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사담집 2/화하난무
「이시중(李侍中)이 급거히 해주서 돌아왔다.」
이 소식을 들은 날 밤, 정몽주(鄭夢周)는 난잠을 이루지 못 하였다.
왜 급히 돌아왔느냐?
명나라에 인사를 하러 갔다가 돌아오는 왕자를 맞으려 해 주까지 갔던 이시중은, 거기서 심심소일로 사냥을 즐기다가 실수하여 낙마를 하여 다리를 상하였다. 며칠간 해주에 누 워서 다리의 아픔을 좀 낫게 하여 가지고 돌아오는 것이 당 연하다. 그렇거늘 이시중은 급급히 왕도(王都)로 돌아온 것 이다. 여기서 몽주는 자기의 몸에 다닥쳐 오는 비상한 위험 을 직각하였다.
두 개의 세력대치─ 이시중의 세력과 몽주 자기의 세력의 대치─ 다시 말하자면 반역자의 세력과 애국자의 세력의 대 치─.
기울어지려는 나라의 운명을 오로지 자기의 늙은 어깨에 짊어지고, 쓰러지려는 국운을 어떻게든 다시 바로잡아 보려 는 자기의 노력과, 한편으로는 쓰러지려는 나라를 부숴 버 리고 다시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려는 이시중의 운동─ 이 두 가지의 운동이 차차 노골화하고 맹렬하여 갈 동안, 몽주 는 침식을 잊었다. 온갖 다른 일을 잊었다. 그리고 나날이 쇠약하여 가는 국운을 어떻게든 만회하여 보고자, 자기의 가진 힘을 다 썼다.
이시중의 세력이 너무도 강성하여 가므로 그것을 좀 꺾어 보고자 이번 시중이 해주로 내려간 기회를 타서 시중의 심 복지인인 남은(南誾), 정도전(鄭道傳) 등을 손빨리 조정에서 멀리하고, 나아가서는 시중까지도 어떻게든 처치하려고 꾀 하는 이때에, 시중이 급급히 해주에서 돌아온 것이었다.
시중이 이렇게 급급히 환경한 것은, 시중의 다섯번째 아들 이요, 지금의 이시중 일파의 운동의 참모격(參謀格)이 되는 방원(芳遠)이 밤을 세워서 자기의 아버지를 모시러 해주까지 갔던 때문이다. 방원이 출발한 것이 즉 조정에서 정도전, 남 은 등을 멀리한 그 날이었다.
이것으로 미루어 이번 시중이 급급히 돌아온 그 이유도 짐 작할 수가 있다.
아직껏 서로 암암리에 저편 세력을 꺾어 버리려던 두 개의 세력은 여기서 비로소 정면으로 충돌을 하게 된 것이다.
인제는 서로 비밀의 책동이라는 것이 필요가 없다. 이시중 이 돌아온 이상에는 당연히 시중이 잡은 군대의 위력으로써 자기에게 대할 것이다.
아직껏 숱한 노력으로서 자기를 반역당 가운데 끌어 넣고 자 운동하였지만, 인제부터는 자기와 표면으로 정면으로 충 돌을 하게 될 것이다.
늙은 이 몸을 나라를 위하여 바치는 것이 무엇이 아까우랴 만, 자기 한 사람만 없어지면 이 나라는 기름 마른 등잔같 이 꺼져 버릴 것이다. 태조 왕건 때부터 오백년에 가까운 날짜를 전면히 물려온 이 나라가 꺼져 없어져 버릴 것이다.
이거이 몽주에게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무서운 일이었다.
恭讓王 사 년 사 월─.
왕도에서 봄은 익어서, 먼 산은 저으기 자주빛이 돌아 보 이되, 조정의 두 개의 암류 때문에 갈피를 차리지 못하는 서민들의 마음에는 봄이 이르지 못하였다. 음침하고 암담한 봄이었다.
『적적한 봄이 아니냐?』
『추운 봄이옵니다.』
병 문안을 핑계삼아 이시중을 찾는 몽주─. 행차도 없이 간단히 녹사(綠事) 하나를 뒤에 달고, 음침한 봄의 길을 이 시중의 집으로….
이전 자기가 섬긴 삼대의 임금의 면영이 걸핏걸핏 몽주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사랑하는 비 노국공주를 잃고 외로운 여생을 보내다가 폐 신(嬖臣) 홍륜(洪倫)이며 최만생(崔萬生) 등에서 시를 당한 공민왕.
신씨(辛氏)라는 누명 아래 강화로 쫓겨 갔다가 참혹한 죽음 을 당한 우왕(禑王).
그의 아드님이요, 또한 이시중 때문에 참화를 본 창왕(昌 王).
