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근대사회의 태동/사회변화와 대외관계/실학의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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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의 발생[편집]

〔槪說〕

조선 영·정조(英·正祖)시대에 일어난 학풍. 조선 초기의 실학 즉 주자학적 도학(道學)이 초기의 참신한 기운을 잃고 케케묵은 이론을 시종하여 실제와는 아주 동떨어진 학문이 되고 말았다. 이때 사실에 입각한 새로운 비판정신을 불처넣은 것은 당시 청(淸)나라에서 들어온 고증학(考證學)과 서양의 과학적 사고방식이었다. 그 영향을 받은 사람들, 즉 새로 등장한 실학파(實學派)들은 비판의 눈을 우선 퇴폐한 사회·경제·정치로 돌리고 현실의 여러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이상적인 사회와 희망적인 장래를 내다보고자 하였다.실학파의 비조(鼻祖)는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인데 그를 계승한 성호(星湖) 이익(李瀷)과 더불어 실학의 앞길을 닦아 놓았다. 유형원의 『반계수록(磻溪隧錄)』과 이익의 『성호사설(星湖僿說)』은 현실적인 문제들, 즉 정치의 길(道)·지방제도·경제·과거제도·학제(學制)·병제(兵制)·관제 등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그들의 장래에 대한 이상과 구상을 논한 책이다. 이리하여 실학의 계통을 밟은 학자들이 잇달아 나타났으니, 앞에 말한 유형원의 『반계수록(磻溪隧錄)』, 이익의 『성호사설』 외에 정약용(丁若鏞)도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를 지어 현실의 개혁을 부르짖었다.이 실학의 학풍은 역사(歷史) 방면에도 영향을 주어 안정복(安鼎福)의 『동사강목(東史綱目)』 『열조통기(列朝通紀)』, 이긍익(李肯翊)의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한치윤(韓致奫)의 『해동역사(海東繹史)』, 유득공(柳得恭)』의 『냉재집(冷齋集)』 『사군지(四郡志)』 『발해고(渤海考)』 『경도잡지(京都雜志)』,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志)』, 정약용의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 『조선수경(朝鮮水經)』, 신경준(申景濬)의 『강계고(彊界考)』 『도로고(道路考)』 『산수경(山水經)』, 김정호(金正浩)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대동지지(大東地志)』, 권상기(權尙驥)의 『팔도분도(八道分圖)』, 성해응(成海應)의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등이 나왔고 의학·농학에는 김여(金?)의 『우해어보(牛海魚譜)』, 정약전(丁若銓)의 『자산어보(玆山魚譜)』, 정약용(丁若鏞)의 『마과회통(麻科會通)』, 박세당(朴世堂)의 『색경(穡經)』, 서유구의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 등이 있었다. 또 언어학(言語學), 분야에는 신경준(申景濬)의 『훈민정음운해(訓民正音韻解)』 유희의 『언문지(諺文志)』, 황윤석(黃胤錫)의 『이재집?齋集)』 등이 나왔다.실학파 중에서, 청나라에 들어가 그 우수한 문화를 직접 보고 청나라(淸朝)의 문물(文物)을 수입하자고 주장한 사람들이 나타났는데 이들을 북학파(北學派)라고 불렀다. 북학파로는 박제가(朴齊家)의 『북학의(北學議)』, 홍대용(洪大容)의 『담헌집(湛軒集)』, 이덕무(李德懋)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박지원(朴趾源)의 『연암집(燕岩集)』, 홍양호(洪良湖)의 『이계집(耳溪集)』 등이 있었다. 실학의 풍조는 영조·정조 두 임금이 학문 보호정책으로 한때 융성하였으나 그 담당자들은 어디까지나 봉건적인 테두리 속에서 성리학적인 가치관을 청산하지 못하였고 한말(韓末)부터 밀려들어온 서양문화에 압도당하고 말았다.

