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종교·철학/세계의 종교/유 태 교/유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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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사[편집]

십이종족[편집]

十二種族

<구약성서>에 의하면 야곱의 열두 아들이 이스라엘 제부족(諸部族)의 조상이 된다. 이집트에 들어간 것도, 모세의 영도하에 탈출한 것도, 그리고 시나이에 있어서 신과 계약을 맺은 것도 모두 이 열두 종족 전체가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12종족은 루벤, 시므온, 레위, 유다, 이사갈, 제부룬(이상 정처(正妻) 레아의 아들), 요셉, 베냐민, 단, 납달리, 아셀, 가드이다. 다른 자료에 의하면 레위가 없고 요셉족은 므낫세, 에브라임으로 갈라진 것으로 되어 있다. 이 경우에 있어서 레아의 셋째 아들로서 레위 대신에 가드가 들어앉게 된다.

<구약성서>에 기술(記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집트를 탈출한 주체는 요셉족을 중심으로 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일부였다고 추정된다. 그들은 사막 한가운데에서 모세의 지도 아래 야웨신의 계시(啓示)를 받아 야웨 신앙을 지니고 가나안의 땅에 침입한 것이다.

성지(聖地) 시켐에서 이미 에르 신을 중심으로 종교연합(宗敎聯合)을 형성하고 있던 레아의 여섯 종족과 접촉하였을 때에 그들은 야웨신의 신앙을 장려하고 여기에 야웨신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종교연합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때에 여섯 종족은 레아와 연결되지 않은 다른 부족을 더하여 12종족으로 확대되고, 오늘날에 알려진 12종족 설화(說話)의 배경이 된 것이다.

출애급[편집]

出埃及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들의 거류지(居留地)였던 이집트에서 압정(壓政)에 못 이겨 탈출하여 지중해 동쪽 해안의 가나안 땅에 이주한 역사적 사실을 말한다.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은 메소포타미아로부터 가나안 지방으로 이동하였던 것이나 요셉족을 중심으로 한 일부가 힉소스 지배(BC 1730∼BC 1570)의 이집트에 들어가 나일강의 델타 지역 동쪽에 머물러 살게 되었다. 그 뒤 람세스 2세(BC 1290∼BC 1224) 때 토목사업(土木事業)에 혹사를 당하여 심한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 이 때에 이스라엘 민족해방의 지도자로서 나타난 사람이 모세였던 것이다. <출애급기(出埃及記)>에 의하면 형인 아론(Aaron)의 협력을 얻어서 이집트로부터의 탈출을 기도하여 이집트 군사의 추격을 벗어나서 성공하였다. 성서에는 이 과정에 있어서 신이 보여준 여러가지 기적을 기록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홍해(紅海)를 건널 때 바닷물을 양쪽으로 갈라지게 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무사히 건너가게 한 다음 뒤따라 밀어닥친 이집트 군대에게 물을 다시 합치게 하여 익사시킨 기적은 민족의 뇌리에 길이 새겨진 일이었다. 그 후의 수십년간 사막에서 생활을 하는 동안 그들은 모세의 지도를 받게 된다. 시나이산에서 모세는 '십계(十戒)'로 상징되는 종교적·도덕적 지침(指針)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제시하고 야웨신과의 특수한 관계(계약)를 맺게 된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십계(<출애급기> 20:1∼17, <신명기(申命記)> 5:6∼21) 자체가 모세에 의한 것인지 아닌지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나, 그 중심사상이 그에 의하여 발원(發源)된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그것은 일신교적 신관(一神敎的神觀)과 그것을 기초로 한 윤리적 성격에 두드러진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유태교, 그리스도교에 연결되는 사상의 원류(源流)가 되었다.

모세는 가나안의 옥토(沃土)를 바라보면서 죽었으나 그의 뒤를 이은 여호수아의 영도하에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민족을 정복하고 그 땅을 점령하였다. 또한 이집트에 들어가지 않은 동포들과 합쳐서 야웨신을 섬기는 신앙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대동단결을 이룩하였다.rembrant

사사[편집]

士師

가나안에 정착(定着)한 이후 왕국 성립까지의 기간 동안 활약한 지도자들을 말한다. 그들은 평상시에 농경(農耕)과 목축(牧畜)에 종사하였던 지방토호(地方土豪)였으나 선주민(先住民)과의 투쟁이나 외적의 습격에 의한 군사적·정치적 위기에 처하였을 때 이스라엘 민족을 구출하기 위하여 일어섰던 카리스마적 영웅들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전이스라엘의 지배자는 아니고, 어디까지나 국지적(局地的)·부족적(部族的), 그리고 일시적 지도자들이었다. <사사기(士師記)>에 들어 있는 이러한 여러 영웅들에 관한 이야기 중에서도 특히 삼손과 데릴라의이야기는 유명한 것이다.

다윗[편집]

David(재위 BC 100∼BC 960)

이스라엘 민족사상 제2대 왕. 베들레헴에 살던 유다족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40년간 이스라엘을 통치하였다. 궁정(宮廷)의 한 시종무관(侍從武官) 이었던 청년 다윗은 사울왕의 질투를 피하여 몸을 감춘 사이에 남방부족(南方部族)의 신임을 얻어 사울이 죽은 뒤 헤브론 지방에서 유다족의 왕위에 오르게 된다.

수년이 지난 뒤에 사울가(家)의 세력이 쇠약해지자 북방의 여러 민족에 군림(君臨)하는 왕권을 휘어잡고 전 이스라엘 민족의 왕이 되었다. 그는 블레셋 종족을 격파하고 그들의 위협을 제거한 뒤 예루살렘에 수도(首都)를 정하고 '계약의 상자'를 안치(安置)하여 이곳을 왕국의 정치적·종교적 중심지로 삼았다. 한편 인근 여러 도시를 병합 또는 정복하여 아카바만(灣)으로부터 유프라테스강 상류에 이르는 사상 최대 왕국을 이룩하였다. 내정에 있어서도 뛰어난 솜씨를 발휘하였는데, 관료제도(官僚制度)를 실시하여 군사권을 장악하였다. 다윗은 그 뒤를 잇는 모든 왕들의 모범과 상징이 되었으며, 메시아도 이 계보(系譜)를 이은 것으로 되어 있다.

사울[편집]

Saul(재위 BC 1020∼BC 1000)

이스라엘 민족 최초의 왕. 베냐민족 기시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생애를 전하는 <사무엘서(書)>는 자료상으로는 서로 엇갈리고 모순되는 점이 있으나 왕으로 선출된 직접적인 원인으로 이스라엘이 외적의 침략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군사적·정치적 지도자를 필요로 하였던 점을 들 수 있다.

선출에 있어서도 카리스마적 지도자로서 사무엘의 종교적 권위에 의존하였던 것도 인정할 수 있다. 왕으로서의 사울은 블레셋 종족을 위시하여 인근 제민족을 격파하고 민중의 기대에 잘 부응하였다. 그러나 강력한 블레셋인으로부터 최종적인 승리를 얻어내지는 못하였다. 얼마 뒤에 종교적 지도자인 사무엘과의 사이에 심각한 불화가 생겨 그의 지지를 잃게 된다. 만년(晩年)에 숙적(宿敵)인 블레셋군(軍)과의 길보아 싸움에서 패전하여 그의 아들들은 전사하고 사울 자신도 부상하여 자결하고 만다. 적들이 그의 유해를 성벽에 달아매어 놓았으므로 다윗은 '슬픔의 노래'를 불러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Jonathan)의 죽음을 애도하였다고 한다.

솔로몬[편집]

Solomon(재위 BC 961∼BC 922)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 태어난 외아들로, 다윗왕의 후계자로서 약 40년 동안 이스라엘 민족을 통치하였다. 솔로몬의 업적은 그의 부왕(父王)이 착수한 사업을 발전·완성한 것이다. 그는 인근 여러 민족을 제압하고 국내에 있어서는 상비군(常備軍)을 두어 방비를 튼튼히 하고 통상과 상업을 일으켜 나라를 부강하게 하였다. 또한 큰 토목공사를 종종 일으켰다. 그 중에서도 다윗이 소원하였으나 실현시키지 못하였던 야웨신의 신전(神殿)을 두로의 왕인 히람의 도움을 받아 예루살렘에 완성하였다. 이것은 예루살렘 신전에 야웨신을 제사지내는 의식(儀式)을 집중시키는 계기가 되어 이스라엘 종교사상 커다란 의의를 갖는다. 그가 일으킨 큰 토목공사와 사치스러운 낭비생활은 민중에게 무거운 세금을 강요하게 되고 이에 대한 불만은 그가 죽은 뒤 왕국이 분열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사무엘[편집]

Samuel

사사시대(士師時代) 말기로부터 왕국시대 초기(기원전 2세기 후반)에 활약하였던 종교적·민족적 지도자. 당시 블레셋 사람에 의한 거듭되는 침략은 이스라엘을 매우 괴롭혔으며, 드디어는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적 지주(支柱)라고 할 수 있는 '계약의 상자'조차도 빼앗기게 되었다. 사무엘은 이러한 불행을 개탄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격려, 고무하여 승리를 쟁취하게 하였다. 만년에 이르러 그는 민중의 강력한 요청에 못이겨 싫어하면서도 베냐민족 출신인 젊은 사울을 왕으로 선출하여 이스라엘에 새로운 체제(體制)를 가져오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남유다 왕국[편집]

南Judah王國

솔로몬이 죽은 뒤 그의 아들 로호보암에 의하여 계승된 왕국으로서, 삼왕조(三王朝) 21대 335년간(BC 922∼BC 587) 지속되었다. 영토는 다윗·솔로몬 시대의 수도인 예루살렘을 포함하는 남쪽 지방으로서 북왕국(北王國)에 비하여 유목적(遊牧的)·보수적 성격이 강하여 그들과 반목(反目)하며 지냈다. 기원전 8세기 후반에는 여러 차례 아시리아의 침공을 받았으나 곧잘 이를 막아내어 나라를 지켰다. 기원전 7세기 말에는 영주(英主) 여호수아가 출현하여 예언자적 정신으로 야웨 신앙의 순수화를 도모하여 예루살렘 신전에 예배를 집중시킴으로써 종교사상 공헌한 바가 컸다. 기원전 6세기 초에는 바빌로니아 제국(帝國)의 침략이 심해져서 드디어 느브갓네살에 의하여 기원전 587년에 멸망하였다.

