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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미술/미술의 종류/건축·정원·단청/건 축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운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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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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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派

1875년부터 1900년에 걸쳐서의 미국 중서부 특히 시카고 특유의 상업건축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명칭이다. 1871년 시카고 대화재 이래 철골(鐵骨)을 벽돌로 둘러싸는 방법이 제니에 의하여 시도되었다. 처음에는 전통적인 디테일(detail)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였으나 직선적인 표현과 금속의 뼈대짜기, 넓은 유리의 개구부(開口部), 그리고 릴라이언스빌딩(reliance Building)에서 볼 수 있는 수직선의 표현으로 진전되어 갔다. 이 중에서 설리번(Sullivan)은 몇몇 뛰어난 작품을 남겼으나 시카고파 전체를 보면 양식의 다양성이 연대나 각 건축가 사이에서 보인다.

아르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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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nouveau

1890년에서 1910년에 걸쳐서 유럽 전체에 퍼진 로망주의적이고 개성적이며 또한 반역사적인 양식을 제창한 강력한 운동(運動)을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슈틸1900'의 이름으로 잘 알려지고 있는 이 운동은 곡선의 장식적인 가치가 강조되어 있는 것이 많고, 건축에서는 엔델의 <사진 스튜디오>, 기마르의 <파리 지하철 입구>, 오르타(Horta)의 <타세르 저택>, 가우디(Gaudi)의 <바트료 저택> 등을 들 수 있다. 이것들은 몇몇 예외를 빼고서는 커다란 공간 처리라기보다는 화려한 장식이 중심으로 되어 있다. 19세기의 양식 상실 속에서 일어난 운동이었으나 양식과 장식을 혼동하고, 또한 사회민중과의 윤리적인 유대를 갖지 않았으며, 복잡한 기계나 구조에서 몸을 멀리하고 있었으므로 일시적인 유행현상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1900년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박람회는 아르 누보 일색이 되었으나, 이를 경계로 쇠퇴되어 갔다. 그러나 한편 이 가운데에서 더욱 이것을 타고 넘어섰던 매킨터시(Mackintosh), 페터 베렌스(Peter Behrens)등 근대건축의 개척자가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아츠 앤드 크라프트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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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s and craft 運動

1861년 윌리엄 모리스가 설립한 모리스 상회를 발단으로 시작된 운동으로서 1888년 아쉬비가 미술공예전람회 협회를 결성하여 이 운동의 최종적인 종결을 보기까지 30여 년 계속된 것이다. 값싼 대량생산의 물품이 시장에 범람하여 가는 데 대하여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고, 러스킨의 미학에 입각해서 예술의 수준까지 높이기 위하여 노력이 계속되었다.

또한 이 운동은 사회주의적인 기반을 가지고 제품이 보급됨으로써 사회전체를 개량하여 나가려 하는 발상 아래서 진전되었다. 운동 도중에 미술공예협회 초대 회장인 레크인의 개인적인 취미에서 몇몇 젊은 건축가가 축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미술과 기술 양방면에 걸쳐서 강한 영향을 19세기의 심미관에 결별을 고하게 되었다. 또한 독일 공작연맹(工作聯盟) 발흥의 계기를 만들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독일 공작연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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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逸工作聯盟

1907년 독일의 건축가 무테쥬스에 의하여 설립된 것, 이 운동은 무테쥬스가 런던 체재 중 기계의 악용에 의하여 생겨나는 조잡한 모조품에 대한 윌리엄 모리스 등의 반항 운동에서 받은 영향이 크다고 하는데 거기에서 발전하여 근대 공업사회에서의 기계를 올바르게 인식시키고 공예와 연결시킨 점에 크나큰 의의가 있다. 독일로 돌아온 무테쥬스는 페터 베렌스 등 저명한 건축가를 디자인 고문으로 맞아 공업미술에서의 품질향상에 노력하였다.

그리고 심미적인 면의 추구에 있어서는 새로운 자동차, 선박, 비행기 등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함으로써 기계를 전면적으로 용인하였다. 그러나 그와 함께 제창된 규격화는 우수한 회원의 한 사람인 반 데 베르데로부터 반대를 받아 공업화와 개성이라는 오래고 새로운 문제가 반복되었다. 1914년에 개최된 케른의 공업미술 박람회에서는 그 건물의 몇몇이 근대건축의 개척자에 의하여 설계되었고, 또한 1927년에는 바이젠호프에서 미스 반 데르 로에(Mies van der. Rohe)의 지휘에 의해 공동주택 전람회가 열렸다. 이와 같은 운동을 통하여 그 사상은 온 세계의 건축계가 주목하게 되어 각지로 계승되어 갔다. 또 한편 젊은 정력을 이 운동에 바친 그로피우스(Gropius)에 의하여 바우하우스로 인계되어 간다.

표현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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表現主義

제1차대전 직전의 불안한 사회정세를 배경으로 뮌헨에서 일어나, 1920년대 중반 무렵 독일의 인플레이션이 그칠 무렵까지 계속된 건축운동이다. 이동안의 활동은 별로 통일적인 것은 아니었으나 아르 누보에서 국가적인 로망주의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형태의 것을 내포하면서 전개되어 갔다. 그것들은 유기적인 형태나 불안정한 동적인 표현을 하는 것이 많았다. 이들 운동 중에 들어가는 작품으로서 멘델존의 아인슈타인탑(塔), 헨가의 칠리관(館), 페르치히의 급수탑(給水塔), 자르츠브르크 축전극장(祝典劇場) 계획안, 시타이너의 괴테관(館) 등이 있다. 베를린의 AEG 공장에 의하여 표현주의에로 이행한 페터 베렌스는 그 뒤 국가적인 로망주의로 이행한다. 그리고 표현주의 운동은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항의로서도 사용되었다.

구성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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構成主義

제1차대전 직후에 가보(Gabo)와 페브스너(Pevsner)의 사실파(寫實派) 선언으로서 이 운동의 시작이라 해고 무방하다. 회화와 조각과의 사이의 구별을 불식하고 건축 속에 근대산업에서 생겨나온 것에 의한 생명이나 우주의 개념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려 하였다. 입체파와의 유대도 지적될 수 있으나 건축에 있어서는 보다 넓게 기능주의 속으로 전개되어 간다. 구조가 모든 면에서 강조되었고 목적에 대해서 효과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름다움을 동시에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운동에 참가한 사람은 리시츠키, 도스부르크(Doesburg) 외에 리트펠트(Rietveld), 몬드리안 등이 있다.

작품으로서는 계획안이 그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데 블라드미르 타틀린의 <기념탑>은 그 대표작이라 하겠다. 이 밖에 베슨니 형제의 프라우다 지국 계획, 말레비치(Malevitch)의 건축구성, 리시츠키와 스탐의 <마천루(摩天樓)>, 브로이어(Breuer)의 <하리코프시(市) 극장> 등을 들 수 있다.

데 스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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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 stijl

1917년 라이덴에서 결성된 예술가·건축가의 그룹으로서 동명의 잡지를 발행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에는 아우트(oud), 호프, 리트펠트 등의 건축가가 있다. 데 스틸 디자인은 몬드리안과 도스부르크의 신조형주의 및 입체파에 연유되는 데가 크고 전통과의 단절 위에 서서 기본적인 표현으로서의 입방체를 동적(動的)이고 연속적인 것으로서 포착하려고 하였다. 색채도 백색, 회색, 흑색에 대해서 빨강, 노랑, 파랑의 원색이 대비되어 단순성이 존중되었다. 이들 공간에 대한 태도는 기능주의, 국제양식 등의 규범이 되었으나, 심리학적인 고정개념에서는 충분히 탈피하지 못하였다.

대표적인 건축으로서는 아우트의 <카페 드 유니>, 리트펠트의 <슐레다 저택>, 호프의 <하이데의 집>, 아우트의 <튀센디켄의 집합주택(集合住宅)> 등이 있다. 또한 데 스틸은 일명 로테르담파(派)라고도 불리고 있다.

