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종교·철학/세계의 종교/유 교/유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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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유교[편집]

원시유교[편집]

原始儒敎

유교는 공자에 의하여 창시되었다. 기원전 5세기경의 일로 중국사에서 말하면 춘추시대(BC 771∼BC 403)의 말기가 된다. 춘추시대는 다음의 전국시대(BC 403∼BC 221)와 일괄하여 춘추전국시대로 불린다. 이 시대는 은(殷)나라와 주(周)나라로 이어온 중국 고대의 봉건체제가 붕괴되는 과정이며, 진(秦)나라의 시황제(始皇帝)에 의한 통일제국의 형성(BC 221)으로 종지부가 찍히기까지의 중국 역사상 일대 전환기였다. 그 현실은 주왕조(周王朝)의 권위가 쇠퇴하여 이윽고 땅에 떨어졌으며 무력이나 경제력이 강한 제후(諸侯)들의 할거, 강대국의 실력에 의한 약소국 병합, 나아가서는 배신(陪臣)에 의한 국군(國君)의 추방·살해와 같은 하극상(下剋上)이 여러 번씩 있었던 전국난세(戰國亂世)였다.

문화적으로 보면 주왕조(周王朝)는 선행하는 두 왕조인 하(夏)·은(殷)의 문화를 기반으로 하여 상당히 진보한 문화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것이 왕조 창시 후 수백년이 지난 이 시대에 이르자 그 정치지배 제도인 봉건제도를 포함하여 다가올 새로운 시대에는 사회나 인간이 어떻게 되어야 하느냐는 과제 아래 재검토를 하게 되었다. 그 출발점이 된 것이 공자에 의한 유교의 창시이다. 공자에 이어 그 계보를 계승하는 유가(儒家)뿐만 아니라 이른바 제자백가(諸子百家)로 불리는 여러 사상가가 배출되어 전국시대에 피비린내나는 난세를 배경으로 백가쟁명(百家爭鳴)·백화제방(百花齊放)의 시대가 전개된다.

공자를 비롯하여 선진시대(先秦時代)의 사상가들은 제각기 사상을 영위하는 출발점에서 유구한 태고부터 그 시대까지 형성되고 축적된 두 문화적 유산을 공유재산으로 지니고 있었다. 그 하나는 '상제(上帝)' 내지는 하늘에 대한 숭경의 정념(情念)이다.

이것은 자연이나 인간, 요컨대 우주의 근원 내지 근본원리라고 하는 두 종류의 직관에서 오는 것이나 모두가 인간의 감각을 초월한 보편적인 것, 우주의 참된 실재(實在)에 관한 사색이 포함되어 있다.

그 두 가지는 현실적으로 전통 내지 습속(習俗)이라는 구체적인 형태를 지니고 있는 의례나 제도 등의 문화에 대한 신뢰, 나아가서는 그 문화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고대 성왕(聖王)들에 대한 존경의 정념이다. 이 두 가지가 난세에 살았기 때문에 종래에는 없었던 '인간'이라는 새로운 문제에 '응시(凝視)'의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던 전국(戰國) 사상가들에게 받아들여져 오랜 뒤의 중국인의 종교정조(宗敎情操) 기둥이 되는 온갖 사상으로서 전개되었던 것이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노자(老子)>나 <장자(莊子)>의 저자들 계통의 도가(道家) 및 공자를 시조로 하여 맹자(孟子)·순자(荀子) 들을 배출한 유가(儒家)였다. 도가(道家)는 인간의 감각을 초월한 우주의 참된 실재로 향하는 사색을 전개시켜 그 참된 실재를 '도(道)'라 부르고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인간행동의 기본적인 본연의 자세로 했다. 한편 전통문화에 대한 신뢰의 정조(情操)를 받아들인 것은 공자 및 유가(儒家)들이었다(다만 유교에서도 맹자 및 그 계통의 사상가는 '천(天)'의 사상까지 다루고 있다). 공자는 전통적인 제도·의례·습속 ― 공자가 '예'(禮)로서 일괄하는 것 ― 가운데에서 인간행동의 규범을 발견하고 이 '예와의 관련으로 '인(仁)'을 파악했다.

공자는 만년에 "나도 무척 늙었도다. 그토록 존경했던 주공(周公)을 오랫동안 꿈에 볼 수 없게 되었다"고 자신의 노쇠를 탄식하였다. 주공이란 주왕조(周王朝)의 창시자 무왕(武王)의 아우이며 조카인 성왕(成王)을 도와 창시 이후 얼마 되지 않는 주왕조의 지배체제를 굳힌 사람이다. 공자가 주공을 그토록 숭앙했던 것은, 주공이 주에 선행하는 하(夏)나라·은나라의 두 왕조 문화를 모델로 하여 풍성한 문화를 이룩하고 그럼으로써 문치주의적(文治主義的)인 주의 지배체제를 굳힌 사람이라고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공자사상의 출발점이 된 '예(禮)'는 공자에게 있어서는 주공이 창시한 것이라는 절대적인 무게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공자는 전통주의자이나 그가 살았던 시대는 이미 전국난세의 양상을 띠기 시작한 춘추시대의 말기였다.

주공에 의해서 수백 년 전에 정해졌던 '예'도 사회적으로 적합할 수 없게 된 면도 있었고, 본래 지녔던 의미가 상실되었거나 다른 의미로 바뀌거나 한 경우도 생겨났던 것이다. 공자는 이러한 시대의 양상에서 예가 흐트러짐을 보았다. 그래서 그는 예를 재검토하여 문란해진 사회질서를 재건하려고 꾀했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공자는 보수주의자라고 하겠다. 그러나 이 예를 재검토함에 있어서 그가 택한 방법에 공자의 새로움이 있었다.

공자는 예, 즉 전통적인 의례나 제도, 습속의 의미를 인간의 측면에서 탐구했던 것이다. 그리고 예와 인간의 주체성을 결부시키는 데 성공했다. 공자는 예를 실천하는 인간이라는 형태로 인간의 주체성을 확립시키고 그와 같은 인간 본연의 자세를 인(仁), 즉 인간다움이라고 규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공자의 인간 연구에는 전제(前提) 내지 한계가 있었다. 하나는 공자가 주체성을 확립한 인간이 실천해야 하는 것이라던 '예'는 주나라의 봉건지배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기 때문에 신분질서까지 포함시켰다는 점, 또 하나는 '인(仁)'이란 글자가 암시하듯이('仁'은 '人'이 둘 겹친 글자이다) 인간의 인륜(人倫), 즉 특정한 인간관계에 따라 파악되고 있다는 것이다. 거기서는 인간이 사회의 신분관계를 떠나서는, 또는 '개인'으로서는 파악되지 않고 있다.

공자가 생각한 인간은 예컨대 얼마 후 맹자에 의해서 수립되는 '오륜(五倫)'이라는 범주에서 넘어서지 못한다. 프랑스 근대사상의 선구자 몽테뉴가 파악했던, "사람은 누구나 인간이라는 조건(人間性)을 갖추고 있다"고 하는 인간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오늘날 예컨대 <기대되는 인간상>을 읽고 느끼는 도덕주의적 인간상의 건조함과 동질의 것이 유교의 발단부터 인간상 안에 깃들이고 있는 것이다.

유교는 공자 뒤의 전국시대에 이르러 맹자·순자와 같은 사상가에 의해서 발전했다. 인간 연구의 면에서 맹자의 성선설(性善說), 순자의 성악설(性惡說)이 주장되나 예를 실천하는 인간이라고 하는 공자의 기본적인 인간 파악의 범주에서 크게 발전하지는 못했다.

또한 시대의 진전과 함께 정치사상 면에서는 맹자의 왕도사상(王道思想), 순자의 법치주의에 가까운 사상이 나오나 전한(前漢)의 무제(武帝) 시대가 되어 동중서(董仲舒)에 의해 한제국(漢帝國)의 국교적 지위를 차지하기까지는 실천의 기회가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국교(國敎)가 되기까지의 준비단계에 있는 유교를 여기서는 원시유교라고 부르기로 한다.

