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신 추도문
노신 약전
[편집]노신(魯迅)의 본명은 주수인(周樹人)이며 자(字)는 예재(豫才)다. 1881년 중국 절강성 소흥부에서 탄생. 남경에서 광산학교에 입학하여 양학에 흥미를 가지고 자연과학에 몰두하였으며 그 후 동경에 건너가서 홍문학원을 마치고 선대(仙臺) 의학전문학교와 동경 독일협회학교에서 배운 일이 있다. 1917년에 귀국하여 절강성 내의 사범학교와 소흥중학교 등에서 이화학 교사로 있으면서 작가로서의 명성이 높아졌다.
그리하여 54문학운동 후 중국 문학사조가 최고조에 달하였을 시대에 북경에서 주작인(周作人) 경제지(耿濟之) 심안영(沈雁永) 등과 함께 『문학연구회』를 조직하고 곽말약(郭沫若) 등의 『로맨티시즘』 문학에 대하여 자연주의 문학운동에 종사하고 잡지 『어사(語絲)』를 주재하는 한편 북경 정부 교육부 문서과장 및 국립북경대학 국립북경사범대학 북경여자사범대학 등의 강사로 있었으나 학생운동에 관계되어 북경을 탈출하였다.
1926년도 하문 대학교수로서 재직하다가 남하 그 후 광주 중산대학 문과 주임교수의 직에 있다가 1928년 이것을 사직하고 상해에서 저작에 종사하는 한편 『맹아일간』이란 잡지를 주재하였다.
이로부터 그의 문학 태도는 점점 좌익으로 전향하여 1930년 『중국 좌익작가연맹』이 결성되자 여기 가맹하여 활동하던 중 국민정부의 탄압을 받아서 1931년 상해에서 체포되었다. 그 뒤 끊임없는 국민정부의 간섭과 남의사(藍衣社)의 박해 중에서 꾸준히 문학적 활동을 하고 국민정부의 어용단체인 '중국작가협회'를 반대하던 중 지난 10월 19일 오전 5시 25분 상해시 고탑 자택에서 서거하였다. 향년 56.
주요한 작품으로는 <아Q정전(阿Q正傳)> <납함(吶喊)> <방황(彷徨)> <화개집(華蓋集)> <중국소설사략(中國小說史略)> <약(藥)> <공을기(孔乙己)>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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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阿Q正傳(아Q정전)』의 작자로서 세계적 작가이며 중국 신문학의 최고봉인 魯迅(노신)이 지난 19일 오전 5시에 상해에서 宿疴(숙아)로 영면하였다는 實音(실음)이 전한지 3일 되는날에 우리는 간단한 一文(일문)을 빌어 삼가 추도의 뜻을 표하거니와 만년에 그의 정치적 불우로 인하야 문학자로서의 聲名(성명)조차가 우리에게 널리 퍼지지 못한 것을 더 유감으로 생각한다. 一記者(1기자)
1932년 6월초 어느 토요일 아침이었다. 식관에서 나온 나와 M은 네거리의 담배가게에서 조간신문을 사서 들고 근육신경이 떨리도록 굵은 활자를 한숨에 내려 읽은 것은 당시 중국과학원 부주석이요 민국 혁명의 원로이던 양행불(楊杏佛)이 남의사원(藍衣社員)에게 암살을 당하였다는 기사이였다.
우리들은 거리마다 삼엄하게 늘어선 불란서 공무국 순경들의 예리한 눈초리를 등으로 하나 가득 느끼면서 여반로(侶伴路)의 서국까지 올 동안은 침점이 계속되었다. 문안에 들어서자마자 편집원 R씨는 우리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주었다.
