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인/하권
第一次[제일차]의 慘劇[참극]
[편집]무대는 다시 삼청동 백영호씨의 저택으로 옮아간다.
때는 오후 여덟시 전후…… 삼청동공원 일대에는 짙은 어둠의 장막이 흐르고 멀리 내려다보이는 시가지에는 오색의 「일류미네―숀」이 굶주린 요부의 눈동자처럼 「윙크」를 한다.
천태만상의 죄악을 한아름 품고 지금 마도(魔都) 대경성의 밤은 점점 깊어 가고 있다.
백영호씨는 지금 자기 「아뜨리에」서 「여인군상(人群像女)」이란 등신대의 석고상을 이모저모로 바라보면서
『이만 했으면!』
하고 가장 자신있는 어조로 중얼거려 보았다.
지금 거의 완성에 가까운 「여인군상」은 오는 유월 초순에 열릴 제일 미술전람회에 출품할 셈으로 작년 초가을부터 손을댄 대작이다.
각각 「포 ― 즈」를 달리한 세사람의 벌거벗은 여인이 그 어떤 진리의 광망을 발견한 듯 멀 ― 리 천공을 바라보면서 서 있는, 말하자면 백영호씨의 많은 작품 중에서도 가장 정성을 들인 대작이었다.
백영호씨는 지금 이만했으면 제일 미술전람회 심사원으로서의 면목을 충분히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어지간히 만족한 얼굴로 「소파」에 걸터앉아 「담배·케이스」에서 담배를 한대 꺼내 붙였다.
그때 옆방 침실로 통하는 중문이 슬그머니 열리며 분홍빛 「나이트·까운」입은 주은몽이 들어오면서
『다들 어디 갔어요? 혼자 있을라니까 무서워서……』
하고 남편 백영호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무섭긴 뭐가 무섭소. 이처럼 내가 옆방에서 당신을 지키고 있는데 ── 남수는 조금 아까 산보를 나가고 정란은……아 정란은 삼층에 있지 않소?
「피아노」소리가 들리는군 ——』
백영호씨와 은몽은 귀를 기우렸다. 멀리서 「피아노」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하옇든 집안이 너무 음침해서 못 쓰겠소. 이젠 몸도 어지간히 회복 되었으니 우리 신혼 여행겸 어디 산수 좋은데로 여행이나 떠납시다. 무엇보다도 당신의 기분을 전환시켜야지. ── 우리 내일이라도 떠납시다. 금강산은 어때요?』
백영호씨는 그리고 아내의 어깨에다 손을 올려 놓으면서 꼭 껴안아 본다.
그런데 은몽은 머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안돼요. 금강산은 안돼요.』
『왜요?』
『금강산은 그 놈의 고향 ── 그 놈이 소년시절을 보낸 백도사가 거기 있지 않아요? 그 놈은 필경 우리를 따라올 것입니다. ……아니 어디를 가든지 그 놈은 우리들의 신변을 헤매고 있을 거에요.』
은몽은 그리고 남편 품안에 머리를 부비며 파고 들었다. 백영호씨는 애처러운 듯 아내의 머리를 쓰다듬을 뿐이었다.
그즈음 백남수는 컴컴한 삼청동 「풀」옆을 걷고 있었다. 그는 저녁마다 한번씩 꼭 자기집 주위를 휘 돌아다니는 것이었다. 그저께 밤, 임경부가 담장 밑에서 보았다고 하는 수상한 그림자의 정체를 붙잡을 의향이다.
그러나 가다가다 하나씩 서 있는 전등불을 통하여 아무리 살펴보아도 수상한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삼층에서 치는 정란의 「피아노」 소리만이 한적한 공원일대의 적막을 고요히 깨뜨릴 뿐이었다.
거기는 투쟁도 없고 공포도 없었다. 죄악의 실마리라고는 바늘 끝만치도 보이지 않았다. 정란의 「피아노」소리가 무한의 평화를 싣고 어둑어둑한
「풀」위를 스치고 날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 아아 그것은 평화를 그리워하는 백남수의 순간적 감상에 지나지 못하였다.
그가 희미한 전등불이 내리는 정문을 향하여 걷고 있던 그 찰라,
『아 앗!』
하고 부르짖는 여자의 목소리가 안으로부터 터져 나왔다. 그것은 틀림없는 주은몽의 공포에 찬 목소리가 아닌가!
백남수는 그 순간, 우두커니 발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우렸다. 온몸이 으쓱함을 깨달았다.
『해월이다!』
『그렇게 외치면서 부리나케 정문 안으로 뛰어들어 갔다.』
그러나 한 발자욱 정문안으로 드려놓은 순간, 이번에는 남수가
『악!』
하고 고함을 치면서 우둑커니 발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아아, 그것은 너무나 무서운 광경이었다. 몸서리쳐지는 무시무시한 광경이 지금 백남수의 눈앞에 전개되고 있었던 것이다.
보라! 지금 「아뜨리에」의 「커텐」에 비친 두개의 그림자를 보라!
하나는 전신에 치렁치렁한 기나긴 「만또」같은 것을 두른 괴한(怪滿)……
두말도 할것 없이 백도사의 도승 복수귀 해월이의 단도를 번쩍 든 손그림자요 또 하나는 그 단도 밑에서 ,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아버지의 그림자가 아닌가!
『해월이다! 해월이다! 이놈』
하고 고함치는 백영호씨
『아 앗……사람 살려요!』
하고 부르짖는 은몽의 목소리 그러나 백남수가 멈추었던 발자욱을 다시 떼어 넒은 정원을 나는듯이 달음박질 하여서 정원 한복판까지 다달았을 때는 벌써
『으 음……』
하고 신음하면서 마치 짚으로 만든 인형처럼 쓸어지는 아버지의 그림자를 보았다.
그 순간 남수는 온몸의 피가 일시에 머리로 기어올라옴을 감각하면서 무아 몽중으로
『이놈 해월이 잡아라!』
하고 외쳤다. 만일 남수가 정문을 들어서자 마자 그렇게 고함을 쳤던들 해월은 자기 아버지를 찌를 사이도없이 도망했을런지도 몰랐을 것이다.
과연 남수의 부르짖음이 터져 나오자 마자 해월의 그림자는 옆방 주은몽의 침실로 따라 들어가려던 발걸음을 돌리어 저편 낭하로 빠져나가 버렸다.
『아, 앗……』
은몽의 찢는 듯한 목소리가 복도로부터 들리어온다. 낭하로 쫓겨 나갔던 은몽이 거기서 해월을 만난 모양이다.
남수는 또 한번 가슴이 덜컥하고 내려앉았다. 그 순간 온 집안이 돌연 캄캄한 암흑 세계로 변하지 않는가! 해월이가 「스윗치」를 껏구나!
『은몽씨! 은몽씨!』
남수는 화살같이 현관으로 뛰어 들어가며 그렇게 불렀다.
『아, 남수씨! 빨리……빨리……아, 저 놈이 들창문으로……』
하고 부르짖는 은몽의 숨찬 목소리가 암흑을 뚫고 찢어져 나왔다.
『은몽씨 빨리 전등을 켜요! 「스윗치」를 눌러요!』
그것은 남수가 현관을 들어서서 「아뜨리에」와 침실로 통하는 복도를 오른편으로 「커 ― 브」하면서 고함친 소리였다.
『남수씨! 빨리 빨리……아버지가, 아버지, 아버지께서……』
『「스윗치」를 눌러요! ─』
그때 번쩍하고 전등이 켜졌다. 거의 쓰러지듯이 「스윗치」에 매어달린 은 몽의 몸뚱이를 남수는 달려가서 쓰러안으며
『아버지는, 아버지는?』
하고 외쳤다.
『아버지를, 그 놈이 아버지를……』
납인형 처럼 창백한 은몽의 얼굴 ── 그의 여윈 손가락이 「아뜨리에」안을 가르쳤다.
글로쓰면 이처럼 길어지지만 그것은 실로 찰라적 일이었다. 남수가 정문 밖에서 은몽의 고함소리를 듣고서부터 단 일 분 동안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때야 비로소 삼층에서 「피아노」를 치던 정란이가 새파랗게 얼굴을 변해 가지고 뛰어 내려왔다.
