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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학의 발전[편집]

生物學-發展

근대 생물학의 발전사(發展史)는 고대 및 중세기 생물학의 개념적인 부분을 부정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서 표현된 고대의 생물학은 높은 수준에 달해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스로 500종 이상의 동물을 분류하여 500종류의 동물을 해부하고, 또 선인(先人)의 지식을 총괄하여 『동물지』 『동물의 발생에 대하여』 『동물의 부분에 대하여』를 썼다.

그것은 동물의 형태·생태, 닭의 발생, 해부적 소견에 관한 풍부한 지식을 담고 있다. 그러나 그는 전 자연계를 질료(소재)가 목적으로서의 형상을 실현하는 발전과정(엔테레케이어), 합목적적(合目的的)으로 질서가 주어진 통일체로 하고, 합목적적인 생기론적(生氣論的) 생명관으로 보았다. 이 생명의 합목적성은, 19세기 다윈의 진화론에 의하여 처음으로 과학적으로 해석되게 된다. 그러나 생기론 자체는 라이프니츠에서, 볼프(K. F. Wolff, 1733-1794), 뮐러(J. P. M

ller, 1801-1858)의 생기론, 드리슈(H. A. E. Driesch, 1867-1941)의 신생기론, 아돌프 마이어(A. Mayer, 1866-1950)의 전체론(全體論)으로 계승되어 갔다.

로마 시대의 갈레노스(K.Galenos)는 위대한 의학자였으나, 인간의 해부가 허락되지 않아 원숭이 등의 해부 소견을 인간에게 적용시켰기 때문에 인간에 대해서의 해부학상의 기술(記術)에 많은 과오가 있었다. 이 과오는 16세기가 되어 인간과 동물을 비교 해부한 베살리우스에 의하여 지적된다. 또 갈레노스는 혈액의 움직임을 바닷물의 간만과 같이 해석하여 그것을 정기(精氣:Pneuma)와 관련짓고, 심장의 좌우 양실간의 벽에 작은 구멍이 있다고 했다. 이와 같은 견해는 그의 정기설과 함께 17세기 하비의 혈액 순환론에 의하여 부정되었다.

중세에는 주로 아라비아인에 의하여 과학 연구가 이루어지고 그리스 과학이 동화되었으나, 생물학·의학의 분야에서도 갈레노스의 이론이 계승되었다.

1543년, 코페르니쿠스의 『천구의 회전에 대하여』와 베살리우스의 『인체의 구조에 대하여』가 출판되어 과학의 혁명이 개시되고, 갈릴레이·하비 등에 의하여 다시 연구되어 이 속에서 생물학의 근대화도 이루어지게 되었다.

하비의 혈액순환론의 확립은 생물학을 갈렐노스 등의 그 때까지의 권위로부터 해방시켜 실험과학화했으나, 하비의 인과론적·기계론적 방법의 성과는, 한편에서는 생물이 기계라는 사상을 낳게 하는 제일보이기도 했다. 각 시대의 사람들은, 생물을 때로는 시계에, 혹은 열기관(熱機關)의 자동 제어장치에 비유하게 된다. 그 비유에서는 획기적인 성과는 얻어지지 못하지만, 생물에도 인과성이 적용된다는 사상은 생물학 발전상 적극적인 구실을 다해 갔다.

17세기에는 현미경이 쓰이게 되어 생물의 새로운 분야가 열리고, 식물의 구조, 동물의 정자나 난자, 미생물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에 의하여 전성설(前成說)이 논의되고, 생물의 자연발생이 또다시 문제되게 되었다.

미소한 생물에 대한 지식과 동시에 항해·탐험이 성해짐으로써 새로이 많은 동식물에 대한 지식이 얻어졌으며, 씨앗에 대한 개념이 명확화하고 분류 체계가 확립되어 갔다. 동시에 형태에 관한 연구도 활발해져서, 진화에 관한 논의도 활발해지게 되었다.

18세기 말에 화학은 라부아지에 등에 의하여 근대화하고, 생물학에도 생리 화학적 연구가 도입되게 되었다. 이것은 19세기를 거쳐 20세기의 생화학 발전의 기초가 되고 있다.

19세기 초 '생물학'이란 말이 프랑스의 라마르크와 독일의 트레비라누스(G. R. Treviranus, 1776-1837)에 의하여 독립적으로 만들어졌다.

이것은 동식물의 기본적인 단위가 인식되고 생물에 대한 일반적인 분석이 이루어지는 기반이 성립되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세포학은 세포 내 구조·유사 분열을 밝혔으나, 한편으로는 세포는 독자의 생물이라는 생각도 일어나고 있었다. 생리학은 효소연구에 실마리를 두고 생명 현상을 물리 화학적으로 해석하는 가능성을 서서히 열어서, 드디어 19세기 후반, 생명에서의 단백질의 중요성이 인식되고, 엥겔스의 "생명이란 단백질의 존재 양식이다"로 정식화하게 되었다.

생명의 역사성의 인식도 19세기의 생물학의 위대한 달성이었다. 분류학·지질학의 지식, 탐험에 의한 새로운 자료, 농업 기술의 지식의 정리에서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설이 확립되고, 생물의 합목적성의 설명을 생명력에서 구하지 않고 그것을 기계적인 인과성으로서 파악하는 일을 가능케 하였다.

19세기 말, 실험 발생학이 일어나고, 20세기가 되어 미세한 기술, 생화학적 방법에 의하여 성과를 올렸으나, 여기서도 전성설(前成說)과 후성설(後成說)의 논쟁이 일어나고, 신생기론도 나타났다.

20세기가 되어, 유전학은 급속히 발전하여 유전 현상을 세포 내의 염색체와 결부시켜 이해하게 되고, 다시 DNA(디옥시리보핵산:deoxyribonucleic acid) 분자의 현상으로서 이해되게 되었다.

현대 생물학상에서는 분자생물학의 발전이 눈부셔서 생명 현상을 분자라고 하는 레벨(계층)에서 해석하려는 시도는 에너지 대사(代謝)·유전 현상·뇌의 기능 등에 대해서까지 방대한 성과를 올리고 있다.

또한 위너에 의하여 열린 사이버네틱에 의해서 대뇌 기능·조절작용 등 생리학적 현상의 탐구가 행해지고 있다.

자연의 계층을 생물 개체·조직·세포 분자로 내려감과 동시에 거꾸로 개체군(個體群:생물 개체의 집단)으로부터 생물 사회로 올라가서, 그 상호작용을 문제로 하여 종합적으로 생물계를 파악하는 생태학도 20세기에 발전한 생물학의 분야이다.

인류의 진화에 대한 증거가 모아지고, 인류의 조상에 대한 개요가 알려진 것도 19세기 이후의 일이다. 사회학·심리학·의학 등과 함께 진화해 온 생물의 일종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연구도 더욱더 활발해지고 있다.

근대 생물학의 시초[편집]

近代生物學-始初

근대의 생물학은 기재적인 박물학에서 실험적 방법에 의한 생물학으로의 탈피에 의해서 생겨났다.

그것은 먼저, 1628년의 하비의 저서에 나타나 있다. 그는 각종 동물의 생체 해부에 의하여 심장의 운동을 분석하고, 실험·관찰에 의해 정맥판(瓣)의 기능을 나타내고, 다시 계산에 의하여 혈액의 양을 추정하여 혈액이 대순환과 소순환을 하고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러한 발견은 그 사실과 함께 생물학 사상(思想) 위에서는 생물학이 실험과학이 되기 위한 길을 트고, 기계론적 생물학에의 길을 만들었다는 의미에서 커다란 일보였다.

베이컨, 갈릴레이, 하비를 거쳐 17세기 중엽에는 전반적으로 과학 사상의 근대화의 성과가 나타나 있었다. 데카르트는 물리적 세계에 관한 개념을 공간과 운동으로 돌리려 하고, 또 독자적 역학을 기초로 하여 생명의 문제에 기계적 인과를 적용하여 기계적 생물학을 수립하였다. 이것은 볼레리의 『동물의 운동에 대하여』에 구체화되었다.

얀센, 갈릴레이의 업적에 힘입은 복합 현미경에 의하여 관찰자의 시야가 넓어진 것은 17세기 중엽이다. 말피기, 레벤후크, 로버트 훅, 네헤미어 그루(N. Grew, 1641-1713)에 의하여 현미경적 생물학이 전개되었다. 말피기는 현미해부(顯微解剖)의 창시자로서, 모세혈관·곤충의 기관계(氣管系)를 발견하고 식물의 구조도 조사했다.

레벤후크는 독학자였으나 자기 손으로 조립한 현미경으로 물이나 침출액(浸出液), 또는 기관의 내용물 등을 상세히 관찰하여, 원생동물·세균류·정자(精子) 등 미소한 생물의 세계를 발견하여 충실히 기록했다. 로버트 훅은 코르크의 절편(切片)을 관찰, 죽은 세포의 세포막에 '세포'란 이름을 붙이고 『마이크로 그라피아』(1667)에 그것을 기록했다. 그루는 말피기와 마찬가지로, 식물 해부학을 개척했다.

기계론적인 사상 위에 실험과 관찰에 입각하여, 새로운 생물학이 전개되어 갔다.

생물학의 실험적 연구의 시초[편집]

生物學-實驗的硏究-始初 혈액의 순환을 교묘한 실험과 치밀한 관측으로 증명한 하비는 발생학상에서도 개척자이며, 닭의 발생을 기재하여 알 속에 이미 닭의 소형체가 들어 있다고 하는 '전성(前成)'의 사고에 반대하고 '후성'의 개념을 제출했다.

사슴을 교미 후 일정 기간마다 죽여 해부했는데, 그 자궁 속에 초기의 태아를 발견해냈다. 레니엘 드 그라프(R. de Graf, 1641-73)는 하베이의 관찰을 더욱 진척시켜, 그라프 여포(濾泡)를 발견했다. 그러나 전성설은 현미경학자 간에서 생긴, 정자나 난자 속에 성체의 소형체(小形體)가 있다는 주장에 힘입어 존속했다.

