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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고대사회의 발전/삼국의 성립과 발전/7 ~ 8세기경의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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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8세기경의 한국〔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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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 있어서 정치적·문화적으로 7세기에서 8세기에 걸치는 기간은 커다란 변화와 발전을 본 시기였다. 이 시기에는 정치적으로는 신라의 삼국 통일이 있었고, 문화적으로는 불교문화의 전성기를 맞이하였던 것이다.신라의 통일에 앞서 삼국은 서로 정치적·군사적으로 갈등이 있었고, 그 위에 중국 대륙에서는 수세기 이래 다시 천하를 통일한 수(隋)가 대두하여 한반도를 침략했다. 그러나 고구려는 잘 싸워 이를 물리쳤고 사비(泗批)로 천도한 백제도 고지(故地) 회복에 힘써 한때 큰 뜻을 펴 나가기도 하였다. 그러나 신라는 안으로 불교를 통한 정신적 통일을 꾀하는 한편, 화랑 제도를 발전시켜 군사적 일면을 담당케 하였고, 대외적으로는 수에 대신하여 일어난 당과의 연합으로 먼저 백제를 쳤으며(660), 다음으로 고구려를 멸망시켰다(668).고구려나 백제는 신라에 못지 않은 강대국이었고 그들의 문화 또한 신라에 대하여는 지도적 지위에 있었다. 신라에게 망하기 직전만 하더라도 고구려는 수차에 걸친 수·당의 침략을 물리쳤고, 백제 또한 신라에게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여 신라를 궁지로 몰아넣었다.그러나 고구려는 권력층의 세력 분쟁과 민심 이반으로, 백제는 전승(戰勝)으로 인한 긴장 해이와 간신의 사리(私利) 도모로 결국 나라를 잃기에 이르렀다.신라의 삼국 통일은 드디어 한국의 민족 통일을 가져왔으나 당과의 연합 세력에 의한 군사적 승리 뒤에는 적지 않은 난관이 뒤따랐다. 당은 당대로 백제의 고지에 5도독부(五都督部)를 두었고, 고구려의 고지에는 9도독부(九都督部)를 두었으며, 이를 다시 42주(州)로 나누었다. 이것은 당이 두 나라의 영토를 자기의 속령으로 만들고자 하는 속셈이었으니 신라는 이러한 당의 계획을 분쇄해야 했다. 이 투쟁은 문무왕 16년(676) 고구려가 망한 지 8년이 지나서야 성공하여 신라는 대체로 대동강과 원산만을 연결하는 선 이남의 영토를 차지했고, 당은 평양에 설치, 신라까지도 포함하여 지배하려 한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철거하게 되었다.한반도에 뻗쳐 오던 당의 세력을 물리치고 통일의 결실을 가져온 신라의 노력은 이 시기에 있어서 특기할 만한 일이라고 하겠다.신라는 삼국을 통일하자 막대한 영토와 인구를 차지하게 되었고 평화를 찾을 수 있었다. 따라서 통일을 계기로 새로운 방향으로의 발전을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신라는 본토에 3주, 고구려 고지에 3주, 백제 고지에 3주를 두어 통일 전에 3주이던 것을 9주로 개편하였고(신문왕 5년, 685), 다시 충주·원주·김해·청주·남원에 5소경(五小京)을 두었다. 한편 군사면에서도 신문왕대에는 고구려·백제의 유민(流民)을 포함하여 9서당(九誓幢) 10정(十停)을 편성하였다.이러한 제도면의 정비는 급격히 증대한 영토와 인구에 대한 필연적인 조치이겠으나 그보다도 중요한 일은 문화의 발전이었다. 삼국 시대에는 고구려나 백제의 문화가 신라보다 앞서 있었으니, 신라에서 황룡사 9층탑을 건립할 때 백제의 공장(工匠)을 청해 온 사실은 이것을 증명하는 일이라 할 것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부터 문화 또한 급속한 발전을 보았으니, 그 바탕이 된 것은 당문화의 적극적인 흡수와 호국적(護國的)인 성격을 가진 불교의 흥륭(興隆)이었다. 신라는 통일 전부터는 나(羅)·당(唐) 연합의 정치적 의도도 있어, 승려·학생·귀족들의 당나라 파견이 활발하였다. 일찍이 승(僧) 지명(智明)·담육(曇育) 등이 수에 들어가 구법(求法)한 일이 있었고 자장(慈藏)·의상(義湘) 등이 입당(入唐)한 바 있다.