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정치/한국의 정치/한국의 정치제도/조선시대의 정치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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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정치제도〔서설〕[편집]

朝鮮時代-政治制度〔序說〕

조선시대의 정치제도는 전제군주국가의 통치제도로서 비교적 잘 정비된 제도였다. 조선왕조는 전제군주국가였지만 왕도정치를 이상으로 삼았던 관계로 현군(賢君)의 덕치(德治)를 목표로 하였다. 그러나 반드시 현군의 출현을 기대할 수가 없기 때문에 자연 왕의 보필기관을 설정하게 되었는데 이 보필기관으로서 여러 가지의 관료제도가 확립되었다. 아마도 전제군주국가로서 조선시대만큼 복잡하고도 완비된 제도를 갖춘 국가는 많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정치제도 역시 군주제도와 관료제도 및 유교정치철학의 3대 여건을 기본으로 해서 성립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다.

조선왕조는 1392년에 이성계(李成桂)가 태조(太祖)로 등극하여 이씨 조선왕조를 창건한 후 정종(定宗)·태종(太宗)·세종(世宗) 등 4대를 지나는 동안에 고려시대의 정치제도를 차차 벗어나서 조선왕조 특유의 정치제도를 확립하였다. 고려시대의 최고의정기관인 도평의사사(都平議使司)는 문무관으로 조직된 왕의 최고자문기관이었는데 조선왕조 정종 때에 와서는 최고의정기관을 문신만으로 구성하는 동시에 그 이름도 의정부(議政府)로 바꾸었다. 조선시대의 최고의정기관은 의정부요, 의정부의 최고관은 정승(政丞)인데 이는 3인으로 구성되었다. 영의정(領議政)·좌의정(左議政)·우의정(右議政)이 그것이다. 의정부에는 정승 밑에 좌우찬성(左右贊成)·좌우참찬(左右參贊), 사인(舍人)·검상(檢詳)·사록(司錄) 등의 관직이 있었다. 정승회의를 영의정이 주재함으로 해서 영의정직을 1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이라 했다. 3정승은 의정부의 장(長)일 뿐만 아니라 경연청(經筵廳)·춘추관(春秋館)·홍문관(弘文館)·예문관(藝文館)·승문원(承文院)·내의원(內醫院)·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군기사(軍器寺)·관상감(觀象監)·준천사(濬川司)·비변사(備邊司)·선혜청(宣惠廳)·훈련도감(訓練都監)·금위영(禁衛營)·어영청(御營廳) 등의 10여 관청의 최고직을 겸직하였으므로, 정승에게는 많은 권력이 수반되었다. 이러한 의정부 밑에 중앙관서인 6조(六曹)의 행정독립기관이 있었다. 이조(吏曹)·호조(戶曹)·예조(禮曹)·병조(兵曹)·형조(刑曹)·공조(工曹)가 그것이다. 이 6조에는 판서(判書)라는 장관이 있어서 지금의 행정부 장관의 업무를 맡아 보았다. 왕의 비서실과 같은 것으로 승정원(承政院)이 있었고, 여기에는 6조를 분담하는 비서격인 6승지(六承旨)가 있었으며, 비서실장격으로 도승지(都承旨)가 있었다. 3정승과 더불어 6조판서도 직접 정원(政院)에 나가서 왕에게 상계(上啓)할 수 있었다.

지방은 전국을 8도로 나누었고 도에는 관찰사(觀察使)를 두어 통치했으며 관찰사 밑에 도사(都事)와 경력(經歷)을 두었고, 도를 다시 몇 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누어 혹은 목사(牧使)·부사(府使)를 두고, 혹은 군수(郡守)·현령(縣令)·현감(縣監)·찰방(察訪) 등의 지방 수령을 두었다. 이러한 중앙과 지방의 행정제도가 조선사회의 정치제도의 골격을 이루고 있지만 행정권의 운용을 감시·감독하고, 왕의 보필을 제도화하기 위하여 이른바 3사제도(三司制度)를 확립하였다. 이 제도는 고려시대부터 내려오던 제도를 개편하여 세종 때부터 확립된 것으로 홍문관(弘文館)·사헌부(司憲府)·사간원(司諫院) 제도가 그것이다. 홍문관원은 경연관(經筵館)을 겸했기 때문에 경연을 통하여 왕의 의사결정에 큰 영향을 미쳤고, 사헌부나 사간원의 관리는 왕과 백관(百官)의 잘못됨을 감독하는 관청이었다. 이들 세관청을 3사(三司)라고 불렀는데, 이 3사의 관리는 특히 언관(言官)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언론의 자유와 비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어서 왕의 잘못이나 백관의 잘못을 신랄하게 비판도 하고 공격도 하였다. 따라서 비록 정승이라 할지라도 이를 3사의 젊은 관리들의 비판과 공격을 가장 두려워했으며, 전제군주인 왕도 이들 3사가 모두 들고 일어나면 자기의사를 굽혀야만 했다. 그 뿐만 아니라 사헌부나 사간원에는 서경(署經)을 하는 관청이 있었다. 서경이란 것은 관리를 채용할 때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승인을 해야만 임명하게 하는 절차로서 사헌부나 사간원은 오늘날의 신원증명과 같은 권한을 가지고 있었으니 그 권한은 대단했다.

