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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근대화의 방향
[편집]農業近代化-方向
농업의 근대화는 농업 내부에 있는 전근대적 제 요인을 불식하다는 것이다. 농업에서의 근대화 요인은 먼저 토지의 소유관계에서 볼 수 있다. 토지소유제에 있어서 전근대적인 요인으로서 지적되는 것은 봉건적 또는 반봉건적(半封建的) 소작형태의 잔존이며, 다음으로는 생산기술에 있어서의 전근대성이다. 그러므로 농업의 근대화는 생산관계에 있어서 봉건적 또는 반봉건적 잔재를 불식하는 일이며 농업생산기술의 혁신으로 생산력을 높이는 일이다.
농업의 근대화 과정의 일반적 경로는 토지를 비롯한 농업의 생산수단이 봉건 및 반봉건적 소유관계에서 농민의 자유로운 사적(私的) 소유가 제도적으로 보장되어지며, 독립자영(獨立自營) 농민의 자유로운 의사에 의하여 각자의 경영에 가장 알맞게 농업생산 제 요소를 합리적으로 결합시켜 농업생산력을 높여가면서 이들 생산물의 사회적 배분에 있어서도 농업생산자에게 합리적으로 이루어져 간다. 그리하여 소자유 토지사유(小自由土地私有)는 자유로운 경쟁에 의하여 농민의 양극화 분해현상을 거쳐 자본제적 대중경영 형태로 이행되는 것이 일반적이고, 이와 같은 대농경영(大農經營)은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로 노동생산성이 높아지는 과정을 밟는 것이며, 이의 사회적 배분은 합리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의 농업은 일제하의 토지조사사업과 1950년의 농지개혁 과정을 통하여 오늘에 이르렀으나 아직도 토지소유의 측면에서나, 농업기술적 측면에서나, 생산물의 사회적 배분에 있어서나 전 근대적 영역을 탈피하고 있지 못하다.
농지개혁으로 봉건적 토지소유관계가 해체되었다고 하나 그 잔재가 아직도 농후하고 농지개혁 후에도 소농경제(小農經濟)는 해묵은 생산기술을 되풀이할 뿐 농업발전의 길을 모색하지 못하였다.
토지소유의 근대화는 농지개혁 후 잔존하는 봉건적 잔재를 불식하는 것이 당면 과제이겠지만 궁극적 목표는 농업의 기업화를 뒷받침할 수 있는 방향에서 정립된다. 토지소유제와 새로운 농업기술의 도입은 상호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기술혁신을 토지소유제가 가로막고 있다면 기술혁신을 위하여 우선 선행돼야 할 것은 토지제도의 개편이라 할 것이다. 영세농경제(零細農耕制)가 농업 생산기술혁신의 장애가 되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현대과학의 발전으로 생산기술은 공업분야뿐만이 아니라 농업분야에서도 크게 발전을 가져왔다.
새로운 기술의 도입은 오늘날과 같은 가족노작적(家族勞作的) 영세농경제하의 경영적·경제적 조건에서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다. 능률기술에 있어서 개별분산적 소농경영에 맞는 농업기계가 있기는 하나, 본래 농업의 근대적 발전의 궁극적 목표는 대형화된 능률기술의 도입으로 참다운 생산력 제고의 지속적 발전의 길을 보장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능한 한 대형기술 도입의 길을 찾아야 한다. 대형화된 능률기술 도입조건은 농지의 소유권 문제와는 별 관계가 없고 사적 소소유(私的小所有) 규모라 할지라도 대형 기술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경영조건, 즉 토지의 집중적 공동경영형태만 갖추어지면 가능한 것이다. 전근대적 기술수준을 탈피하는 길은 토지소유관계에 있어 제도적 개편이 불가피하니 농업근대화의 정책적 초점이 여기에 두어지지 않을 수 없다.