『정란이! 아버지가……』
은몽은 힘없이 정란의 목을 껴안는다.
『어머니, 무슨 일이 생겼어요? 아버지가 어쨌어요?』
정란은 끌어안는 은몽의 팔목에 반항하면서 놀라 물었다.
『그 놈이 아버지를 ──』
은몽이 그렇게 외치며 정란과 더불어 「아뜨리에」로 뛰어 들어갔다.
『아, 앗! 아버지……』
자기 눈앞에 벌어진 참혹한 광경이 혹시 꿈이 아닌가를 마음 한구석으로 의심하며 정란은 아버지의 옆으로 달려갔다.
석고상 「여인군상」앞에 백영호씨의 몸뚱이는 기다랗게 쓸어져 있었다.
예리한 비수로 심장 한복판을 찔린 백영호씨의 가슴으로부터 저릿저릿하게 새빨간 피줄기가 샘솟듯이 쿨렁쿨렁솟아나온다. 극도의 공포로 말미암아 눈과 입을 벌린 얼굴 ── 그러나 아직 절명까지 이르지 않은것 만은 다행이었다.
『아버지! 아버지! 정신 차리세요! 정신을……』
남수는 아버지의 상반신을 붙들고 뭉클뭉클 솟아나오는 선혈을 손으로 막으며
『정란, 빨리 서재로 올라가서 문군(정란의 약혼자 문학수)에게 전화를 걸어! 그리고 경찰에도!』
정란은 갈팡질팡 허덕거리는 발걸음에 채쭉질을 하여 가며 이층으로 뛰어 올라 간다.
그 때 백영호씨는 한손으로 허공을 휘저으며 번쩍 떴던 눈을 힘없이 감았다. 눈이 감기자 그는 입술을 들썩거리며 무엇을 말하려는 듯이 최후의 노력을 다 하였으나 공기는 그만 입안에서 말을 이루지 못하고 푸시시하고 입 밖으로 새어나곤 하였다.
아버지 말씀이 있으시거든 『 ! 빨리 하세요! 아버지,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세요? 말씀을 하세요! 말씀을 해 보세요?』
그렇게 고함을 치면서 남수의 초조한 마음은 자기도 모르게 아버지의 상반신을 힘껏 흔들었다.
『여보세요, 말씀을 하세요! 접니다! 은몽이예요! 은몽을 몰라 보세요?』
은몽이 그렇게 백영호씨의 팔을 잡고 흔들었을 때 은몽의 목소리가 낯익음인지 그는 감았던 눈을 번쩍 뜨면서 은몽의 눈물어린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것이다.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그는 팔을 은몽에게 내밀며 돌연
『은몽, 은몽! 너, 너는……』
하고 최후의 기력을 다하여 외친다는 것이 겨우 알아들을만한 가는 목소리었다.
『네? 저는, 저는, 아무런 상처도 받지 않았어요. 그 놈은 복도 들창문으로 도망했어요. 여보, 여보세요! 여보세요!』
하고 은몽은 미친듯이 부르짖으며 자기를 그 처럼 사랑하여 주던 늙은 신랑에게 최후의 선물을 바치려는 듯이 자기 입술을 백영호씨의 입에 가져다대며 머리를 부비었다. 백영호씨 그 때 힘없는 팔에다 최후의 기력을 다하여 은몽을 꽉 부여잡고
『이 음 ……으 음 …… 은몽이 너는……』
하고 괴로운 듯이 신음하던 그 순간 은몽은 그만
『아얏! ──』
하고 소리치며 얼굴을 번쩍 들고 양손으로 자기 입술을 가리우면서
『고맙습니다! 당신이 당신이 저를 그 처럼…… 사랑하여 주시는 줄은……』
하고 벌써 숨이 끊어져 버린 남편의 얼굴을 부여잡고 울기 시작하였다. ── 아아, 늙은 신랑 백영호씨가 젊은 아내 주은몽의 입술에 남겨놓고 간 사랑의 선물 ── 은몽의 입술로부터 새빨간 핏줄기가 주르르하고 흘러내린다. 입술 위에 남은 남편의 입빨 자리!
그 때 이층으로 전화를 걸러 올라갔던 정란이가 굴러질 듯이 뛰어들어 왔으나 아버지는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아버지, 아버지!』
하고 정란은 시체를 쓰다듬으며 은몽과 함께 느껴 울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이요?』
하고 은몽을 바라보았다.
백영호씨의 이 무참한 죽음에 관하여 은몽은 적지않게 책임감을 느끼면서 모두가 저하나 『 때문에 일어난 봉변 ── 저는 남수씨와 정란을 대할 면목이 없어요. 정란, 나를 용서해 줘요. 나를……』
하며 오늘밤 그 사갈같은 악마가 「아뜨리에」나타나기 까지의 자세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오후 여덟시 전후였다.
어멈은 저녁을 치르고나서 다방골 자기 아들네 집에 갔다온다고 나가 버렸다. 그리고 남수는 그 때 삼청동 「풀」옆을 걷고 있었고 정란은 삼층에서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그 다음에 백영호씨와 은몽은 아랫층 「아뜨리에」 「소파」에 걸터앉아 기분 전환책으로 그리고 신혼 여행도 겸하여 금강산 같은데로 여행을 떠났으면 어떠냐고 ── 그런 이야기를 주고 받고 하던 바로 그 때였다고 한다.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리였다. 똑딱똑딱하는 소리다.
『여보 ── 』
은몽은 가만히 남편의 팔소매를 잡아당겼다. 삼층에서 정란의 「피아노」
소리가 멀리 들려 오고 그 보다도 좀 더 가까운데서 똑 ─ 딱 ─ 똑 ─ 딱 ─ 하는 결코 금속성(金屬性)이 아닌, 목성(木性)의 소리가 고요한 방안을 녹이는 듯 들려왔다고 한다.
『가만있자 ── 이게 목탁소리가 아닌가?』
백영호씨는 문득 그렇게 중얼거리며 소파에서 몸을 이르켰다.
『목탁치는 소리?』
그렇다! 그것은 틀림없는 목탁소리였다. 그 순간, 은몽은 몸이 으스스하니 오그라지는 것이었다. 자기자신의 발자욱 소리가 으쓱하고 두려움을 싣고 기어올라옴을 깨달았다.
『목탁소리가 왜 날까? ──』
은몽은 백영호씨의 귀에다 입을 가까이 대며 속삭이었다.
『글쎄 ── 대체 어디서 나는 거야?』
백영호씨의 목소리도 극히 낮았다. 목탁소리는 처음엔 침실에서 나는 것 같았다. 침실로 가보았다. 그러나 침실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목탁소리는 한층 더 가까이 들려온다. 은몽과 백영호씨는 그 때 문득 침실 천정을 쳐다보았다.
『악!』
하고 두사람은 낮으나마 놀라움에 찬 목소리로 외쳤던 것이다. 목탁소리는 틀림없이 천정으로부터 들려왔다. 아니, 자세히 말하면 침실 윗층 미술품 수집실로 부터 들려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때 들려오던 , 목탁소리가 돌연 끊기었다. 사방은 고요해졌다.
미술실에 숨어있는 해월이도 은몽과 백영호씨가 자기의 존재를 알아차린 것을 짐작했던 모양이다.
도승의 목탁치는 소리! 복수귀 해월의 목탁소리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고 있었던가?……「웨딩·마 ─ 치」대신 장송곡을 친 해월이가 아니었던가!
불길의 징조 ── 죽음을 의미하는 목탁소리였다. 주위의 적막은 자즈러질 듯이 가슴을 파고든다. 누구냐!……고 고함이라도 쳐볼까 하였으나 고함을 치는 그 순간 시퍼런 비수가 자기네 심장을 향하여 날아올 것만 같았다.
그 때 늙은 백영호씨는 오들오들 떨고 있는 은몽의 손목을 잡고 옆방 「아뜨리에」로 와서 역시 숨소리도 낮추고 귀를 기우려 보았다. 그러나 아무 기척도 없었다.
『이상하다! 분명히 목탁소리가 들리었는데 ──』
백영호씨와 은몽은 혹시 자기네의 환청(幻聽)이 아니었던가를 의심하여 보았다.
