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근대사회의 발전/동학운동과 갑오경장/러·일 대립 속의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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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 대립 속의 조선〔槪說〕[편집]

청일전쟁의 결과 신흥 일본 세력이 강력하게 대두하고 그 대신 청의 세력은 조선에서 완전히 퇴각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독점적인 지배력도 러(露)·불(佛)·독(獨)의 삼국간섭에 의해 후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러한 일본의 후퇴는 조선 정부안에 배일 친러(排日親露)의 기운을 싹트게 했다. 이러한 정책을 배후에서 조종한 것은 민비와 그 일족으로 그들 일파는 친일 세력을 축출하고 이범진(李範晋)·이완용(李完用) 등 친러파(親露派)를 정부에 기용하게 되었다. 그 결과 조선 정부의 친러 경향은 현저하게 나타났다.청일전쟁의 승리로 조선에 강력한 세력으로 진출한 일본은 다시 러시아와 충돌하게 되었다. 일본은 민비를 중심으로 한 친러파를 구축하고 친일 세력을 부식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 방법으로서 일본은 하나의 놀랍고도 야만적인 음모를 획책했으니 그것이 바로 고종 32년(1895)의 을미사변(乙未事變)이었다. 이 을미사변에 의하여 새로 개편된 김홍집 내각은 전례대로 개혁을 추진시켜 나갔다. 즉 군제를 변경하여 중앙에 친위대(親衛隊), 지방에 진위대(鎭衛隊)를 두었고, 단발령(斷髮令)을 공포하여 이를 강행했다. 또한 태양력을 사용하고 일세일원(一世一元)의 연호(年號)를 쓰되 건양(建陽)이라 했으며, 서울에 관립소학교를 설치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모(國母) 피살 사건과 강제된 개화는 국민의 분노를 격화시켜 전국적인 의병 봉기를 불러일으켰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유인석(柳麟錫)·이소응(李召應)·이춘영(李春永)·김복한(金福漢) 등이었다.을미사변으로 인한 전국적 의병 봉기의 소요 속에서 조선의 정국을 일변시킨 사건이 벌어졌으니 이것이 바로 아관파천(俄館播遷)이었다. 이리하여 정권은 또다시 이범진·이완용 등을 중심으로 한 친러파에게 넘어갔으며, 조선의 정치는 러시아의 수중에서 우롱당하게 되었다. 한편 각종 이권이 러시아에게 넘어갔으며, 이에 열강은 다투어 조선의 이권을 강탈하였다.

삼국간섭[편집]

三國干涉

고종 32년(1895) 러시아·독일·프랑스 3국이 일본을 강박하여 요동 반도를 청국에 돌려주게 한 사건. 제국주의 일본은 청일전쟁 결과 대만과 요동반도를 할양받았다. 이로 말미암아 남하 정책에 위협을 느낀 러시아는 독일·프랑스와 더불어 일본의 요동반도 영유(領有)에 대해 엄중한 항의를 제출했다. 일본은 열강 사이에 고립되어 하는 수 없이 요동반도를 청국에 반환하고 그 대가로 3천만 냥의 배상금을 받았다. 이와같이 열강의 관심이 청국에 쏠렸던 한편, 요동반도의 남단에 전초기지를 조차(租借)하게 된 러시아는 조선을 사이에 놓고 일본과 날카롭게 대립하는 형세를 취하게 되었다.

친러파[편집]

親露派

조선말 러시아 세력을 배경으로 일본과 청국 세력에 대항하여 정권을 잡았던 자들을 말한다. 청일전쟁의 결과 일본은 김홍집 중심의 친일내각을 조직하였으나, 러시아·프랑스·독일의 삼국간섭으로 조선 정부에서는 친러적 경향이 나타난다. 그 중심 인물은 이완용·이범진 등으로 이들은 민비의 동의를 얻어 정권을 장악했다. 그 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이들 친러파는 러시아 공사 웨베르와 공모하여 건양 1년(1896) 러시아 수병(水兵) 백여 명을 인천으로부터 서울로 끌어들이고 아관파천(俄館播遷)을 감행했다. 뒤이어 이들은 다시 친러파 내각을 꾸며 러일전쟁 때까지 친러정책을 수행하였다.

