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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종교·철학/한국의 종교/한국의 그리스도교/한국 그리스도교와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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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그리스도교와 문화〔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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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Christ敎-文化〔槪說〕

한국 그리스도교가 한국문화에 끼친 영향은 큰 바가 있다. 19세기 초반부터 한국에는 프로테스탄트 선교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선교 활동은 그 근본 취지가 복음을 이 땅에 전하는 것에 있음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여기에 수반되는 여러가지 사회적 변화를 우리는 역시 과소 평가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교의 복음이 가 닿는 곳에는 반드시 그 고장의 사회적·문화적 변화가 따라온다는 말이다. 이런 것들을 간단히 추려 말해 보려고 한다.

우선 이 시기로 말하면 개화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개화라면 우선은 서양문물이 한국에도 밀려 사회생활 전반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 시기를 말한다.

이때의 한국인은 누구나 다 새로운 세계를 동경했었다. 먼저는 정신세계에 있어서 그러하였고, 그 다음은 문화생활을 동경하였던 것이다.

조선 500년의 유림정치에 신물이 난 한국 백성은 먼저 종교적인 새로운 세계를 동경하였다.

이 현상은 우선 동학의 물결이 노도와 같이 일어난 것으로도 짐작이 간다. 종교에 의한 새로운 휴머니즘의 대두이다. 이러한 때에 그리스도교의 선교는 시기를 맞춘 것이라 하겠다. 참다운 종교를 희구한 것이 당시 한국인의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그러면 이러한 때를 기하여 프로테스탄트가 끼친 영향은 어떠한 것이었던가. 조선의 유림정치는 한문을 진서(眞書)로 내세우고 있었지만, 부녀자나 서민계급은 진서인 한문을 제대로 배울 길이 없었다.

그리하여 글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실제로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하겠다. 이러한 때에 스코틀랜드 선교사 로스는 만주에 와서 몇몇 한국인과 더불어 성서의 우리말 번역을 시작하였다. 우선 신약전서의 번역이 나왔는데, 이것을 보통 로스역 신약전서라고 한다. 이 책은 삽시간에 국내로 들어오게 되었고, 그리하여 누구나 한국어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아마 독일의 마르틴 루터가 독일어역의 신구약전서를 번역한 것과 비슷한 공헌을 로스가 하지 않았는가 사료된다.

또한 개화당 사건 이후 일본으로 망명한 이벽(李蘗)과 같은 사람도 일본에서 신약복음서(마가복음)를 우리말로 번역하여 국내 선교에 사용했다. 이것은 첫째로 한국민족의 문맹퇴치에 앞장섰던 것이었고, 나아가서는 한국인으로 하여금 우리말을 통해서 자주적인 정신을 기르게 한 것이다.

그 후 선교활동이 활발해지자 선교사들과 한국인들이 협동하여 성경번역을 서둘렀고, 수를 헤아리기 어려운 부수의 성경전서가 발행되어 모든 사람이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특기할 만한 것은 일제 말엽에는 한국사람이 한국말을 하지 못하도록 강요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오직 한국교회만이 예배당 안에서 한글로 설교를 할 수 있었고, 찬송을 부를 수 있었으며, 성경을 읽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점에서는 교회가 민족의 생명을 유지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실제로 한국 독립운동의 본거지는 교회였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다음으로 교회가 한국민족에 공헌한 것은 교육사업이다. 3·1운동이, 한국인이 아직도 살아 있음을 세계만방에 공개한 업적은 크다 하겠으나, 일제의 압박은 쉽사리 제거되지 않을 것을 안 교회는, 민족의 독립을 위한 원대한 계획으로 교육기관을 통한 민족정신의 앙양을 도모했다.

우선 유명한 학교로는 배재학당·이화학당을 들 수 있고, 그 다음에는 서울과 지방에 수많은 미션 학교가 설립되어 신교육의 효시가 된 것이다. 교육기관을 오늘과 같은 정세하에서는 반드시 교회가 맡아서 해야 될 책임은 없다고 본다. 그러나 일제 당시로 보면 오직 이것만이 교회가 하지 않으면 안 될 사명이었다고 볼 수 있다.

