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종교·철학/한국의 종교/단 군 신 앙/단군신앙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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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신앙의 역사〔개설〕[편집]

檀君信仰-歷史〔槪說〕

단군은 한국의 건국신화에 있어 처음으로 나라를 세운 국조(國祖)이며 신인(神人)이다. 단군의 건국신화는 역사 기록으로는 고려의 중 일연(一然)이 쓴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신화 형식으로 처음 나타나 있으나 실제로는 상고시대부터 한민족의 정신생활 내용으로 소박한 민족신앙의 핵심이 되어 왔을 뿐 아니라 천손(天孫)을 자부하는 민족주체의식은 역사상 외족의 침략에 항거하는 정신적 지주가 되기도 하였다.

한국사에 직접 단군을 국조로 신앙하는 사상이 드러난 것은 원(元)나라의 압박을 받던 고려 충렬왕(忠烈王)때 민족의식의 자각에서 연유된 것이라고 볼 수 있으나, 단군신앙의 역사적 연원을 추구하여 보면 상고시대의 '제단정치(祭壇政治)'와 '제천신앙(祭天信仰)'에서부터 기원한 것으로서, 단군이라는 말이 제단설치 및 제천행사 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이 학자들의 통설이다.

그러므로 단군신앙의 역사는 단군신화의 내용인 태백산 신단수(神壇樹) 아래에서의 제천행위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종교적 신앙형태는 고대에 있어 부여의 영고(迎鼓), 삼한의 계음(契飮), 발해의 보본단(報本壇) 등으로 전승되었다는 학설이 있고, 중세에 들어와서는 고려의 팔관재(八關齋) 및 8성신앙(八聖信仰)과 민간신앙으로 전해 오는 구월산의 삼성사(三聖祠), 마니산의 참성단과 삼랑성(三郞城), 태백산의 제천단(祭天壇) 등이 모두 단군의 제천행사 및 단군에 대한 신앙행사와 관계가 있는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고려 말엽에 와서 직접 국조로서의 단군을 신앙 대상으로 하는 종교사상이 대두되었다. 당시의 역사기록인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보면 단군신앙과 직접 관계가 있는 전설로서는 주로 고구려의 구강인 서북지방에 전승된 선인왕검전설(仙人王儉傳說)과 국도왕검전설(國都王儉傳說)이 병행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전자가 종교사상을 중심으로 한 교조적 왕검전설이라면 후자는 민족역사를 중심으로 한 국조적 왕검전설이라 할 수 있으나, 사실은 이 두 가지 내용이 혼연일치되면서 당시 원나라의 탄압에 반항하는 민족의식의 자각이 필요해짐에 따라 국조단군신앙이 형성된 것이라 하겠다. 대체로 삼국시대에는 각국이 독자적인 건국신을 내세웠으나, 고려 때에 와서 <삼국유사>에서 기초국신을 '단군'이란 하나의 건국신으로 일원화하는 민족종교사상운동이 행해졌던 것이다.

단군신화는 논리적으로 삼국의 건국신화에 선행하는 일원적인 민족건국신화라는 면에서 한 '단군' 할아버지의 자손들로서의 일체감 형성의 필요상 삼국유민 일체화의 정신적 기조작업으로 유일한 개국시조로서의 유일 민족신인 단군을 직접 대상으로 하는 단군신앙이 대두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고려시대에 이미 단군의 도읍지라고 전하는 평양에 단군을 신봉하는 사당이 있었는지는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단군신앙은 다시 조선시대로 접어들면서 그의 사당이 평양에 건립된 것이니 이태조가 즉위한 해에 당시의 예조전서 조박(趙璞) 등에 의해 단군은 '동방시수명지주(東方始受命之主)'라 하여 평양부로 하여금 시제를 지내게 할 것을 건의하여 단군을 기자묘(箕子廟)에 합사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다시 세종때에 이르러 주부 정척(鄭陟)의 단군향사에 대한 상소에 의하여 단군묘(檀君廟)를 따로 건립한 다음 단군을 주벽으로 모시고 동명왕 주몽(朱夢)을 종사하였다. 그리고 세조때에는 단군의 위패를 '조선시조단군지위(朝鮮始祖檀君之位)'라고 고쳐서 봉사하게 되었고, 그후 때로는 단군묘를 중수하면서 향사를 계속하였다.

