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사담집 3/수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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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으리─』

『......』

『나으리─』

부르는 사람. 불리는 사람.

무더운 여름날 밤임에도 불구하고, 문을 굳게 닫은 방 안에 한 사람은 아랫목 보료 위 안석에 기대고, 또 한사람은 한 발쯤 거리되는 곳에 꿇어앉아 있다.

『나으리!』

『응?』

세번째야 비로소 내인 대답. 그러나 시원치 않은 대답이었다.

『결심을 하세요.』

『......』

『대사의 앞을 작은 일, 공(公)의 앞의 사사(私事). 꾹 누르고 결심을 하세요.』

『......』

또 다시 벙어리가 된 듯이 잠잠하여 버린 주인─.

진언하던 사람도, 이 돌부처와 같이 입을 열기를 싫어하는 주인께 대하여 텅무한 듯이 잠잠하여 버렸다.

무더운 여름 밤, 무겁게 계속되는 침묵─보기에 사십이 되었을까 말까 할 아직 젊은 주인이었지만, 이마에 새겨진 주름살과 턱에 나타나 있는 놀라운 패기는 만인을 위압하는 기품, 남의 머리를 저절로 숙이게 하는 위엄이 있는 인물이었다. 한참 계속된 침묵 뒤에, 다시 기다리던 사람이 입을 열려 할 때에, 주인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아직껏 닫고 있던 눈도 조금 뜨였다.

『나가게, 내일 다시 오게. 좀 더 생각해야겠네. 적지 않은 일, 가벼이 작정치 못할 큰 일. 좀더 생각해 보세.』

작은 음성이나마 놀랍게도 굵은 음성이어서, 창호지가 조금씩 울렸다.

『꼭 결심을 하세요. 소인이 진언한 대로 틀림없이. 사삿정을 돌아볼 때가 아니올시다. 사정은 사정, 대사는 대사.』

『알았네, 내일 다시 오게. 그때는 분명한 대답을 전해 주리.』

손은 주인의 얼굴을 잠시 쳐다보았다.

무슨 깊은 뜻이 있는 듯하고도 무심한 듯도 한 눈은 서로 마주 보았다. 그러다가 손이 먼저 미소하였다. 그러나 주인의 눈에는 여전히 무겁고 무더운 그림자만 나타나 있었다.

손은 드디어 하직하였다. 주인의 말대로 내일 다시 와서 분명한 대답을 듣기로 하고서.

올해년(명나라 경태 육년) 윤유월 초승. 갈구리와 같은 달은 하늘 높이서 반짝이고 있었다.

🙝 🙟

수양대군(首楊大君)과 한명회(韓明澮)의 밀회였다.

지금 상감(단종)의 아저씨요 선왕 문종의 친동생 되는 수양대군과 그의 모사 한명회.

때의 수양은 영의정, 이병(吏兵) 조판서 겸임, 그 위에 내외 병마(兵馬) 도통사까지 겸해, 군국의 최대 권위자요, 그의 위력 패기 등등으로서 온 백성의 흠앙의 표대가 되어 있었다.

🙝 🙟

한명회를 보낸 뒤에도, 수양은 죽은 듯이 그대로 있었다.

무더운 날씨 때문에 이마며 가슴을 물론하고 땀이 폭포수 같이 흐르지만, 그 땀을 씻으려도 않고, 부채질을 하려도 않고, 문을 열어서 바람을 끌어 들이려도 않고, 한명회가 하직할 때와 같은 자세로 그냥 있었다. 짧다 하지만, 그래도 그대로 앉아서 새우자면 꽤 지루한 하룻밤을 수양은 안석에 기대어 앉아서 까딱 새웠다.

주인 나으리의 금침을 준비할 책임을 가진 청지기가 몇 번을 와서 엿보고, 주의를 끌고자 기침을 하고 하였지만, 수양은 그 모든 것을 모르는 듯이 눈 한 번 떠보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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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나? 공을 취할까? 사를 취할까?