셋째로 교회의 공헌은 의료사업과 사회사업이다. 서울과 각 지방에 서구식 병원을 설비한 일이라든지, 그 밖에 사회사업 기관을 설립한 것은 당시에 있어서는 큰 공헌이 아닐 수 없었다.

다음에 특기할 만한 것은 구습타파(舊習打破)를 들 수 있다. 복음은 서양 사람들이 가져왔고 거기에 수반하여 그들의 합리적인 사고방식도 함께 들어오게 되었다.

비합리적인 생활양식과 미신적인 생활을 타파하는 것이 선교사업의 하나라고 그들은 본 것이다. 그 중에도 특기할 만한 것은 제사(조상숭배)문제였다. 돌아간 조상을 위해서 기념하는 것은 좋지만 많은 경비를 들인다든지 때를 따라 큰 제사의 의식을 갖는 것은 합리적인 서구인의 생활 안목으로는 맞지 않을 것은 명확한 사실이다.

실제로 우리의 빈한한 처지에서 그러한 큰 부담을 지는 것은 지나친 폐습으로 알았던 것이다. 조상의 기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간단한 표시로 그치는 것이 합리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너무 지나치게 조상숭배를 우상숭배와 동일시하고 이것을 전적으로 금한 것은 잘못이었으나, 폐습이라는 점에서는 마땅히 개선해야 될 문제였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선교사들의 과격한 제사폐지 강요는 선교에 큰 지장을 가져오게 되었다. 만일 이것을 좀 더 관대하게 처리하였더라면 더욱 많은 신도를 확보하게 되었을 것으로 본다. 그 다음에 폐습타파운동으로 꼽을 만한 사실은 금주금연(禁酒禁煙)운동이었다. 물론 그리스도교가 금주금연을 지상명령으로 삼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국과 같은 빈궁한 나라에서 술과 담배로 소모되는 큰 액수가 돈과, 또 그것이 패가망신의 원인이 되는 것을 막은 공헌은 크다 하겠다. 크리스찬이 된다는 것은 바로 금주금연을 하는 것과

맞비기는 것으로 생각할 정도였다. 이것은 사회개량운동의 일환으로 크게 평가해야 될 사건이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 이것만을 강조하는 것도 사회생활에 반드시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는 못한다. 즉 그것이 율법주의를 초래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 밖의 구습타파운동으로 들 수 있는 것은 계급타파(階級打破)운동일 것이다. 즉 유교적인 상반(常半)의 계급주의가 조선을 지배해 왔었다.

이것을 타파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었던 것이다. 특히 신교의 선교 대상은 시민계급을 위주로 하였고, 교회는 사회적으로 완전히 버림을 받은 무리들이 찾아올 수 있는 문을 활짝 열어 놓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아주 세력있는 양반이나, 사회적으로 버림받은 백정 같은 천한 계급이나 모두 한자리에 앉아 예배를 볼 수 있었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한국인의 생활에는 번거로운 것들이 많이 있었다. 예컨대 여자들의 치맛자락이 길다든지 또한 남자가 머리를 기르고 상투를 짜올리고 갓을 쓰는 경우라든지, 흰옷을 입고 일을 하는 경우라든지, 이러한 불합리한 생활요소를 개선하는 데도 교회가 앞장섰던 것은 사실이다.

교회 초창기에 있어서 교인이 된다는 표식으로 상투를 깎아버렸다는 것도 기억할 만한 일이다.

물감을 들여서 옷을 해입는 것도 교회가 크게 장려한 일이었다. 그리고 위생관념을 고취하고 집안환경을 깨끗이 하는 것이라든지, 부엌 같은 곳을 청결히 하여 병마에 걸리지 않도록 교화한 것도 기억할 만하다.

교회가 생긴 지역은 시간관념이 철저해졌던 것도 기억에 새롭다. 한국인은 모든 것을 천천히 하는 것이 예의인양 생각하여, 걸어도 천천히 걷는 것을 양반의 걸음이라고까지 했다. 이러한 관념은 자연 시간관념에도 반영이 되었던 것이다. 예배를 보는 시간은 일정하였고, 정하여진 시간에 모이는 것이 훈련되었던 것이다.