중국 좌익작가연맹의 발안(發案)에 의하여 전세계에 진보적인 학자와 작가들이 상해에 모여서 중국의 문화를 옹호할 대회를 그해 8월에 갖게 된다는 것과 이에 불안을 느끼는 국민당 통치자들이 먼저 진보적 작가 진영의 중요 분자인 반재년(潘梓年)(현재 남경 유폐)과 인제는 고인이 된 여류작가 정영(丁玲)을 체포하여 행방을 불명케 한 것이며 여기 동정을 가지는 송경령(宋慶齡) 여사를 중심으로 한 일련의 자유주의자들과 작가연맹이 맹렬한 구명 운동을 한 사실이며 그것이 국민당 통치자들의 눈에 거슬려서 양행불(楊杏佛)이 희생된 것과 그 외에도 송경령 채원(蔡元) 배(培) 노신 등등 상해 안에서만 30명에 가까운 지명지사(知名之士)들이 남의사의 『뿔랙 리스트』에 올라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뒤 3일이 지난 후 R씨와 내가 탄 자동자는 만국빈의사(萬國殯儀社) 앞에 닿았다. 간단한 소향(燒香)의 예가 끝나고 돌아설 때 젊은 두 여자의 수원(隨員)과 함께 들어오는 송경령 여사의 일행과 같이 연회색 두루막에 검은 『마괘아(馬掛兒)』를 입은 중년 늙은이 생화에 싸인 관을 붙들고 통곡을 하던 그를 나는 문득 노신인 것을 알았으며 옆에 섰던 R씨도 그가 노신이라고 말하고 난 십분쯤 뒤에 R씨는 나를 노신에게 소개하여 주었다.
그때 노신은 R씨로부터 내가 조선 청년이란 것과 늘 한번 대면의 기회를 가지려고 했더란 말을 듣고 외국의 선배 앞이며 처소가 처소인만치 다만 근신과 공손할 뿐인 나의 손을 다시 한 번 잡아줄 때는 그는 매우 익숙하고 친절한 친구이었다.
아! 그가 벌써 56세를 일기로 상해시 고탑 9호에서 영서(永逝)하였다는 부보를 받을 때에 암연 한줄기 눈물을 지우는 이 어찌 조선의 한 사람 후배로써 이 붓을 잡는 나뿐이랴.
(1936년 10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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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중국 문학사상에 남긴 그의 위치
『<阿Q의 正傳>을 다 읽고 났을 때 나는 아직까지 阿Q의 운명이 걱정되어 못 견디겠다』고 한 『로망·로-랑』의 말과 같이 현대 중국문학의 아버지인 노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阿Q의 정전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지금의 중국의 阿Q들은 벌써 『로망·로-랑』으로 하여금 그 운명을 걱정할 필요는 없이 되었다. 실로 수많은 阿Q들은 벌써 자신들의 운명을 열어갈 길을 노신에게서 배웠다. 그래서 중국의 모든 근로층들은 남경로의 『아스팔트』가 자신들의 발밑에 흔들리는 것을 느끼며 시고탑 노신촌의 9호로 그들이 가졌던 위대한 문호의 최후를 애도하는 마음들은 황포탄(黃浦灘)의 붉은 파도와 같이 밀려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阿Q시대를 고찰하여 보는데 따라서 노신 정신의 3단적 변천과 아울러 현대 중국문학의 발전 과정을 알아보는 것도 그를 추억하는 의미에서 그다지 허무한 일은 아닐 것이다.
중국에는 고래로 소설이라는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과 같은 완전한 예술적 형태는 존재하지 못했다. 삼국연의나 수호지가 아니면 홍루몽(紅樓夢)쯤이 있었고 다소의 전기가 있었을 뿐으로서 일반 교양 있는 집 자제들은 과거 제도에 화(禍)를 받아 문어체의 고문만 숭상하고 백화소설 같은 것은 속인의 할 일이라 하여 낮히 아는 한편 소위 문단은 당송팔가와 팔반(八般)의 혼합체인 상성파(相城派)와 사기당(思綺堂)과 원수원(袁隨園)의 유파를 따라가는 사륙변체문과 황산곡을 본존으로 하는 강서파 등등이 당시 정통파의 문학으로서 과장과 허위와 아유(阿諛)로서 고전문학을 모방한 데 지나지 못하였으며 새로운 사회를 창생할 하등의 힘도 가지지 못한 것은 미루어 알기도 어렵지 않은 분위기 속에 중국 문학사상에 찬연한 봉화가 일어난 것은 1915년 잡지 <신청년>의 창간이 그것이다.
