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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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직후였다.

나는 어떤 동업 일본인 변호사의 집을 한 채 양도받아가지고 이 동네로 이사를 왔다.

이사를 와서 대강한 정리도 된 어떤 날 집으로 돌아오니까 아내는,

“김덕수네가 이 동네에 삽디다그려.”

하는 보고를 하였다.

“김덕수란? 형사 말이요?”

“네…… 애국반장짜리, 애희의 남편.”

“반장도 그럼 함께?”

“네…….”

“녀석도 적산 한 채 얻은 셈인가?”

“아마 그런가봐요. 게다가 그냥 이 해방된 나라에서도 경관 노릇을 하는 지 금빛이 번쩍번쩍하는 경부 차림을 하고 다니던걸요…….”

“흠…….”

우리가 적산인 이 집으로 이사오기 전에 ○○동네에 살 때에 덕수네와 서로 이웃해 살았다.

덕수는 경찰 고등계의 형사였다. 고등계의 형사로 일본인 상전 아래서, 많은 사람을 잡아서, 죄를 만들어서 공로를 세워, 우리 한인 사이에는 상당히 미움과 무서움을 받던 인물이었다.

그의 아내 애희는 또 그 동네의 애국반장으로…… 남편은 형사, 아내는 반 장이라, 그 동네에서는 상당히 세도를 하고 있었다.

1945년 8월 15일의 위대한 해방이 이르러서 김덕수의 손에 걸려 감옥살이 하던 많은 인사들이 갑자기 출옥하자 혹 매 맞아 죽지나 않는가 근심했더니 덕수네는 어느덧 그 동네에서 자취가 없어져서 그저 그만그만 잊어버렸는 데, 이 새집으로 이사오고 보니, 덕수네는 우리보다 먼저 이 동네에 와 살고 있다는 것이다.

전번 동네에서 덕수네와 이웃해 살기를 5년이나 하였다. 그 5년간을 내내 덕수의 아내 애희는 애국반장으로 있었기 때문에 자연 상종이 잦았고, 그런 관계로 나는 덕수라는 인물을 비교적 여러 각도로 볼 수가 있었다.

더욱이 내 직업이 전 재판소 판사요, 현 직업이 변호사였더니만치 덕수는 자기 독특의 우월감으로써 동네의 다른 사람과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하여 내게 찾아와서 자기의 심경이며, 환경을 하소연하고 하더니만치 그를 비교적 정확히 알았노라고 나는 스스로 자신한다.

덕수는 일본의 대정 중엽에 세상에 난 사람으로서 그의 부모는 구멍가게를 경영하는 영세한 시민이었다.

요행 소학교는 무사히 졸업하고 그러고는 경찰서의 급사로 들어갔다가 본 시 영특한 자질이라 어름어름 ‘끄나풀’로 다시 형사로까지 승차를 한 것이었다.

그가 끄나풀에서 형사로까지 오른 그 시절은 한창 일본의 군국주의가 만주를 정복하고 중국을 정복하며 일변 한인의 일본인화(소위 내선일체주의)가 맹렬히 진척되던 시절이라, 본시 민족사상이라는 기초 훈육을 모르고 지낸 덕수는 자기는 한 황국신민으로, 그 점을 자랑으로도 여기고 그래야 할 의무로도 믿었다. 이 사상에 배치되는 행동이거나 운동을 하는 ‘불령선인’ 은 마땅히 배제해야 할 것이며, 그런 역도를 구축 배제하는 책임을 띤 자기의 직업은 아주 신성한 것으로 여겼다.

그런지라 그는 기를 써서 조선인 가운데 역도를 배제하기에 노력하였으며, 국가의 역적을 없이해서 ‘반도인’의 명예를 훼손하지 않기 위해서는 최선의 힘을 아끼지 않았다. 고문 명수, 자백 자아내는 명인이라는 칭호가 어느덧 그네에게 씌워지고, 상관의 신임도 차차 두터워질 때에 그는 이것을 추호도 자책하는 마음이 없이, 자기의 자랑으로 알고 명예로 알고 자기의 천직으로 알았다.