무슨 모임이 있으려면 반 시간이나 한 시간쯤 늦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 우리 사회 풍토였던 것이다.

조선 500년은 유교적인 생활양식으로 일관된 시기였다. 국민생활에 불가피한 정서생활(情緖生活)은 아주 말살되다시피 한 시대였다. 우선 비근한 예로, 노래는 극히 국한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마음대로 부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교회가 들어온 후로부터 찬송을 부르는 관습이 생겨났고, 찬송을 통해서 우리의 정서생활은 풍부해질 수 있었다. 부녀자들이 노래를 마음대로 부르지 못한 사회환경에서 교회를 통한 찬송가의 보급은 국민 정서생활에 큰 보탬이 되었다. 음악인을 천시하던 관념은 점차로 사라지게 되었고 당시 대부분의 음악가는 교회 출신이었다.

오늘에 와서는 음악은 보편화된 생활의 일용할 양식이 되다시피 하였으나 그때만 해도 부녀자들이 숨을 들이켤 수 없는 엄한 가족제도 아래서였지만, 그때도 교회에서만은 신나게 찬송을 부를 수 있었다는 것은 하나의 큰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여기에서 특기할 만한 것이 있다.

그 당시에 한국 민족의 독립을 위하여 독립운동가로 불리운 찬송가가 하나 있었다. 이것은 바로 한서(翰西) 남궁억(南宮檍)의 <삼천리반도 금수강산>이라는 노래이다. 이것을 교회에서는 한국 독립운동가로 느끼고 불렀던 것이며, 당시 선교사들도 그렇게 알았던 것이다.

이 노래는 일제 말엽에는 부르지 못하던 찬송가 중의 하나가 되었던 것 같다. 이것 하나만도 무폭력(無暴力) 레지스탕스(抵抗) 운동의 하나의 산 표현이었던 것이다.

새로운 교육이 미션 학교를 통해서 시작되면서 먼저 사회생활에서 특히 계급주의가 타파되었고, 민주주의가 생활화되었다. 우선 가족제도의 새로운 개선이 추진되었다.

부모의 엄격한 통제 아래 있던 남녀간의 교제문제, 결혼 그리고 신혼부부의 시부모와의 관계 등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참다운 사랑의 표현과 가정의 자유스러운 분위기가 점차로 조성된 사실들을 들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한국은 재래로부터 내려오는 민간종교인 샤머니즘이 서민생활의 밑바닥에 깔려 있었던 때이다. 사신우상(邪神偶像)에게 복을 빌고, 무당에게 가서 운수를 점치고, 허무맹랑한 점쟁이에게 속는 미신적인 생활을 철저히 타파할 수 있었던 것은 교회의 공헌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이 중에는 조상숭배의 관습도 들어 있었다. 어쨌든 제사는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경제적으로 커다란 폐단을 안고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예컨대 돼지 1마리밖에 없는 집에서도 조상제사를 위하여 잡아 사용하는 예가 지방에서는 흔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름다운 미풍이기는 하나 패가하는 극단의 경우라 할지라도 막을 길이 없었던 것이 당시의 풍조였다.

그리고 장사지내는 경우에도 지세를 보기 위하여 지관(地官)을 데려다가 작성하는 따위도 큰 사회적인 폐단의 하나였다. 이러한 온갖 구습을 일소하는 운동은 교회가 끼친 영향 가운데 하나였다고 본다.

이상에서 볼 때 한국에 그리스도교가 들어옴으로써 문화의 각 분야에 개선을 가져온 것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이상 열거한 것만으로도 많은 공헌이 있었던 점을 부인할 수 없다.

