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사담집 2/편주의 가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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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의 정기를 한몸에 지니고 기다랗게 벋어 내려오던 산맥이 한 군데 맺힌 곳- 거기는 봉오리를 구름 위로 솟고 널따랗게 벌여 있는 태백산이 있다.

이 태백산 아래 자리를 잡고 한 개 나라를 건설하고 나라 이름을 동부여(東扶餘)라 한 금와왕 때에 금와왕에게 사랑을 받는 소년이 있었다.

고주몽이라는 소년이었다. 일곱 살 때부터 활쏘기와 말달리기로써 어른이 능히 대적치 못할 기능을 보여서 사람들을 놀라게 한 기이한 소년이었다.

이 소년이 벌에서 말을 달리며 눈을 들어서 멀리 서편 쪽 하늘 닿는 곳의 산야를 바라보며 웅심(雄心)을 기르기 십수 년 드디어 기회를 얻어서 지금껏 몸을 의탁하고 있던 동부여를 등지고 서로 달아와서 거기 새로이 한 나라를 이루고 고구려라 정하였다.

고주몽의 이룩한 고구려가 차차 자리를 든든히 잡을 동안 주몽의 작은 아들 온조(溫祚)는 자기의 아버지의 나라에 머물러 있기를 꺼리어서 몇 몇 신임하는 신하를 이끌고 스스로 또 다른 나라를 건설하려 주인 없는 땅을 고르려 남쪽으로- 남쪽으로 내려왔다.

이리하여 하남 위례성(河南 慰禮城)까지 내려와서 거기서 기름진 땅을 얻어서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백제라 하였다.

이리하여 시조 온조왕에서 비롯하여 제이대 다루(多婁)왕을 걸쳐서 삼대 기루(己婁)왕을 지나서 제사대 개루(蓋婁)왕의 시대.

말하자면 온조왕이 백제를 건국한 뒤 대략 백오십 년쯤 지난 뒤의 일이다.

한 국가가 서서 일백오십 년이나 지나면 그때는 모든 것이 다 정체가 되고 건국 초의 긴장도 풀려서 태평 시대다운 사건이 많이 생겨 나는 것이다.

개루왕의 망령 때문에 생겨 난 한 개 비극도 건국의 긴장이 풀리기 때문에 생겨 난 것이다.


이 개루왕이 즉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어떤 해 가을이었다.

벌에는 오곡이 무르익고 백성들은 배를 두드리며 이 성대를 축하하는 어떤 즐거운 가을날 백제 서울 어떤 한가한 모퉁이에 노파 서넛이 앉아서 서로 쓸데없는 이야기를 주고받고 한다.

사실 아무 모에도 쓸데가 없는 한담들이었다. 누가 계집애만 다섯째 낳고 누가 시집을 가고 뉘집 며느리가 어떻고 뉘집 과부가 어떻고 말하자면 이런 노파들이 모여앉으면 저절로 입에서 흘러나오는 부질없는 이야기들이었다.

한참 서로 이런 부질없는 이야기들만 하다가 한 노파가 맞은편을 바라보고, 눈을 한 번 질긋 하고 다른 노파들에게 무슨 눈짓을 한다.

다른 노파들은 이 노파가 본 곳을 일제히 돌아보았다.

웬 한 젊은 여인이 지나가는 것이었다. 그 젊은 여인은 노파들과도 면식이 있는 모양으로써 노파들한테 미소를 하며 인사를 던졌다.

"아지먼네들 안녕합서요?"

"응 어디 가는 길인가?"

"잠깐 마실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야요."

"그럴듯하이. 걸음걸이가 발이 땅에 붙지 않는 품이 어서 가서 그 지아비 품에 안기려구 빨리 가는 게 분명하이."

"아지머니두. 그럼 앉아 말씀들 하세요."

"어서 가게 돌부리 차지 말고."

놀랍도록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여인이었다. 그 놀랍도록 아름다운 얼굴에 달린 놀랍도록 아름다운 눈으로 노파들을 한 번 흘긴 뒤에 자기의 가던 길로 가 버렸다.

