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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헌서/외집 1권/회우록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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會友錄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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遊乎三韓三十六都之地。東臨滄海。與天無極而名山巨嶽根盤其中。野鮮百里之闢。邑無千室之聚。其爲地也亦已狹矣。非古之所謂楊墨老佛而議論之家四焉。非古之所謂士農工商而名分之家四焉。是惟所賢者不同耳。議論之互激而異於秦越。是惟所處者有差耳。名分之較畫而嚴於華夷。嫌於形跡則相聞而不相知。拘於等威則相交而不敢友。其里閈同也。族類同也。言語衣冠其與我異者幾希矣。旣不相知。相與爲婚姻乎。不敢友焉。相與爲謀道乎。是數家者。漠然數百年之間秦越華夷焉。比屋連墻而居矣。其俗又何其隘也。洪君德保嘗一朝踔一騎。從使者而至中國。彷徨乎街市之間。屛營於側陋之中。乃得杭州之遊士三人焉。於是間步旅邸。歡然如舊。極論天人性命之源。朱陸道術之辨。進退消長之機。出處榮辱之分。考據證定。靡不契合。而其相與規告箴導之言。皆出於至誠惻怛。始許以知己。終結爲兄弟。其相慕悅也如嗜欲。其相無負也若詛盟。其義有足以感泣人者。嗟乎。吾東之去吳幾萬里矣。洪君之於三士也。不可以復見矣。然而向也居其國則同其里閈而不相知。今也交之於萬里之遠。向也居其國則同其族類而不相交。今也友之於不可復見之人。向也居其國則言語衣冠之與同而不相友也。迺今猝然相許於殊音異服之俗者。何也。洪君愀然爲間曰。吾非敢謂域中之無其人而不可與相友也。誠局於地而拘於俗。不能無鬱然於心矣。吾豈不知中國之非古之諸夏也。其人之非先王之法服也。雖然。其人所處之地。豈非堯舜禹湯文武周公孔子所履之土乎。其人所交之士。豈非齊魯燕趙吳楚閩蜀博見遠遊之士乎。其人所讀之書。豈非三代以來四海萬國極博之載籍乎。制度雖變而道義不殊。則所謂非古之諸夏者。亦豈無爲之民而不爲之臣者乎。然則彼三人者之視吾。亦豈無華夷之別而形跡等威之嫌乎。然而破去繁文。滌除苛節。披情露眞。吐瀝肝膽。其規模之廣大。夫豈規規齷齪於聲名勢利之道者乎。迺出其所與三士譚者。彙爲三卷以示余曰。子其序之。余旣讀畢而歎曰。達矣哉。洪君之爲友也。吾乃今得友之道矣。觀其所友。觀其所爲友。亦觀其所不友。吾之所以友也。燕巖朴趾源序。

회우록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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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 삼십육도의 땅을 돌아다녀 보건대, 동쪽은 창해에 임하여 하늘과 더불어 끝이 없고, 명산 거악이 그 가운데 뿌리를 박아 서리었다. 조선의 들은 백 리가 넘는 곳이 드물고, 도시는 한 줌 천 가구가 되는 곳이 없으니, 그 속한 땅덩이가 또한 너무나도 좁을 뿐이다. 옛날의 소위 양·묵·노·불[1]도 아니고 어찌 의논의 파벌이 넷이나 되고, 옛날의 소위 사·농·공·상도 아니고 어찌 명분의 파벌이 넷이나 된다는 말인가. 이것은 오로지 존경하는 바가 같지 않은 이유이다. 의논이 서로 부딪혀 마치 진나라와 월나라가 다른 것과 같다. 