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종교·철학/세계의 종교/이 슬 람 교/이슬람교
이슬람교의 역사
[편집]이슬람교
[편집]Islam敎
<코란>에 근거를 둔 신앙과 의식을 갖는 종교체계. 유럽에서는 속칭 '마호메트교'라 하고, 동양에서는 '회회교(回回敎)'라고 하기도 한다. 후자의 명칭은 중국의 서역(西域) 지방에 사는 터키계의 회골이라는 민족의 이름으로부터 온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중국에 있어서의 이슬람교는 그들의 종교를 청진교(淸眞敎) 또는 이사란교(伊斯蘭敎)라고 부른다. <코란>에서는 동사(動詞) '이슬라마(신에 자기를 복종시키다)'가 신에 대한 신자의 태도를 나타내어 '이슬람(복종하다)'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이 종교체계를 표현하는 용어로서 부분적으로 확립되어 왔다고 생각할 수 있다. 후세에 와서 이와 같은 종교적 실천면을 나타내는 '이슬람'과 신앙론인 '이만'이 대립되어 신학상의 문제가 되었으나 후자인 신앙론이 전자에 포함되게 되어 교리적으로 해결을 보았다. 근대 서구에서는 흔히 이슬람을 넒은 의미로 해석하여 종교·사회·정치·법률에 걸친 문화적인 복합체로 파악하기도 한다. 이슬람 교도들은 그들 자신을 '무슬림'이라고 부른다.
마호메트
[편집]Mahomet(570∼632)
이슬람교의 예언자. 역사상 마호메트의 존재를 밝혀주는 확실한 근거는 <코란>밖에 없으며, 후대에 와서 형성된 문헌 '하디스'는 신앙 또는 율법상의 마호메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나 이것이 역사적으로 신빙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 여부는 매우 의심스럽다.
<코란>의 계시에 접하기 이전의 마호메트의 생활은 알 수가 없으나 570년에서 580년 사이에 메카에 있는 코레이시족의 하심가(家)에서 출생한 것으로 보인다. 고아가 된 그는 조부인 압둘 무타리브에 의하여 양육되었고 이어서 백부인 아부 탈리브 밑에서 자라게 되었다. 그가 메카에서 상업에 종사하였음은 충분한 가능성이 있으며 사실 <코란>에는 상업용어가 자주 쓰이고 있다. 그가 최초로 신의 소명을 받게 된 것은 615년경, 즉 그의 나이 40에 이르렀을 때인 듯하다. 최초로 신의 계시를 받았을 때 그가 느꼈던 놀라움과 격렬함이 <코란>과 하디스에 나타나 있다. 처음에는 메카의 유력한 사람들로부터 박해를 받게 되면서부터이다. 메카에서는 신도가 증가함에 따라 이에 대한 압박이 차차 커져가고, 초보적인 단계에 있던 교단은 새로운 발전을 위한 전기(轉機)를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이 전기를 마련한 것이 헤지라(Hegira)였다. 이때에 이슬람교는 하나의 교단(종교공동체)으로서 동시에 정치적으로는 하나의 국가를 확립하였다.
마호메트는 종교 교단의 중심인물인 동시에 정치적 지도자였다. 그 시대의 아랍 사회에 있어서 하나의 신흥정치권력은 종교적으로 표현되고 조직되었던 것이다. 그는 만년에 이르러 메카를 정복하고 서부 아라비아에 있어서 가장 유력한 정치세력을 이뤘다. 마호메트의 사회적 역할을 분석하여 보면, 첫째로 그는 선지자(先知者)로서의 자질을 갖추어 사회악의 근원을 종교사상가로서 통찰하는 능력을 보여주었고, 이러한 그의 사상은 <코란>에 적절히 표현되어 있다. 둘째로 그는 한 국가의 지도자로서 실제로 정치를 행하였고 그 후에 급속한 발전을 이룰 국가의 기초를 닦아 놓았다. 이와 같이 그의 예언자적 역할과 동시에 정치적 수완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또한 아랍 민족의 사회에는 메디나 사회가 마호메트를 초빙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종교적 예언자를 어떤 분쟁의 중재자로 삼는 관념이 있었다.
카디자
[편집]Khadijah bint Khwailid( ? ∼619년경)
마호메트의 첫아내. 메카 코레이시족의 부유한 과부로서 상업을 경영하였다. 마호메트전(傳)에 의하면 그는 처음에 그녀에게 고용된 고용인이었는데, 나이가 많은 그녀의 구혼을 받아 결혼한 뒤 경제적으로 윤택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어 종교적 명상에 몰두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슬람교에서는 마호메트가 최초로 신의 계시에 접하였을 때 매우 흥분하고 동요하자 그녀가 정신적으로 뒷받침해 주었다는 것을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다. '헤지라' 3년 전에 죽었다.
아이샤
[편집]'A' ishah bint Abu Bakr(613년경∼678)
마호메트의 여러 처(妻) 중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 뒤에 '칼리프'가 된 아부 바크르의 딸. '헤지라' 후에 결혼생활을 하였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녀는 마호메트의 원정에 동행하였고, 그가 그녀의 불의를 의심하게 되었을 때 알리가 그녀와의 이혼을 주장하여 두사람 사이에 불화가 생겼다고 한다. 마호메트가 죽을 때 그녀의 나이는 18세로, 이미 이슬람 교단에서 중심적인 인물이 되었다. 우스만 살해의 죄를 알리에게 뒤집어씌워 교단의 내분에 개입하였다. 많은 '하디스'에서 그녀는 마호메트의 언행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다.
아부 탈리브
[편집]Abu Talib
마호메트의 부계(父系) 백부. 그 혈연관계는 아랍족의 친족관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그는 고아가 된 마호메트를 키우고 보호하였다. 하디스에 의하면 마호메트는 백부의 대상(隊商)을 따라다닌 것으로 되어 있다. 이슬람교에 개종하였는지 여부에 관해서는 명확치 않으나 메카에서 박해를 받은 마호메트를 보호하여 주었던 것만은 확실한 듯하다. 헤지라의 3년 전까지 살아 있었고 마호메트와 밀접한 생활을 하였다. 알리는 그의 아들로서 '시아파'가 그를 미화(美化)하였으므로 반(反)알리파들은 그가 '지옥에 떨어져 괴로움을 당하고 있을 것'이라는 하디스를 만들어 내었다.
아랍족
[편집]Arab族
이슬람교는 아랍족의 풍토에서 생겨난 종교이다. 아랍족의 이름이 처음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은 기원전 7세기의 아시리아 비문에서 볼 수 있으며, 북부의 시리아 아라비아의 유목민 집단을 가리킨다. 아랍족이라는 말 자체가 유목민을 가리키는데, 아라비아에 인접한 고도의 문명을 가진 정주 지배민족들에 의하여 그 후 수세기 동안 쓰여 왔고, 그리스도와 로마 시대에는 이 말이 지리적으로 더욱 확대된 전아라비아 반도를 가리키게 되었으며, 오아시스의 여러 도시에 사는 정착민들도 포함하게 되었다. 아랍족 자신의 용법으로서 나타나는 것은 남부 아라비아에 있는 기원 전후의 비문으로 유목민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북부 아라비아에 있는 것으로는 기원전 4세기의 나마라 묘비가 있다. 마호메트에게 아랍족이라는 말이 유목민을 뜻하는 것이었으며, <코란>에 있어서도 같은 의미로 한정되어 있어서 메카, 메디나의 도시주민을 아랍족이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도시주민의 언어를 아라비아어라고 부르고 있는데, 여기서 아라비아어의 가장 순수한 형태는 아랍족의 생활과 언어를 충실히 유지하고 있었던 유목민이었다는 생각이 이슬람 시대에 들어와서 가장 유력하게 싹텄음을 알 수 있다. 마호메트가 죽은 뒤 대정복사업에 의하여 유목민이건 정주민이건간에 아라비아의 제종족은 거대한 아랍제국을 건설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아랍족은 오리엔트의 정복자가 되었다. 초기 이슬람 시대에 있어서 이슬람교는 아랍족의 종교였으며 '칼리프'는 아랍족의 수장(首長)이고, 아랍족이라 함은 아라비아어를 말하는 아랍 부족의 자손이며 본인이나 조상이 아라비아 땅에서 태어난 자에 한하게 되었고, 피정복자인 이란인·시리아인·이집트인 등과 구별되었다. 8세기 이후 아랍제국으로부터 초민족적인 이슬람제국으로 발전하게 되고 이슬람교도 아랍적 성격을 탈피하여 보편적 성격을 갖게끔 변화되었다. 경제생활의 발전이 이 변화의 방향을 촉진하게 되었던 것이다. 10세기 이후가 되면서부터 터키계 여러 민족이 이슬람 세계의 정복 왕조가 되고 아랍족은 그 종속자로 떨어져 이들 족속은 터키계 지배자와 구별하게 되었고 아랍족이라는 말은 사회적으로 유목사회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근대사에 있어서 그들에게는 서구적 민족관념이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고, 아라비아어를 사용하는 여러 나라가 영토를 같이하고 언어와 문화가 공통되며 한결같이 정치적 독립을 열망하는 유럽적 의미에 있어서의 통합된 민족이라는 관념이 형성되었다. 오늘날 아라비아 민족의 공간적 넓이를 볼 것 같으면 터키, 이란, 아프가니스탄을 제외한 중근동 일대와 이집트, 북아프리카에 걸치고 있다.
메카
[편집]Mecca
서부 아라비아의 아랍족 순례지이며 대상도시(隊商都市)로서 이곳에서 이슬람교가 발생하였다. 당시의 메카는 인도양과 아프리카 동해안으로부터 지중해세계에 이르는 대상무역의 요충지였으며 중계무역의 독점권을 장악하여 경제적으로 변영을 누리고 있었다. 그 사회상태는 유목민 생활에서 도시 상업생활로 이행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기로서 사회관념상으로는 유목생활적인 이념이 잔존하고 있었다. 코레이시족이 단일종족으로 도시사회를 구성하고 있었으며 그 밑에 몇 개 종족이 나누어지고 코레이시족은 이들 종족의 연합체였다. 동족 집단의 장(長)인 샤이크가 주재하는 동족회의(마지리스)와 동족의 제전(祭典)이 기초가 되어 도시 평의회(마라)와 동족적 숭배대상을 합동으로 모신 공통의 중심적 신전으로 발전하였고, 그 지배세력은 신흥 상업인의 연합에 의한 과두제 형태를 취하였다. 이 상업상의 발전은 결과적으로 종족적 결합력을 약화시켜 부유한 상인들은 자기 종족의 구성체를 돌보지 않게 되었다. 사회적인 긴장은 부자와 가난한 자의 관계이기보다는 고도의 부유층과 그 하위에 있는 종속계층간의 것으로서, 후자가 공동체적 이념의 상실에 대해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고, 마호메트가 이러한 위기감을 품고 있었다는 것이 하나의 사회학설로 되어 있다. <코란>이 고도의 부유층을 비난하고 부(富)와 지식에 의존하려는 태도를 비판하고 있는 점은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라 하겠다. 한편 메카의 상인계급의 상업경험이 아랍족 사이에 높은 수준의 상호협력과 자기억제 능력을 배양하고 뒤에 초기 이슬람이 발휘한 고도의 통치능력을 형성하는 데 이바지하게 되었다.
메디나
[편집]Medina
마호메트의 헤지라 이전엔 '야스리브'라 불렸고 헤지라 이후에는 '예언자의 도시'라고 불리게 되어 이것이 일반적으로 '도시'를 의미하는 메디나로 생략되었다. 메카와는 달리 오아시스 도시로서 야자수와 곡물이 재배되어 이들 농산물이 외부에 나가게 되었다.
사회의 구성은 메카보다 복잡하여 아랍족으로서 카브라지족과 아우스족이 있었고 그 외에 세 종족으로 나누어진 유태교도가 있었다. 마호메트의 '헤지라'에 앞서 아우스족 대부분과 카즈라지족 일부가 서로 싸웠으므로, 마호메트는 이 분쟁에 대한 조정자로서 또한 예언자로서 메디나에 초빙되어, 이 두 종족을 이슬람의 결합 원리에 의하여 통일·연합시켰다. 이 연합은 불안정한 것이었으나 마호메트군(軍)의 메카 약탈에 의하여 메디나 경제가 윤택해져서 이슬람을 지지하게 되었다. 마호메트가 죽은 뒤에도 '정통(正統) 칼리프' 시대의 수도였다. 정치의 중심이 다른 곳으로 옮겨간 뒤부터 이곳은 하디스 학문 형성이 중심이 되었다.
헤지라
[편집]Hegira
마호메트가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한 역사적 사건. 이슬람교의 전설에 의하면 이것은 622년 9월 20일의 일로서 메카를 출발한 날이 아니라 메디나에 도착한 날짜를 말한다. '헤지라'라 함은 본래 혈연·지연관계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키는 것을 의미했으나 이것이 뒤에는 종교적 이유에 의한 이동을 뜻하게 되었다. 이슬람교는 헤지라를 계기로 해서 메카에 있어서의 사적 신앙 단계를 벗어나 하나의 교단을 형성하는 단계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러한 의미로 말미암아 이것이 이슬람교의 역사적 전환점으로서 이슬람교 초기의 교도들에게 인식되어 뒤에 이슬람교 기원(紀元)의 출발점이 되었다(헤지라 기원 원년). 마호메트의 헤지라 때 메카의 이슬람 교도들도 집단적으로 메디나로 이주하게 되었다(하로지룬). 이미 메디나측과는 마호메트와 그의 종교집단을 받아들인다는 협정이 성립되어 있었던 것이다. 메디나측으로서는 메카측과는 달리 다신교를 기초로 하는 기득권이 없었기 때문에 이슬람교를 그들의 정치적·사회적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것으로 수용하기가 쉬웠다. 메디나에서 마호메트에 반대한 사람들은 <코란>에서 '무나휘쿤'이라 하여 경멸적으로 불리고 있다. 반대 이유는 종교적 이유에서가 아니라 정치적 이유 때문이었다.
안사르
[편집]Ansar
헤지라 이후 메디나에서 마호메트와 이슬람교를 지지한 집단. '무하지룬' 집단과 구별하여 붙인 이름으로 <코란>에서는 후자와 같이 그들의 공덕을 기리고 있다. 이들 두 집단간에 존재하는 구별을 없애기 위하여 마호메트는 양자간에 형제관계를 맺게 하려 하였다. 메카가 이슬람에 복종하게 된 뒤 이들 안사르는 마호메트가 메카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우려하였으나, 마호메트는 메디나를 활동본거지로 삼아 그들을 안심시켰다. 마호메트가 죽고 후계자, 즉 칼리프 문제가 일어났을 때 안사르는 그들의 대표자를 옹립하려 하였으나, 교단측에서는 무하지룬에서 칼리프를 세웠다.