교회와 문화는 실질적으로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고 하겠다. 문화는 교회의 표현이고, 교회는 문화의 본질과 같은 관계에 있다고 하겠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한국문화에 끼친 공헌은 그리스도교가 발전한 만큼 문화적으로도 이에 정비례하여 변모되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오늘의 교회가 반드시 과거의 1세기 동안에 이룬 문화적인 공헌을 앞으로도 그대로 이루어야 된다는 이유는 없다. 교회는 시대시대를 따라 문화적으로 공헌할 수 있는 대상이 변하게 될 것이다. 오늘의 한국의 사회적·문화적 정황에서 새로운 공헌은 교회가 살아 있는 한 계속될 것은 물론이다. 왜냐하면 교회의 본질은 반드시 문화적 표현에서 나타나야 하만 되기 때문이다. <尹 聖 範>

그리스도교와 개화의 선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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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敎-開化-先驅者개화기에 있어서 한국 그리스도교는 그 시대의 역사적 상황에 있어 사회적 요청에 부응하여 개화의 선구자로서 예언자적(豫言者的) 사명을 다하였던 것이다.

교회는 개인 영혼의 구원에서 나아가 사상의 변화, 정신적 개혁을 꾀하여 새로운 가치관을 수립하였으며, 개국(開國)과 더불어 전래된 그리스도교는 한국인의 주체적 입장에서 수용되었고 정신적 빈곤을 극복하기 위한 사회적 요청에 부응하여 교회는 학교설립과 의료사업을 개화의 수단과 방법으로서 제시하였다. 교회는 민중을 계몽하였고, 시대적 각성을 한 이들의 개화사상은 애국적이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그리스도교 정신은 민족주의 이념과 일치하였고, 교회는 민중세력의 집결지로서 민중을 교화(敎化), 선도한 개화운동의 온상이었으며, 각성된 민중, 개화사상을 가진 인물들로 구성된 이념집단으로서 개화의 상징이었다.

그리스도교와 교육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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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敎-敎育事業

예로부터 거의 부락마다 소위 한문서당이 있어서 한문과 중국 고전을 가르쳤지만 실제 생활과는 별로 관계가 없는 교육으로, 공맹자 유교사상이 사대주의 사상을 주입시키는 효과밖에 별다른 효과를 주지 못했다. 그리하여 조야의 뜻있는 이들은 하루빨리 현대적 교육을 실시해야겠다고 생각하여 일본과 중국에 유학생을 보내고 고종께서 1885년에 미국 문교부장관 이턴(John Eaton)에게 청원하여 유능한 교사들을 초청하여 1886년 5월에 신식 교육기관인 육영공원을 설립케 되었다. 하지만 귀족학교의 운영은 순탄하지만은 않고 정치적 갈등 속에서 시련을 겪다가 오래 못 가서 그 기능이 짓밟혀 문을 닫아야 했다. 현대적 교육이 정상적으로 발전하지 못한 것은 유감이었지만 다행히 정부가 못한 일을 개신교가 선교사들을 통하여 이루었던 것이다. 제일 먼저 설립된 학교는 서울 정동에 아펜젤러 목사가 세운 '배재학당'이었다. 1885년 8월 3일부터 아펜젤러는 독자적으로 학교경영을 시작했으며, 1886년 6월 8일 정부의 공인과 함께 고종은 '배재학당'이라는 이름까지 지어 주었다.

배재학당과 쌍벽을 이룬 것은 여자들을 위한 '이화학당'이었다. 1886년 5월 30일에 현재 정동 이화여자고등학교 자리에 미국 감리교 선교사 스크랜턴(W.B. Scranton) 부인이 여자들을 위하여 설립하고 1887년 황후에게서 학교명을 '이화학당'이라고 받았다. 아펜젤러와 때를 같이하여 언더우드 목사도 1886년 선교부와 한국정부의 허락을 받고 고아원 겸 학교를 시작하였는데 이 학당은 후에 '경신학교'로 육성되었다. 우리나라의 근대식 고등교육의 효시는 세브란스 의학교(醫學校)였다. 1899년에 정식으로 의학교가 설립되어 초대 교장에 애시슨(魚丕信) 박사를 추대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우리나라에서는 최초의 의학교인 동시에 최초의 고등교육 기관이었다. 1909년까지 설립된 그리스도교계 학교의 교파별 통계를 보면, 장로교가 605교, 학생수가 14,708명이고, 감리교가 200교, 학생수가 6,4233명에 달했으며, 성공회나 가톨릭 및 안식교 등의 것을 합하면 학교수는 실로 950여 교에 달했다. 교육과 문화 개진(開進)에 대한 교회의 공헌은 실로 한국사상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것이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는 종교로서보다는 위대한 교육자로서 환영받았던 것이다. 한국교회가 전반적인 문화활동을 동반(同伴)함으로써 한국 근대화의 도관(導管) 역할을 담당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스도교와 의료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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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敎-醫療事業