공자[편집]

孔子(BC 552/551∼BC 479)

유교의 창시자.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 공자의 자(子)는 경칭으로 '선생'이라는 뜻이 된다. 춘추시대 말기에 노(魯)나라에서 태어났다. 노나라는 주왕조(周王朝) 건설에 공이 컸던 주공(周公)이 세운 나라이다. 조상은 전왕조(前王朝)인 은(殷)의 자손이 봉(封)함을 받은 송(宋)나라의 공족(公族)이었으며 공자의 3대 전에 노나라로 옮겨왔다. 어릴 때부터 제사(祭祀) 흉내를 내며 놀았다고 하며 고실(故實), 즉 예로부터의 종교의례·제도·관습에 밝았다고 한다. 공자 자신도 15세때 '학(學)'에 뜻을 두었다고 말한 바 있다. 종교와 정치, 종교와 사회생활이 아직 충분히 분화(分化)되지 못했던 당시로서는 전통적인 의례·제도·관습에 관한 여러 지식은 관직에 올라 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요건이었으며 그 때문에 취직을 지망하는 제자들이 일찍부터 공자 아래 모였던 모양이다. 공자 자신도 젊은 시절부터 노나라의 관리가 되어 중간에 관직에서 물러났던 시기가 있었던 모양이나 50세가 넘을 무렵에는 대사구(大司寇:당시의 법무장관)가 되어 재상 직무도 맡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포부는 노나라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아 조국을 떠나 10여 년간 각국을 순유(巡遊)하면서 제후(諸侯)에게 유세(遊說)도 했으나 역시 뜻을 이루지 못하고 68세 때는 다시 노나라로 돌아와 그 후로는 정치의 뜻을 포기, 죽기까지 고전 정리나 제자 교육에만 전념했다고 전한다. 제자들에 대한 가르침을 중심으로 한 공자의 언행(言行)을 기록, 그가 사망한 후에 편집한 것이 바로 <논어(論語)>로서 유교의 중요한 경전(經典) 중 하나가 되었다.

공자가 스승으로서 제자들의 교육에 임할 때 목표로 삼은 것은 '군자(君子)'의 양성이었다. 군자란 원래는 한 나라의 정치에 참여하는 능력과 자격을 겸비한 귀족계층의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었으나, 공자는 그러한 지위나 신분에 어울리는 인격·능력·교양을 지닌 사람으로 뜻을 확대하여 이러한 인재의 육성을 자기 교육의 목표로 삼았다.

교과서로는 춘추시대 이전의 여러 나라 민요나 주나라의 조정에서 의식이나 제사를 지낼 때 부르던 가요 등을 편집한 <시경(詩經)> 또는 주가 천명(天命)을 받아 왕조를 창시할 시기의 왕조의 기록류를 정리한 <서경(書經)> 등 전통문화를 내용으로 하는 것이 쓰였으나, 한편 공자는 주의 권위가 쇠퇴하여 이윽고 땅에 떨어지는 춘추시대의 노나라 연대기 <춘추(春秋)>를 편술(編述)했다는 말이 있듯이 영고성쇠가 거듭되는 난세(亂世)를 지켜본 사람이기도 했다. 전통문화를 내용으로 하는 교과서와 난세의 양상을 띠기 시작한 현실을 응시하는 눈, 이 두 가지가 공자의 교육을 설명하고 있다.

공자는 군자교육(君子敎育)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예'의 '학(學:예를 배워 몸에 익히는 것)'이었다. 공자의 경우 '예'란 아직 훗날의 유교처럼 덕목(德目)의 하나는 되지 못했었다. 그것은 공자가 존경했던 주공에 의해서 대성한 중국 고대의 전통문화라는 것과 가깝고 종교의례·제도·관습을 그대로 개괄하는 말이었다. 공자는 주공의 시대, 즉 주왕조 창시기의 사회 본연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시킴을 이상목표로 삼았었다. 그는 그 이상목표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예(禮)의 학습·습득(習得)을 제자들에게 부과했던 것이다.

그러나 난세(亂世)에 살고 인간을 응시하는 눈을 가졌던 공자는 예가 지니는 의미를 그것을 실천하는 인간에게서 추구했으며 예를 실천하는 인간에게서 인간의 주체성, 즉 '인(仁)'을 발견했다. 공자 교육의 중심이 된 '예의 학'은 '인'의 완성이나 혹은 인간형성을 궁극목표로 했던 것이다. 이전 문헌에 나오는 인이라는 말은 남자답다든가 훌륭한 풍채, 외모의 아름다움을 뜻함에 불과했으나 여기서 비로소 공자에 의해서 특별한 뜻을 지니게 되었다고 하겠다.

'인'은 공자가 생각하는 인간의 최고 덕(德)이었다. 덕이란 인간에게서 기대되는 개개의 훌륭한 자질이라고 중국인은 생각하며, 동시에 그것은 영향력 내지는 인격력으로서 남에게 감화를 미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중국인의 정치사상에서 근간을 이루는 덕치주의(德治主義) 내지 정치에서의 도덕중심주의의 근거라고 하겠으며, 공자의 정치사상 근저에도 이 직관(直觀)이 있다. 그는 처음에 위정자 특히 최고 책임의 소재자(所在者)인 군주에 기대를 걸어 각국을 역방하면서 자기 주장을 설명했었다.

뛰어난 덕(德)으로써 백성을 다스리고 백성의 덕을 높여 그 결과 도덕이 고루 퍼져 세상이 저절로 평화가 된다는 바로 그것이 공자의 정치사상이었다. 그러나 이 사고방식은 난세(亂世) 아래의 제후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제자를 교육하고 제자들에게 '예'의 학습을 시킴으로써 고전(古典)의 지식이나 정치기술과 함께 인격력인 '인'을 겸비하는 군자가 되도록 하고, 그들로 하여금 정치의 요로에 참여케 함으로써 당면한 난세를, 유혈이 따르는 실력주의가 아니라 평화적인 방법으로 바로잡으려 했던 것이다.

맹자[편집]

孟子(BC 390/389∼BC 305, 또는 BC 372∼BC 289)

전국시대의 대표적인 유교 사상가 중 한 사람. 활약한 시기는 기원전 4세기 후반. 이름은 가(軻)로서 공자가 태어난 노나라와 가까운 추(鄒)나라 출신.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문인(門人)에게 배운 것이 맹자의 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된다. 자사의 계통은 공자의 경우에는 별로 드러나지 않았던 '천(天)'의 신앙을 발전시키고 있었다.

맹자도 공자처럼 각국을 순방하면서 제후에게 정치적 소신을 설명하였으며, 그의 경우는 그 포부가 채택되고 실시되었던 적도 있었던 모양이나 결국은 뜻을 펴지 못한 채 만년은 고향인 추나라에 돌아와 제자인 만장(萬章) 등과 함께 제자 교육에 전념했다고 한다.

<맹자> 7편은 만년의 저술이라고 하나 의문이며 실제로는 그의 제자들이 편찬한 것으로 봄이 옳을 것이다.

맹자의 사상은 하늘에 대한 숭경의 정념이라고 하겠다. 맹자는, 하늘은 인간을 포함한 만물을 낳고 그 피조물(被造物)을 지배하는 영원불변의 법칙을 정해 이를 만물창조의 목적으로 삼았다고 파악했다. 그리고 이 하늘과의 관련으로 인간 본연의 모습을 고찰하고 있다. 피조물인 인간에게는 하늘의 법칙성이 내재하고 있으며 하늘이 정한 법칙의 달성이 피조물인 인간의 목적이라는 것이 맹자의 기본적 인간관인 것이다.

공자가 인(仁)이라 부르고 '예(禮)'를 실천하는 인간의 주체성에서 발견한 인간의 덕성(德性)을, 맹자는 인간이 갖추고 있는 하늘의 목적을 지닌 법칙성으로 생각하고 이를 인간의 본성이라 하여 인간의 성(性)은 선(善)이라고 하는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맹자는 은·주 이후의 전통적인 유산인 인간의 지각을 초월한 우주의 참된 실재자에 대한 숭경의 정조(情操)로 공자가 발견했던 인간의 실천적 계기를 종교적으로 기초를 닦았던 것이다.

맹자는 인간의 성은 선이라고 하는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인간의 마음에는 인(仁)·의(義)·예(禮)·지(智) 등 4덕(四德)의 4단(事端:싹)이 구비되어 있다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인(仁)은 '측은(惻隱)의 마음' 혹은 '남의 어려운 처지를 그냥 보아넘길 수 없는 마음'이며, 의(義)는 불의불선(不義不善)을 부끄럽게 알고 증오하는 '수오(羞惡)의 마음', 예(禮)는 사람에게 양보하는 '사양의 마음', 그리고 지(智)는 선악시비를 판단하는 '시비(是非)의 마음'으로 설명되고 있다.

