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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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가 소파에 걸어앉아 화집의 장을 번기고 있는 동안에 나는 방 한구석에서 알콜 풍로에 물을 끓이며 차 넣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병든 아내가 치료를 칭탁하고 시골로 내려간 후로는 손수 차 만드는 것이 나의 일과의 하나였다. 차도구의 일절을 방안에 들여놓고 두터운 책상 옆에는 발자크 모양으로 따로 작은 탁자를 붙이고 그 위에 커다란 코오피 잔을 올려 놓았다. 소설은 발자크의 꽁무니에도 못 미치면서―

파코레터에 두 사람분의 모카가루를 분량하여 넣으면서 나는 은근히 유라를 관찰하였다. 요전 음악회에 갔던 때보다도 더 여윈 듯하다. 자부죽이 숙인 고개 밑으로 콧등이 오똑 솟고 눈두덩 밑이 낭떠러지같이 푹 빠졌다. 그 속은 산골짝에 잠긴 조그마한 호수와도 같다. 기다란 속눈썹은 호숫가에 밋밋하게 늘어선 전나무 수풀이다. 창백한 두 복―좀더 실팍하였건만 지금에는 대패로 민듯이 팽팽하게 가드러 들었다. 그가 보고 있는 그림은 슬픈 그림이다. 하아얀 시이트 위에 누운 병든 소녀의 그림이다―깊게 빠진 눈 위는 검게 그림자 지고 까스러든 속눈썹에 맺힌 눈물이 그 그림자 속에서 구슬같이 빛났다. 검게 질린 입술 사이로 두어 대의 이가 힘없이 드러나 보이고 열어 헤친 가슴 위에 옷섶이 어지럽다. 그 그림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던 유라는 책장을 번기면서 문득 나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쳐들었다. 반짝하는 맑은 눈방울이 호수 속에 비친 별 그림자와도 같다. 미소를 띠기는 하였으나 그것은 지새는 달그림자와도 같이 여린 것이요, 그의 표정은 마치 그가 들여다보고 있던 그림 속의 소녀의 그것과도 같이 애잔하고 슬픈 것이었다.

「손수 넣으시기 수고스럽지요.」

「혼자니까 할 수 없지.」

마치 이 대답이 탓인듯이 유라는 책을 놓고 일어섰다.

「제가 넣을께요.」

나는 대신 소파에 앉아 화집을 들고 그가 번긴 페이지 위를 보았다. 바로 등뒤의 병든 소녀의 그림과는 정반대로 실팍한 팔 위에 뾰족한 턱을 고이고 만면 미소를 띠인 유쾌한 소녀의 그림―그 한 장의 그림의 양면은 바로 그대로 유라의 우울하고 양기로운 양면과도 같다―고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 유라는 향기 높은 두 잔의 코오피를 탁자 위에 옮겨 놓았다.

「이렇게 진하게 넣으시니! ―부인은 결국 이 독한 차와 씨름하다가 지고 내려가신 셈이지요.」

「아내에게 관하여는 더 이야기 맙시다.」

「저도 독한 코오피와 결단하여 볼까요?」

차를 마시는 사이 사이에도 호도를 깨면서 나는 그의 말이 호도와 같이 풍미 깊음을 느꼈다.

한편 저으기 기꺼워하는 오늘의 그를 귀엽게 여겼다. 그의 기꺼움을 살리기 위하여 차 시간을 마친 후 그의 청대로 거리를 거닐기로 하였다.

나의 생활 속에서 어느 틈엔지 산보의 길로 작정된 거리거리를 지나서 우리는 불란서 교회를 옆에 낀 우뚝 솟은 언덕에까지 이르렀다. 여리고 애잔한 그가 오늘에는 건각이었다. 아내와 세 사람이 같이 다닐 때에는 여짓여짓 말도 잘 안하고 별로 주밋주밋하며 유라는 세 사람중의 그림자 같은 존재더니 오늘에는 그가 마치 산보의 주인과도 같이 활기 있고 유쾌하게 서둘렀다.

「곁에 부인이 안계시니 헙헙하고 섭섭하시지요.」

야유 같기도 하고 조롱 같기도 하면서도 그의 어성에는 슬픈 여음이 흐름을 나는 날렵하게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구 오늘은 너무 떠들었나봐요.」

언덕을 내려가던 유라는 별안간 몹시 기침을 하였다. 손수건을 입에 대고 연거푸 쿨룩쿨룩 비인 기침을 지쳤다. 하아얀 손수건이 볼 동안에 단풍같이 물들었다.

