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종교·철학/한국의 종교/한국의 불교/한국불교의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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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의 문화〔개설〕[편집]

韓國佛敎-文化〔槪說〕

어느나라의 문화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우리나라의을 겪어왔다. 외래문화의 충격과 그에 따른 반발과 수용, 소화와 발전의 반복을 거듭하면서 우리나라의 문화는 형성되어 왔던 것이다. 선사시대에도 이런 현상은 거듭되었지만, 한사군(漢四郡)의 설치(BC 108)를 전후하여 중국문화의 전파는 한국문화사상 또 하나의 기복이었다. 이것을 소화하여 우리 문화에 흡수, 발전시키고 있을 때 또 다른 문호의 충격이 미쳐왔다. 즉 불교문화의 전파이다. 이것은 좀더 광범하고, 좀더 철저하며, 좀더 복합적으로 충격을 주었다. 종교문화이기에 이것은 정신적으로 우리 민족의 심층에까지 파고 들었으며 또는 민족의 모든 계층에 널리 심어졌던 것이다. 더구나 이것은 상대적인 문화이기에 미술과 음악, 문학과 사상 등 전반적인 문화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이러한 충격은 인도에서 기원(起源)하여 중앙 아시아·중국을 거쳐 온 것이므로 광범하고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었다. 따라서 불교문화의 전래는 아마도 한국의 문화사상 복합적이고 광범한 점에서 전후미후무한 문화적 충격의 하나에 속한 것이다. 이 시대가 372년의 불교수입 이후의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및 고구려였고 유교문화의 충격에 다소 흔들린 것이 청동기대였다.

고구려의 불교문화[편집]

高句麗-佛敎文化

불교를 최초로 받아들인 고구려는 372년 소수림왕 2년(小獸林王 二年)에 초문사(肖門寺)와 이불란사(伊不蘭寺)를 창건하면서부터 서서히, 그리고 착실하게 불교문화를 꽃피우기 시작하였다. 5세기를 넘어서면서부터는 불교문화가 공전의 성황을 이루었는데 수많은 학승(學僧)들이 중국·인도로 유학했고, 다수의 명승(名勝)들이 신라나 일본으로 건너가서 교화(敎化)에 전력하였다. 따라서 많은 사찰(寺刹)이 곳곳에 세워지고 조상(造像)·조탑(造塔) 등 미술활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현재는 이들 문화의 유산들이 거의 없어져서 그 전모를 완전히 파악할 수가 없지만 연가 7년명 금동여래입상(延嘉七年銘金銅如來立像:539) 같은 조상들, 많은 와당(瓦當)들, 또는 고분벽화에 남아있는 불교화의 전통이나 고구려벽화 계통인 일본의 법륭사 벽화 등의 작품들에서 우리는 다소나마 당시의 불교문화를 복원해 볼 수 있다.

그들이 받아들인 불교문화가 중국의 북조(北朝)를 거쳐 왔던 영향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도 고구려의 문화적 특색이 이들 불교문화에 현저히 작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활달하고 강직한 문화적 특색이다. 그러니까 그들의 북방적 기질은 바로 불교문화에도 작용하여 고구려 불교문화의 특색을 이루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건축·조각·회화·공예 등의 미술문화 또는 기타 예술 및 학문과 사상 등에 이르기까지 고구려문화는 이 불교문화의 충격으로 말미암아 일대 비약을 했던 것이며, 이것을 그들 나름대로 소화, 발전시켜 찬란한 고구려문화를 이루었다고 하겠다.

백제의 불교문화[편집]

百濟-佛敎文化

백제는 고구려보다 좀 늦은 384년(枕流王 元年)에 불교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였다. 385년 한산(漢山)에 절을 세우고 승 10인을 득도(得道)시킨 이후 불교문화는 점차로 발전, 보급되고 있었다. 그러나 불교문화가 보다 융성하기 시작한 것은 수도를 공주로 천도한 후 중국의 양(梁)과 활발하게 문화적 접촉을 하면서부터이며, 다시 부여로 천도하면서부터는 절정기를 맞이하게 된다. 중국의 <주서(周書)>가 '승니사탑심다(僧尼寺塔甚多)'라고 극찬한 시대가 바로 이때인 것이다. 35년간에 걸쳐 창건한 왕흥사(王興寺)를 비롯하여 대소 사찰과 탑이 전국적인 규모로 즐비하게 세워졌으며, 불교미술은 말할 것도 없고 학문과 사상 등도 울흥의 기세를 보였다. 이 기세는 불교문화를 일본으로 이식하게 했던 원동력이 되었다.

백제의 불교문화는 고구려와는 달리 부드럽고 우아한 기교가 넘친다. 서산(瑞山) 마애불(磨崖佛) 같은 불상들, 익산 미륵사탑 같은 석탑, 또 수많은 와당, 기타 문화유산들에서 우리는 백제적인 특색을 실감나게 맛볼 수 있다.

신라의 불교문화[편집]

新羅-佛敎文化

신라가 불교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인 시기는 고구려나 백제에 훨씬 뒤지는 528년이지만 본격적으로 꽃피기 시작한 것은 그렇게 큰 간격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528년의 공인(公認)을 지난 얼마 후부터 불교문화가 공전의 성황을 이루기 시작했다. 대흥륜사(大興輪寺)가 544년에 완성되면서부터 황룡사(皇龍寺)·기원사(祇園寺)·실제사(實際寺) 등 많은 대소 사찰이 건립되어 건축미술이 화려하게 대두되었고, 황룡사 장륙상(丈六像) 같은 수많은 불상이 조성되어 조각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무어라 해도 이 시대의 문화를 상징하는 기념비는 황룡사의 9층탑이다. 67m나 되는 거대한 이 탑은 경주 분지를 위압하는 장관이었으며, 이 장관이야말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의지와 힘의 상징이었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불교문화에서 벌써 우월을 나타낸 것이다.

통일신라시대의 불교문화[편집]

統一新羅時代-佛敎文化

이상과 같은 삼국의 문화가 고전적인 불교문화였다고 하면, 이러한 고전적 불교문화가 전형적인 불교문화로 진전되어 난숙하게 꽃피웠던 시대가 통일신라시대였다.

무열왕은 통일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당과의 결속을 위하여 중국화를 모든 면에서 시도하였다. 660년에는 백제를, 668년에는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이러한 일련의 정치적 대변화는 문화면에서도 커다란 변혁을 몰아왔다. 당의 문화가 보다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고, 고구려 및 백제 문화 역시 신라로 집중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모든 문화가 복합되어 하나의 새로운 불교문화를 탄생시켰다. 그것이 바로 통일신라의 불교문화인 것이다. 말하자면 통일신라의 불교문화는 통일이라는 생기차고도 발랄한 시대조류에 의하여 삼국의 문화가 종합되고 거기에 당의 문화까지 작용하여 나타난 신종의 불교문화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신종의 문화가 어느 정도의 제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통일을 하고도 한참 뒤가 되는 8세기 초기였다고 할 수 있다. 미술문화에서 그 예를 찾아본다면 감산사(甘山寺)의 조상(造像)들이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흐르는 듯한 굴곡, 조용하고도 우아한 수법에서 이상주의적인 양식을 찾아낼 수 있으며, 이러한 스타일이 다소 경화되긴 했지만 절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석굴암이고, 불국사인 것이다.

미술문화말고도 이 시대의 불교문화는 음악과 문학에서 또한 빛나고 있다. 범패(梵唄)라는 독특한 불교음악이 불교 의식에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인도의 노래였으나 불교적인 가사로 화하여 특이한 장르의 불교음악이 되었는데, 당을 거쳐 신라에 전해져 크게 유행했던 것이다. 문학에 있어서도 향가라는 시가문학이 불교계에 크게 유행되었다. 향가는 물론 우리 고유의 시가였지만 불승들이 가장 애용하였기 때문에 내용이나 작가들이 불교일색에 가까우리만큼 불교문학화하였다. 불교는 이러한 음악과 문학을 통해 불교문화를 대중 속으로 깊이 전파하고 있었다.

이 시기 불교문화의 급자탑인 석굴암과 불국사의 기념비적인 유산들을 지나면 9세기의 화려한 불교문화가 전개된다. 9세기의 신라는 귀족정치의 등장과 함께 지방세력이 급격히 대두되던 시대였다.

정치의 주무대는 경주권을 벗어나 전국적으로 분산되었던 것이며, 불교문화 역시 지방화가 급격히 진전되었다. 이들의 전진기지 역할을 담당했던 곳이 선종(禪宗)의 여러 사찰이었으며, 당시 현저히 늘어난 기타 지방의 모든 사원이었다. 문화의 지방화와 더불어 당시의 불교문화는 화려·섬세해지고 있었다. 말하자면 기교의 화려함으로 규모의 축소를 커버하려 했던 모양이며, 그것을 도식적인 밀교미술이 더 부채질했다고 생각된다.

하여튼 통일신라의 불교문화는 우리나라의 문화사상 종교문화로서는 절대무비의 업적을 남긴 가장 찬란한 문화였다고 하겠다.

