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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소포타미아의 종교[편집]

Mesopotamia-宗敎

근년에 와서 고대사에 관한 많은 새로운 지식이 더해짐에 따라, 인류의 가장 오랜 문명을 쌓아올린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는 이미 BC 4000년에 놀랄 만한 고도의 기술이나 물질문명이 결실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문학·미술·종교 면에 있어서도 그 소박한 표현에도 불구하고 인간성의 깊은 이해를 나타내는 걸작, 또는 제신(諸神)에 대한 신앙을 나타내는 갖가지 유품들이 알려지게 되었다.

메소포타미아는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에 의한 비옥한 퇴적평야로서 수메르(Sumer)인은 역사의 시초에 이미 남부에 정주하여, 각지에 소도시를 중심으로 한 지역사회를 형성하고 있었다. 수메르인의 왕은 주신(主神)의 하나인 엔릴의 아들이라 칭하여 신으로서 숭배받았으나, 그들의 뒤를 계승한 셈(Shem)인의 왕은 스스로를 신이라 부르지 않았다. 예컨대 바빌론 제1왕조의 함무라비왕(BC 2000년 전반)은 신 에아와 엔릴에 의해 왕으로 지명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주요한 3주(三柱)의 제신을 한 쌍으로 해서 숭앙하는 습관이 있었다. 수메르인 사이에서는 아누(Anu:天神)·엔릴(Enlil:地神)·엔키(Enki:水神) 등이 숭앙받았다. 최고신 아누는 이미 형식적 존재가 되어 있었으며, 수메르 판테온의 실권은 엔릴에 돌아와 땅뿐만 아니라 하늘까지 다스리는 신이 되었다.

왕권의 신장과 함께 주신(主神)은 국가신의 성격을 강화했다. 셈 판테온에서는 셈인의 주신 마르두크가 함무라비왕 시대에 엔릴의 기능을 계승하여 최고신이 되었으며, 샤마쉬(Shamash:太陽神)·신(Sin:月神)과 함께 한 쌍을 이루었다. 기원전 2000년 말부터 융성하기 시작한 아시리아 제국에서는 주신 아슈르(Ashur)가 최고신이 되었다.

수메르인은 이미 발달한 신전·제사(祭司) 계급을 갖고 있었다. 고대에서는 후에 분화한 예술·학문과 같은 문화활동뿐만 아니라 세제(稅制)·금융 등의 사회·경제활동도 신전과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당시 고급관리가 되는 지름길은 신전 부속의 서기(書記)학교에서 점토판(粘土板)에 설형문자(楔形文字)를 배우는 일이었다. 따라서 문학작품도 습득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길가메쉬 서사시>는 인류가 소유하는 가장 오랜 이야기의 하나이다. 몸의 3분의 2가 신, 3분의 1이 인간이라고 했던 영웅 우루크의 왕 길가메쉬(역사적으로 실재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가 영원의 생명을 구하여, 일찍이 대홍수에서 살아난 제신의 하나가 된 지우도라(아시리아판의 우트나피슈팀) 를 찾아간다. 그에게 가르침을 받은 길가메쉬는 일단 영원의 생명을 얻기는 하나 도중에 이를 잃고 헛되이 우루크로 돌아간다.

또한 새해에는 천지창조의 성극(聖劇)이 제사(祭司)들에 의해 상연되고, 신전은 토지나 양의 무리를 소유, 소작이나 목축자에게 빌려 주어 연공(年貢)을 바치게 하거나, 이자를 붙여 돈을 빌려 주거나, 물가의 기준이 되는 은의 정제가공(精製加工)이 행해졌다. 신전의 경내에는 자주 지구라트(Ziggurat:산을 뜻한다)라고 불리는 벽돌을 쌓아올린 높이 수십 미터나 되는 인공의 산이 구축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이른바 '바빌론의 탑'으로 불리는 에산길라 신전의 지구라트가 유명하다.

거듭된 타민족의 침입이나 주권의 교대에도 불구하고, 메소포타미아의 종교는 어떤 종류의 형태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두무지(Dumuzi:후의 탐무즈, 아도니스) 신앙을 들 수 있다. 훗날 탐무즈는 해마다 시들고 봄이 오면 다시금 싹이 돋는 식물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한다고 했다. 원래 수메르에서는, 두무지가 사후 이 지상에 되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저승의 주민이 되었음에 불과한 듯싶다.

