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종교·철학/세계의 종교/그리스도교/그리스도교〔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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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敎〔序說〕 그리스도교는 기독교(基督敎)라고도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과 생애, 그리고 그의 십자가의 죽음에서 성취된 구원의 길과 그의 부활로 말미암아 주어진 확신에 의한 공동체 형성, 그리고 오순절(五旬節) 성령의 임재에서 이루어진 교회(敎會), 이런 것을 통칭해서 부르는 종교의 이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로 신앙되고 있으며, 이때 '예수'가 그의 본명이고 '그리스도'라는 것은 그리스어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인데, 이 말은 본래 헤브라이어의 '메시아(Messiah)', 곧 구속자(救贖者)라는 말이다. 본래 이 말은 타이틀인데도 불구하고 예수에게 전적으로 결부되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고,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도 기원40∼44년경부터 '그리스도교인', 곧 크리스찬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예수는 기원전 3년 내지 4년에 팔레스티나의 나사렛, 베들레헴에서 마리아를 어머니로, 그리고 목수 요셉을 육신의 아버지로 태어났다. 탄생한 날짜에 대해서는, 그것이 12월 25일로 지켜지기 시작한 것이 기원 336년의 '필로칼리안력(Philocalian Calendar)'에 나타났고 따라서 정확한 날짜를 역사적으로 결정할 수는 없다. 그는 대개 30세에서 공적인 선교(宣敎) 활동을 시작하였고, 33세 되던 해에 제자 중 한 사람인 가룟 유다의 배반과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단죄, 그리고 통치국이었던 로마의 치안 문란죄 판결을 받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 하지만 이런 일이 있은 지 사흘째 되던 날, 곧 일요일에 예수는 부활하였고, 여러 제자들에게 나타났다가 40일 후에 승천(昇天)하였다. 이 부활에서 예수의 추종자들은 구세주요 주님이 바로 예수였다는 신앙을 가지게 되었고, 십자가의 피에 의해서, 다시 말하면 죄없는 하느님의 아들, 어린 양의 피의 공로로써 아담 이후의 원죄와 그 심판의 저주에서 구속(救贖)되게 된다고 믿었다. 더구나 이들은 예수가 현재에도 성령(聖靈)으로 인간 생활 속에 현존한다는 신앙을 고수하고, 이것을 세계 만국에 전파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스도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종교로서 이스라엘의 유태교를 들 수 있다. 그리스도교의 성전(聖典)인 성서에 구약성서와 신약성서가 있는데, 구약성서(舊約聖書)는 본래 유태교의 경전이라는 점에서 그렇고, 또 예수가 실상 유태인들이 대망하던 메시아와 동일시되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더구나 예수는 구약의 핵심인 모세의 율법을 폐하려 온 것이 아니라 완성시키러 왔다고 언명함으로써 이러한 밀접한 관계를 밝혔던 것이다. 그러나 유태교에서 전승돼 내려온 전통적인 이미지에 예수의 언행이 꼭 들어맞지는 않았다. 실상 예수의 독신적(瀆神的) 거동을 허물삼아 그를 십자가에 넘겨 준 이들은 바로 유태교의 제사장들이었다. 반면에 예수의 추종자들은 예배의 태도로 부활 승천한 그리스도를 추앙했고, 하느님, 바로 그의 성육신(成肉身)이었다고 신앙한 것이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소외되었던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화해(和解)의 관계로 이끌어 주고, 죄악의 세상에서 영원한 안식과 구원의 천국으로 인도해 준다고 확실히 믿었다. 이것은 유태교의 경전에 나타나 있는 예언자가 할 수 있는 일을 초월한 것이며, 따라서 여기에서 유태적인 종교와의 차이를 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스도교가 수많은 유태교와의 유사점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독자적 종교로 등장하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신의 성육신적 활동, 그의 고난·부활에 있었고, 따라서 십자가의 고난에 의한 구속의 대전제로 중추를 삼는 그리스도교가 확립된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핵심적인 교훈은 성서에 들어 있다. 