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백 (이효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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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침에 세수할 때 어디서 날아왔는지 버들잎새 한 잎 대야물 위에 떨어진 것을 움켜 드니 물도 차거니와 노랗게 물든 버들잎의 싸늘한 감각 ! 가을이 전신에 흐름 을 느끼자 뜰 저편의 여윈 화단이 새삼스럽게 눈에 들어왔다 . 장승같이 민출한 해 바라기와 코스모스——모르는 결에 가을이 짙었구나 . 제비초와 애스터와 도라지꽃 ——하늘같이 차고 푸르다 . 금어초, 카카랴, 샐비어의 붉은 빛은 가을의 마지막 열 정인가. 로틴제——종이꽃같이 꺼슬꺼슬하고 생명 없고 마치 맥이 끊어진 처녀의 살빛과도 같은 이 꽃이야말로 바로 가을의 상징이 아닐까 . 반쯤 썩어져 버린 홍초 와 관라디올럿 , 양구비의 썩은 육체와도 같다——가을은 차고 맑다 . 마치 바닷물에 젖은 조개껍질과도 같이 .

나 의 두 귀는 조개껍질이 아니나 그리운 바닷소리가 너무도 또렷이 들려 온다 . 이것도 가을 하늘이 지나쳐 맑은 탓이겠지 . 화단을 어정거릴 때에나 방에 누웠을 때에나, 그 무엇을 생각할 때에나 , 한결같이 뚜렷이 울려 오는 바닷소리——궂은비 같은 바닷소리——느껴 우는 울음과도 같은 바닷소리——가을 바다는 소리만 들어 도 처량해 . 어저깨 저녘 바닷가 모래밭을 거닐 때에도 등에 업은 어린것만 아니라 도 처량한 소리에 이끌려 그대로 푸른 바닷속에 걸어 들어갈 뻔하지 않았던가 . 그 러지 않아도 산란하고 뒤숭숭한 심사가 바닷소리를 들으면 모순된 마음 . 어지러운 마음을 꿰뚫고 한 줄기 곧게 뻗치는 추억의 실마리 . 그 추억의 실마리에 조개껍질 을 무수히 꿰어서 그에게 보냈건만——소포 속에 조개껍질을 포기 포기 싸서 멀리 그에게 차입해 보냈건만 국한된 네 쪽의 벽 안에 갇혀 있는 그가 그것을 받았는지 어쨌는지. 받았으면 조개껍질을 귀에 대고 오죽이나 바닷소리를 그리워할까 . 손바 닥만한 높은 창으로 좌향달은 별을 쳐다보면서 오죽이나 고향을 그리워할까 . 서대 문에서 묵은 지 두 해요 , 서대문에서 다시 대전으로 넘어간 지 반년이다 . 서울에 있어서 차입 시중을 들던 나는 대전까지 좇아갈 수는 없어서 그가 그리고 떠날 다 음날 하는 수 없이 반대의 방향인 이 고향으로 내려온 것이다 .

지 금 와서는 뒤숭숭한 마음속으로 삼 년 동안이나 손가락 하나 대어 보지 못한 남편의 육체에 대한 열정이 송곳같이 날카롭게 솟아오를 뿐이다 . 모든 원망이 한 줄기 이 육체적 열정으로 환원된 듯도 하다 . 싸늘한 가을임에 불구하고 마음의 불 길은 뜨겁게 타오른다 . 화단에 피어 있는 새빨간 샐비어——이것의 표정이 나의 마음을 그대로 번역하여 놓은 것이 아닐까 . 조개같이 방긋이 벌어진 떨기 사이로 불꽃같이 피어 오르는 한 송이의 붉은 꽃——이것이 곧 나의 마음의 상징인 것이 다. 이것도 모두 남편과 나와의 육체적 거리가 가져온 것인을 생각할 때 마음은 더한층 안타깝게 뒤끓는다 . 가을이 짙을수록 꿈자리가 어지럽고 머리가 띵하고 전 신에 뜨겁게 열이 솟는다 . 골을 동이고 자리에 누우면 가슴이 죄어지고 모르는 결 에 입에서 신음 소리가 새어 난다 . 대낮에 홀연히 잠이 들었다가 부끄러운 꿈을 꾸고 얼굴을 붉히며 깜짝 놀라 깨나는 때가 많다 . 복받치는 열을 식히려 하는 수 없이 날마다 바다로 향한다 . 바다로 가는 길에 종묘장을 지나게 되고 종묘장을 지 날 때에 반드시 도야지우리의 그것이 눈에 뜨이는 것이다 . 이 무례한 도야지우리 의 풍속——이것이 마치 마법사와 같이 나의 마음을 활활 붙여 준다 .