실학의 발전과 사상[편집]

실학은 실사구시지학(實事求是之學)이란 말의 요약으로 실제적인 사물에서 진리를 찾아낸다는 뜻이다. 즉 종래의 공리공담(空理空談)이 주로 된 도학(道學)과 주자학(朱子學)의 관념적 세계에서 벗어나 실제의 세계에서 온갖 민생문제와 사회문제를 참다운 이상과 방법으로서 해결하여 다같이 행복한 생활을 하자는 데 그 뜻이 있으며 이것이 우리나라 실학의 특징인 동시에 이상이었다. 어원(語源)은 『전한서(前漢書)』에 서한(西漢) 경제(景帝)의 아들 헌왕(獻王)이 현실적인 학문을 연구 발전시켰으므로 수학호고(修學好古), 실사구시한다는 데서 나왔다. 그러나 중국에서 실학으로써 학풍(學風)이 세워진 것은 명나라 말기 서구과학(西歐科學)의 전래와 청나라 초기의 고증학풍(考證學風)이 일어나 학문으로서의 체계를 세웠다. 청조 고증학파 실학은 한족(漢族)들이 만주에서 일어난 청에 정복된 민족문화운동 또는 경전재정리(經典再整理)로 청조타파와 한족국가의 재흥을 기도한 민족적 사상과도 합류된다고 볼 수 있다.청조의 실학파 학자들이 경서고증(經書考證)에 치중한데 대하여 우리나라 실학파 학자들은 정치·경제·종교 및 문화 등의 제반제도를 개선하여 임진왜란·병자호란으로 인한 절박한 민생문제와 사회문제를 해결하자는 데 치중하였다. 즉 우리나라의 실학은 서구과학과 청의 농법(農法)·농제(農制)를 토대로 하는 경세(經世)의 학문을 주로 뜻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런 뜻에서 우리나라의 실학은 한국의 르네상스라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실사구시의 학풍 장려를 가장 먼저 주장한 사람은 양득중(梁得中:德村)이다. 그는 1729년(영조 5)에 실사구시의 학이 이상적이며 실제적인 학문임을 왕에게 아뢰어 왕도 ‘실사구시’란 4자를 써서 실내의 벽상에 걸어 놓고 양득중으로 하여금 진강케 하였다 한다.임진왜란을 전후한 우리 국내 사정은 지주(地主) 및 관료층의 착취와 이전부터 상공기술(商工技術)에 대한 천대에 겹쳐 조선 후기 전정(田政)·군정(軍政)·환곡(還穀)의 3정(三政) 문란은 부패한 사회의 개량을 더욱 촉진케 하여 새로운 생활 타개를 위한 구국구폐운동(救國救弊運動)이 개별적 혹은 체계적인 개혁방안(改革方案)과 사회정책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임진왜란·병자호란의 두 난이 있은 뒤 국민들의 곤란한 생활의 타개책으로 관리가 되기 위하여 노력하며, 권리의 유지책으로 드디어는 당쟁을 이용하게 됨에 따라 당쟁의 격심으로 정계에서 물러난 학자들은 임야(林野)에 들어가 역사와 정치·경제 문제를 연구하였으며 국가 재건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의 사회적인 요구가 절실한데서 비로소 실학사상이 움트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더욱이 임진왜란·병자호란의 치명적 타격은 비판정신을 길러 사회생활과 정치의 지도이념으로 되어온 주자학에 대한 비판을 하게 되었고, 지행합일주의(知行合一主義)를 주장하였다.주자학에 대립되는 양명학(陽明學)의 전래에다 청조의 고증학이 영·정조(英正祖) 때에 있어서 하나의 새로운 학풍을 이루어 수신제가(水神齊家)와 치국(治國)의 이상을 올바르게 하기 위하여 현실적으로 절실하게 요구되는 정치를 실현하려는 일종의 혁신운동이 그들 사이에 일어났다.서세동점(暑勢東漸)에 따라 서학(西學)의 중국 유입(流入) 즉 1601년 중국에서 선교사(宣敎師)들에 의하여 북경개교(北京開敎)와 함께 포교(布敎)를 위한 방법으로 『천주실의(天主實義)』 등의 천주교 교리서(敎理書)와 『기하원본(幾何原本)』 등의 서구 과학서를 번역하여 전포(傳布)했으며 천리경(千里鏡)·자명종(自鳴鐘)·지구의(地球儀)·천구의(天球儀)·곤여만국전도(坤與萬國全圖)·서양포(西洋布)·유리기(琉璃器) 등 중국민의 취미에 맞는 서양 기물(器物)을 만들어 중국인의 마음을 사는 데 사용하였다. 이런 것들은 해마다 북경에 내왕하는 우리나라의 사절(使節)들이 호기심을 가져 드디어 우리나라에도 들어오기 시작하여 서학이 천주교와 서구과학을 겸한 두 방면으로 발전하였다. 이는 선조(宣祖) 때에 이수광(李?光:芝峰)에 의하여 우리나라에도 소개되었으며 같은 시대의 대사상가 허균(許筠)과 인조(仁祖) 말기의 소현세자(昭顯世子)에 의하여 발전을 보기 시작하였다. 서학의 종교는 숙종(肅宗) 때의 이익(李瀷:星湖)에게서 크게 이해되어 마침내 그 문하에서 홍유한(洪有漢)·이벽(李蘗)·이승훈(李承勳)·권일신(權日身)·정약종(丁若鍾) 등의 천주교 실천자가 배출됨으로써 서학이 종교로서 발전을 거듭하였다.또한 인조 때의 김육(金堉)·정두원(鄭斗源)·이영준(李榮俊) 등에 의하여 학습이 시작된 서학의 과학면은 이익에 이르러 크게 발전되어 그의 문하에서 홍대용(洪大容:湛軒)·신경준(申景濬:旅庵)·정약용(丁若鏞:茶山)·최한기(崔漢綺:惠崗)·김정호 (金正浩:古山子) 등의 서구 과학의 실제 응용자를 얻음으로써 서학이 과학으로서의 발전은 더욱 활발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그들 사이에 새로운 인생관과 세계관이 수립되었고 다급한 민생문제의 해결을 위한 새로운 방안과 노력이 생기게 되었으니 서학은 우리나라 사상 발생의 일대 요인이 되는 것은 물론 실학 내용의 절반을 형성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우리나라에 실학사상이 발생되던 명말 청초의 중국 문화는 한인(漢人)의 한문화 재건으로부터 오는 고증학적 학풍과 서구 과학의 섭취로써 얻은 이용후생(利用厚生)의 경제정책 또는 산업정책을 내용으로 하는 것인데 소위 북학파(北學派)로 알려저 있는 홍대용·박지원·박제가 등의 신진학자들에 의하여 수입 발전되었다. 이들은 중국의 문물제도를 배워 그대로 사용하자는 것으로 우리나라 실학 성립의 한 초석이 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나라에도 서학(西學:중국에서는 西泰子之學)을 우리나라보다 더 실제생활에 이용해 본 중국 문화의 전래 등으로 인해 완전히 실학사상이 대두하여 명실공히 이용후생의 학문으로서 나타났던 것이다.