왕을 중심으로 정치가 이루어졌지만, 조선왕조는 궁중(宮中)과 부중(府中)과는 형식상으로는 구별이 있었다. 왕과 가까운 친척은 종친(宗親)이라고 해서 정치에 간섭하지 못하도록 하는 대신에 종친부(宗親府)라는 관아(官衙)를 두어 대우했으며, 또 왕의 사위나 문객(門客)들도 정사(政事)에 간섭하지 못하도록 대우하기 위하여 돈령부(敦寧府)라는 관아를 두었다. 왕권의 강화와 번신(藩臣)들의 공(功)을 표창하고 충성을 길이 하기 위해서 충훈부(忠勳府)를 두고서 공신들을 대우하였고, 봉군(封君)된 공신의 종손(宗孫)에게는 일정한 여건 아래서 봉군의 세습제도가 있었다. 이렇게 해서 왕의 가까운 친척, 가까운 인척 및 문객들을 정사에서 멀리한 것은 그만큼 궁중과 부중을 구별하기 위해서 마련된 것이었다. 이러한 구별이 그대로 지켜졌느냐 하는 것은 별도로 하더라도 어쨌든 제도상 이러한 배려가 되어 있었다.

또 중추부(中樞府)란 기관이 있어서 정부의 고관들이 보직(補職)이 없이 지낼 때에는 중추부의 관직을 주어 봉록(俸祿)을 주도록 했다. 왕의 권력행사를 강화·확보하기 위하여 의금부(義禁府)를 왕에게 직속시켰으며, 왕의 정사나 정치를 공정화하고 공개화하여 모든 신하가 왕을 만날 때에는 반드시 사관(史官)이나 기록관 및 승지(承旨)들이 배석(陪席)하였으며, 관리가 왕을 독대(獨對)할 수 없게 하였다. 또 모든 정사나 의견을 교환하는 회의에도 반드시 사관이나 기록관이 참석하여 사실을 기록하는 관아가 있었으니 이것이 춘추관제도(春秋館制度)이다. 춘추관원은 겸직을 원칙으로 하여 모든 공사(公事)를 기록해 두었으니, 조선의 왕정(王政)이 문화국이었다는 연유가 또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국방을 위해서는 병조가 있었지만 지방관청에도 관찰사 밑에 경력(經歷)을 두어 병사(兵事)를 담당시켰고, 요충지에는 도호부(都護府)를 두어 군대를 상주(常駐)시켰을 뿐 아니라, 병사(兵使)와 수사(水使)를 두어 지방과 변경의 방비에 주력하였으니 조선왕조가 5백년 동안이나 군림하게 된 것은 실로 이러한 정치제도의 완비에 있었다고 하겠다.

이러한 제도상의 완비와 더불어 인재를 등용하기 위하여 과거제도를 두었으니, 이는 실력있는 자에게 출사(出仕)의 길을 열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우수한 자는 3사에 임명케 하여 왕정을 비판케 했으니 좋은 제도가 아닐 수 없다. 음직(蔭職)이라고 해서 문벌과 신분에 따라 특별채용이 있었지만 실력자에게 문이 열려 있었고, 또 은일(隱逸)·남행(南行)이라고 해서 학덕(學德)이 높은 은사(隱士)를 뽑아 쓰는 제도 등, 왕의 보필에 각별히 배려한 정치제도였다.

조선왕조의 정치는 왕이 하되 책임은 재상이하 신하가 지는 제도였다. 임진왜란 이후 국방에 주력하기 위하여 비변사(備邊司)라는 문무합동의 국정심의기관이 신설되었고, 시대의 변천에 따라 정치제도도 개선되었지만 근본골격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姜 周 鎭>

중앙의 정치체제[편집]

중앙의 정치제도[편집]

中央-政治制度

조선왕조(朝鮮王朝)의 정치제도는 그 초기에는 고려의 문무양반제도(文武兩班制度)를 답습하여 운영하였다. 고려의 정치제도의 원형은 중국 역대의 제도에서 모방한 것이 대부분이었지만, 민족국가적 이데올로기와 사림정치(士林政治)라는 새로운 통치 패턴에 기반을 둔 조선왕조는 새로운 관인국가(官人國家)의 모델 속에서 조선 특유의 체제를 발전시켰다. 그것은 곧 법치(法治)를 기반으로 한 중앙집권적인 관인체제의 완성이었다.

