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유기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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編者一言[편집]

산수(山水)를 뉘 아니 즐기리마는 범안은 보기나 할 뿐이오 오직 시인묵객(詩人墨客)이라 사이를 옮겨 더욱 빛나게 하고 더욱 향기롭게 하는 것이다.

위당 정인보 씨! 그 민박(敏博)한 안식(眼識)과 풍부한 사조(詞藻)를 가지고 남으로 영호(嶺湖)에 노닐며 가는 곳마다 호반이나 산전(山顚)에서 얻은 수순(秀旬)과 일흥(逸興)을 우리에게 부치노라 한다.

오늘부터 금산수수(錦山繡水)의 면영(面影)이 지상(紙上)에 방불(髣髴)하야 읽는 이도 따라 봉두(峯頭)에 구름을 만지고 호심(湖心)에 달을 낚는 양미(凉味)와 청복(淸福)을 맛보리라.

더구나 위당은 또 조선학의 권위라 가다가 고찰고비(古刹古碑)나 숨은 장서가를 만나 행여나 묻힌 것을 발견하면 파들고 돌아오리니 이 방면의 수확 또한 적지 않을 것을 믿는 바이다.

第一信[편집]

X형 청주(靑州) 와 보니 여기도 큰비가 갓 지냈다 합니다. 화양동(華陽洞) 가는 자동차를 물으니 시간 정해 다니는 것은 없고 삯으로 얻어야 간다 하기에 동행인 부전(不顚) 민세(民世) 윤석오(尹錫五) 세 분과 의논하고 이왕이니 타고 달려보자 하야 부전은 왼쪽에 민세는 가운데 나는 민세 옆에 윤군은 운전대 옆에 차례로 올라 앉어 화양동을 향하고 떠났습니다. 오후 이점반 채 못된 때.

「하눌이 끄믈끄믈한다. 비나 또 만나지 않을까.」 민세와 이렇게 이야기하다가 민세가 「화양동」 하는 바람에 깜짝 놀래어 눈을 뜨니 어느덧 미원(米院), 미원은 쌀원이라고 부르는데 이다음이 청천(靑川) 또 이다음이 화양동이라 합니다. 갈수록 개울벌이 넓어집니다. 산은 범산(凡山)이나 점점 높아갑니다. 자동차가 한 굽이를 돌면서부터는 넓은 개울에 여기저기 여울이 지며 깍지끼듯한 두 산날이 먼 앞길을 가리었는데 왼쪽은 높고 오른쪽은 저윽이 처져 그 너머로 열푸른 먼산도 보이고 세모진 토산 서너 봉은 바로 내다보입니다. 얼마 더 지나서는 먼산이 왼쪽 높은 날에 바싹 붙드니 점점 감추어집니다. 얼마 아니 가니까 큰 촌락이 있고 오래된 기와집, 허술한 솟을대문이 보입니다. 여기가 청천이라 합니다.

삯자동차로 화양동 들어가는 이것도 세사(世事)이니 쌔그랭이가 안 붙을 수 있겠습니다. 청천서 오리(五里)쯤 나와 삼간(三間)통가량 되는 개울가에 닿드니 더 못 간다도 하지요. 「여보 그럴테면 왜 화양동까지 간댔소.」 「아니되오 건너갑시다.」 암만하기로니 못 간다는 편이 지겠습니까. 비는 곧 올 것 같고 인가는 멀고 어쩔 수가 없더니 피차 다투는 동안에 오고가는 사람이 있어 행장은 짐꾼 얻어 지우고 네 사람이 천천히 걸어 떠났습니다. 개울소리가 산을 따라 높아가면서 굽이굽이 좋은 데도 많습니다. 자동차의 쌔그랭이가 아니었든들 이 경치를 휙 지내고 말았을 것입니다. 아직도 화양동은 어느 속인지 보이지 아니합니다.

第二信[편집]

산기슭 바위 엉더리에 한참인 딸기도 좋고요 숲새에 지려 붉은 단풍도 좋고요 틈틈이 폭이 큰 철쭉나무를 보니 꽃필 때는 이 어름이 모두 꽃밭일 것 같습니다. 아까는 넓은 개울을 오른편으로 놓고 지났더니 지금은 왼쪽으로 끼고 올라갑니다. 벼루가 험하지 아니하고 강물 개울물이 달러 그렇지 배치된 것은 대략 단양 옥순봉(丹陽玉筍峰) 어름 같습니다. 이렇게 얼마 가더니 산이 돌고 개울이 꺾이는데 개울버렁이 거의 강과 같고 행인 건뉘는 배가 보입니다.

거울 같은 수면에 서슴지 않고 젓는 삿대. 저 사공은 아까운 줄도 모르는지. 옷자락이 날리랴 말랴 하는 지음 온 개울이 순인 결 같습니다. 뱃속에서 보이는 버렁은 물에서 보는 것보다 멉니다. 이 물은 어서 오며 가기는 어데로 가노. 으슥하면 의례히 갑갑한 것인데 □□나려가는 데가 보이지 아니할 수록 끝없는 강호 맛이 나는 것도 별일이라 하려니와 물깟풀[1] 냄새가 바람 따라서 오고갈 제 큰 숲속 그윽한 기운이 도는 것도 이상스럽다 하였습니다. 개울 이름은 감으내오 현천(玄川)이라고 쓴다 합니다.

검은 돌이 희여가고 물소리 점점 요란하고 산빛이 행인의 마음을 기껍게 합니다. 그러나 이 산은 오히려 껍풀이라 다시 돌아들면 한 산의 안팎이었만 아까 보고 좋다든 밖산의 유(類)가 아니니 임벽(林壁)의 기장(奇壯)함이 내금강 표훈사 동구(內金剛表訓寺洞口)를 연상하게 합니다. 이 돌아드는 데서 건느는 물이 곧 화양동 아래 개울입니다. 이리 놓고 저리 끼고 배로 건느고 업혀 건너 여러가지로 변한 것은 행인의 일이지 물은 언제나 이 개울의 한 줄기입니다. 개울을 건너서니 낮었다 높았다 펄펄 날어 돌아다니는 밀잠자리 한 떼 축축한 개울가에 꼬마동이로 자란 눈버들을 어루는 것 같습니다. 산벽(山壁)은 솔나무로 입히었는데 솔마다 아래는 성기다가 올라가서 다박다박 엉기었고 틈틈이 드나들어나는 바위가 어떤 것은 우람스럽게 고대(高大)한데 화양동문(華陽洞門)이라고 사긴 것이 아직도 두렷합니다. 산빛 물빛 돌빛이 어울러 환하야지는 지음이라 하눌에 끼었든 운음(雲陰)도 일반(一半)이나 엷어 사이사이 청공이 드러납니다.

第三信[편집]

짜른 편지나마 세 번째 쓰것만 아즉도 서울 떠난 그날이라 칠월 십사일(七月十四日) 해가 반척쯤은 남았습니다. 화양동문이라고 사긴 그쪽만 보면 더 말할 것 업는 기관(奇觀)인데 상대한 다른 산이 마저 그와 같었드면 더 좋았을 것을. 물과 돌은 나므랄 것 없이 좋습니다. 좀 올라가면 돌들이 물을 피하랴는 듯이 이리저리 물러서고 수면이 저윽이 넓은 데도 있으나 또다시 올라가면 돌이 도로 물과 싸와 조곰도 지지 아니합니다. 더 올라가면 유착한 놈 우람한 놈 긴 놈 모진 놈 둥근 놈 갖가지 별별 돌들이 온 개울에 허여져 물소리 어찌 들레이는지 동행끼리 떠드는 이야기가 서로 들리지 아니합니다.

더 올라오니 이쪽저쪽의 임애(林厓)가 이제는 얼맞게 유(幽)□합니다. 보 막은 밑으로 개울을 건너 보 안에 고인 물을 전면으로 바라보니 물 우에 둘린 창벽이 물밑으로 나리비추어 거울 속 같습니다. 화양동 마슬 초입에 검박창(劍朴脹) 옛집 한 채가 있으니 이 집은 기와로 이었건만 초당(草堂)이라고 부른다 합니다. 우암 당시(尤菴當時)에는 모옥(茅屋)이든 것 같습니다. 오른편으로는 담도 없는 공청(空廳)이 두어 채나 길옆에 있는데 한 채에는 진흥회(振興會)라고 쓴 목패가 붙었습니다. 이것을 지나면 다 무너진 여러 층 댓돌 저 위로 삼문(三門)이 보입니다. 이 집이 무슨 집인지 아시겠습니까.

무에니 무에니 산중고사(山中故事)를 들추지 말고 이쪽 삼문만 바라보든 눈을 한번 돌려 저쪽을 바라볼 것입니다. 물소리 정히 높은 굽이에 암벽을 터를 삼고 소송 두어 주(株)로 유취(幽趣)를 도읍게 한 정자가 있으니 이를 암서재(巖棲齋)라고 합니다. 화양동으로 가장 미목(眉目)될 만한 건물입니다. 구경은 내일로 미루고 채운암(綵雲庵)으로 올라갑니다.

第四信[편집]

채운암이란 아담한 암자입니다. 산곡(山谷)이오 전후좌우가 다 수목(樹木)이라 화양동 촌락에서 얼마 올라오지 아니하는 곳이었마는 인간이 아렴풋합니다. 집은 적어도 어찌 정갈스러운지 유리 같이 어른거리는 누마루에 틈 하나 아니 벌였습니다. 화양일동은 우암 이후 기다명인(幾多名人)의 노력(努力)을 쌓아 거의 명사화(明士化)한 곳이라 석각한 것은 신종(神宗), 의종(毅宗)의 필적이오 족자한 것은 신종생모(神宗生母)의 관음(觀音) 상상(相像)이오 발문(跋文), 영시(詠詩) 어는 것이나 다 명조(明朝)에 향한 혈성(血誠)이니 이 암자에서 보관하는 문헌만 하야도 적지 아니합니다. 암주의 내여놓는 고지(古紙) 뭉치를 등하(燈下)에 돌려가면서 보고 여기가 과연 어딘가 이상스런 생각이 나더니 덮어 치우고 각기 누어 잠을 청할랴 할 제 풍□ 소리가 가갑게 들리면 물소리도 가깝고 풍□ 소리 멀어지면 물소리 또 한번 멀어지더니 풍□은 한참 소리가 없고 물소리만 그윽히 들리는데 물의 곡절이 소리를 따라 보이는 것 같습니다.

여보 민세 「좋지 않소」 「그래도 수석(水石)은 우리 수석이구려」 그러다가 무슨 마음이던지 「우리 수석」 또 한번을 뇌고 피차 말이 끊쳤는데 석전노사(石顚老師)는 발서 코곤지 오랩니다.

윤고산 어부사시사(尹孤山漁父四詩詞)에 「하마 밤□□냐 자규(子規)소리 맑게 난다.」 한□□ 심상한 말 같으되 이를 생각하야 보면 실로 시가(詩家)의 묘경(妙境)이니 묘경은 참이라야 열리는 것이라 밤든 뒤 자규소리를 누구나 들어 보면 이 말이 얼마나 참된지 알 것이오 참되다 할진대 이곳 묘경임을 알 것입니다. 오늘 밤 이 암자에서 해맑은 자규소리를 들으니 완연히 고산의 시조입니다. 여기서 들리는 새소리는 대개 자규소리오 가끔 찍찍하는 소리도 나고 더 먼곳으론 흐르를 딱 따닥 이렇게 들리는 소리도 있는데 어떠한 새짐승의 소리인지 물어보아도 잘들 알지 못합니다.

第五信[편집]

자고 나서 암서재를 들러 그 뒤 환장암(煥章庵)이라는 절에 가 보니 법당만 남았는데 뜰앞에 오얏 장미 언제 심근 것인지 알 수 없으나 길 넘은 대명홍(大明紅)은 이름이 이상한지라 일부러 심근 것 같기도 합니다. 화양동이라면 누구나 우암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두옛적 원주인을 찾으면 고운(孤雲)일가 합니다. 환장암서 바라보이는 높은 봉이 낙영산 주봉(落影山 主峯)인데 그 옆 바위너덜에 고운대(孤雲臺)가 있다 합니다. 전하되 이는 곧 고운의 암서구지(巖棲舊址)라 하며 석란(石欄)으로 그 자리를 표하여 아즉것 남아있다 합니다.

화양팔경이라고 무슨 담(潭) 무슨 대(臺) 하는 것이 다 석각(石刻)이 있으나 이는 호사자의 일이라 분서(分叙)코자 하지 아니하거니와 화양절경인 「파곶(巴串)」으로 올라가는 길옆에 와용암(臥龍岩)의 정류(正流)와 학소대(鶴巢臺)의 창벽(蒼壁)이 다 가승(佳勝)합니다.

