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지리/중부지방-남부지방/서울특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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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교통[편집]

서울의 가로[편집]

-街路

조선시대의 가로는 도심부 중앙을 지나는 종로 거리와 종로 거리에서 광화문·돈화문·남대문 쪽으로 갈라지는 정자형(丁字型) 대로가 주요한 도로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넓고 좋은 가로는 구릉이나 개울을 자연경계로 하여 정하였기 때문에 불규칙한 형태였다. 즉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불규칙한 가로망이 현재까지 많이 남아 있는 것이다.그러나 기존 시가지의 재개발과 함께 무교로·종로 1가와 같이 개수(改修)하고 확장하여 가로의 모습은 많이 달라졌다. 한편 강남지역과 강북지역을 연결하면서, 서울의 균형 있는 발전을 위해서 동호대로가 개통되어 남·북간의 교통체증을 크게 덜어주고 있다.서울의 가로망은 일반적으로 지역에 따라 다양하다. 도심부에는 조선시대부터 사용해 온 주요 간선도로를 중심으로 동서방향의 율곡로·종로·청계로·을지로·퇴계로와 남북방향의 의주로·태평로·남대문로 등이 있다. 또한 서울이 거대도시화하여 감에 따라 도심부와 주변 지역, 도심부와 위성도시(衛星都市)를 연결하는 19개의 방사상도로(放射狀道路)와 도심지에서 반지름 2km·5km·10km 거리의 부도심(副都心)과 도심간, 또는 부도심간의 유기적인 연결을 위한 여러 개의 순환도로가 기본 도로망이 되었다. 주변 지역인 영동·화곡·불광·면목·구로·개봉 지구에는 직교상 가로망이 분포되어 있다. 서울시는 2000년 이후에도 점증할 교통난 해소를 위해 내부순환로 및 외부순환도로의 지속적 확충에 노력하고 있다. 특히 북부간선 등 도시고속도로 건설, 과학적인 교통체계 개선과 기존도로의 유지·보수에도 유의하고 있다.이상과 같이 여러 갈래로 분포되어 있는 서울의 도로 총연장은 2000년말 현재 도로 총길이 8,600km, 도로율 25%이다.

서울의 대중교통[편집]

-大衆交通

1899년부터 운행하던 전차(電車)가 없어지면서 서울시가의 대중교통 수단은 많이 달라졌다. 1966년부터는 시가지의 대폭적인 재개발로 건물의 고층화와 함께

도로의 입체화가 진전되었다. 2001년 말 교통인구는 2,746만 명이고, 자동차 등록대수는 255만 441대로 2000년의 244만 992대에 비해 10만 9,449대가 증가, 하루 272대 정도가 늘어났다. 수송분담률은 버스 27.6%, 지하철 36.5%, 택시 8.4%이다. 그 외는 자가용 등 27.5%이다. 버스의 서비스 빈도가 높은 곳은 도시반지름 5km 이내의 도심지와 기차와 버스를 갈아타는 서울역·청량리역·영등포역 부근, 그리고 고속버스터미널과 동마장과 용산의 시외버스터미널 부근이다. 그러나 많은 시민들이 주변 지대의 주택지에 생활하고 있으므로 도심지로 들어가기 위한 통근·통학시간인 러시아워에는 교통이 매우 혼잡하다. 이 시간에 1일 교통량의 60%와 대부분의 교통인구가 이동되고 있기 때문이다.서울은 인구의 과다집중(過多集中)으로 교통인구는 해마다 늘어나 교통 사정도 계속 악화돼 서울시는 이러한 교통난의 해소를 위해 제3호 터널의 건설, 영등포에 있는 입체교차로, 청계로·아현동·서울역·원남동·삼각지·신당동 등지에 있는 고가도로, 남대문·시청앞·세종로·소공로·종로 등지에 지하도를 개설하고 버스통행이 가장 많은 시간대인 오전 7시∼10시 사이와 오후 5시∼9시 사이에 버스전용차선제를 실시하고는 있으나 아직 근본적인 해결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한편, 시민의 교통수단을 고속화하고, 노면(路面)의 교통 혼잡을 완화시키면서 교통공해를 줄이고, 도심지 인구를 분산시키는 데 도움을 주고자 1974년에 청량리와 서울역 사이의 지하철 1호선과 서울역과 구로 사이, 청량리와 성북 사이의 전철(電鐵)이 개통되었고, 1983년에 강남지역을 지나는 지하철 2호선이 개통되었으며 1985년에 3호선이 1986년에는 4호선이 개통되었다.1997년 5호선(방화

온수) 개통에 이어 6호선(도봉

온수), 8호선(암사·성남), 과천선(사당

금정), 분당선(강남구청

오리), 일산선(지축

일산) 등이 개통되었다. 9호선은 2002년 4월 3일 착공하였다.

우리나라 교통의 중심지[편집]

-交通-中心地

서울은 지방과 연결되고 있는 경부(京釜)·경인(京仁)·경춘(京春)·경의(京義)·경원(京元) 가도(街道), 경부·경인 고속도로, 경부·경인·호남·중앙·장항·경춘선 등의 철도, 부산·제주·대구·광주·속초 등지와 연결되는 항로(航路)의 기점으로, 우리나라 교통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김포(金浦) 국제공항은 일본·미국·유럽·중동의 주요 도시와 연결되고 있는 우리나라의 문호가 되고 있다. 외국과의 인적·물적 교류에 대비해 김포국제공항 이외에 수도권 신국제공항을 인천 영종도에 총 4,743만㎡ 규모로 건설하여 2001년 3월 29일 개항하였다.

서울의 사회·문화[편집]

서울은 우리나라 문화활동의 중심지가 되고 있으며, 수많은 각급 교육기관을 비롯하여 도서관·박물관·신문사·출판사·방송국과 기타 문화시설들이 집중되어 있다.서울은 2002년말 현재 8개의 학구(學區)에 542개의 초등학교 357개의 중학교와 204개의 인문고 및 78개의 실업고가 있다. 또 대학 41개교, 교육대학 1개교, 방송통신대 1개교, 산업대 1개교, 전문대 12개교 등이 있다.도서관은 23개 소가 있으며, 장서(藏書) 100만여 권을 가진 국립도서관과 국회도서관, 그리고 공공 및 대학도서관이 있다. 국립박물관을 비롯하여 60여 개의 박물관이 있다. 그 외 국립미술관과 민속박물관·국립극장·세종문화회관·예술의 전당 등의 문화시설이 있다. 또한 132개의 국보(國寶), 380개의 보물, 61개소의 사적(史蹟), 11개의 천연기념물, 32개의 무형문화재, 46개의 중요 민속자료 등이 전기한 여러 시설에 잘 보전되어 있다. 또한 경복궁·창덕궁·덕수궁·종묘 등의 고궁과 어린이대공원, 서울대공원, 용산가족공원 등이 있어 시민들과 외국 관광객들에게 좋은 휴식처와 관광 명소가 되고 있다.운동경기장으로는 동대문·효창 운동장과 장충체육관 등이 있고, 잠실에는 종합운동장, 상암동에는 서울월드컵경기장이 있다.

경복궁[편집]

景福宮

조선왕조의 건립에 따라 창건되어 초기에 정궁으로 사용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전소된 후 폐허로 남아 있다가 조선 말기 고종 때 중건되었다. 이성계가 즉위 3년째인 1394년에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열어 궁의 창건을 시작하였으며 이듬해에 완성하였다. 이때의 궁의 규모는 390여 칸으로, 수조지소(受朝之所)인 근정전(勤政殿)이 5칸에 상하층 월대(越臺)와 행랑·근정문·천랑(穿廊)·각루(角樓)·강녕전(康寧殿) 7칸 등이 조성되었다.

덕수궁[편집]

德壽宮

임진왜란 뒤 선조(宣祖)가 임시로 왕의 거처로 쓰면서 궁이 되었다. 선조가 죽은 뒤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였는데, 그해 완성된 창덕궁으로 떠나면서 경운궁(慶運宮)이라는 궁호를 붙여주었다.1897년(고종 34) 고종(高宗)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이 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비로소 궁궐다운 장대한 전각들을 갖추게 되었다. 1904년 큰 화재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었으나, 1905년 즉조당(卽祚堂)·석어당(昔御堂)·경효전(景孝殿)·함녕전(咸寧殿) 등이 중건되었다.1906년 대안문(大安門) 이 수리된 뒤 대한문(大漢門)으로 개칭하고 정문으로 삼았다. 1907년(순종 1) 순종(純宗) 즉위 후 고종은 궁호를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바꾸었다.

창덕궁[편집]

昌德宮

조선시대 임금이 상주하며 정치를 하던 궁이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점한 1912년부터는 창덕궁의 후원인 비원(秘苑)과 아울러 인정전(仁政殿) 등의 중심부와 낙선재(樂善齋) 등을 일반에게 공개 관람시키고 있다. 창덕궁은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중요한 고궁이며, 특히 비원은 우리나라의 유일한 궁궐후원이라는 점과 우리나라의 정원을 대표한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다.

경희궁[편집]

慶熙宮

경희궁은 광해군 9년인 1617년에 창건된 이후, 8대에 걸쳐 임금이 정사를 보았던 궁궐이다. 부지 7만 2천8백 평에 정전, 동궁, 침전, 별당을 비롯해서 모두 98채의 건물이 들어섰던 경희궁은 경복궁, 창경궁과 함께 조선왕조의 3대궁으로 꼽힐 만큼 큰 궁궐이었으나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정문이었던 흥화문과 정전이었던 숭정전, 그리고 후원의 정자였던 황학정까지 세 채에 불과하다. 5대궁 가운데 가장 철저히 파괴된 궁이다. 그나마 초석과 기단이 남아 있고, 뒤쪽에는 울창한 수림이 잘 보전돼 있어 궁궐의 자취를 잘 간직하고 있는 편이다.

