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림에게 7
기림 형
궁금하구려! 내각이 여러 번 변했는데 왜 편지하지 않소? 아하 요새 참 시험 때로군그래! 머리를 긁적긁적하면서 답안 용지를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 당신의 어울리지 않는 풍채가 짐짓 보고 싶소그려!
허리라는 지방은 어떻게 좀 평정되었소? 병원 통근은 면했소? 당신은 스포츠라는 초근대적인 정책에 감쪽같이 속아 넘어갔소. 이것이 이상 씨의 '기림 씨 배구에 진출하다'에 대한 비판이오.
오늘은 음력 섣달 그믐이오. 향수가 대두하오. ○라는 내지인 대학생과 커피를 먹고 온 길이오. 커피 집에서 랄로를 한 곡조 듣고 왔소. 후베르만[1]이란 제금가는 참 너무나 탐미주의입디다. 그저 한없이 예쁘장할 뿐이지 정서가 없소. 거기 비하면 요전 엘먼은 참 놀라운 인물입디다. 같은 랄로의 더욱이 최종악장 론도의 부(部)를 그저 막 헐어내서는 완전히 딴것을 만들어버립디다.
엘먼은 내가 싫어하는 제금가였었는데 그의 꾸준히 지속되는 성가(聲價)의 원인을 이번 실연을 듣고 비로소 알았소. 소위 '엘먼 톤'이란 무엇인지 사도(斯道)의 문외한 이상으로서 알 길이 없으나 그의 슬라브적인 굵은 선은 그리고 그 분방한 변주는 경탄할 만한 것입디다. 영국 사람인 줄 알았더니 나중에 알고 보니까 역시 이주민입디다.
한화휴제(閑話休題)―삼월에는 부디 만납시다. 나는 지금 참 쩔쩔매는 중이오. 생활보다도 대체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를 모르겠소. 의논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오. 만나서 결국 아무 이야기도 못 하고 헤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저 만나기라도 합시다. 내가 서울 을 떠날 때 생각한 것은 참 어림도 없는 도원몽(桃源夢)이었소. 이러다가는 정말 자살할 것 같소.
고향에는 모두들 베개를 나란히 하여 타면(墮眠)들을 계속하고 있는 꼴이오. 여기 와보니 조선 청년들이란 참 한심합디다. 이거 참 썩은 새끼조차도 주위에는 없구려!
진보적인 청년도 몇 있기는 있소. 그러나 그들 역 늘 그저 무엇인지 부절히 겁을 내고 지내는 모양이 불민하기 짝이 없습디다.
삼월쯤은 동경도 따뜻해지리다. 동경 들르오. 산보라도 합시다.
〈조광〉 2월호의 〈동해〉라는 졸작 보았소? 보았다면 게서 더 큰 불행이 없겠소. 등에서 땀이 펑펑 쏟아질 열작이오.
다시 고쳐 쓰기를 할 작정이오. 그러기 위해서는 당분간 작품을 쓸 수 없을 것이오. 그야 〈동해〉도 작년 유월, 칠월경에 쓴 것이오. 그것을 가지고 지금의 나를 촌탁하지 말기 바라오.
조금 어른이 되었다고 자신하오. (중략)
망언 망언. 엽서라도 주기 바라오.
음력 제야 이상
각주
[편집]- ↑ 폴란드의 바이올리니스트(1882~19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