그러나 그 순간, 그들의 바로 등뒤 ── 뒤통수에서 청천벽력처럼 떨어지는 목탁소리!
『에엣! ── 』
하고 두사람이 획하고 돌아서는 순간, 은몽은 그만 질겁을 하여
『아, 악!』
하고 고함을 치면서 침실로 딩굴듯이 뛰어갔다고 한다.
아아! 홍의(紅衣)의 악마여!
붉은 「만또」를 기다랗게 두르고 얼굴에는 울긋 불긋한 도화역자의 틸을 쓴 복수귀가 한손에 목탁을 들고 한손에 비수를 들고 백영호씨를 노려보는 전신 주홍색의 악마여!
『악!』
소리를 치며 침실로 쫓겨 들어간 은몽은 다시 복도로 뛰어 나갔다. 남수가 정문 밖에서 은몽의 찢는 듯한 부르짖음을 듣고 놀란 것은 바로 그 때였던 것이다.
은몽은 복도로 뛰어 나가면서 뒤를 한번 힐끗 돌아보았다. 전신 주홍색의 악마 해월이와 남편 백영호씨가 서로 붙잡고 하나는 찌르려고 하나는 찔리지 않으려고 ── 두개의 몸뚱이가 불이 나듯이 부딪치며 돌아가는 광경을 보았다고 한다.
『해월이, 해월이! 이놈!』
늙은 백영호씨의 숨찬 고함이었고 남수가 정문안으로 뛰어 들어와서 「아뜨리에」의 「커 ─ 텐」에 비친 두개의 격투하는 그림자를 본 것은 그 때였다.
다음 순간, 은몽은 남편 백영호씨의 가슴을 파고드는 시퍼런 칼날을 꿈결처럼 바라보며 역시 꿈속사람 처럼 감각을 잃어버린 부르짖음을 쳤던 것이다. 남수의 고함치는 목소리가 정원으로 부터 들린것은 그때였다고 한다.
석고상 앞에 쓸어진 남편 ── 복수귀 해월은 침실로 은몽을 따라 들어가려던 발머리를 돌려 그대로 낭하로 달아나면서 「도어」옆에 달린 「스위치」
를 눌렀던 것이다.
캄캄한 사방 ── 복도 들창을 넘어 밖으로 달아나는 해월이 ── 그 때 남수가 현관으로 뛰어 들었던 것이다.
『정란, 이 일을 어쩌면 좋아? 정란, 모두가 내 탓이야! 내탓! ──』
이야기를 마친 은몽은 정란을 끌어안고 흐느껴 울었다.
이윽고 정란의 약혼자 문학수가 달려왔다. 그러나 벌써 절명해버린 백영호 씨를 어찌할 도리는 없었다. 그는 그저 가족들과 같이 미래의 장인의 영혼에 머리를 숙이고 함께 애도의 정을 표할 따름이었다.
뒤를 이어 경찰관 일행이 도착하였다. 임경부는 아까 정란으로부터 백영호 씨의 비보를 받은 순간, 무엇 보다도 먼저 머리에 떠 오른 관념은, 그는 종시 사람을 죽였구나! 하는 생각과 거기 대한 무거운 책임감이었다.
『유불란!』
그는 문득 그렇게 중얼거리며 이마를 찌프렸던 것이다.
경찰의(警察醫)는 아무런 감정도 없는 기계처럼 백영호씨의 피묻은 시체를 검시하였다. 그러나 그 역시 아무런 단서도 잡지 못하였다. 다만 예리한 비수가 심장을 깊이 찔렀다는 것 이 외에는 ── 은몽은 임경부 앞에서 다시 한번 사건의 전후 사정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임경부는 우수의 얼굴을 들면서
『그러면 목탁 소리는 분명히 침실 윗층 미술품 수집실로 부터 들렸읍니까?』
『네, 분명히……』
이리하여 임경부는 박부장으로 하여금 정원과 삼청동 부근 일대를 수색케 하고 자기는 백남수와 문학수를 데리고 이층으로 올라 갔다.
『미술품 수집실은 항상 자물쇠를 잠가 두십니까?』
임경부는 층계를 올라 가면서 남수에게 물었다.
『네, 늘 잠가두지요. 저번에 그런 일이 일어난 후 부터는 아버지는 자신이 꼭 열쇠를 가지고 다니십니다. ── 아, 참, 열쇠를 잊었군. 아버지 주머니에 있을 겁니다.』
남수는 다시 아랫층으로 내려가서 아버지의 「포켙」에서 열쇠를 꺼내 가지고 올라왔다.
『그러면 미술품 수집실 문은 지금 잠겨있읍니까?』
『그렇지요. 잠겨 있어야지요.』
『열쇠는 단 한개입니까.』
『그렇습니다. 단 한개입니다. 미술품 수집실에 출입하는 사람은 우리집에선 아버지 혼자뿐이었으니까요 ── 』
그런 이야기를 주고 받으면서 그들은 전등불이 희미하게 비치는 넓은 복도를 미술실로 향하고 걷고 있었던 그때
『아, ── 저 문이……』
하고 앞서서 걸어가던 문학수의 낮으막한 외침! 미술품 수집실의 「도어」
가 마굴의 돌문처럼 벙긋하니 열려있다!
시커먼 아가리를 벙싯하니 벌리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듯한 미술품 수집실은 조금 아까 까지도 주홍색의 복수귀 해월의 소굴이 아니었던가!
방안은 캄캄하다. 죽은 듯이 고요하다. 그 순간 목탁을 든 주홍마(朱紅魔)의 히쭉거리는 얼굴이 문밖으로 쑥 기어나올 듯 싶었다.
남수는 「도어」를 힘있게 열어젖히고 「스윗치」를 눌렀다. 넓다란 방안에 무수히 놓여 있는 조각품 ── 하얀 석고상과 싯누런 불상 ── 그 순간
『앗! 붉은 봉투!』
하고 세 사람은 이구동성으로 외쳤던 것이다. 아아, 무서운 저 빨간 봉투!
철석같은 악마의 명령서가 다섯개의 불상 가운데서도 그 중 가장 큰 신라 중엽에 주조되었다는 좌상(坐像)관음보살의 손바닥 위에 놓여있지 않은가.
불길의 징조! 저 핏빛처럼 새빨간 봉투속에는 또 어떠한 공포가 들어 있을 것인가? 임경부는 달려 가자마자 봉투를 떼었다.
은몽! 나는 너의 남편 백영호씨를 죽였노라. 그것은 물론 나의 본의는 아니었으나 그는 나의 하고자 하는 일을 방해한 벌을 받은 것이다. 그렇다!
누구든지 나의 하고자하는 일을 막는자는 내 칼에 죽으리라. 누구든지 죽으리라. 그러나 나는 백영호씨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의외의 일을 하나 발견하 였다. 그것은 무엇인가? 남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은몽, 네가 느끼는 비탄(悲歎), 너의 쓰라린 가슴이다. 그렇다! 나는 아직까지는 어리석은 복수자였었다. 너만을 죽임으로서 나의 복수가 완전히 성공하리라고 믿고온 것이 얼마나 단순한 복수이뇨. 나는 지금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십 삼년 동안이나 원망과 저주와 눈물로 보내온 이 너무나 기나긴 역사를 가진 나의 복수심은 이제 정말 잔인할대로 잔인해진 것 같다. 너의 목숨이 단 한칼에 이슬처럼 살아지는 것으로만은 만족을 느낄 수 없는 것 같은 나의 심경이다. 은몽! 나는 복수의 방법을 달리하려고 결심했다. 공포와 비애로 말미암아 각일각으로 시들어가는 너의 생명을 얼마 동안 혀끝으로 대굴대굴 굴리면서 맛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렇다! 너를 귀여워하는 존재, 그리고 네가 믿고 사랑하는 존재를 지금부터 한사람 한사람씩 죽여 버림으로써 네게 재빛과 같은 비탄과 공포를 던져 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맨 나중에 시들다 남은 너의 목숨을 빼았으므로서 나의 완전한 복수를 수행하려는 것이다.
그러면 너를 귀여워하고 네가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누구냐? 먼저 너의 가족들이다. 백남수, 백정란, 그리고 너의 애인 김수일……또 없는가? 또 없는가?…………
해 월세 사람은 편지에서 눈을 들었다. 임경부와 문학수는 남수의 얼굴을 이상한 표정으로 묵묵히 쳐다 보았다.
