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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우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계순이와 나와는 그의 평생에 세번의 기이한 해후를 가졌었으니 불과 칠년을 두고 일어난 이 세번의 기우(奇遇), 그때마다 그의 생활은 어떻게 변천하였으며 그의 운명은 어떻게 전개되었던가. 이 세번의 기우는 다만 파란 많은 그의 생애의 세 단면을 보여줌에 지나지 아니하나 이것으로써 능히 그의 기구한 일생도 엿볼 수 있다.

세번의 기우가 일어났으리만큼 그와 나와의 사이에 그 어떤 기연의 실마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나로서는 그의 박명한 생애를 한없이 슬퍼하고 그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속에는 크나큰 울분과 무서운 결심이 항상 새로와진다.

다음에 나는 이 세번의 기우를 순서대로 기록하려 한다. 아무 연락 없는 무미한 세 조각의 단편이 될지라도 그것은 나의 죄가 아니라 인생을 항상 그렇게 꾸며놓는 「우주의 의지」(?)의 죄일 것이다.

팔년 전이었다.

당시에 나는 우연한 관계로 어떤 괴상한 노파와 알게 되었었다. 넓은 장안 천지에는 생활의 어두운 이면에 무수히 잠겨 그들의 독특한 수단으로 생활을 도모하여 가는 한 계급이 있으니 그들은 침침한 어둠 속에 있어서 화려한 꽃과 꽃 사이의 중개의 역할을 하여 그들의 과거를 빛나게 하는 찬란한 꿈의 조각을 마음속에 어렴풋이 꽃 피우며 아울러 그들의 실생활을 도모하여 가는 늙은 「나비」의 무리이다. 나와 알게 된 노파도 말하자면 이러한 무리의 한 사람이었다.

노파와 나와의 사이에는 어떤 「상업적」약속이 있어서 그의 연출할 「나비」의 역할에 대하여 나는 이미 그의 요구하는 상당한 보수까지 치뤄준 터이었다. 그는 그의 역할의 제일보로 나를 약속한 곳으로 이끌고 갔다. 거기에서 나는 아직 알지 못하는 꽃을 선볼려는 것이었다.

「만나보시우만 사람은 그만하면 괜찮습니다. 학교 공부했것다, 속 잘 쓰것다, 생김생김도 숭굴숭굴하것다, 살림살이에야 아주 맞춰 놓았지 머…… 자꾸 인물만 찾으시니 어데 그렇게 붓으로 그려논 듯한 일색이 있단말유. 두구 보시우만 여자는 그래두 뭐니뭐니 해두 살림살이가 첫째라우.」

약간 허리 굽은 노파는 앞장을 서서 길을 인도하면서 이 늘 하는 소리를 몇번이나 되풀이 하였다.

「게다가 또 숫색시요, 영어 일어가 능란하구……」

큰거리에서 뒷골목으로 들어서고 뒷골목에서 다시 좁은 골목으로 구부러져 이렇게 지껄이는 동안에 어느덧 세가닥 진 골목 조그만 반찬가게 앞까지 오자 노파는 발을 머물렀다. 바로 그 집이 목적하고 온 집이었다. 가게에 아무도 없음을 깨닫자 노파는 뒤로 돌아가 조그만 대문 앞에 이르렀다.

다 쓰러져 가는 초옥이었다. 문패의 글자조차 알아보지 못하리만큼 끄슬린 집이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가슴속에 예상한 아름다운 꿈을 버리지는 않았다.

깊은 바다 진흙 속에 항상 진주는 잠겨 있는 법이다. 이 다 끄슬린 초옥 안에 얼마나……녹은 「진주」가 숨어 있을 것인가.

손쉽게 대문을 열더니 노파는 서슴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아름다운 꿈과 가벼운 수치의 념으로 자못 흥분된 나는 그리 쉽사리 들어서지도 못하고 문밖에 서서 한참 주저주저하였다.

무슨 담판이 그리 잦은지 꽤 오랫동안 지체시킨 다음에야 겨우 노파는 나와서 웃음과 눈짓으로 나를 맞아들였다. 처음 겪은 터이라 퍽도 열적어서 주저하고 있으려니 노파는 나의 손목을 잡아 끌었다.

얕은 지붕 헐어진 벽 찢어진 문 무너진 장독대―모든 것에 쇠퇴와 파멸의 빛이 역력히 드러나 보였다. 조그만 반찬가게를 경영하여 가지고 각각으로 기울어져가는 살림을 간신히 끌어가는 듯한 그 집의 형편이 첫 눈에 똑똑히 짐작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나의 목적하고 온 바는 그 속에 숨은 아름다운 「진주」에 있었으니까.

빨래할 옷가지로 구저분히 널어놓은 마루를 주섬주섬 치우더니 노파는 나에게 앉기를 권하였다. 마루 끝에 허리를 걸치고 한참이나 기다리고 있어도 아름다운 「진주」는 어느 구석에 묻혔는지 속히 나오지도 않았다.

「무얼 그러우 시체 양반이……기대리는데 얼른 나오구려.」

초조한 나의 마음을 예민히 살핀 노파는 안방을 향하여 이렇게 소리쳤다.

「어이구 저렇게 수집어하면서 학교는 어떻게 댕겼누.」

또한번 노파가 외치면서 껄걸 웃자 안방 문이 가볍게 열리며 사뿐히 걸어나오는 것이 있었다.

「이것이다!」

하고 직각하자 가슴속은 알 수 없이 수물거렸다. 그러나 결국 보아야 할 것이매 나는 용기를 다하여 얼굴을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찰나의 죽음이 있었다.