창경궁[편집]

昌慶宮

고종 때까지 본래의 웅장한 모습을 갖추고 있었으나, 일제가 궁 안에 일본식 건물을 세우고, 궁궐 전체를 동식물원, 박물관 등을 설치하여 유원지로 조성하였다. 1983년 창경원에서 창경궁으로 이름을 되찾았으며, 동물들은 서울대공원으로 옮겨지고, 궁 안에 있던 벚나무는 모두 뽑아 없앴다. 이제 창경궁에서 벚꽃을 찾기 어렵다. 대신 잘 가꿔진 소나무가 볼만하다. 특히 춘당지 뒤쪽의 <한국자생식물화단>은 한국식물로서 월동이 가능한 중부지방 자생식물을 모아놓은 화단으로 세계적 희귀식물인 미선나무를 비롯해 400여 종 600여 포기가 심어져 있어 도시 어린이들이 자연생태를 익힐 수 있는 공간이다. 창경궁은 숙종이 인현왕후를 저주한 장희빈을 처형한 일과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 일 등 크고 작은 궁중 비극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남산[편집]

南山 높이 262m이며 대부분 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북쪽의 북악산(北嶽山), 동쪽의 낙산(駱山), 서쪽의 인왕산(仁旺山)과 함께 서울의 중앙부를 둘러싸고 있다. 목멱산(木覓山)·종남산(終南山)·인경산(仁慶山)·열경산(列慶山)·마뫼 등으로 불렸다.정상에는 조선 중기까지 봄과 가을에 초제(醮祭)를 지내던 국사당(國祀堂)과, 통신제도의 하나인 봉수제(烽燧制)의 종점인 봉수대(烽燧臺)가 있었다. 또 남산 주변에는 조선시대에 축성된 도성(都城)의 성곽 일부가 남아 있다.

사육신 공원[편집]

死六臣公園

수양대군이 조카인 단종(1445)으로부터 왕위를 빼앗고, 왕이 되자 이에 불복하고 단종 복위에 힘쓰다 목숨을 잃은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응부·유성원을 모신 곳이다. 이들의 충성심과 장렬한 의기를 추모하고자 숙종 7년(1681) 민절서원을 세웠고, 정조 6년(1782)에는 신도비가 세워져 전해오다가, 1955년 5월에 육각의 사육신비를 세웠다.1978년 서울시에서 사육신의 충의 정신을 기리고자 묘역을 확장해 공원화하였다. 입구에 홍살문이 있고, 그 안 좌우로 신도비, 1955년에 세운 육각비, 불이문을 들어서면 의절사가 있으며, 각종 편익시설도 구비되어 있다.

사직공원[편집]

社稷公園

조선 태조가 한양에 수도를 정하고 궁궐, 종묘를 지을 때 함께 지은 사직단이 있는 곳으로 1921년 사직단 주변이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사직단은 태조3년(1934)에 고려의 예를 따라 토신을 제사하는 국사단을 동쪽에, 곡신을 제사하는 국직단은 서쪽에 배치하고 신좌를 북쪽에 모셔 만들어 1년에 세 번 제사를 지냈다. 사직단 입구에 있는 사직단 정문은 보물 제17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 건평 17.4평으로 단층맞배지붕이다.또 사직공원 내에는 단군성전, 시립종로도서관이 있으며 매년 전국 규모의 활쏘기 대회가 열리는 황학정이 있다. 황학정은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25호로 고종 광무2년(1898) 어명에 의하여 경희궁 회상전 북쪽에 지었던 것을 1922년에 현위치로 옮긴 것이다. 한말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던 마지막 궁술연습장이었던 황학정은 건평 59㎡에 정면 4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이며 우측으로부터 2칸 추녀 밑에 황학정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탑골공원[편집]

塔-公園

사적 제354호. 서울 최초의 근대공원이다. 조선 세조 13년에 원각사로 건립하였던 것을 고종 34년인 1897년 도지부 고문인 영국인 브라운이 공원으로 조성하여 1920년에 개원하였다. 1919년 3·1운동의 발상지로 처음으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친 곳이다.1992년 5월 28일 공원 명칭을 파고다 공원에서 탑골공원으로 개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독립운동 봉화에 불을 당겼던 팔각정을 중심으로 국보 제2호인 원각사지 10층석탑, 국보 제3호인 원각사비 등의 문화재와 3·1운동 기념탑, 3·1운동 벽화, 의암 손병희 선생 동상, 한용운 선생 기념비 등이 있다.

북한산 국립공원[편집]

北漢山國立公園

1983년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북한산 국립공원은 북한산과 도봉산 전역을 포함하며 총 면적이 78.45㎢에 달한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공원의 동남쪽은 도봉구·성북구·종로구·은평구의 4개 구에 북서쪽은 경기도 고양시·양주군·의정부시에 속한다.북한산은 예로부터 한산·화산·삼각산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려왔으며 북한산이라 불리게 된 것은 조선조 중종 때 북한산성을 축성한 뒤부터라고 추정된다. 북한산 국립공원은 지형적으로 볼 때 북에서 남으로 이어지는 산맥으로 이루어졌으며 우이령을 경계로 하여 북쪽으로는 도봉산 지역, 남쪽으로는 북한산 지역으로 크게 나뉘어진다.남쪽의 북한산 지역은 최고봉인 백운대를 정점으로 주능선이 남북으로 길게 뻗어 북으로는 상장봉, 남으로는 보현봉에 이르며 다시 사방으로 굵직한 지능선을 뻗쳐 웅장한 산세를 이룬다. 특히 북한산 국립공원 전체의 중심에 높이 솟아 그 웅장함을 자랑하는 인수봉, 백운대, 만경대와 노적봉 일대의 암봉군은 북한산 경관의 으뜸으로 꼽힌다. 북한산의 다른 이름인 삼각산도 북한산을 멀리서 볼 때 인수봉, 백운대, 만경대 등 세 개의 높은 암봉이 마치 뿔처럼 날카롭게 솟아 있는 데서 유래한다고 한다. 북한산 국립공원에는 숙종 37년(1711)에 축성한 북한산성과 신라말 도선국사가 창건한 도선사, 조선 중종 때 신월 선사가 창건한 화계사, 신라의 고찰 승가사·진관사·망월사 등의 유적지가 있다.

한강시민공원[편집]

漢江市民公園

한강을 옛날과 같이 깨끗한 강으로 되살리자는 목표로 1982년 9월부터 한강종합개발이 이루어져 1986년에 사업을 끝냄으로써 서울지역 41.5km의 구간(하일동-개화동)이 평균 수심 2.5m, 강너비 1km의 살아있는 강으로 변했다. 아울러 강변에 시민 휴식공원과 축구장, 배구장, 농구장, 수영장 등 각종 체육시설과 수상스키장, 요트장, 보트장, 낚시터, 주차장 등을 갖추어 시민들의 오락·휴양지로 이용할 수 있게 했다. 한강 시민공원은 크게 광나루, 잠실, 뚝섬, 잠원, 반포, 이촌, 여의도, 양화, 망원 등 9개 지구로 나뉘어 있다.

올림픽공원[편집]

Olympic 公園

올림픽공원은 1988년 서울올림픽을 기념하기 위해 조성된 곳으로 6개의 경기장이 있는 체육공원과 벡제 초기 문화유적인 몽촌토성을 중심으로 한 부분으로 크게 나뉜다. 올림픽공원은 야외조각공원을 비롯하여 88놀이마당, 음악 분수 등과 같은 휴식공간이 조성되어 있다.몽촌토성은 사적 제297호로 3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북쪽의 한강과 남쪽의 남한산성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현재는 몽촌토송의 비탈면에 소나무 숲이 자리하고 있어 사철 푸른 경관을 연출하고 있다. 주요 시설로는 사이클·역도·펜싱·체조·수영 등 6개 경기장과 올림픽회관, 올림픽 파크텔, 몽촌 역사관 등 각종 편익시설이 구비되어 있다.

도봉산[편집]

道峰山

도봉산은 우람한 기암괴석과 뾰족이 솟은 바위 봉우리들이 장관이며, 사방으로 뻗은 계곡을 따라 녹음이 우거져 있다. 면적은 24㎢로 북한산의 55㎢에 비해 등산로가 더 조밀하다. 최고봉인 자운봉(739.5m)을 비롯해서 만장봉·선인봉·주봉·관음봉·오봉·우이암 등 암벽이 아름답다.

관악산[편집]

冠岳山

관악산(해발629.1m)은 한남정맥이 수원 광교산에서 북서쪽으로 갈라져 한강 남쪽에 이르러 마지막으로 우뚝 솟은 산이다. 서울 남쪽 외곽에 위치하며, 산봉우리의 모양이 불과 같아 풍수적으로 화산이 된다. 빼어난 수십 개의 봉우리와 바위들이 많고 오래된 나무와 온갖 풀이 바위와 어우러져 철따라 변하는 모습이 마치 금강산과 같다 하여 소금강 또는 서쪽에 있는 금강산이라 하여 서금강이라고 한다.

수락산[편집]

水落山

수락산은 도심과 가깝고 산행하기에 알맞은 높이(637m)의 산이다. 대부분 돌산으로 화강암의 암벽이 노출되어 있지만 산세는 그다지 험하지 않다. 수목이 울창하지 않은 대신 동쪽의 금류동·은선동·옥류동의 세 폭포가 있어 사시사철 끊임없는 등산객들이 찾아든다. 봄이 되면 불암산과 잇닿은 쪽의 능선에는 철쭉이 만발해 산행이 더욱 즐겁다. 수락계곡과 노원골 일대 11km 산책로는 삼림욕하기에 좋은 곳이다.

아차산[편집]

峨嵯山

서울과 구리에 걸쳐 있는 아차산은 해발 300m밖에 되지 않는 야트막한 산이지만, 삼국시대의 전략요충지로 특히 온달장군의 전설이 전해져 온다. 학문적 고증과는 상관없이 이 지역 주민들은 온달장군이 아차산에서 전사했다고 믿고 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아차산에는 ‘온달샘’이라 불리는 약수터와 온달이 가지고 놀았다는 지름 3m의 거대한 공기돌이 있다.대성암 뒤에는 의상대사가 수련을 했던 곳으로 알려진 천연 암굴이 있어 눈길을 끈다. 이밖에 석곽분, 다비터, 봉수대, 강신샘 등이 있다.