그는 소위 사회의 명사라고 꺼덕이는 인물들에게는 일종의 반항심과 증오심을 품고, 그런 인물은 골라가며 뒤를 밟고 탐사하고 하였다. 사람이란 죄를 씌우자면 면할 사람이 없는 법이라, 아니꼬운 인물은 잡아다가 두들기고 물 먹이고 잡담 제하고 토사를 강요하면 무슨 토사 간에 나오고, 한 가지의 토사가 나오면 그 연루가 넓게 퍼져서 한 개의 큰 ‘음모 사건’이 조출되고 하는 것에 일종의 재미와 쾌감까지 느꼈다. 이리하여 덕수가 한번 노리 기만 한 사람이면, 반드시 무슨 사건의 주범으로 되어 검사국으로 넘어가고, 검사국에서는 이 사건이 복잡다단하다 하여 예심으로 넘기고 하여, 명 형사 김덕수의 이름은 이 방면에는 꽤 컸다.

그의 아내 애희는 어느 여고보 출신이라 한다. 애희가 애국반장이 되고 당시의 민생이 전혀 애국반을 통해 영위되었기 때문에 우리 집과도 상종이 있게 되었는데, 애희는 남편 덕수의 지극한 애국심과 충성(애희는 그렇게 믿었다) 등에 대하여 아주 공명하여 자기보다 학력이 낮은 남편이지만 매우 존경하였다.

애희는 뽐내기를 좋아하고 비교적 욕심은 적으나 명예욕은 센 사람이었다.

사회의 누구누구라는 명사들이 자기 남편의 앞에 굴복하고 자백하고 하는 모양을 꽤 기쁘게 생각하는 모양으로, 우리 집에 와서 흔히 그런 자랑을 하 는 일이 있었지만, 물자 배급 같은 것은 비교적 정직하고 공평하게, 더욱이 특수 물자는 제 몫은 빠지고 반원들에게 나누어주고(생색내기 위하여)하여 비교적 평판이 좋았다. 하기는 그런 배급물 등은 자기네는 받지 않을지라도, 딴 길로 들어오는 물자가 꽤 풍부한 모양으로 다른 ‘반’에는 나오지 않은 배급을 때때로 소위 ‘반장 배급’이라 하여 ‘하도 이런 것은 시가에 서는 볼 수 없는 물건이기로, 우리 집에 있던 물건을 여러분께 나누어드립니다’고, 광목 양말 등을 특배하는 일도 있었다.

내가 연구한 바에 의지하건대, 그들은 진정한 일본제국 신민이었다.

대정 중엽 혹은 말엽에 세상에 나서 가정에서는 무슨 다른 교육이 없이, 학교에서는 황국신민으로서의 교육만 받아왔고, 더욱이 만주사변 이후 중일 전쟁 기간은 더욱이 격화된 소위 ‘황민화’ 소위 ‘내선일체’ 소위 ‘내 선 동근동조’ 사상의 추진 교육 아래서 지식을 성취한 그들이라. 그들의 부조(父祖)가 조선인이라는, 일본인과는 별다른 종족이었다는 점은 애초에 알지도 못하고, 다만 ‘내지’와 ‘조선’이 서로 말과 풍습이 다른 것은 가운데 현해탄이 끼여서 멀리 격해 있기 때문이지 ‘내지’의 구주 지방과 동북 지방이 사투리가 다르고 풍습이 다른 것이나 일반으로, 다만, 내지 끼리끼리보다 조선은 거리가 더 멀기 때문에 더 차이가 큰 것이라고쯤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런지라, 덕수에게 있어서는, 일본제국에 방해되는 사상을 가진 사람은 역적으로 보이고, 게다가 젊은 혈기와 공명심까지 아울러서, 그의 직권을 이용하고 남용하여 ‘고문 명인’이라는 칭호까지 듣게 된 것이요, 아내(애국반장) 애희는 동네 여인들의 불평을 사리만치, 방공 연습이며 국방 헌금 저금에 열렬한 것이었다.

우리 같은, 구 대한제국 시절에 태어나서 고종 황제와 순종 황제를 임금으로 섬긴 늙은 축으로는 이해하기 곤란하리만치, 모든 애국 운동(일본에의) 에 지극히 정성스러웠다.

그러나 우리도 표면은 황국신민인 체를 하지 않을 수 없는 비상시국이었 다. 약간만이라도 눈치 달랐다가는 덕수의 눈에 걸릴 것이라, 방공 훈련에 나오라면 하던 빨래를 던지고라도 나가야 했고, 헌금이나 예금 국채 구입을 하라면 주머니를 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애희는 꽤 영리한 여인으로서, 공채거나 예금 등에 있어서는 빈부와 수입 등을 참 잘 고려하여 나무람 없도록 배정하고, 더욱이 자기네가 솔선해 가장 많이 책임져서, 다른 사람으로서는 용훼할 여지가 없게 하였다.