고려의 불교문화[편집]

高麗-佛敎文化

936년에 후삼국을 완전히 통일한 고려 태조 왕건은 "국가의 창건은 제불의 힘에 의하였으니 선교(禪敎)의 사원을 세우라"고 하였다. 실제로 그가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은 이엄(利嚴) 같은 선승들의 적극적인 후원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불교의 종교적인 힘을 중요시하여 후손들에게 불교의 보호를 유언으로 지시하였던 것이다. 그는 흥왕(興王)·법왕(法王)·흥국사(興國寺) 등 10사(十寺)를 개경에다 세우는 등 많은 사찰들을 건립하였다. 그러나 태조는 사찰의 난립에서 오는 경제적인 파탄을 방지하고자 사찰 건립의 제한도 동시에 후손들에게 유언하였다. 그러나 역대왕들은 사찰을 누가 많이 짓는가를 다투기나 하듯 서로 사찰 건립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안화사(安和寺) 같은 거찰은 제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왕의 고집으로 세운 대표적인 사찰이거니와 이러한 왕들의 시책은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영향을 주어 고려 일대는 가히 사원국가라 부를 수 있을 만큼 많은 사원들이 쟁립(爭立)하였다.

따라서 불교문화는 이러한 불교의 국교적인 배경 아래서 융성을 나타냈다. 수많은 불교미술들이 제작되었고, 음악과 문학 등도 불교적인 요소가 크게 작용했으며, 모든 학문과 사상 등도 불교와 떼어 놓을 수 없는 깊은 관계에 있었다.

고려의 불교문화는 <대장경>의 조판으로 일단 정리를 보게 된다. 대장경의 첫 조조(雕彫)는 현종에서 문종에 이르는 4대 76년간이란 장구한 세월 동안에 완성한 것이지만 몽고의 침략으로 불타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거란의 침입에 대항하는 의지를 결집하는 의미에서 고려문화의 우위성과 국가적인 능력을 과시하려는 의도로 만들었던 것이다. <대장경> 재조(再雕)는 고종때 몽고전란 통에 이룩된 것이지만 내용의 정확함과 자체의 아름다움 제작의 정교함이 동양에서 조조된 20여 종의 대장경 중에서 가장 으뜸가는 것으로 이름나 있다. 이러한 문화적인 힘은 금속활자를 세계최초로 발명하게끔 했으며, 더욱이 감지(紺紙)에다 금이나 은으로 정성껏 필사(筆寫)하는 사경예술(寫經藝術)이 극도로 발달하여 탄연(坦然) 같은 신필(神筆)을 배출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고려의 불교문화는 인쇄문화로 특징지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고려의 불교는 국가적인 지원과 그들의 상업적인 행위로 말미암아 날로 교단은 호부(豪富)를 극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호화를 극하는 사치성의 불교문화가 풍미하여 고려의 국가를 쇠퇴로 몰아가기도 하였다.

성리학으로 알려진 신유학(新儒學)이 이러한 정세를 업고 불교에 대담스럽게 도전하면서 등장하여, 불교문화 대신 유교문화를 세운 것이 조선조였다.

조선의 불교문화[편집]

朝鮮-佛敎文化

조선은 한국 문화사상 유교문화라는 새로운 문화적 충격이 1000여 년간 우리 문화를 주도하던 불교문화를 급속도로 쇠퇴시킨 시기다.

그러나 장구한 세월 동안 뿌리깊이 박힌 불교문화가 국가적인 시책으로 말미암아 일조일석에 없어지지는 않았다. 아니, 세종이나 세조 또는 명종과 같은 호불(好佛)의 왕들을 만날 때는 전날의 성세를 다시 찾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민중 속으로 깊숙히 파고들어 대중적인 불교문화를 형성하기도 했다. 초기의 불교문화를 기념하는 것이 원각사의 10층석탑이다. 여기에는 불교문화를 중흥하고자 하던 세조의 서원(誓願)이 서려 있어서, 조선문화의 한 단면을 잘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불교는 성종과 연산군 때에 사상 유례없는 대박해를 받는다. 승려들의 도성출입도 금지되었고, 심지어 그들은 이제 상층 계급에서 탈락하고 또 최하층의 천민 그룹에 겨우 끼어 온갖 수난을 겪게 된다. 그래서 보우대사(普雨大師) 같은 순교자들도 나오게 되지만 그들은 소극적이고 줄기찬 항쟁으로 이 법난(法難)을 극복하려 했다.

이러한 끈질긴 노력은 왜란과 호란으로 전면적인 파괴를 입은 불교가 영·정조대에 거의 복구되는 결과를 초래했던 것이다. 그러나 전대와 같은 찬란한 불교문화는 두번 다시 재현하지 못하고 말았으며, 불교문화는 이제 사면적인 것과 결합하여 민중 속에 파고들거나 설화소설 같은 것을 통해서 대중에게 불교의 문화를 간접적으로 전달하고 있었을 뿐이다.

서구 문화가 도래되고 일본의 침략을 받는 동안 불교는 유교로부터 해방되었지만 새로운 불교문화를 탄생시키지 못하였고, 그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불교문화가 다시금 이 땅에 꽃필 수 있을는지는 미래에나 알 수 있겠지만 그 관건은 불교가 사회를 선도할 수 있는 새롭고도 참신한 방법을 어떻게 마련하느냐 하는 데에 달려 있을 것이다.

<安 啓 賢>

삼국시대의 불교문화[편집]

불교미술의 시원[편집]

佛敎美術-始源

우리나라 불교미술의 시원(始源)은 아마도 초문사(肖門寺)가 창건된 375년이 될 것 같다. 물론 372년의 불교의 공식적인 전래에 따라 불상과 경문을 가져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중국의 작품일 뿐 우리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초문사가 정확히 어떤 규모의 사찰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1938년에 발굴, 조사된 청암리사지(淸岩里寺址)나 1939년에 조사된 상원오리사지(上元五里寺址) 같은 것을 보면 8각전탑(八角殿塔)을 중심으로 동서북에 금당(金堂:法堂)이 있는 1탑 3금당식(一塔三金堂式) 사찰이었던 것이어서 이런 양식은 아마도 고구려 초기 불사(初期佛寺)의 일반적인 경향이었던 것 같다. 따라서 초문사도 이같은 범주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탑은 물론 초기 불교도들의 신앙의 주대상이었고, 법당 안에는 불상이 모셔지며, 벽에는 불화들이 장식되고 의식때 사용되는 불기(佛器)들이 있는 만큼 조각·건축·회화·공예의 불교미술 전반이 모두 갖추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초문사의 시창(始創)은 바로 우리나라 불교미술의 시원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들 최초의 것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고 단지 다수 남아 있는 불상이나 와당(瓦當) 또는 고분벽화에서 잔존하는 불교적 그림들을 통해서 초기의 시원적인 고구려의 불교미술을 알아낼 수밖에 없다.

연가 7년명(延嘉七年銘)의 불상이나 와당 등에서 보다시피 우리나라 최초기 고구려의 불교미술들은 강건하고 고졸(古拙)한 것이 특징이다. 이것은 벽화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것이어서 초기불교의 신선한 힘이라 할까, 사회의 발랄성 같은 것을 실감나게 느낄 수 있다.

불교미술의 새로운 대두는 우리나라 문화, 특히 미술문화에 있어서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미분화상태에 있던 선사미술(先史美術)은 일약 본격적인 종교미술로 비약하여 찬란한 불교문화를 만개시켰던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나라 문화의 일대 전기가 되었던 셈이다.

문화의 일본전파[편집]

文化-日本傳播

610년이란 연대는 동양의 제패(制覇)를 놓고 극동의 강자이던 고구려와 중국을 통일한 수(隋) 사이에 최대 혈전을 벌이던 612년보다 2년 앞선 해이고, 둘 사이의 첫 대결이 있었던 598년보다 12년 후가 되는 시기였던 만큼 긴장되고 불안한 분위기가 온 고구려에 팽배하고 있었을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고구려는 수의 정면공세와 아울러 신라의 배후공격 또한 커다란 두통거리였다. 이에 고구려는 백제 및 왜(倭)와 연합전선을 더욱 강력히 시도하여 일차적으로 신라를 견제하고자 했다. 특히 후진국이던 왜에게는 호감을 사고자 문화사절을 빈번히 파견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602년의 승륭(僧隆) 등 파견을 전후하여 때로는 황금을, 때로는 승려를, 때로는 기술자를 사절과 함께 일본에 파견하고 있었다. 당시의 문화사절은 고구려만 하더라도 허다하지만 특히 백제는 조사공(造寺工)·조불공(造佛工) 또한 와전사(瓦塼士) 등 무수한 사람들이 일본의 문화를 건설하는 주역을 맡았던 것이며, 담징은 이런 사람들 가운데서 한 사람으로 그의 도일(渡日)도 바로 이와 긴박한 국제정세 때문에 이루어진 일종의 문화사절이었다

담징[편집]

曇徵(579∼631)

고구려 말기인 7세기 전반에 활약하였던 승려. 기록에 의하면 그는 대단한 학승(學僧)이자 유명한 명장(名匠)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진가는 단순한 학승이나 명장이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를 직언해 주는 문화의 전파자라 하는 데 있다. 담징(曇徵)은 610년 3월 승(僧) 법정(法定)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성덕태자(聖德太子)의 환영을 받고 법륭사(法隆寺)에 살았다. 그는 여기서 유명한 금당벽화(金堂壁畵)를 완성하여 불후(不朽)의 명장(名匠)으로 알려지게 된 것이지만, 그를 벽화의 작자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이 일본측 학자들의 대다수 의견이다. 그 이유는 물론 정확한 기록이 없다는 데 있지만 건물이 후대의 중창(重創)이고, 벽화에 초당양식(初唐樣式)이 보인다는 것 등이 또한 논거이다. 이것은 최근 발견된 벽화고분들을 애써 고구려와 무관하게 보려는 것과 흡사한 의도가 숨어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어쨌든 그는 불화(佛畵)는 물론 종이나 먹 같은 문화의 필수품들을 제작하는 기술까지도 전파하였던 저명한 문화사절이었다.