와용삼서는 이야기 하나가 있습니다. 일행중 민세(民世) 가장 운승(韻勝)한지라 바위기슭에 앉어서 굽이치면서 흘러가는 물을 굽어보다가 무엇을 얻었는지 회중만년필을 꺼내어 두어 줄 쓰랴말랴 할 때 댁각하더니 만년필 뚝겁이 급류로 떨어졌지요. 나려갈 수는 없고 가만히 있기는 너무나 무정하고 왔다갔다할 뿐이었습니다. 뚝겁없는 만년필이 하도 딱하기에 치분갑(齒粉匣) 속 누빈종이를 맞게 말어 밥풀로 붙혀 놓고 우까지 막아 부□□□힌 장식이 있어야지요. 새 양말 밑에 꽂혀 있는 철사를 빼어서 장식까지 만들고 보니 뚝겁으로는 우수우나 우숨거리로는 상당하였습니다.

이따금 쿵 쿵 소리가 나기에 동행하는 학운암주(鶴雲庵主)더러 여기 어디 물방아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이것도 물에서 나는 소리라 합니다. 학소대라는 것은 층첩한 바위로 된 기봉인데 그 옆으로 골이 지고 그 골로부터 흘러 나려오는 물이 대하(臺下)로 미쳐서는 버스듬하게 놓인 너럭바위로 두 층을 꺾이어 나려 개울로 쏟칩니다.

第六信[편집]

여기가 파곶이라는 곳입니다. 파곶이라는 일홈이 어찌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학소대를 바라보면서 개울가 돌사다리를 얼마 지나 올라가면 개울물이 급히 나리질리며 그 우가 잘 보이지 아니하더니 다시 또 올라가니까 아랫개울은 보이지 아니하고 흘러가는 물이 턱을 덮어 넘는 것만 보입니다. 턱 안은 넓습니다. 이 넓은 속은 반은 물이오 반은 돌인데 전통으로는 둥구스름하게 되고 둘레의 상반은 독전[甕의 圍] 같이 되었으되 그 전더귀가 대개 두 층씩 둘려 넓게 나려오는 골물이 이 둘레에 와서는 일제히 소리를 냅니다.

둘레 속으로 들어오는 물들이 또 곰살거울 리 있겠습니까. 이 돌뿌리와 저 돌새로 굵은 여을 잔 폭포가 이로 세일 수 없이 많고 턱 안으로 얼마쯤은 판한 물이 있으나 우아래가 모다 물소리라 판한 것도 판한 것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소리 높은 곳마다 눈보라가 칩니다.

여기서 일어나 저기서 날리는 것과 어우러지는 어름은 부옇게 일어나 안개 같습니다. 물 가운데 솟은 반석에 앉어 우로 아래로 쳐다보고 나려다보면 우로는 물 오는 곳을 모르겠습니다. 나리쏟치는 것만 보이고 아래로는 물 가는 곳을 알 수 없습니다. 턱으로 넘는 것만이 보입니다.

파곶은 참으로 절경입니다. 아늑하기 방속 같으나 시원하기 강호(江湖) 같습니다. 땅버들, 철쭉나무, 말채나무, 물푸레 물 기스리 돌 사이로 두루 나서 키는 적을망정 물소리에 어우러져 너울거리고 빙 돌린 사산(四山)에는 수림이 우거져, 높으니 산인가 할 뿐이지 실상은 수림만이 보입니다. 옥수(玉水)라니 이 물이 참 옥수오 백석(白石)이라니 이 돌이 참 백석이오 무림(茂林), 유곡(幽谷)이라니 이 골이 참으로 무림, 유곡입니다.

第七信[편집]

파곶서 도로 나려와 「초당」을 보고 다시 암자에 오니 겨누리 때가 지났습니다. 산등 둘만 넘으면 곧 공림사(空林寺)라 하기에 그리 멀지 아니할 줄 알았더니 첫 등 넘기부터 언간히 장찹니다. 다음 넘을 데는 저기려니 하고 거침없이 가다가 길 좋은 것이 좀 수상하야 「우리가 잘못 들지나 아니하였나」 하였으나 물을 곳은 없고 절 있을 데는 석전(石顚)이 대개 가르치므로 그리 의심하지 아니하였더니 가다가 화전(火田) 매는 사람을 보고 물으니 이 길이 아니라고 합니다.

여기서부터는 그 사람 가르치는 대로 도랑뚝으로 밭틀로 풀숲 골속으로 들어 산등을 파서 넘는데 돌너더리 우에 측넌출이 덮이어 나뭇길도 보이지 아니하더니 얼마 나려가니 물 끌어[引]가는 나무 「홈」이 산허리로 은은하게 보입니다. 이 물이 아마 절로 가는 것이렷다 하고 「홈」을 따라 □□□가 보니 이 물 받는 곳은 절이 아니요 논입니다. 해는 어둑어둑하고 다시 물어볼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가볼 밖에 있습니까. 한 모통이를 돌아가면서 혼자말로 「물어볼 수나 있어야지」 하든 차에 나무새로 드러나는 기와집웅이 보입니다. 분명히 절인 줄 알면서도 또 헷집지나 아니하였나 저윽이 의심하였습니다.

들어서니 괴괴합니다. 절은 절이다만 과연 공림사인가 한참만에 주지가 오더니 등불이 나오고 밥상이 나왔습니다. 자랴고 누우니 산등 넘던 일은 가마득한데 화양동 「초당」이 한동안 눈에 선합니다.

우암화상(尤菴畵像) 「감실」도 허술하거니와 족자 둘레가 군데군데 상하였고 유물로 전하는 목침, 책상, 지팽이 되는대로 한구석에 그루박히고 학계에 진품(珍品)이 될 만한 운천의(運天儀) 황적도(黃赤道) 두 테를 끼운 채로 반 넘어 부서진 것은 말도 말고 한구석에 막 싸인 금석탁본(金石拓本)들이 손을 대일 수 없이 삭은 것도 참으로 아깝습니다. 공림사란 야사(野寺) 같은데 그래도 깊은 산골이라 창 밖으로 우하고 지나가는 바람소리를 들으니 마음에 가을밤 같습니다.

第八信[편집]

공림사에서 속리산(俗離山) 가는 길을 삼분하야 보면 처음은 수석이 좋고 그다음은 편한 들이오 최후는 상당히 높은 「재」입니다. 절동구를 막 나와서 큰 개울물이 소(沼)가 되어 석벽 둘린대로 사겨가며 고였은데 이 뒤로는 물소리 차차 높아지며 개울바닥에 돌들이 솟기 시작합니다. 화양동 개울물은 희지 아니하면 검은데 이 어름에는 돌들이 다 퍼렇습니다. 양옆 산 준급(峻急)한 것이 그 중간 바닥개울과 어떠한 관계 있을 배 아니었마는 산을 보고 물을 볼 때 준급한 산세(山勢) 쏴하는 개울소리를 한층 더 돕는 것 같습니다.

길이 촌(村) 새로 들매 물으니 상주(尙州) 땅이라 합니다. 초집웅 솔울하고 도랑가 사리 앞에 검둥개 「밍밍」 짖는 것이 의연히 □□□촌입니다. 여기서 얼마 가면 큰 들이 나섭니다. 벼들이 발서 검어 바닥은 보이지 아니하고 이 배미에서 저 배미로 넘어드는 물소리만이 여기저기서 콸콸거릴 뿐입니다. 이 「들」을 건너가면 길이 산골로 듭니다. 들어갈수록 나무 숲이 우거져 햇볕이 사이지 아니하고 올라가다가 나려서기도 하되 나려서는 것도 실상은 올라가는 길입니다.

아찔아찔한 벼렁(崖)이 가끔 발 아래로 지나가것만 원체 숲속인지라 자 아래가 어띠한지 잘 보이지 아니합니다. 한 돌뿌리를 드디고 오르면 또 오를 돌뿌리가 내밀고 한 구비 가쁜 곳을 지나면 더 강팔한 굽이가 나옵니다. 이렇게 올라가기를 약 세 시간이나 하였는데 앞만 본 까닭에 얼마나 올라온지를 스사로 알지 못하였다가 「재」마루를 얼마 아니 남겨놓고서 너럭바위에 앉어 올라온 데를 굽어보니 웬만한 산은 다 땅에 깔리고 벌어 선 봉 너머로 피어오르는 구름이 아득한 저 아래입니다. 「재」마루는 펀펀한 빈 밭 같은데 「익새」풀 우로 오고가는 바람이 서로 얼려 「우수수」합니다. 이 「재」를 「북가추리」라고 부르는데 속리산 비로봉(俗離山毘盧峯)과 연한 정간(正幹)입니다.

第九信[편집]

이쪽저쪽 벌려 있는 집채가 이상히도 나즉하야 보이는데 판한 넓은 뜰에 햇볕이 쨍쨍히 들었고 귀귀이 달린 「풍경」이 반공에서 「뎅겅」거리는데 드높은 다섯 층 목조탑이 전산(全山)을 지키는 것 같으니 이것이 법주사(法住寺) 들어갈 제 첫 번 뜨이던 광경입니다. 주지 석상상인(住持石霜上人)이 우리 일행을 맞으며 순창(淳昌) 손님 한 분이 어제 와서 기다리고 있다 합니다. 이는 물을 것 없이 송계 노병권 군(松溪盧秉權君)입니다. 얼마 전 약속이 없었던 것은 아니로되 산중에서 만나보니 의외 같기도 하고 피차 명산(彼此名山)으로 기회(期會)함이 조남명(曺南溟), 성동주(成東州)의 해인사(海印寺) 모임과 방사(髣似)하야 오늘날 일 같지 아니합니다.

지금부터 열아홉해 전 생정선인(生庭先人)이 족형 학산옹 동반(族兄學山翁同伴)으로 법주사를 지나신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방이 아버지 숙소이던고 석교(石橋) 어느 군데 마당 어떤 쪽이 아버지 지나시던 곳인고 심사 자연히 감창합니다. 한참 쉬어 가지고 민세(民世) 송계(松溪) 윤군(尹君)은 다 수정봉(水晶峯) 구경을 가고 석전사(石顚師)도 어데로 나가 오래 오지 아니하고 나 혼자 객실에 앉어나느니 옛 생각이었습니다. 빈뜰에 자최 소리 하나 아니 나고 바람없이 제절로 울리는 풍경 시름없이 뎅겅입니다.

수정봉은 절 서록(西麓)에 있는 암봉(岩峯)이 □□절 전경을 굽어보게 된 곳입니다. 아까 갔던 세 분이 나려와 참 좋더라고 칭찬하야 마지 아니하는데 좋을 것도 사실이려니와 내가 같이 가지 아니한 까닭으로 나 들으라고 좀더 하는 것도 같습니다. 저녁 때 석전사까지 다섯 사람이 같이 나서서 개울 건너 동명찬(東溟撰) 낭선군서(朗善君書)의 사적비(事蹟碑)를 보고 들어오다가 제명(題名) 많은 바위 앞으로 지날 때 부우 홍분원 선생(父友洪汶園先生)의 제명이 반가웠습니다. 객실은 정쇄(精灑)하고 물것도 그리 없는데 나 혼자 둥굿거리느라고 이윽도록 자지 못하였습니다.

第十信[편집]

십칠일은 「중사자(中獅子)」에서 잤습니다. 중사자는 바위 이름이니 바위로 인하야 암자까지 이렇게 부르는 것이오 속리산에 사자처럼 된 바위가 셋인데 하나는 산 우에 있고 하나는 낮은 데 있고 이 바위는 금산중복(金山中腹)이라 하야 중이라는 것입니다. 이날 산행은 어제에 비하야 여간 다르지 아니합니다. 일기 은청상반(隱晴相反)인지라 걸어도 더웁지 아니하고 석경(石徑)이 여러 번 곡절하되 험하지는 아니하며 수림 우거진 속이언마는 헤치고 나갈 지경은 아닙니다.

순로(順路)로 「복천(福泉)」이라는 암자를 지나게 되는데 복천 뒤 샘물이 이 산중제일이라 사자 바위로 중사자암이 되듯 이 샘물 때문에 복천이라 하는 것입니다. 고적(古蹟)으로는 세조 임어(世祖臨御)하시던 곳이라 문앞 축대의 돌 다듬은 모양이 예사롭지 아니할 뿐더러 반이나 무너진 뒷담이 궁장(宮牆) 같이 정려하니 이 모다 그때 유물이라 합니다. 문학(文學)으로 김수온(金守溫), 신숙주(申叔舟) 무공(武功)으로 귀성군준(龜城君浚) 유명한 홍윤성(洪允成)이까지 다 호가(扈駕)하야 왔었고 내전(內殿)이 오시고 귀빈(貴嬪), 공주 모다 배종(陪從)하야 왔었으니 한참 들석하였을 것입니다. 이 사적(事蹟)이 수애집(垂厓集)에 자서히 있는데 법임사(法任寺)에 있던 남순기(南巡記)는 찾어도 없다 합니다.

세조께서 수양대군 적부터 수애(垂厓)로 인하야 수암도인 신미(秀巖道人信眉)와 심계(深契)함이 있었던지라 세종 만년(世宗晩年) 궁중에 불당을 지으신 것이 한편으로 광평(廣平)의 조서(早逝)함을 애통하시는 나머지에 자연 인간의 무상함을 생각하시게 됨이나 한편으로는 수양(首陽)과 안평(安平) 두 대군으로조차 불리(佛理)를 들으신지라 드디어 분수(焚修)함에 뜻을 두심이니 이로써 보면 세조의 석교숭신(釋敎崇信)하심을 정난 이후(靖難以後) 일이라 함이 실로 구구(區區)한 추단(推斷)입니다.