생리학상으로는, 소화에 관한 실험적 연구가 18세기에 이르러 행해졌다. 식물의 소화에 대하여 기계적인 파쇄 작용이라는 설, 발효·부패와 같은 현상이란 설이 있었으나, 레오뮈르(R. A. de R

aumur, 1683-1757)는 구멍을 뚫는 금속관에 고기를 넣고 새에게 먹인 다음 고기가 기계적 작용을 받지 않고 용해되는 것을 관찰하고, 또 해면(海綿)으로 위액을 채취하여 고기에 작용시켰다. 스팔란차니(L. Spallanzani, 1729-1799)는 같은 실험을 보다 체계적으로 반복했다.

레오뮈르는 또 재생에 대한 실험, 열에 의한 알의 부화, 곤충에 대한 연구를 했으나 스팔란차니도 재생과 생식에 대한 연구를 했다. 그는 개구리를 재료로 알이 발육하는 조건을 추구하여, 정액이 알에 닿는 것을 방해한다거나 정액을 여과(濾過)하거나 하면 정액의 능력이 소실된다는 것을, 또 깔때기 속에 남은 액체는 수정시킬 능력이 있다는 것을 나타냈다.

그러나 스팔란차니는 이들 실험으로 알은 산란하는 순간부터 하나의 태아이며, 정액의 역할은 다만 그것이 나타내는 조건을 만들 뿐이라고 생각하고, 올바른 정자의 역할에 대한 결론을 이끌어 내지는 못하였다.

18세기 말에, 화학자 라부아지에는 생명현상을 물리화학적 현상으로 환원하여, 새로운 생리학을 개척하였다. 호흡의 구실은 그 때까지 알려지지 않았으나, 라부아지에는 호흡이, 1774년 프리스틀리(J. Priestley, 1733-1840)가 발견한 공기 중의 산소와 유기체 내의 '탄(炭)을 포함하는 부분(유기물)'과의 결합이며 일종의 연소라는 것을 나타내었다. 그는 그 밖에 발한(發汗)·발열(發熱) 현상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박물류·분류학의 연구[편집]

博物學·分類學-硏究

17세기 후반과 18세기의 생물학은 분류학이 커다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신대륙이나 열대 제지방의 답사로 많은 동식물이 새롭게 알려졌다. 발견된 동식물을 분류할 필요에서 17세기에 존 레이(J. Ray, 1628-1705), 투르느포르(J. P. de Tournefor, 1656-1708) 등은 종(種)·속(屬)의 개념을 밝혔다. 18세기가 되어 린네는 『자연의 체계』 『식물의 종(種)』을 저술하여 그 때까지의 노력을 집대성해서, 동식물에서의 속·종의 개념을 정하고 2명명법(二命名法)의 기초를 만들었다.

분류에서의 린네의 영향은 식물원에 반영되어, 파리의 왕립 식물원의 베르나르 드 주쉬(Bernard de Jussieu 1699-1777)는 원내(園內)의 식물을 린네의 체계에 따라 배치했다. 그의 조카 앙트와느 로랑 드 주쉬(Antoine Laurent de Jussieu, 1748-1836)는 린네의 체계를 개변(改變)한 『식물의 제속(諸屬)』(1789)를 저술하여 자연의 분류를 확립했다.

동물의 분류 체계 속에도 린네의 영향은 계승되었다. 뷔퐁은 동물의 해부학적 구조를 비교하여 유사점을 연구하고, 씨앗의 연속성을 주장했다. 라마르크는 신경계에 주목하여, 그 때까지 곤충과 연충으로 2분(二分)되어 있던 린네의

하등동물(무척추동물)을 10강(綱)으로 나누어, 전동물을 14강으로 나누었다. 그는 그것을 체제가 간단한 것에서부터 차례로 늘어놓아, 자연의 질서와 일치하게 만들기에 힘썼다. 비교해부학자인 퀴비에는 동물계를 그 신경계와 순환계에 따라 4문(門)으로 나누었다.

린네는 종(種)을 불변의 것으로 생각했으나, 뷔퐁은 생물이 변화한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라마르크는 자기가 늘어놓은 분류의 계단이, 동물이 단세포 생물에서 인간에 이르기까지 경과한 진화의 서열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종의 개념의 명확화, 분류 체계의 확립은 그 자체로서도 17, 18세기의 생물학상의 커다란 업적이었으나, 19세기의 진화론을 위한 기반을 만들었다는 뜻도 가지고 있었다.

린네[편집]

Carl von Linn

(Carolus Linnaeus)(1707-1778)

스웨덴의 박물학자.

웁살라 근교, 로스폴트의 목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룬트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했으나, 신학교수이자 식물학자인 셀시우스의 소개로 웁살라대학의 식물학자인 루드베크의 조수가 되었다. 1735년, 네덜란드의 허르델위크에서 의학 학위를 땄다. 이 곳에서 식물의 관찰, 분류학상의 문제에 대한 연구에 종사하다가 1738년 귀국, 『자연의 체계』 『식물의 종(種)』을 저술하고, 약 4,000종의 동물, 5,000종의 식물을 다루었다. 속명(屬名) 다음에 종명(種名)형용사를 붙여서 두 말로 된 학명(學名)을 만드는 2명명법(二命名法)을 확립하였다. 그리고 변종에 대한 개념도 제시했다. 투르느폴 밑에서 일하던 바이언의 저작(著作)에서, 수술의 중요성을 알고, 수술의 수(數)로 강(綱)을 나누고 암술의 수로 목(目)을 나누는 암수술 체계를 만들었다. 『자연 분류법 단편』을 초(草)하여 식물 분류에 통일성 있는 원리를 만들려 했으나 미완으로 끝났다. 이것은 베르나르드 주쉬와 그의 조카인 앙트와느에 의해 계승(繼承)되어 완성되었다.

동물의 형태 연구[편집]

動物-形態硏究

식물의 형태 연구에 약간 뒤처져서 18세기 말경부터 동물 형태학 확립의 움직임이 나타났다.

존 헌터(J. Hunter, 1728-1793)는 수백 종의 동물을 해부하여, 해부 박물관을 건설하고, 동물의 형태를 연구하는 한 방법인 비교 해부학에 기여했다. 시인 괴테는 사람과 다른 포유류의 두개골을 비교하여, 사람에게도 간악골(間顎骨)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생틸레르는 형태의 다양성의 배후에 한 가지 공통의 형(型)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고등 척추 동물의 앞다리는 여러 가지 다른 기능에 적응하고 있으나, 앞다리의 뼈의 배열은 동일하다는 것, 사람의 손과 짐승들의 앞다리는 어느 것이나 등뼈에 대하여 같은 위치에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기관 상호의 위치는 일정하다는 원리를 확립하여 비교해부학의 새로운 전개를 유도했다. 이에 대하여 퀴비에는 동물종(動物種)은 고정된 것이며, 동물의 형태는 4개의 기본적인 형으로부터 여러 가지로 수식(修飾)된 것이라 하고, 생틸레르와 논쟁을 했다.

18세기부터 19세기에 걸쳐서 고생물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어, 형태학 연구에 새로운 측면이 가해졌다. 퀴비에는 절멸 포유류·파충류의 불완전한 유해를 이어붙여서 처음꼴로 복원했다. 뒤에 진화론에 반대한 리처드 오언(R.Owen, 1804-1892)은 퀴비에의 비교 해부학·고생물학을 계승했다.

고생물학과 함께 새로이 해양 동물학이 항해·탐험에 의하여 전개되었다. 타히티, 뉴질랜드 등 남양제도를 탐험한 쿡(F. A .Cook, 영국의 항해가, 1728-79)의 항해, 다윈이 탔던 비글호의 항해, 챌린저호의 항해 등이 많은 자료를 가져다 주었다.

비교해부학자, 고생물학자들의 노력은 종 사이의 연관성을 이해하기 위한, 따라서 진화론 건설을 위한 기초(基礎)가 되었다.

뷔퐁[편집]

Georges Louis Leclerc de Buffon(1707-1788)

프랑스의 박물학자.

영국으로 건너갔다가 귀국 후 뉴턴의 저서 등을 번역, 뒤에 파리의 왕립 식물원장이 되었다. 자연 분류를 하고, 자연계의 생물이 차례로 서로 지극히 미소(微小)하고도 연속적인 차이를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후세에 영향을 끼친 그의 저서 『박물지(博物誌)』(44권·1749-1804)에 생물 진화를 시사하는 말이 있다.

생틸레르(에티엔)[편집]

tienne

Geoffroy

Saint-Hilaire(1772-1844)

프랑스의 박물학자.

파리 교외에서 태어났다. 파리의 자연 박물관의 척추동물 교수가 되었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에 종군하여 채집품·표본을 가지고 돌아왔다.

척추동물의 비교해부학적 소견으로 기관(器管) 상호의 위치는 일정하며 동물계 전체에 공통한 단일형이 있다고 하여 4개의 기본형을 생각해 냈으며 퀴비에와 논쟁을 했다. 기형학(奇形學)의 창시자이기도 하며, 실험적으로 기형을 만들 것을 시도하여 진화학·발생학에 영향을 주었다. 그의 기형학은 아들 이시도르에게 계승되었다.

퀴비에[편집]

Georges Leopold Chretien Frederic Dagobert Cuvier (1769-1832)

프랑스의 박물학자.

동부 프랑스 출생. 비교해부학에 흥미를 가지고, 해양동물(海洋動物)을 연구했다. 생틸레르의 인정을 받아 파리의 자연박물관원이 되고, 비교해부학 교수가 되었다. 동물계를 척추동물·연체동물·관절동물·방사동물의 4개로 나누고, 동물종(種)은 4형(型)으로 이루어졌으며 종은 고정된 것이라고 주장, 동물계에 단일한 형이 있으며, 동물 종(種)은 대체로 일선상(一線上)의 진화 계단을 형성한다는 라마르크, 생틸레르의 견해와 대립하였다. 화석 연구도 하여 고생물학의 창시자가 되었다. 천변지이설(天變地異說)을 세워서 지질학상의 암석층의 성인(成因)을 설명하고, 지표의 동물도 대격변(大激變) 때마다 멸망했다고 생각했다.

