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통상·산업/한국의 산업경제/북한경제/북한의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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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경제의 흐름[편집]

北韓經濟- 북한의 경제건설은 다른 모든 나라의 경우와 같이 북한 고유의 지리적 환경과 자연조건 그리고 역사적 배경하에서 진행되어 왔다.

북한지역은 아시아 대륙 동쪽에 위치하는 한반도의 대략 북위 38도선 이북에 위치하며 북쪽으로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하여 중국과 1,360㎞, 소련과 16.5㎞에 걸쳐 접경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휴전선을 끼고 남한과 접하고 있으며, 동서해안선의 총연장은 2,495㎞이며 약 1,000여개 섬들이 있다.

한반도는 3면을 바다와 접하고 있지만 북한은 동서 양면으로 바다와 접하고 있으며 해안선은 단조로운 편이다.

북한은 지리적으로 고원, 온대, 해양 등으로 특정지을 수 있는데 이것은 많은 자연자원의 소재를 뜻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은 사실상 평야를 제외하고는 풍부한 자연자원을 보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북한에는 지금까지 총 3600여종의 광물이 부존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으며 그 중에서 경제성이 있는 광물이 220여종에 달한다. 특히 마그네사이트는 전세계에서 매장량 1위를 차지하고 있고 10위 이내에 드는 광물로는 중석, 몰리브덴, 흑연, 형석 등이 있다.

이러한 풍부한 광물자원들로 공업원료 및 연료의 70% 이상을 자급할 수 있으며 석탄의 매장량이 풍부하여 산업용 연료의 거의 대부분을 석탄에 의존하고 있고 화학공업도 석탄계열 화학공업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광복 전후의 북한경제[편집]

解放前後-北韓經濟

광복과 더불어 남·북으로 분단되어 식민지형의 파행적이며 후진적인 경제구조를 이어받은 북한은 광복 당시 수준이야 어떻든 수산업, 광업 및 공업 위주의 산업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북한 역시 일제 36년의 강점기간 동안 일본의 식민지적 성격을 보이고 있어 생산이라면 수탈을 전제로 한 제1차산업의 원료산업에 불과한 것이며 2차산업은 정책적으로 발달시키지 않았었으나 일제가 아시아 대륙에서 전쟁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물자를 공급하기 위하여 한반도에서도 공업생산을 착수하게 되었는데 그 시설을 원료산출지와 인접한 곳에 설치함으로써 광복과 더불어 북한지역에 편입되게 되었다.

그러나 농업은 토지와 기후 등 자연조건에 의하여 발달되지 못하였으며 수산업은 주변에 좋은 어장을 갖고 있었기에 상당히 발달되었지만 대부분이 일본인들이 소유하였던 것으로 북한주민이 소유했던 어업은 영세성을 면치 못하였다.

광복 당시 북한지역의 광업생산량이 내용에 있어서 주요한 것을 간추려 보면 금은 1년간 약 4톤, 은 20톤, 전기동 4천톤, 철광 300만톤, 니켈 2만7천톤, 인상흑연 1만 7천톤, 토상흑연 3만 7천톤, 유연탄 400만톤, 무연탄은 460만톤, 고령토가 1만톤이며 형석이 16만톤으로 풍부한 지하자원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반도의 공업시설은 광복 전까지 전반적으로 빈약하였다고밖에 할 수가 없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우리나라 전체를 일본 본토를 위한 식민지로서만 발전시킬 것을 계획하고 실천하였던 까닭으로 경제발전의 초점을 생산구조 중 원료산업 그 중에서도 농업에다 집중시켰다.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전쟁인 만주사변·중일전쟁·세계 제2차대전을 통하여 일본은 한반도에서도 공업의 발전을 기할 필요를 느꼈다. 그런데 이러한 공업발전의 중심지를 일본인들은 북한지역에 집중시켰던 것이다.

