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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미술/한국미술의 흐름/한국 현대미술/주요 미술단체·미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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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미술 건설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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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美術建設本部

1945년 8월 18일 발족을 보았다. 해방과 더불어 최초로 만들어진 범(汎)미술단체이다. 조선문화건설 중앙협의회(朝鮮文化建設中央協議會) 산하단체(傘下團體)로서 전체 미술인을 망라하여 문화정책의 일익(一翼)으로서 미술 분야의 통일을 당면 목표로 삼았다. 창립행사로 해방기념 문화축전(文化祝典) 미술전을 1945년 10월 20일부터 10일간 덕수궁 미술관에서 개최하여 97명의 화가가 출품한 총 135점의 작품을 진열했다. 해방의 흥분으로 무계획하게 집합되었던 이 단체는 좌익들의 내분(內紛)으로 해방기념전을 고비로 해산되었다.

임원구성으로 중앙위원장 고희동(高羲東), 서기장 정현웅(鄭玄雄), 동양화부 위원장 노수현(盧壽鉉) 위원, 김용준(金瑢俊), 변관식(卞寬植), 허백련(許百鍊). 서양화부 위원장 김주경(金周經), 위원 길진섭(吉鎭燮), 오지호(吳之湖), 이병규(李昞圭), 이종우(李鍾禹), 조각부 위원 김두일(金斗一), 문석오(文錫五), 공예부 위원 이순석(李順石) 아동미술부 위원장 이병규(李炳圭), 선전미술부 부장 길진섭(吉鎭燮), 위원 이순석(李順石), 회원 강희원(姜喜遠) 등 총 186명이었다.

대한미술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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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美術協會

1945년 11월에 조선미술협회(朝鮮美術協會)로 창설되어 1950년에 대한미술협회로 개칭되었다. 좌익단체에 대항하여 조선미술건설본부를 모체(母體)로 재조직된 단체로서 숙명여자고등학교 강당에서 열린 준비대회를 쳐 선출된 추천위원 23명이 전국에서 98명의 회원을 추천하여 결성하였다. 초대회장은 고희동이 선출되었고, 15명이 평의원과 10명의 상무위원(常務委員)을 선출하였다.

그 당시의 청년작가들은 대한미술협회의 성격이 뚜렷하지 않다고 하여 가입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1950년 6·25사변이 일어나자 화단(畵壇)에 단일단체를 만들 필요를 느낀 미술가들은 가을 9·28 수복(收復) 후 전체 미술인들의 대동단결을 목표로 국립극장에서 미술인대회를 열고, 1·4후퇴 이후까지 이 단체를 중심으로 결집하였다.

전체 미술계의 중추가 된 대한미술협회는 내용확충과 강화가 요청되어 1954년 총회를 열어 위원장으로 고희동(高羲東)을 선출하였고, 장발, 윤효중, 이봉상, 박고석 등을 위원으로 선출하였다. 다음해인 1955년 또다시 재정립하였으나 1956년 장발을 주축으로 하는 일부 미술인들이 대한미술협회를 탈퇴하여 따로 한국미술가협회를 결성함으로써 사실상 이분(二分)되었으며, 이런 상태는 자유당 시대 말기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분열상태에서도 형식적으로는 대한미술협회가 미술계를 대표하고 있었고 국제적으로도 대표 단체로서 활약하고 있었다. 그후 1961년 4월 정부의 예술단체 통합정책에 따라 같은 해에 발족된 한국미술협회에 흡수되었다.

독립미술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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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立美術協會

1946년 1월 창립. 조선미술협회에서 제거(除去)된 회원 및 탈퇴한 미술인의 일부가 결성한 그룹. 동년 7월 동화화랑(東和畵廊)에서 제1회전을 개최한 후 해산되었다.

조선미술가동맹·조선 미술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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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美術家同盟·朝鮮美術同盟 1946년 2월 23일 창립. 조선미협에서 제거된 미술인 40여명과 좌익(左翼) 단체인 프로미술동맹의 일부 미술인이 모여 결성한 단체. 동년 11월 10일에 조선조형예술동맹을 흡수하여 조선미술동맹으로 개칭하고 제3회전까지 끌고 갔으나 조선문화협회의 발족과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樹立)으로 와해되었다.

조선조형미술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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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造形美術同盟

1946년 2월 28일 창립. 조선미술협회에서 제거된 일부의 미술인 및 무소속미술인 등 30여 명이 서울에서 전국 미술인대회를 열고 민족미술의 건설을 표방하고 결속되었다. 기관지(機關誌) <조형예술(造形藝術)> 창간호를 발간하고 5월 13일-18일 사이에 동화화랑(東和畵廊)에서 전시회를 가졌으나 동년 말에 조선미술동맹에 합류(合流), 해체되었다.

조선조각가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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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彫刻家協會

1946년 3월 창립. 해방후 최초의 유일한 조각단체이다. 일제(日帝)시대에 활약했던 조선미술협회 소속의 조각가와 무소속 조각가들이 집결하였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정치적인 이념의 분열로 해체되고 일부 회원들은 국전 조각부에 흡수되었다.

회원으로 김경승(金景承), 윤승욱(尹承旭), 윤효중(尹孝重), 이국전(李國銓), 백문기(白文基), 조규봉(曺圭奉), 김정수(金丁秀), 김종영(金鍾暎), 이종의(李鍾義), 이성(李成), 한재홍(韓在弘)외 3명, 총 13인.

조선공예가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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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工藝家協會

1946년 3월 10일 창립. 공예. 해방후의 혼란기에 결속을 본 공예가들의 단체로서 미군정(美軍政)의 후원(後援)아래 결성되었다.

임원구성으로 회장 김재석(金在奭), 부회장 강창원(姜菖園), 박철주(朴鐵柱), 김봉룡(金奉龍), 유진욱(兪鎭旭), 김삼득(金三得), 김병덕(金秉德), <금공부> 이중칠(李重七), 김상기(金象基), 이승만(李勝萬), <도자부> 김재석(金在奭), 황인춘, <가수부> 윤봉숙(尹鳳淑), 장의선(張義善), 유복신(劉福信), <염색부> 김재석(金在奭), 백태원(白泰元), <목공부> 임중식(林重植), 서재유(徐載裕). <화각부> 음진갑(陰辰甲), 회원 이순석(李順石)외 50명이었다.

대한산업미술가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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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産業美術家協會

1945년 12월 27일 조선산업미술가협회(朝鮮産業美術家協會)로 발족. 1946년 10월에 제1회전을 '조국광복과 산업부흥전'이란 테마로 열었고, 1947년에는 제2회전 산업포스터 및 팜플렛전을 열었으며, 1948년 제3회전 올림픽에 관한 디자인전, 1949년 제4회전 관광을 위한 경주·충북 단양 스케치전을 여는 등 활약이 컸다. 1965년에는 제15회 회원전과 동시에 제1회 공모전(公募展)을 열기 시작하여 지금에 이르는 최장수(最長壽)의 단체다. 그래픽 디자인, 상업사진, 도자기, 염색, 목공예 등 공예의 여러 분야를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다.

1970년대에는 한홍택(韓弘澤)을 주축으로 홍익대학 출신들이 주로 활동하였다. 이 당시의 회원으로 조능식(趙能植), 정대길(鄭大吉), 이근배(李根培), 박근지(朴根池), 박선의(朴善義), 조병덕(趙炳悳), 정담순(鄭潭淳), 김윤환(金潤煥), 권명광(權明光) 등 30여 명이었다. 1979년에 한국 디자인포장센터 전시관에서 회원전을 가졌고, 1983년 전시회와 공모전을 갖는 등 산업미술, 디자인 계통에서도 큰 활약을 하고 있다.

초기 회원으로 권영휴, 한홍택(韓弘澤), 홍순문(洪淳文), 이완석(李完錫), 유윤상(劉允相), 조능식(趙能植), 조병덕(趙炳悳), 최정한(崔廷翰), 이봉선(李奉先), 홍남극(洪南極) 등이 중심이 되어 단체를 발족하였다.

미술문화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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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術文化協會

1947년 8월 8일에 창립되었다. '진정한 민족미술 건설을 촉진하기 위하여'라는 목표 아래 20여 명의 미술인들이 집결한 단체로 제1회전을 고비로 해산되었다.

창립회원은 이쾌대, 이규상, 김인승, 홍일표, 김재선, 손응성, 임완규, 신홍휴, 박영선, 조병덕, 이봉상, 이해성, 남관, 임군홍, 이인성, 박성규, 한홍택이다.

신사실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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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寫實派

1947년에 창립되었다. 해방 후 최초로 등장한 추상주의적인 서양화가의 모임으로 창립과 동시에 제1회전을 화신화랑에서 열었고 1949년 11월 28일부터 12월 3일 사이에 동화화랑에서 제2회전, 1952년 5월 26일부터 6월 4일 사이에 부산 광복동 국립박물관 부산임시사무소 화랑에서 제3회전을 열었다. 한국추상회화의 선두 그룹으로 한국화단에 끼친 영향은 크다.

동인에는 김환기, 유영국, 이중섭, 장욱진, 백영수, 이규상 등이었다.

