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종교·철학/한국의 종교/한국의 도교/한국도교의 사상·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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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도교의 사상·문화〔개설〕[편집]

韓國道敎-思想·文化〔槪說〕

한국도교를 취급할 때는 언제나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점이 있다.

그것은 도교(道敎)를 한국고래의 민족고유신앙에 원류(源流)를 두고 보는 경우와 중국에서의 도교, 즉 중국민족의 통속신앙을 바탕으로 하여 황로사상(黃老思想)에서 정립시킨 후한말(後漢末:2세기 전반기)의 장각(張角)이 연 태평도(太平道)와 장릉(張陵) 등이 세운 오두미도(五斗米道)를 도교의 원류로 보아 설명하는 경우로 나눠서 들 수 있다.

본래 도교는 은둔생활(隱遁生活)에서 도리를 터득하여 그것을 구전심수(口傳心授)하고 단전단수(單傳單授)한 것으로 사상이나 문화에 끼친 영향도 각기 그 분야에서 근저(根底)를 이룰 수는 있어도 독창적인 것을 내놓지는 못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한국 도교도 고유 신앙 위에서 중국의 황로사상(黃老思想)과 신선사상(神仙思想)에다 유·불교를 덧붙여서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특정한 시대의 사상이나 문화에 끼친 영향에 대하여도 그 시대적 배경에 따라 달리 나타나고 있다. 고조선의 건국설화(建國說話)부터가 다분히 도교적 색채를 띠고 있다.

그렇더라도 중국적 도교라는 것이 아니고 한국은 한국 특유의 도교풍 신앙은 미 건국설화에서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여러 고기(古記)에서 볼 수 있는 고대사회의 시조(始祖)에 관한 공통적 설화형태(說話形態)에 나타난 태(胎)·란(卵)·습(濕)·화(化)의 사생설(四生說)에 의한 도교적 유래와 출생은 범인(凡人)과는 달리 신이비상(神異非常)한 신선설(神仙說)을 능히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단군설화(檀君說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군장(君長)과 천신(天神)과의 관계, 제사장(祭祀長) 칭호와 신단(神壇) 설치에서도 알 수 있듯이 중국의 도교가 아직도 고대조선에 유입되기 이전에 이미 도교사상은 모든 분야에 영향을 주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삼국시대(三國時代) 역시 통속신앙에 의한 설화적 사회구조 아래 사상·문화 등 여러 제도가 형성되어 오다가 고구려는 중국의 남북조(南北朝) 때 도교(신선사상과 노장의 무위사상)가 유입된 흔적이 있었으며, 영류왕(榮留王) 7년(624년)에는 당고조(唐高祖)가 도사를 시켜 천존상(天尊像)과 도법을 가지고 와서 <노자(老子)>를 강하게 되었다.

백제(百濟)는 근초고왕(近肖古王) 때 그의 아들 근구수왕(近仇首王)이 태자로 있을 때 고구려와의 싸움터에서 장군 막고해(莫古解)가 도가(道家)의 글을 인용하여 추격을 중지하였다는 기록(<삼국사기>)을 보면 백제에도 불교가 들어오기 전에 중국도교가 이미 유입되었고, 신라(新羅)는 삼국 중 가장 고유신앙이 깊어 낙천적이고 현실주의적인 생활양식이 중국의 도교사상인 무위자연주의(無爲自然主義)와 결합되기 알맞게 형성되어 있었으며 중국도교의 유입은 제34대 효성왕(孝成王) 2년, 당현종(唐玄宗)이 사신을 시켜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과 여러 가지 문서를 보내 왔다는 사실이 있으나 신라 역시 고구려, 백제와 더불어 민족고유의 통속신앙에 의한 산신사상(山神思想212)·수신사상(水神思想)·무속신앙(巫俗信仰) 등 정령사상(精靈思想)인 자연숭배(自然崇拜) 신앙이 깊었고 이에 원류를 둔 도풍과 선파(仙派)가 존재했었다.

이렇게 삼국시대는 민족 고래의 고유신앙을 바탕으로 중국 도교와의 교섭은 도참사상(圖讖思想)이 널리 보급되고 때를 같이하여 전래된 불교와 더불어 삼국시대의 사상과 문화에 끼친 영향이 크다 할 것이다.