이것이 처음 발간되자 당시 『아메리카』에 있던 호적지(胡適之) 박사는 『문학개량 추의(芻議)』라는 『문학혁명론』을 1917년 신년호에 게재하여 진독수(陳獨秀)가 이에 찬의를 표하고 북경대학을 중심으로 한 진보적인 교수들이 합류하게 되자 종래의 고문가들은 이 운동을 방해코저 갖은 야비한 정치적 수단을 써 보았으나 1918년 4월호에 노신의 『광인일기』란 백화소설이 발표되었을 때는 문학 혁명운동은 실천의 거대 보무를 옮기게 되고 벌써 고문가들은 그 추악한 꼬리를 감추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것은 그 후 얼마 뒤에 노신이 광동에 갔을 때에 어떤 흥분한 청년은 그를 맞이하는 문장 속에 『광인일기(狂人日記)』를 처음 읽었을 때 문학이란 것이 무엇인지 몰랐던 나는 차차 읽어내려 가면서 이상한 흥분을 느꼈다. 그래서 동무를 만나기만 하면 곳 붙들고 말하기를 --- 중국의 문학은 이제 바야흐로 한 시대를 짓고 있다. 그대는 『광인일기』를 읽어 보았는가. 또 거리를 걸어가면 길 가는 사람이라도 붙들고 내 의견을 발표하리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魯迅 在廣東)
이 문제의 소설 『광인일기』의 내용은 한 개 망상광의 일기체의 소설로서 이 주인공은 실로 대담하게 또 명확하게 봉건적인 중국 구사회의 악폐를 통매한다. 자기의 이웃 사람은 물론 말할 것도 없고 특히 자기 가정을 격렬히 공격하는 것이다. 가정---가족 제도라는 것이 중국 봉건사회의 사회적 단위로서 일반에 얼마나한 해독을 끼쳐 왔는가. 봉건적 가족 제도는 고형화한 유교(儒敎)류의 종법 사회 관념 하에 당연히 붕괴되어야 할 것이면서 붕괴되지 못하고 근대적 사회의 성장에 가장 근본적인 장애로 되어있는 낡은 도덕과 인습을 여지없이 통매했다. 이에 『광인일기』 중에 한 절을 초(抄)하면 『나는 역사를 뒤적거려 보았다. 역사란 건 어느 시대에나 인의 도덕이란 몇 줄로 치덕치덕 쓰여져 있었다. 나는 밤잠도 안자고 뒹굴뒹굴 굴러가며 생각하여 보았으나 겨우 글자와 글자 사이에서 『사람을 먹는다』는 몇 자가 쓰여 있었을 뿐이었다.』
이같이 추악한 사회면을 폭로한 다음 오는 시대의 건설은 젊은 사람들의 손에 맡겨져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면서 이 소설의 1편은 『어린이를 구하자』는 말로서 끝을 막았다. 실로 이 한 말은 당시의 『어린이』인 중국 청년들에게는 사상적으로는 『폭탄 선언』 이상으로 충격을 주었으며 이러한 작품이 백화로 쓰여지는데 따라 문학혁명이 완전히 승리의 개가를 부르게 된 공적도 태반은 노신에 돌려야 하는 것이다.
(1936년 10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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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광인일기』의 다음 연속해 나온 작품으로 『공을기(孔乙己)』 『약(藥)』 『명일(明日)』 『일개소사건(一個小事件)』 『두발적고사(頭髮的故事)』 『풍파(風波)』 『고향(故鄕)』 등은 모두 신청년을 통해서 세상에 물의를 일으켰으나 그후 1921년 북경신보 문학부간에 그 유명한 『阿Q正傳』이 연재되면서부터는 노신은 자타가 공인하는 문단 제1인적 작가였다.