1943년도 산업별 생산액의 비율은 공업생산액이 37.1%를 차지하였는데 공업생산액의 구성비율은 화학공업 30.4%, 식료품공업 21.9%, 방직공업 16.8%, 금속공업 11.1%, 기계공업 5.7%로 되어 있었다. 공업발달의 전제조건이 될 금속공업과 기계공업은 합쳐서 16.8%에 불과했다. 더욱이 그 내용을 보면 정밀기계와 공작기계공업은 아니고 광산기계·식료품 가공기계·농기계 또는 차량·선박·자동차의 조립 내지는 수리 정도에 지나지 않아 커다란 의의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한반도에 있어서 1945년 8월 현재의 전력생산을 위한 설비용량은 194만kVA이었고 최대출력은 172만kW이었다. 그런데 한국은 수력자원이 풍부했으므로 대부분의 전력은 수력발전(91.2%) 이었다. 또한 이 수력자원은 북한지역에 편중하여 있었으므로 대부분의 발전시설은 광복후 북한(87.6%)에 위치하게 되었다. 즉, 북한은 광복직후 설비용량에 있어서 170만kVA, 그리고 최대출력에 있어서 112만kW의 전력생산규모를 소유하고 있었다. 모든 발전소는 수력발소이었으며 따라서 북한에는 당시 화력발전소는 하나도 없었다.

북한은 잘 아는 바와 같이 험한 지세를 보이고 있으므로 운수, 통신 발달을 계획할 때 주로 본국과 그리고 중국대륙간의 수송, 연락을 위하여, 다음에는 식민지경제로서의 물자수송과 연락을 위한다는 것이 주목적이었으므로 북한은 남북에 비하여 비교적 빈약한 상태라고 할 수가 있으나 광복 당시까지는 북한의 주요도시와 공업지대를 연결하는 수송 및 통신망이 완비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광복 당시 북한은 근대적 생산수준에는 만족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근대 경제건설에 필요한 요소를 어느 정도는 갖추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광복 이후의 북한경제[편집]

光復以後-北韓經濟

광복과 더불어 소련이 진주한 북한은 1946년에 토지개혁(3월), 중요산업국유화(8월), 지하자원, 산림, 해양 수역의 국유화(12월)와 같은 사회주의화 개혁을 단행하여 계획경제 추진의 기초를 구축하기 시작하여 1958년 8월의 농업협동화와 수공업자, 상공업자의 협동화를 끝으로 생산관계의 사회주의화를 완료하였는데 광복 이후 1947년에 첫 경제계획을 실시한 이래 1987년에 시작된 제3차 7년계획에 이르기까지 총 9차례의 경제계획을 추진하여 왔다.

60년대 이전의 경제개발[편집]

六十年代以前-經濟開發이 시기는 소련군 주둔하에서 사회주의체제 형성기(1945∼1950), 전쟁기간, 전후복구기(1954∼1956)의 제1차 3개년계획 그리고 북한의 공업화가 40여년간 경제개발계획중 가장 빠른 속도로 추진된 제1차 5개년계획(1957∼1960)을 포함하는 기간이다.

제1차 1개년계획[편집]

第一次一個年計劃

소련군 주둔하에서 사회주의체제로의 구조개편기(1945∼46)를 끝낸 북한은 이민민주주의 개혁기를 발판으로 1947년 1월 12일 최초로 제1차 1개년계획을 수립·집행했다.

이 계획은 장기간 일본제국주의의 통치로부터 파생된 문제점을 해결하고 주민의 생활수준향상 그리고 민족경제의 자립적 발전을 위한 기반구축에 중점을 두면서 다음과 같은 목표를 설정했다.

첫째, 일제하에 파괴된 시설과 노후화된 공장, 기업소를 보수, 운영하여 전전 대비 생산량을 두 배 정도로 성장시킨다.

둘째, 생산조직을 개선하여 자립경제를 도모하고, 경제면의 절약준수와 도급제 실시로 노동력의 생산능률을 48% 향상시킨다.

셋째, 석탄생산의 증대와 공급을 보장

넷째, 철도산업을 근본적으로 개선

다섯째, 농촌경제의 발전에 필요한 생필품과 공업품을 생산하는 동시에 주민의 주요 식량의 요구에 대처하도록 한다.