실학파[편집]

實學派

조선 중기에 일어난 실학의 일학파. 헛된 이론을 버리고, 사실을 추구하여 실생활에 이용할 수 있는 학문을 주장하였다. 고려말에 중국에서 전하여 온 성리학은 그 사이에 많은 발전을 보았으나 일상생활과는 먼 감이 없지 않았고, 임진(壬辰)·병자(丙子)의 양난을 겪고 난 국민은 때마침 청나라를 통해 들어온 서양문명의 영향을 받아 학계에 큰 변동을 일으켰다. 곧 정치·경제·천문·지리·어학 등에 유형원(柳馨遠)을 비롯하여 이수광·정약용·이덕무·박지원·신경준 등의 학자가 동시에 일어나 실용적인 학문을 주장하였다.

실학파문학[편집]

實學派文學

조선시대에 있어서 유교 이외의 실생활에 유익한 것을 목표로 한 학문을 하는 사람들의 문학. 실학에는 3파, 즉 경세치용학파(經世致用學派)·이용후생학파(利用厚生學派)·실사구시학파(實事求是學派)가 있는데 그 중 이용학파는 물질문화의 향상에 많은 관심을 나타냈다. 그들은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인의 생활양식을 보고 각성한 바가 많아, 문명을 이해하였고, 인간 본능의 긍정(肯定)과 감정의 충족을 요구하였다. 그들의 문학은 당시(唐詩)와 당송고문(唐宋古文)을 모범으로 삼아오던 사대부(士大夫)의 정통(正統)문학의 낡은 색조와는 반대로, 신선한 구상과 평이한 사실적 수법으로 시와 산문(散文)을 창작했으며, 우리나라의 속담이언(俗談俚言)을 자유로이 표현하고 풍자(諷刺)와 해학(諧謔)으로 서민적 정취를 섭취하여 우리나라의 한문학상 새로운 한 유파를 형성하였다. 이 유파의 대표적인 인물이 박지원(朴趾源)이며 이덕무(李德懋)·박제가(朴劑家) 등이 그 뒤를 이었다.