이와 같은 정치제제의 기본적인 구조는 태종 때 왕권의 확립과 더불어 짜여지고, 제4대 세종 때에 이르러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실려 있는 내용과 같은 완비된 관제로 되었다. 그것이 곧 최고의결기관으로서의 의정부(議政府)와 행정집행기관으로서의 6조(六曹)를 기축(基軸)으로 하는 조선왕조 특유의 관인지배체제의 제도적인 확립이었다.

이와 같이 조선왕조의 정치체제는 3의정(三議政)으로서 구성되어 백관(百官)을 총괄하고 계책을 의결하는 최고의 합의기관인 의정부를 정점으로 하고, 의정부의 감독하에서 그 직능에 따라 각 부의 기능상의 동질성을 갖도록 하는 6조를 중심으로 하여 행정계층제를 형성하였다.

이상은 일반행정의 중앙관제이거니와 그 외에 특수행정의 경관직(京官職:中央官職)이 있다. 특수중앙관청에는 2종이 있으니, 그 하나는 의정부와 각 조(曹)의 지휘와 감독을 받지 않는 국왕직속의 의금부(義禁府)·사헌부(司憲府)·사간원(司諫院) 및 승정원(承政院) 등이며, 다른 하나는 한성부(漢城府)·수원부(水原府)·개성부(開城府)·강화부(江華府) 등 4도(四都)의 감영(監營)으로, 이들 관아(官衙)는 본래 지방행정을 관장하므로 외관직(外官職:지방관청)이어야 하겠으나, 왕도(王都)·구도(舊都) 또는 요새지를 관할하는 지방관청이라 특별히 경관직에 소속시켰으므로 행정부의 지휘·감독을 받는다.

이 외에 왕족과 공신 등 국왕의 측근(direct access) 자들의 집합체인 종친부(宗親府)·충훈분(忠勳府)·의빈부(儀賓府)·돈령부(敦寧府) 등의 특수 경관직이 있었다.

의정부[편집]

議政府

중앙의 최고 정책의결기관이며 행정감독기관. 그 조직은 3명의 의정(議政)을 중심으로 하고 여기에 좌·우 2명의 찬성(贊成)이 보좌하고 있었다. 3명의 의정은 그 기능상으로는 그 지위가 동일하며, 모든 결정은 전원일치를 전제로 하였다. 그러나 의정부의 정책결정 과정은 당해의 모든 의정부의 당상(堂上)들이 참여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의정부의 당상들은 당상관 이상의 관리들 중에서 그 기능으로 보아 정책결정에 참여함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요직의 관리들을 겸직으로 임명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그들 본직의 기능 수행과정에서의 여러 요구나 경험을 이 정책결정 과정을 통하여 반영하고 토론하게 된다.

여기에는 6조(六曹)의 판서(判書)는 물론 언관(言官)·무신과 때로는 근접한 지방관 등 대개 40-50명이 참여하였다. 그 구성의 특색은 당상관 이상의 관직중에서는 상·하의 계서(階序)에 관계없이 오직 그 기능상의 필요에 따라서 누구라도 임명될 수 있었으며, 또 여기에는 원임대신(原任大臣:전직 대신)들도 다수 참여하게 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의정부의 당상관 조달통로의 개방, 기능 중심적인 운영, 전직인(前職人)의 참여 등은 언론과 합의를 근본으로 하는 조선왕 관인체제의 특색으로서 기능상으로 보아 다양스런 면모를 보여준다.

의정부와 6조의 관계를 보면 6조의 장(長)이나 당상관이 의정부의 당상관으로서 참여함으로써 의정부의 정책결정과정에서 집행기관인 6조와 연결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는 역대 왕조에 따라서 다소 변모하였으니 때로는 의정부의 기능을 약화시키고 6조로 하여금 국왕에게 직계(直啓)하여 정책을 수행케 하기도 했고(태종 및 세조), 때로는 의정부의 기능을 강화하여 모든 정책은 의정부의 결의를 거쳐서만 시행할 수 있게 하였다(세종). 이것은 언론과 토의의 형식을 통하여 국왕의 독재를 견제하려는 사림정치(士林政治)의 특징으로, 왕권이 강화되고 언로(言路)가 제한될 때에는 의정부의 기능이 약화되고 6조를 국왕에 직결시키게 하고, 신권(臣權)이 강화되고 언로가 개발될 때에는 이와 반대의 현상이 보였다.

의정부는 외구(外寇)의 침입과 국경분쟁이 잦던 명종 때 비변사(備邊司)가 생기면서 그 실질적인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고, 일시 그 기능이 회복되기도 하였으나 이러한 상태는 대체로 갑오경장 때까지 계속되었다.

