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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옅은 자여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9월 21일

[편집]

형님.

마침내 고백할 날이 왔읍니다.

언제든지 형께서 직접으로나 혹은 편지로,

『무슨 번민이 있거든 내게 다 말하라』

하였지만, 저는 종내 못 하였어요. 제 성질 가운데 별한 것이 있어서, 이 사건을 다른 사람에게 알게 하려면 시기의 불이 앞서서 일어나는고로 마침내 못 하였읍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꿈질거리고만 있지 못하게 되었읍니다.

마침내 고백할 날이 왔읍니다.

이 편지를 보시고 형께서 조력을 하시든지 안하시든지 그것은 문제 밖이외다. 아니, 이제는 어떠한 힘으로 조력을 하셔도 효력이 나타나지 않을이만큼 사건의 좌우는 결정되었읍니다. 다만 동정만 하여 주시면 그것으로 넉넉하외다. 저는 그것 뿐으로 만족히 여기겠읍니다. 지금 이 경우에 있는 제게는 한 줄기의 동정이 만금의 돈, 10년의 목숨보다도 귀하도록 동정 그것이 귀하게 되었읍니다.

이제 이 사건을 쓰기 전에 먼저 제 역사를 좀 쓰겠읍니다. 그 가운데는 형도 아실 것이 많겠지만, 전의 일을 안 쓰고는 도저히 이 사건을 쓸 수가 없읍니다.

그리고 또 편의상 보통 수사문 투로 쓰게 됩니다.

나는 서울 학당을 졸업한 뒤에 곧 고향인 평양으로 내려왔읍니다-때는 지난해 봄.

구도 평양은 역시 5년 전에 나를 서울로 보내던 때와 같은 낯으로 나를 맞았다. 좁은 거리에 가득하니 왔다갔다 하는 사람과 수레들은 분주한 자기네들의 일로 말미암아 몇 해 본 곳을 떠나 있던 나를 싱크러운 듯이 피하여 다닌다.

나는 집에 들어가기 전에 나의 아내에게 많은 바람을 품고 있었다. 5년이나 내가 떠나 있던 사이에 그는 갑갑하여 심심풀이로라도 공부를 많이 하였으려니-지금은 훌륭한 부인이 되었으려니-그 사이 내가 없으므로 대단히 파리하였으려니-이제 내가 들어서면 너무 기뻐서 말도 못하고 늙은 어머니와 함께 물끄러미 나를 들여다보고만 섰으려니-내 아들도 꽤 컸으려니.

그렇지만 곧 내 이상은 그릇된 것인 줄 알게 되었다. 아까 내 생각과 같이 어머니는 늙은 눈을 비비며,

『이자야 왔구나!. 』

하시면서 나를 물끄러미 보며 있었고, 다섯인가 여섯인가 난 내 아들은 자기 할머니 뒤에 숨어서서 낮선 나를 힐끗힐끗 쳐다보며 있었지만, 나의 아내는 보이지도 않았다. 그는 5년 동안 어린아이를 내어버리고 자기 집에 가 있었단 말을 들었다. 나는 그때 얼마나 성이 났었는지-얼마나 낙망을 하였는지!-쓰지 않으려 한다-나의 앞길의 대부분은 이때, 이 순간에 검은 점이 찍혔다.

이삼 일 뒤에 나의 아내는 내가 왔다는 말을 듣고 나의 집으로 왔다. 새까맣게 타진 얼굴 살진 허리는 그가 그 사이 본집의 농사는 도와 주면서도 마음은 걱정 없이 지낸 것을 나타내었다.

마음이 옅은 자여!

나의 허튼 규칙 없는 생활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이성의 합(合), 거기서 남녀의 정은 생긴다 한다.

나도 그런 이유로인지는 모르지만, 5년 전에는 나의 아내를, 서로 마주 있을 때에는 사랑하였다. 흑은 그 사랑이 육(肉)의 사랑일지도 모르거니와, 어쨌든 나는 그를 사랑하였다. 그렇지만 지금 나와 그는 다른 사람 이상이다. 하루에 한 번을 보는가 마는가 쯤으로 되었다. 육의 사랑은 이런 때는 소멸된다 한다. 나의 사랑도 소멸되었다. 뿐만 아니라,

『노자, 노자-젊어서 노자, 늙어지면 못 노니라』

의 슬픈 노래를 부르는 어린 기생도 보며, 남산현(南山峴) 예배당 특유의 R학당식 머리를 하고 쌍쌍이 밀려다니는 이팔 혹은 이구의 여학생들도 보며, 검은 파라솔에 책보를 끼고 바쁘게 지나다니는 S여중 학생들도 보며, 넓은 길을 좁게 여기며 즐거이 다니는 젊은 부부도 보며, 매주일 몇 쌍 예배당에서 예를 이루는 새 부부들을 보는 때는…… 아!

형이여, 내 마음을 짐작하라!

그렇지만 아내는 나의 번민을 덜하게 하지 못한다.

만약 초월이란 말이 있다 하면 이런 경우에나 쓸 말이다. 나는 아내의 문제를 초월하였다. 나는 다만 꽃다운 새 부부와 여학생들과 아름다운 기생들을 보는 것만으로 무한히 속을 태우면서도 만족히 여겼다. 사람이란 시기로 믿지 못하는 데 부러움이 생기고, 부러움도 믿지 못하는 데에는 다만 보는 것뿐으로 넉넉히 여긴다. 나도 넉넉히 그만것은 할 수가 있는데 하는 때에 시기가 생기고 자기 경우보다 좀더 높은 데 있는 것에 대하여 부러움이 생기고, 자기는 생각지도 못할 데는 다만 보는 것뿐으로 넉넉히 여긴다. 나는 다만 그들을 보는 것뿐으로 넉넉히 여겼다.

구주 전쟁의 영향이 우리 나라에는 물가고등으로 나타났다. 나는 이 핑계로 나의 어머니와 아내와 아들은 약간의 토지가 있는 함종으로 보내고, 나는 평양서 K학교 보통과 교사로 들어앉았다. 함종으로 가기 전날 밤에 아내는 내게 와서 탄원하였다.

-저를 왜 그리 싫어하십니까?


-제가 무슨 잘못한 일이라도 있읍니까?


-참 속상해서 죽겠어요.


-여필종부(女必從夫)라니……


-5년 동안이나……독수(獨守)……


-참! 왜 그러세요?


-죽겠어요!


그렇지만 그를 남으로 보던 나는 천연히 그의 말을 거절할 수가 있었다. 그들이 함종으로 간 뒤에 나는 집을 팔고 조그마한 셋집으로 이사하였다.

학생 교수-이것은 참 내게는 무거운 짐이나 다름없었다. 전에 나의 학생 시대에는 교사를 성화시키는 것이 위에 없는 쾌락이더니, 내가 그 단련을 받아보니 전에 나의 선생이던 그 사람들까지 가련하게 보인다.

그들은 내가 들어간 사오 일 뒤에 벌써 나를 '배꼽 눈'이란 별명을 지었다. 내 눈이 살진 계집의 배꼽 같다는 뜻이라 한다. 흑판에 내 화상을 펜취로 그린다.

의자에 석탄칠을 한다, 그밖에 말할 수 없는 성화를 혜아릴 수 없이 받았다. 이때에 나의 양식은 여자들을 바라보는 것과 공상(空想) 두 가지밖에 없었다.

그 공상 가운데 나타난 나는 어떤 때는 우리 나라에 제일의 이학자(理學者)도 되어 보았다. 흑은 세계 제일의 부자도 되어 보았다. 또는 해와 달에 원정도 가 보았다. 그렇지만 그 공상의 대부분에는 나는 미인의 남편이었다. 여학생의 부러움의 푯대었다. 나는 어떤 왕의 사위였다. 여자가 섞여야만 공상의 세계가 자유 자재로 전개되었다.

나는 세계에 이름난 연애 소설 중에 일어로 번역된 것은 대개 보았다. 그리고 그 소설 가운데 연애에 성공한 자는 나로 치고 성공치 못한 자는 나의 사랑의 원수로 치고 말았다.

나의 이러한 외롭고 답답한 생활을 버려두고 때는 1년을 뒤로 물러갔다. 그 이듬해 봄이 이르렀다.

이때에-나의 생활 가운데 한 놀랄 만한 일이 생겼다. 나의 껌껌한 검은 점이 찍힌 삶에는 한 밝은 빛이 비쳤다. 나는 다시 살아났다. 나의 삶 가운데는 다시 이런 빛이 안 비치리라 믿었던 나는, 첫번에는 겁나서 이를 피하기까지 하였다. 나의 삶 가운데 한 줄기의 빛!

나의 앞에 갑자기 일어난 것은 Y라는 여성이다. 내가 졸업한 B학당의 남매교인 R학당을 졸업하고, 지금 내가 교수하는 K학교의 남매교인 J학교의 교사로 들어간 Y! 이것뿐으로도 어떤 인연이 있지 않을까?…… 형님!

여덟 시 십 분 전이외다. 가르칠 시간이 급박하여 그만 봉하여 부칩니다. 나머지는 낮에……

K는 C형에게.

같은 날!

(방금 가르치기 끝내고 돌아와서 또 쓰기 시작합니다. 좀 글이 길게 되겠지만 보아주소서. )

Y의 아버지는 평양의 유명한 건달이다. 평양 부자 가운데 나한테 속지 않은 놈은 하나도 없다고 장담한 사람이다. 키는 중키나 되고 위아랫 수염이 시꺼멓게 나고, 눈은 올롱하도록 흉측한 빛이 보이는, 건달에는 맞추인 사람-이런 사람이 딸을 어찌 서울까지 공부를 보내었는지 참 기적이랄 수밖에 없다.

Y는 미인이 아니다. 그는 소위 '세리상'이다. 삼각을 세워 놓은 상이다. 입 하나밖에는 그의 상에서 아름다운 점은 약에 쓰려고 해도 없었다.

(그럼 너는 왜 그를 사랑하였느냐?)

그렇다! 그는 이성의 사랑을 끌 만한 용모는 못 되었다. 그리고 내게는 J학교의 여교사로 벗이 많았다.

그럼 왜 나는 특별히 그를 사랑하였는가?-딴 교사들은 '높은 곳의 꽃'이다. 나는 그들은 벗으로 사괴이는 데까지 겁을 내었다. 그와 같이 나와 그들 사이에는 간격이 있었다. 그때에 Y는 내게 사랑을 요구하는 눈치를 보였다.

『너는 사나이로서 그 간사한 점과 그 밖에 여러 가지로 오히려 성격은 여자에 가깝다. 어떤 여자는 이 성질을 싫어하지만 어떤 자는 도리어 좋아한다』

고, 어떤 나의 벗이 내게 말한 적이 있다. 다른 여교사들은 나를 돌아보지도 않을 때에, Y가 내게 사랑을 구함은 이와 같이 성격이 서로 다름으로 말미암았으리라.

차디차고 외로운 삶 안에서 혼자 부르짖으며 슬퍼하고, 마지막에는 세상을 내어버리고 마침내 이 내 몸까지 내어던지려던 때에 비친 사랑의 빛, 사랑의 따스함-나는 사랑을 맛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여 그를 탐식하고 그를 깨물어 삼켰다.

오! Y! 사랑의 빛!

나의 사랑은 차차 더워졌다.

때도 때-따스한 봄, 따스한 사랑의 맛을 본 나는, 누구 말과 같이 벌거벗고 천지를 동편 끝부터 서편 끝까지 굴러다니고 싶은 마음이 되었다.

굶었던 사람이 갑자기 많이 먹으면 중독이 되는 것같이, 사랑에 굶었던 나는 내 몸을 사랑의 굴함에 잡아 넣고 그 속에서 팔다리를 두르면서 헤매었다. 바다에 빠져서 헤매던 몬테크리스트 백작이 겨우 어떤 바위 위에 올라서서

『세상은 다 내 것이로다』

라고 고함친 것같이, 캄캄한 바다 속에서 겨우 사랑의 언덕에 올라선 나는,

『세계는 다 내 앞에서 항복하였다』

고 고함쳤다.

나는 누리를 비웃었다.

『흥! 흥!』

『나도. 이제는……』

『네까짓 것들!』

나는 복카치오의 데카메론의 시로 온누리에 선전하였다.

-사랑은 아름답다 들의 꽃이여


너른 더운 볕 아래서 썩지 않는 꽃이여.

나는 타고르의 시로 온 여자에게 대하여 선전하였다.

-누리에 가득한 빛이여


눈과 맘을 입맞추는 빛이여.

오! 나의 애인이여, 나는 빛의 삶 가온데서 춤추노라.

빛의 바다에 나비가 날고 개나리와 진달래는 빛의 물결 가운데서 웃도다.

나는 솔로몬의 시로 온 젊은 아내를 가진 남편들에게 선전하였다.

-아름다운 여자여


나는 너에게 노루와 들사슴을 두고 맹세하면서 원하노라.

'사랑이 저절로 생기기 전까지는 이를 일게 하거나 깨우지 말라'고……

나의 사랑하는 이의 소리 들리는도다.

오! 내 사랑하는 이여!

나의 이때의 기쁨, 형이여! 어떠하였으랴!

바라고 바라고 또 바라다가 그만 이런 행복이 내게는 안 올 것이라 단념하고, 드디어 운명을 비방하고 누리를 미워하며 인생을 저주하고, 마지막에는 자기까지 죽이기 시작하던 나에게 이런 기쁨이 올 줄 누구가 알았으랴-나의 사랑에 취하고 사랑의 구덩이에 빠지고 말음도 당연하다.

(형이여, 이때 일을 똑똑히 기록한 일기를 함께 보낼 터이니 참조하라.)

이렇게 이 봄은 또 지나갔다. 한 발로 지구를 짚고, 또 한 발로 해를 짚고, 머리로 하늘 천장을 뚫고, 우주의 삼라만상을 굽어보는 기쁜 맘으로 이 봄을 보냈다.

여름이 되었다.

이 여름. 내 일생에 잊지 못할 큰 타격을 받은 이 여름. 어떻든 간 문제가 Y의 집에서 일어나리라 생각은 하였지만, 이런 타격이 이를 줄은 뜻도 아니하였다.

어떤 날, Y는 이런 이야기를 하였다.

.나는 이 말을 하려 하려 하면서도 종내 못 하였다.

내게는 어렸을 때부터 약혼한 사람이 있다. 그 사이 두 집에서 다 내가 공부하므로 잊은 것같이 가만히 있었지만, 이제 공부를 끝내고 돌아오니 도로 말이 일어났다. 두 집에서 서로 결의한 결과 이제 곧 종폐를 끝내고 이 가을로 시집을 가야 한다.이제는……그대와 나도……

나는 다만,

『흥!』

코웃음을 웃었다.

이 코웃음. 단장(斷腸)의 울음이라든가 하는 것이 있어서, 그 울음을 한 번 울면 3년인가 1년인가 축명(縮命)이 된단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이 코웃음, 이 웃음이 한 번 짜내이는 데는 단장의 울음보다 몇 배 이상 축명이 될 것을 나는 보험(保險)한다.

나는 갑자기 검은 세계로 들어갔다.

나의 성격 가운데는 참 여자의 성격의 분자가 많았다.

좀스러운 자존심, 시기.

나의 이 좀스러운 자존심은 Y에게 어찌하라고든지 권하는 것을 허락지 않았다.

『거기 가고 싶으면 가시오.』

나는 다만 이렇게 대답하였다.

『가고 싶기야……아버지가 너무 가라고 하니까……』

그의 대답은 이것이었다.

그가 돌아간 뒤에 밤새도록 나는 그를 저주하였다-아버지 가라는 것이-제가 가고 싶기에 그런 소리를 했지……

그렇지만 저주는 차차 내게로 돌아왔다.

(너는 무얼 잘했느냐? 왜 Y에게 단연히 거절하란 말을 못 하였어?……)

그 뒤에도 여전하게 그는 흔히 나를 찾아왔다. 그렇지만 둘 사이에는 어떤 알지 못할 벽이 막혀 있었다.

서투른 치의(齒醫)에게 맞지 않는 어금니를 하여 보지 못한 사람은 우리 둘 사이에 막힌 것을 똑똑히 알지 못하리라. 둘이는 서로 전과 같이 손도 안 쥐고 멀리 앉아서 서로 흘겨보기만 한다. 간혹 내가 단장의 웃음을 짜내면 그도 따라 웃는다. 물론 서로 말은 아니 하지만, 한다 하면 이래서는 안 되겠다 하면서도 자연히 노기를 머금었다. 서로 이렇게 하는 것이 불유쾌하므로 이렇지 않기를 원하면서도 좀스러운 자존심으로 말미암아 서로 속이 괴었다. 그가 간다-나는 그가 좀 더 있다 가면 한다- 시기가 일어난다.

(이제 가면 자기 새서방의 의복을 하겠거니.)

일어나는 시기의 불길에 공상의 기름을 부어서 더 맹렬하게 하고, 이 단장의 시기를 나는 맛있게 맛본다.

그 후에는 그가 왔다 갈 때마다 이런 맘으로 맞고 보냈다.

차디찬 생활-생각만 하여도 소름이 끼치는 그 차디찬 생활, 나는 거기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가? 잠깐 내게 비쳤던 그 빛은 어디로 갔는고, 낮이 다 지나가고는 저녁과 밤이 오지 않을 수 없는가? 어떠한 잔혹한 일이냐! 어떠한 포학한 일이냐! Y는 마침내 가려는가? 가지 않으면 안 되는가? 무슨 힘이-무슨 권세가 내게서 Y를 빼앗아 가려는가. 나는 그만 찬 생활로 들 수밖에 없게 되었는가? 나는 다시 어둠 속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가? 아.아.

나는 내 일과 비슷한 소설을 구하여 거기서 위로를 얻으려고 먼저 다눈치오의 《프란체스카》를 보았다.

파오로의 애인 프란체스카가 싫어하면서도 파오로의 형에게 시집갔다가 마지막에 파오로와 정사(情死)하던 것. 거기서 내 번민에 대한 해결은 손톱눈만름도 못 얻었다. 그 다음에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불쌍한 사람》을 보았다. 마칼의 애인 봐링칵가가 자기가 사랑하지 않는 어떤 사람에게 맘 없이 시집을 가고, 마칼의 부르짖음으로 끝난 것. 《프란체스카》보다 번민은 좀 잘 그렸어도 이도 역시 불만으로 돌아갔다. 유도무랑(有島武郞)의 《선언(宣言) 》을 보았다. 주인공의 애인이던 여자가 주인공의 벗에게로 가고 만 것을 그렸으나 맨 끝은 참 웃음나게까지 함부로 되었다. 그 밖에 몇 가지를 보았지만 나의 번민은 더하여 갈 뿐이지, 조금도 위로는 얻지 못하였다.

소설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한 나는, 인생의 활사실(活事實) 가운데 내게 유사점이 있는 것으로 내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걸핏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나와 Y밖에 다른 Y라는 여성의 사실이다. 그 Y도 어렸을 때에 어떤 집 아들과 약혼을 하여 두었지만, 그 Y가 S여중학교를 졸업할 임시에 어떤 다른 사람과 연담(緣談)이 일어나고, 자기와 약혼하였던 남자의 집안에는 대대로 긴 병이 전하여 내려오므로, 그 Y는 새로 연담이 일어난 집으로 가려 할 그때에, 전에 약혼하였던 그 사람의 집에서 굳센 담판이 일어나므로 그만 Y는 그 집으로 갔지만 지금은 자기의 생활에 만족할 뿐 아니라 어떤 여자든지 자기만큼 복받는 이는 없으리란 말까지 한다. 그 Y와 이 Y. 그 사이의 경우가 무엇이 다를까? 그렇다! 나와 Y도 1년만 지나면 이전에 자기 생활 가운데 이 '나'라는 사람, K라는 사람이 있었던지도 모르게 되지 않을까?

어떤 이유냐? 왜?

찬 생활을 바라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더움을 주고, 다스한 맛을 보려고 친척(親戚)을 희생하고 내 몸까지 산제사로 바치고 겨우 맛을 보려던 나에게는 잠깐 보인 것까지 거두어 가는 것은…… 왜? 어떤 이유로.

나는 누리를 저주하노라. 인생을 저주하노라. 그리고 신을 저주하노라.

낙담에 낙담을 쌓은 나는 종내 죽기로 결심하고 어떤 맑은 날 저녁에 반월도(半月島)로 건너갔다. 의복을 언덕에 벗어 놓고, 나는 얕은 물에 들어가 누웠다.

지금 생각하여도 그때 나는 참 죽을 맘으로 그리하였는지, 혹은 흥분된 끝에 앞뒤를 헤아리지 않고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이것이 사실인 것을 나는 보험(保險)한다.

죽음-이것이 모든 것의 끝이라 한다. 자살하는 자는 바보라고 언젠가 나도 밝히 말한 적이 있다.

그렇지만 이것도 필경은 나에게 엽전 한 푼어치라도 '바람'이 있을 때에 한 말이다. 세상이 나를 버리고 내가 세상을 버리고, 내가 친척을 버리고 마지막에는 온갖 것을 저주한 뒤에 세상을 뒷발로 차서 던진 내게야 삶이 무엇에 쓸 데가 있을까!

작은 물결은 찰싹찰싹 나의 왼편 뺨을 와서 친다.

이때에 나는 공상의 세계로 들어섰다.

-내가 죽는다.


-그리고 Y는 시집간다.


그때에는, Y는 어찌 될까?

-Y부부(夫婦)는 나를 비웃는다.


-나는 죽어도 고혼이 된다.


안 되었다 하고 나는 공상을 바꾸었다.

-나는 죽는다.


그때의 Y는?

『나로 인하여 죽었구나, 내가 시집을 간다고 죽었구나. K씨! 왜 돌아가셔요? 나는 시집 안 갈 터이니 다시 살아나 주시오!』

-Y는 울었다. 그리고 내 무덤에 와서 자복을 하고 자결을 하렷다.


-회한의 정.


『아-K씨! 잘못했어요. 용서하십시오. 제가 잘못 하였어요. 이렇게 된 것도 못생긴 저 때문에.살아 주셔요. 그리고 해로(偕老)하지요』

나는 혼자 슬퍼서 혼자 울었다.

밀물이 오르는지 작은 물결이 코에 남실남실하는 고로 나는 자리를 바꾸려고 일어났다.

그때에-내 눈에 비친 것은 깎아 세운 듯한 청류벽(淸流壁)의 천국 담장을 연상시키는 바위들이다. 이 경치는 이유 없이 '살아야겠다'하는 생각을 내 머리에 넣어 주었다.

그 다음 순간, 내 눈에 비친 것은 청류벽 아래 그늘로 작은 물결들을 타고 떠 가는 청년 남녀 철학자들을 실은 요리배이다.

『어화둥둥 내 사랑. 이리 보아도 내 사랑, 저리 보아도 내 사랑.』

그 배 가운데 여철학자가 목청을 높여 사랑가를 부른다.

(그렇다! 사랑! )

어떤 큰 철리(哲理)의 번개가 번쩍 머리를 지나간다.

나는 언덕으로 뛰어 올라와서 모래 위에 번듯 누웠다.

'나는 살았다'고 갑자기 기뻐졌다.

붉은빛에서 찻빛으로 차차 흙갈색으로 청갈색으로 푸른빛으로 남빛으로 변하는 하늘은 멀리 높이 걸려서 나 같은 사람은 주의도 하지 않는 듯이 내려다본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안드레가 전장에서 넘어져서 푸른 하늘을 쳐다보면서, 저 하늘에 비하면 나폴레옹은 참 조그마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의 맘이 나의 지금과 같지 않았을까.

개바락별이 서편 하늘에서 반짝거린다. 순간 순간에 차차 빛이 더하여 오는 현월(絃月)은 나와 꼭 맞은편 하늘에 웃고 있다. 강물은 쌀쌀 모래 위를 걸어다닌다.

그 '쌀쌀'소리가 차차 변하여 싸르럭싸르럭하다가 마지막에는 '살아라, 살아라'한다.

그렇게 듣고 보니 강물만 그러지 않는다. 바람도 풀 틈을 꿰고 달아나면서 '살아라 살아라'한다. 능라도(綾羅島) 다리 아래로 나오는 바람도, 바람과 싸우는 물결도, 청류벽의 바위도, 모란봉의 작은 솔도, 을밀대(乙密臺) 앞의 늙은 솔도 모두 내게 '살아라 살아라'한다.

갑자기 '살아라 살아라'의 오케스트라 합주가 시작되었다. 그 곡조가 어떠하였었는지 못 기억하나 어떻든 살라는 것을 표현한 장엄한 멜로디였다.

허파가 터져오도록 그 속에 기쁨을 가득 채워 가지고 돌아왔다. 길에서 나는 사람을 보는 이마다 그들을 불쌍하게 여겼다. 나는 그들보다 무엇을 더 아는 듯하여-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그들보다 한층 높은 사람이라는 자신을 가지고 우쭐럭우쭐럭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는 Y에게서 편지가 와 있었다.

-시월 아흐렛날 가게 되었다.


-어찌 하여다고.


나는 시재 그 기쁨이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편지는 목척(木尺) 한 치짜리가 없을 이만큼 잘게 찢어져 내어던졌다. 성이 상투 끝-아니 머리칼 끝까지 났을 때에 나는 다시 아까 그 기쁨을 맛보고 싶은 생각이 났다. 그래서 아까 일을 차례차례 생각하여 보았지만 한 마디 뒤에는 시월 구일 생각이 나서 종내 못 하였다.