공자는 예를 실천하는 인간의 주체성을 '인'이라고 했으나 4단(四端)은 공자가 말하는 '인'의 세분화(細分化)라고 하겠다. 한편, 맹자는 '인(仁)이란 사람으로서의 덕'이라 하고 특히 그것이 위정자에 의해서 실현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즉 공자의 사고방식을 계승하는 면도 있다. 또한 맹자가 말하는 의에는 수오(羞惡)의 마음이라는 의미 이외에, 개개의 예가 적절타당하기 위해서의 원리라는 뜻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바로 그가 '예의'라고 병칭(竝稱)하는 경우이다. 이 경우 맹자는 공자의 '인'을 다시 한번 깊이 고찰했다고 하겠다.

이상과 같이 공자와 맹자로는 용어법에도 차이가 있고 또한 맹자 자신의 용어법에도 일관성이 결여되는 경우가 있으나 개괄적으로 말한다면 맹자는 공자의 사상을 나름대로 발전시켰다고 말할 수 있겠다.

덕목(德目)의 정리라는 점에서는 '4단'설 외에 '오륜(五倫)'설이 유명하다. 이것은 인간관계를 다섯으로 정리한 것으로 '부자유친(父子有親)·군신유의(君臣有義)·부부유별(夫婦有別)·장유유서(長幼有序)·붕우유신(朋友有信)'이라고 한다.

맹자는 공자의 덕치주의 사상을 하늘이 만민을 낳고 그 통치자로서 유덕자(有德者)를 천자(天子)로 명한다는 <서경(書經)> 이후의 천명관(天命觀)으로 뒷받침했다.

하늘의 신앙에 의해 정치권력의 정통성에 기초를 주는 사상이다. 그리고 하늘의 의지는 민(民)의 소리와 천지의 제신(諸神)의 승인으로 알 수 있다 하여 민본주의(民本主義)의 요소가 부가되었다. 맹자는 농사의 방해가 되는 노역이나 전쟁을 하지 않고 우선 민생(民生)의 안정을 꾀하며 이어 도덕교육을 행하여 인륜(人倫)의 길을 가르치면 천하의 사람들은 기뻐하여 심복하고 귀일한다는 것으로 이것이 옛날 성왕(聖王)들의 정치, 즉 '인정(仁政)'이며 '왕도(王道)'라고 했다. 이 주장이 맹자의 '왕도론'이며 그는 또한 <서경>에 강조되고 있는 은·주 교체기(交替期)의 역성혁명(易姓革命) 사상을 확인하고 있다. 그의 논법은 민의(民意)를 배반하고 인의(仁義)에 어긋난 은나라 왕 주(紂)는 이미 군주가 아니라 한 평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은나라 신하였던 주의 무왕은 필부(匹夫)인 주를 토벌한 것이지 군(君)을 시역(弑逆)한 것은 아니라는 격렬한 것이었다. 이 점에 바로 군신의 의 이상의 것으로서 천명(天命)이 설정되어 있다.

맹자는 정치적 원리로서의 하늘을 설명하지 않았던 공자보다 여기서는 앞서고 있다.

맹자는 공자의 사상을 계승하고 공자가 수립한 인간의 실천적 주체성이나 덕에 의한 정치라는 사고방식을 전통적인 하늘의 신앙과 결부시킴으로써 이를 발전시켰다.

성선설이나 왕도론(王道論)에서 그 경위를 볼 수 있다. 그러나 맹자는 또한 5백년마다 성인이 출현한다고 하는 일종의 순환론적 역사관에 의거하여 공자의 정당성을 증명하려고 한다.

성인의 전형이라는 전설상의 제왕(帝王)인 요·순(堯·舜)부터 5백년쯤 지나 은의 탕왕(湯王)이 나오고, 탕왕에서 5백년쯤 지나 주나라의 문왕(文王), 문왕에서 5백년쯤 지나 공자가 나와서 선왕(先王)의 도(道)를 전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맹자 자신은 공자부터 당시까지 1백년쯤, 공자가 세상을 떠난 뒤부터는 아직 얼마 되지 않아서 자기는 공자의 길을 유지 확보하는 자로 위치가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순자[편집]

荀子(BC 298?∼BC 238?)

전국 시대(戰國時代) 말기의 유교 사상가. 이름은 황(況), 순경(荀卿), 손황(孫況)이라고도 불렀다.

진(秦)에 의한 전국통일(BC 221) 전야(前夜)의 사상계에서 활약했으며 초(楚)나라에서 정치 실무를 담당한 일도 있다고 한다. 사상적으로는 천(天)의 사상을 발전시킨 자사(子思)나 맹자와는 다른 예(禮)에 뛰어났던 유교 계통에 속한다.

맹자 등의 유교사상뿐만 아니라 제자백가(諸子百家)로 불리는 전국시대의 다른 학파의 사상까지 비판·섭취하여 유교로서는 상당히 특이한 사상체계를 수립했다.

<순자(荀子)>는 그의 저술이라고 하며, '천론(天論)'·'예론(禮論)'·'성악(性惡)' 등의 여러 편 외에 그의 제자나 그 밖의 관계되는 것이 들어 있다.

순자의 사상에서 바탕이 된 것은 예를 지상(至上)의 것으로 한다는 태도이다. 공자는 있는 그대로의 종교의례·제도·관습을 예로 삼아 성인(聖人) 주공(周公)에 의해서 집대성된 중국인의 전통적 문화유산으로서 신뢰하고 존중했다. 예는 공자의 경우 아직 덕목(德目)은 되지 못했었다.

순자는 기본적으로는 공자의 이러한 태도를 지지한다. 그도 예는 성인(聖人)의 작위(作爲)에 의한 것으로 영원히, 즉 시대의 제약을 초월하여 무한하게 타당성을 갖는다고 한다. 그러나 상고(上古)의 성왕(聖王) 업적은 시대가 오래되므로 전승(傳承)이 완전하지 못하여 후세 사람으로는 그 전모를 알 수 없다. 때문에 상고의 성왕, 즉 '선왕(先王)'이 만든 예는 후세의 왕, 즉 '후왕(後王)'의 업적을 보고 추정해야 한다고 하여 예를 생각하는 기준을 동시대로 옮겨버린다.

그리고 공자처럼 예를 구체적으로 생각하는 순자는 후왕이 예의 내용에 새로 추가하는 요소인 법률에도 성왕의 예와 같은 권위를 인정하고 그것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했던 것이다. 그 결과 정치사상에서 그는 공자 이후의 덕치주의(德治主義) 전통에 새로 법치주의의 요소를 추가하게 되었던 것이다.

맹자는 공자가 예를 실천하는 인간의 주체성에서 발견한 덕성(德性), 즉 인(仁)을 인간에게 구비되어 있는 하늘(天)의 목적을 가진 법칙성, 하늘의 의지로 생각하고, 이것이 있기 때문에 인간의 본성은 선이라고 했다.

순자는 욕망을 지니고 있는 그대로의 인간에 눈을 돌린다. 그도 또한 인간의 덕성(德性)을 부정하지 않는다. 체내에서 5관(五官)을 통제하는 자율심(自律心)을 '천관(天官)'이라 부르고 이것이 선을 이루는 주체라 하여 중시한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즉 인간에게 선이 되려는 자율심이 있기 때문에 인간의 본성은 악이라고 순자는 맹자를 비판한다.

근대철학의 아버지라는 데카르트는 명저 <방법서설(方法序說)>의 첫머리에서 "이성(理性)만큼 세상에 널리 퍼진 것은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에게 없는 것이라면 무엇이건 모두 탐내지만 이성은 아무도 탐내지 않기 때문"이라고 역설(逆說)을 전개하고 있다.

순자도 그 초점은 데카르트와 다르나 논법은 같다고 하겠다. "원래 덕이 박한 자는 후덕해지기를 원하고 추한 자는 아름다워지기를 원하며 가난한 자는 부자가 되기를 원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만약 자기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이 있다면 반드시 그것을 외부에서 구하게 마련이다" 순자는 맹자의 성선설을 이해하면서 이를 야유하고 있다.