여섯째, 국영산업망과 소비조합산업망을 확장하여 상품의 유통을 강화한다.

그리고 개인자본을 산업과 상업회사에 인수하여 개인의 창의성은 고취한다. 이와 같은 계획의 기본방향은 경제질서의 회복과 최소한도의 인민생활안정을 시도한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그러나 기업소 복구, 석탄생산의 증대, 철로의 정상화, 생필품의 생산, 식량생산의 증대 그리고 상품의 유통구조 개선 등 일련의 방향은 체계적인 발전계획보다는 당면문제 해결의 특성을 지닌다.

경제계획의 구체적인 목표와 성과를 살펴보면 국영산업의 생산량의 목표를 전년대비 92% 증가된 84억원으로 책정하여 226%가 증가되었다. 이 목표달성을 위해 8.8억원의 중앙예산을 지출 계획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곡물의 총수확고를 전년대비 118.6%가 되는 215만 톤을 증산하기 위해 경지면적 역시 전년대비 116.9%가 되는 223억 4천3백만 톤 정도로 계획하였으나 20% 미달하였다.

이와 같은 북한의 제1차 1개년계획은 전반적으로 초과 달성되었지만 주요한 계획목표에 있어서는 저조한 실정이었다. 즉, 전년대비 공업총생산 200%의 증가 목표와 양곡 30만 생산목표는 각각 70% 수준에 머물게 되었다. 이는 경제기반의 미약, 기술적 지도의 미숙, 허약한 기술촉진기반 때문에 계획방향과 비교 분석해 볼 때 많은 문제점을 노정하였다.

제2차 1개년계획[편집]

第二次 一個年計劃

북한은 1947년도 계획의 수행실적에 기초를 두면서 다음과 같은 목표를 수립했다. 첫째, 일제지배하에서 조성된 산업의 편파성 타파 둘째, 각종 생산품의 증대와 생산품질 제고 그리고 물가절감 셋째, 식량과 공업원료의 증산을 위한 농촌경제의 발전 넷째, 운송의 발전과 교육, 문화시설 확충, 이러한 기본방향으로 1948년 제2차 1개년 전망계획이 수립되었으나 1947년 안과 큰 차이는 없는 것이었다.

이 기본방침에 따라 북한은 기계, 기구, 농업기계부속품, 생활필수품의 생산과 그 생산원료의 절감에 주력하는 동시에 식량 공업원료 확보를 위한 농업부문의 발전과 운송산업의 확충 등에 집중하였다. 특히 생활필수품, 기계 및 기계 부속품 생산에 박차를 가하기 위하여 노동조직의 개선, 도급제 실시, 성과급제, 식량배급제, 노동규율의 강화 등 노동생산성 증대를 위한 노동자의 생산의욕 고취방안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계획적 경제관리의 강화를 위해 독립채산제 실시와 기술자 양성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시킨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북한이 발표한 자료(최고인민회의)에 의거하여 1948년도 경제계획의 목표와 성과를 부문별로 검토해 보면 다음과 같다.

노동조직과 생산조직의 개선에 의해 전년도에 비해 노동생산성은 136.1%로 제고되었으며, 물가의 9.5% 인하는 10억원 이상의 절약을 실현했다.

이와 같이 공업부문의 경제계획은 102.9%가 초과 달성되었으며 전년 대비 139.1% 성장하였다. 이를 생산부문별로 보면 전기부문 102.4%, 석탄부문 102.2%, 금속부문 115%, 기계공업부문 101.7%, 화학부문 110.2%, 조립공업부문 112.5% 각각 초과 달성하였다.

그러나 경공업은 계획의 90.2%, 광업부문은 96.1%의 달성에 그침으로써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지만 전년대비로 보면 123.2%, 광업부문 127.8%로 성장되었다.