나는 성 김에 방안을 둘러보고 시계를 벽에 내어던졌다. 시계는 '데가닥!'깨어져 내려졌다.

아아. 나는 그만……나는 그만……다시……다시…… 이것이 어젯밤 일이다.

형님!

아뢰일 일은 다 아뢰었읍니다.

형님이 이것을 보시고 비웃을는지 모르지요. 흉보실는지도 모르지요. 어떻든 그 속에 한 푼어치의 동정이라도 있으면 저는 그것으로 넉넉히 여기겠읍니다.

일기에서 여기 저기 뽑아서 보내오니 보아주소서.

K C형에게.

'K의 일기의 여기저기'

4월 6일

[편집]

봄날두고도 별로 갑갑한 날이다.

저녁을 먹고 참다 못해서 뛰어나갔다.

서문 밖을 나서서 무슨 생각을 한 것 같지만 생각이 안 난다. 무슨 대단히 재미있고도 쓸데없는 생각이었었다.

어느 길로 어떻게 다녔는지 모르지만, 앞에 시꺼먼 것이 있기에 쳐다보니 도로 서문으로 들어왔다. 서문 안을 들어설 때에 무슨 좋은 노래가 들리기에 쳐다보니, 기흘 병원 3층 다락문으로 내다보는 두 여학생이 있으니, 노래는 거기서 오는 것이었다.

이름 높게 나타난 알프스의

나뭇잎에 맺히는 아침 이슬,

방울방울 서편으로 구울러서는

맑은 라인 강의 물이 되고,

살짝 불어 오는 새벽 바람이

동편 쪽으로 날아갈 때에

은빛 구슬은 찰싹찰싹

도나우 시내에 떨어지도다.

이바노비치의 '도나우의 줄기'를 그들은 부른다.

나는 눈을 멀거니, 아니 머리가 멀거니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문사가 못 되므로 내 속을 형용할 수 없지만, 억지로 하려면 목욕물에 석유를 두어 통 붓고 홍엽남백흑(紅葉藍白黑)의 물감을 풀어 놓은 뒤에 그 물에 오장 육부를 활활 씻는 것 같다고밖에 말할 수가 없다. 나는 얼마나 거기 섰었는지 알 수 없지만 집에 돌아와서도 역시 불을 켜고 눈을 멀거니 그 앞에 앉아 있었다. 그믐 어두운 밤, 싫다도록 밝은 빛을 밖으로 내어보낸 창 밖에 아름다운 두 처녀의 머리! 불은 입술에서 나오는 그 노래! 이 활인화(活人)!

그렇지만 나는 갑갑하다-쓸쓸하다. 이 활인화가 내게 무슨 관계가 있는고-그들은 그들, 나는 나. 그들이 그 노래를 내게 들으라고 부른 바도 아니고.

아! 나는 그만 고독으로 나의 삶을 끝내야 하는가!

5월 24일

[편집]

보름달은 뽀얀 내와 김 위로 솟아올랐다.

산보갔다가 학교 앞을 지나올 때에, 거기 M과 B 두 사람이 서 있다가 나를 보고 찾는다.

『아. K선생, 어디 가시오? 일 없으면 이야기나 좀 합시다그려. 달도 밝구……』

나는 말없이 그편으로 갔다.

『그것이 다 무슨 걱정이야!』

아까 하던 대화의 연속으로 M은 B에게 말하였다.

『무슨 이야기요? 나도 좀 들읍시다그려.』

나는 말을 가로채었다.

『아-니, 무어 쓸데없는 이야기. B선생이 저고리가 좀 크다기에 말이에요. 그깟것 썩썩 잘라서 하면 될 것.』

『기처(棄妻)하오. 저고리도 할 줄 모르는 마누라 두어 무얼하오?』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아니 B선생, 자기가 했기에 말이지. 썩 잘 한다오.』

『응, 그럼 기자기(棄自己)하였겠군.』

『하하하하!』

셋은 웃었다.

『기자기라니 어드런 것이야요? 왜 해보지.』

『죽어야지!』

나는 빨리 대답하였다.

『B선생이 죽으면 선생 부인이 울지.』

『부인은 울든 말든, 자-B선생, 아까 약속이니 기자기하오!』

『이거 야단났군.』

『야단났지. 자……』

『한데 K선생, 눈물이란 원 무어요?』

『응? 눈물? 이번은 내가 야단났군. 그런 큰 문제를 대답하나?』

『아이, 그러지 말구……』

『눈물이란 무어야, 소금물이지. 짜지 않다구?』

『하하하! 그러지 말구……』

『눈물이 란!』

『예.』

B는 나를 성화시킬 작정이다.

『어렸을 때엔 매맞으면 나구, 좀 커서는 욕먹으면 나구, 어른이 되어서는 매운 것 먹으면 나구……』

『아니, 그렇게 어리구 크구 구별 말구.』

『그럼 공통으론 연기(煙氣) 가운데 들어……』

『그러지 말래두……』

『정말루요?』

『예.』

『거기도 남녀의 구별이 있다오. 남자는 억울할 때야 나는 법이야! 그저 슬플 때는 안 나구 설글 때야 나구.』

『여자는?』

『여자는 쑥 하면 나오지, 대개는 칠정(七情)이 눈물을 꺼내지만 공연히 쑥 나올 때도 많아!』

『하하하하! 고마운 설명 반가이 들었나이다.』

『하하하하!』

우리들은 공연히 유쾌하여 허튼 소리를 하며 웃었다. 이때에 J교 여교사가 하나이 지나가다가 우리를 보고 인사하고 갔다. 우리는 갑자기 점잖게 되었다.

그는 Y다.

Y는 이상한 여자이다. 나를 보면 공연히 두려워하는 듯한 양을 보이며, 할 수 있는 대로 나와 만날 기회를 지으려 하며, 그러면서 외딴 데서 서로 만나면 인사도 안하고 못 본 체하고 뛰어가니, 그의 성질이 이런가 하면, 다른 남자들에게는 그렇지 않고. 생각할수록 이상한 여자이다. 알지 못해라. 그는 내게……

달은 땅 속 몇십 척까지 들이비치도록 밝다.

6월 7일

[편집]

Y는 나를 '러브'한다. 오늘에야 그것을 알았다.

어찌하여선가 내 손이 Y의 손에 잠깐 닿았다. 그는 빨리 손을 움츠러뜨리고 잠깐 나를 쳐다본 뒤에 얼굴이 빨개져서 도망하였다.

종내 내게도 이런 일이……종내!

그렇지만-이것이 나의 오해가 아닐까? 기다려라, 때가 있으리라.

6월 13일

[편집]

나는 일기를 쓰기 전에 이것이 꿈이 아닌 것을 증명하여 두겠다.

오늘 Y는 나를 찾아오겠다고 약속하였다.

내가 그에게

『갑갑하면 놀러 오시오』

천연히 말할 때에, 그도

『가겠읍니다』

고 천연히 대답하였다.

이 세상의 모든 비밀한 일, 모든 위험한 일이 모두가 이 '천연히'라는 가면 아래서 성립된다.

나는 집에 돌아와서 과자를 사다가 주인에게 맡기고

『내가 가져오랄 때에 곧 가져오라』

고 부탁을 한 뒤에 돼지우리같이 더러운 방을 멀끔히 치워 놓았다.

다 치운 뒤에 면경을 보니, 머리는 먼지투성이다. 그것을 빗질을 한 뒤에 머리에 바르려고 사다 두었던 향수를 방안 여기저기 뿌렸다. 그런 뒤에 방안을 거닐기 시작했다. 동서로나 남북으로나 세 걸음이면 끝나는 방안을 왔다갔다 나는 몇 십 리나 걸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 사이 시계를 마흔 번 이상은 꺼내어 보았지만, 시간을 의식 있게 보기는 다섯 번 이상이 되었다. 맘속에서는 죽을 쑨다. 부글부글 끓다가는 펄쩍 한 번 뒤집히고, 뒤집힌 뒤에는 또 끓고.

4시 좀 지나서 Y가 왔다. Y가 오면 필연코 마음이 끓으리라 생각했더니, 오고 마니 맘은 별로 내려앉는다. 자리에 서로 마주 앉으면서 나는 준비하였던 말을 물었다.

『대단히 고단하지요? 어린애들이라니 참……』

『네, 좀 그렇긴 해요.』

『한 1년 지나면 모르게 되지요.』

『그렇겠지요.』

그의 대답은 모두 너무 간단하였다.

『네, 그래요.』

나는 준비하였던 말이 없어진고로 그 말을 거푸하였다.

한참 말없이 앉아 있었다. 사람의 침묵은 온갖 장애물을 쳐 물린다 한다. 한참 말없이 앉아서 눈의 정력만 서로 왔다갔다하는 사이에 우리는 좀더 가까와졌다.

과자가 들어왔다. 나는 과자를 Y에게 밀어 놓고, 좀 나 앉았다. 무릎과 무릎 사이에는 목척 반 치가 못 되도록 가깝게.

『자, 잡수십시오.』

하고 나는 먹기 시작하였다. 그도 하나 집어갔다.

『오늘이 오월 단오지요?』

멀리서 매화포(梅花砲)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그가 말했다. 나는 말 문제가 났기에 곧 대답했다.

『네, 평양서 단오 구경 못 하기 몇 해째나 되십니까?』

『6년째야요!』

그의 입은 조금 웃는다.

『네. 오늘두 구경 못 하셨지요?』

『네, 할 틈이 있어야지요.』

『그렇지요. 오늘이…… 목요일…… 모레가 토요일이죠! 그날 구경 갈까요. 기자묘(箕子墓)에 오르는 날……』

『가지요……그러다가, 학생들이 보면 선생두 간다구……』

『그렇긴 하지요……』

말하는 동안에 무릎의 전쟁은 여러 번 일어났다. 내가 무릎을 가만히 그의 무릎에 댄다. 무엇인지 모를 것이 찍! 내 무릎에서 약하게 떨리며 그의 무릎으로 가고 그의 무릎에서 내게로 온다. 좀 있다 그는 슬쩍 무릎을 치운다. 좀 있으면 내가 갖다대지 않는데 그의 무릎이 가만히 내 무릎으로 온다. 입으로는 뚱딴지 이야기! 왔다갔다하는 두 사람의 무릎은 이와 같은 원정(遠征), 퇴각(退却)이 생긴다. 참 20세기가 아니면 없을 풍자적 일이다.

닿다 떨어졌다 하던 무릎은 차차 변하여 단단히 닿았다 가만히 닿았다 하게 되었다. 그의 떨림은 내게까지 전해와서 멈출 수 없이 다리가 부르르 논다. 무릎은 이와 같은 일이 있는 사이에 입으로는 이런 말이 교환되었다.

『오늘이 백이 숙제가 죽은 날이라지요?』

『그럽디다.』

나는 대답하였다.

『왜 그리 유명하게 되었는가요?』

『아마 나라에 대한 충절로 그렇지요. 왜-우리 나라에서는 백이 숙제의 충절과 춘향이의 정절을 함께 유명하게 말하지요?』

『춘향이가 어느 때 사람인가요?』

『모르지요-소설이니까.』

『춘향이가 이도령과 이별할 때가 아마 열 여섯 살이라지요?』

『네, 열 여섯.』

『나 같으면 그러지 않겠읍니다.』

『그럼 어떻게 하구요?』

나는 웃으면서-속으로는 맘을 뛰놀리면서 물었다.

『따라가지요!』

『어떻게요?』

『그까짓 걸 못 따라가요?』

『Y선생!』

『네?』

『그런 이별을 하셔 본 적이 있어요?』

나는 천연한 낮으로 웃으면서 물었다.

『그런 이별이라니요?』

『춘향이와 같은 경우의 이별.』

『제게 그런 일이 언제……K선생님은?』

『물론 없지요.』

그 뒤에는 큰 웃음. 말은 춘향전에서 양산백전(梁山伯傳)으로 건너갔다. Y는 자기가 추랑대(秋娘) 같으면 물론 암자(庵子)에서 도망도 안 하고, 설혹 하였다 하더라도 양산백(梁山伯)을 죽게까지 안 한다 하였다.

나도 내가 만약 양산백이었더라면 추랑(秋娘)을 빼 가지고 도망을 할지언정 죽지는 않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천연한 낯으로 슬쩍 쳐다보면서 말했다.

『우리 서로 추랑대, 양산백이라 할까요?』

그는 '농담이지요'하는 듯한 웃음을 생긋 웃고도, 갑자기 낮을 붉히며 딴 데를 향한다.

나의 계획은 들어맞았다. 그는 부끄러워한다.

5시쯤 Y는 돌아갔다. 그는 왜 갔는지? 부모 있는 그는 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 하면서도 이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남은 날은 그저 황공히 지냈다.

일기를 쓰는 지금도 무릎 위에서는 전류가 왕복하는 것 같다. 아까가 10년 전 같기도 하고 꿈 같기도 하다. 마침내 이것이 내 몫에 돌아왔다. 매양 바라고, 또 바라고, 친척을 희생하고 바라고, 내 몸의 한 부분을 바치고 바라고, 바라다 못하여 그만 낙담하고 세상을 비관하고 단념하고 말았던 것도 이것이다. 잘 때나 깰 때나 먹을 때나, 깊이 내 맘속에 싸고 싸고 또 싼 그 속에 조그만 무엇이 순화되는 것도 이것이다. 젊은 부부를 보며, 아름다운 처녀를 보며, 노자 노자의 기생을 볼 때에, 내 몸 속에서 움직이던 그 약하고도 강한 맥박도 이것 때문이다. 매양 나오던 한숨도 역시 이것 때문이다. 마침내……(아래는 지움)

여기까지 쓰매 흥분으로 손이 떨려서 더 못 쓰겠다.

저 멀리서는 매화포 소리가 쾅쾅 난다. (12시 15분)

6월 14일

[편집]

동산 위에 사람꽃 피었다. 명절의 등산인들-희게 붉게 은향색으로……그네줄에 춤추는 나비, 소나무 아래 웃는 사람꽃……1년 만에 기다리고 기다려서 차리고 나선 이 여자들.

나의 맘에 사랑꽃 피었다. 둥그렇게 분홍빛으로 아름답게-머릿속에서 돌아가는 이 사랑의 안개, 가슴 속에서 뛰노는 이 사랑의 고동……몇 해를 기다리고 바라다가 겨우 얻은 이 아름다움.

청류벽 아래를 헤어내려가는 그 고운 배들……모란봉 위에서 속삭이는 그 어린 풀들, 능라도에서 아래로 흐르는 물을 재는 그 늙은 수양버들, 거리 위에서 높이 떠서 웃는 해……이 모든 아름다움. 오! 아름답기도 아름답거니와……(아래 지움)

6월 23일

[편집]

서울 있던 줄만 알았던 C가 그 특식(特式)의 웅웅 울리는 소리로 투덜거리며 찾아왔다.

『응! 우리 나라 문사같이 불쌍한 놈은 없어!』

『C군! 언제 내려왔나? 그 동안 살쪘구먼!』

그가 앉아서 이야기한 바는 C를 위하여 뿐아니라 우리 사회를 위하여 근심한 바이다.

그는 이런 이야기를 하였다.

나는 서울 있을 동안에 논문 하나와 창작 하나를 썼다. 나는 아직껏 무엇을 쓰든지 벗들의 발행하는 잡지에만 발표하였지만, 이 모든 물가 비싼 때에 그리만 할 수가 없어서 논문을 어느 신문사에 가지고 가니까 허락하더니, 원고료 문제가 일어나매 그것은 뜻도 안 하였던 바라고 물리친다. 그 뒤에 창작을 어떤 서점으로 가지고 가서 사라고 하니까, 뭔고 8백 장이나 되는 것을 백 원만 주겠다는고로 도로 가지고 돌아와 버렸다. 서양서는 원고 한 장에 수백 원 씩이나 하고, 일본서도 한 장에 십여 원을 하는데, 이것이 무슨 일이냐-우리 나라에서는 너무 문예를 낮게 여긴다. 그래서 나는 고향에 내려가서 벗들의 보조를 얻어 자비 출판을 하려고 내려왔다. 이제 방금 여관을 잡고 오는 길이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이런 말을 들으면 좀 농담으로라도 대답하겠지만, C를 보면 알지 못하는 가운데 존경의 생각이 나서 별로 미안하여진다. 그래서 그것 고생이겠다고 대답하었다.

C는 현대 우리 문단에 대해서 내게 설명하여 주었다.

문단이라는 것이 물론 없지만, 지금 이것을 문단이라고 칭하면 지금 있는 창작계라는 것은 참 허튼 것이다. 왜 소설이라는 소설은 모두 연애 결혼 주창의 무기에만 쓰느냐-대밭에 죽순과 같이 나오는 소설은 모두 연애 결혼 주창의 논설뿐이니, 아마 우리 나라에서는 문학 소설이라는 것을 그것으로 아나 보다. 그 원인은 맨 첫번에 문학 소설이란 이름으로 발표한 사람-실로는 통속 소설이지만-창작 몇 가지를 모두 혼인 문제로만 하므로 그 중독을 받았음이다. 간혹 딴 문제로 쓰는 사람이 있어도 그 구상의 더러움, 그 배경-내용의 문제-의 '범위를 좁게 잡음, 묘사의 유치는 참 구역난다.

이 말을 듣고 나도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별로 통쾌하다. 내가 하고 싶던 말을 그가 다 한 것 같다. 나도 전부터 소설들에서 결점 없는 것은 못 보았지만 어떤 결점인지 몰라서 모른 체하고 있었다.

그는 이야기를 다 한 뒤에 물끄러미 나를 들여다보다가,

『자네 맘속에서 무얼 다투지 않나?』

하고 물었다.

그렇다. 참으로는 다투고 있었다. Y의 이야기를 그에게 하려 하였다. 그럴 때에 맘속의 어떤 자는 그것을 막는다. 나는 다투고 있었다. 문학자의 날카로운 눈으로 그는 이를 간파하였다. 이래서 나는 C를 무서워한다.

『무얼 다투어?』

나는 천연히 대답하었다.

『그만치 놀았으면 이제 갈까? 심심하면 놀러오게. 또 원고 보려면 보게.』

그는 원고를 두고 갔다. 그 원고의 논설은 이런 것이다-우리 나라의 며느리는 참 불쌍하다. 시집가서는 하녀 이상의 부림을 받고, 하녀 이상의 부자유로 살고,

다만 하녀보다 좀 나은 것은 밖에 나갈 때에 좀 잘 입는 것이다. 그 집 아들과 함께 있고, 주인이라는 명의를 가진 것뿐이다. 여기 만약 흔히있는 일과 같이 남편으로서 그릇된 일을 하거나 흥망을 하였다고 가정할까-다만 하나 믿고 있는 남편을 잃고, 하녀의 맛보지 못하는 타는 시기를 맛보고, 하녀의 맛보지 못하는 독수 공방이라는 괴로움을 맛보고, 남 모르는 속을 끝없이 태우나니……연애를 해방하기 전에 먼저 이를 해방하라. 온 천하의 '며느리'를 해방하라. 먼저 너회의 영(靈)을 해방하고-그리고 온 천하의 며느리를 해방하라.

이런 이야기를 그 특유의 풍자를 섞은 날카롭고 시고 가렵고 쏙쏙 쏘는 통쾌한 글자로 내리썼다. 이를 보매, 저절로 손뼉이 쳐진다. 그러면서도 얼굴이 붉어진다. 내게도 이런 일이 있다. 그가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쓴 것 같다.

소설도 보려 하였으나 너무 긴 고로 틈 있는 때로 미뤘다. 저녁을 먹고 불을 켜 놓은 뒤에, 심심하므로 공상으로 Y의 낮을 그려놓고 그 너무 큰 눈을 좀 작게 하고, 삼각형 세워 놓은 듯한 이집트의 스핑크스와 같은 상을 달걀 모양으로 고치고, 그 공상의 상에 손으로 키스를 보내면서 혼자 사랑스러워서 웃을 때에 Y의 소리가 문 밖에서 난다. 구두소리가 바작바작 차차 가까와 온다.

그가 들어설 때에 나는 맞받아 나가면서 그를 꼭 껴안았다.

그의 숨찬 호흡, 그의 약하게 떨리는 몸-이를 나는 내 팔로써 감(感)하였다. 그는 한참이나 뿌리치려고도 하지 아니하고 숨찬 숨을 쉬면서 내 팔 안에 꼭 박혀서 떨고있다가,

『왜 이러세요?』

하면서 내 팔을 벗어 나가서 방그레 웃으면서 나를 쳐다본다.

Y는 미인이다-원체 애교있는 입에서 흐르는 부끄러움의 애교-두 큰 눈에서 쏟아져 나오는 기쁨의 폭포, 그가 웃을 때는 삼각형을 세워 놓은 듯한 낯의 윤곽까지 곱게 반원형으로 된다. 이런 때의 Y를 보지 못한 사람은 Y의 참표정을 알 수가 없다.

『그래선 안 되어요!』

그는 내 채플린식 수염을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그 말투는 한번 더 그래 달라는 것 같다.

나는 두 번째 달려들어서 그를 껴안았다. 그는 뿌리치는 체하면서-실로는 뿌리치지 않으면서 나를 맞는다.

내 뺨은 부드러운 주단(紬緞)보다도 더 부드러운 그의 뺨 위에 뛰논다. 내 입술은 그의 붉은 입술 위에서 불붙는다. 얼마 동안이나 이랬는지 한참 뒤에,

『누가 보면 어째요!』

하는 모기 소리만한 Y의 소리에 생각이 나서 그를 놓고 그의 낮을 들여다보니 낮에는 핏기운 없이 하얗지만 모란봉 기린굴(麒麟窟) 만큼이나 크게 보이는 시꺼먼 그 두 눈에서는 기쁨의 번개가 탁탁 내 눈을 쏜다.

『Y씨!』

『네?』

둘이는 마주보고 벌씬 웃었다. 이 한 마디의 말과 이 웃음이 우리들이 하고 싶던 모든 말을 대표한 자로, 나는 그의 생각을 알고 그는 나의 생각을 안 셈이다.

한참 있다가 아까 일은 다 잊은 듯이

『산보나 가십시다그려.』

하고 그가 청하였다.

『그럽시다.』

하고 들이는 보통문(普通門)으로 갔다.

둥그렇고 크게 낮추던 보름달은 그 붉고 푸른 빛을 물살 빠르게 흘러가는 보통강(普通江)위에 내리비치고 있다. 똘똘 좔좔 빠르게 흐르는 물은 달빛을 반사하여 물결마다 푸르게 반짝이며 황해로 달아난다.

한참 말없이 그것을 내려다보던 Y는 후 한숨을 쉰다.

『K선생님!』

『네?』

『돌아갑시다.』

『왜요?』

『별로 슬퍼져요. 저 물을 가만히 들여다보니깐, 저절로 눈물이 옷깃에 떨어져요.』

그럼 가자고, 나는 Y를 그의 집까지 보내고 돌아왔다.

집에서 C의 원고를 보렸지만, 그만 글자 위로 걸어다니고 맘은 딴 데로만 가서 그만 접고 말았다. 나도 왜 그런지 뜨거운 눈물이 옷깃을 적시고 이유 없는 '슬픔'이 가슴 속에서 휘도는고로, 이즈음 Y에게서 배운 슬픈 노래를 속으로 읊으면서 나와 Y의 앞에 행복많기를 하나님께 빌었다.

6월 24일

[편집]

C와 함께 있는 것은 재미있다. 거기는 정신상의 오락-물론 그와 함께 있을 때에는 정신상 압박도 적지 않지만-이 있다.

Y와 함께 있는 것도 재미있다-오히려 C와 보다 더 즐겁다 할 수가 있다. 그렇지만-아, 쓰기도 싫다.

『너는 Y에게서 무엇을 구하느냐? 정신상 오락보다 오히려 정욕의……』

뉘가 내 귀에 속삭이는 것 같다. 아! 나는 Y에게서 정욕의 만족을 구하지 않았는가?-정신상 즐거움보다도 오히려!

내가 그와 좀 정답게 이야기하게 된 다음에 첫번 물은 말은(?)

『잉태하면……』

이 아닌가!

그가 자기는 어려서 몹시 자궁병을 앓아서 그만 새끼집을 잘라 내었다고 대답할 때의 나의 안심은 무엇을 의미함이댔는가?

아! 쓰기도 싫고 말하기도 싫지만, 내가 그에게 구한 바는 정욕의 만족에 지나지 못하였다. Y에게 대한 나의 사랑은 역시 그 실로는 육의 사랑에 지나지 못하였다. 정신상 즐거움! 육에서 활동하다가 남아서 넘쳐 흘러 정신계에 들어온 밖에는 나와 Y의 사이는 정신상 즐거움이란 한푼어치도 없었다.

Y와 만나기 전에 그 모든 로맨틱한 그리움, 그것은 모두 어디 갔는가? 우주 낙관을 주창하는 그 아리따운 기생의 노래, 여학생을 볼 때에 그 로맨틱한 그리움, 젊은 부부를 볼 때에 그 로맨틱한 시기, 누리를 둘러볼 때에 그 로맨틱한 슬픔, 내 앞길을 내다볼 때에 그 로맨틱한 근심. Y로 인하여 잃어버린 이 모든 로맨틱한 동경, 그립기도 그립지만……

그렇지만 나는, 그래도 전의 그 찬 생활로 돌아갈 수가 없고 그대로 Y와 이별할 수가 없다. 이제 만약 Y로서 나를 떠난다 하면. 나는 그 뒷일을 상상할 수도 없다. 그때의 나의 생활은 참 '제로'일 것이다.