맹자의 인간론에 대한 순자의 비판에서 그 초점은 인간의 덕, 즉 인간의 마음에 구비되어 있는 자율성을 하늘의 목적을 지닌 것 내지 하늘의 의지를 담당하는 것으로 하는 맹자의 사고방식에 대한 부정에 있다.

순자도 인간의 마음에는 법칙성에 지배되는 측면이 있음을 시인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하늘의 기능이라고도 말한다. 그러나 순자는 자연성·법칙성으로서의 하늘을 시인하는 것으로서, 하늘이 목적이나 의지를 갖는 것은 승인하지 않는다.

초목의 생성, 4계(季)의 추이(推移)와 같이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 하늘의 작업이며 하늘의 기능은 완성된 '구체적인 결과는 알 수 있지만, 그 원인이 된 무형(無形)의 곳은 알 수 없다'는, 즉 신비성이 하늘의 기능에는 있다는 것이 순자의 하늘사상이다.

이것은 도가(道家)의 '도(道)' 내지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사고방식과 같으며 거기에 일종의 불가지론적(不可知論的) 태도, 즉 인간의 감각을 초월한 하늘·신·부처와 같은 절대자에 관해서는 인간이 알 수 없다고 하는 태도가 있다.

그리고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서는 천지(天地) 등의 자연현상에 관한 지식은 현상이 뚜렷해진 것에만 한하고 그 이상은 추구하지 않을 것, 마음을 청명하게 하여 5관(五官)의 기능을 정상적으로 갖춰 자연이 명하는 대로 순응하며 자연스러운 본래의 감정을 도야할 것이라고 도가(道家)의 가르침과 똑같은 경험주의적인 신중한 인생 태도를 취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순자는 유가로서 도가가 아니다.

그리고 인간의 사회생활에서 가장 분명한 것은 성왕이 만든 문화, 즉 예(禮)라고 하여 예를 절대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이것이 바로 순자의 성악설의 초점이라고 하겠다.

순자가 생각하는 예의 내용에는 새로운 요소인 법률이 들어 있다. 순자는 맹자가 생각했던 왕자의 덕의 감화력에 의한 정치방식, '왕도(王道)'에 준하는 것으로서 공자나 맹자가 엄격하게 배격했던 권력에 의한 신상필벌식(信賞必罰式)의, 즉 법치주의 정치 본연의 자세로서 '패도(覇道)'의 존재가치를 시인했다. 맹자는, 군주는 하늘의 의지인 '천명(天命)'과 '백성의 소리'로 정당화된다고 했다.

하늘의 의지를 부정하는 순자는 '백성의 소리'만은 그 정당성의 근거로서 남겨 놓았다.

그러나 그의 문하에서 배출된 법가사상(法家思想)의 대성자(大成者)인 한비자(韓非子, ?∼BC 233)는 '백성의 소리'마저 부정하여 당시의 권력자가 제정하는 법령에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했다.

이러한 점에서 순자는 유가와 법가를 결부하는 구실을 다한 사상가라고 하겠다. 또한 덕치주의와 법치주의를 포함하는 정치사상은 한제국(漢帝國)의 국교적 존재가 되는 유교의 사상적 준비라고 할 수 있겠다.

국가유교[편집]

국가유교[편집]

國家儒敎

전한(前漢)의 중기에서 청조(淸朝)의 붕괴에 의한 통일제국의 소멸까지 약 2000년 동안 중국 정치체제의 사상적 지주가 되어 발전해 온 유교를 그 이전의 유교, 즉 원시유교와 구별하여 국가유교라고 부른다. 정치권력의 측면에서 보면 체제교학(體制敎學)으로 된 것이 유교측에서 보면 그 이상으로 하는 덕치주의를 실현시키는 현실적 기반을 획득한 셈이 되며, 실제로 유교는 중국 정치자세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셈이 된다.

유교는 예교(禮敎)라고도 한다. 예란 예로부터 시행되어 온 종교의례나 제도·습속 등을 총괄하는 말로서 왕이나 제후의 궁정에서 촌락공동체·가족공동체에 이르기까지 사회에서 실제로 시행되어온 온갖 관행(慣行)을 그 내용으로 한다.

유교는 주나라 봉건체제의 붕괴가 시작된 상황 아래에서 그것들을 받아들여 그것들이 붕괴하거나 소멸하는 것을 방지하려는 관점에서 출발했다.

창시자인 공자는 예를 성왕 주공이 창시, 적어도 주공이 집대성한 것으로 평가하여 사회의 규범·인간형성의 훌륭한 범례로 삼았다.

통일제국 출현 전야의 순자는 '성왕'의 창시라는 범주에서는 벗어나지 않았으나 그 성왕을 생각하는 시점(視點)을 '선왕(先王)', 즉 고대의 왕에서 '후왕(後王)', 즉 후세의 왕으로 옮겨 후왕에 의한 새로운 예를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 또한 공자는 후왕을 위해 예를 만들었다고 하는 사상(春秋公羊學)도 통일제국 성립 전후에는 성립되어 있었다.

유교를 국가적 지위에 올려놓은 동중서(董仲舒)는 봉건체제로부터 제국의 독재지배 체제로 정치에 변혁이 있었다 해도 유교를 별로 왜곡시키지 않은 채 그 체제의 교학으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이다.

수(隋)나라 시대에 이르자 관리 등용의 시험이 시작되었다. 바로 과거제도의 기원이다.

이 제도는 당나라 시대에 정비되고 다시 문벌귀족층이 붕괴한 송나라 시대 이후는 민간인의 실력에 의한 출세의 관문이 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시험 범위인 유교경전(儒敎經典)의 민간보급도 활발해졌다.

유교는 원래 민간의 관습까지 이해한 것인만큼 민간에 더욱 깊이 뿌리를 박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유교의 체제교학이었던 실제이다.청조 말기에 이질적인 문화토양에서 자란 서양 근대문명의 충격을 받아 왕조체제가 변혁을 강요당하자 체제교학이었던 유교는 새로운 시대에의 적응을 외면할 수 없었다.

캉유웨이(康有爲)의 사상이 그 일례로, 그의 공양학(公羊學)에 경도된 수많은 저서 내용은 마침내 국가유교의 가치체계를 붕괴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유교가 2000년 동안이나 체제교학일 수 있었던 것은 첫째 중국인의 사상 소재(素材)를 모두 통합하여 독특하고 훌륭한 사상체계를 구축했기 때문이다.

우주의 제1원리·궁극적인 실재에 관해서 중국인은 '하늘(天)'과 '도(道)'의 두 가지로 파악한다. 맹자에서 볼 수 있는 하늘의 신앙, <노자(老子)>의 도(道)의 직관 혹은 <장자(莊子)>의 신비주의적 직관에 의한 도의 파악 방법이 대표적이다. 또한 현실세계의 인간이나 사물(事物) 및 여러 현상에 관해서는 음양오행(陰陽五行)의 기(氣)를 원리로 하여 파악하려는 음양가(陰陽家)의 사상이 있다. 또한 인간을 소우주, 천지를 대우주로 하고 양자를 대응시켜 생각하는 인간소우주론이라고도 할 수 있는 사고방식이 있다.

유교는 그러한 것을 종합하여 대우주 속에 인간의 위치를 정했다. 거기에는 인간의 의미인세계의 법칙과 자연현상의 법칙을 구별하지 않았던 중국인의 사고(思考) 습성까지 포함되어 당시의 중국인이나 중국 문화권 내의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완성된 사상체계를 수립했다.

송학(宋學)의 대성자 주자(朱子)의 사상이며 그것을 보충하는 왕양명(王陽明)의 심학(心學)이었다.

유교가 체제교학일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로는 유교경전이 오래 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중국인은 일부 예외를 제하고는 자기들 운명의 황금시대를 태고(太古)에 상정(想定)한다. 바로 상고(尙古)의 심정인 것이다. 그것은 오래 되면 오래 될수록 값어치가 있다는 감각이다. 유교는 요·순이라고 하는 전설상의 제왕(帝王)에까지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게 한다. 도교(道敎)는 요·순보다도 오랜 황제(黃帝)를 조상으로 받들어 그 오래 됨을 겨룬다. 그러나 경전이 오래 되었다는 점에서는 유교가 다른 학파를 압도했다.