녹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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綠美會

이화대학교 미술대학 출신 여류화가들의 동창(同窓) 그룹으로 1949년 5월에 창립되어 지금까지 존재하는 단체이다. 1949년 10월 창립전이 충무로(忠武路) 대원화랑(大元畵廊)에서 열렸으며, 그 후 매년 1회씩 개최하여 1972년 제20회전을 가졌고, 1984년 제30회전을 가졌다. 이대(梨大) 출신이면 누구나 자동적으로 이 그룹에 가입될 자격이 부여되며 서양화, 동양화, 자수부, 조각부, 생활미술부 등으로 나누어 매년 정기적인 전시회를 갖고 있다. 그러나 전시회에는 일부만이 참가한다.

50년미술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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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年美術協會

1949년 가을에 창립되었다. 당시의 화단의 진공상태를 메우고 건실한 재야 미술운동을 전개하려는 의도에서 국전의 아카데미즘에 반발하여 집합된 서양화가들의 모임이었다.

1950년 제1회 전을 계획하던 중 6·25사변으로 중단되어 해체되었다. 그 당시 주요회원으로는 김환기, 김병기, 남관, 유영국, 박고석, 이봉상 등이었다.

기조동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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基潮同人會

1952년 12월 22일 피난지 부산에서 창립되었다. 북한에서 월남해온 몇 명의 서양작가들이 중심이 되어 새로운 창작활동을 모색하려고 모인 그룹이며 서울 수복과 동시에 해체되었다. 1952년 12월 22일부터 28일까지 부산 르네상스다방에서 기조전을 열었다. 동인은 손응성, 한묵, 박고석, 이중섭, 이봉상 등이었다.

한국미술가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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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美術家協會

1955년 5월 21일 창립되었다. 대한미술협회에서 탈퇴한 회화, 조각, 공예, 서예, 사진, 건축 등 각 분야의 미술인들이 대한미술협회에 대항하여 결성한 단체이다. 이로써 당시의 화단은 사실상 두 개의 대립되는 단체로서 갈라졌는데, 한국미술가협회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출신의 화가·교수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고 하여 서울대파(派), 대한미술협회는 홍대파(派)로 지칭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날카로운 대립의식 속에서 제1회전을 1956년 9월 21일부터 30일 사이에 휘문고등학교 강당에서 열었다.

1961년 4월에 제2회전을 마지막으로 정부의 예술단체 통합정책에 따라서 같은 해에 발족된 한국미술협회에 흡수되어 해체되었다. 회원들은 장우성, 노수현, 김세중, 서세옥, 이순석, 김정수 등 약 120여 명이 되었다.

공예작가동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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工藝作家同人會

1955년 7월 17일에 창립되었다. 창립동인은 박성삼, 박여옥, 조정호, 김재석, 박철주, 백태원이다.

백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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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友會

1955년 7월 17일에 창립되었다. 일본 데이코쿠 미술학교(帝國美術學校) 출신 화가들의 동창전인 제1회전을 1955년 11월 24일부터 30일 사이에 덕수궁 미술관에서 열었다. 다음해에 제2회전, 1963년에 제7회 전을 열고 그 이후에 해체되었다.

초기회원은 이유태, 김화경, 김창억, 김종하, 이충근, 조창환, 이수억, 변희천, 김두환, 주경, 김원, 최덕휴, 장욱진, 김형구, 정규, 이세득, 권옥연, 송혜수였다.

한국수채화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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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水彩畵協會

1956년 11월 17일 창립되었다. 수채화에 관심을 둔 화가들의 모임으로 동호회의 성격을 지닌 그룹이다. 창립회원은 고화흠, 최덕휴, 이경희, 임직순, 이규호, 이종무, 장이석, 유경채, 이준이다.

모던아트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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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DERN ART 協會

1957년 4월에 새로운 미술을 지향한다는 이념을 갖고 중견 화가들이 모여서 창립한 단체로 1957년 4월 9일부터 4월 15일까지 동화화랑(東和畵廊)에서 제1회전을 개최하면서 출범하였다. 한국 최초로 현대회화 그룹의 성격을 지닌 단체로서 화단의 주목을 받았으며, '국전의 일방적인 방법론에 상대적인' 동인전을 표방하고 출발하여 화단에 모더니즘의 새로운 양식을 이식(移植)하려고 하였다. 즉 아카데미즘에 반발한 새로운 의식의 집결체였다.

1962년 11월 제7회전을 마지막으로 해체되었다. 창립회원으로는 유영국(劉永國), 한묵(韓默), 이규상(李揆祥), 황염수(黃廉秀), 박고석(朴古石)이었고, 후에 김경(金耕), 정규(鄭圭), 문신(文信), 천경자(千鏡子), 정점식(鄭點植) 등이 가담하였다.

현대미술가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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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代美術家協會

1957년 5월 1일 창립. 서양화가들의 모임이다. 대한미술협회와 한국미술가협회의 무의미한 대립·갈등이 국전(國展)을 거점으로 표면화된 데에 회의를 느낀 20대의 의욕있는 젊은 작가들이 앵포르멜의 첨단적인 해외 전위 경향을 이념으로 내세우고 1957년 5월 1일부터 5일까지 USIS 화랑에서 제1회전을 가졌다. 이를 계기로 추상예술이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의 회원전 중 1958년 11월 28일 덕수궁 미술관에서 열린 제4회전은 폭발적인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으며, 한국에서의 전위미술의 돌파구를 터 놓았다. 이때 활동한 작가로는 박서보(朴栖甫), 하인두(河麟斗), 김창열(金昌烈), 전상수(田相秀), 김서봉(金瑞鳳), 이양노(李亮魯), 이명의(李明儀), 안재후(安載厚), 장성순(張成筍), 김청관, 나병재(羅丙宰) 등이었다. 제4회전에서의 파격적인 양상을 당시의 신문은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

"서구(西歐)의 경우에는 전위예술에는 전설적 화제가 그림자처럼 따르지만 한국의 그들도 새로운 예술의 창조라는 것이 조직과 전략(戰略)을 동반한 전투행위(戰鬪行爲)라고 생각이나 하는 듯이 12명 동인의 발표장치고는 너무 벅차리라고 짐작되었던 육중한 덕수궁 미술관의 벽을 오히려 좁다는 듯이 이용하였다……"

현대미술가협회는 1961년 제6회전까지 전위예술가다운 의욕과 시위로 다양한 작품활동 및 운동을 추진하였으나 그해 10월 60년 미술협회와 연합전을 갖고 해산되었다.

창립회원으로는 김영환(金永煥), 이철(李哲), 김종휘(金鍾輝), 장성순(張成筍), 김청관, 문우식(文友植), 김창렬(金昌烈), 하인두(河麟斗)였다.

창작미술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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創作美術協會

1957년 5월 1일 서양화가들이 모여 창립하였다. 스타일을 따지지 않고 개개인의 작가가 지닌 바탕에 따라 현대정신을 추구한다는 목표 아래 결성된 그룹으로 창립회원 거의가 당시의 화단에서 비교적 안정된 위치에 있었으며, 또 국전(國展) 출품작가들이기 때문에 재야(在野) 집단으로 보기는 힘드나 한 단체(국전) 안에서 소집단을 구성하여 내부형식을 꾀한 점이 주목된다. 제1회전은 5월 28일부터 6월 4일까지 동화화랑에서 열렸다. 비교적 장수(長壽)하고 있으며 횟수를 거듭하는 동안에 그룹자체의 성격과 구성인원의 많은 변동이 있어 구상, 추상이 섞인 회원 중 1970년대에는 창립회원으로 남아있는 회원은 유경채, 고화흠 두 명뿐이었다. 1970에 제15회전을 가졌다. 창립회원은 장이석(張利錫), 최영림(崔榮林), 박창돈(朴昌敦), 유경채(柳景埰), 박항섭(朴恒燮), 이준(李俊), 고화흠(高和欽), 이봉상(李鳳商), 황유엽(黃瑜燁)이다.

신조형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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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造形派

서양화가들이 1957년 6월에 창립한 단체로 새로운 전위운동을 표방하고 나섰다. 1957년 6월 27일부터 7월 4일까지 동화화랑에서 열린 제1회전은 기하학적인 추상계통의 작품이 대부분이었으며 당시로서는 몹시 난해한 추상으로 받아들여졌으나 큰 반향(反響)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창립회원은 변희천(邊熙天), 조병현(趙炳賢), 손계풍(孫啓豊), 변영원(邊永園), 김관현(金寬鉉), 이상순(李商淳), 황규백黃圭白)이다.

백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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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陽會

1957년 12월 중견 동양화가들이 화가 상호간의 친목과 작품연구라는 취지 아래 창립한 모임이다. 인간적인 교류에서 조직되어 한 가지 이념이라기보다는 서로의 독특한 개성을 찾아 각자가 활동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자유로운 상태에서 작업한다는 목표를 두고 출발한 집단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동양화의 아카데미즘으로 결속된 인상이 짙다. 이 단체는 서울전, 지방전 외에 동남아 각지에서 작품전을 여는 등 가장 발표전을 많이 가진 동양화 모임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가장 큰 활동은 해외 순회전(海外巡廻展)으로 1960년 홍콩과 대만에서 가진 제1회 해외전, 1961년 일본의 도쿄(東京)와 오사카(大坂)에서 가진 제2회 해외전 등 국내에서 해외 순회전을 가진 첫 단체로 손꼽힌다. 또한 1958년 목포를 비롯하여 전라남도 일대에서 순회전을 가졌으며, 1964년 12월 제1회 공모전을 가진 것을 시작으로 하여 여러 차례의 공모전을 통하여 신인 발굴과 국전과의 교량 역할을 하였고 백양회사 문공부장관상 등 시상제를 두었다.