무하지룬
[편집]Muhajirun
헤지라 때 마호메트와 행동을 같이한 이슬람교 집단. 헤지라 교우(敎友)는 이들 그룹이었다. 메디나의 이슬람 교단은 무하지룬과 안사르 두 집단의 연합체였으며, 양자의 관계는 초기 메디나 교단이 헌장에 규정되었다. 메디나에서 이슬람 교단의 발전함에 따라 메카로부터 새로운 무하지룬이 부단히 흘러 들어오게 되었다.
이슬람력
[편집]Islam曆
정확하게 말하면 '헤지라력'. 우마르가 칼리프로 있던 시대에 이슬람 교단, 즉 국가의 재정과 세제(稅制)가 발달하여 일부(日附)의 통일이 필요하게 되어 취해진 조치였다. 이 때까지는 연호(年號)가 없었고 각 해에 일어난 주요 사건을 이름붙여 '지진의 해'·'코끼리의 해' 따위로 불렀다. 이슬람력은 헤지라의 해를 기원원년으로 정하고 헤지라의 날로부터가 아니라 헤지라의 해 1월 1일부터 계산한다. 이 이슬람력 1월 1일은 서기 622년 7월 16일에 해당한다. 이슬람력은 태음력(太陰曆)으로서 초생달이 나오는 날을 제1일로 치고 또 하루는 일출이 아니라 일몰과 함께 시작된다. 1년은 354일이고 윤년(閏年)은 355일이며 12개월로 되어 있어 한달은 30일과 29일이 서로 엇갈린다. 1주일은 7일간이고 금요일이 휴일이 되며 이날에 공식적인 예배를 드린다. 시장이 서고 순례와 전투의 중지가 행해지는 신성월(神聖月)은 1월, 9월, 11월, 12월이다. 현대에 와서는 태양력을 일상생활에 채용한 나라들이 많으나 종교행사만은 이슬람력에 의하여 거행한다.
칼리프
[편집]Caliph
마호메트가 죽은 뒤 그의 예언자로서의 기능은 정지되었으나, 교단(敎團)국가 지도자로서의 기능을 계승하는 칼리프(후계자)가 제도화되었다. 마호메트 직후의 4칼리프는 '정통 칼리프'라 불리고 이에 뒤이은 우마이아조(朝)의 칼리프는 세습화되어서 왕권 강화를 가져왔으며, 압바스 왕조의 칼리프들은 이란적 제왕사상(帝王思想)에 의하여 뒷받침된 것이었으나 11세기 이후 북방 왕조의 술탄(sultan)이 되면서 압바스 왕조의 칼리프는 명분을 갖게 되었다. 14, 15세기의 '철학자'는 샤리아에 입각한 권력을 칼리프로 인정하였다. 오스만제국은 1538년 술탄에 칼리프란 정신적 권위를 새로이 더 추가하였다. 이 칼리프의 칭호는 1924년 터키 공화국에 의하여 마침내 폐지되었다.
아부 바르크
[편집]Abu Bakr(572년경∼634)
제1대 칼리프. 마호메트가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고 죽었으므로, 교단 내부에서는 지도권을 둘러싸고 각파가 대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분열을 피하여 '무하지룬'의 장로 아부 바크르에게 여론에 따라 '복종'을 맹세하였다. 그는 시리아와 이라크의 정복사업에 군대를 보내어 동요하는 종족들을 메디나 정부를 중심으로 결속시켰다(재위 632∼634).
우마르
[편집]Umar ibnu'lKhattab( ? ∼644)
제2대 칼리프(재위 634∼644). 초대 칼리프의 지명에 의하여 취임하였고 칼리프의 칭호로 정복군, 즉 '신도군(信徒軍)의 사령관'을 뜻하는 '아미르 알 무미닌'을 사용하였다. 이라크, 시리아를 편입시키고 이란, 이집트에 정복사업을 벌였다. 제도적으로도 아랍제국의 기초를 닦아 놓았다.
우스만
[편집]Uthman b'Affan(574년경∼656)
제3대 칼리프(재위 644∼656). 이 때에 이르러 '무하지룬' 집단과 메카가 항복한 뒤 개종한 구(舊)지배집단인 코레이시족과의 차별이 없어지고 이슬람 이전에 가장 유력하였던 씨족 우마이야가(家)의 대표가 취임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낡은 씨족간의 대립은 정치적 당파의 대립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알리
[편집]'Al
b. Ab
Talib(?∼661)
제4대 칼리프(재위 656∼661). 마호메트의 종형제이며 사위인 가까운 혈연관계에 있었다. 그의 칼리프 취임을 우마이야가(家)에 속한 시리아의 태수(太守) 무아위야가 인정하지 않았는데 이 무아위야군(軍)과의 화의(和議)는 칼리프군 내부에 분열을 가져오게 되어 분리파인 '카리지파'의 손에 살해당하였다. 뒤에 알리는 지지파인 '시아파'에 의해 신격화되고 제1대 '이맘(Imam)'으로 추대되었다.
우마이야 왕조
[편집]Umayyad王朝
무아위야가 알리를 타도하고 661년에 우마이야 왕조를 일으켰다. 초기 이슬람교의 신정체제(神政體制)에서 아랍 귀족이 지배자로 군림하게 되는 아랍왕국(무르크)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수도를 시리아로 옮기고 시리아가 우마이야 통치기의 정치·경제의 중심지가 되었다. 피정복지의 통치기구도 비잔틴의 것을 이용하였다. 종교적 유대관계에 대신하여 아랍의 종족적 결합이 재편성되고, 이슬람 이전의 족장의 권위와 부족의 회의제도가 지배체제로 되었다. 무아위야의 치세(治世)에 있어서 중앙아시아의 헤라드, 카부르, 보하라를 정복하고 북아프리카 쪽에서 서서히 대서양을 향하여 진출하였다.
비잔틴과의 사이에 전쟁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680년 야지드가 즉위하면서 이라크는 시리아의 지배에 대한 불만이 격화되어 알리의 차남인 후세인을 지지하는 운동으로 발전하였으나 후세인이 680년 남부 이라크의 카르발라 전투에서 우마이야 왕조의 군대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이 후세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뒤에는 우마이야 왕조에 대한 종교적 반대 운동이 크게 일어났다. 우마이야 왕조는 683년 무아위야 2세가 죽은 뒤에 아랍족 내부의 대립으로 내란에 휩쓸렸으나 압둘 말리크에 이르러 왕국의 통일을 회복하게 되었다. 우마이야 왕조의 사회에서는 아랍족이 특권계층을 형성하고 이 종족 내에서 출생하지 않은 자는 성원이 될 자격을 갖지 못하였다. 그들 지배계급 주변에는 이슬람 교도이지만 계보상으로 아랍족의 정식 성원으로서의 자격이 없는 '마왈리'가 형성되었다. 이들은 아랍 지배층에 대하여 경제적·사회적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 양자의 구별은 아랍족과 비아랍족으로서의 구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경제적·사회적 종교운동과 결부되어 우마이야왕조에 대한 반대운동이 종교적으로 표현되게 되었다.
또한 정치적인 중심으로부터 소외된 메디나가 이슬람의 학문과 경건주의(敬虔主義)의 중심이 되고 우마이야 왕조에 대항하여 종교적 권위의 보유자로서 인정되었다. 750년에 압바스 왕조에 의하여 우마이야 왕조는 멸망되었으나 그 일족이 시리아를 탈출하여 북아프리카를 거쳐 이베리아 반도(알 안달스)로 건너가서 코르도바를 도읍으로 하여 755년에 지방적인 우마이야 왕조를 수립하였다. 이 지방왕조는 약 300년간 통치하는 동안에 경제적인 번영과 활발한 문화적 활동을 보여주었다.
압바스 왕조
[편집]Abbas王朝
이 왕조에 이르러 아랍족의 특권 신분인 정복자계급의 '아랍 제국'으로부터 피정복민의 이슬람 교도를 참여시킨 보편화된 '이슬람 제국'으로의 역사적인 전환이 이루어졌다.
압바스 왕조를 성립케 한 정치적·사회적 기반으로서는 우마이야 왕조를 해체케 한 '마왈리' 운동, 이에 결합된 '마호메트의 가계', 즉 '압바스가(家)'의 계보에 속하는 '하심가'에 동족적인 카리스마를 인정한 시아파 종교운동, 이에 더하여 이슬람의 '수나' 확립을 추구하는 메디나의 법학자들의 종교적 움직임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압바스 왕조는 권력을 잡자 그들의 지지자였던 시아파를 제거해 버렸다. 수도를 시리아로부터 이라크로 옮기고, 통치기구는 사산 왕조의 이란 제도를 재편성한 것으로, 칼리프가 이란적인 성계(聖界)와 속세를 통치하는 군주가 되었고 그 밑에 관료와 서기가 제도화되었다. 이 왕조의 칼리프인 하룬의 통치시대에는 국운이 융성하여 그의 아들 마문(813∼833) 치하에서 그리스 철학서의 아라비아어 번역사업이 장려되어 이슬람 문화와 과학의 개화를 보게 되었다.
셀주크 왕조
[편집]Seljuk王朝
터키계 정복 왕조. 이들의 조상 구즈족(族)은 790년을 전후로 하여 압바스 왕조의 동쪽지방에 들어와 이슬람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들의 수령 토그룰 베그가 동부 이란에 지배권을 확립한 뒤 11세기 중반기에는 칼리프의 수부(首府)인 바그다드를 장악하여 스스로 술탄이라 칭하였다. 뒤를 이은 알프 아르슬란의 치세에 시리아·팔레스티나를 파티마 왕조로부터 탈취하였다. 또 비잔틴으로부터 애나톨리아 반도의 대부분을 점령하였다. 그의 아들인 말리크 샤아의 통치하에 국가체제가 확립되고 이에 이슬람 제국의 대부분이 단일의 군사적 술탄 아래 통일을 이룩하게 되었다. 이 왕조의 제도는 이란의 관료제도를 많이 도입하였다. 11세기 후반에 재상 니잠 알 물크가 '봉건제도'적 체제를 이루어 놓았다. 종교적으로는 이 시기에 왕조에 의한 종교제도의 재편성이 있었고 신학교가 설립되어 정통파 법학자(행정관)의 중심기관이 되었고 아시아리파(派)의 신학·법학이 보호를 받아 부흥하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7이맘파(派)'의 '이스마일파'가 억압을 받게 되었다. 동부 이스마일파는 하산 샤바(1124년에 죽음)가 중심인물이 되어 동 왕조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 이스마일파의 한 파는 13세기에 고의 침공에 의하여 궤멸될 때까지 남아 있었다. 말리크 샤아(1072∼1092)가 죽은 후 이 왕조는 몇 개의 군소국가로 분열되고, 이러한 약체화는 11세기 말 십자군원정을 불러들이게 되었다.
가잘리
[편집]alGhazal
(1058∼1111)
갓잘리라고도 하며 이슬람 종교사상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때까지 분리되어 있던 신학·법학과 수피즘을 종합하여 후자의 인격적·신비주의적 체험과 직관지(直觀知)를 기초로 정통신학을 재구성했다. 이것은 공인된 아시아리 신학과 이슬람 교도 대중간의 거리를 메우려는 시도였으며, 이때까지 수피즘과 대립하고 있던 신학·법학자 들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수피즘을 섞어서 형해화(形骸化)되어 있던 종교체계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었다. 그가 죽은 16년 뒤에 최초의 정규 수피 교단(敎團)이 형성되고 뒤이어 다수의 수피 교단이 전이슬람세계에 걸쳐 이슬람 교도를 교단으로 조직하였다. 그의 종교적 편력은 지식인의 정신적 동요를 나타낸 것으로 처음에 그는 법학자·신학자로 성공을 거두었으나 학문의 형식논리에 반항하여 스스로 자기의 내적 세계를 강조하여 이슬람의 여러 종교학, 특히 주지적(主知的)인 철학파를 차례로 편력한 뒤 최종적으로 내면적인 고뇌를 거친 다음 수피즘의 종교체험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의 역할은 이슬람 종교사상에 하나의 전환점을 가져오게 되어, 첫째 이슬람의 학문을 스콜라 신학으로부터 탈피시켜 <코란>과 유디스를 살아 있는 것으로 부활시켜서 마치 그리스도교가 유럽에서 스콜라주의의 얽매임을 깨뜨린 것과 같은 상태로 만들었다. 둘째로는 외경(畏敬) 요소를 다시 도입하였다. 셋째로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수피즘의 지위를 이슬람교 내에 확립하였다. 넷째로는 철학을 일반 이슬람교도에 접근시켰다.
무갈 왕조
[편집]Mughal王朝
중앙 아시아로부터 인도에 들어간 터키의 정복 왕조로서 16세기 전반에 델리 왕조의 뒤를 이어 북부 인도를 널리 지배하여 19세기 중엽까지 지속되었다. 제3대 아크바르 황제 때 가장 융성하였고 이때에 지배체제를 확립하였다. 아크바르 황제 자신이 종교적 인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어서 수피즘에 기울었고 그리스도교와 힌두교에 대하여 관대했으며, 제종교의 교리상의 외형적인 차이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 외래의 정복 왕조가 인도 토착의 정치세력으로서 기반을 굳히게 되는 단계의 전환을 나타내는 것이다. 제6대 아우랑제브 황제 때에 판도를 크게 넓혔다. 황제는 엄격한 이슬람 정책을 채택하여 토착적인 요소를 배격하였다. 이 황제가 죽은 뒤 각지에 지방세력이 난립하여 중앙 왕조의 지배권이 약화되었다. 포르투갈·네덜란드 해상 세력이 서해안으로부터 상륙하였고, 드디어 18세기에 들어와서 해상권을 장악하게 된 영국이 사실상 벵골을 지배하게 되었으며, 1857년의 '세포이의 반란'이 있은 다음 영국에 의하여 왕조가 폐하여졌다.
오스만 터키
[편집]Osman Turkey
14세기에 애나톨리아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마호메트 2세 때인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이스탄불)를 공격하여 동로마제국을 멸망시켰다. 이어서 셀림 1세는 이란, 시리아, 아라비아, 이집트에 원정하여 '칼리프' 칭호를 얻어 종주권을 쥐게 되고 술탄=칼리프 제도를 확립하였다. 그 후 술레이만 1세(재위 1520∼1566) 치하에 극성기를 이루고 판도가 동유럽 일부에서 북아프리카, 아랍 세계에 달했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오스트리아, 러시아, 폴란드에 의하여 영토를 빼앗겼다. 19세기에 들어와 '탄지마트' 제도 개혁시대에 들어간다. 입헌운동(立憲運動)은 압둘 하미드 2세(재위 1876∼1909) 때에 일어나 탄압을 받았으나 이 운동을 지도하였던 청년터키당이 혁명에 의하여 권력을 잡았다. 오스만 터키는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측에 가담하였으나, 피지배 민족인 아랍 민족이 독립을 위한 반란을 일으켜 술탄(=칼리프)의 교령(敎令)과 회유책은 아랍측에 의하여 거부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오스만 터키는 영국·프랑스에 의해 분할되어 아랍 지역과 발칸 지역을 상실하게 되었고, 터키 본국이 독립할 때까지 위협을 받았다. 이에 케말 아타투르크가 혁명군을 이끌고 그리스 침략군을 터키에서 격퇴하고 국내에서는 술탄제도를 폐지하였다(1922년). 이어서 칼리프 제도도 1924년에 폐지되고, 터키 공화국은 서구적 근대화를 강행, 이슬람교를 공적인 관계로부터 분리시켰고, 아랍측과도 손을 끊었다.