북이스라엘 왕국[편집]

北Israel王國

수도 예루살렘과 유다족을 중심으로 한 남부의 세력에 반대하여 북부 10부족을 규합, 독립한 왕국으로 약 200년간 지속되었다. 왕조(王朝)의 교체가 빈번하여 정정(政情)이 불안하였다. 벧엘 이북을 영토로 하고 오므리 왕조 시대에 남쪽 왕국의 수도 예루살렘에 대항하기 위하여 수도 사마리아를 건설하였다. 남부에 비하여 땅이 비옥하였으므로 농경적 성격(農耕的性格)이 강하고 종교적으로도 토착종교 또는 이민족(異民族)의 신앙이 상당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기원전 722년에 앗시리아에 의하여 멸망되었다.

족장[편집]

族長

부족(部族) 또는 씨족(氏族)의 지배자로, <구약성서>의 <창세기>에 나오는 이스라엘 민족의 선조(先祖)들을 말한다. 협의(狹義)로는 특히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지칭한다. 이들은 각 부족의 명칭임과 동시에 그 부족 지도자의 개인 이름이었다고 생각된다. 우가리트, 마리, 누주 문서(文書)들이 발견되어 중기 청동기 시대(中期靑銅期時代, BC 2000∼BC 1500년경) 고대 오리엔트의 모습이 밝혀짐에 따라 「창세기」에 묘사된 부족장 시대의 내용이 이 시대의 사회습관이나 고유명사(지명·인명)를 반영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들 족장들에 관한 전설은 단순한 신화가 아니라 어떠한 역사적 사실과 더불어 민족의 기억 속에 전해진 것으로서 신학적·사회적·역사적 관심에 따라서 차츰 도태되어 현재와 같은 형태를 갖추게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들의 종교는 '아브라함의 신' 따위와 같이 개인의 이름과 결부되어 있는 것이 특색이다. 이것은 농경문화 속에서 생겨난 가나안의 신들이 토지와 결부되어 표현되고 있는 것과 비교하여 커다란 대조를 이루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베두인[편집]

Bedouin

'사막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낙타·양·산양을 유목(遊牧)하면서 살던 아랍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이스마엘의 자손들이라고 자칭하면서 짐작컨대 아라비아 반도의 북부 사막지방에서 형성되어 오랜 옛날부터 이미 이집트에서 시리아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살고 있었다. 천막생활을 하면서 풀 있는 곳을 찾아 사막의 여기저기를 이동하였다. 때로는 생명의 원천인 물을 둘러싸고 부족 사이에 심각한 싸움을 벌이기도 하였다. 아라비아 사막의 대부분을 지배하였던 이 베두인은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하는 목초지(牧草地)와 여행자, 사막 주변의 부족들을 약탈하여 그들의 생활을 꾸려나간 것으로 유명하다. 이러한 약탈적 성격(掠奪的性格)은 현재까지도 하나의 사상으로서 그들 속에 흐르고 있다고 한다.

가나안[편집]

Canaan

이집트와 소아시아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지중해 동해안 지방을 지칭하는 명칭으로서 오랜 옛날부터 쓰여졌다. 또한 <구약성서>에는 요단강의 서쪽 지방을 일반적으로 지칭한다.

이 지방에 사는 가나안 사람들은 셈족의 한 분파(分派)로서 정복자인 이스라엘 민족보다 우월한 고도의 문화를 지니고 농경에 필요한 기술을 그들에게 가르쳐주었다. 동시에 가나안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다산(多産)을 상징하는 여러 신에 대한 신앙이 이스라엘 민족 속에 침투해 들어가서 심각한 종교문제가 되어 때때로 예언자들의 비판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바빌로니아의 유폐[편집]

Babylonia-幽閉

남유다 왕국이 멸망하고 사회의 지도적 입장에 있던 여러 사람들이 대부분 바빌론에 억류되었던 역사적 사건을 말한다. 신(新) 바빌로니아 제국(帝國)의 느브갓네살은 기원전 598년에 이어서 기원전 587년에도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이를 완전히 멸망시켜 버렸다. 이 사건은 두 가지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민족국가가 소멸되고 민족이 그 지반(地盤)을 잃어버린 것과 둘째는 신전이 파괴되어 예루살렘에서 행하여지던 제사의식(祭事儀式)을 중심으로 하던 중교가 변혁을 겪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는 것이다. 기원전 598년에 억류생활이 시작되고 바빌론에서 활약하던 예언자 에스겔은 예루살렘 함락 이후 각 개인의 주체적 신앙을 강조하며 이국 땅에 있는 동포들을 지도하고 격려하였다.

그들은 안식일 율법을 지키고 할례(割禮)를 엄격하게 실행함으로써 그들 스스로를 주위 환경으로부터 구별하고 주변문화(周邊文化)에 흡수 동화되지 않도록 노력하여 선조들의 전통을 끝까지 지켜나가 다음에 오는 시대에 대비하고자 노력하였다. 기원전 538년에는 페르시아 제국(帝國)이 바빌로니아 제국을 넘어뜨림으로써 그들은 고국 땅에 돌아갈 것을 허락받게 되고 신전의 재건과 고국의 부흥(復興)에 힘을 기울였다.

유태전쟁[편집]

History of the Jewish War

유태 역사가 요세푸스(F.Josephus)의 저작. 75년경 아랍어로, 이어 그리스어로 출판되었는데 현재 후자의 것만이 전한다. 모두 7권으로 되어 있으며 1·2권은 시리아의 안티오크스 에피파네스(재위 BC 175∼BC 163)에 의한 예루살렘 약탈로부터 서기 66년 이후 로마에 대한 저항까지 유태민족의 역사를 다마스코의 니콜라우스라고 하는 인물의 자료에 의해 기술한 것이다. 3권부터는 수년간 계속된 대(對) 로마전쟁의 모습을 최후의 마사다성(城)이 함락될 때까지 기술하였다. 이것은 그 자신의 체험과 로마측의 기록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요세푸스는 서기 37년경에 예루살렘의 유서 깊은 사제(司祭)의 집에서 태어나 유태인으로서의 높은 교양을 몸에 익힌 다음 로마에 갈 기회를 얻어 고대 로마의 실상(實狀)을 자세히 알게 되고 아울러 유력한 인사들과 알게 되었다. <유태전쟁>은 로마에서의 반항이 무의미한 것이며 두번 다시 유태인들에게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여진 것이다.

디아스포라[편집]

Diaspora

팔레스티나 이외의 지방에 산재(散在)해 있던 유태민족을 말한다. 다윗, 솔로몬 시대에 무역에 종사하였던 사람들이 이미 외국에 살았다는 기록이 있으나 양적(量的)으로 가장 많았던 것은 아시리아, 바빌로니아의 포로로서 메소포타미아에 억류되었던 경우이다. 이 지방은 그 뒤에도 늘 팔레스티나에서 쫓겨난 유태인들의 피난지였다. 로마 시대에는 유태인의 전통을 보유한 최대 거점(據點)이 되어서 뒤에는 '바빌로니아 탈무드'를 낳게 된다. 이집트에는 옛날부터 어느 정도 유태인들이 살고 있었음을 엘레판틴 파피루스(기원전 5세기의 것)를 통하여 알 수 있다. 또한 기원 전후에는 알렉산드리아에 100만명에 달하는 유태인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지중해 주변의 여러 곳에서도 활약하였으며, <사도행전(使徒行傳)>에 의하면 메소포타미아, 아라비아, 이집트와 더불어 리비아, 키레네, 로마, 크레테 등지로부터 칠주절(七週節)에 모여들어 예루살렘 신전의 유지를 위한 헌금을 하였다고 한다.

예언자[편집]

예언자[편집]

豫言者

이스라엘의 종교에 높은 윤리성을 부여하고 세계종교로서의 그리스도교로 발전하게 한 소지(素地)를 마련한 것은 예언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유목생활로부터 일전(一轉)하여 비옥한 땅에 정주(定住)하게 된 이스라엘 민족은 생활방식으로부터 가치 기준에 이르기까지 유목문화(遊牧文化)와는 이질적인, 그리고 한층 고도의 수준에 있는 농경문화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두 가지 문화의 갈등이 이스라엘에 예언자를 출현시켜 준 배경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스라엘의 종교적 전통이 농경문화에 동화(同化)·흡수되지 않고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예언자의 활약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사무엘기(記)>에는 "오늘날의 예언자(nabi)는 옛날에 선지자(先知者:roeh)라고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선지자는 일반적으로 셈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점장이·마술사를 가리키며 미래의 일, 분실물 또는 감춰진 것을 투시(透視)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이것과는 별도로 같은 <사무엘서>에는 악기를 취주(吹奏)함으로써 황홀경을 조성하여 집단행동을 하는 예언자들에 관한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런 엑스터시즘은 원래 비옥한 땅에서 있을 수 있는 요소의 것이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에게서도 이러한 두 가지 성격을 볼 수 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그들의 성격을 결정지어주는 것은 각 예언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강렬한 영적 체험(靈的體驗)이었다. 예언자의 말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노여움을 샀기 때문에 박해를 받은 일도 흔히 있었으나 강렬한 영적 체험은 이러한 박해로 인한 고통을 물리칠 수 있는 것이었다. 예언자는 사제(司祭)와는 달리 신전(神殿)·교단(敎團)·조직 따위와는 관계없이 완전히 독립된 존재로서 활동하였다. 그들은 신과 이스라엘 민족과의 중개인(仲介人)으로서 신에 대한 신뢰(信賴)를 설교하고 정의를 추구할 것을 권하며 사람들이 저지르는 죄를 지적하여 참회의 결단을 촉구하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비운(悲運)에 빠진 이스라엘 민족을 위로하고 힘을 불어넣어 주어 그들을 위하여 신의 대리자 노릇을 하였다. 이른바 신의 말씀을 전한다는 확신에 의하여 행동한 사람들이었다.