공을 위하여 사를 버리랴, 사를 위하여 공을 버리랴? 자기는 자기대로 그냥 이대로 지낼까? 혹은 자기의 소신대로 남의 비평을 꺼리지 않고 나아갈까?

선왕의 아우님이요 현왕의 아저씨며, 부귀가 겸전한 <대군>이라는 지위를 그냥 곱다랗게 보전하여, 무난한 일생을 보낼까? 혹은 찬위(簒位)라는 오해나 누명을 무릅쓰고 라도 자기의 믿는 바대로 일을 감행할까?

🙝 🙟

무서운 두 갈래의 길이었다.

돌아보건대 삼년 전─ 병집의 근원은 선왕 문종께 있었다.

문종, 본시 병약하신 위에 의심 잘하는 성질을 가진 분이라, 지어 병집을 만들어 놓으셨다.

병약하신 문종이 당신의 세자, 지금의 상감되는 분을 부탁하심에 있어서, 누구보다도 먼저 당부할 사람은 수양 자기어늘, 자기를 꺼리고, 영의정 황보인이며 좌우의정 남지 김종서 등이며, 내려가서는 다른 어중이떠중이에게 세자의 장래를 당부한 것은 웬 일인가?

「삼촌을 삼가라. 수양을 삼가라. 아버지의 동생이라고 방심치 말아라.」

만날 아무 철도 모르는 어린 세자를 무릎에 안으시고, 이런 교훈을 들려 주신 문종이 오늘날의 병집의 원인을 만들어 좋았다. 이 의심 많고 병약하신 문종이 승하하시고, 아드님이 보위에 오르신 뒤에 생긴 모든 일은 그 결과의 여하를 여실히 증명하는 바다.

어려서부터 아버님 왕께 <삼촌을 삼가라>는 훈계를 들으신 현왕은, 세상에 무엇보다도 수양을 무서워하였다.

편전(便殿)에서 노신들과 재미있게 노시다가라도 수양이 알현하시기만 하면 당황한 기색을 보이시며 어쩔 줄을 모르시고 하였다. 저 삼촌은 왕좌를 엿보는 고약한 사람이거니 하고, 거리고 피하고 마지막에는 원수로 보고─ 이리 하여 수양과 왕의 사이는 혈족의 애정이란 하나도 없어지고, 이상한 어석버석한 사이가 되어 버렸다. 사랑하는 조카님이요, 한편으로 주권자에게 대한 애모의 눈자위로서 수양이 어전에 나아갈 때라도, 왕은 늘 당황하여 하시고 수양을 어서 피하고자 하시고 하였다.

왕이 그러신지라, 왕의 신임을 받은 재상들은 역시 한결 같이 수양을 꺼리었다. 아무 꺼릴 바 없는 이야기를 하다가라도, 수양이 보이기만 하면 쭉 끊져 버렸다. 수양이 국사에 관해서 무슨 진언을 하면 겉으로는 그럴 듯이 대답하면서도 속으로는 회의의 눈의 던지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수양의 지위라 하는 것은 궁중 부중에서 외따로이 튀겨진 기괴한 것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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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그 고명을 받은 신하들은 신왕께 대하여 신하의 도리로서 섬겼던가?

잘 섬겼다면 잘 섬겼달 수도 있고, 못 섬겼다면 못 섬겼달 수도 있는 그들의 신하였다. 이 어리신 상감께 대한 그들의 충성의 방법은, 국책이라든가 왕도라든가는 돌보지 않고, 오직 소년왕의 일신상의 안락과 희열을 목적하였다. 물론 그 중 몇몇은 왕의 한 마디면 물불이라도 헤가르지않을 만한 적성은 있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인간으로서의 왕께 대한 과도한 충성 때문에, 번거로운 문제라든가 시끄러운 일이라든가 하는 것은 절대로 왕의 귀에까지 안 및게 하려 하였다. 애지중지 공지경지 뿐이지, 왕도에 관한 진언은 일체 피하였다. 이 왕이 장차 자라서 나라라는 데 눈이 뜨실 때까지 곱다랗게 키우 것이 선왕의 고명에 보답함이요, 현왕께 대한 충성이라, 이렇게 믿는 그들은 나라를 돌보지 않고 오로지 왕의 개인적 안락을 조장할 뿐이었다.

