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근대사회의 태동/종교의 새 기운/19세기 전반의 개혁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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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전반의 개혁사상[편집]

-全般-改革思想

19세기 전반 세도정치의 모순을 시정하려는 개혁사상가들이 반(反)세도 지식인들 사이에 나타났다. 이들은 세도정치의 실무관료로 참여하기도 하였으나 마침내 세도가들에 의해 밀려나 서울 부근의 농촌에 은거하면서 학문을 연구하고 농촌현실을 목도하여 새로운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홍석주(洪奭周)·서유구(徐有?)·성해응(成海應)·정약용(丁若鏞)·최한기(崔漢綺)·이규경(李圭景) 같은 인사들이 그러하다. 유교정치의 도덕성을 회복하면서 시대의 흐름을 따라 부강한 산업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데 목표를 두었다.홍석주는 서울 노론의 후예였으나 세도정권의 편협한 인사정책과 가혹한 수탈을 반대하고 정조가 추구했던 이상적 유교정치로 돌아갈 것을 촉구했다. 이러한 시각에서 그는 성리학(宋學)을 일차적으로 중요시하면서도 한나라 훈고학의 장점을 흡수하여 이른바 한·송(漢宋) 절충의 새로운 학문체계를 세웠다. 그의 문집으로는 『연천집(淵泉集)』이 전한다. 서울 소론으로서 북학파의 한 사람이던 서유구는 서울 주변의 농촌에 거주하면서 『임원경제지』(113권)를 써서 경영방법의 개선과 기술혁신을 통한 농업 생산력 제고, 농촌의 의료 및 문화생활을 높일 것에 대한 일대 개혁안을 제시했다. 다시 말해 도시발전에 치중했던 북학사항을 농촌발전에 응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그는 『의상경제책(擬上經濟策)』(1820년경)을 써서 전국 주요지역에 국가시범 농장인 둔전(屯田)을 설치하여 혁신적 농법과 경영방법으로 수익을 올려서 국가재정을 보충하고, 부민(富民)들의 참여를 유도하여 유능한 자를 지방관으로 발탁할 것을 제한하였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정조가 화성에 시범농장인 대유둔전(大有屯田)을 설치 운영한 것에서 큰 암시를 받은 것이었다. 정조 때 유득공·박제가·이덕무와 더불어 규장각 검서관이었던 성해응은 세도정치기에 포천으로 귀향하여(1815) 저술에 몰두한 결과 160권의 방대한 『연경재집(硏經齋集)』을 남겼다. 그는 청나라가 강희·건륭의 전성기를 넘어서서 점차 쇠락의 길로 접어들고 있는 것을 간파하고 서북지방 경비를 강화하여 청의 침략에 대비하며, 나아가 청(淸)을 공격하여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고, 명(明)에 대한 의리를 실천할 구체적 방안을 제시했다.한편 국내정치에 있어서는 중앙의 세도가를 정점으로 하여 지방의 감사·수령·서리·부민(富民)으로 이어지는 중층적 수탈구조를 개혁하고 부민(富民)들이 참여하는 지방자치의 활성화를 주장하였다. 성해응의 개혁안은 기본적으로 성리학에 토대를 둔 것이었지만 한대 학자들의 경전연구(한학·漢學)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이를 절충하는 이른바 한송(漢宋) 절충의 경학체계를 세웠다. 그리고 자질구레한 것을 깊이 고증하는 청대의 고증학은 현실개혁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으로 배격했다. 정조의 사랑을 크게 받았던 남인학자 정약용은 천주교에 관여한 것이 문제가 되어 1801년 고향인 경기도 양주군 마현(지금의 양수리)으로 돌아와 『경세유표(經世遺表)』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 등의 명저를 남겼다. 