이럴 즈음에 1945년 8월 15일의 국가 해방의 날이 온 것이었다.

그 해방의 흥분 가운데서, 서대문 형무소의 문이 열리고 거기서는 많은 사상범이 청천백일의 몸이 되어 해방의 새 나라로 뛰쳐나왔다.

이 일이 덕수 내외에게는 무슨 일인지 모르겠는 모양이었다.

며칠 지나서, 몇 장정이 덕수의 집으로 와서 무슨 힐난을 하다가 덕수를 두들겼다.

또 며칠 지나서는 덕수 내외는 이 동네에서 사라져 없어졌다.

그러나 국가 해방의 흥분의 시절이라, 그런 일에 그다지 마음 두지 않았다. 어디로 뛰거나 혹은 매 맞아 죽었거나 했겠지쯤으로 무심히 보아두었다.

그러는 중 나도 어떤 일본인 동료(변호사)의 집을 한 채 양도받아서, 그리로 이사를 온 것이다.

그랬더니, 얼마 전 종적 사라진덕수네가 이 동네에 살고 있는 것이었다.

더욱이 덕수는 금빛 찬란한 군정부 경무부의 정복으로서…….

대체 군정부는, 미국인의 하는 일이라 우리 민족의 감정 따위는 고려하지 않고, 제멋대로만 해나가는 행정기관이지만 제아무리 경험의 전력자라 할지 라도, 민족적 분노를 사고 있는 부류의 사람을 그냥 그 자리에 머물러두는 것은, 좀 과심한 일이겠지만, 덕수 자신으로 보자면 이 해방된 새 나라에 그냥 삶을 유지하려면 ‘경관’이라는 무장적 보호가 절대로 필요하였을 것이다.

덕수네는 자기의 전력을 아는 이가 또 같은 동네에 살게 된 것이 얼마간 재미없던지, 처음 얼마는 우리를 외면하며 피하는 태도를 취하더니 그 아내 애희가 먼저 내 아내와 아는 척하기 시작하여 다시 서로 왕래가 시작되었는 데 그의 뽐내고 생색내기 좋아하는 성질로서 지금의 새 세상에서 경부로 승차한 남편을 내 아내에게 자랑하며, 예나 지금이나 일반인 ‘전 판사, 현 변호사’인 우리에게의 일종의 우월감적 태도를 취하려는 기색이 보이더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 내외에게 있어서는, 전 일본제국 조선 지방 신민이 왜 8·15 이후에는 조국이요 모국인 일본은 분명 망해 들어가는 꼬락서니인 데도 불구하고, 해방되었노라고 기뻐하는지 그 진정한 속살은 이해하기 힘들어 내 심 불안에 갈팡질팡하는 모양이었다.

이에 나는 생각하였다. 일본의 대정이나 소화 연대에 출생한 우리 사람도 수백만이 될 것이다. 가정에서의 특별한 지도가 없는 이상에는 혹은 시대에 영합하기 위하여 혹은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기 위하여, 가정에서도 그 자녀를 일본 신민 만들기를 목표로 교육하거나 혹은 그저 방임해두거나 한 아이들은, 소학교에서부터 일본(황국) 신민 되기를 강조하는 교육을 받았는지라, 근본 사상이 애초에 일본 신민으로 되어 있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어느 날 전차에서 견문한 바이지만, 어떤 노동자가 기껏 일본인을 욕해 말 하느라고 ‘내지 놈, 내지 놈’ 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런 축들은 기껏 자기를 ‘반도인’으로, 일본인을 ‘내지인’으로밖에 인식하지 못하는 인생이다. 그런 축의 자제는 대게 자기는 일본 신민으로밖에는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청소년들에게 우리 전래의 조선 혼을 다시 부어넣고 배양하기 위해서는 장차 수십 년의 세월이 걸려야 할 것이다.

국가는 해방되었으나 아직 국권을 못 잡은 우리가…… 아아, 요원하고 지 중한 문제로구나.

