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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 서예의 전개
[편집]韓末書藝-展開
조선이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개칭한 후, 당시의 내외 사조(內外思潮)의 추이에 따라 서예의 성격이 형성된다. 즉 시기적으로 보아 청(淸)의 영향력이 컸을 뿐만 아니라 청나라와의 빈번한 교류로 중국에서 유행했던 고증학(考證學)이나 금석학(金石學)에서 유래된 서풍(書風)을 받아들여 이것을 주류로 삼았으며 한편 재래(在來)의 서(書)를 답습하는 경향도 보인다.
청 영향하의 한말 서예
[편집]淸影響下-韓末書藝
청나라에서 유행하던 서풍(書風)을 좇으려는 경향은 옹동화와 오대징(吳大徵) 등의 내한(來韓)을 계기로 표면화되었으며 여기에 전기(前期)의 김정희(金正喜)를 중심으로 한 옹방강(翁方綱), 성친왕(成親王), 철보(鐵保), 하소기(何紹基) 등의 서풍을 들 수 있으며, 한편 동기창(董其昌), 미불, 소식(蘇軾) 등의 송(宋). 명(明)의 서풍과 구양순(歐陽詢), 안진경(顔眞卿)을 배우는 경향도 보인다. 특히 안법(顔法)의 유행은 전대에 볼 수 없던 현상이며 이것은 모두 청의 영향으로 이루어진 한말 서예의 한 경향이다.
재래 서풍의 답습
[편집]在來書風-踏襲
한말 서예의 한 경향, 주로 지방을 중심으로 한 현상이다. 특히 사색당쟁(四色黨爭)의 여파는 서체에까지 영향을 미쳐 노론(老論)을 주축으로 하는 일부에서는 추사체(秋史體)와 청(淸)의 서풍에 관심을 두었고 소론(小論)측에서는 주로 신위(申緯)의 체를 숭상하여 신위가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로 송(宋)의 소식(蘇軾)과 통한다 하여 소체(蘇體)를 숭상하기까지 하였으며 이러한 현상은 후대에도 여세를 미쳤다.
사자관의 서풍
[편집]寫字官-書風
조선시대의 관제(官制)로는 사자관과 도화서(圖畵署)가 있으며 서화(書畵)의 수용(需用)이 여기 일임되어 특수한 서풍과 화풍이 형성되어 왔다. 도와서의 화원을 중심으로 한 화풍은 조선시대 회화의 뚜렷한 성격을 형성하여 주류로서 내려왔으나, 사자관의 서풍은 좀처럼 변화를 이룩하지 못하고 한호(韓濩)의 글씨를 전형으로 하는 판에 박은 듯한 서체로 명맥을 이어 왔다. 그 중에도 시류를 좇아 전(篆)·예(隸)·해(楷)·행(行)·초(草) 등 각 체에 청(淸)의 서풍을 모방한 경우도 있다. 이 서풍은 조선미술회의 근간(根幹)이 되어 현대 서예에도 적지않은 영향을 끼쳤다.
전각
[편집]篆刻
서예의 한 분야로 명(明)의 영향 아래 조선시대 중엽부터 유행하여 김정희(金正喜)에 이르러 그 중요성이 인정되었다. 한말에는 중국으로 건너간 민영익(閔泳翊)을 통하여 오창석(吳昌碩)의 전각이 소개되어 서예가들의 깊은 관심을 끌게 한 바도 있다. 근대의 대표적인 전각가로는 정대유(丁大有), 안중식(安重植), 오세창(吳世昌), 김대석(金台錫) 등을 들 수 있다.
조선미술회
[편집]朝鮮美術會
국권강탈 직후 발족, 1919년에 해체된 미술단체. 사자관(寫字官)과 도화서(圖畵署)의 화원을 규합, 조직되었으며 운영은 구황실(舊皇室)이 전담하고 조선총독(朝鮮總督)의 출연(出捐)에 의하여 조선의 청년 자제들로 하여금 미술을 연구케 함이 목적이었다. 김응원(金應元), 안중식(安中植), 정대유(丁大有), 강진희(姜璡熙) 등이 여기서 서화지도를 했으며 친일(親日) 단체의 성격이 짙다.
민영익
[편집]閔泳翊 (1860-1914)
서예가. 자는 우홍(遇鴻), 호는 운미(芸楣), 죽미(竹楣), 원정(園丁), 천심죽재(千尋竹齋), 여흥 출신. 벼슬은 판서(判書)에 이르렀으며 서예와 문인화에 모두 뛰어났다. 중신(重臣)으로 한말의 급박한 국운(國運)을 통감,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한묵(韓墨)에만 전렴한 서예가로서 안진경(顔眞卿)을 터득하고 난죽(蘭竹)에 능했으며 매주 당시 청(淸)의 서화 대가들을 초대하여 함께 서예를 연마했다. 특히 오창석(吳昌碩)과 교유(交遊)하며 그의 서체를 국내에 소개하여 일시 오체(吳體)가 시·서·전각에 이르기까지 국내 서예계를 풍미한 바 있다. 고서화(古書畵)를 애호하여 다수 수장(收藏)했고 55세 때 상해에서 사망했다.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예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근대 서예의 독보적인 존재이다.
