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중세사회의 발전/귀족사회와 무인정권/귀족사회의 동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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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사회의 동요[편집]

「槪說〕

귀족 세력의 대두는 필연적으로 그들 상호간의 항쟁을 조성하였다. 그러한 항쟁은 수차에 걸친 반란의 형태를 띠고 나타나게 되었다. 귀족 문화의 극성기라고도 할 수 있는 인종(仁宗)·의종(毅宗) 때에 연달아 일어난 반란은 인주(仁州) 이씨 세력의 절정을 이룬 이자겸(李資謙)에 의하여 발단되었다.왕실과 중복된 혼인관계를 맺고 있던 이자겸은 예종이 죽자 인종을 옹립하여 높은 벼슬과 광대한 토지를 차지하였다. 권력과 재산이 왕보다 더한 그는 내외의 요직에 일족을 앉히고 반대 세력을 거세시켜 권세를 독차지했다.이자겸의 횡포를 증오한 인종은 동왕 5년(1126) 김찬(金粲)·안보린(安甫麟)·최탁(崔卓)·오탁(吳卓) 등과 밀의, 그의 일파를 제거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교만해진 이자겸은 18자(十八字)가 왕이 되리라는 참설(讖說)을 믿고, 인종을 폐하고 스스로 왕이 되려는 야심을 품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척준경(拓俊京)의 군사행동으로 왕을 금족(禁足)시키고 측근의 여러 신하들에게 해를 입혔다. 그러다가 뒤에는 도리어 일당인 척준경과의 불화로 실각되고, 이자겸을 몰아낸 척준경마저도 정지상(鄭知常)의 탄핵으로 제거되니 귀족의 발호는 일단 진압되었다.왕권의 쇠미와 귀족 세력의 강대로 빚어진 이자겸의 난이 진압되자 인종은 왕권 부흥을 위해 정치 개혁을 꾀했다. 이때 이자겸 일파, 즉 개경 귀족 세력의 제거에 앞장섰던 묘청(妙淸)·백수한(白壽翰)·정지상(鄭知常) 등 서경인들은 이러한 내외 정세를 이용하여 서경 천도를 앞세워 정권 장악을 계획했다.서경은 고려초부터 북진정책과 관련하였으며, 또 개경 귀족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도 중요시되었다. 그리하여 일찍이 태조 때부터 서경에서는 분사제도(分司制度)가 실시되기도 하였다.서경의 발전과 함께 묘청 일파는 정권 탈취를 위해 당세를 풍미하던 풍수지리설을 이용하여 서경천도운동(西京遷都運動)을 벌였다. 이들은 또 칭제건원론(稱帝建元論)을 제거하고 금을 정벌할 것을 주장했다.그러나 개경을 세력 기반으로 하며 전통을 존중하는 유학파·사대파들은 묘청 일파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묘청 일파는 서경을 근거로 개경에 대하여 반기(叛旗)를 들었다. 인종 13년(1135) 정월 그들은 유참·조광 등과 더불어 군사를 일으키고, 나라를 세워 국호를 대위(大爲), 연호를 천개(天開), 그 군대를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라 칭하였다.조정에서는 묘청 반대파의 두령(頭領) 김부식(金富軾)에게 서경 정토(征討)의 명령을 내렸다. 김부식은 출정에 앞서 정지상·백수환 등을 죽이고 북상하여 평양성을 포위했다. 조광(趙匡)은 정세의 불리함을 깨닫고, 묘청·유참 등을 목베어 귀부(歸附)의 뜻을 표했으나 거절된 후 끝까지 반항하였다.인종 14년(1136) 2월 평양성이 함락되어 난은 1년 만에 평정되었다. 이로써 서경 세력의 정권 장악의 꿈은 수포로 돌아갔던 것이다.

이자겸[편집]

李資謙 (?

