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종교·철학/한국의 종교/한국의 유교/한국의 유교〔서설〕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韓國-儒敎〔序說〕 유(儒)란 원래 학문하는 사람의 일반적인 칭호였는데, 중국의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학자들이 서로 학설을 주장하며 자기 선전을 하게 될 때에 공자(孔子)를 수령으로 하는 일단의 사람들이 공자의 가르침을 받고, 그의 사상과 학설을 선전하며, 그것을 실천하게 되면서부터 '유'란 말은 특히 공자를 중심으로 한 학파의 명칭으로 변하였다. 이 유학자들은 진시황(秦始皇) 때에 그의 폭력정치에 대항하다가 마침내 '분서갱유(焚書坑儒)'의 참화를 당하였으나,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에는 동중서(董仲舒)의 헌책(獻策)에 의하여 '백가'를 물리치고 공자를 추존하는 정책을 쓰게 됨에 따라 국가에 등용되기 시작하였다. 그로부터 유학은 유교가 되어 국가의 모든 정치·교화의 기준이 되었다. 유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시기는 '기자조선'·'위만조선'이라고 불리는 고조선시대까지 소급해 올라갈 수도 있겠으나 공적(公的) 기록이 없으므로 말할 수 없고, 기록에 나타난 것으로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에 태학을 세워 국자(國子)를 가르쳤다 하니 지금으로부터 1600년 전이요, 유교가 국가에 봉사를 하기 시작한 때(BC 136년에 漢무제가 五經博士를 두었음)로부터 시작하여 500년이 지난 뒤였다. 백제는 국학을 세운 기록은 없으나, 고이왕(古爾王) 52년에 왕인(王仁)이 논어와 천자문을 일본에 전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백제에도 유교가 일찍 들어왔던 것 같고, 신라는 훨씬 뒤 신문왕(神文王) 2년(682) 국학을 세웠다. 특히 신라는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 같은 유교 경전에 의한 인재양성의 교육제도를 두어 유교의 국가적 봉사를 장려하였으며, 삼국통일의 주동 역할을 했던 화랑도의 교양에 있어서도 유교적인 것이 절대 우세하였음은 원광대사의 세속오계(世俗五戒)의 내용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신라·고려는 종교면에서는 불교를 숭상하였지만 정치면에서는 유교의 원리를 따랐다. 조선(朝鮮) 시대에 들어오면서부터는 정치뿐 아니라 사상면에 있어서도 유교가 절대 우세한 지위를 차지하여 조선 500년의 역사는 유교정치의 역사이며 유교사상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교가 우리나라의 국가발전과 문화향상에 이바지한 공헌으로서는 흔히 다음 몇 가지가 지적되고 있다. 첫째, 정치제도면에 있서 삼국시대에는 부족연맹국가를 봉건군주국가로 체제전환을 시키는 데 있어서 이론적 뒷받침을 하였고, 고려를 거쳐 조선에 이르러는 한층 강력한 중앙집권의 군주국가·관료국가 체제를 완성시켰으며, 과거제도를 채택하여 인재 등용의 기준을 삼으면서부터 더욱 전형적인 유교국가의 형태를 갖추어 국가와 국민을 유교화시키는 데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둘째, 사상면에 있어서 유교는 국민의 윤리·도덕의식을 함양·계발함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이른바 오륜(五倫)은 가정생활·사회생활·국가생활에 있어서 기본 윤리가 되었다. 충(忠)·효(孝)·절(節)·의(義)의 사상은 널리 국민 일반에게 보편화되어 가정과 국가를 유지해 가는 정신적 지주(支柱)였으며, 예의·염치를 존중하고 '군자'·'소인'의 구별을 중히 여기어 군자 되기를 힘쓰고 소인됨을 부끄러워하는 윤리의식은 드디어 외국인으로부터 '동방예의지국'이란 평을 받게까지 되었다. 셋째, 특히 조선에 있어서의 송학(宋學), 그중에서도 정주학(程朱學)들이 정치를 담당하고 부패·부정의 세력들과 싸우다가 도리어 부정세력에 희생되는 이른바 사화(士禍)도 종종 생겼으나, 그들이 남긴 도의정신은 역사상 영원히 빛나고 있다. 