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통상·산업/한국의 산업경제/한국경제의 전개과정/광복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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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혼란기[편집]

經濟混亂期 (1945∼1953)

1930년대 중반 경까지 공업이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은 정미업(精米業)이나, 조면업(繰綿業) 등을 비롯하여 주로 농업생산에 부수된 소규모의 가공업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던 중 만주사변 발발을 계기로 일제가 대륙침공을 위한 병참기지로서 우리나라의 입지조건을 재인식하게 되는 한편, 자국(自國) 내에서 포화상태에 달한 일본자본의 우리나라의 풍부한 자원과 동력의 개발가능성, 그리고 노동력 이용에 눈을 뜨게 됨에 따라 우리나라에 대한 군수산업 위주의 공업이식을 서두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제철, 제련, 화학, 방적공업 등 주로 소재공업(素材工業)과 그 동력원으로서의 대발전소 건설이 급속히 진행되었으며 공업생산액도 1936∼43년 사이에 약 3배로 증가되는 발전상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공업발전은 전시의 요구에 의한 일본 공업의 보충적 역할에 그친 것이고, 또한 주요 공장의 대부분이 일본 기업의 분공장(分工場) 형식으로 설립됨으로써 주로 두 가지 면에서 큰 결함을 갖게 되었다.

즉, 첫째로 주요 공업의 자본과 기술은 물론 원료 및 반제품 등 생산계열까지도 일본에 종속되어 공업생산구조에 있어 자립성을 결여하게 되었다. 광복 이전의 공업자본 구성에 있어 일본 자본이 94%라는 절대적 비중을 차지한 사실만 보아도 이를 쉽게 알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우리나라 공업의 보충적 성격에서 오는 필연적인 결과로, 각 산업간에 구조적인 불균형성을 띠게 된 점이다. 1940년의 공업구조를 보면, 기계 및 금속공업의 생산비중이 각각14% 및 6%로 불균형상태를 나타냈으며, 또한 공업자급률에 있어서도 전체 평균이 73%인 데 비하여 특히 기계부분은 25%에 불과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중공업의 절대규모 자체도 과소한 편이었다.

이와 같은 산업구조의 불균형성은 광복과 더불어 국토가 양단되자 한층 심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남농북공(南農北工)'이라는 말이 단적으로 표현하듯이 우리나라의 산업분포는 자연조건상 중공업과 전력이 북한에 편재된 반면, 남한은 농업과 경공업 부문에서 우위성을 지니게 되어 일종의 지역적 분담형태로 구성되어 있었다. 광복 이전의 남북한별로 산업분포 상황을 보면 북한에서는 거의 100%의 철광 및 석탄자원, 90%의 금속 및 82%의 화학공업 생산액, 그리고 86%의 발전설비 등을 점유한 데 반하여, 남한에서는 방적공업 85%, 식품공업 65% 등 주로 경공업 부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취약한 기반 위에 선 우리나라의 산업은 광복 후의 과도기적 혼란으로 말미암아 그나마의 생산활동도 크게 위축되는 상태가 한동안 지속되었다. 우선 남한 총 공장수의 85% 이상을 차지한 귀속사업체(歸屬事業體)가 오랫동안 관리 부재상태에 빠졌던 데다가, 그 후에도 관리인의 기술 및 경험 부족, 자금고갈 등의 애로와 과도기적 군정(軍政)하에서의 정책 미비로 그 복구 운영이 부진하였다.

이와 동시에 공업구조의 불균형 상태도 한층 더 심화되어 1948년의 각 부문별 공업생산액의 구성을 보면 섬유공업이 41.0%, 식품공업이 12.5%로서 이 양자만으로도 과반을 차지한 반면에 금속 및 기계공업의 비중은 각각 4.2%, 6.4%로 줄어들고 있다. 여기에 1948년 5월에 일어난 북한으로부터의 송전(送電) 중단은 이후 남한의 산업활동을 저해하는 또 하나의 고질적인 원인이 되었다.

1948년 8월, 대한민국정부 수립을 위하여 제정된 우리나라 최초의 헌법에는 특별히 경제조항이 마련되어 새정부가 지향할 경제체제에 관하여 규정하고 있다.