아모스[편집]

Amos

기원전 760년경 북이스라엘 왕국에서 활약한 예언자. 시리아, 이집트 등의 제국(諸國)이 당시 일시적으로 세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남북이스라엘 두 왕국은 영토를 확대하고 국내적으로 경제적 번영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부(富)를 손에 쥔 자들은 거만해져서 가난한 사람들을 학대하고, 지위와 권력을 얻은 자들은 이를 뽐내며 약한 사람들을 경멸하여 국가의 융성(隆盛)에 취해서 신을 망각하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남왕국(南王國) 유다 영내(領內)의 황야에서 양을 치고 있던 아모스는 이러한 사회적 부정과 종교적·도덕적 퇴폐를 신랄하게 규탄하고 하늘의 심판이 반드시 내릴 것을 예언하였다. 아모스에 의하면, 신은 절대적 의지로써 인간을 대하며 일체의 타협을 허용하지 않고 철저히 심판을 행하는 존재였다. 이 심판은 다만 이스라엘에만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인근 여러 나라에도 미치게 되었다. 그의 예언은 북왕국(北王國)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결국 그는 추방되고 말았다.

예레미야[편집]

Jeremiah

기원전 626년에 하늘의 소명(召命)을 받고 그후 약 40년간 활약한 예언자. 예루살렘의 근교(近郊) 아나도테의 제사장 힐기아의 아들로 태어났다. 예언자 중에서 예레미야만큼 인간적인 고뇌(苦惱)를 호소한 사람도 없었다. 하느님의 말씀을 민중에게 전도(傳道)한다는 일은 조롱과 욕설을 스스로 불러들이는 일이고, 예언활동을 그만두려고 하면 신의 말씀이 마음 속으로부터 불과 같이 타올라 억누를 수가 없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신명기(申命記)>의 정신에 따른 여호수아왕의 종교 개혁에 처음에는 호의적이었으나, 이와 같은 제도적인 변혁(變革)이 종교적·사회적 생활의 순화(純化)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히려 그는 예루살렘 신전에 대한 맹목적이고 미신적인 숭배가 진실을 바로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간파하였다. 그가 주장하는 '새로운 계약'이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인들의 완고하고 어리석은 마음에 의하여 깨어진 모세 시대의 계약과는 달리 율법(律法)의 내면화(內面化)·개인화를 주장한 것으로서, 민족 전체가 신을 알게 되는 세계의 실현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엘리야[편집]

Elijah

기원전 9세기 중엽에 북이스라엘 왕국에서 활약한 예언자. 당시의 북왕국은 오므리 왕조의 최성기(最盛期)에 해당하며, 아합왕은 페니키아로부터 왕비를 맞아 양국간에 우호관계가 이루어짐과 동시에 경제적·정치적인 이로움이 많았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페니키아의 종교가 공공연히 이스라엘에 침투하게 되었던 것도 또한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예언자 엘리야의 행적 가운데 가장 뚜렷한 것은 이교신(異敎神) 바알과의 대결에 있었다. 갈멜 산상(山上)에서 참다운 신의 증거를 구하면서 바알에 도전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떤 신을 선택할 것인가를 결단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역사적 배경에 지니고 있는 사막문화(沙漠文化)와 가나안의 옥토문화(沃土文化) 사이의 필연적인 대결이었으며, 그 결과 모세 이래의 야웨신앙이 승리하게 되었다. 엘리야의 예언자정신과 그 활동은 그후 이스라엘의 종교사상에 등장하는 일련의 예언자들의 선구(先驅)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사야[편집]

Isaiah

기원전 8세기 후반 남유다 왕국에서 활약한 위대한 예언자. 예언의 내용은 <구약성서>의 <이사야서(書)> 1∼39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당시 팔레스티나는 때때로 아시리아의 침략을 받아 다마스코(BC 734)에 이어 북이스라엘 왕국도 멸망하고 말았다(BC 722). 또한 기원전 701년에는 해안지방 여러 도시의 반(反)아시리아 동맹에 참여한 유다도 예루살렘이 곧 함락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었다. 이러한 정치적인 국가적 위기에 처한 남왕국(南王國)의 위정자들이 외국의 힘에 의존하여 나라의 안전을 도모하려고 부심(腐心)하는 것을 보고 신에 대한 믿음의 결여, 인간의 힘을 과신하려는 생각을 통렬히 비판하고 신의 심판의 말을 전도하였다. 그러나 그는 장남에게 '남은 자는 돌아올 것'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과 같이 아직도 장래에 희망을 걸고 있었다.

그의 사상의 특징은 야웨를 성스러운 신, 초세계적(超世界的)인 신으로서 파악하고 이 신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강조한 데 있었다.

느헤미야[편집]

Nehemiah

페르시아 궁정(宮廷)에서 벼슬살이하던 유태인. 기원전 445년에 고국의 황폐를 전해 듣고 페르시아왕의 허가를 얻어 유다 지방의 총독(總督)으로서 예루살렘에 부임했다. 많은 방해와 싸우면서 성벽을 완성하고 사마리아의 세력을 배제하여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 데 힘썼다. 부채(負債) 면제 등으로 경제적 불평을 해소하는 데 노력하고 신전봉납물(神殿奉納物)의 규정과 안식일율법(安息日律法)을 엄격하게 지키도록 하며 다른 민족과의 결혼을 금지하는 등 유다의 재건에 진력(盡力)하였다.

에스라[편집]

Ezra

기원전 5세기 바빌론에 이주한 유태인의 한 사람으로서 느헤미야에 뒤이어 예루살렘에 돌아가 고국의 종교적 지도자로서 활약하였다. 사제(司祭) 집안에 태어난 그는 '하느님의 율법학자(律法學者)'로서 '모세의 율법'을 널리 펴고 정치적·경제적으로 비운에 빠진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신앙심을 일깨워주었다. 그 내용은 오늘날 알려진 <모세 5경(五經)> 혹은 그 일부일 것으로 추정된다.

다니엘[편집]

Daniel

기원전 6세기 초의 예언자.

<구약성서> <다니엘서(書)>의 중심 인물. 바빌론에 유폐당한 포로의 한 사람으로서 신(新)바빌로니아제국(帝國)의 느브갓네살 왕의 신임을 얻어 중용(重用)되었다. 이민족들 가운데에서도 야웨신을 충실히 섬기고 율법을 굳게 지켜 몸을 깨끗이 건사하고자 노력하였으므로 신이 그에게 특별한 은총을 내린 것이라고 하였다. 그의 지혜는 왕의 꿈을 해석하고 수수께끼 문자(文字)를 해독(解讀)할 때에 발휘되었다.

페르시아왕 다리우스도 사자굴에 던져졌지만 다니엘이 신의 가호에 의하여 난경을 이겨낸 사실을 보고 야웨신을 인정하고 영토 내의 여러 민족에게 조칙(詔勅)을 발하여 이 신을 받들 것을 권장하였다고 한다. 이 다니엘이 역사적 인물인지 아닌지는 확실치 않다. 이 이야기는 시리아왕 안디옥스 4세(재위 BC 175∼BC 163)의 박해 아래 신음하던 유태인에 대하여 경건한 자의 구원과 승리를 확신시켜 주기 위하여 포로시대의 역사적 배경을 빌려 쓰여진 것이다. 사자(死者)의 부활에 관한 사상이 다니엘의 환상 속에 언급된 것은 사상사상(思想史上) 주목할 만하다.

제2 이사야[편집]

第二Isaiah

<이사야서> 40∼55장의 예언 중에 담겨진 무명(無名)의 예언자. 바빌로니아 제국으로부터 페르시아 제국으로의 과도기에 있어서 유폐의 땅 바빌론에서 예언활동을 하였다. 제2 이사야의 예언은 기원전 538년을 경계로 하여 그 내용이 둘로 나뉘어진다. 예언활동을 시작한 기원전 546년경에는 바빌로니아의 국운(國運)이 기울어 멸망이 시간문제였으나 예언자는 새로운 힘 키로스에 의한 유태인 해방과 유태인을 통하여 야웨신에 의한 세계구제(世界救濟)의 희망을 설교하였다. 야웨는 전세계를 지배하는 유일신(唯一神)이며 우상(偶像)은 힘없는 존재에 불과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포로 신세가 된 이스라엘인들에게 위안과 격려를 해주었다. 기원전 538년에는 바빌로니아 제국이 멸망하게 되었다. 그러나 키로스를 야웨신이 선택한 인물로 보고 그의 정치적 권력에 건 기대는 배반당하고 말았다. 이에 예언자는 <주의 종의 노래(52:13∼53:12)」에서 보는 바와 같이 야웨신에 의한 세계의 구제는 정치적으로 무력한 한 사람의 속죄(贖罪)의 죽음에 의하여 이룩될 수 있는 것으로 확신하게 되었다.

에스겔[편집]

Ezekiel

기원전 598년 제1회 유폐 때 바빌론에 이주하여 그곳에서 소명(召命)을 받고 활약한 예언자. 그의 예언 내용은 <에스겔서>에 담겨 있다. 나라가 망하게 되는 기원전 587년까지는 백성들의 죄를 책하고 예루살렘에 심판이 내릴 것이라고 에언하였으나 예루살렘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포로로 된 백성들을 위로하고 복지(福祉)에 대한 예언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이스라엘을 괴롭힌 여러 민족에 대한 심판, 분산된 이스라엘 민족 집결(集結), 다윗의 자손에 의한 통치, 신전의 회복과 이를 중심으로 하는 이스라엘의 재건을 강조하고 있다.