이와 같이 평양의 단군사당을 통한 조선시대의 단군신앙은 어디까지나 개국시조인 동시에 실존인물로서의 숭배였다고 하겠으며, 한편 민간신앙으로는 고려시대부터 전해 오는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三聖祠)에 위토까지 마련하여 두고 환인·환웅·단군의 3신을 제사하는 토속적이며 민간중심적인 단군신앙이 계속되었다.

다시 국조 단군의 숭배의식이 특별히 고조된 것은 조선 말엽의 외세 침입과 일제 침략을 받으면서였다. 이 무렵에 단군을 국조로 하는 역사연표(歷史年表)가 작성되고 단군 국조를 종교적 신앙 대상으로 하는 대종교(大倧敎)·단군교(檀君敎) 등이 발생하여 단군신앙의 교리를 체계화해서 민족주체의식과 자주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그 후 8·15해방은 다시 민족의 자주의식을 크게 자극하여 단군을 개국시조로 하는 단기연호(檀紀年號)의 사용을 국회에서 결의하였고, 단군이 나라를 세웠다는 10월 3일을 개천절이라 하여 국경일로 정하였다.

이에 수반하여 학계에서는 단군에 대한 역사·문화·민속·신화 등의 연구가 전개되고, 민간에서는 단군의 숭고한 이념으로 전해 오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정신을 받들어 민족문화의 발양과 민족의식의 고무를 목적으로 하는 사회단체로서 단군숭년회(檀君崇寧會), 단군숭모회(檀君崇慕會)·단군전(檀君殿)·단군봉찬회(檀君奉贊會) 등이 각지에서 차례로 건립되었다.

그리고 종교계에서는 단군국조를 신앙하던 대종교가 해외로부터 귀국함과 동시에 기성·신생의 많은 종단들이 단군을 신앙 대상으로 신봉하게 되었으며, 원래 단군신앙 계통이 아닌 종단에서까지도 단군을 곁들여 신앙하는 예가 늘어나고, 또 무속이나 사이비 종교에서도 표면으로는 단군신앙을 내세우는 예가 허다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단군의 개념도 건국신화에 의한 국조 또는 시조신으로부터 3신일체신(三神一體神) 내지 3신각개신(三神各個神)으로 변모되고, 또는 창조적 유일신(唯一神) 내지 각종 형태의 무속신(巫俗神)으로까지 변질되었다고 하겠다.

<柳 南 相>

고대사회의 단군숭배[편집]

古代社會-檀君崇拜

단군은 <삼국유사>에 인용된 고기(古記)에 의하면 평양성에 도읍하고 고조선을 건국하였으며, 다시 백악산 아사달로 도읍을 옮겨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다가 기자(箕子)로 말미암아 다시 장당경(藏唐京)으로 천도(遷都)하여 나이 1900살에 아사달에 숨어 산신이 되었다고 하며, 또다른 기록(<帝王韻記本紀>)에 의하면, 그는 조선지역의 왕이 되어 고시라(高尸羅)·고례(高禮)·남북옥저(南北沃沮)·동북부여(東北扶餘) 등의 지역을 다스리고 즉위한 후 1038년인 은(殷) 무정(武丁) 8년에 아사달산에 들어가 신이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주(周) 무왕 원년에 기자가 조선에 들어오기까지 164년간 조선에 왕이 없었다고 한다. 이 두 책은 단군이 바로 조선민족의 시조이며 국조(國祖)라는 것과 또 그가 시조 내지 국조로서 실재했던 인물이고 한국의 전민족이 하나같이 추앙해야 할 신앙 대상이라는 것을 전하여 준다. 그런데 고기(古記)나 본기(本紀)의 내용·체제 및 찬술한 연대가 알려지지 않고 있는데 단군의 시조 또는 국조신앙은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즉 <삼국유사>와 <제왕운기(帝王韻記)>가 저술된 시기를 전후하여 비로소 한국인의 의속(意俗)에 뿌리를 드리웠다고 생각된다. 왜냐 하면 신라·고구려·백제는 제각기 주변의 여러 부족을 흡수할 이데올로기의 제시로서 시조신화를 일정한 아키타이프(archetype) 혹은 신성규범(divine model)에 따라 윤색하고 시조묘를 건립하여 족적(族的) 유대를 강화하였다.