『지봉유설』[편집]

芝峰類說

광해군 6년(1614)에 지봉 이수광이 지은 일종의 백과사전적 저서. 이 책은 한 가지 사실을 체계적으로 논술한 것이 아니라 평소에 느끼고 깨달은 바를 그때 그때 메모했다가 분류 편찬한 것이다. 여기에는 천문·지리·병정(兵政)·관직·유도(儒道)·경서·문학·인물·궁실·복용(服用) 등에 관하여 설명하고 있다. 사실의 설명에 있어서는 되도록 주관적인 견해는 회피하고 고서(古書)나 고문(古聞)에서 널리 참고하고 근거로 삼아 이를 채집, 인용하고 있다. 이 책에 인용된 서목(書目)은 무려 348종이나 되고, 인용된 인명은 2만 1,265명이나 된다.

이수광[편집]

李睟光 (1563 ~ 1628)

조선 후기 실학의 선구자. 호는 지봉(芝峰), 본관은 전주(全州). 선조 18년(1585)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의 관리가 되었고, 동왕 23년(1590) 서장관으로 명에 다녀왔다. 임진왜란 때는 조경(趙儆)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방어전에 참가했다. 이후 동왕 30년(1597)과 광해군 3년(1611)에 각각 명에 가서 서양 제국의 발달한 문명에 대하여 많은 것을 배웠고, 귀국 후에는 대사간·대사헌 등의 언관직(言官職)과 지방 행정직을 맡았다. 인조 3년(1625)에는 만언차자(萬言箚子)를 왕에게 올려 시정(時政)을 비판하였는데, 여기에서도 그의 실학자로서의 면모가 보인다. 동왕 6년(1628), 이조판서로 재직중 병사했다.

한백겸[편집]

韓百謙 (1550

1613)

조선 중기의 학자. 자는 명길(鳴吉), 호는 구암(久庵), 본관은 청주(淸州), 효윤(孝胤)의 아들. 어려서 배움에 힘썼으며, 민순(閔純)에게 『소학』과 『근사록(近思錄)』을 배웠고, 계속하여 의리(義理)에 관한 연구에 힘써 육경논맹(六經論孟)과 염락관민에 이르기까지 정통하였다. 1586년(선조 19) 천거에 의하여 중부참봉(中部參奉)이 되고 곧이어 경기전(慶基殿) 참봉을 역임하였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 모반 때 연좌되어 귀양갔다.임진왜란 때 석방되어 적소에서 적군에게 아부하여 난을 선동한 자들을 참살한 공으로 내자직장(內資直長)이 되었다가 여러 내외직을 거친 다음 호조참의(戶曹參議)가 되었다. 선조가 죽었을 때 대신들은 백겸이 예(禮)에 밟다 하여 빈전(殯殿)의 모든 상례(尙禮)를 맡겼다.

유형원[편집]

柳馨遠 (1622

1673)

