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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의 의식〔개설〕[편집]

韓國佛敎-儀式〔槪說〕

중인도 가비라(迦毘羅:Kapilavastu)에서 탄생한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Sakyamuni-Buddha)에 의해서 성립된 불교가 중국(67)을 거쳐 한반도에 전래한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小獸林王) 2년(372) 6월의 일이었다.

이렇듯 오랜 역사를 가진 불교는 의식 또한 다른 어느 나라 종교에서도 그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방대하다. 그런데 경전에 나타난 인도의 불교의식은 극히 간단해서 경의를 표하는 정도였으며,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오는 동안 시대와 지역의 변천에 따라서 마침내 전문화하기에 이르렀다. 현재 한국의 불교의식을 크게 나누어 본다면 대략 아래와 같다.

(1) 아침 저녁의 예경(禮敬)의식과 이에 따르는 종송(鍾頌)·독경(讀經)·송주(誦呪)·상축(上祝).

(2) 사람의 사후(死後) 49일에 영혼의 명복(冥福)을 빌어, 천도해서 삼계육도(三界六道)의 윤회(輪廻)에서 벗어나 극락세계로의 왕생(往生)을 비는 각종 재(齋) 의식.

(3) 살아서는 금생에 복수(福壽)를 더하고 죽은 뒤에는 왕생극락(往生極樂)을 비는 생전예수재(生前預修齋) 의식.

(4) 법계(法界) 안의 물이나 허공에 있는 모든 중생을 천도하는 천지명양수륙재(天地冥陽水陸齋)의식.

(5) 물고기나 그밖의 수족(水族)들이 그물에 잡혀 죽게 된 것을 다시 물속에 놓아 살려 주는 방생재(放生齋) 의식.

(6) 다과진수(茶菓珍羞)를 베풀어 독경(讀經)과 염불(念佛)로써 영혼을 위령·천도하는 시식(施食) 의식과 이에 따르는 영반(靈飯)·대령(對靈)·관욕(灌欲) 등의 의식.

(7) 이미 지은 죄업장(罪業障)을 참회(懺悔)하고 깨끗한 삶을 다짐하는 예문(禮文) 의식.

(8) 불상(佛像)을 조성했거나 가사(袈裟)를 지었거나 탑(塔)을 만들었을 때에 거행하는 점안(點眼) 의식.

(9) 괘불(掛佛)을 모시거나 가사(袈裟)나 사리(舍利)등을 봉안할 때의 이운(移運) 의식.

(10) 부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하여 5계·10계·250계등 각급 금계(禁戒)를 받는 수계(受戒) 의식.

(11) 사람이 죽었을 때의 장례의식인 다비(茶毘) 의식.

이상은 불교의식의 대강을 소개한 것이며, 특히 불교의식의 어려운 점은 모든 의식을 범패(梵唄)로 부르게 되어 있는 점이다. 범패란 범토(梵土), 즉 인도의 가패(歌唄)라는 뜻이며, 혹은 넓은 의미에서 범음(梵音)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불교에 있어서의 범패의 유래는 일찍 불타께서 재세(在世)하실 때에 묘음보살(妙音菩薩)이 영취산(靈鷲山)의 법화회상(法華會上)에서 노래를 불러 부처님의 덕을 찬탄하여 공양하심에 비롯되었고, 중국에서는 위(魏)의 조식(曹植:字는 子建)이 산둥(山東) 어산(魚山)에서 노닐 때 허공에서 들려오는 맑고 아름다운 특이한 소리를 본떠 부른 데서 비롯된 것을 신라의 진감선사(眞鑑禪師, 774∼850)가 당(唐)에 들어가 배우고 돌아와서 지리산(智異山)에 옥천사(玉泉寺:지금의 雙溪寺)를 짓고 운집(雲集)하는 대중에게 범패를 가르쳐 널리 교화에 힘썼고, 고려를 거쳐 조선(朝鮮)에 와서는 특히 청허대사(淸虛大師:休靜)의 제4세 법손(法孫)인 운계당선사(雲溪堂禪師:法敏)에 의해 크게 떨쳤으나, 근세의 장안사(長安寺:內金鋼) 윤금운(尹金雲) 스님과 개운사(開運寺:서울 安岩洞) 전우운(田雨運) 스님을 끝으로 지금은 어산종장(魚山宗匠:魚丈)의 자취가 끊어져, 천여 년을 면면(綿綿)히 이어온 우리의 무형문화재가 인멸(湮滅) 직전에 있음은 실로 애석함을 금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범패는 가사(歌詞)인 한자(漢字)가 가지는 소리의 장(長)·단(短)·고(高)·저(低)를 원칙으로 하여 부르되, (1) 홑소리 (2) 짓소리 (3) 둘림소리 (4) 안소리 (5) 겉소리 등의 다름이 있다.

홑소리는 혼자 부르는 독창(獨唱)이며, 짓소리는 여럿이 길게 가락을 지어서 부르는 합창이며, 둘림소리는 부처님 앞을 천천히 걸어 돌면서 부르고, 안소리란 혼자 조용히 앉아서 부르고, 바깥(또는 겉)소리란 남성적·외향적이라는 뜻에서 그렇게 구별한다.

이러한 불교의식과 범패에 대한 문헌으로는 지경(志磐)·자기(仔夔)·범음집(梵音集)·요집(要集)·귀감(龜鑑)·범패원류(梵唄源流)·범음종보(梵音宗譜)·불자필람(佛子必擥)·석문의범(釋門儀範) 등이 있다.

<黃 晟 起>

불타 당시의 불교의식[편집]

佛陀當時-佛敎儀式

불교의 기본 의식은 삼귀(三歸)·오계(五戒)이며 먼저 불(佛)·법(法)·승(僧)의 삼보(三寶)에 귀의한 다음 부처님으로부터 ① 불살생(不殺生) ② 불투도(不偸盜) ③ 불사음(不邪淫) ④ 불망어(不妄語) ⑤ 불음주(不飮酒)의 5가지 금계(禁戒)를 받아 가지는 것이었다.

이렇게 입교(入敎) 의식을 마치면 부처님을 경례함에는 ① 부처님의 오른쪽으로 3바퀴 돌고, ② 머리를 조아려 이마를 땅에 대고 두 팔꿈치와 두 무릎을 땅에 대고 엎드리며, ③ 무릎을 꿇고, ④ 두 손을 모아 부처님을 뵈옵는 것이 의식의 전부였다.