을미사변[편집]

乙未事變

1895년(고종 32) 민비(閔妃:明成皇后) 일파의 친러적(親露的) 세력을 없애고 자기의 세력을 키우기 위하여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 등이 일으킨 변란. 1894년의 갑오경장으로 조선내정을 강압적으로 간섭하던 일본은 청일전쟁에 승리하자 더욱 노골적으로 그들의 침략성을 드러내어 일본공사 이노우에(井上聲)는 대원군을 몰아내고, 박영효(朴泳孝)·김홍집을 중심으로 친일내각을 조직하고 그들의 기반을 닦았다. 그러나 삼국간섭(三國干涉)으로 인한 요동환부(遼東還附) 이래 국제적으로 일본의 위신이 떨어지자, 일본세력의 동향에 민감한 민씨 일파는 급격히 친러적(親露的) 방향으로 기울어지면서 일본을 멸시하고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제휴, 박영효의 음모고발사건(陰謀告發事件)을 계기로 친일내각을 무너뜨리고 친러파인 이진범(李晋範)·이완용(李完用) 등을 등용하여 제3차 김홍집 내각을 구성하였다. 이에 일본 공사는 러시아 공사와 심각하게 대립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일본 정부에서는 러시아의 이러한 진출을 두려워하여 이노우에(井上聲) 공사에게 훈령을 내려 1894년(고종 31)에 제정한 홍범 14조(洪範十四條) 중 왕비의 국정간여(國政干與)를 금지하는 조항마저 삭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민비 등은 일본의 이러한 양보를 러시아에 대한 굴복으로 해석하고 더욱 친러적 경향을 적극적으로 나타냈다. 이에 이노우에는 본국으로 소환되고 무인(武人) 출신인 미우라 공사가 새로 부임하게 되었지만 궁중의 민비는 여전히 일본 공사를 무시하고 친일내각이 이루어 놓은 신제도(新制度)의 파괴에 착수, 민씨 집권의 구태(舊態)로 복귀시킬 음모를 추진시키는 한편 러시아에 대하여는 후원(後援)의 대가로 함경도 1항(港)을 대여한다는 밀약이 추진되고 있었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일본은 대원군을 다시 받들어 민비 일파를 제거할 비상수단을 쓰게 되었고, 대원군 또한 이런 시세(時勢)에 분개하여 마침내 일본 공사와 제휴하기에 이르렀다. 마침 10월 7일 개혁파 최후의 아성(牙城)인 훈련대(訓練隊)가 해산당하자, 미우라는 대원군을 받들고 8일 새벽 훈련대 장병 및 일본인 자객(刺客)들을 앞세우고 경복궁(景福宮)으로 쳐들어가 호위병을 죽이고 다시 궁내부대신(宮內府大臣) 이경식(李耕植)과 연대장 홍계훈(洪啓薰)을 살해, 옥호루(玉壺樓)에서 민비를 살해한 다음 시체에 석유를 뿌려 불살라 뒷산에 묻었다.그들은 임금에게 강요하여 친러파내각을 물러나게 하고 유길준(兪吉濬) 등 친일파를 중심으로 제4차 김홍집 내각을 수립하였다. 이 정변은 국제 간에도 많은 물의를 일으켜 미우라 및 그들 일당은 소환되어 히로시마(廣島) 지방재판소의 예심(豫審)에 회부되었으나 결국 증거 불충분으로 전원 석방되었다. 그리고 새 내각에서는 모든 방면에 개혁의 손을 대어 음력의 폐지, 종두법의 시행, 우편의 개시, 건양(建陽) 연호의 사용, 단발령의 시행 등을 급진적으로 추진하였다. 그러나 민비의 참변과 단발령은 민심을 크게 흔들어 각처에서 의병이 봉기하였으며, 결국 아관파천(俄館播遷)의 계기를 마련, 일본의 계획에 타격을 주게 되었고, 한때 우리나라는 러시아의 보호국과 같은 지위로 떨어졌다.

건양[편집]

建陽

1896년부터 사용된 조선 최초의 연호(年號). 고종 32년(1895)의 을미사변 이후 새로 개편된 김홍집 내각은 갑오경장 때의 내정 개혁을 계속 추진하여 동년 11월 양력 사용과 동시에 건양이란 연호 사용을 결정하였다. 그래서 음력 1895년 11월 17일을 양력 1896년 1월 1일로 환산하여 사용했다. 이것은 표면적으로는 청나라와의 종속 관계를 청산한다는 것이었으나 기실 일본제국주의의 대륙 침략정책의 일환으로 우선 청국을 조선에서 몰아내기 위한 것이었다. 1897년 8월 연호를 광무(光武)로 고치면서 폐지되었다.

단발령[편집]

斷髮令

고종 32년(1895) 백성들에게 머리를 깎게 한 명령. 을미사변 이후 김홍집 내각은 내정 개혁에 주력하여 그 일환으로 전국에 단발령을 내렸다. 고종은 솔선해 머리를 잘랐으며 내부 대신 유길준(兪吉濬)은 고시(告示)를 내려 강제로 백성들의 머리를 깎게 했다. 이것은 예로부터의 전통에 대한 도전이었으며 강제된 개화이기도 했다. 더구나 을미사변으로 일본에 대한 감정이 극도로 악화되어 있던 터라, 전국 각처의 유학자들은 일본인과 친일정권에 대한 무력 항쟁에 들어갔다. 단발령에 대한 대표적인 반대론자였던 최익현(崔益鉉)은 “내 목을 자를 수는 있으나 두발은 자를 수 없다”고 그 강제된 삭발에 완강히 항거하기도 했다.