노파들은 모두 눈을 몹고 여인의 뒤를 바라보았다. 여인이 길 모퉁이로 사라져 안 보이게 된 뒤에야 비로소 모두 얼굴을 바로 하였다.

"언제 보아도 이뻐."

"장안 일색이야"

그들의 한담은 이번은 젊은 그 여인에게로 돌아섰다.

"처녀 적보다 시집가서 더 이뻐졌거든."

"시집간 지도 이럭저럭 벌써 오 년이지?"

"참 장안이 넓다 해두 저만한 색시는 또 없어. 나무랄 데가 없단 말이야."

"얼굴도 이쁘거니와 마음씨가 더 고와. 시집간 지 오 년에 이렇단 말 한 번도 내 본 적이 없고."

칭찬뿐이었다.

말하자면 얼굴도 곱거니와 마음씨도 곱고 흠할 데 없다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노파들에게 흠잡힐 곳이 없는 사람은 쉽지 않다.

"도미(都彌)에겐 과해."

"아깝구 말구. 가세도 넉넉지 못하지. 게다가 집안도 미천하지. 학(鶴)이 닭에게 시집간 셈이다."

"그래 옳은 말이야."


도미(都彌)의 안해.

이 존재는 백제 서울에는 당시 한 큰 이야깃거리로 되어 있었다.

절세의 미색 도미의 안해는 일찍 처녀 시절부터 이야깃거리가 되어 왔다.

장차 누구의 안해가 되려느냐.

위로는 왕족으로부터 아래는 서민에 이르기까지 수없는 사내가 이 처녀를 얻기 위하여 장가를 안 들고 혹은 약혼을 깨뜨리고 혹은 기처를 하고 경쟁들을 하였다. 한 개의 미천한 집에 딸이었지만 너무도 뛰어난 미모 때문에 이름이 장안을 덮었다. 그리고 그 집 대문 밖은 마치 저자와 같이 만날 젊은 사내들이 우글우글 하였다. 그리고 그 인기가 너무도 굉장하기 때문에 온 장안 백성은 호기의 눈으로 이 처녀가 장차 어떤 곳으로 시집가나 주시하였다.

그랬는데 그 처녀가 골라 낸 남편은 의외의 사람이었다. 그가 마음만 내면 왕후장상에게도 능히 갈 수가 있을 것이요 어떠한 부요한 집에라도 갈 수 있을 것이어늘 그가 골라 낸 것은 도미라는 한 미천한 사내였다.

집안도 보잘것 없었다. 가세도 보잘것 없었다. 그렇다고 도미 당자가 또한 뛰어난 인물에 혹하여 갔는가 하면 그도 그렇지 않았다. 도미라는 인물은 아무 보잘것도 없는 한 평범한 사나이였다.

장안은 모두 입을 딱 벌렸다. 방맞은 사내들은 주먹을 휘둘렀다.

"훌륭한 데 가서 평범하게 지내는 것보다는 평범한 데 가서 훌륭하게 지내겠읍니다."

이것이 도미에게로 시집갈 때에 제 부모에게 한 말이었다.

그러나 장안 모든 사람들은 그 말뜻을 잘 알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의 결혼은 불행한 결말을 맺으려니 하였다. 그만큼 뛰어난 인물의 계집이 아무 보잘것 없는 도미의 집에 만족해 할 리가 없다. 지금 철없이 가기는 했지만 얼마를 못 살고 다시 돌아올 것이라 하였다.

그들의 상식으로 보자면 그렇게밖에 해석할 수가 없었다. 지금도 수없는 훌륭한 도령님 서방님들이 연하여 유혹의 눈을 던지는데 평범하고 보잘것 없고 가난한 도미의 집에 끝까지 붙어 있을 이치가 없다는 것이었다.


시집간 지 일 년이 지났다.