제1차 2개년계획[편집]

第一次二個年計劃

조국의 자주독립과 민주발전의 보장 그리고 인민의 복지증진, 문화수준의 향상을 위해 실시된 북한의 제1차 2개년계획은 첫째, 일제지배하에 조성된 산업의 편파성 타파, 즉 산업부문의 완전자립성 확립 둘째, 토지개혁 성과의 확대와 농촌생산시설(경지면적, 관개시설) 증설 확장 셋째, 생활 필수품의 충족 공급과 도농간 상품유통의 원활 그리고 물가안정 넷째, 생산조직 합리화에 근거한 품질개선과 기업의 수익성 제고, 도급임금제 확대실시로 노동자 실질임금의 증대 등이라는 기본방향을 설정하였다. 이와 같은 방향은 1947년, 1948년의 기본방향을 답습하고 있는 것 같은 성격을 띠었으나 6.25전쟁으로 실행되지 못하였다.

이 계획의 기본목표는 비록 전쟁으로 무산되었지만 경제부문에서 1944년 생산수준에 도달하는 것을 기초로 하고 있다.

2개년계획의 주요내용을 산업부문별로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산업의 부흥발전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금속공업에 역점을 두고 원가절감과 생산증대에 주력하여 국영산업생산은 1948년에 비하여 1949년에는 143.2%, 1950년에는 194.1% 성장으로 1944년보다 33.2% 초과생산목표를 설정하였다.

기계공업부문에 있어서 차량공업, 기계공업, 변압기 공장, 농기구공장 등을 신설하고 1949년 총생산액을 1948년에 비해 199.3%, 1950년에는 309.9%로 증산할 계획을 수립했다.

농·수산업 부문을 보면 계획기간중에는 새로운 영농법을 적용시켜 총수확고는 1948년에 비해 1949년에는 101.8%, 1950년에는 107.9%의 증산을 계획하였다.

북한은 동 계획을 추진하기 위해 1948년 11월 유고, 루마니아, 헝가리 등과 경제적 관계를 설정하였을 뿐 아니라 1949년 3월 소련과도 경제, 문화협정 및 친선협정을 체결하였다.

전후복구 3개년계획[편집]

戰後復舊三個年計劃

북한이 '조국해방전쟁'이라 칭하는 한반도전쟁은 북한에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 이에 북한은 휴전이 완전 성립되자 1953년 8월 "모든 것을 전 인민경제 복구발전을 위하여"라는 제하에 전후 문제를 '조선노동당중앙위원회'에서 토론하고, 1954년부터 전후 국민경제부흥발전 3개년계획을 실시하였다.

경제복구 및 발전 3개년계획의 기본방향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첫째, 공업부문은 생산시설 및 제부대시설의 복구, 공업화의 기초확립에 중점을 주어 생산조직을 개선하고 지도사업을 강화한다.

둘째, 협동조합화 운동을 추진하여 농업의 생산성 증대를 꾀한다.

셋째, 수송수단의 복구운영으로 인민경제발전을 도모한다.

넷째, 생필품에 대한 주민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국영 및 협동조합의 상업을 발전시키며, 전체 식료품과 공업상품의 배급제를 철폐하고 자유상업 이행을 위한 조건을 조성한다.

다섯째, 주민의 후생증대를 위해 마을을 복구, 증대하고 건설에 따른 물질적 제공, 확대를 꾀한다.

여섯째, 앞으로 국방력을 더욱 강화한다.

이 기간 중 계획의 목표는 신속한 피해복구의 필요성을 반영하여 전쟁이전보다 매우 높게 설정되어 있는 것이 하나의 특징이다. 그리고 계획 자체를 공업, 인민의 생활, 도별 경제 및 문화로 세분화하여 경제계획을 작성, 시행함으로써 전쟁전의 계획보다 진일보한 특징을 지닌다. 동 기간중의 계획과 실적을 기본방향에 입각하여 부문별로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공업산업의 목표는 2년 8개월 만에 달성되었다. 1956년의 공업생산고는 1949년의 1.5배의 목표에 2.7배 증가하였으며, 생산수단 역시 1.3배의 목표에 1.7배 증가, 소비품은 2.1배 증가하였다.