그 후 통일신라시대를 거쳐 고려초기에는 종교를 왕조통일국가를 추진하는 활력으로써, 태조 왕건(王建)은 훈요십조(訓要十條:유·불·도 사상을 혼합 제시한 계훈)를 제창하여 교화정치사상(敎化政治思想)을 정립시켰으며, 국교로는 통일신라에 이어 불교를 숭상하였다가 점차 유·불·도를 다 포용하였고 도교적 면으로는 팔선사상(八仙思想), 팔관회(八關會), 초제(醮祭)제도가 있었으며, 관청기관으로 복원관(福源觀)·대청관(大淸觀) 등이 있어 민속신앙으로서 서민층에까지 깊게 파고들었다.

고려 말기에 이르러 유교의 정주학(程朱學)이 들어와 판을 치게 되자 도교는 불교와 함께 지식계급으로부터 배척당하게 되었고, 조선 전후기를 통하여 유교를 국교로 하는 정치제도 아래 사림(士林)으로부터 대단한 비판을 받는 가운데도 대청관과 소격전(昭格殿)은 존립하여 각급 초례(醮禮)가 봉행되었으며, 중종 때에 조광조(趙光祖) 등의 유학자에 의하여 소격전이 혁파되었다가 4년 뒤 복설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파괴되었다.

그러나 조선의 당파싸움은 많은 사림파(士林派) 가운데 은거(隱居)하는 청담풍(淸談風)이 일어나 현실에 실망한 유생(儒生)들이 유가에 대립하는 도가(道家)를 야인정신(野人精神)의 귀의처로 삼고 산야(山野)에 파묻혀 수도하는 단학파(丹學派)를 형성하였다.

최근세에 와서는 <태상감응편(太上感應篇)>에 교리를 둔 선음즐교와 유·불·선 3교를 합일하는 종지를 내걸고 일어난 최제우(崔濟愚)의 동학(東學)과 강일순(姜一淳)을 교조(敎祖)로 하는 50여 개파의 증산교단(甑山敎團) 등 민족사상에 기틀을 둔 신흥종단이 난립하였다.

뿐만 아니라 제2차세계대전 직후에 중국 톈진(天津)으로부터 장서전(張瑞筌) 등에 의하여 전래한 일관도(一貫道)는 각기 대한도덕회(大韓道德會)·국제도덕협회(國際道德協會)라는 종교단체로서 성리심법(性理心法)을 전하고 있다.

한국도교는 중국의 성립도교(成立道敎:敎團道敎)가 들어오면서부터 유교의 각종 경서와 불교의 경전과 함께 많은 도서(道書)가 전래하여 사상과 문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바 있다.<盧 在 璣>

정령신앙과 도교[편집]

精靈信仰-道敎

고대(古代)에는 어느 민족이나 정령사상에 깊이 빠져 있었다. 그리하여 각기 독특한 일종의 <도교풍>이 형성되었고, 각자의 사상과 문화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모든 정령들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능력자가 한 부족의 통솔자(統率者)가 되고 군장(君長) 자격이 있다고 믿는 것이 고대 신앙으로 되었기 때문에 고조선을 개국한 단군왕검(檀君王儉) 역시 정령을 자유자재로 부릴 수 있는 절대자로 믿어졌고 영능자(靈能者)로서의 군장(君長) 또는 제주(祭主)로 추앙받았음에 틀림없다.

천부인과 신시[편집]

天符印-神市

단군(檀君:君長)의 계통을 한울(天)에다 두고 지상국가(地上國家)를 천상국가(天上國家)의 연장으로 보아 하늘에서 천제의 아들 환웅(桓雄)이 천제(天帝)로부터 천부인(天符印) 3개를 받아 무리 3천을 이끌고 땅에 내려왔다 함은, 천부인 3개는 권능자로서의 능력을 상징하는 것이며 신시(神市)는 한울에 제사지내는 제단(祭壇)으로 풀이할 수 있는 것이다.

