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사담집 1/거타지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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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진성여왕(眞聖女王)때의 일이다.

이 왕의 막내아드님 아찬 양패공(阿■ 良具公)이 명을 받들 고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다.

왕사의 탄 배는 순풍에 돛을 달고 어기어차 어기어차 서쪽 을 향하여 항행을 계속하고 있었다.

명나라로 가자면 지리상(地理上)으로 별수없이 백제의 연안 을 거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해적이 연변에 성하다는 소문이 신라까지도 높이 들리므로 왕사의 배에는 호위하는 궁사(弓士)가 오십인이 동 승을 하였다. 이리하여 왕사와 및 호위 궁사들을 실은 배는 순풍을 받아가지고 일변 연변을 경계하면서 서쪽으로 서쪽 으로 길을 채고 있었다.

그들의 탄 배는 무사히 항해를 계속하여 혹도(鵠島) 근처에 까지 이르렀다.

혹도의 근처를 지나갈 때에 배의 항로를 지휘하고 있던 늙 은 사공은 이마에 손을 얹고 멀리 동남쪽을 바라보고 있다 가 눈살을 찌푸렸다.

손바닥만 하게 동남쪽 수평선 위에 걸려 있는 한 조각 구 름─ 그러나 노련한 사공의 눈에는 그 한 조각 구름이 인제 일으킬 천지의 조화를 넉넉히 알아보았다.

『폭풍이 있겠군.』

배를 어서 혹도로 갖다 대어라. 저 한 조각 구름이 천지를 뒤집어 놓기 전에 어서 피난의 준비를 하자.

『키를 북쪽으로 돌려라.』

노련한 사공의 명령에 뭇 사공은 힘을 아울러서 대자연의 폭위에 어서 피하려고 서둘기 시작하였다.

손바닥만하게 보이던 구름조각은 삽시간에 커지고 넓어졌 다.

이런 자연의 변화에 사람보다도 민감한 갈매기며 그밖 물 새들은 벌써 이 폭우를 피하고자 죽지가 부러질 듯이 힘을 다하여 육지로 피난의 길을 빨리하고 있다.

아직 대낮인에도 캄캄한 천지에는 흰 물결만이 빛나고 극 도로 낮게 된 하늘에서는 금방 폭우가 쏟아질 듯한 가운데 서 이 왕사의 탄 배는 사공의 노래 우렁차게 대자연의 폭우 를 피하여 섬으로 섬으로 길을 채고 있었다.

우덕덕!

한 방울 빗소리가 대폭우의 전주곡이었다.

우덕덕─ 한 방울 떨어진 듯한 다음 순간은 벌써 쏴 하니 온 바다는 소낙비 아래 잠겨 버렸다.

세찬 소낙비였다. 아직껏 바다에서 일던 물결까지도 하늘 에서 내리는 소낙비 아래는 항복을 하는 듯이 이젠 일어설 생각도 못하였다. 쏟아지는 소낙비 아래 온 바다는 덮이고 눌리어 버렸다.

이 폭우의 해상에 작다만 배 한 척은 갈팡질팡하고 있었 다.

그러나 이 배는 종내 파선치 않고 혹도 연변에까지 이르렀 다.

그 날 저녁과 온 밤을 이 대자연의 폭우와 싸우고 싸우면 서 겨우 섬에까지 이르기는 이르렀다. 그러나 섬에까지 이 른 때는 사공 이하 궁사며 왕사까지도 모두 더 기운을 쓰기 못할이만치 피곤한 때였다. 처음에는 사공들끼리 어떻게 피 해 보려고 배를 부려 보았지만 사공들만으로는 당할 수가 없기 때문에 궁사 왕사까지도 조력을 한 것이었다. 이리하 여 겨우 섬에까지 이르기는 하였다.

그러나 폭풍우는 멎지 않았다.

하루, 이틀, 사흘, 폭풍우는 그냥 계속되었다. 온 하늘을 가 득히 덮은 검은 구름은 언제 벗겨질는지 기약을 할 수가 없 었다.

나흘, 닷새, 엿새…

그냥 계속되는 폭풍우!