그 찰나가 지나자 놀람, 의혹, 동요의 회오리바람이 불었다.

그 회오리바람이 지나자 계순이! ―나에게는 겨우 바른 의식이 돌아왔다.

「계순이!」

그는 갈 데 없는 계순이었다.

역시 나를 똑바로 인식한 그의 얼굴에는 놀람인지 기쁨인지 슬픔인지 복잡한 표정이 흘렀다. 그는 마침내 고개를 숙여 버렸다‥‥‥

이것이 최초의 기우였으니 이 기우까지에는 약 삼년의 과거가 있었다―

그 삼년 전의 당시.

낙원동 네거리에 넓은 간판 달린 한 채의 와가가 있었으니 장안에서 손꼽는 큰 여관이었다. 당시 일개의 서생인 나는 이 하숙을 겸한 여관에 기숙하고 있었다.

이 번잡한 집안에 고이고이 자라나는 한 송이의 꽃이 있었다. 그것이 곧 주인의 딸 계순이었다. 날마다 수십명의 여객이 드나들고 십여명의 학생이 뒤끓는 이 여관 안에서 그만은 맑게맑게 자라났다. 그러나 공부가 점점 차가고 나이가 바야흐로 익어감에 주인은 은근히 그의 배우를 물색하기 시작하였다.

이러는 즈음 무엇이 눈에 들었는지 간에 수많은 사람 가운데에서 그는 나를 가장 많이 마음속에 두었다. 그래서 차차 나는 그와도 알게 되고 사귀게도 되었다.

마침내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영어책을 들려서 나의 방에 보내게 까지 되었었다. 사꾸라가 필 때엔 창경원에 동반하였고 달이 밝으면 고요한 마루까지 우리에게 치워 주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나의 마음은 타오르지 않았다. 첫 순간에 타오르지 않더라도 차차 때가 가면 타는 수가 있으되 이것은 달이 가고 해가 넘어도 종시 타오르지는 않았다. 나의 마음은 끝끝내 맑고 굳었다. 그쪽에서 적극적으로 나오면 나올수록 나의 태도는 진중하고 소극적이었다. 말하자면 그만큼 그에게는 나의 열정에 불지를 아무 것도 없었던 것이다. 타지 않는 곳에는 장난도 있을 수 없거늘 하물며 사랑이야. 나는 그 집을 떠남에 피차의 안전과 해방을 느꼈다.

이때로부터 첫 기우에 이르기까지의 긴 동안 도무지 그를 만나지 못하였다. 떠난 후 월여에 그 집을 찾았을 때에는 이미 그들은 어디론지 떠나 버린 뒤였고 여관은 다른 이의 소유 밑에서 경영되어 나갔었다.

물론 그후 다시 찾으려는 노력도 필요도 없거니와 약 삼년 동안 그들의 종적은 묘연하였다. 나중에는 계순이라는 이름까지 점점 나의 기억 속에 희미하여 갔었던 것이다.

한참 동안이나 숙였던 고개를 들었을 때에 계순이의 볼에는 두 줄의 눈물이 빛났다. 나를 쳐다보는 그의 젖은 눈은 원망하는 듯도 하고 호소하는 듯도 하였다.

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푹 빠진 눈, 툭 꺼진 볼, 수십 간의 와가가 단간의 초옥으로 변한 것과 같이 팽팽하던 전날의 용모는 여지없이 이지러져 버렸다.

끝까지 지조는 굳었고 마음속에 한 점의 흐린 흔적도 없었던 나였지만 그의 이지러진 자태와 호소하는 듯한 눈물을 대할 때에는 약간의 가책과 미안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한참 동안은 멍멍히 할말조차 몰랐다.

「그러문 벌써들 이렇게 됐었군요.」

기대치 아니한 돌연한 연극에 적지아니 당혹한 노파는 이렇게 침묵을 깨뜨렸다.

「그러문 그렇지 시체 양반들이 지금까지 가만 있을 수 있나…… 찬찬히 앉아서 싸였던 회포들이나 마음껏 풀어들보시우.」

하고 노파는 한 걸음 먼저 나가버렸다.

노파의 아첨하는 어조가 지금 와서는 심히 불유쾌한 것이었다. 그리고 계순이에게 대하여서는 이렇게 노파를 따라온 내 자신을 한없이 부끄러워하였다.

그러나 이왕 한 걸음을 들여논 이상 그들의 현재에 이르른 곡절이 궁금하였다. 불과 수년 동안에 수십 간의 와가가 일간의 초옥으로 변하고 장안에서 손꼽던 여관이 뒷골목의 조그만 반찬가게로 변하고 금지옥엽같이 귀여워하던 딸의 처지를 알지 못할 괴상한 노파의 손에 맡기게 되었다는 것은 너무도 큰 변화이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알고자 하였다.

「어머니는 어데 가셨어요?」

겨우 입을 열어 그에게 묻자 방에 있던 그의 어머니는 미안한 듯이 문을 열고 나왔다.

「이게 웬일이요!」

너무도 의외의 해후에 그 역시 놀랐었다. 나는 묵묵히 반가운 마음을 표하고는 뒤미처 물었다.

「대체 어떻게 된 곡절입니까?」

감개무량한 듯이 길게 한숨 쉬는 그의 표정은 자못 어두운 듯도 하였고 어느덧 주름만이 잡힌 그의 얼굴은 부끄러운 마음에 약간 붉어지는 듯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극히 간단하였다.