조선의 실학파 학자. 자는 덕부(德夫), 호는 반계(磻溪). 본관은 문화(文化). 정랑(正郞) 성민(成民)의 손자, 검열(檢閱) 흠의 아들. 어머니 이(李)씨는 우참찬(右參贊) 지완(志完)의 딸. 2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5세에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7세에 『서경(書經)』의 우공기주(禹貢冀州)편을 읽다가 감탄하기를 마지 않았다. 이원진(李元鎭)·김세렴(金世濂)을 스승르로 섬겨 문장이 크게 이루어져 21세에 『백경사잠(百警四箴)』을 지었으며, 정동직(鄭東稷)과 더불어 『이기사칠(理氣四七)』 『인심도심(人心道心)』 등의 설(說)을 논술하는 등 옛 사람이 발견치 못한 것을 발견한 것이 많았고 주문공(朱文公):朱子) 『가례(家禮)』에 의하여 모든 의례를 행하였다. 진사에 합격하고 1653년(효종 4) 큰 뜻을 품고 전라도 부안에 옮겨 경독(耕讀)하는 한편 저작에 힘쓰고 이상적 세상을 건설하려는 이념에 몰두하다가 사망했다.천성이 청렴 결백하였으며, 민유중(閔維重) 등이 벼슬에 추천하였으나 사양하고 농촌에서 농민을 지도하는 한편 기근(飢饉)을 구제하기 위하여 양곡을 예비케 하고 큰 배 4·5척과 마필(馬匹) 등을 바닷가에 비치하여 구급(救急)의 책을 준비하였으며 이웃 사람과 노복(奴僕)에 이르기까지 극진히 사랑하였다.그는 나라를 부강케 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는 방법으로 첫째 토지 개혁을 실시하여 농민에게 최저기본량(最低基本量)의 경작 농지를 확보케 할 것, 다음에 농병 일치(農兵一致)의 군제(軍制)개혁·부역(賦役)의 균형·국민균등(國民均等)의 세제정리(稅制整理)·국가재정의 확립·농업을 해치지 않는 한도 내에서의 상공업(商工業)의 장려·과거제도를 폐지하고 공거제(貢擧制)의 실시·관아(官衙)의 정비 등을 주장하여 이상 국가의 건설을 실천에 옮기려 하였다. 더욱이 토지 소유가 공정하게 되면 모든 일이 따라 이루어진다고 굳게 주장하였다.그가 10년 동안 저작한 유명한 『반계수록(磻溪隧錄)』 26권에는 그의 사상과 이념, 이상 국가 건설의 구성이 실려 있으며, 1770년(영조 46) 영조의 특명으로 간행되었다. 경제(經濟)의 실학(實學)에 연구가 깊어 당시 이름이 뛰어났다.

『반계수록』[편집]

磻溪隨錄

영조 45년(1769)에 간행된 반계 유형원의 대표적인 저술. 이 책은 그의 만년의 저작으로 그가 지방을 자주 유람하면서 민정을 살피고 특히 우반동(愚磻洞)에서 농민과 더불어 생활하면서 얻어진 제세구민론(濟世救民論)의 집대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편제를 보면, 전제·교선제(敎選制)·임관제·직관제·녹제(祿制)·병제의 6부문과 미완성의 보유(補遺)인 군현제 1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편에서는 고설(攷說)을 붙이고 한국과 중국의 옛 문헌을 인용하면서 그가 주장하는 논설의 이론적 뒷받침으로 삼았다.

윤휴[편집]

尹鐫 (1617

680)

조선 중기의 학자, 남인의 거두. 호는 백호(白湖), 본관은 남원(南原). 재학(才學)과 행의(行誼)로 천거되어 여러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학문 연구에 전심했다. 그는 주자의 학설에 추종하여 이를 묵수하려는 태도를 배격하고, 주자와 대등한 입장에서 유학의 독자적인 경지를 개척하는 데 과감했다. 앞서 현종 11년(1660), 복상문제가 일어나자 허목(許穆)·윤선도(尹善道)와 함께 송시열의 예론(禮論)을 통박하다가 사문난적(斯文亂賊)의 낙인이 찍혔다. 숙종 초에 남인이 득세하자 대사헌·이조판서·좌찬성의 요직을 역임했다. 정계에 등장한 이후 호포법(戶布法)·상평제의 실시와 전정(田政)의 개혁 등을 꾀하였으나 시행되지 않았다. 경신대출척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정계에서 배제되어 사형에 처해졌다.