인왕산[편집]

仁王山

높이 338m. 정상에 서면 서울 중심가와 청와대 부근이 한눈에 보인다. 바위산이기 때문에 조망도 좋고 기차바위·치마바위·매바위·범바위·이슬바위·모자바위·선바위·지렁이바위 등이 저마다 기이한 모습들을 뽐내고 있다.

국립민속박물관[편집]

國立民俗博物館

경복궁 안에 있다. 조상들이 남긴 민속자료를 모아 보관하는 곳으로 제1전시관에서는 한민족의 생활상을 살펴볼 수 있는데, 선사시대 각종 생활도구에서부터 청동기시대,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의 인쇄와 조선의 한글창제 등에 대한 자료를 복원, 전시하고 있다. 제2전시관은 생활민속과 문물 등 의·식·주를 살펴볼 수 있으며, 제3전시관에서는 출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한국인의 일생에 관한 자료들이 구성돼 있다. 또한 신라의 안압지, 황룡사 9층탑, 경복궁 근정전 등의 모형도 있다. 박물관 주변 이곳저곳에는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 돌하루방, 연자방아 등의 전시물들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편집]

國立中央博物館

1908년 창경궁 내의 이(李)왕가박물관으로 출발한 국립중앙박물관은 2, 3, 4층 전시실에 10만 점에 이르는 우리 나라의 역사, 고고학, 미술사, 민속 등에 관한 자료가 풍부하게 전시되어 있으며, 총 소장품 7,000여 점에 21개의 상설 전시실, 2개의 기획전시실을 가지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유물전시뿐만 아니라 각종 문화강좌도 열린다. 도자기를 직접 만들어보는 도자기 교실을 비롯해서 박물관 교실, 토요 공개강좌 등이 있다.

궁중유물전시관[편집]

宮中有物博物館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르네상스식 석조건물로 대한제국 때 외국사신들의 접견장으로 쓰였던 궁중유물전시관은 조선시대 임금에서 궁녀에 이르기까지 궁중에서 사용하던 물건들을 전시해 놓았다. 상설전시실과 기획전시관으로 나뉘어 10개의 전시실 중 2층에는 악기류와 정치경제, 과학자료, 오례의, 궁궐건축, 궁중의식과 관련된 유물이 전시되어 있고, 3층에는 어보, 어책류, 공예품, 궁중 복식 및 장신구류, 회화류, 동궐도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관람 시간은 대략 1~2시간 정도, 음성안내기를 대여하여 들으면 더욱 깊이 있는 관람을 할 수 있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편집]

西大門刑務所歷史館

1919년 백범 김구 선생은 일제로부터 17년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면서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을 때마다 “우리나라가 독립하여 정부가 생기거든 그 청사의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는 일을 하여보고 죽게 하소서”라고 기원했다.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은 김구·강우규를 비롯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거쳐갔던 옛 서대문형무소 보안과 청사와 옥사로 사용하던 곳이다. 역사현장으로 보존키 위해 옥사와 사형장, 망루와 시구문 등을 원형대로 복원했다.

세종대왕기념관[편집]

世宗大王紀念館

세종대왕의 성덕과 위업을 추모하여 이를 길이 보존하기 위해 1970년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준공하였다. 전시관은 한글실, 과학실, 국악실, 일대기실로 구성된다. 한글실은 세종대왕 당시 펴낸 도서류를, 과학실은 과학 관계자료(금속활자 판자기, 수표측우기 등)를 전시하고 있으며 <국악실>은 국악기류를 전시하고 있다. <일대기실>은 김학수 선생께서 수년 동안 그린 ‘세종대왕 일대기 그림’ 14폭이 전시되어 있어 세종대왕의 치덕을 살펴 볼 수 있다.

전쟁기념관[편집]

육군본부 자리에 들어선 전쟁기념관은 지하 2층, 지상 4층 건물로, 6천여 평 정도의 전시관을 갖추고 있다. 호국추모실, 전쟁역사실, 한국전쟁실, 해외파병실, 국군발전실, 대형장비실 등으로 구성된 7개의 실내 전시실과 옥외 전시실에는 1만 3천여 점의 자료가 전시되어 있는데, 각 전시실에는 선열의 정신이 담긴 벽화부조, 조형물, 각 전투의 기록화, 각종 무기장비 등이, 옥외 전시실에는 세계 각국의 대형무기 1백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전쟁체험실은 한국전쟁 당시의 야간 전투 상황을 영상·음향·진동·포연·조명·화약냄새 등의 특수효과로 연출해 전쟁터에서의 긴장된 극한 상황과 장병들의 투혼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다. 전쟁기념관 양쪽 화랑에는 한국전쟁과 월남전쟁에서 전사한 장병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전쟁기념관의 녹지공원에는 인공호수와 휴식공간들을 조성해 놓았다.

서울의 인물[편집]

-人物

서울을 빛낸 인물은 3천여 명이 된다. 대표적으로 몇몇 인물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유형원[편집]

(1622~1673)

조선시대의 실학자. 호는 반계(磻溪). 한성 태생으로 벼슬을 하지 않고 전국의 명승지를 유람하며 학문에 일생을 바쳤다. 특히 스스로 농촌 생활에서 겪은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잘못된 사회 제도와 경제 개혁의 필요성을 느끼고, 유교적 윤리와 정치의 시정을 바탕에 둔 사회 개혁을 주장하였다. 그는 성리학을 비롯하여 정치·경제·역사·지리·군사·언어·문학에 이르기까지 학문의 범위가 매우 넓었다. 그의 중농적 실학 사상은 이이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정약용에 이르러 발달되었다. 토지 개혁을 중심으로 한 사회 개혁을 주장했으므로 중농적 실학자·경세치용(經世致用)의 실학자라고 불린다. 저서로 반계수록 기행일록 주자찬요 '경세문답' '정음지남' 등이 있다.

박종화[편집]

(1901~1981) 소설가. 호는 월탄(月灘). 1920년 휘문 의숙을 졸업하였다. 졸업하던 해 문학 동인지 '문우'를 발간하면서부터 문학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1922년 '백조'의 동인으로 활약하면서 시와 소설을 발표하였다.1924년 처녀 시집 '흑방비곡'을 발간했고, 그 후'시인' 등을 쓰면서 소설로 전향했다.1935년 장편 '금삼의 피'를 '매일신보'에 연재하면서부터 역사 소설을 쓰기 시작하여, 그 후 '아랑의 정조' '다정불심' 등 많은 역사 소설을 발표했다. 1954년 예술원 회원, 이듬해 원장이 되었다. 1964년 문인 협회 이사장을 지냈고, 1965년 ‘월탄 문학상’이 제정되었다. 통일원 고문, 통일 주체 국민회의 대의원이 되었고, 문학박사 학위와 문화 훈장 대통령장, 5·16민족상과 국민 훈장 등의 상을 받았다. 작품으로 '여인천하' '임진왜란' 등이 있다.

맹사성[편집]

(1360~1438)

조선 초기의 문신. 호는 고불(古佛). 황희와 더불어 조선 초기의 문화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청렴 결백하였을 뿐 아니라 시문·음악에도 능하였다.'태종 실록' 편찬을 감독했고, '팔도지리지'를 편찬하고 당시의 향악(鄕樂)을 정리하였다.

박팽년[편집]

朴彭年 (1417~1456)

조선 세종 때의 문신. 호는 취금헌(醉琴軒). 1434년 문과에 급제, 성삼문과 함께 집현전 학사가 되어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세조가 즉위한 다음 해인 1456년, 형조 참판의 자리에 있으면서 성삼문·하위지 등과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사형당했다. 사형시키기 전에, 세조가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겨서 마음을 돌려 보려고 하였으나, 흔들리지 않았다. 뒤에 아버지와 동생, 아들까지 사형당했다.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글씨로 「취금헌 천자문」이 전한다.

김굉필[편집]

(1454~1504)

조선 중기의 학자. 호는 한훤당(寒暄堂). 김종직의 문하에서 '소학'을 읽고 스스로 ‘소학동자’라 일컬었다. 평소 학문을 깊이 연구하여 성리학에 능하였으며 실천 궁행을 위주로 하는 학자였다.1498년의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일파라 하여 희천으로 귀양 갔다가, 귀양지에서 조광조에게 자신의 학문을 전해 주었다. 중종 때 우의정에 추증되었다.저서로 '한훤당집' '경현록' 등이 있다.

방정환[편집]

아동문학가. 호는 소파(小波). 묘가 망우리묘지(묘지번호 203703)구리 지역에 있다. 17세 때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에 취직했으나, 이곳이 토지조사사업을 담당하여 조선인들로부터 지탄을 받는 기관이었기 때문에 곧 사직하고 천도교청년회, 개벽사(開闢社), 천도교소년회 등 천도교와 관련을 맺었다. 이후 청년문학단체인 ‘청년구락부’를 조직하여 활동하면서 어린이 운동에 열성을 보였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자신의 집에서 등사판으로 '독립신문'을 발행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1921년 서울에서 ‘천도소년회’를 만들었다. 한편 방정환은 전국 순회강연을 하였는데, 강연내용은 어린이들을 위해 그들의 인격을 존중하자는 것이었다. 이때 그는 아동을 지칭하는 ‘어린이’라는 용어를 처음 만들었다.1923년에는 월간 '어린이'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순수아동잡지를 창간했고, 이어 동경에서 어린이문제를 연구하는 단체인 ‘색동회’를 조직했다.1957년 그를 기리기 위해 ‘소파상(小波常)’이 제정되었으며, 1978년 금관문화훈장, 1980년 건국포장이 수여되었다. 1983년 어린이날 망우리 묘소에 「소파방정환 선생의 비(碑)」가 건립되었으며, 1987년에는 독립기념관에 그가 쓴 ‘어른들에게 드리는 글’을 새긴 어록비가 건립되었다.