사공은 머리를 기울였다. 바다의 폭풍우는 하루 한 때의 것이어늘 이 폭풍우는 며칠을 지날지라도 갤 가망이 없었 다. 오십여 년을 바다를 벗하여 바다에서 자란 늙은 사공도 연하여 머리를 기울이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레, 여드레, 아흐레…

그냥 계속되는 폭풍우였다.

『전하, 이상합니다.』

사공은 드디어 양패공께 여쭈었다.

『이상하단?』

『이것은 보통 폭풍우가 아닌 듯 싶습니다.』

『그럼?』

『용신(龍神)의 노염이 아닌가 하옵니다.』

이렇게밖에는 해석할 수가 없는 기괴한 긴 비였다.

양패공도 그럴 듯이 여기어 점을 쳐보게 하매, 아니나 다 를까 이 섬에 신지(神池)가 있으니 그 못에 제사를 드리어야 하겠다 하는 것이었다.

그 날 비를 무릅쓰고 그 신지에 제사를 드렸다. 양패공 자 신이 제주가 되어 가지고 지성의 제사를 드린 것이다.

그 밤 양패공은 이상한 꿈을 꾸었다. 꿈에 허연 노인이 하 나 침두에 나타나서,

『명궁(名弓) 한 사람을 이 섬에 남겨 두면 능히 순풍을 얻 으리라.』

하는 것이었다.

밝는 날 수행원들에게 이 일을 의논하였다. 그리고 불공평 이 없게 하기 위하여 나무 조각 오십 개를 만들어서 오십 명의 이름을 한 개에 하나씩 써서 이 나무를 물에 던지기로 하였다.

쏟아지는 폭우 아래서 바다에 던져진 오십 개의 나뭇개비─

오십 개의 나뭇개비는 물결 위에서 춤추었다. 물결 위에서 어지러이 춤추던 오십 개의 나뭇개비 가운에서 문득 한 개 가 쑥 바다물에 빨리어 잠겨들어갔다. 그리고 그 나무가 빨 려 들어간 자리는 잠시 구멍이 그냥 남고 좌우쪽에서 물결 이 용솟음치고 있었다.

조사하여 보니 거타지(居陀知)라는 궁사의 이름을 쓴 나무 였다.

이 오십 명 궁사 중에서도 가장 강궁(强弓)이요, 명궁으로 이름 있는 거타지였다.

제비에 뽑힌 거타지가 애용하던 화살을 가지고 배에서 섬 으로 내리매 이상하다, 아직껏 쏟아지던 소낙비가 순식간에 멎고 한 점 광풍에 하늘의 검은 구름도 차차 갈라지기 시작 하였다.

이리하여 왕사의 배는 거타지를 섬에 남기고 순풍을 받아 가지고 당나라 서울로 다시 항해를 계속하였다. 그리고 거 타지는 화살을 등에 지고 무인 고도에 혼자 남았다.

양패공이 이하 동행 동관을 먼저 보낸 거타지는 홀로 고도 에 떨어졌다.

방금 전까지도 쏟아지던 소낙비가 멎고 기름같이 잔잔한 바다를 순풍을 받아가지고 당경으로 향하여 차차 멀어가는 배를 거타지는 적적한 마음으로 해안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무인 고도에 혼자 남은 거타지, 활로써 당할 일이라면 무 서울 바가 없지만 그래도 홀로 남아 있노라니 무시무시하였 다. 수평선 뒤로 차차 넘어가는 동료의 배를 멀리 바라볼 때에 앞 일이 한심하고 딱하였다. 혼자 남기는 남았지만 무 슨 필요며 무슨 연유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제길!』

귀신이고 여수고 호랑이고 무엇이고 간에 나오너라. 어서 나오너라. 귀신이면 잡아서 말동무라도 하리라. 짐승이거든 잡아 요기라도 하리라. 이만한 배짱으로 한심스러이 있노라 는데 어느 문득 뒤에서 무슨 기척이 들렸다.

무엇이냐? 무인 고도에 사람이 있을 까닭이 없다. 거타지 는 머리가 쭈뼛하며 홱 돌아섰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거타지의 한 십 여보 뒤에 서 있었 다. 애원하는 눈초리였다.