덕수 내외는, 처음 한동안은 우리 내외에게 좀 회피하는 태도를 취하다가 그 뒤에는 자기는 경부라는 우월감을 품고 예나 지금이나 변동 없는 우리에게 다시 상종을 시작했다. 사실 그들의 눈에는 모든 조선 사람이 혹은 사장이 되고 전무가 되고 중역이 되고, 제각기 출세하는 이 경기 좋은 판국에서, 10년을 하루같이 ‘전 판사, 현 변호사’라는 움직임 없는 자리에 있는 우리에게 정떨어질 것이었다.

그즈음에 이 서울에는 한 가지 색채 다른 사건이 생겨서, 사람들의 눈을 둥그렇게 하였다.

즉 이전 총독부 시절에 이 땅 사상계의 인물에게 아주 혹독하고 무섭게 굴던 어떤 일본인 경부가 총에 맞아 죽었다.

그 일본인이 경부로 있을 때 그 부하로 있어서, 상관에 못지않은 활약을 한 덕수는 이 사건에 가슴이 서늘해진 모양이었다.

이 새 동네에서는 가장 오래 전부터 면식이 있는 우리 집이 그래도 서로 통사정을 할 수가 있었던지, 덕수의 아내 애희가 지금껏의 생색내고 뽐내는 태도의 대신으로 당황한 기색으로 찾아와서 내 아내에게 그 사정을 호소하였다.

호인이요 남에게 싫은 소리를 하기를 꺼리는 내 아내는 그때 애희에게 대하여 그저 대강 이는 민족적 노염이니 할 수 없는 일이라 하고, 그대네도 이전 매 맞은 일이 있는 것이 모두 그 당시 그대 남편에게 부당한 대접을 받은 사람의 사사로운 원염이 아니고, 민족으로서의 노염이라는 뜻으로 대답해준 모양이었다.

그 수삼 일 뒤, 덕수 자신이 이번은 나를 찾아왔다. 금빛 찬란한 경부의 제복을 입은 채로…….

“영감.”

변호사라는 직업에 대한 보통 칭호이지만 덕수는 아직껏 내게 불러 보지 않은 이 칭호로써 나를 불렀다.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경부(일본인 경부) 사살자인 범인으로 지목되는 자를 발견해서 체포하려 하니까, 상부에서 그냥 버려두랍니다그려.

법치국가에 이런 법이 있겠습니까?”

“김경부, 김경부는 그 일에 그저 모른 체해두오. 김경부도 전일 폭행 당한 일이 있지만 ‘민족의 분노’는 국법이 용인해야 하는 게요.”

“그렇지만 살인자사(死)는, 하늘의 법률이 아니오니까?”

“살인해서 중심(衆心)을 쾌하게 하는 자는 하늘이 칭찬할 게요. 대체 …….”

여기서 나는 그에게, 우리 민족과 일본 민족의 사이에 얽힌 역사적 인연을 자세히 설명해주고, 한일합병과 그 뒤의 일본족의 행패며, 근일 일본이 전쟁에 급하게 되어 내선일체 동근동족이라는 간판을 내세워서 우리를 끌려던 자초지종을 그에게 말해주었다.

나의 이야기하는 동안 미심한 점은 질문을 해가면서 다 들은 덕수는, 비교적 총명한 자질이라, 대개 이해하겠다는 모양이었다. 내 이야기를 다 들은 뒤에 잠시 머리를 숙여 생각한 뒤에 긴 한숨을 쉬며,

“영감, 잘 알았습니다. 듣고 보니 가증한 일본이올시다그려.”

하고는 잠깐 말을 끊었다가 이번은 미소를 하며 뒷말을 하였다.

“그렇지만 영감, 비국민적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구정은 난망이라, 내겐 일본인이 가끔 그립습니다. 더욱이 ○인의 우월감적 태도를 보면 그야말로 반감이 생기고, 일본인이 동포같이 생각됩니다그려.”

“인정이 혹은 그렇겠지. 우리 같은 늙은이는 옛 한국의 백성이라 이번 태평양전쟁 때 같은 때도, 일본이 패망하면 우리 민족은 일본의 식민지로서 어떤 비참한 지경에 떨어질지 모르면서도, 다만 일본에 대한 증오심 적개심으로 일본의 패배를 바랐으니……”

“그 대신 우리 같은 젊은 축은, 그런 사상(일본 패배)을 가진 사람은 참으로 비국민이라고 밉고, 가증해서 경찰에서도 죽어라 하고 때렸습니다그려. 죽은 사람도 적지 않지만……”

“그게 살인자사(死)로 처리됐소?”