더욱이 신미(信眉)는 내전(內典)에만 홍통(弘通)한 사람이 아니라 훈민정음 반포된 뒤 가장 정음학(正音學)에 대한 깊은 조예를 가졌나니 「간경도감(刊經都監)」[2]이 실로 이를 중심(中心)하고 한 것이라 세조의 총우(寵遇)를 받음이 까닭 없음이 아닌데 신미 일즉이 속리(俗離)에 있었든지라 이로 인하야 어련(御輦)이 이 산중에까지 드시게 된 것입니다.

第十一信[편집]

수림 속으로 가는 것이야 산행하는데 흔히 있는 일이지요마는 법림사(法林寺)에서 복천까지 가는 길 같이 좋으리까. 들어갈수록 수림이 더욱이 깊어 상하사방이 모다 초록 속이오 초록 속으로 가는 사람까지 의모(衣帽)가 다 초록입니다. 길의 굴곡이 심한지라 수석일대(水石一帶) 혹은 좌로 혹은 우로 자조 바꾸이는데 돌이 히지는 못하나 막 쌓이고 어즈럽게 흩어져 굽이굽이 쏟쳐 나리는 물이 이른바 백도천기(百道千岐)입니다. 물소리는 사나운데 수림에 가리어 보이지 아니하는 쪽도 있고 가다가 물바닥이 저윽이 패인 데 있어 나려오는 물이 잔잔하게 고였다가 흘러갑니다.

물이 나려오다가 고이면 돌들도 조곰씩 물러나서 그 어름이 얼마쯤 훤한데 바위옷 누른 빛이 일종의 싱싱한 기운을 돕고 돌새에 나서 헌츨하게 자란 나무들이 울 같이 둘렀으되 긴 가지가 우으로 벋어 수면을 건너간 것도 있고 드리운 가지가 물에 닿을 듯이 나려왔다가 끝으로 잠간 들려 되오르랴는 것도 있습니다. 물 우에 고운 결은 언제나 어른거리고 나뭇가지는 언제나 근덩입니다. 그리다가 햇볕이 반짝 나면 금(金)으로도 쇄금(碎金)이오 이 잎새들이 가만히 있는 잎새들이 아니라 쇄금으로도 뿌리[灑]고 날리[飛]는 금설(金屑)입니다.

그저 갈 뿐이지 갈 곳은 보이지 아니합니다. 복천이 여기서 얼마나 남았는지 더 들어갈수록 수림과 수석의 서로 은영(隱映)하는 광경이 일상(一狀)이 아님은 무론이어니와 수림만으로도 형용할 수 없는 것이 많습니다. 이상할사 여기 수림은 보이면서도 성긴 맛이 있는데 잎새들을 보면 어떠한 나뭇잎이던지 아래로 처졌거나 우로 향했거나 말렸거나 겹쳤거나 한 것이 없이 따로따로 떨어져 붙은 잎새가 풀기 있게 판판히 펴진 채로 반짝반짝 들리었기 때문에 보여도 성긴 것 같습니다. 이렇게 써놓아 보았으나 암만하여도 거기서 보던 그것이 나타나지 아니합니다.

第十二信[편집]

복천암(福泉菴)을 떠나 중사자로 가는 데는 길이 아니라 그대로 풀숲이오 풀숲이 아니면 곧 「똘」바닥이오 이렇게 얼마를 가다가 산허리를 돌아 다시 팔구곡(八九曲) 실 같은 길을 돌아 나려가니 이를 「보현재」라 하고 이를 지나 또 적은 물을 건너 바위뿌리를 돌아가면 암자집웅이 보입니다. 중사자는 속리산 중복(俗離山中腹)이니만치 산중 제일구(山中第一區)라 이르는 곳인데 암자 앞 좌우 산록이 옷깃 같이 나즉하게 여민 그 너머로 벌어 선 산봉이 겹이오 또 겹이라 이렇게 하야 먼산까지 접하였습니다.

앞 산록의 여며진 형세를 따라 좀 가차운 산봉은 보이는 넓이가 좁고 그 너머로 좀 넓게 또 그 너머로는 더 넓게 차차 내다 보이는 것이 넓은데 먼 산일말(山一抹)은 앞산 여민 새로 넘어오는 것이 아니오 훨씬 솟아오른 까닭에 반공을 가로건너 가장 넓게 둘렸습니다. 가까운 산봉은 대개 청주(淸州), 문의(文義), 회덕(懷德), 진잠(鎭岑) 등지 산들이오 먼산은 계룡산 연봉(雞龍山連峯)이라 합니다. 뒤로는 엄벽(嚴壁)과 임애가 대약상반(大約相半)인데 바위는 층으로 쌓여 산봉이 되고 숲은 어찌 성한지 산형이 보이지 아니합니다.

민세, 송계와 윤군은 문장대(文壯臺)로 가고 나와 석전은 법당 마루에 누워 전경을 바라보니 내 몸도 운표(雲表)에 있는 것 같습니다. 세 분이 다 건각(健脚)인 줄은 아나 문장대는 험절(險絶)한 곳이라 혹 실수나 아니하였나 하야 마음이 놓이지 아니하더니 귀 익은 뎅걸뎅걸 하는 소리가 발서 숲 새로 새어 나옵니다. 중사자란 고암(孤菴)이라 우리 일행을 지공(支供)하지 못할 줄로 알아 양식을 지어 가지고 오랴고까지 하였는데 암주 필경상인(菴主畢竟上人)이 어찌나 관대(欵待)하는지 석찬의 풍결(豊潔)함이 처음 생각하던 것과 딴판입니다.

석후 천기(夕後天氣) 아조 맑아져 눈섭달이 암□ 우에 뜬 것을 보고 뜰에 나려와 거닐다가 베적삼이 하도 쓸쓸하야 방으로 들어오니 따뜻한 장판바닥이 저윽이 좋습니다.

第十三信[편집]

「잠 깨어 낙수 듣는 소리를 듣고 나서 보니 비 시작한 지가 오래다. 어제 보이던 골 바깥 산들이 하나도 없는데 골 안 산등성이가 점점 덮히어 온다. 오든 것이 한동안 머무르더니 멀리 계용련봉(鷄龍連峯)이 하나둘씩 나오고 얼마 아니하야 산들이 다 드러났다. 이는 다 구름의 도섭[幻]이다. 그러나 산이 아니었더면 이렇게 나타낼 수가 있었을까. 조곰 있더니 먼산 가까운산의 골마다 구름이 나온다. 걷힐 적은 잠시러니 이번 나오는 것은 더디다. 나오는 중인지 이만 나오고 그치는 것인지 고만하고 있다. 그러더니 각각 골을 따라 가득하야 간다. 암자 앞 골 너머로 보이는 중첩(重疊)한 산색(山色)이 어제라고 모호하였던 것은 아니로되 멀면 담청으로 가까우면 심록으로 나누일 뿐이오 또 봉만(峯巒)의 높았다 낮었다 함을 보아 변용세(辨容勢)를 별(別)할 뿐이러니 골마다 구름이 나와 그골그골 가득하야진즉 앞산의 굴곡한 선이 뒷산에 혼동되어 보이지 아니하든 것이 뒷구름에 받치어 분명하고 또 이산 저산 서로 거리가 있는 것을 일말(一抹)로 보았었는데 터진 데로 구룸이 도니 연한 것 같은 산들도 다 솔기가 보인다.

이뿐 아니다. 골구룸이 천천히 퍼져 올라오며 봉만을 더듬으니 고랑진 데는 먼저 퍼져 아까까지 보이지 아니하든 울뭉줄뭉한 모양이 섬세하게 나온다. 그러더니 먼산이 또 잠기랴 하고 가까운 산들까지 다 잠기랴 한다. 인제는 뾰죽뾰죽한 산끝들만이 보인다. 구룸이 아니요 바다다. 산들이 아니오 섬이다. 가장 먼산은 가장 먼섬이오 그 너머로는 일망무제한 큰 바다인 것 같다. 비는 가루 같이 온다. 드문드문 낙수 소리는 들려도 빗발이 땅에 울리는 것은 없다. 참으로도 섭이다. 끝만 보이던 산들이 한쪽은 또 반이나 들어났다. 딴편 산들도 들어난다. 어느덧 구름은 간 곳이 없다. 분명히 없넌 것이 어데서 왔는지 구룸 한 장이 좌로부터 우로 향하는데 이 구름은 하릴없는 백사(白紗)라 산을 가리되 그대로 내다보인다. 그러나 아니 가렸을 때 보다는 달다. 어떻게 달러 백사 한 겹이라도 좀 멀리 격한 것과 좀 가깝게 격한 것이 다른지라 가까운 산으로도 분명한 것 좀 덜 분명한 것이 가린 너머로 계별(界別)됨이 있어 아니 가렸을 적 모르던 것을 이 너머로 볼 수도 있다. 아까는 산이 아니면 구름에도 섭을 다 보이지 못하리라 하였더니 이제 보니 구룸이 아니었던들 먼산 가까운산의 진형(眞形)을 또한 다 그려내지 못할 것이 아닌가 하였다. 산이 구룸의 도섭을 보일 수도 있다. 또 구름이 산의 점형(點形)을 그리기도 한다. 다만 부끄러운 바이 있다. 내 붓이 과연 저를 보일 수 있는가. 이를 그릴 수 있는가.」

이 한 편기문(篇記文)은 제목을 「중사자우중간운기(中獅子雨中看雲記)」라 하고 지은 것입니다. 편지 대신 이것을 부칩니다.

第十四信[편집]

아침이나 먹고는 그냥 나서랴 하였더니 비가 점점 소리 냅니다. 명산고사(名山古寺)에서 비 만나 묵는 것도 또한 운사(韻事)라 더운 방에 향 피워놓고 앉으니 참으로 세상 바깥 같습니다. 민세는 더 유벽(幽僻)한 곳을 찾어 암자 옆 소각(小閣) 속으로 들어가 오래 아니 오기에 나도 쫓아가 보니 이 집은 곧 원종왕비구씨원당(元宗王妃具氏願堂)이라 양전위패(兩殿位牌) 아즉껏 기신데 좌우로 파초선을 갈라 세운 것이 있고 뒤에 친 선묘어필병풍(宣廟御筆屛風)이 비록 판각본이나 신채(神彩)가 오히려 환발(煥發)합니다.

낮 지난 뒤 비가 뜸[3]하는 것을 보고 다시 복천암으로 가서 거기서 또 상환암(上歡菴)으로 가는데 바위너덜 우로 돌을 쌓아 길을 통(通)한 것이 잠간 금강산로(金剛山路)를 생각하게 됩니다. 조곰 가면 번듯한 잔디밭 우에 부도(浮圖) 둘이 있으니 사긴 글자가 완하야 잘 알 수 없는데 석상산인(石霜上人)의 말을 듣고 자서히 더듬어 보니 하나는 「학조등곡지탑(學祖燈谷之塔)」이오 하나는 「수암화상탑(秀岩和尙塔)」입니다. 지금은 그래도 잔화(殘畵)를 변별할 수 있으나 조금 더 지나가면 석각(石刻)□ 치고는 증거할 흔적이 없을 것 같습니다. 복천서 들어오는 길로 말하면 먼저 학조탑(學祖塔)을 보게 되고 이 탑을 지나서 수암탑(秀岩塔)을 보것됩니다.

국초불가(國初佛家)의 위걸(偉傑)임은 말할 것도 없고 이 둘이 다 정음학의 명석(名碩)이라 그 고심(苦心)한 자최 아직것 학자의 진벌(津筏)로 남었거니와 정음으로써 문장(文章)을 자저(自著)한 것으로 신미의 「영가집발(永嘉集跋)」과 학조(學祖)의 「오대산어첩서후(五臺山御牒書後)」 같은 것이 다 간결, 전중(典重)하야 읽으매 조선고대(朝鮮古代)의 사기(詞氣)를 접하는 듯하니 이를 생각하고 공산(空山) 속 일편석탑(一片石塔)을 돌 때 어떠한 일종의 방향(芳香)이 그윽한 속에 풍기는 것 같습니다.

바위아래로 돌고 골속으로 나려가다가 다시 석벽 뿌다구니를 사기며 올라가는데 다리를 발서 가쁘고 암자는 향방(向方)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가다가 혹 폭포도 있고 혹 바위 속으로 깊이 울리는 물소리도 들려 이런 것을 만날 때는 일절(一切)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바위 사이로 몇 구비를 올라가다가 앞이 탁 막히더니 옆에 있는 층대로 쫓아 올라서 보니 곧 상환암 앞뜰입니다. 이것만 보아도 상환(上歡)이란 얼마나 높으며 또 얼마나 유절(幽絶)한가 생각할 수 있지 아니합니까. 바위 틈에 달리어 있는 수간소암(數間小菴)을 뒤로부터 왼쪽으로 앞까지 모다 바위로 휩쌌는데 바위라도 예사바위의 유가 아니라 모다 깎어지른 기봉이오 앞뒤의 상거(相距)가 얼마 되지 아니하야 음삼한 돌기운이 곧 사람을 침습(侵襲)하니 오래 머물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절경은 절경입니다.

