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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근대사회의 태동/사회변화와 대외관계/서양과의 접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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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과의 접촉〔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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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말 인도에 이르는 새 항로가 발견된 이래 서양인의 세력은 동양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이 가장 바라던 것은 무역에 의한 이익으로, 여기에 선구적 역할을 한 것이 포르투갈·에스파냐·네덜란드 등이었다. 이와 함께 천주교의 선교사들에 의한 서양문화가 동양으로 전해졌다. 이러한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여파를 타고 조선에도 그 문화가 전래되었다.서양에 관한 지식과 그 문화가 조선에 들어온 것은 선조 말년에 명에 갔던 사신이 유럽 지도를 가져온 것이 시초였다. 이어 마테오 리치(Matteo Ricci)가 지은 『천주실의(天主實義)』가 전래되어 이것이 일부 식자층의 호기심을 끌었다. 그 뒤 인조 때에는 정두원(鄭斗源)이 명에서 돌아오는 길에 여러 가지 문물을 가져왔으며, 소현세자가 청에 인질로 갔을 때 아담 샬(Adam Schall, 湯若望)과 사귀고 귀국하는 길에 과학 서적과 천주교 서적 등을 가지고 왔다. 그러다가 효종 때에는 김육(金堉) 등이 시헌력을 수입하여 새로운 역법(曆法)이 연구되었다.한편 남쪽 바다를 통한 서양인과의 접촉도 생기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에 왜군을 따라서 야소회(耶蘇會) 선교사 세스페데스(Cespedes)가 온 이후, 인조 때에는 네덜란드 상인 웰테브레가 표착하여 왔다. 그 뒤 효종 때에는 하멜(Hamel) 일행이 표착하여 『난선 제주도 난파기』를 지어 처음으로 한국을 서양에 소개하였다.이 같은 서양문화 및 서양인과의 접촉은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요구하게 되었다. 동양을 세계의 전부로 알던 좁은 의식은 이리하여 점차 변화 확대되었다.

정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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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斗源 (1581

?)

조선의 문신. 호는 호정(壺亭), 본관은 광주(光州). 광해군 8년(1616)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인조 1년(1623) 성천부사(成川府使)가 되었다. 이듬해 관향사(管餉使)로 모문룡(毛文龍)에게 군량을 조달했으며, 정묘호란 때 전향사(轉餉使)가 되어 임진강의 군량수송을 맡았다. 광해군 8년(1630), 진주사(陳奏使)로 명나라에 가서 이듬해 귀국할 때 홍이포(紅夷砲)·천리경(千里鏡)·자명종(自鳴鍾) 등 서양 기계와 『천문서(天文書)』 『직방외기(職方外記)』 『서양풍속기(西洋風俗記)』 등 서적을 가지고 왔다.

시헌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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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憲曆

조선 효종 때부터 사용된 역법. 24절기의 시각과 1일간의 시간을 계산하여 제작한 것이다. 조선 초에는 고려 공민왕 때 명에서 가져온 대통력(大統曆)을 사용하였으며, 세종 때에는 회회력(回回曆)을 만들었으나 대통력과 유사한 것이 많았다. 정두원과 소현세자가 중국에서 귀국할 때 여러 가지 서양문물을 가져오면서 조선에도 역법개정의 기운이 무르익었다. 인조 22년(1644) 관상감 제조(觀象監提調)로 있던 김육이 상소하여 시헌력의 채용을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청에 가서 아담 샬의 가르침을 받고 귀국하는 길에 시헌역법에 관한 서적을 구하여 왔다. 그 후 10여 년 동안 연구를 거듭한 결과 효종 4년(1653) 비로소 시헌력의 시행을 보게 됐다.

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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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淵(燕) (1595

?)

조선 인조 때 귀화한 네덜란드 인.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유럽을 소개했다. 1595년(선조 28)에 북부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1626년(인조 4) 뱃사공(水夫)로 홀란디아(Holandia) 호에 승무하다가 일본에 가려고 1627년에 오우벨켈크(Ouwerkerck)호로 바꿔타고 항해하던 중 제주도에 표착했다. 동료 히스벨츠(Direk Gijsbertz) 및 베어베스트(Jan pierteree Verbaest)와 함께 음료수를 구하러 제주도에 상륙했다가 관헌에게 붙잡혀 서울에 호송되고 훈련도감에서 근무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세 사람은 모두 출전하여 박연을 제외한 두 사람은 전사하였다. 그는 훈련대장 구인후(具人厚)의 지휘를 받아 항복해 온 왜인(倭人)과 포로된 청나라 군인을 통솔 감시했고, 명나라에서 수입한 홍이포(紅夷砲)의 제작법·조종법을 지도했다. 1653년(효종 4)에 하멜(Hamel)이 제주도에 이르렀을 때 파견되어 하멜 등을 서울에 호송하고 하멜이 도감군오(都監軍伍)에 소송되자 이를 감독하는 한편 우리나라의 풍속을 가르쳐주었으며 조선 여자와 결혼하여 남매를 낳았다.

『난선 제주도 난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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蘭船濟州道難破記

조선에 표착한 네덜란드인 하멜(Hendrik Hamel)의 14년 간에 걸친 억류 기록. 부록 『조선국기(朝鮮國記)』와 통칭해서 『하멜 표류기』로 많이 알려졌다. 효종 4년(1653) 네덜란드의 상선(商船)이 일본으로 향하는 도중 풍랑을 만나 제주도 부근에 난파하였다. 선원중 생존한 일행은 제주도에 표착하고 이듬해 서울로 호송되었다. 그 후 현종 7년(1666), 하멜 이하 8명은 야음을 틈타 탈출하여 현종 9년(1668)에 귀국하였다. 이 책은 조선에서의 14년 동안의 억류 기록으로, 부록인 『조선국기』는 조선의 지리·풍토·산물·정치·군사·법속 등에 대하여 실제로 보고 들은 바를 기록한 것이다. 하멜의 이 기록은 유럽인들에게 처음으로 한국을 소개하여 한국에 대한 인식에 많은 기여를 했다. 또한 당시의 사회사정·풍속·생활의 일면을 이양인(異樣人)의 눈으로 투영시킨 것으로 자료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