「안됐군. 어서 가서 주사맞고 고요히 진정해 누어야지.」

나는 황당하게 그의 몸을 어루만지면서 흥분된 그의 몸과 감정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날마다 한 대씩 「야토코닌」을 맞는 그의 몸을 그와 같은 흥분에 이끈 것이 모두 나의 죄 같이도 생각되었다. 한참 동안이나 쿨룩거리고 섰는 유라는 겨우 기침을 가라앉힌 후 고요히 언덕을 걸어 내려갔다.

교회의 뜰앞 가을 나뭇가지에서 물든 낙엽이 두어 닢 휘날려 떨어지자 교회의 높은 다락에서 별안간 종이 뎅 ! 뎅 ! 울리기 시작하였다. 종소리에 귀기울이고 쓰러진 듯이 주춤 머물러 섰던 유라는 천천히 발을 떼놓으면서 느끼는 듯한 슬픈 음성으로 한 토막의 시를 읊었다.

레 쌍로 롱
데 비올롱
드 드토오느
브레상 몽 쿠울
듀느 랑궤엘
모노토오느

불란서 말로 읊은 베를레느의 <샹송 도토오느>의 시 한 구절이 나의 가슴조차에 울려는 듯이 구슬프게 울렸다. 교회의 종소리가 이 시 속의 비올롱 그것이었다. 나는 들까부느 유라의 심회를 어떻게 하면 진정시킬지를 몰랐다.

유라를 보내고 돌아온 나는 그가 오래전에 빌려갔다 아까 돌려온 나의 소설책 첫장에서 난잡한 그의 낙서를 발견하였다. 그 역 베를레느의 슬픈 시의 한 구절이었다. 갈팡질팡하는 그의 어지러운 심사와도 같이 불란서어 원문이 난잡히 흘려 있었다.

Il pleure dans mon coeur
Comme il pleut sur la ville,
Quelle est cette langueur
Qui penetre mon coeur?

맑게 개인 다음 일요일 유라는 저으기 건강을 회복한 듯이 홀가분한 치장으로 일찌기 찾아왔다. 기침 없는 그의 얼굴은 대낮의 바다같이 잔잔하고 고요하다.

「별안간 바다가 보고 싶어요. 가을 바다가.」

아스파라거스와도 같이 애잔한 그의 건강을 측은히 여겨 나는 그의 청이면 대개 거절하지 않았다. 느린 기차에 한 시간 남짓이 흔들린 후 우리는 가을 바다를 찾았다.

새까만 드레스에 새빨간 목도리를 감은 맵시 고운 그의 양자가 야트막한 창고가 늘어선 지저분한 부두와는 모랫속의 구슬과도 같이 어울리지 않았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물건과 구성과 배치가 유라의 일신을 마치 보석과도 같이 구별해 놓았다. 그의 옆에 붙어 있는 내 자신조차 그의 기품 높은 모양과는 조화되지 못하고 스스로 구별될는지 모른다. 나는 새삼스럽게 유라의 태양과도 같은 존재를 느꼈다―하기는 이것이 알 수 없이 침착을 잃은 나의 마음의 탓인지도 모르지만 그만큼 그가 차차 나의 마음의 세상에 침범하여 온 것을 깨닫고 나는 돌연히 마음의 떨림을 느꼈다.

부두를 떠나 긴 방축을 건너 섬에 이르렀을 때에 한낮을 훨씬 지난 바다는 차차 거칠게 수물거리기 시작하였다. 만목 거칠은 배경 속에서 유라의 자태는 더한층 뛰어나 보였다. 그것을 맑게 타오르는 한 송이의 성스러운 불덩이였다.

파도 찰락거리는 모랫벌을 걸어서 바닷속에 오똘하게 뛰어난 바위를 더듬어 올랐다. 모진 바람에 나부끼는 유라의 붉은 목도리는 활활 붙는 불꽃이었다. 몇걸음 앞서서 험한 바위언덕을 더듬는 유라의 치맛자락을 모진 바람이 졸재에 휙 불어올리는 순간 하얗게 드러난 허벅살의 한 점이 번개같이 나의 눈을 쏘았다. 그것은 마치 한숨의 향기와도 같이 나의 감각을 스친 것이언만 그리고 나는 그것을 본 순간 즉시 시선을 옮겨 버렸건만 눈총 속에 들어붙어 한참 동안 지워지지 않았다. 검은 것, 붉은 것, 흰 것이 한데 휩쓸려 타는 유라의 불덩어리가 그대로 나의 마음속에 들어와서 나의 가슴을 활활 붙여 올렸다.