第十五信[편집]

비는 그친 모양이나 한눌은 그대로 흐린데 상환은 암석 속이라 더욱이 음산하므로 저물기 전 큰 절을 대이랴고 총총이 떠나 석벽(石壁) 솔기진 데로 두어 번 꺾이어 나려서니 물소리 나는 아래로 골이 어찌 깊은지 신나무 층층이 얼크러진 속이 거머득 친친하고 앞뒤로 깎어지른 듯한 바위들은 갑갑하게 둘려 쳐다보면 하눌에 닿는 것 같습니다. 여기 와서는 음산도 지나서 마치 소낙비 몰아들어 오랴는 때 같습니다.

얼마 나려가니 성기게 듣[落]는 빗방울 소리 나뭇잎새 우로 들리기 시작하자 우수수하며 빗발이 칩니다. 산돌림이면 얼마 아니하야 지나가려니 하였더니 웬걸 점점 어두워지지요. 상환암서 그냥 있었더면 음산은 하다 해도 유취로나 좋았을 것을 중로에 와 가지고 폭우를 만나면 이야말로 참고생이오 가는 길이 또 충충한 수림 속이라 다른 것은 보이지 아니하고 얽히인 가지를 헤치고야 나가게 된 데는 얼굴과 나뭇잎새가 가끔 서로 스치는 까닭에 수림조차도 실상은 잘 보인다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만해도 산행이 여러 날이라 수림 좋은 것이 눈에 익어 그렇지 먼지속 생활에 비기어 보면 이 아니 운치(韻致)로운 일이오리까. 이렇게 생각은 하여 보았으나 비는 오고 다른 보이는 것은 없고 암만해도 나선 것을 후회하지 아니할 수가 없었습다니.

그리다가 길이 개울로 들었습니다. 이 길은 어제 오던 그 길이었마는 수석으로는 어제 없든 장관입니다. 골바닥이 모두 암석이라 비 뒤 불은 물이 한편으론 차며 뛰고 또 한편으론 나리□□ 또 한편으로 급히 짓찧어 나□였다가 합하고 합했다가 갈러지는데 가다가 집웅 같이 된 큰 바위를 온통 덮어가지고 그 너머로 떨어질 때는 사산(四山)이 일시에 울립니다. 이 밑에는 넓고 긴 소(沼)요 소 아래로는 「갈맷빛」 나는 바람벽 같이 된 바위가 물께로 숙어졌는데 그 밑에는 검은 물결이 바다 같이 술렁거립니다. 나려가면서 폭포로 떨어지고 소되어 깊은 데가 한두 곳이 아닙니다. 비야 오던마던 길바닥야 돌이건 질이건 물소리에만 넋을 잃어 그대로 나려가는 동안 어느덧 젖은 옷이 마르고 큰 절 앞 마실이 바라보입니다.

第十六信[편집]

십구일 떠나랴고 보은자동차(報恩自動車)를 부르러 보냈더니 읍내 앞 내를 못 건는다 하므로 할 수 없이 하로를 묵는데 벽서(壁書)를 구하는 이도 있고 영찬(影讚)을 청하는 이도 있어 서너 시간을 필묵(筆墨)설레를 지나고 나서 동행끼리 모여 앉어 앞길을 의논하는데 석전은 「여기서 보은(報恩)으로 가 옥천역발화차(沃川驛發火車)를 타고 김천(金泉)서 나려 청엄사(靑嚴寺)를 보고 목통령(木通嶺)을 넘으면 얼마 아니 가서 해인사(海印寺)니 해인서 일순(一旬)쯤 묵고 거창(居昌)으로 안의(安義)로 함양(咸陽)으로 벽소령(碧宵嶺)을 넘어 쌍계(雙溪)를 들러 불일폭포(佛一瀑布)로 칠불암(七佛庵)으로 이리하야 호남(湖南)으로 빠지자」 하고 나는 「그럴 것 없이 옥천(沃川)서 곧 대구(大邱)로 가서 자동차로 해인을 들어가자」 하였습니다.

목통령이란 높고 험한 큰 재요 동행중 가장 험한 데를 못 가는 사람은 내니 나는 물론 이 재를 재미없게 알 것인데 그저께 복천암주(福泉庵主)하고 이야기하다가 목통령 말이 나니까 암주의 말이 「목통령 말도 마시오. 원래 「불통(不通)」이라 하드랍니다. 「불(不)」자 나려근획(畵)이 우로 올라가 「목통(木通)」이 된 것이라 하지요」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은지라 더구나 싫었던 것입니다.

석전은 내 속을 잘 아는지라 짐즛 더 가자 하고 민세는 산행하기를 원체 좋아하고 내가 못 간다면 더 「신」이 나므로 「한번 넘어보자」고 나를 권하고 윤 군은 비슷 민세 편이나 바로 말은 아니하고 송계는 내 편을 들어 마즈막으로는 대구행을 작정하였습니다.

자고 나니 비는 또 오고 오는 모양이 개일 것 같지도 아니하므로 노배기 할 셈 잡고 나섰습니다. 법주(法住)서 보은이 삼십 리라는데 육십 리나 되는 것 같았습니다. 「말티」 너머 길갓집에서 비가 이렇게 오니 좀 들어앉으라 하기에 못 이기는 체하고 들어가니 노주인이 호인(好人)이오 마슬 온 이들이 다 정숙스러운 분들이라 우리 짐꾼이 법주사 사람인 것을 알고 회편(回便)에 보내라고 어떤 이는 우산을 벌리고 어떤 이는 잠 덮으라고 도□□까지 빌려주었습니다. 보은읍(報恩邑)을 들어가니 비는 나리 퍼붓는데 「자동차부(自動車部)」에 가서 옥천행을 물으니 못 통한다 하고 청산(靑山)은 통하나 이렇게 몇 시간만 지나면 거기도 막힌다 합니다. 이왕 옥천으로 못 갈 바에는 청산은 내 큰집이니 그리 가 묵는 것이 옳다 하야 청산행차를 삯으로 얻으랴고 물어 보니 칠원 오십전을 달라 하기에 우선 요기부터 하랴고 주막에 가 밥을 시키고 사람을 보내어 자동차를 불러오라 하였더니 더 올라 팔 원을 내라한다 하므로 송계와 같이 쫓아가 보니 「대절임금표」에 청산까지 칠 원 오십 전이라고 분명히 씨었는데 이 표가 오서(誤書)라고 더 내라 합니다. 결국 더 주지는 아니하였으나 우산 빌리던 촌(村) 인심이 거듭 생각히었습니다.

第十七信[편집]

청산서도 물에 막혀 이틀을 묵고 비를 맞으며 영동(永同)으로 나가는데 「솔티」 앞물이 한참 벌창하야 업히어 건느기가 저윽이 위험하였습니다. 영동 주막에서 한결같이 퍼붓는 빗소리를 들으며 밤을 지새고 새벽에 「정거장」으로 가 보니 주서(朱書)로 표시한 철도불통광고(鐵道不通廣告)가 여기저기 붙고 철도로 온 신문 뭉치를 푸는데 삼남수해(三南水害) 기별이 거의 전면(全面)이라 마음에 송구(悚懼)하나 나선 길이니 대구까지 나가 보자 하였습니다. 완행(緩行)이라 연도(沿道)를 자서히 보며 가다가 금호강(琴湖江) 근처에 이르니 어데가 강인지 어데가 들인지 펀하니 탁류(濁流)로 채어가다가 원두막집웅이 설멍하게 드러난 데도 있고 축동 같은 나무숲이 상반만 보이기도 합니다.

해인 가는 자동차가 못 통할 것은 발서 짐작하였지요마는 대구역에서 짐짓 다시 물어보니 앞강을 건늘 수 없다 합니다. 앞강이 다른 강이 아니오 차 속에서 바라보던 그 탁류의 일대(一帶)인 줄 생각하니 간다 해도 나설 마음이 없습니다. 우리야 한행(閑行)이니 묵은들 어떠며 못 간댔자 별랑패 되오리까마는 원두막이 저렇게 되었을 적에야 밭과 논이 어찌되었으며 축동숲이 저같이 잠기었을 적에야 인가는 어찌되었을까 생각하야 보니 차마 못 볼 참상이 눈앞에 선하게 보입니다. 여관에서 하로를 지나니 비는 더 퍼붓고 종일 두고 들리는 소문은 소문마다 끔찍합니다. 인제는 해인행을 단념하고 호남방면으로나 갈까 하여도 논산가수원간(論山佳水院間)이 끊쳤고 삼랑진(三浪津)이 방장 수국(水國)이오 진주로나 갈까 하여도 마산을 갈 길이 없고 심지어 심천선로파괴(深川線路破壞)로 인하야 서울길까지 막혔습니다. 쓸데없는 사려는 끝없이 일어나는데 밤은 들고 빗소리는 철철 그치지 아니하고.

여관주인이 우리를 글하는 축으로 알았던지 파적(破寂) 삼아 보라고 시축(詩軸) 두어 뭉치를 내어놓는데 먼저 뜨이는 것이 고 이관재(故李貫齋)의 필적입니다. 내 이년 전 대구 와서 이 여관에서 잤는데 지금 우리 묵는 데가 그때 관재 있던 방이라 내 방에서 들으니 그 방에서 시 읊는 소리가 나고 연하야 관재의 시담하는 것이 들리므로 좀 가 보랴 하였으나 모인 이들을 몰라 고만두었더니 오늘 와서 이 시축을 고인의 유적(遺跡)으로 볼 줄 뜻하였으리까. 관재와 나와는 세호(世好)요 또 척연(戚緣)도 있건마는 과종(過從)은 잦지 아니하더니 작년 금강산 갔다가 오는 길에 관재를 석왕사(釋王寺)에서 만나니 병중이로되 유달리 간곡하게 하며 「내 명자(名字)가 자네 문집에 없으면 한이니 무슨 글로던지 한 편만 지어주게」 하기에 「병만 나으시우 내 글야 어려요것 있소」 하고도 마음에 감한(感恨)하더니 이내 문자 한 편을 그 생전에 보내지 못하고 피차 유명이 갈린지라 고인유적을 보매 더욱이 느꺼웠습니다.

第十八信[편집]

입오일(卄五日) 아츰에야 간신히 대전으로 떠났습니다. 연도소견(沿道所見)이야 말하야 무엇하오리까. 대전 오니 호남선이 마침 통하므로 「내장(內藏)」이나 가 있어 보랴고 정읍표(井邑票)를 사 가지고 「차」를 바꾸어 탔는데 이 길에는 논산(論山)이 역로(歷路)라 윤 군 말이 자기 집이 역에서 십 리니 잠간 들어가자 하므로 석전 민세 송계 다 그리하기로 하야 논산서 나려 먼저 관촉사(灌燭寺)를 보고 오강리(五岡里) 윤 군 집으로 가서 하로밤을 잤는데 윤 군은 노독이 나서 동행을 고만두기로 하고 사인(四人)이 역으로 나왔으나 사인중 송계 또한 순창으로 직행(直行)할 사람이나 내장 들어갈 동행은 겨우 삼인(三人)이 남게 되었습니다.

정읍(井邑) 오니 옛 생각나는 것도 있고 또 새 자랑거리도 있습니다. 십사년 전 홍벽초(洪碧初)와 같이 대둔산(大屯山)에서 일삭(一朔)이나 묵다가 내장으로 가는 길에 정읍서 하로를 자는데 늦도록 무슨 이야기가 그리 많았던지 오늘날 교원(敎員), 소설가(小說家) 다 예기(預期)하던 바이 아니니 여기서 나는 옛 생각은 이것이오 송계의 소개로 정읍 주막에서 황욱 씨(黃旭氏)를 만났는데 이는 곧 이재 황윤석 선생 종손(黃胤錫先生宗孫)의 계씨(季氏)입니다. 내 이재(履齋)를 경모(敬慕)함이 오래라 이번에도 근촌(芹村)과 약속하고 고창(高敞)서 모여 가지고 이재고택(履齋古宅)을 같이 찾자 하였었는데 뜻밖으로 여기서 그 초손(肖孫)을 만난 것도 반가우려니와 또 황욱 씨의 말을 들으니 형제분 사이에 오래 전부터 이재전서(履齋全書) 출판할 계획이 있었는데 어떻게 하던지 근속(近速)히 해 보겠다 하기에 천학(淺學)이나마 편차(編次)와 교감(校勘)을 자임하겠다 하였습니다. 새 자랑으로는 이것을 특필하고자 합니다.