이문열[편집]

(1948∼)

소설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중퇴하고 1977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입선한 뒤 '대구매일신문' 편집기자를 지냈다. 이어 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새하곡(塞下曲)'이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같은 해 중편 '사람의 아들'로 ‘오늘의 작가상’을 받으면서 왕성한 창작활동을 전개하여 1980년대에 가장 많은 독자를 확보한 작가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그의 소설의 특징은 탄탄한 구성과 문장의 탁월함으로, 자전적 요소가 강하게 드러나 있다. 주요작품으로는 '젊은날의 초상(1981)' '황제를 위하여(1982)' '영웅시대(1987)' '변경(邊境)' 등이 있으며 '사람의 아들' '그해 겨울' '금시조(금시조)'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등 소설집과 번역서인 '삼국지'와 '수호지'가 있다. 동인문학상·이상문학상을 받았다.

서울의 산업[편집]

서울의 임야[편집]

-林野

서울의 임야면적은 157.84㎢(2002)로, 2001년의 157.57㎢에 비해 약간 늘었다. 임야의 31%는 국공유림(國公有林)이고 69%는 사유림(私有林)이다.임야의 분포는 산이 많은 도봉구에 40.93㎢, 관악구에 24.64㎢, 강남구에 23.64㎢가 있어서 전 임야의 52%를 차지하고 있다.이 임야의 많은 부분이 개발 제한구역(green belt)으로 들어가 있어서 임야는 잘 보호되고 있는 편이다.

서울의 공업[편집]

-工業

서울의 공업은 1920년대에 영등포의 피혁공장을 비롯하여 철도공작소, 방직공장 등이 세워진 것을 시작으로 본격화하기 시작하였고, 2차대전 중에는 일제의 군수공업(軍需工業)이 영등포·용산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그 후 광복 후의 혼란기와 한국전쟁 때의 침체기도 있었으나 1957년부터 다시 발전하기 시작하여 1961년 이후의 경제성장과 함께 서울의 공업은 급속도로 발달하였다.주요 공업지구로는 각종 중소기업이 집중되어 있는 성동·용산·영등포·천호동 지구와 노원구가 있고, 1971년 구로동에는 한국수출산업공단과 1973년 영등포기계공단 등 수출공업단지가 조성되어 섬유·전자기계, 고무합성수지제품, 금속·광학기기류 등이 생산되며, 구로공단이 영등포와 함께 경인공업지구를 이루고 있다. 또한 강서구의 한국플라스틱공단에서는 플라스틱·화학공업이 성하다. 그러나 근래에는 이들 업체가 시흥·안양·수원·부천 방면으로 이전하여 경인공업지대가 확장되고 있다. 대기업은 섬유·식품·화학·반도체·기계공업 등에 중소기업은 기계·섬유·화학·식품 공업에 주력하고 있다.1999년 말 현재 등록된 공장수는 1만 4,878개 총 종업원수는 24만 1,400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종업원 300명 이상 대기업체는 49개, 300명 이하 중소기업체는 1만 4,829개이다.

서울의 상업[편집]

-商業

서울의 상업은 종로·남대문로·충무로·명동·을지로와 청계로 등의 상가와 남대문·동대문·중부시장 등의 큰 시장, 이름난 백화점 등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1960년경부터 대단위 슈퍼마켓과 연쇄점·지하상가가 시내 요소에 설치되어 새로운 상가를 형성하고 있다.특히 편의점의 성장이 두드러져 1990년 10개이던 것이 1993년 520여 개로 증가하였으며, 강남·강동 지역이 서울 전체의 4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1999년 말 현재 서울지역의 등록대상 시장은 447개 소로 점포수는 10만 1,356개이다. 이중 일반 소매시장이 397개 소(점포 수 83만 834)이며, 백화점 및 쇼핑센터 등 대형유통업소는 50개 소(점포 수 1만 1,356)가 있다. 전문상가로는 전국에 의류를 공급하는 남대문 의류상가와 동대문 평화시장, 전국 농수산물의 집산이 이루어지는 가락동 농수산물시장, 노량진 수산시장, 용산 전자제품상가, 한약재 및 청과물 중심의 경동시장, 구로 기계공구상가 등이 있다. 최근 두산타워, 밀리오레, 프레야타운 등 상가 전문 빌딩이 들어서 폭발적인 수요를 창출하고 있는 동대문 상가는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 가고 있다.

서울의 연혁[편집]

삼국시대까지의 서울[편집]

三國時代-

서울은 고고학자들이 암사동(岩寺洞) 등지에서 행한 발굴작업에 의하여 출토된 각종 유물과 유적들을 통하여 신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생활하고 있었음을 추측하게 되었다.그러나 기원전 18년경부터는 백제(百濟)의 세력이 서울 지방에 미치게 되면서 백제가 현재의 강북구 미아리 부근에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을 세웠고 이로써 백제의 발상지가 되었다. 이 위례성은 후에 현재의 천호동 부근에 세운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과는 구별되는 것이다.그 후 삼국시대에는 서울이 군사적 요충지가 되어 삼국이 모두 서울을 차지하려고 하여, 세력의 충돌 중심지가 되기도 하였다. 392년에 고구려의 광개토왕은 백제를 공격하여 한때 서울을 점령하였고, 475년에 장수왕은 또다시 백제를 공격하여 서울을 점령하여 북한산주(北漢山州)를 설치하고 위례성을 남평양(南平壤)이라고 하였다.그 후 신라는 국력을 신장하여 영토 확장에 힘을 써오다 백제와 연합하여 551년에 고구려의 세력을 한강 유역에서 물리치고 서울을 차지하였다. 신라는 신주를 설치하였는데, 신주는 북한주(北漢州) 또는 남천주(南川州)라고 개칭하였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전국을 9주로 구분하여 통치하였을 때 서울은 한산주에 소속되었다. 한산주는 경덕왕 때 한주라 개칭하고, 서울은 한양군이라고 하였다. 이 명칭은 신라 말기까지 계속하여 사용되었다.

고려시대의 서울[편집]

高麗時代-

서울은 고려 성종 때 12목의 하나인 양주목(楊州牧)으로 승격되어 지방행정구역의 중요한 단위가 되면서 정치적 비중이 높아지게 되었다.1067년 문종 때에는 양주목에 소속시켰던 것을 3소경의 하나인 남경(南京)으로 승격시켰다. 남경의 규모는 동쪽이 대봉(大峰-현재의 낙산), 서쪽이 기봉(岐峰-현재의 안산), 북쪽이 면악(面嶽-지금의 북악산), 남쪽이 사리(沙里-지금의 용산 남단)까지로, 서울은 더욱 지방제도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서울에 궁궐이 처음으로 창건되었고, 인근의 백성들을 이주시켜 생활하게 함으로써 도시로서 발전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숙종 때에는 현재의 경복궁(景福宮) 부근에 남경 이궁(離宮)을 짓는 등 건설사업이 추진되었다.1231년 이래 몽골이 침입하던 때에는 몽골군의 주둔지가 되기도 하였다. 충렬왕 때 원나라의 간섭으로 3경제도가 없어지자, 남경은 지방단위의 하나인 한양부(漢陽府)로 개칭되었다. 그러나 공민왕 때 다시 3경제도를 부활시켜 남경의 궁궐을 중수하였다. 그리고 원나라의 간섭을 벗어나 국권을 회복하자는 정책의 하나로 한양천도론까지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이 한양천도론은 우왕 때에 더욱 고조되어, 마침내 1382년 9월에 한양으로 천도를 단행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2월에 다시 개경으로 돌아가게 되어 천도기간은 6개월에 불과하였다. 그 후 공양왕 때에 다시 한양으로 천도하였으나 또 6개월 만에 개경으로 돌아갔다.

조선시대의 서울[편집]

朝鮮時代-

1392년에 조선왕조를 세운 이성계(李成桂)는 조선왕조의 면목과 인심을 새롭게 할 목적으로 도읍지를 옮기기로 결심을 하였다. 새 도읍지를 물색하던 중 무학국사와 하륜(河崙) 등 중신들의 의견에 따라 1393년에 도읍지를 한양으로 정하여 1394년 11월 26일에 천도(遷都)를 하였다. 천도의 기준은 풍수설에 따르면서, 남쪽에 한강이 있어 교통상 조운(漕運)이 편리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태조(太祖)는 궁궐을 중심으로 ‘우묘좌사, 전조후시(右廟左社, 前朝後市)’라는 동양 고래의 수도 배치 원칙에 따라서 도읍을 건설하였다. 궁궐을 세운 뒤 동쪽에 종묘(宗廟), 서쪽에 사직(社稷) 등 국가를 상징하는 건물을 세웠다. 그리고 광화문 앞에 육조관서(六曹官暑)를 배치하여 관아가(官衙街)로 하고, 북쪽 신무문(神武門) 밖에는 시장을 두었다. 이때부터 서울은 우리나라의 정치도시로서의 기능을 갖추어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 다음으로 태조는 한양의 방위를 튼튼히 하기 위하여 북악산과 낙산(駱山)·남산(南山)·인왕산(仁旺山)을 잇는 약 17km의 성벽을 쌓기 시작하였다. 1395년에 한양을 한성(漢城)으로 개칭하고 1395년에는 한성의 행정구역을 설정하였다. 그 행정구역은 도성(都城)과 성저(城底)로 구성되었는데, 조선시대의 500년 동안을 사용하여 왔던 것이다. 도성은 성 안의 땅으로 모두 국유지이며, 궁궐·관청·도로·하수도·시장 등의 위치가 정해져 있었다. 성저는 성벽으로부터 사방 10리 되는 한계선까지를 가리키는데, 북쪽은 북한산, 남쪽은 한강 노도(露渡), 동쪽은 양주 송계원·대현(大峴-지금의 우이천)·중랑포(中浪浦)·장안평, 서쪽은 양화도(楊花渡)·고양덕수원(高揚德水院-지금의 응암동), 모래내(沙川)를 따라 난지도(蘭芝島) 부근까지였다. 이 지역내는 산림과 풍치의 보호를 목적으로 암장과 벌목·채석이 금지되었다.이 도성은 동·서·남·북·중부의 오부(五部)를 두고 그 밑에 52방(坊)을 두었다.같은 해 9월에 성벽과 문루(門樓)가 완성되어 왕성은 주위에 견고한 성벽이 쌓여진 성곽도시가 되었다.1398년 왕자의 난이 일어나고, 정종이 즉위하면서 한때 수도를 개성으로 옮긴 일이 있었으나, 태종(太宗)이 즉위하자 곧 한성으로 다시 환도하였다. 환도한 다음 해부터 궁궐을 수축하면서 도읍지로서의 여러 시설을 갖추어갔다. 노폭 56척(尺)의 운종가(雲從街-지금의 종로 1가에서 종로 네거리까지)를 비롯하여 노폭 16척, 11척의 각종 도로를 만들고, 그 양쪽에는 가가(假家)라고 부르는 상점을 만들어 번화하게 하였는데 상점이 들어서 있는 토지는 10년을 한도로 대여하여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간선도로변에는 2척의 구거(溝渠)를 만들어 배수가 잘 되게 하였다. 또한 개천(開川-지금의 청계천)을 준공하여 배수가 잘 되게 하였고, 도읍지의 미관과 화재예방을 위하여 초가(草家)의 건축은 억제하였다.1592년 선조 때의 임진왜란과 1624년 인조 때의 병자호란으로 입은 피해는 흥선대원군 때에 와서 많이 복구가 되었다.1876년 개항 이래 한성에는 새로운 문명시설이 갖추어져 갔다. 근대적인 병원·학교·교회·신문사 등이 세워졌고, 1898년에는 서대문과 홍릉(洪陵) 사이에 전차가 부설되고, 1899년에는 경인선의 개통과 전화의 가설, 1900년에는 한강가교가 준공되었다. 그러나 계속하여 근대적인 상공업 발달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일제시대의 서울[편집]