끝내 군정 또는 과도정부하에서는 경제기구를 체계적으로 정비하지도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시책 자체도 자유와 통제가 원칙없이 임기응변적으로 혼용되어 경제계획이 부재상태나 다름없었다. 그러므로 새 정부의 수립과 함께 이들 경제기구의 체계화는 물론 관리체제를 위한 계획기구의 창설이 긴요하였다. 그리하여 경제계획에 관한 종합통일기구로서의 '기획처(企劃處)'가 신설되었으며, 아울러 그 자문기관으로서 '경제위원회'도 조직되었다.

새정부는 '농지는 농민에게 분배한다'는 헌법 조항에 의거하여 이를 실현하기 위한 법안 작성을 우선적으로 추진하였다. 이 법안은 1949년 6월에 국회에서 통과하여 1950년 4월부터 시행에 들어가게 되었다. 소작제(小作制)를 철폐한 토지개혁의 단행은 반봉건적(半封建的) 농촌사회구조를 근대화하는 데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산업의 대종(大宗)을 이룬 농업부문 생산력의 증대를 촉진하는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경제재건기[편집]

經濟再建期 (1954∼1960)

6·25전쟁 이후 3년간에 걸쳐 입은 전화는 총액 30억 달러를 초과했으며, 공익시설을 제외한 일반 공업시설의 11.7%를 잃고, 주택의 16.9%를 소실당하였다.

여기에서 한 가지 유의할 사실은 '인플레이션' 사정이 종전과는 전혀 달라졌다는 점이다. 즉 6·25전쟁 전까지는 통화발행고 추세에 대한 물가 상승률이 통화 증가율에 선행되었다는 것으로, 말하자면 인플레이션이 최악의 국면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사변 3년 동안의 한국 경제는 전면적인 파괴를 당하였을 뿐 아니라, 재정금융정책의 전면적인 파괴를 국민경제는 도산 지경에까지 다다르게 되었는데, 또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중대한 문제는 1949년에 실시한 바 있는 토지개혁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실패하여 한국 경제가 지니고 있던 유일한 기둥인 토착(土着)자본마저 고갈당하고 말았다는 점이다.

휴전 후의 각종 외원(外援) 및 내자(內資)에 의한 투·융자 활동은 국내 공업의 양적 성장을 급속도로 증가시켰다. 특히 전산업에 대한 공업화의 비중이 점차 증가되었다는 사실은 자주(自主) 한국 경제의 재건에 있어서 매우 만족할 만한 사실이다.

그 내역을 살펴보면 광복 전의 수준에는 미흡하나 휴전 후 8년 동안, 연평균 10.8%라는 전례없는 성장은, 전쟁 후의 폐허를 감안할 때 주목할 만한 발전추세이다.

1953∼60년대 한국 경제는 인접국의 발전추이에 비춰 볼 때 부진한 발전이기는 했으나 1954년도 국민총생산면의 성장률이 6.7%, 1955년 5.9%, 1956년 10.1%, 1957년 8.1%, 1958년 6.5%, 1959년 4.8%, 1960년은 2.5%에 달했다.

자립경제기반 구축기[편집]

自立經濟基盤構築期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기간 第一次經濟開發五個年計劃期間

1960년대 전반기에 해당하는 1961∼1966년 기간은 우리나라 산업경제의 자립적 경제 기반을 구축하는 중추 요인으로서의 공업화가 본격적인 기능을 발휘한 시기였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기간에 해당하는 이 기간에 와서야 비로소 산업정책이 종합적인 테두리 속에서 구체화되기 시작하였다.

1950년대까지의 우리나라 공업활동은 시장가격기구를 매체로 하는 자유경쟁체제가 지속되어 오기는 하였으나 수요변동에 대응되는 생산기반의 효과적 확충사업은 자본 및 기술부족, 정책부재 등 복합적 인과관계 때문에 억압당해 왔다.