그 후 1977년 제11회전을 끝으로 공모전이 중단되었고, 회원전도 1978년 제27회전이 마지막이었다. 창립회원은 김기창(金基昶), 김영기(金永基), 김정현(金正炫), 박내현(朴崍顯), 이유태(李惟台), 이금추(李錦秋), 장덕(張德), 조중현(趙重顯), 천경자(千鏡子)이다.

대한미술교육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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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美術敎育會

1957년 10월 창립된 미술교육에 관계있는 화가들의 친목단체로 창립되던 해 회원전을 열었다.

창립회원은 최덕휴(崔德休), 이항성(李恒星), 이상욱(李相昱), 전상범(田相範), 윤재간 등 57명이다.

한국판화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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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版畵協會

1958년 3월에 창립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판화단체로 기록되며 창립 당시의 회원중에는 유화(油畵) 작가나 조각가, 공예가가 다수 포함되어 있다. 횟수를 거듭하는 동안 회원이 많이 변동되어 1970년대에는 창립회원 중 회원으로 존속하고 있는 작가는 이항성(李恒星) 뿐이며 그가 실질적인 단체의 리더이기도 하였다. 정기적인 발표전과 1964년 이후 학생과 일반의 공모전(公募展)을 병행하여 열고 1971년 일본 도쿄(東京)에서 열린 한국현대판화전을 주최했고 국전에 판화부의 신설(新設)을 요구하는 등 판화 보급에 힘썼다.

창립회원은 박성삼(朴星三), 이규호(李圭皓), 박수근(朴壽根), 최영림(崔榮林), 장이석(張利錫), 이항욱(李恒昱), 변종하(卞鍾夏), 정규(鄭圭), 임직순(任直淳), 차익, 김정자(金靜子), 유강열(劉康烈), 최덕휴(崔德休), 전상범(田相範), 이항성(李恒星)이다.

신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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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紀會

1958년 5월 창립. 서울 시내 중·고등학교를 중심으로 미술교사들이 모여 이루어진 모임이다. 사실 경향의 작품이 지배적이며 추상작품도 일부 포함된 발표전을 매년 정기적으로 열어 1970년에 제15회전을 열었다.

일선(一線) 미술교사들의 모임이라는 점이 특이하며, 초등학교 교사들의 모임인 백일회를 제외한 유일한 교직자(敎職者) 단체이다. 1965년부터 학생미술 실기대회 및 학생작품전을 주최하였다.

창립회원은 윤성호(尹聖浩), 김진명(金鎭明), 임규삼(林圭三), 윤재간, 이상우(李商雨), 이달주(李達周)이다.

목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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木友會

1958년 3월에 서양화가들이 모여 창립하였다. 한국적인 아카데미즘을 계승하고 사실주의의 집결체로서 뿌리를 내린다는 취지 아래 출발하여 사실상 한국의 아카데미즘을 이끄는 가장 규모가 큰 사실화가들의 단체로 성장했다. 국전 서양화부 심사위원의 3분의 2선을 차지하여 논란이 될 만큼 큰 영향력을 행사한 단체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서양화만으로 구성되었다가 도중에 조각부를 신설, 회원전, 소품전, 자화상전(自畵像展)을 주기적으로 가졌으며 1963년부터 신진(新進) 양성을 위한 대규모 공모전(公募展)을 병행하는 동시에 목우회상(木友會賞) 등 시상제도(施賞制度)를 두었다.

1969년까지 이른바 9인회를 주축으로 한 운영방식을 취하다가 9인회의 이마동(李馬銅), 김원(金源)을 제외한 전 멤버 등 10명의 회원이 탈퇴하여 따로 한국사실작가회를 형성함으로써 분열되었다.

창립동인 중 초대회장은 이종우였고 회원은 이병규(李昞圭), 도상봉(都相鳳), 이동훈(李東勳), 박희만(朴喜滿), 최덕휴(崔德休), 박광진(朴光眞), 김인승(金人承), 박득순(朴得錞), 박상옥(朴商玉), 손응성(孫應星), 지형구(池亨求), 이종무(李鍾武), 나희균(羅喜均), 임직순(任直淳), 김종하(金鍾夏), 김형구(金亨球) 등이다.

동방연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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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方硏書會

한국의 서예연구단체로 1958년 6월에 창립되었다. 창립된 목적은 서예의 발전을 위하여 서예 전반에 걸쳐 연구와 이에 따르는 제반사업을 전개함으로써 민족문화 향상과 창달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 연례적으로 발표회를 가지고 부설기관으로 서예연구소를 설치하여 후진양성을 하고 있다. 1971년부터 서예의 정급자시제(正級者試制)를 실시하여 서도의 체계화와 길잡이의 역할에 힘쓰는 한편 지방의 서예가 지망자들을 위한 통신강좌를 실시하고 있다. 부설기관으로는 서예연구소, 문인화연구소, 한문학연구소, 동방서예강좌 등이 있다.

1983년 제21회 동방연서회전이 열렸다. 초기회원은 김용진(金容鎭), 송치헌(宋致憲), 원충희(元忠喜), 김문현(金文顯), 김충현(金忠顯), 김응현(金膺顯), 홍진표(洪震杓), 송성용(宋成鏞), 배종승(裵宗承), 노수현(盧壽鉉), 정명순(鄭明旬), 김서봉(金瑞鳳), 이규숙(李圭淑) 등이다.

한국건축가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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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建築家協會

1959년 12월 5일 창립한 단체로 한국의 건축 예술가들의 대표적인 활동단체이다. 설립목적은 국제적으로 일대 전환기에 선 현대건축의 조류(潮流)에 순응하고, 건축 문화예술의 건전한 발전을 도모하는 동시에 건축가의 자질향상과 권익을 옹호, 건설문화의 발전에 기여한다는 것으로 한국 현역 건축가들의 모임이다. 이 단체는 5·16 혁명을 계기로 예총(藝總)의 산하단체로 입회하였다.

창립 이후 한국고건축위원회(韓國古建築委員會) 발족, 현대건축작가전, 한국 건축용어집 발행, 지방 지부 순회전시, 강연회, 건축 세미나, 회지 발간 등 건축의 질적인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다. 1982년 국전이 폐지되면서 매년 대한민국건축대전을 주관하고 있으며 1989년 제8회를 맞이하였다.

창립회원은 이천승, 김태식, 이희태, 강명구, 김세연, 김중업, 김희태, 김정수, 이명휘, 정인국, 배기형, 나상진이다.

묵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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墨林會

동양화가들이 1960년 3월에 창립하였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출신의 동양화가들이 중심을 이루는 동창그룹으로 설립목적은 동양화의 순수한 전통정신을 견지하며 새로운 현대의 형식을 추구한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으나 친목단체로서의 성격이 짙었다. 연례적인 발표전을 가졌고 1968년경에 해체되어 회원의 일부는 새로 결성된 한국회화의 중심 멤버로 흡수되었다.

창립동인은 박세원, 서세옥, 안혜택, 권영우, 장운상, 박순일(朴順一), 이순복, 박노수, 안상철, 안혜영, 최용걸, 정병숙, 김백숙, 전영화, 민병갑, 박순일(朴純一), 손명예, 장선근, 남궁훈, 이학숙, 김덕희, 이윤영, 신성식, 양정자, 이순영, 정영조, 유효식, 최애철, 이덕인, 이정애, 정탁영, 정영희, 이영환이다.

60년미술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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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年美術協會

1960년 7월에 창립되었다. 서양화가 20대의 젊은 화학도로 구성된 이 그룹은 액션 페인팅 앵포르멜의 첨단적인 전위미학을 앞세우고 등장했으며, 1960년 10월 5일부터 14일까지 열린 제1회전은 실내가 아닌 실외, 즉 덕수궁의 가두벽(街頭壁)에 작품을 전시함으로써 큰 반향(反響)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악뒤엘(ACTUAL)회의 창립과 동시에 일부회원이 거기에 흡수됨으로써 자연 해체되었다.

창립회원은 김대우, 유형렬, 김봉태, 최관도, 이주영, 김응찬, 박재곤, 김기둥, 손찬성, 윤명로, 김종학, 손대현이다.

한국응용미술가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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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應用美術家協會

1961년 5월에 창립된 공예부문의 단체이다.

창립회원은 강희수, 곽원모, 권길중, 권순형, 김기태, 김선영, 김홍련, 민철홍, 박대순, 백태원, 백태호, 봉상균, 유윤진, 이동찬, 이명구, 이신자, 임홍순, 임이섭, 한도용, 한동섭이다.

난정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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蘭亭會

1961년 9월에 창립된 서예부문의 모임이다. 창립회원은 장인식, 김용제, 최중길, 정환섭, 박병규, 유희강, 이병직, 손재형, 송치헌, 배길기, 최현주, 박세림, 현중화, 오제봉, 유인식, 정재홍이다.

2·9동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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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九同人會

1961년 9월 창립한 서양화 부분의 모임이다. 제2고보(第二高普:경북고등학교의 전신) 출신 6명의 화가들이 모여 1964년까지 발표전을 가졌다. 창립동인은 유영국, 장욱진, 김창억, 권옥연, 이대원, 임완규이다.