1126)

고려 인종 때 척신(戚臣). 자연(子淵)의 손자. 둘째 딸을 16대 예종(睿宗)의 비(妃)로 보내고 익성공신(瀷聖功臣)이 되고 동덕추성좌리공신 소성군개국백(同德推聖佐理功臣邵城郡開國伯)이 되었다.왕이 죽자 외손자인 태자 인종(仁宗)을 옹립하고 권세를 잡아 셋째 딸·넷째 딸을 인종에게 바쳤다. 이렇게 위세가 커지자 자기 일파를 내외요직에다 쓰고 대권을 잡아 국왕 이상의 권세와 부귀를 누리던 중 ‘십팔자(十八子〓李)가 임금이 되리라’는 참위설을 믿어 왕위를 찬탈까지 하려 들자 이 기미를 알아챈 왕은 김찬(金粲)·안보린(安甫麟) 등과 거사하여 이자겸 일당을 제거하려다가 이자겸파인 척준경(拓俊京)의 반격으로 실패, 자겸은 왕을 자기집으로 옮겨 모시고 독살까지 하려 들며 전횡하였다.그 후 자겸의 인척(姻戚)인 척준경은 이자겸과 반목이 생기고 전날의 과오를 뉘우쳐 왕의 밀지(密旨)를 받들고 김향(金珦)·이공수(李公壽)와 더불어 거사, 이자겸과 그의 처자를 잡아 영광(靈光)에 귀양보내고 여당도 멀리 귀양보냈으며 이자겸 소생의 왕비도 폐위시켰다. 자겸은 적지 영광에서 죽었다.

척준경[편집]

拓俊京 (?

1144)

고려 인종 때의 재상. 곡주(谷州:谷山) 출신.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 위공(謂恭)의 아들. 어려서 집이 가난하여 학문을 배우지 못하고 무뢰배(無瀨輩)들과 교유하여 서리(胥吏)를 원했으나 되지 못했다.뒤에 계림공(鷄林公:숙종)의 부(府)에 들어가 종자(從者)로 되었다가 추밀원별가(樞密院別駕)로 임명되었다. 1104년(숙종 9) 평장사(平章事) 임간(林幹)을 따라 동여진(東女眞) 정벌에 나가 공을 세워 천우위록사참군사(千牛衛錄事參軍事)가 되었고 다시 1107년(예종 2)에 중군병마록사(中軍兵馬錄事)로 윤관(尹瓘)을 따라 동여진을 정벌할 때 석성(石城)·영주(英州) 싸움에서 대승하였고 또 길주(吉州) 싸움에서 큰 공을 세워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이 되었다.이어 위위경직문하성(衛慰卿直門下省)에 임명되고 인종 초에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올라 참지정사(參知政事)를 거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다. 1126년(인종 4) 2월 이자겸(李資謙)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대궐을 범했으나 왕의 권유로 뜻을 바꿔 자겸을 잡아 귀양보내고 그 공으로 위사 공신(衛士功臣)이 호를 받고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뒤에 정언(正言) 정지상(鄭知常)이 범궐(犯闕) 사실을 탄핵하여 암타도(巖墮島)에 귀양, 이듬해 곡주(谷州)에 이배(移配)되었다. 1144년(인종 22) 다시 조봉대부(朝奉大夫)·검교(檢校)·호부상서(戶部尙書)를 받게 되었으나 얼마 뒤 곡주에서 병사하였다.

인종[편집]

仁宗 (1109

1146)

고려 제17대 왕. 재위 1123

1146년. 휘는 해(楷), 자는 인표(仁表), 시호는 공효(恭孝). 예종의 맏아들. 어머니는 순덕왕후(順德王后) 이(李)씨. 1115년(예종 10)에 태자로 책봉. 예종이 죽은 뒤 나이가 어린 것이 염려되었으나 평장사 이자겸(李資謙)의 옹립(擁立)으로 즉위하였다.1126년(인조왕 4) 이자겸이 궐내에 침입하여 궁실을 방화하여 왕은 남궁(南宮)에 파천(播遷)하였으나 최사전(崔思全)·척준경(拓俊京) 등으로 하여금 이자겸을 잡아 원지에 귀양보내고 이듬해 척준경도 원지에 귀양갔다.묘청(妙淸)의 서경(西京)천도와 칭제건원론(稱帝建元論)·금국정벌론(金國征伐論)에 찬성하여 한때 서경천도를 하려 하였으나 김부식(金副植) 등의 반대로 중지하였다.1135년(동왕 13) 묘청의 반란이 일어나자 김부식을 서경정토대장(西京征討大將)으로 보내어 이듬해 평정하였다. 태자(太子)에게 왕위를 물리고 병으로 죽었다. 어려서부터 재예(才藝)가 있어 음률과 서화에도 능하였으며, 국가재정을 절약하여 환관(宦官)들을 감축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으며, 문운(文運)을 일으키고 김부식 등에 명하여 『삼국사기(三國史記)』를 편찬하게 하였다. 능은 장릉(長陵)이다.