日帝時代-

1910년 경술국치 이후에 한성부는 일제 식민지의 행정 중심지로서, 명칭도 경성부(京城府)로 바뀌었으며, 경기도의 일부가 되어 그 지위도 낮아지게 되었다.행정구역은 종전대로 성내(城內)는 5부로 구분하고 성밖(城外)은 용산·서강·숭인·두모(豆毛)·인창(仁昌)·은평·연희·한지(漢芝)의 8면(面)으로 구분하였다가 1913년에 행정구역을 변경하여 1914년에는 용산·숭인·인창·한지·두모면의 일부를 경성부에 편입시켰다.1919년 경성의 인구가 48.8만 명이었던 것이 일본인들이 급속하게 이주하여 오는 등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구는 계속하여 증가하고 일본인 주택지가 새로 조성되었다. 즉 남산 북사면(北斜面) 일대의 필동·남산동·인현동·쌍림동·장충동·회현동과 남대문 밖 서울역 부근의 후암동·청파동·효창동·용문동·원효로 등지의 용산 방면에 일본인 주택지가 생겨 일본식 목조가옥이 늘어서게 되었다. 후에는 을지로와 명동·충무로에 일본인 상가도 형성되었던 것이다.1935년에 인구가 40만 4천만 명으로 증가하자 1936년에는 고양군·시흥군·김포군 관내의 일부 지역을 경성부에 편입시켜 면적이 133.94㎢가 되었고, 용산·영등포·동부에 출장소를 두었다. 종로·남대문로·태평로를 중심으로 번화한 도심지가 형성되어 가고, 청량리·마포·돈암동·영천(靈泉)·영등포 등의 전차 종점과 전차 노선 부근은 계속 도시화가 이루어졌고, 주변은 근교 농촌으로 있었다. 그러나 아현동 일대와 숭인동·신설동 등지에는 순수한 한국인 주택지가 조성되어 갔다.1943년에 행정구역은 종로구·중구·동대문구·성동구·용산구·서대문구·영등포구의 7구로 나누어 각각 구청을 둔 구제(區制)를 실시하였고, 1944년에는 고양군 연희면을 편입시켜 행정구역을 조정하고 마포구를 신설하였다.일제는 시가지 정리에 주력을 한다고 하여 1913년에는 성벽을헐어 도로를 만들고 확장한 결과 성곽 도시의 면모를 달라지게 하였고, 1939년에는 남대문에서 종로·을지로·퇴계로 등 도심부는 상업지역, 영등포·용산에서 마포·서강 일대와 청계천 하류의 답십리 일대는 공업 지역, 기타 지역은 주택지구로 정하는 지역제(地域制)를 실시함으로써 서울이 근대적 도시로 발전할 계기를 맞게 되었던 것이다.

광복 이후의 서울[편집]

光復以後-

1945년 8월 15일 광복으로 서울은 한때 미군정 관할하에 있기도 하였으나, 그 해 10월 행정의 책임자가 우리나라 사람으로 바뀌었다.1946년 8월 16일 경기도에서 독립하여 서울자유특별시가 되면서 행정상의 직능과 권한이 도(道)단위와 같게 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1일에는 종래에 써 오던 가로명(街路名)과 동명(洞名)의 일본식 명칭을 없애고, 우리나라 선현(先贅)들의 아호(雅號)와 고유명칭으로 바꾸었다. 이때부터 서울의 인구는 해마다 증가하였고, 주변 지역은 크게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정부수립 이후의 서울[편집]

政府樹立以後-

정부가 수립되면서 서울은 대한민국(大韓民國) 수도로서의 기반을 다지고, 국제적인 도시로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가로를 확장하여 대로변에 있는 일본식 상점 건물은 철거하고 새로운 양식의 건물을 세우기도 하였다.1949년 8월 15일 서울의 명칭을 서울특별시로 결정하고, 고양군의 숭인면·은평면·연희면 일부와 시흥군의 신동면을 서울에 편입시켜 면적이 268.3㎢로 확장되고 인구는 141만 8천 명이 되었다. 그리고 새로 성북구가 증설되어 구는 9개로 늘었다.그러나 한국전쟁으로 정부는 부산으로 일시 옮겨 가고 시가(市街)는 심한 전재(戰災)를 입었다. 즉 정부기관·공공시설·공장·학교·주택 등의 도시의 기본적인 시설이 일시에 파괴되어 많은 피해를 입게 되었다.휴전(休戰) 후 전국 곳곳에 피난갔던 시민들이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따라서 서울은 전후(戰後) 복구사업에 착수하였고, 시민들의 생활도 활기를 띠게 되었다. 그 후 서울은 계속 발전하여 1960년 말에는 244만 5천만 명의 인구가 생활하고 있는 대도시로 발전하게 되었다.1961년 5·16군사정변 이후 서울은 또다시 새로운 발전을 하게 되었다. 수도 서울의 건전한 발전을 도모할 목적으로 서울특별시는 행정상 내무부장관의 감독권을 벗어나, 국무총리에 직속되게 되었다. 따라서 서울특별시장은 소관사무에 관하며 국무회의에 출석하여 발언을 할 수 있게 되었다.인구의 증가로 시가지의 확대가 불가피하게 되어 1963년에 양주군의 구리면·노해면, 광주군의 구천면·언주면·중대면·대왕면, 김포군의 진동면·진서면, 부천군의 오정면·소사면, 시흥군의 신동면의 전부 또는 일부를 성동구·동대문구·성북구·영등포구에 각각 편입시켜 시역(市域)은 강남지구와 북동부쪽으로 크게 확대되었고 면적은 613.04㎢가 되었다. 따라서 도심부에 있는 주택·학교·공장의 일부가 천호동·불광동·남가좌동·월곡동·장위동·화계동·공항동 등의 주변지역으로 이전하게 되었다.그리고 1960년경 이후부터 도심지에는 많은 회사와 금융기관이 집중하게 되면서 사무실이 부족하게 되고, 지가(地價)가 급속하게 상승되면서 도심지의 토지이용에 큰 변화가 생겼다. 그래서 1960년경부터 소공동(小公洞)·명동(明洞)·서소문·퇴계로·충무로 1가·회현동 등지에는 10∼20층 내외의 고층건물이 들어서서 도심지의 스카이 라인(skyline)은 높아져 갔다. 즉 서울도 근대적인 거대 도시(巨大都市-metropolitan)로서의 경관을 보이게 되었다. 그 반면 도심지에 있었던 주택지는 점점 줄어들어 공동화 현상이 나타남으로써, 청계·종로·수송·방산·일신·서대문 초등학교가 폐교되었다. 한편 강남의 영동지구에는 신흥주택 단지, 여의도와 반포지구에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기 시작하였다.1973년에도 다시 서울의 인접 지역이 편입되어 면적은 627.06㎢ 가 되었고 도봉구·관악구의 2개 구가 신설되어 11개 구가 되었다. 1975년에는 강남구, 1977년에는 강서구, 1979년에는 은평구·강동구, 1980년에는 구로구·동작구가 신설되어 총 17개 구가 되었다.이어 1988년까지 양천구·서초구·송파구·중랑구·노원구가 신설되었고 1996년 광진구·강북구·금천구가 신설됨으로써 서울특별시의 행정구역은 총 25개 구로 늘어났다.

서울의 인구[편집]

서울 인구의 증가[편집]

-人口-增加 서울의 인구는 지방인구의 도시집중 현상으로 급격하게 늘어나서 과밀화 현상을 빚어내고 있다.

1919년에 인구 24만 8천 명, 인구밀도 6,873.5명이었던 것이 1925년에는 인구 33만 6천 명, 인구밀도 9,296.5명, 1930년에는 인구 33만 5천 명, 인구밀도 9,823.8명, 1935년에는 인구 40만 4천 명, 인구밀도 11,171.9명에 달하였다. 이에 따라 1936년에 시역(市域)을 확장하여 인구는 72만 7천 명으로 증가하고 인구밀도는 5,429.6명으로 감소하였다.

1945년 광복 당시의 인구는 90만 1천 명, 인구밀도 6,627.7명이었는데, 전시(戰時)에 피난 갔던 사람이 다시 돌아오고, 해외동포의 귀국, 북한(北韓)에서의 월남 동포, 지방의 영세민이 집중함으로써 1946년에는 인구가 126만 6천 명으로 급격하게 증가하여 인구밀도는 9,309.3명이 되었다. 1948년에는 인구 170만 7천 명에 인구밀도 12,055명으로, 1949년에는 136.05㎢이었던 시역(市域)이 268,35㎢로 확장되었고 인구는 141만 8천 명, 인구밀도는 5,284.2명으로 되었다.