다시 그는 조상의 죄가 자손에 미친다는 예로부터의 생각을 부정하고 죄를 범한 개인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최초로 '개인'이 자각되어진 주목할 만한 일이다. '계약(契約)'을 전제로 하여 성립한 국가가 붕괴되었기 때문에 율법(律法)에 의한 이스라엘의 재건을 원하게 되었던 것은 '개인'의 자각과 더불어 유태교 교단(敎團)의 발전상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편집]

Job

<구약성서> <욥기(記)>의 주인공. 고결한 인격자로서 신앙심이 두텁고 그릇된 점은 찾아볼 수 없는 인물로 설정되어 이야기가 진행된다. 하늘나라에서 하느님과 사탄이 의인(義人) 욥을 놓고 내기를 하였다. 비참한 환경에 빠져도 신에 충실할 것인지 아닌지를 시험해보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욥에게 여러 가지 어려운 시련이 내려지게 된다. 고통에 시달리는 욥을 보고 인과응보사상(因果應報思想)을 갖고 있는 친구들은 욥이 지은 죄의 대가라고 단정한다. 욥은 이를 부정하고 옳은 자가 왜 고난을 당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끊임없이 의문을 품고 그 부조리에 저항한다. 그 결과 의인(義人)에게 은혜를 베풀고 악인(惡人)을 벌하는 것만이 신이 아니고 인간사회의 조리와 부조리를 초월한 존재로서의 신을 파악한 신앙의 경지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 이야기의 성립은 아랍어(語)의 영향이 확실하고 유태교적 인과응보사상이 확립되어 있는 점, 신앙의 개인적·주체적 자각 등으로 보아서 유폐 후 상당히 지난 뒤인 기원전 5∼3세기경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후의 유태교[편집]

이스라엘 공화국[편집]

Israel共和國

1948년 5월 14일에 독립한 입헌공화국(立憲共和國). 국토면적 2만 770㎢. 건국 초에 77만여 명이던 인구는 세계각지로부터 귀환한 유태인을 받아들여 현재는 약 583만 8천 명에 달한다. 그 중에서 10% 가량은 아랍을 포함한 비(非)유태인이다. 종교적으로는 90%를 차지하는 유태인의 유태교 이외에 바하이교도(敎徒) 약 200명, 두루우즈교도 약 2만 4000, 그리스도교도 약 5만, 나머지는 이슬람교도이다. 특히 국토개발을 열심히 추진하여 집단농장과 같은 '키부츠', 소토지소유자(小土地所有者)들로 구성된 협동조합적(協同組合的)인 '모샤브 오브딤'이 곳곳에서 의욕적인 개척사업을 벌이는 동시에 귀환 이민의 수용(受容)을 위하여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공업 발전도 서서히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사해(死海) 남부로부터 산출되는 칼리, 인산염을 원료로 하는 화학공업은 괄목할 만한 발전을 가져왔다. 화학비료는 과일과 함께 이스라엘의 주요한 수출품이 되었다.

1897년에 열린 제1회 시오니스트 회의에서 민족의 부활을 선언한 이래 급속히 조국재건운동이 활발해지게 되었는데 제2차 세계대전중 유럽에 있어서의 유태인 대학살을 계기로 더욱 강화되었다. 영국의 위임통치가 끝남과 동시에 팔레스티나에 거주하던 유태인은 벤구리온(David Ben­Gurion)을 지도자로 하여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어서 일어난 팔레스티나 전쟁에서 주위를 둘러싼 아랍 제국의 침공을 물리치고 독립을 지켜 유엔의 중재(仲裁)에 의하여 아랍 여러 나라와 휴전협정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아랍 제국과의 긴장상태는 개선되지 않고 1956년에는 수에즈(시나이)전쟁, 1967년에는 중동전쟁이 일어났으며, 지금까지도 팔레스타인을 둘러싼 PLO단체와의 분쟁은 끊이지 않고 있다.시오니즘

Zionism

유태 민족의 향토(鄕土) 건설을 목적으로 하는 운동. 1897년 바젤에 세계 각지로부터 유태인 대표들이 모여서 제1회 시오니스트 회의가 열렸다. 이것은 2년 전에 이미 저서(著書) <유태인의 국가>에서 유태인 자신의 국가를 소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주장한 바가 있는 헤르츠르 (T.Herzr, 1860∼1905)가 중심이 되어 이끈 것이다. 이 회의에서 채택한 강령(綱領)은 "시오니즘은 공적(公的)이고 또한 합법적으로 인정된 국가를 유태인을 위하여 팔레스티나의 땅에 건설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하였다. 시오니스트라 함은 위의 강령 취지에 찬동하고 그 목적을 위하여 연간 일정액의 기부금을 바치는 유태인을 가리킨다. 그들이 지향하는 국가가 세속적인 의미에서의 국가인가 또는 문화적·정신적 거점으로서의 국가인가에 대해서는 내용적으로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유럽 각지에서 2년마다 한 번씩 열리는 시오니스트 회의를 중심으로 이 운동은 열심히 계속되어 1948년 이스라엘 공화국 탄생의 원동력이 되었다.

안네의 일기[편집]

Diary of Anne Frank

나치스에 의한 인종주의(人種主義)의 희생이 된 한 유태인 가족의 소녀 안네 프랑크(Anne Frank, 1929∼1945)가 자기가 숨어 살던 집에서 적은 2년 남짓에 걸친 일기. 독일에서 상업에 종사하던 프랑크가(家)는 유태인에 대한 압박이 심해져서 1932년 암스테르담에 이주한다. 그러나 네덜란드가 독일군에 유린당하게 되자 그들 일가(一家)는 시내에 있는 사무실의 골방에 숨는다. 다만 유태인이라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사회적으로 일체의 자유를 박탈당하고 숨을 죽이면서 공포에 싸인 나날을 보내게 된다. 발각되는 날이면 그대로 죽음에 이르는 극한상황(極限狀況)이었다. 이와 같은 특이한 상황 아래서 빚어지는 압박감은 인간의 초조감·추악상을 드러낸다. 다정다감한 열세 살의 소녀는 이러한 것들을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면서 좌절을 이겨내고 불굴의 희망과 이상을 스스로 불태워 간다. 불행히도 이 은신처는 발각되고 안네는 언니에 뒤이어 강제수용소에서 병사(病死)하고 만다.

드레퓌스 사건[편집]

Dreyfus事件

프랑스 제3공화국을 뒤흔든 간첩사건. 참모본부 소속 포병대위 드레퓌스(Alfred Dreyfus, 1859∼1935)는 프랑스 육군의 군사기밀을 독일 측에 누설했다는 혐의로 군법회의에 의하여 종신금고형(終身禁錮刑)을 선고받았다. 이것은 에스테라지 소령의 필적을 그의 것으로 오인한 데서 생긴 일이었다. 더구나 유태인이라는 것이 그에게는 더욱 불행이었다. 반(反)유태주의의 신문들은 그를 매국노(賣國奴)로서 맹렬히 공격하게 되었다. 한편 진상을 조사한 군정보부(軍情報部)와 무죄를 믿고 있던 가족의 노력에 의하여 재심청구의 여론이 높아짐에 따라 특히 에밀 졸라 같은 작가는 <르 로르> 지상(紙上)에 대통령에 대한 공개장을 발표하고 군부의 부정을 규탄하였다. 세론(世論)은 양분(兩分)되어, 자유주의적 지식인과 공화주의자에 대하여 군부와 이를 지지하는 우익정치가·반유태주의자·가톨릭교회가 대립하여 정치투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결국 재심을 요구하는 드레퓌스파(派)의 승리로 1899년에 그는 석방되고 그 뒤 공소심(控訴審)에서 정식으로 원심(原審)을 파기하게 되었다.

팔레스티나 전쟁[편집]

Palestine戰爭

이스라엘 공화국과 아랍제국간에 있었던 전쟁.

1948년 5월 14일 영국의 신탁 통치가 끝나자 이를 계기로 하여 유태인은 팔레스티나의 중요지점을 장악함과 동시에 텔아비브에서 이스라엘 공화국 독립선언서를 내외에 발표하였다. 이에 아랍 5개국은 북·동·남 삼면으로부터 팔레스티나를 향하여 진격, 이스라엘은 독립을 걸고 아랍 측은 '질서회복'을 내걸고 격전을 벌였다. 장비와 벙력 면에 있어서는 아랍 측이 압도적으로 우세하였으나 전국(戰局)은 이스라엘 측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이스라엘은 만일 패한다면 그들의 조상의 땅인 팔레스티나를 잃어버리는 것이 되므로 배수의 진을 치고 싸웠다. 이에 유엔은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하고 1949년 2월 이후 이스라엘과 아랍 각국 사이에 개별적으로 휴전협정을 체결케 하는 데 성공하였다. 휴전 경계선이 설정되고 양측 대표와 국제연합 대표로 편성된 공동 휴전감시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이 과정에 있어서 국제연합의 조정관(調停官) 펀치 박사의 공적이 컸다.