정지상[편집]

鄭知常 (?

1135)

고려 인종 때의 문신. 초명은 지원(之元). 호는 남호(南湖). 1112년(예종 7) 급제하여 벼슬은 정언(正言)·사간(司諫)을 지내고, 인종 때 기거주(起居注)에 이르렀다.역신 이자겸(李資謙)을 축출한 척준경(拓俊京)이 그 공을 믿고 발호하자 정지상은 왕에게 상소하여 척춘경과 그의 동조자들을 유배시켰다. 묘청(妙淸)일파에 가담하여 한때 묘청·백수한(白壽翰) 등과 함께 삼성(三聖)이라는 칭호를 받으면서 서울을 서경(西京:평양)에 옮길 것과 북쪽의 금나라를 정벌하고 고려왕도 황제로 칭할 것을 주장하였는데, 후에 묘청의 난이 일자 이에 관여하였다는 혐의로 김안(金安)·백수한과 함께 김부식(金副植)에게 참살되었다.특히 시(詩)에 뛰어나 고려 12시인 중의 한 사람으로 꼽혔으며 왕명에 따라 곽여(郭與):東山居士)의 『산재기(山齋記)』를 지었고 노장철학(老莊哲學)을 숭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분사제도[편집]

分司制度

서경(西京, 평양)을 부도(副都)로 생각한 고려에서 개경의 관아(官衙)를 서경에도 나누어 설치한 제도. 이 제도는 태조 때부터 시작하여 예종 11년(1116)에 완성된 것으로, 서경에는 낭관(廊官)·아관(衙官) 등을 두었다.그 뒤 직제(職制)와 관명(官名)에 다소 변천이 있었으나, 예종 11년(1116) 동서 양반(東西兩班)의 정사(政事)를 개경과 같이한 데서 그 완성을 보았다. 이 제도는 정치기구에 있어 중앙과 반분립(半分立)의 독특한 지위를 부여한 것이다.

묘청[편집]

妙淸 (?

1135)

고려 인종(仁宗) 때의 중. 일명 정심(淨心), 서경(西京:평양) 출신. 1128년(인종 6)에 백수한(白壽翰)이 검교소감(檢校少監)으로 서경에 파견되자 묘청을 스승이라 하고, 두 사람은 음양비술(陰陽秘術)을 사용하면서 백성들을 현혹시켰다.서경 출신 정지상(鄭知常)도 이에 깊이 현혹되어 내시랑중(內侍郞中) 김안(金安)과 모의, 근신(近臣) 홍이서(洪彛敍)·이중부(李仲孚) 및 대신(大臣) 문공인(文公仁)·임경청(林景淸) 등의 찬동을 얻어, 왕에게 ‘묘청은 성인(聖人)이다. 그에게 국사를 일일이 물어본 후 처리하면 반드시 국태민안하리라’ 하면서 여러 벼슬아치들에게 서명을 받아, 왕도 승낙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묘청 등은 왕께 진언하여 서경에 궁궐을 짓기 시작해서 1129년(인종 7)에 신궁이 낙성되었다.1131년(인종 9)에는 왕을 설복시켜 새 궁궐에 팔성당(八聖堂)을 신축, 보살(菩薩)·석가·부동(不動) 등 8개의 상(像)을 그려서 안치시켰다. 이듬해 1132년 왕은 이자겸(李資謙)의 난으로 불타버린 채 있던 개경의 궁궐을 영수(營修)함에 있어 묘청과 그 일파들에게 궁터를 보게 하니, 묘청은 서경 천도를 목적으로 개경의 궁터가 서경의 그것보다 못하다고 역설하여 드디어 공사는 중지되고 왕은 묘청의 인도를 받으며 서경에 내려가 천도를 결정지으려 했으나, 이지저(李之底)의 간언으로 중지되었다. 1135년(인종 13) 드디어 묘청은 분사시랑(分司侍郞) 조광(趙匡)·병부상서 유담·사재소경(司宰小卿) 조창언(趙昌言)·안중영(安仲榮) 등과 같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군사를 보내어 절령(?嶺) 길을 차단, 국호를 대위(大爲), 연호를 천개(天開)라 하여 스스로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라 칭하고 곧장 개경으로 쳐들어가려고 하였다. 이때 왕은 김부식을 원수로 하여 삼군을 이끌고 가서 이를 토멸케 하였다. 묘청은 부하 조광에게 피살되었다.

