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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인사담집 3/안 돌아오는 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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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놈—."

"금년에 들어서도 벌서 네 명짼가 보오이다. "

"그런 모양이다. 하하하하,"

용마루가 더룽더룽 울리는 우렁찬 웃음소리다.

"어리석은 놈들, 무얼 하러 온담."

저편 한길에 활을 맞아 죽은 사람을 누각에서 내려다보며 호활하게 웃는 인물. 비록 호활한 웃음을 웃는다 하나, 그 뒤에는 어디인지 모를 적적미가 감추어 있었다. 칠십에 가까운 듯하나 그 안색의 붉고 윤택 있는 점으로든지 자세의 바른 점으로든지 음성의 우렁찬 점으로든지 아직 젊은이를 능가할 만한 기운이 넉넉하게 보였다.

"이제도 또 문안사(問安使)가 오리이까?"

"또 오겠지. 옥새(玉璽)가 내 손에 있는 동안은 연달아 오겠지."

"문안사들이 가련하옵니다"

"할 수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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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흥본궁에 돌아와 계신 이씨 조선의 건국자이 신 태조 이성계. 지금의 위계로는 태상왕(太上王)이시었다.

태상왕께서 당신의(생존한) 맏아드님 방과(芳果)께 왕위를 물려드리고 이 함흥본궁으로 오신 지도 이미 수개 년. 그때 위를 받으셨던 정종대왕은 이미 퇴위하시고 태상왕께는 다섯째 아드님이요 정종대왕(이제는 상왕)께는 아우님이 되시는 방원(芳遠)이 등극하신 지도 또한 몇 해가 지났다.

함흥본궁에 한가히 계시고 이제는 세상 집무는 모르신다 — 표면은 이렇게 되어 있었지만 그 이면에는 여러 가지의 사정이 있었다.

서울 왕에게서 함흥 계신 태상왕께 문안사가 오면 태상왕은 만나보시지도 않고 오는 문안 사마다 모두 멀리서 활로 쏘아 죽여버렸다. 이전 고려조 신사(臣 仕)할 때부터 명궁으로 이름이 높던 태상왕의 살은 벌써 수십 명의 왕사(王使)를 만나시지도 않고 죽여버렸다.

옥새라 하는 것은 당연히 왕이 가지셔야 할 것임에 도 불구하고 태상왕은 당신의 손으로 아직도 옥새를 맡아 가지고 계시고 아드님께 물려드리지를 않으셨다.

말하자면 왕위를 물려받으신 정종대왕이며 그 뒤를 또 물려받으신 태종대왕은 왕의 위에는 오르셨다 하나 왕위를 증명하는 옥새는 그냥 태상왕의 손에 있었다 마음이 오직 착하시기만 한 상왕(上王)은 옥새 없는 왕위를 2년간을 그냥 지나셨건만, 패기 만만한 현왕 (現王)은 이런 허명의 왕위뿐에 만족할 수가 없으시기 때문에 문안을 겸하여 옥새를 달래러 연하여 왕사를 함흥으로 아버님 태상왕께 보내셨다 그러나 그 왕사는 함흥까지 가기는 가지만, 살아서 돌아오는 사람이 없이 모두 태상왕의 살아래 애처로운 혼이 되었다.

(옥새는 명나라에서 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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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활하고 뇌락한 기품의 태상왕.

"하하하하."

칠십노인답지 않은 호활한 웃음으로 이 세상을 눈 아래로 굽어보시는 듯이 마음에 아무 구애되는 일도 없으신 모양으로 지나시지만, 태상왕의 가슴 깊이는 남이 헤아리지 못할 큰 근심이 숨어 있었다.

무너져가는 고려의 사직을 둘러엎고 여기 이씨조선의 크나큰 기업을 세워는 놓았지만 이 기업에 흠점이 생기지나 않을까. 아직 자리잡히지 않은 이 기업, 그 출발에 조그만 착오라도 있으면 장래에는 그것이 얼마나 빌려질지 알 수가 없을 것이다. 처음 출발을 바 로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이씨 기업의 출발에 벌써 좋지 못한 그림자가 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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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건대 당신 재위시의 일이었다.