그 이튼날 내장사 동구 채 못 미쳐 나, 석전, 민세는 자동차에서 내리고 송계는 며칠 뒤 구암사(龜菴寺)에서 만나기로 하고 그대로 순창으로 갔습니다. 송계 탄 차가 수백척 절벽으로 돌아 넘어가는 것을 개울가에서 바라보다가 산뿌리에 가리어 보이지 아니하므로 저 모통이를 지나면 보이려니 하고 서 있더니 한참만에야 가므스름한 것이 가마득하게 나옵니다. 이만하면 이 「재」가 얼마나 험준한지 알 것입니다. 내장은 학오선사(鶴嗚禪師) 이후로 일신하게 되었다는데 전에 묵던 「벽련암(碧蓮菴)」 채는 간 곳이 없고 다만 처음 들어와 수일 자던 뒷방만이 옛 모양이오 전에 없던 훤츨한 선방(禪房) 한 채가 있어 성염(盛炎)이라도 더위를 모르게 되었습니다.

第十九信[편집]

장성 백양산(長城白羊山) 순창 영구산(淳昌靈龜山) 정읍 내장산(井邑內藏山)이 비록 세 고을에 나누어 있으나 실상은 일지(一枝)의 삼타(三朶)라 내장서 백양으로 넘어갈 수도 있고 영구서 「재」 하나를 넘으면 곧 내장입니다. 내장은 단풍으로 이름이 나서 호남금강(湖南金剛)이라고까지 일컬으나 단풍 뿐이 아니라 봉만이 대개 엄석(嚴石)으로 되어 금강산과 방사한데 수림이 어찌 무성한지 뾰죽한 것도 많이는 둥그스룸하게 보이는 까닭에 제 「생김」이 다 나타나지 아니하고 단풍으로만 금강의 동배(同輩) 노릇을 하게 되니 다시 생각하여 보면 일홈나는 그것이 곧 제 진수(眞髓)를 가리는 장애라 인사(人事)론들 이러한 일이 어찌 적다 하리까.

내장사 뒷봉을 「쓰레」봉이라고 하는데 다른 까닭이 아니오 엄봉일대(嚴峯一帶)의 삐죽삐죽 솟은 것이 「쓰레」이[齒] 같이 되었으므로 생긴 대로 이름을 지은 것이나 그럴듯은 하되 대인[比擬] 것이 너무나 둔졸(鈍拙)하니 아쉬운 대로 말하여 보면 삐죽삐죽하되 가지런치는 아니하다고 할까 연했다 벌었다 하였으되 이 또한 일상(一狀)이 아니라고 할까 나 역시 형용할 수 있다고 자기(自期)하기는 어렵습니다. 정읍역에서 내장으로 향할 때 참치(參差)한 고봉이 운제(雲際)에 건너 질린 것을 보았더니 들어와 보니 그 고봉이 곧 쓰레봉의 일대인데 밖으로 보이게는 열푸른 고첨(高尖)의 참치함 뿐이러니 안으로는 엄봉이 모두 「짙은유록」빛이오 마침 비 개인 끝이라 아청(鴉靑) 같이 푸른 청공을 봉 너머로 보니 봉세(峯勢) 한층 더 돋보일 뿐 아니라 벌어진 틈이[4] 청공에 받히어 어떤 데는 칼 빼어 꽂은 모양도 같고 어떤 데는 박쥐 날개 처져 나린 모양도 같아 또한 기관이오 또 바위들이 솔이 나서 성하지는 못하나 다 오래 묵은 것이라 가지는 성기고 잎새는 다박다박 엉기어 가지고 혹 등성이로 늘어서기도 하고 혹 벌어진 데를 약간 가리기도 하고 혹 드문드문 벽면에 거꾸로 달리기도 하야 수놓았다 하자니 속되고 그림 같다 하자니 형용이 몽키지 아니합니다.

대개 내장산에 엄봉이 많으나 이만큼 수림 우로 드러난 것이 없고 드러나되 또 이같이 기묘한지라 이 봉일대(峯一帶) 만으로는 금강중(金剛中)에도 가장 절기한 칠보대(七寶臺)에 비겨 거의 백중(佰仲)이니 금산(金山)의 진수가 아모리 가리었다 하드라도 이 봉이 드러난 바에는 단풍만 가지고 내장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第二十信[편집]

쓰레봉 바로 밑은 잡본(雜本)으로 둘렀고 그 밑은 죽림으로 둘러 잡목의 심청(深靑)과 죽림의 천록(淺綠)이 완연(宛然)히 두 층이오 또 그 밑은 곧 절이라 선방에서 나려다보면 뜰 앞에 그뜩 모인 것이 모두 산인데 이쪽으로 둘리되 두툼하고 저쪽으로 쌌으되 곰살가워 봉이면 다 둥그재오 언덕이면 다 뻔디기[경사 심하지 아니한 산록]오 높아도 으슥하며 떨어져도 한 날 같으니 이는 다 수림[5]으로는 풍(楓), 송(松)이 많고 그 외에는 떡갈나무, 부엉가랑나무, 참나무, 쏙소리, 밤, 나도밤, 쇳다람 각색 나무들이 보이다 못하야 서로 엉기었는데 송림 모여선 곳에 웃가지 더덕인 잎새 함치르르[6]하게 서로서로 연(連)한 것은 마치 잘 다뤄 논 「잘[水獺皮]」 같고 어떤 때 산복으로 골새가 불며 잡목 잎새 떨기떨기 뒤집히면 심청이던 수림에 수없는 대백타(大白朶)가 일어나 솟노은[7] 「대접문(紋)」 같습니다.

그러니 내장은 고산(高山)이라기보담도 심산(深山)이오 심산이라기보담도 심림(深林)이라 별별 새소리 갖가지로 들리는데 선방이 또 한 고요한지라 낮이[8] 앉었으면 자규, 꾸꾹새, 가마귀, 가치까지 서로 선후 소수(先後疎數)의 율도(律度)를 약속한 듯이 음악 같이 어울리고 말배아미 길게 빼는 청과 매아미 연거퍼 내는 목이 「새」소리에 혼동할 것도 아니로되 거기 들매 곧 한마당 풍류라 소리로는 딴소리면서도 저 소리와 곁들이었기 때문에 더 맑게 들리고 이 소리가 먼저 났었기 때문에 딸려 애연하여지는 것을 보면 이렇듯이 얼리는 소리는 따로 떨어진 그 소리와 일례(一例) 아님을 알 것입니다. 그중에도 매아미 소리는 얼마 동안 「매얌」「매얌」 연거퍼만 하다가 끄칠 때는 「매」 하고 다무는 소리를 길게 늘이어 조자(調子)가 잠간 변하니 편락종구(編樂終句)를 「이화(李花), 도화(桃花), 삼색도(三色桃)」라 하야 단화(單花)로 열비(列比)하던 것을 바꾸고 춘향전 기생점고(妓生點考) 마디의 머시 머시 머시를 연호하야 긴 사설로 각각 부르던 것을 대신하는 것과 실상 한가지 법칙(法則)이라 자연임일새 이를 법칙이라 하는구나 이렇게 생각하여 보니 무엇을 깨달은 것 같기도 합니다. 「매아미」야 심림 아닌들 없느냐고 반박할 수도 있습니다마는 심산, 심림이니만큼 전일에 심상하게 듣던 소리를 자세자세하게 들으매 이렇게까지 생각하게 된 것이니 알고 보면 이것도 심림에 대한 모사(模寫)입니다.

第二十一信[편집]

이십칠일부터 삼십일일까지 닷새를 내장서 묵었는데 이동안에도 소낙비는 거의 아니 온 날이 없고 이십구일 아츰에는 소낙이로도 대우(大雨)요 뢰성 번개 오전(午前)은 무시무시하더니 늦은 뒤는 번쩍 들어 저녁 일기 맑으니 오늘이 음력으로 십팔일 채 이슥하기 전에 달이 오르려니 어두운 뒤로 별빛이 있어 그리 캄캄하지 아니하였었는데 얼마 지나 동쪽이 훤하랴 하니 온 산이 문득 거머득하야지며 앞산날 높낮은 등성이가 그림자 지듯이 두레만 구불구불할 뿐 차차 훤한 것이 더함을 따라서 거머득한 것 또한 더하야지니 이제는 온 산이 칠흑이오 칠흑으로도 쌓이고 쌓인 칠흑이러니 높은 봉 두어 군데 히끗히끗하야지자 서쪽 높은 봉에는 벌서 달빛이 바의[□]입니다.

동쪽은 의연히 캄캄하더니 봉머리로 달바쿼가 봉굿하게 솟아나오매 안개 같은 은광(銀光)이 수림새로 풍기는데 어떤 봉은 달빛을 받고 어떤 봉은 못 받어서 거믓□□어루러기가 지더니 옴굿하던 달이 반 넘어 오르니 서쪽 봉 바의는 빛이 점점 더 퍼져 나려오다가 별안간 서쪽 빛이 동봉 밑까지 막 건너가는데 어루러기 지던 모든 것이 일시에 부산하게 걷히기에 동쪽을 보니 달이 벌서 공제(空際)에 솟았습니다. 허 중사자(中獅子) 첨단(簷端)에 눈섭같이 곱던 것이 장마 속에 남모르게 둥그러 가지고 이제야 나타나니 둘레 이미 이즈러졌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보니 우리의 산행도 어느덧 이순(二旬)이 거의입니다.

그러나 동봉 반허리는 아즉것 어둡습니다. 어두워도 칠흑은 아니오 서봉에 달빛이 나려오든 것처럼 여기는 달빛이 올라갑니다. 얼마 지나더니 구름보다는 가볍고 남기(嵐氣)보다는 짙은 일종의 연광(煙光)이 동서로 건너질러 오랫동안 헤지지 아니하는 것은 무엇인지 달이 중천에 올라 상하가 모다 달빛인데 달은 높고 밤은 괴괴한지라 전에 없이 전산(全山)이 나즉하야 보이고 구름덩이는 무엇에 놀랜 것 같이 급히 몰려 서쪽으로 닫는데 바람은 맑고 밤기운은 서늘한지라 벽유리(碧琉璃) 같은 공중에 티 하나가 보이지 아니합니다. 자고 나다 잠든 뒤는 또 어떠하얐는지 새며 보지 못한 것이 서운합니다.

정정

제십구신 제사단 제일행의 「틈이」는 「틈틈이」

제이십신 제일단 십이행하의 「에 싸인 까닭입니다. 수림」이 낙(落)

제삼단 제오행 「낮이」는 「낮에」의 오(誤)

第二十二信[편집]

구암사가 얼마나 높은 곳인가 하면 정읍역에서 보면 내장이 까맣고 내장서 보면 순창 넘어가는 재가 또 까만데 이 잿마루가 순창쪽으로는 거의 평지와 비등하니 순창은 실로 산꼭대기 「고을」이어늘 구암은 순창서도 또 까맣습니다. 어느 때 사람인지도 모르고 「중」인지 「처사」인지까지도 자서치 아니한 「한곡도인(寒谷道人)」이라는 이가 여기다가 초암(草菴)을 만들어 가지고 있었다든데 그 뒤에 또 어느 때 일인지 기와로 「이」기는 하였으나 오즉지 아니한 소암(小菴)이라 이 절을 다시 이룩하야 선당과 강실(講室)이 구비하게 되기는 백파(白坡)부터라 합니다.

백파는 헌철(憲哲) 양조간(兩朝間) 경교대사(經敎大師)로 역중(域中)에 유수(有數)하던 명승이니 김추사(金秋史) 제주 있을 때 피차 서신이 빈번함을 따라 계호(契好)가 자못 깊더니 추사가 서울로 돌아갈 제 미리 백파에게 기별하고 정읍노차(井邑路次)에서 잠간만 서로 만나자 하야 백파가 날짜를 대여 갔더니 마침 추사의 행정(行程)이 하로를 드티게 된지라 백파가 그 문인(門人)더러 말하되 「내가 오기는 하얐다마는 묵고 기다리기까지는 못하겠다.」 하고 그냥 가버렸다는 것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항고(亢高)하던 것을 알 수 있지 아니합니까.