예수의 지상 생활과 교훈은 대개 신약성서(新約聖書)의 4복음서(마태·마가·누가·요한)와 사도행전(使徒行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그 기록들은 초대 교회 사람들에게 구전(口傳)되던 것들의 총화이며, 또 전기적인 역사성의 충실보다는 신앙의 교리에서 볼 때 중요하다고 생각되던 고백적인 진술들이기 때문에, 전기 연구에서는 항상 만족할 만한 사실들을 체계적으로 찾아내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 성서는 본래 '책'이라는 뜻이며, 따라서 거기에 신성한 종교적 의미가 조금도 함축되어 있지 않음이 특기할 만하다. 경전(經典)이라든가 귀감이라는 뜻이 없는, 단순한 책이라는 뜻이 전부이다. 내용을 보아도 인간의 평속한 생활, 소박한 모습이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있으며, 예수의 모습도 초인(超人)다운 차원보다는 평범한 한 인간의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시장할 때 먹을 것을 구하고, 고난에 신음하며 아파하는 모습, 분노에 격해 채찍을 든 모습이 소박하게 그려져 있다. 여기에 그리스도교가 인류의 고난과 가난과 감정에 간격없이 하나로 연결되어 동행하는 편이 역력히 보인다. 가끔 그리스도교를 종교라 부르지 말고 다만 복음이라고만 하자고 하는 말이 그래서 타당하게 들린다. 성서, 특히 신약성서는 다양성과 통일성을 함께 가지고 있다. 저자의 수로나 문학적인 형태로나, 또 각 권(卷)이 기록된 시간의 폭을 보아도 다양 다종하다. 이러한 여러 권의 책이 27권으로 한정되어 최종적으로 성서로 결정된 것은 382년의 일이다. 동시에 신약성서는 한 통일성이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생존과 사망과 부활이라고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중심으로 해서 다 쓰여지고 있다는 데서 밝혀진다. 그런데 이러한 통일성·일치성의 근거는 집필자들에 대한 성령의 감동, 곧 영감에 의해서 성서가 쓰여졌다는 사실과, 계시(啓示)에 의해서 성서의 집필·경전화(經典化)가 시종 지도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이러한 사실이 동시에 성서의 권위 문제에까지 연결되고, 성서에 대한 절대적 권위 시인을 전제로 하는 교리가 형성되기에 이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으로서 인간이 되어 강림하였다는 사실과, 성서가 인간의 경험과 예지에서가 아니라 저 밖에서 계시로 주어져 기록되었다는 사실은 신학적으로 일치하는 논리인 것이다. 그리스도교가 오늘과 같은 세계적 종교로 성장 발전해온 과정은 험준하였다. 예수의 제자였던 베드로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그의 신앙을 전파하여 많은 공명을 얻었으나, 사울이라는 열정적인 당시 굴지의 학자와 종교가나 유태교인들의 핍박은 억세었다. 그런데 사울이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의 음성을 듣고 심기일변하여 그리스도교가 되고 이후 계속해서 열의와 헌신으로 선교하여, 마침내 마케도니아로 복음의 씨를 옮김으로써 서양에 그리스도교의 물결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그래서 이후의 발전이 순조로워 그리스도교가 서양종교로 토착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의 수도에까지 진출하긴 했으나 박해는 극심하였다. 카타콤베라는 지하굴에서 예배를 보면서도 시련은 모면할 길이 없었다. 트라얀이나 네로 황제 때의 박해는 필설로 다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밀라노시(市)에서 칙령을 발표하여 그리스도교의 공인을 선포하였고, 국고금으로 교회당을 짓고 이단을 국사범으로 처리하면서 일약 국교의 지위에까지 진출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로마제국 수도가 로마에 위치하면 너무 서쪽에 치우친다고 생각해서, 오늘의 이스탄불시에 수도를 옮기고 이름을 콘스탄티노플이라 명명하였다. 여기에서 그리스도교는 그리스계의 그리스도교와 라틴계의 그리스도교로 분립하는 첫발이 내디뎌졌다고 할 수 있다. 