그의 학문은 이익 등 선배 남인학자의 실학(고증)을 계승하면서도 이용후생을 강조하는 북학사상의 영향을 함께 받아 19세기 전반기의 학자로서는 가장 포괄적이고 진보적인 개혁안을 내놓았다. 먼저 『경세유표』에서 『주례』에 나타난 주(周)나라 제도를 모범으로 하여 중앙과 지방의 정치제도를 개혁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에 의하면 정치적 실권을 군주에게 몰아주고, 군주가 수령을 매개로 백성을 직접 다스리도록 하되, 백성의 자주권을 최대로 보장하여 아랫사람이 통치자를 추대하는 형식에 의해서 권력이 짜여져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중앙의 행정기구인 6조의 기능을 평등하게 재조정하고 이용감(利用監)을 새로 설치하여 과학·기술의 발전 등 북학(北學)을 수행할 수 있도록 바꾸며, 지방의 부유한 농민들에게 향촌사회에서 공헌도에 따라 관직을 주어야 한다고 하였다.정약용은 국가재정과 농촌경제의 안정을 위해 정전제도(井田制度)를 우리나라 현실에 맞게 시행할 것을 주장하였다. 즉 국가가 장기적으로 토지를 사들여 가난한 농민에게 나누어 주어 자영농을 육성하고, 아직 국가가 사들이지 못한 지주의 토지는 농민에게 골고루 병작권을 주자는 것이었다. 정약용은 자신의 개혁사항을 학문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유교경전을 깊이 연구하면서 홍석주·신작(申綽) 등 학자들과 토론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의 저술은 500여 권에 달하는데,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속에 수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19세기 중엽에는 중인층에서도 뛰어난 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개성 출신으로서 서울에 살면서 북학사상을 발전시킨 이가 바로 최한기이다. 무관(武官) 집안에서 태어나 개성과 서울의 상업문화와 부민(富民)들의 성장을 목격한 그는 부민들이 주도하는 상공업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여러 개혁안을 제시하였으며, 외국과의 개국통상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그는 또한 뉴턴의 만유인력설을 비롯한 천문학·지리학·의학·농학 등 서양과학과 기술에도 조예가 깊어 앞선 시기의 학자들보다 한층 깊이 있는 과학지식을 소개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주기적(主氣的) 경험철학을 발전시켰다. 1천권에 달하는 방대한 그의 저서는 현재 『명남루총서(明南樓叢書)』로 전해지고 있다.최한기와 비슷한 시기의 이규경도 『오주연문장전산고』(60권)라는 방대한 문화백과사전을 편찬하여 중국과 우리나라 고금의 사물 1,417항을 고증적 방법으로 소개하였다. 북학사상가인 이덕무의 손자로서 가학의 전통을 계승한 그는 동양의 전통사상인 유교·불교·도교를 넓게 포용하려는 자세와 아울러 서양과학을 실용적 학문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동서양의 문명을 형이상과 형이하의 체계 속에 통합시키려고 노력하였다. 말하자면 동도서기(東道西器)와 법고창신의 개혁사상이라 할 수 있다. 오주(五洲)라는 그의 호는 전세계 5대주(大洲)를 포용하려는 넓은 시야가 담겨져 있다. 경직된 세도정치하에서 이들의 진보적 개혁사상은 정부시책으로 적극 수용되지 못하고 말았으나, 뒷날 개화사상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어 자주적 근대화 정책의 토대를 쌓았다.