내가 우두커니 서 있는 동안에 어느새에 벌써 바위 위에 올라선 유라는 나의 마음의 변동은 살피지 못하고 무심히 나에게 손짓하였다.

그래도 오히려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내립떠보고 그는 드디어 짜증을 냈다.

「안 올라오세요……가을 바다는 쓸쓸해, 아 쓸쓸해―그이와 나같이 왔더면 !」

유라는 가끔 「그이」라는 명칭으로 그의 애인을 불렀다. 그러나 나는 아직고 「그이」가 실재의 인물인지 그렇지 않으면 다만 그가 가상하고 있는 꿈속의 인물인지조차도 모른다―유라는 가끔 나에게 들으라는 듯이 큰소리로 「그이」를 외나 나는 아직 「그이」를 본 적도 없는 까닭이다. 자칫하면 「그이」는 유라의 속산 성품의 허장성세(虛張聲勢)에서 나오는 가상의 인물인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나는 이 한 마디가 이제 불현듯이 나의 마음을 괴롭힘을 깨달았다. 질투에 가까운 일종의 불쾌한 심사가 솟아오름을 어찌할 수 없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나는 몸이 더 굳어져서 그가 앉은 바위 위로 뛰어올라갈 용기를 잃고 그자리에 못박힌 것같이 어느 때까지나 서 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밤 유라는 드디어 나의 꿈속에 들어왔다. 전에 없던 처음의 일이었다. 나의 아내가 있는 탓도 아니겠지만 나의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을 꿈속에서 일지라도 유라는 비집고 들어온 적이 없었다. 그러던 유라가 그날밤 돌연히 나의 꿈속에―굳게 닫힌 문을 뚫고 나의 쓸쓸한 잠자리, 넓은 시이트 속에 살며시 숨었던 것이다. 나는 깜짝 놀라 오도깝스럽게 이불을 차고 벌떡 일어났다. 가슴이 두른거리고 웬일인지 몹시도 부끄러워서 얼굴이 화끈 달았다. 밤중을 조금 지난 때였으나 그대로 새벽까지 허다한 생각에 나는 잠 한숨 못 이루고 고시랑거릴 뿐이었다.

이튿날 오후 거리의 아늑한 찻집에서 유라를 만났을 때에 나는 아무도 없는 그자리에서 숫제 그에게 그 꿈이야기를 할까 하였으나 그보다도 먼저 유라가 그의 꿈 이야기를 끄집어낸 까닭에 그것을 기회로 나는 입을 다물었다.

「전에도 선생님의 꿈을 안 꾼 바는 아니었으나 어젯밤 꿈같은 것은 처음예요.」

나의 꿈이라는 소리를 듣고 나는 웬일인지 섬찟하였다. 간밤의 나의 꿈을 다시 생각하면서 그의 꾼 꿈은 또 어떤 것인가 하고 마음이 공연히 서성거림을 느꼈다.

「꿈의 인물은 세 사람이에요―선생님과 부인과 저와……세 사람 사이에 마치 쇠사슬이 얼크러진 연극이 일어나요. 그속에서 부인의 표정과 저의 표정이 제일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어요.」

나는 그 꿈의 내용을 알 수 없이 무섭게 여겨 구태여 캐물으려고도 하지 않고 다만 그의 이야기에 조마조마 마음을 죄이면서 그 어지러운 심사를 엷히기 위하여 일어나서 축음기에 레코드를 걸었다. 그러나 기타아가 가늘게 뜯는 〈바아카로올〉의 연연한 음률은 결코 찻점 안의 적막을 깨뜨리지 아니하고 도리어 고요하고―약간 슬픈 정서를 자아내었다. 고요한 정서 속에서 유라는 꿈의 열정을 결코 잃지 않았다.

「꿈속에서 하던 제 표정을 이 자리에서 또한번 해 볼까요―망칙한 표정을 보시지 않으려거든, 자 눈을 감으세요. 저 혼자 그 표정을 또한번 살려 볼께요.」

나는 한참 동안이나 진득이 눈을 감았다가 그것이 어리석음을 깨닫고 반분 동안이나 지난 후일까 문뜩 다시 눈을 떴다. 순간 나는 나의 앞에 바싹 다가있는 유라의 얼굴을 보았다. 내가 눈을 뜬 다음 순간 그의 얼굴은 마치 달팽이같이 저편으로 움츠러들었다.