부처님 앞에서의 독경의식의 유래[편집]

-讀經儀式-由來

동진(東晋) 때의 유명한 불교학자인 도안(道安)법사가 처음 부처님 앞에서 경을 읽기 시작한 것이 독경·송주(誦呪)의 효시이다. 도안법사는 고구려에 처음 불교를 전한 전진왕(前秦王) 부견(符堅)이 도안법사를 얻기 위해 10만 대병을 움직여(東晋太元 4년:379) 양양(襄陽)을 공략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72세(前秦의 建元 31년 2월:385)에 입적했다.

49일재의 유래[편집]

四九日齋-由來

불교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사후(死後) 의례는 49일재(齋)이다. 경에 설한 바에 의하면 사람의 존재 형태를 넷으로 구분하여, ① 생유(生有) ② 사유(死有) ③ 본유(本有:生에서 死까지 생애) ④ 중유(中有:이생에 죽어서 다음 生까지를 말함)인데 이 중유(中有)의 정상적인 기간이 49일이다. 즉 사람이 죽은 뒤에는 일반적인 경우 49일이면 중유(中有)가 끝나고 다음 생(生)이 결정된다. 그러므로 다음 생이 결정되기 전인 48일째에 정성을 다하여 영혼의 명복을 비는 것이 49일재이다.

그런데 이 49일재에는 광·약의 다름이 있고, ① 상주권공재(常住權供齋)는 가장 간단한 것으로 우선 불(佛)·법(法)·승(僧)의 삼보(三寶)에 예경하고 향(香)·등(燈)·다(茶)·화(花)·과(果)의 5가지로 공양(供養)을 드리고 끝으로 영혼을 위로하여 법어(法語)와 염불로써 천도를 행하는 의식이며 ② 시왕각배재(十王各拜齋)는 앞의 삼보(三寶) 외에 다시 영혼의 선악(善惡)을 심판하는 명부세계(冥府世界)의 염라대왕 등 10대왕에게 예배 공양하여 명복을 비는 것이며 ③ 영산작법재(靈山作法齋)는 가장 범위가 큰 의식이니 갖추어 하자면 하루 한나절이 소요된다.

생전예수재[편집]

生前預修齋

이는 갖추어 말하면 예수시왕생칠재(預修十王生七齋)로서 사후(死後)의 재식을 생전에 미리 행하는 것인데, 주로 명부세계의 시왕(十王)을 비롯해서 이를 따르는 각종 판관권속(判官眷屬)에 이르기까지 골고루 공양을 올려 현세의 복수(福壽)를 더하고(現增福壽) 당대에는 왕생극락(當生淨刹)을 발원하는 의식이다.

천지명양수륙재[편집]

天地冥陽水陸齋

이 수륙재(水陸齋)의 연기(緣起)를 살펴보면 일찍 양무제(梁武帝)가 법운전(法雲殿)에 있을 때 한 신승(神僧)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육도·사생(六道:四生)의 고통이 한량없거늘 어찌하여 수륙재를 베풀어 법계함령(法界含靈)을 제도하지 않느냐고 하므로 무제가 대장경에서 출처를 찾아 의문(儀文)을 스스로 지어 금산사(金山寺)에 가서 재를 베풀어 수륙공계(水陸空界)의 함령(含靈)을 천도한 것을 효시로 하고,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광종(光宗) 21년에 화산 갈양사(葛陽寺:오늘의 龍珠寺)와 귀법사(歸法寺) 등에서 재를 베풀었고, 선종(宣宗)은 보제사(普濟寺)에 수륙당을 지었고, 이태조(李太祖)는 진관사(津寬寺)·견암사(見岩寺)·석왕사(石王寺) 등에서 재를 베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방생재[편집]

放生齋

방생재는 물고기 등 수족(水族)들이 그물이나 낚시에 걸려 죽게 된 것을 구해서 물에 넣어 살려주는 의식으로, 요즘에는 방생(放生)을 하기 위하여 일부러 어부에게 미리 돈을 주어 잡아 오게 한 다음 놓아주니, 이는 오히려 방생이 아니라 수족에게 고통을 주는 만큼 고쳐야 한다.

위령천도의 시식[편집]

慰靈薦度-施食

시식은 다과진수를 베풀어 영혼을 위로하고 법어와 염불로 천도하는 것으로 여기에는 ① 관세음보살의 가지력(加持力)을 빌려 행하는 관음시식(觀音施食) ② 화엄경문의 법력을 빌어 천도하는 화엄시식(華嚴施食)과 ③ 널리 삼보(三寶)의 위신력에 힘입어 법계 고혼(孤魂)을 천도하는 전시식(奠施食) 등이 있다.

참죄업장의 예문의식[편집]

懺罪業障-禮文儀式

예문(禮文)은 지은바 죄업장(罪業障)을 참회함이니, 우리의 죄업에는 신(神)·구(口)·의(意)의 3업이 있고, 이를 세분하면 신삼(身三:殺生·偸盜·邪淫), 구사(口四:妄語·綺語·兩舌·惡口), 의삼(意三)의 10악업이 된다. 이를 참회할 때에는 팔뚝에 불을 놓아 살을 태우니 이를 연비(燃臂)라고 한다.

그런데 관세음보살에게 참회하는 의식은 관음예문이라 하고, 지장보살에게 행함을 지장예문이라고 한다.

불상·가사 등 점안의식[편집]

佛像·袈裟-點眼儀式

불상(佛像)을 조정했거나 가사(袈裟)나 탑(塔) 등 불사의 준공을 점안(點眼)이라 한다. 이러한 것들은 완성해서 그냥 모시거나 쓰지 못하고 반드시 점안이라는 의식을 행해야 한다.

그런데 가사(袈裟:kosa)는 괴색(壞色)이라고 번역하니 그 법복의 빛깔이 청(靑)·황(黃)·적(赤)·백(白)·흑(黑)의 다섯 빛 정색(正色)을 피한다는 뜻에서 괴색이라 하는데, 이에는 승가리(僧伽梨:Sa

ghati)의 대의(大衣)와 울다라(鬱多羅:Uttarasa

ga)의 상의(上衣)와 안타회(安陀會:Antaravasa)의 내의(內衣)가 있다. 승가리는 상·중·하가 있는데 상품(上品)은 25조(條)·23조·21조이고, 중품(中品)은 19조·17조·15조이며, 하품(下品)은 13조·11조·9조이다.