6조[편집]

六曹

의정부(議政府)의 감독하에서 그 기능에 따라 각 부서의 행정을 분담하고서 이를 집행하던 6개의 행정집행기관. 조선왕조는 동양의 6전식(六典式) 법전을 완비시켜 법치국가적 기반을 확립한 최초의 왕조였다. 조선왕조는 이러한 6전체계에 따라 6조를 두어 중앙집권적 민족국가의 건설을 위한 정치적 제도화의 과정을 일단락지었다. 6조는 행정 각 분야를 직능적 기구, 즉 행정조직문제로서 기능상의 동질성을 갖도록 나눈 것으로, 이조(吏曹)·호조(戶曹)·예조(禮曹)·병조(兵曹)·형조(刑曹)·공조(工曹)를 총칭한다. 이와 같이 정무와 관직을 6관 및 6부로 분류하는 6분법(六分法)은 중앙관제의 6조편제는 물론 승정원(承政院)과 지방관아의 부서(部署) 편제에까지 6방제(六房制)로서 널리 응용되었다.

6조에는 각각 판서(判書)·참판(參判)·참의(參議) 각 한 사람씩이 있어 이를 3당상(三堂上)이라고 하고, 속료(屬僚)로는 정랑(正郞)·좌랑(佐郞) 각 3원(三員)이 있어 이를 낭관(郎官)이라고 했다. 6조는 그 사무를 처리하기 위해 각 조내에서 사(司:행정 각 부의 局에 해당)를 두어 각각 소정의 사무를 분장(分掌)케 하였는바, 각 사는 당하관(堂下官)으로 구성되었으며 각 낭관이 이들을 주관하였다. 각 조의 기능은 다음과 같다.

⑴ 이조-문선(文選:관리의 채용·임용·봉급 등에 관한 일), 훈봉(勳封:봉군·봉작 등에 관한 일) 및 고과(考課)의 인사행정을 장리(掌理)했다.

⑵ 호조-호구·공부(貢賦:공물과 부세)·전량(田糧:전지와 양곡) 및 식화(食貨:식료와 재화) 등의 재정을 장리했다.

⑶ 예조-예악(禮樂)·제사·연향(宴享:국빈을 위하여 베푸는 연회)·조빙(朝聘:조견과 나라끼리의 사신 교환)·학교·과거 등의 교화(敎化)를 장리했다.

⑷ 병조-무선(武選:무관의 선발·임명 및 봉급)·군무(軍務)·의위(儀衛:의식에 참렬시키는 호위)·우역(郵驛)·병갑(兵甲)·기장(器仗)·문호·관약 등의 군사를 장리했다.

⑸ 형조-법률·상언(형벌의 상심 결정)·사송(詞訟) 노예 등의 법률을 장리했다.

⑹ 공조-산택(山澤)·공장(工匠)·영선(營繕)·도야(陶冶) 등의 공영(工營)을 장리했다.

승정원[편집]

承政院

왕명의 출납을 관장하던 관청. 승정원은 국왕의 측근에서 내외의 대소(大小) 문서와 주청(奏請)을 모두 장리하고 정리하는 곳이다. 그 구성은 정3품의 당상으로 6승지(六承旨)를 두어 각기 6조(六曹)의 상응조직단위(counterpart unit)인 6방(六房)이 사무를 분담케 하였다. 그리고 당하관은 정7품의 주서 2원(注書二員)과 사변가주서 1원(事變假注書一員)을 포함하여 서리(書吏)와 사령(使令) 등 모두 문관을 임용하게 되어 있다. 승정원은 왕명의 출납을 관장하는 것을 임무로 한다. 하지만 단순히 그것을 위하여 국왕과 백관민서(百官民庶)와의 중간 매개 역할을 하는 데에만 그치지 않고, 승지(承旨)는 입시(入侍)·등연(登筵)하여 국정에 관한 스스로의 의견을 상달(上達)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미칠 수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승사(承史:承旨注書)가 직접 왕명을 받아 이것을 봉행(奉行)하며, 때로는 왕을 배행(陪行)하는 일도 있다. 특히 6승지는 모두 경연 참찬관(經筵參贊官)과 춘추관 수찬관(春秋館修撰官)을 겸하고 도승지(都承旨)는 그 위에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상서원정(尙瑞院正)을 겸하는 등 국정을 위하여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그밖에 승사는 일기를 기록하고 조보(朝報)를 기재·반포하는 임무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사항은 행정적·사무적인 일도 있고 단순히 의례적·형식적인 일도 있는 것이다.

