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미술/한국미술의 흐름/한국 근대미술/한국 근대 동양화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근대 동양화의 두 경향[편집]

近代東洋畵-二傾向

이 시기의 동양화의 경향은 대체로 아래와 같이 이분(二分)할 수 있다.

① 조선시대의 도화서적(圖畵署的)인 화풍, 즉 장인적(匠人的)인 기교에 치중하는 경향. 이 경우 대부분의 화가들이 창조정신이 고갈된 상태에서 전습(傳習)의 진부한 기교만을 답습하는 것이다. 중국의 개자원화보(芥子園畵譜) 같은 교본을 통한 기술·기교의 연마(鍊磨)에 전심하여 생생하고 직접적인 자연 대상에 의존한다거나 개성을 부각시키는 작업과는 거리가 먼, 일종의 붓의 유희에 머물고 있었다.

② 문인화(文人畵) 계통의 화풍. 기술·기교보다는 높은 정신적인 차원에서 회화를 다루려는 경향. 조선시대의 도화서(圖畵署)에는 중국의 영향을 받은 북화(北畵) 계열의 화풍과 남화(南畵) 문인화 계열의 것, 그리고 이 둘을 혼합한 별개의 화풍이 있었는데 조선 중엽 이후에는 청(淸)의 남화 일색이 된 그것과 유사한 현상으로 남화·문인화 계열의 화풍이 번성하였으며 이러한 현상은 근대 이후에까지 존속하게 되었다.

남종문인화의 형성과 전개[편집]

南宗文人畵-形成-展開

1910년 전후의 동양화는 조선시대의 고식적(姑息的)인 화풍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어서 이른바 서화일치(書畵一致)의 회화관을 지속, 연장하는 것이었다. 남종문인화는 근대 초기의 두 거목(巨木)이라 할 수 있는 안중식과 조석진을 통하여 두 개의 분수령(分水嶺)을 형성하였으며, 다시 이도영에 이르러 접합점을 얻었다. 묵(墨)과 선을 중심으로 수묵담채(水墨淡彩)를 구사하는 남종문인화의 전개는 조선시대의 명맥(命脈)을 그대로 유지하는 한 본보기로서 받아들여질 수도 있으나 또 다른 측면에서는 채색 본위의 일본화(日本畵)에 대한 배척감정·배일사상(排日思想)이 그 저변에 깔려 있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여건으로 남종문인화는 한국이라는 풍토 속에서 어느 정도 확고한 기반을 닦고 발전하여 동양 3국(한국·중국·일본)을 대표할 만한 차원에까지 이끌어 올려질 것이다.

서화미술원[편집]

書畵美術院

1911년 창립. 미술교육기관. 이왕직(李王職)의 뒷받침을 얻어 설립되었으며 수업 연한은 4년제이다. 주로 전통적인 동양화 후진 양성에 목적을 두었으며 1919년 이후에 활약한 오일영(吳一英), 김은호, 이상범, 노수현, 최우석(崔禹錫) 등을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이완용(李完用) 등이 주축이 되었다 하여 친일단체로 지목되기도 했으며, 발족 8년만인 1919년에 폐쇄되었다.

안중식[편집]

安中植 (1861-1919)

동양화가. 호는 심전(心田). 순흥(順興) 출신. 관직에 몸을 담아 양천(陽川)·통진군수(通津郡守)를 지냈고, 31세 때(1880년) 관비생(官費生)으로 중국 천진(天津)에 가서 유학한 일이 있다. 1911년 서화미술원 회원이 되었고, 1918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단체인 서화협회를 조직, 그 회장이 되었다. 조석진과 함께 당시의 동양화의 주류를 이은 마지막 도화서원 출신 화가의 한 사람이다. 북화를 주로 하고 산수(山水)·인물·화조(花鳥) 모두 통달했으며 특히 산수에 능하고 서는 해행초예(偕行草隸) 등 각체를 다 잘했다. 대표작으로 <산수도>가 있다.

조석진[편집]

趙錫晉 (1853-1920)

동양화가. 호는 소림(小琳). 함경남도 출신. 조선시대 화가 조정규(趙廷奎)의 손. 도화서(圖畵署) 출신 최후의 화원이다. 1869년 태조(太祖)의 어진(御眞)을 모사한 공으로 영천군수(永川郡守), 1869년 고종(高宗)의 어진도감(御眞圖鑑)으로 정삼품(正三品)의 벼슬에 올랐다. 1880년 관비 유학생으로 중국 천진(天津)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왔으며 1918년 서화협회의 결성에 참가, 발기인이 되고 제2대 회장이 되었다(1919년). 산수·인물·화조에 모두 통달했으며, 화풍은 단아하고 일취(逸趣)가 있다.