같은 순간에 얼굴의 표정도 꺼졌기 때문에 그가 어떤 표정을 지었던가는 물론 알 바가 없이 놓쳐 버렸다. 익숙한 표정으로 돌아간 유라의 낯색은 붉어졌다 푸르러졌다 하얗다 푸르러졌다가 다시 붉어진 듯도 하였다.

그의 무참해 하는 양을 차마 볼 수 없어서 나는 자리를 일어서 마침 끝난 〈바아카로올〉의 곡조를 다시 걸었다―유라가 지었던 표정은 대체 어떠한 것인가를 나는 수수께기를 풀 듯이 곰곰이 생각하면서―

다시 병이 도져서 유라는 그 후 여러 날 동안 모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나의 생일날에는 가뜬하게 단장을 하고 아침부터 왔다.―품안에 가지의 선물을 그득히 들고.

「일년에 하루 오는 생일날 이렇게 우울하게 책상 앞에 앉아 계세요.」

나의 우울과는 반대로 그는 마치 그 자신의 생일인 것과도 같이 양기롭게 서둘렀다.

한 묶음의 초초한 프리이자를 화병에 세워 책상 위를 장식한 후 그는 그가 가져온 선물의 보를 폈다.

「이 속에 무엇이 들었겠어요―판도라의 상자가 아니니 설마 괴악한 건 안 나오겠지요.」

대답 없이 보고 있으려니 그는 부피 큰 「버스데이 케이크」를 내어 책상 복판에 놓았다. 과자 위에는 전면에 가득히 나의 이름이 수놓여 있었다. 나는 그의 세밀한 용의에 놀라는 동시에 너무도 과한 염려를 미안히 여겨 알맞은 감사의 말을 찾지 못하였다.

「오늘은 제가 산타클로오스예요.」

유라는 마치 신부와도 같이 명랑하게 웃으면서 나의 즐겨 하는 호도, 초콜렛 등이 담긴 기다란 양말짝을 책상 모서리에 걸었다. 소설 쓰는 책상은 때 아닌 크리스마스 식탁으로 변하였다.

「그리고 밤에는 여기다 촛불을 그득 켜지요.」

하고 나의 나이 수효대로 있는지 여러 대의 가는 양초를 내서 책상 위에 수북 세웠다.

책상 위는 찬란히 빛나고 방안은 향기에 넘쳤다.

그러나 그렇게 고분고분히 날렵하게 서둘건만은 유라의 거동에는 그 어디인지 쇠약하여 허전허전한 것이 있음을 나는 민첩하게 살필 수 있었다. 얼굴은 핏기 한 점 없이 창백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도리어 나의 우울을 책하는 것이다.

「아니 왜 이리 나분히 기운이 없으세요. 기분이 좋지 못하면 잠깐 바람을 쏘이고 올까요?」

나도 그것이 좋은 듯하여서 곧 옷을 입고 거리로 나갔다.

가라앉은 마음을 유쾌하게 뛰놀게 하기 위하여 될 수 있는 대로 번잡한 거리를 걸었다.

악기점에 들러 양기로운 재즈를 들은 후 백화점에 들어갔을 때 유라는 의미있는 듯이 내 팔을 끌어 찬란한 색채 사이를 뚫고 한군데로 인도하였다.

「무엇보다도 넥타이를 사셔야겠어요. 오늘의 우울이 모두 그 넥타이의 죄라고 저는 생각해요―자, 이중에서 어느 것이든지 하나 유쾌한 빛깔로 고르세요.」

나의 눈앞에는 가지각색 넥타이가 무지개의 폭포같이 드리워있다. 그 속에서 내 비위에 맞는 침착한 색깔의 것을 골랐을 때 유라는 나의 감식의 정도를 측은히 여기는 듯이 나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넥타이도 하나 바로 못 고르시는 이가 소설의 여주인공은 어떻게 고르시노……제가 골라 드리지요―우울을 없애 드리지요.」