사헌부[편집]

司憲府

『경국대전』에 의하면 시정(時政)을 논하고, 백관을 규찰(糾察)하며, 풍속을 바로잡는 규찰·탄핵의 임무를 맡아보던 관청. 그 구성은 고려조의 제도를 개정하여 대사헌(大司憲)·집의(執義) 각 1명, 장령(掌令)·지평(持平) 각 2명, 감찰(監察) 24명으로 하였고, 감찰은 세조 이후에 감원하여 문(文) 3, 무(武) 5, 음(蔭) 5의 13명으로 하였다. 사헌부는 사간원(司諫院)과 더불어 대간(臺諫)·남사(南司) 등이라고도 하여, 언론 감찰의 관아로서 발언권이 매우 컸으며 국가정책과 인사에 깊이 간여하였고, 종친(宗親)과 문무백관을 규탄함은 물론 국왕에 대해서도 언제나 극간(極諫)하는 것을 본령(本領)으로 삼았다. 그리고 사헌부는 관원의 기강을 감찰하는 사법기능을 담당하였던 만큼 그 위풍이 삼엄하였으며, 그 가운데서도 감찰은 비록 하위에 있었지만 제1선의 검찰을 담당하여 조정의 예회(禮會)·국고의 출납·제사·과거 등 모든 일에 임검(臨檢)하여 범칙(犯則)을 사찰하였다. 이와 같은 관료의 전횡과 국왕의 전제를 견제하는 체제는 그 기원이 역시 중국에 있었던 것이기는 하나, 그 기능이 정치에 있어서 현저하게 작용했던 것은 조선왕조에 있어서의 한 특징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그리하여 사헌부의 기구와 기능은 사간원(司諫院)과 같이 군신(君臣)의 권한을 조정하고 조선왕조의 중앙집권적인 관인체제의 질서를 유지하려고 한 장치였으나, 때로는 그 자체로서 왕권과 신권(臣權), 왕과 양반관료 사이의 대립과 항쟁 등의 정쟁(政爭)의 도구로서 사용되어 당초의 설치목적과는 다른 큰 부작용을 가져왔고 그 기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사간원[편집]

司諫院 국왕에 대한 간쟁(諫諍)과 논박(論駁)을 전담하던 관청. 그 구성원으로는 대사간(大司諫)·사간(司諫)·헌납(獻納) 각 1명과 정언(正言) 2명을 두었다. 위에 든 바와 같이 사헌부와 사간원은 다같이 언론의 관(官)으로서 국가의 중요정책에 관하여 기필코 국왕의 뜻을 움직이려 하는 경우에는 대간 양사(臺諫兩司)가 합의한 의사로서 소위 '양사 합계(兩司合啓)'를 하기도 하며, 때로는 홍문관(弘文館)을 합하여 3사의 합계(合啓)까지 하는 일도 있었다.

홍문관[편집]

弘文館

궁내(宮內)의 경서(經書)와 사적(史籍)을 관리하고 문서를 처리하며 왕의 자문에 대비하는 임무를 관장하던 3사(三司)의 하나. 모두 문관을 임용하며 제학(提學) 이상은 다른 관사(官司)의 관원으로 겸임한다. 홍문관의 관원은 전원이 경연(經筵)의 관직을 겸한다. 그리고 부제학(副提學)으로부터 부수찬(副修撰)까지의 관원은 지제교(知製敎:국왕의 교서를 제술하는 직책)의 관직을 겸임하였으며, 직제학(直提學) 이하에 결원이 있을 때는 재직기한을 고려하지 않고 순차대로 승진·임용한다. 홍문관은 정3품(正三品)의 아문(衙門)으로서 옥당(玉堂)의 별칭이 있으며, 관원으로는 영사(領事)·대제학(大提學)·제학·부제학·직제학·전한(典翰)·응교(應敎)·교리(校理)·수찬(修撰) 등이 있다.

비변사[편집]

備邊司

처음에는 단순히 변정(邊政)의 국방문제를 토의하기 위한 의결기관에 불과했으나, 점차 의정부의 권한을 대행하여 국정전반에 걸쳐 의결하는 최고 정책결정기관으로 발전했다. 비변사는 3상(三相)을 위시하여 6조의 판서, 언관(言官)의 장(長), 관찰사, 그리고 문무의 고관을 망라한 대규모의 정책결정 기관이며 이것을 비국(備局) 또는 주사(籌司)라고 하였다. 전시(戰時)의 통제하에서 모든 정책결정과 집행에 있어 문무의 관계고관의 의견을 통합하고, 또한 중앙과 지방의 의사소통을 꾀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이와 같이 다수의 문·무 당상관(堂上官)들이 합동하는 비변사가 일정한 테두리 속에서만 정치과정에 참여하던 본래적 의정부를 대행하였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관인권력의 강화에 따른 왕권의 약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정치적으로는 언제나 외부로부터의 침략과 위협을 방어하고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전시군사통제(戰時軍事統制) 아래에 놓여 있었던 조선왕조인 만큼, 이러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비변사는 오랫동안 존속하면서 중요한 정책결정 및 집행기능을 담당했다. 왕권강화책이 다소 주효(奏效)하였던 영·정조시대에 비변사의 기능은 약화되었고, 그것은 19세기 후반기에 다소 변질된 방향에서 왕권강화를 시도하였던 대원군(大院君)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의정부로 통합되고 말았다.