천부인(天符印:천·지·인의 권능)으로 나라를 다스릴 때 재곡(財穀)·생명(生命)·질병(疾病)·선악(善惡) 등 360여 가지의 일을 주재(主宰)했다고 하니 이는 도교적 사상의 원류인 정령신앙(精靈信仰)에서 기인하였다고 볼 수 있다.

삼국시대의 도교사상과 사회문화[편집]

三國時代-道敎思想-社會文化

중국에서의 도교가 성립도교(成立道敎)로서 교단형성이 되자 이에 영향을 받은 고구려·신라·백제 등 삼국도교도 여러 방면으로 그 형태가 달라졌다.

낙천적(樂天的) 현실주의에서 온 자연숭배사상(自然崇拜思想)은 고구려에서 수신(隧神)에 제사지내게 되었으며, 신라에서는 사직단(社稷檀)을 세우고 제사지내는 제도가 생겼고, 서민층에 점복술(占卜術)이 성행하여 선지예조(先知豫兆)의 사상이 널리 보급되었음은 물론 <음양도참설(陰陽圖讖說)>과 함께 신라 고유의 풍류도(風流道)·풍월도(風月道)와 교섭되면서 통일신라를 이룩하는 강력한 화랑도정신을 정립시켰다.

고구려 문화의 주체성 형성[편집]

高句麗文化-主體性形成

삼국문화의 형성과정을 고찰할 때 동북 아시아 계통의 원시문화를 기반으로 하여 철기문화(鐵器文化)를 수입함으로써 성립되는 것이나, 고구려에 있어서는 한족(漢族)의 침입에 대항하면서 고구려 고유의 신앙인 일월지자(日月之子)의 정신적 전통을 수립하여 고유문화를 확립하였다.

연개소문의 억불양도책[편집]

淵蓋蘇文-抑佛揚道策

연개소문(淵蓋蘇文)은 고구려 보장왕때의 재상으로서 보장왕 2년(643년)에 왕에게 도교(道敎)의 없음을 탄하고 나라의 위급을 상주하여 당태종(唐太宗)에게 청하였던바, 당태종은 숙달(叔達) 등 도사(道士) 8명에게 천존상(天尊像)과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을 보내왔으므로 불사(佛寺)를 도관(道觀)으로 삼고 도교를 신봉하니, 그때의 명승 보덕화상(普德和尙)이 <국가봉도(國家奉道) 불신불법(不信佛法)>이라 하여 망국(亡國)을 개탄하고 백제 완산(完山:지금의 전주) 반룡사(盤龍寺)로 망명 거주하였다.

백제에의 도교 전래[편집]

百濟-道敎傳來

백제에 교단도교(敎團道敎)가 성립된 흔적은 뚜렷하지 않으며 불교가 성행하였음은 "승니사탑심다, 이무도사(僧尼寺塔甚多, 而無道士)"라고 기록한 <주서 이역전(周書異域傳)-백제조(百濟條)>에서 엿볼 수 있으나, 근초고왕(近肖古王:제13대) 때 이미 불교가 백제에 전래하기 전에 도서(道書)가 유입된 사실이 입증되고 있다.

장군 막고해(莫古解)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태자에게 추격을 간하여 "상문도가지언, 지족불욕, 지지불태, 금소득다의, 하필구다(嘗聞道家之言, 知足不辱, 知止不殆, 今所得多矣, 何必求多)"라 하여 도서(道書)를 인용하여 중지시킨 사실이 그것이다.

백제의 산경전[편집]

百濟-山景塼

근래 발견된 소위 산경전을 보면, 품(品)자 형의 삼봉(三峰:3봉우리)이 중첩해 있고 산 밑에는 큰 바위가 뾰족하게 튀어나왔으며 산 위에는 수목이 울창하고 가운데는 집이 한 채, 우측에는 한 사람의 도사(道士)와 비슷한 인물이 그려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분명히 삼신산(三神山)과 도관(道觀)과 도사(道士)를 표현한 것이 아닌가 짐작되므로 백제가 신선사상(神仙思想) 내지 도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직기·박사 왕인의 도교 일본 전수[편집]

阿直岐·博士王仁-道敎日本傳授

아직기와 왕인은 다 같이 백제 근초고왕과 근구수왕 부자 때의 사람으로 차례로 일본에 보내어져 한학(漢學)을 전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도교사상과 도교적 의식(儀式)을 아울러 전수하였음도 뚜렷하다.