그 뒤 설두(雪竇)로 설유(雪乳)로 석전까지 상하 백여년을 두고 법석(法席)이 니어 나려온지라 사방학인(四方學人)이 경교(經敎)를 배오랴면 구암(龜巖)으로써 의귀(依歸)를 삼었었으니 구암을 가르쳐 조선근세 교종(敎宗)의 본가라 하야도 과언이 아닙니다. 순창이 고려 때는 순화현(淳化縣)인데 충숙왕 초원(忠肅王初元)에 국통(國統)[僧爵] 정오「(丁午)」의 본향이라 하야 군(郡)으로 올리었나니 정오라는 이가 어떠한 명승인지는 아즉 검색하야 보지 못하얐으나 순화일현(淳化一縣)이 그로 인하야 영화로웠던 것은 우선 분명한 일이니 백파로 인하야 구암이 우뜩하야진 것이 이와 비슷하기도 하나 하나는 국가의 예우오 하나는 총림(叢林)의 귀향(歸向)이라 예우는 혹 세위(勢位)로 가차(假借)됨도 있을 수 있으나 귀향은 실지(實地) 없이 얻을 배 아니니 백파의 구암과 정오의 순화가 다 같이 「지이인중(地以人重)」이로되 구암의 법석(法席)이 오히려 더함이 있다 할 것입니다. 백파영정(白坡影幀) 걸은 별당이 있는데 현판을 「변연재(變然齋)」[9]라고 하였습니다. 「애연(僾然)」이란 눈에 「선」하다는 말입니다. 석전으로서 백파에 대하야 언제나 잊[忘]지 못할 것도 상정(常情)이려니와 율안(律眼)으로 퇴풍(頹風)을 보매 「애연」한 이 고사(故師) 뿐일 것도 또한 느껍게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第二十三信[편집]

산행한지 수순(數旬)에 절 잠이 반이 넘으니 맑고 그윽한 맛을 그동안 보기도 많이 보았으나 백양산 청류암(白羊山淸流菴)에서 지난 하로밤이란 참으로 맑고 그윽함의 고작[極]이라 하겠습니다. 구암사[10]에서 사흘이나 묵었기 때문에 명일 팔월사일은 진작부터 백양으로 넘어가랴 한 것인데 삼일 오전에 송계가 와서 이왕이니 오늘 청류암 가사 하야 오후 삼시경에 떠나서 뒷산을 넘는데 길은 없고 그대로 덤불 속이라 가다가 가시 있는 가지를 만나면 위절이오 쐐기 붙은 잎새를 헤치고 나가는 것은 더 귀찮은 일이오 앞사람의 밀어 논 긴 넌출이 뒷사람의 면상으로 무망중에 달겨들 때는 누구나 다 「이것보라」고. 이렇게 산마루를 넘어 가지고 인제는 좀 나을까 하였더니 갈수록 우거진 덤불 속입니다. 운문암(雲門菴)을 지나서는 청류암이 그리 멀지 아니하다 하는데 산골로 나려가기만 하기를 또 얼마를 하더니 숯 굽던 가마를 두엇을 지나서야 비로소 절집웅이 나려다 보입니다.

암주 금해상인(錦海上人)은 나와 구면이라 관음전(觀音殿)이라는 별원(別院)으로 일행을 인도하는데 사간(四間) 너비에 좌우는 퇴까지 아울러 분합을 내고 가운데 두 간통은 분합이 들어가고 퇴가 반 간씩 나와 궁중제도와 근사하며 오랜 집이로되 갓 지은 것 같이 정밀하야 틈 하나 번 데가 업고 단청이 아담하야 예사 솜씨 같지가 아니합니다. 조곰 있더니 열쇠 가진 사미(沙彌)가 와서 앞 분합을 여는데 들어설 때 향내가 휙 끼치는 것이 벌서 이경(異境)에 들어온 것 같고 그리자 어두워지며 멀고 가까운 물소리가 어둘수록 점점 커지어 밤든 뒤에는 마치 비바람 몰아들어오는 것 같은데 비로도 그리 급하지는 아니한 비오 바람으로도 폭풍은 아니라 「우수수」 「우」 몰아들어오기는 하되 또한 고은 맛이 있어서 어느 편으로는 은근하기도 하고 어느 편으론 구슬푼 것도 같습니다. 이 소리가 좋아서 앞 퇴마루에 나가 이윽도록 누웠더니 밤기운이 어찌 쓸쓸한지 방으로 되들어와서 앞뒷문을 다 닫고 앉으니 관음상 앞에 등불은 으스름하고 들리는 것이라고는 물소리 밖에 없습니다. 몸은 곤하나 잠은 오지 아니하고 잠이 온대도 차마 잘 수는 없습니다. 하 맑고 하 그윽하니까 「여기가 어데인고」 「내가 어데 와서 있노」 스스로 의심스러웠습니다.

第二十四信[편집]

사일은 청류암서 떠나서 봉황대(鳳凰臺)라는 층암(層巖)을 거쳐 백양사(白羊寺) 점심 대접을 총총히 받고 큰길로 돌아서 구암사로 다시 가 또 하로밤을 자고 그 이튼날은 송계의 청으로 일행의 모다 운암리(雲巖里), 송계본택(松溪本宅)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이틀밤을 잤는데 가든 이튼날 정자(亭子)놀이를 하자고 하야 약 십 리쯤 되는 데로 가보니 큰 「들」을 넉넉하게 두른 산들이 아랫목으로는 바싹 좁아지며 중간에 일곡청계(一曲淸溪)를 끼고 절애(絶厓)가 서로 대하얐는데 강 건너 있는 벼렁은 우로는 암봉(巖峯)이오 아래로는 암벽(巖壁)이라 봉 아래 벽 우에 정자 두 간이 있고 정자 앞으로는 소송 사오주(疎松四五株)가 있습니다. 정자 일홈은 쌍구(雙龜)□□□근동(近洞) 여러 인사들이 얼□□은것이라 합니다.

육일 오후에 순창읍으로 나가는데 송계는 다른 볼일이 생겨서 긴 동행은 파의하고 우리 전송으로 낙덕정(樂德亭)까지만 같이 왔었습니다. 낙덕정은 운암서 약 십 리쯤 되는 사창(社倉)이라는 동내 앞 정자인데 하서선생(河西先生)의 유상(遊賞)하던 곳이라 합니다. 정자가 육각으로 되었는데 뒤 이외는 모다 마루로 돌리고 속은 온돌을 놓아 한서(寒暑)에 언제나 편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정자 앞 노송들이 모다 사오 장(四五丈)이 넘는데 웃가지가 서로 얼키어서 바람이 불면 저 가지는 저리로 흔들리려는데 이 가지에 끌리고 이 가지는 이리로 흔들리랴는데 저 가지에 끌리입니다. 뜰앞에 있는 바위너덜이를 두어 층 나려가면 곧 절벽이라 돌아 나려가는 대천(大川)이 이 어름에서 긴 「소(沼)」가 되어 방에 앉어서도 거울 같은 수광(水光)이 노송 새로 내다보입니다. 이 앞내만 건느면 곧 순창읍 가는 대로(大路)이므로 하오(下午) 오시쯤 될 때 지나가는 자동차를 소리하야 세우고 송계와 작별하고 꾸부리고 올라가서 읍으로 달렸습니다. 여기서 읍이 오십리라 어둘 때□ 들어가 가지고 다시 관음사(觀音寺)라는 새로 진 절을 찾어가서 하로밤을 지났는데 절은 아즉 초창(草創)하되 자리가 높아서 나려다보이는 데가 넓고 읍 근처로는 이만큼 한적한 곳이 드믄지라 해 진 뒤에도 놀러오는 손들이 끊이지 아니합니다. 아까 읍을 지날 때 유지 신문휴 씨(有志申文休氏)를 민세의 소개로 알았었는데 이 분이 일부러 우리를 찾어 올라와서 밤들도록 이야기를 하고 내일 남산대 신여암 고택(南山臺申旅菴故宅)을 같이 찾어가자고까지 하얐습니다.

第二十五信[편집]

신여암고택방문기 【일】

신여암 선생은 고령인(高靈人)이니 「경준(景濬)」은 휘오 「순민(舜民)」은 그의 자이라.

이렇게 쓰면서 생각하니 발서 개연(慨然)하다. 이 글이 선생의 행상(行狀), 전(傳), 비지(碑誌)가 아니오 선생의 고택을 방문하고 짓는 것이어늘 조선 수백년간 광절(曠絶)한 굉석(閎碩) 다시 말하면 조선학자로서 조선의 심혼(心魂)을 고도리 삼고 일생고심(一生苦心)이 전(專)혀 이에 모드어 그를 들매 조선근고(朝鮮近古)의 학계 무겁고 그를 제치고는 비록 성호(星湖), 농포(農圃)의 거학으로도 오히려 고적, 삭막을 느끼게 되는 이렇듯 거룩하신 어룬을 말하면서 그의 호만으로 부족하야 다시 그 휘와 그 자를 쓰게 되는 것을 보면 마치 이 세상에 대하야 첫 번으로 소개하는 것 같다. 세상이 다 여암 선생을 고로 알지 못할새 이렇게 써서 알어드리기를 구하는 것이 아닌가 이 어쩌 개연치 아니한가.

순창 남산대는 곧 선생의 나신 곳이라[肅宗壬辰 一七一二] 팔 세부터 사방으로 전유(轉游)[11]하셨는데 중간에 어찌다가 과환(科宦)에 붓들려 혹 경성에 주접(住接)하기도 하고 혹 인언(人言)에 걸려 원지(遠地)에 천적(遷謫)하기도 하고 세로(世路)가 귀치 아니하야 호서(湖西)에 객우(客寓)도 하였으나 만절(晩節)은 도로 남산대 고택으로 돌아와서 칠십 세에 세상을 떠났다. [正祖辛丑 一七八○] 그러니 이 집은 곧 선생의 시종(始終)하신 곳이다. 고택이 하상 선생 대신 우리에게 회언(誨言)을 끼칠 배 아니었마는 내 오래 두고 선생을 사모한지라 일부러 남산대를 찾어서 선생의 후손을 물었더니 다행히 신경우 씨(申瓊雨氏)를 만나니 이는 선생의 육세손(六世孫)이라 우선 그 의모(儀貌)를 바라보며 선생의 풍용(風容)이 혹 어느 곳에 비추어지지 아니하였나 표준(表準) 없이 살피어 보았다. 그리자 그 백 씨(伯氏) 신영우 씨(申榮雨氏)까지 인사하고 같이 선생 고택을 찾어가니 인가(人家)의 번리(藩籬)가 분격(分隔)함이 많고 죽림이 언제부터 있던지는 모르나 정반(庭畔)이오 또 산하(山下)라기에[12] 선생 당시에부터 있던 것인 듯하니 혹 선생의 수종(手種)하심이니 아니었든가 선생의 유저(遺著)는 내 처음에 여암산이(旅菴散移)[13]를 보고 보았고 그 뒤 훈민정음운해(訓民正音韻解)와 및 판본문집(板本文集)을 보았고 그 뒤에 또 선생 종교가(先生宗敎家)[14]에 단장(單藏)이라는 사본(寫本)인 전집(全集)을 보았으나 판본은 수간(收刊)됨이 너무 요요(寥寥)하고 선생의 일생대업을 보려면 오즉 사본이 있을 뿐인데 자체(字體)의 이잡(俚雑)하므로던지 탈오(脫誤)의 부정(不訂)한 것으로던지 추측건대 선생 몰후에 여러 번 이사(移寫)한 본중(本中)의 일본(一本)인 듯하나 이를 무엇으로 대조하여야 할지 항상 우탄(憂嘆)하야 왔었다. 오호라 용노(庸奴)라도 부손(富孫)만 있으면 문집이 남출(濫出)하고 멸학(蔑學)이라도 세가(勢家)만 된다면 대교(大橋)[15]가 풍행(風行)하지 아니하는가. 우리 선생이 누구시완대 조선으로서 그 거대한 가혜(嘉惠)를 가호호축(家戶戶祝)[16]하지는 못하나마 이다지 매몰하야 왔단 말인가.[17]

第二十六信[편집]

신여암고택방문기 【이】

조선역대의 문인의 저술을 보면 대개 「범(汎)」할지언정 「절(切)」하지 못하것만 선생의 문장은 필단(筆端)이 그대로 이인(利刄)이 되야 고금의 기리(肌理)를 부파(剖破)하는 데다가 포부(抱負)의 광박(廣博)함이 그야말로 만휘(萬彙)를 그대로 뇌리에서 찾어낼 만한지라 우산 「소사문답(素沙問答)」 일편만 보라. 삼교(三敎)로부터 백가(百家)에 이르리 모다 선생의 필하(筆下)에 분주(奔走)하되 어느 구 하나 정독(精篤)하지 아니한 것이 없으니 이 글만 하야도 농암(農巖)이 그 광식(廣識)에 양(讓)할지오 연암(燕巖)이 그 밀치(密致)에 손(遜)할지라. 그러나 문장으로써 선생을 말함은 도로혀 선생을 말살하는 것이다. 선생은 문인이 아니라 학자이오 학자가 아니라 광고(曠古)한 지사인 동시에 절세한 용세재(用世材)이다.