반유태주의[편집]

反猶太主義

유태인에 대한 증오와 혐오(嫌惡)를 품고 있는 사람들의 입장을 말한다. 생리적으로 혐오감을 갖고 단지 유태인과의 교제를 피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으로부터 극도의 증오감에서 계획적으로 전(全)유태인을 말살하려는 부류에 이르기까지 그 정도는 여러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고대에 있어서는 주로 종교적 이유로 말미암아 그들에 대한 반감(反感)이 높았으나 중세 유럽에 있어서는 여기에 경제적 요인이 추가되었다. 그들은 대부분 거주국의 땅에 정착하지 못하고 오로지 상업과 금융 면에 종사하면서 그 사회에 침투하여 들어갔던 것이다. 19세기의 동유럽에 있어서는 거주국에 동화하지 않는다는 사회적 원인으로 유태인 대량학살이 행해졌다. 반유태주의가 가장 노골적으로 표현된 예는 나치스에 의한 유태인 절멸정책(絶滅政策)이었다. 이것은 유태인종 열등론(劣等論)에 기초를 둔 것으로서 문화 창조에 기여하는 아리아인종의 순수한 혈통을 지켜야 한다는 명목으로 인류 역사상 최대의 오점(汚點)이라고 할 행위로까지 발전하였다. 희생자는 약 600만 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현대 유태교 제파[편집]

現代猶太敎諸派

현재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유태인은 전 유태 인구의 약 50%를 차지하고 있는데, 그들은 종교적으로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즉, 전통주의파(Orthodox)·중도파(Conservative)·개혁파(Reform)의 세 가지이다. 이들은 유태교가 갖는 민족성과 근대사회에서의 적응을 둘러싸고 발생한 것이며, 유럽에 있어서의 유태교의 상황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유태교는 오랫동안 '종교'와 '민족'이라는 숙명적인 과제를 짊어지고 왔다. 민족종교로서의 유태교를 신봉하면서 민족 성립의 기반(基盤)인 국토를 잃어버리고 세계 각지에 흩어져서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세기초 독일에 거주하는 유태인의 일부가 독일 국민임과 동시에 유태교도이고자 하는 혁신운동을 일으켰다. 예배에 독일어를 사용하고 팔레스티나에서의 민족 재건을 기원하는 구절을 기도서(祈禱書)에서 삭제하는 등 유태교로부터 민족성을 배제하고 하나의 수수한 종교로 만들자는 것이었다. 이 운동은 전통을 중시하는 사람들로부터 강력한 반발을 샀으나 당시 크게 일어나고 있던 유태교 연구의 르네상스, 즉 유태교학(猶太敎學)의 적극적인 지지를 얻게 되었다. 한편 근대화가 늦어진 동유럽쪽에서는 유태인들이 전통주의에 젖어 있어서 외부의 영향을 외면한 채 독자적인 생활권(生活圈)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 지역에 있어서는 '민족'이 '종교'보다 한층 더 중요시되었었다.

과거 3세기에 걸쳐 신대륙 미국에서는 끊임없이 유태인을 받아들이고 있었으며, 독일에 있어서의 유태인 사회의 봉건성(封建性)에 반발한 사람들이 19세기 중기부터 자유 천지에서의 개혁을 추진하기 위하여 미국에 건너가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교의(敎義)의 근대화, 유태교 교회의 조직화를 진행하고, 동시에 유태인의 미국화(美國化)에 노력하였다. 이리하여 개혁파가 생겨나게 되었다. 1885년의 피츠버그 회의에서 채택되었던 선언(宣言)은 혁신성(革新性)에 있어서 독일에서의 개혁운동을 한층 앞지른 것이었다. 유태인 사회는 특정한 민족과 특수 관계를 갖지 않는 하나의 종교공동체로 규정되었다. 또 '탈무드(Talmud)'의 율법을 초월하여 <구약성서>, 특히 예언자 정신으로 되돌아가 안으로는 신앙의 순수화를, 외적(外的)으로는 사회정의의 추구(追求)를 지향하였다. 중도파(中道派)는 이 개혁파로부터 분파된 것이다. 현대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유태교를 지향하면서 유태교의 전통과 민족과의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전통적 관습이나 시오니즘 사상에 대한 개혁파의 부정적 태도에 반발하여 결집(結集)된 것이다. 또한 반유태주의의 압박을 피하여 19세기 말에는 동유럽의 유태인들이 대거 미국에 이주해 갔다. 그들은 모두 전통적인 지반 위에서 자란 사람들이었으므로 미국에 건너가서도 여전히 동유럽에서의 생활태도를 유지함으로써 전통주의파(傳統主義派:Orthodox)의 주체를 형성하였고, 개혁파의 과격한 노선을 따라간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으나 전근대적인 중세적 율법주의(中世的律法主義)에도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중도파를 흡수하여 그들을 미국화하는 데 공헌했다.

사 상[편집]

야웨(여호와)[편집]

Jahweh(Jehovah)

이스라엘의 민족신(民族神). 오랫동안 '주(主)'라고 불리어 왔으므로 본래의 이름은 잊어버리게 되고 근대에 이르러 여호와라고 오독(誤讀)되게 되었다. 야웨란 말의 뜻은 헤브라이어의 '존재(存在)한다'·'있다'의 어근(語根)과 관련이 있으며 '실재(實在)하는 것' 또는 '존재케 하는 것'이라는 뜻일 것이다(<출애급기> 3:14). 모세가 처음으로 이 이름을 밝혔으나 이것은 족장시대(族長時代)의 신의 이름과 같은 것임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야웨신은 사막의 신, 유목민(遊牧民)의 신이었다. 사막을 둘러싼 자연환경은 인간생활에 가혹한 것이었고 따라서 자연의 품 속에 안겨 있다는 느낌을 주지는 못하였다. 사막에 있어서의 유일한 생활양식은 유목이었다. 이 유목생활은 일정한 토지에 정착하지 않는 생활이다. 이들은 부족의 지배자가 갖춘 지도력 아래 견고한 단결을 유지하면서 생활하였다. 야웨신이 비옥한 토지의 생산을 주관하는 바알이나 아스타르테 같은 신과는 달리 지극히 관대하지 못하고 투쟁적이며 또 어떤 특정한 토지에 결부되지 않고 오히려 야웨신을 숭배하는 자들과 결부되어서 표현되고 있음은 사막적 환경(沙漠的環境)과 관계가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과의 관계를 보아도 야웨신은 유일성(唯一性)이 현저한 특징을 이루고 있다. 모세의 십계(十戒)는 이스라엘 민족이 오직 야웨신만을 받들 것을 주장하였다. 이 경우에 있어서 타민족(他民族)과의 관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모스의 예언에 따르면 야웨신은 자유로이 타민족도 그의 지배하에 두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야웨신이 세계적인 유일신(唯一神)으로 된 것은 바빌론 유폐기(幽閉期) 이후의 일이다. 제2 이사야는 이 세상에 야웨만이 오직 신이며 다른 신들은 무력한 존재에 불과하다고 설교하였다. 이러한 사상은 다수 예수에 의하여 지상에 있어서 인류는 모두 평등하며 유일신의 은혜를 받는다는 사상으로까지 제고(提高)되었다.

메시아[편집]

Messiah

헤브라이어로 '머리에 기름 부어진 사람'이라는 뜻으로 나중에는 '구세주(救世主)'를 나타내는 말이 되었다. 왕이나 종교 지도자가 그 지위에 취임할 때 머리에 기름을 부어주는 습관은 옛날부터 이집트, 시리아 지방에 널리 알려진 일이었다. 이들은 신으로부터 특별히 선택되어 그 직무를 위하여 성스럽게 구별되어진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구약성서>에는 이스라엘 및 유태의 제왕(諸王)·대제사장(大祭司長)과 때로는 예언자들도 기름이 부어졌었다.

이스라엘 민족은 끊임없이 외적(外敵)으로부터 위협을 받아 결국에는 나라를 잃게 되는 고통스러운 역사를 걸어왔는데, 이러한 체험으로부터 한 사람의 구제자(救濟者)를 대망(待望)하는 사상이 길러지게 되었다. 이 사상에 의하면 이상적(理想的)인 왕이 탄생하여 이스라엘의 국난(國難)을 타개하고 이 세상에 평화와 번영을 가져다 준다는 것이다. 이 경우에 있어서 이상적인 왕의 모습은 언제나 다윗을 염두에 두고 생각되었었다. 사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제2대 왕이 되어 국가의 기초를 튼튼히 한 영주(英主) 다윗에 대한 기억은 뚜렷이 그들의 뇌리 속에 늘 살아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구세주는 다윗의 가계(家系)에서 나올 것으로 기대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다윗적 메시아와는 전혀 다른 것으로서 '고난(苦難)의 종'이라는 것이 있다. 괴로움을 당하고, 번민하며, 박해를 받고, 상처를 받으며, 죽음을 당하고 죄인으로 묻히면서 운명에 순종하는 그는 고뇌(苦惱)를 한 몸에 지니고 신과 인간 사이에 서서 중간 역할을 하여 이 세상을 죄로부터 구하고 속죄하는 자를 말한다. <이사야서> 53장에 표현된 이 메시아상(像)은 뒤에 예수의 생애와 연결지어 해석되었다.

<구약성서>의 미래에 메시아에 관한 예언이 예수에 의하여 구현된 것으로 믿게 되어서 그리스도교 사상 중에 커다란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구약성서>가 완성된 뒤 유태교에 있어서는 묵시문학적 2원론(默示文學的二元論)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천지창조 이전부터 존재하는 천상(天上)의 메시아가 생각되기도 하였으나 한편에서는 로마에 대한 저항운동의 투사(鬪士) 바르 고호바가 메시아로 불린 것과 같이 차츰 높아가는 민족주의와 결부된다. 그러나 135년의 봉기(蜂起)에 실패하고 또 묵시문학적 사상경향이 훗날 유태교에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메시아 사상은 유태교 중에 중요한 요소가 되지 못하였다.

아브라함[편집]

Abraham

이스라엘 역사상 족장(族長)의 한 사람. 그의 가족은 남바빌로니아의 우르 지방에 거주하였는데, 대략 기원전 1900년대에 북서(北西) 메소포타미아의 하란에 이주하였다가 다시 아브라함 대에 이르러 시리아의 땅을 거쳐 팔레스티나에 이주, 남부의 네게브 지방에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그에 관한 <창세기>의 기술(11:27∼25:11)은 고대 문헌 자료와 고고학적 답사 결과가 풍부해짐에 따라서 상당히 많은 부분이 실증되었다. 그에 관하여 일관해서 주장되어 온 것은 신에 대한 절대적 복종(絶對的服從)이었다.