이도영[편집]

李道榮 (1885-1934)

동양화가. 호는 관재(貫齋). 황해도 연안(延安) 출신. 1904 안중식의 문하생으로 들어가서 회화를 익혔다. 1911 서화미술원 회원, 1918년 서화협회의 발기인이 되었다. 1920년, 일본 미술계를 6개월간 시찰하고 돌아왔다. 21년 서화협회전에 출품, 1923년 선전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근대초기에 활약한 안중식, 조석진의 예술을 완전히 체득하고 하나로 집약시킨 화가이며 장승업의 영향을 받아 산수·인물·화조(花鳥)·절기(折枝)·기명(器皿) 등에 특출한 기법을 보였고, 서예는 행예(行隸)에서 정제연미(整齊軟美)함을 보이고 있다.

고희동[편집]

高羲東 (1886-1965)

화가. 호는 춘곡(春谷). 서울 출신. 1899-1903년 관립 '한성법어학교(漢城法語學校)'에서 불어를 수학했다. 1904년 구한국 궁내부(宮內部) 주사, 예식관(禮式官)을 역임했고 이 무렵부터 동양화를 시작하여 안중식, 조석진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1908년 도일(渡日)하여 도쿄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 서양화과에 입학함으로써 한국 최초의 서양화 전공 화가가 되었다. 1915년 동교를 졸업하고 귀국, 사립인 중앙고보(中央高普), 휘문(徽文), 보성(普成), 중동학교(中東學校)의 교원으로서 재직했다. 1918년 서화협회의 조직에 참여, 1939년 일제에 의해 강제해산될 때까지 총무·회장직을 역임했다. 해방 후 1947년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를 조직, 4년간 회장으로 있었고 국전 제1회(1949년)에서 제7회까지 계속 심사위원장이 되었다. 1949년 미국친선사절단의 일원으로 미국을 역방한 바 있다. 1950년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 1953년 대한미협 회장, 1954년 예술원 종신회원 및 회장, 1956년 제2회 예술원상(미술 공로상) 수상, 1959년 민권수호국민총연맹 상임위원장, 1960년 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참의원(參議院) 의원으로 국회에 진출하기도 했다. 일시 서양화로 전신,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로 활동한 바도 있으나 다시 수묵 산수로 돌아왔으며 화풍은 남종화의 선염법(渲染法)을 쓰지 않고 서양화의 기법을 가미하여 북종화에서 쓰던 부벽준에 가까운 음영법을 쓴 것이 특징이다. 작품 <미전배석(迷顚拜石)> 등이 있다.

이상범[편집]

李象範 (1897-1972)

동양화가. 호는 청전(靑田). 충청남도 공주(公州) 출신. 1914년-18년 서화미술원을 졸업, 1916년-19년 안중식 문하생으로 묵화에 정진했다. 1919년-45년 서화협회 회원, 1927년-37년 동아일보 미술기자 등을 역임했다. 1922년-34년 선전에 출품, 제3회 단 한번 입선했을 뿐 연속 10회의 특선을 기록하고 있다. 1931년 제10회 선전에서는 청덕궁상(昌德宮賞)을 수상한 바 있다. 1933년-45년 '청전화숙(靑田畵塾)'을 설립하여 후진 양성에 힘썼고, 1935년 선전 추천, 49년 국전 추천작가, 1953년-60년 국전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1949년-61년 홍익대학 교수, 1954년 예술원 회원이 되었고, 1957년 예술원상(예술 공로상)을 수상, 1962년 문화훈장(대통령상)을 수장(受章)했다. 남종화 화풍은 계통이나 순수한 향토적인 면을 추구하여 한국의 새로운 남종화의 방향을 개척한 화가로서, 중국화의 안일한 모방이나 모사(模寫)만을 일삼던 대다수의 산수화가들에게 새로운 자극을 주었다.

노수현[편집]

盧壽鉉 (1899-1978)

동양화가. 호는 심선(心汕) 서울 출신. 1913-14년 보성중학(普成中學)을 1년 수료, 1914년-17년 서화미술원을 졸업했다. 1917년-21년 안중식의 문하로 들어가 산수를 터득했고, 1919년 서화협회 회원이 되었다. 1921년-23년 동아일보에 입사, 재직한 바 있으며, 1926년 제5회 선전에서, 1929년 조선박람회에서 각각 입상했다. 1940년-48년 심선화숙(心汕畵塾)을 설립, 1948년-61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강사를 거쳐 동교수가 되었다. 1949년-64년 제1회부터 9회까지 국전에서 계속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1955년 서울시 문화상 수상, 1959년 예술원상 수상, 1962년 문화포장을 수장했다. 안중식과 장승업의 영향이 보이는 화풍으로 특히 준법에서 더욱 그러하다. 간결하고 온아한 한국적인 일취(逸趣)가 넘치는 작품으로 <초경(樵徑)> 등이 있다.