바우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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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uhaus

1919년 바이마르에 그로피우스가 설립한 디자인, 건축, 공예를 위한 학교를 말한다. 그후 데사우 베를린에 옮겨져 1933년에 폐쇄되었다. 이를 주최한 그로피우스는 오랫동안 분리돼 있던 예술과 공예의 통일을 기도하여 예술가나 건축가가 되기 위하여 손에 의한 작업의 경험, 재료의 본질을 아릭 위한 훈련을 그 중심과제로 삼았다. "모든 예술적인 창조를 합쳐서 통일할 것을 목표로 하고, 모든 공예부분을 하나의 새로운 건축으로 그 불가분(不可分)의 구성요소로서 재통합할 것을 지향한다"는 것이 그 기치였다. 따라서 건축 그 밖의 분야에서의 팀워크를 주창하고 부분을 담당할 때에도 항상 전체를 파악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역설하였다.

바우하우스의 교수 중에는 파이닝거(Feininger), 모홀리 나기, 파울 클레(Paul Klee), 칸딘스키(Kandinsky) 등의 흘륭한 예술가가 참가하였는데, 건축에서는 처음에 학생이었던 마르셀 브로이어(Marcel Breuer), 비아어, 시미트 등이 배출된 것은 의의 깊다. 작품으로서는 1923년에 개최된 전람회에 출품한 <암 호른>이라고 불니는 단독주택, 시카고트리분 신사옥(新社屋)의 국제경기 설계안 등이 주목되는데 그치고 있다. 바우하우스의 흐름은 그 뒤 하버드대학 건축학부, 뉴욕 공업디자인 연구소, 남캘리포니아 디자인학교 등에 전해져, 그 사상은 현대까지의 교육방법 중에서 가장 훌륭한 발자취를 남기고 있다고 하겠다.

미래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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未來派

1914년 신테리아와 카트네가 밀라노에서 개최된 전람회에 발표한 과학과 기술의 결정적인 발전에 대해서 환경을 인간에게 조화(調和)시키려고 한 견해에서 발단되었다. 이것이 시인 마리네티(Marinetti)의 공감을 불러, 동년 <미래파 건축선언>이란 표제의 책으로 출판되었다. 이 선언은 이탈리아를 유럽 건축의 주류로 삼았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건축작품으로서는 산테리아의 일련의 계획안이 있을 뿐이다. 이 운동은 1928년에 다시 평가되어 뭇솔리니의 후원으로 미래파 건축전람회가 개최되었다. 그 후 차차 파시즘과 결합되는 경향이 있었으나, 미래파의 조건인 운동조형론(運動造型論), 동시성, 속도 등의 개념은 무대장치의 분야로까지 표현되고 있었다.

신고전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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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古典主義

근대건축의 창시자들로부터 현대까지의 건축가들 속에서 어떠한 의미에서이건 신고전주의에 연결되는 것을 발견해낸다는 것은 비교적 용이하다. 싱켈(Schinkel)을 19세기 최후의 위대한 건축가라고 한 사람들 속에 아돌프 로스나 무테쥬스가 있고, 마리네티는 순수하게 고전적인 것을 찬미하고 있다. 한때 고전주의가 근대건축의 적으로 간주되고 있었으나 여기에서 말하는 고전주의란 그리스나 로마의 오더(Order)나 지붕장식을 재차 반복하는 풍조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고, 본디는 기능주의적인 합리성과 종이 한 장의 상황에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그 사실은 현대작품 속에서 몇몇 작품을 꺼내어 이 계열에 짜넣음으로써도 명백하게 할 수가 있다. 예를 들면 미스 반 데르 로에의 일리노이 공과대학 크라운홀, 존슨의 셀트 아트갤러리, 루이스 칸의 수욕장(水浴場) 등이다. 그것들에서 공통되는 것은 엄격한 기하학, 좌우대칭, 축(軸)을 갖는 플랜이고, 앞으로의 건축에서도 하나의 형이상학적인 요소로서 계속하여 지켜져 갈 것임에 틀림이 없다.

국제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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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際樣式

1925년에서 50년 동안의 건축계의 움직임을 가리키는 말로서 사용되고 있다. 1932년에 뉴욕에서 출판된 동명의 책 가운데 건축을 매스(덩어리)가 아니라 볼륨(내부에 공간을 가진 것)으로 파악하는 것, 좌우대칭이 아니라 균정(均整)을 소중하게 여길 것, 및 장식 남용의 금지가 이 양식의 특징이라고 지적되고 있다. 그리고 더욱이 공간의 효율성을 존중하는 것도 꼽히고 있다. 그리고 현실에서 이와 같은 경향이 지리적인 조건을 떠나서 동시에 존재해 있었고, 아마도 금후 더욱 대규모의 형태로 계속 존재해나갈 것이다. 그리고 이 국제양식이란 말은 그러한 정황(情況)이 강화되어 가면 고전적인 의미만으로 한정되게 된다. 이 양식은 주택건축, 페레(Perret), 베렌스, 그로피우스 등의 초기 공업건축, 산테리아의 미래파적 환상, 르 코르뷔지에, 미스 반 데르 로에, 아우트, 리트펠트 등의 작품에 영향을 미쳤다. 미국 건축은 특히 여기에 해당한 것이 많고 다시 남미, 아프리카로까지 전파되고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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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AM(Congres Internationaux d'Architecture moderne) (近代建築國際會議)

1928년 각지에서 행해진 건축의 창조적인 활동에 새로운 국제적인 질서를 가져 와야 된다는 취지에서 만도로 부인에 의하여 라 사라성(城)에 초대된 회의에서 비롯된다. 건축을 그 본디의 바닥, 즉 경제, 사회란 기반으로 되돌아감으로써 조화를 획득하고, 기성화한 아카데미즘에 대항하려고 하는 제1회의 성명은 기디온(Giedion)과 르 코르뷔지에 주도로 진행되었다. 그후 제2회 회의는 형식주의적인 것으로 끝나고 보고서에서는 <최소한주거(最少限住居)>를 남기고 있다. 이 속에서 생긴 국제건축문제 해결위원회는 그 후 회의를 거듭하고 도면의 표현방법의 표준화에 착수하였다. 지중해의 선상(船上)에서 개최된 1933년의 제4회 CIAM에서는 유명한 <아테네 헌장(憲章)>이 기초되어 주거, 레크리에이션, 작업장, 교통, 역사적인 건축의 5항목에 대하여 하나의 헌법을 수립하였다. 10년에 걸친 전쟁의 공백 이후 개최된 제6회 CIAM부터 이 헌장이 반드시 보편화하지 않는다는 의견이 각 연구자 사이에서 나오게 되어, 제8회의 테마인 '도시의 핵(核)'에 대해서는 예비지식이 결여되고 있어, 특별히 도시계획적인 공백이 지적되었다. 제10회 CIAM을 준비한 그룹(뒤에 팀 텐이라 불렸다)은 아테네 헌장의 보편화에 대하여 개별적인 것, 정확한 것을 요구하여 이와 대결하고, 제10회로서 CIAM은 붕괴하기에 이르렀다. CIAM 자체가 하나의 유파를 형성하여 버렸다는 것은 인터내셔널적인 것으로 될 수 없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근대건축과 도시계획의 개념을 온 세계에 보급시킨 공적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겠다.

브루털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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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utalism

1954년 영국의 건축가 피터 스미슨이 이 말을 사용한 것이 효시였는데, 1950년대의 영국 젊은 건축가가 권위에 아첨하는 기성 건축가의 태도에 만족치 못하고, 기본적인 기능주의 원리를 관철하려고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들에게는 퓨리턴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엄격함이 보이는데 기술까지도 포함시켜 철이나 콘크리트 등의 실체를 버리지 않고, 이것을 뮤직 콘크리트(music concrete)처럼 조립함으로써 표현해 나가려고 하고 있다. 이 점에서 근대 건축사상의 체재내에 있어서의 개혁운동이라는 한계를 인정치 않을 수 없다. 브루털리즘을 상징하는 작품으로서는 브로크 바케마의 <도시관청가>, 스미슨 부부의 <이코노미스트 빌딩>, 비가의 <마르키온디 소년원> 등 외에 수많은 계획안이 있다.