Y여, 영구히 나를 떠나지 말라! 나를 불쌍히 여겨서라도 떠나지 말라! 한 개의 인명을 손하지 말라! 지금 육의 사랑도 언제든 참사랑으로 변할 때가 있으리니 부디……

(아래는 지움)

6월 29일

[편집]

Y가 닷새째나 안 온다.

그제는 너무 성이 나서 잠도 밤새도록 못잤다. 어제는

『오늘이나 올까?』

하고 의관을 한 채로 정신 나간 놈같이 일어섰다 앉았다 하면서 밤까지도 그를 기다렸다. 오늘도 얼빠진 놈같이 우두커니 문을 열고 뜰만 내다보고 있었다. 누가 보았으면 필연코 웃었으리라.

Y 없이는 나는 못 살겠다.

6월 30일

[편집]

일요일, 오후에 Y가 찾아왔다. 나는 반가움과 성남으로 말없이 앉아 있었다. (이때 일을 좀 똑똑히 기억하여 두리라.)

Y는 이렇게 변해(辨解)하였다.

『육촌 오라버니 되는 이가 찾아와서 그이 대접하느라고 그 사이 못 왔어요.』

그는 내 대답을 들으려 함인지 숨을 들이쉬려 함인지, 잠깐 말을 끊었다가 내가 아무 말도 안 하는 것을 보고-혹은 자기 목적을 달하였는고로 다시 말을 잇는다.

『그 오라버님은 참 친절한 이댔어요. 특별히 제겐 더 친절히-제가 지금 차고 있는 이 시계도 제가 R학당을 졸업할 때 오라버님이 사다 준 거예요.』

(에게, 이 줘.) 내 머리에 번뜩 이 생각이 지나갔다.

『하고 사람도 잘났지요. 지금 무역상으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근 반 년 만에-오래간만에 집에 찾아왔어요. 사람도 잘나고……』

『그렇겠지요. 나 같은 것보다야 잘났겠지요.』

나는 종내 독 있는 말로 그의 말을 끊었다. 그는 무슨 말인지 똑똑히 뭇 알아들었는지 나를 쳐다본다.

『그래요……Y씨가 그렇게까지 그러는 것으로 보아도 나 같은 것보다야 낫기에……』

그는 연하여 나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말을 못 들었는지, 말을 못 알아들었는지, 알아들었어도 무슨 뜻인지 못 알아들었는지, 알고도 모르는 체함인지, 흑은 내 참뜻을 알아봄인지, 한참이나 나를 쳐다보다가,

『온, K씨두……온……』

하며 외면을 한다. 그의 긴 턱과 귀를 넘어서 조금 보이는 두드러진 광대뼈가 내 눈에 보일 때에 나는 무한 그가 미웠다-때려 주고 싶기까지 하였다. 나는 전력으로 이 마음을 참았다.

측면으로 보이는 그의 인두(咽頭)가 올라왔다 내려왔다 하다가 머리가 수그러지고 이상한 한숨 소리가 들린다. 나로서 만약 여자의 우는 것을 처음 보았다 하면 놀라서 그에게 사죄를 하고 그를 위로하였으련만, 나는 여자의 울음이란 공연히 잘 나오는 것을 알므로 그를 흘겨만 보고 있었다.

『온……K씨두 심하지……절……온……육촌 오라버니와 절……온……K씨두……』

그는 눈물을 씻고 일어섰다. 이때에 이상한 것은 수만근 되는 철퇴가 내 머리에 내려 부순 것 같다. 그보다 더 이상한 것은 내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또 한 방울 똑똑똑똑 참가슴에서 짜내는 쓰린 눈물이 방안에 떨어진다.

(곡해(曲解)! 아니 곡해도 아니다. Y의 속을 알면서도 공연히 내 심장을 썩이며 시기를 우정 하여서 내 마음을 썩이며 내 애인 Y의 마음을 썩이느냐? 잘못은 내게 있다. Y가 무엇을 잘못하였느냐? )

나는 뛰어 일어나서 Y를 붙들고 사죄를 하였다. 벌겋게 부은 눈 아래서 웃는 그 아름다운 눈동자.

폭풍우가 지난 뒤의 날은 별로 더 고즈넉한 것이다.

나와 Y사이는 참즐거움-정신적 즐거움이 고즈너기 왔다갔다한다. 우리는 평양 감사 부럽지 않은 안락으로 고즈너기 날을 보냈다.

아! 정신상 즐거움, 때때로 머리를 드는 이 참사랑으로 Y와 나는 맞매우고 싶다. 육을 떠나고 속(俗)을 떠나고 인정을 떠나고 인간적을 떠난 이 이상의 순간이-이 참의 순간-이 순간-이 연속되어 시(時)로 되고 일(日)로 되고 연(年)으로 되어, 우리 두 사람으로 하여금 그 위를 걷게 하여 육적(肉的) 속적(俗的)인 우리 사랑으로서 신성한 이성적 사랑으로 변케 하면, 아-그때는……그때는……나는 누리에 대하여 포고(布告)하리라.

'오. 나는 너희보담'이라고……

C는 출판할 비용을 구하여 가지고 오늘 첫차로 서울로 올라갔다.

7월 4일

[편집]

덥다. 일기가 꽤 더워졌다.

시뻘건 해가 머리 위에서 곧추 내리비친다. 꽤 덥기는 덥다.

이와 함께 Y와 나의 사이도 꽤 더워진 모양이다.

아직까지는 주의가 채 미치지 못하였지만 오늘 B선생이 웃으면서

『K선생, 좀 주의하시오. 벌써 쭉 퍼졌다오. 생도들도 다 아는 모양입니다.』

라고 할 때에 내 몸을 살펴보니 과연 주의할 필요가 있다.

내가 생도들에게 '배꼽 눈'이란 별명은 있을지언정, '계집 버린 놈'이라는 흥들은 보일망정, 생도들에게 대하여는 참 진실한 선생이댔다. 특별히 수학과 이과는 내가 교수 한 아이들은 다른 교사에 배운 아이들보다 얼마 우승하다는 것은 사실이 증명하는 바이다. 나는 이것으로 생도들에게 존경을 받고 교장에게 감사의 하례를 받더니, 지금은 내가 가르치는 시간은 생도들은 하품만 한다. 나는 전과 같이 이론적으로 똑똑히 가르치지 않고 '책에 이렇게 썼으니 알아야 한다. 또 실지상 연구해 보면 역시 이렇다. 그러니 즉 이렇다'는 논법으로 그들에게 임하였고, 만약 어지러운 질문을 어떤 생도가 내게 발하면 나는 거기 대답은커녕 오히려 그를 벌하였다. 전에는 그들이 너무 갑갑해할 때는 시간을 쉬어 주고 유희를 하였으며, 어떤 때는 모란봉 기자묘로 산보도 다녔지만, 이즈음은 그들에게 가혹한 엄한 것만 내려 주었다.

전에는 하학한 뒤에는 교사들과 테니스를 회롱하며 학생들과 '진싸움'도 놀더니 이즈음 하학하기가 바쁘게 돌아오고 하였다.

빠지지 않고 다니던 예배당도 자주 빠지게 되었다.

전에는 학교를 무한 낙원으로 알고 거기를 가면 심심한 것도 꺼지며 성가신 것도 스러지더니, 지금은 학교에서는 눈살만 찌푸리고 있게 되었다. 전연 쉬는 날도 많게 되었다.

전에는 밤에는 벗들의 집에 가서 옛말들을 하며 즐기더니 지금은……Y의 벌거벗은 몸을 쓸어안고 그 붉은 입술에 입을 맞추며 육의 맛을 즐겁게 누리게 되었으니……그렇지만 난 능히 이 생활을 떠나 전 생활로 돌아갈 수 있을까?

Y가 있어서는 도저히 이전과 같은 규칙적 생활은 해 갈 수가 없고 Y가 없이는 당초에 생활을 할 수가 없다. B가 내게 주의를 하나, 학생들이 내게서 떠나나, 누리가 나를 미워하나, 나는 Y 없이는 생활하여 갈 수가 없다.

그렇지만 다만 의문인 것은 Y가 영구히 나를 버리지 않으려는지, 웬일인지 모르지만 나는 이즈음 자꾸 Y가 나를 버릴 것같이도 생각된다. 아니-벌써 나를 버린 것같이 생각되고 어떤 때는 나는 처음부터 Y를 사랑할 권리가 없고 나의 그 사이 행동은 남의 것을 횡탈(橫奪)한 것같이 생각된다. Y의 두 큰 눈이 내 눈 아래서 기쁨과 부끄러움으로 빛을 내면서 나를 바로 볼 때에도 나는 그를 바로 내려다보면서 이것을 감(感)하였다. 그의 붉은 심장이 내 가슴 아래서 뛰놀 때도 나는 이것을 감하였다. 그의 조(粗)하고도 아름다운 노래가 내 귀를 즐겁게 할 때도, 그의 굵고도 몽트락한 손가락이 내 손 속에서 움직일 때도, 그의 숨찬 숨이 내 입으로 날아들어올 때도, 그의 살진 어깨와 허리가 내 품 속에서 떨릴 때도, 그가 없을 때도 그가 있을 때도, 그가 보일 때도 안 보일 때도 이 생각은 약하나마 내 마음 속에 깊이 잠겨서 떠나지 않고 나를 괴롭게 한다.

7월 7일

[편집]

오늘도 11시에 일어났다.

Y도 눈두덩이 벌겋게 부어서 있다. Y를 보니 별로 멸시하는 생각과 사랑과 미움이 함께 일어나서 그를 껴들고 키스를 하였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다. 훌떡 쏘게 아프고 좀 있다 또 훌떡, 훌떡 훌떡 쏜다. 아-육의 환락 뒤에 일어나는 이 육체의 아픔, 그보다도 더 심한 마음의 아픔.

7월 8일

[편집]

어제 일기는 취소한다.

내게 마음의 아픔이 무엇이 있을까? 나를 사랑하는 여자를 내가 사랑하는데 그것이 육의 사랑이든 참사랑이든 관계가 무엇이며 마음의 아픈 것이 무엇이랴!

그러나-나의 의무는 다만 Y를 사랑할 것이지 그것이 무슨 사랑이든 분석기에 올려 놓아서 이렇다 저렇다 할 필요는 없다. '사랑'에는 '이론'을 허락치 않는다. 사랑이란 이를 해석하려 할 때는 벌써 그 신성한 점을 잃고 이적(理的) 속적(俗的), 여기저기 딩굴딩굴 구는 허튼 사랑이 되고 만다. 사랑-남녀의-은 끝까지 맹목적이라야 한다. 언제 C도 내게 이 말을 했다. 맹목적이라야 할 사랑에 육적이 영적이니 구별할 필요는 없다. 하물며.'영적(靈的)이라야 할 것인데 육적이 되어서 마음아프다'고.

또 육의 사랑이라면 어떻단 말이냐? C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남녀의 사랑이란 그 근원은 육의 환락에서 비롯하였다. 원시적 사람을 보라. 짐승들을 보라.

다정한 시인을 보라. 정에 날카로운 여자를 보라. 그들이 이 이성에서 다른 이성으로 또 다른 이성으로 사랑을 옮기는 것은-그 무엇을 의미함이냐? 정에 날카로운 사람은, 참환락의 삶을 맛보는 사람은, 참세정을 아는 사람은 사랑의 영적 육적 구별을 하지 않고, 영적보다 오히려 수적(獸的) 육적으로 그들의 참 '순(純)'을 발휘함이 아닌가-라고, 나도 이렇게 생각한다.

사랑은 맹목적이라야 한다. 이론적이면 못 쓴다.

C에게서 세 번째 번민이 있으면 기별하라는 글이 왔다. 어찌하여야 할지, 나도 모르겠다.

7월 9일

[편집]

『Y씨!』

『네?』

마주보고 서로 웃는다. 좀 뒤에 이번은 Y가,

『K씨!』

『네?』

또 웃었다. Y는 두 팔굽으로 내 무릎을 짚고 거기 의지하여 나를 쳐다보면서 Y문(門)의 로맨틱한 전설을 그 조(粗)하고 도랑도랑한 소리로 이야기하였다.

.이것이 한낱 전설에 지나지 못하는지 혹은 사실에 가공을 한 것인지 또는 참사실인지 모르지만, 우리 Y문에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우리 4대 할아버님의 누이 되는 이가 참 인물도 훌륭하게 나고 재주도 썩 좋더래요. 그래서 규중 심처에 있었어도 소문이 퍽 밖에까지 나서 그 꽃다운 얼굴을 보고 그 꽃을 한번 꺾어 보려고 모여들어서 그 동리 객주집은 늘 와글와글 하였대요. 그 청년들은 아마 모두 그 집에 도적 무리라도 들어가서 그 집안 식구를 결박하고 때리면 자기가 먼저 가서 도적을 모두 쳐물리고 그 집안 사람들을 구원하여 그 공명으로 규중 깊은 곳에 감추어서 달빛으로나 간접으로 접촉할 수 있던 그 그립던 아름다운 임을 자기가 차지하리라는 공상을 품고 있었겠지요.

그 가운데도 그 바로 곁집에 있는 젊은이가 그이를 그 중 사모하였대요. 그 청년이 달밤에는 비파로써 자기의 그리운 사정을 날려 보내고, 비 오는 날에는 단소로써 사모의 정을 어울어울 그 깊은 곳으로 알릴 때는 여자 되는 이도 그 정성에 통한 노래를 듣고는 차차 보지도 못한 임을 그리게 되어 눈물을 흘리면서 이것을 듣고 노래가 안 들리는 날은 혼자 속을 태우며 지내다가 마지막에는 자기도 거문고로써 자기의 사정을 그에게 알렸대요. 그러는 동안에 어떻겐가 서로 보게되고 그러는 동안에 둘 사이에는 연매 비익(連埋比翼)의 맹세가 맺혔겠지요-그런데 호사다마로 여자 되는 이가 어디 먼 데로 시집을 가게 되었대요. 옛적 여자의 일이라 부모의 명을 거절치는 못하되 언제든 잊지 않고 생각하려고 그 정다운 거문고를 가지고 갔대요. 그런데 사내 되는 이는 불쌍히도 상사병으로 세상을 떠났지요. 그이는 시집을 가서도 아무 재미 없이 거문고를 벗삼아 지내댔는데, 하루는 연못 앞에서 달밤에 거문고를 뜯으며 없는 임을 생각하고 있는데 그 연못 가운데서 비파의 화답이 들리더래요. 그것도 분시(分時)를 잊지 못하던 그 골수에 박힌 그 소리가요. 그리고 은연히 연못 위에 나타난 것은 그이더래요.

그 다음부터는 여자 되는 이도 탈이 나서 화타 편작도 쓸데없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는데, 떠나는 날 이상한 것은 그 방안에 있던 사람이 다 보았는데, 어떤 예쁜 동자 하나이 옆에 비파를 지고 여자 되는 이의 머리맡에 나타났다 사라졌대요. 그래서 그이는 거문고와 함께 예서 한 30리 가서 M산이라는 데에 묻었는데 지금도 그이 넋은 오월 보름날 달이나 좋은 야삼경에는 은연히 거문고 소리가 난대요. 저도 혹간 그 소리를 들은 때가 있어요. 이번 오월 보름날 K선생과 함께 보통문에 갔을 때에 달빛에 반짝거리는 그 보통강 물 속에서 이 거문고 소리가 들려요. 딍딍 동동 딩동딩동. 슬프게 운명을 저주하는 만년의 원한을 토하는 그 거문고 소리가 들려요. 그 소리를 들으니 별로 우리 앞길에 마음이 가서 눈물이 나옵니다그려…… 나도 거문고 소리는 못 들었어도 Y와 같이 별로 우리 앞길에 어두움이 있을 것 같아서 하느님께 행복 많기를 빈 것은 사실이다.

Y가 돌아간 다음에도 별로 슬프고 만세(萬世)의 원한을 토하는 거문고 소리가 귀에 쟁쟁한고로 혼자서 엎디어 한참 울었다.

7월 15일

[편집]

그 싫던 학교도 휴학이 되고 일없이 분주하던 그 '분주'도 없어지게 되었다.

나의 바라던-Y와 한층 더 깊이 친밀케 될 기회를 줄-하기 휴학이 이르렀다. 어떤 결혼식이 남산재 예배당서 거행되는고로 Y와 함께 구경갔다.

신랑과 하얀 의복을 입은 신부가 멘델스존의 결혼 행진곡에 발걸음을 맞추면서 하얀 옷을 입고 두 손으로 꽃분을 든 아름다운 어린 계집애에게 끌려서 하얀 옷 입은 여학생 몇을 뒤에 달고 목사 앞에 가서, 하느님 앞에 2세(二世)의 연(緣)을 맹세하는 그 모양은 참 신성코 순결코 장엄코 신답고 아름다왔다. Y는 눈에 빛을 내고 눈을 깜짝 않고 들여다보고 있다.

폐한 뒤에 예배당을 나서면서 나와 Y는 의논하였던 것같이 한숨을 쉬었다.

우리는 무엇이 마음을 받치는 것 같아서 말없이 당찰방골로 내려오다가 Y의 집 앞에서 갑자기 Y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다가

『내일 찾아가리다』

하고 자기 집으로 들어갔다.

집에 돌아오니 가슴이 무겁다. Y와 나는 언제나 저렇게 여러 사람 앞에서 2세의 맹세를 맺을꼬?

『도저히 못 된다.』

누가 속삭인다.

제일 Y의 부모가 허락치 않을 터이요, Y는 미태성(未胎性)의 여자가 아니냐! 이것은 불관하더라도 내게는 아직 법률상 아내가 있다.

아내와 이혼, 그것이 문제이다. 이혼은 도저히 할 수 없다. 양심에 부끄럽고 양심이 쓰려서 할 수 없다.

일변 성도 나고 내게 이런 양심이 아직 있댔나 하면, 일변 부끄럽기도 하지만 나도 때때로 아내를 위하여 눈물을 흘렸다.

아직까지는 아내에 대한 이야기는 아무에게도 안 하고 생각도 할 수 있는 대로 안 하려고 하였고 물론 기록치도 않았지만, 시작한 김에 좀 써 두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

그는 내가 함종(咸從)으로 보내니까 곧 어머니와 아들과 함께 거기 가서 어머니에게는 참효부와 아들에게는 참현모로 집안 일을 열심으로 돌보며 틈틈이 자기 여간 지식으로 아들을 교육시키고 있었다.

(나는 때때로 평양에 오는 나의 벗들에게서 나의 본집의 일을 똑똑히 다 알고 있었다.) 어머니도 내가 아내를 사랑할 때는 오히려 그를 미워하였지만, 내가 그에게서 떠난 다음부터는 그의 효도와 순한 것과 진실함과 불쌍한 것을 보아서 그를 친딸이나 다르기 않게 사랑하였다. 아내도 전력으로써-마지막에는 온갖 자기 즐거움(간혹밖에 없지만)을 희생까지 하여 K가(家)를 위하여 도왔다. 그는 내가 자기에게서 떠나가게 된 것은 내가 서울서 공부할 동안 자기가 K가를 돌아보지도 않은 데 있다고 믿었는 고로 (물론 이것도 원인의 큰 것 가운데 하나이다), 행여나 이렇게 하면 내 사랑이 돌아오지 않을까 함으로 한 것이다.

그의 나에 대한 사랑은 그것이 의무적인지 아닌지는 똑똑히 모르되 육적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의 나에 대한 사랑은 어떻든 참사랑이다. 나는 자기를 외딴 데로 쫓고 도회 평양에서 갖은 즐거움을 다 누리고 있을 동안, 그는 외딴 촌구석에서 자기를 돌아보지도 않는 나의 사랑을 자기에게 향케 하려고 온갖 힘을 다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그 얼마나 나의 사랑을 얻고자 하는지, 따라서 얼마나 나를 그리는지 알 수 있다.

이런 일이 있었다.

작년 내 생일날, 그는 이날은 별로이 늦게 일어나서 무슨 일이든 손에 잘 닿지 않게 서투르게 하다가 종내 어머리 앞에 고꾸라졌다, 울었다.

『어른이 여기 계셨더면……오마님이 어찌 기쁘실지 몰랐을걸……그이두……전엔 이렇게꺼정 무정치는 않으시댔건만……낯익긴 해도 객지 인데……평양도 객지 인데……원……평안히나 오늘 같은 날은……좀 오셔두……』

어머니도 울었다. 고부는 서로 붙들고 서로 위로하며 종일 울었다. 이튿날은 나의 아들의 생일이다. 그날도 종일 아들을 앞에 놓고 서로 신세 타령을 하면서 울었다.

또 그 이튿날은 나의 아버지의 없는 6년째되는 기념일이다.

『아버님 살아 계신 땐……이렇진 않더니……』

그날도 울었다. 한참 울다가 그는 갑자기 웃으면서 뛰어서 자기 방으로 가서 농을 열고 내가 처음 서울로 갔을 때에 크리스마스 프레센트로 보낸 장갑을 꺼내어 그 위에 낯을 대고 울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그는 미친 사람이 되었다. 가슴에 쌓이고 쌓인 슬픔은 꺼줄 이 없이 그는 그만 미치고 말았다.

정신이 없어진 때는 바람과 회롱을 하며 벌에 뛰어나가서 '어른B학당5년 동안한숨을 쉬어서 동남풍 되고야'를 연발로 부르며 눈, 비를 헤아리지 않고 휘돌며 정신이 드는 때는 언제든 장갑에 낮을 대고 울었다.

(남편인 나는 평양서 갖은 환락의 꿈을 다 꾸며 즐기고 있을 때에 그의 희생물인 나의 아내는 혼자서 외롭게 부르짖으며 슬피 울다가 마침내 그 찬 모진 바람을 막지 못하여 남편의 일고(一顧)를 얻지 못하고 따스한 사랑도 맛 못 보고 외로이 그 자리에 고꾸라졌다.)

나는 이 생각을 할 때는 언제든 뜨거운 눈물 몇 방울을 그를 위해 안 떨어뜨릴 수가 없다. Y가 아무리 나를 사랑하든, 그 사랑이 이만큼 강할 수가 있을까? 전에 C의 며느리에 대한 논설을 볼 때에 낮이 붉어진 것도 이 때문이다. 실상은 그때도 눈물을 흘렸다.

그렇지만 이상한 것은 Y이다-이 생각이 아무리 내 머리에 깊이 인상되어도 한 번 Y의 생각을 하거나 그를 볼 때에는 이런 생각을 한 내가 오히려 부끄러워진다-Y의 사랑이 나의 아내의 사랑보다는 약하더라도……

7월 16일

[편집]

Y가 왔댔지만 성난 것같이 하고 있다갔다.

웬일인지 그가 자기 성난 낮을 좀 화평케하려 할 때마다 더 성난 것같이 보였다. 그가 내 일기를 보려 하기에 그 가운데는 Y가 읽었다는 안 될 구절도 있는고로 못 보게 하니 그의 성은 더하여진다. 그가 성난 것을 보니 나도 성이 나므로 어제 Y가 할 듯 할 듯하던 그 말은 무엇인가고 물으려다가 그만두었다. 돌아갈 때에 그도 인사 안 하고 나도 물론 안하였다. 내일 또 오마 약속하였다.

7월 17일

[편집]

아침에 회색 만면히 Y가 찾아와서 오늘 일없으면 강서(江西)나 가잔다. Y가 기뻐하는 것을 보니 왜 그런지 별로 미안도 하고 기쁘기도 하여, 곧 가자 승낙하고 둘이서 인력거로 정거장으로 갔다. 별로 숫저웠다.

기차는 강서 약수행 나그네로 찼다. 도마메 정거장에서 내려서 자동차로 약수로 갔다.

약수에는 아는 사람이 많았다. 그들은 나와 Y의 관계를 알았는지 자기네끼리 수군거리며 우리를 본다.

나는 걱정이 있었다. 여기서 나의 함종군(咸從郡)이 20리 안팎인고로 눈을 두룩거리며 주의하여 다녔다.

강서 해는 더 더웠다. 훈훈 달게 무르녹인다. 그 가운데 각 장사들과 나그네들이 20세기의 문명을 나타내는 '소리'로 와글거리며 돌아다니니, 해의 '더움'은 소리의 더움과 사람의 더움과 번잡의 더움과 서로 화하여 더움 자기를 무르녹이며 공기를 무르녹이며 땅을 무르녹이며 온갖 것을 모두-심지어 공기까지-이를 벌리고 혀를 가로물고 땀을 흘리는 모양이다.

차고 쩔한 탄산질 많은 약물로 더위를 태우고 목마른 것을 적시고 배까지 불린 뒤에 Y와 함께 강서 고을로 산보를 떠났다. 훈훈히 더운 바람은 발 틈에서 푸른 냄새를 몰아다가 우리에게 보낸다. 하루살이가 활동사진, 실사(實寫)의 군대같이 우리를 두고 아물아물 돌아간다. 소의 마-하는 미지근한 소리, 보 보 더운 하늘에 높이 떠서 돌아가는 솔개, 울리어 오는 농부의 길게 뽑는 타령, 들에서는 개구리 소리.