이상의 구품대의(九品大衣)는 설교하거나 법공양을 할 때 착용하고, 다음의 울다라는 상의(上衣) 7조로서 걸식(乞食)이나 밖에서 다닐 때에 착용하고, 안타회의 내의(內衣) 5조는 앉을 때는 방석으로, 잘 때는 덮개로서 쓰는 것이다.

그러므로 청·황·적 등의 정색(正色)을 가사에 쓰는 것이나 7조 가사를 입고 설교 혹은 법공양에 참예함은 다 옳지 못하다.

가사·괘불·사리 등의 이운[편집]

袈裟·掛佛·舍利-移運

이운(移運)이란 옮기거나 봉안(奉安)할 때의 의식이며, 이에는 괘불(掛佛)·가사(袈裟)·불사리(佛舍利)·승사리(僧舍利)·금은전(金銀錢)·경함(經函)·법사(法師)·시주(施主) 이운 등이 있다.

각종 수계의식[편집]

各種受戒儀式

불교의 금계(禁戒)는 신분에 따라서 계목(戒目)이 같지 않다. 먼저 ① 사미(沙彌:20세 미만의 남자), 사미니(沙彌尼:18세 미만의 여자)에게 주는 사미 10계, ② 식차마나니(式叉摩拏尼:18세에서 20세까지의 여자)의 6계, ③ 우바색(優婆塞:재가한 남자), ④ 우바니(優婆尼:재가한 여자)에게 주는 우바색 5계, ⑤ 비구(比丘:20세 이상의 남자)의 250계, ⑥ 비구니(比丘尼:20세 이상의 여자)의 348계가 있고, ⑦ 대승보살의 10계가 있다. 이상의 수계에는 모두 엄숙한 수계의식이 있다.

다비의식[편집]

茶毘儀式

이는 염습(殮襲)할 때부터 시작해서 화장(火葬) 또는 매장(埋葬)을 마치고 반혼(返魂)까지의 의식이다. 삭발(削髮), 목욕(沐浴), 세수(洗手), 세족(洗足), 착군(着裙), 착의(着衣), 입관(入棺), 기관(起棺), 발인(發靷), 거화(擧火), 하화(下火), 기골(起骨),

습골(拾骨), 쇄골(碎骨), 산골(散骨), 반혼(返魂) 등의 순서로 되어 있는데, 매장(埋葬)의 경우에는 발인 뒤에 하관(下棺) 반혼(返魂)으로 마친다.

범패와 범음과 인도[편집]

梵唄-梵音-引導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범패(梵唄)는 범토(梵土), 즉 인도의 노래(歌唄)라는 뜻이니 일체의 가패를 말하고, 범음(梵音)은 범토(印度)의 음악을 말하니, 비단 노래뿐 아니라 경읽고, 염불하고, 북치고, 목탁치고, 바라치고, 춤추고, 예배하는 등의 일체의식을 가리키는 것이고, 또는 범음(梵音)·범패(梵唄)로 의식을 집행하는 승려를 인도승(引導僧)이라고 하는데 이는 영혼을 극락으로 인도(引導)하는 스님이라는 뜻이며 인도 중이란 뜻이 아니다.

이 밖에도 불교의식의 집행에 있어서 다음의 직책들이 있다. 즉 어산(魚山)은 의식에 참여하여 범패나 범음을 행하는 사람들의 통칭이고, 범음(梵音)은 불교음악에 간여하는 사람, 범패(梵唄)는 특히 노래를 부르는 사람, 지전(持殿)은 불전의 책임자, 종두(鍾頭)는 재식(齋式)장의 사환, 입승(立繩)은 규율을 집행하는 사람, 유나(維那)는 범음·범패의 종장(宗匠)으로서 의식 전반을 지휘 감독하는 사람으로 유(維)는 한어(漢語)의 강유(綱維)에서 취하고, 나(那)는 범어(梵語)의 karmadana로서 범한(梵漢) 합성어이다.

<黃 晟 起>

인왕백고좌도장[편집]

仁王百高座道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인왕백고좌도장이 개설되기는 신라 진흥왕 12년(511)이다. 진흥왕 12년에 고구려 승 혜량(惠亮)이 귀화하였다. 왕은 귀화승 혜량에게 승통(僧統)이란 신라 승관제도에 있어서 최고의 직위를 내렸다. 그해 혜량은 처음으로 백고좌법회와 팔관회(八關會)를 개설하였다.

백고좌도장의 명칭도 다양하여 인왕도장·인왕경도장·인왕백좌도장·백고좌인왕도장·백고좌회·백고좌도장·백좌인왕회·백좌인왕경도장·백좌인왕도장·백좌회·백좌도장·백좌법석 등으로 불렸다.

백고좌법회는 구마라습이 번역한 <불설인왕반야바라밀경(佛說仁王般若波羅密經)> 2권을 소의(所依)경전으로 하여 내란과 외우를 방어·제거하고 국가를 안태하게 하기 위하여 호국적 불교 신앙에 의한 100의 불상과 100의 보살상, 100의 사자좌(師子座)를 마련하고 100명의 법사를 초청하여 <인왕반야경>을 강독하는 도장의식인 것이다.

특히 신라 승려들의 <인왕반야바라밀경>에 대한 연구는 대단하여 원측(圓測)의 <인왕반야경소> 6권, 태현(太賢)의 <인왕반야고적기(古迹記)> 1권, 현범(玄梵)의 <인왕반야경소> 2권, 예원(禮元)의 <인왕경주(注)> 4권이 있다.

신라에서 개설된 백고좌인왕도장은, 그것이 정기적으로 혹은 연차적으로 열렸는지, 아니면 부정기적으로 개설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도합 10회에 걸쳐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613년 7월에 수나라 사신 왕세의(王世儀)가 왔을 때 황룡사에 백고좌를 개설하고, 원광(圓光)법사 등을 초치하여 경설하였으며, 636년 3월 와병중인 선덕왕의 치유를 위하여 황룡사에 백고좌를 시설하여 승(僧) 100명을 득도케 하였고, 877년에도 헌강왕이 백고좌법회를 마련하였다고 하니 부정기법회의 인상을 준다.