사피비 왕조
[편집]Safavi王朝
16세기 초에 아제르바이잔의 터키계 종족이 일어나 이란에 지배권을 확립, 1501년에는 국왕(시아)을 세웠다. 이슬람교 분파인 '12이맘파(派)'를 국교로 삼고 12이맘파의 교회를 보고하였다. 이 왕조는 '수니파'계의 서부 오스만 터키 및 북쪽 중앙 아시아의 터키계 여러 나라와 동쪽의 인도 무갈 왕조 사이에 끼어 12이맘파 계통에 의한 정치·종교적 통합을 이루었다. 이 왕조가 쇠퇴하면서 일시적으로 18세기에 아프간 계통의 수니파 세력이 이란을 지배하였으나 18세기 말 카자르왕조가 또다시 이란을 통일하여 12이맘파를 보호하게 되었다.
이란 입헌혁명
[편집]Iran立憲革命
19세기 후반에 카자르 왕조 이란은 영국과 러시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으로 지배를 받게 되어 반식민지 상태로 떨어지고 말았다. 19세기 말에는 왕조가 이권(자원·은행·도로 따위)를 연속적으로 영국의 개인기업체에 양도하였으므로 이에 반대하여 반영국과 반전제(反專制)운동이 점점 높아갔다. 외국세력과 전제권력에 대한 국민의 권리의식이 싹터서 20세기 초엽(1905∼1911) 입헌혁명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영국과 러시아가 이란의 민족적 독립을 위협한다는 민족의 위기의식이 일어나서 민족적 위기를 불러들이는 장본인으로서의 전제왕조를 공격하였다. 이 운동은 시민운동조직으로서 '안지만'을 각 도시마다에 두고 또 도시 내에는 지역적인 구마다 이를 결성하여 자치위원회를 조직하고, 이를 기초로 하여 국민의회에 대표를 보냈다. 이 운동의 배경에는 대상인들이 있었으며, '울라마'가 사회의 불만을 대변하는 역할을 하고, 전위대열에는 근로자층이 앞장섰다. 러시아와 결탁한 전제왕조의 탄압으로 인하여 그들은 시민무장봉기를 일으켰다(다브리스市). 그 결과 명목적인 입헌제를 이루게 되었으나 러시아의 무력개입으로 민주주의적 개혁 의도는 실현되지 못하였다. 반혁명파가 입헌파를 배반하였기 때문이었다.
자말루드 딘 알 아프가니
[편집]Jamalu'dDin alHusain alAfghani(1838∼1897)
19세기 말부터 서아시아는 서구 열강들의(주로 영국의) 지배를 받게 되는데, 서유럽의 지배에 대한 민족적 각성이 이루어지고 이슬람 사상을 민족운동에 도입한 그 사상·행동은 일반적으로 '범이슬람주의'라고 불린다. 이것은 초민족적인 '칼리프'의 상징 아래 아시아의 이슬람 제민족을 통일하려고 했다기 보다는 오히려 개개의 민족운동을 횡적으로 연결시켜주는 것이었다. 사실 이 운동에 의하여 이집트에서는 1880년대에 이집트 민족운동의 기점을 이룬 '아라아비의 반란'이 일어났고 이란에서는 90년대 초에 이란 민족운동의 출발점이 된 '타바코 보이코트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이슬람 제민족 연대의식의 발상(發想)은 1857년에 있었던 인도의 '세포이의 반란'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었다고 하며, 아시아의 이슬람교도의 한 지역에서 일어난 민족운동을 이에 인접한 다른 지역의 이슬람 교도가 지원하여 줌으로써 서아시아를 지배하는 영국 세력을 타도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주요한 적은 이란에서나 이집트에서나 인도에서나 아프가니스탄에서나 모두 영국이었다. 이와 같이 서아시아의 이슬람 교도 제국의 민족과 제국주의적 서구와의 관계를 처음으로 그는 제국주의 시대의 지배와 종속관계의 대립하는 형태로서 인식하였다. 반영국적인 입장에 의해서 제정 러시아에 접근하기도 하였으나 그들의 일방적인 앞잡이는 아니었다. 또한 내부의 통일적인 심벌로서 오스만 터키의 전제적 칼리프를 이용하려 하였으며, 한편 오스만왕 조의 칼리프도 자신을 이반(離反)하려 하는 아랍을 붙들어 두기 위하여 그를 이용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전제주의를 지지하려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하는 세력에 가담하고 있었다. 이란에서는 그를 입헌운동의 지도자로서 전제주의 타도의 지도자적 위치에 올려놓고 있다. 그의 정치운동 방법은 '울라마'를 대중적 저항운동의 대표로 내세워 울라마를 반제국주의와 반전제주의의 광범위한 연합전선 지도자로 이용한 것이다. 이 지도방식은 특히 이란의 민족운동 과정에서 장점과 단점을 보여주었다. 인도에서는 '세포이의 반란' 이후 울라마를 중심으로 하는 대중적 민족해방운동이 끈질기게 전개되어, 제1차 대전 직후에는 간디의 전국적인 '비폭력·비협력운동'='칼리프 옹호운동'과 결부되어 이슬람 교도는 인도 국민의회파에 유력한 세력을 구축하였다. 그의 사상은 이슬람의 관념을 현대민족운동에 결합시켜서 19세기 말 이래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슬람 교도의 정치사상과 정치행동의 원형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정치적으로는 이슬람교의 심벌을 내세웠으나 그것은 울라마를 위한 것으로 그 자신의 신념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그의 사상에는 '사회전체의 행복'을 위한 기술적 논리인 이슬람교의 실천철학의 전통이 살아 있다.
아브두
[편집]Muhammad 'Abduh(1849∼1905)
알 아프가니의 제자이며 협력자로서 출발하였고 이집트의 이슬람교 근대주의의 선구자가 되었다. 1886년 이집트에 귀국한 후 보수적인 울라마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이슬람교로부터 소외되어 있었던 새로운 세대에 대하여 매우 폭넓은 사상적 영향을 끼쳤다. 그의 사상은 전통적 이슬람교를 단절함으로써 그 출발점을 삼은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이슬람교를 내부로부터 개혁하고 그 개념을 넓혀 근대의 도전에 대응하려고 한 것이었다. 그 한계점은 울라마측으로부터도 허용될 수 있는 한도에 머무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브두의 다음 세대는 아브두의 종교사상을 '근대주의'의 방패로 삼아 대담한 근대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의 이슬람 사상은 전통적인 이슬람측으로부터가 아니라 근대주의적 이슬람측에 의하여 이용되었던 것이다. 그는 이슬람교의 합리주의 정신을 촉구하고 그것이 결국 이슬람교의 종교적 진리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이슬람교의 진리를 확증하게 되는 길이라고 확신하였다. 이 합리주의라는 것이 중세적 합리주의인가 또는 근대적 합리주의인가에 따라서 그의 사상적 평가는 달라진다. 근대주의자는 이슬람교를 근대적 합리주의와 형식적으로 동일시함으로써 거꾸로 이슬람교의 참다운 근대사상적 변혁을 가로막는 결과를 빚어 그들의 근대주의적 호교론(護敎論)은 종교사상으로서는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이 근대주의는 또한 '세큘러리즘'과는 구별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근대주의는 과연 근대적인 세큘러(세속적)적인 직업(관료·자유업)으로서 대표되는 것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세큘러리제이션'의 과정을 진행하고자 할 때에 관념적으로는 이와 반대로 이슬람교에 대하여 세큘러리즘의 입장보다 더욱 온건한 태도를 취한다. 그들의 입장은 중세적 권위를 일방적으로 부정하고 그 대신 개인적 판단의 권리를 때때로 주장하는 태도에 의하여 개괄할 수 있다. 그런데 아브두가 죽은 뒤 근대주의와 전통주의의 거리가 확대되는데, 이를 복고주의적(復古主義的) 입장에서 메워 보려고 한 운동이 이집트에서 발전되었으며 이것이 '사라피 운동'이다. 이 운동은 모로코로부터 자바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이 운동은 터키 공화국의 세큘러리즘에 정면으로 반대하고 아랍을 중심으로 한 이슬람교의 현대적 재건을 모색하였다. 이것은 근대주의운동에 대한 반동이었으며 근대주의의 새로운 세대의 등장(두번의 세계대전 사이)에 사상적으로 접속되는 것이었다.
사이이드 아마드 칸
[편집]Sir Sayyid Ahmad Khan(1817∼1897)
1857년 '세포이의 반란' 이후에 등장한 이슬람 근대주의의 대표자. '세포이의 반란'의 패배와 더불어 무갈 왕조의 구지배층은 최종적인 타격을 받아 인도의 이슬람교는 근본적인 방향전환을 강요당하게 되었다. 서사이이드는 정치적으로 인도의 이슬람교를 영국 세력에 연결시켜서 인도 이슬람 교도의 몰락을 위기로부터 구출하려고 하였다. 사상적으로는 19세기 영국의 자유주의 사상을 이슬람 교도의 윤리 기준으로 하였다. 그가 활동한 시대는 알 아프가니와 동시대였으나 영국의 지배에 대한 대응책은 전혀 다른 대립 방식이었다. 사이이드에게는 인도 국내의 이슬람 교도들의 지위향상만이 최대 관심사였고, 알 아프가니와 같이 다른 나라의 이슬람 교도에 의한 민족해방운동에는 아무런 관심도 나타내지 않았다. 영국과 협조를 기본 노선으로 하여 알 아프가니의 영국 타도 노선에는 반대하였다. 이것은 알 아프가니에게는 배신행위였다. 그는 이슬람교에 대한 해석은 아브두에 가깝고 합리주의적이었으며 이슬람교와 과학은 거시적으로 보아서 적대적인 것이 아니라고 확신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슬람교가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자연'과 과학법칙에 일치하고 있는 점이며, 이 원칙에 모순되는 요소는 참다운 의미에 있어서 이슬람적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인도 이슬람 교도에게 근대적 고등교육을 실시하여 이슬람 교도의 근대관료를 양성할 목적으로, 1875년 아리갈에 칼리지(college)를 설립하였다. 이 대학은 인도 이슬람 근대주의자들의 중심이 되어 울라마측의 신학교 계열과 대립하였다.
이크발
[편집]Sir Muhammad Iqbal(1876∼1938)
양차 대전 사이에 인도 이슬람의 새로운 세대의 종교사상 동향을 대표하였다. 그의 사상은 제1차 세계대전 후의 세계, 특히 인도이슬람 사회의 정치·사회체제에 있어서의 위기가 심각해져 좌절감을 경험하게 된 세대의 욕구에 응답하는 것이었다. 제1차대전 때까지의 사이이드의 영국적인 고전적 자유주의 가치가 붕괴되고 여기에 급진적이고 로맨틱한 이슬람 사상이 모색되었다. 이슬람교가 여기에 비로소 사회적 정치적 지도이념으로서 현대의 지도이념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의 철학에는 니체, 베르그송의 사상적 영향이 강하고 이슬람교를 다이나미즘(dynamism)으로 파악하고 있다.
개인의 '자아(自我)'의 주체적인 확립으로부터 출발하여 전체주의적인 이슬람적 결합이 이념화된 '운마(교단공동체)'에 개아(個我)가 몰입하는 몰아(沒我)의 철학을 설파하여, 이 사상은 청년 인텔리층에 '폭풍과 같은' 인기를 모았다. 그의 사상은 페르시아어, 우르두어의 철학시로 표현되어 있으며, 오늘에 이르기까지 특히 파키스탄의 사상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지야 괴칼프
[편집]Ziya Gkoalp(1876∼1924)
현대 터키의 대표적 사상가. 1908∼1909년 '청년 터키당'의 혁명에 가담하였고, 1919∼1922년 케말 아타투르크가 지도한 조국방위 전쟁의 동원과 그 후의 개혁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청년 터키당의 정치혁명을 '사회혁명'으로 심화시켜야겠다는 과제를 1911년경부터 자각하고, 1913년경부터는 당대를 위기의 시대로 파악함과 동시에 이상의 맹아기라고 불렀다. 이슬람적 터키 철학을 발전시켰고, 터키의 국민 형성의 활력소로서 민중적인 우애조합(友愛組合) 등 사회조직을 재발견하고, 국민성의 일관성을 역사와 전통을 토대로 하여 방향지었다. 또한 '터키주의'와 이슬람화를 주체적으로 통일하려는 시도가 그의 사상의 중요한 과제였다. 해결방법으로 터키 국민의 관습법 '우루후'를 이슬람의 '계시(啓示)' 텍스트와 동등한 위치로 끌어올리고, 신의 '수나'와 같은 지위를 줌으로써 국민을 내재적인 신에 연결지어 터키주의와 이슬람의 모순을 해결하려 했다.
파키스탄
[편집]Pakistan
1947년 영령(英領) 인도로부터 분리 독립하여 1956년에 제1차헌법이 제정되고 '이슬람 공화국'이라 칭하였다. 58년 혁명에 의하여 동 체제가 부정되고 62년 신헌법과 더불어 '제2공화제'에 들어갔다. 파키스탄 국가의 분리독립 요구운동은 40년의 '라호르 결의' 이후 인도 이슬람 교도의 커다란 세력으로 발전하여, 일부의 '코뮤널리스트' 그룹이라고 부르는 영국이 창설한 특권계층뿐만 아니라 급진적 지식층을 포함하는 대중운동으로 바뀌었다. 이 운동의 강력한 정치적 지도자는 진나로서 파키스탄 국민으로부터 '위대한 지도자(가이데 아잠)' 칭호를 받았다. 진나와 이슬람적 지도이념의 제창자 이크발과의 결합은 1937∼1938년에 성립되었고, 이 시기로부터 '무슬림 리그'가 급진적 분자를 포함하여 재조직되었다.
파키스탄은 '이슬람 국가'임을 세계사상 처음으로 선언하고, 형식상으로는 국가와 종교의 일체화를 내걸면서 실질적으로 '세큘러라이제이션' 과정을 걸어온 것은 그 리더십이 서구적이고 반대파인 울라마가 세력권으로부터 언제나 배제되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이 '이술람 국가'라는 것은 궁극적인 이념에 그치는 것에 불과하다. 제2공화제하에 있어서는 '파키스탄 공화국'이라 칭하고 이슬람의 호칭이 탈락되었으나 이슬람의 지도이념(이데올로기)에 대해서는 언제나 유지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슬람의 국민적 통합은 방글라데시의 분리 독립으로 심한 타격을 받았다.