중앙의 군사조직[편집]

中央-軍事組織

조선초기의 군사기구는 여러번 폐합이 있던 끝에 태종 3년에 고려제(高麗制)인 3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가 부활되었다. 그러나 이 3군도총제부는 3군(中軍·左軍·右軍)에 각기 설치된 것으로 단일체가 아니었고 병조(兵曹)의 지휘하에 있었던 것으로서, 태종 9년에 국왕은 병조가 모두 유신(儒臣)들로서 군사의 실무를 알지 못한다는 것과 병권(兵權)의 집권화를 막기 위해 3군진무소(三軍鎭撫所)를 설치하여 병조에의 예속에서 벗어났다.

세종 원년(1419년)에 다시 군무가 병조에 통합되었고, 뒤이어 세종 28년(1446년)에는 3군진무소를 의흥부(義興府)로 개칭하고 역시 군무는 병조에 귀속시켰다. 문종 때에 이르러 3군을 고쳐 5위를 만들고 5위 진무소를 설치하여 이를 통제케 하니, 조선왕조 군제편제의 기간이 된 5위의 제도는 여기서 비롯된다.

그 후 세조 12년(1466년)의 군정개혁(軍政改革)으로 진무소를 고쳐서 5위도총부(五衛都摠府)를 만들고 군무를 전담케 함으로써 병조로부터의 자율성을 갖게 했다. 그러나 선조 때의 임진왜란을 당하여 그 무력함이 드러나자, 구5위제(舊五衛制)가 일조(一朝)에 붕괴돼버리고, 5위의 규모를 아주 축소시켜서 대체로 궁성수호와 도성(都城)을 경호하는데 그쳤다. 때마침 임진왜란 때에 내원(來援)하여 온 명군(明軍)을 통해서 얻은 외국의 새로운 지식과 경험을 토대로 군제개혁을 단행하였으니, 이때 5군영(五軍營)이 채택되었다. 5군영은 왕조의 중엽 이후의 기본적 군사조직인 훈련도감(訓練都監)·어영청(御營廳)·총융청(摠戎廳)·금위영(禁衛營)·수어청(守禦廳) 등을 말하는 것이다.

5위도총부[편집]

五衛都摠府

5위(義興·龍賁·虎賁·忠佐·忠武)의 군무를 다스리는 정2품의 아문(衙門). 그 관원은 도총관(都摠管)·부총관(副摠管)·진무경력도사(鎭撫經歷都事) 등이다.

『대전회통(大典會通)』에 의하면 그 관제는 도총관 5원(五員), 부총관 5원, 경력 6원, 도사(都事) 6원, 서리(書吏) 13인, 사령(使令) 20인 등으로 구성되며, 그 중 도·부총관의 10원은 타관(他官)으로써 겸임하되 1주년이면 경질하였으며, 당하관(堂下官)에는 관리로서의 재능이 있고 사무에 숙련된 자를 취재(取才)시험을 면제하고 겸용하였다. 5위도총부는 처음에 군정 최고기관으로서 매우 중요한 기관이었으나 비변사가 설치된 후에는 군국(軍國)의 기세(機勢)가 비변사에로 이행되고, 따라서 5위의 제도도 유명무실한 것으로 되었다.

5위[편집]

五衛 경위(警衛)의 집단을 의미하는 말로서 군관구(軍管區)에 해당한다. 5위는 의흥휘(義興衛)·용양위·호분위(虎賁衛)·충좌위(忠佐衛)·충무위(忠武衛)를 말한다. 5위의 편성은 병종별(兵種別)·지방별의 이중으로 되어 있으며, 병종별을 보면 신분에 따라 병종을 달리하여 노역과 처우의 등급에 차이를 마련하고 있으며, 대체로 5위의 각 병종은 특권층과 직업군인으로 충당되었다. 그 계층조직은 위(衛) ― 부(部) ― 통(統) ― 여(旅) ― 대(隊) ― 오(伍) ― 솔(率)의 상하계층으로 되어 있다. 병종은 보(步)·기(騎)의 둘로 나누었다.