세포와 조직의 연구[편집]

細胞-組織-硏究

퀴비에 등의 비교해부학은 기관의 비교 연구였으나, 그 기본적인 소재에 대한 비교연구·조직학은 21종류의 조직을 구별하고, 근육이나 신경 등 기관을 특이한 조직과 결합조직 같은 일반적인 조직으로 나눈 비셰에 의하여 그 기초가 주어졌다.

'세포'라는 말은 17세기에 만들어져서 식물 조직의 세포구조도 관찰되고 있었으나, 세포의 내용에 대한 인식은 거의 없었으며, 세포학의 새로운 전개는 19세기가 되어서 나타났다. 오켄(L. Oken, 1779-1851)은 생물체가 점액포(粘液胞)로 이루어졌다고 하고 있었으나, 듀트로셰(R. H. Dutrochet, 1776-1847)에 의하여 세포가 동식물의 구조 단위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1831년 브라운(R. Brown, 1773-1858)은 식물의 표피 세포 속에는 일정한 구조가 있다는 것을 관찰하여, '핵'이라는 말로 그것을 나타내었다.

색지움(色消)렌즈의 현미경이 개량되어 생물 세포의 세부를 살펴볼 수가 있게 되었다. 뒤자르댕(F.Dujardin, 1801-1860)은 아메바의 생체물질에 대해서 연구하고, 여기에 '육양질(肉樣質)'이란 이름을 붙였다. 슐라이덴은 그 때까지의 지식을 '세포설(細胞說)'에 정식화하여, 세포가 모든 식물 구조의 기본적인 살아 있는 단위이고, 모든 식물은 세포의 집합이며, 모든 세포에는 하나의 공통된 발전(형성)원리가 있다고 말했다. 슈반(T. Schwann, 1810-1882)은 이와 같은 견해를 동물계에 적용시켜 세포설을 완성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관찰과 결론을 잘못 내려, 물리적인 결정화의 과정에 비추어서 새로운 세포의 형성을 설명했다. 그들은 인(仁)·세포핵이 먼저 존재하고, 그 주위에 결정 생성처럼 세포가 형성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 후 레마크(1815-1865)는 개구리의 알을 연구하여, 세포는 그 때까지 있던 세포에서 분열해서 형성된다는 것을 발견하였고, 피르호(R. Virchow, 1821-1902)는 또 '모든 세포는 세포로부터'라는 말을 만들었다.

유사 분열에 의하여 세포가 형성되는 현상은, 식물 세포에 관해서는 슈트라스부르거(E. Strasburger, 1844-1912)에 의해, 동물에서는 플레밍(W. Flemming, 1843-1905)에 의하여 관찰되었다. 슈트라스부르거는 핵이 그에 앞서는 핵에서 생겨났다는 것도 알아냈다.

세포학의 진보는 조직학의 진보를 가져왔고 해리슨(R. G. Harrison, 1870-1959)은 도롱뇽의 배(胚)의 신경세포를 단리(單離)하여 배양하는 조직 배양에 대한 기술을 개척하였으며, 발생학 연구에 응용하여 조직학·발생학 연구에 공헌했다.

슈반[편집]

Theodor Schwann(1810-1882)

독일의 생리학자. 1836년 소화과정을 연구하다가 위(胃)에서 소화와 관계있는 물질을 발견하고 펩신이라고 이름지었으며, 살아 있는 조직에서 일어나는 화학적 변화를 물질대사라고 했다. 슈반은 슐라이덴이 식물의 세포설을 주장한 다음해인 1839년에 동물도 식물처럼 세포로 되어 있다는 동물에 관한 세포설을 주장했다. 또한 식도 상부의 가로무늬근을 발견했으며, 신경섬유인 축색돌기를 싸고 있는 수초를 발견하기도 했다.

슐체[편집]

Max Johann Sigismund Schultze(1825-1874)

독일의 동물학자이자 세포학자. 슐라이덴과 슈반이 내놓은 세포설을 더욱 발전시켰다. 그는 1861년 세포를 핵이 있는 원형질 덩어리로 규정하고, 핵과 원형질이 식물세포와 동물세포에 모두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눈의 망막, 신경기관의 말단 등에 대해서 많은 연구를 했다.

슐라이덴[편집]

Matthias Jakob Schleiden(1804-1881)

독일의 식물학자.

함부르크에서 태어났다. 법률과 의학을 공부하고 예나대학의 식물학 교수가 되었다. 식물의 발생 과정을 연구하여 세포설(細胞說)을 주장했다. 이것은 독일의 동물 생리학자 테오도르 슈반에 의해 동물에도 확장되었다. 슐라이덴, 슈반 두 사람 다 세포의 증식에 대해서는 결정 형성과 유사(類似) 현상이라는 그릇된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슈트라스부르거[편집]

Eduard Strasburger(1844-1912)

독일의 세포학자.

본, 예나에서 공부한 후 예나대학, 그리고 뒤에 본대학 교수가 되었다. 유관속(維管束) 식물의 생식 기관의 해부학적 연구를 하여, 나자(裸子) 식물의 배(胚)발생에서의 세포와 핵의 분열, 그리고 염색체의 종열(縱裂)을 발견하고, 식물에서의 유사 핵분열의 과정을 해명했다. W. 플레밍은 동물 세포로 핵의 분열을 관찰하여 슈트라스부르거의 설(說)을 확장했다. 그들의 발견은 세포학에 공헌했을 뿐만 아니라 유전학에 세포학적 기초를 만들어 주는 길을 터 놓았다.

동식물의 생리학[편집]

動植物-生理學

생물학의 각 분야의 진보는 생물체에는 무엇인가 특유의 생명력과 같은 것이 있다는 관념을 서서히 제거해 나가는 방향으로 생물학을 진전시켜 나가기는 했으나, 19세기의 생물학자 가운데서도 요하네스 뮐러(J. M

ller, 1801-1858)와 같은 생리학의 개척자이면서 생기론자(生氣論者)인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확고한 실험적 방법을 확립하고, 생리학의 전 분야에 걸쳐서 업적을 올렸으며, 일반 생리학의 창시자라 일컬어지는 사람에 베르나르(C. Bernard, 1813-1878)가 있다. 그는 간장의 글리코겐 생성과 당(糖) 대사(代謝) 기능의 발견, 소화액의 기능·교감 신경의 작용·독물의 작용에 대해 연구했으며 다시 저서인 『실험의학 서설』(1865)에서 생리학에서의 실험 방법을 제시하여 의학으로부터 생리학을 독립시킴과 동시에 생물 현상도 물리·화학과 마찬가지로 법칙에 따를 것을 강조하였으며, 생리학에서 생기론을 구축했다.

19세기 초에 소쉬르(N. Saussure, 1767-1845)는 『식물의 화학적 연구』(1804)에 의하여 광합성에 의한 식물체의 증량과 또 생겨난 산소가스량이 소비된 탄산가스량 이상이 된다는 것에서, 이 증가된 분이 물에서 오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식물 생리학의 정량적 연구의 테이프를 끊었다. 리비히와 같은 이들은 질소에 주목하여, 식물은 이것을 공중에서가 아니라 땅 속에서 흡수한다는 것을 알아 내었다.

19세기 초에 키르히호프는 맥아(麥芽)에 의해 녹말이 가수분해(加水分解)된다는 것을 관찰하고 있었으나, 1832년 페이언과 페루소는 맥아 추출액(抽出液)에서 이와 같은 작용을 하는 물질을 분리하여 디아스타제라고 명명하고, 효소 연구의 길을 텄다. 1897년 부흐너(E. Buchner, 1860-1917)는 세포를 가지지 않은 효모 여액(濾液)을 얻어, 이것이 알코올 발효를 일으킨다는 것을 증명하여, 발효 화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생명의 자연발생 문제[편집]

生命-自然發生問題

척추 동물에 관한 자연 발생설은 17세기에는 부정되고 있었으나 썩은 고기에 생기는 구더기는 자연 발생하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었다. 레디는 이것을 실험적으로 부정했다. 그러나 다음에 현미경에 의해서 발견된 미생물이 자연발생하는 것으로서 문제시되었다.

뷔퐁, 니담은 뜨거운 수프 그릇을 공중 아포(芽胞)가 들어가지 않게 봉해 두어도 며칠 뒤 수프는 미생물로 충만되어 있음을 보았다. 스팔란차니는 같은 실험으로 미생물이 생기지 않은 것을 관찰하고 자연 발생을 부정했다. 그러나 이것은 끓인 결과로 산소가 없어진 때문이라는 해석도 가능하여 명확한 해답은 얻을 수가 없었다.

파스퇴르는 새로운 자연 발생론자인 푸셰(1800-1872)에 대하여, 배양액을 넣은 시험관에 산기슭, 표고 850m, 2,000m의 공기를 넣고 미생물 발생의 비율을 비교하는 실험을 하였고, 훅은 경부(頸部)를 잡아 늘여서 생물이 속에 닿을 수 없게 만든 플라스크를 사용한 실험을 실시하여 액 속에 미생물이 들어가는 것을 완전히 피한다면 미생물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어, 자연발생설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와 같은 실험은 멸균 기술·미생물학·생화학의 발전에도 기여했다.

진화론의 확립[편집]

進化論-確立

생물 진화에 대한 사상은 그리스 시대부터 있었으나, 생물 진화를 실증하는 사실은 17세기 이후의 생물학의 진보에 의해서 집적되었다.