묘청의 난[편집]

妙淸-亂

1135년(인종 13) 묘청이 서경(西京:평양)에서 일으킨 반란. 묘청 일파의 서경천도운동(西京遷都運動)에 대한 김부식 등 개경 유교(儒敎) 세력의 반대 및 이 세력에 굴한 왕의 천도(遷都) 중지 결정 등으로 인한 묘청 일파와 개경 왕실과의 관계의 파탄에 기인한다.1135년(인종 13) 정월 묘청은 서경의 분사시랑(分司侍郞) 조광(趙匡) ·동병부상서(兵部尙書) 유담 등과 더불어 반기를 들고 곧 부유수(副留守) 이하 중앙정부에서 파견된 관리들을 비롯하여 상경인(上京人)으로서 서경에 있는 사람을 귀천(貴賤)·승속(僧俗)을 막론하고 모두 잡아가두는 동시에 자비령(慈悲嶺:황해도) 이북의 길을 막고, 서북 여러 고을의 군대를 전부 서경으로 집결시킨 후, 국호를 대위(大爲), 연호를 천개(天開)라 선포하였다.그리고 그 군대를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라 하는 한편 모든 관청의 관리들은 주군수(州郡守)에 이르기까지 서북인(西北人)만으로 채운 다음, 앞으로 개경(開京:開城)에 진격할 뜻을 밝혔다. 김부식이 평서원수(平西元帥)로 임명되자 그는 출정에 앞서 묘청의 일파인 백수한(白壽翰)·정지상(鄭之常)·김안(金安) 등 3명의 목을 베고, 좌·우·중 3군을 지휘하여 평산역(平山驛)·관산역(官山驛:新溪)·사암역(射巖驛:逐安)을 거쳐 성천(成川)에 이르렀다.여기서 그는 토적(討賊)의 격문(檄文)을 발하여 서경 주위의 여러 성(城)을 산하에 끌여들여서 이들을 달래었다. 김부식의 관군이 연천(連川:价川)을 거쳐 안북대도호부(安北大都護府:安州)에 이르는 동안 도중의 성들은 그 기세에 눌려 모두 관군을 환영하였다.김부식은 이 동안 7, 8차나 서경에 사람을 보내어 항복하라고 권유하니 반란 주모자의 한 사람인 조광(趙匡) 등은 묘청·유담 및 유담의 아들 유호(柳浩)의 목을 베어 분사 대부경(分司大府卿) 윤첨(尹瞻) 등으로 하여금 개경에 가서 죄를 청하게 하였다.그러나 개경 조정에서는 오히려 윤첨 등을 옥에 가두니, 이 소식을 들은 조광 등은 자기들도 결코 화를 면치 못하리라는

단정 아래 서경에서 반란을 계속하게 되었다.이후 약 1년 동안 관군에 대하여 완강한 저항으로 버티었으나 포위당한 성중은 식량의 결핍 때문에 극도로 사기가 저하되었다. 마침내 1136년(인종 14) 2월 관군의 총공격으로 조광이 분사(焚死)하니, 성중 사람들은 드디어 장수 최영(崔永) 등을 잡아가지고 나와 항복하였다.이로서 묘청의 난은 끝을 맺고 동시에 천도 운동에도 종막을 고하였으나 유신(儒臣) 김부식의 승리는 이후 문신(文臣)의 위신을 높이고 무신(武臣)을 멸시하는 풍조를 낳게 하여 후에 무신의 난을 유발하는 한 소인이 되었다.