―원래 부채가 많았었다. 그 위에 장사에 서투른 그들이라 경영하는 여관에서도 별로 이가 없었고 갚을 수 없는 부채는 점점 늘어갔다. 무서운 채귀의 독촉은 날로 심하였고 나중에는 별도리없는 그들은 결국 여관집까지 차압을 당하고야 말았다. 새파란 목숨을 끊을 수 없는 이상 목숨 붙어 있는 동안까지는 살아야 하는지라 할 수 없이 일간 초옥을 얻어가지고 애닯은 그날그날의 생활을 이어가는 것이었다―

너무도 단순하고 평범한 이야기였으나 그의 엄숙하고 감개 많은 어조는 무서운 진실성을 가지고 뼛속까지 젖어 들어가는 듯하였다. 흔히 있는 평범한 사실이지만 그것을 살과 피를 가지고 실지로 과정하여 온 그들에게는 결코 평범하고 단순한 것이 아닐 것이다. 그들의 영락한 자태가 이것을 말하였다.

「그래서 그저 살림이구 말구 죽지 못하니 살아가지요.」

암담한 그의 어조에는 호화롭던 전날의 그림자는 한 점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조만간 필경은 몰락하여 가고야마는 저들의 운명을 그들은 한 걸음 먼저 걸었을 뿐이었다마는 그들의 돌연한 삽시간의 몰락에는 또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애나 얼른 임자를 찾아 줘야 우리야 우리대로 살아가든지 어떻게 하든지 할터인데.」

이야기가 계순이의 일신상으로 떨어졌을 때에 나는 괴로왔다. 될 수 있는 대로 그의 일에는 접촉하고 싶지 않은 나는 다만 침묵할 따름이었다.

「나이는 차 가고 궁한 살림에 집에만 붙어 있어야 별수 없고……」

딱한 일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에 아무리 동정한다고 하더라도 이 일만은 난들 어떻게 하랴. 과거에 있어서 이미 싸늘하던 나의 마음이 이제 와서 새로 끓어 오를 리는 만무하였다. 다만 전날에 있어서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왔던 것이 불행하였고 이제 와서 또다시 그들의 현재를 알게된 것만 실책이었다. 첫째로는 노파가 미웠고 다시 한층 내 자신이 비루하게 보였다.

「오래간만에 뵈니 이렇게 반가울 덴 없구려!」

그의 어머니는 모처럼 찾아온 나에게서 그 무슨 암시라도 얻으려는 듯하였다. 그러나 더 깊이 들어가기를 두려워하는 나는 한시라도 속히 그자리를 떠나고 싶었다. 마침내 선명한 태도로 그 자리를 일어서려 하였다.

별안간 안방 문이 거칠게 열리더니 한 사람의 사나이가 문득 마루에 나섰다. 전에 본 적 없던 초면의 사나이였다.

약간 상기된 듯한 그 사나이는 어쩐지 나를 한참이나 노려보았다. 나는 나 스스로의 시선을 옮겨 버렸을이만큼 험상궂은 시선이었다. 그는 똑같은 억센 눈초리로 계순 어머니와 계순이를 차례로 노리더니 나중에 계순이에게 무어라고 두어 마디 거칠게 끼어붓고는 맨머릿바람으로 황망히 밖으로 나가 버렸다.

괴상한 사나이었다. 그의 험상스런 태도는 더욱 알지 못할 것이었다. 무슨 까닭으로 초면의 나를 그렇게까지 노려보지 않으면 안되었던가. 그 험상궂은 사나이와 처녀와 어머니가 어두운 방안에서 무엇을 의논하고 무엇을 계획하였던가. 생각 안하려 하면서도 나는 여기까지 어둡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골서 온 일가 사람이랍니다.」

그의 어머니는 묻지도 않는 나에게 변명하는 듯이 이렇게 설명하였다. 그러나 나에게는 아무 변명도 필요치 않았다. 옳든지 그르든지 간에 나는 직각한 대로 믿을 수밖에는 없었다. 필연코 그 사나이에게도 나를 변명하기를 「시골서 온 일가 사람」이라고 하였을는지 모르니까.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나는 그 집을 떠남에 점점 몰락하여 가는 그 집안과 계순이의 장례를 한없이 슬퍼하였다.

삼년 후―

이 짧은 삼년 동안 나의 생활에도 많은 변천이 있었으나 아직도 젊은 나의 마음을 퍽도 로맨틱하였다―(고 하여도 그것은 참담하고 비장한 로맨티시즘이었다.) 이 로맨틱한 마음에 항상 아름다운 꿈을 가슴에 품고 끊임없이 항구에서 항구로 옮아 다녔다. 쉴새없이 꿈을 찾는 마음에 항구는 가장 매력 있는 곳이었다. 맑은 거리, 붉은 등불, 밝은 술집, 푸른 술, 젊은 계집―푸른 하늘, 기름진 바다, 그 위에 뜬 배, 아물아물한 수평선―이 모든 것이 무조건으로 좋았다.

새파란 바다 건너 저쪽 편에는―

새파란 하늘 닿은 그 나라에는―

항상 무엇이 손짓하고 부르는 듯하였다. 아름다운 생각을 그편 하늘 멀리 날릴 때에 아물아물한 수평선은 어여쁜 처녀의 손짓과도 같았다. 그럴 때마다 배에다 꿈을 가득히 싣고 낮에는 바람에 돛대 달고 밤에는 달빛에 젖어가면 쉬지 않고 먼 나라로 달아나고 싶은 충동을 금할 수 없었다.

이 아름다운 공상은 구체화하여 가서 필경은 실현되게 까지 되었다-―「방랑」이라는 시점 개념에 취하였던 박군과 나에게는 오래전부터 계획하여 오던 「해삼위행」을 마침내 단행할 날이 왔었던 거이다.

동해안의 어떤 항구였다.