<춘추(春秋)>를 공자의 저작으로 하는 외에도 <시경(詩經)>·<서경(書經)>·<역경(易經)>·<예기(禮記)>도 공자가 편집한 것이라 하며, 고대 황금시대로부터의 전통문화를 전하는 만고불역(萬古不易)의 신성성(神聖性)을 갖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러한 것을 소의(所依)로 하는 유교의 정통성도 그것에 의해 승인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 연구가 발달하고 그것이 오래 되었다는 점에 의문이 생겼을 때는 이미 유교의 국교적 지위가 흔들릴 때이기도 했다. 이것이 곧 청조(淸朝) 고증학(考證學)의 결과이다.

동중서[편집]

董仲舒(BC 178?∼BC 104?)

전한시대(前漢時代)의 대표적인 유교 사상가. '춘추공양학(春秋公羊學)'이라는 새로운 유교사상을 형성했다.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을 배우고 경제(景帝, 재위 BC 157∼BC 147) 때 박사(博士)가 되었다. 즉위한 지 얼마 안 되는 무제(武帝, 재위 BC 141∼BC 87)의 현인(贅人) 등용시험에 응시, 발탁되었다.

무제의 형인 강도왕(江道王)이나 교서왕(膠西王) 밑에서 대신을 지냈으며 은퇴 후는 집에서 수학(修學)과 저술에 힘썼다. 무제는 그 후에도 자주 사자를 파견하여 그의 의견을 들었다고 한다. 그의 사상은 저작 <춘추번로(春秋繁露)>나 <사기(史記)> <태사공 자서(太史公 自序)>에 인용되고 있는 그의 말에서도 엿볼 수 있다.

유교가 이상적인 군주로 평가하는 '성왕(聖王)'의 기준을 '선왕(先王)', 즉 과거의 왕에서 '후왕(後王)', 즉 후세의 왕으로 전환시켜 이상적 정치인 덕치주의에 현실적인 법치주의의 요소를 부가함을 시인한 사람은 순자였다. 동중서는 순자의 이 현대주의를 이해하여 현실적으로 통일지배 체제를 굳힌 시기를 맞은 한왕조를 후왕으로 보고 무제에 의한 체제 확립에 사상적 지주를 부여했다.

<춘추공양전>의 학자였던 그는 우선 공자가 <춘추>를 집필함에 있어서 후왕을 위해 은밀히 시사한 정치이상인 '대일통(大一統), 天子에 의한 제후의 통제, 즉 一統을 존중한다는 뜻)이 한제국(漢帝國)을 위한 정치목표라 했으며, 그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를 합리화했다.

또한 왕조의 교체는 천명(天命)에 의하며 천명은 흑통(黑統) →백통(白統) → 적통(赤統) → 흑통(黑統) → … 으로 순환하고 하왕조(夏王朝)는 흑통, 은(殷)은 백통, 주(周)는 흑통이었으며, 공자는 이 흑통의 왕조인 한(漢)을 위한 제도의 이상을 <춘추>에 담았다고 한다. 이것이 <삼통설(三統說)>이라고 불리는 순환사관(循環史觀)으로서 그는 이 관점에서 무제의 신제도 제정에 역사적 필연성을 부여했다.

동중서가 진왕조(秦王朝)를 삼통설에서 제외한 것은, 진나라가 유교에서 말하는 덕치주의를 채택하지 않고 법률편중주의를 정치의 근간으로 삼았기 때문에 천명은 진나라를 쓰러뜨린 한나라에 내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유교의 덕치주의가 천명을 받는 조건으로 되어 있다.

절대군주체제에서의 덕치주의라는 조건은 '천인감응(天人感應)' 사상 내지 '재이설(災異說)'이라는 그의 사상으로 이론화되었다.

이것은 '인간소우주론'이라고도 할 수 있는 사고방식이 바탕이 된 것으로 인간(人間:小宇宙)과 천지(天地:大宇宙)는 같은 구조를 지니며 모두 음·양의 두 '기(氣)'에서 이루어진다. 양자는 그 음·양의 기의 매개에 의해서 밀접하게 반응하는 것이며, 인간계가 음·양의 기의 조화를 문란케 할 때는 곧 하늘의 음·양의 조화가 혼란스러워지고 그것이 '재이(災異)', 즉 자연계의 이변현상(異變現像)이 되어 나타나며, 인간계의 음·양의 조화를 혼란케 하는 것은 제왕의 실정(失政)이다.

그러므로 재이(災異)는 제왕의 실정에 대한 경도라는 것이 대강의 취지라고 하겠다. 동중서는 제왕에 대한 가치판단의 기준을 객관화하고 자기가 정당화한 절대군주에 있어서의 자의(恣意)를 검토하려고 했다.

동중서는 천인감응사상에서 볼 수 있듯이 중국에서 예로부터 있었던 음양오행(陰陽五行) 사상을 채택하여 자기 사상의 체계화를 시도했다. 음·양이란 인간이나 사물, 요컨대 우주에 존재하는 전부를 구성하는 두 '기(氣)' 즉 원소(元素)이다. 그리고 오행(五行)이란 목(木), 화(火), 토(土), 금(金), 수(水) 등 5원소의 작용이란 뜻으로 인간을 포함하여 우주의 모든 현상을 설명하는 원리이다.

음양사상과 오행사상은 원래 별개의 것이었으나 기원전 3세기경의 사상가 추연(騶衍:陰陽家의 始祖)에 의해서 정리되어 음양오행사상이라는 것이 되었다.

이 음양오행사상은 동중서에 의해 유교에 채택되었으며 훗날의 유교사상을 우주론의 규모로까지 체계화시키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그러나 음양오행에 의한 우주의 설명은 우주의 자연현상이라는 측면에서는 도움이 되었으나 행동하는 인간이란 의미의 세계를 설명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하다.

동중서는 '하늘은 곧 인(仁)'이라 하여 자기 사상이 단순한 자연현상의 설명으로 끝나는 것을 막고 인간행동의 의미의 근원을 인(仁)인 하늘, 곧 전통적인 하늘의 신앙에서 추구한다.

음양오행설에 의한 우주인식의 방법에는, 특히 음양에 의할 경우에는 인식하는 인간의 가치관 내지 취향이 인식되는 것이 반영되기 쉽다.

중국인에게는 '양존음비(陽尊陰卑)'라는 가치판단이 있다. 양은 양지(陽地), 음은 음지(陰地)라는 뜻을 갖고 있는 것이 바로 그 근거이다.

동중서는 난(暖)-한(寒), 여(與)-탈(奪), 인(仁)-배(背), 관(寬)-급(急), 애(愛)-오(惡), 생(生)-살(殺)이라는 인간심리나 행동에 관한 것, 선-악이나 군-신, 부-자, 부-부(君臣·父子·夫婦는 '三綱'이라는 倫理의 根本이 된다), 성(本性)-정(情念)이라는 도덕가치 자체에 관한 것 또한 덕(德, 덕치주의)-형(刑, 법률 편중의 형벌주의)과 같은 정치에 관한 것까지나 음(→後項)·양(→前項)으로 나누어 후항의 양을 플러스 가치를 지닌 것, 전항의 음을 마이너스 가치를 지닌 것, 혹은 전항(前項)보다 못한 것으로 하고 있다.

오행은 단순한 항목 분류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목·화·토·금·수에는 상하가 없으며 이 배열은 1·2·3·4·5의 식으로 순서를 나타내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맹자는 '4단(四端)'에 '신(信)'을 더한 '5상(五常)'이 있다.

인(→ 목)·의(→ 금)·예(→ 수)·지(→ 화)·신(→ 토)이나 여기에는 거의 뜻이 없다. 정부의 5관(五官)인 경우도 사농(司農)을 목, 사마(司馬)를 화, 사영(司營)을 토, 사도(司徒)를 금, 사구(司寇)를 수로 배열한다.

동중서는 한제국의 절대군주에 의한 통일지배 체제를 공자가 난세에 즈음하여 장래에 위탁할 대조화(大調和)의 세계를 실현하는 제도라고 했으며, 그것으로써 유교를 국교, 즉 체제교학의 위치로 올려놓는 데 성공했다. 그는 원시유교로부터의 전통을 근거로 하고 새로이 '음양오행'이라고 하는 중국인의 정통적인 우주인식의 카테고리를 채택하여 유교의 체계화를 시도, 국가유교에 어울리는 스케일을 지니는 당시로서는 최고수준의 사상체계를 구축했다.