갑신정변 때 알렌이 민영익을 치료해 준 일을 계기로 세워진 우리나라 첫 의료기관이 광혜원이다. 1893년에 애비슨 박사(Dr.R.Avison 魚丕信)가 이를 맡아 병원의 기구를 완전히 개편하고, 운영비는 장로교 선교부에서 전적으로 책임맡았다. 또한 의사들도 새로 채용하여 완전히 선교부의 기관으로 만들었으며, 그후 1896년 부산에서 오스트레일리아 선교부가, 평양에서 장로교 선교부가 각각 의료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감리회의 의료사업은 주로 스크랜턴(Rev.Dr.W.B.Scranton) 의사가 시작했고 그의 활동으로 확대되었다. 스크랜턴은 여러 곳에 진료소를 신설하고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지방을 순회 진찰하면서 의료와 전도를 병진시켰다. 또한 미국 여선교의 후원을 받는 한편 1887년에는 하워드(miss Howard M.D.), 1889년에는 셔우드(miss Rosetla Sherwood)가 우리나라에 왔으며, 미 선교부에서는 1890년(William Me Gill M.D.) 의사를 보내주었다. 이와 같은 의료사업의 활동으로 3년 동안에 무려 5,500명의 환자를 치료하였다. 그가 착안 강조한 점은 돈 없고 병원 없는 데서 가엾게 죽어가는 형제들을 구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초기의 의료사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1895년에 호열자병(전염병)이 창궐하였는데 애비슨 박사의 주선으로 모든 의료 선교사들이 단합하여 환자 치료에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던 사실이다. 그리스도교 전래 이전까지는 무당과 미신으로 병을 물리쳐 보겠다는 원시적 사고(思考)를 가졌었지만 이러한 의료활동의 진전으로 합리적 사고를 가질 수 있었고, 과학이 가져다주는 혜택이 무엇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스도교와 사회복지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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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敎-社會福祉事業

한국의 각종 사회복지사업이 그리스도교를 통하여 일어났고, 또한 발전된 것은 누구도 부인 못할 것이다. 3·1운동 이후에 실력양성이 민족독립의 첩경임을 자각한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은 민중의 선두(先頭)에 서서 교육사업과 아울러 사회복지사업을 크게 일으켰다. 그 중 제일 큰 사업이 농촌사업이었다. 3·1운동 이후 농촌문제는 교회의 제1과제(第一課題)로 등장하여, 1925년 YMCA는 서울 근교를 순회하면서 간이농사강습(簡易農事講習)과 통속(通俗) 및 위생강화(衛生講話)를 행하였다.

이것이 한국교회 농촌운동의 효시(嚆矢)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27년 동회(同會)는 농촌운동의 전국적 전개를 위해서 신흥우 총무와 홍병선 간사를 덴마크에 파견하여 덴마크 농촌을 시찰하게 한 후, 전국을 순회하면서 덴마크식 농업을 권장하는 한편 수백(數百)의 협동조합을 조직하여 농촌사업을 크게 발전시켰던 것이다. 1929년 한국그리스도교 연합공의회는 각 교파와 청년회 대표들로 구성된 '농촌사업협동위원회'를 조직하고 농촌사업의 연합전선을 펴 농촌문화를 진일보(進一步)케 하였다. 농촌사업 이외에도 맹아학교(盲啞學校)·양로원(養老院)·고아원(孤兒院) 등 어두운 사회환경 속에서 소외되고 있는 자들에게 새빛을 안겨주었으며, 자선사업(慈善事業)을 주임무(主任務)로 하고 있는 구세군(救世軍)은 해마다 성탄절이 되면 자선냄비를 통한 가두모금으로 빈민구호에 힘썼다. 1921년에는 남감리교 동양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1919년 3월 민족대표 33인이 모여 독립을 선언하고 유서깊은 곳(仁寺洞 明月館支店 자리)에 '태화여자관(泰和女子館)'을 세워서 종교·보건·음악·체육·육아(育兒)·요리·재단(裁斷)·독서 등 부녀자의 지식계발과 생활개선, 그리고 아동의 체위향상을 위한 육아법 등을 가르쳤다. 이것은 한국 최초의 여자 및 아동의 생활향상을 위한 기관이었다.