이집트 아랍공화국
[편집]Egypt Arab共和國
1952년 '자유장교단(自由將校團)'의 혁명으로 이집트의 왕권이 무너진 뒤 1958년 시리아와 통합하여 '통일 아랍공화국'이라고 칭하게 되었으나 1961년에 시리아가 분리되었다. 이 혁명의 배경에는 무능한 왕권과 국민의 신임을 잃은 의회제도에 대한 이집트 국민의 광범위한 반대 움직임이 있었고, 1940년대부터 급진적 사상과 조직이 발전하고 있었다. 이슬람적 반체제조직으로는 '이크와느 알 무슬리문'이 대표적인 것이었고, 제2차 대전 후 정치위기 속에서 광범위한 대중운동을 일으킬 힘을 축적하였다. 1952년의 혁명은 이 '이크와느' 운동의 후원을 받은 것이다. 왕제(王制) 의회제도에 반대하는 같은 형태의 혁명 발생조건은 다른 아랍 제국(諸國)에서도 1950년대에 이르러 성숙해 있었고, 따라서 이집트 혁명은 아랍 제국에 연쇄반응을 일으켜 나셀이 아랍 혁신진영의 영웅으로 추대받게 되었다. 이집트 혁명의 제1단계(1952 ∼1956)는 정치적 독립의 달성을 목표로 하였고 제2단계(1956∼1961)는 경제의 이집트화를 목표로 하였다. 이어서 1961년 이후의 '사회주의' 제법령 제정 단계에 들어가고 마지막으로 '국민헌장'이 제정되어 이를 기초로 한 신헌법이 제정되었다. 1970년 9월 나세르가 죽자 대통령직을 계승한 사다트는 71년 시리아 및 리비아와 더불어 아랍공화국 연방을 구성하였으나, 통합이 이같은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제4차 중동전을 일으켜 자신의 지위를 굳혔다.
사상·성전
[편집]진
[편집]jinn
아랍족 종교의 '영귀'적 존재. 명확한 개성을 갖지 않은 힘의 무리로서 많은 경우에 있어서 인간에 대하여 나쁜 일을 한다. 인간생활을 둘러싼 세계에는 이러한 종류의 이름 없는 힘의 무리가 인간생활에 밀접히 관계하고 있으며, 때로는 인간을 위협한다는 신성관(神聖觀)의 공포적 측면이 이슬람 이전부터 강하게 나타났다. 진은 여러 가지 형태로 둔갑하여 인간 앞에 나타난다. 또 사막에는 어떤 곳에나 있는 것으로 믿어지고 적절한 의례에 의하여 인간은 그 해를 방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랍족 안의 시인은 진에 이끌려 영감을 얻게 되고 복술가(卜術家) '카힌'도 이 진의 힘으로 점복(占卜)의 힘을 얻게 된다고 한다. 이 진의 일부는 지위를 상승시켜 '천사적 존재'와 결부되었다. <코란>에서는 진이 알라의 통일적 지배 시스템에 종속되어서 이슬람에 복종하는 것과 이슬람을 외면하는 둘로 나누고 있다. 이들의 존재는 인간과 마찬가지로 창조된 것이지만, 인간처럼 흙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불로 된 것이다. 불신(不信)의 진은 인간과 더불어 최후의 날에 심판을 받고 지옥에 떨어진다. 신을 배반한 진은 '샤이탄(사탄)'이라 부르고 인간을 유혹하며 사람들을 예언자에 반항하도록 한다. 샤이탄은 인간에게 주술(呪術)을 가르치고 솔로몬왕을 모시고 바닷속에 뛰어들기도 하며 집을 짓기도 한다. 그들의 중심이 되는 것은 샤이탄 또는 '이브리스'라고 부른다. 이 진에 관한 관념은 이슬람교가 발전하는 가운데 특히 이슬람교의 주술과 관련되어 남아 있는 것이며, 그것의 활동은 <천일야화(千一夜話)>에 잘 나타나 있다.
천사
[편집]天使
<코란>에 있는 천사라는 말은 이디오피아어(語) 내지 아랍어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외부에서 들어온 관념이지만 이미 서부 아랍족 사이에서 확립되었던 관념이었다. <코란>에서는 아랍 민족이 천사를 '알라의 딸'이라고 여기는 것을 비난하고 있으나, 이로부터 진이 처녀를 신에게 시집보내 여기서 태어난 것이 천사라고 하는 알라와의 친자관계(親子關係) 신화가 성립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코란>에서는 천사가 신의 사자(使者)로 취급되어 있으며, 인간과 같이 하나님의 피조물(被造物)로서 언제나 하나님을 받든다. 하나님의 성좌(聖座)를 받들어 모시고 '힘이 내리는 밤'에 신의 명령에 따라 지상에 내려와 인간의 행위를 기록하고 '최후의 심판'에서 개개인의 선과 악을 증언하게 된다. 또한 마호메트의 군사가 전투를 할 때 보호하고 원조해 준다. 천사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는 지부릴(가브리엘)인데, <코란>에서는 그를 마호메트에게 <코란>을 고지(告知)하여 준 '귀하신 천사, 힘의 주인'으로 묘사하거나, 혹은 동정녀 마리아에게 예수의 탄생을 고지(告知)하여 예수를 '힘있게 하여 준' 성령(聖靈)과 동일시한다.
하람
[편집]Haram
막연한 의미로 신성한 상태. 속된 것과 구별하여 강조되며 동시에 '금기(禁忌:터부)'를 의미한다. '부정(不淨)'의 측면뿐만 아니라 부정함이 없는 '정결(淨潔)'의 측면을 동시에 일컫는 영역이다. 어떤 것이 신과 밀접하게 연관될 때에 그것은 하람으로 되며, 이와 반대로 그것에 명백히 반(反)하는 경우에도 하람이 된다. 그 신성성(神聖性)은 전염의 힘을 가지며 하람과의 접촉은 위험을 불러들이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일단 하람과 접촉한 후 일상생활에 되돌아가려고 할 때에는 그 위험한 힘을 떨어버리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관념으로 말미암아 처음에 아랍족은 '카바'를 순례할 때에 알몸으로 하였다. 옷을 입으면 '성지(聖地)'의 위험한 힘이 몸에 충만하게 되어 일상생활을 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당시의 순례자들은 성지 메카에 사는 주민들로부터 옷을 빌려 입고 참배를 하였다. 하람은 메카와 그 부근의 순례지를 중심으로 하는 성역(聖域)을 뜻하는 외에 신성한 시간으로서 신성월(神聖月)과 신성한 일시(日時)가 있다. 이슬람법(샤리아)의 개념으로는 하람은 명백히 금지사항이며 이에 반대되는 개념은 '하랄', 즉 적법사항이다. 이슬람 교도에게 돼지고기는 하람에 저촉된다. 하람의 파생물 '이람(ihram)'은 순례자가 입는 흰 옷을 말한다.
바라카
[편집]아랍족의 주력관념(呪力觀念). 이슬람 이전에는 이 비인격적이고 불가시적(不可視的)이며 방산적(放散的) 에네르기가 신성한 사물로부터 발해져서 번영·번식을 가져다준다는 신앙이 있었다. 이러한 힘은 목장, 성스러운 장소, 성스러운 나무, 성스러운 돌, 성스러운 샘이나 토템 동물에 유숙한다고 생각되었다. 이슬람교는 신성관을 알라의 지배 밑에 합리화시키며 바라카를 지상과의 관계로부터 단절시키고 이를 하늘과 결부시켰다. 이것은 알라가 주는 축복의 힘이 되어 선택받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은혜라고 하였다. 이것은 <코란>에서 "신은 근원을 발생케 하는 은혜를 주는 힘이며, 물질의 세계에 풍요와 번영과 정신의 행복을 가져다 준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이슬람 교도는 바라카를 발하는 것으로서 <코란>의 글, 예언자, 성자의 인격을 들고, 특히 마호메트와 그 자손은 바라카의 힘을 갖는 것으로 되어 있다. '시아파'에서는 '이맘'과 그 자손에 바라카를 인정하고 있다. 일반 신도는 이들 성자(聖者)의 묘에 접하면 바라카를 전해받을 수 있으며 힘을 얻게 된다고 하였다. 이슬람의 민간신앙은 이 바라카 관념이 기초로 되어 있다.
알라
[편집]Allah
이슬람 종교체제의 중심을 이루는 신. 이슬람교가 나오기 전에는 일신교의 관념이나 '알라'라는 말도 미지의 것이었고, 있지도 않았다. 그런데 아랍족의 종교에서 지상신(至上神)에 관한 관념은 애매하고 직접적인 숭배 대상과는 먼 존재였다. <코란>은 이러한 신관(神觀)에 새롭고 충실한 내용을 주어 주위의 잡다한 다신교적 요소를 합리화해 나갔다. 알라는 여기에 초월적(超越的)이며 리얼한 존재로 제시되고 전세계의 창조자, 유지자, 전지(全知) 최고의 심판자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코란>의 신관의 기본점은 일체의 타협을 배제하는 일신교를 주장함에 있다. 메카 시기에 아랍족이 숭배하는 여신을 '알라의 처녀들'이라고 부르는 것을 처음으로 인정하였으나 곧 배척하였고 또 예수를 '주님'이라고 하여 숭배하는 것도 비난하고 있다. 배타적 일신교의 반대개념은 '시르크', 즉 알라와 대등한 다른 존재를 인정하는 행위이며 이는 절대로 인정되지 않았다. 이 알라는 스스로 존재한 것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며 영원히 존재한다. 전세계와 그곳에 있는 모든 것은 다 알라의 피조물(被造物)이며 그것의 의지에 의한 '있으라' 하는 창조의 명령과 함께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존재'의 개념은 거기서는 '존재케 되어진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알라가 정한 운명은 미리 알 수가 없으며 불가피하고, 모든 것이 신의 의지에 따라서 결정되며 실현된다. 인간은 알라의 피조물이며 알라의 의향에 자기 자신을 전적으로 따르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 인간은 신을 언제나 외경(畏敬)하면서 생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신에 대하여 부단히 자기의 자세를 고쳐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한편 지상(至上)의 힘, 심판자, 보복자와 같은 위협적(威脅的)이며 위압적인 알라의 측면과 아울러 알라의 넓은 은혜, 자애로운 일면을 강조하여 신도들을 권장한다. 알라의 '초월성'과 함께 그것이 가장 몸 가까이 있다는 것, 그리고 현재(賢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숨어 있는 것이라는 신비적인 시사(示唆)도 <코란>에는 포함되어 있다. 알라의 속성(屬性)·의(義)·숙명론과 자유의지론 등의 문제는 후대에 신학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논의를 불러일으키고 정통파 신학의 교리로서 확립된다. 마지막으로 알라의 형상화는 엄중히 금지되어 있다.
코란
[편집]Koran
이슬람의 성전(聖典). 마호메트에 의해 단편적으로 계시된 사상의 집록(集錄). 이슬람 교도는 <코란>을 천사 가브리엘을 매개로 하여 전달된 자의(字義)대로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본다. <코란>의 모든 구절은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라고 먼저 단서를 붙이고 이슬람 교도에게 인용되어 <코란> 속에는 알라가 일인칭으로 말하는 경우가 많다. 편찬된 <코란>의 체제는 약 300페이지로 114개의 '수라(s
rah:章에 해당)'로 나누어지고, 기도문으로 쓰이는 서장(序章)의 '파티하'를 제외하고는 거의 절(節)의 대소에 따라 각 장이 배열되어 있다. 앞부분의 장(章)일수록 많은 절(節)로 되어 있고 마지막 부분이 되면 겨우 셋 또는 다섯개의 짧은 절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이 배열법은 계시(啓示)의 시기적 순서에 따라서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메디나기(期) 수라의 긴 것이 많아서 후기의 것이 앞에 놓여졌다. 19세기 말부터 <코란>을 시기적으로 재구성하는 연구가 서구의 문헌학자에 의하여 문체와 사상을 근거로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메디나기 수라의 대부분과 함께 메카기 수라의 다수가 각각 다른 시기에 된 절(節)을 포함하여 구성되어 있는 관계로 그 작업은 순조롭지 못하다. 메카 최초기의 그룹은 운(韻)을 붙인 짧은 구절로 된 일정한 형식의 힘있는 신탁(神託)을 내리는 형태로 되어 있고 이 구절의 많은 부분이 명료하지 않다. 그 문체는 이슬람 이전의 아랍족 점복가(占卜家) '카힌'의 문체 및 발상법(發想法)과 흡사하다. 때문에 마호메트는 신탁자의 부류라고 메카의 반대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았었다. 다음 시기에는 그 문체의 긴장도가 한층 단순하고 수사적(修辭的)인 산문체로 부드러워졌다. 이와 함께 사회적 비난이나 종말론적 표현이 아니라 역사적 화법(話法)으로 이행되었고, 다시 메디나기(期)로 들어오면 입법과 현실문제 해결에 관련된 주제로 발전하는데, 여기에는 초기의 문체상 특색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약간의 절(節)을 묶는 틀린 각운(脚韻) 내지 동운법(同韻法)이 보이는 것에 불과하고 절의 길이도 길어지고 있다. <코란>은 성전(聖典)임과 동시에 아랍족의 미의식(美意識)을 최고로 표현한 것이며 시적으로 힘차게 엮어진 것으로 이것을 능가하는 작품은 도저히 만들어낼 수가 없을 것이라고 아랍족은 자랑하고 있다.
<코란>이 마호메트의 생전에 전부 쓰여졌는지 어떤지는 전설에 따라 일치하지 않으나, 일반적으로 이슬람측이 기술한 바에 의하면, 최초의 편찬은 마호메트 사후 수년 후에 '양피지, 가죽조각, 돌조각, 야자의 잎줄기, 낙타의 견갑골(肩甲骨), 늑골, 판자 조각, 인간의 가슴'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되어 있다. 이들의 기록류와 함께 마호메트와 접촉하고 있던 몇 명의 교우가 암기하던 것을 전달한 것도 아울러 사실로서 추정된다. 제3대 칼리프인 우스만이 이것들을 기초로 하여 메디나에서 권위있는 통일 텍스트를 만들어 그 사본을 주요 도시에 보낸 것은 확실한 역사적 사실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들 사본은 불완전한 초기 아라비아 문자로 쓰여 있고, 이것을 보충하기 위해서는 여러 '독송자(讀誦者)'들의 숙달된 기억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난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정자법(正字法)의 개선이 행하여져 이슬람력(헤지라력) 100년경에는 오늘날 우리가 보는 텍스트가 사소한 점을 제외하고는 완성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방언적 발음(方言的發音)이 표준어 발음으로 고쳐졌으나 여기에 실질적인 내용상의 변화는 없었고, 본래의 형식과 내용이 자세하게 보존되었던 것은 확실한 듯하다. 그러나 읽는 방법에는 다수의 자질구레한 차이가 있고 이들 모두가 공인을 받게 되었다. 통일판이 보급된 것은 인쇄술이 발달하게 된 20세기에 들어와서부터였다.
