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종교·철학/한국의 종교/한국의 기타 종교/원불교〔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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圓佛敎〔序說〕 원불교를 창교한 교조 박중빈(朴重彬)은 1891년 3월 전남 영광에서 탄생하였다. 박중빈의 자호는 소태산(少太山)이며, 제자들은 그를 대종사(大宗師)라고 호칭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우주 자연현상과 인간 만사에 큰 의심을 일으켰다. 그 의심을 해결하고자 산신(山神)과 도사(道士)를 구하여 보았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스스로 기도와 고행을 하던 중 마침내 모든 생각을 다 잊은 경지에 들어갔다. 그는 그럭저럭 20년이란 긴 세월을 흘려 보냈다. 그가 26세 되던 1916년 3월 26일, 드디어 대정(大定)의 상태에서 깨어나 대각(大覺)을 이루었다. 그가 깨달은 진리는 우주 및 인생의 근원적인 진리로서 생성원리(生成原理)를 드러낸 것이었으니 이를 일원상(一圓相)으로 상징하였다. 대각 후 대종사의 환골탈태(換骨奪胎)한 모습은 그를 대하는 사람들에게 경의와 감명을 주었다. 그리하여 그를 비웃던 사람도, 연상의 이웃들도 제자가 되려고 그의 앞에 모여들었다. 그들 중에서 9인의 지도적 인물을 뽑아 양성하니 이들은 교단창립(敎團創立)의 초석이 되었다. 박중빈은 대각의 안목으로 세상 정세를 관망하니 세도인심(世道人心)을 바로잡을 일이 무엇보다도 시급함을 느꼈다. 그는 수신(修身)의 요법(要法), 제가(齊家)의 요법, 강자·약자 진화(進化)의 요법, 지도인(指導人)으로서 준비할 요법 등 최초법어(最初法語)를 발표하고 이를 제자들에게 먼저 훈련시켰다. 그리고 허례 폐지와 근검저축과 유휴 노동력을 개발하여 사업 자금을 마련하는 한편 백수면(白岫面) 길용리(吉龍里) 해안을 막아 간석지(干潟地)를 개간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제자들과 함께 3년간에 모은 기금으로 바다를 막을 결심을 하고 1918년 3월 스스로 조합장(組合長)이 되었다. 9인 제자들과 조합원이 되어 10인 일단으로 지사불변(至死不變)의 포부와 서약을 하고 방언공사(防堰工事)에 착수하였다. 그들은 일심합력(一心合力)으로 모든 난관을 무릅쓰고 1년 만에 성공하였다. 그는 "물질이 개벽(開闢)되니 정신이 개벽하자"라는 개벽표어(開闢標語)를 내걸었다. 물질개벽이란 과학문명을 의미하였고, 정신개벽이란 도덕문명을 의미하였다. 물질문명은 점점 번성하는데 그것을 주도해야 할 인간의 정신은 극도로 쇠약해감을 본 것이다. 그는 과학문명을 인정할 만한 정신의 권리만 회복한다면 결함없는 이상사회가 이 땅에 도래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던 것이다. 소태산은 방언공사를 끝내자 단원들과 함께 제생의세(濟生醫世)의 포부를 실현하기 위해 사무여한(死無餘恨)의 정신으로 무아봉공(無我奉公)할 것을 굳게 서원(誓願)하는 기도를 3개월간 계속하였다. 이어서 장차 교문을 열어 정법(正法)교화를 하기 위한 연구에 착수, 1920년에는 인생의 요도(要道), 4은4요(四恩四要)와 공부의 오도, 3학8조(三學八條)를 교강(敎綱)으로 발표하였다. 1924년 장차 교화의 본산이 될 근거지를 다시 마련하니 이곳이 바로 현재의 원불교 중앙총부와 원광대학교가 있는 전북 익산군 북일면 신용리(益山郡 北一面 新龍里)이다. 박중빈을 중심으로 이들은 또다시 이곳에서 개척정신을 발휘하였다. 당시 그곳의 황무지를 밭으로 개간하여 산업부(産業部)를 세우고 한편으로는 엿장사를 하면서 교화의 터전을 닦으며 동지를 규합했다. 모여든 동지들은 엿밥과 아카시아잎으로 끼니를 이어가는 어려움 속에서도 대회상(大會上) 건설의 기반을 닦기 위해 벅찬 희망을 안고, 낮에는 노역에 종사하며, 밤에는 도학공부(道學工夫)에 정진함으로써 이사병행과 영육쌍전(靈肉雙全)의 정신을 실천했던 것이다. 그후 그는 법신불 일원상(法身佛一圓相)의 진리를 근본 바탕으로 한 교리와 제도를 구체화하여 교화하기 20여 년간, 일제의 갖은 압제를 다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리훈련과 사업확장 등 민족의 저력을 길러 오다가 1943년 6월에 입적(入寂)하였고, 초창 당시 9인 제자의 한 사람인 정산(鼎山:宋奎)이 제1대 종법사(宗法師)로 취임하였다. 그는 8·15 해방을 맞아 한글보급·전재동포구호사업·교육사업 등을 활발히 전개시켰다. 또한 정산종사는 교조의 정신을 계승하여 교명(敎名)을 원불교(圓佛敎)라고 정식으로 개칭하였다. 그는 교화·교육·자선 등의 공익사업을 점차 확장하였다. 교세는 계속 발전하여 오다가 1962년 1월에 정산종사도 입적하였다. 그리하여 대산(大山:金大擧)이 제2대 종법사(宗法師)의 직에 취임하고 교단적으로 개교 반백년(開敎半百年) 결실성업(結實聖業)을 추진하였다. 1971년 10월 8일 세계적 종교에로의 발전을 촉구하는 뜻에서 국내외 60만 전 교도는 단합대회(團合大會)를 가졌다. <柳 炳 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