그러나 1962년을 초년도로 한 제1차 5개년계획은 종전까지의 공업화 유형과 추진속도를 현저하게 별개의 것으로 만들었다. 즉, 시멘트, 비료, 정유와 같은 새로운 근대공업을 개척하는 한편 각종 화학섬유 등 기초적 자재 내지 중간재공업까지도 본격적으로 개발하는 단계까지 들어서게 하였다. 또한 생산체제 내지 기업체제면에 있어서도 국제수준과 연계되는 방향에서 적정규모 또는 양산체제(量産體制) 문제가 구체적으로 논의되기에 이르러, 우리나라 공업의 면모를 근대적인 것으로 혁신하게 되었다. 또한 이 기간중의 각종 계획산업들이 비록 수입대체적(輸入代替的)인 성격을 띠기는 하였으나 정부가 공업화의 추진 주체로 등장하여 중요산업을 계획적으로 개발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공업화의 유형이 이른바 계획주도형으로 전환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공업화를 통한 국민경제의 발전을 표방하고 있는 바와 같이 1961∼1966년 기간을 계기로 하여 자본 및 기술부족, 산업환경, 즉 사회간접자본의 미비, 시장협소와 같은 제반 제약조건과 애로를 수반하면서도 지속적이고 본격적인 공업화 단계에 들어서게 되었다는 점에서 이 시기의 의의를 크게 평가하여야 할 것이다.

제1차 5개년계획 기간에 해당하는 1961∼1966년에 있어서의 중점적인 공업화 정책은 생산의 양적 확충이란 점에서뿐만 아니라 신규 산업의 개발을 통한 공업구조 개선이라는 질적 측면에 있어서도, 우리나라 공업의 모습을 근대적인 것으로 변모시켰다.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기간[편집]

第二次經濟開發五個年計劃期間

자립경제를 확립하기 위한 1961∼66년의 경제개발 1차계획을 통하여 우리나라 경제는 당초의 목표 7%를 크게 상회하는 연평균 8.3%의 고도성장을 이룩하였으며, 이와 같은 고도성장은 연평균 15%가 넘는 급속한 공업성장에 의하여 주도되었다. 이에 따라 산업구조가 크게 개선되었으며, 특히 수출실적의 비약적인 증대와 더불어 수출상품 구조는 종래의 1차산품 중심에서 공산품(工産品) 중심으로 변모하였다. 이 기간에 정유공장을 비롯하여 비료, 시멘트 등 기간산업이 신설 내지는 대폭 확장되었고, 전력과 운수 등 사회간접자본시설도 크게 확충되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고도성장은 한편으론 성장에 수반되는 새로운 문제를 제기시키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국민경제 체질의 취약성을 나타내는 계기가 되었다.

국내축적자본이 빈약한 상황하에서의 고도성장의 추구는 투자재원의 50% 이상을 해외저축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고, 그 결과 개발 인플레의 압력과 외자도입에 따르는 원리금 상환부담의 가중(加重)문제가 대두되었다. 주요 수입대체산업의 건설을 주축으로 하는 급속한 공업성장은 여타 부문의 상대적인 낙후를 불가피하게 함으로써 산업간 및 산업 내부의 각 부문간에 불균형을 초래하였고, 이에 따라 산업의 2중구조가 심화되었다. 소비재 내지는 최종제품에 치중된 수입대체산업의 건설은 시설재 및 중간원자재의 수입수요(輸入需要)를 크게 증대시킴으로써 비약적인 수출신장에도 불구하고 무역수지 적자는 더욱 확대되었다.

새로운 경제질서의 확립을 위하여 단행된 금리 및 환율의 현실화와 '네거티브 리스트 시스템'에 의한 자유화 조치는 차관 원리금의 상환 부담과 더불어 기업 부실화의 부작용을 수반하였으며, 대부분의 수출산업은 장기적인 국제경쟁기반을 구축하지 못함으로써 수출지원에 더욱 의존하게 되었다. 경제규모가 확대됨에 따라 동력 및 수송부문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애로현상도 계속적인 경제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이 아닐 수 없었다.

