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통상·산업/한국의 산업경제/한국경제의 전개과정/일제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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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합방 이후 조선회사령 폐지 이전의 경제[편집]

韓日合邦以後 '朝鮮會社令' 廢止以前-經濟

한국이 일본 자본주의에 의하여 강압적으로 합방된 이래 일본의 한국진출은 현저하게 나타났던 것이다. 일본인의 이주수(移住數)는 해마다 증가하였고, 양국간의 무역액은 나날이 증가해 갔다.

조선총독부『통계연보』에 의하여 일본인의 이주상황을 보면, 합방된 1910년에는 171,000여명이었던 것이 10년 후인 1920년에는 347,000여명, 다시 10년 후 만주사변 발발 직전인 1930년에는 501,000여명으로 증가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에 있어서 양국간 무역액도 증가하여, 1910년에는 수출입총액 40,726,000여원이었던 것이 1920년에는 518,800,000여원에 달하였다. 이와 같이 일본 자본주의의 한국에 대한 경제적 관심은 어디까지나 한국을 그들의 상품판매시장 내지 원료공급지로 발전시키는 데 있었다. 그리고 한국의 대외무역은 75%∼87%가 대일(對日)무역이었으므로 한국의 일본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는 나날이 강화되어 갔다. 이 20년 간에 있어서도 일본 자본주의의 한국 식민지에 대한 공업정책은 1920년경을 전환기로 하여 약간의 변화가 있었던 것이다. 즉 1920년까지의 10년간은 대체로 통감부 시대의 정책을 답습하였고, 1920년 이후에는 그 정책을 다소 변경하여 한국에도 부분적인 근대공업의 건설을 추진시켰던 것이다.

통감부 시대의 정책이란 것은, 일본자본주의 모국(母國)과의 경쟁적인 산업은 원칙적으로 한국 내에 건설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책적인 의도를 단적으로 나타낸 것이 1910년 12월에 조선총독부령으로 공포한 '조선회사령'이었다. 이 회사령의 내용은 한국 내에 있어서의 회사설립이나 또는 외국에서 설립된 회사가 한국에 본점 내지 지점을 설치하고자 할 경우에는 총독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규정한 것이다. 회사령 발표로부터 1919년에 이르는 사이의 설립 회사 수는 연평균 27개 사에 불과하였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특정한 산업부문에 한해서만 일본의 자본진출을 허용하였는데, 이 특정산업부문이라는 것은 토지투자 및 농산물증산을 위한 수리시설투자, 농산물 및 수산물 가공업, 광산개발 등 일본공업에 대한 원료가공 또는 일본 공업과 비경쟁부문에 속하는 것이었다.

조선회사령 폐지 이후 1930년 이전의 경제[편집]

'朝鮮會社令' 廢止以後 一九三十年以前-經濟

전술한 바와 같이 일본 자본주의의 대한(對韓) 공업정책은 1930년경을 전환기로 하여 약간의 변화를 가져왔고, 또 '조선회사령'은 1920년 3월에 이르러 철폐되었던 것이다. 회사령이 철폐된 이유는 이미 그 당시엔 회사령을 존치(存置)할 필요성이 없어졌고, 오히려 이것은 더욱 고도한 일본 자본주의의 발달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이에 대응해서 1920년에는 한일간의 관세장벽을 철폐하여 일본과 동일한 관세법을 실시함으로써 일본 자본의 한국 진출을 용이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1920년 이후 회사령 철폐, 관세법 실시 등의 제조건에 의하여 한국내에 있어서의 기업투자는 성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1920∼1930년에 이르는 10년간에 설립된 회사의 수에 있어서는 약 4배의 증가를 보여주고 있으나, 회사의 불입자본(拂入資本)액에 있어서는 불과 1.6배의 증가를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이 시기에 있어서의 설립회사가 일반적으로 소규모의 것이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이 시기의 근대적 공업발전 과정에 있어서 한국인의 민족자본은 어떠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1931년 현재 한국 내에 있어서의 공장 총수는 4,602개 사(社)이며, 그 가운데 일본인 소유 공장은 2,182개 사로서 전체 수의 46.2%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한국인 소유공장은 2,424개 사로서 전체수의 52.7%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당시 한국인의 기업활동이 일본인보다 우세한 지위에 있는 것처럼 생각되나, 이러한 공장수는 5명 이상의 직공을 고용하는 공장을 총망라한 것이므로 공장수가 늘어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한국인 공장 중에는 재래식 수공업공장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다음에는 한일합방 이래의 기업자본을 민족별로 나누어 그 발전 추세에 대하여 살펴 보기로 한다.