기능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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機能主義

'형은 기능에 따른다'라는 말은 근대건축의 출발점이 된다고 일컬어지는데, 유사 이래 인간이 만들어낸 것은 그 기능 =작용이 그 형을 결정하여 왔다. 여기에서는 이 기능이라는 말이 의식적으로 취급되어 건축의 표현이 된 점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 주장한 건축가는 새로운 구조계산 결과 생겨난 가구(架構), 나아가서는 자동차나 선박을 특히 취급하였으나 그것들이 감각적으로 보더라도 아름다운 한 문제는 없었다. 전혀 기계적으로 그리고 자동적으로 생겨 나오게 되는 것이나, 또한 그들의 단순한 집적(集積)으로 완성되는 건축물이 천성인 사람의 마음을 빼앗을 리가 만무하다. 기능주의는 어느 것이건 간에 여러 가지로 해석되고 혼동하여서 사용되었다. 그러나 재차 인간생활의 기능이라는 것을 고쳐 물음으로써 올바른 기능주의를 세우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분리된 하나하나의 건축요소가 요구되는 성능에 대하여 충분히 대답해 나가는 일이 필요함과 함께 그들이 또 다시 전체의 부분으로서 유기적으로 구성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건축을 만들 때의 가장 중요한 과제의 하나이다.

유기적인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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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機的-建築

유기적인 건축이라는 말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서도 다르지만, 건축이 자연중에 있는 유기물이 가지고 있는 구성과 동일한 것을 가져야만 된다는 주장이라면 로마시대로부터 그 계보(系譜)를 거슬러 올라가서 생각할 수가 있다. 로마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의 <건축십강(建築十講)> 속에는 인체와 건축과의 관계가 기술되어 있고, 또한 미켈란젤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것이 지적된다.

근대에서는 반 데 베르데나 멘델존의 사상에서 볼 수 있듯이 건축을 분석적으로 파악함이 없이 유기적인 일체성을 노렸던 것을 들어도 되겠다. 특히 프랑크 로이드 라이트는 공업적인 비인간성에 대하여 자연환경까지 포함시켜서, 건축의 일체화를 주장하여 이른바 유기적인 건축의 대명사로도 되었다.

아무튼 유기적인 구성이란 우선 개체의 자유로운 활동을 인정하면서 그것을 전체라는 하나의 것으로 융합시키고자 하는 의식이 그 밑바닥에 흐르고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사실은 근대에서 현대에 걸쳐서 공업사회의 고도의 발달과 함께 각 분야에서 항상 주장되어 온 것이고, 그것은 단순히 형태적으로 자연 속에 있는 것을 모방한다는 것이 아니라, 사회 체제로의 안티테제로서 전투적인 성격을 띠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핀란드의 알토(Aalto)나 스웨덴의 아스픈드 등의 작품을 단순한 지방주의적인 건축으로서 파악하고자 하는 태도는 거꾸로 유기적인 건축에의 도전이라 보아도 되겠다.

기 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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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근 콘크리트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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鐵筋 concrete 構造

철근은 열에 대해서 약하지만 그것을 피복(被覆)하고 있는 콘크리트는 변형이 적으므로 내화성(耐火性)이 높고, 철근은 산성(酸性)에 대하여 약하나 알카리성(性)인 콘크리트에 싸여 있기 때문에 내구성이 높으며 또한 양자의 압축강도와 인장강도(引張强度)의 힘에 의하여 내진성(耐震性)이 있는 구조이다. 일반적으로는 현장에서 형틀을 만들어 그 속에 계산된 소정의 위치에 철근을 배치하고, 콘크리트를 부어서 일체화시킨 것이다(현장치기 콘크리트).

최근에는 프리패브(prefab)의 경향이 짙으므로 기둥, 들보, 상판(床板) 등의 구조부재(構造部材)를 공장생산한 프리캐스트 콘크리트(precast concrete)도 많이 쓰이는 경향이 있다. 또한 목구조(木構造)나 석구조의 주된 직선적인 조형에 알맞은 재료에 대하여, 철근 콘크리트 구조는 2차, 3차곡선 등의 자유로운 형태가 만들어지고 있으므로 현대건축에서 자유로운 공간조형의 무한한 가능성을 가져왔다.

셸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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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hell 構造

셸의 본래 의미는 조개껍질이다. 건축에 사용될 경우는 건물의 외각뼈대, 속이 빈 구형(球形) 또는 반원으로 된 것을 가리킨다. 구조는 얇은 판(版)의 곡면을 사용한 구조로, 철근 콘크리트 구조로서는 가장 경량이고 경제적인 구조가 가능하다. 그것은 현대구조 설계의 이상적인 표현에 속하고 있다.

역학적인 특성은 이른바 막응력(膜應力-손에 쥐어진 한 장의 종이는 흐느적거려 구부러져서 자기 무게를 받칠 수가 없으나, 만약에 똑같은 한 장의 종이를 쥐고서 좀 위쪽으로 구부리면 그 종이는 자기 무게와 어느 정도의 무게를 받칠 수가 있다)의 성립에 있어서, 곡응력(曲應力)을 일으키지 않을 정도로 얇고, 압축·전단력(剪斷力)은 인장(引張)에 의하여 하중을 전달할 정도로 두꺼운 곡판구조(曲板構造)이다. 셸의 두께는 일반적으로 6cm-10cm 정도로 설계, 시공되고 있다. 셸은 나무, 강철, 플라스틱 재료로 만들어져 왔는데 철근 콘크리트 구조에 가장 알맞다.

셸의 종류에는 H.P 셸, 통형(筒型) 셸, 안형(鞍型)셸이 있다.

현조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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懸弔構造

흔들구조라고도 한다. 조교(吊橋)처럼 주요구조가 현수선(懸垂線)에서 생기는 교차곡면의 형으로 만드는 구조이다. 케이블, 강봉(鋼棒) 등의 장력(張力)만으로 하중을 받치는 방식으로서, 고장력(高張力)이 매우 세밀한 강재로 형성되어 있다. 구조체가 가볍기 때문에 내력(耐力)이란 점에서 유리하다. 셸과 비슷한 구조로 보이나 역학적인 상이점으로서 곡강성(曲剛性)이 없으므로 강성이 부족하여, 풍압력(風壓力), 설하중(雪荷重) 등의 가하중(加荷重)에 대한 휘어짐이 문제가 된다. 이러한 현조구조의 강성 부족을 보충하는 의미로 조재(吊材) 위에 프리캐스트 콘크리트나 또는 현장치기 콘크리트를 병용하여 셸 효과를 기대할 경우가 많다. 현대의 건축에서는 사리넨(Saarinen)의 하키링크가 이 구조를 채택하고 있다.

뉴매틱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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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neumatic 構造

막내(膜內)에 내압을 가하여 외력에 견딜 수 있도록 한 구조이다. 철근 콘크리트 구조에 있어서는 자기 무게를 받친다는 것이 구조설계상 커다란 조건이었으나 뉴매틱 구조에 있어서는 구조물 자체가 플라스틱계(系)의 생지(生地), 캔버스, 경량 파이프 등을 사용하여 구성하므로, 자기 무게에 대한 문제는 적다. 또한 구조 강도는 외력에 대하여 블로어(blower 송풍기), 컴프레서(compressor 압축기), 컨트롤계(control 압축기)의 설비기계가 있으면 내압을 가감할 수가 있다. 구조로서 정역학(靜力學)에서 동역학으로 문제를 이행시키는 구조이다. 최근에는 몬트리올 만국박람회에서의 에어돔형(air dome 型) 전시장, 미국의 월터 바드에 의한 6만 명까지의 수용력을 가진 에어돔식(式) 뉴매틱 구조의 경기장과 텍사스의 어느 작은 마을 전체를 둘러싼 계획의 가능성까지 연구되고 있다. 그리고 가구, 조명기구, 조각 따위 조형 분야에서도 뉴매틱 구조의 원리를 응용한 것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스페이스 프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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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ce frame

입체 그리드(grid)를 말한다. 입체상으로 트러스(truss)를 짜고서 여러가지 응력(應力)을 입체적으로 분리시키는 방법이다. 따라서 구조는 경량임에도 불구하고 놀랄 만한 안정성과 내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플라스틱까지도 구조재(構造材)로서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우수한 구조이다. 이 구조는 모듈(module)에 의한 구성재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프리패브 건축에 알맞다.