훈련도감[편집]

訓練都監

조선왕조 중엽 이후의 기본적 군사조직인 5군영의 하나. 훈련도감은 명군(明軍)으로부터 창(槍)·검(劍)·곤봉(棍棒) 등의 기술을 배우게 하기 위하여 도감(都監)을 별도로 설치하여 훈련케 한 데서 연원한다. 이 신군(新軍)의 특색은 소위 3수(三手)의 기법으로서, 곧 병(兵)을 포수(砲手)·사수(射手)·살수(殺手)의 3종으로 분류하여 각각 전문기술을 연마케 함으로써 종합적 효과를 거두려는 특수 군대조직인 것이다. 이 훈련도감이 창설된 선조 27년(1594)에는 도제조(都提調)·대장(大將)·유사당상 낭청(有司堂上郎廳)을 두었으나 점차 확장되어 훈련도감군제가 정비되었다. 이 훈련도감제는 임진왜란에서 명군(明軍)이 일군(日軍)을 꺾고 평양을 수복했다는 실증과 또 재래의 군제의 무력화에서 상하로부터 많은 기대리에 확대·강화된 것이나 곧 그 실제 효능은 의문시되었으나 고종 19년(1882년)까지 존속한 것이다.

지방의 정치체제[편집]

지방행정구역[편집]

地方行政區域

전국의 행정구역은 8도로 나누어 각각 관찰사(觀察使)를 두고, 그 밑에도 부(府)·대도호부(大都護府)·목(牧)·도호부(都護府)·군(郡)·현(縣) 등 대소의 각 읍(邑)을 두었다. 조선왕조의 지방관은 외관(外官)이라 하여 그 수위를 차지하는 것은 도(道)의 관찰사였고, 그 밑에 수령(守令)인 부윤(府尹)·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목사(牧使)·도호부사(都護府使)·군수(郡守)·현령(縣令)·현감(縣監) 등이 있었다. 각 읍이나 수령들은 행정상으로는 모두 병렬적(竝列的)으로 관찰사의 관할하에 있고, 다만 이들 수령이 겸임하는 군사직으로 말미암아 상하의 명령이 이루어졌을 뿐이다. 그리고 각 읍과 각 수령의 이와 같은 차등은 집단적 부락의 대소나 인구의 호수(戶數)의 많고 적음 또는 전급(田給)의 규모에 따라 생겼음은 두말 할 나위가 없으며, 수령 밑에는 면(面:坊·社)과 그 밑에 이(里:村·洞) 및 통(統)이 있었던 바, 여기에는 중앙에서 파견하는 외관이 없이 자치적인 조직을 이루었다. 다만 한성부(漢城府)와 개성부(開城府)는 경관직(京官職)으로서 중앙정부의 직할이었으며, 후기에 이르러 왕실의 호위를 위하여 경주·강화·수원 등이 이에 준하여 경관직으로 편입되었다. 지방행정구역은 왕조의 초기에는 고려의 제도를 그대로 답습하였으나 태종 13년(1413년)에 이르러 비로소 8도로 구획을 나누었다. 그리하여 약간의 변경은 있었으나 대체로 왕조의 말기까지 유지되었으며 고종 32년(1895년)에 이르러 부·군·현의 각 칭호를 고쳐 군수(郡守)로 하는 한편, 8도를 23부(府)로 고치고 부에 관찰사를 두었으며, 다음해에는 다시 구제(舊制)에 따라 13도로 고치면서 대폭 개편하였다.

지방관제조직[편집]

地方官制組織

여기서는 관찰사(觀察使) 수령(守令)·향리(鄕吏) 등 주요한 외관직(外官職)과 기타 지방행정제도가 문제된다. 우선 관찰사(별칭:監司·道伯·道臣·方伯 藩任 등)는 고려조 이래 조선왕조에 걸쳐서 각 도의 장관의 호칭으로서, 대체로 관찰사는 한 도의 행정·사법·군사의 제정(諸政)을 통할하고 관하(管下)의 주(州)·부(府)·군(郡)·현(縣)의 수령을 감독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관찰사의 직무는 본래 관하 각지를 순찰하며 수령의 행적과 민간의 실정 등을 관찰함에 있었으므로 일정한 거처가 없이 단신으로 순력(巡歷)하라는 것이니, 관찰사의 직(職)은 반드시 순찰사(巡察使)를 겸하게 되어 있다. 관찰사의 지방행정을 보좌하기 위하여 중앙에서 파견되는 관원으로 경력(經歷)·도사(都事)·판관(判官)·중군(中軍)·검률(檢律) 등이 있었다. 다음으로 수령 가운데서 가장 큰 것이 부윤(府尹)으로서 관찰사와 동격이며, 관찰사 소재지의 부윤은 대개 관찰사가 겸하기도 하였다. 대도호부는 부윤에 다음가는 제2급 지방장관으로서 본래 도호라는 제도는 한(漢) 당(唐)의 제도였으며 군사상 진호(鎭護)가 그 임무였으나 조선의 경우에는 다만 지방구획상의 한 명칭에 불과했다. 목사는 부윤·대도호부사에 다음 가는 지방관으로서 군읍(郡邑)의 이름이 주(州)로 된 곳 약 20개처의 구획명을 목이라고 하였으며 그 장관을 사(使)라고 하였다.