근래 농업근대화를 정책과제로 내세우는 이유의 하나는 사회경제적 여건 변화에 있다. 오늘날 한국사회는 그동안의 전근대적 경제사회가 근래 급격한 자본주의화의 길을 밟으면서부터 크게 변화되어 가고 있다. 그리하여 도시의 확장, 시장의 확대, 소비생활의 발달 등으로 농업도 그동안의 전통적 단순상품 생산으로부터 차차 자본제적 상품생산으로 변화하여 가는 경향이 나타났다. 그리하여 상당부분의 농업이 상업적 농업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경향이 있다. 물론 아직도 소농지배적인 농업이기는 하지만 화폐경제의 농촌 내부의 침투로 인하여 단순상품 생산적인 농업생산이 점차 허물어져 가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이와 같이 사회경제적 변화는 농업의 상업적 농업으로의 성격변화를 가져오게 했으며, 상업적 농업은 생산을 시장 조건에 맞추어야 했다. 그러므로 확대된 시장의 대량적 요구는 이제까지의 영세 소농경제로서는 이에 적응할 수가 없고 상품가치를 고려한 대량생산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와 같이 한국의 농업은 농업발전의 자체논리에 입각하건, 농업발전을 촉진시키기 위한 외부적 작용에 의하건, 전근대적 상태에서 머물러 있을 수 없고 근대화의 길을 찾아야 한다. 따라서 근대화의 방향은 소농경제를 탈피하고 하루속히 대농경제로 개편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한국 농업이 대농경제로 구조적 개편의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은 역사적 발전에 있어 필연적인 과정이기 때문만이 아니고, 대농경영이 갖는 여러 가지 장점이 바로 한국농업 발전에 필요하기 때문이다. 대농경제라 할 때에는 몇 가지 기본적인 형태가 있겠으나 한국 현실에서의 대농경제의 길은 협업화(協業化)의 길을 가야 한다고 생각된다.
그 이유로서는 영세소농으로 규정지어지는 한국 농업이 갖는 몇 가지 문제점들을 포괄하여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농경영의 대표적 형태로는 대농(大農)·부농(富農)을 선두로 하는 기업농의 길과 영세농의 협업화에 의한 길이 있겠으나, 오늘날의 한국과 같은 사회경제적 여건으로 보아서 전자의 길을 택할 때 이것으로부터 야기되는 대량적 농민추방의 문제는 물론, 전자가 갖은 생산력 발전의 한계성과 생산관계에서의 제 모순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못된다. 그러나 협업화의 길은 생산수단의 사적(私的) 소유를 바탕으로 할지라도 협동이 갖는 이점으로서 생산력 발전의 지속적 보장과 대농경영이 갖는 여러 가지 장점을 살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개별적 기업농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포괄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 농업의 근대화 방향은 이상에서와 같이 소농경제를 탈피하고 협업화의 길을 통해 대농경영의 길로 가는 것인데, 여기에는 몇가지 필요한 정책수단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1960년대 이전의 농업정책
[편집]1960年代 以前-農業政策해방 이후 한국의 농업정책에서 획기적인 사실은 1949년에 이루어진 토지개혁(land reform)일 것이다. 이것은 식민지시대의 잔재인 반(反)봉건적 지주제를 타파하고 건실한 자작농을 창출하기 위한 것으로, 부분적으로는 당시의 냉전사태와 남북분단 그리고 북한에서의 토지개혁이라는 정치적 여건의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였다. 이 제도는 지주와 농민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되는 것이었으므로 구체적인 실행을 둘러싸고 많은 논쟁들이 있었지만, 결국 유상몰수·유상분배의 방법을 취하게 되었다. 그러나 지주들에 대한 상환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또한 당시의 높은 인플레이션으로 사실상 지주계급은 거의 몰락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농지개혁은 지주-소작관계를 해체하고 일단은 광범위한 자작농을 성립시켰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그러나 6·25전쟁을 겪은 이후 한국의 경제상황은 매우 열악하였으며 이러한 사정은 농업에서도 마찬가지여서 확고한 생산기반이 성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식량자원을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국민의 기아 상태는 줄어들었지만 저곡가 상태가 지속되어 한국농업의 발전은 많은 방해를 받았다. 더구나 농민에게는 토지소득세를 비롯한 많은 종류의 잡부금이 부과되었는데 이러한 것들은 농지개혁으로 창설된 자작농계층의 성장을 저해하는 요소가 되었다.