이와 같은 법회는 신라 민중과 내면적인 관계를 맺은 것이 아니라 왕이나 귀족들을 위한 강설법회 형식을 띤 것이었으며, 국가 안위를 위한 일종의 호국(護國)의식 행사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구마라습 번역의 <불설인왕반야바라밀경>이었으므로 고려 불교에 상당히 가미되었던 밀교적인 성격이 배제된 것이 신라 백고자법회의 특징인 것이다.

<睦 哲 宇>

팔관법회[편집]

八關法會

팔관회란 불교의 계율인 팔계수행을 목적으로 하는 불사의식(佛事儀式)이다. 즉, <근본 5계>인 불살생(不殺生)·불투도(不偸盜)·불망어(不妄語)·불음주(不飮酒)에다 부좌고대광상(不坐高大廣床)·부착화만영락·불습가무희악(不習歌舞戱樂)을 지켜 행하려는 종교적인 의식이며, 윤리적 덕목으로 삼아야 할 것을 매월 7일·15일에 포살(布薩)·설경(說經)하는 것이다. 이러한 종교적인 행사가 신라에서는 중국의 양무제(502∼549)때에 이룩된 무차대회(無遮大會)의 형식을 넘어서 전몰자의 위령제로 변용되게 되었다.

신라 팔관회의 시원은 백고좌법회와 같이 혜량이 신라에 귀화한 진흥왕 12년(551)부터 비롯된다. 즉, 진흥왕은 전몰장병을 위하여 팔관법회를 외사(外寺)에 베풀어 7일 동안이나 행하였다는 기사가 <삼국사기>의 <신라본기> 제4 진흥왕조에 보인다.

신라는 영토를 확장하기 위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항상 침공하였다.

이때 무수한 신라 장병들이 전몰하였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 전몰장병의 추모를 위하여 팔관회 의식이 호국적이고 군사적인 행사로 변용된 것이다.

더욱이 자장(慈藏)이 선덕왕 12년(643)에 귀국하여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우기를 간청하였는데, 그 탑은 국방적이고 호국을 상징하는 탑인 것이다.

이 탑이 이룩된 이후 팔관법회를 황룡사에서 개설하여 이웃 9개국이 신라에 조공을 바칠 것을 널리 알렸으며, 이 탑으로 말미암아 신라는 영원히 안위할 것을 선포하였다.

이처럼 신라의 팔관법회는 불교적인 팔계수행을 덕목으로 삼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국가 수호와 전몰 장병을 위한 위령제 형식이 가미된 것이었다.

또한 신라 팔관회는 10월에 개최·실시되었는데, 이것은 고대의 한국에서 10월을 중히 여겼던 것과 마찬가지로 민족 고유의 무속적(巫俗的)인 일면도 저버리지 않고 불교와 호국, 장병 위령을 위한 것이 복합적으로 습용(襲用)된 신라 의식의 하나였다.

연등회[편집]

燃燈會

정월에 있었던 연등회[편집]

正月-燃燈會

연등회는 팔관법회와 같이 불교의 특수한 의식이다. 연등회는 다른 의식법회와 같이 소의경전(所依經典)에 의해 강경을 하지는 않지만, 등(燈)공양을 장려하는 경전은 많다.

등공양은 부처님께 대한 찬탄의 의미를 나타내며, 특히 <법화경> 약왕보살본사품(藥王菩薩本事品)에서는 그 공덕이 무량하고 위대함을 밝히고 있다. 이는 어두운 암혹을 제거하는 광명, 즉 무명(無明)을 퇴치하는 등불로써 상징되어 부처님의 지혜를 발견하는 지름길로 보았다.

연등회는 정월 보름에 행사가 행해졌는데 중국의 풍속을 따른 것으로 생각된다.

중국에서는 태일성제(太一星祭)가 성행하였는데, 한국에서도 태일성제를 수입하여 행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연초에 많은 의식 행사가 있었으며, 제주 등지의 해안에서는 정월 보름에도 연등회 형태의 의식을 지낸 흔적이 엿보인다.

한국에서 언제부터 연등회를 실시하였는가에 대한 근거는 확실하지 않으나 중국에서는 정월 14·15·16일의 3일간에 걸쳐 연등회를 하였는데, 이것은 고구려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왜냐하면 혜량법사 귀화 이후에 기록이 보이는 까닭이다. 그 뒤에 왕이 백고좌법회와 동시에 연등회를 참관하였는지는 모르지만 정월에 베풀어진 법회는 다음의 5회로, 진평왕 44년(622), 경문왕 6년(866), 경문왕 11년(871), 안강왕 2년(889), 진성왕 4년(892)이다. 이때 위의 왕들은 친히 황룡사에 마련된 법회에 참석하였다.

황룡사는 호국사찰로서 모든 국가적인 의식이 거행되었으며 백고좌법회·팔관회·연등회도 이곳에서 행하여졌다. 이 연등회는 불교의 연등불(燃燈佛)의 설화에 있듯이, 이 사바세계에 광명·지혜·정의를 구현시키려는 이상을 의식으로 행하여 등불을 밝히는 행사로 지냈는데, 그 뒤 형식화하고 세속화되어 종교적 순수성을 이탈하게 되었다.

호국적 행사로서의 연등회[편집]

護國的行事-燃燈會

<고려사> 세가(世家)를 살펴보면 연등회에 관한 기사가 무려 166회나 나온다. 그 명칭은 연등(燃燈)·연등회(燃燈會)·연등도장(燃燈道場) 등으로, 법회 개최 날짜도 정월, 2월 또는 4월 8일 불탄일(佛誕日)에 포함된 연등회도 있었다.

태조때부터 설치되었던 연등회는 팔관회와 같이 성종 때까지 성대히 행하여졌다. 이 연등회가 태조에 의하여 시설될 때는 보국안민(輔國安民)하는 불사(佛事)의 뜻과 군신동락(君臣同樂)의 2가지 의미가 있는 법회였다.

태조 훈요십조(訓要十條)에는 "부처님을 섬기기 위하여서는 연등을 행한다(燃燈所以 事佛)"고 하였지만, 부처님 섬기는 것으로만 해석하기는 어렵게 되었다. 이미 이 연등회는 팔관회와 마찬가지로 호국적인 의식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당시 유행했던 풍수지리설이나 도참설(圖讖說)의 영향도 받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조상숭배 사상과 습합하여 항상 봉은사(奉恩寺)에 행행(行幸)하여 태조의 진상에 향을 올리게 하였다.