1951년에는 한국전쟁으로 인구가 64만 8천 명, 인구밀도는 2,416.3명으로 급격하게 감소하였다. 그러나 1953년에 휴전과 환도(還都)로 다시 인구가 급격하게 증가하기 시작하여 1955년에는 인구 157만 4천 명, 인구밀도 5,868.7명, 1960년에는 인구 244만 5천 명, 인구밀도 912.7명, 1965년에는 인구 347만명, 인구밀도 5,661.8명, 1970년에는 인구는 552만 5천 명, 인구밀도 9,012.8명, 1980년 인구는 836만 4천 명, 인구밀도 13,074명, 1985년에는 가구수 232만 5천에 인구는 964만 5천 명, 인구밀도가 15,933명이 되었다. 이상 서울의 인구증가를 보면 1960년경부터 우리나라의 경제성장과 함께 각종 산업이 발전하면서 고용 증대가 이루어졌고 이에 따라 농촌인구가 급격하게 서울로 집중하게 되었다. 1988년 인구 1,000만 명 이상의 거대도시가 되었다. 서울은 자연증가보다 사회증가에 의하여 과밀화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정부(政府)는 서울의 인구수용 상한선을 결정한 적도 있었으며, 인구집중의 억제와 인구를 지방으로 분산시키는 정책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2002년 12월 현재 서울 인구는 1,028만 523명으로 최근 들어서 계속 감소추세에 있다. 이는 분당·일산·평촌·중동 등 신도시와 기타 교외지역으로의 이주에 의한 것이다.

서울의 구별 면적과 인구 현황

(2002.12.현재)


구 분

구 별

행정동수

면 적(km2)

가 구

인 구

25구

522

605.52

3,623,929

10,280,523

종 로

용 산

성 동

동 대 문

성 북

도 봉

은 평

서 대 문

마 포

강 서

구 로

영 등 포

동 작

관 악

강 남

강 동

중 랑

노 원

양 천

서 초

송 파

광 진

강 북

금 천

19

15

20

20

26

30

15

20

21

24

22

19

22

20

27

26

21

20

24

20

18

28

16

17

12

23.91

9.96

21.87

16.85

14.22

24.57

20.80

29.72

17.60

23.87

41.40

20.11

24.57

16.35

29.57

39.54

24.58

18.50

35.42

17.40

47.16

33.89

17.05

23.60

13.00

70,113

54,521

91,735

123,394

143,014

159,810

122,201

164,981

134,023

142,790

181,422

142,342

147,838

144,854

197,578

193,857

164,155

154,085

209,521

158,639

138,627

223,754

141,367

126,252

93,056

184,224

141,603

245,218

343,018

384,356

446,968

373,086

471,873

368,001

378,777

530,169

415,789

412,152

404,872

524,560

540,813

483,004

443,246

643,585

486,350

393,583

649,888

388,478

362,906

364,004

자료:한국행정구역총람편찬회, 「한국행정구역총람」 2003

서울의 자연[편집]

서울의 상징물[편집]

-象徵物

서울시를 상징하는 꽃은 개나리, 나무는 은행나무, 새는 까치이다.

서울의 위치[편집]

-位置

서울은 한강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넓게 자리잡고 있으며, 한반도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어서 예부터 우리나라 정치·행정·경제·사회·문화의 중심지가 되어 왔다. 북위 37

33

, 동경 127

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서간의 거리는 36.78km, 남북간의 거리는 30.3㎞ 이며, 그 넓이는 606.37㎢ 이다.

서울의 지질[편집]

-地質

서울의 지반은 주로 중생대말(中生代末)에 관입(貫入)한 담홍색의 아름다운 화강암과 고생대 이전에 이루어진 화강편마암(花崗片麻岩)의 두 종류로 되어 있다. 화강암은 서울의 동북구와 관악산 일대에 분포되어 있고, 화강편마암은 주로 남서부 일대에 분포되어 있는데, 그 경계선은 대체로 북아현동에서 서소문, 남산 서쪽을 돌아 한남동과 행당동을 지나고 있다.화강암은 조립질(祖粒質)이면서 다른 암석과는 다르게 절리(節理)가 잘 발달하고 풍화작용에 약하며, 도봉산·백운대·인수봉과 같은 기봉(奇峰)과 기암절벽을 만들어 서울 특유의 절경을 보여 주고 있다. 또한 박리가 쉽게 되어 돔상(dome狀)의 원정봉(圓頂峰)을 이룬 곳도 있다. 한편 홍제동·안암동·창신동·장위동 등지의 화강암은 몇 해 전까지만 하여도 건축재로 쓰였다.화강편마암은 견고한 암석이지만 접착성이 적기 때문에 쉽게 붕괴되어 준봉은 이루지 못하나, 작은 기복을 이룬 노년기 지형을 나타내주고 있다. 특히 동작동 부근의 화강편마암은 판상(板狀)으로 쉽게 박리(剝離)되며 온돌의 구들장으로 쓰였고, 화강편마암이 풍화되어 된 천호동의 점토는 벽돌과 옹기 제조의 원료로서 많이 쓰였다.

서울의 지형[편집]

-地形

서울은 북한산을 최고점으로 한 고양·양주구릉과 경기평야의 접촉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주위에는 북한산(836m)·도봉산(717m)·인왕산(338m)·관악산(629m) 등 500m 내외의 산과 구릉이 자연성벽과 같이 둘러싸고 있는 분지이다.광주산맥의 한 줄기인 도봉산은 백운대·인수봉·노적봉의 3개 봉우리가 솟아 있는 북한산과 이어져 있고, 그 산줄기는 다시 남으로 뻗어 북악산(北岳山 342m)을 솟게 하였다. 그리고 북악산에서 동으로 뻗은 산줄기에 낙산(駱山 125m), 서로 뻗은 산줄기에 인왕산이 있다. 인왕산에서 뻗은 산줄기 중 남쪽으로 뻗은 것은 남대문을 지나 남산(南山 265m)·응봉(鷹峰 175m)과 이어져 있고, 서쪽은 무악재의 안부(鞍部)를 지나 안산(鞍山 296m)과 이어져 있는데 모두 구릉성 산지이다.한강 건너에는 100m 이하의 구릉지가 펼쳐져 있고, 남쪽에 관악산(629m)이 천연의 요새와 같이 서울의 외곽에 솟아 있다.한편 남산·북악산·인왕산·낙산 등 서울 시내로 향한 산지사면(山地斜面)은 동쪽으로 흐르고 있는 청계천이 오랫동안 침식을 하였다. 이 침식으로 북악산의 남사면에는 남쪽으로 향한 산각(山脚), 남산의 북사면에는 북쪽으로 향한 산각이 무수하게 발달되어 산지 사면은 기복이 많은 지형이 되었다. 시내에서 규모가 큰 산각 중의 하나는 명륜동과 창경궁을 지나 종로에 이르는 산각이다. 이와 같이 북에서 남으로, 남에서 북으로 뻗은 산각으로 인해 동서로 지나는 가로는 평탄하지 않고 많은 기복이 생겼다. 옛날에 있었던 을지로 입구의 구리개, 조선일보사 앞의 황토현(黃土峴)이란 기복은 가로공사와 도시개발에 따라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으나, 현재도 율곡로·퇴계로·을지로 곳곳에서 기복을 찾아볼 수 있다.또한 산각이 지나간 곳에는 고개 또는 현(峴)이란 지명이 남아 있다. 즉 충무초등학교 부근의 풀무고개 또는 대장고개(治峴), 인현(仁峴)·종현(鍾峴)·진고개(泥峴), 계동(桂洞) 일대에 관상감현(觀象監峴), 가회동 일대에 맹현(孟峴)·홍현(紅峴)·안현(安峴)·송현(松峴)·배고개(梨峴) 등이 있다.한편 이 산각은 조선시대에 잘 이용되었다. 풍수설에 따라 북악산 기슭의 산각에는 경복궁·창덕궁·창경궁·종묘, 인왕산 기슭의 산각에는 덕수궁을 지었고, 궁궐 사이의 산각은 궁인(宮人)·귀족·고관 들의 저택지로 이용하였다.산지사면의 침식으로 운반된 토사는 청계천 연안에 퇴적되어 평탄한 시가지를 형성하게 하였다. 따라서 도심지에서 가장 평탄한 곳은 청계천 북쪽의 연안으로 동대문에서 세종로 사이의 종로이며, 이곳에서는 지형의 기복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삼각지로부터 해발고도 20m의 갈월동을 지나면 지형이 차차 높아져서 서울역 앞에 오면 더욱 높아지기 시작하고 남대문 부근은 해발고도가 40m 내외가 된다. 이곳은 분수계(해발 36.6m)가 되어, 동으로는 청계천이 동으로 흘러 중랑천과 합류하고 서로는 갈월천이 흐르고 있다.청계천은 인왕산의 남사면에서 흘러내린 물이, 북악산의 남사면에서 흘러내리는 중학천·청운천·대학천·성북천과 남산의 북사면에서 흘러내리는 장충천·필동천·오장천·신당천과 합류한 다음, 하류에서 정릉천·월곡천·전농천과 다시 합류하여 중랑천으로 흘러들어가 뚝섬 부근에서 한강으로 흘러가는 개천(開川)이다. 이 개천은 서울 도심부에 내리는 빗물이나 하수를 한강으로 흘러가게 하는 자연적인 하수구가 되어 도심지의 지반을 습하지 않게 하여 주고 있다.이 청계천(개천)은 태종 12년에 개수하고, 330여 년이 지난 영조 때에 자연적으로 곡류하던 유로(流路)를 준설도 하고 직선으로 흐르게도 하였다. 그리고 양안(兩岸)에 석축을 쌓았고, 관수동 부근에는 홍수 때 수위를 측정하는 수표(水標)를 세웠다. 그리고 청계천의 남북을 서로 왕래할 수 있도록 혜정교(광화문우체국 부근)·광통교(광교)·장교·수표교·철물교·효경교·초교 등의 많은 다리를 놓았다. 2003년 현재 복개되었던 청계천의 복원 공사가 진행 중이다. 청계천 복원 공사는 2005년 9월까지 계속될 예정이다.강북과 강남 사이에는 남산 남쪽을 북동-남서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 한강 하류가 지나고 있다. 하류이기 때문에 구배(勾配)는 완만하며 물의 흐름은 느리나, 홍수 때는 상·중류의 유역 지방으로부터 흘러내려오는 물 때문에 수위가 높아진다. 여의도와 잠실은 상류로부터 운반되어 온 토사가 퇴적된 하중도(河中島)이다. 이 섬은 제방을 쌓아 신흥 아파트 단지가 되어 새로운 주택지로서 발달되었다.한강물은 광장·뚝섬·노량진 멀리는 팔당 저수지로부터 물을 끌어들여 서울의 음료수·공업용수로 이용되고 있다.옛날에는 뚝섬과 마포에 하항(河港)이 있어 번창하였으나 최근 육상교통이 발달되면서 자취가 사라졌다. 또한 노량도(서울