스페이스프레임(space frame)은 콘라드 왁스만 등 구조기술가들에 의하여 추구되고 있다. 바크민스터 프라의 풀러 돔(Fuller dome)도 이 수법의 하나로서, 구형을 다면체로 분해하고 공장가공한 파이프로 트러스를 조리하여 대가구(代架構)의 도움을 만든다. 스페이스 프레임은 제 아무리 큰 면적이라도 공간과 스팬(span)이 차단되는 일 없이 쌀 수가 있고, 어떠한 요구에도 거의 무제한으로 대응할 수 있다는 전혀 새로운 건축의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커튼월 공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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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rtain wall 工法

근대건축의 독특한 장벽식공법(帳壁式工法)이다. 기둥, 들보 등의 주요 구조체가 건물의 하중을 받치고 벽에 연직하중(鉛直荷重)이나 수평하중을 분담시키지 않아서 비바람을 방지하거나 외부의 소음을 차단하거나 하는 것이 주요한 기능이다.

또한 공간을 구획하거나 이동함으로써 자유롭게 확장, 융통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외벽면을 새시(sach)로 구성한 것으로서 고정시켜 여닫을 수 없는 창, 미닫이, 밸런스 오르내리기 창 등으로 구성된 커튼월 새시는 이 응용이다.

프리패브리케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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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fabrication

건축의 경우 그 단위부재(單位部材)의 생산, 가공, 조립을 미리 공장에서 만든다는 의미이다. 단위부재의 조합방법으로 해체, 재구성, 및 증축도 가능하다. 지붕, 마루, 벽재(壁材)에서 최근에는 구조재까지 공장생산할 단계에까지 이르고 있다. 급격한 건설 수요에 대한 노동력의 부족과 노동임금의 앙등, 공사규모의 대형화, 고도의 기술화 등이 반영되어 세계 어느 선진국에서도 이 경향이 있다. 현장작업의 공정을 가능한 한 공장생산으로 하고 합리화함으로써 공기단축(工期短縮), 정밀도의 향상, 비용의 감축을 가져오는 잇점이 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만들어진 부재 또는 건축을 프리패브라고 부른다.

유니버설 스페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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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versal space

공간을 전체로서 넓게 취급하여 어떠한 내용에도 대응할 수 있는 공간을 말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미스 반 델 로에 등에 의하여 추진되었다. 기둥, 마루, 천장 등 움직이지 않는 요소에 대해서 가동(可動)의 간막이나 가구, 커튼 따위, 자유로운 요소의 배치에 의하여 공간의 기능을 암시하고, 다양한 사용방법을 추구하려고 하는 것을 말한다.

필로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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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lotis

본래 의미는 기주(基柱)이다. 프랑스의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는 건물의 기주를 지상으로 내어 건물은 공중에서 받치는 구조를 만들어 내었다. 필로티는 건축과 토지를 분리함으로써 대지(大地)를 개방하고, 그리고 반대로 융합점으로서의 자유로운 공간을 만들고 있다. 이 수법은 현대건축에 하나의 커다란 방향을 제시하였다.

인공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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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工土地

도로와 직결된 시가지나 도로에 의하여 다른 곳과 통합되는 종래의 도시의 양상은 도시의 인구밀도가 높아짐에 따라 허다한 모습을 낳아 왔다. 그 해결방법으로 종래의 평면적인 도시구성을 입체적인 형으로 새로운 도시구조를 재구성해 가고자 하는 하나의 제안이다. 도시의 기능을 가능한 한 분화시켜서 분리하고, 저마다의 기능을 단독으로 자유롭게 발달시켜서, 공장지대나 도시교통, 상업지역의 발달에 의하여 침범된 주공장지대나 도시교통, 상업지역의 발달에 의하여 침범된 주공간(住空間), 녹지(綠地)를 되찾으려고 하는 것이다.

동선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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動線計劃

인간, 탈 것, 에너지 등의 움직이는 흐름을 평면적으로 도시(圖示)한 것이다. 주택의 평면계획에서 도시계획에 이르기까지 평면을 기능적으로 분석하고 조직화하기 위한 중요한 방법으로서 사용되고 있다.

모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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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dule

기준 치수, 치수 조정을 위하여 특별히 선정된 치수 단위를 말한다. 모듈은 모든 재료, 구조, 기능에 대하여 합리적인 치수 계열일 뿐만이 아니라 인간의 생활동작에 대해서도 합리적인 치수가 아니어서는 안 된다. 현재의 건축계에서는 건축공업 근대화를 위한 하나의 수법으로서 재료, 부분품, 조립의 복잡한 생산수단을 조직화하기 위하여 모듈의 확립이 중요한 과제가 되어 있다.

아티큘레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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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ulation

아티큘레이션이란 언어학상의 언어로서 분절(分節), 명료(明瞭)의 의미이다. 이 말이 건축의 주요한 분야로 도입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에서 20세기 초 현대건축이 전개될 무렵부터이다. 그 이전에는 주로 교회건축의 주요 공간을 구성하는 기둥, 벽, 천장, 또는 플라잉 버트리스(flying buttress) 등의 요소를 말한다. 그 뒤 기능주의의 추구에 의하여 건축의 완전한 개별화, 분해를 가리킬 만큼 변화되어 갔다. 이러한 생각은 또한 합리주의라는 개념을 가지면서 루이스 칸이나 많은 건축가에 의하여 설계방법의 추구가 이뤄지고 있다.

프라이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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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vacy

주택설계에 있어서 개인의 생활을 중요시하고 그 독립을 주장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의 전통적인 주택구조는 봉건제도의 영향으로 가장(家長) 이외의 개인의 사생활은 거의 인정되지 않는 형태였다. 따라서 독립된 개인의 사실(私室)이 없이 부부와 아이들이 함께 쓰거나 침실이 서로 붙어 있거나 하였다. 해방과 더불어 한국에도 근대적인 개인존중의 사상이 들어오게 되어 개인의 사실(연령, 성, 추미, 고독, 휴식, 수면, 사랑)과 공통의 거실을 중심으로 한 주택계획이 수립되었다.

코트 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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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urt house

건물에 의하여 둘러싸여 폐쇄된 마당(뜰)을 갖는 주택을 말한다. 코트 하우스의 주요한 특징은 마당을 프라이비트한 외부로서 확보하는 그 내향성에 가장 잘 드러나 있다. 교외나 전원에 세우는 독립주택과 같은 인간성 있는 주택을 도시의 주택에 접목시키려는 방식으로 밀집지대에서의 마당의 양상으로서 가장 유효한 방식의 하나이다. 이 기법은 세계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모빌 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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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bile house

이동하면서 생활할 수 있는 집을 말하는데, 오늘날 그 대표적인 것은 트레일러 하우스이다. 유목민과 같은 촌락의 이동은 집을 해체하여 새로운 토지에 가서 조립하여 생활하는 방식을 말한다. 또는 생활의 장에서 다른 생활의 장으로의 이동이었으나 현대의 모빌 하우스는 생활하면서 이동해 가기 때문에 생활 그 자체가 토지에서 개방되어서, 산다는 행위를 토지와의 연결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있다. 그러므로 생활공간은 이동에 편리하도록 기계화되고 콘크리트화되어 높은 기능밀도가 요구된다. 사람이 토지에서 유리되어 움직이며 살게 되었을 때 건물에 대한 개념도 변하고 조형도 변하게 될 것이다.

랜드마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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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ndmarks

도시 안에서 방향을 알리거나 도표(道標)가 되는 건축구조물로서 시각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이들의 중요한 특색은 그 특이성에 있다. 랜드마크는 주위공간 속에서 한층 더 눈에 띄고 도시의 양상(樣相) 속에서 잘 조화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큰 랜드마크로서는 뉴욕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나 파리의 에펠탑 등이 그것이며, 작은 것으로는 시에나칸포 광장의 시계대나 베니스의 산마르코 광장의 탑이 그것이고, 도시 공원의 조각상(彫刻像)과 같은 랜드마크도 있다. 랜드마크는 공간적인 배치가 보다 훌륭한 것이라면 도시기능의 일부로서 의의 깊은 건축물이다.