현처(賢妻)의 소문이 차차 밖으로 새어 나왔다. 가난한 살림살이를 맡아 가지고 한 마디의 불평도 없이 집안을 다스리고 남편을 섬기고 잘 산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길씸 좋은 장안 사람들은 그래도 감시의 눈을 게을리지 않았다.

"일 년쯤이야 아직 아무것도 모르지. 인제부터야 차차 싫증이 날 테지."

자기네의 경험에 미루어 이렇게 비평하고 감시하였다.

또 일 년이 지났다.

현처의 소문은 차차 높아 갔다. 시집온 지 이 년 그 새 수없는 유혹의 손끝이 그를 불러도 보았으며 수없는 유혹물이 그를 달래도 보았지만 눈 한번 거듭떠 보지 않고 가난한 제 집안을 아름답게 꾸미기에 열중이라 한다.

삼 년도 지났다.

사 년도 지났다.

인젠 유혹의 손도 감히 그의 곁에 이르지 못하였다. 열 번 찍어서 꺽이지 않는 나무가 없다지만 도미의 안해뿐은 천 번을 찍을지라도 꺽이지 않을 것을 인젠 알았으므로 헛된 노력은 인젠 중지한 것이었다.

동시에 도미의 안해의 정절과 미모에 대한 칭찬이 차차 장안에 퍼지기 시작하였다.

"얼굴과 마음이 똑같은 만고일색이야."

다른 점으로는 아무 보잘것도 없는 도미의 집안이언만 그 안해의 덕으로 장안에 이름높은 집안이 되었다. 장안 사람 치고 도미의 집이라면 인젠 모를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그 소문은 퍼지고 퍼져서 백제 전국에 꽤 유명한 집안으로 이름났다.

"평범한 집안에 가서 훌륭하게 살겠읍니다."

과연 평범한 집안에 갔기에 그 집안에 명성이 퍼졌지 좀 웬만한 집안에 갔더면 그 집의 한 며느리로서 장안에서는 벌써 잊히어 버린 지가 오랬을 것이다.

이리하여 도미의 집안은 나날이 유명해지어서 가세와 문벌은 보잘것이 없지만 이름 높기로는 어느 재상의 집안보다도 나았다.


도미의 안해의 소문은 드디어 대궐 안에까지 들어갔다. 국가 창건도 제삼대까지 지나서 제사대쯤부터는 저으기 긴장미도 잃고 차차 안일(安逸)을 즐기게 되는 때 국왕 개루(蓋婁)도 어리석다든가 포악하다든가 하는 왕은 아니었으나 태평 시대의 임군으로서 많은 궁녀를 두고 한가로운 그날그날을 술과 놀이로 보내는 그런 종류의 왕이었다. 그리고 많은 궁녀를 지내 보았으니만치 여인에게 대하여 자가 독특의 견해도 가지고 있는 왕이었다.

어떤 날, 그 날도 신하들과 역시 연회를 열고 계집들을 늘이어 놓고 놀 때에 말말결에 신하들에게서 도미의 안해의 평판을 들은 왕은 처음에 웃어 버렸다.

"하하하하 여편네에게 대체 정절이라는 게 어디 있소."

여기 대하여 약간의 반대의 의사를 표한 것은 일찍이 도미의 안해의 정절을 매우 아름답게 보던 노신이었다.

"젛사오나 도미의 안해만은 아마 세상 보통의 여인과 좀 다른 데가 있는 모양이옵니다."

"그게야 아직 톡톡한 유혹을 겪지 못했기에 그렇겠지. 혹은 조용한 곳에 은근히 유혹을 받아 보거나 혹은 눈에 현혹되는 보물로써 유혹을 받아 본 일이 없기에 그렇겠지."

"똑똑히 알지 못하옵거니와 조용한 곳에서도 적지 않은 유혹을 받아 보았다는 모양이옵니다."

이러한 말이 오고가는 동안에 왕은 지금 너무도 세상 평판이 높은 소위 도미의 안해의 정절이 얼마나 한 것인지 시험하여 보고 싶은 생각이 일어났다.