시흥)·양화도(서울

인천)·한남도(서울

용인)·송파도(서울

광주)·광나루(서울

광주) 등의 나루터가 있었으나 대교가 가설된 후부터 옛날의 나루터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서울의 기후[편집]

-氣候

서울은 위도상 중위도(中緯度)에 위치하고 있어 온대성 기후를 보인다. 연평균 기온은 11.1

이며 8월의 월평균 기온은 25.4

, 1월의 월평균 기온은 -4.9

이다. 여름 기온과 겨울 기온의 연교차가 30

로 비교적 크기 때문에 겨울은 몹시 춥고 여름은 무더운 대륙성 기후이기도 하다.시내의 기온분포는 중구와 같이 가옥이 밀집한 곳과 많은 자동차가 배기가스를 뿜으며 지나는 간선도로, 그리고 도심부의 포장도로가 지나는 지역이 가장 기온이 높고, 한강 연안과 가옥의 밀집도가 낮은 지역은 기온이 낮게 나타나고 있다.한편 도심부의 기온은 1945년 이후 근 45년 동안 여름철의 6, 7, 8월 3개월을 제외하고는 해가 거듭될수록 높아지고 있다. 즉 이러한 기록을 기초로 하여 이 상태로 계속 기온이 높아진다고 가정하면 약 100년간에 평균기온은 1.8

, 일최저기온의 연평균치는 4.1

씩 높아질 것이 예상된다. 반면 시내의 습도는 점점 줄어들어 1950년 이후 1970년까지 약 2%가 감소되었다.서울의 연평균 강수량은 1,259mm인데, 1940년에는 2,135mm, 1949년에는 633mm가 내리는 등 기복이 많다. 한편 연강수량의 약 60%가 여름철과 장마철에 내린다. 서울은 네 계절이 뚜렷하며, 여름과 겨울은 몹시 길고, 봄과 가을은 매우 짧다.봄은 3월부터 시작되는데 월평균기온이 0

이상으로 올라가고 날씨는 따뜻해진다. 그러나 북서풍이 불어올 때 황사현상이 일어나기도 한다.여름은 20

이상의 기온이 계속되며 7, 8월에는 30

내외의 무더운 날씨가 많아 열대기후와 다를 바가 없을 정도이다. 또한 장마가 계속되어 많은 비가 내리므로 홍수의 피해가 클 때도 있다.가을은 하늘이 높고 맑은 날이 계속되며, 기온은 차차 내려가 선선한 날씨가 계속된다.겨울은 기온이 -0

이하로 내려가는 날이 100일 내외, 최저기온이 -10

이하로 내려가는 날이 29.4일로서, 추운 날이 비교적 오래 계속되고 있다. 눈이 내리는 기간은 125일, 얼음이 어는 기간은 164일이나 강수량과 강수일수는 여름에 비하면 매우 짧아 건조한 날씨가 많다.우리나라는 계절풍 지대에 속하고 있기 때문에 서울은 여름에 남동풍, 겨울에 북서풍이 빈번하게 불고 있다.도심부에서 도로 위를 부는 도로바람은 남산의 북사면에서 발달한 차가운 공기가 충무로 지하상가 위를 지나 을지로 입구 쪽으로 이동하고 있기 때문에 퇴계로 2가 부근이 가장 강하게 불고 있다.한편 시내에는 큰 건물과 공장의 굴뚝에서 내뿜는 매연, 자동차의 배기가스 등의 오염물질이 늘어나면서 시내에 내려쬐는 태양광선의 투과를 어렵게 하고 있으며, 따라서 시내에 내리쬐는 일사량은 매년 감소되어 가고 있다.비행기나 높은 산 위에서 시내를 내려다보면 연기와 먼지를 품은 오염대기층인 연진모자가 상공을 덮고 있어 시계(視界)를 나쁘게 하고 있다.

서울의 지역적 구조[편집]

서울의 도심지구[편집]

-都心地區

도심지구는 도시인의 사회·경제·문화적인 생활권의 중추기능지대일 뿐만 아니라 서울의 경우는 국가 전역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국가의 핵심적 기능을 관장하고 있는 기관이 집중되어 있는 지역이다. 조선시대에는 광화문과 광교를 연결한 지역을 도심부로 한정하였으며, 현재는 종로와 중구 일대가 도심지로 되고 있다. 즉 이곳에는 우리나라의 중앙행정기관과 서울시청을 비롯하여 회사·금융기관, 각종 보도기관 등의 중추관리기관이 집중되어 있다.

관청가[편집]

官廳街

교통이 편리한 세종로에는 중앙청과 정부종합청사를 비롯하여 행정 각 부처, 태평로에는 서울시청 등 국가의 중추적 정치행정관서, 정동(貞洞)에는 외국의 외교관들이 국가 행정기능 상호간의 기능적 효율성을 높이기 위하여 구심적으로 집중되어 있다. 또한 이 지역에는 경제·행정적 관리기관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변호사·회계사·건축 설계사 등의 대리업이 집중되어 있다.

업무 중심지구[편집]

業務中心地區

소공동과 태평로 1가, 명동 등에는 기업관리기능의 본사(本社)와 무역회사, 여행사, 소공동·태평로·서소문에는 보험회사, 명동과 을지로 입구 사이에는 증권회사, 남대문로 1가에는 은행의 본지점 등의 금융기관, 태평로에는 행정·경제적 관리기능과 가까이 위치하여야 할 신문사가 있다.최근 서울시의 인구분산정책에 따라 일부 기관과 회사가 주변 지역이나 지방으로 이전하려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으나 아직도 이 부근의 교통은 매우 혼잡하고, 주야간의 인구 이동이 심하다. 1960년대부터 이 지역에는 삼일로 빌딩을 비롯한 고층건물이 들어서고, 37층의 롯데호텔 등이 있어 서울의 도시경관을 크게 변화시키고 있으며 1980년대부터는 강남·강동 지역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이들 두 지역이 서울의 중심가로 변모되고 있다. 특히 테헤란은 새로운 업무 중심지구로 자리를 잡았다.

상업지구[편집]

商業地區

상업지구는 도심상가와 시장을 중심으로 나눌 수 있다. 도심상가는 명동·충무로·종로·을지로·청계로 등을 중심한 지역인데, 판매되고 있는 상품이 전문화되고 있다. 명동·충무로 일대는 고급 의상과 양품(洋品), 각종 유행품, 남대문로 2, 3가와 종로 2, 3가는 금·은·시계 등 고급품, 종로와 을지로 입구 부근은 양복을 파는 상점이 모여 있다. 을지로 3가에서 5가 사이에는 건축재, 청계천 2, 3가와 봉래동 1가에는 공구(工具)와 기계류, 을지로 2가와 아현동에는 가구(家具), 광희동에는 자동차 부속품, 종로 4가에서 동대문 사이에는 한약재와 묘목·씨앗, 청계로 5가는 고본점(古本店)들이 몰려 있다. 백화점은 남대문로와 명동에 모여 있다.용산 일대에는 전자상가들이 밀집해 있다. 특히 컴퓨터 관련 제품을 판매하는 상가들이 많아 주로 젊은 층의 고객들이 발길을 잇고 있다.도매시장인 동대문시장은 일상용품과 각종 직물, 남대문시장은 일상용품과 청과물 중부시장은 건어물, 용산의 청과시장은 청과물, 노량진의 수산시장은 수산물, 서초동의 양곡시장은 양곡, 제기동의 경동시장은 고추와 마늘 등을 도매하고 있다. 한편 도심지와 떨어져 있는 주변지역인 신촌·미아리·청량리·영등포·천호동 등지에는 상가와 상설시장이 개설되고 있어 일상생활에서 필요로 하는 물건들을 공급하고 있다.시내 요소에는 슈퍼마켓이 있어서 근대적인 유통과정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상업기능 분포를 보면 이전의 중심지였던 종로구·중구의 점유비가 1980년대 이후 점차 줄어 들고 있으며 강남·강동은 증가하고 있다.

환락지구[편집]

歡樂地區

강남·강동구와 명동·무교동·다동(茶洞), 종로 2,3가 일대와 북창동·청진동·낙원동·입정동·인현동·방배동의 뒷거리, 그리고 청량리·영등포·천호동의 부도심에는 고급호텔·대중음식점·나이트 클럽·다방·오락실 등이 모여 있다. 따라서 이곳은 낮의 점심시간과 저녁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즐기고 있다. 또한 종로 3가와 을지로 4가, 초동(草洞) 일대에는 극장들이 모여 있다.