앙가쥬망 동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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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GAGEMENT 同人會

1961년 9월에 창립된 서양화 부분의 모임이다. '뜻맞는 사람끼리 구상·추상에 관계없이 모여서 작품을 만들고 발표전을 갖는다'라는 취지를 갖고 출발하여 다양한 화풍을 가진 작가들로서 구성되어 발표전을 가져왔다. 친목단체로서의 성격이 짙으며 1971년 제9회전을 가졌다. 창립동인은 김태, 박근자, 안재후, 최경한, 필주광, 황용엽이다.

한국미술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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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美術協會

1961년 12월에 창립되었다. 창립되기 전에 화단이 대한미술협회와 한국미술가협회로 분열된 상태에서 1961년 6월초에 두 단체의 대표자들이 모여 통합문제를 논의하였으며, 문교부의 단일화 방침에 따라 같은 해 12월에 한국미술협회가 결정되었다.한국예술문화단체 총연합회의 산하단체로서 전체 미술인을 대표하는 기관으로 설립목적은 민족미술의 향상발전을 도모하고, 미술가의 권익옹호와 국제적인 기여와 미술가 상호간의 협조에 두었다.

국전(國展)의 운영이나 제도 영향력을 행사하는 외에 국제위원회를 따로 두어 각종 국제전의 출품작가 인선(人選)을 관장하기도 하였다.

1964년부터 전국학생미술전을 개최하여 주도하고 있으며, 미술의 대중화운동의 일환으로 아마추어 화가회를 만들기도 하였다. 또한 주기적으로 회원전을 열어 1970년 제7회전, 1971년 한국미술협회 창립 10주년(제8회전)을 연 바 있으나 광범위한 작가들의 호응을 얻지 못하여 이 단체는 화단의 주도권밖에 있다는 인상이 짙었다. 1986년 대한민국 미술대전이 민간주도로 운영방식이 바뀌면서 한국미술협회로 이관되어 1988년 공모전을 열었으며 제3회 대한민국 공예대전을 주최하였다.

창립회원은 박득순, 김환기, 김세중, 김기승, 손재형, 변관식, 김은호, 배렴, 장우성, 김인승, 유강렬, 이순석, 김종영, 이세득, 최중길이다.

악뒤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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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UEL會

1962년 3월 23일 창립된 서양화 부분의 단체이다. 30대의 전위작가들이 중심이 되어서 ① 전위운동의 집결체를 표방하고 ② 현대미술에서의 한국적인 미학관 내지는 가치관을 설정하며 ③ 작품활동과 동시에 사회참여를 한다는 취지로서 출발하였다. 이 그룹은 창립과 동시에 다음과 같은 선언을 내걸었다.

"해진 존엄(尊嚴)들 여기 도열(堵列)한다. 그리하여 이 점은 공간속에 부둥켜 안고 홍소한다. 모두들 그렇게 현명한데 우리는 왜 이렇게 전신이 간지러운가. 살점을 깎아도 명암을 치달아도 돌아오는 마당엔 언제나 빈손이다. 소득이 있다면 그것은 광기다. 결코 새롭지도 않은 이 상태를 수확으로 자위하는 까닭은 그것이 이른바 새로운 가치를 사정(射精)할 수 있는 기본적인 생리이기 때문이다."

1960년대 초반의 젊은 전위화가를 거의 망라했던 이 그룹은 1964년 4월 2회전을 고비로 현대미술가 회의가 새로 발족됨에 따라 거기에 흡수되어 단명으로 끝났다.

창립회원은 김봉태, 김대우, 김창렬, 김종학, 하인두, 전상수, 이양노, 박서보, 정상화, 손찬성, 윤명노, 장성순, 조용익, 나병재이다.

신상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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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象會

1962년 3월 17일 창립된 회화, 조각, 디자인 부분의 모임이다.(反) 아카데미즘을 내걸고 등장했으나 약간 보수적인 성격을 띤 단체이다. 공통된 경향을 가리지 않고 작가들 각자가 인간적인 교류를 가지고 모여 연마한다는 것이 이 단체의 목적이다. 화가와 조각가, 디자이너의 혼성 단체이며 창립전과 동시에 공모전을 가졌다.

1968년 제7회전을 고비로 활동이 침체되어 회원들의 대다수가 다른 단체에 이적(移籍)됨으로써 활동이 침체되었다. 창립회원은 김창억, 박석호, 박창돈, 박항섭, 유영필, 유영국, 이대원, 이달주, 이봉상, 이수재, 이준, 이정규, 임완교, 장욱진, 조병원, 정건모, 최덕휴, 한봉덕, 황규백, 황유엽, 손동진, 김영중, 김영학이다.

판화5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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版畵五人會

1963년 3월에 판화가 5명이 모여 창립하였다. 새로운 회화분야로 판화가 관심을 끌게 되면서 판화가로 등장한 5인 그룹으로 서울과 인천 등지에서 발표전을 열었다.

신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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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樹會

홍익대학교 출신인 동양화가들의 모임으로 1963년 5월에 창립되었다. 작풍(作風)에 일관성 없으나 단순한 친목단체의 성격을 떠나 새로운 이념의 전개를 목표로 출발한 그룹으로 주목되었다. 1971년 11회의 발표전과 제2회의 소품전을 가졌고, 1979년에는 미술회관에서 개최되었다. 창립회원은 조평휘, 김동수, 하태진, 오태학, 이용휘, 최재종이다.

청토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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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土會

1963년 5월에 창립된 동양화가들의 모임이다. '각자의 개성을 살려 작품활동을 자주 하기 위하여'라는 평범한 취지로 출발한 모임으로 30대에서 50대에 이르는 동양화의 현역작가가 다수 참여하였으며 작품 경향에 관계없이 모인 그룹이다. 창립회원은 권순일, 이선옥, 김옥진, 김석중, 김용원, 김재호, 나부영, 민중기, 박노수, 박경준, 박세원, 방조철, 소영주, 신화순, 안봉규, 안상철, 오석환, 이건걸, 이상재, 이완수, 이열모, 이영찬, 이재호, 이현옥, 이희세, 장철야, 전영화, 정은영, 조복순, 천경자, 성재휴, 황만영, 황서성, 송형근, 송수남, 이병식, 장선백이다.

낙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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駱友會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출신인 조각가들이 모여서 1963년 12월 창립한 모임이다. 20대 젊은 조각가들의 모임으로 비교적 진취적인 조각 경향을 보이는 이 모임은 1963년 7월 창립전을 가졌고 정기적인 전시회를 가졌다. 1968년 덕수궁 정원에서의 야외전을 통하여 환경공간에 대한 관심을 표시하기도 했고, 1982년 8월 20회전을 가졌다. 창립동인은 강정식, 김봉팔, 송계상, 신석필, 황교영, 황택구이다.

오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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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IGIN

1963년 9월에 창립된 서양화 부분의 모임이다. 홍익대학 출신 청년작가들의 전위적인 모임이며, 1960년대 이후의 해외 미술사조에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인 모임의 하나로 화단의 주목을 끌어왔다. 신선한 감각으로 이 시기에 주류를 이룬 옵 아트의 미학을 추구해 왔다. 1971년 제5회 발표전을 가졌다. 창립동인은 서승원, 권영우, 이승조, 이상락, 김수익, 최명영, 김택화, 신기옥이다.

원형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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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形會

1963년 12월에 창립한 조각가들의 모임이다.

"일체의 타협적인 형식을 부정하고 전위적 행동의 조형의식을 가지고, 공간과 재질의 새 질서를 추구하여 새로운 조형윤리(造形倫理)를 형성한다"는 선언을 가지고 출발하여 이 시기에 대표적인 전위 조각가들이 총망라되었다. 제2회전을 끝으로 활동이 침체되었고, 일부 회원은 다른 그룹으로 이적되었다. 창립동인은 최기원, 김영학, 김찬식, 전상범, 김영중, 이운식이다.

한국창작사진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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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創作寫眞協會

1964년 8월 30일 창립하였다. "우리는 하루 빨리 사진 예술의 건전한 발전을 위하여 의무와 권리를 수행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할 것이며 세계 사단(寫壇)에 이바지할 수 있는 순수한 작품제작에 온 힘을 기울인다"라는 선언을 내걸고 출발하였다. 1970년 제2회의 발표전을 가졌다. 초대 대표위원장은 임응식이다.

한국서예가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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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書藝家協會

1965년 6월에 창립되었다. 서예가들의 권익옹호와 서예의 발전을 위해 발족된 범(汎)서예가들의 단체로 매년 정기적으로 발표회를 열고 있다. 1971년 제6회의 한국서예가협회전을 가졌고, 1982년 제17회 한국서예가협회전을 아랍문화회관에서 열었다.

창립회원은 배길기, 유희강, 민태식, 원충희, 배종승, 김충현, 조영준, 이기병, 김응현, 장인식, 박병규, 오제봉, 현중화, 박번, 강창원, 유인식, 김효수, 김광업, 안규동, 이상복, 정재오, 배재식, 이석수, 허홍, 김재화, 금기풍, 신봉식, 신경희, 허후, 윤덕생, 양진이, 박태준, 김진화, 부달희, 김응호이다.