『웬 노인이오?』

『빈 노는 사람이 아니라 이 신지의 용이올시다. 궁사께 한 가지 소원이 있어서 부러 궁사를 이 곳에 머무시도록 한 것이올시다.』

소원! 악의는 없는 모양이다.

『소원이란 무엇이오니까? 나로서 당할 수 있는 일이면 해 봅시다.』

『다름이 아니라, 빈 노는 이 신지의 주인으로서 일족 수 십 인이 이 못에서 살고 있었는데, 수일 전부터 웬 난데 없 는 사미(沙彌)기 해 뜰녘마다 하늘에서 내려와서 다라니(陀 羅尼)를 외며 이 못을 세바퀴 돌면 그 신통력으로 우리 일 족은 저절로 물 위에 떠오르며, 그러면은 사미는 그 가운데 서 살진 자로 하나씩 잡아먹고 하여 수십 명의 일족이 다 없어지고 인젠 우리 늙은 내외와 한 딸이 만날 남아 있을 뿐이올시다. 일찌기 거타지 궁사의 높으신 이름을 들은 지 오랬더니 지금 왕사에 백종해서 이 앞바다를 지나가신다기 에 우리 남은 일족을 구원해 줍시사고 궁사를 이 곳에 머물 도록 한 것이올시다. 소원이로소이다. 구원해 주십사.』

늙은 눈에서는 눈물까지 흐른다. 거타지의 마음도 저으기 움직였다.

『부족하오나 도와드릴 생각은 간절하외다마는 어떻게 하 면 되리까?』

『네, 사미는 내일 해 뜰녘에 또 내려올터이오니 궁사께서 는 어디 숨어 계시다가 활로써 사미를 쏘아 주시면 될 일이 로소이다.』

『어렵지 않은 일, 해봅시다. 활에는 자신 있는 몸이니 활 로 될 일이면 아무 염려 마시오. 그럼 밝는 날 내게 사례하 실 준비나 잘 해 두십시오.』

팔을 두드리며 승낙하는 거타지에게 노인은 눈물로써 사례 를 하고 그냥 사라져 버렸다.

그 밤은 순식간에 넘어갔다. 바위 틈에서 한참을 잔 거타 지는 새벽 새의 지저귀는 소리에 눈을 떴다. 뜨고보니 바야 흐로 웃음 띤 아침 해가 동녘 바다 위로 불그스름하게 그 자태를 나타내려 한다.

『해 뜰녘이로구나. 어디 보자.』

한 번 활짝 기지개를 하고 눈을 신지로 옮길 때에 거타지 는 보았다.

기괴한 일이었다. 한 사미가 하늘에서 학과 같이 못가에 날아 내렸다. 못가에 내린 사미는 다라니를 입 속으로 외면 서 발걸음을 천천히 못가를 세 번 돌았다. 즉, 못물이 홀연 히 술렁술렁 끓기 시작하더니 용 셋이 불끈하니 물 위에 떠 올랐다. 그 떠오른 용에게 사미가 손짓을 하매 지남석에 끌 리는 쇠와 같이 용은 저절로 사미가 서 있는 못가로 빨려 왔다.

이 기이한 일을 거타지는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가 바야흐로 사미가 손을 펴서 한 마리의 용을 끌어내려 할 때야 펄떡 정신을 차리어 활에 살을 메었다.

구부러져 들어가는 활─ 탁 손을 놓을 때에 활에서 떠나는 살.

명궁의 이름 높은 거타지의 활에는 실수가 없었다. 살이 우는 소리가 난 다음 순간 바야흐로 용을 잡으려던 사미는 기괴한 부르짖음을 내며 못가에 거꾸러졌다. 그의 가슴에는 살이 깊이 박혔다.

거타지는 손을 한번 활활 털고 일어나서 사미의 거꾸러진 곳으로 가 보았다. 가 보매 순간 전까지 사미로 보이던 그 괴물은 한 마리의 늙은 여우(狐)였다. 가슴에 살을 받고 여 우는 피를 쏟으며 거꾸러졌고 그의 가슴과 다리는 지금도 약간 푸들 푸들 떨린다.