머지않아 로마에는 정치적 실권자가 부재한 까닭에 그곳의 감독, 곧 교황이 실질상의 정치적·종교적 실권자로 군림하게 되었고, 제국의 수도에 있는 교회의 수장(首長)과 대립하여 지상권을 주장하게 되었다. 문화적 차이와 종족적 차이가 그 배경에서 작용하여 결국 로마의 전통과 베드로의 순교지가 로마라고 하는 라틴계 서방의 교회는 로마가톨릭 교회로 구형(構形)되어 갔고, 동방의 그리스계에서는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동방정교회가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물론 1054년에 가서야 완전히 분열되지만, 그 분열의 요소는 벌써부터 있어 왔다. 1517년에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면서 교회는 다시 구교(舊敎)와 프로테스탄트, 곧 신교로 분열되었다. 영국계에서 성공회(聖公會), 스코틀랜드와 스위스에서 장로교가 따로 발전하였으나 모두 신교의 범위 안에 들어 있다. 이러한 그리스도교가 17세기경부터 세계선교에 착수해서 선교사들의 해외진출이 증가했고, 간혹 순교와 핍박의 고난을 겪으면서 수행한 선교사업 때문에 오늘날 전세계에 그리스도교가 전파되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본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하나로 보고 유기적인 일치를 가지고 내려왔다. 역사적으로 제약되는 여러 조건 때문에 교파(敎派)나 고백의 다양성이 생기고, 따라서 교회의 내적 분열을 가져오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의 실재로서는 하나이지만, 그것이 속해 있는 역사나 지역에 따라서 예배나 선교, 그리고 사회적 봉사 차원에서 피차 다양한 형태나 전략을 취할 수 있고, 그것은 교회 기능의 분업화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여러 면을 고려해서 교회의 실질적인 연합운동을 진행하는 것을 에큐메니칼 운동이라 부른다. 현대 그리스도교는 이러한 운동으로 특징지어 부를 수 있다. 그리스도교는 예배적인 요소도 강하지만 동시에 예언자적인 박력과 세계 역사에 대한 책임 참여로서의 구속운동도 강하게 본질로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교가 서구 문화의 형성과 그 정신의 방향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까닭이 여기에 있다. 서구에 침입한 야만민족들의 교화와 소위 궁정학교 설립에서 비롯한 알쿠인(Alcuin)의 교육, 성서의 외국어 번역을 통한 그 나라 어문화의 실질적인 구성, 스티븐 랭턴이라는 주교에 의한 영국왕 '존'의 '마그나 카르타' 서명, 거기에서 비롯된 시민적 권리에 대한 종교적 근거, 중세 가톨릭 교회의 스콜라 신학에서 시사된 인류 예지와 문화의 종합적인 총화 체계, 그리고 마르틴 루터에게서 표현된 신앙과 양심의 권위 이외에 인간이 굴복할 권위가 하나도 없다고 하는 발언, 이같은 것들은 모두 그리스도교의 유산인 것이다. 불의 앞에서나 부정 앞에서 하느님의 정의나 그 섭리의 소재를 밝혀야 할 예언자적 책임이 있다고 보는 것도 그리스도교의 특색이다. 이러한 그리스도교의 신앙은 그리스도교의 성서적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계시종교라고 하여 일반적인 자연종교와 구분한다. 또 신비적 체험과 명상을 통해서 인간의 본질 심층에 이르러 각성을 하고 그것이 구원의 길이라 보는 신비주의적 종교에 반해서, 인간의 원죄성을 처음부터 전제하고 타력에 의한 구원을 말하며, 동시에 침묵과 침잠이 아닌 말과 선포의 종교라 해서 예언자적 종교라고 구분하기도 한다. 그리스도교가 설교(說敎)에 중점을 두고 선교에 헌신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구원은 은총에 의해서만 부여되고, 그 사실을 신앙하는 데서 얻어진다. 이것을 신앙의인(信仰義認)의 교리라고 한다. 그리스도교는 사랑의 종교라고 말한다. 종교가 고난의 문제에서 시작했다고 전제한다면, 그리스도교의 특징 역시 거기서 드러나게 된다. 그리스도교는 고난을 수양이나 체념으로 극복하거나 고난의 실재를 환상이라 보는 철학과는 달리, 엄숙하게 그 실재를 시인하고 그 인과를 따짐이 없이, 다만 피차 함께 그 고난을 나누어 지는 동행과 사랑의 길만을 통해서 해결책을 찾고자 한다. 예수의 복음도 결국 이 사랑의 실현과 선포에 핵심이 있었다. 우리나라에 그리스도교가 전래된 것은 병자호란을 전후해서 된 일이지만, 신구교가 자유롭게 선교를 하기 시작한 것은 1898년 이후의 일이다. 〈閔 庚 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