예컨대 신라는 남해왕 3년에 처음으로 혁거세의 시조묘를 세우고 사시(四時)로 이를 제사하다가 시조 탄강(誕降)의 땅인 나을(奈乙)에 신궁을 창건하여 그를 제사하고, 고구려에서는 고등신(高等神:朱蒙)과 각목부인상(刻木婦人像:河伯女=柳花)이 신묘(神廟)에 모셔졌고 동명왕묘(東明王廟)가 대무신왕 3년에 세워지고 백제에서는 온조와 원년에 동명(東明)의 시조묘가 건립되었다. 이것은 제각기의 국조숭배를 말하는 것이며 이와 같은 배경에서 국조로서의 단군숭배는 있을 수 없었다. 더욱이 민족이란 개념이 성립되기 이전부터 삼국에 공통된 시조 또는 조상신으로서의 단군숭배가 형성되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국조로서의 단순숭배가 없었다고 하는 것이 단군신앙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시 말해서 단군신앙 자체는 단군조선계 유민집단의 시조신앙으로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고구려에서는 영성(靈星)·태양·가한(可汗) 등과 같이 기자(箕子)를 신으로 간주하여 제사를 지냈다고 하는 기록으로 보아 단군조선계 유민 집단이 후일에 고구려에 정복되거나 혹은 고구려와 결합함으로 말미암아 이 집단의 시조인 단군이 고구려의 여러 신 중의 하나로 관념되어 비록 국조신은 아니라 하더라도 고구려인에 의해 숭배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한 것이다.

이런 추측을 뒷받침하게 하는 것은 한국사 고대편의 단군신화 해석이다. 여기서 단군이 처음 도읍하였다는 평양성과 두 번째 도읍하였다는 백악산 아사달을 동일지명으로 보아 양자 모두 현재의 평양으로 추정하고, 평양 부근의 지배씨족, 곧 단군조선의 지배씨족은 새로운 지배씨족의 출현으로 평양 일대의 자기 생활 근거지로부터 쫓겨 현 구월산 부근으로 비정(比定)되는 장당경으로 도읍을 옮겼다고 주장하면서 "단군이 아사달에 숨어 산신이 된다"는 기록은 단군을 봉사(奉祀)하는 사당이 장당경에는 없으나 평양에는 신사가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한국 고대에 있어서 단군을 모시는 봉사처(奉祀處)가 있다는 것이고 나아가 단군숭배가 고대사회에 존재했다는 점을 시사해 준다.

고려시대의 단군숭배[편집]

高麗時代-檀君崇拜

고려는 각지에서 할거하는 지방의 호족세력을 통합하여 삼국의 재통일을 완성하였고 또한 의의 있는 민족의 재통일을 이룩하여 단일민족국가를 성립시켰다.

그러나 단군숭배는 고려 초기에 있어서 고대의 단군숭배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였다고 생각된다. 다시 말해서 고려조의 이 시기에서의 단군숭배는 통일된 단일민족의 국조신이나 민족신으로서의 그것이 아니었던 것 같다. 즉 <고려사(高麗史)>에 보면 현종 3년 12월에 서경(西京:현재의 平壤) 목멱사의 신상을 제작한 일이 있었는데, 이 목멱신상은 뒤의 고려 인종 때 서경 대화궁(大花宮) 구내에 설치한 8성(八聖) 중의 하나인 '구려목멱선인(駒麗木覓仙人)'의 전신일 것이다.