에라스무스 다윈(Erasmus Darwin, 1731-1802)은 『주노미어(Zoonomia)』(1794-96)에 진화에 대한 생각을 발표했으나 라마르크는 생물 진화를 처음으로 체계적인 형태로 표현했다. 그는 10강(綱)으로 나눈 무척추 동물을 1열로 늘어놓고, 그 뒤에 계속 어류·파충류·조류·포유류의 4강(綱)을 늘어놓아 동물계의 단계를 나타내고, 이것이 동물이 진화해 온 순서를 시사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동물 철학』 『무척추 동물지』 가운데서 그는 진화에 대한 사상을 제시했다. 그는 전진적인 발달이 바로 진화의 주요인이라 생각하고, 거기에 환경 조건이나 새로 획득한 습성이 영향을 주게 되어 다양한 체제나 환경에 적응한 형태가 나오게 된 것으로 생각했으며, 또한 새로운 요구가 새로운 운동을 불러 일으켜서, 새로운 기관을 형성하는 것으로 여겼다.

퀴비에는 라마르크에 반대하여 종(種)이 고정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라마르크 이후, 진화 사상은 퀴비에의 영향으로 자취를 감추고 있었으나, 1859년 찰스 다윈은 『종(種)의 기원』을 저술하여 진화론을 전혀 새로운 기초 위에 세워 놓았다. 다윈은 생존을 위한 투쟁이, 보다 편리한 변이(變異)를 보존하고 불편한 것을 없앤다고 생각하고, 많은 수의 후손들 가운데서 생존에 유리한 개체가 살아 남는다는 이른바 선택이 몇 대에 걸쳐 계속됨으로써 이윽고 새로운 종(種)이 형성된다고 생각했다.

말레이 군도를 여행하고 있던 윌리스(A. R. Wallace, 1823-1913)는 다윈과는 따로 자연 선택설에 도달하고, 그것을 기술한 논문을 라이엘(영국의 지질학자)에게 전해 달라는 요청을 곁들여 다윈에게 보냈다. 라이엘, 후커(J. D. Hooker, 1817-1911)의 배려로 1858년의 린네학회에서 다윈과 윌리스의 학설이 아울러 발표되었다.

다윈이 풍부한 실증적 사실에 기초를 두고 진화론을 전개시켰다는 것과, 자본주의의 발전기이자 사회의 구조, 사람들의 의식이 변화하고 있었던 일들이 진화론을 받아들이기 쉽게 했다. 『종(種)의 기원』은 수많은 생물학자들로부터 지지를 받았으나, 한편에서는 비교 해부학자 리처드 오언(Richard Owen, 1804-1892) 같은 사람들의 원숭이와 사람과의 근연(近緣)을 부정하는 비난도 받았다.

그러나 진화론은 헤켈, 헉슬리, 치밀랴제프(K. A. Timiliazev, 1843-1920)에 의하여 약 10년 동안 보급되었다.

라마르크[편집]

Jean Baptiste Pierre Antoine de Monet, Chevalier de Lamarck(1744-1829)

프랑스의 박물학자·진화론자.

북프랑스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의학·식물학을 공부했다. 왕립 식물원에 식물학자로서의 지위를 얻었으나 프랑스 혁명 후, 왕립 식물원을 개혁하여 설립한 자연 박물관의 무척추동물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무척추 동물'이란 말을 만들고, 그것을 10강(綱)으로 나누어, 척추동물의 4강을 보태서 동물을 14강으로 하여 체제가 간단한 것에서부터 차례로 늘어놓는다. 『동물 철학』(1809) 『무척추 동물지』(1815-1822)를 집필하여 진화론을 체계적으로 서술했다.

"모든 생물은 오랜 동안에 자연이 만든 것이다. 자연은 생물의 최초의 소묘형(素描型)을 형성하지만, 그들 생물은 무생물에서 발생했을 때부터 체제를 복잡화하여 완성시키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 능력에 의하여 생물은 여러 기관을 발전시키지만, 실제의 진화 과정은 환경 조건의 영향이나 그 변화에 따르는 생물의 요구와 습성의 변화에 의해서도 규정되어, 환경에 적응한 다양한 형태를 획득했다. 그 때 기관의 사용·불사용은 어느 기관을 더욱더 발전시키고 다른 기관을 퇴화·소멸시켜 갔다. 이리하여 획득 형질은 유전되어 생물은 진화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라마르크의 설은 같은 시대에는 퀴비에의 비판 등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그 후에도 오랜 동안 주목되지 못하였으나,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네오라마르키즘으로서 다시 나타났다.

다윈[편집]

Charles Robert Darwin(1809-1882)

영국의 박물학자·진화론자.

슐스베리에서 태어났으며 에라스무스 다윈의 손자. 에든버러대학 의학부에 입학했으나 중도 퇴학하고,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재학중에 박물학에 흥미를 갖게 되어, 졸업 후 해군의 측량선인 비글호 박물학자로서 승선(1831-1836)하여 남아메리카 대륙, 오스트레일리아, 태평양에 있는 여러 섬들을 두루 돌아다녔다. 그 길에 특히 갈라파고스 제도에서의 자연관찰 및 항행중에 읽은 라이엘(C. Lyell, 영국 지질학자, 1797-1875)의 『지질학 원리』(1830-1833)에 의해서 진화 사상을 품게 되었다.

귀국 후, 지질학·동식물학의 연구에 종사하면서 진화를 실증할 만한 사실을 찾다가, 축산업·농업에서의 품종 개량 방법(유용하다고 판정된 성질을 보존·발달시키기 위하여 종축(種畜)·종자를 인위적으로 선택한다)에서 그것을 발견하였으며, 맬서스(T. R. Malthus, 영국 경제학자, 1766-1834)의 『인구론』(1798)을 읽은 일이 있는 다윈은 자연 속에서의 진화의 요인으로서, 생존을 위한 투쟁에 의한 자연 선택을 취했다.

한편, 1858년 말레이군도를 여행하고 있던 윌리스로부터 자연 선택에 대한 생각에 기반을 둔 종(種)의 기원에 관한 논문이 보내지고, 라이엘, 후커의 배려로 7월, 런던의 린네 학회 석상에서 다윈과 윌리스의 두 논문이 동시에 발표되었다. 다윈의 진화론은 전혀 새로운 생명관을 가져왔다.

후커[편집]

Sir Joseph Dalton Hooker(1817-1911)

영국의 식물학자. 후커는 남극지방, 히말라야의 시킴지방, 뉴질랜드, 영국, 인도, 모로코 등을 탐험하면서 그 곳의 식물상을 정리해 출판했다. 탐사 여행 중에 새로운 식물종을 발견했으며, 벤담과 함께 『식물의 속』을 출판해 식물지리학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그는 다윈의 진화론을 지지했으며 식물의 지리적 분포에 대한 설명으로서 종의 가변성(可變性)을 주장했다.

헉슬리[편집]

Thomas Henry Huxley(1825-1895)

영국의 동물학자·강연가·작가. 어릴 때 기계 기사가 되기를 원했지만, 의학을 배워 해군 병원에서 일하였다. 동북부 해상의 탐험과 측량 항해선인 래틀스네이크호의 의사로 4년 동안 항해를 하였다. 그동안 바다 동물에 흥미를 느껴, 1854년 「대양산의 히드로 충류」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 무렵 다윈의 학설에 영향을 받은 그의 논문은 많은 공격을 받았으나, 그로 인하여 왕립 광산 학교의 교수·런던대학의 시험위원 등을 지냈다. 1883년 왕립 협회 회장이 되었다. 뛰어난 수필도 많이 발표한 그는 다윈의 학설을 널리 알리고, 정치 제도의 개선, 과학 교육의 발전 등 여러 방면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저서에 『자연계에 있어서의 인간의 위치』 등이 있다.

골턴[편집]

Sir Francis Galton(1822-1911)

영국의 과학자. 다윈의 사촌. 5년 동안 아프리카의 수단과 나미비아에 머무르면서 이 지역에 서식하는 동물을 연구했다. 또 기상학에 공헌을 하여 1875년에 최초의 신문 일기도를 발표했으며, 고기압의 개념을 도입했다. 게다가 그의 지문에 대한 연구로 범죄수사에서 신원 확인에 지문을 이용하게 되었다. 또 식물과 동물은 일정한 양식에 따라 변이한다고 주장하며 우생학이라는 말을 최초로 사용했다.

월리스[편집]

Alfred Russel Wallace(1823-1913)

영국의 박물학자·탐험가. 1852년부터 동인도를 탐험하여 동양과 오스트레일리아 대륙과의 동물 분포 구역의 경계선을 정하고 '월리스선'이라고 하였다. 1858년 자연도태에 의한 생물진화론을 다윈의 진화학설과 함께 린네학회 총회에서 발표하였다. 월리스는 이 '자연도태설'을 '다위니즘'이라 불렀다. 저서로 『기적과 강신술』 『토지 국유화의 필요와 목적』 등이 있다.

발생학의 전개[편집]

發生學-展開

17세기 말, 발생학의 역사는 정자의 발견에 의하여 두 번째로 가져온 전성설(前成說)과 후성설(後成說)이라는 이론적 대립으로써 전개되었다.

말피기 같은 이들은 알 속에, 레벤후크는 정자 속에 성체(成體)의 소형체(小形體)를 인정했다.

18세기에도 전성설이 지지를 얻고 있었으나, 볼프는 식물에 있어서 잎과 꽃이 구별되지 않은 상태에서 양자가 분화하는 것과 닭의 발생에 관한 연구에서, 장(腸)이 편평한 것에서 변형되는 것으로 후성설을 주장했다. 19세기가 되자 생틸레르는 기형을 실험적으로 만듦으로써 전성설에 반대했다.

19세기 초두, 베어(K. E. von Baer, 1792-1876)와 같은 이들의 비교 발생학적 연구에 의하여 동물 발생의 일반적인 원칙, 배엽설(胚葉說)이 확립되었다.