효현간(孝顯間) 학자의 풍기는 대체로 「가위(假僞)」의 절성기(絶盛期)이라 각색이 다 존화(尊華)오 제현이 거의 다 명인(明人)이더니 그중에도 일이선식(一二先識) 장유(張維) 최명길(崔鳴吉) 김육(金堉) 같은 이의 고심으로 알운(斡運)하던 사상이 전민중(全民中)의 □하는 서광(曙光)에 어울렸든지 □□이후 성호(星湖)가 나고 농포(農圃)가 나고 연하야 제현이 배출하되 그 학문의 중심이 전에 없이 줄연(崒然)한 조선혼이니 여암선생이 이때에 나심이 실로 응운(應運)이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강계(疆界)」를 지(誌)하고 「의표(儀表)」를 도(圖)하고 「정음(正音)」을 해(解)하고 「도로(道路)」를 고(考)하고 「사연(四沿)」을 고하고 산수를 경위(經緯)하야 어데까지든지 조선을 알리자 하얐더니라. 그의 저술로써 그의 치학(治學)하던 미의(微意)를 어루만져 보면 이것이 모다 사학(史學)이니 종래의 사학은 사에서 사를 구하얐으되 선생은 그러치 아니하야 불변하는 밑바닥을 찾어 가지고 추이(推移)하던 웃자최를 정리(整理)하자 하매 강계에다가 연구(硏究)의 보습을 대이는 일면 산수 도로를 소증(疏證)함이오 사학으로도 그저 역사를 안색(按索)하자 함에만 그친 것이 아니다. 선생은 지사이오 또 위재(偉材)라 적약(積弱)을 분개하고 위망(危亡)을 눈앞에 그리매 침체, 매몰, 잔패, 탕복, 초절(剿絶), 부란(腐爛)하야 마지아니하는 조선의 정신을 한번 진기(振起)하랴 하야 사학으로써 존조(尊祖)의 염(念)을 세우게 하고 자중(自重) 자위(自偉)함에 비롯하야 지괴(知傀) 지치(知耻)함에 미치도록 하자 한 것이다. 그러나 사적(史跡)은 과거라 발서 한연(寒煙), 야초(野草)에 잠기고 말었나니 이를 되살리리랴 한즉 범언(汎言)보다 그 땅을 실증하야 유수(流水), 고산(高山)으로부터 인심의 감개함을 고발(鼓發)케 하랴 한 것이다. 그러나 역사학만으로 심혼을 환기하얐댔자 오히려 급무에 응함에 어떠할까 걱정한지라 이에 「차제(車制)」를 설(說)하야 이용편민(利用便民)으로써 생계를 일으키게 하고 병선제(兵船製)를 강(講)하야 어모(禦侮)에 실익을 돕자함인데 우선 차제의 정교함이 그때로 보아 꿈도 못 꿀 화통(火筒)의 추운(推運)하는 일조(一條)가 있느니 선생의 고색(考索)하는 정력(精力)이 얼마나 입신(入神)하얐던 것을 이것만으로도 생각하고 남음이 있지 아니한가.

정정

제입오신

사단 십이행 산하(山下)의 「기에」는 연(衍)

십오행 이(移)는 「고(稿)」

십팔행 종교가(宗敎家)는 종가(宗家)

오단 십일행 대교(大橋)는 「대고(大稿)」

십사행 가호(家戶)는 「가시(家尸)」

십육행 「인가」의 「인」은 연(衍)

第二十七信[편집]

신여암고택방문기 【삼】

그런즉 선생의 저술처노쿠는 였던 것이나 모다 그 한 고도리로조차 운전(運轉)한 것이니 정음은 무엇하러 해(解)하얐는가 이것이오 「소사문답(素沙問答)」의 철리(哲理)까지라도 결국은 「순명책실(循名責實)」하는 삼엄한 변증으로써 조선인의 두뇌를 종작없음에서 건져다가 깔축없음에로 인도하자 함인 줄 알라. 선생은 이렇듯한 고심인(苦心人)이라. 이제 우리의 상상을 이끌어 가지고 아득한 백년 이전으로 달리어 선생의 저술하던 그때를 그리어 보자. 병선제를 초할 때 또는 차제설을 창(創)할 때 붓을 잡고 침음(沈吟)하며 얻은 듯하다가 아니로구나 한탄도 하고 생각이 막히던 것이 뜻밖에 투여나오는 것을 자쾌(自快)도 하며 가다가 적세(敵勢)를 요탁(料度)하되 방장 전지(戰地)에 임한 듯이 연변(沿邊)을 주사(周思)하되 일실중(一室中)에서 해산(海山)이 삼렬(森列)한 듯이 근근 자고(勤勤自苦)하는 그 모양으로부터 일세가 다 승평(昇平)을 구가하던 이때 홀로 서 위망을 조석에 보는 듯이 찌푸린 미간 주룸살까지 약존약무(若存若無)한 가운데 방불함을 찾어보라. 유심인(有心人)의 가슴이 저절로 뭉쿨하야지지 아니하는가.

들으니 선생이 기관(羇官)하러 왔을 제 누구 와던지 학의(學議)를 내기를 질겨하지 아니하야 명사 거유(名士巨懦)와는 정호(情好)도 별로 통치 아니하고 오즉 여항간(閭巷間) 무식한 사람과 같이 모여 속담, 이어(俚語)로 우수개하기만 좋아하였다 하며 차선(車船)의 제(制)를 일생 적공(積功)한 것이로되 한 번도 말한 적이 없더니 언젠가 지우중(知友中) 한 사람이 선생의 취중을 타 가지고 이를 시고(試叩)하얐더니 선생이 위곡개설(委曲開說)하야 도도함이 강하 같으매 그 사람도 또한 범자가 아니다. 이를 암기하야 마침내 일권서(一券書)를 만든지라 선생이 그 명일에 작일 취중의 말한 것을 크게 뉘우쳐서 백방으로 그 책을 달라하야 가지고 그 자리에서 소화(燒火)하야 바리었다 한다. [李岱淵海東憬史參照]

오호라 선생의 일생고심이 무엇에 들었었관대 이렇게 애를 써 가지고 이다지 잔훼(殘毁)하야 바리었는가. 선생은 위재라 그때가 어떤 때인지 선생이 어찌 모를 것이랴. 이렇게 애써 만들어야 마침내 쓸데가 없는 줄은 선생의 밝히 아는 바이다. 이뿐 아니라 간세(奸細)의 매설(媒薛)이 어느 곳에 미칠지도 모르는 것이니 일생의 전력을 드린 학문이 쓸데만 없을 뿐이 아니라 이것이 곧 살신물(殺身物)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모를 것이 아니라 가장 가장 분명한 것이다. 이가환(李家煥)이 무슨 죄로 죽었으며 정다산(丁茶山)은 무슨 죄로 십팔년을 남황(南荒)에서 보냈는가. 선생도 하마트면 남산대 이 집에서 고종(考終)도 못하얐으리라. 그 악한 세상이니라. 못된 판국이니라. 악착하고도 뻑뻑학 패리(悖理)하고 멸식(蔑識)한 생각하야도 기가 막히는 그 당시의 인심이니라. 선생으로서 접어(接語)를 싫어할 적에야. 선생으로서 일편저술(一篇著述)을 아니 내랴할 적에야.

第二十八信[편집]

신여암고택방문기 【사】

보일 데도 없거니 하믈며 쓸 곳을 바랄 것이랴. 그러면 고만둘 일이 아니냐. 그렇게 말 못할 세상을 그다지 살뜰히 위할 것은 무엇이냐. 그렇거든 잊어바릴 것이 아니냐. 그러나 선생은 지사이오 위재라 쓸데야 없기로서니 아니하고 어찌하며 저는 나를 모르고 알었다 하자 미워하고 미워하다 못하야 죽일 수까지 있을 지라도 나는 세상을 잊어바리지 못한다. 누구로 인하야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오즉 내 마음의 차마 마지못함을 조칠 뿐이다. 이것이 선생일생의 학문저술을 남모르는 가운데 고심자갈(苦心自竭)하게 한 대동력(大動力)이니라. 뉘라서 선생학문의 대행(大行)치 못함을 가르쳐 선생의 불행이 아니라 세상의 불행이라 하던고. 선생의 일생용심(一生用心)이 이같으셨더니라.

구시(救時)의 위걸을 산중에서 노사(老死)케 함도 원통하거니와 개세(開世), 도민(導民)의 대저(大著)까지 매몰하야 이제 이르러서는 우리네 박재(薄財), 면력(綿力)으로 그 부전(不傳)함을 탄타(歎咤)하니 선생의 영령이 알음이 기시면 그래도 가련(嘉憐)하실 것인가. 이것을 이제 와 전해선들 무엇하느냐고 한번 웃으실 것인가. 그러나 조선인으로 조선의 심혼을 고도리 삼은 선생의 학술을 받들어 전함에 있어서 기왕(旣往)은 기의(己矣)어니와 지금이라도 때가 아님이 아니오 금일인지라 더욱이 가슴으로 부여안고 살 깊이 삭여야 할 것이니 이것이 나의 여암선생전서(旅菴先生全書)의 교간(校刊)을 요무(要務)라 하는 소이이다.

「영우(榮雨)」「경우(瓊雨)」 형제양씨(兄弟兩氏) 의연히 서향(書香)의 남은 기운이 있고 또 들으니 무수동(茂樹洞) 선생의 혈속(血屬)이 여러 집 있고 그중에 기인(幾人)은 고심으로 선생전서의 합간(合刊)을 도모한다 하는데 내가 보든 이오(俚誤)한 사본 이외에 영우 씨에게 있는 일퇴(一堆)의 고책이 모다 선생의 저술인데 대약적기(大畧籍記)하야 보니 「동국강계지(東國疆界誌)」, 「해차록(海槎錄)」, 「지도초(地圖草)」, 「군현지제(郡縣之制)」, 「가람고(伽藍考)」, 「산수고(山水考)」, 「초목소(草木疏)」, 「설문학(說文學)」과 및 「선생자필일기(先生自筆一記)」 수권인데 어떤 것은 일종이 수본(數本)이 되야 편사(編寫)하던 때 자조 수정한 자최가 보이니 대개 선생 당시의 물(物)이라 이로서 나 보든 사본전서(寫本全書)를 교정할 수 있고 또 내 행정(行程)이 총총(怱怱)함을 인하야 미처 찾어내지 못한 것은 찾기를 기다리지 못하였으니 물론 적기한 이외에도 얼마가 있을 줄 안다. 선생의 착서(着書)는 조선의 보(寶)이니 일가(一家)에다가 그 간책(刊責)을 지을 것이 아니나 과거는 몰라서 받들지 못하였건만 지금 우리네 잔열후학(孱劣後學)은 알어도 바칠만한 힘이 시거에 생기기 어렵고 예 와 보니 선생 후손이 이만큼 조선에 대하야 혈성(血誠)일 뿐 아니라 또 유소(儒素)로서는 저윽이 유력(有力)하다 하니 나는 그네에 향하야 거듭 계수봉권(稽首奉勸)하고자 한다. 무릇 세고(世故)란 일이년이 어떨지 모르는 것이오 가세 또한 할만한 그때를 항상이리라 자기하기 어려운 것이라. 한번 분발하라. 시급한 것으로 알라. 경영(經營)만으로는 물 흐르듯 하는 세월을 묵혀두지 못하는 것인 줄 알라.

선생 돌아가신 지 일백오십사년 갑술 팔월팔일 순창여사(一百五十四年甲戌八月八日 淳昌旅舍)에서.

第二十九信[편집]

짤막짤막한 기신에다가 장찬 방문기를 사회(四回)나 연하야 좀 미안합니다마는 여암의 고택을 보고 그의 유저(遺著)뭉치를 피열(披閱)하여 보니 고금을 부앙(俯仰)하야 감개함이 없지 아니할 뿐더러 그 전서의 간행이 실로 시급한 문제라 선생후손중 이를 경영하는 이가 있다 하기로 하로라도 어서 하라는 부탁을 문자에 실어보랴고 길건 지리하건 불계(不計)하고 쓴 것입니다. 남산대가 여암의 고택으로서 중한 것은 이미 기문(記文)에 서술한 바이어니와 여암선세의 귀래정(歸來亭)[末舟]이 보한재(保閑齋)의 계씨(季氏)로서 영도(榮道)에 마음이 없어서 전주부윤(全州府尹)의 직을 바리고 이곳에 와서 종로(終老)하였나니 남산대 산두고향(山頭古享)이 곧 귀래정고구(歸來亭古構)입니다. 설사 우산(雨傘) 같은 야정(野亭)이라 할지라도 전수(前修)의 고풍양절(高風亮節)을 수연간(數椽間)에서 상망(想望)하야 마지아니할 것인데 이 정자야말로 고적古蹟에 승경(勝景)을 겸한 곳이라 고송(古松)의 구불텅거린 가지 너머로 읍옥(邑屋)이 모다 나려다보이고 원근산록(遠近山麓)의 취색(翠色)이 정히 농려(濃麗)한데 평광(平曠)한 도전 중간(稻田中間)으로 이리저리 굴곡한 유리일대(琉璃一帶)는 곧 장천(長川)이라 조망의 넓음으로도 이번 결에 보던 정각중(亭閣中) 이 정자를 제일이라 할 밖에 없습니다.