그러나 체제교학이 됨으로써 유교의 인간을 보는 눈에는 변화가 생겨났다. 공자·맹자, 그리고 순자에게 있어서도 인간은 덕을 쌓고 예를 실천하는 주체성을 지니는 것이라 하여 문제시되었다. 동중서에게는 새로이 인간은 지배되는 것이라는 관점이 성립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현실의 왕자의 덕에 의해서 교화된다고 하는 관점이다. 인간의 객관화인 것이다. 이 관점에서 인간은 성인·중민(中民)·두소(가치 없는 인간)의 세 종류로 분류되게 되었다. 이리하여 인간 주체성의 문제는 후세의 과제가 되어 남겨졌다.

주자[편집]

朱子(1130∼1200)

이름은 희(熹). 자(子)라는 것은 선생이라는 뜻의 경칭. 남송시대(南宋時代)의 유교 사상가, 송학(宋學)의 대성자(大成者), 주자학의 시조이다.

주자의 생애에서 사상 형성이라는 면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유교의 소양 외에 불교나 도가(道家), 즉 노자나 장자의 사상 등에 관한 교양도 깊었으며, 특히 선(禪)의 소양이 결정적인 작용을 했다는 것, 또한 19세에 과거(進士)에 합격하여 22세부터 죽기 전년의 70세까지, 중간에 긴 공백기가 있기는 했으나 지방관(地方官)으로서 정치의 실제를 경험했다는 것, 또한 관리로 있을 때 벼농사의 기술지도를 하는 등 천문학 지식은 당시로도 일류였듯이 자연과학적인 지식이 많았다는 것 등이다.

그의 저작은

<태극도해설(太極圖解說)>·<사서집주(四書集注)>·<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주자가례(朱子家禮)> 등 그 밖에 막대한 수를 헤아리나 위에 든 것 외에도 주자와 문하생들과의 대화를 기록한 <주자어류(朱子語類)> 등은 그의 사상을 아는 데 있어서 참고가 된다.

주자에게는 대조화(大調和)의 세계라는 직관이 있었다. 이 직관이 그의 사상에서 주도동기(主導動機)가 된다. 주자는 이 대조화 세계의 근본원리를 '이(理)'라 부르고 '무극(無極)이면서 태극(太極)'이라고 설명한다.

태극이란 궁극의 근원이란 뜻으로 우주의 정연한 법칙이나 실천의 주체인 인간에 있어서의 의미의 세계도 이 궁극의 근원인 '이(理)'에 근거를 지닌다고 한다. 무극이란 인간의 감각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것을 말하며 '이(理)'는 인간의 감각으로 포착할 수 있는 사물·현상의 배후에 있는 우주의 눈의 실재라고 하는 설명이다. 도가도 인간의 감각을 초월한 곳에 우주의 참된 실재를 직관하고 그것을 '도(道)'라고 불렀다.

주자도 기본적으로는 도가의 도를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도가는 현실 세계에 실제로 담겨진 의미를, 결국은 인간 사상의 소산인 우주의 궁극적인 원리를 추출(抽出)하여 합리화함을 거부했다. 도는 인간의 지각을 초월한,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이해할 수는 없다고 한다. 주자의 '이(理)'는 그의 대조화(大調和)의 세계라고 하는 직관과 결부되어 있다. 그것은 자연계의 법칙, 인간의 의미의 세계를 추구하여 마지막에 이 양자를 통일하는 원리로서 논리적으로 요청된 '이어야만 하는' 것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대조화의 세계는 현실에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자가 직관한 있어야 할 세계, 다시 말해서 이상(理想) 혹은 관념의 세계인 것이다. 주자가 생각한 이(理)는 있어야 할 이상 세계의 원리라는 것이며 유교사상의 관념론적 내지 이상주의적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주자는 현실에 있는 그대로의 인간이나 자연을 음·양 혹은 목·화·토·금·수 오행(五行)의 기(氣)가 작용하는 자리로 본다. 동중서 이후의 현실인식 방법의 답습이다.

그리고 현실에 있는 그대로의 인간이나 자연은 동시에 그것들이 본래 지녀야 할 성질이 안에 깃들여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인간의 '성(性:本性)', 자연의 '성'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성'이 '이'라 하여 '성즉이(性卽理)'를 주장하고 있다. 맹자는 인간의 마음에는 선천적으로 덕의 싹이 깃들이고 있다고 하여 그것을 하늘의 의지 내지 하늘의 목적을 담당한 법칙성이라 하고, 이것이 있기 때문에 인간의 성은 선이라고 했다. 주자는 맹자의 소박한 인간 덕성(德性)의 인식을 근거로 하고 그것을 자연계의 사물에까지 확대시켰다.

주자는 '이(理)'를 대조화 세계의 비인격적인 근본원리로 하여 우주의 주재자였던 '하늘'에서 인격성을 제거했으나 인간의 의미 세계의 근원임은 그대로 두어 범신론(범神論:萬物에 神이 깃들인다고 하는 사상)의 구도(構圖)로 '이(理)'를 인간뿐만 아니라 만물에 보편적으로 내재한다고 생각한다.

주자에게는 인간과 자연의 구별이 없다. 인간과 자연을 같은 구도(構圖)로 생각한다. 예컨대 인간의 '성'을 '마음의 덕'이라 하고 이를 '인'이라 하며, 다시 그것을 분석하여 인·의·예·지(맹자의 四德의 사고방식)로 하나 이 구도를 자연계에도 적용하여 자연의 '성(性)'을 '천지의 심덕'이라 하고 이를 '인'과 대응시켜 '원(元)'이라 하며, 원을 분석하여 원(→ 仁)·향(享:→禮)·이(利:→ 義)·정(貞:→ 信)의 4덕으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또한 인간의 마음을 '미발(未發:靜止의 狀態)'에서 '이발(已發:活動의 상태)의 마음'으로 변화하는 것으로서 포착하나 그것은 자연계가 '음정(陰靜:靜止한 陰의 상태)'에서 '양동(陽動:活動하는 陽의 상태)'으로 변화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한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의 미발·이발과 자연계의 음정·양동이 모두 태극인 이(理)에 의해 근거가 주어져 있다고 했다.

주자는 일시동인(一視同仁), 인간을 포함하여 만물에는 안에 대조화 세계의 근본원리인 '이'가 구비되어 있으며 그러한 점에서 만물은 모두 같다고 했다.

그러나 현실로는 만물에는 인간과 사물, 인간에도 성(聖)-불초(不肖), 현(贅)-우(愚), 귀(貴)-천(賤) 등의 차이가 있다. 주자(朱子)는 이러한 종류의 차이는 인간 만물을 구성하는 음양오행의 '기(氣)'에 청(淸)-탁(濁), 정(正)-편(偏), 순수-조잡 등 여러가지가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기가 청·정·순수라면 성(性), 즉 이(理)는 선명하게 발현되나 탁·편·조잡이면 그 발현은 방해된다. 그리고 이러한 사고방식에 의거해서 주자는 인간의 실천을 생각했다. 인간은 어떻게 해서 인간에 있어서의 성 즉 이, 다시 말해서 본성을 실현하느냐의 문제이다.

주자는 이 문제의 초점을 인간의 '마음'에 두었다. 그는 인간의 마음의 현실, 희·로·애·락, 거기에 욕망과 지성이 마음을 구성하는 기(氣)의 기능이라 하여 이를 '정(情)'이라 부르고 마음에 깃들인 본래의 성(性)과 구별했다. 여기에서 정을 규제하여 성으로 하는 수양법(修養法)·실천법이 궁리되었다. 그런데 주자의 수양법은 2단(二段)으로 나뉜다.

제1단은 '거경(居敬)', 즉 마음의 미발(未發) 상태에서의 수양법이며 안에 구비된 성을 기르고 그것을 순수한 그대로 유지하는 것, 구체적으로는 비록 의미는 다르나 선(禪)이나 도교의 정좌(靜坐)·조식(調息)의 방법이 채택되고 있다. 제2단은 '궁리(窮理)'. 마음의 이발(已發) 상태에서는 외물(外物)에 자극되어 욕망이 싹트고 발달할 가능성이 있다.