동물이 발생하는 데 있어 수정란에서 포배(胞胚)로 진행됨과 동시에 외·내 두 배엽(胚葉)으로 분화하고, 다시 중배엽(中胚葉)이 생기며, 그리고 기관이 생긴다는 것을 제시하여 전성설에 타격을 주었다. 다윈의 진화론은 발생학 연구에 영향을 주어 헤켈(E. Haeckel, 1834-1919)은 개체 발생과 계통 발생에 대한 관계를 정식화하여 "개체 발생은 계통 발생의 단축된 급속한 반복이다"라고 했다.

비교 발생학이 전성기에 달했던 19세기 후반, 루(W.Roux, 1855-1924)는 발생 기구의 실험적 해석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자신도 실험적인 연구에 종사하여 실험 발생학을 창시했다. 루는 2세포기(二細胞期)의 개구리 알의 일할구(一割球)를 소침(燒針)으로 소살(燒殺)하고 살아 남은 쪽의 할구(割球)가 발생을 계속하여 드디어 반배(半胚)를 형성한다는 것을 관찰했다. 이에 대하여 그는 각 세포가 자율적으로 발생을 이루고 있다고 전성설적인 해석을 붙였다.

이에 대하여 드리슈는 성게 알의 난할(卵割) 초기의 할구를 분리하여 하나하나가 소형의 완전한 유생(幼生)이 되는 것을 보고 전체는 부분의 단순한 집합이 아니고 부분은 전체에 의해서 그 존재 방법이 규정된다고 해석했다.

20세기가 되어 슈페만(H. Spemann, 1869-1941)은 양서류(兩棲類)의 배를 재료로, 조직을 이식하는 기술을 이용하여 원구 배순부(原口背唇部)가 그에 접하는 외배엽(外胚葉)으로부터 신경판(神經板)의 발생을 유도하여 2차배(二次胚)를 형성한다는 것을 제시하고 2차배 형성을 일으키게 할 수 있는 이식체를 형성체라고 명명했다.

발생 현상에 관한 생화학적 연구도 행해져서, 바르부르크(O. H. Warburg, 독일의 생리학자, 1883-1970)는 성게 알의 호흡을 측정하였으며 헤르프스트, 룬쉬트렘 같은 이들은 배(胚)의 물질 대사, 형태 형성의 구배설(勾配說)을 제출했다. 바우츠만 같은 이들은, 원래 형성체 작용을 가지지 않은 조직도 끓임으로써 유도능(誘導能)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어, 유도 물질의 탐구에 대한 길을 열었다. 홀트 프레터는 양서류(兩棲類)의 내·중·외배엽의 세포를 분리해서 함께 배양하면, 내·중·외배엽이 어떤 구조를 형성한다는 것을 보여주어 형태 형성 기구의 해명에 시사를 주었다.

베버[편집]

Ernst Heinrich Weber(1795-1878)

독일의 해부학자·생리학자. 비텐베르크 출생. 베버의 가장 큰 업적은 감각기능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이다. 1826년경 기존의 생리학자들이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던 촉각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해 물리적인 구조와 자극, 그리고 그 결과를 늘 고려했으며, 정량적으로 기술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또한 여러 연구를 통해 두 개의 유사한 자극 간에 차이를 느낄 수 있는 최소한의 자극 변화량에 대한 개념을 도입하여 베버의 법칙을 주장했다. 또 모든 감각에는 더 이상 감각의 증가가 느껴지지 않는 최대자극이 있음을 발견하고, 이를 종말역치라고 했다.

베어[편집]

Karl Ernst von Baer(1792-1876)

독일의 발생학자.러시아의 에스토니아에서 태어났다. 의학·생리학·비교해부학을 배웠다. 케니히스베르크대학의 해부학 교수가 되어 비교발생학 연구에 종사했다.

판더(C.H.Pander, 1794-1865)에 의하여 닭의 배(胚)로 여러 기관이 3개의 배엽으로부터 분화된다는 것이 관찰되었으나 베어는 배엽이 동물 일반에 존재하며, 동종의 기관이 같은 배엽에서 형성된다는 것을 관찰하여, 배엽설을 확립시켰다. 비교 발생학적 견지에서 여러 동물의 분류와 그들 동물이 속하는 공통형의 결정을 행할 것을 제창하고, 4개의 주요 발생형을 나누었다. 그것은 퀴비에의 분류 체계와 일치했다.

헤켈[편집]

Ernst Heinrich Haeckel(1834-1919)

독일의 동물학자. 포츠담에서 태어났다. 베를린대학을 비롯한 여러 대학에서 공부하고 의사가 되었다. 그 후 방산충류에 관한 연구로 예나 대학 교수가 되었다. 카나리아 제도 등지에 연구 여행을 했다. 다윈의 진화론을 재빨리 받아들여 보급에 공헌했으며, 독일의 형태학·발생학 연구를 다윈적 체계와 결부시켰다. 메켈(J. F. Meckel, 1781-1833)에 의한 생물 발생의 병행(竝行) 법칙(생물의 개체 발생 과정은 그 종(種)의 주요 단계를 경과한다는 견해)을 부활, 확대하고 생물발생 원칙을 제창하여 발생학 연구에 자극을 주었다.

바이스만[편집]

August Weismann(1834-1914)

독일의 동물학자. 그가 주장한 원형질연속이론은 원형질의 일부로 배의 발생에 필수적인 생식질은 변하지 않고 대대로 전달되는 연속적인 것이며, 육체가 환경의 영향 아래에서 획득한 형질은 자손에 전해지지 않는다는 이론이다. 따라서 개체의 적응에 관여하는 세포들은 개체의 죽음과 함께 사라지지만, 생식에 관여하는 세포는 개체의 죽음을 뛰어 넘어 계속 보존된다고 주장했다. 이런 관점으로 획득형질의 유전을 강력하게 반대했으며, 생물의 진화는 자연선택으로 충분하다고 보는 신다윈주의자읜 한 사람이 되었다.

[편집]

Wilhelm Roux(1850-1924)

독일의 동물 발생학자(動物發生學者).

예나대학의 헤켈 밑에서 동물학을 배우고 다시 의학·철학을 배웠다. 초기에는 혈관의 구조에 대한 연구를 하였다. 뒤에 발생학을 연구하여 그 때까지의 기재적(記載的)인 발생학을 비판하고, 배(胚) 발생의 기구를 알기 위해서는 실험에 의해야만 한다고 주장하여 '발생 기구학'을 창시, 실험 발생학적 연구에 종사했다.

개구리 알의 실험에서 각 세포가 자율적으로 분화한다고 생각하여, 드리슈의 성게 알의 실험 결과와 대립했다. 뒤에 헤르트비히(Oskar Hertwig, 1849-1922) 같은 이들은 개구리 알에서도 죽은 쪽의 세포를 제거하면 살아 남아 있는 쪽의 세포는 정상적인 배를 형성한다는 것을 증명하여 루의 설을 부정했다.

드리슈[편집]

Hans Driesch(1867-1941)

독일의 발생학자. 예나에서 태어나 예나와 그 밖의 대학에서 수학했다. 헤켈의 문하생으로 나폴리의 임해 실험소에서 동물의 실험 발생학적 연구에 종사하였다. 성게 알의 실험에서 알의 조화된 분화를 강조하고, 루를 기계론적이라고 비판, 엔텔레히의 원리(아리스토텔레스의 엔테레케이아(entelekheia:배 속에 포함될 목적으로서의 자율 인자를 채용하는 사고 방식)를 도입하여 조화된 발생 과정을 설명하고 신생기론을 제창. 뒤에 관념론적·철학적 경향을 띠게 되었다.

포크트[편집]

Walter Vogt(1888-1941)

독일의 동물발생학자. 발생 과정에서 나타나는 형태 형성 운동을 분석하고, 발생 초기에 있는 배(胚)의 각 부분이 나중에 어떠한 기관으로 분화하는지를 알아내는 '국소생체염색법'을 고안했다. '국소생체염색법'은 여러 색깔의 생체 염색용 색소를 한천 조각에 흡수시킨 다음, 이를 포배나 낭배 초기의 배에 붙여 각 부분을 여러 색으로 염색시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염색은 조직의 분화가 일어날 때까지 유지되므로, 배의 어느 부분이 어떠한 기관으로 발생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뒤부아[편집]

Eugene Dubois(1858-1941)

네덜란드의 해부학자·자연인류학자. 1891년과 1892년 자바에 머무는 동안 직립원인의 화석의 뼈를 발견했다. 이 원인이 인간과 유인원 사이의 잃어버린 고리(missing link)에 해당한다고 주장했고, 1920년대에 이르러 이 주장은 결국 인정되었다.

슈페만[편집]

Hans Spemann(1869-1941)

독일의 동물 발생학자.프라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뷔르츠부르크대학 보베리 밑에서 연구. 로스토크대학, 프라이부르크대학 교수가 됐다.

알 부분을 제거, 조직의 이식, 배의 결찰(結紮) 등 미세(微細)한 기술을 이용하여 양서류(兩棲類)의 발생을 연구하고, 개구리 배(胚)에서의 안배(眼胚)의 렌즈 원기(原基)의 유도, 도롱뇽 배(胚)의 결찰에 의한 중복배(重複胚) 형성을 제시하였다. 도롱뇽 배(胚)의 원구배순부(原口胚唇部)의 이식 실험으로써 형성체 작용을 발견하여 1936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다.

플레밍[편집]

Walther Flemming(1843-1915)

독일의 생물학자. 체세포 분열 과정을 비롯한 세포학을 근대적으로 설명한 최초의 사람으로 염색체가 나누어지는 것에 관한 연구와 현미경 기법에 관한 중요한 연구를 했다.

체트[편집]

Mikhail Semenovich Tswett(1872-1919)

러시아의 식물학자. 1906년 식물 색소를 분리하는 삼투법을 고안하여 처음으로 크로마토그래피 분석을 수행했다.