석탑[편집]

石塔

우리나라는 석탑의 나라라고 할 만큼 석탑은 가장 유니크한 미술품이다. 불교전래 초기에는 중국식 목탑(木塔)이 유행하였으나 삼국시대 말경에 석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양질의 화강암이 풍부하게 생산된 때문이지만 탑의 원래 뜻에도 부합되기 때문인 듯하다.

석탑이 언제 어디서 최초로 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현재 남아 있는 것으로 가장 오래된 석탑은 미륵사지(彌勒寺址)석탑이다. 그래서 흔히 이 석탑을 부여의 정림사지(定林寺址) 5층 석탑과 함께 시원양식석탑(始源樣式石塔)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석탑양식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하나의 정형양식을 만들고 있는데 감은사(感恩寺)의 3층 석탑이나 고선사(高仙寺)의 3층 석탑 같은 것이며, 이러한 3층 석탑은 우리나라 석탑의 기본적인 양식으로 후대까지 성행하였다.

미륵사지석탑[편집]

彌勒寺址石塔

전북 익산군 금마면 기양리에 남아 있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석탑. 구조상의 특징은 (1) 목조탑을 충실히 모방하여 많은 소석재(小石材)로 건물을 가구(架構)했고, (2) 2층 기단 없는 4각형 기단에 사방 3칸의 다층탑이며, (3) 2층 이상이 초층에 비해 급격히 줄고 옥개석이 평평하나 네 끝이 가볍게 반전(反轉)하여 고준(高峻)한 형태가 된 것이 특징이다. 현재 6층으로 높이는 14.2m이지만 동과 서쪽 벽 일부만 남아 있을 뿐 모두 붕괴되어 일제시대에 시멘트로 보수하였다. 원래는 7층으로 상륜부(上輪部)까지 합하면 무려 20m 정도가 되는 거대한 탑이었을 것이다. 거대하고 웅장한 이 석탑은 백제의 무왕(武王)이 이 지역을 새로운 별도(別都)로 잡으면서 장대한 규모로 건설한 미륵사의 기둥으로 제작된 것인 듯한데, 신라쪽에서도 이 사찰을 창건하는 데 백공(百工)을 파견하여 원조를 하였다는 전설이 있을 만큼 백제의 국력을 총집중하여 건설한 국제적인 걸작품이다.

탑(stupa)은 부처님의 유골(遺骨:舍利)을 모시는 일종의 묘이다. 그래서 항상 불교사원의 중심에 배치하여 초기(初期) 불교신앙의 중심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최대의 정성과 최고의 기술을 다하여 장엄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불교미술 중 가장 위대한 작품이었고, 가장 신성시되었던 신앙대상이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 있어서도 걸작의 미술들은 거의 탑이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마애불상[편집]

磨崖佛像

인도에서는 일찍이 암벽을 뚫어 예배당·강당·승당(僧堂) 등을 만든 대규모의 석굴사원(石窟寺院)이 크게 조성되었다. 이들 석굴사원은 그 자체가 장려한 건축이고 위대한 조각이며 또한 화려한 벽화들로 가득한 장엄한 것이었기 때문에 종교적인 숭엄성을 만족시켜 주는 종합적인 예술작품이었다. 뿐만 아니라 고온다습(高溫多濕)한 인도에서는 이들 석굴사원이 수도하기에 가장 쾌적한 장소였으므로 다투어 조성하였던 것이다.

아잔타(Ajanta) 석굴 같은 것은 바로 인간이 남긴 기적적인 문화유산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중국도 인도의 석굴사원을 그대로 받아들여 둔황(敦煌)·윈강(雲崗)·룽먼(龍門) 같은 굉대무비한 석굴사원이 조성되었는데 차츰 시대가 지남에 따라 특히 산둥(山東) 같은 곳에서는 암벽을 조금 파고들어가 불상을 조성하고 앞에다 목조전실(木造前室)을 결구(結構)하는 마애석굴(磨崖石窟)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600년경의 백제는 이들 산둥지방의 마애석굴 양식을 수입하여 일종의 석굴사원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현재까지 발견된 것은 서산(瑞山) 지방의 운산마애삼존(雲山磨崖三尊)과 태안마애삼존(泰安磨崖三尊) 등 둘뿐이지만 모두 마애석굴 형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귀중한 작품들이다.

운산마애삼존은 바위를 88㎝ 정도 파서 불상을 조성하고 있는데 중앙에 본존(本尊)이 있으며 좌·우에 각각 보살이 협시(脇侍)하고 있다. 특히 본존여래의 쾌활하게 웃고 있는 얼굴은 요즘도 가끔 대할 수 있는 백제 사람의 얼굴이며, 원통형의 신체나 묵중하면서도 부드러워진 모습에서 백제, 그것도 말기적인 양식이 물씬 풍기고 있다.

태안마애불 역시 바위를 파서 불상을 조성하고 목조전실(木造前室)을 결구한 마애석굴인데 중앙의 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에 여래가 각각 서있는 특이한 형식의 삼존(三尊)이다. 마멸이 심하지만 모두 체구가 당당한 강직하고 힘찬 모습이다.

이들은 모두 600년을 전후하여 조영(造營)된 석굴 형식인데 중국의 산둥지방과 바다(一衣之水)를 격한 서산 지방이어서 산둥 마애석굴의 영향을 받아 조성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백제적인 양식이 정립된 백제 작품의 걸작이며, 이것은 후대 마애불의 선구로서, 또는 유명한 경주 석굴암의 선구적인 것으로서 한국미술사상 거대한 발자취를 남기고 있다.

신라의 삼보[편집]

新羅-三寶

신라에는 일찍부터 세 가지 국보가 있었으니 말하자면 신라 최고의 문화유산인 셈이고, 신라의 문화는 이 세 가지에 집약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① 황룡사(皇龍寺)의 장륙존상(丈六尊像)과 ② 황룡사의 9층탑, ③ 진평왕(眞平王)의 옥대(玉帶)인데 그 중 두 가지가 황룡사의 탑과 불상인 것이다. 신라문화는 바로 불교문화인 것을 단적으로 알려주는 좋은 본보기이다. 장륙존상과 9층탑은 말할 필요도 없이 신라문화의 집약이며 또한 우리나라 불교문화의 최대 걸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장륙존상[편집]

丈六尊像

장륙존상은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인도에 버금가는 불교국의 긍지에 의하여 조성된 것이라고 한다. 장륙의 거대한 불상은 바로 신라의 힘과 긍지를 과시하는 것이며, 이것이 단번에 주조됐다는 것은 그들의 기술이 신기(神技)에 가까웠음을 단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아마 장대하면서도 뛰어난 걸작의 조각품이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현재는 석조의 대좌(台座)만 있을 뿐 불타버린 지 오랜 이 상은 만약 남아 있다면 우리나라 최고의 국보적 걸작품일 뿐더러 인류문화의 최대 신품(神品)으로 손꼽을 수 있을 것이다.

황룡사 9층탑[편집]

皇龍寺九層塔

이 탑은 신라를 중심으로 삼국을 통일하고자 하는 그 시대의 간절한 소원이 표현으로 된 것이다. 그런만큼 이 웅대한 포부는 그대로 이 탑에 반영되어 있었다. 우선 그 스케일로 보아서도 장대무비한데 9층까지 높이는 탑지(塔誌) 기록 당시의 당척(唐尺)으로 따진다 하더라도 약 53.45m, 상륜부(上輪部)까지 합하면 약 66.70m나 되는 거대한 것이고, 조영(造營) 당시의 척수인 동위척(東魏尺)으로 따진다면 그보다 더 높은, 가히 초대형 건축물이다. 여기에 기기묘묘한 의장(意匠)의 신기(神技)가 나타나 있어 이 목탑 하나만으로도 신라 문화의 위대성이 유감없이 발휘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이만한 걸작품을 만들 수 있는 역량과 만들고자 한 의지가 말하자면 동쪽 구석의 보잘것없는 한 작은 나라가 한반도를 통일하고 패자로 군림할 수 있게 했던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그 후 고려때 몽고의 난으로 불타버린 채 현재는 탑의 초석(礎石)만 남아 있을 뿐이며, 중앙의 심초석(心礎石)에서 1964년 12월에 도난당하였던 금동사리함(金銅舍利函)이 1972년 10월 28일 국립박물관에서 처음으로 공개된 적이 있다. 이 사리함의 3면에 걸쳐 탑의 조성 기록이 새겨져 있는데 신라 경문왕(景文王) 11년(871)에 탑을 중수하면서 탑의 조성과 중수 사연을 적은 것이다. 그 내용은 대체로 삼국유사의 기록과 유사하지만 당시의 확실한 명문(銘文)에 의하여 황룡사의 위관(偉觀)을 새삼스럽게 평가할 수 있는 것은 지극히 다행한 일이다.

분황사의 탑[편집]

芬皇寺-塔

분황사는 선덕여왕때 창건된 절인데 황룡사와 이웃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와 나란히 이름이 높던 대찰(大刹)이다. 분황사 역시 오래 전에 없어지고 지금은 다만 모전탑(模塼塔) 1기(基)만 남아 있을 뿐이다. 삼국시대의 신라탑으로는 유일한 존재일 뿐더러 웅장한 스케일과 소박한 기법으로 이 시대를 대표할 만한 기념비적 작품이다.

지금의 모양은 1915년에 수리된 것이어서 본래의 면목이 어떤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야석(野石)의 기단 위에 3층탑이 서 있는데 안산암(安山岩)의 작은 석재(石材)를 같은 크기의 벽돌 모양으로 절단하여 쌓은 모전탑(模塼塔)이다. 1층 탑신의 4면에 문을 개설하였는데 문에는 각각 2구의 인왕상(仁王像)이 양쪽에 서 있다. 이 인왕상은 기단 네 귀에 서 있는 돌사자와 함께 삼국시대 조각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강직하고 힘있는 조각수법은 당시의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현재는 3층뿐으로 높이는 역시 9.3m에 불과하지만 원래는 아마도 7층의 훨씬 높은 탑이었을 것 같다.