신라 고유신앙과 도교사상[편집]

新羅固有信仰-道敎思想

삼국 중 신라는 도교류의 고유신앙이 가장 강하게 흐르고 있었으며 화랑도(花郞道)의 원류인 풍월도(風月道)·풍류도(風流道)는 오래 전부터 있어 왔다.

화랑도의 낭도(郎徒)를 국선(國仙) 또는 선랑(仙郞)이라 불렀으며, 통일신라를 이룩하는 데 사상의 근저가 된 도교사상도 교단성립(敎團成立)을 이룬 적은 없었다. 오로지 산천기도(山川祈禱)에 전념하고 서민층에서는 면액(免厄)·발복(發福) 등 무축기도(巫祝祈禱)로 전락하여 통속신앙인 무속(巫俗)이나 기축의식(祈祝儀式)과 습합(習合)하여, 나중에 와서는 동학(東學)과 같은 사상적 요소에 집약되기도 했다.

신라선파[편집]

新羅仙派

통일신라시대에는 도교가 유·불(儒·佛) 양교에 많은 영향을 미쳐서 3교합일(三敎合一)의 경지까지 승화시켜 놓았으나 이를 후세 사람들은 위작(爲作)으로 보는 이도 있으며, 원래 도교의 흐름이 민족신앙을 바탕으로 했고 모든 외래종교가 토착화하는 과정에서는 통속적 민속신앙에 교섭되지 않은 것이 없는 한 위작으로만 단정해서는 안 된다.

신라선파(新羅仙派)는 영랑(永郞) 등 사선(四仙), 호공(瓠公), 물계자(勿稽子), 대세(大世), 구칠(仇柒), 옥보고(玉寶高), 우륵(于勒), 김·소 2선(金蘇二仙), 장미선인(薔微仙人), 김가기(金可紀), 최승우(崔承佑), 자혜(慈惠), 이청(李淸), 권청(權淸), 의상대사(義湘大師), 최치원(崔致遠), 김유신(金庾信) 등 설화(說話)와 이적(異蹟)과 함께 비기(秘記)가 많이 전해져 있어 문화형성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화랑도의 자연주의사상과 도교[편집]

花郞道-自然主義思想-道敎

신라인의 풍류적 기풍은 고대로부터의 도교사상에 연유한 영육일치사상(靈肉一致思想)과 공통점이 있고 상호협동(相互協同)하는 정신을 강하게 하여 제사(祭祀)·군사(軍事)·경제 등 화합충성의 덕(德)으로 발현되어서 화랑의 생활양식 중 가장 중요한 상마이도의(相磨以道義:理性陶冶), 상열이가악(相悅以歌樂:情緖陶冶)으로 나타났던 것이며, 이러한 정신의 연마는 세속오계(世俗五戒)의 실천윤리사상과 삼국통일의 정신적 근저를 이루었다.

삼국시대의 도참사상[편집]

三國時代-圖讖思想

우리나라에서는 도참서(圖讖書)를 비결(秘訣)·비기(秘記)·예참(豫讖)등으로 말하는데 이 도참(圖讖)은 중국 고대로부터 전래한 것으로 복회씨(伏羲氏)시대에 하도(河圖), 하우씨(夏禹氏)시대에 낙서(洛書)가 각각 나왔다고 전하며, 중국에서는 역대의 비밀결사 단체들이 이 사상에 매혹되어 운영되는 등 널리 뿌리 깊이 파고들었다. 한국에도 고대사회로부터 전래하는 도참사상은 있었으나 일찍이 문자가 없어 이를 묶지 못해 중국보다 뒤떨어진 감이 있지만 중국문화의 유입과 함께 한문의 영향을 받고 여러 가지 비기·비결이 유행하였다.