<신약성서>에도 그는 '신앙 깊은 사람'으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육체적으로는 이스라엘 민족의 아버지이나 종교적으로는 모든 신앙자(信仰者)의 아버지라고 하였다. 소명(召命), 약속을 기다리는 태도, 이삭의 희생 등에서 보이는 모든 시련(試練)을 신앙심에 의하여 극복해 가는 그의 모습은 모든 그리스도교인의 모범이 되었다.

아담과 이브[편집]

Adam-Eve

제2의 창조 이야기(<창세기> 2:4 후반, 3:24)에 나오는 인류 최초의 남녀. 하느님은 흙(adamah)을 빚어 남자인 아담을 만들고 생명의 입김을 불어넣어 에덴 동산에 살게 하였다. 또 아담의 늑골 한 개를 뽑아 여자를 만들어 그의 아내로 삼았는데, 바로 이브이다. 이브는 교활한 뱀의 유혹에 빠져 금단(禁斷)의 열매를 따먹고 아담에게도 먹게 함으로써 하느님의 명령을 어기게 된다. 이를 알게 된 신은 인류의 조상을 낙원으로부터 추방하여 죽음의 운명과 살아 있는 동안 땀을 흘려 먹을 것을 얻지 않으면 안 되도록 하였다. 이 아담과 이브의 전설은 인간이 신에 의해 창조된 것이나 명령을 깨뜨림으로써 죄를 범하여 하느님을 배반하게 되었다는 성서의 인간관(人間觀)에 기초를 둔 것이다. 뒤에 이것은 '원죄(原罪)'의 문제로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교의적(敎義的)으로 전개되었다.

천지창조[편집]

天地創造

<구약성서> <창세기> 1장 1절∼2장 4절 전반(前半)에 기술되어 있는 이야기. 이에 의하면 하느님은 천지창조 이전에도 존재하여 천지 만물을 6일간에 걸쳐 창조하였다고 한다. 제1일에는 빛이 있으라 하여 빛을 만들고, 제2일에는 천공(天空), 제3일에는 땅과 식물(植物), 제4일에는 천체(天體), 제5일에는 물고기와 새, 제6일에는 기타 동물과 이를 지배하는 인류를 하느님의 형상을 따서 만들었다. 제7일에는 창조의 일이 완성되었음을 축복하여 휴식하고 이 날을 성스럽게 하였다. 이 이야기는 본문비평적(本文批評的)으로는 제사법전(祭司法典)에 속하며 현재의 형태로 된 것은 대략 기원전 5세기경으로 본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바빌로니아의 천지창조 신화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때 거주하였던 곳의 전설이 민족의 기억 속에 머물게 되고 이것이 그 소재(素材)가 된 것 같으나 창조설화(創造說話)의 구성은 본질적으로 다른 점을 보이고 있다. 바빌로니아 신화의 경우에는 서로 싸우는 여러 신들이 등장하는 데 반하여 구약에 있어서는 일신교적 신관(一神敎的神觀)의 기초 위에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다.

노아의 방주[편집]

Noah-方舟

노아의 홍수 이야기(<창세기> 6:5∼9:29)에 나오는 배의 이름. 인류의 선조들이 나날이 포악해지므로 하느님은 홍수를 내려서 인류를 멸망시켜 버리려 하였다. 다만 정의로운 사람 노아 일가(一家)만이 이 심판을 면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창세기> 6장 14∼16절에 보면 길이 약 135m, 폭 22.5m, 높이 약 13.5m인 이 배는 지붕과 문을 달고 배 안은 3층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선체(船體)는 측백나무로 되고 안쪽에는 아스팔트를 칠하여 굳혔다. 노아는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배를 만들고 가족과 암수 한 쌍의 모든 생물을 싣고 밀어닥친 홍수를 피하였다. 길가메쉬 서사시(敍事詩)의 우트나피슈팀 설화(說話)는 바빌로니아의 홍수 이야기로 알려져 있으나, 내용적으로는 노아의 홍수 이야기와 흡사하다. 노아의 홍수 이야기가 바빌로니아 신화의 영향을 받은 것만은 확실하나 유일신관(唯一神觀)과 윤리적 성격이 후자의 것과는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다.

데보라의 노래[편집]

Debrah-

<사사기(士師記)> 5장 2절∼31절에 실려 있다. 우가리트 문학에서 볼 수 있는 시의 양식과 공통되는 문학적 성격을 갖는 점으로 미루어 이 시가 상당히 오래 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여자 예언자인 데보라와 바라크(Barak)의 지도에 의하여 선주민(先住民)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였을 때에 불리어진 것으로서 주(主)의 찬미로부터 시작하여 싸움의 모습을 노래하고 "주여, 당신의 적은 모두 이와 같이 멸망할 것이며 당신을 경애하는 자는 태양과 같이 힘차게 솟아오르게 하여 주소서" 하는 기원의 말로 끝을 맺고 있다.

바벨탑[편집]

Babel塔

노아의 홍수 후 '시나르의 평야(平野)'에 이주한 사람들은 그 땅에 마을을 건설하고 그들이 다시 흩어지지 않도록 그 상징으로 하늘에 닿을 수 있는 높은 탑을 쌓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본 신은 인간들의 언어를 혼란시킴으로써 이 계획을 중지시켰다고 한다(<창세기 11:1∼9). 이에 따라서 이 도시와 탑을 바벨(혼란이라는 뜻. 또한 도시 바빌론의 헤브라이 명이기도 하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고고학자(考古學者)들은 이 탑을 바빌론의 마르도크 신의 고탑신전(高塔神殿) 지구라트(Ziggurat)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율법[편집]

律法

유태교의 용어로서 <모세 5경(五經)>을 가리키게 된 것은 꽤 오랜 뒤의 일이었다. 원래 율법에 해당하는 헤브라이 말은 지시나 지휘를 의미한다. 구체적인 국면(局面)에 처했을 때 어떻게 행동하지 않으면 안될 것인가를 보여준 것이다. 이것은 신의 명령, 개개 사건의 재정(裁定), 자연계의 질서와 법칙, 제의적(祭儀的) 관습규정 따위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

고대 이스라엘에 있어서 성지(聖地)를 중심으로 12종족의 연합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그들은 일년에 한 번 성지에 모여 야웨신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였다. 이 때 계약에 의하여 맺어진 공동체가 갖는 권리와 의무로서의 율법을 지킬 것이 강조되었었다. 율법은 그의 기원과 형식에 따라 두 종류로 분류된다. 하나는 "살인을 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는 것처럼 확실하게 단언적(斷言的)인 형식을 취한 것으로, 종교적·도덕적 제문제를 규정하고 있다. 기원은 사막시대(砂漠時代)에까지 거슬러올라가며 이스라엘 고유의 것이다.

그 외에 "만일 불이 나서 나뭇단에 옮겨붙고 쌓아놓은 보릿다발 또는 벼와 밭을 불태우게 되면 불을 낸 사람은 반드시 이를 보상(報償)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하여 어떤 사건을 가상하고 거기에 대한 판정(判定)을 내리는 형식으로 표현된 것도 있다. 이것은 고대 오리엔트 제국에 공통된 형식이며,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에 정착한 다음 그 땅에 사는 여러 사람에 의하여 채택된 규정인 것이다. <출애급기(出埃及記)> 20장 22절∼23장 37절에 있는 '계약(契約)의 서(書)'는 이와 같은 두 가지 형식을 갖는 여러 규정을 모은 이스라엘 최고(最古)의 법률집이다.

율법이 개개의 규정으로서가 아니라 객관화되고 통일된 것으로 생각되어진 것은 예언자 예레미아의 <신명기(申命記)>가 나온 때쯤에서부터이다. 그 뒤에 나라가 망하고 국민은 다른 나라에 잡혀가 억류생활을 하게 되자 사람들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의의(意義)를 율법에서 발견하게 되었다. 즉, 신전에서의 제사를 가질 수 없는 그들에게 율법의 준수(遵守)는 구제의 전제로 생각되 었으며, 유태교의 율법주의에 이어지는 사상을 낳게 하였다.

계약[편집]

契約

신이 노아(<창세기> 9:11)나 아브라함(동 15:18)과 계약을 맺은 것과 같은 예가 <구약성서>에는 많이 보인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의 이집트 탈출 이후 시나이 황야에서 모세를 중개로 하여 야웨신과 맺은 계약은 역사적이고 결정적인 의의를 갖는다. 이것은 유목민으로서 조직이 불안정한 집단에 대하여 신에 대한 신앙을 중심으로 하는 계약공동체 성격을 부여하고 이에 의해 민족의 기원(起源)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계약의 내용은, 이스라엘은 야웨를 유일한 신으로 숭배하고 야웨는 이스라엘을 보호하며 이끌어갈 책임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 계약을 맺게 됨에 있어서 이니셔티브는 신에게 있었다(<출애급기> 24장).

신과 이스라엘의 상호관계에 의해 빚어지는 이와 같은 모든 권리와 의무는 율법에 의해 구체화되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율법은 계약을 기초로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계약을 대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태도는 예언자들을 실망시키는 것이었다. 그들은 때로는 신의 가호(加護)를 과신하거나 혹은 야웨신 이외의 신에 접근하여 야웨신을 배반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일들은 예언자들에 의하여 맹렬히 비판되었고 나아가 새로운 조건에 의한 계약의 갱신을 바라게 되었다. 예언자 예레미야에 의한 '새로운 계약' 사상은 모든 사람이 하느님을 알 수 있는 세계의 실현을 소망하였던 것이다.