참시(詩)다. 선적(仙的)이다!

Y는 말없이 걸어오다가 좀 쉬어 가자고 한다. 물 길러온 여자 곁으로 우물을 지나서 곁길로 들어가서 무성한 도토리나무 밑에 가 앉았다. 함께 Y와 나란히 앉으니 막지 못할 육감이 온몸에 뛰논다. 멀리서 날아오는 농부의 타령 소리밖에는 인기가 없다.

나는 바른편 팔로 Y를 껴안았다. Y는 가만있다. 그때에-Y는 입술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하였다. 그 다음 순간, 그의 머리는 내 무릎 위에서 격렬히 울기 시작하였다. 그의 뜨거운 눈물은 엷은 내 바지를 째고 내 살을 녹인다.

『왜? 또 거문고 소리가 들려요?』

나는 농담으로 이렇게 말하였지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어떤 보이지 않는 철퇴가 내 머리에 내리 친다.

(그렇다!)

Y는 잠깐 원망스러운 듯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곧 도로 머리를 숙인다.

(그렇다.)

두 번째 철퇴가 내리친다.

'그렇다'뒤에 무슨 생각이 나올 것 같지만 채 나오지 않고 역시 '그렇다'로 변한다. Y가 오늘 별로 쾌활하던 것도 그 실은 서어서어한 쾌활, 거짓 지은 쾌활이던 것을 이제야 알았다. Y에게는 무슨 번민이 있다. 어제 성난 것 같던 것도 그제 무슨 말을 할 듯 할 듯하던 것도 그 고백을 내게 하려 함이었으리라. 그럼 그 번민은? '나와 Y의 사이'에 무슨 번민이 생졌다. 나의 직감으로 이를 안다. 그리고 직감으로 이를 시인한다. 그럼 그 번민은-그 번민의 이유는 어떤 것이냐?

여기는 '그렇다'이상으로는 해석할 수가 없다.

나는 Y를 위로할 생각도 안 나서 그대로 두었다.

전에 Y와 만나기 전에 아내를 곁에 놓고 이런 공상을 하여 본 적이 있다. 아내를 함종으로 보낸 뒤에 어떤 애인을 얻게 된다. 그러는 동안에 어떻게 큰 재산을 얻고 큰 부자가 된다. 그때에는 애인과 함께 세계 일주를 하면서 이집트 넓은 벌에서 별을 보며, 이태리 바닷가에서 조개껍질을 주우며 누구 부럽지 않게 즐기리라고……지금 그 공상의 한 부분의 실현으로 애인과 함에 강서 도토리나무 아래서 사랑을 즐기려 할 때에 아-이 '그렇다!'라니……

어떤 무서운 생각이 머리를 넘어간다.

(그렇다면 Y와 나 사이의 파멸을 뜻함이다.)

희미하니 이 생각이 머리에 떠오른다. 한순간 눈이 아득하여진다. 한참 있다가 Y는 머리를 들고

『자기에게는 때때로 이런 증세가 일어나니 용서하라』

고 말했지만 내 머리에서는 '그렇다!'가 종내 떠나지 않았다.

뫼 뒤로 사라지는 해를 보면서 우리는 기차로 평양에 돌아왔다.

밤에 음력 초열흘 달을 바라보며 앉아 있을 때에 Y문의 몇 대조 고모 되는 이의 연애를 저주하는 만세의 원한을 토하는 그 거문고 소리가 땅에서 일어나서 하늘로 사라지고, 동에서 일어나서 서으로 사라지면서 'Y집 딸을 사랑하는 자의 말로를 알아보라'는 것 같아서 자리를 펴고 누웠으나 잠을 못 이루었다. 2시 반.

7월 19일

[편집]

사랑? 즐거움? 정신적? 육적? 욕정의 만족? 환락? Y? 맹목적? 원시적? 다 글렀다. 다 글렀다. 종내 글렀다.

(나는 Y를 사랑할 권리가 없다.)

(Y는 남의 사람이다.)

(아직껏 나의 Y에게 대한 행동은 횡탈(橫奪)에 지나지 못한다.)

(내가 Y에게서 빼앗은 정조는 남에게 바칠 것이다.)

(나는 나쁜 놈이요, Y는 간녀(奸女)다. 음녀(淫女)다.)

(Y는 나를 속였다.)

Y는 어렸을 때 섬 무지렁이에게 50원엔가 팔려서 마땅히 거기 가야 될 몸이란다. 그럼 아직껏 왜 그 이야기를 내게는 안 하였느냐? 간녀! 음녀! 색마! 상당한 학문도 있는 계집이 왜 이제라도 50원을 물어 주고 그만둘 마음을 안 내?

마음이 옅은 이여!

그렇다! 전자에는 나의 아내를'마음이 옅은 자'라 불렀지만 실로는 네가 더하다. 나의 아내는 참 정녀(貞女)이다. 너 같은 음녀와는 다르다. 마음이 옅은 계집이여……(아래는 지움).쓰기도 싫다.

7월 20일

[편집]

성 김에 어제 일을 못 써 두었으니 여기 쓰리라.

저녁에 Y가 와서 말없이 한참 앉아 있다가 무엇을 결심한 것같이 아직껏 내가 들어보지 못한 떨리는 예쁜 소리로,

『어찌할까요? K씨!』

하고 찾는다. 오늘쯤은 무슨 이야기를 하리라고 예기는 하였었다. 아니 벌써 수십 일 전부터 Y의 부모에게서 무슨 문제가 일어날 줄은 예기하고 있었다. 나와 Y의 사이는 벌써 평양 성내에 쪽 퍼졌다. 그래서 나는 피할 만한 근거가 있는 생각을 여러 가지로 하여 두었다. 이러하니까 대담히 그의 말을 기다렸다.

그렇지만 참 그는 의외의 말을 한다.

그의 말은 대략 이와 같았다. 아들 없는 집 딸은 귀히 길러난댔건만, Y의 부모는 그렇지 않아서 자기네들 아들을 못 낳은 분풀이를 Y에게나 부렸었다. 무슨 일에든 걸핏만 하면

『에구 계집애가』

『엠나이두, 방정맞지』

로, 자기를 낳은 부모 아래서도 그는 밝은 해 달을 못 보다시피 길러났다. 부모의 정을 못 받아 보고 길러난 그가 다섯 살인가 여섯 살인가 났을 때에 아버지는 돈이 급하여 그를 어떤 섬사람에게 스무 살이 나면 며느리로 주마 하고 50원의 돈을 받게 되었다. 이리하여 그는 오륙 세 적에 벌써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 하는 사람의 약혼자가 되어 버렸다. 그렇지만 아직 말도 변변히 못하는 Y는 자기에게 이런 일이 있는 줄은 뜻도 못하였다. 여덟 살 났을 때에 그는 J소학교-지금 그가 교수하는-에 입학하였다. 압제가 심한 소학교도 자기 집에 비하면 무한 낙원이었으므로 그는 날만 밝으면 부엌 구석에서 변변치 못한 찬밥을 먹고 상학하였지만, 집에 있을 때는 겨울에는 차디찬 얼음 방에서 여름은 이슬 오는 뜰에서, 어린 마음에도 자기의 애처로운 처지를 생각하고 혼자 어린 눈물을 흘릴 때가 많았다.

열 세 살 나는 해에 그는 겨우 어머니의 따스한 맛을 보았다. 본마누라에게서 아들을 못 본 아버지는 전부터 관계하여 오던 갈보를 첩으로 삼았다. 어머니는 한동안 이로 인하여 Y를 더 미워하였지만 종내 딸에게 대한 따스한 사랑으로 변하였다. Y는 짐승에서 사람으로 뛰어올랐다. 모녀의 사랑은 정과 사랑과 연(戀)과 자기 희생과 이전의 미안이 섞인 뜨거운 사랑이었다. 그래도 어머니는 Y에게 약혼 사건을 이야기 안 하였다-어머니는 몰래 단단히 파혼을 힘썼다 한다-Y는 도무지 이를 모르고 컸다.

열 다섯 살 나는 해에 Y는 서울 공부를 가게 되었다. 첩댁에만 있는 것이 다 큰 딸에게 대하여는 부끄러워서 그리함인지 아버지는 쾌히 허락하였다. 서울서 공부하는 동안 그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빽빽하던 목소리는 낭랑코도 조(粗)한 소리로 변하였고, 까맣고 파랬던 그의 몸에는 큰 엉덩이와 살진 어깨와 젖과 광대뼈를 가리울 만한 뺨의 살이 붙었고, 성격은 대개 고정되었다. 마음이 약한 것은 어렸을 때의 비참함을 의미함이다. 약함을 외식(外飾)하는 '거짓 강함'은 모녀 화해 뒤와 서울 유학할 동안의 자유-압제 뒤의 자유와 짐승에서 사람으로 뛰어올라옴을 말함이다.

성격과 함께 체격과 체질도 고정되었다. 구부러진 허리와 때때로 눈과 턱에서 경련이 일어나는 것과 몸의 온도가 보통 때도 38도를 지나는 것은 어렸을 때에 겨울밤 찬 방안, 차디찬 자리 속에서 허리를 구부리고 입으로 서리를 뿜으며 아랫목에서 따뜻이 자는 부모를 부러이 여기던 것을 뜻함이요, 어두움에 눈이 밝은 것은 어렸을 때에 불을 못 보고 길러남을 뜻함이다. 그 밖에 그는 그의 몇 대조 고모 되는 이의 피를 받은 점도 적지 않다. 음악뿐 아니라 온갖 '감 (感)'에 빠른 점과 '붓을 안 드는 천재 시인'인 것이다.

금년 봄 공부를 끝내고 무르익은 처녀가 되어 평양에 내려와서 그는 J교 선생으로 들어앉았다. 오래 떠나 있던 모녀는 속으로는 더 친밀하여졌지만 겉으로는 좀 소(疏)하게 되었다.

Y는 처음에 약혼 사건을 알고 그리 놀라지는 않았다. 어떻게 되었는지 그 집에서 잊었는지도 모르겠다뿐으로 알아두었다. 그 동안 K-나를 만나게 되었다.

잊은 줄만 알았던 그 집에서는 다시 이야기가 나서 내일(즉 오늘)-이 납채날이다.

『전 아버지께 아버지와 그런 사이니까……아버지껜 도저히 말씀드릴 수가 없어서 어머님께 말씀드려도 아버지는 어머니 말씀을 들을 이도 아니구……』

아직껏은 Y의 말을 눈물을 흘리며 동정하여 듣더니 이 마지막 구는 이유 없이 충천의 성을 나게 하였다.

『거기 가고만 싶으면 가구려, 가라우. 그 집서도 그리 Y씨를 그리는데.』

그는 원망스러운 듯이 나를 보면서-눈물 한 방울 안 떨어뜨리며 K씨두, 온 무정하지, 저를 가라니,

'가구 싶으면?가구 싶으면?'남자란……아버지가 그러기에 그러지, 온 제가 가고 싶댔어요? 하고 머리를 돌린다. 서로 할 말 없어서 한참 있다가 해져갈 때 그는 갔다.

그가 간 다음에 첫번 머리에 떠오른 생각은 'Y는 음녀요 마음이 옅은 계집'이라는 것이다. 곧 일기를 썼다. 참 기쁠 때도 잠이 안오거니와, 참 성날 때는 잠 안 을 뿐 아니라, 눈도 감기 싫었다.

『아버지가 가라니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논법으로 어찌 20세기에 통행해. 아버지도 자기 친아버지, 왜 못 가겠다는 말을 못 해? 이 나-보다 촌 무지렁이가 날까? 이전에 춘향이와 이도령의 이별을 어떻게 비평했어? 자기가 춘향이었더면 이도령과 이별을 안 하고 따라가겠다고 했지. 양산백과 추랑대에게도 그런 비평을 했지. 왜 실행을 못 해? 자기면 하겠다던 일을 왜, 못 해 왜 못 해 왜?』

밤새도록 그를 저주한 말은 이것이다.

그렇지만 번하니 동터 올 때는 나는 나 자신을 저주하지 않을 수 없었다.

『Y를 저주하는 너는 얼마나 잘 하였느냐? 네가 Y를 사랑하느냐? Y를 사랑하는 자가 왜 Y에게 거절하란 말을 못 했어? Y의 아버지도 건달, 그런 의리를, 그런 구약을 지킬 사람은 아닌 것이 아니냐. 정 Y가 가기 싫다면 그만둘 일-뿐만 아니라 너는 Y에게 가고 싶으면 가라고까지 했지! 못난 놈! 바보!』

Y가 오면 거절하래라고 작정하였다. 오늘도 생각난 일은 좀 써 두렸지만 아무 생각도 못 하였다. 다만 Y가 밉고 사랑스럽고 불쌍하고, 내가 밉고 사랑스럽고 불쌍하고, 둘이 합하여 함께 밉고 함께 사랑스럽고 함께 불쌍할 뿐이다.

7월 31일

[편집]

그 사이는 일기 쓸 만한 사건도 없었고 쓰기도 싫어서 안 썼지만 오늘은 그 사이 일을 통괄하여 써 두리라.

마지막번 Y가 왔던 열 아흐렛날이 지나서 이삼 일 된 다음에는 나는 이삼 일 전에 Y에게서 들은 그 약혼 사건을 차차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그 '의심'은 'Y가 나를 놀리기 위하여 이런 이야기를 하였다'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Y가 이런 이야기를 내게 하였는가 흑은 내가 이런 꿈을 꾸지 아니했는가 하는 의심이다. 이 '의심'과 함께 '그렇다!'도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렇다, 역시 그렇다. 내가 이전에 감(感)하였던 바가 역시 옳았다.) 이 생각이 날 때마다 '외나무다리에서 강한 원수를 만난'이상의 무서움이 온몸을 찌른다. 무서웠다. 이 순간에는 왜 무서운지, 무서움의 의의는 똑똑히 몰랐다. 다만 무서웠다. 떨렸다. 추웠다. 어두웠다. 캄캄한 앞이 내다보인다.

때때로(Y는 그만 가지 않을 수 없는가) 생각할 때는 (거절하래라!)라는 생각과 함께 (그렇지만 할 수 없다!) 생각이 안 날 때가 없었다. Y가 가면 나는 어찌 될까(?) 생각할 때는 아-다만 아-생각밖에는 안난다.

'Y가 가면?'내게 이보다 더 참혹한 말이 어디 있을까?

'Y가 가면?'Y는 파멸이다.

'Y가 가면?'나도 파멸이다.

'Y가 가면'아-나는 다시 찬 그 찬 생활에 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어찌 내게 무섭지 않을까? Y가 있을 때는 전의 그 찬 생활이 로맨틱하게도 보이고 그립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이것 역시 색안경으로 내다본 색채의 세계댔다. 색안경을 벗은 다음에는 건조와 무미밖에는 남을 것이 없다! 주육(酒肉)에 겨워서 된장찌개를 들여다보던 사람이, 주육을 온전히 잃고 된장찌개만 먹지 않을 수 없는 경우가 되면-아-그 사람의 마음이 어떠랴!(조물주의 장난도 심하다. 왜 내게는 사랑의 아름다운 맛을, 그 아름다운 맛을 풍부히 내려 주지 않는가? 나는 이를 구하려고 온갖 것을 다 희생하다 못하여 마지막에는 친척을 희생하고 이 내 몸까지 바치지 않았느냐? 내려 주기는커녕 무슨 이유로 내게서 Y를 빼앗느냐? 온갖 희생을 과하도록 하여 겨우 얻은 이 Y를, 나의 Y를!)

여기까지 생각하면 나는 우주의 지배자를 원망치 않을 수 없다-그를 저주치 않을 수가 없다. 이를 다(多)복자랄지 과(寡)복자랄지 모르지만, 이 세상에는 사랑에 겨워서 흑은 산 가운데 은둔하는 사람도 있고, 흑은 탈속하여 중이 되는 사람도 있는데, 사랑의 신은-이런 사람을 우정 쫓아다니며 그 '싫다'는 '사 랑'을 그들에게 부어 주는 사랑의 신은 어찌하여 그 남은 부스러기라도 내게다 주려는 것을 아까와하는가? 아니, 내려 주었던 것까지 거두어 가는 것은 그 어떤 이유냐? 어떤 이유야?

전에(전이라고 불러도 가하다!) Y와 함께 있을 때는 그에 대한 내 사랑이 약하다고 나 자신을 책망한 적이 많다. 그렇지만 시방에 이르러서 과거를 생각하여 보면 결코 약하지 않았다. 안토니오와 클레오파트라의 사랑이라도, 이도령과 춘향의 사랑이라도, 결로 나와 Y의 사랑보다 강하지 못 하였다. 슬픔-기쁨의 소멸로 나는 슬픔은 그 기쁨에 반비례한다. 지금 나의 슬픔을 표준하여 전에 얼마나 기뻤는지 알 수 있고, 따라서 사랑이 얼마나 강하였는지 알 수 있다. 사랑에 겨워서 Y와 다툰 일도 없지는 않다. 과한 즐거움에 놀라서 Y를 저주한 일도 적지는 않다. 과함에 깨닫지 못하는 '사랑의 보통성'으로 혼자 번민한 적도 있기는 있다. 그렇지만-이것 역시 과한 즐거움의 반동인 작은 괴로움에 지나지 못하였다. 이제 만약 Y로서 나를 떠난다 하면-아-생각키도 무섭다. 소름이 몸에 끼친다.

찬 삶, 어두운 삶, 서리를 훅훅 뿜는 그 사랑을 저주하는 악마의 크고 푸른 입!

전에 (그렇다!)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아무래도 Y는 내게서 떠날 것이다. 그렇게 되면……걱정 없다. Y뿐 여자가 없는 바도 아니고 평양만 하여도 만여 명의 묘령의 처녀가 있단다! Y보다 다정하고 더 예쁜 여자가 암만이라도 있다)고……

이것 역시 배부른 자의 말이댔다. 평양에 만여 명의 나이 찬 처녀가 있다 한들 Y와 같이 내 성격, 여자와 같은 간사한 성격을 사랑할 여자가 그 몇이나 될까?

어찌할까?

절망!

낙담!

찬 삶!

어두운 삶!

어둡고 큰 악마의 입에서 나온 그 찬 서리! 이는 나를 둘러싼다. 각각이 내 몸을 뚫고 심장 복판 가운데로 새어 들어온다. 피하려면 그는 속력을 더하여 따라온다. 이것을 너무 무섭게 생각할 때는, 그럴 때는-그는 좀 멈칫 선 것같이도 생각되고, 이런 일은 당초에 없는 것같이도 생각되지만 이 생각과 함께 그는 더 맹렬히 내 심장으로 들어오는 것같이 생각된다.

흔히 이것이 다 거짓말이로다. 의심하여 보았다. 그리하면 일변 무섭기도 하고 더 무섭기도 하되, 또 한편으로는 안심도 된다. 이런 때는 언제든 이제 나에게 Y가 기쁨을 넘쳐 가지고 오면서, K씨, 며칠 전에 그 말은 거짓말이에요. 정말로요! 아버지한테 K씨와 혼인할 허락을 맡았어요. 남산재 예배당으로 식을 들러 갑시다요! 라면서 들어올 것 같다.

나는 그 사이 열흘 동안 Y 오기를 가다렸다. 그가 오면 물론 더 성도 날 것이다. 재미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안 기다릴 수 없다. 잠깐이라도 만나고 싶다.

이제 영구히 Y를 못 보리라 생각하면 어떻다 할지, 내 마음을 형용할 수가 없다. 다만 한 번이라도 더 만나 보고 싶다. 그렇지만 Y가 오면 좋겠다는 생각 가운데는 또 한 이유가 있다. 시기, 이것이다. Y가 지금 집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한때에 일어나는 시기로 말미암아 Y를 다만 몇 시간이라도 자기 집에 못 있게 하고 싶은 생각으로 나옴이다.

나는 Y에게 온 예물이 불만족하면 통쾌하리라는 생각이 나서 알아보니, 역시 잘못 오기는 하였댔지만 이 말을 들으니 통쾌는커녕 더 성이 난다.

『그 따위 놈에게 시집 가!』

이즈음 너무 성이 나고 답답도 하여서 전에 보았던 소설 가운데서, 이것 저것 며칠 다시 보기 시작하였다.

8월 1일

[편집]

오늘 Y가 왔댔다.

전에는 그가 와서는 무거워요, 하면서 내 무릎에도 털썩 앉고, 또는 내 뒤에서 나를 껴안고 흔들거리고 하더니, 오늘은 서로 그럴 맛이 없어서 멀리 앉아 있었다. 그가 온 다음에 내가 첫번 물은 말은 이것이다.

『반갑지요? 예장두 잘 오구, 분주하겠구려! ……』

내가 독 있는 말로 이렇게 물은 것은 그가 원망스러운 낮으로 나를 보면서 울라고 한 것 이다.

『반갑구말구요. 너무 반가와서 죽겠어요.』

그 역 독 있는 말로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그를 때리고 싶었다.

『원, 사람두……남 속상해서 죽겠는데……』

그는 혼자 중얼거린다.

그에게 시집 언제 가는가 물으니 대답도 안 한다.

이렇게 되니 그에게 '거절하라'하려던 생각도 종내 실현 못 되고 만다.

영 재미없이 지냈다.

온전히 서로 모르는 사람이나 같으면 어떨지, 아는 사람끼리-그것도 참 친밀하던 사람끼리 이렇게 있는 것은 어떻다 말할 수 없이 마음이 아팠다. 그렇지만 이렇게 안하고 있을 수도 또 없다. 내가 굴복 안 할 터이고 Y또한 그럴 터이니 이렇지 않을 수는 없다.

한참 있다가 내가 쾌활한 목소리로,

『오늘 길 질지요?』

하니까, 그는 간단히 거기 대답하였다.

오늘 사괴인 말은 이 몇 마디뿐이다.

Y가 돌아간 다음에 나는 미안하였다. (속상해하는 그를 위로는 못할망정 더 성나게 하여 보냈으니, Y는 나를 어찌 생각할까? 이제 다시 볼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는 Y를 나는 왜 그렇게 박대하였는고!)

학교에 사직 청원하였다.

대동강에 창수(漲水)졌다.

8월 20일

[편집]

서울 있는 C에게서 이런 편지가 왔다.

'K의 일기에 붙인 C의 편지'

K군.

어찌하였소? 군은 이즈음 신경쇠약이 들렸나 보오.

주의하오! 군의 내게 한 편지의 질서 없음에는 놀랄 수밖에 없소. 어제 편지 같은 것은 참 알아도 볼 수 없소.

군은 그 동안 어떤 연애에 실패치 않았소? 나는 이렇게 인정하고 의심치않소.

전에 한동안은 연애 만능을 주창하며, 여자를 칭찬하며, '세상이란 참 재미있다여자란 참사랑스럽다 '이런 소리를 하며, 또는 '어떤 것이 참사랑이냐아-정욕을 벗어난 사람이 되고 싶다육의 사랑이라, 영의 사랑이라, 구별할 필요가 있을까?마음이 아프다'라고 편지마다 이런 소리를 찾더니, 이즈음 편지는 그 꼴이 어떻소. '죽고 싶다나는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로 절망의 소리로 찼으니, 이렇게 인정하여도 옳다고 나는 믿소.

어떻소? 참말 이런 일이 있지요?

내게 다 이야기하오.

이 C, 사내라 힘 자라는 대로 군을 위하여 힘을 쓰겠소. 번민이 있으면 그 번민보다 더 큰 기쁨으로 그 번민을 소멸시켜 봅시다.

어떻든 주의나 하오. 신경쇠약 걸렸단 안 되오! 군은 부인과 별거한다니 더 할말 없지만, 어떻든 여자를 접하지 마오. 군은 신경질의 사람이라 병이 과하여졌다는 안 될 터이니……

얼마 뒤에 나도 평양 좀 가 볼 밀이 있소. 그때는 군에게 직접 담판으로 들어 붙을 테요. 잘 준비하여 두오. 굿-바이,

8월 19일

[편집]

서울 C는 K군에게.

8월 21일

[편집]

한 스무날 전에 일기를 쓰고는 아직 안썼다. 그 사이 여러 번 쓰려고 일기를 펴 놓고 들여다보고 하였지만, 쓰고 싶어도 싫어서 못 하였다. 오늘 쓰자.

그 동안 Y는 네댓 번 왔댔다. 나는 종내 거절하란 말을 뭇 했다. 안 했는지 못 했는지는 모르지만 어떻든 하지 않았다. 한 번 Y에게 이야기를 하였다.

『전에 우리 첫번 만났을 때, Y씨 춘향이를 흉본 적이 있지요?』

그는 대답 안 하고 웃었다. 어떤 심리학자든 어떤 표정학자(表情學者)든, 이 웃음은 못 해석하리리. 그의 웃음은 부끄러움도 아니고 어이없음도 아니고 미안함도 아니고 또는 우스움도 아니고-그 표정을 보면, 참 알지 못할 웃음이다. 비웃는 듯도 하고 기쁜 듯도 한……또 한번은 이런 말을 하였다.

『Y문(門)의 딸은 다 같은 운명을 가졌나보구려!』

이때도 또 그와 같은 웃음을 웃었다.

