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꾸미는 여인
─ 순진한 정미(情味)를 느끼게 하는 ‘쁘량슈’ 급의 여인
조선적 현실에서는 찾을 수 없는 경지나 ─ 그러므로 이상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 르노아르의 ‘쁘량슈’ 나 ‘말토’ 쯤의 여인이면 이상에 가깝다 할까. 하필 ‘쁘량슈’ 나 ‘말토’ 를 드는 것은 그들의 높은 지적 계도(繼度)를 원함으로써이다.
즉 이상이라 함은 지적 이상을 가리킴이다. 의상이야 무엇이든 드레스와 머플러 대신에 치마 저고리를 입히고 하이힐 대신에 털 고무신을 신기고 갸우뚱한 베레모 대신에 맨머리바람으로 거리를 거닐게 하더라도 ─ 무관한 것이며 보다도 지적 민첩, 고도의 이성, 심리의 비약적 거래가 바라고 싶은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란 피차에 끼쳐주고 받는 추억밖에는 값이 없는 것이예요” 하고 말할 때의 ‘쁘량슈’ 의 연애적 활달과 심리적 은근성이 꾸며 보고 싶은 것이다.
고도의 지성을 우리는 더 많이 지드의 ‘엘리사’ 에게서 볼 수 있으나 거기서는 도리어 과도의 이성에 질식하게 되며 편집적(偏執的) 극기 절제에 일종의 안타까운 불만조차 느끼게 된다.
“제롬씨, 우리는 언제까지든지 떨어져 있는 편이 좋아요……나는 당신을 멀리서 생각하고 있는 편이 훨씬 좋아요……사람이 가까이 가서 탈없는 것은 다만 주에게 뿐에요” 하고 딱 잡아떼는 엘리사의 완고한 정신에는 일률로 찬 것을 느낄 뿐이다. 반대로 누이동생 ‘줄리엣’의 걱실걱실한 마음씨에는 따뜻한 동감을 느낄 수 있다.
“언니는 저를 뉘에게 시집보내려고 하시는지 아세요……당신께예요.”
‘제로옴’에게 대한 구애의 말에서도 다만 그의 꾀를 본다느니 보다는 순진한 정미(情味)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 정미와 고도의 지성과는 반드시 서로 배치되는 것이 아닐 듯싶다. 이 두 가지 심조를 갖춘 곳에 이상의 여인을 꾸밀 수 있을 것 같다. ‘가’ 를 말하면 ‘나’를 대답하고 꽃의 빛깔을 이야기하면 그 향기를 짐작하는 내포가 넓고 함축이 많고 심리적 비약적 회화를 건넬 수 있으며, 연애적 모험성이 있고 ─ 그 위에 육체적 욕심을 말한다면 눈자위에 윤택이 흐르고 응시하는 초점이 확적치 못하여 나를 노리든지, 혹은 내 등 너머 죽은 석고 조상(彫像)을 바라보는지 분간할 수 없는 ─ 그런 여인이면 이상에 가깝다 할까.
현실에 있어서 그런 육체적 조건의 여인은 간혹 발견할 수 있으나 그 심적 조건에 이르러서는 말을 건너보기 전에는, 마음을 떠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