진안대군, 정종대왕, 익안대군, 희안대군, 태종대왕, 덕안대군, 이렇게 여섯 왕자가 전비(前妃) 한씨에게서 탄생한 분들이었다.

무안대군, 의안대군, 이렇게 두 분이 계비(繼妃) 강 씨의 탄생한 바이었다.

여덟 분의 왕자를 거느리시고 일국의 지존의 위의 계신 당년의 태상왕이었지만, 가정적으로 매우 불쾌하고도 참담한 일을 겪으셨다 태상왕의 전비 한씨는 태상왕이 아직 이씨 조선을 건설하시기 전에, 한낱 무장의 아내로서 세상을 떠났다. 그 뒤에 맞은 계비 강씨는 절색이라 일절을 아리따운 여자였다.

태상왕은 매우 계비 강씨를 사랑하셨다. 그리고 계 비의 탄생인 두 왕자 방번(무안대군), 방석(의안대군)을 또한 유난히 사랑하셨다. 사랑하는 이의 몸에서 난 왕자며 그 위에 아직도 어린애니까 사랑하시는 것이 당연하였다.

이 유난히 사랑하시는 점을 좀 다른 의미로 본 사람에, 왕비 강씨와 총신 정도전, 남은 등이며 전비 탄생의 방원 등이 있었다.

계비 강씨며 정·남 등은 왕(지금의 태상왕)께서 계 비 탄생의 두 아드님을 유난히 사랑하시는 점을 이용하여, 계비 탄생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게 하도록 운동을 하였다.

이 밀모가 비밀히 진행되는 동안, 눈치 빨리 이 기 수(幾數)를 채인 사람은 전 비 탄생의 제5왕자 방원(후의 태종대왕)이었다.

제5왕자 방원 —성미가 괄괄하고 그 패기며 야심이 만만한 인물인 방원은 이씨조선 건국의 공에 있어서는 내부(乃父)인 태조보다도 오히려 더 많다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아직 고려조에 신사하던 시대의 이시중(李侍中)이 유예미결하는 일이 있을 때마다 아버님을 격려하고 충동하여 드디어 이씨 건국의 대사업을 성취하게 한 건국 제일공자였다. 주저하는 아버님을 격려하여 고려 충신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박살한 것도 방원이었다.

주저히는 아버님을 뒤받아서 수창궁에서 즉위하게 한 것도 방원이었다.

이만치 이씨조선 건국에 있어서 제일공을 가지고 있는지라, 아버님 왕만 퇴위하시면 당연히 자기가 그 위를 잇게 될 것으로 굳게 믿고 있었으며, 정식으로 세 자의 책봉은 받지 않았지만 세자로 자처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의외에도 자기와는 배가 다른 동생 되는 방석(芳碩)을 끼고 어떤 밀모가 진행되는 듯한 눈치를 볼 때에, 그는 이를 묵과할 수가 없었다. 이리하여 이씨 조선 개국초에 벌써 왕족끼리의 살륙이라는 불길한 사건이 일어났다. 방원은 자기를 도우려는 몇몇 재상과 무장을 인솔하고 적대편인 정도전, 남은 등의 무리를 모두 죽이고 그 위에 나아가서는 자기의 이복동생 되는 방번, 방석까지 죽여버렸다. 이것이 소위 '방석의 변'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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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국 벽두에 생긴 이 참변에 태조께서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이씨 조선의 만년지계를 도모하려면 먼저 왕위계승 의 순서를 세워야겠다.

왕위는 왕의 맏아들이 이을 것, 맏아들이 일찍이 돌아가면 왕 장손이 이을 것, 왕 장손도 없는 경우에 한해서 연장자의 순서를 세워놓지 않으면 왕위 계승 문제 때문에 이씨 자손은 대대로 다툼이 끊길 날이 없을 것이다.