그가 와 있을 때는 너무 재미없어서 나는 그가 안 오기를 바랐다. 그렇지만 그가 안 올 때는-아.생각키도 무섭다. 심장을 태우는 시기-나는 시기가 일어날 때는 이를 삭히려지 않고 오히려 여러 가지 공상으로 더 심하게 하여 가지고, 혼자 성이 나서 팔을 두르며 눈물을 뿌렸다. 이 심장을 태우다 못하여 내 온몸까지 태우는 단장(斷腸)의 시기가 이때의 나의 다만 하나의 양식(糧食)이다. 주먹을 쥐고 눈을 감은 뒤에, Y의 앞일을 내게 불리하게만 생각을 돌려 하여, 시기에 시기를 승하여, 가뜩이나 성이 나는 것을 더 맹렬히 돋우는 것은 참 죽게 속상하고도 또 끝없이 통쾌하였다. Y가 왔다가 갓돌아간 다음에는 그 시기가 어떻다 형용할 수 없도록 맹렬하였다. 이때의 시기가 제일 통쾌하였다.

때때로 공상을 바꾸어서, Y가 이제 시집을 갔다가 몇 달이 못 되어서 대단히 불행하게 되어 돌아오리란 생각을 여러 가지로 하여보았다. 이때는 참 통쾌하였다. 그 통쾌보다 더 맹렬히-이상하거니와-얼토당토 않은 시기가 일어난다. 이런 때마다 내 소유물이 하나씩 파손된다. 나는 참지 못하여 무엇이든 파괴하고야 만다. 이 순간 내 양심은 끝없이 가책된다.

-너는 Y의 불행을 바란다.


-Y를 시기하다 못하여 너는 Y의 불행까지 공상으로 그려 놓고, 공상의 Y까지 책망을 하며,


『네 보아라!』

하며 시기를 한다.

그렇다-나는 Y의 불행을 바란다! Y의 불행이 내게 행복을 줄 것은 없으되, 나는 이를 바란다. 이것도 나의 좁으러운 시기에서 나온 바다. 뿐만 아니라 나는 여기 대한 변해(辨解)까지 가지고 있다.

(악마의 어두운 입, 나는 그것이 무섭다! 이전 거기서 길러날 때는 그 무서움을 몰랐지만, 한번 온대(溫帶)의 맛을 본 나는 거기 다시 돌아갈 수가 없다. 가면 나는 파멸된다! 나를 파멸에 이르게 한 자는 Y. Y 없었더면 나는 그 악마의 입에서라도 만족히 살았을 터이다. Y 없었더면 나는 이런 비경(悲境)에 이르지 않았으리라. 나의 파멸(그렇다! 나의 장래는 파멸밖에는 없다!)의 원인은 하나에서 열까지 다 Y에게 있다.

앞에 보이는 깜깜한 차디찬 삶, 소름이 먼저 끼치는 삶, 그의 원인은 Y에게 있다. 내가 어째 Y의 불행을 바라지 않을까!)라고……

8월 22일

[편집]

어제 일기에 연속하여 쓴다.

(Y는 아무 저항 없이 가고 말까? 혹은 나 모르게 힘을 단단히 쓰고 있지나 않은가?)

나는 늘 어지러운 머리로 이 생각을 하여보았다. 그때마다 나의 직각(直覺)은 이렇게 대답한다.

(가고 싶은 마음은 물론 없거니와 그래도 아무 저항 없이, 마치 도소(屠所)에 끌려가는 양과 마찬가지로 가리라.)

내가 이 해결-극히 해결치고는 불완전하게 되었지만-을 얻기에는 직각 밖에 소설과 인생의 활사실(活事實) 가운데서도 몇의 예를 구하였다.

-직각뿐으로는 '가리라'하는 것은 단정하였지만, 가서도 안락하게 살지, 혹은 늘 나를 그리면서 살지를 똑똑히 몰랐다.


소설에 내 사건과 비슷한 일은, 어떤 자는 시집을 가서 평안히도 살고, 또 어떤 자는 재미없이도 살았다.

그 가운데 대개는 잘 살았다. 소설뿐으로는 아무래도 완전해 보이지 않아서 사람의 활사실에서 내 일과 비슷한 것을 구할 때에 곧 머리에 떠오른 것은 아래 이삼 종이다.

첫째는 금년 봄에 숭의 여자 중학교(崇義女子中學校)를 졸업한 나의 Y밖의 다른 Y라는 여성의 사실이다. 그 Y가 이 봄 학교를 졸업하는 임시에 T라는-일본 유학생과 혼담이 일어났다. 이때에 이 Y는-그에게는 어렸을 때부터 약혼한 사람이 있었다. 그 T라는 사람의 반양식 가택에 정신이 빠졌는지, 혹은 그 T를 정답게 생각함인지, 자기의 이전 약혼자의 집안에는 대대로 긴병이 전하여 오는 것을 핑계로 삼아서 T에게로 가려 하였지만, 여러 가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하여 이전 약혼자에게 갔으되 지금은 자기 시집만한 곳은 이 조선 안에는 없고, 자기만큼 다복한 여자가 세계에 드무리라고 장담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서울 W백작집 며느리의 일이다. 남편이 동경 유학갈 때에 눈물을 흘리면서 보낸 그는, 그 뒤 며칠이 못 되어 자기의 시아버지인 W백작과 간통을 하여 애를 낳고, 자기 남편이 여름 방학 때 귀국하렬 때마다 한사히 말려서 못 오게 하였다. 그래도 끝까지 감출 수 없어서 남편되는 사람에게 종내 들키고, 남편이 이를 보고 애를 태워 죽인 다음에, W백작의 며느리는 지금 W백작의 첩으로 아들 낳고 딸 낳고 잘 지낸다한다.

그 밖에 몇 사실이 더 있지만, 사실이 증명하는 바는 '여자란 바람에 움직이는 갈대와 같다. 다스한 정만 주는 사람이 있으면 마음은 곧 그리로 변한다'하는 것이다.

아-마음이 옅은 자여-네 이름을 여자라 하노라!

세익스피어의 여자평, 구약성경의 여자평, 철학자의 여자평, 세상 경력 많은 노인들의 여자평, 모두 이 말이 아니냐.

마음이 옅은 자여, 네 이름을 계집이라 하노라!

그렇다-나의 Y도 이 몇 달 동안을-내 삶 가운데는 제일 즐거웠고, 제일 기념할 값이 있는 이 몇 달 동안을-이제 며칠이 못되어 자기 '촌 무지렁이'의 갈구리식 사랑으로 매일 조금씩 조금씩 씻어 버려서, 이제 몇 해 뒤에는 자기의 이전 삶 가운데 한때의 색채를 더한 이나, K라는 사람이 있었는지도 모르게 되리라.

아니 모르게는 안 되어도 전을 돌아볼 때에 한 로맨틱한 꿈으로 볼 뿐이지, 또는 '나를 한동안 위로해주던 K라는 사람이 있댔거니'뿐으로 생각할 따름이지, 그 이상으로는 생각 안 하리라.

얼마나 잔혹한 일이냐!

내게서 Y를 빼앗고, Y에게서 나를 떼는 것은 얼마나 혹독한 일이냐!

천도(天道)가 무심하다.

인도(人道)가 무정하다.

이럴 줄 알았더면 당초에 Y를 사랑치를 않았을걸……

나는 온갖 것을 저주하여 마지않노라! 사람을 저주하노라-누리를 저주하노라! 그리고 검을 저주하노라!

그렇지만-통체(統體)로 사랑은 저주할지언정 부분적으로 Y만은 저주하고 싶지가 않다. Y보다 오히려 죄없는 Y의 새 남편이 저주하여진다……

아-온갖 것을 저주한 뒤에 내게 남은 것은-죽음밖에는 없다. 죽고 싶은 마음이 자꾸 난다. 한 번은 칼도 목에 대어 보았다. 승홍(昇汞)을 물에 타서 맛까지 본 적도 있다. 그때마다-이유 없이 씩 웃고 말았다.

그렇지만 죽음도 이제 곧 내게 이르리라. 그때는……Y도, 그때는 ……알아보리라!

눈물이 나서 더 못 쓰겠다.

9월 19일

[편집]

Y의 집에서는 새서방의 의복도 벌써 하여 보내고, 이제 음력 오는 달 초승에 장가 오고 시집 간단다.

그사이 때때로 'Y가 가지 않고 말지도 모르겠다'던 그 바람도 헛데로 갔다. 그는 마침내 가련다.

뿌리 빠진 풀은 마침내 마르지 않을 수 없다.

안 올 것 같기도 하고 벌써 나를 둘러싼 것같기도 하던 '파멸'은 마침내 이르렀다. 나는 두 팔을 벌리고 이를 맞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이즈음 매일 Y의 몇 대조 고모 되는 여자의 꿈을 본다. 늘 그 만세에 원한을 토하는 거문고 소리를 듣는다.

『Y문 딸을 사랑하는 자의 말로, 알아보라!』

나는 죽지 않을 수 없다. 살 수 없다.

'K의 유서(遺書)'

9월 20일

[편집]

죽기 몇 시간 앞하여 어머님 전 간단하게 몇 말씀 드리옵니다. 갑자기 죽겠단 말씀을 드리면 어머님에서는 놀라시겠지만, 불효자 며칠 동안을 생각하여 하는 바오니, 그리 알아 주시옵소서.

이 글월은 어머님께서 제가 죽었단 소문을 들으시고 여기 오실 때까지 이 책상 위에서 어머님을 기다릴 터이며, 제가 죽은 이유는 이 글월과 함께 놓여 있는 제 일기가 똑똑히 말씀드리올 터 이오며, 성은 나시겠지만 그때에 다만 한 마디 제 시체에게

『네 정상은 짐작한다』

말씀하여 주시면, 소자의 시체의 낯에도 화기가 떠오르겠사오니 짐작하셔 주시옵소서, 또 한 말씀, 제 자식은 K가(家)의 대를 이을 애오니, 어머님께서 힘 자라시는 대로 저같은 불효는 안 되도록 잘 교육시키셔서, 이후 K가의 이름을 빛나게 할 자가 되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제 아내는 좋은 연분이 있으면 개가하여, 좋은 남편의 다스한 정을 맛보고, 생전 사후 한결같이 평안히 지내라고 어머님께서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죽을 몸이라 아뢰일 말씀이 많은 것 같고도 그리 없사오니, 세계를 돌던 돌림감기가 우리 나라에도 들어와서 온 곳이 다 흉흉한 이때에, 저 같은 불효의 생각은 잊으시옵고, 노체후 내내 은총 가운데 안녕히 지내시옵소서.

불효자 K 상서 어머님 전

'이상 C에게 보낸 K의 자백(自白)'

10월 아흐렛날은 이르렀다.

그리 그가 저주하며, 이날이 영구히 안 오기를 바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막지 못할 인력(引力)으로 말미암아 나날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시월 아흐렛날은 돌연히-K에게는 이날이 돌연히 이른 것 같다-K의 앞에 나타났다. K는 아침 일찌기 커피나 여남은 잔 먹은 것 같은 흥분으로 일어나서, 오늘 Y의 잔치 구경을 갈 준비로 대충 양치와 세면을 한 뒤에, 10시에 갈까, 11시에 갈까 벼르다가 오후 3시쯤 마침내 집을 나섰다.

평양의 거리는 역시 움직이면서도 고즈넉하였다. 거리의 사람들은 참 어떤 도회에서도 보기 어렵도록 와글와글하고도 별로이 한가하고 고즈넉하게 보인다.

'이앗다리'에서 남문거리로 나선 K는 태안양행(泰安洋行) 곁으로 순라청골로 빠져서 당찰방골 Y의 집에까지 무의식이라도 가할 이만큼 정신없이 왔다.

그가 의식적 시각을 가질 때에 처음으로 눈에 뜨인 것은 홍천, 방울, 솔다리 등으로 화장(化粧)한 새서방이 타고 온 백마와 가마, 마부, 교군 들이다. 잔치를 구경오던 그는 한 번 눈을 휘둘러서 쭉 다 돌아본 뒤에, 탁 침을 뱉고 돌아서서 이번엔 아까 길과 반대로 서문통을 나섰다.

(아! 종내 이렇게 될 것이었다.)

그가 첫번 의식한 생각은 이것이다.

그는 보통문 밖으로 나섰다. 무르익은 벼와 수수 냄새는 약한 바람에 풍겨서 이삭들이 서로 쓸리는 약한 소리와 함께 K에게로 날아온다. 보통(普通)의 넓은 벌을 기러기는 남향하여 건너간다.

(여기두 재미 없다!)

그는 무의식적 의식으로 생각하고, 다시 돌아서서 보통강을 끼고 차차 상류를 올라가다가 칠성문(七星門) 밖 삼장로까지 와서 대로(大路)로 들어섰다.

길을 만드느라고 찍은 성(城) 틈에서 가을바람이 다른 데보다 더 강하게 내어쏜다.

(흥! 되고 싶은 대로 되어라!)

그의 두 번째 의식한 생각은 이것이다. 무엇이 '되는지'는 역시 의식 못 하였다.

어쩐지 좀 다리가 아픈 것 같은 생각이 나서 집으로 향하다가, 그는 뚱딴지 C가 내려왔으리라는 생각이 나서 빨리 만나 봐야겠다고 분주히 걷기 시작하였다.

그가 자기 방에 들어설 때에, K의 일기를 들여다보는 낯과, 허리가 다 가늘고 길게 보이는 C의 뒷모습이 눈에 띄었다. C라 하는 굳센 후원자를 본 K는 무한 큰 슬픔이 가슴을 터치고 방안에 차는 것을 깨달았다.

『언제 내려왔나? C, 사람 살리게!』

『응, 갔댔나? 오늘이 잔칫날이지?』

C는 돌아앉으면서 말한 뒤에 K를 서너 번 훑어보더니, 와서 손을 쥐면서 또 한 손으로는 K의 이마의 열을 본다.

『장가 왔던가?』

『모르겠네.』

K는 한숨을 내쉬었다. K는 몸은 안 떨려도 심장이 약하게 부르륵 떨리는 것을 깨달았다. K는 자기 마음이 슬픔으로 찼는지 무서움으로 찼는지 몰랐다. 그는 그런 것을 의식할이만큼 마음이 한가하지 못하였다.

그는 Y의 문제를 온전히 초월한-아니, Y의 문제를 온전히 잊을 것 같은 적적함을 깨달았다. 이때에 K는 이유는 모르지만 자기 온 목숨까지라도 미칠 만한 C에 대한 극도의 연애에 가까운 사랑이 생김을 깨달았다. C에게 손을 잡히고 있는 것이 부끄러워서 그것까지 뽑았다.

『잔치 구경했나?』

C는 물었다.

K는 이 말이 별로이 고마왔다.

『C-난 죽겠네, 죽겠어! Y는 가네……』

K는 고마움에 넘쳐서 눈물을 흘린다.

『머리 아프지 않나? 열이 있네.』

C는 K의 머리에서 손을 내리면서 말했다.

『모르겠네. 어드런지 ……어질어질한게 세계가 다 핑핑 도네』

『흐흥-눕게, 자리 펴 줄께. 난 K위해 부러 내려왔네.』

K가 공경하는 C 가 K 자기를 위해서 부러 평양까지 서울서 내려왔다 할 때에, K는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C는 일어나서 K를 위하여 자리를 폈다.

『자-눕게. 응, 아직 인사도 안 했군. 그 사이 잘 있었나? 난 안녕히 계셨네.』

자기도 웃으면서 남도 잘 웃기는 C의 우스운 소리에 K는 웃으면서 한숨을 쉬며,

『사람 살리게. 난 죽겠네.』

하며 자리 속에 들어갔다. C는 K의 일기를 볼 동안에, K는 괴로움과 다투다가 곤하여 잠이 들었다. 검은 것과 횐 것이 범벅된, 광야 같기도 하고 바다 같기도 하고, 또는 하늘 같기도 한 것을 걸핏 보고 K는 펄떡 깨었다. 어느덧 밤이 되어서 C는 불을 켜고 그냥 K의 일기를 보다가 후덕덕 뛰어온다.

『왜 그러나?』

『응?』

K는 갑자기 일어나 앉아서 어린애같이 을 기 시작하였다.

『왜?』

『응, 무서워……』

『무엇이?』

K는 무엇인지 모르지만 무서웠다. 심심 산곡에서 범을 만난 유(類)의 무서움은 아니다. 세상에서 저주를 받은 뒤에 달에 정배를 간다 하여도 이 무서움의 백분의 일도 못 된다. 넓으나 넓은 집을 부모가 어디 나간 틈에 혼자서 집을 보는 어린아이에게서야 처음으로 볼 그 무서움을 K는 맛보았다. K는 훌쩍훌쩍 느끼기 시작하였다.

『K! 걱정 말게. 나 여기 있네!』

C의 이 어린애 어르는 듯한 말은 K에게는 큰 안심을 주었다.

누가 있었는가? 아! C가있다. 나의 형 C가 있다! K 는 안심하여 C를 쳐다보았다.

『K, 무엇이 무서워?』

『응? 뭣인지, 시커먼 것이……허연 것이……그저 무서워……』

『어떻게?』

『응? 그저 무서워!』

『안심하게. 내일 금강산이나 가세.』

K는 무슨 말인지 똑똑히 못 알아들었다. 금강산이란 무엇을 의미함인가, K는 의심하였다. 벌써 알아보았는지 C는 설명을 한다.

『강원도 금강산 말이야. 우정 K데리러 평양까지 왔네, 편지만 하면 안 오겠기에……』

『응? ……』

『가지?』

『가게 되면 가지.』

『가게 되면이라니? 가야지! 못 가서 울지 말구.』

『가지.』

『정말?』

『응.』

『글쎄, 안 가면 앨 좀 때리렸더니……』

K도 C의 성질이 이런 줄은 잘 알지만, 이렇게까지 갑자기 나오는 데는, K는 다만 속으로(역시 C로다) 생각밖에는 더 못 내었다.

『그럼 누워 자게. 나두 여기서 자겠네.』

K와 C는 나란히하여 누웠다.

『K, 일어나! 12시가 줬는데……』

하는 C의 소리에 K는 눈을 번쩍 떴다.

『이젠 열두 없네. 오늘 낮차에 떠나세. 날두 좋구.』

하며 C는 문을 덜컥 열었다.

C의 말과 같이 날은 참 좋다. C는 12시가 되었다 하였어도 아직 6시 반쫌으로 하늘에는 멀건 운하(雲河)가 하나 걸려 있을 뿐, 가을 높은 하늘은 더 높고 푸르고 맑고, 동편하늘에는 새빨간 새벽놀이 다리를 뻗치고 괴상히 웃고 있다. 가을 맑고 찬 공기는 더운 기온과 합하여 한 불쾌와 상쾌를 준다.

어제 C에게 금강산 가기를 좀 희미하게 대답하였던 K도, 이 일기를 보고 또 자기의 지식의 대부분을 지배하는 C의 열심을 보고는 가야만 될 마음이 생겨서 가세, 하고 일어났다.

『일어나서 짐 꾸리게. 내 짐은 아까 가져왔네.』

『꾸리지……꾸릴 거 없네. 그저 가지.』

『흥! 거 대용단이로구먼. 짐도 안 꾸리구.』

『자, 가세. 인력거 부를까?』

『그러게, 난 낮차에 가겠네.』

『저엉, 낮에야 차가 있지?』

K는 어제와 오늘의 마음이 다른 것을 속으로 이상히 여기면서 입으로만 대답하었다.

.K의 Y에 대한 사랑은 마침내 육의 사랑이었다. 음양이 합한 사랑이었다. K 자기가 육의 사랑이라도 괜치않다고 억지로 마음을 먹고 그렇게 믿으려 하였어도, 여러 가지 C에게서 얻은 지식으로 자기 뇌민(惱悶)을 억지로 해결은 하였어도, 또는 참사랑이 되기를 대단히 원하였어도, 그의 사랑이 육적이던 것은 자기도 아는 바이다. 육의 사랑은 육의 결합이 없으면 소멸된다고 K 자기도 말한 바와같이, Y의 마지막 선고를 받은 다음부터-K와 Y의 사이에 육의 결합이 없어진 때-그 순간부터 K의 사랑의 한란계(寒暖計)는 차차 내리기 시작하였다. 물론 '기쁨의 반동인 슬픔'도 약하지는 아니하였지만, 당시의 K의 슬픔의 대부분은 시기로 인하여 나온 그것이다. 오늘에야 K는 그것을 깨달았다. 어제 Y의 잔치 구경 갔다가 보지도 않고 돌아온 K의 심리는 탁 치받치는 시기와, Y와 영구히 떠나는 순간의 한낱 신비적 깨달음으로 인하여 일어난 '실신'에 지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갑자기 그가 숭배하는, 그의 지식의 근원인, 그의 유일의 이해자인 C를 보는 순간에 안심과 (내게는 걱정이 있거니) 하는 생각의 작용으로 열도 났었다. 그렇지만 순간적 열은 곧 내리고, 그는 C의 감화로 이전과 같은 쾌활한 K를 회복하였다.

그들은 아침밥을 먹고 짐은 12시쯤 정거장으로 보내 달라고 부탁한 뒤에, 담배를 하나 씩 피워 물고 산보차로 모란봉을 향하였다.

『요게 숨이 차단 말이야?』

아직껏 Y의 이야기만 물으면서 오던 C는 처음으로 모란봉 꼭대기에 올라와서야 딴말을 한다.

『자네두 씩씩거리누만.』

『하하하! 나두?. 좋디! 저 을밀대 봐라!』

『좋지!』

『저 경치 봐, 언제 봐두 싫증 안 나!』

『응.』

『저 을밀대가 공중에 떴나 땅에 붙었나?』

『떴네!』

K는 고함쳤다.

『그래, 떴지! 평양 시민을 감독하려구.』

『왜?』

『K! 평양서 무슨 냄새가 나는지 맡아 보았나?』

『하하하하! 냄새가 나나? 무슨 내?』

『걱정 말게. 자넨 그 축에 안 섞겠네. 수전노 내, 돈 내, 물질 내, 허영 내!』

『난 안심했다. 서울선 무슨 내가 나나?』

『자네 모르나? 대감 내, 건달 내, 비단 내, 셋방 내, 무식 내!』

『금강산선 무슨 내가 날까?』

『아마 신선 썩은 내나 나겠지.』

『하하하하! 또 중 내……』

『그래. 저, 저기, 저 바위가 주암이지?』

『응.』

『거친 물의 핍박을 받을지언정 속은 역시 만년 불변이요, 동해물과 백두산 다-마르고 닳아두, 나는 변치 않는단 정신이로구먼!』

『응.』

위연히 서 있는 주암은 물과 백만 년을 다투면서도, 거친 물에 담겼을지언정 속은 역시 내 속, 정신은 역시 내 정신이라고, 백만 년을 백만 인에게 백만 가지로 가르치던 주암은 역시 굴치 않노라고 우뚝 대동강 위로 솟아 있다. 그 곁으로는 물이 거품을 가로물고 모란봉에서까지 들리도록 왁-고함을 치면서 내려온다.

움쭉이나 하겠느냐는 듯이 주암은 그냥 위연히 서 있다.

『기자묘로 가세.』

C가 말했다.

『가지.』

K는 따라갔다. C는 기자묘를 향해서 큰길로 나섰다.

기자묘에 가자던 C가 들르지 않고 지나가므로 K는 이상하여 물었다.

『어디루 가나?』

『정거장으로 가지.』

『응, 시간 되었나?』

『12시 반이 지났네.』

그들은 칠성문 안까지 와서 인력거를 잡아타고 정거장으로 향하였다.

가는 길에 서기산(瑞氣山) 화장장(火葬場)에서는 1918년의 돌림감기로 죽은 사람을 태우는 내가 높이 동북편 하늘로 세상 사람들을 비웃는 듯이 장려하는 듯이 길게 뻗치고있다.

낮차의 시간에 못 미친 그들은 새벽 1시 차의 일등실에 서로 대하여 앉았다. 일등차를 처음 타 보는 K는 안락히 소파에 퍽 들어박히면서 C에게 물었다.

『C, 일등만 타고 다니나?』

『응, 왜?』

C는 대답 겸 물어본다.

『인도(人道)에 위반되지 않나?』

『하하하하! 어느 틈에 그리 인도주의자가 되었나?』

『뭐, 인도주의자가 된 바는 아니지만……』

K는 입을 움찔움찔하였다.

『하하-바보의 소리야! 자기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데까지는 자기 몸을 평안히 할 것이라네! 가만, 여긴 글렀어.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자는 상 뵈구, 어디 내 침대권 사 올께, 앉아 기다리게.』

하고 C는 일어나서 차장실로 갔다.

C가 간 뒤에 K는 하얀 무명으로 덮인 소파에 양생스러이 들어박혀서 턱을 팔에 의지하고 평양을 내다보았다. 역부(驛夫)들의 "평양-평양"하는 소리는 개찰구에 걸려 있는 불과 함께 졸음 오는 듯이 비인 정거장에 퍼져 나간다. 개찰구 밖에는 객주집 사환과 순사들이 졸음 오는 눈을 비비며 빛나는 차창들을 들여다보고 있다.

종소리와 호각소리가 나고 기차는 한 번 고함친 뒤에

『턱 』

소리와 함께 파발을 떠나서, 덕덕 소리가 날 때마다 속력을 가하면서 반짝이는 등불을 뒤로 보내며 양각도(島)로 들어선다.

『그렇다!』

K는 무엇이 그런지는 모르지만 소리까지 내어 중얼거릴 때에 C가 돌아와서 턱 걸터앉는다.