뉴턴[편집]

Alfred Newton(1829-1907)

영국의 동물학자. 1866년 케임브리지대학의 첫번째 동물학 및 비교해부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조류사전(A Dictionary of Birds)』을 비롯해 조류학에 관한 귀중한 책을 썼다.

보베리[편집]

Theodor Boveri(1862-1915)

독일의 동물학자. 성게의 난자를 대상으로 핵의 중요성을 밝혀낸 실험을 했으며, 중심체라는 용어를 최초로 도입했다. 중심체는 1876년 베네당이 처음으로 발견한 세포 속에 있는 작은 기관인데, 다음해에 보베리는 베네당과 함께 중심체가 체세포분열 과정에서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또 회충의 알을 재료로 염색체는 세포의 핵 안에 늘 존재하는 독립적인 것이며, 부모로부터 같은 수의 염색체를 받는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버뱅크[편집]

Luther Burbank(1849-1926)

미국의 원예 육종가. 랭카스터에서 태어나 1868년 소규모의 종묘업을 경영하며 작물 개량에 착수하였다. 그 후 식물을 개량하여 새 품종을 많이 만들어 낸 사람으로, 1872년 '버뱅크의 감자'라고 하는 뛰어난 품종을 만들어 냈다. 다윈의 자연 도태설을 응용하여 꽃·과일·야채·곡물의 새 품종을 계속 만들어 냈다. 특히 가시 없는 선인장, 샤스타데이지는 유명하다. 저서에 『방법과 발견』 등이 있다.

괴벨[편집]

Karl von Goebel(1855-1932)

독일의 식물학자. 『식물 조직학(Organographie der Pflanzen, 1898-1901)』을 쓴 저명한 식물 형태학자로서 뮌헨에 식물학연구소와 식물원을 세웠다.

유전학설의 진전[편집]

遺傳學說-進展

유전학은 거의가 20세기의 과학이며, 1900년 멘델의 법칙의 재발견 뒤에 발전했으나, 멘델 이전에도 유전학의 선구적 연구가 행해지고 있었다.

18세기 중엽, 독일의 식물학자인 쾰로이터(J. G. K

lreuter, 1733-1806)는 처음으로 종류가 다른 담배를 교잡(交雜)하여 잡종을 얻고, 다시 되돌리기 교잡을 해서 20대쯤 거듭하는 실험을 보고하였다.

19세기가 되고 나서도 겔트너, 사듀레가 오이과(科) 식물 등의 교잡 실험을 하였다.

1865년, 멘델은 완두의 유전에 대한 실험 결과를 발표했다. 그 중의 한 실험, 키가 큰 그루와 작은 그루의 완두의 교잡에서는 잡종 제1대(F1)에 전부 키가 큰 것이 나타났으며, 그것을 자가수분(自家受粉)하여 얻은 잡종 제2대(F2)에서는 키가 큰 것과 작은 것이 나타났고 그 비는 약 3대 1(1064대 277)이었다. 그는 콩의 색깔·모양·꽃의 위치에 대해서도 실험을 하여 같은 결과를 얻었다.

다시 몇 가지의 성질을 달리하는 그루간의 교잡, 잡종 제3대(F3)의 자가수분을 하여 멘델은 F1에는 우성·열성의 형질을 나타내는 것이 각각 3대 1의 비율로 나타난다는 것, 3대 1이라고 하는 것은 내용적으로는 1대 2대 1이라는 것, 각각의 형질은 독립적으로 행동한다는 것 등으로 결론지었다.

멘델의 논문은 35년간이나 파묻힌 채로 있었다. 3사람의 식물학자, 드

브리스, 코렌스(K. Correns, 1864-1933), 체르마크(E. Tschermark, 1871-1962)가 각각 독자적인 연구를 진행하였으며, 1900년에 멘델이 얻은 것과 같은 결과를 얻어 멘델의 업적이 인정되었다.

멘델의 법칙이 재발견된 후에 유전학은 급속히 진보했다. 유전의 물질적 기반으로서 세포핵 중의 염색체가 서튼, 보베리 등에 의해서 인정되자, 유전 현상이 세포학적 사실과 결부되었다. 또 모건 일파(一派)는 초파리를 이용한 유전학 실험으로 유전학의 개념을 확립시켰다.

모건 같은 이들은 유전 실험에 쓰고 있던 파리 사육중에 나타난 백안(白眼)의 돌연변이체, 그 밖에 발견한 많은 변이체를 포함하는 방대한 수의 파리를 사육하여, 그 형질의 유전을 연구하고 결과를 통계적으로 처리했다.

그 결과 형질이 몇개의 무리(群)로 되어서 행동한다는 것, 그 무리의 수는 생식 세포의 염색체 수와 일치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와 같은 사실은, 개개의 형질을 지배하는 유전자가 염색체에 존재한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다시 이들 무리 속에서도 유전자의 바꿔짜기, 즉 염색체의 교차(交叉)가 일어난다는 것이 알려져서, 그것이 일어나는 빈도를 바탕으로 염색체상의 유전자의 배열을 나타내는 그림 염색체 지도가 스타트번트(미국의 유전학자, 1891- ? ) 같은 이들에 의해서 그려지게 되었다. 또한 H.J. 멀러(1890- ? )는 1927년 X선으로 최초로 인위적으로 돌연변이를 일으키는 데에 성공했다.

유전학은 세포학적 기초와 통계적 처리 위에서 확고한 이론을 완성하고, 그 뒤 미생물학 같은 방면에서 일어난 현대의 분자 유전학과 결부되어 갔다.

또, 유전학은 진화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었다. 드 브리스는 달맞이꽃의 교잡실험에서 발견한 돌연변이에다 진화의 원인을 귀착시켰으나, 집단 유전학(집단의 유전적 구성을 지배하는 법칙을 연구)으로서 홀데인(J. B. S.Haldane, 1892-1964), 라이트, 피셔(R. A. Fisher, 1890-1962), 드브젠스키(1900- ? ) 같은 이들에 의해서 진화의 문제에 관련된 분석이 행해졌다.

멘델[편집]

Gregor Johann Mendel(1822-1884)

오스트리아의 식물학자.

실레지아 지방의 조그만 마을인 하이젠도르프에서 출생. 아버지의 영향으로 식물의 교배(交配)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알트브륀의 수도원에 들어가, 브륀신학교의 청강생이 되었다가 1847년 신부(神父)가 되었다. 수도원에서 생물을 다루는 일에도 종사했다. 빈에 유학(1851-53)하여 빈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빈의 동식물학회 회원이 되었으며, 브륀의 국립실과 학교의 임시 교원이 되었다.

수도원 뜰에서 완두를 이용한 유전 실험을 1856년부터 8년간에 걸쳐서, 그리고 뒤에는 다른 식물을 이용한 교잡실험(交雜實驗)을 했다. 완두의 실험에서 얻은 결과를 1865년 브륀의 자연 연구회에 보고, 다음해 논문으로 발표. 이 논문은 뒤에 멘델의 법칙이라 불리게 된 유전의 3법칙(분리·우열·독립)을 내용으로 담고 있으나, 이것은 1900년의 재발견 때까지 파묻혀 있었다.

드 브리스[편집]

Hugo de Vries(1848-1935)

네덜란드의 식물학자·유전학자.

라이덴, 하이델베르크, 뷔르츠부르크대학에서 수학하고 잭스등에게 사사(師事)했다. 처음 호흡·생장 등의 식물 생리학의 연구에 종사하다가 원형질 분리를 발견(1877)하였다. 뒤에 식물 잡종에 대한 연구를 하여, 달개비의 교잡 실험에 의하여 1900년 멘델의 유전법칙을 재발견한 3사람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1901년, 큰달맞이꽃의 교잡 실험에서 생물진화의 요인이 돌연변이에 있다는 설을 발표했다.

모건[편집]

Thomas Hunt Morgan(1866-1945)

미국의 발생학자·유전학자.

존스홉킨스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나폴리의 임해실험소에서 발생학에 대한 연구를 했다. 컬럼비아대학, 캘리포니아공과대학 교수가 됐다. 발생학자로서 출발했으나, 1910년경부터 초파리에 의한 유전 실험을 시작했다.

멘델이 추정한 유전 요소가 염색체상에 선상(線狀)으로 배열하는 유전자라고 하고 『유전자설(遺傳子說)』(1926)을 내었다.

베이트슨[편집]

William Bateson(1861-1926)

영국 동물학자·유전학자. 미국의 존스홉킨스대학에서 공부를 하여 진화론을 연구하였다. 1886년 중앙아프리카 서부의 함수호(물이 짠 호수)의 동물들을 관찰하여 후에 「변이 연구 자료」를 발표하였는데, 이는 다윈의 학설을 비판한 것이었다. 1900년 연구를 계속하여 「멘델의 유전 법칙·그 변호」라는 논문에서 멘델 법칙을 다시 확인하였다. 『유전의 문제』 등의 저서가 있다.

서턴[편집]

Walter Stanborough Sutton(1877-1916)

미국의 유전학자. 염색체는 일정량의 유전물질을 운반하며, 상동염색체의 쌍으로 존재한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처음으로 제시하여 멘델주의의 염색체 이론에 기초를 제공했다. 1902년에 발표된 「밑들이메뚜기의 염색체군 형태에 관하여」에서는 메뚜기의 체세포에 들어 있는 염색체는 세포마다 일정하고, 구분이 가능한 여러 개의 상동염색체 쌍으로 존재한다는 증거를 제시했다.

현대 생물학의 발전[편집]

現代生物學-發展

20세기 초까지에 생리학의 여러 분야에서는 진화론이 확립되어 세포내 구조, 세포 분열에 대한 지식이 정리되고, 발생학은 실험과학으로서 출발하여 유전에 관한 기본적인 법칙이 확인되고 있었다. 한편 생명 현상도 물질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생각이 이미 정착하고, 물리학자나 화학자가 생리학에 대한 연구에 참가하여 성과를 올리고 있었다.