탈해왕의 지상술[편집]

脫解王-地相術

탈해왕은 신라 제4대왕으로 성(姓)은 석(昔)이다. 매우 전설적인 임금으로서 양산(楊山) 밑 호공(瓠公):신라선파 중의 한 사람)의 집터가 길지(吉地)임을 알고 이를 탈취하여 성(城)을 구축하였다는 설이 있다. 이곳이 지금의 월성(月城)으로서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의 첫 실천자로 알려져 있다.

신라·백제 망국참언[편집]

新羅-百濟亡國讖言

신라 말년에 최치원(崔致遠)이 고려에 의하여 신라가 망할 것이라는 예언을 <계림황엽·곡령청송(鷄林黃葉·鵠嶺靑松)>으로 참했으며, 백제 의자왕(義慈王) 때 나라의 멸망을 참한 <백제동월륜·신라여월신(百濟同月輪·新羅如月新)>이란 글귀가 거북의 등에서 나타났다고 한 설화를 보면 도참(圖讖)과 함께 점복술(占卜術)이 성행하였음도 짐작된다.

태조 왕건의 도참사상[편집]

太祖王建-圖讖思想

왕건은 도선(道詵, 827∼895:신라 말기의 사람으로 영암출신)의 지리도참설과 비기(秘記)에 힘입어 후3국을 통일하는 데 이용하였고 훈요10조(訓要十條)에도 제2조와 제5조, 제6조에는 도참사상이 반영되었다.

구변진단지도[편집]

九變震檀之圖

구변도국이라고도 불리는 상고시대의 신선 신지(神誌)의 저서로 전해오는데, 도선비기(道詵秘記)와 함께 고려시대에 널리퍼져 많은 도참설을 낳았고 이씨가 입국건도(立國建都) 한다는 설도 이에 기인하였다.

이 밖에도 도참사상이 낳은 많은 비기가 있으나 그 가운데 중요한 것으로 도선답산가 도선답산가(道詵踏山歌), 서경천도론(西京遷都論), 남경천도론(南京遷都論), 신라부흥참(新羅復興讖), 최충헌의 산천비보정책(山川裨補政策), 용언궁(龍堰宮), 김암(金巖)의 은형술(隱形術), 왕창근경문참(王昌瑾鏡文讖) 등이 있다.

고려의 연기·비보사상[편집]

高麗-延基·裨補思想

명종(明宗)·신종(神宗) 때의 고려는 무관이 집권하고 나라 안은 계속된 동란으로 왕권이 쇠퇴해가는 한편 천후(天候)의 이변으로 갖가지 액(厄)이 계속되어 이때에 자연히 지리도참(地理圖讖)에 의한 연기·비보의 시설이 논의되게 된 것이다.

3소궁궐[편집]

三蘇宮闕

명종 4년 5월에 왕명으로 개경(開京)의 지덕(地德)을 연장시키고 비보하기 위하여 좌소(左蘇)를 백악산(白岳山:지금의 장단 백학산)에, 우소(右蘇)를 백마산(白馬山:지금의 개풍군 대성군)에, 북소(北蘇)를 기달산(箕達山:지금의 황해·신계군 초면)에 궁궐을 창건하고 국왕의 순주지(巡駐地)로 삼았다.

이 3소(三蘇)는 고대신앙인 3신사상(三神思想)과 일치하는 점도 많고, 소도(蘇塗:삼한시대 부락국가의 수호신을 위하던 大木·竿木)의 유풍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풀이된다.

최충헌의 산천비보정책[편집]

崔忠獻-山川裨補政策

신종(神宗) 원년(1198년)에 권신 최충헌이 문무제신과 술사(術士)를 모아 논의하고 임시관청인 산천비보도감(山川裨補圖鑑)을 설치, 산천의 길흉을 묻지 않고 함부로 불사(佛寺)을 일으키는 것을 억제하여 비비보(非裨補) 사찰을 철폐하는 등 다소의 억불(抑佛)정책을 쓴 바 있었다.

이러한 음양참설에 기인한 비보압승(裨補壓勝)은 국내의 산천을 비보하는 한편 무인자가(武人自家)의 지위를 안전 보위하려는 저의도 엿보인다.

고려의 도·불사상 혼합[편집]

高麗-道·佛思想混合

건국 초기부터 신라에 이어 불사(佛事)인 팔관회(八關會), 연등회(燃燈會)를 가지면서 도교적 행사인 초제(醮祭)를 지냈고 복원관(福源觀)·대청관(大淸觀)과 같은 관청도 설치했다.