『K!』

C는 성난 소리로 찾는다.

『응?』

『이 차두 서울까지 가지?』

하하-실패하였구나 하면서 K는 대답하였다.

『음, 가지.』

『글쎄, 상놈들! 침대차만 서울 간다는 법은 없지! 이 차도 서울 아니라 부산까지라두 가! K, 이 차루 가세! 상놈들 만원됐다네.』

K가 잘 아는 C의 교만한 성질의 산물이 이것이다.

K도 다른 사람에게면

『또 시작했다』

라고 좀 놀릴 터이지만, K가 존경하는 C의 성은 직접으로 K의 성이요, C의 기쁨은 직접 K의 기쁨이나 다름없다-K는 대답할 말이 없어서 가만히 있었다.

『K, 담배나 하나씩 먹구 자세.』

C의 주머니에서는 좋은 엽권(葉卷)이 둘 나와서, 하나는 K가 붙이고 또 하나는 C가 붙였다.

일등실은 고요하였다. 신문기자인 듯한 사람 하나와 어떤 군인 하나밖에는 다 침실로 가고, 간혹 차가 급각도로 돌 때에 배그걱삐그걱 하는 소리밖에는 참 고요하다.

K는 문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담배 연기를 퍼치면서, 번하니 서북편 하늘로 보이는 차차 멀어져가는 평양 하늘을 보면서, 마음에는 슬픔, 외로움과 갑갑함을 깨달았다.

『흥! 되고 싶은 대로 되어라!』

이즈음 그에게 무시로 생각나는, 뜻 없이 이유 없이 쑥 나오는 구(句)를 속으로 중얼거리고 평양의 하늘을 그는 한층 더 자세히 보았다.

K는 슬펐다. 별로 슬펐다. Y를 잃은 것보다도 앞의 외로운 삶을 내어다볼 때에 신비적 예감으로 말미암아 나온 슬픔, 그것을 그는 깨달았다. 넓으나 넓은 세계의 억만 인구가 한순간에 모두 소멸하고, 물로 씻은 듯한 세계에 다만 혼자 외로이 남은 슬픔, 그것을 그는 깨달았다. 십 오륙 세기식 굉장한 건축 안에 혼자 앉아서, 로맨틱한 옛적 기사 이야기라도 읽는 때의 슬픔, 그것을 그는 깨달았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펑 돌았다. 그는 벌써 잠이 든 C에게 눈물을 감추려고 손으로 왼편 뺨을 짚었다.

『흥! 되고 싶은 대로 되어라!』

그는 소리를 내어 중얼거렸다.

멀리 산 밑에서 반짝거리던 불빛들이 기차 뒤로 달아난다. 그 위로는 음력 초엿샛날 구부러진 달이 시꺼먼 도깨비 울 만한 솔밭 위에 푸르게 내리비치고 있었다.

K는 이것을 내다보면서, 그리고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를 휘파람으로 불면서 발로 곡조를 맞추고 있었다. 몇 번 거푸 할 때에 그는 기차의 덜, 덜, 덜컥, 덜, 덜, 덜컥 하는 바퀴 소리에서도 이 음악이 올려 나오는 것을 들었다. 그것은 오케스트라 합주였다.

그는 눈물을 씻고 이 음악을 들었다.

이 음악은 차차 기차 바퀴에서만 나지 않고, 좌우편의 널은 논과 밭과 그 끝에 있는 뫼와 삼림에서까지 일어나서, 그 소리는 뫼를 울릴 듯이 굉장히 K의 귀로 날아들어 왔다.

K는 구름 위에 올라앉은 것 같은 너울너울하는 마음으로 이를 들었다.

소리는 차차 커간다.

『잘 한다.』

K는 소리를 내었다.

그의 가슴은 기쁨으로 찼다-그는 전에 반월도(半月島)에 누웠을 때에 처음으로 이 기쁨을 맛보고, 오늘이 두 번째이다. 그 소리는 가까이서 나면서도 또 멀리서 나는 것같이 바람의 결과 함께 좀 굵어도 지고 가늘어도 진다.

(아-이것을 모르고 스물 네 해를 살았다.)

K는 무엇인지도 모르지만 어떤 삶에 철저한 철리(哲理)를 안 것같이 생각되었다. 무엇인지는 모른다.

어떻든 이후에 탁 만날 때에는 아-이것이었다쯤은 자기에게 알게 된 것같이 생각되었다.

그는 저편 앞을 내다보았다.

거기는 한 빛이 있다. 해의 빛도 아니다. 달의 빛도 아니다. 신비의 눈에 비친 신비의 빛이, 거기는 밝게 빛나고 있었다. K는 뫼를 꿰고 더 저편을 내다보았다.

거기는 끝없이 넓은 벌판이 전개되어 있고, 역시 알지 못할 빛은 밝게-혁혁히 빛난다.

(서방(西方) 십만억토의 극락세계-요단강 저편의 대낙원!)

그 다음 순간, 그는 그 럼은 벌 저편 끝에 가서 닿는 기차를 보았다. 기차의 닿는 그곳은 캄캄하고 불쌍하도록 볼 것 없고, 그 안에 보이는 K 자기는 참 어떻달지 모르도록 썩고 더러웠다. 그리고 K자기가 서 있는 곳은 무어라고 말하기 어렵도록 아름다운 음악과 향기로 찼으며, 거기 비치는 빛은 인간의 그 누렇고 붐은 햇빛과는 다르고, 참사랑의 분홍빛 빛이 둥그렇게 빛나고 있다…… (아! 이것을 모르고 스물 네 해를 살았다!)

그 음악과 그 빛은 차차 더 아름다와지며, 차차 더 빛나며, 둘이 합하여 둥그렇게-원만하여진다. K의 기쁨은 절정에 달하였다. K는 이와 같이 지내는 한 시간을 위해서는 10년의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게 생각되었다. 이것을 맛보지 못하고 사는 일흔의 목숨이 이것을 맛본 스물의 목숨보다도 얼마나 더 불쌍한지, K 는 헤아리지를 못하였다. 이 시간이 K에게 제일 값있는 시간의 하나이다.

(아-이것을 모르고 스물 네 해를 살았다.)

사흘 뒤 아침 10시쯤 K와 C가 탄 배 충청환(忠淸丸)은 장전항(長箭港) 어구에 가깝게 이르렀다.

K는 몸을 결박한 듯한 C의 낡은 양복을 입고 C와 함께 갑판 위에 나섰다.

가을 찬바람은 K의 양복 앞자락을 휠휠 뒤로 휘날린다.

K는 몸을 한 번 떤 뒤에 C에게 향하였다.

『에-춥다! C, 양복 작아 글렀네.』

『좋으네, 좋아!』

『좋다니? 결박한 거 같아서 글렀어. 반환하세.』

『그럼 뭘 입구? 자네 잔뜩 토하지 않았나?』

『씻어 입지.』

K는 웃었다.

『하하하하! 씻어서? 해 보게!』

『C, 좀 씻어 주게.』

『성화시키지 말게. 한데 이 밴 어디로 닿을 작정 인고?』

『저기 닿겠지.』

하며 K는 뱃머리 향한 편을 가리켰다.

『그런 무인지경엔 닿을 이유 없구……』

배는 또 머리를 한 번 돌려서 반도(半島)와 같이 나온 곁으로 돌아간다. 이번은 장전항인가 할 때에, 또 아까와 같은 곳이 그들 앞에 전개되었다. 배는 천천히 소 우는 소리를 연발로 내며 거기를 또 지나간다.

『또 지나간다. 요것만 지나면 장전항이네,』

『어째서?』

『어떻든 장전항이야!』

『자기두 잘 모르댔구만……』

『내기라도 하세.』

『아무렇게나. C, 무얼 내겠나?』

『자네부터 말하게.』

『말하게.』

『내 양복 빌려 주지. 자넨?』

『양복은 벌써 입었네. 가만! 배 돌아선다!』

배는 또 한 번 괴상한 소리를 내고 천천히 돌아선다. 산곁으로 시꺼먼 석탄배 두엇과 새로 지은 집 몇 개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C는 내기하던 것은 잊었는지 곧 짐을 가지러 뛰어내려 간다.

K는 갑판의 난간에 의지하고 차차 커져 가고 많아져 가는 장전항을 바라보았다. 뒤와 오른편으로는 산을 끼고 앞으로는 바다를 안고 왼편으로는 온정리(溫井里) 가는 큰길을 가지고, 저편 뒤에는 대금강(大金剛)의 위대한 경치를 벌인 장전은 기쁜 듯이 자랑하는 듯이 부끄러운 듯이, 조그맣게 웃고 있다. 잔교(棧橋)도 보였다. 삼사십의 새집으로만 된 장전항 오른편 끝에 달린 잔교에는 지게군과 인력거군들과 나그네 맞으러 온 사람틀이 까뭇까뭇 희뜩희뜩 배를 바라보며 기다린다. 그 뒤에는 개가 몇 마리 바람과 회롱하며 날된다. 배의 "더그럭"닻주는 소리가 날 때에 C는 짐을 들고 나왔다.

배가 멎고 잔교에서는 마상이가 하나 나온다.

K는 내리고 싶기도 하고 싫기도 하였다. 그의 머리에는 문득 Y에게 대한 한 신비적 슬픔이 떠올랐다. Y와는 이젠 영원히 만날 수 없다. 자기는 멀리 속세를 떠난 금강산에 있고, Y는 속세 가운데 속세인 평양에 있다. 이와같이 자기와 Y의 사이는 거리의 사이뿐 아니라 경우의 거리의 사이까지 있다. 어찌 Y와 만날 수 있으랴! 이유 닿지 않는 이 결론도 그에게는 제일 당연하고 제일 옳은 결론으로 생각되었다.

『음! 되구 싶은 대로 되어라!』

그는 소리를 내었다.

『무얼 그러나? 자, 내리세.』

하는 C의 소리에 그는 펄떡 놀라서 잠깐 C의 낮을 쳐다본 뒤에, 말없이 C의 짐을 하나 들고 구름다리를 내려서 마상이에 올랐다.

마상이가 사람으로 가득 찬 뒤에 삐그걱삐그걱 젓는 소리와 함께 마상이는 본선(本船)을 떠나서 잔교로 간다. 배가 닿은 다음에 잔교에 내려서 C는 바다를 향하여 돌아선다. K도 같이 돌아서서 그 밝은 바닷빛과 그 넓은 바다 기운을 가슴껏 들이마시며, 구부러지고 또 구부러져서 더 넓은 조선해(朝鮮海)와 접한 장전항을 바라볼 때에, K는 일종의 외로움과 무한 큰 상쾌를 깨달았다. 그것은 며칠 전 경의선 열차 안에서 그림자의 세계를 떠 다닐 때에 그것과 비슷한 것이다.

그는 C를 보았다. C도 눈에 난란한 빛을 내고, 아침 빛에 반짝거리는 반사광에 낯을 쪼이면서, 펴졌다 줄어졌다 하는 바다의 해와 만년의 비밀을 감추고 있노라는 새파란 바다의 속삭임을 듣고 있다.

『아.』

K는 돌아섰다.

『금강산 호텔까지.』

조금 후에 인력거를 불라 타면서 C는 차부에게 명하었다.

『호데루 말씀입니까?』

차부는 묻는다.

『K! 이 금강산선 '호텔'을 '호데루'라는군. 응, 그 '호데루'까지.』

『네,』

『빨리.』

C가 말할 때는 인력거 채는 벌써 들렸을 때다.

배를 처음 타 본 K는 배에서 게웠다. 게우다 못하여 마지막에는 쓴 위액까지 게웠다. 게워서 옷을 모두 적신 뒤에, 그는 C의 작고 낡은 양복을 빌어 입었다.

작은 양복으로 배를 결박한 그는 배에서 내려서도 게울 것 같았다. 아니 위 속에 게울 것만 있었으면 또 게웠을 것이다. 바다의 넓은 경치를 바라본 뒤에는 좀 낫지만, 돼지국에 친 국수를 먹고는 또 게울 것 같았다. 인력거를 탔다. 그는 단정코 게우리라 생각하였다.

그는 이를 할 수 있는 데까지는 막아 보려고 숨도 적도(適度)로 쉬고 몸도 할 수 있는 대로 안 움직이고 눈앞에서 전환되는 경치를 바라보았다.

장전을 떠나서 한 50분이나 왔을 때도 K는 구역을 안 하였을뿐더러, 아까 구역까지 어디로 가 없어지고 왼편으로 오른편으로 건드리는 양생만이 남았다. 그는 안심하였다. 이 안심과 함께 그에게는 다른 불안이 떠올랐다. 그 사이 며칠 동안은 눈앞에 걸핏걸핏 바뀌는 경치로 말미암아 또는 생각하렬 때마다 C의 방해로 말미암아 못 한 끝없는 시기와 함께 또 끝없이 통쾌한-Y에 대한 생각이 구역의 안심과 함께 일어났다.

(Y는 지금 무엇하고 있노?)

Y의 생각을 할 때마다 일어나는 것은 이것이다. 그는 눈을 감았다. 눈껍질 안으로 비치는 새빨간 피빛을 보면서 그는 Y의 그림자를 보았다. Y의 앞에 앉은 사내는-Y의 남편인 듯한 사내는, 우아하고 사내답고, 귀족적 위엄을 모두 가졌고, Y는 그 앞에서 열심으로 흘린 듯이 그 사내를 들여다본다. 물론 그 그림자는 희미하고 똑똑치 않았다. 그렇지만 똑똑치 않고도 그 남자의 형용은 K에게 똑똑히 인상된다. 이때의 Y는 세리상의 Y 그가 아니고, 참여성미를 가진-K가 잘 아는 부끄러움의 웃음을 웃는 그 표정의 Y다.

K는 자기 가슴 속 어디에 구멍이 뚫려지지 않았는가 의심하였다.

그렇지만 K는 막지 못할 인력으로 그 공상의 범위를 한층 더 넓혔다. 한 번 번쩍 한 뒤에 아까 그림자는 없어지고, 새빨갛게 비치는 껍질만 보였다. K는 이번 나을 그 무서운 그림자를 생각하였다. 새빨갛던 눈껍질은 검은 막으로 잠깐 덮였다가, 그 검은 막 저편 끝에, 어떤 알지 못할 사내의 머리 앞에 머리를 하얀 베개 아래 헤쳐 놓은 Y가 보였다. 검은 막은 이불로 변하였다.

K는 이를 갈았다.

Y의 위에 있던 사내는 어느덧 K 자기로 변한다. K 는 일변 기쁘고 일변 성이 났다.

(그럴 리가 없다. 다른 놈이다. 촌 무지렁이다! 아까 그런 미남도 아니다!)

그림자는 한 번 벌떡 뒤집힌다. 거기는 눈에 눈곱이 지기지기 끼고 입술에는 고름이 질질 나는 보기도 더러운 촌 무지렁이의 갈구리 같은 팔 안에 Y가 끼어 앉아서 너무 기뻐서 생긋생긋 웃고 있다.

(에잇! 되고 싶은 대로 되어라!)

그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아-그렇지만-Y는 나를 역시 생각할까?)

그는 그 뒤를 생각할 만한 똑똑한 머리를 가지지 못하였다. 그는 눈을 번쩍 떴다.

이끼로 둘러싸여서 새까맣게 보이는 바위와 이젠 갈색으로 변한 풀로 된 뫼가 왼편으로 오른편으로 저편 앞으로 우뚝 서서, 진(陣)과 같이 보이는 복판 가운데 가늘게 한 줄의 길이 있고, K의 앞에는 좌우(左右)하는 C의 머리가 인력거를 너머 보인다.

K는 갑자기 C에게 물었다.

『C, Y는 지금 무얼 하구 있을꼬?』

『하하하하! 또 생각나? 자기 새서방의 의복하겠지……그 따위 생각은 틈이 있을 때 하구, 저 바위나 보게. 솔개바위라네.』

『솔개바윈 아까 지났읍니다.』

차부가 주(註)를 단다.

『하하하하! 지났나?』

C는 웃고 만다.

『세상 즐거워할 것이라. 비관치 말 것이라』

하는 C의 태도가 K에게는 부럽고도 밉고도 수긍치 않을 수 없었다.

(온 어찌하면 저렇게 모든 번민을 초월하여 모든 근심을 도외로 볼 수가 있을꼬……)

라는 생각은 K의 머릿속에서 Y에 대한 번민과 함께 죽을 쑤듯 북적북적 돌아간다.

C와 Y-C의 낙관(樂觀). Y, 그의 남편. 나와 Y. 사랑-나와 Y의 남편의 사랑. 갈구리.

그의 머리에는 통일 없이 이 생각이 왔다갔다하였다. 그는 눈을 감고 이유 없이-통일 없이 나오는 통일 없는 생각으로 머리를 어지러이하며, 어찌 되는지 자기도 모르게 시간을 보냈다.

오전 2시쯤 그들이 탄 인력거는 온정리 금강산 호텔 문 앞에 닿았다.

차부는 인력거를 놓으려다가 생각난 듯이,

『아, 여름밖에는 호데루에 사람 안 묵입니다.』

『뭐? 안 묵여?』

C는 성을 냈다.

『네.』

『그럼 왜 아까 장전선 안 그랬어?』

『잊었댔읍니다……』

『잊었뎄어? 그런 걸 잊어 어찌! 상놈들…… 여름 나그네만 나그네야! K, 아무데나 묵세. 얘, 아무 데나 정한 데루 가자.』

그들은 새집뿐으로 된 온정리를 지나서 저편 끝 어떤 여관 앞에 이르렀다.

삯을 준 뒤에 그들은 주인에게 끌려서 어느 외딴 방으로 들어갔다.

『에-이젠 다 왔다!』

K는 들어앉으면서 별로 안심되어 말했다.

『흥! 이 여관도 좋기만 하다. 호텔은 별한가?』

하면서 C는 온정리 가운데를 일직선으로 꿰인 길로 향한 문을 덜컥 열었다.

언제든 그렇거니와 K는 C와 대하면 모든 번민이 스러져 없어지는 것을 깨달았다.

『C, 이런 데두 재봉침이 쓸 데 있나?』

『왜?』

『저 맞은편에 씽거 회사 특약점이 있기에.』

『에-좀 누워야겠다.』

하며 C는 벌떡 자빠진다.

『나도 눕자.』

하면서 K도 누웠다.

『그런데, K.』

C는 누워서 찾는다.

『왜?』

『내 말 듣게.』

『듣지.』

『Y는 자넬 안 잊으리!』

K는 무슨 영문인지를 몰랐다. C는 Y에 대한 이야기를 모란봉 산보갈 때 한 번만 물었고, 그 뒤에는 아직껏 K에게 그 이야기를 피하여 왔다. 그러던 C가 갑자기 Y의 이야기를 꺼내는 데는 K는 영문을 몰랐다.

『어째서?』

K는 물었다.

『어째서든 안 잊어.』

『이유가 있어야지.』

K는 역시 의심하였다.

『이유야 물론 있지. 어떻든 자네가 먼저 Y를 잊으리.』

『하하하하! 내가 먼저?』

K는 두 번째 놀랐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럴까)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Y에 대한 번민은 역시 '하고 싶어서 하는 번민'에 지나지 못하였다. 뜻하지 않고 나오는 참마음의 번민이 아니다. '내게는 무슨 번민이 있다. Y는 간다. '부러 생각하여 꺼내는 타발적 번민에 지나지 못하였다. 그 증거로는 혼자서 갑갑히 이리저리 생각할 때야만 그는 자기의 번민을 깨달았다. 참번민이 있는 사람은 K와 같이 그렇게까지 한가히 번민치 못한다-K는 (그러려니) 생각하였다.

『그럼! 무론 자네가 먼저 잊지. 자네 성격이 그것을 증명하네.』

C에게 편지로나 Y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괜치않아도 직접으로 이야기하려면 K는 언제든 낮이 후끈후끈 다는 것을 깨달았다. 농담으로 문답은 하여도 낮이 다는 것은 변치않는다.

K는 화제를 바꾸었다.

『그런데 내일은 어딜 가노? 만물초(萬物肖)?』

『구룡연(九龍淵)으로 가세. 가까운 데부텀 해야지.』

『구룡연이라니, 못?』

『폭포!』

『폭포? 좋지!』

K는 곧 찬성하였다.

『K, 자 산보가세!』

C와 K가 인력거로 신계사(神溪寺)에 이른 때는 가을. 높고 횐 하늘 좀 남(南)편으로 복판 가운데 누런 해가 걸렸을 때-정오에 가까운 때다.

잿빛 수염을 신식으로 한 방주(房主)가 나와서 그들을 맞았다. 그들은 절 문안에 들어섰다.

『K, 곧 갔다 오지.』

『아뭏게나.』

『그럼……』

C는 방주에게 향하였다.

『자, 안내군 하나 좀 불러 주시오. 구룡연이나 보구 오는 길에 절 구경이나 하게……』

『그럽시다.』

방주는 공손히 대답하고 무엇을 수선하는지 일군들이 일하는 편으로 갔다.

『K!』

C는 K에게 향하였다.

『음?』

『그 주의 벗게.』

『왜?』

『더운데 벗어 맡기고 가자. 모양 사나워. 누릿누릿한 것이……』

K는 주의를 벗어 들고 절을 둘러보았다. K는 절에 대하여 한 불만을 깨달았다. 그래도 역사도 길고 금강산 가운데 제일류의 절 가운데는 든다는 것이 이렇게까지 더럽고 낮고 조그말 줄은 그는 뜻도 안 하였다.

그렇지만 그 가운데도 그는 한 영기가 차 있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떻겐지 어딘지는 모르되, 그 근처의 공기에는 산소, 탄소 밖에 한 영기라고 부를 만한 기운이 포함되어 있다. 그는 장전 가는 큰길에서 이 신계사로 오는 곁길로 들어 한참 들어와서 길 바로 옆 산 밑에 기와집이 두어 개 있는 것을 볼 때-그 순간부터 이 영기를 깨달았다. 세계가 넓다 하여도 금강산이 아니면 느끼지 못할 영기이다.

방주는 안내군을 불러 가지고 왔다. 그들은 그 절에서 짚신을 사서 신고 구두와 K의 주의를 맡긴 뒤에 안내자를 따라서 절을 나섰다.

『자. 가십시다.』

하며 안내군은 쾌활히 팔을 저으며 앞서 간다.

습기로 찬 솔밭 하나를 끼고 그 범위 밖에 나서서 좀더 가다가 C와 K는 그 앞에 전개된 경치에 놀라서 발을 멈칫 멈추었다. 곧 앞으로 깎아 세운 듯한 산, 왼편으로도 깎아 세운 듯한 산, 오른편으로도 깎아 세운 듯한 산, 그 가운데 K와 C의 곧 발 앞에는 병풍산수화에서나 볼 시내가 동으로, 서로, 도로 동으로 소리를 내며 흐른다. 새까만 이끼로 덮인 화강석으로 된 산, 그 가운데 흙 있는 데 새까만 조선 솔과 '지금이 내 때로다'라고 자랑하는 단풍이 까맣게 붉게 또는 누렇게 점철되어 있다. 산에 가린 조그만 하늘에서 내리비치는 어두운 빛은 흐르는 시내의 물결에게 물리쳐져서, K와 C의 낯에 반짝반짝 반점을 짓는다.

『좋다!』

K와 C는 함께 고함쳤다.

『좋아요? 더 들어가자면 더욱 좋습니다-그래두 우린 늘 보니까 그리 좋은 줄 모르겠는데요.』

안내자는 자랑하는 듯이 돌아서서 말한다.

『자, 가세!』

하는 C의 소리에 K는 다시 걷기 시작하였다.

K는 가득 찬 영기를 마시며 무르익은 남성미를 나타내는 좌우 앞뒤의 경치를 보며, 흑은 시내를 건너뛰며, 흑은 네 발로 걸으며, 사람을 취케 하는 경치에 "좋다"소리를 연발로 하며 걸었다.

『이것이 금강문이올습니다.』

하는 안내군의 소리에 K는 그편을 보았다. 왼편은 우둘투둘한 바위요, 그 다음은 시내요, 정면으로는 큰 바위 가운데 시꺼먼 구멍이 있다.

『이리로 들어갑시다.』

안내자는 그 구멍 속으로 들어간다.

『K, 도깨비 있나 주의하게!』

하면서 C도 들어선다. K도 따라 들어갔다.

얼마나 긴 줄 알았더니, 한 번 구부러지고는 다시 곧 금강문 밖 밝은 곳에 나섰다.

『이제부터가 참 금강이외다.』

그들은 금강의 위대한 대자연 안에서 또 앞으로 나아갔다.

『저것 봐라!』

한참 가다가 C가 고함쳤다 첩첩이 둘러싼 금강산을 한칼로 내리찍은 것같이 그들이 섰는 곳서 일직선으로는 몇 겹 둘러쌌던 좌우편의 산이 모두 다 사람 인(人)자 거꾸로 세운 듯이 몰쳐지고, 그 틈으로는 가을 맑은 바람이 금강의 영기를 몰아다가 그들에게 보낸다. 그 틈으로 보이는 저편 멀리 산 밖에는 눈이 부시도록 밝은 빛이 줄기줄기 빛난다.

『평양까지 뵈겠다!』

K는 고함쳤다.

『더 가세!』

그들은 시내를 끼고 또 걷기 시작하였다.

『여기는 옥류동(玉流洞)이올습니다.』

하는 소리에 그들은 또 멈칫 섰다.