국학의 발달[편집]

國學-發達

세도정치기의 불우했던 개혁사상가들 가운데에는 18세기의 역사의식을 계승하면서 이를 한층 학문적으로 심화시킨 역사가들이 적지 않았다. 정약용·한치윤·홍석주·홍경모·윤정기가 그러한 이들이다.정약용은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1811, 1833)를 써서 우리나라 고대사의 강역을 새롭게 고증했다. 특히 백제의 첫 도읍지가 지금의 서울이라는 것과 발해의 중심지가 백두산 동쪽이라는 것을 해명한 것은 탁월한 견해로서, 그의 지리고증은 대부분 지금까지도 통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서울 남인학자인 한치윤(韓致奫)은 일평생 역사편찬에 몰두하여 조카 한진서(韓鎭書)와 합작으로 85권의 방대한 『해동역사(海東繹史)』(1814, 1823)를 편찬했다. 540여 종의 중국 및 일본 서적을 참고하여 쓴 이 책은 동이문화(東夷文化)에 뿌리를 둔 우리나라 문화의 선진성과 아울러 우리나라와 중국 및 일본과의 문화교류가 상세히 정리되어 있어 자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높다. 특히 한진서가 쓴 『지리고』는 정약용의 『아방강역고』와 더불어 역사지리 고증의 높은 수준을 보여준다. 홍석주는 삼국과 발해의 강역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동사세가(東史世家)』를 쓰고, 또 우리가 중국인보다 더 정확한 중국사를 쓸 수 있다는 자신감에 『명사관견(明史管見)』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역사책을 썼다. 중국인이 쓴 중국사에 잘못이 많아 이를 바로 잡으려는 노력은 정조 때에 송사(宋史)의 잘못을 바로 잡은 『송사전』의 편찬으로도 나타났는데, 이는 조선 후기 학자들의 문화적 자신감에서 나온 것이다.홍석주의 친족인 홍경모(洪敬謨)는 정약용과 한치윤 등 선배학자들의 문헌고증방법을 계승하여 우리나라 상고사의 여러 의문점을 하나하나 고증했는데, 『동사변의(東史辯疑)』(1868)를 써서 고증적 역사 서술의 전통이 이어졌다.19세기의 과학적이고 고증적인 학풍은 지리지 편찬과 지도에도 나타나 앞 시기보다 한층 정밀하고 규모가 큰 지도·지리지가 제작되었다.이 시기의 가장 뛰어난 지리·지도 연구자는 김정호(金政浩, 吉仙子)이다. 그는 황해도의 평민 출신으로 서울에 살면서 신헌(申櫶)·최한기 등의 도움을 얻어 여러 관찬지도를 보고, 이를 집대성하여 『청구도(靑丘圖)』라는 지도책을 발간하고, 이를 더욱 발전시켜서 23폭으로 이루어진 약 7미터 길이의 전국지도인 「동여도」와 「대동여지도」를 제작하였다. 전자는 필사본 채색지도이고, 후자는 목판으로 찍어내어 대중들에게 널리 보급되었다.

문학과 예술[편집]