세종 때에는 북쪽 야인을 정벌하여 커다란 공을 세운 일이 있는 김종서까지도 기괴한 눈치까지 보이는 형편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한결같이 수양을 꺼렸다.

선왕 문종이 의심의 눈으로 보던 수양이거니, 선왕께 보답한다 하여 역시 수양을 의심의 눈으로 보는 것이었다.

수양이 입궐하면 무슨 일로 입궐했느냐 하는 눈치를 보였다. 무슨 진언을 하면, 그 이면에 별다른 내막이 없지 않은가고 의심하였다.

수양이 소년왕을 애모의 눈으로 바라보면 쥐를 노리는 고양이의 눈이라 보았다. 수양이 어떤 일 어떤 말을 하든, 그들은 그게 반드시 그럴 듯한 역리를 발견해 가지고 수양을 경계하였다.

역시 수양을 꺼리는 소년왕과, 서로 마음이 잘 맞는 이 신하들은, 어떻게 하여서든 수양을 멀리하여 수양의 감독을 피하려고 고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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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족 중의 위물 수양─ 자기의 증조부 태조 이성계를 닮아서, 그 야심, 지배력, 위력, 패기, 정복욕, 호활함, 모두 왕자의 기개를 타고난 수양. 그의 아버님 세종 때부터─ 또는 그의 형왕 문종 때부터, 수양은 꾸준히 정치에 용훼하였다. 정복욕이 강렬한, 그 야심이 만만한 그는 이 조그만 방토를 만족히 여길 수가 없기 때문에, 그리고 이 좁은 방토에 허덕이는 가련한 국민들은 그냥 볼 수가 없기 때문에, 끊임 없이 부왕 형왕께 대하여 국토의 확장을 진언하고, 나라의 부강을 역설하고 하였다.

그런 일 때문에, 형님 문종의 의심 많으신 성질은 곧 이 동생을 회의의 눈으로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너무도 패기가 많고, 너무도 정복욕이 강하기 때문에 경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만 천추만세하면 저 수양이 혹은 불궤한 생각을 품지 않을까?」

이런 의심이 커가고 늘어난 결과, 드디어 몇몇 신임하는 신하를 부르셔서 수양을 경계할 것과 세자의 장래를 보좌할 것을 부탁하게까지 되었다. 이 결과로서 수양은, 좀 딴 생각 품은 사람에게는 물론이요, <충성> 하나밖에는 전연 무능무지한 재상들과, 아직 아무 철 모르는 소년 왕께 경이원지함을 당하였다.

그러나, 국토 확장과 내정에 대하여 커다란 포부를 품고 있는 수양은, 자기의 눈앞에서 움직이는 정치적 무능을 묵시하기에는 너무도 패기가 컸다. 태조 때부터 완비되었던 국방적 무비, 세종 시대에 이룩했던 난숙한 문화─ 이 모든 것이 선왕과 현왕의 대에 와서는 나날이 줄어들어 가는 것을 잠자코 보고 있기에는 너무도 큰 야심가였다.

이리하여 이 야심적 진언을 꾸준히 하기 때문에 소년왕과 및 그 고굉의 신하들은 수양을 더욱 의심하였다. 수양의 진언은 무엇이든 묵살하여 버리는 것으로 그들의 방책을 삼았다. 문종이 천추만세하시면 신왕의 제일 가까운 종친으로서 당연히 신왕을 보좌할 자기어늘, 자기의 입장이 너무도 기괴하게 되어, 수양은 때때로 몰래 혀를 차기까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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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유 시월의 변란은 수양의 확청 운동의 제일보였다.