생화학은 1940년대부터 급속히 발전하여, 그 분석적 능력을 더욱더 발휘하였으며, 그 때까지 따로 흩어져 있던 생명 현상을 분자에 의하여 통일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였다. 한편, 생물을 개체군이라든지 집단으로서의 레벨에서 포착하여, 각각의 레벨 속의 법칙이나 그 간의 상호 관계의 분석으로부터 전체로서의 생태계(生態系)의 개념을 만들어 내는 생태학도 20세기의 생물학의 또 하나의 분야가 되어, 분리되어 있던 각 레벨급 현상의 유기적인 이해를 가능케 했다.

생화학의 발전[편집]

生化學-發展

부흐너(E. Buchner, 1860-1917)가 효모 여액(濾液)을 단리(單離)한 후, 하든(A. Harden, 1865-1940)과 영에 의해 발효에 인산(燐酸)이 관여한다는 것이, 노이베르크에 의해서는 카르복시라아제가 관여한다는 것이 지적되었으며, 마이어호프 같은 이들의 근육 수축에 대한 연구에 의하여 글리코겐 → 젖산의 분해경로가 밝혀지고 발효 과정과의 일치가 인정되어, 뒤에 엠덴, 파르너스 등에 의해서 발효와 해당(解糖)의 반응 도식(圖式)이 이룩되었다.

호흡에 대해서는, 1920년대에 바르부르크는 시토크롬 산화 효소를 연구했으며, 툰베리는 탈수소 효소를 연구하였고, 그 후 툰베리 등은 디카르본산 회로를 제창했다. 다시 센트 죄르지(A. von Szent-Gy

rgyi, 1893-1986)는 C4·디카르본 산설(酸說)을 내놓았다. 1937년 크레브스에 의하여 구연산, 이소구연산 등이 가해지고 구연산회로(TCA회로, 트리카르 본산 회로)가 제출되었으며, 1940년경부터 기질(基質)이 분해됨에 따라 해방되는 에너지가 ATP의 고(高)에너지 산 결합으로써 저장되어 가는 과정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근수축(筋收縮) 기구의 해명에도 생화학적 연구가 공헌했다. 이미 19세기부터 뮐러, 뒤 보아 레이몬(1818-1896), 헬름홀츠 등에 의해서 근수축 때의 전기 생리학적 현상은 정량적(定量的)으로 이해되고 있었다.

또 뒤 보아 레이몬은 근육이 활동에 의하여 산성화한다는 것을 지적하고, 홉킨스(F. G. Hopkins, 1861-1947)는 이 산성이 젖산에 의한다는 것을 제시하고, 마이어호프 등의 해당 작용계의 해명에 연결된다.

한편, 큐네(1837-1900)는 근육 세포에서 수축성이 있는 단백질 미오신을 분리하였고 센트 제르지는 액트미오신 계(系)가 ATP에 의해서 수축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엥겔리갈트(1894-1984), 류비모와는 미오신이 ATP 분해효소의 작용을 갖고 있다는 것을 제시하여, 근육수축의 에너지는 ATP 분해에 의한 에너지라는 설(說)을 세우고, 근수축에 관한 역학적·생화학적 식견을 통일했다.

19세기 동안에 녹색 식물이 광합성을 영위한다는 것이 알려졌다. 힐(A. V. Hill, 1886-1977)은 엽록립(葉綠粒)에 빛을 쬐어 다량의 산소를 얻었으며 루벤 등은 광합성의 결과로 나오는 산소가 물에서 온다는 것을 제시하여 블랙만이 밝혀 놓았던 명(明) 반응과 암(暗) 반응의 구별에 물질적인 뒷받침을 해 주었다.

발효·해당에 대한 화학적 연구, 생체에서의 물질 에너지 대사(代謝)에 대한 연구의 발전에 따라 생화학 반응의 열쇠를 쥔 여러 효소가 발견되어 효소의 본질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다. 빌스테터(R. Willst

tter, 1872-1942)는 사카라아제를 순화(純化)하였고, 섬너(J. B. Sumner, 1887-1955)는 처음으로 결정 효소 우레아제를 얻었으며 노드럽(J. H. Northrop, 1891-1955)은 펩신과 그 밖의 단백질 분해 효소를 결정화하였다. 노드럽은 또 효소가 단백질이라는 것을 확증했다.

생물의 자연 발생설이 19세기 중엽 파스퇴르에 의하여 완전히 부정된 후, 진화론의 침투와 광합성 세균과 같은 미생물에 대한 새로운 식견에서, 최초에 생긴 생물은 무기물에서 유기물을 합성하고 있는 자가영양적 호기성세균(好氣性細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으나, 오파린은 종속 영양 생물이 가장 원시적이라는 것을 주장하고, 『지구상의 생명의 기원(起源)』(1936)에서, 원시생물은 지구상에 장시간의 물질 진화가 있는 단계에서 발생한 것임을 밝혔다. 생화학의 새로운 국면에 유전 현상의 물질적 기초 핵산의 연구가 있다. 핵산의 성분에 대한 연구는 19세기 중엽부터 미셸에 의하여 행해지고 있었으나 1930년대부터 그 생물학적 중요성이 알려지게 되었다.

스탠리는 1935년 담배 모자이크 바이러스를 결정화하고, 그 뒤의 연구에서 자기 증식을 행하기 위해서는 핵산이 필요하다는 것이 시사되었으며, 카스페르손에 의하여 세포 내의 핵산의 분포와 양이 조사되었다. 핵산에 디옥시리보핵산(DNA), 리보핵산(RNA)이 있다는 것도 알려져서, 자기 증식·단백질 합성에 핵산이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1953년, 웟슨(J. Watson, 미국의 생화학자, 1928- ), 크릭(1916- ? )은 DNA가 2중(二重) 나선(螺旋)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제창하여 유전자의 특이성의 근거를 만들어 주었다. 오초아 같은 사람은 RNA의, 그리고 콘버그는 DNA의 시험관 내의 효소적 합성에 성공했다.

진화 문제에 대해서도 볼드윈(미국의 생화학자, 1909- ? ) 등에 의하여 비교 생화학적 연구가 이루어져서, 척추 동물의 종류와 환경과 질소의 배출 양식의 관계 깊은 것들이 밝혀졌다. 프로르칸도 진화학을 분자 생물학적 방법에 의하여 탐구하고 있다.

생태학[편집]

生態學

다윈의 저서에 이미 생태학적 견해가 나타나 있으나, 생태학이란 말을 만든 사람은 헤켈이었다. 그 후 목적론적인 적응 현상에 주목한 생태학이 왕성해졌으나 한편으로는 식물의 생리와 환경 요인을 직접 연결시키는 방법을 취하고 있던 것도 있었다. 그 가운데의 클레멘츠는 식물 군락(群落)이 기후 조건에 의해서 극상(極相)을 향해서 변화한다는 천이설을 제창하였고, 셸퍼드(V. E. Shelford, 1877-1968)는 이것을 동물에 대해서도 적용했다. 한편 엘턴(C. Elton, 1900- ? )은 이와 같은 생각에 대해서 비판적이었으며 동물의 군집의 해석(解析)에 먹이 연쇄를 첫째로 생각하여 먹이 연쇄의 개체수 피라미드를 그렸다. 보이센, 옌센 등은 중량을 문제로 하여 피라미드를 그렸으며, 티네만(독일의 호소(湖沼)학자·동물학자, 1882-1960)은 어느 생활장소 내에서 만들어지는 시간당의 생산량과 배출량을 문제로 하여 생태학을 양화(量化)하였다.

동물 사회에 대한 연구는 20세기 초에 순위제(順位制)가 발견되었으며, 실험 과학으로서 출발하여 닭의 무리 안에서의 순위와 개체나 무리의 기능과의 관계가 밝혀졌다. 일본의 동물학자들에 의하여 일본 원숭이 사회에 대한 것이 자세히 조사되었고, 이 속의 순위제와 분업, 과부(寡夫) 다처적인 결혼 형태가 알려져서 인류의 사회, 가족의 진화에 대한 연구에 시사를 주고 있다.

인류학[편집]

人類學

헤켈은 인류와 원숭이를 잇는 연쇄의 중간적인 형태를 지닌 동물이 발견될 것을 믿고 이것을 원인(猿人)이라고 이름지었으나, 1891년 뒤보아(네덜란드의 해부학자·인류학자, 1854-1940)에 의해서 실제로 이것이 발견되어, 직립(直立) 원인이라 명명되었다. 20세기가 되어서 베이징 근교 저우커우뎬(周口店)에서 안델슨(스웨덴의 지질학자·고고학자)·주단스키는 지금부터 약 50만년 전 빙하 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인류의 어금니를 발견하였고, 이어서 블랙(캐나다의 해부학자·고생물학자, 1884-1934), 바이덴라이히가 발굴하여 북경 원인(原人)이라고 명명한 뒤 1929년 비문중(悲文中)에 의하여 완전한 두개골이 발견되었다. 다시 약 백만년 전에 살고 있었을 것으로 상상되는 인원(人猿),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1925년 다트에 의하여 남아프리카에서, 진잔트로푸스가 1959년 리키에 의해 동아프리카에서 발견되었다.

학습과 기억[편집]

學習-記憶

심리학이 독립된 과학영역으로서 인정된 것은 19세기 말기이다. 세계 최초의 심리학 연구실을 둔 분트는 『생리학적 심리학 강요(强要)』(1874)를 저술하여 실험 심리학의 기초를 확립하고, 의식의 내성(內省) 분석에 종사했으나 행동주의의 와트슨, 정신 분석의 프로이트(S. Freud 1856-1939), 게시탈트파(派) 등에 의하여서 비판되었다.

한편, 구소련의 파블로프는 외계로부터의 자극에 의한 소화액 분비에 관한 효과에 주목하여, 수술을 실시한 개를 이용하여 조건 반사학의 신분야를 개척했다. 브이코프(1886- ? )는 이것을 내장에서의 자극으로 확장했다. 스키너는 레버를 누르면 모이가 나오는 상자를 이용하여 쥐의 학습에 대해서 연구했다.