1960∼1970년대의 농업정책
[편집]1960∼1970年代-農業政策이 시기는 우리나라의 경제발전이 시작되어 지속적인 고도성장이 달성되었던 기간이다. 그런데 이 기간의 성장은 주로 풍부한 인적 자원을 바탕으로 한 수출위주의 성장이었으므로 이를 위해서는 생계의 기본이 되는 농산물이 낮은 가격으로 충분히 공급될 필요가 있었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농업정책의 기조는 식량증산에 두어지게 되었다. 이를 위하여 실제로 취해진 정책으로는 우선 수리시설의 확충과 경지정리사업을 들 수가 있다. 특히 한강·낙동강·금강·영산강 등의 4대강 유역이 이 목적에 따라 집중적으로 개발되었다. 다음으로 토지생산성을 높이기 위하여 다수확 품종의 보급이 장려되었는데 특히 통일벼의 보급으로 우리나라의 쌀자급 기반이 마련되었다. 이외에도 비료나 농약의 사용으로 생산성을 높이려는 노력도 진행되었는데, 정부는 비료공장의 설립을 적극 보조하고 농민들에게 다소 강압적인 행정지도를 통하여 보급을 확대하였다. 한편 1970년대 초반에는 농산물의 증산과 농민소득 보호, 그리고 곡가의 안정을 위하여 이중곡가제가 실시되었으나 그 효과는 크지 못했다. 1970년대 중반부터는 농촌 잘살기 운동의 하나로 새마을운동이 정부주도 아래 강력하게 시행되었는데, 이것은 당시 상황에서 긍정적인 측면도 보였던 반면에 농촌의 사회간접자본 형성을 위해서 농민의 무상노동을 동원하여 농민의 불만을 일으키고 초가집이 없어진 대가로 농가부채가 증가하는 등의 부정적인 면도 동반하였다.
1980년대의 개방농정
[편집]1980年代-改放農政
1980년대 중반에 이르러 우리나라의 농업정책은 큰 변화를 겪게 된다. 그때까지 실시되었던 농업에 대한 보호의 증산정책이 포기되고 개방농정이 대두하게 된 것이다. 즉 종전의 농업 중심에서 농촌 중심으로 농업정책의 시각을 바꾸고 1970년대의 단위면적당 생산성 향상으로부터 농가가구당 생산성 향상에 초점을 맞추었다. 또 이것은 농산물의 가격이 국제가격에 비하여 높으므로 비교우위가 없는 농업을 보호하기보다는 오히려 수입을 통하여 값싼 농산물을 소비하면서 비교우위가 있는 산업에 특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이론적 배경에서 이루어졌다. 이러한 개방농정의 내용으로는 우선 해외농산물의 수입을 점차적으로 자유화하고, 농지임대차를 양성화하여 자본주의적 기업농을 육성하고, 농업의 기계화, 경지관리에 힘쓰고, 단작보다는 복합영농으로 농민의 수입을 증가시키며, 또한 농촌공업화로 농촌의 잉여노동력을 흡수하는 것 등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이렇게 농산물개방이 본격 논의된 때는 우리나라가 1986년 이후 국제수지 흑자를 기록하여 GATT 개발동상국 조항을 졸업하는 GATT/BOT 협의가 본격화되는 시점이기도 하였다.
사실 개방농정의 이론적 배경이 되는 비교우위는 정태적인 개념이 아니라 동태적인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즉 현재는 비교우위가 없다고 하더라도 앞으로의 개발여부에 따라 장래에는 비교우위가 생길 수도 있으므로 특히 농업처럼 국민경제에서 중요한 사업의 경우는 그 적용에서 신중을 요해야 할 것이다. 유럽의 경우 미국에 비해서 농산물의 비교우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보호를 하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또한 농촌공업화로 농촌의 소득을 증가시키는 것도 현재의 사정으로 보아서는 단기적으로 이루어지기 어려우며, 상업작물의 재배를 통해 영농다각화도 과잉공급의 우려가 있으므로 현재 농업정책의 실시 결과가 낙관적이지만은 않다고 하겠다.