자기만이 알 수 있는 이 미묘한 마음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포착하여 욕망이 싹트는 것을 제거하고 일상시의 행동을 규칙적으로 엄숙하게 하는 것이 목표. 구체적으로는 '격물치지(格物致知, 모든 사물에 관하여서 그 理를 철저히 밝히고 지식을 널리 갖는 것)', 즉 인간의 마음의 움직임에 관해서는 인·의·예·지라고 하는 4단(四端)에서 볼 수 있는 이, 윤리로서는 군신·부자·부부·장유·붕우에 있어서의 의·친·별·서·신의 오륜(五倫)의 이, 그 밖에 일상생활의 모든 행위규범을 나타내는 덕목의 이, 자연계에서의 법칙성 등을 파악·고찰하는 것이며 유교 고전의 독서가 이 단계에서 중시된다. 이 거경과 궁리를 병용하여 수행을 쌓으면 우주의 궁극원리가 체득된다는 것이며 이것이 주자의 실천론이다.

주자가 실제로 생각한 '이'는 위에서 살핀 대로 자연현상의 법칙성이라고 하는 새로운 요소도 있으나 결국 인의예지(仁義禮智)라는 4덕, 의친별서신(義親別序信)이라는 오륜, 그 밖에 유교 경전에 담겨진 덕목 등, 요컨대 공자가 '예'라는 말로 일괄한 현실에 이미 있었던 전통적인 의례·윤리·습속·제도 등 모든 관행(慣行)이 지니는 본연의 모습이었다.

"존재하는 것은 진리다"라고 하는 헤겔식 현상긍정의 사고방식과 통하는 것으로 주자는 현실의 체제가 지니는 가치체계, 즉 예교질서(禮敎秩序)를 직관적 원리로서 재확인했던 것이다.

왕양명[편집]

王陽明(1472∼1528)

명(明)나라 때 정치가. 유교 사상가. 양명학의 시조이며 또한 심학(心學)의 대성자. 이름은 수인(守仁)이며 양명은 호. 부친은 명나라의 고급관료로서 양명 또한 과거에 급제하여 관리가 되기 위해 어릴 때부터 당시의 교학(敎學)인 주자학을 배웠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체험으로써 사상을 배우려는 태도였기 때문에 주자학에 회의를 품고 도교·불교에도 관심을 가졌으나, 도교의 깊이가 없는 사상, 불교의 출가주의(出家主義)를 납득할 수 없어 그는 결국 유교에 복귀했다. 그 뒤 지방관으로 각종 직을 역임하거나 무인으로서 반란을 진압하면서 구도적인 사상 형성의 길을 걸었다.

왕양명 관계의 문헌은 <왕문성공 전서(王文成公全書)>에 수록되어 있으며 <전습록(傳習錄)>·<주자만년 정론(朱子晩年定論)>·<대학고본(大學古本)>은 그의 사상을 알기 위해서는 매우 중요한 저서이다.

왕양명의 사상에서 주도동기(主導動機)가 되는 것은 인간의 자연적 심정에 대한 신뢰의 정조이다. 주자학에의 회의에서 출발한 그의 사상도 사상의 전체적 구상, 즉 사상의 범주라는 점에서는 도달한 최종단계에서조차 주자의 사상에서 크게 넘어서지 못했다.

그러나 왕양명이 주자학과는 다른 심학의 대성자, 양명학의 시조로 숭앙받은 것은 단적으로 말하면 양자의 인간의 '마음'을 파악하는 방법에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주자의 경우는 분석적이며 왕양명의 경우는 직관적이었다.

주자는 인간의 마음을 성(性<本性>:理)과 정(情:현실의 마음의 작용)으로 나누고, 정은 성(性)을 현혹시킬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서 성(理)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정을 규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여기서는 현실의 인간 심정은 마이너스로 평가되고 있다. 왕양명은 그것을 플러스로 평가한다.

인간(人間)의 자연적 심정에는 '양지(良知)'가 갖추어져 있으며 그러므로 인간은 자연의 심정에 의거하여 행동한다면 성(理)을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양지라는 것은 <맹자>의 "깊은 궁리를 하지 않고서도 알 수 있는 것이 양지이다. 2, 3세의 어린이도 부모를 사랑한다는 것을 모르는 아이는 없다"라는 글에서 볼 수 있는 말이며 왕양명은 그것을 하늘(天)이며, 천리(天理)인 동시에 인간의 마음의 본체로서 시비선악의 판단을 갖추고 더구나 선천적으로 구비되어 있는 사려(思慮) 이전의 것, 자연스런 것, 오늘날의 말로 한다면 '양심'에 가까운 것으로서 받아 들이고 있다.

여기에서 그는 자연의 심정 그대로 양심에 따라 살 것을 주장하며, 이는 주자의 실천론에 비하면 자유로운 해방감이 수반되는 것이었다.

캉유웨이[편집]

康有爲(1858∼1927)

19세기말 청조(淸朝)의 혁신에 노력한 국가유교 말기의 사상가이며 손문(孫文) 또는 홍수전(洪秀全:太平天國의 영도자)의 출신지에 가까운 광동성 남해현(廣東省南海縣)의 지주 출신 증국번(曾國藩)이나 이홍장(李鴻章) 등의 중체서용론(中體西用論:本體는 中國이나 西洋近代文明을 섭취하여 實用한다는 사고방식)에 의한 양무운동(洋務運動)의 노선을 더욱 추진시켜 정치제도 자체까지도 전통적인 황제와 관료에 의한 절대주의적 지배체제로부터 입헌군주정치 체제로 변혁시켜 부국강병을 목적으로 한 변법자강(變法自疆) 운동을 지도했다. 이 운동은 한때 성공하여 젊은 황제 광서제(光緖帝)를 중심으로 여러 제도의 개혁이 착수되고 입헌정치의 시행이 기도됐으나 보수파의 반격으로 실패(戊戍政變, 1898), 백일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캉유웨이는 그후에 일본·동남아시아·유럽 각지를 전전하며 변법유신(變法維新) 운동을 계속했다. 중국에 신해혁명(辛亥革命, 1911)이 일어나자 귀국하여 공교운동(孔敎運動) 및 제정(帝政) 복귀 운동을 일으켰으나 모두 실패, 뜻을 이루지 못한 채 70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상활동은 자기의 생애를 건 변법운동을 유교에 바탕을 두려고 한 것이었다. 저작으로는 <예운주(禮運注)>·<신학위경고(新學僞經考)>·<춘추동씨학(春秋董氏學)>·<공자개제고(孔子改制考)>·<대동서(大同書)> 등이 있다.

국가유교는 그 역사의 처음과 끝을 <춘추공양학(春秋公羊學)>으로 장식한다. 유교를 체제교학·국가유교의 지위로 올려놓은 동중서(董仲舒)는 춘추공양학의공자개제(孔子改制) 사상(孔子가 後世를 위한 制度를 준비했다고 하는 사고방식)을 근본으로 했다. 캉유웨이가 서양문명의 충격으로 개변(改變)을 강요당한 절대주의 체제를 입헌군주 체제로 변혁시키려 할 때 그 사상적 근거로 삼은 것도 이 공자개제 사상이었다.

또 캉유웨이는 이 '변혁의 유교'라고 할 수 있는 춘추공양학의 대선배로서 동중서에게 경의를 표하고 공양학을 배우려면 동중서를 통해 배워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공양학은 역사관에서 서로 달랐다.

동중서는 '삼통설(三統說)'이라고 하는 순환사관(循環史觀)에 의거하여 한왕조의 체제확립을 정당화했으나, 캉유웨이는 세상은 난세(亂世)의 세상 → 소강(小康)의 세상 → 대동(大同)의 세상 등 3단계로 진화한다는 진화사관에 입각하고 있다.

영원히 올바르고 시간을 초월하며 타당한 원칙을 변경할 필요가 없으며, 다만 약간의 수정을 가한다는 입장과 체제변혁, 즉 원칙에까지 변화를 가해야 한다는 입장 차이가 그들의 사상에 반영된 것이다.