아아, 짐승 같은 악마! 귀신 같은 복수귀! 복도 들창을 넘어 달아났던 해월은 어느새 어떻게 미술품 수집실로 숨어 들었던가?
세 사람은 이런 의문을 한 아름씩 안고 방안을 낱낱이 뒤져 보았으나 해월의 그림자는 역시 무슨 기체(氣體)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때
『이것이 뭘까?』
하고 중얼거리면서 문학수가 저편 불상 뒤에서 호박(琥珀)으로 만든 조그만
「로켓트」를 하나 발견하였다.
『「로켓트」가 아닌가?』
남수는 「로켓트」를 받아 들고 뚜껑을 열었다. 사진이 들어 있었다.
『여자의 사진?』
그러나 그것이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세사람은 긴급히 아랫층 「아뜨리에」로 내려와 그것을 은몽과 정란에게 보였다.
『글쎄 누굴까?』
은몽과 정란은 머리를 갸웃거렸다. 스물이 될락말락한 갸름한 얼굴을 가진 처녀의 사진이었다. 물론 해월의 것일 께다. 머리를 길게 따아 늘인 처녀 ── 아아, 사람의 죽음을 기원하면서도 한편 그것을 애도하는 듯 싶은 저 저릿저릿한 목탁소리여! 전신을 치렁치렁한 주홍빛 「만또」로 몸을 감추고 조는 듯한 가는 눈과 귀밑까지 찢어진 가는 입을 가진 그 도화역자의 가면을 쓴 무시무시한 악마여!
홍의(紅衣)의 악마는 마침내 사람의 피비린내를 맡았다. 복수와 질투에 불타오르는 그의 칼날은 드디어 늙은 신랑 백영호씨의 행복에 찬 심장을 찌르지 않았던가!
거리거리에 휘날리는 호외조각! 서울 장안을 들볶는 각 신문사의 호외의 방울소리를 들으라!
── 호외다 호외다! 홍의의 복수귀는 드디어 백영호씨를 죽였다.
── 복수귀의 눈초리! 난무(亂舞)하는 복수귀의 칼날!……귀신인가 짐승인가? 바람과 같이 나타났다 바람과 같이 사라진 도승 해월이!
── 악마의 명령서, 붉은 봉투는 또 무엇을 말하는가?……
── 미술품 수집실에서 얻은 이상한 「로켓트」! 「로켓트」속에 들은 미인 사진의 주인공은 대체 누구일까?……
장안의 인심은 그야말로 글자 그대로 흥분과 엽기와 공포에 몸부림쳤다.
그들은 한 곳에 모이기만하면 복수귀의 이야기요 주홍마의 이야기로 날을 보냈다. 그들은 백영호씨의 영혼을 애도하기보다 먼저 복수귀 해월의 기상천외한 재주를 찬양하였다. 콩알만한 가슴을 움켜쥐고 바들바들 떨고 있는 은몽의 신세를 가련하다고 생각 하기보다 먼저 순정을 짓밟히운 소년 승려 해월의 애끓는 심정에 한숨짓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백영호씨 살해사건은 공포와 기적과 신비를 남겨놓고 또 다시 미궁(迷宮)으로 부터 미궁으로 빠져들기 시작하였다. 이 처럼 사건이 다시 미궁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도하의 각 신문지는 명탐정 유불란씨의 출마를 대서특필하여 부르짖게 된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니었다.
이제 ×× 일보사의 민완기자 정대호(鄭大浩)가 공작부인 은몽과 「인터 ─ 뷰」한 기사 중의 한대목을 소개해 볼 필요가 있다.
……삼청동 「풀」위에 거대한 암록색 도영(倒影)을 그리며 높다랗게 솟아 있는 이 삼층양옥은 마치 탐정소설에 나오는 중세기의 고성과도 같고 무슨 유령의 집과도 같았다. 그래도 백영호씨의 장례식을 치르기 전까지는 사람들의 출입이 많아서 그렇지도 않았으나 사람들의 발자취가 끊어져버린 요즈음에는 마치 산 송장과 같은 창백한 얼굴을 가진 공작부인이다.
『밤이나 낮이나 그 놈은 항상 저를 감시하고 있을 것입니다. 변소 출입도 마음대로 못하지요. 어디서 불쑥 나타날런지……저를 구할 사람은 한사람도 없어요. 저는 그저 뱀 앞에 개구리처럼 시들시들 말라빠져 죽을 것 같아요 ──』
부인께서 유불란씨에게 『 친히 한번 청탁해 보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유불란씨가 유명한 탐정이란 말은 들었읍니다마는 그 인들, 그 인들 어쩔 수가 없을 겁니다. 그 놈의 재주와 유불란씨의 재주와는 도저히 비교가 안되지요. 유씨가 아직껏 이 사건에 출마하지 않는 것도 제 생각엔 그 놈을 두려워 하는게 아닐까요? 도저히 자기의 힘으로는 해결짓지 못할 줄을 깨닫고……』
『그런 말씀을 유불란씨가 들으면 적지않게 분개할 겁니다.』
『글쎄요, 그럴까요? 그렇다면 제 말을 취소하겠읍니다. 아직 뵈옵지도 못하신 분에게 그런 경솔한 말을해서……그러나 유불란씬들, 유불란씬들 ……』
『덮어 누르는 듯한 공포에 오그라들 것 같은 부인의 애처러운 자태를, 만일 유불란씨가 눈앞에 본다면 그는 결코 이 외로운 공작부인을 그대로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이라고 기자는 문득 생각했다……유불란씨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이것은 기자인 나 혼자만의 부르짖음이 아니고 서울장안 칠십만 시민의 외침일 것이다. 유불란씨여, 한시바삐 저 악마의 손으로부터 부인을 구하라.』
吳辯護士의 推理[오변호사의 추리]
[편집]××일보 기자 정대호와 은몽과의 회견기를 읽고 과연 유불란 탐정이 분개를 느끼었는지 어쩐지는 알바가 없으나 하옇든 그런 기사가 게재된 이튿날, 금강산 온정리에서 유불란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간단한 글이 ××일보사 사회부에 도착되었다.
홍의의 악마 ── 그는 세상에서 생각하는 것보다 몇 배나 더 무서운 존재다. 이 복수사건의 배후에는 실로 형용할 수 없는 커다란 두려움이 잠재해 있는 것 같다. 만일 나의 상상이 틀림이 없다면 지금까지 발생한 사건은 말하자면 조그마한 서곡(序曲)에 지나지 않는다.
공작부인이 말한바와 같이 나는 사실 그 놈을 두려워 마지 않는다. 그 놈은 나보다 몇 갑절이나 더 비상한 힘과 재주를 가진자다. 그러나 나는 내가 가진바 모든 힘을 다하여 홍의 복수귀와 더불어 끝까지 싸우리라는 것을 칠십 만 시민제군 앞에 맹세하노라! 시민제군은 나의 성공을 빌어주기를 바라는 바다. 유불란 유탐정의 이 성명서가 한번 지상에 발표되자 세상은 다시 새로운 흥미에 끌려 들기 시작하였다.
유불란과 해월이! 그렇다! 이 호적수(好敵手)의 두 거인(巨人)사이에는 과연 어떠한 투쟁이 일어날 것인가?…… 용호상박(龍虎相搏)의 처참한 광경이 머지않아 독자제군 앞에 벌어질 것이다.
그것은 하옇든 필자는 여기서 잠깐 붓끝을 돌려, 독자제군의 머리를 어지럽게 한 이 복잡다단한 사건을 절반 이상이나 단순화시킨 한개의 명논문(名論文)을 여러분께 소개하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유탐정의 성명서가 ××일보 지상에 발표된지 사흘만의 일이었다. 전부터 ××일보와 대립상태에 있는 △△일보는 돌연 라는 제목으로 변호사 오상억씨의 논문을 사흘동안이나 계속하여 게재하였다.
백영호씨의 고문변호사 오상억이라면 여러분도 아시다싶이 정란에게 실연을 당한 청년신사로서 명석한 두뇌와 능란한 수완으로써 법조계에 명성이 높은 사람이며 「그리샤」형의 조각처럼 표정이 없는 단아한 얼굴은 아직까지 여러분의 기억에 남아 있을 줄로 믿는다.