묘청(妙淸, ? ∼1135:서경의 術僧·道僧으로 후에 淨心이라 불렀음)의 칭제건원론(稱帝建元論), 8성사상(八聖思想), 태일옥장보법(太一玉帳步法)과 백수한(白壽翰: ? ∼1135:고려때 日官으로 묘청에게 師事한 제자)의 천지인 3정사의장(天地人三庭事宜狀) 등 도교사상에 근거한 것이 보인다.

초제청사[편집]

醮祭靑詞

도가에서 초례(醮禮)를 올릴 때 축원문(祝願文)을 푸른 종이에 쓰고 도장(道場) 문에도 푸른 종이를 썼으므로 이것을 청사(靑詞)라고 한다.

초제청사에는 김부식(金富軾)의 <건덕전초례청사(乾德殿醮禮靑詞)>, 김극기(金克己)의 <동지태일청사(冬至太一靑詞)>, <건흥절태일청사(乾興節太一靑詞)>, <왕본명청사(王本命靑詞)> 등이 있다.

그리고 이외에도 <국복북두연명도액도장문(國卜北斗延命度厄道場文)> 등 많은 청사가 있었고 이것이 일반 사회 생활에 미치는 영향은 대단히 컸었다.

소격전과 민속신앙[편집]

昭格殿-民俗信仰

조선 초기에는 고려의 본떠 왕성 안에 대청관·소격전 등을 설치하고 각종 초례(醮禮)를 봉행하는 한편 일반 문신(文臣)이나 민중 사이에는 도교가 은밀히 성행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상류 사림사회(士林社會)에서의 당파 싸움이 차차 극심해질수록 중앙정계에서 밀려난 유학자(儒學者:선비)들은 더욱 도학에 심취되었고, 일반민중은 은둔생활에서 수도(修道)하는 이들을 신선시(神仙視)하게 되었다.

실학자(實學者) 가운데도 도교를 숭상하는 이가 많아져 단학파(丹學派)를 형성하게 되었다.

왕실에서 행해지는 초례(醮禮)에는 노자(老子:太上老君)를 최고의 숭배 대상으로 삼고 칠성(七星)·옥황(玉皇)·천존제군(天尊帝君)에 제사하였으며 무축(巫祝)의 성격을 띤 개복신초(開福神醮)·청명초(請名醮)·도병초(禱兵醮)·기우초(祈雨醮)·소격전 본명초제(本明醮禮)·소격전 진병초(鎭兵醮)·사원초(三元醮)·삼계초(三界醮) 등과 마리산단제천(摩利山壇祭天) 등이 행해진 뒤에는 일반민중은 무속신앙에 더욱 깊이 빠져서 마지막에는 많은 미신(迷信) 행위가 성행하게 되었다.

조선단학파[편집]

朝鮮丹學派

<해동이적(海東異蹟)>(洪萬宗輯)에 실린 선파(仙派) 20인 중 대표적인 조선단학파를 든다면 권진인(權眞人)과 남궁두(南宮斗)·김시습(金時習)·남추·정렴·전우치(田禹治)·윤군평(尹君平)·곽재우(郭再祐)·권극중(權克中) 등이 있고, 종래 실학자들의 음양도참사상 관심은 주목되며, 많은 도법과 비결이 나왔다.

예를 들면 <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 <옥추보경(玉樞寶經)>, <청학집(靑鶴集)>, <정감록(鄭鑑錄)> 등이 있었다.

은둔사상과 무축신앙[편집]

隱遁思想-巫祝信仰

임진왜란을 겪고 나서 소격전(昭格殿)이 혁파 폐지되었고 민간에서 성행되었던 무격(巫覡)은 불교와 교합되기도 했으나 명군(明軍)이 임란때의 원군으로 나오면서 도교계(道敎系)의 민간신앙에 관왕(關王:중국의 관운장)숭배가 전래되고 국가에서는 관묘(關廟)까지 세우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일부 사림(士林)에는 청담풍(淸談風)이 일어 은둔사상이 보급되었고, 서민층 대중에는 비결(秘訣)에 의한 말세사상(末世思想)이 널리 퍼져 뒷날 동학(東學)과 같은 신흥종교를 열게 하여 민중봉기의 기인이 되었다.