“아, 왜요? 직권이요 애국 행동인데야……”

“일본 경부 사살 사건도 ‘살인자’가 아니라 쾌심자니 경찰도 모른 체하는거요. 김 경부, 한인이 되시오. 내 나라로 돌아오시오.”

아아, 그러나 우리나라 안에, 아직 진정하게 조국 사상에 환원하지 못한 젊은이가 진실로 수백만 명이 될 것이다. 이들을 모두 내 나라 내 조국의 백성으로 환원시키려면 과거에 일본인이 우리를 일본화하려던 그만한 노력 과 그만한 날짜가 걸려야 할 것이다. 이 문제는 우리 건국에 지대한 과제라 아니할 수 없다.

지난날 일본인이, 조선의 서른 살 이상의 사람은 다 죽은 후에야 조선은 참말로 일본제국의 일부가 될 것이다 하였지만, 사실 해방 이후에 교육받은 아이들이 이 땅의 주인이 된 뒤에야 비로소 이 땅은 진정한 우리 땅이 될 것이다.

그런 일이 있은 뒤부터는 덕수는 흔히 나를 찾아와서 나에게 조선학을 듣고 민족사상을 듣고 하였다. 본시 총명한 사람이라, 제 마음에 남아 있는 일본적 뿌리를 빼버리려는 노력이 분명히 보였다.

나는 이를 흡족하게 보았다. 단 한 사람이라도 조국 정신에 환원시키는 일 이 기특한 일이라는 것을 스스로 느끼고, 덕수에게 꽤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때에 이 땅에는 또 색채 다른 사건이 하나 생겼다.

즉, 옛날의 재판소 검사요 그 뒤에는 황민화 운동의 무슨 단체의 수령이었던 어떤 일본인이 무슨 사소한 횡령 사건으로 법에 걸려 처단을 받은 사건이었다.

이 땅에서 모두 철퇴하는 일본인이라, 사기며 횡령 등의 사건은 부지기수 였지만, 하필 이 사건만은 문제가 되어서, 법의 처단을 받아, 예전에는 제 지배하에 있던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이 된 것이었다.

역시 민족의 노염이었다. 쫓겨가는 인종의 사소한 허물을 일일이 들추어 무엇하리오만, 그 일본인(전 검사)에게는 민족의 노염이 부어져 있어서, 한 몽치 내릴 무슨 핑계만 기다리고 있던 차라, 이 문제되지 않을 문제가 법에 걸린 것이었다. 이 사건에 있어서 김덕수가 비교적 정확한 판단을 내린 것을 보고 나는 기뻐하였다.

영감 흠을 “, 잡으려고 노리노라니 그 모 검사나 걸려든 게지요?”

“옳소. 이 처단이 그에게는 되려 다행일 게요. 이렇게 걸리지 않았더면 그도 혹은 총을 맞았을는지도 모를 게요. 우리 민족에게는 총 맞을 죄를 지은 자니까……”

“나도 썩 삼가겠습니다. 과거의 잘못을 사죄하는 뜻으로라도, 썩 잘 처신 하겠습니다.”

사실 현 군정부의 요직에 있는 사람 가운데에 덕수의 고문 몽치를 겪은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가 스스로 겁내고 스스로 근신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자칫하면 민족적 노염에 걸려들 자기의 입장을 이해하느니만치, 그는 전전긍긍하는 모양이었다.

더욱이 그의 열혈적 성격이 자기의 한인이라는 점을 알아낸 만치, 스스로 애국심을 자아내려는 모양도 역력히 보였다.

군정 당국이 조선에 대한 방침이 약간 달라져 이전은 같은 연합군이라 하여 칭찬하기만 장려하던 방침이 변경되어, 공산당은 나라를 망치려는 단체라 하여 좌익 계열이며 그들의 조국이라는 소련에 대한 공격 비난이 공인되고 공행되는 세월이 이르렀다.

그 어떤 날 덕수가 나를 찾아왔다.

한참을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하다가 문득 이런 말을 하였다

“참 악질입니다. 좌익 극렬분자들…….”

“왜 또 새삼스레?”

“뻔한 증거를 내대고 아무리 문초해도 결코 승인하거나 자백하지 않습니 다그려. 증거가 분명한 일도 그냥 모르노라고 고집하고 버티니까 참 가증하고 얄밉지요.”