이 오상억 변호사의 논문은 실로 경탄할 만한 두뇌의 소유자가 아니면 도저히 불가능한 사실을 여지없이 적발하였던 것이다. 사람들의 흥미는 또 다시 오상억으로 옮아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면 오변호사가 그의 치밀한 두뇌를 구사하여 짜아낸 명논문이란 대체 어떤것인가? 필자는 이제부터 그 논문을 소개하여 독자 제씨와 더불어 다시 한번 놀라보고자 하노라.
△△일보사 편집국장!
소생이 이 귀중한 원고를 귀신문사에 보내는 이유는 이 원고의 게재로 말미암아 △△일보가 순식간에 적어도 삼만부는 더 팔리리라는 그런 이해타산으로 나온 것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미리 알려 두는 바입니다. 소생은 단지 ××일보가 유불란 탐정의 성명서를 싣고 떠들어 댄다는 것이 약간 소생의 비위를 거슬렸을 따름이요, 그 외엔 아무런 이유도 없읍니다.
편집국장! 소생은 일개의 법률가, 감히 문필을 논하여 사람을 감동시킬 문제는 갖지 못했아오나 다만 소생이 말하고자 하는 본의만을 이해하여 주신다면 감사 하겠읍니다.
서울장안은, 아니 전조선은 지금 바야흐로 저 정체모를 무서운 복수귀의 잔인한 칼날아래서 몸서리치고 있읍니다. 광란의 칼날로부터 공작부인을 구할 자는 대체 누구인가? 사람들은 명탐정 유불란씨의 출마를 고대하여 마지 악마의 정체?
않습니다 그러나 유불란 . 탐정이 과연 저 홍의의 악마와 적수가 될는지……
나는 이제부터 사람들이 예상치도 못했던 실로 의외의 사실을 기록해 보고자 합니다.
소생은 이 사건에서 실로 의외의 사실을 하나 발견했읍니다. 이 한가지 사실로 말미암아 사건 전체가 실로 어지러울만치 복잡성을 띄게된 결과를 맺었다는 것을 먼저 이야기해 둡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사건전체를 처음부터 재 검토해 불 필요를 느끼는 바이며 따라서 간갈적(間渴的)으로 발생된 몇 가지 사건을 하나하나씩 음미해 보는 한편, 그 사건과 사건 사이에 어떠한 관련성이 숨어있는가를 다시 한번 냉정히 검토해 보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읍니다. 그러자면 소생은 편집국장 이하 수 백만 독자의 기억을 새봅히기 위하여 이 사건에 등장하는 중요 인물을 먼저 열거해 보고자 합니다.
1, 주은몽(백영호씨의 부인) 2, 백영호씨(주은몽의 남편) 3, 백남수(백영호씨의 아들) 4, 백정란(백영호씨의 딸) 5. 김수일(주은몽의 애인) 6, 이선배(김수일의 동무) 7, 해월(홍의의 복수귀) 8, 문학수(백정란의 약혼자) 9, 오상억(백영호씨의 고문변호사인 필자 자신) 10, 유불란(탐정) 11, 황세민(폐교에 임한 혜전(惠專)교장 ──) 12, 임경부(××서 사법주임) 이상 열기한바 열 두명이 직접으로나 간접으로나 이 사건에 다소나마 관계를 가진 인물이라고 볼 수 있읍니다.
그러나 이상 열 두명 가운데서 우리가 가장 주목해 보는 인물은 두말 할 것 없이 해월이와 김수일과 이선배입니다. 이 세사람의 정체가 판명된다면 이 사건은 결국 무사히 해결을 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김수일이란? 이 선배란, 그리고 해월이란 대체 어떤 인물이며 그들 사이에는 과연 어떠한 관계가 잠재해 있는가?
편집국장!
소생이 지금 이처럼 붓대를 들고 거친 문장을 논하는데는 이 수상한 세 사람 가운데서 김수일이란 인물과 이선배란 인물의 정체를 발견한 때문입니다 귀하는 좋건싫건 . 소생과 더불어 이 사건의 맨 첫 장면 ── 명수대 공작 부인인 가장무도회로부터 탈출해 버린 자칭화가 이 선배 ── 「씰크햇 트」를 쓰고 「택시 ─ 도우」를 입고 「모노클」을 쓰고 수염을 붙인 이 선배와 경찰관들 사이에 벌어진 일대 추격전이 일어났던 광경을 다시 한번 회고해 보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한강인도교 입구에서 지나가는 빈 자동차를 잡아 탄 이선배를 경찰들은
「오토 ─ 바이」로 경성역전을 거쳐 남대문을 지나 마침내 태평동까지 추적해 왔읍니다. 그때 경찰들의 맹렬한 추격에 못견디어 이선배는 하는 수 없이 자동차를 버리고 왼편 막다른 골목으로 뛰어 들었다는 것을 기억하실 줄 압니다. 그리고 그 길이 막다른 골목인줄 안 순사부장 박태일군은 포대 속에 든 쥐로만 알고 부하들을 격려해 가면서 수상한 신사 이선배를 따랐읍니다. 편집 국장! 귀하도 기억하실 줄 알고 있읍니다만, 이 막다른 골목은 양편이 모두 두길이나 되는 「세멘트」담장, 제아무리 난다 긴다하는 재주를 가졌다할지라도 귀신이 아니고 사람인 이상 순식간에 그것을 넘었으리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읍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선배는 거기서 마치 땅으로 꺼진 듯이 자취를 감추어 버리지 않았읍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사실 ── 현대과학으로는 도저히 해결하지 못할 한개의 커다란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읍니다. 더구나 때 마침 저 편에서 「노오타이」에 「와이샤스」바람으로 휘파람을 불면서 한가히 걸어오던 산보객도 그런 수상한 인물은 전혀 본적이 없노라고 단언하였읍니다. 더구나 그 산보객이 오른편 양옥집 주인 유불란씨인 줄을 안 박태일부장은 이 마술사의 수수께끼를 어떻게 해결하여야만 되겠느냐고 유불란 씨에게 물었던 것입니다. 그 때 유불란씨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읍니다.
『유선생은 과학을 믿습니까?』
하고 묻는 박태일부장의 물음에 유불란씨는 뭐라고 대답하였읍니까.
『나는 무엇보다도 과학을 사랑한다.』
『그러면 사람의 힘으로 두길이나 되는 이 돌담을 눈 깜박할 사이에 넘을 수 있을까요?』
『못 넘는다.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면 그는 유령입니까?』
『유령이 걸어 다니는 것을 군은 보았는가?』
하고 「샬록 ‧ 홈즈」처럼 하루 아침에 담배를 열갑이나 피우고 커피를 스무 잔이나 마시면서 생각하면 유령 이선배에 대한 수수께끼가 풀릴 것이라고 대답하였읍니다.
편집국장!
유령이 아닌 이선배는 유불란씨의 말대로 물론 양쪽 돌담을 넘지도 못했을 것이며 땅으로 꺼지지도 못했을 것이며 하늘로 날지도 못했을 것이 분명하지 않읍니까.
그러면 이 선배는 대체 어찌 되었느냐? 하는 귀하의 질문에 소생은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그는 한개의 인간으로서의 행동을 취했을 따름이라고.
편집국장! 소생은 결코 탐정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탐정소설에서 유명한 탐정이 『모 ─ 든 불가능사를 제하고 남는 것이 즉 그 수수께끼의 해결이라』 ── 는 말을 귀에 담은 적이 있읍니다.
(謎一不可能事〓解答[미일불가능사 해답]) 그러면 이 선배는 어떻나 행동을 취하였던가?
경찰에게 쫓기어 막다른 골목으로 뛰어든 이선배는 담도 넘지 않고 땅으로 꺼지지도 않고 하늘로 올라가지도 않고 디귿(ㄷ)자 모양으로 생긴 골목을 돌아 뛰어 들어 갔읍니다. 그리고 그는 사람입니다. 사람인 이상 필연적으로 저 편으로부터 이리로 걸어오던 유불란씨와 마주쳤읍니다. 유불란씨 자신의 말과 같이 그가 잠자면서 길을 걷는 습관을 가지지 않은 이상 그는 필연적으로 이선배를 보았을 겁니다! 보았을 것입니다! 보았읍니다!