그리스도교와 출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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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敎-出版事業

그리스도교 문화사업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부문은 출판사업이다. 문서운동 중에서도 경전(經典)인 성서의 보급은 가장 큰 일로 시대의 변천과 함께 항상 새로운 번역이 나와야 하므로, 성서공회는 1910년 성서 전권(全卷)의 완역(完譯)을 한 뒤에 곧 개혁위원회를 조직하고 개역에 착수하였다. 성서 원어(原語)에 정통한 한인신학자(韓人神學者:南宮爀·金觀植·金仁俊) 들이 개역에 가담하여 원전(原典)에 가장 가까운 개역성서(改譯聖書)를 낼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찬송가의 편간(編刊)은 문서운동의 선구적 사명을 띠고 1928년에 장로교·감리교 양교파(兩敎派) 공동편집의 신정찬송가를 출간하였다(후에 1949년 합동찬송가, 1967년 개편찬송가를 출간함). 1890년 '예수교서회'가 발족되었으며, 3·1운동 이후 급진적으로 향상 발전되는 신자들의 독서열에 보조를 맞추어 1931년 5층 현대식 건물을 신축하고 출간에 힘썼다. 영구히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을 선교연합회의 기관지 는 1904년 창간된 이래 월간 선교지(宣敎誌)의 사명을 다함과 동시에,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관한 연구논문과 한국그리스도교에 관한 연구논문이 큰 분량을 차지했다. 1923년 1월 30일 윤치호·이상재(李商在) 등 유력한 평신도들이 중심이 되어 '조선기독교 창문사(朝鮮基督敎彰文社)'를 창립함으로써, 선교사만으로 조직된 예수교서회와 쌍벽을 이루게 된 것이다. 그 설립 이유는 교회지도자들이 출판사업을 통한 그리스도교 문화운동의 필요성을 절실히 자각한 때문이었다. 창문사(彰文社)가 출판한 서적 중에는 기관지 <신생명(新生命)>이 있고, 가장 저명한 것은 <신구약성서(1925, 奇一)>·<조선예수교장로교회사기(1928)>·<한국신교선교사(韓國新敎宣敎史, 1929)> 등이 있다. 기관지로는 <청년(YMCA)>·<신생(新生:감리교엡워드청년회)>·<활천(성결교청년회)>·<진생(眞生:장로교면려청년회)>·<신학지남 (神學指南:장로교신학교)>·<신학세계 (감리교신학교)> 등이 출판되었다.

그리스도교와 신생활개선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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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敎-新生活改善運動주류(酒類)·아편·축첩(蓄妾)·매음·잡기 등의 사회악에 대한 정화운동(淨化運動)은 교회를 통하여 일어났고 또 진행되었다. 선교부가 제일 먼저(1919) 사회복지사업위원회를 조직하고 절제운동을 시작하였다. 1922년 비로소 정주·순천·논산·나리·철원·춘천·은율(殷栗)·양주 등지에서 교회를 중심으로 금주단연운동(禁酒斷煙運動)이 크게 일어나 전국에 퍼질 기세였다. 특히 같은 해에 세계그리스도교 여자절제회 동양특파원 틴링(Christine L. Tinling)양이 내한하여, 전국을 순회하면서 약 300회의 금주강연을 실시함으로써 절제운동을 크게 일으켰다.

한편 기독신보는 절제란을 설치하고, 금주·단연(斷煙)·폐창(廢娼)에 관한 논문을 연속 게재하여 절제운동을 크게 성원하였으며, 구세군에서는 1924년부터 기독신보에 위탁하여 매년 전국 금주운동일에 금주호(禁酒號)를 출간하여 색다른 절제운동을 일으켰다.