상서롭지 못한 최후를 본 이 전 삼대의 임금의 지극히도 착하고 어질던 면영이 봄날 하늘 가에 나타나서 몽주의 마 음을 어지럽게 하였다.
북쪽을 찾아가는 기러기가 하늘을 길게 날고 있었다.
외로운 봄날─ 음침한 봄날─.
『환후가 좀 어떠시오?』
묻는 사람은 몽주였다.
『과하지는 않은 모양이외다.』
이시중 성계의 대답이었다.
바야흐로 행하려던 사람─ 방금 처치하기를 의논하던 사람 이 병 문안을 핑계삼아 찾아온 것이다.
그 학식, 그 견식, 그 인격─ 당대의 사표되는 인물이요, 만인의 존경을 받고 있는 인물인 이 몽주를, 물론 자기네의 당파 안에 끌어 넣을 수만 있으면 이 위에 더 양책은 없을 것이다. 몽주를 자기네의 당파에 끌어 넣기 위하여 그런 뜻 을 몽주에게 보일 때에, 몽주는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다시 죽어, 백골이 진토되고 넋이라도 있건 없건, 임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이 시조 한 마디로 왕씨의 사직에 대한 자기의 변함 없는 마음을 비추어 보인 것이었다. 이 왕씨의 사직에 대한 변함 없는 충성을 가지고 있는 몽주는, 이씨의 일파에게는 커다 란 난물이었다.
몽주를 그냥 두자면, 몽주에게 비록 군대의 위력은 없으나 마 만인의 존경을 받고 있는 재상이니만치 몽주의 생전에는 이 사직에는 흔들림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몽주를 없이하자니, 왕조에 이성된 몽주를 ■
「민심이 왕씨를 떠나서 이시중에게로 오기 때문에─ 」
─ 할 수 없이 왕씨의 사직을 없이하고 서서 왕이 되게 되 었다. 이러한 체재 좋은 구실을 꾸며 나가려는 이시중에게 있어서는 노골적으로 반역자란 이름은 또한 듣기가 역겨운 일이었다.
이리하여 이 괴로운 존재에 대하여 지금도 한참 의논을 거 듭할 때에 몽주가 병문안이라는 핑계로서 이 집에 뛰쳐들어 온 것이었다.
시중은 비교적 낭패하지 않았다. 그의 먹은 나이의 덕으로 마음의 낭패를 감추고 몽주를 맞았다. 그러나 시중의 다섯 째 아들 방원은 분명히 낭패하였다.
『과하지 않으시다니 천행이외다. 젊지도 않으신 몸, 어쩐 가 하고…』
『감사하회다.』
두어 마디의 인사가 사괴어졌다.
이윽고 몽주가 눈을 들었다. 아직 쉰 여섯, 그다지 늙은 축 은 아니로되, 자기의 어깨로 나라의 커다란 운명을 짊어지 고 그 때문에 많은 노심을 한 몽주는, 그 눈가에 벌써 육십 이 훨씬 넘은 듯한 ■
『그런데 대감.』
『예?』
『이번에 조준, 남은, 정도전 등 몇 사람을 조정에서 멀리 한 것을 대감도 들으셨겠지요?』
물론 들었다. 들었기에 밤을 도와서 서울로 달려온 것이다.
『들은 법하외다.』
『대감이 서울 계셨으면 당연히 대감과도 의논을 해 가지 고 처결을 할 일이지만, 대감은 멀리 계시고 의논할 사람은 없고… 혼자서 애를 썼소이다.』
『……?』
『더구나 그 사람들은 모두 대감께서 신임하시던 사람들─ 일이 급하지만 않으면 전인해서라도 대감과 의논을 할 것이 지만, 일은 급하고 그 위에 대감도 고려의 지주(支柱)시매, 나라를 위해서 한 마음해서는 그다지 나무람도 없으시리라 고 억단을 하고 혼자 생각으로 처치를 한 일인데 대감의 의 향은 어떠시오?』
남문이었다. 잘하였다고 하기는 싫은 일이었다. 이름을 <고 려에 대한 충성>에 붙였으매 못하였다고 비난도 못할 노릇 이었다. 시중은 잠시 뒤에 한 마디 의미 명료치 못하게,
『그렇겠지오.』
한 뿐이었다.
상서롭지 못한 일을 보았다.
몽주가 시중과 이야기를 하는 동안, 방원이 여러 번 들락 날락하였다. 밖에서 흥분돼서 수군거리는 소리도 간간 들렸 다. 방원과 그의 아버지 시중의 사이에 불길한 눈짓이 왔다 갔다 하는 것도 보았다.
무슨 불길한 계획이 진행되는 것이 분명하였다.
땅을 밟고 집에까지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까?