허백련[편집]

許百鍊 (1893-1977)

호는 의재(毅齋). 전라남도 진도(珍島) 출신. 1911년-20년 사숙(私塾)에서 한학(漢學)을 수학, 도일 후 1923년-25년 일본 메이지 대학(明治大學)을 중퇴했다. 1922년 제1회 선전에서 2등상을 받았으며, 1925년-26년 소실취옹(小室翠翁)의 문(門)에서 여러 화가들과 교유하면서 작품에 심취했다. 1955년 전라남도 문화상 수상, 1955년-59년 국전 심사위원. 1959년 예술원 회원, 1962년 문화훈장을 수장했다. 만년은 광주(光州)의 무등산록(無等山鹿)의 산곡(山谷)에묻혀 자연을 벗삼아 다(茶)를 가꾸며 보냈다. 그의 화풍도 산수·사군자·서 모두 필획(筆劃)이 생동하는 힘과 초연한 기품을 보인다. 작품 <모추(暮秋)> 등이 있다.

김은호[편집]

金殷鎬 (1892-1979)

동양화가. 호는 이당(以堂). 경기도 인천(仁川) 출신. 1914년 안중식 문하생으로 들어갔으며, 1919년 서화협회 회원이 되었다. 1920년 도일하여 도쿄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 청강생으로 3년 동안 수학했다. 1922년-30년 선전에 출품, 입선 5회(1·2·3·4·8회) 특선 2회(6,7회)의 기록을 가졌다. 1933년 '제미전(帝美展)'에서 1등상을 수상하고 1937년의 제16회 선전에서는 창덕궁상을 받아 다음해에는 선전 참여 추천작가가 되었다. 1938년 중국으로 건너가 2년간 체류하였고, 해방 후 1949년 국전 추천작가, 1955년-57년 제4,5,6회 국전 심사위원이 되었다. 한국 화가로는 드문 북종화 계통의 화가로서 채화(彩畵)를 통하여 한국의 풍속화를 새로운 경지로 끌어갔으며 중국 명대(明代)의 구영(仇英)이나 일본의 우키요에(浮世繪)와도 비견할 사녀도(仕女圖) 형식의 한국적 화풍을 수립한 화가이다. 그외 채색화로서 산수·인물·화조 등 다양한 작품세계를 전개시켰고 재래 도화서풍의 초상화도 많이 남겼다. 작품은 <향로(香爐)> 등이 있다.

이한복[편집]

李漢福 (1897-1940)

동양화가. 호는 무호(無號). 충청북도 전의(全義) 출신이다. 1919 서화협회 회원이 되었으며, 같은 해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 일본화과에서 수학했다. 1922년 제3회 선전에서는 2등상을 수상했다. 1926년-29년 제4,5,6,8회 선전에도 출품, 특선 7회를 기록하고 있다. 1930년 이후 '진명여고(進明女高)' 교사로 재직했다. 작품 <춘난(春暖)> 등이 있다.

변관식[편집]

卞寬植 (1899-1976)

동양화가. 호는 소정(小亭). 황해도 출신이다. 1921년 서화협회 회원으로 협회전에 출품하였고 다음해 신구화도의 연구를 목적으로 동연사(同硯社)라는 동인 그룹을 조직했다. 1922년-29년 선제 제1,2,3,4,6,7,8회에 계속 출품하여 입선했고, 1939년 일본 도쿄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를 졸업했다. 1946년 조선미술협회 회원. 1949년-57년 국전 제1,2,5회의 심사위원을 역임. 1954년에 개인전을 가진 바 있다. 전통적인 남종화 계통의 화가이며 작품 <성북정협(城北靜峽)> 등이 있다.

이용우[편집]

李用雨 (1904-1952)

동양화가. 호는 묵로(墨鷺). 서울 출신. 1913년. 안중식, 조석진의 문하에서 동양화를 사숙했으며 1914년-18년 서화미술원을 졸업했다. 1919년 서화협회 회원. 1923년-36년 선전(鮮展)에 출품, 제2,3,4,5,6,7,14,15회 전에 입선하고 12,13회전에서는 특선이 되었다. 1923년 동연사(同硯社) 동인회의 조직에 참가했으며 해방후인 1946년 조선미술협회 회원, 1949년 문교부 예술위원 및 국전 심사위원(제1회)를 역임하였다. 동란중 전주(全州)에서 사망했다. 작품 <산만협수(山晩狹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