하디스
[편집]Hedith
마호메트의 언행록. 마호메트의 언행(수나)에 관한 '전승(傳承)' 문헌. 이슬람교 최초 백년간의 사업상 특색은 마호메트의 언행에 관한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사항을 수집, 전달하는 활동이었다. 이 사업은 자발적인 것으로 정치적 중심지가 아니라 학문의 중심지였던 메디나에서 발전하였다. 당연히 그 지역은 마호메트와 접촉을 가졌던 많은 '교우'들이 모여살던 곳이어서 제1차적인 자료를 얻기에는 매우 적당한 곳이었다. 이슬람 이전의 아랍족 사회에서는 '수나(전통)'가 규범적 가치를 지녀서 각 종족은 그들 조상의 수나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이 관념으로부터 초기 이슬람에서는 교단 전체의 수나를 종교와 사회규범으로 삼게 되었다. 그러나 아랍족의 정복사업에 따라서 아랍족이 주둔하게 된 새로운 정복지마다 순수가 각기 다른 방향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에 하디스 학자들은 순나를 마호메트가 설정한 관례에 한정할 것을 주장하고 이 견해가 최종적으로 확정되었다. 마호메트의 언행은, 이를 목격한 교우 한 사람 한 사람이 증언하는 단문(短文) 형식으로 전승되었다. 이 개개의 본문이 하디스 = 전승이 된 것이며 다시 이들을 집대성한 것을 일반적으로 '하디스' 문헌이라고 부른다.
본래 문자로 쓰여진 것은 계시에 한정되었기 때문에 처음에 하디스는 구전(口傳)으로 전승된 것이었다. 그러나 뒤 이어 율법과 교리를 마호메트의 언행에 연관시키기 위하여 많은 하디스가 유포되었고 각 분파와 정치적 당파는 자기 파에 유리하도록 하디스를 만들어내게 되었다. 이와 같이 하여 교리상·율법상 후세의 시대적 필요에 따라서 하디스의 공급이 성행하게 되었다. 거기서는 유태교·그리스도교에 기원을 둔 훈화, 그리스 철학에서 유래된 잠언(箴言)까지도 마호메트가 말한 것처럼 꾸며지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 순수한 하디스를 엄선하는 방법을 하디스 학자들이 만들어냈다. 그것은 전달자의 세대적 연속을 음미해 보는 방법으로서, 이스나드(isnad)라고 한다. 이 하디스 비판의 방법은 이슬람력 2,3세기에 형성된 것이다. 이것은 샤리아(율법) 형성기에 해당되며, 율법의 필요에 의하여 하디스가 규범으로서 요청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하디스의 집대성은 법학의 요청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인데 이슬람력 3세기 초엽(서기 9세기초)에는 법학으로부터 독립된 하나의 학문체계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또 다시 동 3세기 중엽(서기 9세기 중엽)에는 법학과 교차하여 이에 비판적 집대성이 확립되고 '사히하(확실한 것)'라고 일컬어지게 되었다. 이것이 하디스의 정전(正典)으로서 권위를 인정받았는데, 편집 형식은 법학자와 신학자를 위하여 신앙과 실천 등 모든 사항에 걸쳐 즉석에서 참조할 수 있도록 배열되어 있다. 그 뒤에도 계속하여 하디스의 편찬사업이 발전하여 동 시대의 여러 가지 문제 해결에 권위를 주기 위하여 새로운 하디스가 편찬되었다. 서구의 동양학자들은 하디스의 권위에 관한 판정이 형식적인 이스나드의 비판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점을 들어, 모든 하디스를 후세에 있어서의 학문에 의한 창작이라 하여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극단적인 입장이 아니라 중간적인 입장을 주장하는 설도 유력하며, 그 이유로서 초기 하디스 학자가 방법상 결함이 있었다 하더라도 적어도 이슬람력 1세기의 분파적 경향이 짙은 하디스의 대부분과 동 2세기의 경향이 같은 모든 불순한 부분을 적절하게 배제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 뒤에 하디스는 형식적인 검토에 시종일관되어 반대로 그만큼 비판적이 되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디스 연구의 목적은 마호메트의 역사 연구에 도움이 되는가에 국한할 것이 아니라, 후대의 이슬람교 발전을 가장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는 거울로서 취급될 수도 있다 하겠다. 오히려 후대의 불순한 위작(僞作)의 요소야말로 이슬람교의 역사적 발달을 보여주는 중요한 문헌적 가치를 지니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초기 교리의 후대에 있어서의 발전과 그 해석의 유일한 전달방법은 하디스와 결부되어 행하여졌기 때문이다.
성전
[편집]聖典
키타브라고 부르며, 예언자에게 내려진 것이라고 한다. <코란>은 초기의 성전에 관하여도 언급을 하고 있으나 그 이름이 밝혀진 것은 사서(四書)뿐이고, 모세에게 주어진 <토라(torah:<모세 5경>에 해당하는 것)>, 다윗에게 주어진 <자부르(<시편>에 대응한다)>, 예수에게 주어진 <인지르(<복음서>에 대응한다)>, 이에 더하여 마호메트에게 주어진 <코란>이 그것이다. 이들은 성문화된 계시로, 유태교·그리스도교는 '성전(聖典)의 백성'이라 하여 이교도와 구별된다.
예언자
[편집]豫言者
예언자 마호메트의 위치는, 신앙 조항에 보이는 바와 같이, 알라의 유일성과 더불어 이슬람교의 기초적 교리를 형성하는 것이다. <코란>에서는 마호메트에 선행하는 여러 예언자 계통이 밝혀져 있으며 그 중에서 네 사람은 아랍계이고 열여덟 사람은 구약성서에도 나타나며, 세 사람(자카리아, 세례 요한 및 예수)은 신약성서에 나오는 예언자들이다. 다른 두 사람은 그들의 특색을 형용하는 호칭으로 나타나 있고, 그 중의 한 사람은 <알렉산더의 전설>에 나오는 주인공과 동일시되는 '이각인(二角人)'이다. <코란>에는 신이 백성들마다 각각 예언자를 두게 하였다는 사상이 있으며, 마호메트는 알라가 그때까지 예언자를 두지 않은 메카의 백성들에게 보내어진 것이다. 이들 예언자들은 하나님을 믿도록 그들의 백성을 권유할 사명이 주어지게 되었으나 이에 대하여 백성들은 불신과 조롱으로 대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불신의 백성을 벌하고 멸망시켰다는 예언자들의 천벌사상 이야기가 <코란>에 들어 있다. 이 예언자에 관한 이야기는 마호메트를 받아들이지 않은 메카의 백성들에 대한 경고의 뜻으로 쓰여진 것이며, 이들 예언자는 마호메트 자신의 모습을 투영(投影)하고 있다. 이들 예언자의 가르침은 모두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며, 세부의 몇 가지 점에 있어서만이 이들의 예언이 최종의 완전한 계시를 향하여 점진적인 발전을 이룩해 왔다고 믿어지고 있다. 또 이들 예언자에게 성전이 주어졌다고 되어 있다.
<코란>을 자세히 읽어보면 예언자의 초인간성이 반복하여 부정되고 있다. 마호메트 자신도 죽음을 면치 못하는 하나의 인간에 불과하고 신의 경고와 구제의 고지(告知)를 전달하는 사명을 맡은 데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예언자는 성스러운 인격이 아니며 종교적 숭배대상이 되지 못하고, 이들과 접촉하기 위하여는 의식(儀式)적인 절차를 필요로 하지 않으나, 민중 레벨에는 신성이 박탈되어 합리화된 예언자상에 그치지 않고 신성(神性)이 부여된 예언자로서의 의미가 농후하고, 뒤의 전설에서는 죄와 절대적으로 무연(無緣)한 관계에 있는 것으로 되었다.
메라지
[편집]마호메트의 승천전설(昇天傳說). 메라지라는 말은 본래 사후(死後)를 뜻하는 말이며, 이 이슬람 전설의 유래는 <코란>(17:1) "알라는 그의 종을 데리고 밤에 성스러운 예배당으로부터 우리들이 정결하게 한 멀리 떨어진 예배당에까지 오셔서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조짐을 눈으로 경배하도록 하여 주셨도다"에서 나오고 있다. 이 전설은 하디스에서 구체적으로 상세히 그려지는데, 하늘에의 승천은 '천사'가 마호메트의 심장을 꺼내 깨끗하게 한 다음에 있었으며 예언자의 소명이 개시된 직후의 일이라고 되어 있다. 천계(天界)에의 비상(飛翔)은 '이스라'와 관련된 형태로 이야기되어서 예루살렘으로부터 출발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일부 기사에는 메카로부터 천계(天界)로 승천한 일만을 언급하고 하늘나라에의 승천 이야기는 이슬람 이전의 아라비아 또는 동방 그리스도교의 전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마호메트가 승천함에 있어서 사용한 상상(想像)의 동물은 부라크이며, 이것은 마호메트 이전에도 예언자들이 이용한 것이라 한다. 일곱 개의 천계(天界)에서 각 예언자들과 만나게 되는데 제1천(第一天)에서는 아담을, 제2천에서는 세례 요한, 제3천에서는 요셉, 제4천에서는 이드리스, 제5천에서는 아론, 제6천에서는 모세, 제7천에서는 아브라함을 만났다. 제7천에서 마호메트가 하나님과 대면해 '예배'에 관하여 대화를 나누었다는 전설이 초기에는 있었으나, 마호메트가 신과 대면했다는 것을 부인하는 설도 있고 또 그의 승천이 환각(幻覺)인지 아닌지에 관하여도 초기부터 의문이 제기되었었다. 후기 이슬람에서는 죽은 자의 영혼의 여행 형태로, 또 수피즘에서는 신비적 극치에의 영혼 승화(昇華)의 심벌로서 받아들였다.
이스라
[편집]'메라지'와 동류의 관념으로 카바로부터 예루살렘으로의 마호메트 야간비상전설(夜間飛翔傳說). <메라지> 항에 인용된 <코란>의 동절(同節)의 의미를 옛 하디스에서는 천계에의 승천이라 말하고 메라지와 동일시하고 있다. 두 번째의 설명은 예루살렘의 비상(飛翔)이라는 설로서 우마이야왕조가 만들어낸 것으로 추정된다. 세 번째의 설은 그것을 환영이라고 보는 설로서 하나님이 마호메트로 하여금 예루살렘의 정경(情景)을 눈앞에 떠오르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최후의 심판
[편집]最後-審判
마호메트를 가장 강력히 지배하였던 관념은 종말관(終末觀)이었다. <코란>에 묘사된 바에 의하면 이 최후의 심판 날에 천지이변이 일어나고, 나팔소리가 울리며, 하늘이 갈라지고, 산이 무너지며, 무덤이 열리고, 부활을 받은 사람들과 진이 재판석에 소집되고 각 사람의 행위를 천사가 증언하고, 사람들의 행위를 저울에 달아 '칭찬받은 자'에게는 행위에 대한 기록이 오른손에, 영겁(永劫)의 형벌을 받게 되는 자에게는 왼손에 주어진다. 마호메트에게 있어 '예언자'라 함은 이 '최후의 심판'을 사람들에게 경고하는 직분이었다. 그러나 이 종말관이 메카의 사람들로부터 끈질긴 불신과 조소, 그리고 빈정거림을 받게 되었던 것은 <코란>에 반영되어 있으며, 이 사실은 그 종말관이 메카의 사람들에게는 미지의 것이었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육체의 부활, 내세관의 내용, 심판의 과정, 천지이변의 회화적(繪畵的) 묘사와 이것들에 대한 술어(述語)에 이르기까지 시리아 그리스도교의 교부나 수도사의 저술에 모두 공통되어 있다. <코란>에는 최후의 심판과는 별도로 예언자를 배척한 백성들에 대한 지상에서의 신의 처벌을 예언자 이야기 속에서 말하고 있으며 이로써 메카의 백성들에게 경고를 주고 있다. 이 종말관은 적극적인 의미로는 신도들에게 경건과 선행을 유도하는 윤리(倫理)로 되었고, 끊임없이 신을 두려워하는 태도가 이슬람 초기의 금욕주의 발생 동기가 되었다.
천국
[편집]天國
'최후의 심판 날'에 '칭찬을 받은 자', 즉 신을 두려워한 선남선녀, 신을 섬긴 자, 가난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푼 자, 마음이 관대한 자, 신을 위하여 고뇌하고 박해를 받은 자, 신을 위한 성전(聖戰)에서 순교한 자들이 '천상의 낙원'·'평화의 집'인 천국에 들어가기 위하여 부름을 받게 된다. 그들은 천국에 영주하게 되고 흐르는 강물 가에서 신을 찬미하며, 비단으로 꾸민 잠자리에 들어 아름다운 음식을 즐기고, 눈빛이 고운 소녀와 순결한 부인들에게 둘러싸여 지상에서는 맛볼 수 없는 갖은 무쌍의 열락(悅樂)에 빠지게 된다. <코란>의 천국 묘사는 이와 같이 매우 구체적이고 회화적이어서 마호메트가 동방 그리스도교 세밀화(細密畵)와 모자이크를 보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슬람의 정통파에서는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신심(信心)의 여행(勵行)'을 실천할 것을 정하고 있다.
지옥
[편집]地獄
'천국'의 극단적인 반대개념으로 <코란>에서는 탐욕스러운 자, 불신의 무리, 알라 이외의 제신을 숭배한 자들이 지옥의 불 속에 던져져서 그 속에 영원히 있게 되며 고통과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끓는 물을 마시게 하며 '사탄'의 머리를 닮은 끓여진 청동(靑銅)과 같은 '작쿰'의 열매를 먹게 된다고 한다. "반드시 지옥을 진과 인간으로 가득 채우겠다", "그 날 하느님이 이제 지옥에 인간이 가득 채워졌느냐고 물으면 지옥은 대답하기를 아직도 멀었습니다. 여기에 들어올 것은 더 없습니까 하고 대답하게 된다(50:29)"라는 구절은 무엇보다도 공포감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 지옥의 벌이 '영원'한 것인지 여부에 관하여 <코란>에서는 명확하지 않으므로 후세에 와서 이 문제가 신학상의 논쟁점이 되었다. 11세기에 알 가잘리가 지옥의 공포를 종교사상에 다시 도입하여 외포(外佈) 요소를 정면에 내세웠다. 이슬람교의 지옥사상은 다음 시대에 세밀하게 발전되어 단테의 <신곡(神曲)> 구성에 영향을 주게 되었음은 확실하다.
의 례
[편집]예배
[편집]禮拜
이슬람교의 의무체계상(義務體系上)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코란>에는 메카 후기에 부분적으로 제도화되었고 아침과 저녁 예배, 밤의 사적(私的) 예배를 들고 있으나 하루 다섯 차례의 예배를 규정하고 있지는 않다. 이것도 마호메트가 죽게 될 즈음에는 확립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의무화된 다섯 차례의 예배는 (1) 새벽 (2) 낮 (3) 오후 (4) 일몰 직후 (5) 야간의 각 시간에 행해지고 이외에는 '여공(餘功)'이라는 야간예배가 있다. 각 예배는 소정수의 '경배(敬拜)'로 되어 있고 각 경배는 다음의 7가지 동작으로 되며 각 동작에 따라 성구(聖句)를 독송한다.