푸른 하늘은 건강히 빛나고 오월의 바다는 유심히도 파랬다. 그 위에 꿈꾸는 듯한 배 한 척 그것이 우리를 싣고 떠날 배였다.

눈 코 뜰새없이 바빠야 할 출범의 전날이었으나 단지 붉은 몸 하나로 굴러다니는 방랑의 객이라 삼등 선표를 사서 주머니 속에 수습하니 우리의 항해의 준비는 그만이었다. 나머지의 반일을 그 항구의 마지막 날을 우리는 우리를 보내는 김군과 함께 항구의 술집에서 작별의 술을 나누기로 하였다.

앞으로 바다를 바라보고 높이 서 있는 조그마한 카페는 정하고도 고요하였다. 오리알빛 같은 벽, 진홍빛 카텐, 스탠드 위의 푸른 화초 이 모든 것이 창으로 멀리 내다보이는 바다빛과 양기로운 조화를 띠고 있었다. 벽위의 괘종이 두시를 땡땡 울리는 고요한 오후였다.

「술!」

창 옆에 진 치고 앉은 우리는 알지 못하는 땅에 대한 꿈과 장래의 포부를 피로하여 가면서 술잔을 높이 들었다. 유리잔 부딪치는 소리가 옆에 앉은 계집아이의 가늘게 부르는 콧노래와 엎쳐서 고요한 카페 안에 반영하였다.

「흐르고 흘러서……」―애조를 담뿍 띤 유랑의 한 곡조가 이상히도 방랑의 흥을 북돋았다. 흐르고 흘서서―이것이 그나 우리나 피차의 운명일 것이다. 북은 서백리아가 되든 남은 남양이 되든 흐르고 흘러서 안주할 바를 모르는 것이 곧 피차의 자태였다. 아직 길 떠나지 않은 우리는 이제 이 항구 이 술집에서 이미 바다 먼 해외에나 나간 듯한 이국정서를 느꼈다.

계집아이는 심상치 않은 정서를 가지고 노래를 불렀다. 애수를 담뿍 품은 노랫가락은 면면히 흘렀다. 이제 이 고요한 술집 안에서는 모두들 제각각 자기들의 꿈을 꾸고 있었다. 노래 부르는 그 계집아이 노래에 귀기울이는 우리 세 사람, 그리고 아까부터 저 편 창기슭에 의지하여 시름없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그 계집아이, 모두 흐르고 흐르는 자기 자신을 반성하는 듯이 순간 고요하였다.

「술이다!」

「잔 가득 부어라!」

모든 애수를 씻어버리고 나는 늠름히 소리쳤다. 마치 「꿈을 죽여라 행동이다!」하는 듯이 늠름히 부르짖었다. 노래 부르던 계집아이는 또다시 붉은 입술에 웃음을 띠면서 술을 따랐다. 우리는 모든 감상을 극복하려는 듯이 함부로 술을 켰다. 가득히 부으면 한숨에 켜고 켜고는 또 청하였다.

그러나 저편 창 기슭에 의지하여 시름없이 바다만 바라보고 있는 그에게 눈이 갈 때에는 알 수 없이 마음을 치는 것이 있었다. 직업을 떠난 그의 초연한 태도에는 술집 계집아이 아닌 품이 있었고 뜨거운 석양을 담뿍 등지고 잠자코 바다만 바라보고 있는 그의 모양에는 그 무슨 깊은 것이 있었다. 옛 꿈에 잠겼는지 현재를 한탄하는지 미래를 응시하는지 바다 건너편을 생각하는지 그곳의 사랑하는 이를 그리워하는지 시름없이 바다만 바라보는 그의 자태는 몹시도 애처로웠다. 나는 일어서서 그에게로 가보고 싶은 충동까지 느꼈으나 고요한 그의 기분을 깨칠까 두려워하여 술 따르는 계집아이에게 물어보았다.

「유리쨩!」

하고 그가 건너편을 향하여 부르자 바다만 바라보고 있던 그는 손수건으로 고요히 눈물을 씻으면서 이쪽을 향하였다. 얼굴 모습은 똑똑히 안 보였으나 흐트려진 머리, 눈물에 이지러진 분기가 흐릿하게 보였다. 그는 이쪽에는 아무 관심도 안 가지고 또다시 바다를 향하였다.

「아노히도이쓰데모, 나이데박까리이루노요.」

다마쨩은 이렇게 설명하였다. 그리고 그가 약 일주일 전에 이 카페에 왔다는 것, 카페 여급으로는 처음이라는 것, 따라서 손님 접대에 능란치 못하다는 것, 그의 과거에 대하여서는 한 마디고 입을 열지 않는다는 것, 언제든지 혼자 눈물만 흘린다는 것……을 대충대충 추려서 이야기하였다.

그의 태도로 보나 이 이야기로 보다 센티멘탈한 부르조아 소녀가 아닐 것이매 그 역시 남과 같은 밝은 인생을 살아오지 못하는 불행한 사람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어디로부터 흘러오고 장차는 어디로 흘러갈 슬픈 인생인가. 흐르고 흐르고…… 모두 똑같은 운명이로구나 하고 생각할 때에 서로 알지 못하는 그와 나지만 나는 그에게로 기울어지는 한 조각의 마음을 어찌할 수 없었다. 멀리 방랑의 길을 떠나려는 이 마지막 날에 깊은 인생을 이해하는 듯한 그와 이야기라도 한 마디 건너보고 싶었다.

「유리꼬상!」

나는 마침내 그를 불렀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명상에 잠겨 있을 뿐이었다. 대답을 못 얻은 나는 열적어서 그만 침묵하여 버렸다.