왕도 사람인 이상에는 어찌 많은 아들 중에 특별히 귀여운 자식과 미운 자식이 없으랴. 왕자들도 사람인 이상에는 반드시 맏아들이 공이 크고 작은아들이 공이 적으라는 법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애중(愛重)의 염(念)을 초월하여 공의 유무를 막론하고 출생의 순서로서 왕위를 계승한다는 철칙을 일찍부터 세워둘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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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태조는 황황히 당신의 생존한 왕자 중의 맏되시는 방과(芳果)에게 선위(禪位)를 하시고, 당신은 개성으로, 다시 함흥으로 피하신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래도 마음에 걸려서 안심이 되지 않은 것은 다섯째 아드님 방원의 너무도 큰 야심과 패기였다.

왕위를 떠나 상왕이 되셔서 함흥으로 떠나실 때에 도 이것이 그냥 근심스러워서 상왕은 방원을 조용히 부르셨다.

그리고,

"현왕을 도와라. 아직 자리잡히지 않은 사직을 보전하기에는 현왕은 너무도 착하시다. 네가 도와라. 너 외에는 도울 만한 사람이 없다. "

고 타이르셨다.

이때의 방원의 대답은 무엇이었던가?

"네…."

하고 대답은 하였다. 그러나 분명히 불평한 안색이었다. 형이 이 사직을 지킬 만한 능력이 없음직하면 왜 제게 물려주시지 않았습니까 하는 듯한 태도였다 상왕은 알아보셨다 알아보시고 속으로 몸서리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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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왕이 신왕께 옥새를 전하시지 않고 그냥 가지고 가셨다는 점을 안 것은 상왕이 벌써 함흥에 도착하신 뒤의 일이었다.

상왕은 옥새를 가지고 가셨다. 전위(傳位)를 하면 당연히 신왕께 전해야 할 옥새를 상왕은 그냥 가지고 가신 것이었다.

옥새 없이는 전위를 못하는 것 — 이번에 신왕께 전위를 하였지만 이 신왕은 자유로이 전위를 못하시리라 하시는 상왕의 심려였다. 당신만 함흥으로 가시면 방원은 반드시 이 착하신 현왕을 육박하여 방원 자기를 세자로 책봉하게하고 그 뒤에는 또 현왕을 육박하여 퇴위하게 하고 방원 자기가 설 것을 짐작하신 상왕은, 옥새를 가지고 가셔서 이런 자유를 금하시려는 수단으로 신왕께 전수하시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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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상왕의 계획도 수포로 돌아갔다.

옥새가 없으니 정식 전위교서(傳位敎書)는 만들 수 없을 것이지만, 실제의 왕위수습은 옥새 없이라도 하리라는 점을 상왕은 잊으셨다.

상왕이 함흥으로 가시기가 바쁘게 서울서는 왕사(王使)가 함흥에 뒤따랐다. 그러고 방원이 세제(世弟)로 책립되었다는 것을 상계(上啓)하였다.

상왕은 벌컥 노염을 내셨다.

"그런 동궁은 나는 모른다. 주상전하께서 왕사가 있 지 않으냐."

그 뒤를연하여 세제책립의 국서에 어새(御璽)를 눌러야 할 터이니 옥새를 보내주십사 하는 왕사가 이르렀다.

"모른다. 몰라. 그런 세제는 나는 모른다. "

상왕은 버티셨다.

그러나 이때 상왕은 분명히 짐작하셨다. 이후 대대로 왕위 계승 때문에 유혈극이 반드시 일어날 것을…….

1년이 지난 뒤에 왕은 퇴위하시고 세제 방원이 등극하셨다는 왕사가 함흥본궁에 오게 되었다. 옥새 없이도 왕위는 변동이 될 것이었다.

아직껏의 상왕은 태상왕이라는 호를 받게 되시고, 왕은 상왕이 되시고 방원이 신왕이 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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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낱 허수아비와 같은 옥새를 붙들고 혼자 버티시던 상왕(이제는 태상왕)은 이 일에 드디어 격노하셨다.