아무튼 그의 아내인 여신 이난나(Inana:후의 이쉬타르, 아티스)와 함께 농산물의 풍요나 가축의 다산(多産)을 기원하는 신앙 대상으로서 극히 광범하게 고대 오리엔트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 뒤로 점술은 매우 융성해졌다. 1년의 반 이상이나 맑은 날씨가 계속되는 이 지방에서는 별의 관찰이 용이하여 규칙적인 천체(天體)의 운행은 사람들에게 정신적인 안정을 주었다.

이집트의 종교[편집]

Egypt-宗敎

이집트는 여러모로 메소포타미아와 대조적이었다. 이집트는 나일강 기슭의 남북으로 뻗은 긴 범람 평야(氾濫平野)와 강 어귀의 델타 지대 이외에는 사람이 접근할 수 없는 건조지역이었다. 이러한 자연조건 때문에 폐쇄된 거주지대는 외부로부터의 침입이 곤란하였다.

이집트에서는 원래 지역집단이 각각 자기들의 신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상하 이집트의 통일왕조와 결부된 신이 주신이었다. 고(古)왕국시대(BC 3000년)의 헬리오 폴리스의 라, 그 후 테베의 아멘(후에 라와 합쳐서 아멘라가 된다), 아마르나 시대(BC 14세기 중엽)의 아텐 등은 모두가 태양신이다. 왕은 태양신의 화신으로 믿어졌으나, 신으로서의 예배는 받지 않은 듯하다.

그 밖에, 메소포타미아의 두무지(탐무즈) 신앙에 해당하는 오래되고 뿌리깊은 신앙이 있었다. 그것은 오시리스(Osiris) 신앙이다. 왕은 재세중(在世中) 오시리스의 아들 호루스(Horus:매의 모습을 한 天空神. 태양은 그 눈이라고 했다)라 하여 사후에는 저승에서 오시리스가 된다고 믿어졌다. 중왕국(中王國) 시대 이후, 이른바 민주화가 진행되자 귀족·유산계급 등도 사후(死後) 오시리스로 불리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과 백성의 거리는 언제나 컸다.

원래 신하들은 사후의 생명을 향락할 수 있는 왕의 여덕의 혜택을 얻기 위해 왕릉 주변에 묘지를 만들었던 것이다. 조각이나 회화에 그려진 왕도 신과는 동격으로 그려졌지만 백성들에 대해서는 거리가 얼마나 큰가를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도 메소포타미아의 경우와는 대조적이다.

오시리스는 이집트인에게 농업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는 동생 세트(Set:Setekh)에게 살해당하고, 유해는 결국 사지가 찢긴 채 온 이집트에 뿌려진다. 오시리스의 아내 이시스(Isis)는 남편의 사지를 찾아 헤맨 끝에 발견한 장소(예컨대 머리는 멤피스)에서 각각 그것들을 매장하였다.

그녀가 그것들을 주워 모으며 슬픔에 잠겨 있을 때, 라(Ra)가나타나 이를 가엾게 여겨 오시리스를 되살아나게 하여 사자(死者) 나라의 왕으로 삼았다고도 전해진다. 사자는 누구나 우선 오시리스 앞에 서서 현세에서 잘못을 범하지 않았는가에 대해 고백을 요구당하거나 심장을 정의(正義)의 저울로 계량(計量)해 보는 것으로 믿어졌다.

오시리스의 심판은 고대 이집트인의 윤리를 나타내나 형식적이기도 하다. 유명한 미라는 그들의 내세에 대한 신앙의 발현이며, 오시리스의 심판이나 천당까지의 길목, 천당에서의 생활 등을 상세히 적은 파피루스의 문서인 <사자의 서>가 미라에 첨부되었다. 주문을 외면 미라의 각 부분은 잇따라 되살아나서 사자는 오시리스처럼, 또는 오시리스로서 내세에 되살아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자의 서>는 본질적으로 주술(呪術)의 서이며, 그 밖의 주술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소망을 적극적으로 획득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또한 이집트 종교의 주술성과 함께, 이집트의 제신이 동물의 모습을 취함은 오늘날 아프리카 원주민의 종교와 적지 않은 공통성을 나타내며, 이집트 종교의 '보수성(保守性)'이 역사시대에 한정되지 않음을 암시한다.

팔레스티나의 종교[편집]

Palestina-宗敎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사이에 있는 팔레스티나에서는 기원전 12세기경부터 이스라엘인이 정착하여 일신교를 확립했다.