그리고 구려목멱선인이라는 것은 바로 <삼국사기>에 나오는 평양에 살았다는 '선인왕검(仙人王儉)', 즉 고려 조연수(趙延壽) 묘지명에 나오는 평양의 선조라는 '선인왕검'을 지칭하는 것이며, 나아가서 <삼국유사>의 단군왕검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현종조의 목멱신상은 단군의 그것으로, 고려초에도 평양을 중심으로 한 단군숭배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또 단인천왕(檀因天王)·단웅천왕(檀雄天王)·단군천왕(檀君天王)을 함께 모신 삼성당(三聖堂)이 문화현(文化縣) 구월산(九月山)의 기우(祈雨)하는 용단(龍壇) 위 100여 걸음 되는 곳에 있었다고 <조선실록>은 전한다(성조 3년). 그리고 문화현에 보관되어 있는 송(宋)나라 경덕(景德) 3년 병오(丙午) 5월 의주(儀註)에 떡과 밥과 술 그리고 흰 거위로써 제사한다고 하였으나 지금은 흰 닭이 대신해서 쓰인다는 내용이 있는바 그 해는 고려 목종(穆宗) 9년에 해당된다. 따라서 삼성당이 목종 연간 이전부터 구월산에 세워져서 환인·환웅·단군 3성(三聖)이 숭배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상의 목멱선인 신상 제작이나 3성(三聖)의 숭배는 고려 초기에도 단군숭배가 존재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이러한 단군숭배 형태는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통일된 단일민족으로서의 국조신앙 형태와는 다른 것이다.

국조신으로서의 단군숭배[편집]

國祖神-檀君崇拜

고려는 민족의 재통일 후, 대내적·대외적인 온갖 모순에 직면하면서 단일민족으로서의 역사 경험을 쌓아간다.

몽고의 사신 저고여(著古與) 살해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발발(勃發)하였던 13세기 몽고의 수차에 걸친 침입은 고려 왕조가 직면한 대외적 모순을 결정지었으며, 고려가 고려로서 존재할 수 없게 하는 정통성의 일대 위기였다.

고려는 몽고의 침입을 맞아 무력항쟁을 불사하였으나 결국에는 굴복하고 말았다.

몽고에의 굴복은 연쇄적으로 고려 자체 내의 사회적 제모순을 심화시켰다. 그러나 짧지 않은 역사적 경험을 쌓아왔던 고려로서는 와해되는 자기 전통의 보전을 위한 노력과 민족의식의 고취가 현실적으로 요청되었고, 그 한 방법으로서 국조신(國祖神)으로서의 단군숭배가 성립되었다.

이제 단군은 민간신앙에 있어서의 신적 존재일 뿐만 아니라 중국의 요(堯)임금과 같은 시대에 이 땅을 지배했던 실존의 인물이며 또한 이 민족의 시조로서 생각되게 되었다.

이러한 사고의 반영은 <삼국유사>나 <제왕운기>에서 인용한 <단군기(檀君記)>라는 책도 몽고 침입이 가져다 준 역사적 한계정황 속에서 그 해결을 위한 현실적 사고가 반영되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국조로서의 단군관념은 고려말 외적의 침입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공민왕(恭愍王) 때의 인물 백문보(白文寶)는 천수(天數)가 순환하여 3600년마다 다시 시작되는 것을 주원지회(周元之會)라 전제하고 단군에서 공민왕 때까지는 3600년이 흘렀다고 주장하면서, 새로운 정치를 시행해야 한다고 상소하였다. 이러한 백문보의 입장 또한 단군을 동방의 개국시조로서 생각하였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조선시대의 단군숭배[편집]

朝鮮時代-檀君崇拜

고려 귀족정치의 제양상은 고려사회 내외의 모든 모순을 극복할 능력을 상실해 버린 데서, 신흥 사대부계층과 무인계층이 협력하여 새로운 지배계층을 형성하였고, 이들은 고려사회의 제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일련의 개혁정책을 실시하여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으며, 마침내 이 계층은 조선을 성립시켰다.