『궁사, 고맙습니다.』

돌아보니 어제의 노인이다. 늙은 마누라도 곁에 함께 꿇어 엎드렸다. 그의 딸(이팔이나 이구의), 그림과 같고 꽃과 같 은 한 개의 처녀도 함께 꿇어 엎드렸다.

『무엇이라 사례를 드리리까? 재생의 은혜, 무엇으로 갚으 리까?』

학학 흐르는 눈물.

『이 재생의 은혜를 어찌 갚을지 갚을 도리가 없읍니다.

꿇어 앉은 이 계집애, 미련하옵지만 거두어 주시면 일생을 궁사께 시중들어서 은혜를 만분의 일이라도 갚을까 하옵니 다.』

보매 만고의 절색이었다. 젊은 궁사 거타지의 마음이 아니 움직일 수가 없었다.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로소이다. 미련한 인간이 어찌 용 종(龍鐘)을 감히 거느리까만 만약 노인께서 주신다면 결코 사양치는 않으오리다.』

이리하여 거타지는 용녀를 아내로 얻게 되었다.

먼 길에 아녀자 대행이 불편하리라 하여 노용은 자기의 딸 을 한 송이 꽃으로 변하게 하여 휴대에 편하게 하였다. 가 슴에 품고 먼저 간 왕사 일행의 뒤를 따르고 다시 물길을 떠났다.

두 용의 호위 아래 거타지의 탄 배는 나는 듯이 먼저 간 배를 따라갔다. 그리고 그 배를 따른 뒤에도 용은 떠나지 않고 왕사의 배를 호위하여 당경에까지 무사히 갔다. 당경 에서는 이 신라 사신의 배가 용의 호위를 받고 왔다고 신라 사신은 보통 범상한 사람이 아니라고 그 대접이 아주 융숭 하였다.

이 가운데 끼여서 가슴에 명화를 품은 거타지는 혼자서 늘 벙글벙글 웃고 있었다.

사람 안 보는 곳에서는 가슴의 꽃을 꺼내 가지고 들여다보 면서 웃곤 하였다. 남이 보는 곳에서는 차마 꽃을 볼 수가 없어서 가슴에 깊이 품고 혼자 기뻐하곤 하였다.

그 날 무인 고도에서 본 바 그 만고의 절색, 지금 한 가지 의 꽃으로 변하여 자기의 가슴속에 숨어 있지만 장차 철이 이르면 다시 화하여 한 개 미녀로서─ 더구나 자기의 아내 로서 일생을 자기와 같이 지낼 것을 생각하면 웃음이 절로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명을 다하고 어서 바삐 귀국하는 날을 거타지는 목을 길 게 하여 기다렸다. 일각이 여삼추라 하지만 거타지에게는 일각이 여삼 십추 이상이었다.

당나라 황제의 융숭한 대접을 받고 사명을 다한 뒤에 양패 공의 일행은 당경을 떠나서 다시 고국 신라로 향하였다.

이 사신의 배가 한 바다로 뜨자 역시 두 마리의 용이 홀연 히 나타나서 좌우 편에서 호위를 하여 주었다.

용의 호위 아래 한 번의 물결의 위협도 받지 않고 쏜살같 이 바다를 건너고 백제 연안을 거치어서 신라로 돌아왔다.

서울로 돌아온 거타지─ 발걸음이 땅에 닿는 듯 마는 듯 집으로 달려와서 가슴에 품었던 꽃을 내놓았다.

『자, 마누라!』

부르기가 어색하였다. 이 부름 아래 꽃은 홀연히 화하여 한 개의 절세 미색으로─

『여보세요.』

『아아, 마누라!』

서로 바라보는 눈─ 그 사이, 그리고 그리고 켱기고 사모 하던 눈이었다.

이리하여 이 연남연녀의 행복된 살림은 전개되었다. 절세 의 미색을 아내를 맞은 남편과 재생의 은인을 남편으로 맞 은 아내의 살림은 길이길이 즐겁고 행복되었다.

(一九四四年 六月 <朝光> 所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