용암포사건[편집]

鎔巖浦事件

1903년(광무 7) 제정(帝政) 러시아가 용암포를 점령하고 조차(租借)를 요구한 사건. 청일전쟁 후 러시아가 프랑스·독일과 함께 소위 삼국간섭이라 하여 일본의 요동반도 조차를 청나라에 환부케 하자 이에 조선에서는 비로소 러시아 세력이 강대함을 알게 됐고, 동시에 친러파도 대두하게 됐다. 따라서 러시아는 친러파를 앞세워 조선에서 그 세력을 확대시켜 1896년(건양 1)에는 울릉도와 압록강변의 삼림채벌권을 획득하고 1903년 5월에는 러시아인 40여 명이 용암포에 입주하였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러시아 공사관에 항의하고 즉시 퇴거를 요구하였으나 이들은 오히려 군대를 파견하여 용암포를 점령하고 용암포의 조차를 강요, 마침내 조차권을 획득하였다. 이에 러시아의 팽창을 두려워한 일본·영국·미국은 용암포 점령의 불법을 내세워 개항(開港)을 요구함으로써 조정에서는 다시 러시아의 조차를 취소하고 개항하게 되었다. 이로써 이 사건은 해결되었으나 후일 러일전쟁의 한 원인이 되었다.

아관파천[편집]

俄館播遷

건양 1년(1896) 고종과 태자를 러시아 공사관(露國公使館)으로 옮겨 그곳에서 거처케 한 사실. 을미사변으로 국민의 대일(對日) 감정이 극도로 악화하고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전국이 소란해지자 러시아 공사 베베르는 공사관 보호라는 명목으로 수병(水兵) 백명을 서울로 데려왔다. 이에 친러파인 이범진(李範晋) 등은 베베르와 공모하여 건양 1년(1896)에 국왕을 궁궐로부터 정동(貞洞)에 있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데려갔다. 이와 동시에 친일 내각의 김홍집·어윤중(魚允中) 등은 살해되고, 유길준·조희연(趙羲淵) 등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리고 이범진·이완용 등의 친러내각이 조직되었다. 국왕이 러시아 공사관에 체류하고 있는 1년 동안 모든 정치는 러시아의 수중에 있었으며, 당시 탁지부 고문 알렉세프(Aleckccev)는 사실상 재무장관이나 마찬가지였다. 한편 아관파천 이후 많은 이권이 러시아를 위시한 열강의 손에 넘어가 버렸다.

열강의 이권 획득[편집]

列强-利權獲得

국왕의 아관파천과 친러 정권의 수립으로 러시아는 물론 구미제국도 조선에서의 이권 획득에 골몰했다. 그리하여 건양 1년(1896) 러시아는 함경도 경원(慶源)·종성(鍾城)의 광산 채굴권과 압록강 유역 및 울릉도 재목 채벌권을 획득했으며, 미국은 경인 철도 부설권과 평안도 운산(雲山)의 금광 채굴권을, 프랑스는 경의철도(京義鐵道) 부설권을 각각 획득했다. 광무 1년(1897) 독일은 강원도 당현(堂峴)의 금광 채굴권을 획득했으며, 광무 2년(1898)에 미국은 서울의 전차 부설권을, 일본은 경부철도 부설권을 획득했다. 광무 3년(1899)이 되자 일본은 경인철도 부설권을 미국으로부터 인계받았으며, 광무 4년(1900) 영국은 평안도 은산(殷山)의 금광 채굴권을, 일본은 충청도 직산(稷山)의 금광 채굴권을 각각 획득했다.

이춘영[편집]

李春永 (1869

1896)

조선말의 의병장. 자는 우삼(友三), 호는 괴은(槐隱), 본관은 덕수(德水). 경기도 지평(砥平) 출신. 고종 32년(1895) 민비가 시해(弑害)되자 원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4백여 명을 모집, 단양(丹陽)에서 일본군을 격파했다. 이어 제천(堤川)으로 향하다 관군의 기습을 받아 의병이 해산되자, 유인석(柳麟錫)의 의병 부대에 들어가 중군(中軍)이 되었다. 조령(鳥嶺)·달천(撻川)·안보(安保) 등지에서 관군·일본군의 연합군과 싸운 뒤에 충주에서 전사했다.

자혜의원[편집]

慈惠醫院

1909년(융희 3) 지방에 설치된 군대식 의료원. 제중원(濟衆院:1885), 대한의원(大韓醫院:1905)에 뒤이어 세 번째로 세워진 국립병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