타운스케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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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wnscape

도시경관을 말하며,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부분이 건축뿐만이 아니라 수목이나 언덕이나 표지 등 모든 심벌이 함께 짜여 이룩된 패턴을 말한다. 이는 도시의 총체를 그 형태로부터 인출(引出)한 것은 아니고 도시 부분을 그 구성요소가 가지고 있음을 말하고 움직이는 인간에 의하여 도시공간이나 기능이 어떻게 변화되어 가는지를 아는 것을 말한다. 18세기 영국의 조원가(造園家)들에 의하여 사용된 수법이며 20세기에 들어와서부터는 새로운 도시계획 수립에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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廣場

광장이란 단순한 공지(空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계획적으로 외부공간으로서 만들어진 것으로서 그것은 도시에서의 생활방식이고, 생할에 대한 사고방식을 말하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광장은 아고라(agora), 반원극장 아크로폴리스(akropolis)등 거기에 모이는 시민에 대한 진정한 정신적인 장소로 되고, 동시에 시민으로서의 공감을 서로 느끼는 공간이었다. 그후 광장은 도시디자인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르네상스시대에도 그것은 탁월한 양상을 띠었는데 그것은 과밀화된 도시의 휴식 장소가 되었다. 현재 세계 각지에서 시행되고 있는 도시계획에서도 광장을 중심으로 한 커뮤니티의 계획은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다.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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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우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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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onio Gaudi (1852-1926)

동세공가(銅細工家)의 아들로서 에스파냐의 카타로니아 지방의 소도시 레우스에서 태어났다. 처녀작 <돈 마느에르비센스 저택>이 있다. 이것은 당시 세계를 풍미하고 있던 보살 양식이나 앙필 양식의 영향을 전혀 받고 있지 않으며 야석조(野石組)의 벽면에 색채가 풍부한 타일이 박힌 환상적인 건축이었다. 이 때부터 그의 내면에 잠겨 있던 그 열기를 띤 형이상학적인 사고가 싹튼 것이라 생각된다. 그후 <파라시오 그에르>, <바르셀로나 만국박람회의 트란스 아트란티카사(社)의 파비리온>(1888년), 레온에 <카사데 로스 보디네>(1892년), <카사 바트로> <사그라다 파밀리아성당 부속학교> 등을 설계하였다. 그리고 그것들과 병행하여 계획, 착수된 <사그라다 파밀리아 교회>(1883년)은 아직껏 미완인 채로 바르셀로나에 그 모습을 남기고 있다. 이것이 그가 일생을 건 작품이고 그의 사상이 개화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에게 있어서 건축이란 의리에서 도출된 것은 아니고 정념(情念)이나 존재가 그대로 고정화되고 시각화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계산상으로는 해명되어 있지 않았던 돔이나 인체골격을 연상시키는 기둥, 박쥐 날개를 펼친 듯한 지붕, 조가비를 연상시키는 나선형 계단, 그리고 반짝이는 원시의 바다를 연상시키는 저 강렬한 타일의 빛깔, 또한 정교(精巧)를 다한 철세공(鐵細工) 등으로 인간내면의 깊은 곳에 있는 정신을 무의식에서 의식에로 전화(轉化)시키려는 작업을 시도했다. 그가 죽은지 50년이 지난 오늘날 태반의 건축가들이 망각하고 있는 인간의 내면적인 것, 정신이 물질을 빌어 이 세상에 얼굴을 내민 것, 그것 자체를 그는 건축이라 생각했다. 그런 면에서 그는 보다 인간적이고 초현실적인 건축가였다고 할 수 있겠다.

설리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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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uis H. Sullivan (1856-1929)

미국의 보스턴에서 태어났다. 그의 '형태는 기능에 따른다'라는 말은 자주 오해되어 사용되었으나, 그것은 버팔로의 <개런티 빌딩>에 적확(適確)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는 이 명제에서 출발하여 유기적인 건축의 완성을 노렸다. 그 싹은 그의 제자인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에 의하여 개화되고 완성되었다. 그의 작품 중 가장 주시하지 않으면 안될 것은 <카손 필리 스코트 백화점>이다. 여기에는 수직감과 동시에 수평감이 강조되어 상부의 평명성(平明性)에 대한 1층, 2층의 장식이 대비적인 조화를 유지하고 있다. 이것은 엄격한 프로포션에 바탕을 두고 구성되어 있다. 그의 만년은 비극 속에서 끝났으나 그가 의도한 것은 오늘날 면면히 살아나 이어지고 있다.

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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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k Loyd Wright (1867년 또는 1869-1959)

위스콘신주 리치랜드 센터에서 태어났다. 그가 건축 속에서 노린 것은 그 유기성이었다. 오늘날 르 코르뷔지에의 기능주의와 마찬가지로 그의 유기주의의 의미도 잘못 이해되고 있는 점이 허다하다고 생각된다. 그의 저 다채로운 조형창조의 원천은 프레베르의 나무 쌓기놀이와 그가 자란 풍토성이 커다란 원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아마도 그는 그 속에서 초목이나 꽃 등의 부분과 전체가 필연적인 관계에 있다고 하는 하나의 자연법칙을 무의식적으로 체득하였음에 틀림없다. 그는 "나무는 빛(光), 즉 성장을 위하여 저장된 열이 바깥으로 향하여 형상화된 물질이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것을 모태로 하여 성장한 그는 유기적인 건축의 창시자 설리번을 만남으로써 그의 유기적인 건축 사상이 개화되어 갔다. 돌은 단순한 무기물이지만 그것이 하나의 법칙에 바탕을 두고 놓여졌을 때 그것은 무기물에서 시라고 하는 고차적인 형이상학에로 전화(轉化)하고, 다른 새로운 창조에너지가 된다.

이처럼 그에게 있어서 유기적인 건축이란 자연숭배주의는 아니고 전 우주의 질서를 발견해서 그것을 어떠한 법칙성을 가지고 구성표현하는 형이상학적인 사고의 문제이며, 의식적인 상징공간으로서의 건축에 인간과 자연이 공감적으로 관계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의 유기적인 건축이란 인간주체의 생각에 기초를 둔 것이다. 주요 작품에는 <카우프만 저택(落水莊)>, <굿겐하임 미술관>, <라킨 빌딩>, <존슨 왁스 연구소>, <프라이스 타우어>, <타리아센 웨스터> 등이 있다.

베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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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ter Behrens (1868-1940)

함브르크에서 태어났다. 그는 교육자로서 커다란 공적을 남겼다. 그의 문하에서는 현대건축의 거장들이 배출되었다. 그들은 그로피우스, 르 코르뷔지에, 미스 반 데르 로에 등이었다. 그의 건축조형은 다양하게 변화되어 가는데 고전주의적이고, 기능주의적이며 차분한 기념비적인 것을 남겼다.

그는 시대배경으로서의 공업문명의 요구에 호응한 건축철학의 한 형(型)을 발전시킨 20세기 최초의 건축가의 한 사람이다. 그는 최초에 화가로서 출발하였다. 그리고 세세션의 운동에 참가하여 그 중심적인 인물로 활약하였다. 그의 주요 작품으로서 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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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uis I. Kahn (1901-1974)

에스토니아(소련)의 오제르 섬에서 태어났다. 젊어서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의 필라델피아에서 활약하였으며, 칸이 오늘날과 같이 국제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바로 최근의 일로서 그가 50세도 지난 다음부터였다. 이전에는 대학에서 교육에 종사하는 한편 그 자신의 사고를 원숙시키고 있었다. 그는 아웃사이더적인 건축가여서 그의 작품도 매우 유니크한 것뿐이다.