여자에게 정절이 대체 뭐냐. 그것은 톡톡한 유혹을 겪어 보지 못하였기에 정절이라는 것이 있지 왕의 영화 후궁의 영광으로 유혹해도 그냥 굽히지 않을 계집이 어디 있겠느냐.

이 태평 시대에 전형적 임군 개루왕은 이리하여 도미의 안해를 시험하면 제아무리 정절로 이름 놓은 계집일지라도 넉넉히 꺽을 수 있을 것으로 깊이 믿고 성사가 되겠느냐 안 되겠느냐 하는 문제를 내걸고 신하들과 내기를 걸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남편 도미가 갑자기 어전에 불리었다.

한미한 집안에서 생장한 도미는 어전에 불릴 일이라고는 손톱만치도 없었다. 그래서 무슨 일인지를 모르고 황급히 왕사에게 이끌리어 입궐하였다.

감히 눈을 뜨지도 못하고 어전에 꿇어 엎드려 몸만 벌벌 떨고 있는 도미에게 향하여 왕이 직접으로 내린 첫말.

"네가 도미라는 백성이냐."

"황공무지하옵니다."

"네 안해가 정절이 높다고 그 소문이 내 귀에까지 들려와. 사실로 그렇듯 정절이 높으냐."

"황공하옵니다. 변변치 않은 계집의 소문이 구중까지 넘어들어와 어이를 더럽힌 죄를 무에라 아뢰올 말씀이 없사옵니다."

"그러면 사실 그렇듯 정절하단 말이냐."

"세상이 모두 그렇다 하옵니다."

"너도 그렇게 믿느냐?"

"소신도 그렇게 믿사옵니다."

"믿어?"

왕은 미소하였다.

"네 믿는다는 뜻은 대체 계집에게 정절이라는 것이 있다고 믿는다는 말이냐 혹은 네 안해에 한해서는 정절이 있다고 믿는다는 말이냐."

"젛사옵니다마는 천하의 여인이 다 부정하다 할지라도 소신의 계집만은 정절하리라고 소신은 믿사옵니다."

과거 오 개년의 경험에 미룬 자신 있는 대답이었다.

이 너무도 자신있는 대답에 왕은 잠시는 먹먹히 도미를 굽어보고만 있다가야 입을 열었다.

"조용한 곳에서 은근히 꾀어도 안 넘어갈 듯싶으냐."

"네이."

"권세와 영화로 꾀어도 그냥 지킬 듯싶으냐."

"네이."

"권력으로 억압해도?"

"그래도 소신의 계집만은 안 넘어가리라고 굳게 믿사옵니다."

"그 세 가지를 다 병해서 꾀어도?"

"네이."

"응 물러가거라. 좋은 안해를 두어서 너도 기쁘리라."

그리고 그 날 도미는 어명으로 대궐에 그냥 머물러 두고 잡역을 시켰다.

왕은 도미를 물러가게 한 뒤에 당신과 외양이 비슷한 신하 한 사람을 불렀다. 그리고 그 신하에게 당신의 의대를 한 벌 내어주고 노부(鹵簿)까지 빌려 주어서 그 신하로 하여금 왕으로 가장을 하고 왕인 체하고 도미의 안해를 유혹하여 보라는 것이었다.

신하야말로 꿩먹고 알먹게 되었다. 하룻밤이나마 왕의 행세를 할 특권을 얻은 위에 또한 절세의 미인이라는 도미의 안해를 재간껏 달래 볼 권한까지 받은 것이었다.

그날 밤 이 거짓왕의 노부는 대궐을 떠나서 주인 없는 도미의 집으로 향하였다.


남편이 대궐에 불리어 간 뒤에 무슨 영문인지 몰라서 안해는 매우 근심하였다. 그리고 이제나 저제나 하고 남편이 대궐에서 나오기만 눈이 빠지게 기다렸다.

바싹 소리만 나도 남편이 아닌가 하고 내다보았다. 무슨 기척이 들릴 때마다 버선발로 뛰어나가 보았다.