그러자 이 고요하던 카페는 새 손님을 맞아들이자 잔잔하던 공기를 깨뜨렸다. 정복한 일인 순사 한 사람과 형사인 듯한 사복한 사나이가 거칠게 문을 밀고 들어왔다. 정복 순사가 카페에 온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고 하기에 나는 문득 우리 세 사람 위에 무슨 불행이나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좋지 못한 첫 느낌을 받았다. 벼르고 벼르던 「해삼위행」이 또 깨어지나 보다 하는 불안에 떨었다.

「단나와 도꼬다?」

사복한 사나이는 이렇게 소리치더니 저 혼자 서슴지 않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그는 방안을 자세히 휘둘러보았다.

아무래도 일은 일어나고야 말 형세였다. 우리는 속히 그 자리를 떠나려 하였으나 일이 벌써 이렇게 된 이상 그것은 더욱 불리할 듯하였다. 꼼짝없이 가만히 앉아서 당할 일이 있으면 당할 수밖에는 없었다.

우리를 노리던 그는 그 시선을 건너편 유리꼬에게로 옮겼다.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 그에게로 가까이 가더니 나중에 정신없이 생각에 잠겨 있는 그의 등을 쳤다.

유리꼬는 깜짝 놀라 그를 쳐다보더니 기절이나 할 듯이 두 팔로 얼굴을 가리고는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는 무엇인지 높이 소리치더니 거칠게 그를 붙들었다. 심히 놀란 듯한 유리꼬는 말없이 몸을 빼칠려고 애썼다.

일을 당하는 것이 우리가 아니고 유리꼬라는 것을 알았을 때에 우리는 적지 않은 안도를 느꼈으나 꿈꾸는 듯한 유리꼬에게 불행이 닥쳐오는 것을 볼 때에는 미안하고도 애처로웠다.

몸을 빼칠려고 무수히 애쓰던 유리꼬는 기진맥진하여 그 자리에 쓰러져 버렸다. ……(三行略)……

별안간 막았던 보나 터지는 듯이 높은 울음소리가 유리꼬의 심장에서 터져 나왔다. 애를 못 이기고 설움을 못 이긴 듯한 울음소리였다.

나는 곧 일어나서 ……(一行略)……. 그러나 그것도 쓸데없는 무력한 의분에 지나지 못함을 깨달았을 때에 나는 애닯았다.

이층에 올라갔던 사복한 사람이 황망히 내려왔다. 그의 뒤에는 단나와 오까미상인 듯한 두 양주가 공손이 따라 내려왔다. 그들은 두 양주에게 무어라고 일르더니 쓰러진 유리꼬를 잡아 일으켰다.

「사 잇쇼니 유꾼다!」

필연코 밀매라도 하였거나 돈 많은 손님을 집어 먹었거나 하였으리라고 생각하였다.

싫다고 발버둥치는 유리꼬를 그들은 그 옷 입은 그대로 흩어진 머리 그대로 눈물에 젖은 얼굴 그대로 그를 끌어냈다.

눈물에 젖은 그의 얼굴! 나는 이제야 그를 똑똑히 보았다. 나의 시선은 잠시간 그의 얼굴에 못박았었다. 그리고 두 번째의 찰나의 죽음!이 있었고 놀람과 동요의 회오리바람이 불었다. 유리꼬―그는 두말 할 것도 없이 계순이었다. 기모노를 입은 계순이었다.

나는 그에게로 달려들어 나라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그러나 벌써 그는 문밖까지 끌려나간 뒤였다. 그 역시 나를 보지는 못하였다. 그것이 운명이었다.

폭풍우가 지난 뒤 같았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모르는 나는 잠시 술집 주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의 이야기에 의하면 유리꼬는 일주일 전에 서울서 도망온 여자였다. 집이 가난하여서 어떤 사나이에게 「팔려」갔다가 난폭한 그 사나이에게 버림을 받자 두 번째 ××××에게로 「팔려」갔었다. 그러나 그가 징글징글하고 몹시도 싫어서 마침내 그 집을 벗어나서 멋대로 도망하여 왔던 것이다.

생각하지 말자 접촉하지 말자 하던 계순의 운명에 또다시 이렇게 스친 것을 나는 슬퍼하였다. 무슨 몹쓸 운명의 장난인가.

계순의 애처로운 마지막 자태가 문득 눈앞에 떠올랐다. 나는 전에 없던 애착을 이제 새삼스럽게 느꼈다. 그리고 그의 집안에 대하여서도 생각났다. 삼년 전에 보았던 그 집안은 지금 어떻게나 되었을 것인가. 뒷골목의 반찬가게 초가집, 그의 어미니 아버지, 나중에 단 하나의 외딸까지 이렇게 팔아먹게 된 그들의 몰락의 과정이 눈앞에 역력히 비치는 듯하였다.

계순의 자태가 또다시 눈앞에 떠올랐다. 나의 정신은 혼란하였다. 나로서 어떻게 하였으면 좋을지를 모랐다. 그의 뒤를 쫓아가 볼까. 그러나 무슨 소용이 있으리요. 그를 건지기에는 나는 너무도 무력하였다. 그리고 내일은 동무와 같이 해삼위로 떠날 날이다. 나는 미래에 대한 큰 뜻이 있다. 그 뜻을 위하여서는 나갈 대로 나가지 않으면 안되었다……다만 그에 대하여서는 마음으로부터 미안한 생각을 억제할 수 없었다.

동무들에게 끌려 카페를 나와 저물어 가는 해안을 걸어가는 나의 마음속에는 우울의 구름장이 뭉게뭉게 피어 올랐다.