그는 사뭇 얄밉다는 듯이 위를 향하여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그저 매에 장수 없다고, 두들기고 물 먹이고 해야 비로소 토사가 나옵니 다그려. 그러기 전에는 아무리 역연한 증거를 내대어도 그냥 모르노라고 뻗대니까…….”

“여전히 고문을 잘하시오?”

“허허, 안 할 수 없습니다. 가증해서라도 주먹이 저절로 나오거니와, 주먹 아니고는 토사하지 않고, 토사가 없이는 법이 범죄를 인정하지 않으니까요.”

“그래도 고문은 피해야지.”

고문 않고는 하나도 “자백을 받지 못합니다. 변재(變才)가능해서 교묘하게 피하거나, 정 몰리면 입을 봉해버리거나 해서, 절대로 승인이나 자백을 않습니다.

“그래도 고문에 의지한 자백은 법률이 승인하지를 않지.”

“두들겨서라도 자백을 받고 그 자백을 입증하는 물적증거까지 겸하는데도요?”

“글쎄…… 그래도…… 고문은…….”

“나도 압니다. 고문은 법률이 금한 게고 인도에 어긋나는 일인 줄은. 그래도 가증한 꼴을 볼 때는 주먹이 저절로 앞서는 걸 어쩝니까? 꼭 자백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보담도 감정적으로, 주먹 행동이 앞서게 되는걸요.”

“여전히 고문 찬성론자…….”

“암, 고문 대장 고문 선수로 왜정 때부터 이름 높은 김덕수 부장이 아니 오니까? 오늘날의 김경부를 쌓아올린 기초가 고문인데…….”

그는 스스로 미소…… 다시 너털웃음까지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그래도 심한 고문은 피하시오.”

“안 돼요. 그자들은 무슨 범행을 할 때에 애초에 교묘하게 피할 수 있을 핑계를 다 만들어가지고 행하니까, 말로는 꼭 그들에게 집니다. 매밖에는 장수가 없어요.”

“최근에는 매질을 좀 잘한 일이 있소?”

나는 웃으며 물었다.

“이즘이야 부하에게 시켜서 하지 내가 직접 매질하지는 않지만 오늘도 상당히 두들겼습니다.”

“지금도 무슨 큰 사건이 있소?”

“그건 좀 비밀이지만, 좌익 극렬분자의 배국(背國) 행동입니다.”

그가 전일 스스로 자기는 일본인이노라고 믿던 시절의 그의 정의감으로 그때의 범인에게 행하던 폭력주의가 연상되어, 지금의 고문을 대개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김 경부, 인명은 지중한 게요. 피의자의 생명까지 위험한 폭력은 삼가시오. 그들은 우리 동포요. 다만 일시적 유혹에 속은 따름이지 같은 조상의 피를 가진 우리의 동포요. 인도라는 문제보다도, 법률 문제보다도, 동포 동족이라는 문제를 먼저 생각해야 됩니다.”

“아, 이 땅을 소련국 조선현으로 여기는 사람도 동포입니까?”

“또 고문에 의지해서 얻은 자백은 공판에서 다시 번복됩니다.”

“네. 나도 그 점을 생각합니다. 고문만이 아닐지라도 그 잔악한 극렬분자 들은 공판장에서는 교묘한 말로 사건을 번복시키는 게 또 사실입니다. 그러니만치 그들의 죄에 대한 처단을 애초에 경찰에서 폭력으로 응징해두어야 속이 풀리지, 경찰에서까지 인도주의를 써서 우물쭈물해두면 민족적 분노는 그냥 엉킨 채 풀릴 길이 없지 않겠습니까?”

“경찰관에게는 역시 경찰관적 철학이 계시군.”

나도 껄껄 웃는 바람에 그도 소리내어 웃었다.

그런데 그다음 다음날도하의 각 신문은 톱기사로서 커다란 활자를 아낌없이 사용하여 ‘왜정 시대에 고문 대장으로 이름 높던 형사 김덕수가 이 해방된 세월에도 여전히 경찰 경부로 남아서 그 흉수를 놀린다’는 제목 아래, 덕수가 예전에 누구누구 등 현재의 명사들을 어떻게 난폭하게 고문하였으며 그 덕수가 여전히 경찰계에 더욱이 경부로 승차를 하여, 모 사건 취조에 어떠한 고문을 하여, 무리한 자백을 자아냈다는 기사가 각 지면을 장식하였다.