그러나 낮에 들어간 남편은 저녁이 되고 날이 어두워도 돌아오지 않았다.

한 사람의 계집종과 함께 문에 불을 켜 달고 남편 돌아오기를 기다릴 때에 뜻밖에도 왕의 거둥이 있은 것이다.

도미의 안해는 망지소조하였다. 어찌할 바를 몰라서 벌벌 떨며 뜰 한편 구석에 숨어 있었다.

궁액들이 먼저 와서 방안을 대강 정리한 뒤에 왕(거짓왕)은 방안에 자리잡았다. 그리고 도미의 안해를 불렀다.

도미의 안해는 뜰안에 불리어 나왔다. 마루 아래 국궁하고 선 그는 감히 머리를 들지 못하였다.

"네가 도미의 안해냐?"

왕의 하문이 이것이었다.

"네이."

"어디 머리를 들어라."

그러나 어전에 어찌 머리를 들랴. 그의 머리는 더욱 수그러질 뿐이었다.

"내가 네 집에 거둥한 것은 너를 보러 온 것이로다."

"…."

나를 보러? 소문이 대궐까지 들어가서 황공하게도 이렇듯 왕의 거둥까지 보게 되었나. 왕의 그 본다 하는 것은 다른 뜻을 포함한 것이 아닌가. 더구나 지금은 밤이로다. 단지 보기 위해서는 대궐로 불러서도 넉넉할 것이요 밤이 아닐지라도 좋은 것이어늘.

머리를 푹 숙이고 있는 도미의 안해의 가슴에는 천 가지 만 가지의 생각이 오락가락하였다.

가왕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봐라. 오늘 네 그 지아비를 대궐로 불러들인 것은 너도 알지."

"네이. 아옵니다."

"너는 그 지아비를 무엇으로 아느냐."

"네이. 하늘로 생각하옵니다."

"그 지아비의 뜻이면 어떤 것이든 따라야 하는 줄 아느냐."

"아옵나이다."

"네 뜻과 거슬리는 일이라도?"

"네이."

가왕은 미소하였다.

"그러면 너는 단장을 다시 하고 이 방으로 들어오너라."

"?"

"오늘 짐은 대궐에서 네 그 지아비와 장기를 두었다. 짐이 지면 네 그 지아비에게 높은 벼슬을 주기로 하고 짐이 이기면 짐이 하룻밤 네 그 지아비의 행세를 하기로 해서 짐이 이겼으니 네 그 지아비의 뜻이로다. 할 수 없다."

청천의 벽력이었다.

어의가 이럴진대 이를 어찌 피하나. 더구나 남편의 뜻이라 하여 강제하며 왕의 권력으로써 누르니 이를 어찌 모면하나?

슬기로운 도미의 안해이었으나 이 급박한 변에는 갑자기 좋은 수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어전에 국궁하고 선 그는 땀을 벌벌 흘렸다.

"네 뜻에는 비록 맞지 않을지라도 남편의 뜻이라면 시행하겠노라고 네 말로도 한 바로다. 자 어서 채비를 하여라."

꿩 먹고 알 먹을 심사의 이 가왕은 어서 이 미색을 품에 안아 보고자 독촉이 불 같았다. 이 급박한 경우에 당하여 도미의 안해는 드디어 솟아날 구녕을 발견하였다.

"어의가 그러하옵고 그 지아비의 뜻도 그러하올진대 소신이 어찌 감히 거역하오리까. 그러면 소신은 잠깐 머리를 빗고 어전에 뵙겠읍니다."

이리하여 그는 어전을 물러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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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전을 물러 나온 그는 계집종을 불러 가지고 건넌방으로 들어갔다.

"네가 오늘 밤 폐하를 모시어라. 아무리 어명이요 남편의 뜻이라 하나 어찌 두 그 지아비야 섬기겠느냐."

종에게 사유를 타이르고 이렇게 부탁할 때에 계집종은 쾌히 승낙을 하였다.