그런데 개화기에 있어서의 이러한 금주·금연운동은 성서의 교리적인 견해나 선교사들의 청교도적인 영향이라기보다는 개화의 방향에서 볼 때 개화를 저해하는 요소로서 이를 금지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제사에 대한 교회의 비판도 예리하였다. 제사는 효(孝)가 결여된 채 명분과 허식에만 치우쳐 한갖 형식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서 개화사상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또한 봉건적 전통사회의 누적된 폐풍을 버리는 구습타파에도 교회가 앞장섰다. 즉 관존민비(官尊民卑)·폐습적 혼인제도(弊習的婚姻制度)·음담패설 등의 구습은 타파해야 하고, 이 타파의 사상적 기초를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글과 그리스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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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rist敎

그리스도교 관계 서적들은 예외 없이 한글로 출판되었으며, 그 용어도 서민층의 일상어를 택하여 복음전도와 민중교화(民衆敎化)에 유례를 볼 수 없는 대성과를 거두게 하였다. 실로 한글은 그리스도교의 새로운 활동에서 그 자체의 생명확장을 보았고, 이 나라 민족문화를 창달하며 이를 유구히 전승하는 데 절대적 공헌을 남겼다고 단언할 수 있다. 이광수는 "아마 조선글과 조선말이 진정한 의미로 고상한 사상을 담는 그릇이 됨은 성경의 번역이 시초일 것이요, 만일 후에 조선문학이 건설된다면 그 문학사(文學史) 제1면(第一面)에는 신구약의 번역이 기록될 것이외다(耶蘇敎의 朝鮮에 준 恩惠 靑春 1917년 7월)"고 평했던 것이다. 실로 한국의 교회는 심령 구원의 기쁜소식을 전했을 뿐만 아니라 무지한 국민들에게 한글을 깨우쳐주는 선구적 역할까지 하게 된 것이다.

즉, 세종대왕의 한글반포 이후 지금까지 기나긴 세월을 백성들로부터 떨어져 있던 한글이 우리글로 번역된 신약성서 등의 보급으로 빛을 받게 되었으며, 일반백성들로 하여금 한글을 익히게 하여 준 역할을 한 것이 바로 그리스도교회였다. 그리스도교회는 이처럼 한글을 민족의식 각성과 연결시키고, 천대받아온 부녀자와 서민층을 불러일으켜 밝아오는 새 역사의 역군으로 배출하였던 것이다.

그리스도교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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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敎文學

그리스도교 문학은 신구약성서의 번역을 기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성서번역의 문학적 공적은 문장의 국어화에 있고 이러한 국어화(國語化)에 의해서 문화창조의 수평을 밝혀주는 데 성공했다. 신문학 태동기에서 신체시(新體詩) 운동은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의 <해(海)에게서 소년(少年)에게>로부터 비롯된다. 당시 신체시의 개화정신과 독립정신에는 그리스도교적인 성격이 흐르며, 그리스도교사상이 신체시의 시적(詩的) 충동이 되었다. 1910년에 접어들면서 춘원(春園:李光洙)문학이 나타나는데, 춘원의 근대적 민족이념이나 인도적 계몽주의(人道的啓蒙主義)는 대체로 그리스도교의 세련(洗鍊)으로 성장된 사상들이었다. 비록 그가 그리스도교사상을 평면적으로 계몽하였지만 이 계몽의 공(功)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다. 1920년 독립운동의 후유증으로 암울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던 그리스도교와 관련된 대표적인 작가는 전영택(田榮澤)·주요한(朱燿翰)·김동인(金東仁) 등이다. 20년대의 신문학에서 그리스도교사상에 의하여 양성된 근대이념에 기반을 둔 민족정기의 계승과 현현은 그리스도교가 민족문화에 끼친 그리스도교 신앙의 외적 공헌이라 할 수 있다.