어쨌든 이것은 삼국시대 신라의 유일한, 그리고 대표적인 탑으로 통일신라의 정형양식(定型樣式)의 탑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을 것이며, 후대의 전탑(塼塔) 내지 모전탑(模塼塔)의 직접적인 선구자 역할을 담당하였을 것이다.

이 탑은 수리할 때 석함(石函)과 함께 사리 장치가 발견되었는데 금·은제 바늘, 가위, 옥 같은 여성 필수품과 함께 숭녕통보(崇寧通寶) 등의 고전(古錢)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바로 이 탑이 고려시대에도 중수된 점과 탑 조영의 배경을 직언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금동미륵반가사유상[편집]

金銅彌勒半跏思惟像

우리나라의 고대 불상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것이 의자에 앉아 오른손을 뺨에 대고 왼다리는 내린 채 오른 다리를 왼다리에 걸친 소위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들이다.

이러한 양식의 불상들은 고구려(平川里 出土 半跏像 등)는 물론이거니와 백제·신라 등이 즐겨 만들던 불상이었다. 그래서 고대 불상 가운데 최고의 걸작품들은 대부분 이 계통의 것이 차지하고 있다.

이것은 바로 당시의 불교사상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 된다. 중국의 경우 남북조(南北朝) 시대에 가장 성행한 것이 미륵보살인데 반가형식(半價形式)의 상은 미륵보살상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중국의 영향이 삼국시대의 작품에 반영된 것은 물론이거니와 화랑 계통의 사상과 결합하여 이 계통의 불상 제작이 성행하였던 것이다.

이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이 구 덕수궁미술관 소장의 반가상(국보 83호)과 국립박물관 소장 반가상(국보 78호)이다. 이들은 너무나 유명한 것이며 특히 앞의 것은 명상의 법열(法悅)이 생생하게 표현된 걸작 중의 걸작이다. 원만한 얼굴에서 풍겨 나오는 잔잔한 미소야말로 법열의 환희가 자연스럽게 넘쳐나는 것이며, 옷을 벗은 상체의 처리는 비록 여성적인 감각이 엿보이기는 하지만 유연하게 흐르는 선과 날씬하게 굴곡진 양감(量感)은 바로 신기(神技)의 그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유상(思惟像)들에서 당시의 미(美)를 실감나게 느낄 수 있고 그때의 사상의 흐름을 정확히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이들 상(像)이 해외 국보전시회 등을 통해서 세계적인 걸작으로 높이 평가받았던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우리나라 '비너스'요, 한국의 국보로서 인류의 영원한 문화유산이 될 것을 확신한다.

삼국시대의 화가[편집]

三國時代-畵家

고대의 화가들 중에 우리들에게 알려진 인물은 거의 없는 형편이다. 담징 같은 화사(畵師)들이 일본에서 크게 활약했다는 그쪽 기록을 제외하면 우리나라에서 전해지고 있는 화가는 몇 명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삼국유사(三國遺事)> 권 제3 탑상(塔像), 제4 흥륜사 벽화 보현조(興輪寺壁畵普賢條)의 정화(靖和)·홍계(弘繼)의 2승(二僧)과 <역대명화기>에 보이는 김충의(金忠義), 그리고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列傳)에 있는 솔거(率居) 등이다.

그런데 정화·홍계 같은 이는 이들이 직접 그림을 그렸다고 보기는 힘들고, 김충의는 역시 중국 쪽에서 활약했던 인물인만큼 확실한 화가로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솔거뿐이다. 그러므로 솔거가 차지하는 문화사적 의의는 대단한 것이다. 그는 바로 고대 화가의 대표격이며 그를 통하여 당시의 그림 경향을 대충이나마 알아볼 수 있다.

솔거[편집]

率居

<삼국사기>에 보면 그는 미천한 출신이었으므로 그의 족계(族系)를 알 수 없다고 했고 황룡사의 노송(老松), 분황사의 관음상(觀音像), 단속사(斷俗寺)의 유마상(維摩像) 같은 것을 그렸다고 한 것을 보면 아마도 화승(畵僧)이었던 듯하다.

특히 그의 노송 그림은 실물과 대단히 흡사하여 까마귀·소리개·제비·참새들이 날아들어와 부딪쳐 떨어졌을 정도로 놀라운 솜씨였다고 평하는데 이상의 그림들도 모두 신화(神畵)로 평가되고 있다. 이러한 평은 장언원(張彦遠)이 <역대명화기>에서 김충의를 두고 그의 그림이 교묘하고 정교하기는 하되 격이 높지 않았다고 한 평과 부합되기도 하는데, 아마도 당시의 그림 경향이 대체적으로 삼국시대 고구려 고분벽화와 같은 데서 볼 수 있는 일종의 추상주의적인 경향과는 다른 사실주의 작품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경덕왕(景德王) 때에 단속사(斷俗寺)가 창건된 것이 사실이라면 그의 활약기는 경덕왕을 전후한 때였을 것이다. 말하자면 솔거는 통일신라때의 대표적인 화가로서 당시의 그림 경향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유일한 화가라고 할 수 있다.

양지[편집]

良志 <삼국유사>는 양지(良志)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즉, "여러 가지 기예에 통달하여 신묘함이 비길 데 없었다. 또 필찰을 잘하여 영묘사의 장륙삼존(丈六三尊)과 천왕상과 기와와 천왕사탑(天王寺塔) 및 팔부신장(八部神將)과 법립사의 주불삼존과 좌우금강신 등이 모두 그가 만든 것이다. 영묘사와 법림사의 편액을 썼으며, 또 일찍이 벽돌을 조각하여 작은 탑 하나를 만들고 아울러 불상 3천을 만들어 그 탑을 절 안에 모셔두고 예했다. 그가 영묘사의 장륙상을 만들 때 입정(入定)하여 삼매에서 뵌 부처를 모형으로 삼았는데 온 성안의 남자와 여자들이 진흙을 다투어 운반했다."

여기에서 보다시피 그는 모든 기예에 능통하였고 명필가이기도 하였지만, 무엇보다도 조각가로서 가장 저명하였던 것 같다. 그가 가장 즐겨하던 기법(技法)은 흙으로 빚어 만드는 소조(塑造)였다. 그가 만든 불상들은 어느 것이나 소상(塑像)들이었던 점은 그의 작품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지금까지 하나도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러나 그의 작품은 분명히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확실한 작품은 그가 살았던 석장사에서 출토된 불상전(佛像塼)과 팔부신장이다. 이들은 삼천불(三千佛)이 조각된 전탑(塼塔)의 일부임에 틀림없는 것 같고 그 양식도 바로 통일을 전후한 시대의 것이다. 또 하나는 사천왕사(四天王寺)에서 출토된 신장(神將)들인데, 이것은 천왕사탑 밑의 팔부신장을 그가 만들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서 그의 작품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한 것이다. 사천왕사의 신장상들은 흔히 사천왕상(四天王像)으로 알고 있지만 아마도 <삼국유사>에 적힌 대로 팔부신장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현재로서는 그의 작품으로 확실한 것은 이들밖에 알 수 없지만 이것만 가지고도 그의 작품기법과 양식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는 정묘하고 치밀한 수법을 마음대로 구사하고 있으며, 특히 근육표면 같은 것은 완벽할 정도로 묘사하여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이러한 그의 신기(神技)를 흠모한 장안의 선남선녀들이 다투어 흙을 나르려고 했던 이유를 짐작할 만하다. 과연 그는 고대의 예술가 중에서 가장 뛰어난 천재의 한 사람이었고, 따라서 그가 한국 문화사에 끼친 업적은 절대무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통일신라시대의 불교문화[편집]

감은사[편집]

感恩寺

삼국을 통일한 신라가 그 위업을 기념하고 앞으로의 국가 방향을 설정하는 뜻에서 동해안에다 건립한 대찰(大刹). 감은사를 처음 창건한 사람은 절의 기록에 의하면 문무왕(文武王)이지만 그의 재세 중에는 완성하지 못하고 돌아가자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神文王)이 682년에 완성했다고 한다. 목적은 왜병을 진압하기 위함이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문무대왕의 평소의 염원과 부합되는 말이며 그의 왕릉(王陵) 경영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감은사는 현재 3층석탑과 사지(寺址)만 있을 뿐인데 3층석탑은 삼국통일의 기념비이기도 하며 동시에 미술사상 절대적인 위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즉, 3층석탑이라는 우리나라 석탑의 정형양식이 이 탑을 시원(始源)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 웅장하고 듬직한 모습은 바로 미술문화와 3국통일의 기념비적인 작품임을 웅변해 주고 있다.

문무왕릉[편집]

文武王陵

감은사 3층석탑에서 얼마간 떨어진 바닷가에 흰빛을 띤 한 개의 커다란 바위덩이가 있는데 이 바윗덩이가 통칭 대왕암(大王岩)이라 불리는 것이다. 이것은 그 안을 사방으로 파고 중앙에 소(沼)를 만들어 바닷물이 드나들게 한 후 큰 심초석을 놓은 밑에다 화장한 뼈를 묻은 불교의 탑과 같은 방식의 무덤을 형성하고 있다. 일찍이 학자들(高裕燮 선생 같은 이)에 의하여 이것이 문무왕릉이라는 것이 시사된 바 있지만 최근의 학술조사(新羅五岳調査團의 황수영 교수 등)에 의하여 그것이 확인되었다.