둘째, 북한의 중공업은 총생산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957년에 농업보다 3.17배 높았을 뿐만 아니라 1947년 대비 61,7% 증가하였다. 이처럼 북한은 중공업 우선 성장의 확대재생산만이 식민지적 파행성과 기술적 낙후성을 극복하고 경제적 자립을 할 수 있다는 정책적 입장을 견지해 나갔다.

셋째, 북한은 또한 이 시기에 개발자원의 동원체제 구축을 바탕으로 급속한 성장을 이룩하였다. 북한은 적산기업과 친일자본가 소유기업의 몰수를 통해 공업의 국유화비율은 1949년 90.7%에서 1958년 98.6%로 증가시켰으며, 농업과 상업에서의 국유화 비율은 각각 3.2%, 56.5%에서 전후복구 기간의 급속한 과정을 통하여 1958년에는 100%의 전면적 국유화를 달성하였다.

거의 전산업부문에서 이룩된 국유화는 자원과 생산수단의 국유화뿐 아니라 상품분배과정까지도 포함하는 것이었으며 따라서 북한은 이 기간 동안 인적·물적 자원의 총동원체제를 구축했다고 분석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북한은 이 시기의 개발전략을 이념적, 정치적 자극을 통한 생산성 제고라는 특성을 부각시켰다. 북한은 본래 기술적 축적과 외국의 대규모 원조로 1차 5개년 계획을 달성하려고 하였으나 동기간에 소련과 동유럽국가로부터의 원조가 부진하고 '8월 위기' 등이 발발하여 '자력갱생의 원칙'을 채택하고, '천리마 운동'과 '청산리 방법'을 추진함으로써 생산성 증대를 도모하였다.

60년대의 경제개발계획[편집]

六十年代-經濟開發計劃

이 시기에 있어서 북한의 개발계획은 50년대 후반에 실현되었던 공업 성장을 정점으로 하여 제1차 7개년계획(1961∼1967)을 실시하였으며, 본 계획의 부진한 성과, 즉 대내 지향적 공업과 정책의 한계로 인해 3년간 계획기간을 연장하여 1970년에야 계획이 종료되었다.

'사회주의 공·농업국에서 사회주의 공업국으로의 이행'을 목표로 한 제1차 7개년계획의 기본방향은 다음과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다. 첫째, 중공업의 우선적 발전과 경공업, 농업의 동시적 발전 둘째, 과학과 문화를 전면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당의 기본노선 견지 셋째, 주민생활의 획기적 향상 넷째, 군사력의 강화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전면적인 기술혁신과 문화혁명 그리고 주민생활의 획기적 향상이라는 기본과제를 설정하여 본격적 경제개발계획을 수행한 북한은 대내외적인 문제로 1966년 노동당대회에서 방위력 제고의 필요성을 문제로 목표 연도를 1970년대까지 재조정하였으나 저조한 실적은 발표되지 않았고, 공업 총생산은 3.2배의 목표에 3.3배의 실적을 가져왔으며, 공업투자는 58% 증대계획에서 57%의 실적을 기록하였다. 이를 산업부문별로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공업부문과 사회주의 공업화를 실현하는 데 중점을 두면서 사회주의의 기술적 기초를 강화하여 제품의 질적 개선, 제품의 다양화, 원료기지 확보에 주력하는 동시에 기술개혁을 적극 추진하였다.

둘째, 농림수산업부문, 기술혁명과 문화혁명, 사상혁명을 강조하고 중공업의 지원하에 농업기술 개선에 주력하여 식량의 자급을 실현하였다고 발표했다.

셋째, 계획기간중 증대하는 수송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특히 철도운수부문의 발전에 주력하여 1,500㎞ 계획에 50%가 미달되는 850㎞의 전철차가 완성되었을 뿐 아니라 화물자동차 보유대수가 1960년 대비 1969년에는 2.8배 증가되었다.