한일합방이 되던 1910년도의 기업회사 총수는 152개 사(社), 자본금액은 1,590원이었는데, 그 중에서 일본인 회사수는 전체의 71.7%, 자본액은 전체액의 31.0%였으며, 한국인 회사는 회사수가 17.1%, 자본액이 10.5%였고, 한국인과 일본인과의 합동회사는 회사수 10.5%, 자본액 50.9%의 비율로 되어 있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일본인 회사가 그 회사수에 비해서 자본액이 적은 것은 당시 한국에 들어온 일본인 자본은 아직도 영세자본(零細資本)이 많았기 때문이며, 한일인(韓日人) 합동회사가 비교적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었던 이유는 당시의 한국 정계(政界)가 불안정하였기 때문에 일본인 자본은 한국인과의 공동명의로 자본을 보호하려는 데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일합방 10년이 지난 1920년에 이르러서는 일본인 회사의 자본액이 급증하여 전체액의 83.1%에 달하였고, 회사수에 있어서도 76.1%로 증가되었던 것이다. 이에 반하여 한국인과 일본인의 합동회사는 그 회사수나 자본액에 있어서 다같이 감소되어 회사수는 5.3%, 자본액은 5.2%로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한일합방 이래 한국에 있어서의 일본인 세력이 확고해짐에 따라 일본인들은 한국인과 합동하여 자본의 보호를 받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1920년도의 한국인 회사는 그 회사수에 있어서는 18.2%로 약간 증가하였으나 자본액에 있어서는 10.5%로 그 비율이 상대적으로 감소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1929년도의 통계에서는 다음과 같은 현상을 볼 수 있다. 즉 일본인 회사의 수는 70.1%인 데 비하여 그 비율이 각각 감소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제1차대전 후의 경기침체로 인하여 일본 내의 중소기업이 그 활로를 찾아 한국에 다수 진출하게 되어 회사당 평균자본액이 감소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인의 회사수는 그 비율이 20.5%로 높아졌으나 자본액의 비율은 6.3%로 저하되었다. 이것은 1920년 4월을 기하여 '조선회사령'이 철폐되어서 한국인의 기업열(企業熱)이 높아지기는 하였지만 민족자본의 축적이 빈약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한일인(韓日人) 합동회사의 비율이 다시 증가하고 있으며 그 회사수의 비율 9.3%에 대하여 자본액의 비율 31.0%로서 매우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1920년 이래 소수의 일본인 대자본가가 한국에 진출하여 한국인의 기업체를 점차 잠식하기 시작한 데 그 원인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의 한국인 기업체는 자금난이나 또는 기술 부족으로 인하여 일본인 대자본가와 제휴하지 않을 수 었었던 형편이었다.

이상에서 본 것은 당시 한국 내에 본점을 둔 회사만을 살펴본 것이다. 그런데 1929년까지 본점은 일본이나 외국에 두고 지점만을 한국에 두고 있었던 회사가 104개로서 그 자본총액은 31억원 이상에 달하여 한국 내에 본점을 둔 회사자본액의 3배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공업의 근대화 과정[편집]

工業-近代化過程 (1930∼1945)1930년대에 이르러서는 일본 자본주의의 한국에 대한 자본진출이 차차 적극화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는 비단 군소자본뿐만 아니라 일본의 독점자본이 한국에 진출하여 근대공장의 설립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는 데 특징이 있는 것이다.

1927∼28년 경부터 일본의 산업계는 이미 불황상태에 직면하게 되었고, 특히 1929년에 세계공황이 발발하자 이 영향을 받아 더욱 심각한 불황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사태를 타개하기 위하여 일본 산업계는 안으로는 기업의 합리적 경영을 꾀하면서 조업(操業)의 단축을 단행하였으며, 밖으로는 각 기업체 간의 협동체를 조직하여 자발적 통제를 감행하는 한편 유휴자본(遊休資本)의 해외 진출을 기도했다. 산업계 자체의 이러한 움직임에 병행하여, 일본 정부에서도 통제의 강화를 촉진하고자 1931년에는 '중요산업통제법(重要産業統制法)'을 공포하고 자유경제로부터 통제경제로의 전기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당시 일본정부로 하여금 이와 같은 정책적인 전환을 단행케 한 데에는 또 하나의 다른 이유도 있었다. 즉 1931년에 만주사변(滿洲事變)을 일으킨 일본 제국주의는 그 당시에 이미 중국 본토의 침략을 결심하고 있었으로 중국 침략을 목적으로 하는 전시경제체제를 확립하고자 한 비상조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일본 산업계의 자체적 요청과 일본 제국주의 지도자들의 정책적 의도가 상호 결합되어 일본의 산업계는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각종 기업체의 조업단축(操業短縮) 내지 판매협정(販賣協定) 등으로 경제체제를 강화하여 갔던 것이다.