편집국장…… 아니 수백만 독자제군이여! 이것이 현대과학이 우리들에게 주는 유일한 대답입니다.
『유탐정은 그러면 거짓말을 하였던가?』
하는 의문이 독자 여러분을 붙들고 놓아 줄줄을 모를 겁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유탐정은 결코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읍니다.
그는 『이선배를 본적이 없다.』는 제일의 거짓말을 『나는 무엇보다도 과학을 사랑한다.』는 제이의 참말로서 부정하였을 따름입니다.
그러면 유불란씨는 대체 무슨 이유로 ── 이선배와 어떠한 밀접한 관계가 있기로 그를 옹호하지 않으면 안되었는가? 하는 의문이 또 다시 여러분을 붙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유불란씨와 이선배 사이에는 실로 뗄래야 뗄수 없는 밀접한 관계가 숨어 있었읍니다. 어째 그러냐? 유불란씨와 이선배는 동일한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태평동 큰거리에서 자동차를 버린 이선배는 ── 아니 유불란씨는 조그만 여유가 있으면 자기집으로 뛰어 들어갈 셈으로 정문 앞까지 달음박질을 쳤읍니다만은 그러나 그 때는 벌써 경찰관들의 시선이 자기 등골위에 집중한 때라, 그대로 지나서 돌담를 돌아서면서 이 난관을 어떻게 피할까를 생각했읍니다 임기응변 . (臨機應變)의 술이 능한 그라, 다음 모퉁이를 또 한번 돌아서서 경찰들의 시선에서 벗어난 그는 비조처럼 빠른 솜씨로 「씰크햇트」
와 단장과 장갑, 얼굴에서 붙였던 수염과 「모노클」그리고 「칼라」와
「넥타이」와 「택시 ─ 도우」를 하나씩 하나씩 자기집 담장 안으로 던져 버린 후에 이번에는 발길을 돌리어 휘파람을 불면서 산보하기를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므로서 마치 마술사 처럼 보이던 이선배에 데한 신비의 껍질은 조금도 ( )( )연한 점이 없이 벗겨졌다고 볼 수 있읍니다.
독자제씨여!
이리하여 이선배의 수상한 행동은 과학적으로 충분한 설명을 보았읍니다.
이선배와 유불란씨가 동일한 인물이라는 놀라운 사실이 폭로 되었읍니다.
이 점에서 관해서는 필자보다도 유불란씨 댁에 있는 젊은 서생의 변명이 한층 더 정확하게 증명하였읍니다.
그것은 유불란씨에 대해서는 매우 미안한 바이오나 요즘 유씨가 여행을 떠나고 집에 없는 것을 기화로 여기고 필자는 태평동 유씨댁을 방문하여 젊은 서생에게 지나간 사월 초 열흘에 ── 다시 말하면 공작부인의 저택에서 가장 무도회가 열린 날밤, 유씨가 집에 있었느냐 없었느냐를 물었더니만 그는 그 때 확실히 자기 주인이 서재에서 독서를 하고 있었다고 극력으로 변명하였읍니다마는 그는 한편으로 자기 주인은 절대로 「와이샤츠」바람으로 산보하는 버릇을 가지지 않았다고 역시 극력으로 역설을 하였읍니다.
이것을 보면 이 젊은 서생도 자기 주인을 본받아 제일의 거짓말을 제이의 참말로써 부정하는 논법을 배운 듯 싶읍니다.
뿐만아니라, 공작부인이 화장실 삼면경 앞에서 도화역자의 칼을 어깨에 받고 쓸어졌을 때 이선배는 어떠한 행동을 취했는가? 그는 그러한 급박한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손수건을 쥐고 칼을 뽑았읍니다. 그것은 도저히 보통 인간으로서는 취하지 못할 행동이었으나 그가 명탐정 유불란씨라고 생각할 때 그 부자연한 행동이 역시 자연스럽게 설명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대체 어떻게 되는가? 이선배란 화가가 곧 유불란 그 사람이라는 논법을 좀더 진행시켜 볼 때 거기에는 또 다시 여러가지 의혹이 뭉게뭉게 떠오를 겁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이선배는 ── 아니 유불란씨는 결코 그날 밤 공작부인의 저택을 처음 들어선 사람이 아니라는 결론을 짓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그는 공작부인의 고함치는 소리를 듣고 누구보다도 먼저 화장실로 뛰어 갔읍니다. 뿐만아니라 그는 이층 서재에 전화가 있으니 속히 경찰을 불러 달라는 명령을 하지 않았읍니까.
그렇습니다 그는 공작부인의 ! 저택을 여러번 드나든 사람입니다. 공작 부인의 화장실에 까지 드나든 적이 있는 그러한 친분을 공작부인과 더불어 가지고 있는 사람에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공작 부인은 아직까지 유불란씨와 한번도 대면 한 적이 없다고 단언하지 않는가!
이 모순된 논리의 방향은 대관절 어디다 구하여만 될 것입니까?…… 그러면 공작부인이 거짓말을 했는가? 무슨 이유로? 아닙니다! 부인에게는 그런 허위의 증언을 감히 할 아무런 조건도 없읍니다.
편집국장 이하, 이 글을 읽어 주시는 수 백만 독자제씨여! 앞이 꽉 막힌 이 논리의 방향을 개척하고자 필자는 기상천외한 공상을 한 가지 하여 보았읍니다. 이런 공상의 몇 분지 일이 사실과 합치 될는지, 그것은 후일 유불란씨 자신의 입으로 증명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은 그것은 하옇든 필자의 대담스러운 공상은 다음과 같은 의혹에서부터 출발하였읍니다.
『── 공작부인과 상당히 친밀한 관계 있는 유불란! 그러나 그 유불란을 공작부인은 모른다?』
그렇다! 이것은 확실히 한개의 모순된 사실이다. 그러나 이 모순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므로서 충분히 해결될 것입니다. 유불란씨는 화장실에 쓰러진 공작부인을 그의 남편인 백영호씨가 그 옆에 서 있는데도 불구하고 몸소 부인을 안고 침실로 옮겨 뉘였읍니다. 그 때의 유씨의 얼굴 ── 그것은 부인의 아품(痛[통])을 자기 자신의 아품과 같이 느끼는 그의 얼굴을 필자는 기억하고 있읍니다. 친우(김수일)의 애인에 대하는 태도라기 보다도 자기 자신의 애인에 대하는 태도라고 보는 것이 한층 더 어울리는 얼굴이 아니었던가!
『김수일과 유불란을 역시 동일한 인물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는가?』
『유불란과 김수일은 같은 인물! ──』
그렇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므로서 쌓옇던 모든 의문을 논리적으로 풀어 나갈 수가 있읍니다. 다시 말하면 공작부인은 화가 김수일이란 가명을 가진 유불란씨와 교제를 맺어왔다고 상상할 수가 있읍니다. 처음 이와같은 상상이 나의 뇌리를 번개같이 스치고 지나갈 때, 나는 나의 이 너무나 탐정적인 공상을 픽하고 웃었읍니다. 그러나 시간이 가고 날이 갈수록 나의 공상은 점점 근거있는 한개의 사실로 변모(變貌)해감을 어찌할 수가 없었읍니다.
공작부인의 진술에 의하면 작년 가을 ×××씨 개인전람회에서 비로소 김수일이란 화가를 알았다고 합니다. 그 때 유불란씨는 어떠한 사정이 있었는지 지금 갑자기 추측하기 어려우나 하옇든 그 때 유씨는 자기 자신을 화가 김수일이란 가명으로써 공작부인께 소개하였읍니다. 공작부인은 단 한번 본 김수일에게 남모를 연정을 품기 시작했읍니다. 그리고 역시 어떠한 이유에선지는 알 수 없으되 유씨는 태평동 자기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서린정
「중앙 ‧ 아파 ─ 트」를 숙소로 정하고 거기서 공작부인을 수차 만났읍니다.