그리고 이러한 대작은 모두 신해혁명 전후의 봉건사회의 생활을 그린 것으로 어떻게 필연적으로 붕괴하지 않으면 안될 특징을 가졌는가를 묘사하고 어떻게 새로운 사회를 살아갈까를 암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당시의 혁명과 혁명적인 사조가 민중의 심리에 생활의 『데테일슨』에 어떻게 표현되는가를 가장 『레알』하게 묘사한 것이다. 더구나 그는 농민작가라고 할 만치 농민 생활을 그리는데 교묘하다는 것도 한 가지 조건이 되겠지만는 그의 소설에는 주장이 개념에 흐른다거나 조금도 무리가 없는 것은 그의 작가적 수완이 탁월하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의 작품은 늘 농민을 주인공으로 하는 것과 때로는 『인테리』일지라도 예를 들면 『孔乙己』의 공을기나 『阿Q正傳』의 阿Q가 모두 일맥이 상통하는 성격을 가지는 것이니 공을기는 구시대의 지식인으로 시대에 떨어져서 무슨 일에도 쓰여지지 못하고 기품만은 높았으나 생활력은 없고 걸인이 되어 선술집 술상대(臺)에 일금 19조(弔)의 주채(酒債)가 어느 때까지 쓰여져 있는 대로 언제인지 행방이 불명된 채로 나중에 죽어졌던 것이라든지 『룸펜』 농민인 일용노동자 阿Q가 또한 쑥스러운 년석으로 혁명 혁명 떠들어 놓고는 그것이 몹시 유쾌해서 반취한 기분이 폭동대의 일군에 참가는 하려고 하였으나 결국 허풍만 치고 아무것도 못하다가 때마침 일어난 폭도의 약탈 사건에 도당으로 오해되어 (피(彼)의 평소 삼가지 못한 언동에 의하야) 피살되는 阿Q의 성격은 그때 중국의 누구라도 전부 혹은 일부분씩은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阿Q나 공을기가 모두 사고와 행동이 루-즈하고 확호(確乎)한 한 개의 정신도 없으며 우약(愚弱)하면서도 몹시 건방지고 남에게 한 개 쥐여질리면 아무런 반항도 못하면서 남이 자신을 연민하면 제 도량이 커서 남이 못 덤비는 것이라고 제대로 도취하여 남을 되는 대로 해치는 무지하고 우수면서도 가엽고 괴팍스러운 것을 노신은 그 『레알리스틕』한 문장으로 폭로한 것이 특징이었으니 당시 『阿Q正傳』이 발표될 때 평소 노신과 교분이 좋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자기를 모-델로 고의로 쓴 것이라고들 떠드는 자가 있은 것을 보아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 중국은 시대적으로 『阿Q시대』이였으며 노신의 『阿Q正傳』이 발표될 때는 비평계를 비롯하여 일반 지식군들은 『阿Q상(相)』이라거나 『阿Q시대』라는 말을 평상 대화에 사용하기를 항상 다반으로 하게 된 것은 중국 문학사상에 남겨 놓은 노신 위치를 짐작하기에 좋은 한 개의 재료이거니와 그의 작가로서의 태도를 통하여 일관하여 있는 노신 정신을 다시 한번 음미해보는데 적지 않은 흥미를 갖게 된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의 조선 문단에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예술과 정치의 혼동이니 분립이니 하여 문제가 어찌 보면 결말이 난 듯도 하고 어찌 보면 미해결 그대로 있는 듯도 한 현상인데 노신 같이 자기 신념이 굳은 사람은 이 예술과 정치란 것을 어떻게 해결하였는가? 이 문제는 그의 작가로서의 출발점부터 구명(究明)해야 한다.
노신은 본래 의사가 되려고 하였다 그것은 자기의 『할일』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때의 자기의 『할일』이란 것은 민족개량이라는 신념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연후 『납함』 서문에 다음 같이 썼다.
『나의 학적은 일본 어느 지방의 의학 전문학교에 두었다. 나의 꿈은 이것으로 매우 아름답고 만족했다. 졸업만 하고 고국에 돌아오면 아버지와 같이 치료 못하는 병자를 살리고 전쟁이 나면 출정도 하려니와 국인의 유신에 대한 신앙에까지 나아갈 것------』이라고
이것은 물론 소년다운 노신의 로맨틕한 인도주의적 흥분이였겠지만은 이 꿈도 결국은 깨어지고 말았다.