그의 작품은 크게 나누어 <리처드 의학연구소>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가 있다. 전자에는 , <이엘 아트 갤러리>, <유다야 집회장> 등이 후자에는 <인도 매니지먼트 연구소>, <동(東)파키스탄 신수도 다카 계획>, <소크 생물연구소>, <유니테리언 교회> 등이 있다. 왜 <리처드 의학연구소>가 하나의 구획이 되느냐, 그것은 그가 <리처드 연구소>에서 이전부터 찾았던 것, 즉 원리적이고 기본적인 그리고 본질적인 것이 이 작품에 이르러 밀도있게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그는 이러한 사고방식을 토대로 해서 사상을 보다 심화시키고, 보다 정념적인 것으로 전개하여 갔다. 그는 다음과 같은 문장을 쓰고 있다. 즉 "만약에 건축을 한마디로 정의하라고 한다면 나는 건축이란 공간을 사상이 풍부하게 창조하는 것이라고 말하겠다. 그것은 시공주(施工主)의 요구를 만족시킬 뿐만으로서는 충분하지 않다.

그것은 한정된 범위에서 용도를 맞추는 것은 아니다. 건축은 전혀 그러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용도의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공간의 창조이다. 공간은 건물이 세워지는 목적의 용도에 잘 조화되록 공간 그 자체를 형성한다"라고 하였다.

산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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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onio Sant'Elia (1880-1916)

이탈리아의 소도시 코모에서 태어났다. 밀라노와 볼로냐에서 배운 뒤 혼자 힘으로 오토 바그너의 빈파(派)의 작풍(作風)에 준해서 제스스로 설계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 생각은 공업도시의 기술적인 발전과 전진적인 확장을 모태로 한 새로운 도시이고, 미래의 도시였다.

그는 북아메리카 문명의 특징있는 도시에 매혹되어 있었고 그것에 전도된 일도 있었다. 그는 '차타 누오바오'의 장대한 계획에서 그 생각을 끌어내었다. 그 밖에 마천루 등에도 그 생각은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당시로는 너무도 앞선 계획이어서 실제로 건설된 계획안은 극히 소수였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하였다.

그로피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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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lter Gropius (1883-1969)

베를린에서 건축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쇠와 유리 그리고 콘크리트의 새로운 가능성을 추구하였다. 또한 유리의 커튼월에 의한 새로운 공간구성에 의하여 인터내셔널 스타일을 만들어 내었다. 그리고 건축의 공업화, 규격화에 의하여 시시각각 변화하는 인간적인 요구를 그 조합에 의하여 해결한다는 수법을 제시하였다. 이 문제는 현대에 이르러서도 아직껏 해결되고 있지 않다. 그것은 근대건축의 숙명적인 과제였다.

그의 작품으로는 <파그스의 공장> <코로뉴의 모델공장> <데사우의 바우하우스 교사(校舍)> <그라듀코트 센터> <하버드 대학> 등이 있다. 그는 1919년 바우하우스를 창설하고 근대 디자인운동에 참가하였으며 교육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가졌다. 또한 1937년 미국의 하버드 대학 건축과 주임에 취임하였다. 그리고 미국에서 설계조직 AC에서 활약하고 있었으나 1969년 7월 상순 보스턴에서 서거하였다.

미스 반 데르 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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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1969) Ludwig Mies Van der Rohe

아헨에서 탄생하였다. 독일계 미국인이다. 미스의 "Less is more"라는 말 가운데 뒤의 '순수·형태'의 정복에 대한 끊이지 않는 추구의 마음을 발견할 수가 있다.

그의 작품은 '철골(鐵骨)과 유리'라는 근대공업의 가장 중요한 소재를 구사함으로써 저 청명한 공간과 명확하게 구축된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의 이 공간의식은 1920년대 초에 일찍이 실현되고 있다. 그의 사상과 작품은 1937년 나치스에 쫓겨서 미국에 건너간 이후 이 커다란 공업력을 가진 나라에서 대규모로 실현되어 갔다. 주요한 작품은 베를린 건축전에서의 <독신자용 전원주택> <시카고 레이크쇼 드라이브 아파트> <일리노이 공과대학> 등이 있다. 그의 정신적인 영향은 현대 미국건축 속에서 커다른 흐름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다. 가령 필립 존슨의 <자택> 엘로 살리넨의 <제너럴 모터스 기술연구소> 또한 SOM의 작품 등은 특히 그것이 현저하다.

르 코르뷔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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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Corbusier (1887-1965)

스위스 라 쇼 드 폰에서 탄생하여 뒤에 프랑스로 이주하였다. 그는 현대건축의 모든 원점(原點)이 된 사람이다. 그가 창조한 모든 것은 우리들의 감성을 요동시켜 이성의 발아를 촉진하였다.

코르뷔지에는 건축에만 재능을 경주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회화, 조각 등 창조라고 이름이 붙은 모든 것에 흥미를 가졌고, 또한 모든 면에 크나큰 발자취를 남겼다. 건축 분야에서 그는 현대건축의 테제로서 다음과 같은 원칙을 주장하였다. 그것은 개방된 공간을 꿰뚫는 기둥, 뼈대와 벽의 기능적인 독립, 자유로운 평면, 그리고 자유로운 파사드(Facade), 옥상정원이다. 그는 이 5원칙을 작품 속에서 차례차례로 취급하여 그의 작품이 현대건축의 출발점이 될 정도로 완성도를 높여 갔다. 또한 그는 근대 도시건축에 요구되는 3원칙을 부여하였다. 그것은 너무나도 유명한 저초록색과 태양과 공간의 도시화이다.

그는 10대의 후반부터 20대에 걸쳐서 근대건축의 선구자들인 오규스트 페레(Auguste Perret) 나 페테 베렌스에게서 배운 다음 고전의 세계를 찾아 여행에 나섰다. 그리고 그는 이 여행에서 얻은 것을 작품 속에 도입하여 갔다. 이것은 론샨 교회의 빛 속에서, 라 토레드의 그림자 속에서 발견할 수가 있다. 주요 작품으로서는 <아르 누보관(館)> <마르세유의 아파트> <샨디갈 수도계획> 등 외에 다수가 있다.

리트펠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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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rit Thomas Ritveld (1888-1964)

위트레흐트시(市)에서 탄생하였다. 동시에서 가구공장을 경영하는 아버지 공장에서 일하면서 창조에 대한 사고를 이론이 아닌 실제를 통해 체득하였다. 그는 건축가이기도 하였으나 또한 가구 디자이너이기도 하였다.

그가 디자인한 의자에 <레드 블루 체어>가 있다. 이것은 의자를 면재(面材)와 선재의 구성요소로 분해하여, 그것을 밸런스가 좋게 조립하고 옐로, 레드, 블루 빛깔을 나눈 것이다. 그가 만든 건축도 의자와 마찬가지로 재질감이란 것은 전혀 느낄 수 없다. 강렬하게 눈에 띄는 것은 공간을 에워싸서 그것을 내외 상호간에 유동시키고 또는 단절시켜 차단되고 있는 면이다. 이것은 <슈레다 저택>에 표현되어 있다. 리트펠트에게 있어서 디자인이란 물질의 구성요소의 분석이며 공간을 수평면과 수직면과의 관계 속에서 파악함이었다.

폰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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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o Ponti (1891-1979)

밀라노에서 탄생하였다. 그는 타일로부터 테이블웨어나 집기류, 쇼핑센터에서 고층빌딩에 이르는 폭넓은 분야에서 활동하였다. 또 동시에 현대 이탈리아의 지도적인 건축가이기도 하였다. 그의 작품 속에 흐르고 있는 사상은 현실에 만족하는 일 없이 그것을 더욱 높인다는 극히 상식적인 것이다. 따라서 그의 작품은 합리주의와 기능주의에 통함과 동시에 젊은 세대에 의하여 대표되는 전위적인 운동에서도 자유로워 독자적인 영역을 개척하였다.

그의 최고걸작인 밀라노의 <피레리 빌딩>은 이 사상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이 건물 속에서 그의 천분의 재능과 사상을 발견해 낼 수가 있다. 이탈리아의 건축잡지 의 편집장을 하기도 하였다.