최근까지, 생리학적으로는 학습의 본질에 대하여, 그것을 시너프스(노이론 상호간의 접합관계)의 변화로서 설명하는 시도가 이루어져 왔으나, 다시 학습·기억에서의 변화를 RNA량(量)의 변화로서 생화학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마이어호프[편집]

Otto Fritz Meyerhof(1884-1951)

독일·미국의 생리화학자. 정신병학을 공부하고 바르부르크의 영향으로 생리화학을 시작하여 나폴리의 임해 실험소에서 성게의 호흡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였다. 1913년 킬대학 생리학 강사가 되어 근육의 물질 대사에 관한 연구를 하였다. 산소 소비와 근육의 젖산 대사와의 관계를 발견하여 1922년, 영국의 A. V. 힐과 함께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다.

해당 작용계(解糖作用系) 효소의 근육으로부터의 추출에 성공하고 해당 작용계의 주요한 반응을 시험관에서 재현하여 엠덴, 마이어호프, 펄너스 경로(經路)의 해명에 공헌했다.

1938년 나치에 의해서 독일에서 추방되어, 파리의 연구소에 2년 근무한 후 미국으로 건너가 펜실베이니아대학 교수가 되었다.

크레브스[편집]

Hans Adolf Krebs(1900-1981)

독일·영국의 생화학자. 독일의 힐데스 하임에서 출생. 괴팅겐대학 등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뒤에 베를린에서 화학을 공부했다. 바르부르크의 조수로 호흡 산소를 연구. 1933년 홉킨스의 초대로 케임브리지로 갔다. 포유류의 요소 생성(生成), 새의 요산(尿酸) 생성을 연구하여 알기닌, 오르니틴, 시트룰린 회로를 해명. 호흡에 의한 에너지 전환을 연구하여 피르브산과 옥살로 초산(醋酸)이 축합(縮合)하여 구연산을 만든다는 것을 밝혀내고 센트 제르지(1893- ? )가 내놓은 C4 디카르본산설(酸說)을 발전시켜 트리카르본산 회로에 대한 기초를 만들었다.

클레멘츠[편집]

Frederic Edward Clements(1874-1945)

미국의 식물 생태학자.

네브래스카대학에서 공부하고 미네소타대학 교수, 카네기연구소원이 되었다. 식물 군락에 관한 연구를 하고, 기후 조건에 따라 식물 군락이 단일의 극상(極相)을 향해서 천이한다는 설을 내놓았다. 동물생태학자 셸퍼드와 함께 '생물생태학'을 제창하여 '통일체로서의 생물 군집'이란 개념을 세웠다. 이 체계는 생물의 개체적 생리와 무기적인 환경요인을 직결시키는 생리주의 위에 세워졌다.

오파린[편집]

Aleksandr Ivanovich Oparin(1894-1980)

구소련의 생화학자. 모스크바 북방의 야로슬라프스카야 출생. 모스크바대학에서 수학. K. A. 티밀랴제프, A. N. 바흐의 영향을 받아서 식물 생리 화학을 연구. 천문학·지구화학·유기화학·생화학의 성과를 바탕으로 『지구상의 생명의 기원』(1936)을 저술했다. 그 책에서, 지구의 어떤 시기에 형성된 탄화수소가 간단한 유기 화합물·단백질·코아세르베이트 적(適)을 거쳐 차례로 보다 복잡한 조화있는 화학기구의 체제가 되어 원시 생물이 되었다고 말하고, 다윈의 진화론을 물질에서 생명에의 진화로 확장했다.

에이버리[편집]

Oswald Theodore Avery(1877-1955)

미국의 미생물학자. 이 기관은 폐렴쌍구균이 면역학적으로 특이한 화학물질로 된 캡슐을 만들어낸다는 사실과 이 캡슐은 폐렴쌍구균이 지닌 독성과 면역학적 특이성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을 밝혔다. 또 캡슐이 없는 폐렴쌍구균에 캡슐을 지닌 폐렴쌍구균에서 추출한 물질을 첨가했더니, 형질전환이 일어나 캡슐이 형성되는 현상을 발견하고, 이에 대해 연구하여 1944년 형질전환을 일으키는 물질이 DNA라고 발표했다.

스탠리[편집]

Wendell Meredith Stanley(1904-1971)

미국의 생화학자. 일리노이대학에서 공부하고, 독일에 유학하였다. 1942년 담뱃잎을 병들게 하는 모자이크병의 바이러스를 연구하고, 제2차세계대전 중 인플루엔자·일본 뇌염의 백신 연구에 힘썼다. 후에 캘리포니아대학 교수 및 바이러스 연구소장이 되었으며, 유기 물질과 세포에 관한 연구로 1946년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1947년 프랭클린상, 1948년 깁스상을 받았다. 저서로 『스티렌의 화학』 『바이러스의 화학적 연구』 등이 있다.

도브잔스키[편집]

Theodosius Dobzhansky(1900-1975)

우크라이나 태생의 미국 유전학자·진화학자. 개체군에서의 유전적 다양성이 크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그의 연구는 또한 다윈설과 멘델의 유전법칙을 연결하는 실험적 증거를 제시했다. 초파리의 자연 집단의 유전적 다양성을 연구하여 생물학적으로 성공적인 종은 그렇지 못한 종보다 집단 내에서 유전적 다양성이 크다는 결론을 얻었다. 반면 유전적 변이가 드물게 일어나는 집단은 환경 변화에 상대적으로 빠르게 적응하지 못하므로 사라질 위험까지 있다. 그는 초파리 집단에 자연선택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관찰하면서 초파리의 유전적 변이가 계절에 따라 주기적으로 변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모노드[편집]

Jacques Lucien Monod(1910-1976)

프랑스의 생화학자. 자코브와 함께 전령 RNA에 대해서 연구하였다. 그의 책 『우여과 필연(Chance and Necessity, 1970)』에서 인간은 우주에서 우연의 산물이라고 제안했다.

로렌츠[편집]

Konrad Zacharias Lorenz(1903-1989)

오스트리아의 자연학자. 로렌츠는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동물을 직접 찾아가서 연구하고, 집에 야생동물을 키우기도 하면서 동물 행동에서 본능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즉 동물이 각인이라고 하는 본능에 따라 사람을 자신의 부모로 알 수도 있음을 알아냈다. 1973년에 프리슈·틴버겐과 함께 동물 행동 연구로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오초아[편집]

Severo Ochoa(1905-1993)

에스파냐의 분자생물학자. 생물체의 에너지대사 과정에서 고에너지 인산이 담당하는 작용에 대해 연구하다가 RNA 합성을 촉진하는 기능을 지닌 효소를 발견했다. 이 효소의 발견은 DNA의 유전정보들이 RNA를 통해 특정한 단백질로 발현되는 과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오초아는 이 효소를 이용하여 1955년 시험관에서 RNA를 합성하는 데 성공했다. DNA와 RNA의 합성에 관여하는 효소를 찾아낸 공로로 1959년 콘버그와 함께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마이어[편집]

Ernst Walter Mayr(1904- )

독일 태생의 미국 동물학자. 처음엔 조류학을 연구했으나 나중에는 『동물의 종과 진화(Animal Species and Evolution, 1963)』와 『진화와 생명의 다양성(Evolution and the Diversity of Life, 1976)』에서 보여준 바와 같이 진화에 관한 신다윈주의적 견해로 유명해졌다.

허시[편집]

Alfred Day Hershey(1908-1997)

박테리오파지 연구의 전문가인 미국의 생물학자. 1950년대 체이스와 함께 파지 DNA가 유전 정보를 운반하는 성분임을 증명하였고, 좀더 뒤에는 다른 생물의 DNA도 유전 정보를 운반한다는 사실을 보였다. 1952년에는 체이스와 함께 32P, 35S의 방사성동위원소가 들어 있는 배양액에서 배양한 박테리아에 박테리오파지를 감염시켜 조사하는 실험을 했다. 이 실험에서 박테리오파지의 DNA만이 숙주세포 속으로 들어가고 단백질은 세포 밖에 남아 있는 것을 발견함으로써 유전물질이 단백질이 아닌 DNA라는 주장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를 제공했다. 바이러스의 복제메커니즘 및 유전자 구조에 관한 연구로 1969년 델브뤼크, 루리아와 함께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크릭[편집]

Francis H. C. Crick(1916- )

영국의 분자생물학자. 1953년 웟슨과 함께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유전정보를 전하는 물질인 DNA의 분자 구조 모형을 만들었다. 이 모형은 2중나선구조로, 꼬인 사다리와 비슷한 모양이다. 그 후 핵산에 관한 연구로 유전 암호와 관련된 훨씬 진보된 발견을 이끌어 냈다. 1962년 미국의 생물학자 웟슨, 영국의 생물물리학자 윌킨스와 함께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웟슨[편집]

James Dewey Watson(1928- ) 미국의 생물학자. 1951년 크릭과 함께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의 캐번디시연구소에서 DNA의 구조에 관하여 연구하였다. 1962년에는 윌킨스와 함께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으며 1968년에는 『이중 나선(The Double Helix)』을 썼다.

메셀슨[편집]

Matthew Stanley Meselson(1930- )

미국의 분자생물학자. 슈탈과 함께 대장균을 이용한 실험으로 DNA가 반보존적으로 복제되는 것을 증명했다. 즉 DNA분자는 복제될 때 꼬여 있던 이중나선구조가 풀려서 두 가닥의 뉴클레오티드 사슬로 나뉜 후, 각 가닥에 새로운 염기가 결합하여 새로운 두 개의 DNA 분자가 된다. 따라서 두 개의 DNA사슬 중 한 가닥은 본래의 DNA사슬인 것이다. 이들의 실험은 현대 분자생물학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