서울일요화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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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曜畵家會

1965년에 창립되었다. 미술의 대중화를 표방하며 목우회(木友會)의 회원들이 주축이 되어 발족한 아마추어반, 연구반, 전문반을 두고 지도교수, 초대교수의 직제를 두어 매 일요일마다 정기적인 모임을 갖는 외에 자선발표전을 열기도 하였다. 서양화를 하고 있으며 각계 각층의 인사들로 구성된 동호(同好)그룹이다. 초대회장은 이마동이다.

한국미술평론가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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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美術評論家協會

1965년 11월에 창립되었다. 미술평론가들의 모임으로 별다른 그룹활동 없이 도중에 해체되었다. 창립회원은 권순우, 이경성, 임영방, 이일, 석도륜, 유준상, 오광수, 유근준, 이구열, 천승복이다.

구상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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具象會

서양화가들의 모임으로 1967년 9월에 창립되었다. '추상이 구상보다 미술사조에서 한층 첨단을 걷고 있다는 등의 그릇된 인식을 없애기 위해서'라는 취지에서 결성된 모임으로 회기(會期)를 거듭함에 따라 어느 정도 이념의 확립을 보았다. 미술단체 중 가장 향토색이 짙은 모임으로 평가되고 있다. 1971년 제7회전을 가졌고, 1979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창립 10주년 구상전을 열었다. 창립회원은 박항섭, 안영일, 이봉상, 박창돈, 박성환, 박석호, 송경, 최영림, 김영덕, 박영성, 박고석, 강우문, 정규, 김희제, 정준용, 정건모, 신석필, 홍종명, 전상수이다.

한국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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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繪畵

1968년 3월에 창립되었다. 주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출신의 30대 동양화가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서양화와 상대적인 의미에서 동양화를 국화(國畵)라고 주장하고 발족, 전통적인 동양수묵화에서 극단의 추상화 경향을 띤 작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가들로 구성되었다. 1971년 제5회전을 가졌다. 창립회원은 김원세, 김금출, 강영봉, 신영상, 송영방, 이용자, 이규선, 장상선, 정치환, 정탁영, 정순일, 정상원, 정영조, 정금희, 최종인, 홍정희이다.

한국현대판화가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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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現代版畵家協會

1968년 10월에 창립되었다. 판화의 대중화·보급화를 목적으로 이 시기에 활약하던 대표적인 판화가 10인으로 결성되었다. '오랜 연구와 끈기있는 노력으로 여러 가지 어려움과 소외감을 극복하면서'라는 판화운동의 고충을 털어 놓으며 창립전을 1968년 10월 20일부터 24일까지 신세계화랑에서 연 이 모임은 제2회전을 끝내고 활동이 침체되었으나 다시 활동을 재게하여 1987년 미술회관과 바탕골미술관에서 국제교류전 및 신인공모전을 가졌다.

현대공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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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代空間會

1968년 12월에 창립되었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출신인 중견 조각가들의 모임으로 "우리는 한국인으로 이 국제사회 속에서 동시에 공존하며 민족적 자주, 자존적 긍지를 가지고 진부한 작가적 양심과 방황하는 정신적 풍토를 개선하며 신시대를 증언하는 사명감을 가지고 새로운 조형 언어로써 참신한 공간을 창조한다"는 선언으로 출발하였다. 실내전과 야외전을 통한 변화있는 발표전을 벌여 왔고, 다각적인 재료와 시도로서 새로운 시공간(視空間)을 형성하려는 패기에 찬 조각그룹으로 평가되었다. 1971년 제5회 현대공간회전을 열었고 1979년에는 미술회관에서 있었다.

한국사실작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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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寫實作家會

1969년 5월에 창립되었다. 목우회의 핵심 멤버이던 10인 원로 사실화가들로 구성되었고 완고한 자연주의의 사실 경향을 띤 단체이다. 현실의 대상을 사실적으로 재현함을 원칙으로 하는 이 그룹의 화풍은 사실상 한국에 정착한 자연주의의 마지막 보루가 되고 있다.

한국아방가르드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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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 AVANT-GARDE 協會

1969년 6월에 창립되었다. "전위예술에의 강한 의식을 전제로 비전 빈곤의 한국 화단에 새로운 조형 질서를 모색, 창조하여 한국 미술문화 발전에 기여한다"는 선언을 앞세우고 등장한 전위미술의 모임이다.

30대의 화가, 조각가, 미술평론가 등이 주축이 되어 결속된 이 모임은 그들의 조형이념을 뒷받침하기 위한 이론지(理論誌) 를 발간하였다. 1970년 AG 전(제1회전)은 '확장과 환원의 역학'이란 주제를 내걸었고, 특히 1971년의 제2회전은 '현실의 실현'이라는 주제로서 경복궁 현대미술관의 전관(全館)을 통틀어 타블로, 입체물, 구조물, 자연물을 망라하는 대규모 발표전을 열었다. 또한 라는 책을 통해 착실하게 전위미학의 논리적인 구심점을 모색하였다.

제3조형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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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三造形會

1969년 7월에 창립되었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출신인 조각가들의 모임이다. 그 당시 20대들의 모임으로 '어떤 이즘이나 사상을 앞세우지 않고 각자 자기 나름의 내용과 형식을 추구하여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추구한다'는 취지를 갖고서 스폰지, 스테인레스, 아크릴, 모르타르, 대리석 등 다양한 재료로 새로운 환경 작품을 시도했다. 1971년 야외전을 가졌다.

창립회원은 심문섭, 안승복, 전준, 김세경, 손필영, 오세원, 장도수, 장정남, 한기옥이다.

한국현대조각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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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現代彫刻會

1969년 9월 창립되었다. 그 당시 홍익대학교 출신 30대 조각가들로 구성되었으며 60년대 말기 전위조각의 뚜렷한 경향과 성격을 반영하였다. 1970년 제2회전을 가졌고, 1977년 제9회전이 열렸다.

도작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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陶作家會

1970년 11월 창립되었다. 홍익대학교 출신 그 당시 30대 도예가들의 모임이었다. 70년대 활약한 회원은 김석환, 노명인, 원대정, 이부웅, 정담순, 한길홍, 한봉림 등이다.

홍익조각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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弘益彫刻會

1971년 11월 창립되었다. 홍익대학교 출신 조각자들의 동문모임으로 동문 상호간의 친목도모와 모교와의 상호교류를 증진시키며 작품연구 및 창작발표에 주력하여 한국 조각의 발전에 기여한다는 취지로서 출발하였다. 구성원은 명예회장, 회장, 총무, 섭외의 순서로 임원을 두었으며 매년 1회의 전시회를 갖는다.

대한민국미술전람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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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民國美術展覽會

약칭하여 국전(國展)이라고 부른다. 1949년 9월 22일 문교부 고시(告示) 제1호에 의하여 발족되었다. 같은 해 11월 21일부터 경복궁 미술관에서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제1회전을 열었다. 국가가 주최하는가장 규모가 큰 공모전이며 그 창설목적은 동 규정 제2조의 "본회는 우리나라 미술의 발전향상을 도모하기 위하여 매년 이를 개최한다"는 문항 속에 간추려져 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그 이듬해 문교부는 미술의 국가적인 보호육성책의 미명 아래 미술분과회의를 두었으며, 여기서 국전 규약(規約)을 만들고 추천작가를 천거하여 그들 가운데서 심사위원을 뽑았다. 국전 규약과 운영방법은 대체로 일제총독부 주최의 조선미술전람회의 것을 그대로 답습하였으며 그 결과 국전 운영상의 여러 가지 차질과 온갖 잡음의 실마리가 된다는 비판의 소리를 낳기도 하였다. 창설 이듬해인 1950년 6·25동란의 발발로 국전은 그 기능이 마비된 채 공백기를 맞이했고, 정부가 환도한 1953년 대한미술협회의 주관으로 제2회전을 열었다.

1957년 7월 8일 국전 규정은 문교부 고시 제33호로 개정되고 전 규정은 폐지된 후에 여러 차례 부분적인 수정을 거듭했으며 1961년 5·16 군사혁명 이후의 제10회 국전 때 대폭적인 개정을 하였다. 이때의 개정의 요지는 ① 재야 중견작가들을 심사위원이나 추천작가로 받아들임으로써 새로운 기풍을 조성하려 했고, ② 초대작가제, 추천작가제를 통합하여 추천작가제로 일원화시켜 그 수를 증가시켰으며 ③ 서양화를 구상, 반추상, 추상으로 3분하고 회장이 미술평론가 약간명을 심사위원회의 자문으로 위촉하게 한 점 등이다. 이것이 불씨가 되어 국전의 아카데미즘을 고집하던 일부 완고한 사실 작가들과 새로 등장한 진취적인 중견작가들의 암투가 오히려 표면화되는 결과를 초래하여 국전의 착잡한 양상은 전체 미술인들과 매스컴의 날카로운 반응을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국전의 급진적인 변혁은 제10회전만으로 그쳤고 제11회전부터는 재차 권위를 회복하고 복권한 사실계열의 화가들이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그후에도 국전에 대한 비판이 드높았는데 1968년 제17회 국전에서는 심사위원 남관이 심사도중 퇴장하는 소동이 일어났으며 이러한 악순환을 거듭한 끝에 일부 재야 화가들 사이에서 국전무용론(國展無用論)까지 나왔다. 또한 국전 제도 개선의 여론도 드높았다.