문무왕은 늘 그 자신이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것이 평소부터의 소원이었는데 그 가죽은 후 유언대로 동해의 대왕암 위에 불교식(인도식)의 왕릉이 만들어졌고 이에 따라 세상사람들은 그가 호국룡(護國龍)이 되었다고 믿었다. 물론 불교식의 장례는 그의 유훈대로 쓸데없는 낭비를 막고 백성들의 노고를 덜기 위한 갸륵한 뜻 때문이었지만 불교식의 장례, 다시 말하면 화장법이 신라에 보편화되어 국민생활에 일대 변혁을 일으켰던 것은 문무왕릉의 경영에 의한 것이었다. 이 왕릉이야말로 신라의 문화를 새롭게 전개시킨 획기적인 기념비적 존재이다. 이와 같은 방식의 장례법은 그후 역대 왕은 물론이거니와 불교교단(佛敎敎團)이나 귀족 또는 일반민중에게 보편화되었고 불교신앙의 일반화와 더불어 국민생활을 변혁시키는 데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어쨌든 감은사의 탑과 문무왕릉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우리나라 역사상 특기할 만한 것임에 틀림없다.

연기파의 불상[편집]

燕岐派-佛像

문무왕릉·감은사가 삼국을 통일한 승리자에 의한 기념비라고 한다면 이들에게 멸망된 패자에 의하여 그 쓰라림을 기념하고자 제작된 것이 충남 연기를 중심으로 한 일군의 비상(碑像)들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은 매우 대조적인 면을 보여주고 있는바 전자가 승리자의 웅대한 스케일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패자의 망국한이 서린 연약한 소품들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연기의 비상들은 우리 나라의 문화사상 중대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품이라고 할 것이다. 이들은 비암사(碑岩寺)의 3상(像), 정안삼존석상(正安三尊石像), 연화사(蓮花寺)의 두 석상, 서광암 천불비상(瑞光庵 千佛碑像) 등 모두 7점을 헤아리는 일련의 불상들이다.

이들은 대체적으로 백제 멸망 직후인 문무왕 이후에 제작된 것들이다. 원자(願者)들은 모두 백제의 유민(遺民)들인데 신라의 관직을 받은 백제 당시의 고관들을 중심으로 일반 승속(僧俗)의 백제 유민들에 의하여 제작되었다. 그래서 이들 여러 상들은 독특한 양식을 이루고 있는데 한편으로는 백제적인 수법이 강하게 풍기기도 하지만 새로운 양식이 대두되고 있는 과도기적인 형식을 지닌 불상들로서 이들은 지방유파적(地方流派的)인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 특히 납석제의 비상(碑像) 계통의 독특한 형식은 새로운 불상 형식의 대두인 셈이다. 이들은 아미타상(阿彌陀像)이 우세하고 그 다음 미륵·석가의 순서로 되어 있다. 수법 역시 같은 순서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말하자면 당시의 신앙사상이 그러했다는 것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아미타신앙이 크게 대두된 것은 통일을 전후해서인데 이것은 그후 경덕왕을 정점으로 하는 신앙의 소장(消長)을 나타낸다. 1세기 이상을 아미타신앙이 신라사회를 풍미했다고 볼 수 있는데 이 불상은 그 시원(始源)을 알려주는 귀중한 유품들이다. 이 일군의 불상들은 망국의 한이 서려 있는 특이한 유래를 가졌을 뿐더러 양식상으로나 조성사상(造成史上)으로나 하나의 독특한 의의를 지닌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다.

석굴암[편집]

石窟庵

통일신라의 문화는 경덕왕 때가 절정기였고 그 최고봉은 경주 토암산의 석굴암이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석굴사원(石窟寺院)은 그 자체가 건축이며 조각인 종합예술품이기 때문에 인도나 중국·한국 등의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그 최고 최대의 문화유산으로 손꼽힌다. 인도의 아잔타(Ajanta), 중국의 윈강(雲崗)과 룽먼(龍門), 우리나라의 석굴암 등이 그러한 것들이다.

석굴암은 인도나 중국 등의 전형적인 석굴사원과는 판이한 것이다. 큰 바위를 파고들어가서 사원(寺院)을 경영한 것이 전형적인 석굴사원인 데 비하여 신라의 석굴암은 지상에다 판석을 결구하여, 인도의 차이트야(Chaitya:禮拜窟) 형식의 전방후원형(前方後圓形) 굴실(窟室)을 경영한 일종의 축조 석굴사원이다. 그러므로 규모는 그러한 것들보다 뒤떨어지지만 짜임새 있는 규모라든가 정묘한 구도 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다. 더욱이 중앙 본존(本尊)과 기타 벽면의 모든 조각들은 신기(神技)에 가까운 작품들이다.

본존은 당당한 남성적인 볼륨의 신체를 갖고 있으며 그 구성비율도 이상적인 불상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불력(佛力)이 넘쳐 흐르는 양감이며 적당히 생략한 선의 처리로 간명한 굴곡의 명암을 나타내어 이 불상의 위대성이 유감 없이 표현되고 있으며, 이러한 점은 주위의 모든 보살상(菩薩像)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석굴암조각은 신라조각의 절정을 나타내는 것이며 당시까지의 조각기술을 총결산하는 획기적인 작품이다. 이 조각을 분수령으로 하여 이후의 조각들은 모두 형식주의 또는 완전한 도식주의(圖式主義)의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이 석굴암은 건축적으로나 조각적으로나 신라미술의 정점을 과시하는 최대 최고의 걸작 종합예술로 길이 빛날 것이다. 그러나 일제 때의 개악적인 시멘트 보수의 영향으로 여러 가지 파손 현상이 속출하여 또다시 우리 손으로 보수하는 심각한 사태까지 일어났다. 그 후 어느 정도의 소강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다행한 일이며 앞으로 과학적이고도 완전한 보존방법이 시급히 강구되어야 할 것이다.

불국사[편집]

佛國寺

불국사는 석굴암과 더불어 같은 시대, 같은 사람에 의하여 똑같이 창건되었고 다 같이 가장 위대한 문화유산으로 손꼽히고 있다.

<삼국유사>에 보면 불국사는 현세(現世) 부모를, 석굴암은 전세(前世) 부모를 위하여 경덕왕 때의 재상이던 김대성(金大城)이 창건하였는데 그가 완성하지 못하고 사망하자 국가가 마침내 완성했다고 되어 있다. 이것은 일개 귀족의 사업이 아니라 국가적인 불사(佛事)였음을 말해 주며, 국가적인 차원에서 두 사원이 창건되었다는 것은 좌우간 최대의 정성과 최고의 기술로 제작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불국사의 현존 건물은 모두 후대(後代)의 것이다. 기단부(基壇部)만은 신라의 것이고 석등배례석 주초, 청운교·백운교 그리고 석가·다보탑 등 모든 석조유물은 신라의 작품들이다. 기본 사찰구조는 중문(中門)·쌍탑(雙塔)·석등(石燈)·금당(金堂)·강당(講堂) 등으로 배치되어 있는 소위 쌍탑식가람(雙塔式伽藍)이다.

다보탑·석가탑[편집]

多寶塔·釋迦塔

불국사에 있는 다보·석가의 쌍탑은 불국사를 대표하는 동시에 신라탑을 대변해 주는 작품이며, 신라문화의 가장 절정기에 제작된 최고의 걸작품 중 하나이다. 두 탑은 좌우 대칭적으로 제작된 것이다. 다보탑은 화려·섬세하고 석가탑은 웅장·소박한 수법을 보여주는데 그 기법이라든가 양식이 최고도로 발달한 것들이다.

석가탑은 정형양식의 신라 3층탑을 대표하는 작품이고, 다보탑은 이들 정형양식과는 판이한 이형양식인데 그 후에 나타나는 이형양식의 선구적인 것이다. 이것은 초기의 목탑과 후기에 대두된 8각원당식부도의 중간양식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인도에서 그 조형을 찾아볼 수 있다.

다보·석가의 대칭은 법화경에 있는 석가·다보 2불병좌상 사상에서 유래된 것에 틀림없는데, 이것은 불국사 창건의 사상적인 또는 종파적인 배경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불국사는 1972년경에 파괴되었던 종각·회랑·강당·관음·비로전 등을 재건하였는데 문화재 복원사업의 일원으로 복구된 첫 사원이 되었다.

남산불적(경주)[편집]

南山佛蹟(慶州)

경주시의 남산은 산 전체가 온통 불교문화재들로 가득 차 있어 최대의 불교성지였다고 할 수 있다. 골짜기마다 탑과 절이 서 있고 바위마다 불상이 새겨져 있다. 동남산에는 불곡(佛谷)·탑곡(塔谷)·미륵곡·칠불암 등과 서남산에는 포석·삼릉·계용장계 같은 골짜기에 수많은 걸작품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보고(寶庫)이다.

불곡(佛谷)에는 바위를 1m 이상이나 판 감실(龕室) 안에 불상을 조성하고 있는데 앞은 목조전실(木造前室)을 결구했던 초기 마애석굴의 하나이다. 불상은 7세기 초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는데 비록 옷으로 덮여 있긴 하나 몸의 율동감이 시각적으로 뚜렷이 나타나 있다.