이처럼 북한의 제1차 7개년계획은 본래의 계획목표에 미달했을 뿐 아니라 3년이라는 기간연장을 통해서 드러난 저조한 실적달성은 상당한 문제점으로 제기되었다. 이와 같이 북한의 60년대 개발정책이 현저하게 부진한 실적을 가져오게 된 데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존재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첫째, 전후복구 과정에서 크게 기여하였던 사회주의 가맹국들의 원조가 감소되었으며, 특히 1962∼1964년에는 소련원조가 단절되었었다.

둘째, 1962년 4대군사 노선의 채택과 남북관계의 악화 그리고 국제정세의 불안 등에 기인한 군사비의 지출증가로 군수산업과 중공업부문을 제외하고는 전반적으로 산업의 투자가 침체되었다.

셋째,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성장국면이 한계에 도달됨으로써즉, 경제개발의 초기단계의 사회주의에 있어서는 국가개발자원의 동원과 배분이 용이하여 다음 단계에 이르면 노동력의 재배치와 기존 유휴설비의 가동이 완료되면서 강제적 자원 동원체제의 효율성과 자본 및 기술의 중요성이 급격히 저하됨으로써 성장잠재력이 감퇴하는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70년대의 경제개발계획[편집]

七十年代-經濟開發計劃

이 시기에 있어서 북한의 경제개발계획은 60년대 경제개발계획과 성과로 인해 야기되었던 문제를 시정하고 사회주의의 물질적 기술적 토대를 굳건히 하기 위해 제1차 6개년계획(1971∼1976)과 제2차 7개년계획(1978∼1984)을 수행하였다. 이와 동시에 이 시기는 기술·문화·사상분야에 있어서 대내정책의 실패 그리고 군사비의 과다한 지출로 인한 산업구조적 모순 등으로 사회주의 체제의 정체기를 맞이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제1차 6개년계획[편집]

第一次六個年計劃

경제의 규모와 생산발전 속도와의 난해한 상호관계에 봉착하였던 북한은 1970년 11월 조선노동당대회에서 '인민경제 6개년계획'을 채택하였다. 동 계획은 '사상도, 기술도, 문화도 주체의 요구대로'라는 슬로건을 내세우고, 첫째 공업의 강화 발전, 둘째 기술혁명의 제고, 셋째 국민생활의 균형적 체계적인 발전 촉진, 넷째 국제혁명역량의 단결 강화 그리고 노동자들의 힘든 노동에서의 해방 등을 기본방향으로 추진되었다. 동 기간중 역점을 둔 것은 무엇보다도 공업내부 구조의 정비와 자주성의 강화를 통해 공업구조의 충실화를 기한다는 것이었으며, 특히 '노동자들의 힘든 노동에서의 해방'이라는 기본방향은 지금까지 추구되어 오던 개발정책이 외연적 성장방식에서 내연적 성장방식으로 전환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러한 요구에 의거하여 6개년 계획에서는 기술축적의 필요성과 기술개발에 역점을 두었으며 중노동과 경노동, 농업노동과 공업노동의 차이를 줄이고 여성을 가사부담에서 해방시킨다고 하여 3대 기술혁명노선이 채택되었다.

6개년계획기간 중 최대의 성과는 공업생산이 두드러지게 발전했다는 점이다. 같은 계획기간중 공업생산의 성장률은 계획목표였던 14%를 상회하는 16.3%라는 경이적인 수준에 달했다.

그리하여 1976년의 공업생산은 1970년에 비해 2.5배, 계획치 보다는 14%가 증가하였다. 그리고 생산재는 2.6배, 즉 계획치 보다는 13% 증가했으며, 소비재는 계획치보다 무려 20%가 증가하였다. 그리고 운수부문에서는 특히 철도운수 강화에 중점을 두어 계획기간중 총 471㎞에 이르는 철도노선이 신설되고 370㎞의 철도구간이 새롭게 전철화됨으로써 유통구조에 상당한 발전을 가져왔다고 발표하고 있다.