문교부가 관장하던 국전이 새로 문화공보부로 이관된 후에 생긴 국전제도연구위원회는 공청회를 거쳐 각계의 의견을 종합, 문공부의 절충안 등을 받아들인 국전제도개혁안을 창안, 제19회 국전을 앞둔 1970년 7월 24일에 발표했다. 그 요지는 ① 국전제도연구위원회가 국전운영위원회를 조직하고 운영위원회가 국전심사위원회를 구성, ② 국전의 각 분야를 회화, 조각, 서예 등의 3분야 7개부문(동, 서양화, 조각의 구상, 비구상 등)으로 구분, ③ 상(賞)제도는 공모상과 초대 추천작가상으로 구분, ④ 종래의 추천작가제를 초대 및 추천작가제로 이원화하고, ⑤ 운영위원은 미술인 외의 다른 분야 인사를 포함시켜 강력한 직권을 가지게 하는 것 등이다. 이 가운데서 ②의 3분야 7개부문안을 문공부의 요청으로 공예부문을 추가하여 4분야 7개부문 안으로 수정, 확정시켰다. 이로써 제5회 국전에서 제6부문으로 국전에 진출하였던 건축, 제13회 국전의 제7부문으로 신설을 본 사진 부문이 제외되어 따로 전시회를 갖게 되었고 제14회 국전 이후 공모상인 대통령상 수상자에게 주어지던 해외여행의 특전이 초대·추천작가상 수상자에게로 넘어가는 등 많은 변화를 보았다. 1971년 제20회 국전에서 서예부의 심사에 불만을 가진 일부 낙선자들이 낙선서예작을 대상으로 한 서예평가전을 가져 분규의 행사처럼 불려져 온 국전에 또 한번 오점을 남겼다.

1980년 제29회 국전부터 운영권이 문예진흥원으로 옮겨지면서 국전의 존속에 대한 논란이 일어나기 시작하여 결국 한국의 미술계는 현대미술초대전과 대한민국 미술대전을 신설하여 이원제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현대작가 초대공모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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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代作家招待公募展

조선일보사가 주최한 미술전으로 1957년 1월에 창립하였다. 국전에 대항하는 재야적인 성격을 띠고 출발하였으며 창립전은 같은 해 11월 21일부터 12월 4일까지 덕수궁 미술관에서 열렸다. 제1회전 및 제2회전은 비교적 넓은 범위의 다양한 성격을 지닌 문제 작가들을 초대한 전시회였으며, 제1회전에 초대된 작가는 서양화 18인, 제2회전에서 조각부문이 추가되고 점차 범위를 넓혀 1962년 제6회전은 서양화, 동양화, 판화, 조각의 각 부문으로 나뉘어지고 일반공모와 외국작가들의 초대작품을 병행 전시했다. 창립초기 한국에 도입된 새로운 미술사조인 앵포르멜이나 액션 페인팅, 네오다다이즘 등 일련의 전위적인 미술 경향이 가장 잘 반영된 것은 제3회전이었으며, 이후 초대전의 성격도 전위적인 경향으로 초점을 좁혀 뚜렷한 이념의 확립을 보게 되었다. 경복궁 미술관에서 열린 제6회 전에는 유럽, 아프리카의 현대 작가들이 대거 참가했고 네오다다 계열의 파격적인 전위 작품들이 등장하여 국전의 폐쇄적인 분위기와 좋은 대조를 이루었다. 1967년을 전후하여 우리 화단에 고개를 들기 시작한 옵 아트의 경향은 제12회전의 젊은 작가들의 작품 속에 많이 요약되고 있다. 1969년 환경미술의 경향을 띤 제13회전을 마지막으로 해체되었다. 한국 미술에 새로운 기준을 설정한 전시회로서 중요하며 신문사가 미술운동에 참여한 좋은 실례가 된다.

문화자유회의 초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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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化自由會議招待展

세계문화자유회의 한국본부가 주최한 초대전람회로 1962년 6월에 창립되어 같은 해 6월 21일부터 27일까지 중앙공보관에서 제1회전을 가졌다. "우리는 인류가 자유를 가진 이와 못가진 이로 갈라져 있는 한 안정된 세계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는 자유인 선언을 내세운 이 기구는 그 해의 가장 문제되는 국내 작가들의 문재작만을 선정, 초대하여 작품전을 여는 한편 미술 세미나를 병행하여 주최하였다. 추상미술 이후의 작가들을 초대한 작품전으로서 60년대 초 한국 현대미술의 주요한 기획전이었다.

대한민국 상공미술전람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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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民國商工美術展覽會

대한상공회의소 주관의 미술전으로 1966년 창립되었다. 1966년 8월 16일부터 20일까지 경복궁미술관에서 제1회전을 열었다. 순수예술의 성격을 띤 국전과는 달리 상업디자인 전반을 다루는 공모전이다. 그 목적은 수출 공산품디자인의 개선에 두며 수출증진과 우수 디자이너의 발굴로 우수 디자인의 창안(創案) 기풍을 세우기 위해 정부가 수출진흥책의 일환으로 실시하였다. 1971년 6월에 제6회전을 열었으며 1977년 전람회의 명칭이 '대한민국 산업디자인전람회'로 바뀌면서 제12회전이 열렸다.

대한민국산업디자인 전람회는 그동안 디자인 제품의 질적 개선과 디자이너들의 창의적인 아이디어 개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 왔고, 일반의 디자인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위해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1989년 제24회 전람회를 가졌다.

한국민속공예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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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民俗工藝大展

동아일보사 주최의 민예전으로 1967년 5월에 창립되었다. 같은 해에 첫 전시회를 열었다. "단절 위기에 있는 한국민속공예의 보존과 그 기술의 전승을 꾀하고 아울러 전통적인 우리 공예미로 하여금 한국현대공예의 중흥을 위한 밑거름이 되고자"라는 취지로 발족하여 처음에는 조선시대 일품전만으로 출발하였다. 매년 1회의 발표전을 열어왔으며 1969년의 전시는 규모를 확대하여 문화공보부와의 공동주최로 제1부 민속공예 일품전, 제2부 전승민속공예전, 제3부 현대창작 공예공모전 등 3부를 두어 ① 조선시대의 수공예품, 가구 등 안방용 공예품(주로 여성들이 사용하던 것)의 수장작품 전시, ② 민속공예품의 기능보유자들이 만든 민속공예품의 전시, ③ 새로운 한국 공예미의 기조를 세우기 위한 신작 공예품의 공모전을 내용으로 했다. 공모전에 출품하는 공예의 종류는 목공, 나전, 칠공, 도자, 금속, 장식, 염직, 자수, 죽공, 화각(華角) 등이다. 1971년 제5회전이 열렸다.

국제사진살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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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際寫眞 SALON展

동아일보사 및 사진동우회 공동주최의 국제사진전으로 1966년에 창립되었다. 1972년 20개국의 사진작가들이 응모하여 제7회전을 가졌고 해마다 여는 정기전과 함께 입선작품집도 출판하고 있다. 1982년 제17회전에서는 동아국제 사진살롱전이 창설된 이래 처음으로 한국 작품이 컬러부문 금상을 차지하여 한국사진예술의 향상됨을 보여 주었다. 1989년 제24회를 열었다.

한국미술대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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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美術大賞展

한국일보사 주최의 미술전으로 한국일보 창간 15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1969년 계획 발표되고, 1970년 6월 10일부터 7월 9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제1회전을 열었다. 관전(官展)인 대한민국 미술전람회에 버금할 70년대 초의 가장 규모가 큰 재야미전(在野美展)이며 국전이 가을의 미술성전(美術盛典)임에 비하여 이 전시회는 봄의 제전이다. 회화(동양화, 서양화, 판화)와 조각부문으로 구분, 제1회전은 초대작가제, 신인공모제를 두어 화가, 평론가 등으로 구성된 심사위원 18인의 종합공개심사로서 초대작가를 선정, 초대작가 중에서 대상 수상자 1명을 뽑고 공모 입선 작가 중에서 분야별로 역시 각 1명씩의 우수상 수상자를 뽑았다. 작품 경향은 구상·비구상에 관계없이 창조적인 작품 모두에 자격을 준다는 원칙을 두었다. 제1회전의 대상 수상작은 김환기의 작품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였다. 1971년의 제2회전에서는 초대작가제를 폐지, 출품작가에 자격제한을 두지 않았고, 종합 공개 심사로서 작품선정에 임했다. 같은 해 5월 10일부터 6월 9일까지 열린 제2회전은 대상작품이 없이 처음으로 최우수상제를 두어 각 분야에서 수상자 4명, 우수상 수상자 등을 뽑았다. 그러나 제도상의 어려운 점 때문에 국전의 재판(再版)이라는 혹평까지 듣는 등 문제가 많았다. 1978년 제5회 한국미술대상전을 실시했다. 1980년 제7회전까지 실시하고 해체되었다.