한편 1967∼1971년에는 기업활동을 건전한 방향으로 유도하기 위하여 유통구조 개선에 의한 상품거래질서 확립에도 주력하였는데, 특히 1968년에는 독과점상품에 대한 폭리문제가 대두되어 주요 공산품에 대한 원가조사가 실시되었으며, 국내 최초로 '상업센서스'가 실시되었다. 이어 1969년에는 IMI(국제시장조사연구소)를 초청하여 주요 상품에 대한 유통구조를 조사케 하였으며 1970년에는 유통구조 근대화계획을 부분적으로 수립한 바 있다.

1967∼1970년은 그동안의 양적인 확대에 치중되었던 고도 성장정책에 수반된 각종 문제가 철저하게 표면화된 시기였고, 정부의 경제정책은 이들 문제의 해결에서 시종되었던 기간이라고 할 수 있다.

공업구조를 고도화하고 공업생산을 배가(倍加)시킨다고 하는 2차 5개년계획의 기본목표를 달성함에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목표달성에 소요되는 투자재원을 확보하는 데 큰 비중을 두었고, 그 결과 외자도입 및 내자조달(內資調達)이 과거 어느 때보다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리하여 1967년부터 1970년까지 연평균 21.4%의 공업성장이 이루어졌고, 이것은 그대로 우리나라 경제의 고도성장을 주도해온 것이다.

그러나 워낙 취약한 공업기반 위에서 중화학공업을 중심으로 한 공업화를 급속히 추진한 결과, 외형적으로는 공업성장이 현저하게 이루어진 반면, 경제구조의 왜곡도 급속히 확대되었다. 즉 여전히 높은 투자재원의 해외의존도, 무역수지 악화와 수출입 의존도의 증대, 산업구조상의 불균형(제1차산업의 정체와 제3차산업의 급성장), 노동자의 궁핍화가 증대되는 사회적 불균형의 확대 등 제2차계획은 경제구조의 왜곡화와 기형화를 초래하여 산업구조의 근대화와 자립경제의 확립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런 문제점으로 제3차계획에는 자립경제의 구축이라는 종래의 목표와 함께 '성장·안정·균형의 조화', '지역간의 균형적 발전', '중화학 공업의 건설'이 새로운 목표로 등장했다.

제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기간[편집]

第三次經濟開發五個年計劃期間

제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기간(1972∼76)에는 국제통화체제의 동요, 자원파동 및 뒤따른 세계경제 불황에도 불구하고 높은 투자율의 지속과 수출의 신장률은 연평균 11%의 고율을 유지하였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의 국민총생산은 1975년 불변시장가격으로 1961년의 54억 달러에서 1975년에는 188억 달러로 연평균 2.3% 증가하여 1975년 35백만 명에 달하였고 1인당 실질국민총생산은 연평균 7% 증가하였다. 경상 달러화로 표시한 1인당 국민총생산은 1991년 83달러에서 1995년에는 532달러로 증가하였다.

한편 제조업내 업종별 성장추세를 보면, 경공업은 화의류(靴衣類) 및 장신품(38.9%), 피혁 및 피혁 제품(32.8%), 고무제품(32.4%), 섬유(25.2%) 등이 높은 증가를 보임으로써 전년도 15.2%보다 높은 23.3%의 증가를 보였다. 중화학공업은 전기기기(58.8%), 일반기계(41.9%), 1차금속(39.6%), 금속제품 등의 높은 증가로 전년의 9.6%에서 30.0%의 높은 증가율을 보임으로써 공업구조도 괄목할 만한 개선을 보였다. 따라서 공업고도화의 지표인 호프만(Hoffmann)비는 경공업 59.8%, 중화학공업 40.2%로 개선되었다.