농업근대화의 정책수단
[편집]農業近代化-政策手段
( 토지제도 정비책: 현재 같은 소농경제를, 사적소유는 그대로 두고 협업화를 통해 대농경영체제로 개편하려면 무엇보다도 농지제도에 있어 협업적 결합이 가능하도록 합리적인 법적 보장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협업화의 길을 열어 놓을 수 있는 법적 보장의 필요성은 단지 농지의 소유권에 관한 문제뿐만이 아니고 협업경영체가 갖는 법인체적(法人體的) 특수성이 있기 때문에 이 특수성을 살려 발전할 수 있는 농업법인법(農業法人法) 같은 법률제정이 필요하다.
( 생산기반의 조성책: 농업근대화의 우선적 작업은 농업 생산기반의 조성이다. 우리나라에 있어서 농업 생산기반 조성이라면 첫째 수리시설(水利施設)의 완비를 들 수 있다. 우리나라는 수도작(水稻作) 위주의 농업이고 식량자급이 국가가 당면한 시급한 과제이기 때문에 더욱더 중요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하여 비교적 수리조건이 유리하기 때문에 국가의 적극적인 정책으로 수리시설을 갖추는 것이 농업근대화의 시급한 기본과제라 생각된다. 우리나라의 수리시설 중 극히 적은 부분은 전래되어 오는 농민들 자신들의 협동적 방법에 의한 것이 있기는 하나 그 규모가 작다. 근대적 수리시설을 농민들의 힘으로는 할 수 없기 때문에 마땅히 국가의 재정으로 행정력을 가지고 하여야 한다. 시설 자체는 국가가 하여야 하지만 시설의 관리운영은 이용자들 자신들이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둘째 경지정리(耕地整理)가 완료되어야 한다. 경지정리는 농기계 도입의 조건을 마련하는 것뿐만이 아니다. 수리시설의 개선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며 농로(農路) 확장, 규반(畦畔) 정리 등으로 지면의 효율적 이용과 작업의 편리 등을 도모할 수 있기 때문에 농업근대화의 필수조건이라 할 수 있다.
경지정리는 그 1차적 목적이 작업과정에서 편리한 점을 찾자는 것만이 아니고 농업의 경영적 조건을 개선하자는 데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경지정리는 농기계 도입의 조건을 마련하고, 농업기계화는 한국적 농업 경영규모로서는 공동이용의 길을 가야 하기에, 기계 사용(私用)의 협업화를 위한 경영조건을 마련하는 것이 된다. 이 뿐만이 아니고 한국 농업의 근대화의 방향을 협업화에 의한 대농경영으로 설정하였기 때문에 마땅히 경지정리는 농업협업화의 기초작업이 되어야 한다.
경지정리가 농업기계화의 기초조건이기 때문에 농업기계의 규모에 따라서 경지정리의 구획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러므로 지역적 조건에 따라서 사전에 정책적 배려가 있어야 한다.
앞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경지정리의 중요 목적이 농업의 협업화에 결부되기 때문에, 이에 맞추려면 농업의 교환분합(交換分合)이 배려되어야 할 것이다. 농업근대화의 중요부분으로서 경지정리사업은 국가의 장기적 농업정책목표에 결부되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 농업의 기계화정책: 농업의 기계화는 농업근대화의 필수이다. 문제는 그 국가사회가 처해 있는 경제적 여건이 이를 어떤 시기에 어떤 방법으로 촉진하느냐 하는 것이다. 농업의 기계화는 농업노동력이 부족할 경우에 필요하고, 작업능률을 높이는 한편 심경(深耕)을 할 수가 있어 다비(多肥)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증산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오늘날의 한국의 현실로 볼 때 농촌에 농업기계화의 적용이 획일적으로 장려될 수는 없다. 지역적 조건 및 농가의 경영적 조건과 일치되어 가능한 곳에만 추진되어야 한다.