네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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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er Luigi Nervi (1891-1979)

롬바르디아의 손도리오에서 태어났다. 현대 이탈리아가 자랑하는 구조 디자이너이다. 그가 건축계에 등장한 것은 40세가 되어서인데, 그것은 22미터까지나 달하는 센티레버(Centi lever)라는 대담한 수법을 가진 <피렌체 시영 스타디움>을 통해서였다. 그가 만드는 기둥에는 피가 통하고 지붕은 대지의 입김이 느껴진다. 네르비는 구조를 통한 접근으로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는 소수 건축가 중의 한 사람이다. 또한 현장치기 콘크리트의 기술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PC 콘크리트나 PS 콘크리트의 개발에 힘쓴 사실은 특필하여야 될 점이라 하겠다.

노이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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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chard joseph Neutra (1892-1970)

빈에서 탄생. 1923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의 건축가로서 활약하였다. 그의 작품에는 근대기술을 대대적으로 또한 낙관적으로 받아들인 것이 많다. 그 하나로 콜로라도주에 세운 <카우프만 저택>이 있다. 이것은 사막 속에 세워진 것으로서 한난(寒暖)의 가혹성을 조정하기 위하여 마루에는 패널히팅(panel heatting), 패널쿨링(panel coolling)이 설치되고, 창에는 알루미늄 가동(可動) 루버(louver)를 사용하여서 태양의 직사를 피하고 있다. 창으로 근대적인 공업기술을 철저하게 활용한 주공간(住空間)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는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수송수단에 기초를 둔 새로운 건축은 지금까지 살 수가 없었던 또는 살 수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던 장소로까지 넓힐 수가 있고 넓혀져 갈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미국 현대주택의 모더니즘을 대표했던 작가라고 할 수 있겠다.

샤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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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s Scharoun (1893-1972)

독일 브레멘에서 태어났으며 베를린 공과대학을 졸업하였다. 제2차세계대전 중 나치스의 정권하에 있었던 당시 독일에서 그로피우스, 로에, 멘델존, 브로이어 등의 건축가가 대서양을 건넜으나 그는 독일에 머물러 정치적인 정세의 악화를 견디어 내었다. 이 사실은 샤론의 건축이 항상 상황의 내면을 천작해내는 표현력을 구현하고 있는 그의 작품과도 관련이 있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에는 <에르고란드 주거(住居)> <북 샤를 로텐브르크의 주거단지> <베를린 콘서트 홀> <다름슈타트 초등학교 계획안> 등이 있다.

그의 공간은 부분과 공간이 융합한다. 인간의 내면적인 것에서 전체적인 것으로, 전체적인 것에서 내면적인 것으로 접근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구분을 구성하는 요소는 유기적으로 집합하고, 그 집합화도 부분인 요소의 독립성을 소실시켜버리고 만다. 가령 그의 주거단위와 코르뷔지에의 주거단위를 비교해 보면 샤론이 얼마나 엄격한 자세로 창작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에게 있어서 건축이란 인간에 관계되는 문제인 동시에 개인과 사회의 역학관계 속에서 성립되는 문제이다.

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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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chard Buckminster Fuller (1895-1983)

매사추세츠주 밀턴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30년간 미국에서 저주받은 건축가였다. 그러나 그는 공간을 거의 무제한으로 덮는 데 열중하였다. 그래서 그 결과 <푸럴 돔>을 만들어 내었다. 그것은 가볍고 조립이 빠르며 경제적이었다. 그의 사상 속에는 일개인, 일기업을 대상으로 한 건축은 없었다. 항상 그것은 어떻게 커다란 공간을 만들 것이냐가 문제였다.

그는 "우리 시대의 정말로 위대한 프로그램은 궤도에서 무궤도로, 유선에서 무선으로, 가시(可視)에서 불가시로"라고 말하고 있다. 그의 이념의 일단은 <몬트리올 박사의 미국관>에서 실현되었다. 내일의 건축을 생각할 때 풀러의 존재는 크며 또한 클로즈업 되지 않으면 안 된다.

키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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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derick John Kiesler (1896-1965)

빈에서 출생하였다. 1936-1942년 사이 콜롬비아대학 건축연구소 소장이 되었다. 그는 건축에서의 기둥과 들보를 거부하여 보다 무제한으로 자유로운 공간을 만들어내는 모든 것을 바쳤다. 평면계획은 전혀 자유로운 흐름을 표시하고, 공간 파악은 완전히 조각 그 자체이다. 그의 공간은 한없는 율동과 흐름속에서 그 이념을 도출해 준다. 그러나 그의 작품이 현실이라는 현재가치(現在價値)에 바꿔 놓이지 않는 것은 그러한 기회와 그것을 만들어낼 수 있는 구조재(構造材)에 대한 혜택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무한이라는 주제를 항상 그의 작품 속에서 주입하려고 노력해 왔다. 이 이념 아래서 만들어진 것이 환상의 건축 <엔드리스하우스(endless house)>이다.

알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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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go Henrik Alvar Aalto (1898-1976)

핀란드의 중서부 쿼르타네에서 탄생하였다. 알토와 핀란드를 분리시켜 생각할 수는 없다. 알토를 만들어내고 있는 창조적인 원천은 그 대지(大地)에서 용솟음쳐 나온 것이다. 근대건축의 파이어니어들 중에서 그 작품이 풍토성을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그는 프랑크 로이드 라이트와 쌍벽을 이루었다. 그의 작품은 항상 우리들의 생활공간을 따뜻하게 감싸서 그것을 보는 사람, 체험하는 사람의 마음에 불안을 주는 일 없이 자연스러운 안락 속으로 이끌어 준다. 알토의 작품 속에서 우리들은 근대 건축의 명제였던 생활공간의 대응, 부분과 전체의 유기적인 결합을 발견해낼 수가 있다. 그는 1929년 <파이미오의 사나토륨>에 의하여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1939년 <뉴욕 만국박람회 핀란드관>에서 그가 갖는 유기성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그리고 그는 건축뿐만이 아니라 가구, 조명기구, 텍스타일 등의 모든 분야에서 그 천분을 쏟아 부었다. 그의 이 힘을 길러온 것은 그의 고국 핀란드의 숲과 호수였다.

프루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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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 Prouve(1901-1984)

프랑스 낭시에서 탄생하였다. 프랑스에서 근대 공업기술에 도전하고 있는 건축가이다. 그는 '현대적'이라는 상황 속에서 주목되어야 할 사람이다. 공업화라는 점에서 건축을 자동차, 배, 비행기와 동류로 생각하여 다른 공업제품과 건축을 직접 결합시킨 사람이다. 코르뷔지에가 콘크리트에 집착하였듯이 그는 메탈(metal)이라는 소재에 집착되어 메탈에 의한 건축을 적극적으로 제안함으로써, 건축의 대량생산화 문제에 정면으로 도전하였다. 그를 에워싼 환경은 낡은 석조건축에 둘러싸인 프랑스이다. 이 속에서 메탈만을 끌어내어 건축을 생각한다는 것은 강력한 인내력과 정열을 요구했다. 엔지니어의 입장에서 건축을 생각하고 있는 희귀한 건축가의 한 사람이었다.

왁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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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nrad Wachsmann (1901-1980)

프랑크푸르트에서 출생했다. 오늘날 공업화 세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축가의 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이론적임과 동시에 실제적으로 건물의 공업화를 촉진하고 있는 건축가이다. 즉 그는 어떻게 대량생산에 가능한 기본적인 부재(部材)를 만들어내느냐 하는 데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 부재는 보다 단순하고, 보다 대량으로 생산되고, 보다 자유로운 조합을 만들 수 있느냐 하는 문제였다. 그의 작품으로 미국 공군으로부터 의뢰받은 <모빌러 스트럭처>를 개발한 것이 있다. 이것은 스틸의 지주(支柱)를 덧붙이기만 하고서 거대한 공간을 만들 수가 있었다. 그의 건축은 건축을 초월하여 기술문명 속에서 정신의 양상을 연상시키는 점이 있다.