묘청의 천도운동[편집]

妙淸-遷都運動

고려 인종 때 묘청 일파가 음양도참설(陰陽圖讖說)로써 왕을 움직여 수도를 서경(西京:평양)으로 옮기려고 한 일. 인종 때 국내외의 정세는 극도로 불안하였다. 즉 밖으로는 새로 일어난 금(金)나라가 고려에 대한 위협을 가중하여 불안한 공기를 조성하였고, 안으로는 이자겸(李資謙)의 난 등으로 정치 기강(紀綱)이 어지러워져 민심은 불안 속에서 더욱더 도참설을 신봉하게 되었다.이러한 판국에 묘청 일파는 역대 고려 사회의 인심을 지배하여 온 도참설에 의거하여 국수주의(國粹主義)적인 배타주의(排他主義)를 표방하고 개경(開京)의 유교주의·사대주의 세력에 대항하여 서경천도운동을 추진하였다.이때 음양대가(陰陽大家)인 묘청을 왕실에 접근할 수 있도록 중간에 공작한 사람은 서경 출신의 문신(文臣) 정지상(鄭之常)이었는데, 그는 개경은 이미 지덕(地德)이 쇠하였으며, 앞으로 서경에 왕기(王氣)가 있으니 서경으로 천도하면 비단 우리 일신의 부귀뿐만 아니라 자손 대대 복을 누릴 수 있다 하고, 임금이 측근자들과 정부의 대신들을 움직여 묘청을 성현(聖賢)으로 추천하여 모든 정사(政事)의 최고 고문으로 삼을 것을 임금에게 건의하였다.이때 김부식(金副植) 등 4, 5명이 이에 반대하였을 뿐 인종도 처음에는 의심하다가 마침내 중의에 못 이겨 이를 허락하였다. 이것은 1126년(인종 4)의 일이다.이리하여 임금에게 접근한 묘청 등은 다음 해에 인종의 서경 행차를 실현하고, 15조항의 유신정교(維新政敎)를 중외에 선포하였다.이듬해인 1128년(인종 6) 묘청 등은 또 임금에게 건의하여 서경의 임원역(林原驛:大同郡釜山面新宮洞)에는 음양가에서 말하는 대화세(大花勢)가 있으니 이곳에 신궁(新宮:大花宮)을 새우면 천하를 통일할 수 있으며, 금(金)나라도 저절로 와서 항복할 것이며, 그 밖의 많은 나라가 또한 와서 조공할 것이라 하여 음양가 특유의 호언장담을 하여 천도운동에 박차를 가하였다. 당시 인종의 심경으로도 이자겸·척준경 등의 난과 특히 변란 중에 대대로 물려 받은 궁궐들을 여지없이 소실당하는 참담한 일을 체험한 터이라 곧 그 해 11월부터 신궁의 건설에 착수하였다.그런데 그들은 때때로 기발한 문제를 제청하여 일반의 주목을 끌기도 하도 괴상한 술책을 부리다가 도리어 조야(朝野)의 조소를 받기도 하였다.그러나 칭제건원(稱帝建元:임금이 황제의 칭호를 사용하고 연호를 제정하자던 그들의 주장) 문제와 금나라 정벌문제를 제외하고는 묘청 일파의 모든 계획은 순조로이 진행되었다.그러나 시일이 흘러감에 따라 그들의 사기성이 차차 드러나고, 큰소리치면서 대화궁(大花宮)을 지었어도 신통한 수가 없을 뿐더러 재화가 자주 일어나 그들을 불신하고 배격하는 경향이 싹트기 시작하였다.그 중에서도 특히 1132년(인종 10)의 서행(徐幸) 도중 갑자기 폭풍우를 만나 대혼잡을 이루고 수많은 인마(人馬)의 사상(死傷)을 낸 일 등은 묘청 등의 위신을 여지없이 땅에 떨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왔다.이중(李仲)·문공유(文公裕) 등의 묘청 배척상소가 올라가고 이어서 임완(林完)이 시폐(時弊)를 통론하고, 마침내 묘청 배척파의 거두 김부식은 임금의 서행(西幸)을 말리는 글을 올리니 도리어 임금도 수도를 서경으로 옮기는 일은 그만두겠다는 말을 하게 되었다.이리하여 묘청 일파의 천도운동은 완전히 좌절당하였으며, 이로써 서경의 묘청파와 개경의 왕실과의 관계는 완전히 파탄에 이르렀고, 다음해에 묘청은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다.이 서경천도 운동은 그들의 공리심과 서경인의 기질 등이 작용하였음은 물론이나, 이 밖에 그들의 정치적 혁신의 의욕도 간과(看過)할 수 없다. 당시 국내외의 정세에 비추어 개경의 타성적이며 부패한 귀족사회의 생태를 좌시할 수 없어, 당시 인심을 지배하고 있던 음양도참설(陰陽圖讖說)을 교묘히 이용하여 서경인 중심의 중흥정치(中興政治)를 베풀어 보고자 한 것이 그들의 당초의 이상이었다.