공으로 보아서, 또는 기품으로 봐서, 어느 모로 뜯어보든 간 왕의 자격에 일점의 부족도 없는 신왕이지만, 이씨 장래의 영원지책으로 보아서, 이 몸서리칠 일에 태상왕은 너무도 불쾌하시기 때문에 그 상계가 이른 뒤 한동안은 수라도 잘 받으시지 못하셨다.

"고약한—, 고약한— "

연방 불재하신 듯 이렇게 말씀하시며 침을 허투로 뱉으시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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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부터 소위 후세에 이르는 바 '함흥차사(咸興差使)'의 사건이 생겼다.

이 불충, 불효, 부제(不悌)의 신왕을 좋게 볼 수가 없으신 태상왕은 신왕을 왕이라 보시지 않았다.

현왕의 위를 물려받으신 신왕은 당신의 지위를 정식으로 고정하게 할 필요상 옥새를 가져와야겠는고로 연하여 문안사를 함흥본궁 태상왕께 보냈다. 그러나 태상왕은 그 문안사를 한 번도 만나보시지 않았다.

멀리서 말을 달려오는 인원이 벌써 서울서의 문안 사로 짐작되시면 곁에 상비해둔 활로써 쏘아서 문안 사가 궁문에까지도 이르러본 적이 없었다.

"하하하하."

문안사를 활로 쏘아서 거꾸러뜨리실 때마다 태상왕은 시신들 앞에서는 호활한 웃음으로써 그 내심뿐은 감추시고 하셨지만, 벌써 칠순이 가까운, 움직이기 쉬운 마음은 매우 괴로우셨다.

"또 한 놈."

그러나 서울 계신 왕은 마치 태상왕과 경쟁을 하시 자는 듯이 돌아올 길 모르는 문안사를 그냥 연하여 보내셨다.

"아직도 뉘우칠 줄 모르고. 아아, 이씨도 오래가지 못하겠구나."

홀로 자리에 들으셔서 먼 서울 일을 생각하시며, 또는 지나간 해의 상쾌하던 기업을 회상하실 때에는 이 늙으신 영웅의 눈에서도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고 하였다.

태상왕의 이 원대하신 심사는 모르고 문안사를 없이할 때마다 '왕보다도 더 높은 이'의 직신(直臣)이라고 멋없이 기뻐들 하는 시신들을 보실 때에는 더욱 적막감과 불쾌감을 금하실 수가 없었다.

이러한 가운데서 지나시는 세월은 일년, 또 일년….

신왕도 태상왕께는 친아드님, 왜 부자지간의 정애(情愛)야 없으랴. 더욱이 이씨조선 건국의 제1공을 가 지신 신왕이시매 신임하시는 생각인들 왜 없으랴.

그러나 오래 이 세상에 살아 계시기 때문에 얻으신 많은 경험으로 미루어, 사사로운 사랑이나 의리보다도 더 큰 곳을 바라볼 때에 밉지 않은 사람을 밉게 안 보실 수가 없고, 싫지 않은 사람을 책하시지 않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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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보내는 문안 사마다 모두 태상왕의 노염을 사서 참변을 보게 하는지라 왕께서도 좀 더 생각해 보시고 사신의 인선(人選)에 좀 유의하셔서 태상왕의 이 전 고려조 신사(臣仕) 시대에 친교가 있던 성석린(成石璘)을 뽑아 보내셨다.

성석린은 이 태상왕과 친교가 있더니만치 살 끝에 고혼됨을 면하였지만, 태상왕의 마음을 풀게 하지는 못하였다.

서울 왕궁과 함흥 태상왕궁의 사이는 돌아올 길 없는 차사만 연하여 오고 또 오고 —날이 가고 달이 가고 해가 가도 같은 것이 헛되이 반복되고 또 반복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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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승추부사(判承樞府使) 박순(朴淳).

대궐에 있어서 태상왕과 왕의 사이에 이런 불상사가 뒤를 이어서 생겨나는 것을 볼 때에, 이 늙은 재상은 이 일을 그냥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왕께 자청하여 함흥까지 사자로 가기로 하였다.