소설의 여주인공을 칭탁하여 은근히 그러니까 현재의 나의 아내 따위 밖에는 못 골랐지 하는 듯한 말 속에 뼈를 읽으면서 나는 그의 가는 양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자, 어떠세요. 이것 마음에 드시지요. 마음에 드시면 이 자리에서 곧 갈아 매세요. 헌것은 주머니 속에 넣어두시구.」

진한 바닷빛 사이로 붉은 줄이 얼기설기 건너간 바둑판 모양의 넥타이―그 속에는 유라 자신의 교양과 세련되 지혜가 은근히 나타나 있기는 하나 그렇다고 일률로 양기로운 빛깔도 아니라고 생각하면서(그것은 마치 유라 자신의 양면과도 같이 양기로운 반면에 슬픈 것이 아닐까.) 나는 그의 귀여운 명령대로 그가 골라준 그 넥타이를 그자리에서 갈아매고 헌것을 꾸깃꾸깃 주머니 속에 수습하였다―다음 순간에 그것이 암시하는 의미에 돌연히 떨면서,

「꼭 어울리시는군요―이제 버젓하게 거리를 거닐 수가 있잖아요.」

그 역 무심히 할 리는 없겠지만 그의 하는 말의 겹겹의 속뜻에 나는 자릿자릿하였다. 아내의 자태가 문득 머리속에 떠올랐다. 그러나 새 넥타이에 한결 몸이 거뿐함은 사실이었다. 유라마따나 뭉켰던 우울도 저으기 지새어 버린 듯하였다.

그러나 나의 제의를 물리치고 유라가 그의 수중으로 돈을 갚은 후 한 걸음 백화점의 문을 나왔을 때에 나는 돌연히 놀라운 것을 발견하고 문득 섰다―팔에서 떼인 적이 없던 그의 왼팔 시계가 오늘에는 보이지 아니함을 문득 깨달은 것이다. 유라의 살림을 막연히 밖에는 짐작하지 못하는 나는 돌연히 이상스러운 것을 생각하였다―자칫하면 이 넥타이도 아까의 「버스데이 케이크」도 꽃묶음도 오늘의 선물이 모두 그 시계 속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유라! 시계를 어찌 하였소.」

「그까짓 건 왜 물으세요―나는 왜 우두커니 서셨다구요.」

유라는 천연스럽게 말하고 나의 팔을 내끌었으나 약간 붉어진 그의 옆얼굴을 나는 예민히 보아 버렸다.

「특별히 오늘만 왜 안 찬단 말요.」

「시계가 별안간 싫어졌어요-그것은 마치 저의 병을 일각일각 재촉하는 것도 같애서요.」

그러나 그것이 물론 그의 영리한 변명에 지나지 못함을 아는 나는 그의 심정을 도리어 아프게 여기는 한편 미안한 마음을 금 할 수 없었다.

「쓸데없는 걱정 마세요―시계는 집에 풀어 두었어요.」

그렇게 말하는 유라는 몹시도 핼쓱하게 보였다. 애잔한 몸이 허전허전하였다. 또 기침이 나오지 않을까 하고 염려하는 나는 그를 부축하는 듯이 이끌고 넓은 거리에 나와 십자로를 건너려 할 때에 돌연히 나타난 난데없는 상여의 행렬에 앞길을 막히워 버렸다.

「에그……」

상여를 몹시 싫어하고 무서워하는 유라는 별안간 소스라치면서 나에게 전신을 의지하였다. 입술이 볼 동안에 핏기를 잃고 파랗게 질렸다. 마치 붉은 꽃판이 약병 속에서 하아얗게 표백되는 것과도 같이 전신이 순식간에 백지장같이 엷어졌다. 홀가분한 그의 몸이언만 의식을 잃음에 따라 나의 팔 안에 무겁게 드리웠다.

나는 불길한 상여의 행렬에 침 뱉고 황급히 지나는 택시를 불러 유라의 몸을 실었다. 그의 집조차 모르는 나는 하는 수 없이 나의 가난한 집으로 그를 실어 왔다. 휘장 속 침대 위에 누이고 곧 의사를 불렀다. 의사의 응급 수단에 유라는 최면술에 걸렸던 사람같이 맥없이 깨어났다. 나는 안심은 하였으나 그러나 그의 안색은 여전히 창백하고 전신은 맥이 약하고 두 눈의 광채조차 심히 엷다. 가지가지의 여러 대의 주사를 베푼 후 의사는 가버렸다.

의사가 나가자마자 유라는 벌떡 일어나면서 슬픈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물론 이전보다는 못하였으나 두 눈에는 광채조차 띠었다.