이 법회도 팔관회의 예를 벗어나지 않고 민심을 이끌기 위하여 정치적으로 응용되고 세속적인 신앙 양상으로 발전되었다. 그리하여 의식이 있을 때는 지나칠 정도로 주연(酒宴)이 벌어져 주연이 중요한 법회 구실을 하는 등 전도(顚倒)된 일들도 허다하였다.

연회는 법회의 둘쨋날로 정하여 행하였다. 본래 연등회는 호국적인 조상숭배 의식이었다. 성종 때 일시 중지되었으나, 헌종이 부활시켜 더욱 적극적인 법회를 시설한 것은 거란군(契丹軍)의 침입을 막으려는 데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고종 때(1234) 강화도에 봉은사를 창건하고 몽고병을 막아내려고 연등법회를 개설한 것만 보더라도 연등법회가 얼마나 호국적인 의식이었는가를 알 수 있다. 개경의 봉은사, 강화의 봉은사는 모두가 호국적인 조상숭배의 본찰로 이룩된 것이었다.

문두루법회[편집]

文豆婁法會

신라의 문두루법회는 명랑(明朗)법사에 의해서 비롯되었다.

명랑은 선덕왕 4년(635)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불설관정복마봉인대신주경(佛設灌頂伏魔封印大神呪經)>을 가져왔다. 이 경전은 신인비법(神印秘法)을 전하는 것인데 일명 <문두루비법>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방위신(方位神)을 신앙하는 것으로서 호국적인 신앙이며, 국가 안위를 위한 행례가 많은 것이다.

명랑은 문무왕 11년(671) 낭산 신유림(神遊林)에 밀단(密壇)을 마련하고 동서남북과 중앙, 즉 5방에 신상을 모시고 유가승 12명과 함께 문두루비법 법회를 열었다. 특히 문두루진언과 밀교가 지니고 있는 의궤(儀軌)에 의해 법회를 열자 신라를 침공하려던 당나라 병선이 침몰하였다 하여 신라에서 새로운 법회로서 숭앙받게 되었다.

그 뒤 문무왕 19년(679) 명랑과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중심으로 문두루법회를 권장하고 국태민안과 국가 비보(裨補)를 기원하였다. 또한 명랑은 김유신이 세운 원원사(遠願寺)는 통일신라시대의 문두루비법의 중심 사원이 되었다.

점찰법회[편집]

占察法會

점찰법회의 소의경전은 <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 상하 2권이다. 다른 이름으로는 <지장보살업보경(地藏菩薩業報經)>·<대승실의경(大乘實義徑)>·<점찰경(漸刹經)>이라 한다. 이 경전은 오탁악세(五濁惡世)의 말세 중생을 위하여 부처님을 대신하여 지장보살이 설법한 것이다. 말세 중생은 업장(業障)이 많아서 부처님의 바른 법과 착한 법을 믿고 닦을 수 없으므로, 먼저 참회법을 닦아서 업장을 소멸시키고 다음에 대승의 바른 길로 나아가게 한 것이다.

상권(上卷)에서는 참회법을 닦는 방법과 목륜상(木輪相)의 점법(占法)을 설명하였고, 하권에서는 참회를 닦아 얻은 불제자가 대승으로 나아가 부처님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법문을 열어 놓았다. 목륜상은 새끼손가락 크기의 나무토막이며 잘 굴러야 한다. 나무토막 양면에 점괘를 쓴다.

점상은 심륜상법(十輪相法)·삼륜상법(三輪相法)·육륜상법(六輪相法)의 3종이 있다. 원광법사가 제일 먼저 가서사(嘉栖寺)에서 어리석은 중생을 위하여 귀계멸참(歸戒滅懺)의 점찰법회를 열었으며, 또한 안흥사(安興寺)의 지혜니(智惠尼)가 일체함령(一切含靈)을 위하여 선남선녀들의 법회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점찰법회의 융성은 진표(眞表)에 의하여 비롯된다. 진표의 점찰법회는 유를 달리하고 있다. 이것은 <점찰경>에 시설된 목륜을 갖고 하는 것이 아니라 189종의 간자(簡子)를 갖고 하는 것이다.

진표는 미륵과 지장의 양성(兩聖)으로부터 계법과 증과간자(證果簡子)를 받았다. <점찰경>에는 증과간자에 관한 것은 없으나, 3종 목륜상의 하나인 육륜상법에 의하면 삼세과보(三世果報)의 선악상(善惡相)이 189종이나 된다. 이 간자로 자기의 선악을 점치고 참회수법하는 것이다.

법화원 법회[편집]

法花院法會

신라의 법회의식을 가장 명확하게 알려주는 현존 기록은 당나라 등주 문등현 적산촌(登州文登縣赤山村)에 세워진 신라 승원 법화원에서 거행된 강경의식(講經儀式) 1일강의식(一日講儀式)이며, 송경의식(誦經儀式)이 수록된 것은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 권2 개성(開城) 4년(839) 11월 22일조이다.

이 법화원 강경의식은 진시(辰時)에 강경종을 울려 대중을 집회시키며, 대중이 모두 법당에 모이면 강사가 등단하고 신라음으로 칭불(稱佛)하며, 또한 대중이 함께 계향·정향·혜향·혜탈향 등을 합송한다. 그 다음 강경할 제목을 올리고 그 제목에 준하여 문답형식으로 경전을 강설하는 것이다.

정해진 시간에 주어진 강경이 끝나고 강사가 하단하면 한 승려가 창하기를 '처세계여허공(處世界如虛空)'이라 한다. 그러면 모두가 승당 밖으로 나가고 1일법회는 끝나게 된다. 이러한 법화원 강경법회는 11월 16일에 시작하여 그 다음해 정월 15일까지 거행된다.

강경은 경전을 강의·해석하는 것으로 출가 승려와 일반 신도를 청중으로 삼는다. 불교의 대중화가 이 의식을 통하여 이루어졌으며 민중의 교화도 이러한 법회 의식을 거쳐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와 같은 법회가 베풀어진다 하더라도 일반 대중이 그들의 강경 내용을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불전(佛典)의 내용을 손쉽게 이해시키는 길이 마련되어야 하였다. 이처럼 이해를 용이하게 하는 직승을 범패사(梵唄師)라 한다. 그리고 앞에 말한 강경의식이 시설될 때 강사를 보조하여 범패를 창하여 불교 이해의 도를 높이는 것이 보통인데, 이때 범패를 부르는 승려를 작범법사(作梵法師)라 하여 대중 교화의 역할이 대단하였음을 강조하고 있다.