가면 십중팔구는 못 돌아올 몸임을 모르는 바가 아 니로되, 임금과 나라를 위하여 적성(赤誠)으로 그는 늙은 몸의 마지막 봉사를 하려 억지로 왕의 윤허를 얻어 가지고 함흥으로 길을 떠났다.

육로, 수로를 거듭해 함흥까지 이르러서 멀리 행재소(行在所)가 보일 만한 곳에서 박순은 하인들도 모두 떨구었다. 그리고 스스로 어미 말 한 마리와 새끼말 한 마리를 끌고 행재소로 향하였다.

바라보매 멀리 행재소 누각에 앉아서 담화를 하고 있는 몇 개의 인물, 그 가운데 중심이 되어 있는 인물은 일찍이는 여조(麗朝)에서 동료로 지냈고 그 뒤에는 같이 힘을 아을러서 이 나라를 개척한 뒤에, 처음에는 임금으로서, 다음에는 상왕으로서, 지금은 태상왕으로서 한결같이 자기의 경애의 염을 바쳐서 마지않은 이 노우(老友)임에 틀림이 없었다.

행재소에서도 이 박순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이 근처에서 보기 쉽지 않은 높은 관원의 행차를 발견한 행재소에서는 모두들 박순의 편을 주의하고 있다.

이것을 보고 박순은 끌고 오던 새끼 말을 길가 나무에 비끄러매었다. 그리고 어미말만 끌고 행재소 정문을 향하여 길을 더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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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여러 해만에 옛날 벗의 앞에 꿇어 엎드린 박순, "전하!"의 한마디밖에는 말이 막혀서 나오지를 않았다.

눈물만 비오듯 쏟아졌다.

그때에 저 편에서 들려오는 기괴한 소리. 돌아보니 한길에 남기고 온 새끼 말이 어미를 찾노라고 부르는 애호성(哀呼聲)이었다. 행재소 안뜰에 매어둔 어미 말도 제 새끼의 애호성에 마음 안 놓이는 듯이 연방 귀를 기웃거리며 발로 땅을 긁으며 부시석거렸다.

"원로에 어떻게 오셨소7"

옛 벗에게 태상왕의 음성도 부드러웠다.

"녜이, 전하 승후(承候)치 못한 지 45성상(星霜)……."

말을 더 계속할 수가 없었다. 차차 더 요란스러워 가는 새끼말 어미말의 애호성에 이 행재소에 때아닌 전쟁이 일어난 듯하였다.

"저게 뭐냐?"

태상왕이 너무도 요란한 소리에 근시들에게 이렇게 물으실 때에, 박순이 대신 아뢰었다.

"전하, 신의 죄로소이다. 신이 끌고 오던 새끼 말을 한길에 버려두었더니 새끼는 어미를 찾노라 어미는 새끼를 찾노라 이렇듯 요란한가 보옵니다. 미물이나마 모자지정은 인간과 다름이 없는가 보옵니다 "

힐끗 쳐다보매 태상왕의 한순간 찌푸리시는 눈살.

동시에 용안 전체를 스치고 지나가는 처량한 기색.

박순은 행재소에 수일간 묵었다. 그러나 이 노련한 유세객(遊說客)은 한 번도 직접 태상왕께 대하여 신왕을 관대히 보시라고는 여쭙지 않았다. 기회 있는 때마 다 빗 걸어 두고, 어버이와 자식간의 정애는 끊을 수가 없음을 내비칠 뿐이었다.

태상왕은 마음으로 신왕을 밉게 보시는 것이 아니었다. 칠십 만로(晩老)이신 태상왕이요, 그 위에 그의 전후 비(妃)를 통하여 여덟 분이나 두셨던 왕자 중에 맏아드님 진안대군은 잠저(潛邸)시에 벌써 돌아가시고, 희안, 무안, 의안 3대군은 모두 정치상 알력으로 참화를 보고, 겨우 남아계신 분이 이 아드님이시매미울 까닭이 없으셨다. 단지 순서없이 왕위에 오르신 점을 아름답지 못하게 보신 뿐이었다.