기자숭배와 단군숭배[편집]

箕子崇拜-檀君崇拜

이성계가 즉위한 다음 달에 당시의 예조전서(禮曺典書) 조박(趙璞) 등이 새 왕조의 각종 제례문제를 논하면서 '단군은 동방시수명지주(東方始受命之主)'라 하여 평양부로 하여금 시제(時祭)케 할 것을 건의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건의가 어떻게 시행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그보다 21년 뒤인 태종 12년 하륜(河崙)이 건의하기를 "단군은 실로 우리 동방의 시조(檀君實吾東方始祖)"이니 단군을 봄·가을마다 기자묘(箕子廟)에서 제사하자고 하여 태종의 허락을 얻어 건의대로 시행되었다고 한다.

국조 단군을 기자묘에서 합사(合祀)할 수밖에 없는 데는 현실적 제약이 있었다. 즉 조선 초기, 조선왕조와 명나라의 외교적 관계에서 명나라측은 조선에서의 기자숭배를 은근히 요구함에 조선에서도 단군이 우리의 시조임을 더욱 내세웠으나 조선측의 현실적 외교면에서의 열세는 단군숭배에 있어서도 제약을 가져오지 않을 수 없었다.

기자에 대한 단군의 열세는 세종 7년에 비로소 거론된다. 사돈주부 정척(鄭陟)의 상서에 의하면, 그가 명나라와의 마필 무역문제로 위주에 갔다 오는 길에 기자사당에 참배하였는데 기자의 위패가 북쪽에서 남쪽을 향했고 단군의 위패는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있어서 기자가 단군보다 우위에 있다고 지적하면서 이러한 위패의 배치는 나라를 세운 순서에 어긋난다는 점, 향단군진설도(享檀君陳設圖) 중 단군의 위패가 사당의 중앙에서 남쪽을 향한다는 점과 현 단군 위패의 위치가 다르다는 점, 기자는 제전(祭典)이 있었으나 단군은 제전이 없으므로 기자는 초하루·보름으로 제사하지만 같은 사당 내의 단군은 봄 가을로만 제사하니 민망하다는 점 등의 모순된 사실을 들어 단군사당을 따로 세워 위치를 남쪽으로 향하여 모실 것을 건의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세종 11년 단군 사당의 건립을 보게 되었고, 이 사당 내에는 고구려 시조 주몽(朱夢)도 합사되어 조선 후기에는 이를 지칭하여 숭령전(崇靈殿)이라 하였다. 이제까지 기자에 비해 열세를 면치 못했던 단군도 이에 독립된 사묘(祠廟)에서 국조로서 숭배 대상이 되었다.

세종 12년에는 조선단군지위(朝鮮檀君之位)이던 단군의 신위(神位)를 조선단군으로 고쳤고 세조 2년에는 다시 조선시조단군지위(朝鮮始祖檀君之位)로 고쳤으니, 이것은 단군이 독립국 조선의 시조로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했음을 의미한다. 단군의 사당에는 중국의 사신까지도 와서 읍례(揖禮)를 행할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단군신화의 변용[편집]