무능하나 왕의 신임을 받는 황보인 김종서 그 밖 몇몇 재상을 죽여 없이하여, 왕의 곁에 경마들던 허수아비를 청결하였다. 그들의 행위에 수상한 일도 있었거니와, 더우기 없이하지 않고는 도저히 그의 패기를 펼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청결한 뒤에, 스스로 영의정과 이조 병조판서 및 내외 병마 도통사의 중임을 잡았다.

이리하여 이년 간.

그러나 왕의 수양에게 대한 불신의 생각은 이런 일이 생기기 때문에 없어지기는커녕 나날이 더하여 갔다. 계유년 변란은 더욱 왕의 이 신념이 틀림없다는 점을 증명할 뿐이었다. 어려서부터 만날 아버님께서 <삼촌을 삼가라>는 경계를 들으신 왕이라, 이번 변란 때문에 더욱 수양을 무서워하고 꺼리게 될 뿐, 수양이 군국의 최고 권위자가 되었다 할지라도, 왕에게서의 신임은 조금도 받지를 못하였다.

궁중에서는 나날이 더 경이원지하려는 수양─ 그 대신 국민의 신망은 나날이 높아가는 수양─. 이렇게 군국의 최대 권세는 잡았지만 왕의 신임이 없기 때문에, 마음대로 그 패기를 놀릴 수 없어서 안타까와하는 수양에게 대하여, 수양의 모사 한명회는 동지들과 의논한 끝에 최후책을 진언하였다.

가로되, 일어서소서─

「왕의 자리에 오르소서. 국민의 신망은 나으리께 있사외다. 나으리 아니면 이 자리를 주물 만한 분이 없사외다.

전하는 상왕으로 높이고, 나으리 몸소 오르소서. 공을 위하여 사를 버리소소. 나라를 위하여서 나으리의 임시적 정애까지 희생하소서. 용감히 감행하소서. 이 밖에는 별다른 도리가 없소이다.」

한명회 일파는 누누이 이렇게 진언하였다.

그러나 수양은 유예미결하였다. 왕은 아무리 자기를 꺼리고 싫어하지만, 수양은 그렇지 못하였다. 아직 어린 조카, 그 위에 서로서로의 입장이 기괴하기 때문에, 자기는 아무 타의가 업지만 자기를 보기만 하여도 몸을 벌벌 떨던 소년왕의 가련한 자태를 생각하면, 이 위에 왕으로 하여금 한층 더 절망의 경에는 떨어지게 하고 싶지 않았다.

공을 위하여 사를 버리랴, 사를 위하여 공을 희생하랴?

유예 미결 중에 날이 가고 날이 오고─ 밀리고 밀리는 동안 수양의 심복들은 드디어 최후적 결심을 재촉하러 온 것이었다.

🙝 🙟

엊저녁의 대답을 들으러, 한명회는 조반 직후에 곧 수양저를 찾았다.

한명회가 왔다는 것을 보고하기 위하여 청지기가 정침 앞에 이르러 들으매, 안에서는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문을 방싯이 열고 엿보니 수양은 안석에 기댄 채 눈을 감은 채, 좌우 눈숡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헴! 헴!』

『누구냐?』

비로소 하는 말─

『한생원이 오셨읍니다.』

『저녁에─ 아니 내일 오라고─』

다시 연기. 고요히 물러가는 청지기의 발소리를 들으면서, 수양은 몸을 일으켰다.

🙝 🙟

『상감마마!』

입궐하여 어리신 상왕께 문후하는 수양─ 편전(便殿)이었다. 편의(便衣)를 잡수신 상감이었다. 이 편의의 소년 상감. 분홍빛이 도는 풍부한 뺨을 가지신 상감.

등을 두드려 드리고 머리를 쓸어 드려도 겹지 않을 이 상감 앞에 꿇어 엎드린 수양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이것이 혹은 상감과 신하의 지위로서는 최후의 사후가 아닌가?