그로부터 또 며칠 뒤, 신문지는 또 김덕수에 관한 기사를 보도하였다. 그 기사에 의지하건대, ‘고문 대장 김덕수 경부는 그 잔학한 고문으로 벌써 물론이 높거니와 또 어느 피의자에게서 뇌물로 쌀 서 말을 받아먹은 사실이 검찰 당국에 알린 바 되어서 파면당하고 기소 수감되었다’는 것이었다.

이 기사를 보고 나는 뜻하지 않게 혀를 찼다.

사실 수감되었는지 어떤지는 알아보아야 할 일이지만 이것은 너무 심한 채찍질이 아닐까.

그가 일정 시대에 좀 심한 고문을 하여 적지 않은 사람에게 원염을 산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자세히 따지자면 그 자신이 받은 교육 때문에 그는 자기 자신을 일본인으로 알고, 일본에 충성되기 위한 행동이었다.

우리처럼 한국의 신민으로 태어나서 중간에 일본으로 변절한 사람은 어떤 채찍을 맞아도 불복하지 못하겠지만, 덕수처럼 어려서부터 한국의 존재를 모르고 나서 자란 사람이 일본을 조국으로 여기는 것은 책할 일이 못 된다.

그가 일본인이라는 자각 아래서, 일본의 반역자에게 좀 잔학한 일을 했다 한들 그것은 그리 욕할 바가 아니다.

현재의 덕수의 행동을 가지고 인도에 벗어난다 하면 모를 일이로되, 지난날의 일을 들추어내어 욕하는 것은 다만 욕하기 위한 욕일 따름이다.

모 일본인 경부의 피살 사건이며 일본인 검사의 피검사건이며 모두가 민족적 노염이 부어져 있기 때문에, 딴 핑계 잡아내어 그것으로 노염풀이를 하는 것이다.

쌀 서 말의 수회 몇 ? 백만 원, 몇 천만 원도 껌찍껌찍 삼키고 그러고도 무사한 이 판국에 쌀 단 서 말로, 그것을 무슨 수회라 하랴.

다만 고문이니 인도니 하는 문제보다도 민족적 미움이 부어져 있던 김덕수라, 역시 민족적 정기에 벗어나 좌익 계열에 대한 고문 혹형에는 문제가 안 일어나고, 쌀 서 말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

아내를 덕수의 집에 보내서 수감된 여부를 알아보았더니 과연 어제부터 집에 안 들어온다 하며 덕수의 아내 혼자 있더라는 것이다.

덕수와 오래 이웃해 산 정분도 있거니와 덕수의 사건에는 동정할 여지도 있어서 나는 덕수의 사건의 변호를 자청해서 맡고, 어떤 날 그가 수감되어 있는 형무소로 변호사의 자격으로 그를 면회하였다.

면회실에서 그와 대하여, 내가 그대 변호인이 되고자 왔노라고 내 뜻을 말했더니 그는,

“제 아내가 부탁합니까?”

고 묻는다. 그래서 그런 게 아니고, 내가 그대의 심경이며 행위에 어떤 정도까지의 이해가 있어서 자진해 변호하겠노라고 했더니, 그는 잠시 머리를 숙이고 생각하고서 천천히 말을 꺼냈다.

“그건 그만둬주십쇼. 고맙습니다만…….”

“왜? 왜 그러오?”

“선생님, 제가 이번 기소된 건 쌀 서 말…… 부끄럽습니다만…… 서 말 문제지만 저를 기소되게까지 한 것은, 말하자면 민족적 증오가 아니오니까?

전 양심에 추호 부끄러운 바 없으니, 민족의 매질을 달게 받겠습니다. 사실을 말씀드리자면 전 늘 괴로웠어요. 모르고서나마 제가 전날 왜경의 일인으로 우리 동포에게 지은 죄가 지대해요. 그 죄의 벌을 받기 전에는 언제까지 든 무슨 큰 빚을 진 것 같은 압박감에서 면할 수가 없었어요. 오늘날 사소한 일을 실마리로 민족의 채찍을 받는다 하면 그 받은 이튿날부터는 마음이 가벼워지겠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그저 내리는 채찍을 피하지 않고 고맙게 받겠습니다. 선생님의 호의는 감사합니다만…….”

이리하여 전 경부 김덕수는 공판정에서도 아무 딴소리 없이 그의 등에 내리는 민족의 채찍을 고요히 받고, 현재 형무소에 복역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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