우리 경제는 1973년의 자원파동을 겪으면서도 높은 투자율의 지속과 수출 증대로 지난 5년간 연평균 11%의 높은 성장을 달성하여 3차 계획목표를 훨씬 초과하였다. 1972∼76년의 투자율은 27.0%를 유지하여 1967∼71년의 26.3%를 상회하였고 수출은 연평균 31.7% 증가하여 수출규모는 지난 5년 사이에 4배 확대되었다. 수출품목 중 공산품 수출은 연평균 41% 증가하여 제조업부문의 성장률을 연평균 21%로 지속시켰다. 그러나 이같은 성장률을 지속하기 위한 투자율의 증가는 해외저축률을 증대시켜 투자재원의 자력조달을 4차계획의 과제로 남겨 주었다. 제3차계획기간에는 조선·철강·의류·피혁가공품 등이 개발되었다. 조선은 수출산업으로 육성되었고 1973년부터 본격적으로 생산을 시작한 포항종합제철은 가동시부터 국제경쟁력을 확보하여 수입대체와 동시에 수출 확대에도 기여하였다. 공산품생산액 중 5%를 점하고 있는 전자공업부문도 수출주도산업으로서 공업의 고도화에 기여하였다. 섬유를 중심으로 한 경공업제품은 수출총액 중 56%를 차지하여 수출의 대종을 이루었고, 상품의 다양화와 품질의 고급화가 착실히 진행되었다.

제4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기간[편집]

第四次經濟開發五個年計劃期間

제4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은 '성장·형평·능률'의 이념하에 자력성장구조를 확립하고 사회개발을 통하여 형평을 증진시키며 기술을 혁신하고 능률을 향상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

제4차계획의 주요지표는 그 기간의 연평균 성장률 9.2%, 국민총생산의 신장률 1.8배, 목표연도(1981)의 1인당 GNP 1,512달러, 연평균 수출증가율 16.0%, 목표연도의 연간수출액 141억 6,500만 달러, 외자도입 예정액 100억 달러 등으로 설정되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1978년 엔화상승 쇼크, 79년의 제2차 오일쇼크와 이에 따른 국내불황으로 난관에 직면하여, 실질성장률이 둔화하기 시작하여 80년에는 -5.2%로 사상 최저성장을 기록했다.

또한 계획기간 중의 실질성장률 확정치는 1977년 12.7%(목표 10.0%), 78년 9.7%(목표 9.0%), 79년 6.5%(목표 9.0%), 80년 -5.2%(목표 9.0%), 81년 6.2%(목표 9.0%)이며 기간중 연평균 6.0%로 목표치 9.2%의 2/3의 달성에 그쳤던 것이다. 즉 외자·수출주도형 개발계획의 전개과정에서 누적된 차관경제(대외의존 경제구조) 모순이 분출되어 고도성장에서 저성장으로 이행이 불가피했던 것이다.

80년대의 경제발전[편집]

80年代-經濟發展 제5차 경제사회발전 5개년계획

第五次經濟社會發展五個年計劃

제5차 경제사회발전 5개년계획(1982∼86)은 1978년 이후의 격심한 인플레이션에 직면해 물가안정을 최우선의 과제로 삼았다. 또한 외자의존·수출주도형 경제개발 정책에서 누적되어온 산업간 불균형 성장, 노동자 궁핍화의 심화를 개선시키기 위하여 경쟁력있는 산업을 육성하고 지역간·계층간 격차를 완화시키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런 정책이 구체화되어 82년 이후로는 지속적인 인풀레시대를 청산하고 저물가시대로 물가안정을 이룩했다. 80년 연말 기준 42%에 달했던 도매물가 상승률이 82년 이후로는 2% 이내로 안정되기 시작했다. 또한 소비자 물가 상승률도 80년 32%에서 82년 이후로는 2∼6% 이내의 상승률로 안정세를 회복했다. 그러나 제2차 석유파동 이후로 선진국의 장기적 경기침체와 이에 따른 수출주도형 한국경제의 수출 둔화·중화학공업 가동률의 저하로 수출은 급격히 감소하고 수입은 증가되어 무역수지 적자는 증가되었다. 또한 세계적 인플레이션의 만연으로 국제금리가 상승, 이 결과로 외자의존형 경제개발을 해온 한국에는 대외이자 지급부담이 가중되었다. 이에 따라 79년부터 경상수지 적자가 늘어나고 이에 상응하여 외채규모도 폭발적인 증가가 있게 된다. 즉 79∼85년의 7년 동안 우리나라 총외채의 순 증가분은 319억 달러, 총외채 규모 467억 달러에 달하며, 우리나라는 개발도상국 중 세계 4위의 채무국이 되었다.