바다와 항구와 거리를 헤매이고 헤매이고……나는 넓은 세상과 수많은 인간 생활을 활연히 해득하였다. 깃이 달린 심장에는 굳은 결심이 못박혔다. 마침내 나는 새빨간 피의 전부를 바쳐서…… 몸을 던졌다. 여름도 차차 늙어가는 작년 구월 ××총동맹의 위원의 한 사람인 나는 어떤 사건 조사의 책임을 지고 하르빈까지 갔었다.

의외에도 일은 쉽게 끝나고 예정보다는 이틀의 여유가 있었다. 동지 박군과도 오래간만에 만났고 나에게 하르빈은 처음 길이기도 하기에 나는 박군의 안내를 받아 하르빈의 사생활을 자세히 구경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마침내 나는 크고 작은거리도 구경하고 노서아 사람 많이 사는 유명한 키타야스카야 거리의 마굴도 엿보았다. 워트카에 취하여도 보고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계집 소니야도 알았다. (소니야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나오지 않는다.)

밤의 하르빈은 더한층 아름다운 도회였다. 깊은 어둠 속에 총총히 박힌 등불이 하늘과 별과 연하여 보였다. 그날 밤에도 박군과 헤어진 나는 워트카의 취흥을 못 이겨서 시원한 바람을 쏘이면서 승가리 송화강(松花江) 연안을 거닐었다. 아름다운 하르빈의 야경과 승가리 강을 불어 건너오는 싸늘한 바람에 무상의 쾌감을 느끼는 나는 강 연안을 거닐면서 한 걸음 두 걸음 조그만 중국 사람 거리로 발을 옮겨 놓았다.

얕은 집, 수많은 노점, 바퀴 작은 수레, 불유쾌한 취기……어느덧 나는 강 연안을 벗어져나서 중국인 거리의 복판까지 들어갔었다. 야경은 해삼위보다 낫고, 복잡하기는 상해에 어림없고, 아름답기는 청도에 몇층 떨어지고, 번화하기는 서울의 몇곱절이고…… 이렇게 막연히 하르빈을 비평하면서 취흥에 끌린 나는 그칠 바를 모르고 거리에서 거리로 몽유병자같이 자꾸 걸어 들어갔다.

그렇게 함부로 걷는 동안에 길을 어떻게 들었는지 나중에 나는 조그만 알지 못할 거리에까지 갔었다. 등불도 없고 인기척도 없는 어둡고 고요한 거리였다. 그 거리를 굽어서 더욱 작은 거리로 몇 간 걸어가자 나는 지붕도 없고 처마도 없는 석유통같이 네모지게 짠 괴상한 집이 졸로리 들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중 몇 집만은 문이 열려 있고 그 안에서 행길로 향하여 희미한 등불이 흘러나왔다.

흐릿한 정신에도 괴상한 느낌을 받았다.

(빈민굴이로구나!)

하고 나는 생각하였다. 세상에 도회 쳐놓고 빈민굴 없는 곳이 없다. 굉장한 돌집이 즐비하여 있는 그 반면에 반드시 쓰러져가는 빈민굴이 숨어 있으니 이 뼈저린 대조를 현재의 도회는 모두 보이고 있다. 하르빈의 빈민굴은 또한 어떠한 것인가를 보아 두어야 할 것이매 나는 늘어 있는 집 앞으로 가까이 걸어갔다.

희미한 등불이 흘러나오는 집 문간에까지 가까이 가 안을 흘낏 엿본 나는 그자리에 장승같이 서 버리고 말았다.

그 속은 한 간의 방이었다. 방안에는 높직한 단이 있고 단 위에는 자리와 요가 펴 있었다. 그 위에 젊은 중국 여자가 두 다리를 뻗고 음란히 앉아 있었다. 두 팔을 드러내 놓고 새파란 중국복에 싸인 젊은 여자였다.

그는 나를 보았는지 이쪽을 향하여 웃음을 던지며서 손짓을 하였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두 다리를 안으로 쪼그리고 두 팔로 웃옷을 걷어 올리더니 발가벗은 하반신을 서슴지 않고 나타내 보였다. 새파란 옷과 희미한 등불에 비쳐 그것은 마치 신비로운 황홀의 연못 그것으로 보였다. 백설 같은 현란한 감각에 현기를 느끼는 나는 정신없이 몽롱히 서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 어디서 나타났는지 두 사람의 거한이 비틀걸음을 치면서 방안으로 들어가더니 음란하게 여자에게로 달려들었다. 어느결엔지 판장문이 덜컥 닫치고 문 잠그는 쇠 소리가 들려왔다.

(마굴이다!)

나는 그것이 빈민굴이 아니고 마굴임을 깨달았다. 전율할 만한 마굴―그 속에서는 어떤 무서운 죄악이 일어나는지도 생각할 새 없이 한번 불지른 이상 타오르는 새빨간 관능의 불길에서 나는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 없었다. 아직까지도 몽롱히 서 있던 나는 부끄러운 말이지만 몇간 건너 역시 행길로 향하여 희미한 등불이 흘러나오는 그곳으로 발을 옮겨 놓았다. 방안에 똑같이 차린 중국 소녀가 앉아 있었다. 새파란 옷, 흰 팔, 눈부신 감각……나는 아무 것도 반성할 여유없이 서슴지 않고 방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하룻밤에 몇놈이나 거친 사나이에게 부대끼는지 젊은 중국 소녀는 피로할 대로 피로한 듯이 손님이 들어가도 머리도 들 생각하지 않고 나른히 앉아 있었다. 아까의 소녀와 같이 난잡한 추태도 지어 보이지는 않았다. 너무도 잠잠한 그의 태도에 나는 기가 빠졌다. 그러나 이왕 이렇게 들어온 이상 염치 불구하고 그의 옆에 가 주저앉으면서 전신을 그에게로 쏠렸다. 그리고 두 팔로 그의 목을 걸어 졸고 있는 듯이 숙인 그의 얼굴을 번쩍 들었다.