이리하여 김수일이란 가명을 가진 유불란씨와 공작부인 사이에는 제 삼자라도 가히 추측할만한 정도의 애정이 오고 가고 하였읍니다. 그러나 임자 있는 몸이라 공작부인은 자기의 연연한 감정을 억제하여 예술의 「파트너」요 일생의 은인인 백영호씨와의 약혼을 굳센 의지력으로서 실행하고자 하던 그 즈음 ── 약혼자의 탄생을 호화롭게 축하하고자 하는 늙은 백영호씨의 의향을 달갑게 받은 공작부인은 드디어 조선서는 보기드문 가장무도회를 열게 되었던 것입니다.
필자는 지금 그 때의 유불란씨가 얼마나 오뇌하였으며 얼마나 번민 했는가를 마치 눈으로 보는 것 같읍니다.
「중앙 ‧ 아파 ─ 트」로 무도회의 초대장이 날아왔을 때, 유씨는 대체 무엇을 생각했는가? 그는 최후의 수단으로서 공작부인의 마음을 돌려 보려고 결심하였읍니다.
그러나 그가 한가지 우려한 것은 자기의 얼굴을 그대로 무도회에 가지고 간다면 거기 출석한 손님 가운데는 반드시 자기를 유불란으로서 대할 사람이 있으리라, 김수일이란 가면은 공작부인의 목전에서 벗겨질 것을 두러워 하였을 겁니다.
세상이 모두 아다싶이 유불란씨의 가장술이 얼마나 능하며 그의 성대모사(聲帶模寫)에 대한 조예가 얼마나 깊은지는 여러분이 한번 그의 서재를 방문하여 가장술과 의성학(擬聲學)에 관한 산떼미같은 서적과 수 백종에 달하는 가장품의 진렬을 견학 하신다면 넉넉히 짐작하실 줄 믿읍니다.
이리하여 마치 「루팡」을 모방한, 이선배라는 가짜 화가가 가장무도회에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는 공작부인을 「발코니 ─」로 데리고 나가서 그 공교로운 성대모사를 빌어 친우 김수일군의 유린된 순정과 암흑같은 장래를 호소하였읍니다. 그러나 마침내 공작부인의 의향을 돌릴 수 없어 하는 수 없이 그는 『수일군은 영원히 당신의 눈앞으로부터 자취를 감추리라.』 ── 는 의미의 말을 전하였읍니다.
편집국장! 이상과 같이 생각해보면 유씨가 그날 밤 취한 수상한 행동에 관한 여러가지 의문이 해결될 것이며 경찰 일행이 도착하기 바로 전에 무도회를 탈출한 이유도 설명될 것입니다. 전부터 안면이 있는 ××서 사법주임 임경부는 공작부인의 눈앞에서 이 수상한 신사의 가면을 벗겨 그것이 유불란씨란 것을 발견하고 놀랄것을 미리 짐작하였던 때문이 아니었던가요.
일인 삼역 유불란 ── , 김수일, 이선배에 대한 비밀은 이리하여 논리적으로 해결을 지었읍니다. 그러나 대체 무슨 이유로 김수일이란 가명을 가지고 공작부인과 교제를 하였던가? 그것은 언젠가 유씨 자신이 설명할 때를 기다릴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새로운 展望[전망]
[편집]신문을 읽고 난 임경부는 극도로 흥분된 얼굴로 전화기를 힘있게 잡았다.
『── 오상억씨 입니까? 임세훈이 올시다. 지금 좀 만나 뵈러 가려는데……혹시 바쁘시지 않으시면 이리로 좀 와주시든지……뭐 손님?…… 공작 부인 ── 주은몽씨가 오셨다고요? 아 그럼 제가 그리로 가겠읍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
임경부는 △△일보를 구겨쥐고 창황한 발걸음으로 ××서를 나섰다.
오후 아홉시 ── 거리에는 짙은 밤안개가 흐를듯이 내리고 오색의 「네온 ‧ 라이트」가 마도(魔都)의 「님프」처럼 오고가는 사람에게 「윙크」를 한다. 이리하여 흥분된 임경부를 태운 서용 자동차가 일로 밤안개를 뚫고 관철동을 향하여 질풍처럼 치닫고 있을 그 즈음 ── 아니 그 보다 얼마 전부터 오상억과 주은 몽이 마주 앉아 있는 관철동 오변호사의 응접실 들창 밖에 이상한 사나이의 그림자가 하나 유령처럼 쑥 나타났다.
안개의 담을 뚫고 쏜살같이 달리고 있는 임경부의 자동차 ── 오변호사의 응접실 들창 밖에서 「커 ─ 텐」을 슬쩍 헤치고 방안을 넘겨다 보는 수상한 사나이의 그림자 ── 짙은 안개로 말미암아 똑똑이는 보이지 않으나 중절모를 눌러 쓰고 검은 안경을 쓴 키가 늠름한 사나이다.
그는 아까부터 무엇을 엿보고 있는지 응접실 안에서 벌어진 그 어떤 광경을 유심히 들여다 보고 있다.
그 때 응접실 안에는 주은몽과 오상억 변호사, 이 두 사람 밖에 없었다.
『── 저를 구할 사람은…… 저를 이 무서운 처지에서 구해 낼 사람은 오직 오선생뿐예요.』
은몽은 절반 울음섞인 목소리로 애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조그만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오상억의 그 「그리샤」형의 조각처럼 단정한 어여쁜 얼굴에는 대리석처럼 싸늘한 공기 이외에는 이렇다 할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웃음 과 등진 「 」 오상억의 얼굴 ── 슬프나 기쁘나 아무런 표정도 지을 줄 모르는 그 너무나 차디찬 오변호사의 얼굴을 쳐다 볼 때마다 희망의 절정에서 절망의 밑바닥으로 툭하고 떨어져 내리는 것 같은 은몽의 눈동자였다.
『── 제가 이처럼 오선생의 구호와 동정을 얻고자 하는 것은 미리부터 오 선생과 친분을 가진 주은몽이 아니고 마인 해월의 칼날을 막아낼 아무런 방비수단도 갖지 못한 한개의 불쌍한 여성으로 생각해 주세요. ── 그야 물론 오선생께서 저를 구해줄 이렇다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 아니예요. 서울 장안을 뒤집어 봐도, 아니 전 조선을 꺼구로 털어보아도 해월의 칼날을 막아낼 사람은 오직 오선생뿐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지요. ……일인 삼역 ── 이선배, 김수일, 유불란이 모두 같은 인물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여지없이 지적한 오선생이 아니십니까? 저를, 저를 하루바삐 악마 해월의 마수로부터 구해 주세요!──』
『글쎄올시다 ──』
부처처럼 표정없이 앉아있던 오상억은 그 때 비로서 흥미없는 얼굴을 들었다.
『── 아까도 말씀드린바와 같이 나는 원체 그런 무시무시한 범죄사건엔 아무런 흥미도 느끼지 않읍니다. 아니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는 것보다도 나에게는 도저히 해월의 칼날을 막아낼 아무런 능력도 없을뿐더러 섣불리 손을 댔다가는 도리어 내자신의 목숨이 위태하니까 나는 아직 은몽씨의 목숨을 아끼기 보다도 내자신의 생명을 더 사랑하고 있지요. 해월은 도저히 나 같은 자에 패할자는 아닙니다. 그는 실로 무서운……』
어름덩이와도 같이 차디찬 오상억의 대답 ── 단 한마디 동정의 말조차 할 줄 모르는 오상억 ── 은몽은 그가 뱉는 한마디 한마디가 마치
『너는 죽어라! 너는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해월의 칼날에 죽을 것이다!』
하는 무서운 사형선고와도 같이 들리었다.
은몽은 마침내 「테의블」위에 엎디며
『아아!』
하고 한번 긴 한숨을 쉬고는 그만 공포와 절망의 연못 속으로 끝없이 끝없이 빠져 들어가는 듯 흐느껴 울기 시작하였다.
『어쩌면 그리도 냉정하시담! 태산같이 믿고 자기를 찾아 온 사람에게 어쩌면 한마디 위로의 말조차 없이……』
은몽은 그리고 눈물어린 두 눈을 반짝 쳐들며 쏘는 듯이 오상억의 표정 없는 얼굴을 바라 보았다.
오상억도 은몽을 바라본다. 일초, 오초, 십초, 이십 초 ── 두 사람은 말이 없다. 의지와 의지의 투쟁이다.