선민사상[편집]

選民思想

이스라엘 민족은 특별히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민족이라는 사상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인의 신관(神觀)이 보편적으로 됨에 따라서 생겨났고 또 이미 예언자 아모스에 의해서도 이러한 사상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사상이 가장 잘 표현되어 있는 것은 <신명기(申命記)> 7장 7절이다. "그대들의 신 주님은 지상에 있는 모든 백성 가운데서 그대들을 선택하여 주님의 보배로운 백성으로 삼았다"고 한 구절이다. 이것은 선조에 대한 약속을 지키기 위한 것이며 그들에 대한 애정의 표시이기도 하다. 따라서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 명하는 바에 따르는 자에게는 은총이 내리고 미워하는 자에게는 벌을 내린다고 하였다. 그리스인들이 그들 스스로를 헬레네스라 칭하고 바르바로이(異民族)와 구별한 것과 같이 이스라엘 사람들은 타민족을 이방인(異邦人)으로 생각하고 선민(選民)인 자기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것은 민족중심사상(ethnocentrism)의 한 예이다. 국토를 잃고 세계 각지에 이산(離散)된 유태인의 마음 속에는 언제나 이 사상이 들어 있었으며, 그들의 전통을 지켜나가는 힘이 되었었다.

성전류[편집]

모세 5경[편집]

Moses五經

<구약성서> 중에서 <창세기>·<출애급기>·<레위기>·<민수기(民數記)>·<신명기>의 5경(五經)을 말한다. <창세기>는 만물의 기원과 족장(族長)에 관한 전설, 이에 계속되는 <출애급기>는 모세의 지도에 의한 이집트로부터의 탈출과 시나이(Sinai)에의 신의 계시(啓示), <레위기>는 황야의 천막에서 행하는 예배의 규정과 형식, <민수기(民數記)>는 시나이를 출발하여 38년 동안 사막을 방랑한 뒤 요단강 동쪽 기슭에 이르기까지의 역사, 마지막으로 <신명기(申命記)>는 백성들이 따라야 할 신의 의지(意志)를 죽음에 임한 모세의 고별설교(告別說敎) 형식으로 기술한 것이다.

유태인은 이 5경에 들어 있는 주요한 내용을 간추려서 율법(torah)이라 부르고 구약성서의 다른 서(書)보다 한층 더 높은 권위를 부여하였다. 이것들보다 뒤에 성립된 몇 개의 서(書)에는 모세가 율법제정자(律法制定者)로 해석되었고 또 <신약성서>의 저자(著者)들, 요세푸스 등은 오경(五經) 전부를 모세의 것으로 생각하지만 현재의 형태로 정리된 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유폐 이후 기원전 5세기경이었다. 또한 문헌학적(文獻學的)으로는 네 가지 자료가 엇갈리고 있다. 이 네 자료라 함은 야웨에 관한 자료, 엘로힘의 자료, 신명기적 자료(申命記的資料), 제사법전(祭司法典)을 말한다.

앞의 둘은 족장의 역사, 이집트 이주, 이집트 탈출, 가나안 침입에 관한 민족사(民族史)를 하느님의 뜻에 따른 민족구제사(民族救濟史)로서 신앙의 입장에서 파악하였다는 점이 공통되고 있다. 야웨의 자료는 다윗, 솔로몬 시대의 왕국 초기에 남부에서, 아마도 예루살렘에서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엘로힘의 자료는 이보다 늦게 기원전 8세기 중엽 북이스라엘 왕국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뒤에 남왕국(南王國)에 들여와서 전자의 것과 결부된 것이다.

이 두 가지 것과는 별도로 현재의 <신명기(申命記)>의 중심을 이루는 신명기적 자료가 있다. 이것은 기원전 700년경에 성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제사법전은 가장 새로운 것으로 적어도 기원전 6세기경부터 서서히 이루어지기 시작하여 기원전 5세기경에 성립된 것으로 보인다.

탈무드[편집]

Talmud

유태교의 종교적 전범(典範)으로서 구전율법(口傳律法)의 집대성인 미슈나(Mishnah)와 그 주해서(注解書)인 게마라(Gemara)가 합편(合編)된 것이다. 자유스러운 형식으로 주제(主題)에 따라서 5경(五經)을 해석한 구전율법(口傳律法)으로 전해 내려온 것이며, 서기 200년경 예프다에 의하여 편집되었다. 이것은 농업·농산물에 관한 여러 가지 규정, 여성과 혼인에 관한 규정, 민법·민사소송 등에 해당하는 제규정, 봉납물(奉納物)에 관한 제규정, '오예(汚穢)'와 '정결(淨潔)'에 관한 제규정의 여섯부(六部)로 되어 있다. 다음 시대에 출현하게 되는 율법학자는 이 미슈나의 해석과 설명에 전념하여 그 중에서도 미슈나의 속편(續篇)과 외전(外典:바라이타) 등의 사이에 보이는 모순의 해결, 새로운 시대에의 적응 등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 미슈나의 해석을 모은 것이 게마라이다.

<탈무드>는 <팔레스티나 탈무드>·<바빌로니아 탈무드>의 두 종류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전자는 팔레스티나 북부 티베리아에서 활약한 율법학자들의 연구에 의하여 된 것이고 4세기 말경 그리스도교의 정치적·종교적 박해를 계기로 서둘러 편찬된 것이다. 후자는 팔레스티나 유태인들의 피난처이며 특히 나라가 망한 이후 많은 율법학자들이 집결하게 된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미슈나가 성립된 300년 뒤에 율법학자들이 연구한 것들을 편집한 것이다.

시편[편집]

詩篇

<구약성서>에 담겨져 있는 150편의 종교적 서사시가(敍事詩歌). 자연과 역사상에 나타난 신의 영광을 찬미하는 노래, 민족적 비운과 개인의 죄를 탄식하는 노래, 감사의 노래 등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다윗왕이 지은 것으로 되어 있지만 원작자를 규명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어떤 것은 아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도 있으나 대부분 바빌로니아 유폐기 이후에 만들어져 노래집(集)처럼 차츰 정리된 것이 기원전 4세기∼2세기 사이에 신전과 시나고그에서의 예배용으로 서서히 편찬되어 현재의 시편(詩篇)으로 된 것이다.

전도서[편집]

傳道書

<구약성서>의 하나. 인생의 경험에 의하여 체득된 가르침이 지혜문학(智慧文學)의 형식을 통하여 서술되어 있다. 부(富)와 권세와 행복을 추구하는 노고(勞苦)는 사실 모두 허무한 것이라는 회의적(懷疑的)·염세적(厭世的) 사상으로 일관되어 있다.

그러나 결코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인간의 행위에 대한 신의 응보(應報)를 설교한 점에 유태교의 신앙이 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에 권위를 주기 위하여 작자를 솔로몬왕이라고 하였으나 원작자는 알 수 없다. 그리스 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아 기원전 3세기말의 것으로 보인다.

잠언[편집]

箴言

<구약성서> 중의 하나. '야웨신을 두려워함은 지혜에서 비롯됨'이라는 신앙을 기초로 하여, 인생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과 깊은 이해로 얻은 실천적 처세훈(處世訓)을 간결한 언어로 표현하여 일상생활에 필요한 구체적인 지침(指針)을 밝혀주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저자는 솔로몬왕으로 되어 있으나, 하나하나의 개별적인 격언이 구전(口傳)되어 내려와 오랫동안에 걸쳐 모아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저자와 성립 연대는 알 수 없으나 현재의 형태로 편찬된 것은 기원전 3세기 전반(前半)에 된 것으로 추정된다.

아포크리파[편집]

Apocrypha

70인 역(譯) 그리스어로 된 <구약성서>에는 들어 있으나. 헤브라이어 성서에서는 빠져 있는 서(書). 루터 역의 성서에는 '성서의 정전각서(正典各書)와 똑같이 평가할 수는 없으나 읽으면 유익한 것'이라는 표제가 붙어 있다. 일반적으로 다음의 각서(各書)를 말한다. 제1·제2·제3 마카비서(Maccabee書), <제3에스드라서(Esdra書)>(史書), <벤 시락의 지혜>, <솔로몬의 지혜>(교훈서), <바루크서(Baruch書)>, <예레미아의 편지> (예언서),

<마나세의 기도>,

<에스더서의 추가>,

<아사리아의 기도와 삼동자(三童子)의 노래>(正典의 추가),

<토비트서(Tobit書)>와

<유디드서(Judith書)>(소설류) 등이 있다. 이들은 기원전 200년부터 기원후 100년 사이에 모두 만들어진 것으로서, 그리스 사상과 동방의 종교사상에서 강하게 영향을 받았으나 당시 유태교의 역사·문화·종교를 알아보는 귀중한 자료들이며 그리스도교 성립 당시의 사상적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뺄 수 없는 것들이다.

사해문서[편집]

死海文書

1947년 사해의 서쪽 해안에 있는 암굴(岩窟)에서 발견된 고문서(古文書). 깨끗하고 정확한 필체로 헤브라이어로 양피지(羊皮紙)에 쓰여진 것으로, 그 중에는 아람어(Aram語)로 된 것도 포함되어 있다.

이들은 (1) <에스더서>를 제외한 <구약성서> 각권, (2) <토비트서>·<벤시락의 지혜>·<에노크서>·<요벨서> 등 <구약> 외전(外典) 및 위전(僞典), (3) <창세기>·<하박국서>·<미가서>·<나훔서>·<이사야서>·<시편> 등 <구약> 각권의 주해(注解), (4)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종규요람(宗規要覽)·회중규정(會衆規定)·축복의 말·전쟁의 서·외전창세기·감사의 시편 등으로서 다양한 내용이 풍부히 실려 있다. 고문서(古文書)를 소유하고 있던 사람들은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에 걸쳐 와지 쿠므란 근처의 평탄한 지방에서 공동생활을 하고 있던 에세네파(派)의 유태인들이었다. 이 고문서는 <구약성서>의 본문 연구에 대단히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 발생 전후의 유태교를 살펴보는 데 있어서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준다.