2대 정치세력 사이에서 그 어느 편이 되느냐에 따라 자주 내분이 생겼듯이, 문화면에서도 <구약성서> <창세기>에 적힌 노아의 홍수 이야기는 메소포타미아의 <길가메쉬 서사시>의 홍수 이야기와 비교되어 모세의 기적이 이집트 종교의 주술성(呪術性)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예언자나 <구약성서>의 저술자들은, 이스라엘의 신이 이름으로 불리는 일이 없고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목석금속의 우상(偶像)에 깃들일 수 없는 초월적 신으로 하여, 주변의 제신들로부터 어떻게 단절하여 독자성을 나타낼 것인가를 강조하고, 선택된 백성 이스라엘을 어떻게 역사를 통하여 구제하였는가를 이야기했다. 한마디로 말해서 피압박 민족의 입장에 섰던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그들의 일신교가 말하자면 인간성을 지키는 마지막 선(線)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BC 10세기, 이집트와 아시리아의 세력이 동시에 후퇴했을 때 다윗(David)·솔로몬(Solomon) 왕조가 융성했다. 이 일은 오랫동안 이스라엘인의 기억에 남아, 훗날 그들에게 있어서 과거의 이상적인 시대, 이상의 왕이 되었다. 특히 BC 1000년 후반에 정치적 독립을 상실한 이스라엘인 사이에는, 이 세상의 종말이 와서 최후의 심판이 있은 뒤 이스라엘의 영광이 재현된다고 하는 종말사상이 번졌으며, 종말의 중심적 존재인 메시아는 다윗(救世主)의 자손이어야만 했다.

이스라엘 왕조가 멸망하기 전후(北王國은 BC 721년, 南王國은 BC 587년에 멸망)에 직업적 예언자와는 다른 한 무리의 예언자가 나타났다. 그들은 모두 신의 계시를 받아 예언자로서 활약, 이스라엘인이 팔레스티나에 정주하여 농경생활로 이행하기 이전의 유목시대에 우상과 번거로운 제의(祭儀)를 수반하지 않는 순수한 신앙을 근거로 하여, 목숨을 걸고 이스라엘(및 여러 나라)의 종교적·윤리적인 죄를 폭로하고 신으로 복귀할 것을 외쳤다. 그 정신은 요시아왕의 개혁(BC 621년)을 가져왔으나, 그후 30년이 지나 왕국은 멸망하고 사람들은 흩어졌다. 예언자는 비탄하는 백성을 위로하고 이스라엘의 부흥을 예언한다. 그 가운데서도 무명 예언자의 <고난의 하인>이란 노래(<이사야書> 52∼53장)는 사상·내용의 깊이와 특이성으로 주목되고 있다.

BC 1000년 후기에 약 1천년에 걸친 율법·예언·제서(諸書) 등의 자료가 편찬되고 오늘날 <구약성서>로 불리는 정전(正典)이 되었다. 그 후의 자료는 탈무드(Talmud)에 편찬되었다.

페르시아의 종교[편집]

Persia-宗敎

페르시아에서는 2원론적 일신교인 조로아스터교가 생겨났다. 교조(敎祖) 조로아스터에 관해서는 뚜렷하지 못한 점이 많고 생존연대도 분명치 않으나, 대체로 BC 1000년 전반 후기로 되어 있다. 그는 천사 보프 마나를 통하여 신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의 계시를 받고 예언자로서 활동을 개시했다고 전해진다.

미트라교(Mitra敎) 등 고대 페르시아의 각 종교와 대결하면서 앙그라 마이뉴(Angra Mainyu:후의 아리만·惡)와 스펜타 마이뉴(Spenta Mainyu:聖)의 두 원리에 바탕을 둔 세계관을 보급시켰다. 사람은 생각·말·행동에 있어서 양자의 어느 쪽을 선택하나, 의로운 자는 후자를 선택하여 신 아후라 마즈다에 이른다. 결국 종말론적 해결로 악의 원리는 아후라 마즈다에게 멸망당한다. 아후라 마즈다 혹은 그의 제령(諸靈)이 조로아스터에게 계시한 지식으로서 <아베스타(Avesta)>가 3세기경에 편찬되었다.

위에서 거론된 고대 오리엔트 종교들은, 조로아스터·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중세의 마호메트 등 선천적 자질을 지녔던 종교적 인격을 거침으로써, 특정 사회집단에 한정되었던 전통적 신앙에서 오늘날과 같은 보편적인 종교로 변모되어, 지역과 국경을 초월하여 널리 사람들에게 수용되었다. 그리하여 훗날 서구의 문화와 문명에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또한 그 종교들은 이미 고대 그리스(Greece)와 로마(Rome)의 종교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