탑곡 불상은 거대한 자연적인 방형석주(方形石柱)의 4면과 기타 암면에 수십 구의 조각이 새겨져 있는데 기법이나 양식이 고졸(古拙)한 통일초기의 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그 외에 동남산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이 칠불암(七佛岩)의 조각군이다. 법당의 중앙이 되는 곳에 4방불이 새겨진 사각형 석주가 있고, 정면이 되는 암벽에는 3존불이 새겨져 있는데 구조상으로 석굴의 구도를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벽면을 금강석경으로 결구했다면 명실상부하게 석굴암 같은 석굴이 될 것이다. 본존불은 자비스러운 점에서, 그리고 세련된 수법에서 오히려 석굴암 본존을 능가할 만한 걸작인데 이것은 모든 조각에 다 적용할 수 있다.

서남산에도 삼릉계의 조각들이나 3체석불(三體石佛) 같은 걸작들이 무수하게 있지만 가장 주목되는 것이 용장사(茸長寺)의 불상들이다. 용장사는 신라 법상종(法相宗)의 시조로 유명하던 태현법사(太賢法師)가 살던 곳으로, 아직도 태현법사가 불상을 돌면 같이 따라 얼굴을 돌렸다는 전설이 있는 장륙미륵존상(丈六彌勒尊像)이 남아 있다. 비록 머리는 없어졌지만 당시의 독특한 형식의 상이며, 바로 이웃한 마애불은 역시 당대의 수법을 잘 나타내주는 아미타상인 것 같다. 이들 외에도 석조 약사여래상(藥師如來像) 같은 것이 많이 있지만 법상종의 사상을 그대로 알려주는 것은 위의 상들이어서 귀중한 자료가 된다. 또한 이 사찰의 구도는 특이한 것으로 산등성이를 이용하여 일직선으로 탑·금당·승당 같은 것을 마련한 듯하여 일반 사원 배치와는 판이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무수한 사지(寺址)와 배례석이나 초석 같은 석조물, 석탑 또는 단독

상들이 열거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온 남산을 뒤덮고 있어서 남산이야말로 당시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전 역사를 통하여 최고의 성지(聖地)이자 최대의 문화 보고라 할 수 있다.

비로자나불상(도피안 사의)[편집]

毘盧遮那佛像(到彼岸寺-)9세기의 신라사회에는 지방세력이 강력하게 대두되었는데 중앙귀족들까지도 이 지방적인 세력의 배경 하에서 그 소장(消長)을 거듭할 만큼 지방이 역사의 주무대로 등장하였던 시대이다. 따라서 문화도 경주 중심권을 벗어나 전국적으로 광범하게 분포하였는데 그 좋은 예의 하나가 선종 9파(禪宗九派)의 각 지방 분산이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거찰(巨刹)들이 전국적으로 건립되기도 했지만 일반 서민들의 조직적인 단결에 의한 것이 보편적이었다. 말하자면 호족뿐만 아니라 일반서민들에 의한 지방문화의 성장이 전시대보다 눈에 띄게 나타난 시대가 바로 9세기의 신라사회였다고 생각된다. 도피안사(到彼岸寺)의 비로자나불(혹은 비로사나불:毘盧舍那佛)은 바로 이 점을 명백히 해주는 작품이라는 데 중대한 의의가 있다. 불상 등어리에 새겨져 있는 133자에 달하는 불상조성기에 보면 1,500여인의 향도(香徒)가 불상을 조성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향도는 거군적(擧郡的)으로 조직되는 신도단체였는데 사찰의 창건과 중수, 불교 신행(信行)에 있어서 항상 주동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이 향도조직(香徒組織)이 먼 지방인 철원에서 철조(鐵造) 비로자나불을 조성할 수 있었다는 것은 당시 신도조직의 규모와 그들의 지방문화에 대한 기여도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 불상은 석조대좌(石造台坐) 위에 앉아 있는 비로자나불인데 높이 91㎝로 인간의 신체로 바뀌어지고 있으며 갸름한 인간적인 얼굴, 몸뚱이와 머리를 구별할 수 없는점, 평행식의문 등 확실히 9세기 중엽의 불상 특징이 현저히 나타나 있다. 비로자나불은 8세기에도 나타나지만 본격적인 유행은 9세기이며 그 절정기는 9세기도 중엽의 일이었다. 이때의 유명한 불상들이 거의 이 비로자나불인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일이거니와 이것은 당시의 불교사상을 잘 반영한다. 선종(禪宗)에도 화엄종에도, 법상종에도 가장 즐겨 조성하던 불상이 이 비로자나불로 밀교(密敎)의 유행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으며, 이 점은 또한 당시의 사회적인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부도미술[편집]

浮屠美術

신라 후기인 9세기의 불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선종의 융성이었다. 선종의 9파가 1파 이외에는 모두 신라 후기에 창립되었는데 이들은 또한 각 지방의 세력에 의하여 성립을 보게 되었다. 그래서 선종의 독특한 발전을 보았으며 따라서 이들은 지방 문화의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선종 역시 화려한 미술문화를 많이 제작했는데 그 중 가장 특징적인 것이 부도(浮屠)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그들의 역대 조사(祖師)들이 열반하면 화장을 하여 이때 나온 사리를 탑에 봉안하였다. 이 묘탑(墓塔)을 부도라고 한다. 부도는 원래 부다(Buddha)라는 뜻으로 불교를 상징하던 말인데 근대에 내려오면서 부처님의 사리가 봉안된 탑과 구별하기 위하여 부도라고 불렀다. 엄격하게 말하면 승묘탑(僧墓塔)이라 해야 정당할 것이다.

사리(舍利)라는 말은 산스크리트(梵語)의 sarira인데 남긴 뼈(遺骨)라는 말로서 불사리(佛舍利)라 할 때 부처님이 남기신 뼈라는 뜻이 된다. 이 부처님의 사리는 탑에 모셔져 가장 신성시하는 신앙대상이었다. 그런데 부처님의 뼈는 유한하므로 기만(幾萬)이나 헤아리는 탑의 수요에 도저히 충당할 수 없으므로 좁쌀알 같은 옥이나 수정 같은 것으로 대용하고 있었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사리는 모두 이런 대용 사리로서 우리의 부도에 모시는 스님의 뼈도 이러한 좁쌀알 같은 사리여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독특한 화장법이 고안되기도 하였다. 어쨌든 좁쌀알 같은 뼈가 흔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이런 뼈가 나오면 그것은 고결한 도인(道人)이라는 등식이 성립되었다. 특히 파(派)가 복잡한 선종은 이런 통념을 그들 종파의 우월을 입증하는 데 사용하였다.

역대 조사들의 몸에서 다투어 특이한 뼈인 사리를 채취하여 내외에 크게 선전하고 그것을 봉안하는 장엄한 탑을 세웠다. 신라 하대(下代)로 내려오면 탑보다 부도의 건립에 훨씬 더 치중하였으며 또한 예술적 가치가 뛰어난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말하자면 부도가 이 시대의 주신앙대상이었으며 따라서 온갖 정성과 최대의 기술을 다하여 제작되었던 걸작들인 것이다.

실상사수철화상탑(實相寺秀澈和尙塔)·흥법사염거화상탑(興法寺廉居和尙塔, 840년)·대안사적인선사탑(大安寺寂忍禪師塔, 870년)·보림사보조선사탑(寶林寺普照禪師塔, 880년)·쌍봉사철감선사탑(雙峯寺澈鑑禪師塔) 같은 것이 가장 저명한 부도들이다. 이들은 모두 팔각원당식(八角圓堂式)인데 보통 방형지대석(方形地台石)·팔각하대석(八角下台石)·팔각간석(八角竿石)·팔각상대석(八角上台石)·팔각탑신(八角塔身)·팔각옥개석(八角屋蓋石), 그리고 상륜부(上輪部)의 순으로 각 부재마다 용(龍)·연화문(蓮花紋)·비천(飛天)·팔부신장(八部神將)·사천왕(四天王)·길조(吉鳥)·사자·구름·꽃 같은 것을 섬세 화려하게 조각하여 호화의 극치를 이룬다. 이러한 탑의 조형(祖形)은 8세기 중국의 구마라습 사리탑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신라인들은 그것과는 매우 다른 독창적인 신라식 부도를 제작해 내었던 것이다.

어쨌든 쌍용사철감선사탑 같은 것은 규모는 작지만 섬세 화려한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주는 걸작으로 손 꼽을 수 있는데 이런 부도식 탑은 신라 하대의, 특히 선종미술의 대표작품이 되었고 역대를 통하여 가장 화려한 미술로 이름이 높다.

범종[편집]

梵鍾

종(鍾)은 시간을 알려주는 그릇의 일종이다. 불교사원에서는 단체생활을 하기 때문에 기상·식사·의식·취침에 이르기까지 모두 신호로써 알려주어야 한다. 종은 바로 이런 목적에서 제작되었던 것인데, 중국에서 수입되었을 때는 중국 재래의 악기와 결합되었고 우리나라에 와서는 우리 독특한 양식의 종이 만들어졌다. 좋은 시간을 알려주는 필수품으로서뿐만 아니라 불교의식 때에 반드시 소용되는 것이어서 사원에서는 가장 중요하게 치는 필수품이었다. 뿐만 아니라 유장하고 신묘한 종소리는 사람의 심성을 청정하게 해주는 청량제였고 심지어 지옥 중생까지도 제도할 수 있는 법음(法音)이라는 생각도 있어서 불교도들에게는 생활필수품 이상의 종교적인 절대성까지 부여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종은 온갖 정성과 최고의 기술을 다하여 다투어 조성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대종(大鍾)에서부터 소종(小鍾)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이 수없이 만들어졌는데 그 아름다움이 뛰어나고

종소리의 신비성 또한 무비(無比)의 것이어서 독보적인 존재로 인정받고 있다.