농업기계화는 농업생산력 증대라는 효과뿐만이 아니고 공업분야의 기계공업 및 자동차공업의 발전으로 그 파급효과와 연관효과가 대단히 큰 것이기 때문에 종합적인 계획에 의한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
( 유통의 근대화 정책: 농업근대화 정책에서 또하나 중요하게 취급되어야 할 것은 농산물 유통정책이다. 생산증대정책뿐만이 아니라 생산된 농산물이 유통과정에서 합리적으로 거래되지 않으면 생산정책 자체가 결정적인 영향을 받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농업의 근대화 정책은 유통정책에서도 깊은 배려가 요청되는 것이다.
한국은 근래 도시의 확장과 시장의 확대로 농산물의 상품화가 확대되었고,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농산물 유통기구가 발달되었다. 그러나 농산물은 아직도 전근대적 유통과정을 통해서 거래되고 있는 실정이며 지속적 발전을 위해서는 유통의 근대적 정책이 이루어져 생산자의 보호정책이 있어야 한다.
( 가격정책: 오늘날의 한국 농업정책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농산물 가격정책이다. 한국 농업의 생산력은 농산물 가격정책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보아진다. 농업생산자는 농산물의 가격이 그 생산량을 보장하고 이익이 나오면 의욕을 가지고 보다 더 생산에 열중하게 된다. 아무리 생산기반이 갖추어지고 유통기구가 근대화되었다 하더라도 가격보장이 안 되면 아무런 성과를 가져올 수 없다. 생산력 증대의 기본 전제는 생산자의 이익에 토대를 두어야 한다. 그러지 못할 때에는 제반정책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는 것이다. 가격정책을 통하여 생산유인효과(生産誘引效果)를 가져오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 당면한 농업근대화정책이라 할 수 있다.
( 농산물 수출정책: 오늘날 한국 경제가 당면한 중요 과제의 하나는 외화가득(外貨稼得)을 위한 무역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수출정책에 부심하고 있으나 수출품의 대부분의 원료를 외국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득률이 높고 노동집약적 산업인 농산물수출에 진력하는 정책을 집중해야 할 것이다.
( 기타 농업근대화를 위한 정책: 이상의 몇 가지 농업근대화를 위한 정책수단 외에 금융정책, 지도정책 등 여러 가지가 있으나, 이 모든 정책의 기저에 흐르는 방향은 모든 정책이 농업생산자의 이익에 토대를 둔 농업생산자의 자주적 참여에 의한 민주적 발전에 의존하는 정책방향을 택하여야 할 것이다.
<金 炳 台>
우루과이라운드 농산물협상
[편집]Uruguai Round 農産物協商GATT는 성립 이후 다자간협상을 통하여 관세교섭에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GATT는 제1차 다자간협상에서부터 이번 제8차 다자간협상인 우루과이라운드에 이르기까지 거듭된 교섭을 통하여, 매번 양허품목수에서 3,000개에서 45,000개까지 일반관세인하교섭을 성공적으로 타결지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관세부문에 관한 것이었고 비관세장벽에 관해서는 매우 미미한 성과를 올렸을 뿐이었다. 당초에 관세인하를 통해 자유무역을 구현하고자 의도했던 각국은 여러 번의 협상을 하는 가운데, 비관세장벽에 대한 타결이 없이는 자유무역의 확대라는 GATT의 기본정신을 구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1964년부터 1967년에 걸친 케네디라운드(Kennedy Round)는 비관세장벽에 대한 논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최초의 GATT 다자간협상이었다. 이렇게 다자간협상이 관세교섭이 아닌 무역교섭으로 확대된 것은 단순히 관세인하가 일단락되어 그 의의가 저하했기 때문은 아니다. 관세장벽이 낮아짐에 따른 위기의식으로, 각국은 비관세장벽의 가치에 주목하고 정책수단으로서 중요성을 재인식하게 되어 실제로 새로운 형태의 비관세장벽이 생겨나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이다.