박세당[편집]

朴世堂 (1629

1703)

조선 중기의 학자·문인. 호는 서계(西溪), 본관은 반남(潘南). 현종 1년(1660) 문과에 급제한 이래 서장관으로 청에 다녀왔다. 숙종 20년(1694)의 갑술환국 이후 승지(承旨)·공조판서·이조판서 등을 역임했으며, 동왕 29년(1703) 『사변록(思辨錄)』을 저술하여 주자학적인 학풍을 비판하고 독자적인 견해를 발표하였다. 이로 인해 이단으로 몰려 관직을 박탈당하고 유배 도중 죽었다. 그는 실학파 학자로 농촌생활에 토대를 둔 박물학의 학풍을 이루었다. 저서로 『사변록(思辨錄)』 『장경(檣經)』 등이 있다.

『산림경제』[편집]

山林經濟

조선 숙종 때의 실학자 홍만선(洪萬選)이 농사요결(農事要訣)을 들어서 지은 책. 이 책은 복거(卜居)·섭생·치농(治農)·치포(治圃)·구급·종수(種樹)·치선(治膳)·구황(救荒)·벽한(酸寒)·벽온(酸瘟)·벽충(酸筮)·양화(養花)·양잠·목양(牧養)·잡방(雜方) 등 15지(志)로 분류되어 있다. 박물지의 성격을 띤 이 책에는 전원생활에 중요한 다방면의 보건위생과 경제면 및 정서생활을 위한 고도의 지식이 수록되어 있다.

호포[편집]

戶布

호(戶)를 단위로 면포(綿布)나 저포(紵布)를 징수하던 세제(稅制). 1296년(고려 충렬왕 22) 6월 당시의 중찬(中贊) 홍자번(洪子藩)의 주장에 따라 처음으로 실시되었다. 이는 잡공(雜貢)을 없애기 위하여 제정된 것인데 서민(庶民)에 한하여 호를 단위로 저포를 징수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태조 때부터 서민의 각호에 대해서 요역(?役) 대신으로 포를 징수하였는데 충청·황해·강원·전라도 등의 민호(民戶)에 부과하였다. 그 액수는 호를 크기에 따라 대·중·소로 나누고 대호는 2필, 중호는 1필, 소호는 반필을 납부하도록 규정하였으나 오래 실시되지 않고 저화법(楮貨法)의 제정에 따라 일단 폐지되었다가 그 후 숙종 때부터 이 문제가 다시 논의되어 고종 때 실시되었다.조선의 병제(兵制)는 국민개병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보포(保布)·양역(良役) 등으로 이를 대치시키는 제도가 있었다. 이는 재정의 확보를 위한 조치의 하나였는데 백성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것을 기피하고, 한편 이를 부담하는 자는 많은 부담액에 고통을 받게 되었다.이에 대신하는 재원획득(財源獲得)의 적당한 방안이 없었다. 이리하여 결포(結布:토지에 대해서 포를 징수하는 것)·구전(口錢:인구에 대해서 돈을 징수하는 것) 등의 대책이 논의되었으나 실시되지 않고 그 가장 유력한 방도로 대두한 것이 호포였다. 즉 호는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정(丁) 20구(口) 이상을 상호(上戶), 10구 이상을 중호, 10구 이하를 하호로 구분하고 등급에 따라 포 3

1필을 징수하였다.그러나 이 방법은 그 자체에 단점이 생기고 또한 서민에게만 이행되는 폐단이 생겨 채용되지 않다가 대원군(大院君)이 집권하자 그의 강력한 명령으로 실시되었다.즉 양반은 노비의 이름으로, 서민은 군역(軍役)을 대신으로 포를 바치게 하였으며, 그 후 포를 전(錢)으로 대치, 매호 2냥(兩)으로 하였다.

김만중[편집]

金萬重 (1637

1692)

조선의 문신·소설가. 호는 서포(西浦), 본관은 광산(光山). 현종 6년(1665), 문과에 급제한 이래 정언(正言)·지평(持平)·동부승지 등을 역임했으나, 동왕 15년(1674)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로 관직을 삭탈당했다가 재등용되었다. 이후 예조 참의·대사헌·홍문관 대제학 등을 역임했으나 숙종 12년(1686) 김수항(金壽恒)의 처벌이 부당하다고 상소하여 선천(宣川)에 유배되었다. 동왕 15년(1689) 다시 남해(南海)에 유배되어 여기서 『구운몽(九雲夢)』을 집필한 후 병사했다.이 소설은 전문을 한글로 집필하여 서민문학의 선구적인 위치를 차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