한편 자제들이 당의 국학에 입학한 일이 있었고, 김춘추(金春秋)·김법민(金法敏) 등 귀족들이 당에 왕래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신라는 문화사상 가장 찬란하였고 또 어느 시기보다도 가장 크게 서방문화에 접하게 되어 중국문화는 서방문화까지도 받아들이게 되었다.이리하여 통일 전의 소박하고 토착적이던 신라의 문화는 한국사상 가장 난숙한 황금기를 맞이하였으니, 현재 남아 있는 이 시기의 문화재를 통하여 당시의 찬란했던 문화상을 엿볼 수 있다. 감산사(甘山寺)의 석불(石佛) 2구(二驅)(719), 불국사와 석굴암의 창건(751), 불국사 금동불 2구(8세기 중엽), 감은사(感恩寺) 창건(三層石塔 二基 遺存, 682), 상원사(上院寺) 동종(銅鐘, 725)과 성덕대왕 신종(神鍾, 771) 등은 당시의 대표적인 문화 유산이라 할 수 있다.이와 같은 불교문화의 융성은 불교의 유흥이 바탕이 되었겠지만, 그 불교는 호국불교(護國佛敎)로서 왕실과 귀족의 후원이 컸기 때문에 더욱 극성했다. 통일 후 신라의 귀족 계급은 거대한 부를 형성하였고, 그것을 배경으로 나라와 일가의 복을 불타에게 빌었던 것이다. 불국사나 감은사의 창건 연유는 그러한 사실을 말하고 있다.불교는 다른 종교도 그러하듯, 신앙을 핵으로 하여 사상·미술·음악·건축·무용·의술·문학·언어 등이 결합된 거대한 하나의 문화체(文化體)로서 전래되었다. 따라서 불교의 수용은 비단 종교·사상적인 면뿐 아니라 문화 전반에 심대한 영향을 주었다. 승려들은 새로운 선진문화를 이해하고 보급하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 집단이었다.그들은 실제 정치와 군사 분야에서 상당한 활동을 하였고, 새로운 의술과 예술의 보급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저수지의 축조와 도로 건설 등에서도 승려가 큰 역할을 하였음이 확인된다.이는 불교 승려의 사회봉사활동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으며, 또 이를 통해 당시 선진적인 토목·건축기술이 승려에 의해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불교가 전래된 시기가 삼국이 본격적으로 중앙집권적인 국가체제를 확립해나가던 때였기에, 바꾸어 말하면 한국 고대문화가 성숙되어간 시기였기에, 이 무렵 수용된 불교문화는 그 뒤까지 한국문화의 주요기반이 되었다. 동시에 불교문화는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문화권의 형성에 주요한 한 요소가 되었다.중국문물의 본격적인 수용과 더불어, 삼국에 유학이 보급되었다. 그것은 주로 교육기관을 통해 이루어졌다. 고구려의 경우,수도에는 태학이 있어 상류층 자제를 가르쳤고, 지방에는 경당이라는 큰 집을 세워 평민자제에게 서책과 궁술을 익히게 하였다. 당시 고구려에선 유교(儒敎) 경전, 사서(史書), 옥편(玉篇) 등의 사전, 문선(文選)과 같은 문학서 등이 읽혔다.백제에서도 6세기 중엽 남중국의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시경(詩經)』과 『예기(禮記)』에 밝은 사람을 구하는 등 유교의 이해에 상당한 열의를 가지고 있었다. 박사(博士) 제도가 있었음을 볼 때, 유교 경전은 교육기관에서 교습한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백제는 일본에 한학과 유학을 전해주었다. 특히 『논어(論語)』와 『천자문(千字文)』을 전한 왕인(王仁)은 고대 일본인으로부터 널리 추앙을 받았다.신라에선 학교가 세워지지 않았으나, 화랑도가 청소년 교육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당시 화랑도에서 강조한 덕목은 원광(圓光)의 세속오계(世俗五戒)에 압축적으로 반영되어 있는데, 충(忠), 효(孝), 신(信), 전투에 임하여 용감할 것, 살육을 함에 신중할 것 등이 그것이다. 이 중 앞의 앞의 세 항목은 유교에서 강조하는 기본 윤리로, 당시 사회에서 요구된 것을 유교의 덕목으로 표현한 것이다. 진흥왕순수비에서는 왕도정치 이념을 표방한 기술도 보인다.그러나 삼국 모두에서 유교 정치이념은 실제 널리 받아들여지지는 못하였고, 유교의 도덕·윤리 또한 사회의 기층에까지 영향을 미치지는 못하였다. 유학은 사상적 측면이 중요시되었다기보다는, 중국문물을 수용함에 있어 수단이 되는 한문을 수업하기 위한 방편으로 인식된 측면이 강하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