지반(地盤) 전면이 화강석으로 되고, 거기는 옥류동이라 그 밖 고금의 유람객들의 이름을 새겼으며, 저편 첩첩이 둘러선 산의 병풍 사이에서는 참 옥류(玉流)인-옥과 같은 시내가 동으로 서으로 고불고불 화강석 사이로 흐른다.

『에-다리 아프다!』

하고 K는 털썩 주저앉았다.

『쉬어서 가지.』

하며 C도 앉았다.

『경치 어떤가?』

K는 물었다.

『좋네! 벙어리 꿀 먹은 맛이네.』

『모르겠단 말인가?』

『왜?』

『그래두 벙어리 꿀 먹은 것 같대게……』

『하하하하!』

C는 그 특유의 웅웅 울리는 소리로 웃는다.

『자네 아직 벙어리 꿀 먹은 맛이란 그런 뜻으로 알았댔나? 벙어리가 꿀을 먹기는 먹었는데 맛이 너무나 좋아도 벙어리가 어떻달지 형용을 못 한다는 뜻이라네. 형용할만한 적당한 말이 없단 말이야! …… 자네 금강산 인상이 어떤가?』

『벙어리 꿀 먹은 맛이네.』

『자, 이야기해 보게.』

『자네부터 하게.』

K는 역습하였다.

『나부터? 하지.』

하며 C는 여행백에서 스케치북을 꺼낸다.

『하하하하! 그림으로 그릴 작정인가? 것두 인상인가?』

K는 웃었다.

C는 대답도 안 하고 곡선과 직선으로 된 알지 못할 그림을 그린 뒤에 한참 눈을 감고있다가 다시 뜨고, 이 선화(線畵) 위에 물감을 칠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뭐야?』

K는 물었다.

C는 역시 대답 없이 머리를 이리 기울였다 저리 기울였다 하면서 물감을 다 칠한 뒤에

『자, 보게.』

하면서 K에게 내대었다.

K는 보았다. 무엇인지 모를 그림이다.

『한참 보게.』

C는 주의한다.

한참 볼 때에, K는 무엇인지는 모른다. 어딘지도 모른다. 어떻든 그 그림 가운데서, 그 알지 못할 오색으로 된 곡선과 직선과 면 가운데서 풍부한 그 금강의 위대한 경치와 정조(情調)와 영기를 발견하였다.

『금강산의 경치의 인상은 말이나 글로는 못 나타내겠네!』

C는 말했다.

『됐네! 자넨 위대한 인상 화가네. 그런데 온정리 인상은 어떻던가?』

K는 물었다. K는 자기가 온정리에 들어서는 순간에 어떤 인상을 얻었으므로 그것을 말하고 싶어서 물은 것이다.

『자네는 어떻던가?』

C는 도로 묻는다.

『나? 밤 껍질에 밥 담은 것 같데.』

『좀더 잘 해야겠네.』

『이젠 가십시다.』

하는 안내자의 소리가 들린다. 안내자는 어느덧 어디 가서 튼튼한 지팡이를 하나 깎아 가지고 왔다.

『가세.』

하며 C도 일어선다.

『난 좀더 쉬어서 가겠네.』

K는 더 튼튼히 앉았다.

『그럼 뒤로 오게.』

『음.』

C는 서너 걸음 가다가 또 돌아선다.

『그래도 안 오나?』

『응.』

『응이라니, 빨리 오게.』

하면서 C는 이번엔 뒤도 안 돌아보고 안내자를 따랐다.

『구부러진 곳마다 표를 하지.』

하는 C의 소리는 벌써 꽤 멀리서 들린다.

K가 C를 안 따라가고 그 자리에 머무른 데는 한 이유가 있다. 화강석 틈으로 흐르는 그 푸르고 맑은 물에 K는 샛노란 가을 쑥꽃이 물결을 따라 고하(高下)하며 흘러내려가는 것을 보았다. K는 이것을 두고 한 달콤한 공상을 맛보고 싶었다. 그래서 C가 먼저 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방은 참으로 고즈넉하다. 똘똘똘똘 흐르는 물소리와 때때로 나무 틈을 스쳐가는 바람 소리는, 있어도 아니, 오히려 이 소리로 말미암아 사위는 더 고즈넉하다. 위로 터진 하늘에서는 밝은 빛이 줄기줄기 내리비친다.

이때에 K는 공상의 나라에 들어섰다.

K는 어딘지 모를 곳에 갔다. K의 앞에는 맑은 시내가 하나 맑게 푸르게 흐른다. 그 시내에는 연꽃이 한 송이 흘러내린다. 조금 뒤로 또 한 송이, 또 한 송이, 또 한 송이-동동 물결에 오르내리며 저편 하류로 흘러내린다.

-K는 어느덧 구운몽의 '성진'이가 되었다-K는 일어서서 그 시내에서 연 송이를 하나 들어 코에 대었다. 인간에게서는 도저히 듣지 못할 선녀의 노래가 그 시내 줄기를 쫓아 상류에서 내려온다. K는 눈을 들었다. 칠색이 몽롱한 무지개가 그의 앞에서 그를 인도하려 기다리고 있다. K는 다리를 옮겼다. 발이 별로 가벼운 것이, 누가 자기를 들고 가고 자기는 다만 다리만 버둥거리는 셈이다. K는 무지개를 따라 차차 상류로 올라갔다. 한참을 나가매, 향내는 점점 많아지며 노래 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아름다와진다. K는 춤을 추면서 올라갔다. 더 가다가 참 소위 금반에 구슬을 굴리는 소리에 번쩍 주의하니, 찬란한 비단으로 몸 감고, 검고 긴 머리를 뒤로 풀어내린 팔인 팔색으로 각각 여성미의 최정점을 가진 팔 선녀가 그를 둘러싸고 아양을 부린다. 첩들은 낭군을 기다리기 오랬는데, 낭군의 오심이 어찌 이리 늦은가, 선녀들은 K를 원망한다. K는 핑계를 대고 사죄를 한다. 선녀들은 기뻐서 K를 위하여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춘다. 그런 뒤에 팔 선녀가 다 K에게 해로의 맹세를 원한다. K는 좀 꼰다.


선녀들은 잠시라도 떠나서 살 수 없으니 아뭏든 옥황상제님께 허락을 맡자 한다. K는 마지못하는 듯이 허락하고 팔 선녀 인솔하고 상제님께 부부되게 하여 줍시사고 원을 한다. 종내 상제님도 허락을 하셔서 그는 천상에서 팔 선녀를 아내 삼고 재미있게 잘 산다. 하루는 K가 대동제국 고려에 한 1년간 내려가 살기를 상제님께 빌어서 허락을 맡고, 평양에 응대하게 궁을 짓고 팔 선녀 데리고 내려온다. Y는…… K는 공상의 나라에서 후덕덕 현실의 나라로 뛰어나왔다.

(그렇다! Y는……)

K는 침을 탁 배앝고 일어서서 C의 뒤를 따라갔다.

『C! C-』

『왜?.』

소리는 이 산에 울리고 저 산에 울려서 K에게로 날아온다. K는 소리나는 방향으로 혹은 네 발로 기며, 혹은 쇠사슬을 따라서 C의 뒤를 따라갔다.

『C, C-』

부르면서 물에 젖어 미끄러운 바위들을 걸어서 K가 겨우 C 있는 데 미친 때는 C는 안내군의 설명으로 비봉봉(飛鳳峰)을 보고, 비봉폭(飛鳳瀑)으로 향하였을 때다.

망원경을 거꾸로 쥐고 멀리서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면 이것이 즉 비봉폭이다. 평면에 가까운 사면 전석반(斜面全石盤), 까맣게 보이는 저편 끝에서 하얗게 비늘같이 빛나는 물이 혹은 일이 장 혹은 삼사 척의 언덕을 떨어지며 구을러서, 그들 앞에서는 조그만 개울같이 되어 아래로 달아난다. 폭이라는 것보다 샘물에 가깝다. 여기는 금강산 경내에 드물도록 하늘이 넓고 밝다.

『K, 어떤가?』

『벙어리 꿀 먹은 맛이네.』

『또 벙어린가?…… 물 좀 먹자.』

하면서 C는 물로 가까이 간다.

남이 목마르다는 소리를 들으니, K도 별로 목이 말라서 C의 뒤를 따랐다.

『K, 미끄러우이. 주의하게.』

하는 C의 소리를 듣고, K는 두 팔을 들고 춤추던 중심을 잡으면서 물 있는 데로 가다가 물에서 일이 척 되는 거리에서 모든 노력이 쓸데없이 K는 미끄러져서 물에 첨벙 빠졌다.

『하하하하! 내래 빠졌나?』

C는 웃는다.

『에, 춥다.』

하며 K는 빨리 일어서서 언덕의 미끄러운 바위를 손으로 잡고 올라오려고 애를 썼다. K의 잡은 바위는 편편하고 미끄러웠다. 물살은 빨랐다. K는 또 한 번 넘어졌다.

『이 손 잡게.』

하고 내어미는 C의 손을 K는 잡고, 푸푸 머리에서 흐르는 물을 입으로 뿌리면서 미끄러운 것을 도로 빠졌다 나왔다 하다가 겨우 언덕 위에 올라왔다. 옷에서는 찬 샘물이 줄줄 흐른다.

『에, 춥다.』

K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추운가? 이거 야단이로다! 외딴 데라 입을 게 있어야지.』

K는 저고리를 벗어서 쥐어짰다. 물은 한사발이 넘도록 떨어진다.

『가만 K, 저고린 이 양복 입고 바지나 짜게. 내 짜 주지. 벗게.』

『뭐 내 짜지.』

하고 또는 돌아앉아서 바지를 짜서 입고 C의 양복 저고리를 얻어 입었다.

K는 이때야 아까와 같은 그 겉의 추위가 아니고, 참심장(心臟)의 추위를 의식하였다. K는 몸을 오그라뜨리고 무릎을 안았다. 추위는 가죽을 꿰고 살을 꿰고 심장을 꿰다 못하여, 도로 살을 꿰고 가죽을 꿰고 뒤로 빠져 달아난다. K의 입과 등과 무릎은 멈추려야 멈출 수 없이 우르르 떨린다. K는 눈을 감으면 좀 낫지 않을까 하여 눈을 감았다. 아까보다 더 춥다. 도로 눈을 떴다. 또 더 춥다.

『에, 춥다.』

그는 기력 없이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말을 하니,

입을 벌리니 추위가 더하여진다.

『건 뭣하러 빠진담! 어떻든 야단이로군. 어쩐단 말인고! 가만, 좋은 수가 있다.』

하며 C는 벌떡 일어선다. K는 힘없이 눈을 가만히 뜨고 C를 보았다. C는 안내군을 불러 가지고 그 근처를 돌아다니며 마른 풀과 나무 조각을 줍는다. K는 이것만 보아도 좀 안심된다.

『하하-수가 있댔다.』

K는 추위까지 좀 적어지는 것을 깨달았다.

한참 모아 놓은 나무 부스러기는 작은 테이블만큼 K의 앞에 가려졌다.

『이젠 됐다!』

하면서 K는 성냥을 꺼내어 거기 불을 지르고,

『자, 담배나 피우며 녹이게.』

하며, 자기 바지 주머니에서 '파이레트'를 두 가치 내어 자기도 하나 붙이며 K에게 준다.

햇빛에 희미하게 보였다 안 보였다 하는 불은 그래도 연기를 무럭무럭 내며 속으로 붙는다. 불을 넘어서 저편으로 보이는 경치는 모두 고불고불하게 보인다.

『K, 자네 불붙네.』

한참 녹일 때 C가 말했다.

K는 놀라서 자기 몸을 살펴보았다.

『어디?』

『응? 그래두 자네게서 내가 무럭무럭 나누만……』

『하하하하!』

K는 다만 웃었다.

K의 바지에서는 김이 무럭무럭 난다.

『K, 증기욕하는 맛이 어떤가?』

C는 담배 연기로 공중에 그림을 그리면서 묻는다.

『좋다.』

『그럼 한 번 더 빠져 보게,』

『더 안 빠져도 넉넉하네. 한 번만으로도 감기가 들린 것 같다.』

『그런데 K.』

『왜?』

K는 대답하였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가 K는 생각하였다. C는 언제든 좀 별한 이야기를 하렬 때마다 나타나는 그 표정-머리를 좀 왼편으로 기울이고, 눈으로만 조금 웃고, 입을 뾰족케 한-그 표정으로 K를 찾은고로……

『자넨 아무 데고 너무 참견을 잘 하데.』

『왜?』

『보지. 실연이 유행할 때라구 거기 참견하더니, 감기가 유행한다구 또 참견할 작정 인가?』

『또 시기가 나나? 그럼 이번은 자네께 물려주지.』

하면서 K는 담배를 내어던졌다. 담배는 K의 저고리에서 떨어진 물에 내려져서 풀색 수증기를 내고 죽는다. K의 바지에서는 김이 나서 K의 몸의 온 아랫동을 적시어 K는 바위 위에 앉아서 증기욕을 하고 있었다.

K는 마음이 하늘로 너울너울 떠올라가는 것 같았다.

아랫동이 모두 근질근질한 것이 그는 육감에 가까운 한 자극적 감각을 깨달았다. 이때에 K는 보지도 못한 알지도 못하는, 존재의 여부도 모르는 어떤 이성에게 대한 참 뜨거운 사랑이 마음에 일어나는 것을 깨달았다. K는 이때만큼 이성에 대한 뜨거운 집착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K의 마음에는 알지 못할 어떤 로맨틱한 것이 왕래할 때에,

『몸 다 녹았나?』

C는 묻는다.

『응.』

K는 뜻을 똑똑히 모르는 입술의 대답을 하였다.

『녹았어?』

C는 또 묻는다.

『응? 응, 응 녹았네 녹았어.』

『바지두 말랐나?』

『말랐네. 아니, 채 안 말랐네.』

『또 가세. 가는 동안 마르지.』

하며 C는 아직껏 들고 있던 다 죽은 담배를 내어던지며 벌떡 일어섰다.

『가지.』

하며 K도 따라 일어섰다.

『안내군 어디 갔나? 안내, 안내.』

『안-내.』

K도 길게 고함쳤다.

『네-여기 있읍니다.』

안내군의 소리는 저편 맞은편에서 올리어왔다. K는 거기를 보았다. 안내군은 무슨 나무에 올라가 있다가 원숭이와 같이 바르륵 나무에서 내려온다.

K와 C는 안내군 있는 데로 갔다.

『밤 좀 따댔읍니다.』

하면서 안내군은 고슴도치와 같은 밤송이 몇을 돌같이 굳은 손바닥으로 비벼서 까면서,

『왼편으로 가십시다.』

한다.

그들이 구룡연에 다 온 때는 새로 2시 반쯤, 가을 해는 더 누런 빛이 많아진 때이다.

물에서 한 십여 간 나와 서 있는 망견대(望見臺)에서 K는 폭포를 쳐다보았다. 산 위의 요(凹)자 모양으로 된 데서 하얀 무명필 드리우듯한 물은 하얀 안개를 피우면서 바람을 내며 쏟아져서, 물로 말미암아 뚫린 바위의 못 속으로 떨어진다. 그리고 전 지반이 화강암으로 긴 물 떨어지는 데는 어느 틈에 C가 가 있는지 C가 보이고, C는 그 안개로 말미암아 마치 물 속 물바닥을 걸어다니는 것 같았다.

『K-이리 와서 보게……』

C는 소리껏 고함친다. 그 소리는 왁왁 하는 폭포 소리에 섞여서 조그맣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안 가겠네.』

K도 힘껏 고함쳤다. 그는 별로 어깨와 등이 추워서 그리 움직이기가 싫었다.

좀 있다가 C는 돌아와서,

『이 물 맞은 것 봐라.』

하면서 '화잇셔츠'와 바지의 안개를 털고 안내군까지 셋이서 앉아 간단한 점심을 맛있게 재미있게 먹었다. 그 뒤에 그들은 도로 신계사로 돌아섰다.

연주담(連珠潭)에서 안내군은 작년 가을 어떤 일인(日人)고등관이 금강산 구경을 왔다가 이 연주담에서 바람에 날아가는 모자를 주우려다가 빠져 죽은 이야기를 한다.

K가 돌아오는 길에 놀란 것은 금강산 경치는 그들이 구룡연까지 갔다 오는 동안에 어느덧 그 경치 그 경치대로 있으되, 한 번 새로와져서 신면목으로 그들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보다 더 놀란 것은 금강산 경치는 첫번 볼 때보다 두 번째 볼 때에 더 아름다와지며 더 영기를 내며 더 장엄하여져서 한층 더 금강산의 미(美)를 휘날림이다.

여관으로 인력거로 돌아올 때에, K는 아까 걸어다닐 때는 그리 몰랐지만, 가만히 앉아 있으니 어깨와 등에서 일어나는 추위가 온몸에 퍼져서 몸은 무한 곤하여지고 중하여지는 것을 깨달았다. 머리가 무거워진다.

맥이 난다. 사지가 움직이기를 싫어한다. 코에서는 더운 기운이 나온다.

밤에는 그는 발열 39도로 자리에 눕지 않을 수가 없었다.

『K,더우나? 더워두 이불 꼭 쓰고 있게.』

K가 한참 자다가 더위에 못 견뎌서, 이불을 차 던지면서 깰 때에 곁에서 자던 C가 주의했다. K는 공손히 이불을 썼다. C도 도로 눕는다.

방은 꽤 더웠다. 불을 어찌나 땠는지 살을 대기가 힘들도록 덥다.

K의 온몸에서는 땀이 우쩍 났다. 땀의 쉬쉬한 냄새는 이불 틈으로 나와서 K의 코로 몰려들어간다. K의 코와 입에서는 단 기운이 훅흑 나온다. K의 온몸, 특별히 팔과 다리와 허리는 참을 수 없도록 저릿저릿하다.

『후.』

그는 기운을 토한 뒤에 번듯 자빠져서 왼편 다리를 오른편 무릎 위에 올려 놓았다. 잠깐은 좀 나은 것 같았지만 도로 곧 저릿저릿하다. 그는 공기침(空氣枕)을 허리 아래 괴어 놓았다. 저릿저릿하던 것이 좀 낫다.

후스마( 障子) 하나를 새로 둔 곁방에서는 어떤 노인 둘이 앉아서 잠도 안 자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무슨 이야긴지는 모르되, 밤공기를 진동시켜서 때때로 등등 울리는 소리가 들린다.

K는 갑자기 슬퍼졌다. 그는 추억의 달고 슬픈 그 세계에 들어섰다. K가 열 여덟에 났을 때, 때때로 새벽 대여섯 시에 깨면, 새벽빛은 흐리게 문의 한지를 꿰고 어두움 가운데 줄기줄기 빛의 선이 되어서 K의 낮과 이불에 던질 때에 아버지는 농사하러 밭에 나가서 빈 자리만 남아 있고 어머니는 부엌에서 동자할 때, 참새 처마끝에서 짹짹거릴 때, 회색빛 가운데 때때로 등등 울려 오는 부엌에서 나는 그의 어머니와 친숙 노파의 말소리를 들을 때에, 그의 어린 마음에도 이 소리가-회색빛 가운데 둥둥 때때로 울려 오는 이 소리가-슬프게 로맨틱하게 잊지 못할 인상을 주었다.

여기 이렇게 깊이 인상된 K는 다 성년되었을 때도 저녁 어슬어슬할 때에 마루에 우그리고 앉아 있으면, 보얀 안개로 말미암아 어디서 나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곳 모를 말소리가 둥둥 안개 틈으로 울려 올 때는 이것이 마음 속에 푹푹 들어박히며, 로맨틱한 슬픔은 그의 마음에 가득 차곤 하였다.

곁방의 말소리는 그냥 둥둥 울린다.

『아아.』

K는 참다 못하여 종내 엎디었다.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푹푹 쏟아진다.

(아아! 다만 한 시간이라도 그 시대에 돌아가 보고 싶다. 눈물 많던 유년 시대에-다만 한 시간이라도 그 시대에 돌아가 보고 싶다!)

둥둥 하는 소리는 그쳤다 멎었다 계속적으로 그냥 울려 온다.

K는 흑-느끼기 시작하였다.

(아아, 어찌하면 다만 한 시간이라도 그런 열정의 삶을 살 수 있을까?)

곁방의 둥둥 하는 소리는 그냥 연속적으로 울려 온다.

K는 엉엉 울기 시작하였다.

『K! 왜 그러나?』

C는 울음 소리에 놀라 깨어서 묻는다.

『C! 날 함종까지 데려다 주게……데려다주게, 내일이라두……이제라두. 아버지, 아버지……어머니 보구 싶어. 아들두……』

K는 갑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누워 자게. 데려다 주지.』

C는 도로 눈을 감는다.

K는 눈물을 씻고 드러누웠다. 한참 눈을 감고 있을 때에 그의 눈에서 붉은 정열의 불꽃이 맹렬히 불붙는 것이 보였다.

『아아.』

K는 한숨을 쉬었다.

『붉은 잉크!』

붉은 정열의 불꽃은 끝없이 넓은 붉은 막으로 변한다. 그 붉은 막은 바람에 풍기는지 너울너울 움직인다.

한참 너울너울하던 붉은 막은 차차 모여들며 작아져서, 마지막에는 검은 막 위에 흐르는 조그만 피의 줄기로까지 변하였다. 그리고 그 피의 근원에는 무슨 꺼먼 물건이 누워 있다. 그것은 차차 어떤 무서운 형용을 하여,

『나를 이렇게 한 것은 그 누구오니까!』

하는 머리를 풀어 헤친 여성으로 변하고, 그 피의 근원은 그 여성의 가슴에 있다.

(누군가 폐렴으로 죽어 간다!)

K는 온 주의력을 끝까지 날카롭게 하였다.

(아내다! 내 아내다!)

그 누워 있는 여성은 차차 똑똑히 보이면서 K 그의 아내로 된다.

(아내는 죽어 간다! 폐렴!)

그는 펄떡 놀라서 후덕덕 일어나 앉았다.

이튿날 하루 종일 누워서 땀을 낸 K는 또 그 이튿날은 열은 다 내리고 아직 콧소리만 조금 하는 정도에 이르렀다.

K의 좀 나은 것을 보고, C는 K에게 하루만 더 누워 있으라고 주의를 한 뒤에 자기는 만물초 구경을 떠났다.

C의 발소리가 안 들리게 될 때에 K는 일어나 앉았다. 첫번에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K는 뒤로 난 장지문을 열어 놓았다. 방안의 냄새 나던 습한 공기와 바깥 가을 찬 공기는 서로 잠깐 다투다가 방안은 새 공기로 찬다. K는 상쾌한 새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시고 바깥을 내다보았다. 거기서 한 십여 간 앞에는 여남은 보(步)되는 개울이 우둘투둘 질서 없이 놓인 바위 틈을 맑게 흐른다. 그리고 빨래질하는 여인의 장단 맞추어 나는 빨래 소리가 거기서 로맨틱한 빛을 띠고 날아온다.

(나가 볼까?)

K는 스스로 물었다.

K에게는 두 생각의 다툼이 일어났다. 나가고 싶은 생각과 그만둘 생각이 다투기 시작하였다.

K는 벌떡 일어섰다.

(어쩔까? ……)

K는 또 스스로 물었다. 그리고 앞문 밖에서 구두를 뒷문 밖으로 옮겨 놓고 한 짝만 신었다.

(가 볼까? 원……)

K는 '원'까지 붙여서 또 한 번 스스로 물어보았다.

(가만.)

하고 K는 신었던 구두를 도로 벗고 들어와서 연필을 꺼내어 쥐었다.

(이 연필을 곧추 세웠다 놓아서 왼편으로 넘어지면 나가고, 오른편으로 넘어지면 그만두자.)

하고 K는 연필을 곧추 세웠다가 놓았다. 연필은 오른편으로 넘어진다.

(이번은 불공평하다. 고쳐 하자.)

하고 K는 또 한 번 하여 보았다. 또 오른편으로 넘어진다.

(초불득삼(初不得三)이라니 다시 하자.)

하고 K는 연필 머리를 조금 왼편으로 향하고 놓았다. 이번은 연필은 왼편으로 넘어진다.

(되었다!)

하고 K는 연필은 도로 넣은 뒤에 타올로 머리를 질끈 동이고 문을 잠그고 나섰다.

그는 발을 디딜 때마다 지끈지끈 머리가 아픈 것을 깨달으면서, 아까 보리라던 그 개울의 들을 짚고, 어느덧 거기를 건너서서 머리를 들고 둘러보았다. 부대를 두엇 건너서는 그리 높지는 않고 금강의 영기도 없으되 어딘지 모를 어떤 위엄을 가진 산의 줄기가 있다.

『거기를 나가자.』

하고 K는 부대를 건너서 길도 없는 산을 혹은 해당(海棠)의 가지를 헤치며, 혹은 갓난 소나무를 붙들며 무성한 풀들을 밟으며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길이 넘는 잡초는 때때로 K의 낯을 스친다. 발 아래에서는 풀들이 밟혀 부러지는 소리가 똑딱똑딱 난다.

K는 달음박질하여 올라갔다.

K는 유쾌하여졌다. 이유는 모르지만 유쾌하여졌다.