이와 같은 통제조직하에 일본의 대기업은 점차 독점체를 이루어 나갔고 반면에 중소기업은 몰락의 운명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일본 국내에서 몰락해 가고 있던 중소기업이 그들의 활로를 찾아 당시 통제권 외에 있었던 한국 식민지에 진출하였고 또 대기업체도 조업단축으로 발생된 유휴자본을 식민지인 한국에 투자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1930∼1936년, 즉 중일전쟁(中日戰爭)이 일어날 때까지의 한국 공업의 발달상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즉 공장 수에 있어서는 4,249∼5,126개로 877개 공장이 증설되었고, 공업노동자수는 81,790명∼113,338명으로 31,548명이 증가되었으며 공업생산액은 2억 4천700만원에서 4억 6천300만 원으로 약 1억 8천900만원의 증액을 보였던 것이다.

이 기간이 일반적 불황기라는 점을 생각할 때 이러한 공업건설의 증가는 결코 적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1930년 이래 한국 공업건설에 있어서의 특징적 사실은 일본의 대재벌이 한국에 진출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의 공업발전 상황을 보면 1936년말 현재의 공장수는 5,927개였으나 1943년에 이르러서는 14,856개 공장으로 증가하였다. 이 기간에 종업원수는 188,250명에서 549,751명으로 증가하였으며, 공업 생산액은 736,000,000원에서 2,050,000,000원으로 증가되었다. 그리고 1939년 말 현재 통계에 의하면 각종 공업부문의 생산액 비율은 방직공업 13.2%, 금속공업 9.0%, 기계기구공업 3.2%, 요업 2.5%, 화학공업 31.3%, 제재 및 목제품공업 2.8%, 인쇄 및 제본업 1.2%, 식품공업 30.9%, 가스 및 전기업 21%, 기타 공업 3.8%로서 화학공업이 식료품공업을 능가하여 단연 수위를 차지하고 있다. 또 이 기간에 건설된 군수공업의 대부분은 대규모공업이었으며 거의 전부가 일본의 거대재벌의 자본에 의한 것이었다. 1939년의 통계에 의하면 전체 공업생산액 중에서 중소공업(종업원 200명 이하)의 생산액비율은 38.2%, 대공업(종업원 200명 이상의 공업)의 생산액 비율은 61.8%로서 대규모공업이 단연 중소기업을 능가하고 있었다. 그리고 방직공업, 금속공업, 화학공업, 광업, 기계기구공업에 있어서 대규모공업이 차지하는 비율은 70% 이상에 달하였다.

1936년 이래 공업생산의 증가는 군수공업의 이식에 의한 중화학공업의 발전을 중심으로 하였기 때문에 중화학공업 중 화학공업의 비중이 비약적으로 높아졌다. 그러나 이 중화학공업은 경금속공업과 군수화학, 약품공업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었으므로 제동(製銅) 등의 기본적 야금업(冶金業)과 기계기구공업 등 기간공업의 발전은 여전히 빈약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였고 한국공업 그 자체로서는 생산재공업 부문의 약점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일제 치하의 한국은 일본 자본주의의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서, 그 전략적 요청에 의하여 급격히 건설된 하나의 보충적 공업지역에 불과했으므로 당시의 한국 공업는 각종 생산부문 사이에 있어서는 물론이요, 동일 생산부문에 있어서도 상호간에 하등의 횡적 또는 종적 연관이 없었던 것이었으며 균형적 발전도 없었다. 일제말 각종 공업부문에 있어서 민족자본의 비중을 보자. 1940년 말 현재 자본금 100만원 이상의 대규모 공장을 경영하는 기업가들의 민족별 자본구성을 보면 공칭자본(公稱資本)만을 지표로 할지라도 한국인의 민족자본은 겨우 6%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실질적 활동자금인 불입자본(拂入資本)을 기준으로 한다면 민족자본의 구성비율은 더욱 빈약할 것이다. 1936년 이래 일본의 전시 경제체제가 강화되고 원료, 자재 및 노동력 등이 대규모의 군수공장으로 집중되어 감에 따라서 민족자본의 기반이었던 중소기업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되었다. 농산물 가공업을 토대로 하는 한국의 중소기업은 당시 대규모 군수공장의 도급(都給)공장으로도 전환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기업정비령(企業整備令)'의 발포실시와 함께 대부분의 중소공업은 강제적으로 정비되어 갔고, 그 정비과정에서 우리 민족자본은 거의 완전하게 기업활동의 기반을 잃고 말았다.

끝으로 공업생산 부문에 있어서의 한국인 기술자의 실태를 보기로 한다. 일제가 패퇴(敗退)하기 직전인 1944년 말 한국인 기술자 총수는 각 공업부문을 통하여 1,632명으로서 전체 기술자수의 20%에 불과하였다. 특히 금속공업과 화학공업 등 중화학공업 부문에 있어서 한국인 기술자의 수는 더욱 적었던 것이다. 그리고 한국인 기술자는 수적으로 적었을 뿐만 아니라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그 대부분이 중급 이하의 기술자에 지나지 않았다. 이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