비록 정치에는 실패하였지만 그들이 보여준 정의와 진리를 위한 불굴의 정신은 드디어 사림(士林)을 통하여 서원(書院)의 발생을 보게 되었다. 뒷날 서원은 여러 가지 폐단을 내었지만, 서원의 당초 창설은 원래 도의를 위하여 순신(殉身)한 선현(先賢) 또는 그 유공자를 추모하기 위한 것이었다. 넷째, 조선의 사화와 당쟁은 유학자들을 산림(山林) 속으로 몰아넣어 현실정치와는 거리를 두는 이론유학(理論儒學)을 발전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른바 심성(心性)·이기(理氣)의 토론,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의 변론 같은 것은 중국의 성리학(性理學)을 능가할 정도였고, 그 영향은 일본에까지 파급되어 일본에 퇴계학파가 생길 정도였다. 한편 임진왜란 이후로는 국내 정세의 변화에 따라 유학이 자기반성을 하기 시작하여 철학, 형이상학적인 이론유학으로부터 현실의 정치·경제·사회문제로 관심을 돌리면서 드디어 새로운 경향의 유학을 발생시켰으니 이른바 실학(實學)이 그것이다. 유학은 원래 내외(內外) 양면이 있다. 수기(修己)와 정덕(正德)은 내적(內的)인 면이요 치인(治人)·이용후생(利用厚生)은 외적인 면이다. 임진왜란 이전의 성리학은 '수기'·'정덕'면의 이론과 실천에 치중했고 그 후의 실학은 '치인'·'이용후생'면의 이론 (그 경륜과 실행의 구체적 방법의 제시)에 힘썼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역사·지리와 문물 제도에 관한 검토·비판이 이루어지면서 유학은 한층 더 한국화·토착화된 유학으로 발전하였고, 청국(淸國)을 통한 서구 문물의 수입에 따라 '북학(北學)'·'서학(西學)'에까지 관심을 넓히게 되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유교는 한국의 역사발전에 많은 폐단도 드러냈다. 그 중요한 것으로는, (1) 너무 예의에 집착된 결과로서 관혼상제의 '번문욕례(繁文縟禮)'가 심하였고 따라서 형식적인 것에 구애되고 체면차리기에 급급하여 내심의 성실성을 잃어버리는 폐단이 생겼다. (2) '사·농·공·상'이라 하여 '사(士)'의 신분을 지나치게 강조한 결과 '반(班)·상(常)'의 구별이 생겨 소위 양반계급은 하나의 특권계급으로서 상민을 천시하며 노력을 착취하여 국민간의 적대의식을 조장하고 노동을 싫어하며 학문을 하나의 행세거리로 삼으면서 유교의 이름을 팔아 국민을 기만하는 무리들이 많았다. (3) 도학이 인간의 덕성 함양에 지나치게 치중한 결과 소위 "덕은 근본이요 재물은 말단이다(德者本也 財者末也)"라는 관념이 '사(士)' 계급에서 굳어져 물질적인 생산산업, 이익을 도모하는 상공업 같은 것을 천시하고, 그런 기술도 배우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농업 이외의 생업, 즉 상공업이 발달할 수 없었고 과학기술도 발전시킬 수 없었다. (4) 유교 경전을 존중함에 따라 그것도 습득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한문(漢文) 학습에 지나치게 몰두한 결과 자기의 문자('한글') 사용을 등한히 하여 민족적 문학·예술의 발전을 지연시켰고, 경전의 교훈을 무조건 맹목적으로 고수하려는 행세 위주의 '양반 유학자'들이 증가되어 감에 따라 시(時)와 세(勢)를 가리지 못하고 시중(時中)을 맞추지 못하는 보수·완고의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이 유교의 특유한 성격처럼 되었다. 유교에는 영원불변의 진리를 내포한 본질면이 있고 그것을 응용함에 있어서 시대와 사회에 따라 생기는 말단적인 폐단도 있다. 한국의 유교는 그 본질면의 우수성을 잘 드러내어 한국의 문화를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린 것은 사실이지만 반면에 진짜 유학자가 아닌 미숙한 유학자, 가짜 유학자, 행세 위주의 유학자로 인한 많은 폐단도 빚어냈다. 이 폐단을 떨어 버리고 유교의 참정신을 다시 부흥시키는 것이 오늘날 공리주의 사상, 물질주의 문화의 폐단을 시정하는 효과적인 방법의 하나가 될 것이다. <李 相 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