(1) "알라는 위대하다"라는 말을 외며 양손을 얼굴의 양쪽으로 들어올려 손바닥을 편다. (2) <코란>의 서장(序章)을 외고 계속하여 <코란>의 다른 구절을 왼다. 자세는 똑바로 서서 눈을 감는다. (3) 허리를 깊이 굽혀 경례. (4) 다시 직립 자세. (5) 양무릎을 꿇고 지면에 이마를 대는 제1회의 궤배. (6) 정좌 자세. (7) 제2회의 궤배. 두 번째 '경배'는 제(2)부터 시작한다. 이 경배가 2회 끝날 때 또는 예배 종료시에 '샤하다', 즉 신앙고백의 구절을 왼다. 예배시간이 되면 신도는 어디에 있든지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안 된다. 예배는 될 수 있는 한 모스크에 모여 거행하는 것이 좋은 것으로 되어 있다. 특히 <코란>은 금요일 낮에 집단 예배를 드릴 것과 이 시간에는 일을 중지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이와 같은 예배의 집단화는 신도에 대한 정신적 규율과 함께 신체적 규율을 주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신도들이 늘어선 열의 선두에 서서 각 동작마다에 적당한 사이를 갖도록 하는 지도자가 예배의 '이맘'이다. 또한 예배에 들어가기 전에 '청정(淸淨)' 의식이 필요하다. <코란(5:8)>에는 "예배를 드릴 적에 얼굴과 양손을 팔굽까지 씻고 다음에 머리를 털어야 하며 양발의 복사뼈까지 닦아야 한다"고 명하고 있으며 이것을 '소세정(小洗淨)'이라고 한다. 몸이 더럽혀진 상태에 있을 때에는 예배에 들어가기 전에 전체를 세정(洗淨)할 것을 명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청정(淸淨)의 상징적 동작을 나타내는 것이다.
사다카트
[편집]Sadaqat
이슬람의 경건의 표징이며 구제수단이기도 하다. 마호메트가 메디나의 유태교로부터 받아들인 것으로 보이며 이슬람교의 희사(喜捨), 주로 자발적인 희사를 가리킨다.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자카트'와 같은 의미로 쓰여지기도 하며 법적인 구빈세(救貧稅)라고 할 수 있다. <코란>이 규정하는 바에 의하면 이것을 분배받을 수 있는 것은 가난한 사람, 구빈세 징수인, 이슬람교에 대한 새로운 개종자, 이슬람 교도인 포로의 몸값을 치러준 사람, 채무자, '지하드'에 종사하는 사람, 여행자 등으로 되어 있다.
자카트
[편집]Zakat
'사다카트'와 더불어 경건의 징표로 하는 희사이며 이슬람 교도의 기본적인 의무 중 하나로 되어 있다. 마호메트 시대에 이슬람교단에 가입하는 조건의 하나로, <코란>에서는 메디나기(期)에 구빈세로서 신도의 재산이나 수입에 부과된제도로 되었다. 그러나 세금이라기보다는 신에 대한 채권이라고 여겨 언젠가는 신이 이를 몇 배로 갚아주리라고 생각하였다. 부(富)는 구제의 방해물이며 자카트는 공덕(功德)이라는 생각이 기본적인 것이었다.
단식
[편집]斷食
이슬람 교도에게 부과된 기본적인 종교적 의무. 마호메트는 헤지라 직후에 제1월의 10일 동안을 단식일로 제정하였는데 그로부터 1년 반 뒤에 이를 개정하여 제9월 라마단월(月) 전체를 단식의 날로 정하였다. 이 사이에는 새벽부터 해가 질 때까지 음식과 성교를 피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병자·임신부·여행자는 단식이 면제되지만 다음에 그 일부에 해당하는 만큼의 단식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근대에 있어서는 담배도 이 기간 동안에는 피우지 말아야 했다. 정규적인 단식 이외에 자발적인 단식도 수시로 행하여지며 이것에 도덕적 의미가 부여되었다. 단식으로 일년 동안에 저지른 죄가 보상된다는 것이 그 근본 관념이다. 이슬람교의 전설에 의하면 "라마단의 사이, 천국 문이 열리고 지옥 문은 닫히며 진이 쇠사슬에 묶이게 된다", "단식은 신심(信心)의 문이다", "단식을 하면 두 가지 즐거움을 갖게 된다. 하나는 단식을 끝마쳤을 때 갖는 즐거움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과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라고 단식의 의미를 가르치고 있다. 단식을 하는 것은 세 가지의 정신적 서클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일반 신도가 욕망에 지지 않게 해 주며, 둘째로는 지도층에 있는 자들은 일반 신도들을 죄로부터 멀리하게 할 수 있는 것이고, 셋째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자는 모든 욕망, 속된 생각, 그리고 신에 속하지 않은 모든 것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단식을 축제일에 하는 것은 죄가 된다고 생각하였다. 단식은 생산을 저하시키므로 현대에 와서 튀니지의 부르기바 대통령은 단식의 중지를 호소하고 경제적 후진성을 탈피하자고 역설했다.
순례
[편집]巡禮
'하즈'라고 하며 모든 이슬람 교도에게 부과된 기본적인 종교 의무 중 하나. 정규적인 순례를 마친 자를 '하지'라고 부른다. <코란>의 초기 부분에는 나타나 있지 않으며 메디나기(期)에 제도적으로 확립되어 메카의 '카바' 순례가 규정되게 되었다. 이것은 이슬람 이전의 아랍 제종족에 의한 '카바'와 메카 근교에 있는 성지를 순례하는 의식이 계승된 것이며, 이는 고대 셈족(族)의 습속(習俗)으로부터 나온 것으로 생각된다. 순례 의식은 신성월(神聖月)의 12월 7일에 카바 설교를 시작으로 일제히 개시되며, 일몰과 더불어 메카를 떠나 8일에는 아라파에 집결하고 9일에는 그 언덕 위에서 거행하는 의식으로 최고조에 달한다. 일몰과 함께 무즈달리파에 급히 달려간다. 10일에는 미나에서 세 기둥이 있는 돌무덤에 돌을 던지고 염소와 낙타를 제물로 바친다. 그 날은 '이드 쓰 조하'에 해당한다. 여기에서 행사는 일단락되고 순례자는 머리를 깎고 손톱을 자르며 전면적인 '청정(淸淨)' 상태로부터 반쯤 해제된 상태로 들어간다(타할르). 카바에서의 행사를 마친 다음 다시 '청정'의 상태로 사파, 마르와의 언덕에 순례(움라)를 한다. 이들 행사 중 카바에서 '검은 돌'을 만지는 행사, 미나에서 '사탄' 모양을 한 비석에 돌을 던지는 행사는 <코란>에 뚜렷하게 나와 있지 않으나 마호메트가 순례할 때 거행한 것으로 믿어져서 순례 행사에 넣어지게 되었다. 이와 같이 순례를 함에 있어서는 의례적(儀禮的)으로 '청정(淸淨)'의 상태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며 속계(俗界)에서 입는 옷을 벗어 버리고 무늬 없는 순례복을 입게 된다. 이 상태에서는 수렵, 손발톱을 자르는 일, 향수를 바르는 일, 모자를 쓰는 것, 성교 따위는 금지되고 이와 같은 터부 상태는 순례 의식이 모두 끝나고 일상생활로 되돌아갈 때까지는 해제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된다. 18세기에 이르기까지 순례 기간에 메카에는 큰 시장이 서고 전세계의 산물이 모이게 되었다. 순례는 전세계의 이슬람 교도가 일당에 모이게 되는 기회이며, 이민족(異民族)의 이슬람 교도간의 코뮤니케이션을 위한 중간 역할을 하고 공통된 의식에 의한 교류와 결속의식이 강화되고 새로워지는 것을 강하게 실감할 수 있다.
또한 성자(聖者)의 묘소 참배는 '즈이야라'라고 부르며 앞서 말한 '하지'와는 구별된다. 메카 순례가 끝난 뒤 순례자는 메디나에 있는 마호메트 묘에 참배하는 것이 보통이다. '시아파' 교도에겐 특히 이라크 남부에 집결되어 있는 '이맘' 순교지의 묘당(廟堂)에 참배하는 것이 메카 순례 못지 않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수피 성자묘(聖者廟)에 참배하는 것도 종교적으로 같은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겠다. 성자의 탄생일에는 성지에 시장이 선다.
카바
[편집]Ka'ba
이슬람교의 예배와 순례의 중심. 이슬람 이전으로부터 고대 아랍족의 지방적 성역(聖域)이었음은 확실하다. 그 주위는 성역화되고 전투, 수목 벌채, 동물 살해는 종교의례상 금지되었고 또한 죄인의 피난처이기도 하였다. 건물은 신성한 주력(呪力)을 가지며 그것에 접촉하면 하람의 상태가 된다. 마호메트는 메디나기(期) 어떤 시기부터 예배의 방향(키블라)을 카바로 바꾸고 이곳을 순례하는 일과 결부시켰다. 이에 이슬람 이전의 아랍족 성지가 이슬람교 성지의 중심으로 전화(轉化)되고 동시에 이슬람 이전의 신성한 여러 관념이 변용(變容)되어 계승되었다. <코란>에는 아브라함의 종교와 카바가 결부되어 있으며 이를 근거로 이슬람교의 카바 전설이 발전하게 되었다. 현존하는 건물은 네모꼴이며 네 귀퉁이는 거의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있다. 건물 내부에는 숭배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놓여 있지 않다. 이곳의 '검은 돌'과 샘은 신성한 힘을 갖고 있다고 믿어지고 있다.
카바의 검은 돌
[편집]Ka'ba-
카바 동쪽의 벽에 박혀 있는 검붉은 돌을 말하며 순례자가 손으로 만지거나 이것에 입맞춘다. 이슬람 이전부터 신성한 물체(페티시)였으며 <코란>에는 직접 언급되어 있지 않으나 이 접촉 행위가 의식의 일부로 되어 있다. 이슬람의 전설에 의하면 이 돌은 하늘로부터 직접 내려진 돌이라 하고,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의 도움으로 카바를 세웠을 때 천사 가브리엘이 하늘로부터 가져와 당시는 흰 돌이던 것이 인간의 죄와 접촉되면서 검은 색으로 변했다고 설명한다.
키블라
[편집]qibla
예배의 방향으로 메카의 카바를 향한 방향을 가리킨다. 예배를 드릴 때에는 일정한 방향을 향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셈족(族)의 관념을 받아들인 것으로 이슬람 교도는 헤지라 직후에 유태 교도를 본받아 예루살렘을 향하여 예배를 드렸으나 그 후 이슬람 교단과 메디나의 유태 교도 사이의 관계가 변화됨에 따라 메카를 키블라로 정하였다. 모스크는 어디든지 키블라를 항하여 지어져 있다. 동물을 제물로 바치는 경우에는 이 동물의 머리를 키블라에 향하도록 한다.
지하드
[편집]jihad
성전(聖戰)을 뜻하며 종족의 약탈이 '신을 위한 것'이라는 목적에 결부된 것은 마호메트의 메디나 시대인 것으로 추측된다. 처음에는 주로 '무하지룬'이 한 약탈행위와 다시 이슬람 교단과 연합한 종족이 이슬람교에 반대하는 종족에 대한 약탈과 원정행위를 종교적으로 정당화시킨 관념이다. 이 관념은 초기 교단에서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으나 후기 이슬람교에서는 이러한 관념이 희박해지고 수피적 관념에 근거하여 해석하게 되었다. 그러나 18세기 복고운동(復古運動)이 전개되는 가운데 이러한 관념이 또다시 부활되었다. 서부 아프리카에서는 19세기초 유목민인 후르베(후라니)족의 지지를 얻은 우스만 단 포리오가 하우사족의 지배층에 대하여 지하드를 선언하고, 1809년에는 소코트를 중심으로 이슬람적 신정국가(神政國家)를 수립하여 서아프리카 최대의 국가를 형성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중에는 오스만 터키의 칼리프가 영국에 지하드를 선언하였으나 아랍의 일부는 오스만의 지배에 반대하여 이를 인정하지 않고 반란을 일으켰다. 19, 20세기에는 제국주의 지배에 반대하여 식민지의 많은 이슬람교도가 지하드를 선언하였다. 정치적 독립을 획득한 뒤의 오늘날에 있어서는 경제적 자립을 위한 노력으로 해석하는 세속화된 새로운 해석을 튀니지에서 엿볼 수 있다.
샤하다
[편집]shahada
이슬람교의 신앙고백. "알라 외에 신은 없으며 마호메트는 알라의 예언자이다"라고 하는 일정 구절로 된 고백. 예배·자카트·순례·단식과 더불어 '5주(五柱)'를 구성한다.
이드 알 피토르
[편집]'Id alpitor
이슬람교의 정규축제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의 하나. 라마단월(月)의 단식 종료 축제이며 모든 교도가 모여서 예배를 드린다. 이것은 이드 르 아드하의 예배의식과 같이 가뭄이나 일식·월식에 대한 예배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고대 형식을 지니고 있다. 예배 시각은 일출부터 정오까지의 사이로 정해져 있다. 이 축제는 3, 4일 계속되는데, 신도들은 새로 옷을 지어 입고 친지를 방문하며, 서로 선물을 교환하여 축하하고 묘에 참배하기도 한다.
이드 알 아드하
[편집]'Id alAdha
이슬람교의 중요한 정규 축제 중 하나로, 이슬람력 12월 10일에 열리는 제물을 바치는 축제. 이슬람 이전에 메카 근교에 있는 마나의 골짜기에서 있었던 제물봉공(祭物奉供) 습관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순례자뿐만 아니라 일반 신도들도 한 사람에 염소 한 마리씩(낙타는 일곱 사람이 한 마리)를 제물로 바치고, 그 고기의 3분의 1은 자기가 먹고 나머지는 다른 사람에게 주거나 가난한 사람에게 주는데, 이 물건들은 신의 것으로 간주하여 매매하지 못한다. 신도들은 깨끗한 옷을 입도록 되어 있다.