대화궁[편집]

大花宮

평남 대동군 부산면 남궁리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129년(고려 인종 7) 서경 임원역에 건립한 인종의 신궁터. 묘청·백수한의 건의로 건축하여 왕이 자주 이곳에 행차하였다.이자겸의 난에 개경의 궁성이 불타버리니 묘청·정지상 등의 서경인들이 서경천도운동을 전개하여 인종이 대화궁을 짓고 여러 번 서행하며 천도하려 하였으나 김부식 등의 반대파에 의해 천도운동은 좌절되었다.

김부식[편집]

金副植

1075(문종 29)

1151(의종 5) 고려 인종 때 명신·사학가. 자는 입지(立之), 호는 뇌천(雷川). 시호는 문렬(文烈). 본관은 경주.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근(勤)의 아들, 부일(副佾)의 형. 숙종 때 과거에 급제, 한림원(翰林院)에 들어갔고, 좌사간(左司諫) ·중서사인(中書舍人)을 역임. 인종이 즉위하여 이자겸(李資謙)이 왕의 외할아버지로서 권세를 잡자, 군신(君臣)의 예를 논하여 자겸으로 하여금 자기의 의견을 따르게 하였고, 박승중(朴昇中)·정극영(鄭克永)과 함께 『예종실록(睿宗實錄)』을 수찬, 어사대인(御史大人)·호부상서(戶部尙書)·한림원학사 등을 거쳐 평장사(平章事)에 승진, 수사공(守司空)을 더하였다. 1134년(인종 12) 요승(妖僧) 묘청(妙淸)의 서경천도(西京遷都)를 적극 반대하고 왕에게 극언하여 왕이 서행(西幸)을 중지케 하고 이듬해 묘청·조광·유담 등이 서경에서 모반하자 부식은 원수가 되어 중군장(中軍將)으로서 좌군장으로 김부의(金副儀:부식의 동생), 우군장으로 이주연(李周衍)을 거느리고 서경을 칠 때, 먼저 반란의 모의자인 정지상(鄭之常)·백수한(白壽翰)·김안(金安)을 우선 잡아 목을 베고 진격하자 서인들은 묘청·유담들을 죽이고 항복, 조광이 또 반하므로 서경을 포위, 그 이듬해에 잔당을 소탕하고, 수충정난정국공신(輸忠定難靖國功臣)의 호를 받고, 검교태보수태위(檢校太保守太尉)·문하시중(門下侍中)·판상서이부사(判尙書吏部事)·감수국사상주국(監修國史上柱國) 겸 태자태보(太子太保)에 임명되어 개선하였다.그 후 집현전태학사(集賢殿太學士)·태자태사(太子太師)의 벼슬과 동덕찬화공신(同德贊化功臣)의 호를 더하였고, 1145년(인종 23) 『삼국사기(三國史記)』 50권의 편찬을 끝냈다. 의종이 즉위하자 낙랑국개국후(樂浪國開國候)로 봉했고, 『인종실록(仁宗實錄)』을 편찬, 송나라의 사신 노윤적(路允迪)이 왔을 때 관반(館伴)으로서 그를 맞아들였고, 같이 왔던 서긍(徐兢)이 그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다 김부식의 집안을 실어 송 황제에게 진상함으로써 김부식의 이름은 송나라에도 유명하였다. 대각국사(大覺國師)의 비문을 지었고, 죽은 뒤 인종묘정에 배향되었다. 문집 20권이 있었으나 전하지 않는다.

대비원[편집]

大悲院

1049년(고려 문종 3)에 개경(開京)의 동·서 두 곳에 둔 의료 구제기관. 이곳에는 의술을 맡아보는 관리가 있어서 병자와 굶주린 자를 돌보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