도교적 민속[편집]

道敎的民俗

한국민속(民俗:風俗)은 고대로부터 전래하는 민간신앙에 원류를 두고 중국에서 유입된 각종 문화(유·불·선)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이다.

이 중 도교적인 것으로 짐작되는 것은 속절제(謖節祭)·무속가제(巫俗家祭)·촌제(村祭) 등이 보인다.

동학사상과 도교[편집]

東學思想-道敎

조선 말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崔濟愚, 1824∼1864:호는 水雲, 초명은 福述)는 서학(西學:천주교문화)에 대항하기 위하여 이른바 동학(東學)을 일으켰는데 이는 유·불·선 3교를 민족고유 신앙에 융합시켜 절대적 유일신(唯一神)으로 한울님(天主)을 신봉하고 인내천(人乃天)사상을 핵심으로 기존체제를 타파하여 평등사회(平等社會)로 개혁하는 한편 말세사상을 동원시켜 개벽(開闢)신앙을 고취시키며 정치적으로는 '보국안민(輔國安民)·척양척왜(斥洋斥倭)'를 앞세워 수심정기(守心正氣)를 수도(修道)의 요결로 민중교화를 하는 한편 도가적(道家的) 비결과 도참설을 동원하였던 것이다.

후에 동학은 천도교(天道敎), 천진교(天眞敎), 상제교(上帝敎), 시천교(侍天敎)와 같은 민족신앙을 지향하는 도교적 교단을 형성케 했다.

천지공사[편집]

天地公事

증산교의 교조인 강일순(姜一淳, 1871 ∼1909:호 甑山, 전북 정읍 출생)이 유·불·선 3교를 합일하는 새종교를 열고 천지를 개벽하여 지상선계(地上仙界)를 건설하는 작업으로 내건 것이 천지공사(天地公事)인데, 그 방편으로 도교적인 둔갑술(遁甲術)·주술(呪術)·도참·치병을 내세웠다. 이 천지공사를 신명공사(神明公事)·세운공사(世運公事)·교운공사(敎運公事)·인도공사(人道公事)로 구분했다.

한국현대의 도교[편집]

韓國現代-道敎

고대로부터 한국에는 성립도교(成立道敎)로서 교단(敎團)은 존재하지 않았고, 민간신앙이나 외래종교에 융합되어 흘러오다가 현대에 와서는 기성종교(유교·불교·그리스도교 등)와 상대적 입장의 여건에서 성립되는 신흥종교의 원류를 이루는 역할로 나타났다.

그리고 극소수의 염세주의적인 식자(識者)들의 현실도피적인 수도(修道) 방편으로 도교가 활용되고 있을 뿐이다.

조선의 성리학과 일관도의 성리심법[편집]

朝鮮-性理學-一貫道-性理心法

조선 때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정주학(程朱學:性理學)은 한국의 사상, 문화면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바 있으나 그것은 유학(儒學)으로서의 성리학으로, 중국의 송학(宋學)이 도교의 절대적인 영향을 받은 것과는 상관없었으나 제2차세계대전 종전 직후 1946년 9월 중국 톈진(天津)으로부터 장서전(張瑞筌) 일단이 들여 온 일관도(一貫道)는 성립도교(成立道敎)로서의 한국전래가 처음이 아닌가 보여진다.

이들은 중국의 정통도교(正統道敎)를 표방하고 3기말겁사상과 5교귀일사상(五敎歸一思想)을 내세워 이(理)·기(氣)·상(象)의 3천세계(三川世界)에서 성리심법을 구현하면 천지생성(天地生成)의 이치를 터득하여 피재도난(避災逃難)하고 요생초사(了生超死)할 수 있는 진리를 얻는다고 하여 도교의 무위자연주의사상(無爲自然主義思想)과 결부짓는다.

이 유파(流派)는 중국도교의 북종(北宗)에 속하는 전진교에 원류(源流)를 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