文學-藝術

19세기에는 상품화폐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서민사회가 성장하면서 세도정치에 소외된 양반·중인층 사이에서 새로운 문학풍조가 나타났다. 흔히 위항인(委巷人)으로 불리는 중인, 서얼층의 문인들이 시사(詩社)라는 인왕산 기슭의 송석원(松石園)을 중심으로 한 옥계시사(玉溪詩社)와 일섭원(日涉園) 및 칠송정(七松亭)을 중심으로 한 서원시사(西園詩社), 비연시사(斐然詩社), 그리고 직하시사(稷下詩社)를 들 수 있다. 이들 시사의 중심인물은 역관(譯官)을 비롯한 서울 중인들이었지만, 명망높은 서울 양반들과도 긴밀하게 교류할 만큼 한문학의 수준이 높았다. 그리고 이들이 서울의 명승지에 모여들어 시주(詩酒)를 즐길 수 있었던 것은 대외무역을 통해서 안정된 생활을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경제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양반과 거의 동등한 수준으로 성장하였다. 당시 중인(中人)문학의 대표적 인물은 장지완(張之琬)·정수동(鄭壽銅)·조희룡(趙熙龍)·이경민(李慶民)·박윤묵(朴允默)·조수삼(趙秀三) 등이다.그리고 문학작품이 판소리와 잡가, 소설과 가면극의 형태로 나타난 것도 이 시대 문학의 주요 특징이다. 판소리는 광대들이 소설의 줄거리를 아니리(獨白)와 타령(唱)을 섞어가며 전달하는 것인데, 「춘향가」 「적벽가」 「심청가」 「토끼타령」 「흥부가」 「가루지기타령」은 가장 인기있는 판소리 사설이었다. 판소리 사설을 창작하고 정리하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은 19세기 후반의 전라도 고창 사람 신재효(申在孝)로서, 그는 판소리 12마당을 정리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11마당만 전한다. 그러나 판소리는 지방마다 창법이 달라 서편제·동편제의 구별이 있었다.해학과 풍자성이 강한 잡가는 주로 도시 평민 사이에서 유행했는데, 「새타령」 「육자배기」 「사랑가」 「수심가」 등이 있다.각종 가면을 쓰고 노래와 춤으로 엮어지는 가면극(탈춤)은 19세기에 이르러 더욱 정리되고 성행되었는데, 황해도 「봉산탈춤」「강령탈춤」, 안동의 「하회탈춤」, 양주의 「산대놀이」, 통영의 「오광대놀이」, 함경도 북청의 「사자춤」이 유명하다. 탈춤은 무당의 굿판과 연계되어 뒷풀이로 벌어지는 것이 관례로서, 내용은 귀신을 축복하고 양반사회를 풍자하는 것이 중심을 이루었다.19세기에는 이야기책으로 불리는 대중소설이 유행하여 민간부녀자 사이에 널리 인기를 끌었다. 이 시기에 유행한 국문소설(이야기책)로서는 『옥루몽(玉樓夢)』 『배비장전(裵裨將傳)』 『채봉감별곡』 등이 유명하며, 특히 19세기 중엽에 필사된 『완월회맹연』(玩月會盟宴)은 180권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으로 효제충신의 내용을 담은 것이다. 또한 농촌의 세시풍속을 노래한 「농가월령 가」, 서울의 아름다움과 번영을 노래한 「한양가」, 중국의 사행(使行)을 노래한 「연행가」, 그리고 「규방가사」도 널리 불려졌다. 이 밖에 꼭두각시극과 같은 인형극이 유행한 것도 이 시기의 한 특색이다. 사당패로 불리는 천민 음악가들이 엄격한 조직체를 유지하면서 각종 묘기와 사물놀이의 음악활동을 벌인 것도 새로운 변화이다.19세기의 그림은 서울의 도시적 번영과 서울 양반들의 귀족적 취향을 반영하여 화려하고 세련된 모습으로 발전하였다. 우선, 서울의 여러 궁궐과 도시의 번영을 그린 대작(大作)들이 많이 제작되었다.그 중에서도 1820년대에 100여 명의 화가들이 집단적으로 창덕궁과 창경궁의 전모를 그려낸 「동궐도」는 가장 우수한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가로 567센티미터, 세로 273센티미터의 초대형 그림을 16폭으로 나누어 그린 이 작품은 기록화로서의 정확성과 정밀성이 뛰어날 뿐 아니라 배경산수의 묘사가 극히 예술적이어서 현재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이 그림은 18세기 궁궐도에서 보이던 서양화의 기법이 한층 적극적으로 도입되어 마치 비행기에서 비스듬히 내려다보는 듯한 부감법과 평행사선(平行斜線) 구도의 기법을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말하자면 전통적 기법의 서양화 기법이 합쳐져서 새로운 형태의 민족화법이 창조된 것이다.「동궐도」와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병풍그림 「경기감영도」 역시 그 규모와 그림 수준에 있어서 걸작으로 꼽힌다. 특히 이 그림은 거리의 행인들 모습까지 함께 묘사하고 기록화와 풍속화를 합한 성격을 지닌다. 이와 비슷한 성격의 대형 병풍그림으로 「평양성 도」가 있다. 경희궁의 모습을 대형 화폭으로 담아낸 「서궐도」는 묵화로 된 점이 위의 여러 그림과 다르나, 부감법과 평행사선구도를 사용한 것은 똑같다. 이 그림들은 회화사적으로 가치가 클 뿐 아니라, 오늘날 파괴된 옛 궁궐을 복원하는 데 기본적인 참고자료가 되고 있다.19세기의 대표적 화가로는 김득신(金得臣)·이인문(李寅文)·장준량(張俊良)·이재관(李在寬)·김수철(金秀哲)·장승업(張承業)·이윤민(李潤民)·이의양(李義養)·강희언(姜熙彦)·허련(許鍊)·안중식(安中植) 등이 유명하다. 문인화가로는 전기(田琦)·김정희(金正喜)·신위(申緯) 등이 뛰어났는데, 특히 신위는 대나무를, 김정희는 난초그림(묵란)에 이름이 높았고, 「세한도(歲寒圖)」라는 걸작을 남겼다. 김정희는 그림도 잘 하였지만, 그보다 ‘추사체(秋史體)’로 불리는 독특한 서법을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이는 금석문(金石文)연구에 바탕을 두고 고대의 금석문에서 서도의 원류를 찾아 그것을 자기 개성에 맞게 발전시킨 것이다. 김정희보다 앞서 이광사(李匡師, 圓嶠)는 서예에 일가를 이루었는데, 일반대중에게는 김정희보다 더 큰 영향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