박순이 묵어있는 동안, 태상왕은 할 수 있는 대로 단 둘이 계실 기회를 피하셨다. 이 오랜 벗을 만나기가 괴로우셨다. 인정과 도리가 서로 어그러질 때에 어느 편을 취하실지 매우 주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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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일 후에 박순은 도로 길을 떠났다. 그때는 박순도 태상왕의 마음이 얼마만치 돌아서게 되신 것을 보았다. 자기가 이만치 마음이 돌아서시게 하였으니, 그 뒤 누가 한 사람만 더 와서 회가(回駕)하시기를 청하면 넉넉히 응하실 만한 자신을 얻었다.

행재소 뜰 아래 박순이 하직하고 떠날 때에 태상왕은 무연히 박순을 보내셨다.

"서로 늙은 몸, 언제 다시 만날는지……."

"전하는 만수무강하시리다. 신은 벌써 노쇠했으니깐, 앞서서 황천에 갈밖에는 없겠습니다."

한때는 고려조의 친구로서 서로 손을 맞잡고 일하 던 이 두 노인은 주종(主從)으로서의 마지막 하직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이것이 진실로 마지막 하직의 길이 될 줄은 태상왕도 뜻도 못하였고 박순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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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이 행재소 밖으로 사라지매, 태상왕의 시신들은 모두 태상왕께 대하여 박순 죽이기를 청하였다.

태상왕께서 왕사(王使)는 모두 죽여버리는 그 깊은 속사정은 모르고 단지 왕사는 죽인다 하는 사실만 인식할 줄 아는 시신들은 서로 공을 세우기 위하여 박순 죽이기를 태상왕께 청한 것이었다.

창연한 심사로서 박순을 보내신 직후에 시신들에게 이런 청을 받으신 태상왕은 심중에 매우 곤란하였다.

일단 세웠던 법을 이유 없이 다시 거두는 것은 왕법을 흐리게 하는 일, 그렇다고 태상왕은 이 노우만은 결코 죽이고 싶지 않으셨다.

"누가 갈 테냐?"

누가 박순을 죽이려 가겠느냐는 질문이셨다.

"신이."

"신이 가겠습니다."

제각기 공을 세우려고 덤벼드는 시신들을 딱한 듯이 보셨다.

이 근신들에게 졸리시기를 얼마—.

얼마를 졸리신 뒤에 부득이 이를 허락하시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시간으로 따져보아서, 이맘때쯤이면 박순은 넉넉히 용흥강(龍興江)을 건너갔을 때였다.

"강을 벌써 건넜거든 내버려두어라."

칼을 사자에게 내어주시며 이렇게 명하시면서 마음으로는 '늙은 친우여, 어서 무사히 강을 건너라' 고 심축(心祝)하여 마지않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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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때까지도 박순은 건너지 못하고 있었다.

도중에 갑자기 몸에 고장이 생겨서 길이 늦어졌기 때문에 칼을 받은 사신이 박순을 따라 뒤미친 때는 박순은 그 발을 겨우 나루에 옮기려 할 때였다.

"박순이 반재강중(半在江中) 반재선(半在船)"이라고 개가를 부르며 사신이 돌아와서 태상왕께 복계(覆啓) 할 때에, 태상왕은 신하들 앞에서는 그 눈치를 안 보이셨지만 곧 외딴 방으로 몸을 피하셔서 우셨다. 짧지 않은 세월을 동고동락을 하던 벗을 당신의 손으로 죽이시지 않지 못한 그 괴상한 운명을 목을 놓아 통곡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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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박순의 죽음은 결코 헛된 죽음이 아니었다 박순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태상왕은 남환(南還)하실 뜻을 결하셨다.

첫째로는 밉기는 밉지만 또한 당신의 몇 분 왕자 중에 가장 걸출이던 신왕의 왕자(王者)적 태도도 보고 싶으셨고, 둘째로는 당신이 세우신 이 기업이 착착 얼마나 자리 잡혔는가, 정치의 중심지인 서울에서 이 점을 관찰도 하고 싶으셨고, 셋째로는 이리하여 늙은 친우의 혼으로 하여금 원을 풀게 하여주고 싶고.