이것은 오로지 처한 바가 다른 이유이다. 명분의 차이를 긋는 것이 너무 엄격하여 중화와 오랑캐를 구분하는 것과 같다. 형세와 자취가 미우면 곧 서로 듣고도 알지 못하는 체 하고, 계급과 권세에 얽매이면 곧 서로 교류하면서도 감히 벗이 되지 못한다. 그 사는 마을도 이문[2]도 같고, 겨레도 무리도 같아서 언어와 의관이 나와 다른 것이 거의 없거늘, 이미 서로 알지 못하고, 서로 더불어 혼인하지도 못하며, 감히 친구로 사귀지도 못하니 어찌 서로 도리를 도모할 수 있겠는가! 이 많은 집안[3]들이 아득하도록 수 백년 동안 진월 화이같이 집을 나란히 맞대고 담장을 잇닿으며 살고 있으니 그 풍속이 또 어찌 그리도 좁은 것인가. 홍군 덕보 형님[4]이 일찌기 어느 날 한 필 말을 타고 사신을 따라가 중국에 이르렀을 때, 저잣거리 사이를 헤매고 다니다 신분이 낮은 자들 사이에 가려져 있는 항주 출신의 유학하는 선비 세 사람을 만났다. 이에 시간 사이에 여관으로 걸어 찾아가니, 옛 친구에게 그러하듯 환대해 주면서 하늘과 인성의 근원, 주자와 육상산[5]의 도의 구분, 진퇴와 소장의 시기, 출처 영욕[6]의 분수 같은 것을 지극히 토론하였다. 참고하여 증거로 삼으며 바로잡음이 맞추어 적합치 않은 것이 없었으며, 이에 그 서로 더불어 경계하며 이끌어 주는 말들이 모두 지성과 측달에서 나온 것이라. 처음에는 지기로서 허교[7]를 하고, 종래에는 형제의 의를 맺기에 이르러 바야흐로 서로 그리워하며 아끼기를 기욕[8]과 같이 하였다. 그래서 서로 저버리지 않기로 굳게 맹세하여, 그 지나칠 정도의 의리가 사람들을 감읍시켰다. 슬프도다. 우리 동방과 오국의 거리가 기만리에 이르니, 형님이 세 선비를 다시 만나 돌아보기는 불가할 것이다. 然而向也居其國則同其里閈而不相知。今也交之於萬里之遠。向也居其國則同其族類而不相交。今也友之於不可復見之人。向也居其國則言語衣冠之與同而不相友也。迺今猝然相許於殊音異服之俗者。何也。형님이 씁쓸한 듯이 있다가 말하길, “내가 감히 우리나라 안에 사귈 만한 이가 없어서 벗을 사귀지 못한다는 뜻이겠는가. 誠局於地而拘於俗。不能無鬱然於心矣。내가 어찌 지금의 중국이 그 옛날의 제하[9]와 다르고, 그 사람들이 선왕들의 법복을 따르지 않음을 모르겠는가. 비록 그렇다 하여도 그 사람들이 사는 땅이 어찌 요·순[10]·우[11]·탕[12]·문·무[13]·주공[14]·공자[15]가 밟았던 흙으로 되어있지 않으며, 그 사람들이 사귀는 선비가 어찌 제·노·연·조·오·초·민·촉의 널리 보고 멀리 배우던 선비가 아니며, 그 사람들이 읽는 책이 어지 삼대[16] 이래로 사해 만국에 지극히 퍼져나간 재적[17]들이 아니겠는가? 制度雖變而道義不殊。則所謂非古之諸夏者。亦豈無爲之民而不爲之臣者乎。然則彼三人者之視吾。亦豈無華夷之別而形跡等威之嫌乎。然而破去繁文。滌除苛節。披情露眞。吐瀝肝膽。其規模之廣大。夫豈規規齷齪於聲名勢利之道者乎。” 하고는 이에 세 선비와 나눈 이야기들을 모아 세 권 짜리 책으로 만든 것을 내게 보여주시면서 말하길, “자네가 서문을 써 주게.” 하였다. 나는 이윽고 이것을 모두 읽은 뒤 탄식하여 말하길, “홍 형님은 벗을 사귀는 것을 통달하였구료. 내 이제야 벗을 사귀는 도를 알게 되었소. 그 벗삼는 바를 보았고, 그 벗 되는 바를 보았으며, 또 내가 벗하고자 하는 바를 형님은 벗하지 않는 바를 보았도다.” 하였다. 이에 연암 박지원이 서문을 썼다.