檀君神話-變容

국조관념의 강화에 따라 단군신화도 그 내용이 달라진다. 조선 초기 단군신화를 언급한 <동국통감>·<삼국사절요> 등 대부분의 서적은 <삼국유사>·<제왕운기>와는 달리 "동방에는 처음에 군장이 없었는데 신인이 단목(檀木) 밑에 내려옴에 나라사람이 이를 세워 임금으로 하였다"고 단군 입국(立國)의 사실을 전하고 있다. 그리고 <세종실록지리지>에 인용된 단군고기(檀君古記)에 의하면 단군은 그의 아들 부루(夫婁)를 보내어 우(禹)왕에게 조공을 드렸다고 하며,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평안도 강동현 서쪽 3리에 대총(大塚)이 있는데 둘레가 410척이며 단군의 무덤이라고 전해진다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들은 실존인물로서 단군을 구체화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려사>지리지 이후의 지리서 등에서는 강화도 마니산정(摩尼山頂)에 단군의 제천단(祭天壇)인 참성단(塹星壇)이 있는데 단의 높이는 10척으로 위는 둥글고 아래는 모나다고 했으며, 전등산(傳燈山)의 삼랑성(三郞城)은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 쌓은 성이라고 하여 단군의 유적이 실재함을 알려준다. 이것은 고려시대 몽고의 침입으로 고려가 강화로 천도하면서 국조숭배의 필요성에서 강화 일대의 고적을 단군과 관련시켜 설명하던 것을 조선시대에도 이에 준하여 강화 단군 유적을 인정했고, 마니산 참성단에서는 세종 12년 2품 이상의 재관(齋官)을 파견하여 초제(醮祭)를 행하였던 것이다.

실존인물로서의 국조 단군을 합리화하기 위해 서거정은 <필원잡기(筆苑雜記)>에서 단군이 1000년 이상 나라를 다스렸다고 하는 것은 실제로는 단군 자손이 세습적으로 나라를 다스린 연수임에 틀림없다고 했다. 숙종 때에는 강동현의 단군묘에서 초목(樵牧) 행위를 금했고 가까운 민호(民戶)를 수호군(守護君)으로 정했다. 조선시대의 단군은 편발개수(編髮蓋首) 제도와 군신상하의 질서와 음식거처의 예를 정한 동방 최초의 군장으로 숭배되어졌음에 틀림없으나 구월산 삼성사를 중심으로 한 단군숭배는 고대 이래의 민간신앙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세종 10년 유관(柳寬)의 상서에 의하면 구월산 동령(東嶺) 중턱에 신당이 있는데, 이는 환웅·환인·단군 세 천왕을 모시는 곳으로서 삼성사라 불리며 삼성당 안팎에는 새들이 살지 않고 짐승들이 드나들지 않으며, 가끔 비를 빌면 효험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삼성당은 평양의 단군묘와는 달리 국가에서 인정한 공식 사당이 아니므로, 일부에서는 삼성당을 공식 사당으로 인정받으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단종 즉위년에 황해도 일대에서 전염병이 발생하였는데 여론에 의하면 구월산에 모시던 단군사당을 평양으로 옮긴 후 괴기가 모여서 귀신 모양으로 밖에 돌아다니고 검은 기운이 진(陣)을 이루어 행동하는 소리가 들려 그것을 본 사람이 놀라서 피했더니 이때부터 병이 발생하였다고 하는가 하면, 혹은 평양사당으로 단군이 옮겨간 후 구월산에 남은 환인·환웅 2성(二聖)이 백성을 원망하여 유행병을 일으킨 것이라고 했다.

병이 점점 만연함에 따라 국가도 삼성사에 관심을 두게 되었고, 마침내 현관(縣官)이 가끔 기우제와 기청제(祈晴祭)를 지내던 데 불과하던 삼성사에서 성종 때에는 평양 단군사당의 예대로 해마다 국가에서 두 번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고 선조 때에는 한때 중단되었던 삼성사의 제사를 다시 지내기로 하여 축문(祝文)도 새로 제정하였다. 또한 숙중 21년에는 삼성사 단군의 축문을 평양 단군사당의 예에 따라 '전조선단군'으로 썼으며, 정종 13년에는 삼성사를 수리하고 그 제품(祭品)과 제식(祭式)을 이정하되 기자의 사당인 숭인전(崇仁殿)과 체제를 같이하도록 조처하고 있다. 그러나 삼성사는 여전히 기우기청, 여제(勵祭)의 장소이며, 국조신으로서 단군을 모신 평양 단군사당과는 달리 민간신앙과 깊이 관련된 사당이다.