이러한 여러 가지의 이유 아래서 이제 다시 그럴듯한 핑계만 생기면 환경(還京)하시기로 내정하셨다.

이런 때에 무학사(無學師)가 또한 왕명으로 함흥 행 재소에 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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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태조 건국초에 그 도읍하실 곳을 정치 못하 여, 고달산(高達山) 초암(草庵)에 도를 닦고 있던 고승 무학에게 정도(定都)할 땅을 선택하게 하였다. 무학이 여러 곳 지형을 살펴보고 한양을 '인왕산을 진을 삼고, 백악과 남산을 좌우용호로 삼는다' 하여 정도할 곳이 라 하였다. 이리하여 무학의 뜻을 받아서 한양에 정도 하신 이래로 신임 깊으신 무학을 왕은 태상왕께의 문 안사로서 보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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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상왕은 뜻 아니한 무학대사의 내방을 반가히 맞으셨다. 그러나 반가히 맞으시면서도 첫번 물으신 말씀이 이것이었다

"대사도 또 유세하러 왔소?"

거기 대하여 무학은 빙그레 웃었다.

"전하를 안 지 수십 년, 지금 한거해 계시는 전하의 심심파적이라도 해드릴까 하고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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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일간을 행재소에 묵을 동안, 무학은 태상왕께 대하여 신왕의 결점만 들추어내었다. 여사(如斯)하니 이도 왕의 잘못이요, 여사하니 이 역시 왕의 과실이라고 왕의 결점만 들추어내었다. 그러면서 태상왕의 동정만 살폈다. 관찰한 결과로 무학은 태상왕이 신왕의 결점만 말하는 것을 결코 좋아하시지 않은 점을 발견하였다. 수십 일간을 두고 이 점을 관찰한 뒤에 어떤 날 저력 조용한 기회를 타서, 무학은 태상왕의 앞에 꿇어 엎드려 탄원하였다.

"전하, 전하의 세우신 기업이 지금 위테롭습니다.

이제 바로 잡지 않으시면 일껏 세우신 위대한 기업이 허사로 돌아갈까 빈도는 근심되옵니다. "

"대사, 그게 무슨 말씀이오?"

이렇게 물드시는 말씀에 대하여 무학은 눈물을 흘리며 복주(伏奏)했다.

"전하, 모(某)의 죄가 많음은 빈도도 모르는 바가 아니로소이다. 그러나 전하는 못 살피시나이까? 전하 의 제왕자는 모두 진(盡)하옵고 오직 지금 모 한 분만 남아 계시지 않으나이까? 공정왕(정종) 전하께는 적출 왕자가 안 계시옵고, 익안대군은 명민치 못하시고, 오직 이 한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이 분마저 전하께서 버리시면 전하 평생 신고(辛苦)의 대업을 장차 뉘게 부탁하려 하옵니까? 타성(他姓)에게 이 대업을 건네주시느니보다는 미우시지만 전하의 혈족께 전하시는 것이 옳지 않으시나이까? 지금 사직은 정했다 합지만 아직 기초 든든치 못한 이때, 전하의 삼사(三思)를 원 하는 바이옵니다. "

이 무학의 충간에 대하여, 태상왕은 아무 대답도 안 하셨다. 눈을 푹 감으시고 고요히 앉아 계실 뿐이었다.

그러나 미리부터 환경(還京)하시기를 내심으로 작정 하셨던 일이라, 무학의 청을 기회 삼아 오래 떠나 계시던 한양으로 돌아가시기로 하셨다.

그 뒤에도 수일간을 무학이 두고두고 권할 때에, 마지못하는 듯이 환경의 노부(鹵簿)를 준비하라고 시신(侍臣)에게 명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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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태상왕은 옥새를 친히 몸에 지니시고 아드님 왕께 이를 전하시려 무학대사와 함께 함흥본궁을 떠나서 한양으로 돌아오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