귀래옹(歸來翁)의 풍절(風節)은 누구나 다 아는 바이 아닙니까마는 귀래옹 부인 옥천벽(玉川蘗) 씨 문장의 왕양아려(汪洋芽麗)함은 아즉껏 세인의 한문(罕聞)한 바입니다. 벽 부인은 문장 뿐만 아니라 글씨로도 수경(秀勁), 청관(淸貫)한 명가(名家)오 화법(畵法)까지 범유(凡流)에 초월하야 한원(閑遠), 소쇄(瀟洒)합니다. 조선 고대 규각(閨閣)중 명류(名流)로서 신사임(申思任) 같은 이 서화의 미를 아울렀으나 문장에 있어서는 벽 부인이 일두(一頭)를 솟을 것 같고 또 사임에 비하면 선배라 규각문학사(閨閣文學史)에 특필할 만한 광채입니다. 옥천은 곧 순창의 고호(古號)이니 벽 부인 고향이 곧 순창이라 귀래가 여기 와서 □□□함이 부인의 친가(親家)를 의지한 것인 듯합니다. 벽 부인의 문(文), 서(書), 화(畵)가 아모리 명가라 할지라도 일생 규중에 은처(隱處)한 분이라 전류(傳流)함이 거의 없을 것인데 다행이 강천사 부도암(剛泉寺 浮屠菴)을 영축(營築)하는데 권선문(勸善文) 일편을 지어서 자필한 것과 또 암자를 지을 곳의 산수형지를 담묘(淡描)한 것이 있어 암물(菴物)로 다시 가진(家珍)이 된 지 오래라 지금도 후손가(後孫家)에서 이를 세수(世守)합니다.

화품(畵品), 서예는 차차 사진(寫眞)으로써 광전(廣傳)케 하랴 하거니와 우선 그 문장일편(文章一篇)을 다음 기신부터 담송(膽送)하랴 합니다. 수백년간 규각문원(閨閣文苑)이 일시에 우꾼한 듯이 공곡(空谷)에서 국향(國香)을 만난들 이에서 지난다 하리까.

第三十信[편집]

【부(附)】 벽부인작부도 암개건권선문(薜夫人作浮屠 菴改建勸善文) 【일】

蓋聞因果之說, 生時所作善惡, 謂之因, 他日報應, 謂之果, 予以女性, □美詳眞妙之理, 畧考其往古之迹, 自釋氏之入中國, 敎以慈悲, 論以因果, 以度衆生, 雖明王哲候, 賢卿俊士, 皆趨風仰慕, 至有躬行服習, 精勤佛事, 能脫去穢累, 超詣覺路者, 至于今不替, 豈無益而若是哉, 是故, 常信而悅之, 今年仲春, 有一, 夜夢先亡母邢氏, 戴霞冠, 飄雲裾, 自虛而降, 相汝對坐, 從容語予曰, 明日, 有人來, 請汝共作善事, 須心悅而從, 母有懈慢之志, 是汝作福之源也, 美及對而夢覺, 斂襟而起, 坐以待朝, 不崇朝而門有扣扉之聲, 使人視之, 則乃居近里, 素知, 「若非」其人也, 迎入許坐, 問其來由, 答曰, 「郡地廣德山中」, 有山水最淸之地, 昔有僧, 「信靈」, 見而愛之, 暫結草舍, 多歷炎凉爲風雨所漂搖, 屋破垣頹, 遂爲遺墟, 使雲山煙水, 長有餘恨, 僧中照, 有志者也, 慨然以重創爲心, 立願出錢, 普勸檀家, 予亦其時, 畧助蟻角, 作而新之, 飾以華彩, 因傍有浮屠, 假名曰浮屠庵, 其制雖小, 淸淨則山中諸刹莫能及也, 自後, 商人勝士棲眞養性者, 咸樂處之, 第恨其時, 工拙事忙, 築基不固, 今未多年, 而顧其力微, 未敢起發, 聞夫人, 常說此事, 慾作施主, 未知肯許否」, 豫想其夜夢, 不覺悚然, 其坐而言曰, 有是哉, 夜夢之奇驗也, 吾先母生時, 且有英明之質, 善無不爲, 惡無不去, 今必爲上界之尊, 參知未來之數而昭示於我也, 如此之事, 吾所樂爲, 况承毛命乎, 吾當幹其事, 以爲願堂也, 今聞此菴之規制, 其所需, 不必多矣, 豈難獨辦哉, 然, 千萬人同願, 以結後因, 可也, 但世人, 逐無窮之欲, 終身汨沒而不能自出者, 天下皆是, 安能盡曉爲善哉, 雖然, 經曰, 若能補理古寺, 是謂二梵之福, 則凡有爲功德, 締結善根, 奉福君親者, 捨此莫之可爲也, 若使有心者聞之, 孰不欲結此善因, 大以福君親, 小以利自己, 以至於利萬物平, 宜曉諸檀家, 以與其有心者也, 但親行普勸, 女類之所難今口勸文, 今照師廣勸之若何, 答曰, 是予與中照, 所望於夫人者也, 故卽圖其形, 君其辭, 以示至情, 凡我諸檀, 見此之文, 膸意施之, 以同此因, 幸甚, 窃恐或有不信理而以吾言爲誣者, 故又以近代易知卽驗之効而畧言之

第三十一信[편집]

【부】 벽부인작부도 암개건권선문 【이】

麗代之季, 有一棟樑僧[僧中負重望者]欲改玉輪寺,鑄成金像, 搢紳士庶人無不施財, 有一散將官, 至窮, 不能施物, 有女年可十三, 願贖此女爲養息, 因納布五白段, 又有崔時中者, 常勤事佛, 宅隣, 有寺上官退公之時, 到寺門, 輒下馬拜禮, 步過, 然後還騎, 凡所得新物, 先奉於佛, 忽夢佛來告曰, 汝事我勤矣, 然不若南里鷹揚府老兵之歸心也, 公明日使人尋之, 果有一老兵在焉, 公親往問之曰, 聞汝常敬隣寺佛, 有何別般致敬乎, 對曰, 老僕, 自中風不起, 己七年矣, 但晨夕聞鍾聲則向其處, 各掌而己, 公曰, 如是則吾之向佛, 果不若汝誠矣, 由是, 大重其人, 每受祿輒以一斛賜之, 夫散將官納女, 誠至矣, 則其女卽受贖 將軍養女, 享富之報, 老兵合掌之□□矣, 則其身卽受崔時中減祿以賜之報, 一生之內, 尙有因果, 如是, 况於後生乎, 以合掌之誠, 尙見其果, 况施之以財乎, 以此觀之, 必知吾言之不誣矣, 故敢以此告之也 貞夫人 薜氏

이 글로 말하면 왕양하고도 근엄하고 아려한 중에도 정한(情恨)하니 전후의 호응함과 전척(展拓), 개합(開闔)함이 다 법도에 맞고 천근(淺近)하게 인과를 말하되 층전(層轉)함이 형세를 내어 편종(篇終)의 위갑이 이상하게 긴건(緊健)하니 이른바 「진고문(眞古文)」이라 우리 전수(前修)의 문장이 성하지 아니함이 아니로되 법도의 구비함은 계곡(谿谷)으로써 개산시조(開山始祖)를 심는데 규각중 벽부인이 그윽히 이 문호(門戶)를 선계(先啓)하였으니 이 어찌 문원의 기문(奇聞)이 아니리까. 또 부인은 세(世), 문(文), 단(端), 세(世) 사조시인(四朝詩人)이니 한참 문화의 융운(隆運)이오 불교에 대한 숭봉(崇奉)이 극도이던 때라 경재가(卿宰家) 부인으로서 권문(勸文)을 자작하게까지됨이 발서 일시의 풍상(風尙)을 볼 것이오 이 권문의 어의(語意)를 보매 군중을 보권(普勸)하는 순유(諄諭)에다가 계도자(啓導者)로 자임하는 기개가 있어 도저히 후래부녀(後來婦女)의 수삽(羞涩)하던 태도가 이니니 그때의 여교(女敎)는 오히려 나려(羅麗)의 준위(俊偉)하던 유풍을 아조 바리지 아니하였었음을 짐작할 것입니다. 권문은 오히려 속문(俗文)이니 부인의 문술이 이에 전주(傳注)하였을 것이 아니라 만일 유집(遺集)이 전하였던들 물론 이 이상명작(以上名作)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편만 하여도 부인은 걸연(傑然)한 명가입니다.

第三十三信[편집]

남원(南原) 오니 우선 양눌제(梁訥齊) 생각부터 나는데 행정이 총총한 까닭에 그 고허(故墟)를 방문하지 못한 것이 한이오 또 남원고적(南原古蹟)으로 가장 우리의 개모(慨慕)를 끄는 곳은 「만인총」이니 정유재란에 명장양원(明將楊元)이 남원성수(南原城守)를 역주(力主)하야 얼마 동안 고수(固守)하다가 위세가 점점 심하매 양원은 고만 탈주하고 접반사 정기원(接伴使鄭期遠), 방어사 오응정(防禦使吳應井), 김경로 별장신호(金敬老別將申灝), 부사 임현(府使任鉉), 통판 이덕회(通判李德恢), 이원춘(李元春), 병사 이복남(李福男) 이하군병(以下軍兵), 사민(士民)의 동순(同殉)한 사람이 그 수를 세일 수 없는데 산같은 적해(積骸)를 한 광(壙)에 묻었으므로 이제것 「만인총」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때 이원춘이 구례 석주관(求禮 石柱關)으로 좇아 본읍(本邑)으로 가서 창고에 불지르고 남원으로 향하는 길에 「압밤티」 고개에 이르니 그때 이공(李公)은 일사(一死)를 자기(自期)하였으므로 수종(隨從)을 다리지 아니하였는데 공생일인(貢生一人)이 성은 손씨(孫氏)오 이름은 전치 하니하나 굳이 이공을 따라가서 같이 순사하였고 이복남은 순천으로 좇아 옥과(玉果)를 거쳐 남원서창(南原西倉)으로 전진하야 □성중으로 들어가랴 하던 길에 「감나무밭」[枾田村]에서 김경로(金敬老)와 만나 동행하였나니 김공(金公)은 방장 금성(金城)으로 좇아오던 길이라 전합니다. 근세로 보면 준비로는 피난이오 임사(臨事)한 자는 도난(逃難)인데 그때는 어찌 그리 부난(赴難)의 용(勇)이 일관하였던고. 우리도 한만(汗漫)한 사람이라 갈 길이 바쁘다고 총전(塚前)에 기서 일번배복을 행하지 아니하고 운전수에게 수호형지(守護形止)만을 물으니 아즉도 사민부노(士民父老)로부터 춘추향화(春秋香火)를 끄치지 아니한다 합니다.

잘 참은 곡성(谷城)이라 돈자강(敦子江)을 거의 저물 때 건넜는데 산은 곱고 물은 맑고 녹수(綠樹), 백사(白沙)에 담아한 풍연일대(風煙一帶)가 중국강남경색(中國江南景色)과 팔구분(八九分)이나 비슷합니다. 곡성읍 묵용실(默容室) 주인 정봉태 씨(丁鳳泰氏)를 찾어가서 담경(談經), 논문으로 한밤을 지나니 이것도 남행이후 처음 있는 아취(雅趣)오 또 정봉태 씨의 영윤내동씨(令胤來東氏) 북평(北平)으로부터 집으로 돌아온지라 가지고 온 진적(珍籍)도 많거니와 그 미재(美才)와 옥모(玉貌)가 한갓 석상(席上)의 진(珍)이 아니니 이번 길에 처음 보는 인재라고 삼인이 다 같이 칭탄(稱歎)하였습니다. 구일 아침에 장차 구례(求禮)로 향하려는데 정씨 소주인(丁氏小主人)이 우리와 동행하기로 하야 같이 떠났습니다. 어제부터 대작(大作)하던 풍우가 밤 지나서 좀 그칠 듯하더니 아침 뒤는 점점 더 쏟아져서 자동차에 들이치는 빗발이 어찌 세이던지 우구(雨具)도 쓸데가 없고 하도 정신을 차릴 수 없으니까 어데를 지나는지 어데가 어떠한지 물어볼 경항조차 없었습니다.

각주[편집]

  1. 물가 풀? 물 까풀?
  2. 와기한 것인지 원문에는 "翻經都監".
  3. 원문에는 "뜹"인데 아무래도 와기인 듯.
  4. "틈틈이"의 오식. 제이십일신 정정 단락 참조.
  5. 이하 "에 싸인 까닭입니다. 수림"이 유락. 제이십일신 정정 단락 참조.
  6. 원문에는 "함치르를".
  7. 수놓은?
  8. "낮에"의 오식. 제이십일신 정정 단락 참조.
  9. 여기서는 변연재라 하였으나, 바로 뒷절에 애연의 뜻을 해설하고 있는 것이 뜬금없는데, 아마 변연재의 변은, 애연의 애를 오식한 것이나 아닐까?
  10. 원문은 "구엄사(龜嚴寺)"이나 오식인 듯.
  11. 유 앞의 자가 흐릿하나 그 꼴이 전 자와 상당히 닮아 비정하여 달았다.
  12. "기에"는 연자. 제이십육신 정정 단락 참조.
  13. "이"가 "고"의 오식인바 정자는 "여암산고". 제이십육신 정정 단락 참조.
  14. "종교가"의 "교" 자가 연자. 제이십육신 정정 단락 참조.
  15. "대고(大稿)"의 오식. 제이십육신 정정 단락 참조.
  16. "가호호축"의 "가호"는 "가시(家尸)"의 오식. 제이십육신 정정 단락 참조.
  17. "인가"의 "인"은 연자. 제이십육신 정정 단락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