서울국제판화 비엔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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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際版畵 BIENNALE

동아일보사가 창립 5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주최한 한국 최초의 판화 국제미술전으로 1970년 11월에 창립되었다. 같은 해 11월 2일부터 30일까지 덕수궁국립박물관 서관(西館)에서 제1회전을 열었다. 제1회전의 특징은 ① 노대가(老大家)보다 신인 내지 중견작가를 우대한 점, ② 작가의 이력이나 국적보다 작품 본위로 심사하려 한 것, ③ 심사위원은 평론가 중심으로 구성하여 국내의 평론가 4인과 외국의 평론가 2인을 초대 심사에 참가시킨 점, ④ 시상에 있어서도 4개상을 두고 그 등급을 없애 동아대상으로 통일시킨 점 등이다. 제1회전부터 24개국 82명 작가의 작품 총 225점이 출품되어 국제전으로서의 면모를 갖춘 전시회로 평가되었으며 제1회전에서의 한국측의 수상작은 김상유의 <막혀버린 출구>이다. 우리나라에 판화의 질적인 발전과 확산에 크게 도움을 주는 것을 평가되고 있다.

전국대학미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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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國大學美術展

대학문화의 건설, 민족문화의 창달을 목적으로 개최된 대학문화예술축전 부속행사의 하나로 1970년에 발족되었다. 학생 국전의 성격을 띠고 출발하여 1970년 9월 7일부터 13일까지 경복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제1회전을 열었다. 각 대학의 관계 교수들로 구성된 대학문화예술축전 추진위원회의 계획 성안(成案)을 거쳐 발족되었으며, 건국 후 최초의 범(汎)전국 대학생 공모전으로 의의를 갖는다. 동양화, 서양화, 조소, 공예, 건축, 서예, 사진, 그래픽 디자인 등 8개 분야로 나뉘어졌다. 제1회전은 전국 43개 대학의 총 1,694점이 응모하였고 제2회전은 1971년 6월 21일부터 7월 5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 53개 대학이 총 2,314점이 응모하였다. 운영상 관제화된 준(準)국전이라는 일부의 비난도 있었으나 대학생들의 유일한 실력 경합의 장소가 되었다. 1978년 제9회전이 덕수궁 현대미술관에서 열었다.

불교미술공모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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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敎美術公募展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주최의 공모전으로 1970년 창립되었다. 같은 해 7월 7일부터 13일까지 중앙공보관에서 제1회전을 열었다. 전통적인 불교미술의 계승과 발전을 위하여 마련된 사상 최초의 불교미술 공모전이다. 불상, 불화(佛畵), 건축설계, 조각, 공예 등 5개 종목으로 나누었고, 1971년 제2회전을 코스모스 화랑에서 열었고, 1989년 제12회전을 열었다.

한국미술 5,000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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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美術-年展

정부 차원에서 실시하는 해외순회전으로 제1차는 미국 전시회로 시작하여 1967년 유럽 순회전, 1976년 일본 전시회, 1979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동양전시관에서 개최되어 미국 순회전을 하였다. 전시되는 미술품은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 대표적인 미술품이다. 1979년의 경우 1981년까지 미국 주요도시를 순회, 전시하였는데, 우리나라의 고유문화 예술을 학술적 측면에서 재조명하고 그 독창성과 우수성을 새롭게 인정받는 성과를 거두었다.

한국화랑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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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畵廊協會

1977년 1월에 창립되었다. 이 협회는 미술의 대중보급과 이해 증진을 위해서 협회전 개최, 협회지 발간, 미술강좌 개최, 신인 발굴, 감정기구 설치 등을 주요사업으로 내걸고 미술계의 유통질서 확립을 도모하기로 하였다. 한국화랑협회는 처음에는 12개의 사설화랑이 모여 협회를 발족하였는데 화랑은 명동화랑, 동산방(東山房), 현대화랑, 문화화랑, 조선화랑, 진화랑, 그로리치화랑, 변화랑, 서울화랑, 조형화랑, 대인화랑, 희화랑으로 국내에서는 최초의 화랑협회이다.

1979년 제1회 미술대전이 서울 선화랑과 문화화랑에서 10월 18일부터 24일까지 열렸다. 각각 동양화, 서양화 구상작품과 조각, 서양화 비구상 작품을 전시하였는데 이 협회전은 총회를 열어 출품작가를 선정하고 이들이 신작(新作) 1점씩을 선보였다. 1986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화랑들의 작품견본시장인 "86서울아트페어"를 8월 29일부터 9월 14일까지 덕수궁에서 열어 화제가 되었고 이를 계기로 한국화랑 협회에 가입한 화랑이 29개에서 45개로 늘어나는 등 호응이 컸다. 또한 1987년 제2회 화랑협회전에서는 그동안 침체기에 빠져 있던 화랑가에 현상극복의 기운을 불어넣어 주었고, 두드러진 특징은 각 화랑들의 출품작가가 주로 신예나 중견층으로 전체 연령이 낮아졌다는 점과 신선함을 찾으려는 노력으로 해외체류작가가 많았다는 점 등이다.

1989년 한국화랑협회 주최로 미술품 국제교류, 화랑의 역할과 기능, 미술관법, 미술품 감정 등 주제발표 및 토론회를 가졌다.

동아현대미술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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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現代美術際

1978년 동아일보사가 격년제 미술전으로 동아현대미술제를 신설하였다. 재래의 국전식 분류방법을 지양하고 하나의 주제를 내걸었다는 점이 이 미술제의 특징으로 1978년 3월 30일부터 4월 12일까지 현대미술관에서 제1회전을 열었다. 회화를 3부로 나누어 1부를 전통회화부, 2부를 현대회화, 3부를 드로잉, 판화, 기타부로 나눈 것이 이 미술제의 새로운 분류방법이었고 이와 같은 분류와 전체에 해당되는 테마의 설정은 지나친 획일적인 조형사고를 지양하고 보다 풍부하고 다양한 풍토를 조성하자는 의도에서 마련된 것으로 미술계의 현실을 이해한 기획으로 평가되었다.

중앙미술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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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央美術大展

1978년 중앙일보사가 신설한 것으로 그 체제는 순수미술분야만으로 압축한 동양화, 서양화, 조각 3부로 이루어졌다. 재래의 분류방법인 구상과 비구상을 지양했다는 것이 특징이고 공모전과 아울러 초대작가부를 설치하였다. 제1회전은 1978년 6월 3일부터 22일까지 현대미술관에서 개최하였고 1989년 제12회전을 호암갤러리에서 6월 23일부터 7월 7일까지 실시하였다. 중앙미술대전의 1985년 이후의 대상 수상자는 한국화에 김광일·이승하·김훈, 서양화에 심웅택 등이 있다.

한국국제사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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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國際寫眞展

1981년 발족되었다. 3월 20일부터 26일까지 예총화랑에서 열렸는데 일본, 홍콩 등 12개국이 참가했고 106점이 출품되었다. 출품 부문은 흑백과 컬러부문으로 나뉜다. 1983년부터 참가국이 20개국이 넘고, 응모 작품수도 늘어나면서 차차 기반이 잡혀가기 시작하였다. 1985년 제5회전은 10월 30일부터 11월 4일까지 여의도백화점 화랑에서 열렸다. 1989년에는 참가국이 많이 줄어 8개국만이 참여하여 제10회전을 개최하였고, 제10회 한국국제사진전 작품집을 발간하였다.

한국사진교육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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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寫眞敎育學會

최초의 명칭은 한국사진교수협의회였다. 1981년 7월 20일 서울예대와 대구대일전문대학에 사진과가 신설된 것을 계기로 한국의 사진발전을 위하여 전문대학 이상의 사진과 전임교수들이 모여서 한국사진교수협의회를 발족하였다. 초대회장은 유만영 교수가 선출되었고, 주요 사업은 ① 사진전문용어 통일, ② 교과과정 연구, ③ 논문집 발간, ④ 대정부 정책건의 등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1982년 5월 8일 한국사진교수협의회는 한국사진교육학회로 개편하여 발족하였다.

대한민국건축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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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民國建築大展

1982년 국전을 해체하면서 신설된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제외된 건축부문을 한국건축가협회가 대한민국건축대전을 개최하기로 하였다. 1982년 제1회전을 개최한 것을 시작으로 매년 정기적으로 공모전과 전시회를 함께 개최하고 있다. 1986년에는 11월 25일부터 12월 4일까지 현대미술관에서 열렸다. 이 해의 대상은 이상호·서기·박광범의 <건축공간과 빛에너지>가 받았다. 1987년 제6회전에서의 대상은 김신환, 문동식, 박충열의 <재활센터>, 1988년 제7회전에서의 대상은 김형우, 이영수, 이승훈의 <유럽문화원>, 1989년 제8회전의 대상은 임지택, 박희택, 양재순의 가 차지하였다.

대한민국사진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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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民國寫眞大展

1982년에 신설된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사진부문이 제외되면서 한국사진작가협회가 주관해서 해마다 개최되는 대전(大展)이다. 1982년 7월 9일부터 7월 21일까지 문예진흥원 미술회관에서 열린 제1회전에서는 779점이 접수되었고, 대상은 민현철의 <전원>이 차지하였다. 해마다 응모 작품수가 늘어나서 성황을 이루었으나 공모작품의 수준이나 초대작가의 작품 수준이 저조한 것으로 평가를 받는 혹평이 있기도 하였다. 1989년 제8회전을 개최하기까지 대상 수상자와 작품은 양은환의 <나들이>(1983), 안봉인의 <고향의 빛>(1984), 김홍두의 <수선>(1985), 백영환의 <기도>(1986), 최진연의 <뿌리>(1987), 이기윤의 <기구(祈求)>(1988), 장을선의 <여생>(1989)이다. 1988년 제7회전에서는 대전, 광주, 여수, 전주, 청주에서 순회 전시를 하였다.