---의학은 결코 긴요하지 않다. 우약한 국민은 체격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또 아무리 강장(强壯)해도 무의미한 구경거리나 또는 구경꾼이 되는 밖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중략--- 그럼으로 긴요한 것은 그들을 정신적으로 잘 개조할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때 당연 문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문예 운동을 제창하기로 했다 (납함 서문)
이리하여 그가 당시 동경에 망명해 있는 중국 사람들의 기관지인 『절강조』 『하남』 등에 쓰던 과학사나 진화론의 해설을 집어치우고 문학 서적을 번역한 것은 희랍의 독립운동을 원조한 『빠이론』과 파란(波蘭)의 복수 시인(詩人) 『아담·미케뷧치』 『항가리』의 애국시인 『베트피·산더-』 『필립핀』의 문인으로 서반아 정부에 사형받은 『리샬』 등의 작품이었다.
(1936년 10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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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그리고 이것은 노신의 문학행정에 있어서 가장 초기에 속하는 것이지만은 이러한 번역까지라도 그의 일정한 목적 즉 정치적 목적 밑에 수행된 것을 엿볼 수 있는 것이며 위에 말한 『광인일기』의 『어린이를 구하자』는 말도 순결한 청년들에 의하여 새로운 중국을 건설하자는 그의 이상을 단적으로 고백한 것으로써 이 말은 당시 일반 청년들에게 무거운 책임감을 깨닫게 한 것은 물론 이래 기천년 동안의 봉건사회로부터 청년을 해방하라는 슬로-간으로 널리 쓰여졌고 사실 그 뒤의 중국 청년학생들은 모든 대중적 사회운동의 최전선에서 활발 과감한 지도와 조직을 하였으며 그 유명한 54운동이나 5주(州)운동이나 국민혁명까지도 늘 최전선에 서서 대중을 지도한 것은 이들 청년학생이였다.
그럼으로 노신에 있어서는 예술은 정치의 노예가 아닐 뿐 아니라 적어도 예술이 정치의 선구자인 동시에 혼동도 분립도 아닌 즉 우수한 작품 진보적인 작품을 산출하는 데만 문호 노신의 지위는 높아갔고 阿Q도 여기서 비로소 탄생하였스며 일세의 비평가들도 감히 그에게는 함부로 머리를 들지 못하였다.
그러나 여기에 한 가지 좋은 예가 있다. 1928년경 무한(武漢)을 쫓겨와서 상해에서 태양사를 조직한 청년 비평가 전행촌(錢杏邨)이 때마침 푸로 문학론이 드셀 때인 만큼 노신을 대담하게 공격을 시작해 보았다. 그 소론에 의하면 노신의 작품은 비계급적이다. 阿Q에게 어디 계급성이 있느냐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정당한 말이다. 노신의 作品에서 우리는 눈 닦고 보아도 푸로레타리아적 특성은 조금도 볼 수가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한 사람의 작품을 비평할 때는 그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니 노신이 작가로 활동을 하고 있을 때는 중국에는 오늘날 우리가 정의를 내릴 수 있는 푸로레타리아는 없을 뿐 아니라 그때쯤은 뿌르조아 민주주의적인 정치사조조차도 아직 계선(界線)이 분명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뿌르조아 혁명이라는 소위 국민혁명도 정직하게 말하자면 45운동을 전초전으로 한 것만큼 여기서 역시 중국의 비평가인 병신(丙申)은 재미있는 말을 하고 있다.
『그가 현재 중국 좌익작가연맹을 지지하고 있다 해서 그의 『四五』 전후의 작품을 푸로 문학이라고 지목할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를 우수한 농민작가라고 하는 것이 타당타고---』
그렇다. 이 말은 어느 정도까지 정당에 가까운 말로서 그를 푸로 작가가 아니고 농민작가라고 해서 작가 노신의 명예를 더럽힐 조건은 되지 못하는 것이다. 다만 문제는 그가 얼마나 창작에 있어서 진실하게 명확하게 묘사하는 태도를 가지는가 그의 한 말을 써보기로 하자.