작품에는 <석란도> <묵란도> 외 서예작품 다수가 있다.
정대유
[편집]丁大有 (1852-1927)
서예가. 호는 우향(又香), 금성(錦城). 서화가 몽인(夢人) 정학교(丁鶴喬)의 아들이며 전라남도 나주(羅州) 출신. 국권강탈 후 조선미술회에서 후진양성에 힘썼으며, 1918년 서화협회의 발기인으로 참가, 동 21년 제3대 서화협회장을 역임했다. 1922년 제2회 조선미술전람회 서도부 심사위원을 지냈다. 부친의 몽인체(夢人體)를 익혔으며 서·화를 겸비, 서는 예(隸)·행(行)·초(草)에 뛰어났으며 화는 채매(彩梅)를 잘 그렸다. 유작(遺作)으로 <채매도(彩梅圖:扇面)>가 있다.
김돈희
[편집]金敦熙 (1871-1936)
서예가. 호는 성당(惺堂), 관직은 검사(檢事), 중추원(中樞院) 촉탁에 이르렀다. 소년시절에 안진경(顔眞卿)의 서체를 공부하고 만년에는 황정견(黃庭堅)의 행서를 숭상했다. 1918년 서화협회의 발기인으로 참가하여 동 21년 서화협회장을 역임하였고 1922년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로부터 심사원으로 활약했다. 그의 서체는 선전(鮮展)의 서도부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하여 한국인·일본인 서예가를 가림없이 그의 서체, 특히 오체(五體)를 추종하는 사람이 많았다. 1956년 상서회(尙書會)를 창설하여 후진양성에 힘썼고, 이 상서회를 통하여 다량으로 생산해 낸 그의 서풍은 한 시대를 풍미했고 일본서(日本書)와도 통하여 일인들 사이에서도 호감을 불러일으켰다.
작품으로 <패녀추전>이 있다.
오세창
[편집]吳世昌 (1864-1953)
서예가. 자는 중명(中銘), 호는 위창(葦滄), 황해도 해주(海州) 출신, 역매(亦梅) 오경석(吳慶錫)의 자. 관직은 <한성순보(漢城旬報)> 기자를 거쳐 박문국(博文局) 주사, 군국기무소(軍國機務所) 서기관, 농상부(農商部) 참의(參議)로 체신국장(遞信局長)에 이르렀다. 1902년 개화당(開化黨) 사건으로 일본에 망명한 바 있고 1910년 천도교(天道敎)에 입교, <만세보(萬歲報)> 및 <대한민보(大韓民報)>의 사장을 역임했다. 1919년 3·1운동 33인의 한사람으로 활약했고, 동 21년 서화협회의 발기인으로 참가했다. 해방 후 1945년 초대 <서울신문사> 사장을 지냈으며 1·4후퇴 중 대구(大邱)에서 별세했다. 와당(瓦當), 종정(鍾鼎)을 잘 그리는 한편 서예는 전·예서(篆·隸書)에서 당시의 독보적인 존재로 알려지고 있다. 서·화의 감식(鑑識)과 전각(篆刻)에도 뛰어난 서예가이다.
유작(遺作)으로 <소양직청강곡(蘇養直淸江曲)> <와당(瓦當)> <종정도(鍾鼎圖)(扇面)>. 서편(書編)으로는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이 있다.
김규진
[편집]金圭鎭 (1868-1934)
서예가. 자는 용삼(容三), 호는 해강(海岡). 벼슬은 시종관(侍從官)을 지냈으며 소년시절에 소남(少南) 이희수(李喜秀)에게서 글씨를 배우고 18세 때 청(淸)나라에 유학하여 남북 각지의 명승고적을 두루 돌아보고 명인 묵객들과 사귀며 서화의 견식을 넓히고 10년만에 귀국했다. 고종황제의 어명(御名)으로 왕세자(王世子) 영친왕(英親王=李垠)의 스승으로 서화를 가르쳤으며 조석진(趙錫晋), 안중식(安中植)과 함께 활약하는 한편 서화연구회(書畵硏究會)를 창설하고 후진을 지도 육성했으며 경향 각지에서 전람회를 열기도 했다. 각체(各體)의 그림에 능하여 특히 묵죽(墨竹)은 그를 따를 사람이 없었고 서예는 대자(大字)를 잘 써서 전국의 정사누대와 사찰마다 필적을 남기지 않은 곳이 없을 만큼 다작한 것으로 유명하다. 유작(遺作)으로 <묵죽도(墨竹圖)> <유연도(柳燕圖)> <월야죽림계류도(月夜竹林溪流圖)> <왕죽도(王竹圖)>(이상 회화)가 있고, 저술로는 <죽란보(竹蘭譜)> <서법진결(書法眞訣)>이 있다.
안종원
[편집]安鍾元 (1874-1951)
서예가. 호는 석정(石汀). 서울 출신. 양정의숙(養正義塾)에서 법률을 전공한 후 1909년 양정의숙 교원, 동 학감(學監), 제2대 교장을 역임했다. 1921년 서화협회 회원, 동 30년 서화협회장이 되었고, 1922년부터 선전(鮮展)에 출품. 해방 후 1949년 제1회 국전의 심사위원이 되었다. 유작(遺作)으로 <양문미고(仰文彌高)>(1923)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