원인(圓仁)의 <순례행기> 권2 개성 4년(839) 11월 22일조에 의하면 복강사(覆講師)가 나오는데, 이것도 작범법사와 같이 강사가 전날에 강연했던 경문을 되풀이하여 대중에게 경전의 깊은 뜻을 이해시키는 데 진력하였던 직승이다. 이 적산촌 법화원에서 이루어진 강경의식은 신라뿐만 아니라 당나라의 불교의식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임에 틀림없다.

팔관회(고려)[편집]

八關會

고려 태조 왕건(王建)도 전례를 답습하여 매년 11월에 팔관회를 시설하였다.

이 법회가 고려가 망할 때까지 일률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나, 성대한 국가적 행사로 거행되었다.

고려 팔관회도 신라나 후삼국의 영향을 받아 호국사상이라든가 미륵신앙 등의 고대적 종교제례(宗敎祭禮) 형식이 가미되었다. 고려의 팔관회는 궐내와 사찰에서 베풀어졌는데 사찰의 경우는 대개 법왕사(法王寺)에서 행하여졌다.

팔관회가 법왕사에서 행하여진 것은 팔관회법회의 중요성과 아울러 법왕사의 지위에 연유한 것이다. 즉, 고려 태조 왕건이 즉위하여 제일 먼저 창건한 사찰이 법왕사였으며, 그는 또 국가를 진호하고 호국하는 길은 팔관회를 잘 모시는 것이라고 훈요십조에 못박았던 것이다.

그 외에도 고려에서 팔관회를 중히 여긴 것은 지리풍수도참 내지 오행사상에 기원하는데, 동방은 목위(木位)요, 목위의 색은 청이며, 이것을 수로 돌리면 8이 된다고 하였다. 이 <8수의 사상>은 이미 있었던 팔관회의 8이라는 수에 관심을 기울이게 하였다. 이러한 8수사상은 인종때 묘청(妙淸)이 팔성당(八聖堂)을 설치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여기의 8성은 국내 명산을 뽑아 8산이라 하고 그 8산에 살고 있는 선불(仙佛)이 나라를 비보(裨補)하여 준다고 강조한 팔관회의 방계적인 발전을 보인 것이다.

한편 이 팔관회는 비록 국가를 위한 법회의식이긴 하였지만 국가의 경제를 피폐하게 하여 한동안 중지되기도 하였다.

팔관회의 거행을 위한 행정적 조치도 마련되어 있었는데, 즉 팔관보(八關寶)가 그것이다.

팔관보는 <고려사백관지(高麗史百官志)> 2 , <제사도감각색(諸司都監各色)>에 보이는데 팔관회 운용에 관한 재정을 담당하는 관직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팔관보와 아울러 팔관회에 관한 관직 또는 관아로서 팔관사(八關司)를 두었다. 이처럼 고려의 팔관회는 국가비보를 위한 호국법회였다.

인왕도장(고려)[편집]

仁王道場

고려의 인왕도장 횟수는 115회인데 현종(顯宗) 3년(1012) 5월에 첫번째로 열렸고 공민왕(恭愍王) 22년(1373)에 마지막으로 베풀어졌다. 보통 3년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열리는 법회였으나, 국가에 침략이나 변재가 있으면 부정기적으로 열리어 진호·비보에 대한 법회로 시설되었다. 인왕도장이 베풀어질 때도 내전·회경전(會慶殿)·문덕전(文德殿)·선경전(宣慶殿) 등 왕궁에서 행하여졌다.

<인왕금광명경>은 호국신앙을 장려하는 철저한 국가 위주의 경전이며, 국왕이 나라를 다스릴 때도 항상 대승적 보살정신으로 하여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인왕금광명경>의 내용은 비구들에게 시설된 것이 아니고 나라를 다스리는 치자(治者), 즉 왕에 관한 사항이 많다.

그러므로 그 왕에 대한 부촉을 성실히 수행하기 위하여 왕궁에서 인왕도장이 시설된 것이다. 특히 고려 왕가에서 창건한 법왕사에서 주로 인왕도장이 베풀어졌는데, 이것은 고려가 호국사찰로서 지은 것이기 때문이다.

인왕도장이 가장 많이 베풀어진 때는 고려 고종 때이다. 당시 고려는 몽고의 침입으로 인하여 국가의 흥망이 눈앞에 다가와 부처님의 힘으로 격퇴시키기 위하여 고종 39년에서 40년까지 2년 동안에 도합 10회의 인왕도장이 베풀어졌다. 이로 미루어 얼마나 보면 고려에서 국가의 안위를 위해 인왕도장에 정성을 기울였는지를 알 수 있다. 이 도장을 행할 때는 반승(飯僧)이 따르므로 국가의 경제적 희생도 대단한 것이었다.

보살계도장[편집]

菩薩戒道場

고려의 왕들이 매년 6월에 받던 수계의식(受戒儀式)으로서 국민을 이롭게 하는 왕은 곧 대승불교의 이상인 보살의 위치에서 10중금계(十重禁戒)와 48경계(四十八經戒)를 수지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의식은 덕종(德宗) 1년(1032)부터 시작되어 공민왕 때까지 계속되었다.

보통 도장이라 부르지 않고 왕수보살계(王受菩薩戒)라 하였으나, 인종 때에는 보살계도장이란 이름도 자주 나온다. 이 의식의 집행은 대전에서 왕사나 국사를 모시고 <화엄경>의 보살십지품을 강독한 것 같다. 왕은 항상 불교 국가의 최고 치자(治者)로서 자기 나라 안에서 보살이 되어 대승정신으로 국가를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며, 종교적인 사상을 뿌리깊게 하고 피지배계급인 중생을 곧 적자(赤子)로 여겨 불국토 건설로 지향하게 하는 것이다.

경찬법회[편집]

慶讚法會

경찬법회란 낙성법회 혹은 낙경(落慶)법회를 말한다. 어떤 절이나 경전이 왕성되었을 때 올리는 축하법회이다. 이것은 어떤 경을 정하여 설경법회를 하는 형식도 없고, 또한 재변이나 소재기양(消災祈禳)을 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대장경의 조조나 금자경(金字徑)의 서사가 무사히 완성되었을 때 축하하는 법회이다.