그러나 물론 모든 부문이 순조롭게 진행된 것은 아니다. 공업부문은 1년 4개월이나 앞당겨 달성되었지만 철강, 시멘트 부문 등은 본래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그리고 생산의 급속한 발전에 사회간접자본이 불충분하여 생산과 수송 사이에 마찰이 생겼으며 대외 수지면에서도 약간의 불안정한 상태가 발생되었을 뿐 아니라 각 산업간의 불균형, 과학기술의 지체, 생산의 높은 비용 등의 문제점이 나타났다.

제2차 7개년계획[편집]

第二次七個年計劃

이 새로운 장기계획은 70년대와 80년대의 이정표적인 의미를 띠면서 다음과 같은 주요방향을 설정했다. 첫째, 인민경제의 주체화, 현대화, 과학화를 근간으로 하여 경영관리를 과학화하며 둘째, 기술혁명을 추진하고 셋째, 절약운동을 실시하고, 생산원가를 인하하며 넷째, 운송의 근대화를 이룩하고 마지막으로는 독립채산제를 강화한다는 것 등이었다. 이와 같이 동 계획의 기본방향을 검토해 보면 자주적 기술개발, 창조적 기술의 개발을 중심으로 한 자립적 민족경제의 확립을 지향해야 한다는 명제가 주축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대내 지향적 공업화의 정책을 통한 경제개발정책이 가지는 한계성이 함축되어 있다.

북한이 제2차 7개년계획에 대한 성과를 공식적으로 발표를 하지 않았지만 공업총생산고는 1.95배 증가, 소비재는 1.32배 증가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국민소득은 또한 계획목표에 미달되는 1.8배의 증가에 머물렀다.

80년대의 경제개발계획[편집]

八十年代-經濟開發計劃

이 시기에 북한은 '사회주의 건설 10대 전망목표', '4대 자연개조사업' 등 새로운 목표를 제시하고 경제건설에 박차를 가하였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1978년 시작된 제2차 7개년계획은 계획대로 1984년에 종료되긴 하였으나 전반적인 실적은 목표에 크게 미달하여 2년간 조정기를 거친 후에 김정일의 주도하에 1987년에 제3차 7개년계획을 발표하였다.

1987년 4월 21일 최고인민회의 제8기 2차회의에 채택된 제3차 7개년 계획은 그 기본과업으로 제2차 7개년계획과 같은 '경제의 주체화, 현대화, 과학화'를 제시하고 있으며, 국민소득 1.7배(연평균 7.9%), 공업생산 1.9배, 농업생산 1.4배 증대, '10대 전망목표' 실현 등을 계획목표로 설정하고 있다.

이처럼 제3차 7개년계획은 그 추진방침이 제2차 7개년계획과 크게 다를 바 없고, 특히 계획목표는 몇 개 분야를 제외하고는 이전의 경제계획에 비해 하향 책정되어 있는 점이 특징인데, 이는 북한의 경제상황이 그만큼 어려우며 또한 이를 타개할 수 있는 뚜렷한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에도 제3차 7개년계획에서는 기술혁신문제를 동 계획의 중요과업 중 최우선과제로 제기하고 있으며, 무역과 대외경제협력의 확대발전을 크게 강조하고 있는 등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점들이 발견되고 있다.

이러한 점들은 특히 기술혁신을 종전처럼 노력동원의 보조수단으로서가 아니라 '경제개발의 관건'으로 보고 있으며, 또 무역과 대외경제협력이 기술혁신의 중요한 방법이 된다는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한 변화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러한 제3차 7개년계획의 주요 정책방향과 북한경제가 처해있는 어려운 상황을 감안할 때, 북한은 동 계획기간 중에 특히 대외경제부문에 있어서 많은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70년대 중반부터 계속되어온 외채문제를 비롯, 경제체제의 경직성 그리고 김정일 승계체제 구축이라는 정치적 부담이 대외개방의 제약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어, 북한의 무역과 대외경제 협력 확대전망이 그다지 밝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