會友錄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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凡物不大則無可觀。故培塿不生松栢。溝池不產蛟龍。小國之於人物文章。亦猶是焉。我朝鮮小國也。僻陋在海隅。士之生於其中者。何足以文章稱。然而自昔華人未嘗鄙夷而小之者。以殷太師遺化所在也。東方文獻。實自太師始。若其九疇之敎。書之始也。麥秀之詠。詩之始也。迨乎新羅高麗。士多入學中國。文章道藝浸浸乎華軌而詩律亦隨而盛。以至本國文物。專象中朝而作者益多。前後華使之來。往往采其詩。編之竹帛。盖亦取其聲律之近於華也。譬如山近泰嶽。水近江海者。爲物小而得氣多也。吾友洪君大容德保。有志好古者也。前歲隨其家仲父赴燕。訪問中國高士。得陸子飛,嚴子誠,潘子庭筠而與之語甚歡。三子江左文章士也。願得見東國詩。德保諾而歸以告余。余曰。三子以中國高文。不夷沫我音而願見之。是昔人之義也。遂相與裒聚國中諸家詩各體。編而爲數卷以歸之。顧急於踐言。未遑博搜。尤略於世代遠者而我東詩道之始終正變。亦槩具焉。非敢曰僻壤俚調。可擬於大國漢唐之遺軌也。庶幾其不甚卑鄙。許之以中華餘音。則小邦之光也。若復因詩而得其意。因意而得其人焉。則又可見魯國之猶秉周禮。郯子之猶守帝典也。嗚呼。詩可以觀者。奚特聲律云乎哉。海東丹室居士閔百順順之甫撰。

회우록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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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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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楊·墨·老·佛. 유교에서 이단으로 취급하는 위아설, 겸애설, 도교, 불교를 말한다.
  2. 閈. 동네 어귀에 세운 문.
  3. 家. 이 글자가 ‘파벌’도 되고 ‘집안’도 됨을 이용해 당파간, 학맥간의 싸움을 집을 맞대고 담장을 잇닿는다고 비유하고 있다.
  4. 원문에는 그저 ‘홍군 덕보’지만, 《연암집》 제3권 〈공작관문고〉의 ‘답홍덕보서’를 보면 박지원은 홍대용을 형으로 예우하고 있다. 실제로 홍대용의 나이가 박지원보다 7세 위다.
  5. 육구연. 남송의 사상가. 양명학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조선 철학계에서는 이황이이가 양명학을 공격한 이래 이단으로서 배척되어 왔다. 홍대용의 세 중국인 친구 중 엄성은 원래 양명학을 지지했는데, 이때 홍대용에게 논박당하고 성리학으로 돌아섰다.
  6. 출처(出處)란 산림에 머물면서 처사로서 생활하는 것을 말하고, 영욕(榮辱)은 입신양명하여 현실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말한다.
  7. 높임말을 쓰지 않고 말을 낮춰도 된다고 허락을 하는 것. 상당히 친밀한 사이에서만 허락된다.
  8. 嗜欲. 좋아하고 즐기려는 욕심.
  9. 諸夏. 사방의 오랑캐와 대조하여 중국 본토를 이르는 말.
  10. (堯), (舜). 고대 중국의 전설적인 임금들. 이 임금들의 치세에 관해서는 실증적으로 알려진 바가 전혀 없지만, 유교 하에서 이상적인 태평성대를 가리키는 관용어처럼 사용된다.
  11. 우왕(禹王). 중국 최초의 왕조인 하나라의 건국자.
  12. 탕왕(湯王). 중국의 두 번째 왕조이자 고고학적으로 발굴된 최초의 왕조인 은나라의 건국자.
  13. 문왕(文王), 무왕(武王). 은나라 다음의 왕조인 주나라의 왕들.
  14. 주공(周公), 문왕의 동생이자 무왕의 숙부로, 노나라 공작이자 주나라의 섭정.
  15. 성리학을 창시한 주희는 이상의 사람들을 “유학의 참 정신이 전해 내려온 큰 흐름”인 ‘도통’으로 보고, 그 도통의 끝에 주희 자신이 있다고 주장했다.
  16. 三代. 왕도 정치가 이루어졌다고 주장되는 하나라, 은나라, 주나라의 세 왕조. 유교 정치는 이 ‘삼대의 이상’의 구현을 목표로 한다.
  17. 載籍. 서책을 따로 이르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