민간신앙과 단군의 관계는 단군을 환인·환웅처럼 생산을 담당하는 민속의 3신(三神)과 관련시켜 설명한 정약용의 <풍속고(風俗考)>에서 잘 나타난다. 한편 조선 후기의 학자 안정복 같은 이는 <삼국유사>의 단군신화를 승담(僧談)이라고 부정하여 환인·환웅을 제거한 단군만이 실존인물이니 단군만을 제사함이 마땅하다고 하여 민간신앙적 단군을 부정했다.

조선은 단군의 조선이란 국호를 답습하고 있는 관계로, 불리한 대명관계에서 오는 모순의 합리화를 위해 국조로서 단군을 숭배하였고, 한편으로는 고대 이래로의 신적 존재로서, 민간신앙의 대상으로 단군을 숭배하였으니 전자는 평양 단군사당으로, 후자는 구월산 삼성사로 대표되어질 수 있다.

현대의 단군신앙[편집]

現代-檀君信仰

1900년대에 이르러 나라가 어지러워짐에 따라 민족의 시조 내지 국조를 부르짖는 인사들이 단군신앙을 중심으로 종교단체를 만들기 시작했다. 1909년에 나철(羅喆)은 단군교를 조직하고 단군·환인·환웅을 3신일체의 천신(天神)으로 받드는 신앙사상을 교의 기초로 삼았다. 이 종교집단을 비롯하여 강원도에 삼성교(三聖敎)가 생기고 평양에 존칭교(尊稱敎)가 생겨났다.

단군을 신앙 대상으로 삼는 종교단체는 일제 초기에 여기저기 생겼으나 중엽부터 조선사상범 보호관찰령(朝鮮思想犯保護觀察令)의 공포 실시에 따라 해체되거나 교단 본부를 만주에 이전하게 되었다.

1945년에 일제로부터 해방되고 신흥종교가 발생함에 따라 단군을 신앙 대상의 중심으로 하고 거기에 유교·불교·도교, 심지어는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가미하여 창건하는 종교단체가 많아졌다. 그러나 1900년부터 순수하게 단군의 국조신앙으로 형성된 종교단체와 나란히 있게 된 것이다. 근자에 이르러서는 무당적인 감응(感應) 신앙을 단군과 결부시켜서 단군을 국조신보다도 무격(巫覡)적 주력(呪力)을 내리는 무조신(巫祖神)으로 받드는 신앙단체가 생겼다.

이와 같이 현대에 이르러 단군신앙은 국조나 시조로 단군을 받드는 형태와 공자나 석가·예수와 동일시하는 형태, 무조(巫祖)신으로 삼는 3형태의 종교단체의 신앙 대상으로 전개되었다. 한마디로 단군은 왕조때의 국조 민족시조신보다 집단의 신앙 대상이 된 것이다.

이런 집단화한 종교에서의 단군과는 별도로 국민의 얼을 단군의 개국(開國) 정신에 두고 정신개혁을 주장하는 연구회가 조직되었으나 이것은 종교신앙과는 다른 경향이라고 할 것이다.

기원전에 환웅과 웅녀(熊女) 사이에 태어난 단군이 평양에 도읍을 정하고 고조선을 개국했다는 단군설화는 신화적 성격을 띠면서 시대가 변천됨에 따라 그 성격이 신앙형태로 전환되었다. 다시 말해서 단군은 민족의 조상신으로 숭봉(崇奉)되는 한편 그것과 달리 복(福)·록(祿)·수(壽)를 내리거나 벽사·초복(招福)의 주적 대상으로 신봉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