『너는 먼저 가거라.』
시중의 집에서 나선 몽주는 녹사를 돌아보며 명하였다. 그 러나 녹사는 듣지 않았다.
『모시고 가겠읍니다.』
『나는 혼자서 어디 들를 데가 있다. 먼저 가거라.』
『아니옵니다. 들리실 데가 계시면 소인도 들르겠읍니다.』
음침한 봄의 거리─ 서로 기분이 어그러진 것 같은 이상한 감정으로 몽주는 앞서고 녹사는 뒤서서 다시 몽주의 집으 로….
말없이 앞서서 가던 몽주는 어떤 집 앞에 문득 발을 멈추 었다.
몽주의 아는 술친구의 집이었다.
『아름다운 꽃이 아니냐?』
『아름다운 꽃이옵니다.』
─ 아름답다. 그러나 언제 질는지 알 수 없는 꽃이로다. 적 적한 꽃─ 적적한 봄─.
몽주는 그 집으로 앞서서 들어갔다. 녹사도 뒤를 따랐다.
『술을…』
꽃 아래 자리를 펴고 술상을 마주 한 잔 두 잔 석 잔─ 봄 날 꽃 아래서 들이키는 술─ 그러나 적적한 술이었다.
『야아!』
녹사에게 몽주의 부름─.
『예이?』
『내 춤출께 보아라. 최후의 춤이로다. 잘 보아 두어라.』
『예? 대감, 그게 무슨 말씀이오니까?』
『사람이 나서 언제 죽을지 아는 사람이 없느니라. 최후의 춤─ 잘 보아 두어라.』
몽주는 일어섰다. 꽃 아래서 도포의 소매와 자락은 어지럽 게 뛰놀았다. 일곡, 이곡.
『자, 대완(대(大)완(椀))에 따라라.』
들이키는 술. 뛰노는 소매.
『오늘 풍세가 괴악도 하다. 자, 대완에 따라라.』
연하여 마시고 연하여 춤출 동안, 몽주의 늙은 눈 가에서 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죽기는 두렵지 않다.
그러나 자기 한 사람만 없어지면, 고려의 사직을 붙들 사 람이 없다.
이미 보낸 삼대의 임금─.
『상감마마. 상감마마.』
꽃 아래 난무하는 동안, 몽주는 속으로 연하여 부르짖었다.
그 집에서 나온 몽주의 주종은, 선지교(選地橋)까지 이르렀 다.
지끈!
거꾸러졌던 몽주는 몸을 일으켰다. 그의 주위에는 벌써 쇠 망치며 칼 가진 사오인의 장정이 둘러섰다. 몽주의 머리에 서는 피가 솟았다.
『섰거라!』 두번째의 쇠몽치가 그를 향하여 내려오려 할 때에, 몽주는 벽력같이 고함쳤다. 이 고암 소리에 괴한들이 멈칫 설 때에, 몽주는 넘어지기 때문에 옷에 묻은 먼지를 털고 북향하여 꿇어 엎디었다.
『상감마마, 가옵니다. 신은 먼저 가옵니다. 신만 가오면 상감마마를 누구가 붙드오리까? 통촉합소서. 통촉합소서.』
왕께 하직을 고한 몽주는 다시 이번은 종묘쪽으로 돌아 앉 았다. 먼저 가신 공민왕, 우왕, 창왕, 삼대의 임금께, 이 세 상 사람으로서의 마지막 하직을 드리기 위해서….
『상감 계신 나라로 신도 가옵니다. 상감께서 신께 짊어지 워 주신 이 고려의 사직 보전할 이가 없사와, 신이 그냥 짊 어진 채로 상감 계신 나라로 가옵니다. 다시 받아 주시옵소 서. 이 세상에서 보존치 못한 사직─ 내세에서 길이길이 보 전하옵소서. 신도 상감마마께로 가옵니다.』
늙은 눈에서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
몽주는 몸을 일으켰다.
『역적들아, 너희 마음대로 해라.』
고요한 명령이었다.
『대감!』
뒤에 섰던 녹사가 와락 몽주에게 달려 들었다. 그와 같은 찰나에 무사의 칼이 몽주를 향하여 힘차게 내려왔다.
다음 순간, 주종의 몸집은 네 동강이 나서 선지교의 돌다 리를 붉게 물들였다.
─ 몽주의 나이 쉰 여섯, 그 때 같이 순사(殉死)한 녹사의 이름은 불행히 사가(史家)에 놓친 바 되어 전하지 못하였다.
이래 오백 년 간, 몹쓸 비와 찬 눈에 씻기우고 또 씻기운 그 돌이로되, 몽주 주종의 흘린 피의 흔적뿐은 아직도 뚜렷 이 남아 있어서 그의 충혼을 조상한다.
(一九三三年 一二月 <中央> 所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