국가적인 행사임에 틀림없으나 대중적이고 보편적인 축하법회로 하였다. 이것은 국가 자신의 신앙도를 국민에게 드러내어 국민의 정신을 통일하고자 한 것이었다.

선종(宣宗) 4년(1087) 귀법사(歸法寺)의 대장경이 완성되었을 때 왕이 친히 참석하였으며, 흥왕사(興王寺)에 대장전이 완성되었을 때도 참석하였다. 또한 충렬왕(忠烈王) 15년(1289) 금자원(金字院)에 왕이 친히 거동하여 대장경 조조를 축하하였다.

이와 같이 건물의 완성, 사경, 조조 등 불교적인 법기(法器)가 이룩되었을 때 국가적으로 축하하는 법회를 경찬회라 한다.

장경도장[편집]

藏徑道場

장경도장이란 대장경을 모시는 법회의식이나 불(佛)·법(法)·승(僧) 3보를 신앙하는 고려인은 불보를 중히 모시는 행사로서 장경조조 불사에 심혈을 기울였다. 부처님의 진리가 담겨 있는 대장경을 서사, 판각하여 영원히 보존하는 것뿐만 아니라 대장경(大藏經)에 향을 올리는 의식(儀式)이 있었으며 이를 행향례(行香禮)라 했다. 이 장경도장(藏徑道場)은 현종(顯宗) 12년(1029)에 시작하여 매년 봄·가을 두 차례 행하였다.

경행[편집]

經行

고려시대에 있었던 특수한 의식으로, 고려 정종(靖宗) 12년(1046)에 처음 실시되었다. 경행은 <반야경>을 모셔들고 독송하면서 개경(開京) 시가를 보행하는 의식이다.

장경도장이 장경(藏徑)을 찬탄하고 장경에다 향을 올리는 의식임에 반하여 경행은 백성을 위한 의식이며, 민복(民福) 위주의 종교행사였다. 의식에 사용된 대장경은 <반야경>이 위주가 되었으나, <인왕경>이 쓰이기도 하였다. 특히 모든 백관들이 공복을 입고 보행하면서 이 의식에 참여한 것을 보면 국가에서 대단한 열성을 가지고 권장한 의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기우도장[편집]

祈雨道場

농경산업을 위주로 한 우리나라에서는 비가 대단히 중요하였다. 담무잠의 역인 <대방등무상경(大方等無想經)>은 기우의 소의경전으로 <대운경(大雲經)>이란 다른 이름이 있으며 이 경 36품에는 설기우지신주(說祈雨之神呪)가 있다. 또 다른 경전으로는 <대운륜청우경(大雲輪淸雨經)>이 있는데 비를 구하는 의식을 내용으로 하였다. 기우도장도 호국도장이나 소재도장과 마찬가지로 오랜 역사를 가진다. 신라 시대에 있었던 용왕(龍王) 신앙에서 시작된 것이며, 가뭄이 심할 때마다 행하는 의식이므로 일정한 기간이 정해져 있지 않다.

기우도장은 천지신명 및 제천·용왕에게 비는 것이므로 중죄를 지은 사람을 사면하는 경우도 많았다.

오백나한재[편집]

五百羅漢齋

5백 상수비구(上首比丘)들을 소승성인(小乘聖人)으로 받들어 모시고 공양하는 의식을 나한재라 한다. 나한은 정통적인 신앙의 대상은 아니지만 불멸(佛滅) 후 불교 경전을 결집한 분이라 하여 존경을 드리는 것이다. 인도나 중국에서도 <나한공(羅漢供)>이란 특별의식이 있었는데 이것을 강찬오백나한지법회(講讚五百羅漢之法會)라 한다. 고려에서는 문종 5년(1051)부터 충렬왕 10년(1284)까지 27회밖에 시설되지 않았다. 이 나한재는 기우제 역할을 한 흔적이 보인다.

신중도장(고려)[편집]

神衆道場

고려 말기의 불교 의식은 주로 신중도장이 차지한다. 태조 7년(924)에 신중원(神衆院)을 창건하였지만 의식이 성행하기는 고종 때였다.

신중이란 부처님을 옹호하는 천룡8부(天龍八部)이다. 수호신적인 의미가 확대되고 민속적인 경향을 띠어 도장신(道場神)·주성신(主城神)·주지신(主地神)·주산신(主山神)·주가신(主稼神)·주하신(主河神)·주수신(主水神)·주화신(主火神)·주해신(主海神) 등으로 풍수지리설의 모든 신과 습합하게 되었으며 의식의 이름도 신중도장·화엄신중도장(華嚴神衆道場)·천병신중도장(天兵神衆道場)으로 불리지만 동일한 의식이다.

이 의식은 국가가 환란을 당할 때 국가를 수호하기 위한 강한 신앙이 담겨 있는 법회인데, 어떤 절차로 행하여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화엄경>을 주로 한 법회였음은 틀림 없다.

고종 4년(1217)에 설치되어서 공민왕 18년(1369)까지 계속된 이 신중도장은 고종 때에 제일 많이 베풀어졌는데, 이는 국난이 혹심한 데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도장을 주도하는 승려는 술수에 능한 주술승이 맡아하여 불교의 근본 사상과는 먼 거리가 있었다. 즉, 도참설이나 주력(呪力)에 의지하여 양병(禳兵)하려 하였지만 강화에 도읍을 옮기고 실지 호복을 위해 여러 신들에게 호소하여 고려를 건지려는 신앙은 모든 백성들에게, 잘 이해된 의식이었다. 이 신중도장은 국가 수호, 국토 회복의 사상을 가열시켰으며 이 법회를 통하여 고종은 몽고병을 격퇴하려 하였으므로, 항상 친설(親設)하였고 왕 자신의 신앙도 모두 바친 것이었다.

수륙재[편집]

水陸齋

조선에 들어와서는 고려적인 잔재를 말살하고 유교적인 이념을 내세우려고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정월 15일에 열리던 연등회를 태종 14년(1414)부터는 수륙재라고 하였다. 앞서 태조는 수륙의 만령(萬靈)을 천도공양하기 위하여 매년 2월·10월에 재를 열었다.

이것은 이태조의 불교 정책이 은근히 비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신라·고려에 있던 연등팔관회 의식을 교묘히 수륙이란 이름으로 전용·거행한 것이다. 그러나 태종은 2월·10월의 행사를 정월 15일로 확정한 것이다.