『---현재 좌익 작가는 훌륭한 자신들의 문학을 쓸 수 있을까? 생각컨대 이것은 매우 곤란하다. 현재의 이런 부류의 작가들은 모두 『인테리』다. 그들은 현실의 진실한 정형(情形)은 쓸려고 해도 용이치 않다. 어떤 사람이 일찍 이런 문제를 제출한 것이 있었다. 『작가가 묘사하는 것은 반드시 자기가 경험한 것이라야만 될 것인가? 그러나 그는 스스로 답하기를 반드시 안 그래도 좋다. 왜 그러냐면 그들은 잘 추찰(推察)할 수가 있으므로 절도하는 양면을 묘사하려면 작가는 반드시 자신이 절도질할 필요도 없고 간통하는 장면을 묘사할 필요를 느낄 때 작가 자신이 간통할 필요도 없다고』 그러나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작가가 구(舊)사회 속에서 생장해서 그 사회의 모든 일을 잘 알고 그 사회의 인간들에게 익숙해져서 있는 때문에 추찰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종래 아무런 관계도 없는 새 사회의 정형과 인물에 대해서는 작가가 무능하다면 아마 그릇된 묘사를 할 것이다. 그럼으로 푸로 문학가는 반드시 참된 현실과 생명을 같이 하고 혹은 보다 깊이 현실의 맥박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면서 또 다시 말을 계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구사회를 조그만치 공격하는 작품일지라도 만약 그 결점을 분명히 모르고 그 병근을 투철히 파악치 못하면 그것은 유해할 뿐이다. 애석한 일이나마 현재의 푸로 작가들은 비평가까지도 왕왕 그것을 못한다. 혹 사회를 정시(正視)해서 진상을 알려고도 않고 그 중에는 상대자라고 생각하는 편의 실정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
(1936년 10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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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비근한 예로는 얼마 전 모 지상에 중국 문학계를 비평한 문장을 한편 보았는데 중국 문학계를 3파에 나눠서 먼저 창조파를 들어 푸로 파라 하여 매우 상세하게 논급하고 다음 어사사(語絲社)를 소뿌르파라고 조그만치 말한 후 신월사(新月社)를 뿌르 문학파라 해서 겨우 붓을 대다가 만 젊은 비평가가 있었다. 이것은 젊은 기질의 상대자라고 생각하는 파에 대해서는 무엇 세밀하게 고구할 필요가 없다는 뜻을 표명한 것이다. 물론 우리는 서적을 볼 때 상대자의 것을 보는 것은 동파(派)의 것을 보는 안심과 유쾌와 유익한데 미치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만약 일개 전투자라면 나는 생각컨대 현실과 상대자를 이해하는 편의상 보다 많은 당면의 상대자에 대한 해부를 필요로 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옛것을 분명히 알고 새로운 것에 간도(看到)하고 과거를 요해(了解)하야 장래를 추단하는 데서만 우리들의 문학적 발전은 희망이 있다. 생각건대 이것만은 현재와 같은 환경에 있는 작가들은 부단히 노력할 것이고 그래야만 참된 작품이 나오는 것이다.」라고
이 간단한 몇 마디 말이 문호 노신의 창작에 대한 『모랄』인 것이다. 이 얼마나 우리의 뼈에 사무치고도 남을만한 시사인고! 이리 해서 현대 중국 문단의 부(父)이며 비평가의 비평으로서 자타가 그 지위를 함께 긍정하든 그의 작가로서의 생애는 너무나 짧은 것이었으니 1926년 3월 『이혼』이란 작품을 최후로 남긴 그는 교수로서 작가로서의 화려한 생애는 종언을 고하지 않으면 안될 때가 왔다. 그는 지금부터 『손으로 쓰기보다는 발로 달아나기가 더 바빴다.』 1926년 북양 군벌을 배경으로 한 안복파(安福派)의 수령 단기서(段祺瑞)의 정부는 급진적인 좌파의 교수와 우수한 지식분자 50여명 체포령을 내렸다. 우리 노신은 이 50명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것은 1924년 국민당의 연아용공책(聯俄容共策)이 결정되어 그 익년 가을 『뽀로듼』 등이 고문으로 광동에 오고 『전국민적 공동전선』이었던 국민혁명의 제1계단인 광동 시기에는 푸로레타리아의 동맹자는 농민 도시빈민 소뿌로 지식계급 국민적 뿌르조아지-였다』
그래서 급진 교수들은 교육부총장 군벌 정부를 육박하였으며 이러한 신흥세력에게 낭패와 공포를 느낀 군벌 정부는 이러한 교수들과 학생들에게 체포령을 내리고 학생들의 행렬은 정부 위병들의 발포로 인하여 남녀 수백여 명의 사상자가 났다. 그때 노신은 북경 동교민항의 공사관 구역의 외국인 병원이나 공장 안으로 도라다니며 찬물로 기아를 참아가면서도 신문과 잡지에 기고를 하여 군벌 정부를 맹렬히 공격하였다 그중에도 『국민 이래 최암흑일에 지(誌)』하였다는 명문은 단기서로 하여금 의자에서 내려 앉게 되었다.