율 법
[편집]샤리아
[편집]shari'a
이슬람교의 율법이며 규범체계(規範體系)이다. 이것은 신이 정해준 계시법(啓示法)으로서 종교적 의무, 개인과 사회생활, 상업, 형벌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규정하고 있다. 이 율법 관념에서는 세속적인 법영역과 종교적인 의무관념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고 사회규범은 무엇보다도 종교적 의무관념 그 자체이다. 모든 행위는 다음과 같은 5분법(五分法)의 기준에 의하여 분류된다. (1) 의무적인 행위 (2) 권장되는 행위 (3) 시비를 문책하지 않는 행위 (4) 비난을 받지만 금지할 수 없는 행위 (5) 금지된 행위. 이슬람법의 근원은 <코란>과 하디스이며 이를 종합한 것은 이지마이고, 계시의 본문과 해석의 적용은 이지마에 따르며 이지마가 판단 기준이 된다. 이와 같이 이슬람법 체계가 학문적으로 확립된 것은 이슬람력 3세기였으며, 이후 법체계로서 새로운 원칙의 도입은 없었고 기본적으로 자기의 것으로 생각된다. 이 이슬람법의 법관(法官)은 카디라고 하며 점차 세속적 권력 아래 놓이게 되어서 결국 세속적 권력의지에 밀착되어 간다. 세속적 권력을 위한 세속법은 일반적으로 발달하지 못하고 있었으나 후대에 와서 '카눈'이라고 하는 일정한 법영역(法領域)을 갖게 되었다. 또한 세속적 권력은 '마라림 법정(法廷)'을 가지고 자기의 재판기구로 삼는다. 샤리아에 종속되는 법체계로는 지방적 관습법인 '아다' 내지 '우르프'가 있어 왔다. 이 샤리아에 관한 학문이 법학(피크)이라고 일컬어지고 법학자 '파키'가 샤리아의 전문해석자였다. '파키'라는 말은 라틴어의 'jutisprudens'의 역어로 추정된다. 법관인 '카디'는 '파키'의 자격을 갖춘 자를 말한다. 여기에 가장 일반화된 법학서의 하나인 마리키 법학파의 이븐 아비 사이드가 편찬한 <리사라>(<要綱>)의 목차를 보고 그 내용을 알아보기로 한다(전45장). 제1장 신학적 문제, 제2장부터 24장까지 종교적 의무, 제25장부터 희사(喜捨), 제28장 순례, 제29장 제물·수렵·할례·금지된 음식, 제30장 지하드, 제31장 서약, 제32∼33장 혼인·이혼·별거수당, 제34장 매매계약, 제35장 유산·담보·차금(借金)·불법취득, 제37장 살상·형벌, 제38장 증인, 제39장 상속법, 제40장 각종 종교적 의무, 제41장 할례·삭발·의복, 제42장 음식, 제43장 사회적 규칙·코란 독송(讀誦), 제44장 의술·주부(呪符)·노예에 대한 관용, 제45장 꿈·노름 등. 현대의 이슬람법은 아직도 신분법에 주로 많이 남아 있으며 민법전(民法典)에 많은 것이 강력하게 반영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수나
[편집]sunna
특정한 관습을 사회와 개인을 구속하는 규범적 가치로 하여 그것의 강제력을 인정한 것. 이슬람 이전의 아랍 사회에서는 종족공동체의 수나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각 종족은 그들 각자의 선조가 가졌던 수나를 자랑으로 삼고 그 관습에 따라야 한다는 자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대하여 <코란>은 알라의 수나를 강조하고 메카의 사람들이 조상의 수나에 집착하고 있음을 비난하였다.
수나는 처음에 <코란>에 엄밀하게 규정된 것 이외의 이슬람 교단의 관습을 가리켰으나, 법학 형성기에 마호메트의 수나로 한정되게 되었다. 즉, 교단 전체의 관습이 아닌 마호메트 자신이 설정한 관행이 규범으로 인정된 것이다. 그러나 전자의 관습은 '수나에 속하는 것'을 의미하는 '수니파'라는 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에 대해 '시아파'는 마호메트의 수나는 인정하나 그가 죽은 뒤에 교단이 취한 조치는 인정하지 않는다. 수나에 대한 대립개념은 '비도아'로 이는 교단의 관습으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하여 엄격히 배제된다.
이지마
[편집]ijma'
이슬람법의 네 가지 기본 원리 중 하나로 종교공동체(교단) 내부의 '견해의 일치점 도달'을 의미한다. 이슬람교의 종교공동체 전체의 기성견해의 합치가 교리해석상 및 법학상 구속력을 갖는다는 원칙이 확립된 것은 이슬람력 2세기였다. 이 원리는 처음에는 내부의 발전 폭을 허용하는 것이었으나 뒤이어 법학(신학)자가 체계화한 교리에 봉인을 누르게 되어 그 변경을 불가능한 것으로 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되어 버렸다. 다시 말하면 적극적이며 다이내믹한 원리로부터 부정적이며 제약적인 역할로 변하여 이슬람법의 경직성(硬直性)을 가져온 원인이 되고, 이에 의한 정통성이 사회적 강제로서 또는 법으로서의 힘을 갖게 되었다. 이지마는 하디스가 <코란>을 보완하고 종합한 것처럼 다시 하디스를 보완하고 최종적으로 종합한 것으로 되었다. 이와 같이 해서 <코란>과 하디스 해석의 확실성을 보증하는 것이 이지마로 되었다. 여기에 이지마 무류설(無謬說)이 확립되어 '이단(異端)'에 대한 판단의 기준이 성립되었다.
일부다처혼
[편집]一夫多妻婚
이슬람법에는 남성이 네 사람까지 자유민의 처를 거느릴 수 있다는 것을 허가하고 있으나 이를 권장하지는 않고 있다. 그러나 여자 노예의 수는 제한하고 있지 않다. 네 사람의 처를 갖는 경우에 있어서는 그 네 사람을 공평하게 취급할 것을 조건으로 하고 있다. 하디스는 결혼 조건으로서 여자편 보호자의 승낙, 증여재산의 지불, 그리고 당사자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것을 필수조건으로 하고 있다. 현대의 이슬람계 제국은 일부다처제를 제한하는 방향으로 가족법의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그런데 여성문제의 소재는 오히려 남편의 일방적인 거부에 의하여 이혼이 성립한다는 데에 있다.
조 직
[편집]운마
[편집]unnma
이슬람의 교단(敎團) 내지 종교공동체. 이슬람이전과 같은 종족적 결합이 아니고 이슬람의 유대를 성립케 하는 결합이다. 샤리아에 의하여 통합되는 보편적 종교사회가 '운마'로서 이념화되고 정통파 이슬람은 개인적인 교단지도자에 대해서가 아닌 '운마'에 카리스마를 부여하였다. 현대에서는 초민족적 '운마'에의 귀속(歸屬)과 민족적 통일과의 관계 재확인이 민족주의 과제로 되어 있다.
이맘
[편집]imam
<코란>에는 '징표(徵表)' '모범' '패턴' '지도자'의 뜻으로 나타나 있다. 이슬람의 용어로서 (1) 집단적 예배의 지도자, (2) 이슬람 종교공동체의 지도자로서의 칼리프(수니파), (3) 시아파의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세 가지가 있다. (1)은 예배 의식에 통달한 장로가 예배자의 열선두에 서서 예배를 인도한다. 일반적으로 모스크에는 거기에 소속된 이맘이 있다. 그러나 본래 이 지위는 직업적인 것이 아니고 또 특정한 자격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3)시아파 '이맘' 관념의 핵심은 이슬람 세계의 성속(聖俗)에 걸치는 지배권을 알리는 자손이 갖는 것을 인정하는 데에 있다. 알리의 자손에 혈연적 카리스마가 인정되고 '이맘'은 무류(無謬)의 지위로 높아지게 되었다. 기타 수니파의 4학파(四學派) 스승의 경칭에도 쓰인다.
울라마
[편집]ulama
'학자'를 뜻하며 주로 이슬람법의 법학자를 말한다. 이슬람에서는 본래 협의의 '성직자' '사제(司祭)'를 인정하지 않으나 이 울라마가 역사적으로 형성됨에 따라 넓은 의미의 성직자에 해당하는 말이 되었다. 11세기 이후 울라마는 신학교(마드라사)에서 학문을 배우고 교단 전체의 '이지마'를 대표하게 되었다. 세속적 권력에 대해서도 이슬람 교도의 사회를 대표하고 대변하며 왕조(王朝)도 이를 존중하였다. 왕조는 울라마의 일부를 그들 체제에 편입하였으나 울라마가 전면적으로 그 체제 속에 흡수되지는 않고 권력층과 피지배민의 중간에 위치하여 정치적인 기능을 발휘하였다. 현대에는 '근대파'에 대치된 '보수적'인 지도자의 위치에 놓이게 되었으나 전통적으로 대중 지도력을 지금도 유지하고 있다.
모스크
[편집]mosque
정확히 말하여 '마스지드'라고 하며 이 말이 와전된 것. 이슬람의 공공예배당. 내부에 신상(神像) 같은 것은 일체 없다. '키블라'의 방향을 향하여 세워져 있으며 이 때문에 정면 벽 중앙부의 움푹 들어간 곳이 '메헤라브'로서 설계되어 있는데 이것이 키블라를 가리킨다. 그 옆쪽에 설교단인 '민바르'가 놓인다. 이것은 마호메트 시대에 이미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모스크의 건축에는 반드시 첨탑(尖塔:미나렛)이 있게 마련이고 몇 개의 첨탑이 모스크의 소재를 표시한다. 여기에서 예배를 알리는 '아잔'을 '무에진'이 소리쳐 왼다. 모스크의 내정(內庭)에는 통상 예배 의식에 선행하는 '청정(淸淨)'을 위하여 손발과 얼굴을 씻도록 물터가 설치되어 있다. 모스크는 일반적으로 도시의 거주 지구마다 세워져 있고, 그 외에 도시의 중심부인 상가 '바자르' 옆에 중심적인 큰 모스크가 세워지는 형식이 이슬람 도시의 공통된 현상이다. 모스크는 때때로 신학교(마드라사)를 겸하며 시민의 집회장이 되기도 한다.
와크프
[편집]Waqf
모스크와 기타 자선을 목적으로 하는 공공시설을 재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하여 기증된 토지·가옥 등의 재산으로서 한 번 와크프에 기증된 재산은 다시 양도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와크프를 관리하는 것은 모스크의 울라마였으나 최근에는 국가의 와크프성(省)에서 이를 관리하는 경우가 많다. 와크프의 농지(農地)는 지역적으로 다소 차이가 있으나 전 농토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며 이것이 농지 황폐화의 원인이 된 경우가 많다.
이슬람교의 교파와 분파
[편집]4학파
[편집]四學派
'마즈하브(법학파)'의 복수(複數)인 '마자히브'라고 불린다. 수니파는 내부에서 이 4학파를 공인하고 있으며 이들 간의 차이도 인정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분파(sect)가 아니라 학파인 것이다. 이들 법학파는 8세기 후반부터 9세기 전반의 학자들을 학문적 선배로 받들고 그 이후에는 이들 선배 학자들이 세운 이론을 변경할 수 없는 것으로 하고 있다. 하나는 하나피 학파로서 압바스 칼리프가 이들을 보호하였다. 뒤에 오스만 제국, 무갈 왕조의 공인 학파가 되었고 양 왕조의 붕괴 이후에도 이들 왕조의 지배하에 있었던 여러 나라들은 이 학파에 속하게 되었다. 말리크 학파는 전통주의적인 메디나 학파로부터 발달하였고 하디스의 우위(優位)를 주장한다. 현재 이집트와 북아프리카의 유력한 학파로 되어 있다. 샤피 학파의 원조는 위에 말한 말리크 학파와 하나피 학파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들이 법학의 이론적 기초를 체계화하였다. 현재 이집트 남부, 동아프리카, 팔레스티나, 인도네시아 등 여러 지역에 퍼져 있다. 마지막으로 한발리 학파는 앞서 말한 여러 학파의 사변적 경향(思辨的傾向)에 반발하여 일어난 것으로 현재는 '와하브파(派)'의 사우디아라비아 공인 학파이며 가장 엄격한 성격을 갖고 있다. 이 네 학파 외에 '12이맘파'를 '분파(分派)'로 보지 않고 하나의 '학파'로 인정하여 '쟈우하리 학파'라고 일컬어 위의 4학파에 추가하기도 한다.
수니파
[편집]Sunni派
'이슬람교 공동체의 관례에 따르는 것'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이슬람교의 '전통파'에 해당된다. '4학파'는 이 파의 내부에서 공인되어 있으며 수니파 교도는 이 4학파 중 어떤 것에 귀속(歸屬)되게 되어 있다. 또한 아부 바크르, 우마르, 우스만, 알리의 네 칼리프를 정통 칼리프로 인정한다. 수니파는 이슬람교 공동체 전체의 '이지마'를 우선(優先)하는 권위로서 인정하고 있으며, 종교공동체를 초월하는 개인적인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로 말미암아 교단의 기성 관례로부터 '이탈(비도아)'하는 것은 '이단(異端)'에 가까운 관념으로 본다.
시아파
[편집]Shi'a派
'알리의 일당(一黨)'을 뜻하며 이슬람 세계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분파. 처음에는 아랍족 사이의 정치적 당파로서 알리와 그의 자손을 정치적 지도자로서 추앙하였다. 이것이 이라크에 뿌리를 박게 되어 다마스커스로부터의 지배를 반대하는 정치 및 사회운동으로 바뀌었다. 특히 중요한 사건은 우마이야 왕조의 초대 칼리프가 죽었을 때에 알리의 차남인 후세인이 아라크측으로부터의 요청으로 메디나를 떠나 이라크 왕국을 수립하려고 하였으나 우마이야 왕조의 군대에 의하여 저지되고 도중에 전멸된 사건이다. 이것은 후일에 시아파의 종교 감정을 크게 자극하여 '억압자'에 대한 그들의 증오를 심화시킨 결과가 되었다. 이 후세인의 순교에 대한 보복으로서 무크타알이 우마이야 왕조에 대하여 이라크 주민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는 알리의 다른 계통의 자손과 연결된 것이었다. 우마이야 왕조 말기에 시아파 계통의 지하 조직이 활발해져서 종교·정치운동이 높아갔다. 압바스 왕조는 이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권력을 잡은 다음에 시아파를 억압하였다. 시아파 교리의 특색은 이맘론(論)(이마마)에 있다. 알리 자손의 이맘은 그들 종파(宗派)의 본질적 부분이 되어서 카리스마화(化)되었다. 이맘은 신에 의하여 직접, 또는 선행(先行)하는 이맘에 의하여 선택되며 무류(無謬)의 것으로 신과 인간의 중개물(仲介物)이다. 수니파의 경우 신도는 종교공동체에 가입함으로써 비로소 구제될 수 있는 조건을 얻게 되는데, 시아파에 있어서는 이맘과 연결됨으로써 구제를 받는다. 이맘은 마호메트 이상으로 숭배받아 "그 시대의 이맘을 모르는 자는 사교도(邪敎徒)로서 죽게 된다"고 믿었다. 이맘을 숭배하는 자는 모두 그 죄를 용서받게 된다고 하였다. 이맘은 신의(神意)의 유일한 권위 있는 해석자로 그 말은 <코란>에 우선하는 것으로 되었다. 이것은 왕권(王權)과의 결합에 의하여 아랍에서 기원된 것이면서 이란적인 왕권설을 찾아볼 수 있다. 이맘의 수난사상(受難思想)이 기본적인 특색으로 되어 있어 시아파는 이맘묘(廟)와 자손들의 묘(廟)를 성지로 하여 '순례(자아라)'한다. 시아파는 이맘의 계보를 따라 내부적으로 여러 갈래로 분열되어 있다.