「응?」

순간! 나의 전신은 화석하여 버린 듯하였다.

놀람, 의혹, 동요의 회오리바람이 세번째 또 불었다.

그 회오리바람이 지나가자 그의 목에 걸었던 나의 두 팔은 힘없이 떨어져 버렸다.

눈의 착각이나 아닌가 하여 나는 두 눈을 비비고 또다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이미 주기조차 깨어 버린 나의 인식에는 한 점의 틀림도 없었다. 확실히 그였다.

무슨 괴이한 인연인가. 멀고 먼 외국의 밤 낯 모르는 도회의 어두운 이 한 귀퉁이에서 그를 또다시 이렇게 만날 줄야 꿈엔들 생각하였으랴. 거짓말 같은 이야기다 그러나 운명의 신은 항상 그런 괴이하고 심술궂은 트릭을 좋아하는 얄미운 계집아이같다.

「무슨 인연입니까? 네? 계순씨!」

풀 죽은 나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나를 힘있게 붙들었던 그는 말없이 나의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소리쳐 울 따름이었다.

어디서인지 돌연히 몇사람의 거친 호인이 몰려 들어왔다. 코를 찌르는 고약한 냄새가 그들에게서 흘러 왔다. 그들의 침입에 나는 적지아니 놀랐다.

「오늘 저녁 이 조선 계집애는 내 차지다.」

그 중의 한 자가 술김에 똑똑지 못한 청어로 이렇게 지껄이면서 나를 무시하여 버리고 쓰러져 있는 계순의 등을 잡아 일으켰다. 잇따라 또 한 놈이 비틀비틀 달려들었다.

나는 크나큰 모욕과 분노를 느꼈다. 그리고 계순이를 보호하여야 할 의무를 느꼈다. 그자리에 일어서서 아무 분별없이 나는 그에게 달려드는 놈의 팔을 뿌리치고 주먹을 하나 안겼다.

세 놈은 무서운 기세를 가지고 일제히 나에게 달려들 형세이었다. 나 한사람과 장대한 세 사람의 거한과 물론 나는 능히 당할 바가 아니었다. 계순이는 나의 팔을 붙들면서 말렸다. 그러나 문득 나는 뒤에 서 있는 장승같이 후리후리한 사나이를 발견하였다. 그런 속을 짐작하는 나는 눈치 빨리 주머니 속에서 집어낸 몇장의 지폐를 그 사나이의 손에 얼른 쥐어 주었다.

그 사나이는 나에게 만족한 듯한 웃음을 보이고 높이 호령을 하더니 세 놈을 밖으로 쫓아냈다. 그리고 자기도 문을 닫고 나가 버렸다.

우리는 겨우 안심하고 그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안존한 마음으로 그렇게 대면하여 앉기는 낙원동 여관서의 작별 후 꼭 십년만이었다. 나는 전무후무 처음으로 그의 손을 잡아 보았다. 그 역시 생전 처음으로 나에게 몸을 의지하였다. 이제는 피차에 부끄러운 마음도 아무 것도 없었다. 산 설고 물 설은 이역에 와 있는 외로운 두 개의 혼이었다. 우리는 벌써 살 파는 사람, 살 사러 들어온 사람은 아니었다.

그 경지를 높이 초월한 두 개의 고결한 영혼이었다.

그에게 대하여 나는 이제 전에 없던 사랑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은 욕심 많은 한 개의 사나이로서의 사랑이 아니라 오빠나 어머니로서의 위대한 사랑이었다. 나는 오빠의 사랑을 가지고 그를 안았다. 그는 어머니에게나 안기는 듯이 나를 신뢰하였다. 외로운 땅에 와 어머니의 사랑에도 많이 주렸을 것이다.

어머니―어머니라면 대체 그의 어머니는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외딸을 이렇게 버려 놓고 망쳐 놓지 않으면 안된 그의 어머니를 나는 물어 보았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새롭게 용솟음쳤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한 마디를 말하였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몰라요.」

「…………」

그러면 대체 어떻게 되었단 말인가. 모를 노릇이다. 그러나 나는 더 물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것보다도 한시라도 속히 둘이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할 것이다. 그를 더 이상 이대로 그 무서운 곳에 버려 둘 수는 없다. 어머니를 찾든지 새 생활을 도모하든지 어쩌든지 서울까지라도 같이 데리고 가야 할 것이다 고 나는 결심하였다.

「자 이대로라도 속히 나와 같이 갑시다.」

「네? 가다니요!」

그는 놀라서 거절하였다. 그리고 마굴 안의 무서운 제도와 호인의 포악무도한 제재를 대강 이야기하였다. 만약 들키면 두 사람의 생명이 위태하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나는 그를 설유하고 용기를 붇돋아 주었다. 주인의 양해를 얻어서 요구하는 대가로 그의 몸을 빼내려고까지 계획하였을 때에 계순이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한참이나 있다가 그는 극도의 절망한 태도로 서슴지 않고 두 팔을 걷어 보였다. 가련한 일이었다. 두 팔 어깻죽지 할 것 없이 흰 살 위에는 무서운 자색 반점이 군데군데 솟아있었다. 감염된 외국인의 독한 병독으로 하여 젊은 살이 점점 썩어 들어가는 것이었다.