의례·파이름[편집]

안식일[편집]

安息日

이스라엘 사람과 유태인들이 갖는 주1회(週一回)의 휴일.'십계(十戒)'는 하느님이 천지창조를 마치고 이레째 날에 휴식을 취한 일과 관련시켜 모든 일을 쉬고 신에 대하여 경건한 마음으로 하루를 보낼 것을 정하고 있다. 유폐생활 때에는 이 안식일을 지킬 것을 특히 강조하였다. 이것은 유태인이 바빌로니아 문화에 동화흡수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기원 200년경에 정리된 미슈나(Mishnah)는 안식일에 금지된 일의 종류로서 39종을 들고 있다(사밧드 7:3).

과월제[편집]

過越祭

이스라엘 민족의 3대 축제 중 하나. 숫염소·숫산양·소 등을 잡아 그 피를 액막이의 표시로 가옥 입구에 있는 기둥과 문지방에 바르고 고기는 요리를 하여 다 함께 회식(會食)을 한 유목민의 습관으로부터 온 것이다. <구약성서>에 있어서의 최고(最古)의 전거(典據)는 <출애급기> 12장 21절 이하에 나오는데, 여기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의 이집트 탈출과 그때에 일어났던 이집트 사람들 가정의 장남을 죽인 사건과 관련시켜 기술하고 있다.

이 해석이 과월제에 대한 그 후의 성격을 결정짓게 되고 이집트 탈출의 기념 축제가 되었다. 또 원래는 전혀 상관이 없는 농경생활의 축제와 결부되어 효모(酵母)가 들어가지 않은 빵을 먹는 습관이 추가되었다.

이 축제는 유폐시대 이후 유태력(曆) 제1월의 14일 저녁부터 1주간 계속된다. 유태인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 축제를 특히 중요시하며, 일정한 방식에 따라 충분히 차려진 식탁을 둘러싸고 각 가정에서 행해진다.

할례[편집]

割禮

바빌로니아인, 아시리아인을 제외한 셈계(系) 제민족 및 이집트인에게 일반적인 음경(陰莖)의 포피절제(包皮切除) 의식이다. 기원적(起源的)으로는 결혼을 앞둔 남성으로서의 생리적 이유, 혹은 사회 성원(成員)으로서의 자격을 얻는다는 의미를 가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구약성서(舊約聖書)>에 있어서는 어느 시기에 생후 8일째 되는 유아에게 시술하도록 개정되어 신(神) 야웨(Jahweh:여호와)와 이스라엘 민족간에 체결된 '계약의 표징'으로 해석되었다.

7주절[편집]

七週節

'수확의 축제'라고도 불리어 새로 수확한 밀로 만든 두개의 빵이 봉헌(奉獻)되는 수확감사제였다. '7주'란 과월제(過越祭)의 첫날 7주 후에 행하여지는 데서 생긴 이름이다. 예루살렘 신전(神殿)이 파괴된 후, 이집트 탈출 후 50일째에 시나이의 황야에서 신(神)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율법을 수여했다(<출애급기> 19:1 이하)는 것을 기념하는 축제로서 역사적 의의가 추가되었다.

가암절[편집]

假庵節

유태력 제7월의 15일부터 7일간 임시로 지은 소옥(小屋)에서 가을의 결실을 감사하는 제전. 예루살렘 신전이 존재하였던 시대에는 이곳에 참례하는 관습이 일반적이었다. 고대 이스라엘에 있어서는 12종족(種族) 종교연합의 천막(天幕) 성소(聖所)에서 해마다 야웨신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여 계약을 갱신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 행사와 가을에 행하여`지는 가나안의 농경제의(農耕祭儀)가 융합하여 가암절이 된 것이다.

예루살렘 신전[편집]

Jerusalem神殿

야웨신에게 봉헌된 신전. 예루살렘 동부의 키드론과 힌놈(Hinnom)의 협곡(狹谷)으로 둘러싸인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다. 신전 건립의 이상은 다윗에 의하여 내걸어졌는데, 이 대사업을 시작한 것은 그의 아들 솔로몬왕이다. 그는 페니키아의 기술을 얻어서 완성시켰다. 형상(形狀)은 장방형(長方形)이며, 상자 모양의 구조물로 안까지의 거리가 약 30m, 폭 10m, 높이 15m의 규모로 추정된다. 이것은 성소와, 계약을 넣어 둔 상자를 안치하는 지성소(至聖所)로 2분되어, 정면에 입구인 전방(前房)이 있고 동쪽을 향해서 건축되었다. 이 신전은 기원전 587년 바빌로니아의 침공(侵攻) 때에 파괴되어 유폐 후 제2신전으로서 재건되었다. 기원전 2세기 시리아의 세레우코스가(家)의 안티오크스 에피파네스는 신전 내에 제우스신의 제단을 세워 마카베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헤롯왕은 기원전 19년에 신전의 개축에 착수, 이방인(異邦人)의 마당, 안마당, 제사장(祭司長)만이 들어갈 수 있는 제사(祭司)의 마당을 구비한 장려(壯麗)한 신전이 되었다.

시나고그[편집]

Synagogue

유태교의 회당(會堂). 팔레스티나뿐만 아니라 유태인이 거주하는 세계 각지에 설치되어 유태교 신앙을 지탱하는 기반이 되었다. 기원은 유폐시대의 바빌론에서 볼 수 있다. 신전의 파괴와 모국(母國)으로부터의 강제 이주(移住)는 지금까지의 신전 제의(祭儀)를 중심으로 한 종교생활을 변경시켰기 때문이다. 그후 시나고그가 어떠한 경과를 거쳐서 발전하였는가는 분명하지 않으나 신약시대에 이미 널리 보급되었고, 유태인의 종교생활에 커다란 감화를 주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랍비[편집]

Rabbi

유태교에서 본래 율법(律法)에 정통한 사람에게 바쳐진 존칭. <신약성서(新約聖書)>에서는 예수는 랍비라고 불리었으며 세례 요한, 율법학자 등도 같았다. <미슈나>를 편찬한 기원 2세기의 랍비 예프다 하나시는 유태교사상 특히 고명하고, 오직 '랍비'라고 할 때는 그를 지칭한다. 현대 유태교에 있어서는 일정한 과정을 종료하고 안수례(按手禮)를 받은 유태교 지도자의 성직명으로 되었다.

에세네파[편집]

Essene派

마카비 시대의 하시딤 유파를 따르던 유태인의 일파로, <사해문서(死海文書)>를 가지고 있던 쿠므란 종단(Qumran宗團)은 이 에세네파(派)에 속한다. 그들은 규율을 중시한 승원적(僧院的) 집단생활을 보내며, 매일 깨끗이 씻고 마음을 바르고 맑게 가지는 행사와 식사 전후에 축복의 기도를 올리는 종단원(宗團員) 공동의 식사 관습이 특히 주목된다. 사상적으로는 하느님과 악마, 광명과 암흑, 진실한 영(靈)과 허위의 영, 육(肉)과 영(靈) 등의 2원론적인 사고방식에서 특징을 볼 수 있으며, 이란의 종교사상의 영향을 받고 있음은 분명하지만 만물은 일체 신의 창조에 의한다는 구약적(舊約的)·유태교적 신(神) 관념의 기초 위에 재구성되어 있다.

기원 70년의 야브네 회의(Jabneh會議) 이후 바리새파(派)가 유태교의 주도적 입장에 선 후로는 거의 소멸하였다.

그들이 유태인, 그리스도교도(에비온派)에게 영향을 준 일은 잘 알려져 있다. 또 8,9세기 카라파(派)의 성립과 모종의 관련을 가지고 있다.

바리새파[편집]

Pharisee派

유태인의 일파. <모세 5경(五經)>의 해석과 율법을 열심히 지키는 일에서 특징을 볼 수 있다. 기원전 2세기 중간쯤 되는 시기, 시리아의 세레우코스가(家)에 대한 저항운동(Maccabee 전쟁)에 가담했던 하시딤에 기원한다. 그들은 정치적으로는 큰 힘을 갖지 못하고 특히 로마 시대에는 소극적인 태도밖에 나타내지 못했으나 종교적으로는 중요한 일파이고, 기원 70년 국가 멸망의 비운 속에서 유태교의 전통을 고수(固守)하였다. 현실의 생활에 전통적 율법을 적응시키도록 노력하였고, <모세 5경>(율법)과 더불어 5경의 자유로운 해석을 주체로 한 구전율법(口傳律法)을 인정하여, 이것에도 모세에 소급하는 권위를 부여했다.

종교적으론 진보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 고대 이스라엘에는 이질적(異質的)인 부활의 교의(敎義)까지도 받아들여 신(神)의 나라의 도래를 대망(待望)하였는데, 그것은 과격파와 같이 힘에 의하거나 묵시문학적(默示文學的)인 계산에 의하지도 않고 어디까지나 신 앞에서 율법에 충실함으로써 실현되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 바리새파는 랍비(Rabbi)의 전통을 만들어내고 오늘날에 이르는 유태교의 기초를 구축하였다.

사두개파[편집]

Sadducee派

유태교 중의 일파. 다윗왕 시대의 대제사장(大祭司長)이던 자도크에서 연유한 명칭이라고 한다. 제사장 출신의 귀족계급에 속하는 사람들로서, 정치적으로 큰 힘을 가지며 바리새파 외의 반대세력으로서 문헌에 나타나 있다. 마카비(Maccabee) 시대(기원전 2세기 중엽) 이전에 이미 존재하였으며, 율법학자들이 만들어낸 구전율법(口傳律法)을 인정하지 않고 성서만을 자구(字句)대로 해석하였다. <사도행전(使徒行傳)>(23:8)에 의하면 부활의 사상을 부정하고 천사와 영(靈)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사상적으로는 보수적이었으나 정치적으로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당시 세계의 주도 세력인 그리스에 접근하였다. 물론 그들의 이러한 태도는 열광적인 유태주의자의 강력한 반발과 박해도 받았으나 때로는 하스몬가(家)의 지배자와 결합함으로써 정치적 권력을 손에 넣기도 했다. 기원 70년 유태인 국가의 멸망과 함께 소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