12이맘파
[편집]十二Imam派
시아파 중에서 가장 유력한 분파. 이맘의 계보가 12대로 그치고 최후의 이맘은 878년에 '은적(隱寂)'한 상태로 들어가며 미래에 '마하디('메시아'의 관념에 해당)가 되어 재림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가 은적하고 있는 일정 기간 동안에 특정된 학자가 이 이맘과 접촉하고 그의 뜻을 인간에게 알려주게 된다고 믿었다. 이 파는 16세기에 사파비 왕조 이란의 공인교회가 되었고, 현재까지 이란에서는 이에 따른 종교와 사회적 전통이 계속되고 있다. 성지(聖地)는 주로 이란 국외에 있으며, 이라크 남부의 케르베라(후세인이 순교한 곳), 나자후(알리가 묻혀 있는 곳)가 주요한 순례지이고 동시에 그 곳에 이 파의 신학교가 있다. 인도에서는 라크노우가 기타 몇 곳에 시아파 교도의 소수파가 존재하고 있다.
7이맘파
[편집]七Imam派
시아파 계통의 한 분파로서 이맘의 계보를 따라 6대까지는 12이맘파와 계통을 같이하고 있으나 제7대 이맘에 이스마일(760년에 죽음)을 세우고 이 이맘을 '카임(마하디)'이라고 부른다. 이런 점으로 해서 그들은 '이스마일파'라고 부른다. 또 '비의(秘義:바틴)' 설이 과장되어 '바티니파(派)'라고도 부른다. 이 파의 초기 역사는 분명치 않으나 9세기 말에는 조직이 명확해졌다고 생각되며, 969년에는 이 이맘의 피를 받은 파티마왕조가 이집트를 지배하였다(1171년까지). 1021년에는 최초로 드루즈 교도가 이 파로부터 분리되었다. 1094년에는 동 왕조의 무스탄실이 죽은 뒤 후계권을 둘러싸고 두 파로 분열되어, 후기의 파티마 왕조의 입장에 선 무스트리파(派)와 이에 반대하였던 니자르파로 나누어진다. 후자는 또 '암살자파'라고도 불리며 특히 셀주크 왕조에 의하여 위험시되었다. 현대의 인도·파키스탄의 정치가인 고 아가칸은 이 계통 일파의 중심적인 존재였었다. 조직은 별도로 하고 교리면에서는 근본적으로 12이맘파의 것과 큰 차가 없다. 그것의 철학체계 속에는 신(新)플라톤주의의 영향이 짙다. 유일자(唯一者)로부터 유출(流出)된 영지계(英知界)는 일곱 사람의 예언자 아담, 노아, 아브라함, 모세, 예수, 마호메트, 이스마일에 의하여 대표되고 각각 두 번째 유출된 영혼계의 대표자가 수반하게 된다. 이것은 영지계의 존재가 인성화(人性化)된 것으로서, 가령 모세에게는 아론, 예수에게는 베드로, 마호메트에게는 알리가 수반하는 것과 같다. 이맘에게는 영혼계의 인성화된 '논증(후자:司敎 위치에 가까운 것)'이 수반한다. 후자는 이맘으로부터 초자연적인 지식을 받아 인간계의 고사가 된다. 이러한 도식(圖式)에 따라 영지계와 인간계의 관계에 있어서는 이맘이 불가결의 존재로서 이맘이 없으면 인간계가 성립할 수 없다고 알려져 있다. "신은 그 지식을 인간에게 가르치고 인간을 논증과 목적으로 이끌기 위하여 이맘을 앞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고, 이맘이 현재(顯在)할 때에 이 '논증'은 숨겨지고 이맘이 나타나지 않을 때에는 이 '논증'이 나타나게 된다. 종교적 구제는 인간이 이맘의 힘으로 영지계에로 향상하고 유일자(唯一者)와 합일하게 되는 경지를 말한다. 이스마일파는 일반적으로 적대적인 교계로부터 이슬람의 종교를 파괴하는 자로 비난을 받지만 이것은 옳지 않다. 그들 측의 문헌에 의하면 그들은 이슬람의 모든 종교적 의무를 엄격하게 이행할 것을 강조하고 결코 외면적 경건(샤리아의 규정)과 내면적 비의(秘義)를 분리하여 가르치지는 않는다. 외부에서는 이스마일파의 특색을 몇겹으로 된 입문식(入門式)에서 찾으려 하지만 초기 이스마일파의 문헌에는 입문식에 관한 규정이라곤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그들의 특색은 사실상 그들이 다양한 교양을 지닌 여러 계층에게 각각 알맞게 교리를 펴고 특히 민중에게 이해하기 쉽도록 가르쳤다는 데에 있다고 생각된다.
무타질라파
[편집]Mutazila派
이슬람의 한 신학파로서 이슬람의 신학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초기에는 윤리·종교운동으로, 8세기에는 '행위'의 측면을 강조한 '카리지파'의 극단적인 입장 및 정치적 순종파의 '신앙'으로 충분하다는 양자의 주장을 다 같이 비판하고 중간적 입장을 취하였다. 이어서 아랍인과 이라크의 비아랍 교양층간의 이원론에 향해진 전도운동의 교사로 나타난다. 여기에서 그들은 그리스 철학과 접촉하고 단순한 메디나적 경건함과 서아시아의 헬레니즘 문화·그노시스설 사이에 있는 거리를 메우는 역할을 하고, 비아랍의 교양층이 이해하기 쉬운 개념으로 이슬람의 신앙을 교의화하였다.
9세기에는 사변적 철학파(思辨的哲學派)로서 이슬람의 교리를 이성(理性)의 입장에서 요청하고 해석하였다. 이러한 경향의 무제한된 진행은 정통파로 하여금 이슬람교의 위기의식을 불러일으키게 하여 910년에 그때까지 무타질라파에 동조하였던 아샤리가 이탈하고, 무타질라파의 방법을 정통파의 도구로 이용하는 형태로 그것에 대항하는 정통적 스콜라 신학을 처음으로 종합적으로 체계화하였다. 이 신학이 최종적으로 승인을 받게 되었다. 무타질라파의 철학은 개개 철학자의 다양한 경향을 보여 주는 것으로, 여기에 어떤 일관된 교리체계가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나 그 특질로서 이슬람과 '의(義)'의 관념과의 조화 문제를 들 수 있다.
즉 신의 의(義)가 인간 이성으로부터 유래하는 개념으로 요청되었다. 이에 대해 정통파 신학은 신을 '무한의 힘'으로 보며, 신을 '무한의 의(義)'로 함은 '신의 힘'에 제한을 두게 된다 하여 반론(反論)했다. 이 논쟁은 또한 '자유의지론' 대 정통파의 '예정설'로 발전했다. 그리고 <코란>이 '신의 말'이냐 아니냐를 두고 논쟁이 일어나고 정통파 신학에서는 그리스 철학에 반대하면서 로고스설(說)인 줄 모른 채 <코란>이 '신의 말'로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라는 점을 확인했다.
수피즘
[편집]Sufism
이슬람의 신비주의. '수피'는 이슬람의 신비주의자. '수프'란 '양털 옷'을 가리키며 그것을 입은 자가 신비주의적 생활에 몰두하는 자를 가리키게 되었다.
그리고 8세기 후반에 이 말은 이라크의 쿠파에 처음으로 나타나고, 9세기에는 모든 이라크에 일반화되었으며, 11세기에는 모든 이슬람의 신비주의자에게 사용되었다. 이 사상은 초기 이슬람의 '금욕주의'(즈프드)에서 시작되며 <코란>과 '수나'로부터 도출되는 태도이나 그 금욕주의의 기초는 동방 그리스도교의 것과 공통되었다. 8세기에는 그들의 집회로 여겨지는 최초의 흔적이 종교적 경건을 구하여 담론(談論)하기 위한 소집단으로 나타나 그들에 의한 <코란>이나 그 밖의 종교적 작품의 독송(讀誦)이 차차 독자적이며 의식적(儀式的)인 '쥐클(알라의 이름을 칭송하는 連禱)'로 발전하고 또한 망아(忘我)의 상태까지 수반하는 '신비적 제창(神秘的齊唱)>(사우마)'으로 발전했으며, 이는 신비적 망아로 이끌기 위해서는 불가결의 의식이 되었다. 동시에 신에 대한 기본적 태도가 변화하고 초기에 볼 수 있었던 신의 분노에 대한 두려움에서 신에 대한 '사랑의 감정'으로 이행한다. 이것은 초기의 그리스도교적 신비주의와 관념적으로도 흡사하다. 이 관념의 변화는 수피 교단(敎團)의 조직화에 대응하고 있다. 그 지도자는 정통적 우라마 자체로부터 9세기 이후에는 주로 도시의 서민층을 기초로 하는 민중종교운동으로 전화(轉化)한다. 수피즘은 정치적 운동의 성격도 가끔 지니며 또한 비(非)이슬람 지역에의 전도운동 조직이기도 했다. 수피에게 있어서 종교적 진리에의 길은 정통적 법학·신학의 '지식(이룸)'이 아니라 인격적인 종교 경험, '대오(大悟)'의 직관지(直觀知)이며 이슬람법(法)은 이것의 전제에 불과했다.
와하브 운동
[편집]Wahhab運動
18세기 중엽에 아라비아반도 내부에서 일어난 '복고주의'적인 운동으로 엄정주의적인 한버리 법학파(法學派)에 속하는 13∼14세기의 이브느타이미야의 계통에 선다. 이슬람 관행의 이완에 항의하고 성자숭배나 수피즘의 '신규관행(新規慣行)'을 이단이라 하여 배척하며 그것을 용인한 우라마를 공격하였다. 현재의 사우디아라비아는 이 운동으로 일어났으며 통일된 왕국이 되었던 것이다.
바하이교
[편집]Bahai敎
12이맘파(派)로부터 19세기말에 생겨난 신흥종교. 교조 바하울라(1817∼1892)는 지상(地上) 평화주의와 인류 통일사상을 발전시켜 이슬람교의 범주에서 이탈했다. 이란을 위주로 하며 미국 등지에 신자가 있다.
문 화
[편집]아라비아어
[편집]Arabia語
셈어족(語族) 가운데 남방 셈어파에 속한다. 한편에선 북서(北西) 셈어파(헤브라이어, 가리트어, 아람어)와 몇 가지 공통점을 지녀 이것과의 중간 쯤에 해당된다. 아라비아어의 가장 오랜 단편(斷片)은 기원전 853∼626년에 아리비에 대한 전투를 기록한 아시리아어의 글에 약 40개 고유명사로 나타나 있다. 이 원래의 아라비아어에서 고전 아라비아어에의 중간에, 즉 3세기에서 6세기의 시기에 아라비아의 대부분에 걸쳐서 고전 아라비아어에 가까운 여러 방언이 형성되었다. 이 시기에는 아람어의 차용어(借用語)가 다량으로 유입되었으나 이는 그리스도교, 유태교와의 접촉에서 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쓰여진 아라비아어의 발전에 관해서 살펴본다면, 아라비아 문자의 가장 오랜 텍스트는 서기 300년 전후의 시나이에서의 란무 신전(神殿) 벽에 그린 세 가지 장식화에서 볼 수 있다. 또한 같은 시대의 그리스도 교회 비문에서도 볼 수 있다. 이 사실은 아라비아 문자가 그리스도교 전도자의 손으로 만들어졌음을 말해준다. <구·신약성서>는 부분적으로 이슬람 이전에 아라비아어로 번역되어 나왔다고 추정할 수 있다. 시의 발달은 나지드의 베두인족(族)에게서 볼 수 있으며 6세기말에는 순문어(純文語)로서 성립, 실제로 아라비아 전토에서 같은 형태로 쓰였다. 이슬람기(期)의 고전 아라비아어는 <코란> <자히랴의 시>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이것은 9∼10세기 이후에 조직화·기준화 되고 문법이 명확하게 규정되었으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형태가 기본적으로 계속되고 있다. 지방별로 일상어(日常語)는 독자적인 발전을 했으나 저작에 있어서는 기준문어(基準文語)를 사용하고 있다.
아라비아 문자
[편집]Arabia文字
페니키아 아람 문자에서 시작된 나바타이 문자에서 발달한 것. 이슬람 시대에 들어오자 <코란>을 정확하게 기록하기 위해 불완전한 문자가 정비되었다. 또한 훗날에 종이를 이용하게 되자 카람(華葦)을 사용한 서법(書法)이 보급되어 각종 자체(字體)·서체(書體)가 생겨났다. 아라비아 문자는 이슬람의 확대와 함께 인도·아리아어계(語系)의 페르시아어·파슈트어·서파키스탄의 우루두어에 미치고 또한 터키어(오스만 터키어)에 사용되었으나 터키 공화국은 1928년에 라틴문자를 채용하였다.
사라센 문화
[편집]Sarasen文化
서력 9∼12세기를 정점으로 하는 이슬람 문화. 이슬람의 지배하에 놓인 다양한 민족의 종합문화로서 비(非)아랍의 지식이 적극적인 역할을 다했다. 오리엔트의 헬레니즘 문화를 조직적으로 계승 발전시켜 이를 기초로 하여 이란, 인도의 문화유산을 집대성시켰다. 이 문화유산은 계속하여 유럽에 계승되었으며 근대문화의 형성에 공헌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과 과학은 사라센 문화를 매개로 하여 11세기말부터 유럽측에 전달되었던 것이다. 우선 750∼850년의 시기에 앗바스 칼리프조(朝)의 장려 아래 외국의 과학서, 특히 그리스의 과학서와 나아가서는 인도의 것이 이슬람에서 조직적으로 변역되어 이슬람 문화의 형성을 준비했다. 사라센 문화의 특색은 상대적으로 신학의 영역에서 독립한 과학과 철학의 발전에서 볼 수 있다. 특히 과학 가운데에서도 의학이 두드러지게 발달했다.
9세기초에 칼리프의 하루느 르 라시드(786∼809)의 명령으로 수도 바그다드에 이슬람 최초의 병원이 이란 형식을 바탕으로 해서 세워졌으며, 이어 이슬람의 각 도시에 병원이 설치되었다. 정신병의 치료도 심리학 연구와 함께 발전했으며, 광학(光學)과 관련하여 안과의학(眼科醫學)도 일찍부터 발달했다. 의학은 왕후·귀족에 의해서 특별히 장려되었다. 처음에 의사는 네스리우스파(派) 그리스도 교도, 유태 교도 등이 많았다. 특히 저명한 의학자로서는 아츠 라지(865∼925), 이브느 쉬나(990∼1037)가 있었고 각각 라틴 이름으로 Rhazes, Avicenna로서 알려져 있다. 전자는 연금술(鍊金術)의 저술로 14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럽문화의 화학 지식의 거점이 되었으며, 후자 <카눈>의 저서는 15세기부터 17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유럽 각 대학의 교과서였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 학자로서도 후자는 중요한 철학사적 위치를 차지한다. 천문학과 수학은 밀접한 관계로 발달했으며 천문대가 각지에 설치되었다. 숫자에는 인도계 숫자가 사용되어 수리(數理)의 발달을 촉구했다. 그리고 연금술도 특히 중요한 분야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