도미의 안해는 계집종을 힘과 재간을 다해서 단장시켰다. 머리를 크게 하고 얼굴을 절반을 가리고 분을 희게 바르고 연지를 크게 찍어서 할 수 있는껏 자기의 모습과 비슷하게 만들어 가지고 가왕의 좌정해 있는 방으로 들여 보냈다.

"결코 머리를 들지 마라. 눈을 뜨지 마라. 작은 소리로만 말하여라."

신신부탁을 하였다.

일찍이 도미의 안해를 본 일이 없고 다만 아까 캄캄한 뜰에 국궁하고 서있는 것을 본 뿐인 가왕은 이 단장하고 들어오는 미녀를 무론 도미의 안해로 알았다.

이리하여 한방에서는 거짓왕과 거짓도미의 안해가 함께 하룻밤을 지내는 동안 한편 방에서는 정말 도미의 안해가 이 가장극이 발각이나 되지 않을까하여 한잠도 이루지 못하고 떨며 지냈다.

도미의 집에서는 이러한 일이 진행되는 동안 대궐에 붙들려 있는 도미는 어떤 궁액(宮掖)에게서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 오늘 밤 왕께서 너의 집에 거둥하세서 너의 안해를 보신다.

도미는 이 소식을 듣고 가슴이 철석 하였다. 어떠한 영화로 유혹할지라도 혹은 어떠한 권력으로 위협할지라도 자기의 안해가 결코 굽히지 않을 것은 도미는 번히 아는 배다. 자기의 안해의 정절이 더럽혀지리라고 놀란 것이 아니었다.

그가 놀란 것은 자기의 안해의 생명 때문이었다. 왕령으로써 위협할 때에 이를 모면할 수가 없게 되면 자기의 안해는 반드시 스스로 제 목숨을 끊을 것이다. 목숨을 끊어서라도 제 정절은 지킬 것이다. 그리고 또한 아까 본바 왕의 태도로서는 어떻게 해서든 꺽어 보려고 할 것이다.

그러면 자기의 안해는 정녕코 죽을 것이다. 대궐에 붙들려 있는 몸이라 피하여 나갈 수는 없고 도미는 안타깝고 속상하여 밤새도록 혼자서 통곡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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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희극미(喜劇味)를 다분히 띤 비극의 밤도 어안간 밝았다.

하룻밤 국왕의 노릇을 한 위에 또한 절세의 미색을 품고 잤노라고 믿는 가왕은 득의양양하여 밝는 날 아침 입궐하여 어젯밤의 경과를 왕께 복주하였다.

왕은 절세의 미색을 당신이 품어 보지 못한 것이 얼마만치 아수하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자기의 의견이 맞기 때문에 매우 흡족하였다.

왕은 도미를 불렀다. 하룻밤을 울어 새기 때문에 눈이 뚱뚱 부은 도미는 어전에 부복하였다.

"네 어제 뭐라 했느냐."

"….

"운 모양이로구나. 왜 울었느냐."

"황송하오나 소신이 상배(喪配)를 하왔삽기 울었삽니다."

"상배라? 네 말이 옳다. 안해를 잃었으니 상배는 상배로다. 네 안해는 어젯밤부터는 짐의 후궁이로다."

"네?"

도미는 깜짝 놀랐다.

"놀라느냐. 놀라리라. 어리석은 사내야. 계집의 마음을 그렇듯도 믿었더냐. 네 계집은 어젯밤 단장 곱게 하고 짐의 침석에 들었다."

믿지 못할 말이었다. 그러나 이것을 농담으로야 어찌 볼까.

입을 악물고 머리를 숙이고 있는 도미의 사지는 사시나무와 같이 떨렸다.

격분과 비애의 떨림이었다.

"이 어리석은 사내야. 인젠 너의 집으로 물러가거라. 그러나 어제까지 네 안해이던 사람은 인젠 짐의 후궁이니까 그렇게 알고 예식범절에 소홀이 없도록 해야 한다."