사 실 타오르는 나의 마음의 동요가 모두 야릇한 도야지우리의 풍속의 죄가 아닌 가도 생각한다 . 거기에는 원시의 욕망 이외의 아무것도 없다 . 그러나 그원시의자 태가사람의일면과흡사함을볼때에나는일부러 면을쓰는사람의꼴을밉게 생각할 때조차 있다 . 우리 밖에는 날마다 씨돋을 울고 고함치는 도야지 사이로 돌 아다니면서 기관차와도 같이 한 마리씩 엄습하씀다 . 힘과 부르짖음과——거기에는 생활의 최고 노력의 표현이 있는 것이다 . 그 금단의 풍경을 나도 모르게 한참이나 물끄러미 바라보고 섰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나는 황당하게 그곳을 떠나는 것이 다. 그 꼴을 누구에게 들키지나 않았을까 하고 한참 동안은 얼굴을 숙인 채 종종 걸음으로 재게 걷는다 . 붉어진 얼굴이 쉽사리 꺼지지 아니하고 전신이 불같이 탄 다. 바닷가까지 허둥허둥 한 달음에 내걷는다 . 도장같이 가슴속에 찍힌 새빨간 풍 경이 생생한 꽃같이 살아서 바닷바람에도 쉽게 식지 않았다 . 그리고는 타는 몸— —바닷물에 빠지기 전에는 그것이 식을 리 없다 . 번번이 왜 그것을 보았던가 하고 후회하면서 결국 또 보는 것이다 . 그것은 일종의 마술이다——이렇게밖에는 생각 할 수가 없다 . 오늘그곳을 지날때에도 나는역시그풍경에눈을감지않았던 것이다. 바다에 이르니 마음이 산란하고 추억이 날카로웠다 . 모래 위에 발자취가 어지럽고 상기된 눈동자에 바다가 무더웠다 . 벌판을 휘돌아 집에 돌아왔을 때까지 몸은 식지 않았다 . 대야에 물을떠놓고 그 속에 주워 온조개와 손을담갔으나 아 침의 싸늘하던 대야의 감각은 먼 옛날의 기억과도 같이 아득하게 사라져 있지 않 은가. 저물어 가는 뜰 한구석에서는 깻잎 냄새가 진하게 흘러왔다 . 그 높은 향기 또한 가지가지의 추억을 품고 있는 것이다 .허전허전 걸어가서 (그 맥없고 휘뚱휘뚱 한 꼬링야 마치 도깨비나 허수아비의 그것과도 같지 않았을까 ) 깻잎을 뜽어 주먹 위에 얹고 손바닥으로 치니 부드럽고 둥관둥관한 음향이 저녁의 적말을 깨뜨렸다 . 이 깻잎의 음향 역시 가지가지 옛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 깻잎 으끄러진 냄새가 코 를 찔뜀다 . 그 냄새에 더운 몸이 한층 무덥고 괴롭다 . 이 고요한 저녁에 네 쪽의 벽 속에 웅크리고 앉은 남편의 회포인들 오죽할까 . 더구나서울 있을 때에는별 것 다 차입해 달라고 청하던 그가 아니던가 . 그의 청대로 차입하는 책갈피에 몸의 털을 두어 오리 뽑아서 넣었더니 태워 먹었는지 삼켜 버렸는지 지금의 나의 감정 같아서는 삼 년 전에 그가 수군거리고 돌아다닐 때에 그를 붙들고 말렸더면 하는 안된 생각조차 난다 . 동무들이 이 소리를 들으면 얼마나 나를 비웃고 꾸짖을까 . 그 러나 이것은 거짓 없는 마음인 것이다 . 나는지금어색한투갑을 입은 영웅되기 보다도 한 사람의 천한 지어미 됨에 만족하는 것이다 . 그리운 남편에게도 이것을 원하는 것이다 . 어색한 영웅과 천한 지아비——어는 것이 더 뜻 있고 값있은 것인 가는 다른 문제다 . 뜻과 값의 문제를 떠나서 지금의 나의 심회는 솔직하게 똑바로 솟아오른다. 사람이란 진실을 말하기가 하늘의 별을 따기보다도 어렵다 . 마음속과 입 밖에 내놓는 말과의 사이에는 항상 거리가 있다 . 이제 천한 지어미에 만족하는 나의 고백은 영웅의 투갑을 버릴 때에 사람의 마음이 이렇게까지 진실하게 됨은 대체 무슨 까닭인고 . 높은 창에 비치는 별을 바라보면서 괴롭게 몸을 뒤틀고 앉았 을 남편의 꼴을 생각하니 이 마음 쓰리고 안타깝다 . 별이라니 벌써 가을 하늘에 별이 총총 돋았네 . 저것이 '오리온'인가. 빛이 제일 청청하고 밝으면서도 일상 청승 맞고 처량한 것이 저 별이야 . 견우와 직년성——긴 강을 사이에 두고 오늘 밤에는 왜 저리 흐리고 슬픈 꼴을 지니고 있는가 . 서로 빤히 건너다보면서도 해를 두고 서로 보지도못하는 이 땅위의 인간은 어쩌란말인고 . 방에 누인 어린 것이 몹시 울고 있네 . 어는 틈에 깨어났노 . 아비를 알 나이에 얼굴조차 모르고 지내는 어린것 의 꼴이 울 때에는 한층 측은히 생각된다 . 젖도 벌써 이렇게 졌네 . 가난한 젖이나 먹고 무럭무럭 자라기나 하여라 . 별안간 요란한이벌레소리 ! 가을 벌레는 무슨 까닭으로 이렇게 청승맞은가 . 모르는 결에 내린 이슬에 전신이 젖었구나 . 이슬이 논고 하늘이맑고 밤이 차건만 나의 몸은 아직도 덥다 . 화단 위의 샐비어는밤 기 운에 오므라졌건만 나의 마음의 붉은 꽃은 아직까지도 조개같이 방긋이 열린 채 닫히지 않는구나 . 익을대로익은능금송이 같은새빨간 별이열린조개틈으로 엿보고 있다 . 그가 그 밑에 잠들어 있을 먼 남쪽 하늘이 붉게타오르누나 . 그렇게 맑던 하늘이 아니 그것이 정말인가 나의 눈의 착각인가 . 왜 이리 정신이 어지러운 가. 이러다가 마치지나 않을까 . 머릿속이 어질한 품이 크게 병들 것도 같다 . 괴로 운 이 밤을 또 어떻게 새우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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