농업문제는 이러한 배경 아래 그 중요성이 더해졌다. 사실 그 이전까지 농업은 무역자유화의 논의에서 제외되고 있었다. 과거 1960년대까지는 공업제품과 달리 농업무역을 자유화하려는 시도는 없었다. 그러나 케네디라운드는 이와 같은 사실에 대해서 농업문제를 정식으로 GATT의 독자적인 교섭의 대상으로 삼으려고 하였다. 그것은 비관세장벽에 대해 본격적인 관심을 보인 다자간협상은 케네디라운드가 처음이었고, 농업의 경우 대개 비관세장벽으로 국내농업이 보호되고 있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농업문제를 공업문제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하려고 하였던 케네디라운드 시절의 인식 아래서는 농업문제의 대부분을 미해결인 채로 남겨둘 수밖에 없었다. 단지 농산물 관세인하 부문에서 미미한 성과가 있었을 뿐이었다.
케네디라운드를 이어받아 1979년에 타결된 동경라운드(Tokyo Round)에서는 농산물교섭에 대한 협상의 틀을 정비하였다는 점에서 케네디라운드보다 진일보하였다. 동경라운드에서는 농업교섭의 수단으로 관세교섭에서 수정(request-offer)방식이 도입되고, 관세·비관세교섭의 통일, 다국간협의와 2국간협의의 병행 등, 우루과이라운드에서 이용된 기본협상의 골격이 이때 도입되었다. 동경라운드에서는 농산물협상이 가장 중심적인 의제로 떠올랐는데 그것은 1970년대 농산물시장의 특수한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당시 영국 등 3개국의 참가로 통합을 확대한 EU는 공동농업정책의 실시를 통해 농업보호체제를 점점 강화하고 있었다. 농산물의 역내자급률은 급격히 상승하여 일부에서는 수출의 가능성마저 생겨났다. 그리하여 이미 공업제품에서 국제경쟁력을 잃고 농산물수출에 더욱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미국의 입장에서는 EU 역내로부터 해외, 특히 미국농산물의 축출이라는 우려할 만한 사태가 현실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동경라운드에서는 미국과 EU의 입장이 매우 강경하게 대립되는 상황에서 대부분의 중요한 문제를 2국간교섭으로 넘겨, 다자간협상으로서의 장점을 충분히 살리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냈다. 이런 가운데 농산물과 관련해서 동경라운드에서 얻어진 성과를 살펴보자. 첫째, 관세인하 부문에서 그 성과는 미미하였다. GATT 사무국이 계산한 바에 따르면 1976년 수입기준 150억 달러 상당의 농산물관세만이 인하되었다. 둘째, 농업 비관세장벽에도 그 성과는 별로 대단치 않아서 수입접근과 잔존수입제한 등 표면적이고 단편적인 몇 부문에서만 합의가 이루어졌다. 셋째, 농업부문과 관련하여 미국과 EU의 입장차이가 보다 명백해졌다. 미국은 시장원리에 입각한 자유무역을 주장하여 그 연장선상에서 국내농업보호의 삭감철폐를 요구하였다. 반면, EU는 국내농업에 대하여 일정하게 보호하는 것을 당연시하고 이를 전제로 국제시장에서도 상품협정에 의한 질서있는 무역을 주장하였다. 물론, 이러한 입장 차이의 확인도 하나의 성과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1987년 우루과이라운드가 시작된 이래 농업교섭은 우루과이라운드의 성패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서 가능했다. 그러면 우루과이라운드에서 농산물협상이 가지는 의미를 살펴보자. 첫째, 우루과이라운드 농업교섭은 과거에 있었던 GATT 라운드 농업교섭의 총결산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사실 농업문제는 케네디라운드에서부터 독자적 교섭의제로 다루어졌으니 성과를 거둔 것은 주로 농업관세 분야였고, 농산물무역의 핵심을 이루는 비관세장벽 문제는 거의 손대지 못하였다. 우루과이라운드에서는 과거의 이러한 교훈을 바탕으로 농업의 비관세장벽 문제에 대해서 체계적이고 종합적으로 접근하려고 하였다. 