「아니 예가 어디요. 선생님의 방 선생님의 침대―기어코 선생님의 침대에 누었군요! 선생님의 코오피와 씨름해서 이긴 셈이지요!」

「일어나서는 안 되오. 떠들어서는 안 되오.」

나는 뛰어가서 그를 다시 침대 위에 눕히고 들뜬 그의 감정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상기된 그의 감정―그것은 마치 타고난 나머지에 마지막으로 활짝 타오르는 불꽃과도 같이 아름다운 것이었다.

「저는 이제 올 곳에 온 것 같애요―기다란 여행을 마치고 기어코 목적지에 도달한 셈예요. 안심하고 눈을 감겠어요. 내일에 이 목숨이 진한다 하더라도 한할 것 없어요.」

흥분 속에서 나다분히 지껄이는 한 마디 한 마디가 그의 건강을 방울방울 해롭히는 것을 아는 나는 하는 수 없이 싫은 소리로 그를 위협할 수밖에는 없었다.

「유라가 너무 떠들면 나는 거리로 나가 버리겠소.」

「안 지껄일게 나가지 마세요. 나가지 마시고 언제까지든지 제 옆에 앉아 계세요. 이 침대 위에 시이트 위에―그러면 언제인가 꾼 꿈 이야기를 해드릴께요.」

「이야기를 하면 도로 지껄이는 셈이 아니요.」

「그럼 이야기는 그만두고 그때의 표정을 해보일께요―어두웠으니 양초에 불을 커 주세요. 선생님의 나이 수효대로 있는 양초에 죄다 불을 켜 주세요. 오늘은 왜 선생님의 탄생일이 아니예요.」

나는 사실 나의 나이 수효대로 있는 수십 가락의 초에 일일이 불을 달이면서 그의 주밀한 용의에 다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다 켜고 난 후에 전깃불을 죽였다. 방안은 일시에 꽃 핀 듯이 밝고 책상 위는 잔칫상같이 찬란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생일을 위한 찬란이라는 것보다도 유라의 병상을 장식하는 광채와도 같아서 불길한 예감이 한결같이 나의 마음을 괴롭혔다.

「선생님의 나이대로 있는 촛불은 선생님의 광명이지요―이 광명 속에서 저는 마치 천사와도 같이 몸이 거뿐함을 느껴요.」

유라의 맑은 눈총이 촛불의 광채를 받아 아름답게 타올랐다. 얼굴에는 만족의 빛이 그득히 넘쳤다.

심드렁해서 책상 앞에도 앉지 아니하고 넋을 잃은 듯이 우두커니 서 있는 나에게는 하아얀 프리이자의 향기가 마치 죽음의 향기 같은 생각이 불현듯이 들었다.

그 해도 못 넘기고 유라는 드디어 떠나 버렸다.―마치 꽃의 향기 같이도 여리게 사라져 버렸다.

그와는 반대고 고향에서 정양하던 아내는 건강을 회복하고 다시 올라왔다.

아내 역시 그의 죽음을 지극히 슬퍼하였다.

유라가 나에게 남기고 간 것은 베를레느의 시의 낙서와 아롱아롱한 넥타이와 그리고 가지가지의 은근한 마음의 향기였다.

마음의 향기―그는 짧은 생애를 마음으로만 산 마음의 귀족이었다. 그의 육체의 살림은 빈곤하였으나 마음의 생활은 풍부하였다. 고독히 사라진 유라―마음의 귀족.

나는 그를 그립게 생각할 때마다 그의 넥타이로 갈아 매고 거리를 거닌다. 그러면 나는 마치 그가 살아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나의 옆에 오종오종 따라옴을 느낀다―여읜 얼굴에 맑은 눈총을 반짝이면서―기다란 속눈썹에 애수를 담고 한 마디 말없이 나의 걸음에 뒤떨어지지 않으려고 애잔한 발을 재개 떼놓으면서.

그럴 때의 그의 얼굴에는 그가 낙서한 베를레느의 시의 구절이 바로 그대로 번역되어 적혀 있음을 나는 본다.

거리에 비 퍼붓듯
내 마음에 눈물 솟네
마음속 파고드는 이 내 슬픔
대체 어인 연고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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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에서 1977년 사이에 출판되었다면 미국에서 퍼블릭 도메인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미국에서 퍼블릭 도메인인 저작에는 {{PD-1996}}를 사용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