사면은 고즈넉하다. 때때로 바삭거리는 K가 헤치는 풀 소리와, 똑딱 풀 부러지는 소리와, K자기의 헐떡거리는 숨소리 밖에는 아무 소리 없다. 참 고즈넉하다.

K는 유쾌함을 참지 못하여 헐떡거리며 소리껏 노래하였다.

화한 강산 우리 반도는

사천여 년 역사국으로

대대 손손 향락하더니

오늘날 이 지경 웬일이냐!

『아, 유쾌하다!』

K는 고함쳤다.

그 노래와 소리는 적막을 깨뜨리고 앞산에 울려서 온정리를 건너서 뒷산으로 가고 도로 앞산으로 오고 하며, K가 그친 뒤에도 한참이나 소리가 난다.

몇 번 미끄러지고 굴러서 산꼭대기에 올라와 닿은 K는 등에 물흐르듯하는 땀을 씻고 앞을 내어다보았다.

평화이다! 그의 눈에 보이는 범위 안에는 모두 한 평면에 놓인 듯한-이 봉우리에서 저 봉우리로 건너뛰어라도 다니고 싶은-산 상봉뿐이요, 틈틈이 멀겋고 허옇게 늘이운 샘물들과, 이 산에서 저 산으로 깃을 펄럭거리며 날아다니는 이름 모를 새들은 모두 고즈너기 평화롭게 이 경치를 장식한다. 산 중동에 걸린 아침 햇빛을 붉게 받아서 붉게 조금씩 움직이는 구름을 넘어서는 좌우로 산의 반도(半島)를 거느린, 빨리 보면 아침 하늘로밖에는 볼 수 없는 조선해(朝鮮海)가 아침 햇빛에 새빨갛게 남실남실 반득인다.

소리 하나 없다. 바람도 안 분다. 다만 평화뿐이다.

『세계에 평화는 이르렀도다!』

K는 헐떡거리며 고함쳤다. 저편 아래서 좀 웅웅 울릴 뿐이지 반향까지 적다.

K는 머리에 동였던 타올을 풀어서 깔고 담배를 하나 붙여 물고 앉았다. 담배 연기는 모양 사납게 공중에 퍼지면서 정처없이 올라간다.

K는 온정리를 향하여 돌아앉았다. 아래서 보기는 그리 높지 않되, 위에서 내려다보니 가뜩이나 작은 온정리는 집 하나이 주먹만큼하게 작아 보이고, 빨래질하는 여인들은 모양이 안 보인대도 좋을이만큼 작게 흐리게 보인다. 역시 온정리도 평화에 잠겨 있다.

가을 차고 다스한 햇빛은 꽤 길게 자란 K의 머리에 평화롭게 내리비친다. 담배 내는 역시 평화롭게 하늘로 퍼져 나간다. K는 평화 속에 움쭉 안하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한참 뒤에 K는 아까 났던 땀이 식노라고 등과 어깨에 싸르르 도는 추위를 깨달았다.

(감기 또 들렸다간 안 되겠다. 내려갈까?)

생각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고 그냥 앉아 있었다. 이 '평화'를 버리고 내려가기가 싫었다.

추위는 차차 더하여진다. 온몸에 한 쾌감에 가까운 추위가 돌아다닌다. 아무래도 내려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마음을 먹고, 그는 무릎을 짚고 일어섰다. 일어서는 순간 갑자기 머리가 아득하여지고 앞은 조금도 안보였다. K는 다리를 내어디디었다 들이디디었다 본능적으로 중심을 한참 잡다가 그만 자빠졌다. K는 자빠지는 것을 똑똑히 의식치 못하였다. 머리가 무엇에 탁 닿는 그 순간 K는 무엇인지 모르는, 해변 같기도 하고 넓은 벌 같기도 하고 공중 같기도 한, 횐 것과 검은 것이 범벅이 된 무서운 물건-그가 어렸을 때 몸이 쇠약해질 때는 언제든 보던 그 환상-을 걸핏 보면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동시에 그는 정신을 차렸다.

K는 무서워졌다.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K는 극도로 무섭고 슬펐다.

K는 너무 무서워서 중병 앓는 사람같이 맥이 풀린 몸을 겨우 가만 일어서서 힘껏 달음박질하며 뛰어내려와서 자기도 모르는 틈에 어느덧 여관 자기 방에 들어와서 블랭킷을 뒤집어쓰고 엎디었다. 이때에 K는 자기가 서울 공부 가기 전에, 어떤 때 한 번 감기로 대단히 앓을 때에 자기 곁에서 친절히-심지어 자기 침식까지도 잊고 간호하던 아내의 얼굴이 생각났다.

이튿날 C가 만물초에서 돌아왔을 때는 K는 열은 하렸어도 맥이 없어서 자리에 누워있을 때다. K는 어머니도 보고 싶고, 아직껏 존재도 잊고 있던 아내에게도 미안하여, C에게 빨리 함종으로 데려다 달라고 원하였다.

C도 그럼 내일 해금강(海金剛)이나 잠깐 구경하고,

내금강(內金剛)은 그만두고 마침 모레 밤에 선편도 있으니 돌아가자고 허락하였다.

이튿날 그들은 인력거로 해금강으로 떠났다.

K는 조선옷 위에 C의 낡은 양복을 입고 또 그 위에 불랭킷을 둘이나 썼으되, 아직 추워서 몸을 오그라뜨리고 눈을 절반만큼 뜨고, 다만 흐릿하니 무의식으로 앞에서 우쭐럭거리는 인력거군과 건들거리는 C의 머리와, 뒤로 물러가는 대로와 산들을 바라보았다.

K는 아무것도 의식치 못하였다. 불교의 소위 '무념무상의 무아(無我)의 경'에서 눈을 가늘게 뜨고 몸을 흔들거리며 춥다 춥다 하였다.

고성(高城)을 좀 지나서 해금강 앞에 거의 왔을 때 솔밭 곁으로 모래밭 하나이 있는고로 K와 C는 할 수 없이 내려서 좀 걷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K는 내려서 걷기가 싫었다. 생각하다 못해 K는 인력거군에게 업히고 인력거 한 차는 C가 끌고 가기로 하였다.

여행장(旅行裝)을 한 신사가 인력거를 끄는 것을 보고 K는 우습다 생각하였다. 이 한 자발적 의식이 동기 되어 K의 의식의 대개는 회복되었다. K는 앞을 내다보았다. 저편 앞에는 멀겋고 푸른 해금강의 조선해가 보이고, 거기 거뭇거뭇 우뚝우뚝 서 있는 괴물 같은 것은 바다의 금강산이다.

『빨리 가세.』

K는 인력거군의 등에서 뛰어내렸다. 내려서 걸어 보니 그리 춥지도 않았다.

『넉넉히 걷겠나? 그럼 빨리 가세.』

하면서 C도 인력거를 차부에게 맡겼다. 해금강 어구 앞 조그만 마을까지 와서 인력거 삯을 주어 돌려 보내고, C와 K는 뱃사공 겸 안내군을 고용하여 가지고 짐을 들고, K는 블랭킷을 둘러쓰고 배에 올랐다.

배는 떠나서 왼편으로 김(海苔) 거두는 여인들 앞을 지나서 산의 반도를 하나 끼고 돌아서면서 참해금강으로 들어간다.

박물 표본의 아연 광석을 몇백 만 배 되게 크게 하여 바다에 세워 놓으면 이것이 안 될까 하는, 모두 이색동공(異色同工)으로 된, 그러면서도 개개가 모두 개성미를 발휘하는 '넓다, 크다, 굉장타, 훌륭하다'밖에는 도저히 말할 수 없는 해금강의 모든 바위-잉어바위, 해금강문, 53불(佛) 및 그 밖-들을 지나서 삼일포(三日浦)로 향하다가 K가 너무 춥다는고로 도로 어구에 돌아왔을 때는 가을 짧은 해는 붉게 서편 산으로 스러지는 때-6시 내외이다.

『여기서 하룻밤 묵지.』

C는 배에서 뛰어내리면서 말했다.

『묵을 데가 있나?』

하며 K는 둘러보았다. 해금강의 경치에 맞지않는 조그만 마을이다. 열 집이 될까 말까 하는 집들은 모두 K의 생전에 처음 보는 성냥갑 같은 집들이다.

『그러니 고성까진 갈 수 없구……』

『그럼 할 수 없지. 여기서래두 묵세.』

K는 대답하였다. K에게는 참 고성까지 가는 것은 큰 문제이다. K는 한시라도 빨리 뜨뜻한 아랫목에 들고 싶었다.

『그럼 이리 오십시오.』

안내군은 자기 아는 집이 있는지 오라고한다. 모두 같이 더러운 집에서 이것저것 고를 필요는 없으므로 그들은 안내군을 따라서, 더러운 마을 가운데도 그 중 더러운 집 밤 껍질 같은 방안에 들어갔다.

『어떻든 뜨뜻해서 좋다!』

K는 들어않아서 방바닥에 손을 대면서 말했다.

『좋으네, 좋아! 하룻밤 묵을 데 아무러면 어떤가.』

방안은 참 답답하였다. 그리고 불을 켜놓지 않으면 앞이 똑똑히 안 보이도록 어두웠다. 여막(旅幕) 겸 술집으로 알코올 냄새와 이런 집 특유의 홀아비 냄새가 코를 쏜다. 방 한편 구석에는 술독이 시꺼멓게 두 개 서있다. 천장은 흙인지 종이인지 어두워서 똑똑히 안 보이지만 새까맣게 되었고, 낡은 옷뭉치가 두어 개 이제라도 떨어질 것같이 걸려 있다. 홀아비 냄새는 거기서 나는 것 같았다.

『C, 저것 보게.』

K는 C를 꾹 찔렀다. C는 쳐다본다.

『인조(人造) 해금강이로군.』

『하하하하! 인조 해금강인가……』

『그렇지 않나 보게.』

『그런데 해금강 어드레?』

『훌륭쿠 아름답네.』

훌륭한 것은 아름다울 수 없고, 아름다운 것은 훌륭할 수 없으되, 해금강은 참 훌륭하고도 또 아름다왔다.

산(山) 금강은 남성적 위엄에 남성적 미를 가졌으되, 해금강은 남성적 위엄에 여성적 자태를 가졌다.

좀 있다가 불을 켜고 밥을 먹은 뒤에, 좀 누워서 몸을 더 녹여 가지고 K는 혼자서 해변으로 나갔다. 만월에 가까운 달은 어둡고도 밝은 빛을 내리비쳐서 바닷물로 말미암아 그 근처 일대는 꽤 밝다. 바닷물이 모래 위를 걷는 사르륵사르륵 하는 소리와, 저편 바위에 부딪치는 철썩철썩 하는 소리는 한 음악을 이루어서 K의 귀로 온다. 새파랗게 반짝거리는 바다 가운데는 역시 해금강의 바위가 시꺼멓게 괴물같이 팔을 벌리고 서 있다. 습기 많은 밤 공기는 K를 둘러쌌다.

하늘에 가로 걸린 은하의 넓은 벌에는 다 늙은 견우 직녀가 수많은 별들을 둘러보며 조그맣게 반짝이고 있다.

아! 하늘에 열린 일만(萬)의 별,

바다에 반짝이는 일만의 물결

바닷가에 속삭이는 일만의 모래

K는 객주집으로 돌아섰다.

10

[편집]

사흘 뒤에 K는 함종, K 그가 처음 보는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그가 함종까지 올 동안은 자기 의식이랄지 남의 의식이랄지 똑똑히 모를 의식을 가졌다. 그는 그 동안 추웠는지 더웠는지 똑똑히 의식치는 못하였으되, 춥다 생각은 하였다. 장전서 칠팔십 톤 되는 조그만 증기선에 올랐을 때, 작은 배로다 생각하였다. 밤 10시에 떠난다던 배가 이튿날 새벽 2시에야 떠났다. 그들이 탄 이등실 머리편에는 기관사실이 있고, 모우터가 도느라고 그들의 이등실은 턱턱턱턱 울려서 K는 한잠도 못 잤다. 경원선 열차에 올랐을 때는 채찍 같은 비가 내리쏘기 시작하였다. 가뜩이나 산으로 둘러싸여서 어두운데 비로 말미암아 해금강 그 객주집보다도 더 어두웠다. 이때에 K는 C의 존재까지 잊었다. 때때로 C가 걸핏 보이기는 하지만, 모두 순서없이 된 것이 무엇이 무엇인지를 모를 범벅 천지였다. 램프불은 어두운 가운데 벌겋게 번득힌다. 때때로 터널도 있고, 왼편으로 보이는 시내에 비 오는 것도 보이고, 유리창을 때리는 빗소리도 들리되, 이것 역시 무엇인지 모를 범벅 천지다.

K의 맞은편 소파에는 여행가인 듯한 서양사람 하나이 턱을 팔에 괴고, 정기 없는 멀건 눈을 어두운 일기로 말미암아 더 멀겋게 뜨고, 그 큰 동자(瞳子)의 창으로 K를 들여다본다. K는 이것이 별로 무서웠다. 이 동자를 피하려 머리를 돌리면 그 동자는 뺨에 와 닿는지 뺨이 근질근질하다. 같이 보면 서양 사람은 머리를 돌리리라 생각하여 마주보면, 그는 멀건 눈을 더 크게 뜨고 경쟁을 하자 한다. 밤 12시에 서울서 내려서 K는 C의 주인집에 하룻밤 묵었다.

이튿날 아침 C도 평양까지 무슨 일이 좀 있다고 기차에 함께 탔으되, K는 C의 존재를 잊었다. 낯익은 사람이 자기 맞은편에 있기는 있으되, 그가 C인지 누구인지는 해석하지 않았다. 비는 안 오지만 하늘 전면이 검은 구름으로 덮여서 차실 안은 침침하다. 때때로 오늘 밤은 함종에 들어선다 생각하면 심장이 뛰놀지만, 이것 역시 한순간이고 그 다음 순간은 이를 잊는다.

밤에 함종 자기 집에 이르렀다. C도 보였다. K는 자기 집에서 알지 못할 사람을 많이 보았다. 알 사람은 어머니 하나뿐이고 아내와 아들은 어디 갔는지 안 보인다. 모두 별로 들끓는다. K는 흥분되어 잠을 못 잤다. 방은 더웠다.

이튿날 아침에도 C가 잠깐 보였다. 이튿날 K의 있는 방은 문을 닫아 두었지만 밖에서는 대단히 뒤숭숭하다. 사람들이 와글와글한다. 슬픈 찬미 소리가 들린다. 기도를 한다. 어머니는 때때로 늙은 눈에 눈물을 괴어 가지고 들어왔다 나갔다 한다.

오후에는 조용하여졌다. 조용한 틈에 K는 잠이 들었다. 때때로 깨면 자기를 들여다보는 어머니의 다정한 얼굴도 보이고, 어머니의 느끼는 소리도 들린다.

11

[편집]

이튿날 정오쯤 K는 정신이 꽤 들어서 깨었다.

깰 때에 그의 머리에는 풀어도 풀지 못할 어떤 수수께끼(riddle) 같은 것이 머리에 떠올랐다. 거기는 이상한 빛이 있고 소리가 있고 냄새가 있다. 그리고 그 이상한 수수께끼는 다만 '아내'라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눈을 떴다. 어머니는 돋보기를 콧등에 걸고 성경을 읽고 있다가 K에게로 향한다.

『춥지 않니?』

『에, 덥다.』

K는 혼잣말 겸 대답으로 말했다.

『더워두 이불 꼭 쓰고 있거라.』

『그런데……우리 처 무얼 하나요?』

K는 수줍고 부끄러운 것을 겨우 물었다.

『응?』

『우리 처요.』

『너의 처? 너의 천……너의 처가 어드레?』

어머니는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머뭇머뭇한다.

『뭘 해요, 우리 처?』

『응, 너의 처가……』

K는 대답을 기다린다.

머뭇머뭇하던 어머니는 딴말을 한다.

『배 고프지 않니? 햅쌀로 미음 쑤어 놓았다.』

『뭐 배 안 고프외다. 이 순덕이 놈은 어디 갔나요?』

『순덕이?』

『네……』

『아까 어디 갔다. 에미하구……』

『어디요?』

『저, 어디 좀……』

『언제나 올까요?』

『모르겠다. 저녁때나 올까……미음 먹어라.』

하면서 어머니는 뛰어나갔다.

이 순간 K의 이상하던 수수께끼는 또 하나 더하여졌다. 그리고 그 해석은 아무 뜻 없는 '아내와 아들'일 뿐이다.

수수께끼는 일전하면서 어떤 무서운 것이 된다. 갈색의 악마가 입으로 새빨간 불꽃의 수수께끼를 토하면서 다리를 벌리고 서있다. 그리고 그 입 속에는 K 그의 아내와 아들이 치를 부들부들 떨며 서로 꼭 안고 앉아있다. 그 근처에는 어디인지 모를 '우리를 이렇게 한 것은 그 누구이오니까?'하는 기운이 돌아간다.

『앗!』

K는 부르짖었다. 뜻 모를 무서움으로 말미암아 한순간 눈이 아득하여진다. 이때에 어머니는 미음을 짜 가지고 들어온다.

『미움 먹어. 가만, 너하구 함께 온 사람 C래는지 하는 사람, 아까 평양에 가면서 편지 하나 써 놓고 가더라.』

하면서 어머니는 미음 그릇을 주고 편지를 가지러 갔다. C라는 소리를 들을 때에 K는 수수께끼의 무서옴은 덜어지고, 빨리 편지를 보고 싶은 생각만 났다.

어머니가 얻어 온 C의 편지는 이것이다.

지금의 군의 불행에 동정하오.

크게 자중 자애하오.

누리를 넓게 보오.

잘 치료하오.

편지를 보고 미음을 먹은 뒤에 K는 자는지 안 자는지 자기도 모르게 시간을 보내고, 산촌에 해가 져서 불 자 놓을 때에 겨우 펄떡 정신을 차렸다. 정신을 차릴 때에 K의 머리에는 아까 그 풀어도 풀어도 풀지 못할 수수께끼가 또 떠올랐다.

『왔나요?』

그는 어머니에게 물었다.

『……응? ……뭐 이……』

『순덕이 ……』

『상게 안 왔다.』

『어디 갔나요? 언제 오나요?』

『모르겠다.』

어머니 낯에는 대답할 바를 알지 못하는 근심과 큰 슬픔이 떠돈다. 눈물이 눈에 가득 찼다.

『어머니!』

이때에 K의 머리에는 아까 그 수수께끼의 악마가 보였다.

『왜?』

『우리 처 죽었지요?』

『무얼!』

『죽었지요?』

『응?』

『죽었지요? 다 알아요!』

잠깐 침묵이 연속되었다. 침묵 뒤에 노파는 목이 멘 소리로 겨우 말한다.

『C인지 그 사람이 그러든?……』

『언제 죽었나요?』

어머니가 목이 멘 소리로 설명한 바는 이와 같다.

.팔월 그믐께(음력) K의 아내는 이번 세계를 휘돈 돌림감기에 걸려서 자리에 누웠다. K의 아들도 그와 함께 감기가 걸렸다. 구월 초순께는 K의 아들 순덕이는 낫지 못하였어도 K의 아내는 전쾌에 가까왔다. 감기가 낫는 것과 함께 그에게는 발광증이 또 일어났다.

구월 초사흗날 K의 아내는 없어졌다. 동리에서 모두 나서서 찾은 결과, 그가 산 중동에 기절하여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병세는 갑자기 더하여졌다. 이때부터 일승일강(一乘一降), 모자가 서로 발걸음을 맞추어서 앓았다. K의 아내가 열이 날 때는 K의 아들도 나고, K의 아내가 좀 내릴 때는 아들도 따라 내리고, 이렇게 며칠 지내다가 모자의 병은 함께 폐렴으로 변하였다.

K의 아내는 죽을 줄은 벌써 깨닫고, 죽기 전에 한 번만 남편의 얼굴을 보고 싶다. 다만 한 번이라도 만나 보고 싶다. 그저 죽으면 고혼이 되겠다고, 매일 울며 부르짖고, 아들도 아버지 아버지 하며 우는고로, K의 어머니는 평양까지 갔으되 K는 금강산을 갔다 하므로 할 수 없이 그냥 돌아왔다. 돌아와서 보니, K의 아내는 일어나 않았는데, 이상한 것은 그의 낮이 K의 낯과 거의 같이 된 것이다. 한참 있다가 오후 1시쯤 아내가 죽고, 이튿날 새벽 2시쯤 아들이 따라 죽었다.

아내가 죽을 때 마지막 말도 순덕의 아버지를 다만 한 번이라도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날이 K가 금강산에 도착한 날이다. 이튿날 뒷산 공동묘지로 가져갔다.

이때에 K의 머리에 떠오른 것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가운데 안드레의 처의 죽은 낯에서 안드레가 본 그 표정.

『나를 이 지경에 이르게 한 것은 그 누구오니까』

하는 그 표정이다.

어딘지는 모르지만 그 방안 공기 가운데

『나를 이렇게 한 것은 그 누구오니까』

하는 기운이 떠돈다.

모든 수수께끼는 풀렸다. 풀리긴 하였지만, 그것은 모두 K의 심장을 찌르는 날카로운 칼끝이다. K는 울지도 못하였다.

말을 하고 보니 더 서러운지 어머니는 엎디어서 늙은 소리로 엉엉 운다.

좀 있다 K는 후 한숨을 짓고 돌아누웠다.

(아아! 세상에 이런 불쌍한 일이 어디 있나!)

12

[편집]

오늘 갈까 내일 갈까, 만날 아내와 아들의 무덤에 가 보기를 벼르기만 하면서도, 별로 무섭고 부끄러워서 못 하던 K는, 종내 결심하고 11월 보름께, 첫눈 얇게 온 이튿날 가기 싫다는 다리를 억지로 끌고 뒷산으로 향하였다. 얇게 왔던 눈은 거의 녹아서, 우묵우묵한 데만 희게 장식하고 두드러진 데는 새빨간 흙이 나타나 있다. 산은 일본 계집 분바른 상에 잠자고 난 것같이 희뜩희뜩 불긋불긋하다.

K는 스틱을 휘두르면서 공동묘지로 가는 길로 마음을 무한 끓이면서 걸었다.

아내는 묻혀 있다. 땅 속에, 어두움 속에, 신비 속에 묻혀 있다. 이전 한때는 나의 아내로 나의 사랑도 받았고, 나를 위하여 아들까지 낳았고 또는 나를 원망도 하고-어떻든 살아 있던 그는 지금은 ……어찌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는 여러 번 도로 집으로 돌아가려 하였다. 그렇지만 마음은 그렇게 먹고도 왜인지 돌아서지는 못하였다. 몇 번 주저하며 그리 멀지 알은 공동묘지에 이른 때에 K의 심장은 뛰놀기 시작하였다. K는 눈을 들었다.

『인생 한 번 죽어지면 만수장림(萬樹長林)의 운무(雲霧) 』

라고 속삭이는 모든 무덤은 일제히 K에게로 향하는 것 같다. K는 자기 아내와 아들의 무덤이 어딘가 둘러보며 나가다가 그만 멈칫 섰다.

곧 찾기는 찾았지만 K는 아직껏 오면서 이렇지나 않을까 걱정하던

『우리를 이 지경에 이르게 한 것은 그 누구오니까? 누구야요!』

하는 기운이 모자의 무덤 위 공기 가운데 어렴풋이 그리고도 똑똑히 나타나 있다.

『집으로 돌아가 버려라!』

누가 K의 귀에 속삭인다.

(에잇 괜찮다!)

K는 뿌리치고도 앞으로 나갈 용기는 없었다.

『음, 되고 싶은 대로 되어라!』

며칠 동안 그에게 생각 안 나던 것이 또 생각나서 중얼거렸다.

K는 얼빠져서 눈이 멀거니,

『나를 이렇게 한 것은 그 누구오니까!』

하는 책망을 들으면서 정신없이 무덤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의 눈에서 나오는 뜨거운 눈물은 뺨을 적시고 땅에 떨어진다.

(아아! 불쌍한 일을 하여 버렸다.)

K가 의식하는 순간, K는 참지 못하여 그 무덤 위에 가서 고꾸라졌다.

『아, 아내여-용서하라! 그대를 이렇게 한 것은 지금 이기적 남자들이 발명한, 그 여자의 인권을 무시한 악사조(惡思潮)에 취하였던 이 나 그대의 남편이다! 나를, 이와같은 나를 생각하던 그대의 마음, 지금은 짐작하노라. 나의 죄, 헤일 수 없는 나의 죄, 지금 자복하노니 용서하라. 나도 이제 부터는……』

K는 눈물을 씻고 일어나 앉았다.

아내의 무덤과 아들의 무덤 위에서 떠돌던 기운.

『나를 이렇게 한 것은 그 누구오니까!』

하는 그 책망은 좀 적어진 것 같다.

(아아! 전에는 잘못하였댔다!)

K는 서편으로 기울어진 하얀 은빛 구름 틈으로 보이는 해를 바라보았다. 그 사이 한 달을 고민하던 씨름을 K는 오늘에야 겨우 치렀다. 그는 얼마 안심되어 다시 무덤을 보았다.

13

[편집]

며칠 뒤에 K는 C에게 하는 편지 가운데 이런 말을 썼다.

……(상략) 나는 이제부터는 참삶을 살 터이다……

……(중략)……

'마음이 옅은 자'는 나의 아내도 물론 아니고 또는 Y도 아니고, 그 실로는 이 나-K이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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