이리하여 도미는 퇴궐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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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말을 믿을까. 그것을 농담으로 볼까. 왕이 자기 집까지 거둥하였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모양이다. 그러나 제 안해가 왕을 모셨다는 것은 아무리 하여도 믿기지 않는 말이었다.

아픈 가슴을 부둥켜안고 도미는 더벅더벅 제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매 안해는 여전히 기쁜 낯으로 맞아 준다.

도미는 들어와서 어젯밤의 경과를 듣고 무한히 눈물을 흘렸다.

그러면 그럴 것이다. 죽거나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모면을 했을 것이지 꺽이단 웬 말이냐.

왕의 영화가 무엇이냐.

왕의 권력이 무엇이냐.

자기의 안해가 정절을 꺽거나 굽힐 자는 이 세상에 하나도 없다.

안해의 앞에서 도미는 너무도 감격되고 고마워서 하염없이 울었다.

부처에서 서로 붙들고 한참을 서로 운 뒤에 그들은 오래간만에 만난 내외와 같이 힘있게 서로 쓸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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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러한 일이 영구히 탄로가 안 될 까닭이 없었다.

"왕은 도미의 안해의 꾀에 속았다."

이러한 소문이 어디서 나기 시작했는지 삽시간에 온 장안에 퍼졌다. 그리고 그 소문은 어언간에 대궐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왕은 이 소문을 듣고 격노하였다.

첫째로는 한 미천한 계집에게 속았다는 것이 분하였다. 둘째로는 한 미천한 계집이 외람되이도 왕을 속였다 하는 것이 괘씸하였다.

왕은 이 소문을 듣는 즉각으로 다시 도미를 대궐로 잡아들였다.

뜰 앞에 엎드린 도미에게 왕은 호령하였다.

"네가 네 죄를 아느냐?"

도미는 대답치 못하였다. 할 말이 없었다. 계집이 정절을 지켰다는 것이 과연 죄일까. 왕을 속였으니 혹은 죄도 될까. 부복한 도미는 묵묵히 있었다.

"아느냐 모르느냐."

"모르겠읍니다."

"몰라? 네 계집이 임군을 속인 것을 너는 모른단 말이냐?"

"소신의 계집이 어리석으와 그런 일이 생겼는가 하옵지만 천기를 거스르지 않았사오니 소신의 생각으로는 죄는 되지 않을까 하옵니다."

"이놈 무얼? 죄가 아니야."

"…."

"저놈을 국법에 의지해서 왕령을 어긴 죄로 두 눈알을 빼고 물에 띄워 내 버려라."

추상 같은 엄령이 내리었다 이리하여 도미는 아름다운 안해를 두었던 탓으로 두 눈알을 뽑히고 노며 치[舵]가 없는 작다란 배에 실리어 송파강(松波江) 물위에 정처없이 떠나게 되었다.

이렇게 도미를 처치한 뒤에 왕은 도미의 안해를 대궐로 불러들였다.

자기의 남편의 운명이 어찌됐는지 궁금하여 하던 안해는 대궐로 불리어서 비로소 자기 남편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알았다.

왕께서 직접 그 말을 들을 때에 눈이 아득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온갖 표정을 죽이고 이 뒤에 이를 박해와 싸우려 마음을 가다듬고 뒤를 기다렸다.

왕도 불러 놓고 보니 과연 미색이었다. 왕의 호탕한 마음은 저으기 움직였다. 이전에는 한 미천한 계집으로서 정절이니 무에니 하는 것이 아니꼬와서 그런 처분을 하였지마는 어전에 불러 놓고 보니 무럭무럭 욕심이 일어났다.

"아. 네 남편은 말한 바와 같이 국법에 의지해서 처형을 했다. 지금쯤은 멀리 어느 대해바다에 떠나갔을 게야. 그러니 너는 인젠 주인이 없는 몸이라 주인 없는 몸도 정절이 있어야느냐."

