뎃상
뎃 상
B부인은 병오생이다
병오생의 여자란 거개 더 많이 동적인 듯하다.
부친 위독의 전보가 반드시 귀국의 전부의 이유가 아님을 나는 잘 안다. 그 돌연사를 기회 삼아 어지러운 신변과 심서心緖를 약간이라도 정리하자는 것이 더 일의적의 뜻이 아니었던가. 그의 생활은 너무도 어처구니없고 감정은 너무도 다단多端하였던 것이다. 상식적 도덕의 굴레로는 달리는 그의 감정을 제어할 수 없다. 부인은 자유의 준마이다.
그렇다고 남편이 천국으로 간 것은 아니요. 지상 건재이다. 위인이 원래 펄펄은 하나 장구한 세월에 이어 처지고 무지러져서 지금엔 돌부처요, 허수아비다. 진보된 도덕관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하는 수 없는 인내적 달관이 그렇게 만들었다. 한 지붕 밑에 살면서도 두 사람의 생활은 각 각 다르다. 남편이 잘 때 아내는 깨어 있고 남편이 깨어 있을 때 아내는 잠자고-이것은 남편이 매일 사정하여야 할 처지에 있는 까닭으로라고 하더라도 부부는 식탁을 마주하는 법이 적으며 아내가 내객來客을 접대하여 차를 마시며 레코드를 걸며 할 때 남편은 외딴방에서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침실이 청교도적 규칙을 지켜야 할 것은 물론이요 그러기 때문에 이 금단을 깨트리려고 한 남편이 아내에게 톡톡히욕을 당한 것은 도리어 당연하다고나 할까.
남편은 그날 밤 부인의 방에 잠자리를 펴라고 분부하였다. 안잠자기가 고지식이 자리를 만들어 놓자 부인은 안잠자기인지 남편인지 누구인지를 모르게 날카롭게 호통하며 일껏 편 이불을 들어 맨봉당에 던져 버렸다. 남편이 눈을 부릅떳는지 머리를 긁었는지는 알 바 없으나 이것은 확실히 ‘암탉에게 눌리운 수탉’ 이상의 희극이다.
원래 남편이 전임지를 떠나게 된 것도 곡절이 결코 단순한 것 같지는 않다. 셋째 아이를 얻을 때에 분인은 잠시 임지任地를 떠났고 남편의 사랑이 그 아이 위에 가장 엷었다 한 것이다.
그래서 부부는 외딴 고장으로 피신한 셈이나 이 열려진 페이지는 벌써 비밀도 아무것도 아니다. 이 뒤에 올 가지가지의 숨은 이야기야말로 부인만의 책 속에 감추어져야 할 것이나 웬일인지 벽 속의 일이란 벽 밖으로 흘러가는 운명에 있는 듯하다.
여자란 소극적이어서 대수對手의 적극적 움직임을 기다릴 뿐이라고 부인은 그의 연애술을 겸양하여 말한다.
그가 만약 말대로 그같이 소극적이라면 남자란 남자는 대담하고 적극적이란 말인가. 질그릇 장사도 과자점의 차인꾼도 집안에 부리는 노복까지도-모두 그같이 대담하단 말인다.
그는 고향의 전보를 받았다. 그는 단신 가까운 항구에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넜다. 바다를 건넌 곳이 바로 고국이며 고향이다. 간 곳마다 대수가 있게 되면 고향인들 또 적적할 리 없다.
도리어 그가 간 후로는 마음이 적적하였다. 가지가지 소문을 말하며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고들 수군거렸다. 다시 돌아오지 않음이 그 일신을 위하여서도 가정을 위하여서도 시끄럽지 않음을 사람들은 뜻함이었으나 그런 원과 추측을 저버리고 부인은 몇 달 후 부승부승한 얼굴로 다시 나타났다. 눈썹을 가늘게 밀고 파적거리로 양재인지를 배워 가지고 아무 티도 없이 돌연히 돌아왔다. 사람들은 반가워하는 법도 없고 별반 신통히도 여기지 않으며 그렇다고 그다지 귀찮게 여길 것도 없다.
여름이 무더우니 그는 해수욕을 갈 것이요. 돌아올 때에는 리어카를 탈 것이며. 밤길을 거닐 때에는 콧노래를 부를 것이다. 나는 해변 모래 위에서 그를 다시 만나야 할 것이나 그의 가느다란 눈초리를 보아도 별 감격이 없다. 원컨대 다시는 영문소설의 강講을 청하지 않았으면 할 뿐이다.
-이런 여자도 있다.
‘루루’라고나 부를까. 확실히 궐녀는 일종의 지령地靈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