신라종(新羅鍾)은 이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작품이다. 현재 우리가 알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종은 725년에 제작된 상원사동종(上院寺銅鍾)이며, 그 다음에 771년의 봉덕사종(奉德寺鍾), 804년의 선림원종(禪林院鍾), 실상사종(實相寺鍾) 같은 것이 있으며, 일본에 전해진 833년의 상궁 신사종(常宮神寺鍾), 904년의 우좌팔번궁종(宇左八幡宮鍾) 같은 것이 남아 있다. 이들 종의 종신은 원추형으로 꼭지에 용과 음통(音筒)이 있으며, 이들 조각들은 초기의 것은 정교 세련되었고 후기의 것은 화려 섬세를 다한 것들이다.

이들보다 앞서는 조형의 종은 지금은 어떤 것인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중국식 종의 영향이 강한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예로부터 전하는 우리나라의 동탁(銅鐸)과의 관련도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조계사 동종이 초기 형식의 종이라는 것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 착상은 물론 타당하나 여러 가지 여건으로 볼 때 원형설(原形說)은 좀더 숙고해야만 될 것이다.

향가문학[편집]

鄕歌文學

향가라는 것은 중국시에 대한 우리나라의 독자적인 시가(詩歌)라는 뜻으로 쓰인 말인데 좀더 정확히 말하면 신라시대부터 고려 초기에 걸쳐 이두식 문자로 지은 모은 시가를 총칭한다. 물론 도솔가니 사뇌가(詞腦歌)니 하는 모든 형태의 시가를 다 포함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향가를 불교문학이라고 하기에는 부적당하지만, 당시의 시가 제작자들의

대부분이 승려였던 까닭에 대부분의 향가는 불교적인 인생관과 우주관을 지니고 있는 말하자면 불교시가였다. 그래서 향가 가운데 불교시가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서 이런 계통의 향가를 불교향가라 이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전하는 향가는 모두 25수인데 이것을 내용·작가·형식으로 분류하면 이상의 것이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즉 내용:불교적(18), 군신 관계(2), 남녀(2), 붕우(朋友)(2), 기타(1), 작가:승려(18), 화랑(3), 여류(女流)(1), 실명(1), 형식:10구체(十句體)(19), 4구체(四句體)(4), 8구체(八句體)(2)로 되어 있다. 여기서 보다시피 '향가의 주작가는 승려였고 주내용은 불교적이며 전형적인 형식은 10구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당시의 문화담당 계층이 승려였다는 데 원인이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화랑들이 비록 향가를 지었지만 작곡하는 것은 승려에게 부탁하였다는(大矩和尙) 사실에서도 이 점은 잘 알 수 있다.

향가는 물론 선사시대부터 제작되었겠지만 통일을 전후하여 향가라고 부를 수 있는 시가형태로 확실히 정립하였던 듯하다. 최초로 나타나는 불교향가는 융천사(融天師)가 지은 혜성가(慧星歌)인데 이것은 기복적(祈福的)인 것이며 광덕(廣德)의 원왕생가(願往生歌), 월명사(月明師)의 도솔가, 충담사(忠談師)의 천수대비가(千手大悲歌) 같은 것이 대표적인 훌륭한 불교향가였다.

우리는 이러한 불교향가를 통해서 선인들의 인생관과 우주관을 알 수 있고 그들의 예술적인 예지와 멋을 찾아낼 수 있다.

범패[편집]

梵唄

범패는 한마디로 말해서 인도의 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인도에서 전래된 음악인 동시에 불교음악인 것이다. 불교음악은 항상 두 가지 목적을 갖고 있다. 종교의식을 장엄하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한 그 음악을 통하여 종교적인 환희에 젖어 스스로 종교목적을 달성하게 하는 것이다. 범패는 이런 목적을 충실히 이행했던 가장 정통적인 불교음악이었다.

범패의 기원은 명확히 알 수 없지만 재래 인도의 음악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인도적인 운율과 인도적인 가사를 노래 부르는 것이 범패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에 수입되자 중국식의 운율이 다분히 가미되어 보통 한찬(漢讚)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중국에 수입된 것은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가장 확실한 것은 당나라때였다고 알려져 있다. <범음집산보서(梵音集刪補序)>를 보면 당의 현장법사(玄奬法師)가 인도에서 배워와서 자은사(慈恩寺)의 경찬(慶讚) 때 고종(高宗) 앞에서 노래했다고 하는 기록이 있는데 아마도 이것이 중국 범패의 명확한 시초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때의 범패는 물론 현장법사 같은 이가 범어에 능통하였으니까 인도식과 흡사한 것이었겠지만, 후대로 내려올수록 중국의 사성식(四聲式) 운율로 바꾸어졌을 것이다. 이것을 한찬(漢讚) 또는 당풍(唐風)이라 한다.

우리나라에 이 범패가 수입된 것이 언제인지는 명확히 알 수 없지만 범패란 말이 등장한 시초는 760년으로서, 월명사(月明師)가 경덕왕이 노래 부르기를 청하자 자기는 화랑의 무리이므로 향가만 알 뿐 범성(梵聲:梵唄)을 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이것으로 보면 벌써 8세기 중엽에는 범패가 꽤 널리 보급되었던 것이 분명하지만 후대까지 본격적으로 영향을 미친 범패는 하동(河東) 쌍계사(雙溪寺:玉泉寺)의 진감국사(眞鑑國師)에 의하여 830년에 수입된 것이다. 최치원(崔致遠)이 쓴 그의 비문에 신라에 전하는 범패는 모두 그의 영향이라고 한 것에서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의 자각대사(慈覺大師)가 쓴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 보면 당의 신라사찰에서 신라식 범패가 행해지고 있다고 한 것은 월명사의 예와 함께 진감국사가 당풍의 범패를 새로 수입하여 크게 전파한 신파(新派)의 시조라는 것을 시사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 신파의 범패가 그 후 주류를 형성했다고 생각된다. 신라의 범패는 중국과는 다르게 신라풍의 음곡(音曲)이 지배적이었던 것 같고, 이러한 신라식 범패가 지금까지도 전승되어 우리나라 특유의 범패가 되었다. 범패는 진감대사의 비문에도 있다시피 신비한 소리로써 뭇 중생을 환희심에 젖게 하는 법열(法悅)의 소리이며 그럼으로써 정통적인 불교음악으로 되었던 것이다.

고려시대의 벽화[편집]

불사건축과 벽화[편집]

佛寺建築-壁畵

고려는 태조가 훈요10조(訓要十條)로써 불사(佛寺)의 난립을 억제하도록 했지만 신라시대보다 훨씬 더 많은 사찰이 건립되었다. 가장 저명하였던 것으로는 안화사(安和寺)·연복사(演福寺)·흥왕사(興王寺)·흥국사(興國寺) 같은 거찰(巨刹)이었는데 지금은 신라의 사찰과 함께 하나도 전해오지 않는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건축으로 아직까지 그 유구(遺構)를 전해주는 것으로 봉정사 극락전(鳳停寺極樂殿), 부석사(浮石寺)의 무량수전(無量壽殿)과 조사당(祖師堂), 수덕사 대웅전(修德寺 大雄殿), 안변(安邊) 석왕사(釋王寺)의 응진전(應眞殿), 황주 심원사(黃州心源寺)의 보광전(普光殿) 등을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건축물은 거의 없어진 고대의 우리나라 건축을 다소나마 복원해 볼 수 있게 하며, 당시의 건축양식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또한 당시의 벽화 수법을 알아볼 수 있게 하는 것으로 매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봉정사 극락전은 정면 3간, 측면 2간의 맛배집인데 공포(拱包)는 2출목(出目)이고, 소로와 주두에 굽받침이 없으며,

복화반(覆花盤)을 사이에 둔 중량(重樑)과 그 위의 대공(臺工)으로 마루도리를 받들고 있는데 마루도리 대공의 형태가 파두형(派頭形)으로 장식된 고식(古式)이다. 이것은 최근의 수리 때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로 확인되었다.

부석사 무량수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八作)집인데 공포는 2출목, 소로·주두에 굽받침이 있고 첨차 하단이 S형으로 된 것 등, 고식주심포양식(古式主心包樣式)인데 1367년에 재건된 건물이다. 이러한 주심포 계(系)말고

심원사 보광전 같은 다포계(多包系)도 있는데 고려의 불사 건축은 조선에 의해 계승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들 건물에는 말하자면 부석사 조사당이나 수덕사 대웅전 같은 곳에 벽화들이 남아 있어 고려 불화(佛畵)의 원형을 찾아볼 수 있다. 조사당 벽화는 세련되고 자유분방한 필선(筆線)에 따라 선명한 녹색을 주조(主調)로 화면을 구성하고 있는 훌륭한 작품인데 이러한 불화를 통하여 당시의 불화들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다.

사경[편집]

寫經

인쇄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고대에는 책을 필사하는 작업이 매우 중요시되었다. 바로 문화의 전파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특히 불교에 있어서는 경전을 필사하는 것이 극히 강조되었는데 이는 포교와 직결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경은 무량한 공덕을 쌓는다는 사상까지 나타났으며 이런 사상이 일반화되어 경전의 필사가 더욱 성행하였다. 그 결과 경전의 유통이 매우 원활하게 되었으며 한자 한획도 정성을 다하여 쓰여졌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금이나 은으로 불경을 필사하는 호화스러운 사경까지 출현하였으며, 심지어는 사경을 전문으로 하는 승려까지 있었다.

삼국이나 통일신라에도 이러한 사경이 크게 유행하였겠지만 현재는 전하는 것이 거의 없다. 현재 많이 전래하는 것은 고려 때의 것인데 매우 호화스럽고도 훌륭하다.