교회는 1930년에 들어서면서 역사에 대한 비참여의 소극적 태도로 바뀌어 교회를 반문화적(反文化的)인 것으로 경도(傾倒)케 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회의 반문화성(反文化性)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컬하게도 소설에서 박영준(朴榮濬)·임옥인(林玉仁)을 배출하고 김동리(金東里)·황순원(黃順元)과 같은 작가와 인연을 갖게 되었는데, 황순원은 정통적(正統的) 그리스도교 가정 출신이었다. 시(詩)에 있어서 박두진(朴斗鎭)을 배출하였을 뿐 아니라 윤동주(尹東柱)의 옥사(獄死)에서 최초의 순교작가를 얻게 된 셈이다. 해방 이후 한국 그리스도교문학은 일반문학과 일단 구별하여 기술할 수 있는 문학 영토를 형성하였다.

해방 이후 4반세기의 그리스도교시(詩)를 한 지표 속에 넣어 조감하여 볼 때 한국 그리스도교시는 김현승의 원죄의식과 박두진의 종말론적 환상을 양극점으로 다양한 경향성을 보이는바, 이상노·박화목·임인수·황금찬 등이 그 대표 시인이요, 50년대에서 60년대에 등장한 시인들은 석용원·김경수·방덕승·한성기·박이도·조남기·박근한·이정기·주선애·황희영·고진숙·김태규·유난연·김원식·전재동 등이다. 소설에서는 주제면에서 볼 때, 임옥인·이종환 정도의 작가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작가가 그리스도교 휴머니즘 회복을 위한 저항적인 성격을 지녔다. 해방 이후 4반세기 만에 등장한 작가들은 이종환·이범선·정을병·김용운·백도기·오승재 등이다.

그리스도교와 청년문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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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敎-靑年文化運動

개국(開國)과 더불어 한국청년들은 새로운 사조(新思)가 밀려 들어오자 사상적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당시에 유행되었던 신사상(新思想)은 민주주의·인도주의·사회주의·공산주의·과학사상 등이었다. 특히 민주주의는 그리스도교정신에 바탕을 둔 것이었지만 봉건사상이 가시지 않은 교회지도자들의 억압에 눌려 울분을 참아오던 청년들은 3·1 운동을 계기로 일제히 일어나 신앙자유를 구가하면서 구질서에 반항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때에 이들의 젊음을 건전한 문화의 창달과 사회봉사에 투자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니 그것이 곧 '황성기독교청년회 (YMCA, 1903년 10월 28일 창립)'의 활동이다. 이 청년회는 구성분이 둘 있었으니 하나는 상류층 중심의 독립협회계(系)였고, 또 하나는 하류층 중심의 엡워드청년회계(系)였다. 철저한 민주적 정신과 항일구국의 기백이 힘있게 새겨졌던 것이다. 한편 이 청년회의 본질은 교회가 접촉할 수 없는 층의 청년들을 특이한 방법으로 접근하려는 데 있었다. 반드시 종교적이 아닌, 폭넓은 프로그램, 곧 체육과 농촌사업 및 직업교육 등을 통해서 YMCA는 자기의식을 찾기 시작한 근대한국의 청년들을 한데 합치는 민족적 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이 청년회의 중요한 사업으로는 종교사업으로 일요강좌·성서연구·특별전도 등이 있었고, 공업교육으로 인쇄·목공·철공·제화·사진 등이 있었으며, 외국어교육으로 영어·독어·중국어·에스페란토(Esperanto) 등이 교수되었고, 소년부와 체육부에서는 서양식 경기와 체육의 보급, 사회활동을 관장해서 젊음의 기상을 키워주었다. 그 외에 1922년에 YWCA가 창설되어 몽매한 여성들의 계몽과 사회봉건적인 관념을 타파하고 사회문제 등에 관심을 갖고 활동하였다. 해방 이후에도 이런 운동은 계속되어 한국 근대화의 활력소가 되어 왔으며,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점차 사회정의구현을 위해 참여하고 있다. 특히,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과 서울지구교회청년협의회, 대한가톨릭학생총연합회 등이 새로운 청년문화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는바, 앞으로의 새 역사 창조가 기독청년문화운동 속에서 전개되어질 전망이 크다. 또한 한국 그리스도교의 문화를 보다 건설적으로 정립할 것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