수륙재를 행하는 절차는 알 수 없으나 태조 6년 정월 진관사(津寬寺)에 시설된 것을 보면 상·중·하의 단을 설치하고 상단은 제불(諸佛), 중단은 승(僧), 하단에는 선왕(先王)·선후(先後)의 영위(靈位)를 모시고 재를 지낸다. 이 의식을 올리는 목적은 죽은 뒤에 윤회의 보를 받아 고해에 떠돌아다니는 영혼들을 불보살(佛菩薩)의 큰 자비에 의지하여 성불케 하는 데에 있다. 항상 수륙재를 베풀면 반승이 따르며, 또한 이러한 의식을 드림으로써 조종(祖宗)의 명복을 비는 동시에 무주고혼을 위령하는 국가안일을 위한 행사이다. 그리하여 진관사가 상설 수륙도장으로서 국행(國行)수륙을 도맡는 수륙사(水陸社)로 되었다. 이 수륙의식은 다시 국행추천의식(國行追薦儀式)과 병행하게 되어 칠재(七齋)행사가 성행하였다.

범음집에 보이는 불교의식[편집]

梵音集-佛敎儀式

1713년 4월 묘향산 보현사(普賢寺)에서 간행된 <신간산보범음집(新刊刪補梵音集)> 상하 2권에 의하면 불교의식의 명칭과 그 행행이 보인다. 보청의식(普請儀式)·회주증사인영의(會主證師引迎儀)·대소단법격금규식(大小壇法擊金規式)·습례의(習禮儀)·분수예식(焚修禮式)·법사이운식(法師移運式)·영산단법(靈山壇法)·중례단법(中禮壇法)·지반단법(志盤壇法)·결수단법(結手壇法)·예수단법(預修壇法)·풍백우사단법(風伯雨師壇法)·당산국사(堂山國師)·가람위(迦藍位)·풍우단소(風雨壇疏)·성황소(성황소(城隍疏)·가람소(伽藍疏)·풍우첩(風雨牒)·성황첩(城隍牒)·가람첩(伽藍牒)·제산소(諸山疏)·종실소(宗室疏)·고사소(庫司疏)·조사참문(祖師懺文) 등으로 의례절차를 설명하였으며, 하권에도 삼보단법(삼보단법)·제산단법(제산단법)·종실위단법(종실위단법)·성도재의(成道齋儀)·점안단법(點眼壇法)·신불이영의(新佛移迎儀)·별축상의문(別祝上儀文)·상축상의문(常祝上儀文)·추천재의문(追薦齋儀文)·사리이영문(舍利移迎文)·괘불의식(掛佛儀式)·시주봉영의(施主逢迎儀)·수계의식(受戒儀式)·조전이헌의(造錢移獻儀)·가사회향문(袈裟回向文)·대종사예참문(大宗師禮參文)·사명일청혼식(四名日請魂式)·이왕작법(十王作法)·전시식의문(奠施食儀文)·운수단고혼방(雲水壇孤魂枋) 등이 있다.

석문의범에 의한 설교의식[편집]

釋門儀範-說敎儀式

<석문의범>은 1949년에 발간된 불교의식에 필요한 의범책이다. 이 속에 설교의식의 절차를 소개하고 있는데 이것은 적산촌 법화원에서 행한 것과 조금 차이가 있다.

(1) 삼정례(三頂禮) 아금지차일주향(我今持此 一 炷香) ―― 한 승(僧)이 선창하면 대중이 동음 화창하면서 반배한다. 다음 지심귀명례시방상주일체불타야중 (志心歸命禮十方常住一切佛陀耶衆)은 한 승이 선창하고, 5체투지(五體投地)하면 대중이 화창하고 5체투지한다.

지심귀명례시방상주일체달마야중, 지심귀명례시방상주일체달마야중, 시방상주 운운할 때마다 5체투지한다. 즉, 삼정례를 하여 불법승삼보께 제의하는 예를 바친다.

(2) 찬불게(讚佛偈) 천상천하 운운 ―― 천상천하무여불(天上天下無如佛)에서 시작하여 일체유무여불자( 一 切無有如佛者)로 끝나는 4구게(四句偈). 한 승이 선창하면 대중이 화창한다. 이것은 부처님을 예찬하는 최상의 예식이다.

(3) 송주(誦呪) 신묘장구 운운 ―― 신묘장구대다라니(神妙章句大茶羅尼) 천수경, 대비주(大悲呪) 등으로 불리는 것을 두 손을 다소곳이 합장하고 목탁에 맞추어 왼다.

(4) 12불(十二佛) 참제업장보승장불(懺除業障寶勝藏佛) 운운 등으로 열두 부처님을 대중과 함께 창불한다.

(5) 10악참회(十惡懺悔) ―― 살생중죄금일참회(殺生重罪今日懺悔)에서 치암중죄금일참회(癡暗重罪今日懺悔)에 이르기까지 열 가지 근본적인 악을 참회한다.

(6) 개경게(開經偈) 무상심심(無上甚深) 운운으로 대중과 화창한다.

(7) 거양(擧揚) ―― 법회를 열게 된 연유를 제불보살께 알리고 이 법회로 인하여 선망사존부모(先亡師尊父母)뿐만 아니라 일체함령(一切含靈)이 모두 이고득락(離苦得樂)하도록 법주가 창하는 것이다.

(8) 입정(入定) ―― 혼란하고 사특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하여 약 5분 동안 삼매에 들도록 대중이 모두 입정을 한다. 죽비 소리에 맞추어 입정하였다가 출정죽비가 울리면 합장하고 입정을 거둔다.

(9) 설교(說敎) ―― 법사 스님이 시처에 알맞은 설법을 대중에게 한다.

(10) 10념정근(十念精勤) ―― 나무삼계도사사생자부시아본사석가모니불(南無三界導師四生慈父是我本師釋迦牟尼佛)을 대중과 함께 세 번 창하면서 세 번 절한다.

계속하여 천상천하무여불이라 승이 선창하면 대중은 석가모니불 운운으로 화창하여 원이차공덕개공성불도(願以此功德皆共成佛道)로 끝난다.

(11) 폐식(閉式) ―― 이렇게 하여 1일 법회를 마치는데 이와 같은 것이 지금도 준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