도미의 안해는 생각하였다. 지금 한 마디의 잘잘못으로 자기의 운명은 결정이 될 것이다. 잠시를 생각한 뒤에야 대답을 하였다.

"바칠 이가 있고서야 정절이 있삽지 바칠 이 없는 정절이 어디 있겠사옵니까?"

"그럼 너는 어떠냐."

"소신은 인제 정절 바칠 분을 새로이 구하여서 그 분께 다시 바치려 하옵니다."

"그러냐. 그러면 오늘부터는 짐의 후궁에 있거라."

좌우를 명하여 즉각으로 후궁으로 맞을 준비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여기서 도미의 안해는 다시 입을 열었다.

"폐하. 잠깐만 한 말씀을 올리게 허락해 줍시사."

"무슨 말이냐."

"소신이 지금 몸이 더러운 중에 있사오니 이삼 일의 수유만 주시오면 몸을 깨끗이 하고 그 뒤는 일평생을 폐하를 정절로 모시겠읍니다."

"그는 마음대로 하여라."


도미의 안해는 대궐에서 나왔다. 그러나 갈 데는 어디냐. 남편이 있었기에 집이지 남편이 없는 집에 무얼 하러 갈까.

그는 자기의 남편을 띄워 보냈다는 강변으로 달려갔다.

달려오기는 달려왔으나 남편의 배가 아직도 강변에 있을 리가 만무하였다.

푸르른 강물은 고요히 아래로 흘러내려갈 뿐이었다.

아아. 어찌하나. 집으로 돌아갔다가는 다시 대궐로 붙들려 갈지도 알 수 없다. 어쩔 바를 몰라서 그는 강변에 서서 넘어가는 황혼을 바라보며 통곡하였다.

한참을 통곡하다가 정신을 가다듬고 보니 저편 강가에 웬 자그마한 배 한 척이 주인 없이 떠 있는 것이 있다.

"옳다. 저 배를 타자. 저 배를 타고 물결이 흐르는 대로 흘러내려가자. 임께서 타고 내려가신 물결 뒤따라 가노라면 임을 만날 곳이 있을는지도 알 수 없다."

그는 그 배로 갔다. 그 배에 올라서 배를 언덕에서 띄웠다.


배는 물결을 따라서 아래로- 아래로 흘러갔다. 이리하여 물결에 흘려서 흘러내려가기를 얼마. 얼마를 내려가다가 배는 저 혼나 어디 걸려서 멈췄다.

신이 없이 배 안에 쓰러져 있던 도미의 안해는 배가 저절로 멎으므로 머리를 들어 보았다. 어느 섬에 걸린 것이었다.

모든 일이 다 귀찮은 그는 그냥 다시 누으려 하다가 저편에 좀 이상한 것이 보이므로 머리를 좀 들고 자세히 보았다.

그때는 새벽이었다. 새벽 어둠컴컴한 가운데 저편 섬 가운데서 무엇이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무슨 신음성까지도 약간 들렸다. 눈이 번쩍하여 다시 자세히 보니 그것은 분명히 사람이었다. 웬 사람이 섬 위에 쓰러져 혼자서 신음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가슴이 철석하였다. 그 사람을 그는 제 남편으로 보았다. 갑자기 맥이 하나도 없이 빠진 다리를 끄을고 달려가서 그 사람을 추켜들고 보니 과연 그것은 자기 남편에 틀림이 없었다.

"여보세요. 제가 왔읍니다. 당신의 안해 제가 왔읍니다."

"네?"

"저예요. 이게- 아아 하느님 맙시사."

눈알이 뽑힌 남편을 부둥켜안고 그는 통곡하였다.


그들은 거기서 나물을 캐어서 요기를 하였다. 그런 뒤에는 한많은 백제를 뒷발로 차고 고구려로 찾아들어가서 그들의 여생을 보냈다.

마음과 외모가 아울러 아름다운 안해의 부양으로 소경이나마 기쁨과 만족의 세월을 이 명군 치하의 고구려에서 길이길이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