캉유웨이의 유교사상의 특색은 주자나 왕양명을 그대로 지나쳐 유교의 창시자 공자의 사상을 근거로 삼았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춘추공양학은 공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나침반 구실을 했다고 하겠다. 캉유웨이의 공자 이해의 특징적인 점은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공자는 단순한 고대문화의 조술자(祖述者)가 아니라 바로 유교의 창시자라는 점으로, 공자는 백세(百世)를 구제하는 제법(制法)의 왕, 백세의 교주이며 <춘추>뿐만 아니라 6경(六經:易·書·詩·樂의 各經과 <禮記>·<春秋>)도 공자의 저술이라고 하는 점, 둘째 태고(太古)의 일은 알지 못하지만 태고의 요·순이 만들었다고 하는 문명이 찬양됨은 주대(周代) 말기의 공자나 제자백가(諸子百家)가 각각 자기 교설의 정당성을 나타내기 위해 옛시대에 가탁(假託)했기 때문이며 그들은 태고때부터 있었던 것을 계승·발전시키는 자세를 취했다고 하는 점, 셋째 공자가 <춘추>를 저술함에 있어서 자기 자신이 직접 보고 알 수 있었던 시대, 들어서 알 수 있었던 조부(祖父) 시대, 전해 듣고(傳承) 알 수 있었던 증조부나 고조부 시대의 셋으로

시대 구분을 하고 그 시대에 따라 쓰는 방법을 바꾸었으나 거기에는 깊은 뜻이 있다는 것이다. 공자는 이 <춘추>의 필법으로 사회가 난세→승평(升平:泰平)의 세상 → 태평(太平)의 세상으로 발전함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승평(升平)의 세상은 <예운(禮運)>(禮記의 1편)에서 볼 수 있는 소강(小康)의 세상이며, 태평의 세상이란 대동(大同)의 세상, 곧 이상사회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공자는 이상사회 출현의 필연성을 제시했다고 하는 점이다.

그리고 <예운(禮運)>의 소강·대동의 기술(記述)을 힌트로 하여 캉유웨이는 글로벌(global)한 규모로 대동(大同)의 세상, 곧 이상사회가 지니는 본연의 모습을 생각했다.

그것은 모든 고뇌가 없는 사회이며 구체적으로는 국경·계급·인종차별도 없는 사회, 남녀동권이며 가족제도는 전폐되고 생산분배 기구는 공영(公營)으로 된 사회를 말한다. 즉 그것은 선인(仙人)·부처(佛)·보살(菩薩)의 극락세계로서 유교도 이미 소용없게 된 천유(天遊)의 사회라는 것이다.

캉유웨이의 사상에서 (1) 공자를 지나치게 존숭(尊崇)하는 나머지 공자의 유교 창시를 노자나 그 밖의 제자백가(諸子百家)의 경우와 같은 동기, 같은 목적, 같은 방법으로 했다는 것, (2) 그럼으로써 태고의 문명을 전하는 것이라 하여 절대적인 가치가 주어져 있었던 유교경전의 신성성(神聖性)을 감소시켰다는 것, 그리고 특히 (3) 대동의 이상 사회에서는 유교가 주장하는 예교(禮敎) 질서가 소멸하고 있다는 것 등은 2000년을 두고 체제교학이었던 국가유교의 자기붕괴 내지 자기소멸을 나타내는 것이다.

캉유웨이는 생전에 대동사상(大同思想)을 공표하지 않았다. 자기의 시대를 난세→소강(小康) 사회의 전환기로 보고 거기에 대동의 이상사회의 비전을 제시함은 혼란을 초래할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소강 사회에서의 중국은 영국이나 근대 일본과 같은 입헌군주제에 의해 부국강병(富國强兵)을 꾀하고 국제사회에서 독립을 보존할 것, 또한 구미(歐美) 열강이 강자가 된 정신적 원동력은 그리스도교이며 중국에서 이 그리스도교 구실을 하는 것은 '공자교'이므로 이를 입헌군주제로 변혁한 중국의 국교로 삼을 것 등이 당면과제라고 캉유웨이는 생각했다. 그러나 중국근대화의 격동은 신해혁명(辛亥革命), 5·4운동(五四運動)으로 나타났으며, 이 정세를 어디까지나 혼란으로 보았던 캉유웨이는 보수반동(保守反動)의 거두로 간주되어 마침내 그의 대동사상조차 자기의 반동성(反動性)을 숨기는 위장(僞裝)에 불과하다고 비판받기에 이르렀다.

사 상[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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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 중국인이 직관 내지 신앙이나 혹은 관념조작으로 파악한 우주의 참된 실재(實在). 머리 위에 퍼져 있는 천(天:하늘)의 인상에 자연현상의 주재자라고 하는 직관이 결합되고 또한 인간의 도덕적 반성이 투영(投影)되어 천(天)의 신앙은 형성되었다.

의지나 목적을 지닌 인격신(人格神), 자손에게 은혜를 베푸는 조상, 우주의 근원 내지 창조자, 인간이나 만물 속에도 그 본성(本性)으로서 깃들이는 신 내지 법칙, 비인격적인 참된 실재, 운명, 인간의 감각을 초월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우주의 근원 등 그 이미지는 다양하나, 우주의 궁극적 실재이며 인간의 의미 세계의 근원, 곧 윤리도덕의 원천이라고 하는 점은 일관되고 있다. 천(天)은 '상제(上帝)'·'천제(天帝)'라고도 부른다. 도가(道家)의 '도(道)'나 주자가 파악한 '이(理)'도 이 전통적인 천(天)의 신앙을 기초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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禮 중국의 전통적인 종교의례·윤리·습속·제도 등의 각 관행(慣行)을 말한다. 고대의 주왕조(周王朝) 체제 확립에 공이 컸던 주공(周公)이 만든 것, 또는 대성(大成)시킨 것이라고 하나 실제로는 중국 고대에서 현실적으로 왕이나 제후의 궁정이나 촌락공동체 및 가족공동체에서 행했던 관행을 제도화한 것이다. 오랫동안 유교에 의해서 수용(受容)되어 중국인 사회질서의 감각을 규정했다.

유교는 이 전통적 관행에 담겨진 의의를 생각하고 또한 그 정리를 행하여 덕목(德目)의 형태로 하고 사람들에게 그 실천을 설유했다. 예교(禮敎)라고 불리는 것은 그 때문이다. 공자는 예를 실천하는 인간의 주체성에서 인간다움을 발견하고 이를 '인(仁)'이라 하여 예의 실천이 인간으로서의 조건이라고 생각했는데, 예는 인간행동의 규범인 동시에 중국인의 인격형성의 소재(素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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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에서 인간성을 뜻하는 말. 또한 유교윤리의 최고 덕목. 인의 원래 뜻은 남자다움이라든가 풍채가 훌륭하다든가 하는 것이었으나 예를 실천하는 인간의 주체성에 인간다움, 즉 인간의 덕성을 발견한 공자가 그것을 '인(仁)'이라고 부른 뒤부터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맹자는 또한 이 인간의 덕성은 우주의 주재자인 천(天)이 인간의 마음 속에 선천적으로 깃들인 것으로 생각하고 천의 신앙과 결부시켜 인간의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려고 시도했다. 이 맹자의 인에서 볼 수 있는 초월자(超越者)와 인간의 덕을 관계짓는 사고방식은 결국 유교사상의 전통이 되었다.

주자는 초월적 원리를 '이(理)'로 하여 인격적 요소는 배제했으나 그것은 인간을 비롯하여 만물 속에도 깃들여 '성(性, 本性, 본연의 모습)'이 되었다고 생각하여 그 실현을 실천의 목표로 삼고 있다.

성인[편집]

聖人

유교에서의 성인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예의 창작자라는 의미이다. 성인이란 예를 만들어 인류에게 문명을 가져다 주는 사람으로 해석한다. 예는 원래 고대 중국 사회에서 행해졌던 전통적인 모든 관행을 정리하고 제도화한 것으로서 그 기원은 분명치 않다.

유교에서는 예(전통적 문명)는 전설상의 제왕(帝王)인 요·순과 하왕조(夏王朝)를 창시한 우(禹)·은(殷)의 탕왕(湯王), 주의 문왕·무왕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전해졌으며, 주공(周公)에 의해 대성되었다.

그것은 그 후 공자·맹자에 의해 후세에 전해져 오늘에 이르렀으며 이러한 사람을 작례성인(作禮聖人)이라 하고 숭앙했다. 둘째는 예의 체득자(體得者)라는 의미이다. 예는 사회의 여러 관행을 제도화한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사람이 행해야 할 길(규범)이라는 성격이 있다. 그리고 성인들은 예를 만들었기 때문에 예의 체득자였다는 것이며 예의 체득을 목표로 하는 유교의 이상적 인격상(理想的人格像)이 되기에 이른다. 거기에서 성인은 '학(學:禮의 학습·실천)'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 생겨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