이런 이상한 일이 지금 진행되고 있는 줄도 모르시고, 단지 무서운 사람 수양을 앞에 하기 때문에 당황해 하는 소년 상감을 우러러볼 때에, 수양은 가슴이 메었다. 눈물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원망을 하자면 승하하신 형왕 문종 한 분,

「수양아, 네 어린 조카를 보좌해라.」

의 한 말씀─

「네 삼촌을 믿고 힘입어라.」

의 한 말씀─ 이 두 마디 말씀만 최후로 남겨 놓고 승하하셨더면 오늘날 이 어리신 조카님은 매사에 삼촌을 의뢰하였을 것이며, 수양 자기는 또한 마음에 있는 온갖 패기를 아무 기탄 없이 조카님께 피력하며, 서로 붙들고 서로 의지하는 가운데 나라는 아름다와 가고 부강해 갈 것이며, 사랑과 믿음은 더욱 두터워 갈 것이어늘.......

이제 바야흐로 이 어리신 눈에서 피눈물이 나며, 삼촌인 자기를 세상에 다시 없는 원수로 알 날이 임박했으니─ 그것을 생각하면 수양의 눈에서 피눈물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 날 한 각경을 수양은 아무 말 한 마디도 없이 어리신 조카님 앞에 꿇어앉아 있었다.

상감으로서의 최후의 사후─ 비록 상감은 자기를 보시고 당황해 하시는 것이 거북하기는 하지만, 최후의 상감의 앞을 차마 떠나기가 싫었다.

『상감마마, 상감마마─』

터져 나오려는 통곡을 억제하고,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였다.

🙝 🙟

윤유월 열 하룻날.

신위식을 드는 경회루의 식장.

『숙부, 어리고 미련한 몸이 감당치 못할 대위─ 숙부께서 맡으셔서 마음대로 하시오.』

수양은 머리를 번쩍 들었다. 상감의 마지막 한 말씀이 너무도 의외이므로. ─의외라기보다도, 너무도 원한 큰 음성이므로─ 어리신 용안에 사무친 원한. 그렇듯 앗으려던 어보요, 그렇듯 탐내던 용상을 맡게 되었으니 이젠 만족하냐 하는 듯 하신 그 표정─ 어보를 받으려고 들었던 수양의 손은 엉거주춤하여 버렸다. 손이 와들와들 떨렸다. 온몸까지 떨렸다.

동시에 곁에서 갑자기 울리는 통곡성─ 돌아보니 오늘 어보를 수양에게 전할 책임을 가진 예방승지 성삼문이었다. 이젠 돌아서지 못할 이 자리에서, 어보를 안 받을 수도 없고 받기도 어렵게 된 수양은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어리신 조카님의 언짢아하시는 모양을 보니, 가슴만 우벼내는 듯할 뿐이었다.

🙝 🙟

어보는 수양에게로 왔다.

수양대군─이제는 신왕─을 중심으로 성대한 축하연이 열리었다. 이 축하연 때문에 흥덩흥덩 정신 없이 그 밤을 보낸 신왕은, 이튿날 아침 일찌기 내시를 선왕─상왕께 문안을 보냈다. 상왕께 갔다가 황황히 돌아온 내시의 복계에 의지하건대, 상왕은 어젯밤 궁녀 두세 명을 데리시고 쓸쓸히 이 경복궁을 뒤로 하셨다 하는 것이었다.

무얼? 어제 낮까지도 일국의 지존이시던 몸이, 마치 망명자와 같이 밤중에 쓸쓸히 대궐을 벗어나단?

신왕은, 상왕과 상왕비의 거처하시던 처소로 내시도 안 데리시고 달려갔다. 물건 하나도 손을 대지 않아서 정연하고 규모 있는 방─ 그러나 그 방은 이젠 주인을 잃은 방이었다.

그 방에서 주인 잃은 가구들을 둘러보며 있는 동안, 신왕이 안정에서는 하염없이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 🙟

이러한 비극을 야기하고도 스스로 조카님의 자리를 물려 받은 수양이니만치, 이 신왕(세조대왕)의 업적은 이조 오백 년을 통하여 가장 빝나는 호화로운 하나이었다.

(一九三六年 一○月 <野談> 所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