현대미술초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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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代美術招待展

1982년 국전을 폐지하면서 신인공모전인 대한민국미술대전과 더불어 신설된 기성작가를 위한 미술전람회이다. 이 미전은 1983년도까지는 과거의 추천작가 및 초대작가를 중심으로 작품을 선정하였으며, 1984년 이후에는 2년 동안의 작품활동 실적을 토대로 초청하며 36세 이상을 대상작가로 하였다. 제1회전은 1982년 7월 20일부터 8월 8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관(西館)에서 열렸는데 현역 기성작가 188명이 출품하였다. 출품분야는 조각·공예·서예 부문이었다. 1983년도에는 한국화·서양화 부문의 전시회가 3월 한달 동안 열렸다. 그리고 격년제로 실시하기로 한 것을 1984년부터 매년 1회씩 열기로 하였다. 1989년 제8회전이 8월 2일부터 8월 31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렸다.

대한민국미술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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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民國美術大展

1982년 종전에 있던 대한민국미술전람회를 폐지하고 새로 신설한 신인발굴을 위한 공모미술전람회이다. 공모 종류는 동양화, 서양화, 조각, 서예, 공예 등 5개 부문만 공모하고 사진과 건축부문은 각각 대한민국 사진전람회와 대한민국건축대전을 실시하기로 하였다. 전시 개최는 봄과 가을로 나누어 두 번 실시하는데 봄에는 서예·공예부문, 가을에는 한국화·조각·서양화 부문으로 구분하여 실시한다. 작품심사는 입선작품 심사위원회와 특·수상작품 선정 심사위원회로 이원화하고, 각 위원회의 부문별 7인 이내로 구성하되 전문가의 자문을 거쳐 주최측에서 위촉하며 작품심사는 공개심사하고 심사위원별 채점은 기명비밀로 하기로 방침을 세웠다. 제1회 대한민국미술대전이 1982년 5월 20일부터 6월 8일까지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렸고(봄 미술대전), 가을미술대전은 1982년 9월 30일부터 10월 21일, 10월 26일부터 11월 14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렸다.

1986년 민간주도로 운영방식이 바뀌었고 봄·가을 두 차례로 나누어 열던 것을 가을 한차례로 통합하고 공모 분야에서 판화부문을 신설하고 공예부문은 분리시켜 대한민국 공예대전을 별도로 실시하였다. 1989년에는 서예부문도 독립해서 대한민국서예대전 제1회전을 개최하였다. 시상(施賞)은 각 부문별로 대상과 우수상을 뽑는다. 각 부문별로 나누어 1명씩 뽑고, 특선을 설정하여 각 부문별로 다수의 수장자를 뽑는다.

1982년 제1회전부터 최근에까지 대상 수상자들은 서예부문에서는 정도준, 여원구, 김서희, 이상태, 선주선 등이고 공예부문은 박현숙, 홍경희, 최병근, 조영미 등이 있으며 한국화 부문에서는 전래식, 홍순주, 사석원, 김순호, 조환, 박영주, 이만수 등 서양화 부문은 전병현, 박기호, 박일용, 정남영, 이기봉, 박영하, 임철순 등 조각부문은 정현도, 김진성, 정대현, 김창규, 김영진 등 판화부문은 이인화 등이 수상하였다.

세계현대미술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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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界現代美術際

1987년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가 주최한 서울올림픽 최대의 문화행사로서 조각과 회화의 두 부분으로 나뉘어 열렸다. 조각부문은 2차에 걸쳐 국제 야외조각 심포지엄이 열렸는데 제1차는 7월 3일부터 8월 20일까지, 제2차는 1988년 3월 11일부터 4월 29일까지 열린데 이어서 1988년 9월 12일부터 10월 말까지 조각공원에서 국제야외조각 초대전이 열렸다. 회화는 1988년 8월 17일부터 10월 5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국제현대회화전이 열렸다.

조각 분야에서는 조각공원에서 국제야외조각 심포지엄 참가작품으로 세계 33개국에서 36명의 작자들이 돌, 철, 합성수지, 시멘트, 청동, 나무 등을 소재로 315m 크기의 작품을 현장에서 직접 제작하였고, 국제야외조각 초대전에서는 세계 66개국에서 155명의 작가가 작은 규모의 작품들을 전시하였다. 세계 정상급의 조각가들이 참가하였는데 프랑스의 세자르, 벨기에의 폴뷰리, 덴마크의 야곱 센, 이탈리아의 포모도르, 영국의 아미타지 등이 그들이다. 그리고 동구권 및 제3세계 국가들의 작품도 많았다. 작품들에 대한 평가는 전체적으로 작품의 수준이 편차가 심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회화 분야의 경우는 국제현대회화전에 전세계 64개국에서 158명의 작가가 참가하였다. 작품의 경향은 미국, 프랑스, 서독 등지의 서구권에서는 비교적 안정감있고 상당한 역량이 돋보이는 수준이었고,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에서는 작가들 나름대로의 개성이 돋보이는 특성과 실험정신이 강한 신선함을 주었으며, 아시아 및 아프리카는 미적조형이 다양하지 못해 아쉬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회화 분야의 경우는 국제현대회화전에 전세계 64개국에서 158명의 작가가 참가하였다. 작품의 경향은 미국, 프랑스, 서독 등지의 서구권에서는 비교적 안정감 있고 상당한 역량이 돋보이는 수준이었고,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에서는 작가들 나름대로의 개성이 돋보이는 특성과 실험정신이 강한 신선함을 주었으며, 아시아 및 아프리카는 미적조형이 다양하지 못해 아쉬웠다는 평가를 받았다.

세계현대미술제를 치르면서 문제로 지적된 것이 몇가지 있었는데 ① 행사의 사대주의적인 성격과 관료적 전횡과 졸속성 ② 조각공원 조성에 따른 몽촌토성 훼손 ③ 전통회화 및 구성계열의 참여배제 등이 지적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가 있는 반면에 세계현대미술제 개최의 의의는 큰 것으로 보고 있다. 12년만에 처음 이루어진 동서화합의 올림픽이라는 좋은 점 때문에 동구권 미술을 포함한 세계의 미술이 한자리에 모였다는 점과 우리 미술계도 국제화 시대의 한국미술 역량을 점검해 보는 기회를 가졌다는 점 등이다.

현실과 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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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實-發言

1981년 창립되었다. 이 모임은 현재 우리나라 미술계가 편의적이고 습관적인 데서 벗어나지 못하고 공통적인 문제해결과 발전의 가능성을 포기해버린 것을 반성해 보자는 창립선언을 하였다. 매년마다 하는 동인전을 각각 테마를 달리하여 작품 발표를 하고 있다. 제2회 동인전에서는 '도시와 시각'이라는 테마를 갖고 발표하였으며, 1983년 제3회 동인전은 '행복의 모습', 1984년 제4회 동인전은 '6·25'등 다른 테마를 내세워 활발할 발표를 하고 있는 민중미술 계통의 화가들의 모임이다.

이 모임의 조형이념은 삶의 구체적인 모습과 의식을 형상화하는 것으로 그것을 알기 쉬운 조형언어로 대중과 쉽게 교감할 수 있는 형식을 추구하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현실과 발언이 현실과 역사적 소재를 형상화하는 창작방법의 한계로 미래의 전망, 진보적 민중의 힘을 구체적으로 그려내지 못하고 소시민적 성격만 노출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1985년 서울미술공동체가 주관한 연립전 형식의 '을축년 미술대동잔치'에도 참여하였다.

임술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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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戌年

1982년 창립되었다. 임술년의 실제 이름은 '임술년 구만팔천구백구십이에서'이다. 이 이름의 의미는 임술년(1982)이라는 시간성과 구만팔천구백구십이(남한 총면적의 ㎢치수)라는 장소성, -에서는 출발의 의미로 이 모임은 스스로 해석하였다.

이 그룹은 1970년대의 조형발상이 국제성이라는 이름 아래에 서구지향적인 것에 반기를 들고 그대신 현장성과 동시대성을 기치로 내걸었고, 이 모임 회원들의 작품에서 구체적인 형식은 우리 문화의 병폐를 철저하게 규명하고 해부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1983년 제2회 전에서는 특히 강한 감동과 전율을 준 전시회로 리얼리즘 정신으로 접근하는 자세를 보여주었다. 또한 이 전시회는 1983년에 열린 구상회화(具象繪畵) 전시회 가운데 가장 높은 수준으로 평가받았다. 1985년 서울미술공동체가 주관하는 연립전 형식의 '을축년 미술대동잔치'에 민중미술을 지향하는 모임의 하나로서 참가하였다.

한국서예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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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書藝協會

1989년 대한민국미술대전이 한국미술협회로 주최권까지 넘어가 주관과 함께 주최권까지 이양되었는데 이에 반발하여 한국서예협회가 한국미술협회속의 서예분과만으로는 과거에 빚어졌던 모순과 비리를 해소하기 어렵고, 문화의 서울중심적 편재현상을 극복하여 지방화시대 참여 등을 내세우며 출발하였다. 그러나 한국미술협회와의 마찰로 제명처분, 성명서, 공개질의, 결의문 등이 오고간 뒤에 1989년 4월 9일 창립총회를 가졌다. 그 해 대한민국미술대전과 같은 시기에 개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