나는 다시 놀랐다. 그러나 침착한 태도로 그를 위로하고 굳은 결심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내일 아침에 일찍이 상당한 액을 변통하여 가지고 와서 주인과 담판하여 모든 일을 결정하기로 굳게 약속하여 놓고 그곳을 나왔다. 번잡하던 도회는 고요히 잠들고 이역의 밤은 깊었다. 취중에 정신없이 헤매이던 거리지만 맑은 정신에는 극히 단순한 거리였다. 나는 손쉽게 거리거리를 빠져서 마침내 밤 이슥히 박군의 숙소를 찾았다.

경성행을 하룻동안 연기하기로 하고 이튿날 아침 일찌기 나는 박군의 호의로 상당한 금액을 수중에 차고 박군과 같이 어젯밤 그곳을 찾아갔다.

수면 부족으로 흐린 나의 머리속에는 전날밤 일이 마치 필름 같이 전개되었다. 생각하고 생각하여도 계순의 이때까지 운명이 너무도 참혹하였다. 그러나 생활이란 항상 「이로부터다」. 이로부터 사람답게 뜻 있게 살아간다면 그만 아닌가. 나는 모든 것을 억지로라도 밝게 생각하려 하였다.

승가리 강을 옆으로 끼고 어제 걷던 거리거리를 찬찬히 찾아 내려가면서 결국 그곳까지 갔었다.

석유통같이 네모로 짠 집들, 그것은 낮에 보니 더한층 참담한 것이었다. 그 속에 계순이가…… 모두 거짓말 같았다. 그러나 그것이 거짓말이라면 오죽이나 좋으랴.

아직 문이 닫친 집도 있고 열린 집도 있었다. 우리는 몇집을 거쳐놓고 그것인 듯 짐작되는 집 앞까지 가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좁은 방안에 이삼인의 호인이 들어서 황망한 태도로 무엇인지 수군수군 의논하고 있었다. 우리의 들어감을 보고 그들은 깜짝 놀라 일제히 이쪽을 향하였다. 그중의 후리후리한 사나이는 주인인 듯한 어젯밤의 그 사나이었다.

나는 그들을 헤치고 들어가서 무엇보다도 먼저 단 위의 계순이를 찾았다. 이불을 푹 쓰고 있는 그는 아직까지 잠자고 있는 듯하였다. 나는 단 위에 올라가서 그를 깨웠다. 후리후리한 사나이는 나를 붙들면서 만류하는 듯하였다. 그것도 불구하고 나는 깨웠다. 흔들었다. 그러나 그의 잠은 너무도 깊이 들었었다. 너무도 깊이―영원히 깊이.

나는 황망하였다. 정신이 산란되었다. 다시 흔들고 흔들었으나 맥은 이미 끊어졌고 전신은 싸늘하였다. 해쓱한 얼굴을 들여다 보았을 때에 나의 가슴은 무너지는 듯이 비통하였다.

「계순이 계순이!」

뜨거운 눈물에 세상이 캄캄하여졌다.

그칠 줄 모르고 쏟아지는 눈물 사이로 나는 그의 머리맡에 놓인 조그만 약병과 한 장의 그발을 발견하였다. 나에게 주는 유서였다. 눈물을 뿌려가면서 나는 그것을 내려 읽었다.

찬호씨 놀라지 마세요. 경솔하다고 책하지 마세요.

저의 취할 길은 이밖에는 없었읍니다. 이 몸을 가지고 어데가서 무슨 새 생활을 꾸며 보겠읍니까. 결국 일각일각 죽음을 기다려야 할 것이니 차라리 한시라도 속히 죽어 버리는 것이 편할 줄로 믿었읍니다. 너무나 고마운 생각에 죽어도 한이 없읍니다. 이 밤에 저에게 보여주신 고결한 사랑, 저는 마지막으로 사랍답게 살았습니다. 아무 것도 한할 것이 없어요. 다만 세상은 저에게 너무도 쓰렸읍니다.

어머니 아버지는 죽었는지도 모릅니다. 서울서 작별한 것이 마지막 작별이었읍니다. 저보다도 더 불쌍한 이들이예요. 이 낯설은 땅에 와 있어도 그이들만은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읍니다. 죽은 뒤에 뼈나 추려 주세요. 그 뼈라도 어머니의 품에 들어간다면 저에게는 더 없는 기쁨이겠읍니다.

계순

쏟아지는 눈물을 나는 금할 수 없었다. 싸늘한 그의 얼굴을 들어 마지막으로 품에 안아 보았다. 그의 말도 옳기는 옳다마는 어젯밤에 약속까지 하여 놓고서 왜 이렇게 죽는단 말인가. 낯설은 땅 이 한 구석에서 이별한 지 오래인 아버지 어미니도 못 보고 반 오십의 젊은 청춘을 죽어버린다는 것은 너무도 비참하였다.

나와 박군과 세 사람의 호인은 그를 둘러싸고 앉아서 외로운 영을 위하여 묵도를 올렸다. 비통의 눈물은 참회의 눈물로 변하였다. 반은 나의 죄라고 할까. 그러나 반은 누구의 죄인가?

빌어먹을 놈의 ××이다. 어금니로 바작바작 씹고 씹고 씹고 또 씹어도 시원치 않을 놈의 ……이다. 나의 새빨간 심장에는 무서운 저주와 굳은 신념의 연륜이 또 한 바퀴 새겨졌다.

이 새빨간 염통이 두 조각이 나는 한이 있더라도 그의 맺히고 맺힌 원한만은 풀어주고야 말 것이다. 그의 영시 앞에 고개 숙이고 앉은 나는 마음속 깊이 그의 외로운 영혼과 맹세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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