학교지구[편집]

學校地區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는 학구(學區)에 따라 시내에 비교적 균등하게 분포되어 있으나, 대학은 주로 도심부보다 비교적 넓은 부지를 쉽게 확보할 수 있는 주변지대에 많이 위치하고 있다. 신림동에 서울대학교, 신촌에 연세대·이화여대·서강대·홍익대, 안암동에 고려대, 이문동에 경희대·외국어대, 전농동에 서울산업대, 모진동에 건국대, 한남동에 단국대, 흑석동에 중앙대, 상도동에 숭실대, 서초동에 교육대 등 모두가 도심부로부터 4∼12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대학이 위치한 곳은 교문(校門) 앞이 상가, 부근에는 주택지가 형성되어 도시화가 촉진되고 있다. 그러나 최근 서울의 인구분산정책에 따라 일부 대학은 지방으로 이전 계획을 세우고 있거나 분교(分校)를 설립한 대학이 많이 있다.

공업지구[편집]

工業地區

서울의 공업지구는 주변 공업지역과 도심구와 공업지구로 나눌 수 있다.주변 공업지구는 영등포의 문래동·당산동, 구로동의 수출공업단지, 김포가도 연변, 용산에서 마포·수색에 이르는 한강변지대, 청계천 하류의 답십리동과 전농동, 중랑천변의 면목동, 장위동·공릉동·창동 일대, 뚝섬의 성수동에서 천호동에 이르 는 한강연안, 오류동과 시흥동 등지이다. 이곳은 지가(地價)가 싸며, 풍부한 용수(用水), 폐수 처리가 용이하다는 등의 이점이 있어 공장이 입지한 곳이다.영등포와 구로 공업지역은 서울 최대의 공업지대이다. 1920년 피혁공장의 건설을 시작으로 공업이 발달한 것이 현재는 섬유공업을 비롯하여 화학·음료품·식품·기계·철강·전기기기·금속제품 등을 생산하고 있다. 최근 영등포 공업지역은 경수(京水)·경인가도(京仁街道)를 따라 발전되고 있다.뚝섬 공업지역은 영등포 다음으로 공업이 발달한 지역이다. 1963년 이전까지는 서울의 근교 농업지역이었으나 공항이 들어서면서 공업지역이 된 것이다.주로 섬유제품과 화공제품·전기기기·금속제품·의약품을 생산하고 있다. 최근 하천오염 등 공해 문제가 대두하면서부터 일부 공장은 지가가 비싼 이곳의 공장을 처분하고 지가가 싼 지방의 공업단지로 이전하고 있다.용산 공업지역은 주로 금속제품과 원동기·산업용기계·전기기기·수송용 기계 등을 생산하고 있다.도심 공업지구는 상가나 주택가에 혼재하고 있는데, 종로·을지로에는 업무중심지구에서 많이 쓰이는 인쇄·출판, 오장동 일대에는 소규모의 직물과 편직물, 남대문로와 종로 3가·청계천 7가에는 의류, 을지로 3가와 청계천 3가 사이에는 소규모 기계공업이 행해지고 있다.

구로동 수출공업단지[편집]

九老洞輸出工業團地

구로동 수출공업단지는 수출공업을 보다 효과적으로 육성하고 수출산업(輸出産業)을 집단화할 것을 목적으로 설립한 공업단지이다. 1964년부터 62만 평의 단지를 조성하기 시작하여 현재는 많은 공장이 입주하여 봉제품·합성수지 제품·전자기기 제품·과학기기 제품·가발 등을 생산하고 있다.

주택지구[편집]

住宅地區

서울의 주택지구는 주택단지와 아파트단지 부근의 오래 된 한옥주택지와 그 주변의 중류주택가, 주변지역의 신흥주택단지, 점재해 있는 하류주택지로 나눌 수 있다.도심지 부근에 오래 된 한옥주택지는 삼청동·가회동·청진동 등이다. 이 지역은 조선시대 말에 상대(上垈)라고 하여 왕족·귀족·고관들의 전통적인 한식 가옥이 많이 밀집되어 남아 있다. 그러나 지은 지가 오래 되어서 낡은 집이 많다. 최근 청진동 등 도심부의 한옥은 상가 또는 환락지구의 대중음식점이나 요정으로 변모해가고 있다.남산의 북쪽과 남서쪽, 그리고 용산 방면의 일본인 거주지역이었던 곳의 일본식 목조건물은 많이 없어지고 새로운 주택이 들어서고 있다. 필동·회현동·청파동의 일부 지역은 최근에 와서 중류 고급 주택지화되어 가면서 주택지의 모습이 서양식으로 많이 닮아지고 있다.광복 전에는 새로운 한식주택지가 아현동·마포·숭인동·신설동과 왕십리·청량리·돈암동 등에 형성되었다. 그 후 서울의 계속되는 인구 증가로 광복 후부터 1960년대까지 산사면(山斜面)이었던 옥수동·금호동·행당동·응봉동·홍제동·홍은동·만리동·한남동·전농동과 청계천변 등에 주택지가 형성되었다. 이어서 신당동·마장동·뚝섬·답십리·성북동·미아동·서교동·상도동에 주택지가 형성되었다. 이 중 한남동의 일부와 성북동은 현재 고급 주택지로 변모하였다.1960년 이후 급속한 경제성장에 따라 사회가 안정되고, 서울 광역도시계획(廣域都市計劃)에 의해 토지를 구획정리하면서 주변지역에 주택단지(住宅團地)를 건설한 결과 서교동·성산동·연희동·남가좌동·불광동·녹번동·수색동·화계동·수유동·도봉동·월곡동·장위동·면목동·중곡동·천호동·영동지구·화곡동·공항동·신림동·개봉동·시흥동 등에 주택지가 형성되었다. 이들 주택지는 지가(地價)가 싸고 대기오염과 소음 등의 공해가 적고 공기가 맑고 한적한 곳이기 때문에 급속하게 신흥 주택단지로 개발된 것이다.한편 여의도·반포지구·영동지구의 일부와 잠실지구, 상계동·창동·중계동지구 주택공사와 민간기업이 건설한 아파트로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형성되었다.

녹지[편집]

綠地 조선시대 말까지만 하여도 서울의 녹지는 주위의 산지나 성(城)에 넓게 있었다. 그러나 일제시대에 서울을 근대도시화한다는 명목 아래 녹지에 주택·학교·공공건물·병원·공장 등의 도시시설을 세워 녹지의 넓이를 줄게 하였다.최근에도 도시주변의 녹지에 도심지에서 이전하여 온 도시적 시설을 세우고, 주택을 건설하여, 녹지공간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 중 녹지가 가장 많은 구는 녹지가 있는 강남구이고, 이어서 영등포·강동구·마포에 비교적 녹지가 많이 있다.한편 서울시는 1971년 은행나무를 서울의 나무로, 개나리를 서울의 꽃나무로 지정, 가로수 등으로 널리 심고 있다.

여의도[편집]

汝矣島

1916년 일제에 의하여 이곳에 간이비행장이

건설되면서 섬의 존재가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68년 윤중제(輪中堤) 공사를 착공한 뒤 한국의 정치·경제·문화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다. 여의도 광장을 경계로 업무지구와 주거지구로 나누어지는데 서쪽으로는 국회의사당·KBS본관·SBS방송국·동아일보사 등이 있고, 동쪽에는 MBC방송국·전국경제인연합회·증권거래소·아파트단지가 있다. 최근 여의도광장은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주변근교 농업지역[편집]

周邊近郊農業地域

근교 농업 지역은 토지 이용의 방식을 바꾸어 수익성이 높은 과실·채소·특용작물을 재배하고 있다. 따라서 근교 농촌에는 곳곳에 비닐하우스가 있어 연중 계속하여 신선한 야채류를 공급하고 있다.한편 도시화되어 가면서 지가가 상승되어 경지가 주택지·유휴지화한 곳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오래 전부터 성가가 높았던 묵골(묵동)의 배, 경인가로변의 복숭아, 서초동·녹번동·수유리 일부의 꽃 재배 등을 볼 수가 있다.

부도심[편집]

副都心

서울이 급격하게 거대화하면서 영등포·청량리·천호동과 같은 도시 주변지대에 시가지가 형성되고 도시기능의 일부를 분담하고 있는 부도심으로 발달되었다. 이 부도심은 지가(地價)가 비교적 비싸지면서 건물이 고층화되어 가고 업종구성도 다양해지고 있다.즉 백화점·은행·음식점·다방·사교오락장과 번화한 상가가 형성되어 도심지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도심에 비하여 관리기관이 적은 점이 특색이다.부도심 영등포는 1899년에 개통한 경인선과 1905년에 개통한 경부선의 분기점인 영등포역이 생긴 이후부터 신시가지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그 후 1917년 한강인도교(제1한강교)가 가설되어 시내와의 왕래가 빈번해지면서 더욱 발전하였다. 이 당시에 주거지역은 영등포역 부근과 본동(本洞)·당산리·양평리 등의 한강변이 주가 되었다. 1924년 전차가 영등포 역전까지 연장되면서 시가지는 더욱 급속하게 발달되었다.더구나 1920년에 대규모의 피혁공장이 세워지고 1931년경에 많은 공장이 건설된 것이 계기가 되어 인구는 급격하게 증가되고 영등포는 시흥군 영등포읍으로 승격되었다. 1949년에 서울에 편입되고 한강에 제2한강교·서울대교가 가설되고 여의도가 개발되면서 영등포는 시간적·공간적으로 도심지와 더욱 긴밀해지고 더욱 눈부시게 발전되어 1977년에는 인구 40만 명을 수용한 서울의 전형적인 부도심이 되었다.최근 영등포의 중심지에 있는 상가가 확대되면서 공장지대의 일부는 이전되고 있으며 공장지대는 경인·경수 가도를 따라 발전되고 있다.부도심 청량리는 철도와 버스·지하철 등 각종 교통의 결절점(結節點)에 발달한 대표적인 부도심이다. 동대문 밖은 토지가 저습하여 오랫동안 넓은 공지(空地)로 남아 있다가, 광복 후 광대한 배후 주택지를 갖고 급격하게 시가지로 진행된 곳이다.부도심 천호동은 근교 농업지역이었으나 1963년 서울에 편입되면서 1980년대 중반까지 급속하게 시가지화하였다. 특히 천호동 사거리를 중심으로 상가가 형성되면서 새로운 부도심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