마곡 사연화경, 광덕사연화경 같은 금은제의 사경이 매우 많은데 이러한 사경은 결과적으로 독특한 사경미술을 발달시켰고 또한 서예에 통달하게 만들었다.

탄연[편집]

坦然(1069∼1158)

고려시대의 명승으로 특히 문필에 뛰어난 신필(神筆)의 하나로서 유명하다. 그는 문종 23년인 서기 1069년에서 1158년까지 살았던 고승이었는데 그의 명성은 무엇보다도 그가 명필가였다는 데 있다. 그의 필적을 흔히 신품(神品)으로 평하는 것이 보통이거니와 과연 그의 필치는 대표작이라고 볼 수 있는 문수원(文殊院) 중수비(重修碑)에서 보는 바와 같이 참으로 신기(神技)가 감도는 명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승려 층에서 명필가가 쏟아져나온 것은 당시의 문화담당 계층이 승려였다는 데에도 원인이 있겠지만 불경의 필사가 절대적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고려대장경판[편집]

高麗大藏經板

대장경이라는 것은 불교 경전을 총칭하는 말이다. 말하자면 경(經)·율(律)·논(論)의 삼장(三藏)을 뜻하는데 역대 명승들의 저서들도 포함되는 것은 물론이다. 처음으로 대장경이 완질로 조조(雕彫)된 것은 중국의 송태조(宋太祖) 때였다.

우리나라는 현종(顯宗) 2년에 처음 <대장경>을 조조하였는데 그후 문종을 지나 선종 때 완성되었다. 무려 76년에 걸쳐 완성된 것인데 5,294권에 달한다. 그후 대각국사(大覺國師)에 의해 <속장경(續藏經)>이 개판(開板)되었지만 이것들은 대부분 몽고의 난 때 불타버렸다.

그래서 고종(高宗) 23년(1236)에는 대장도감(大藏都監)을 두어 수기(守其)와 같은 학승들로 하여금 엄밀한 교정을 보게 하여 전대장경을 완전히 조성하였다. 이 경판은 처음에는 강화 서문 밖 대장경판고(大藏經版庫)에 두었다가 그후 강화 선원사(禪源寺)로 옮긴 듯하며, 다시 조선 태조 7년(1398)에 현재의 해인사(海印寺)로 옮겼던 것이다.

이 경판(經板)들은 해인사 경내(境內) 뒤 언덕에 있는 2동(二棟)의 경판고(經版庫)에 보관되어 있다. 건물은 정면 15칸, 측면 2칸의 우진각 건물이다.

건물 안에 5층의 판가(板架)를 설치하였는데 천지현황(天地玄黃) 등 천자문의 순차로 함호(函號)를 정하여 분류, 배치하고 있다. 판목(板木)은 남해 지방의 자작나무(樺木)로서 세로 23㎝, 가로 69.6㎝, 두께 2.6∼3.9㎝ 크기이며 양끝에 나무를 끼워서 휘어지지 않게 하고 네 모서리에 구리판을 붙이고 전면에 옻칠을 하여 매우 단단하게 하였으므로 보존상태가 아주 좋은 편이다. 매판(每板)은 23행, 각행 14자의 글씨가 웅건 정교한 필치로 새겨져 있다.

판의 총수가 81,240매인데 18매는 없어진 것을 보충한 것이다. 과거 서수생(徐首生) 교수는 이 총판수가 틀린다고 조사 보고하여 귀추가 주목되기도 하였다.

어쨌든 고려 대장경판의 조판(雕板)은 고려 불교문화의 총결산을 뜻하는 것인 동시에 고려문화의 위대성을 과시하고 나아가 한국문화의 우수성을 알려주는 일대 금자탑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조선시대의 불교문화[편집]

원각사 10층석탑[편집]

圓覺寺十層石塔

고려시대와는 반대로 조선조에 와서 불교가 유례없는 탄압을 받아 국교의 지위로부터 일약 사교(邪敎)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때로는 세종·세조 같은 호불(好佛)의 군주나 왕비 등이 나오고 또는 교단 자체내의 끈질긴 노력으로 중흥의 기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조선 초의 세조는 전조(全朝)를 통하여 친불교적인 정책을 가장 강력히 수행했던 군주였다. 불경을 우리 말로 번역하는 등의 일을 하는 간경도감(刊經都監)을 두는 등 적극적으로 불교를 장려하였다. 그의 이런 친불교정책을 총결집하는 기념비가 원각사의 건립이었다.

세조는 불교중흥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흥복사(興福寺)를 폐하고 그 자리에 대원각사(大圓覺寺)를 창건하였는데 원각사 10층석탑은 그러한 점을 잘 나타내 주는 기념비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석탑에는 3중 방형(方形)의 3층 기단 위에 10층의 탑신이 있는데 높이가 약 12m나 된다. 갑석(甲石)의 중앙에는 당초문양(唐草紋樣)이 있고 하층 기단의 각면에 용·사자·모란·연꽃 등이 새겨져 있으며, 중층 기단에는 불전도(佛塼圖)와 본생담(本生譚)의 조각, 상층 기단에는 나한상 같은 것이 있다. 탑신에는 불보살상·신장상 등이 있으며 옥개는 목조 누각형(木造樓閣形)으로 되어 있다.

탑신 1층부터 3층 4방과 4층 남면에 걸쳐서 13회(十三會)의 변상도(變相圖)를 복잡 화려하게 조각하였고 그 이상은 불상들이 새겨져 있다. 이와 같이 이 대리석탑은 특이한 양식일 뿐 아니라 정묘를 다한 조각으로 조선조 초기의 최대 정상과 최고 기술을 다하여 완성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이 탑이 고려의 경천사(敬天寺) 13층석탑을 모방하여 만든 것이라 할지라도 여기에는 불교중흥의 의지와 사상통일의 웅지 및 국력신장의 패기가 서려 있어 조선조 전기의 문화적

기상을 나타내 주고 있다 할 것이다.

불교설화문학[편집]

佛敎說話文學

불교의 발생지인 인도는 일찍부터 많은 설화들이 풍부하게 흡수되어 독특한 불전설화로 발전을 보았다. 일반민중은 물론 승려들에게도 재미있고 친근한 설화를 예로 들어 심원한 불교의 진리를 설명하는 것이 불교의 포교에 가장 적합한 방법이었으므로 이러한 설화들은 불전(佛典)에 즐겨 이용되었다. 이것은 본생담(本生譚:Jataka)·비유설화(譬喩說話:Avadana)·인연설화(因緣說話) 등 3가지 종류가 있는데 전동양에 널리 퍼져 각국의 소설과 가사문학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불교의 수입과 더불어 이와 같은 설화들이 급속도로 전파되었는데 경흥(憬興)·태현(太賢)·원효(元曉) 같은 고승들의 저서에 이런 설화들이 많이 인용되고 있으며 또한 민간설화에도 널리 전파되었다.

<육도집경>에서 나온 귀토설화(龜兎說話)가 7세기 고구려 사회에 퍼져 있었고,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 온 심화요탑설화(心火繞塔說話)가 <삼국유사>에 보이며 이런 예는 <삼국유사>·<해동고승전(海東高傳塼)>·<(殊異傳)> 등에서 상당히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단군신화를 비롯한 고유의 신화·전설·민담 등에 이런 불전설화들이 가미되어 절충과 융합을 통하여 새로운 설화를 만들기도 하고 고대의 시가와 향가의 배경이 되기도 했으며, 고려의 패관문학, 조선의 소설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특히 조선조시대에는 한글의 성립과 더불어 민간에 전승되어 오던 불전(佛典)에서 변용된 설화들이 한글소설로 정착하게 된다. 그 중 가장 저명한 것이 <적성의전(狄成義傳)>과 <토끼전>이다.

전자는 <현우경(賢愚經)>의 비유와 매우 비슷한데 형제의 시기를 다룬 것이며, 후자는 거북과 토끼의 지혜 싸움을 다룬 것으로 이는 <육도집경(六度集經)>의 설화에서 유래한 것이 확실하다. 이와 같이 불교의 설화는 조선시대에는 소설로서 정착하여 일반 민중의 의식구조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문학에 절대적인 영향을 준 것으로 생각된다.

영·정조대의 중흥[편집]

英·正祖代-重興

임진(壬辰)과 병자(丙子)의 양대 전란은 전국토를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다. 이것은 고려시대의 몽고난에는 비할 수도 없을 만큼 심한 타격을 전국가적으로 주었던 것이다.

불교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니, 그 타격이 가장 심각한 쪽은 불교였다고 할 수 있다. 의병활동에 대한 보복과 불교문화재의 약탈 때문에 모든 사찰들은 거의 완전하게 괴멸되어 버렸던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 소장되어 있던 찬란한 불교문화 유산들도 일거에 오유(烏有)로 변해버렸다.

이와 같이 타격이 너무나 심각하였으므로 그 복구는 1세기라는 장구한 세월이 흐른 18세기에야 겨우 이루어졌다. 그것은 바로 영·정조대의 문예부흥기였다.

불사의 중건도 영·정조대에 와서야 이루어졌던 것은 이와 같은 전반적인 사회상황에 따른 것이었다. 오늘날 남아 있는 거의 대부분의 사찰이 이 당시에 중건된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따라서 건축은 물론이거니와 불상·불화·불교공예품 같은 것의 대부분이 그 무렵의 제작이었다.

그 숫자는 어마어마하여 수십 년간의 단기간에 이렇게 많은 불교미술이 어떻게 제작되었을까 하는 의아심이 들 정도이다. 이 시대야말로 불교문화사에 있어 가장 주목해야 할 시대이며, 그것은 본격적인 연구를 통하여 다방면으로 연구·검토되어야 할 중대한 과제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