80년대 초에는 대외여건의 악화와 수출주도형 경제의 모순에 기인해 낮은 경제성장을 기록했으나 85년 이후 유가하락·금리하락·미 달러하락 등 3저 현상에 힘입어 수출이 활기를 되찾고 경상수지는 흑자를 기록했다. 85년 이후 대외경제여건의 호전으로 80년에 1,589달러이던 1인당 GNP가 1986년도에는 2,503달러로 크게 증가했다. 실질 경제성장률도 80년도의 마이너스 성장에서 83년 12%, 84년 9.3%, 85년 7.0%, 86년 12.9%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다.

제6차 경제사회발전 5개년계획[편집]

第六次經濟社會發展五個年計劃

제6차 경제사회발전 5개년계획은 '능률과 형평을 토대로 한 경제선진화와 국민복지증진'을 목표로 하여 경제사회의 제도발전과 질서의 선진화, 산업구조의 개편과 기술입국의 실현, 지역사회의 균형있는 발전과 국민복지의 증진을 추진과제로 선정하였다. 그리고 주요정책 방향을 외채부담 완화, 물가안정 기조의 견지, 산업구조조정 촉진, 국민 복지의 증진과 형평 제고, 지방경제의 활성화, 시장경제제도와 질서의 확립에 두었다. 그 결과 경제성장률은 목표 7.5%를 상회하여 10%를 달성하였으며, 실업률은 2.4%를 기록하여 고용안정을 가져왔다. 저축증대에도 노력한 결과 국내저축률은 당초 예상보다 높은 36.1%에 이르렀다. 한편 수출의존도는 계획보다 낮은 26.4%로 떨어져 경제기반이 보다 탄탄해졌다. 국제수지면에서 수출은 계획보다 늘어났으나 수입이 더 크게 증가하여 87억 달러의 적자를 기록, 흑자기조 정착에는 실패했다. 산업구조는 제조업의 비중이 91년 28.5%로 낮아지고, 농림어업도 7.7%로 떨어진 반면, 기타 서비스 부문은 크게 늘어났다.

제7차 경제사회발전 5개년계획[편집]

第七次經濟社會發展五個年計劃

제7차 경제사회발전 5개년계획(1992∼96)은 자율과 경쟁에 바탕을 두어 경영혁신·근로정신·시민윤리 확립을 통해 21세기 경제사회의 선진화와 민족통일을 지향한다는 기본목표 아래 기업의 경쟁력 강화, 사회적 형평 제고와 균형 발전, 개방화·국제화의 추진과 통일기반의 조성 등을 3대 전략으로 삼았다. 이 기간 동안 연평균 7.5%의 실질경제성장률을 달성하기 위해서 기업의 소유집중 분산, 산업구조조정의 원활화, 기술개발·정보화 도모, 그리고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투자를 확충시켜 나갔다. 또 서민주택 공급을 확대하고 사회보장·복지제도를 확충하고 개방화·국제화를 위해서 금리자유화, 농산물·서비스시장 개방, OECD 가입을 이루었다. 또한 남북경제협력도 적극 추진하여 통일기반을 조성해 나갔다.

경제개발계획의 조건·성과[편집]

經濟開發計劃-條件·成果경제개발계획이 고도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첫째 높은 교육열에 의한 저렴하고도 양질인 노동력이 풍부했다는 점, 둘째 기업의욕이 왕성하였다는 점, 셋째 사회 간접자본의 확충, 베트남 특수, 중동건설 진출에 의한 수요증대 및 저임금과 정부 지원, 넷째 유리한 국제경제환경 등이었다.

고도성장의 성과로서는 첫째 경제규모의 확대와 수출증대를 들 수 있고, 둘째 한국경제에 대한 국제적 위상이 높아졌으며, 셋째 고용증대와 소득증대, 넷째 인재 양성(인력개발·해외유학·해외 두뇌 유치)과 경영관리 능력증대(제2세 경영자의 등장과 그들의 고학력화와 청년화, 미국식 경영방식의 모방), 다섯째 북한의 경제력을 압도하였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