---붓으로 쓴 헛소리는 피로 쓴 사실을 만착(瞞着)하지 못한다--중략--붓으로 쓴 것이 무슨 힘이 있으랴. 실탄을 쏘는 것은 오직 청년의 피다 (속화개집(續華蓋集))
오늘날까지 중국 문단의 『막심 콜키-』이든 그는 지금부터는 문화의 전사로서 『앙리·발뷰스』보다 비장한 생애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그의 말과 같이 최암흑한 50일이 지나고 그는 북경을 탈출했다. 하문 대학에 초청을 받아 갔으나 대학 기업가의 음흉수단인 것을 안 그는 광동 중산대학으로 갔다. 그러나 1926년 4월 15일 장개석의 쿠-데타-는 광동 일성만 노동자 농민 급진 지식분자 삼천여명을 살해하였으며 한때는 『혁명의 전사』라고 간판을 진 노신도 상해로 달아나야만 되었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 한 번 그에게 흥미보다는 최대의 경의를 갖게 되는 것은 다음의 일문이다.
---나의 일종 망상은 깨어졌다. 나는 지금까지 때때로 낙관을 가졌었다. 청년을 압박하고---하는 것은 대개 노인이다. 이들 노물들이 다 죽어지면 중국은 보다 더 생기 있는 것이 되리라고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렇지 않은 것을 알았다. 청년을----하는 것은 대개는 청년인 듯하다. 또 달리 재조할 수 없는 생명과 청춘에 대해서 한층 더 아낌이 없시------이기집(而己集)
이 글은 그가 침묵하고 있는 것을 『공포』 때문이라고 조소한 사람에게 답한 통신문의 일절로서 이때까지 진화론자이던 그 자신의 사상적 입장을 양기(揚棄)하고 새로운 성장의 일단계로 보인 것이라고 해석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가 상해에 왔을 때는 국민당의 쿠-데타-로 혁명군에서 쫓겨온 젊은 푸로 문학자가 많았다. 『혁명문학론』이 효효히 불려지고 실제 정치 행동의 전선을 떠난 그들은 총칼 대신에 펜을 잡았다. 원기왕성하게 실제 공작의 경험에서 매우 견실한 것도 있었으나 때로는 자부적인 영웅주의가 화를 끼치고---에 실패한 분만(憤懣)과 극좌적언 기회주의자들은 노신을 공격했다. 그러나 그는 푸로 문학이란 어떤 것인가 또는 어찌해야 될 것인가를 알리기 위해 아버지 같은 애무로서 『푸레하노프』 『루나찰스키-』들의 문학론과 『싸벳트』의 문예정책을 번역 소개하여 중국 푸로 문학을 건설하고 있는 동안에 『노신을 타도치 않으면 중국에 푸로 문학은 생기지 못한다』던 문학 소아병자들은 그 자신들이 먼저 넘어지고 이제 그가 마저 가고 말았다. 이 위대한 중국 문학가의 영령 앞에 고요히 머리를 숙이면서 나의 개인적으로 곤란한 정형에 의하여 문호 노신의 윤곽을 뚜렷이 그리지 못함을 참괴(慙愧)히 알며 붓을 놓기로 한다. -了-
(1936년 10월 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