둘째, 이와 관련하여 농업교섭의 초점이 각국 농업정책에 대한 간섭이라는 매우 심각하고 미묘한 문제로 부각되어 버렸다는 점이다. 농업의 비관세장벽에는 다양한 형태가 있지만 그 핵심은 각국의 국내 농업정책이다. 따라서, 교섭이 매우 어렵게 진행되었다. 셋째, 1980년대 세계 농산물시장에서는 과잉재고에 따른 덤핑수출이 행해지는 등, 수출국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 이 협상이 진행되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재고누증에 따른 부담을 어떻게 수출국끼리 경감하는가에 대한 문제가 핵심적으로 제기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보면 우루과이라운드 농업협상이 어렵게 진행되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농산물협상에서 가장 큰 핵심은 시장접근의 가능성이었다. 즉, 대부분의 농산물보호국은 일부 특정 품목에 대해서 타국농산물의 최소한의 시장접근도 허용하지 않고 있는 상황인 데 반하여, 농산물수출국들이 주장하는 것은 먼저 농산물에 대한 모든 비관세장벽을 관세화(Tariffication)하자는 것이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관세율을 매우 높게 설정해 놓고 이행기간을 두어 점차로 관세율을 낮추면서 마침내 농산물교역의 완전자유화를 이룩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농산물보호국들은 농업의 비교역적 기능(non-trade concern:NTC)을 들어 농산물관세화에 반대하였다.
농산물과 관련하여 각국의 입장을 살펴보자, 미국의 경우 현상태의 단순한 개선보다는 실질적인 농업의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기본입장으로서 전반적인 개혁을 요구하였다. 또, 외면적으로는 기존 농업개방의 입장을 고수하면서, 농산물수출국들의 협의체인 케언스 그룹(Cairns Group)과 동조하여 EU 및 일본의 입장변화를 유도하였다. 이에 반하여 EU는 기존입장을 고수하는 상태에서 기술적 쟁점사항에 형식적으로 참여하였다. 또, 우루과이라운드와 관련하여 내부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공동농업정책개혁은 역내국가들의 상반된 이해관계로 인하여 합의점을 찾기가 매우 어려운 상태였다. 1992년 5월, EU는 우루과이라운드를 겨냥하여 공동농업정책의 개혁안을 발표하였으나 여기서 제시된 내용 또한 EU의 역내 보조금을 감축시킨다는 계획이었으며, 수입부과금이나 수출보조금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일본은 그동안 벌써부터 최소시장접근(minimum market access)방식에 의한 쌀시장 부분개방 논의가 제기되기는 하였으나 공식적으로는 쌀개방 불가의 입장을 오랫동안 견지하였다.
1993년 12월 15일에 타결된 농산물분야협상에서 우리나라는 쌀을 비롯한 14개 품목에 대한 관세화 예외인정을 협상의 마지막 단계까지 주장하였으나, 관세화 예외를 주장하던 캐나다, 스위스, 일본 등이 그들의 주장을 철회함으로써 우리는 국제적 고립의 길과 다자간무역협상의 성공을 돕고 국제화로 나가는 길의 두 가지 전략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우리들은 후자를 선택하였다.
따라서 쌀의 경우에는 관세화 유예기간을 10년간 인정받고(일본은 6년) 최소시장 접근량은 이행초년도(1995)에 국내소비량의 1%에서 5차연도(1999)까지 2%로 확대하고 최종연도(2004)에 4%가 되도록 확대하며(일본은 4%에서 8%), 관세화유예의 계속 여부는 10년 유예기간 종료 이후 2004년에 협상을 다시 하기로 합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