도호부사(약칭 府使)는 목사 다음에 가는 제4급지방관으로서 전국에 약 80개처, 군수는 제5급지방관으로서 약 80개처였다. 이들 정식적 지방관제상의 행정권 이외에 관찰사, 병(兵)·수사(水使)와 대읍(大邑)의 수령은 그 막료(幕僚)로 비장(裨將)을 두었고, 또 향교(鄕校)>의 지도를 위해 부·목에는 무록관(無祿官)인 교수(敎授), 군·현에는 무록관인 훈도(訓導)가 있었다. 이 밖에 지방행정관으로 교통행정에 관한 특수직인 찰방(察訪)·역승(驛丞)·도승(渡丞) 등이 있었다. 관찰사 및 수령의 사무는 중앙관제의 축도(縮圖)로서 이(吏)·호(戶)·예(禮)·병(兵)·형(刑)·공(工)의 6방(六房)으로 분장(分掌)케 하고, 그 사무는 토착의 이속(吏屬)을 임용하였으며, 이서(吏胥) 또는 아전(衙前)이라 불리었다. 이와 같이 지방관청의 부편성은 중앙관서의 6조(六曹)와 상응하게 6방으로 되어 있었으나 지방의 특정한 방이 중앙의 같은 상응조직(counterpart organization)인 조의 직접적 통제나 서로 긴밀한 연관성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고 본다. 즉 이들 지방관청의 6방은 의정부와 6조와는 내·외직 간의 위계(位階)의 차이는 있었으나 직접적인 종적 명령계열이 확립되지는 않았으며 다만 도의 관찰사가 국왕의 직접적인 지휘감독을 받고, 또 군의 수령은 관찰사의 직접적인 지휘감독을 받았던 것이며 이들 6방은 각각 관찰사와 수령의 보조기관에 불과했다.

과거제도[편집]

科擧制度

조선왕조의 과거제도는 대개 고려의 구제(舊制)에 의거하여 약간의 변동을 가한 것이었으나 그 두드러진 특징은 문화정책의 기본을 이루었던 유교를 바탕으로 한 점이라 하겠다. 과거제도는 개국 이래로 여러 번 개혁을 보았지만 대체로 3대 부류로서 구분되었으니 문과(文科)·무과(武科)·잡과(雜科)가 그것이다. 문과에는 대과(大科)·무과(武科)·잡과(雜科)가 그것이다. 문과에는 대과(大科)와 소과(小科:生進料)가 있었으나 상문(尙文)의 경향으로 말미암아 흔히 문과라 하면 대과를 지칭했으며, 과시(科試) 중에서도 가장 중시된 문관 자격시험에 해당한 것이었다. 문과는 곧 고려의 제술(製述)·명경(明經)을 계승한 것이며, 무과는 일종의 무관자격시험으로 대과·소과가 없는 단일제였고, 잡과는 고려의 의(醫)·복(卜)·지리·율(律)·서(書)·산(算)의 이른바 잡업(雜業)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말하자면 기술관 자격시험이었다. 3과는 모두 국상(國喪)과 같은 사고가 없는 한 3년마다 한 번씩 실시하는 식년시(式年試:子·午·卯·酉年을 式年으로 함)를 행했는데 여기에는 초시(初試:준비시험)와 복시(覆試:再考試)가 있었다. 무과·잡과에서는 이로써 등제자(登第者)를 선정하며 문과에 있어서는 지방의 초시와 중앙의 복시를 통과한 자를 소과의 급제 또는 소성(小成)이라 하고, 다시 대과 초시와 복시 및 전시(殿試:御前에서 하는 최후고시)를 치른 뒤에 대과의 급제 곧 문과출신이 된다(武科에도 殿試하는 일이 있었다). 문과에는 생진과(生進科)라 하는 소과와 '문과'라고 부르는 대과가 있었고, 소과는 다시 초시·복시의 2단계, 대과는 초시·복시·전시의 3단계가 있어 원칙적으로는 이 5단계를 차례로 통과해야만 급제되는 것이었다. 이상의 정규적인 식년시 이외에도 여러 가지 임시적인 부정기 과시가 있었으니 증광시(增廣試:즉위·가례·元子 탄생 등 대사 및 累慶이 있을 때 특설)·별시(別試)·알성과시(謁聖科試:국왕이 문묘에 참배하는 날 성균관에서 시행) 등이 있었다. 또한 과거와는 구별되는 관원임용을 위한 특별시험으로서 취재(取才)와 천거제가 있었다. 이로써 보건대 조선왕조의 인사제도는 일반적으로 사회신분에 따라 엄격히 제한된 봉건주의 자격임용제도를 토대로 하면서 때로는 여러 가지 유인(誘引)에 의한 적극적인 인사제도를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