브로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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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el Lajos Breuer (1902-1981)

헝가리의 페치에서 태어났다. 애당초 화가와 조각가가 되고자 하여 빈으로 옮긴 뒤, 바우하우스의 제1기생으로 입교했다. 그의 관심은 가구 디자인 분야에 있었으나 규격 모델을 사용한 주택에 착수함으로써 건축분야로 진출하였다. 1937년에 그로피우스에 초대되어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가구에 대하여 이렇게 생각하였다. "누구나가 어디에서나 용이하게 사용될 수 있는 다양성이 필요하다" 나아가 "형태는 단순하고 또한 완전한 기능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이 이념은 바우하우스의 파이프 의자로 실현되었다.

그는 미국에서 이 이념을 건축으로 확대하고 차례차례로 주택작품에 실현하여 갔다. 이것은 '브로이어조(調)'로 불려 중류주택의 주류를 담당하기까지에 이르렀다. 그의 주요작품으로 <자택> <도르데르탈 아파트> 등이 있다.

야콥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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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ne Jacobsen (1902-1971)

코펜하겐에서 탄생하였다. 덴마크가 자랑하는 대표적인 현대건축가이다. 그는 근대 건축혁명을 북유럽의 풍토 속에 정착시킨 작가라 할 수 있다. 북유럽에서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개방적인 밝은 디자인을 조적조(組積造)나 경사지붕 속에서 표현하였다. 그도 르 코르뷔지에나 미스, 그로피우스의 작품에 의해 현대건축의 세례를 받은 한 사람이다. 그가 덴마크 건축계의 지도적인 지위를 확고하게 한 작품은 <세호름의 집합주택>이었다.

그것은 시대의 새로운 흐름을 예리하게 탐지하고 그것을 그가 갖는 예민한 감각으로 북유럽의 풍토 속에 정착시키고 있다. 그 정신은 지금도 그의 창조에 대한 주축을 이루고 있다. 그가 보수적인 것에 입각하여 진보적인 창조활동을 하고 있는 데 대하여, 같은 풍토에서 자라난 우트온이 실험적인 것에서 진보성을 발견해 내고 있는 것은, 건축 속에서 우리들이 항상 대면하고 있는 양면성을 보다 강력하게 느끼게 된다.

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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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ip Johnson (1906- )

오하이오주(州) 클리브랜드에서 탄생하였다. 유명한 법률가인 부친을 가졌다. 그가 하버드 대학에서 고전을 배우고 있을 때 히치코크의 <근대 건축운동>에 대한 기사를 읽은 것이 건축가를 지망한 동기가 됐다. 그가 37세 때 일이며, 그리고 본격적으로 건축디자인을 시작한 것이 47세부터였다.

그는 미스의 커다란 영향 아래 작품을 창조하고, 그것을 그가 가지고 있는 지성과 높은 교양에 의하여 독자적인 세계로 고양(高揚)시켜 갔다. 그 가장 대표적인 작품에 그의 자택 <글라스 하우스>가 있다. 이것은 건물의 코어(core)부분을 남기고서 전부 투명한 유리로 덮어씌운 것이다. 주변의 자연과 융화된 내부에는 로맨틱한 분위기나 고풍(古風)의 풍요함이 충만하고 있다. 이 독창적인 집은 물론 미스의 <판스워스 저택>에서 그 아이디어를 얻었음은 쉽게 알 수 있으나, 보다 콤팩트(compact)한 공간구성은 보다 고차적인 해결의 실마리를 보였다.

그 밖에 주요 작품에는 <이스라엘 유다야 교회> <링컨 센터의 뉴욕 주립극장> 등 외에 다수가 있다.

니마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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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scar Niemeyr (1907- )

리우데자네이루에서 탄생하였다. 라틴 아메리카를 대표하는 브라질의 건축가이다. 그는 루미오 코스타의 수제자이자 또한 좋은 협동자이기도 했다. 그래서 선생과 마찬가지로 그도 또한 르 코르뷔지에의 정신을 이어받은 한 사람이다. 그의 작품에는 건축에서의 지방성(地方性)이라는 것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항상 국제성에 넘쳐 있다.

그의 주요 작품에 브라질의 신수도(新首都) 브라질리아에 있는 <브라질 외무성>이 있다. 이것은 건축공법적으로 높은 수준에 있음과 동시에 그 세련된 디자인을 엿 볼 수 있는 작품이다. 그리고 그의 건물에도 코르뷔지에의 정신이 반영되고 있다. 그 밖에 <샌프란시스코의 교회> <국제연합 빌딩> <대통령 관저> <그비체크 집합주택> 등 다수가 있다.

사리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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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ero Saarinen (1910-1961)

핀란드의 키르코눈미에서 탄생하였다. 그는 핀란드의 건축가 엘리엘(Eliel)의 아들이다. 1934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왔다. 그 후 미국의 건축가로서 생애를 보냈다. 그는 1961년, 51세로 급서하였다. 그의 작품활동이 이제부터 완성기로 향하는 때였던 만큼 전 세계에서 그의 죽음을 애석해 하였다.

그의 작품에는 금욕성을 느끼게 하는 것과 생명의 비약을 느끼게 하는 것의 두 개가 있다. <제너럴 모터스 테크니컬 센터 계획> <디어 컴퍼니> 등은 전자에 및 <댈라스 국제공항>은 후자에 속한다. 그는 재료가 가지고 있는 성질을 다양한 표현어휘로 교묘하고 유감없이 사용한 극소수의 건축가 중의 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캔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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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liex Candela (1910- ? )

마드리드에서 탄생하였다. 마드리드 시내의 대학에서서 건축을 배웠다. 트로하에 세운 <프론튼 레코레토스>를 건설하던 중에, 볼 기회를 얻음으로써 그는 셸 구조에 대하여 흥미를 가졌다. 1939년 멕시코에 귀화하고 뒤에 12년간 건설업자로서 생계를 이었으나 나중에 셸의 사용을 논문과 강연으로 제창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대학도시 건설에 그는 최초의 쌍곡포물면(雙曲抛物面)의 셸을 만들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이것은 그가 새로운 건물을 세울 적마다 길러나간 직감(直感)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이 셸은 강구조(剛構造)의 지붕보다도 훨씬 경제성이 있었다. 1954년 멕시코시티에 <기적의 성처녀 교회>를 세워서 두각을 드러내었다. 이 건물은 가우디의 영향을 받고는 있으나 구조적으로는 독자적인 것이었다. 1961년 런던 구조기술가협회의 금메달을, 또한 UIA의 오규스트 베레상(賞)을 받았다.

웃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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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rn Utzon (1918- ? )

코펜하겐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이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은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의 국제 콩쿠르에서 1등을 차지하여 세계를 깜짝 놀라게 만든 때부터이다. 그리고 이 작품은 그의 사고가 가장 응축(凝縮)되어 표현된 것이다. 이것은 바다를 표류하는 요트에서 연상된 작품이라고 알려진 작품으로서 셸 구조의 다이나믹하고 강력한 것이다. 이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의 발상원점은 시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무방하겠다. 그것도 그 창조과정에는 형이상학적인 사고가 넘치고 있다. 그 건축적인 창조의 프로세스 속에 논리적인 고조(高潮)를 충만시키는 형의 건축가는 아니다. 도리어 그 주축이 되는 것은 시적인 착상, 직감적이 사고였다. 그 밖의 주요 작품에는 <킹고 하우스> <취리히 극장 계획안> 등이 있으며 그 수는 의외로 적다.

만자로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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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gelo Mangiarotti (1921- ) 이탈리아의 현대건축계에서 근대기술과의 도전(挑戰)에 깊은 관심을 계속 가져온 건축가의 한 사람이다. 그이 창작범위는 넓어서 건축은 물론 타운 플래닝(town planning)이나 가구, 화기(花器), 산업디자인 등 다양하다. 예리한 눈을 가지고 건축의 공업화에 대한 문제를 이탈리아에서 지적한 것도 그였다. 그러나 그가 건축에서 공업화를 추진한 것은 건축의 질을 높이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서였다. 그래서 그 사실에 의하여 풍부한 공간구성을 표현하려고 생각하였다. 주요 작품으로서 <바란자테의 교회> <제네바의 전시장> <노보판의 사택(社宅)이나 공장>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