순간 시선과 시선이 부딪치는 그 첨단(尖端)에서 불꽃처럼 일어나는 정열과 정열! 여인(麗人)의 눈물은 마침내 오상억으로 하여금 공작부인 주은 몽의 탄력있는 손목을 잡게 하였다.
『은몽씨! 나는 이제 방금 은몽씨의 목숨이 나 자신의 목숨보다 더 중하다는 것을 깨달았읍니다!』
비오듯이 흐르는 창밖의 밤 안개 ──
「커 ─ 텐」 사이로 쏘는 듯이 드려다 보는 수상한 사나의 눈초리 ── 먼듯 하면서도 가까운 것은 젊은 남녀의 마음과 마음이라고, 이것은 연애소설독본(戀愛小說讀本) 제일과에 씌어 있는 말일 것이다.
그처럼 냉정한 오상억 변호사가 이 처럼 열정가로 돌변할 줄 누가 가히 예측 하였으랴.
은몽은 그 순간 도저히 가까이 할 수 없는 듯 싶던 그 어떤 커다란 존재가 다정스러히 자기의 머리를 쓰다듬는것 같았을 것이다.
『오선생!』
감격에 넘치는 가늘픈 목소리와 함께 쥐면 오그라질 듯한 은몽의 연약한 몸뚱이가 오상억의 품안으로 파고 드는 것이었다.
『고맙습니다!』
『은몽씨!』
『고마워요! 고마워요!』
여자란 항상 은혜와 애정을 혼동하는 습관을 가진 동물이라고 ── 이것은 또 어느 대중소설가의 전매특허가 되어 있는 문구라던가.
은몽도 바로 그런가보다. 오상억 자신의 목숨보다도 은몽의 생명을 더 한층 아끼겠다는 마치 염시(炎詩)와도 같이 타오르는 오상억의 말을 듣는 순간, 공포와 절망의 바다속으로 떨어졌던 은몽으로서는 기쁘고 고맙고 황송하다기보다도 그는 저도 모르게 이 어여쁜 부처님에게 끝없이 깊고 한없이 높은 애정의 느낌을 느꼈을 것이다.
『은몽씨! 나는 앞으로 은몽씨를 위해서는 어떠한 위험도 깨닫지 못하는 맹목자(盲目者)가 될것 같읍니다. 아아, 요 눈! 용 코! 요 입!……』
그러나 그 처럼 열정적인 오상억의 말과는 정반대로 그의 싸늘한 얼굴에는 하등 이렇다할 아무런 표정도 보이지 않는다.
은몽은 머리를 오상억의 가슴에 파묻으면서 이젠 저도 저도 아무런 『 , 두려움도 느끼지 않아요! 오선생이 저를 이 처럼…… 저는 영원히 이 품안에서 저 저릿저릿한 해월의 칼날을 피할테야요.
피난소(避難所), 피난소, 이 품안은 나의 피난소!』
어린애 처럼 아양을 일수 잘 부리는 주은몽을 오상억은 비로서 발견했다는 얼굴로 절반은 비웃는 듯이
『은몽씨의 애인 김수일씨 ── 아니 유불란씨가 이 광경을 엿본다면 저윽이 걱정하리라, 분개하리라.』
그러면서 은몽의 몽글몽글한 양어깨를 두손으로 슬그머니 떠밀어 의자에 앉히었다.
은몽은 아무 대답도 없이 눈물 어린 얼굴에 원망의 빛을 띈 눈동자로 오상억의 어여쁜 얼굴을 뚫어질 듯이 쏘아보는 것이다.
김수일과 자기의 사이를 비웃는 것도 같고 질투하는 것도 같은 오상억의 어투를 은몽은 어떻게 해석하여야 할지 모르는 모양이다.
은몽은 그 때 슬그머니 말머리를 돌리며
『그런데, 오선생의 견해대로 김수일씨와 유불란씨가 정말 같은 인물일까요?』
『글쎄올시다. 그것은 다만 나의 탐정소설적 공상이고 실제에 있어서는 유불란씨 자신에게 물어 볼 수 밖에 없지요.』
『저 역시 지금와서 생각하면 그렇게 생각이 들어요.』
『하옇든 은몽씨가 나의 상상을 긍정하신다면 은몽씨는 틀림없이 김수일씨와 교재해 온 것이 아니고 유불란씨와 교제를 해온 것입니다.』
은몽은 오상억의 앞에서 한 번 더 자기자신의 이상야릇한 과거를 뉘우쳐 보이는 것이다.
『하옇든 제 일신을 오선생께 맡겼으니까 저를 이 무서운 처지에서 구해주세요. 저를 구해줄 사람은 오직 오선생뿐이예요.』
『그런 말씀을 유불란씨가 또 들으면 분개하리라. 말씀을 삼가시는게 좋을 듯 합니다.』
은몽은 다시 한번 오상억을 빤히 쳐다 보았다.
그 때까지 응접실 들창 밖에서 방안의 광경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엿보고서 있던 수상한 사나이가 슬그머니 몸을 일으켜 현관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주은몽과 유불란의 사이를 질투하는 오상억 변호사 ── 그 오상억의 질투를 달갑게 받아 드리는 공작부인 주은몽 ── 뭇 남자는 여인(麗人)의 명모(明眸)를 적시는 이슬과 같은 한방울의 눈물을 끝없이 사랑할 것이며 뭇 여자는 자기의 외로운 일신을 모든 위험으로 부터 탐탁하게 간직해 줄 수 있는 굳센 남성의 품이 무엇보다도 그리울 것이다.
무척 이지적인 듯 하면서도 화화(火花)처럼 타기쉬운 오상억의, 그때 까지 가슴속 깊이 고요히 간직해 두었던 숨은 열정을 눈앞에 발견한 주은몽이다.
상노아이가 한장의 명함을 들고 「도어」를 「노크」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들어 와.』
오상억은 주은몽의 곁을 떠나 상노아이가 가지고 들어온 명함을 받아 들었다.
『유불란!……』
오상억의 목소리가 저윽이 당황해 한다.
『유불란?』
주은몽의 입술이 바르르 경련한다.
두 사람의 네줄기 시선이 불꽃처럼 허공에서 부딪친다.
두사람은 말이 없다. ── 이윽고 오상억은 자기를 가다듬고 상노아이를 향하였다.
『모셔 드려라.』
『네에 ──』
상노아이가 다시 밖으로 나갔다.
『유불란?』
주은몽의 낮으막 하고도 힘있는 중얼거림이었다. 그리고
『김수일?』
하고 의아스런 눈으로 오상억을 쳐다 보았으나 오상억은 아무런 대답도 없다.
『이선배?』
그래도 함구불언인 오상억이다.
그 때였다.
『도어』가 슬그머니 열리면서 안으로 들어서는 사나이 ── 검은 안경을 쓴 늠름한 체격을 가진 신사 ──
『앗, 수일씨!……』
총소리에 놀란 참새처럼 의자에서 발딱 일어나는 은몽이었다.
사나이는 입을 굳게 다문채 은몽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한손으로 「테이블」 귀를 잡고 간신히 몸을 의지하는 은몽이었다.
세사람은 돌부처 처럼 움직일줄을 모른다. ── 그것은 마치 낡은 필림이 끊기기 바로 직전 그 순간까지 어지럽게 움직이고 있던 「스크린」 위의 인물들이 일순간 발바닥이 얼어붙은 듯 모든 활동을 중지해버리는 그와같은 광경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사나이는 한걸음 선뜻 은몽의 앞으로 다가 서면서 은몽씨 무엇보다도 『 , 먼저 이번 부군께서 당하신 무참한 봉변에 대하여 뭐라고 조사조차 여쭐말씀이 없읍니다. 은몽씨의 비탄은 지상으로 여러번 읽었읍니다. ──』
정중한 조사였다.
『수일씨!──』
은몽은 자력에 끌리는 쇠부스러기와도 같이 앞으로 쓰러지려는 상반신을 간신히 뒤로 잡아 당기며
『수일씨는 왜……』
하고 다음말을 잇지 못한 채 그 어떤 격정에 휩쓸려 버리려는 자신을 간신히 붙들면서
『저를 미워하세요?……수일씨는 저를 원망하시겠지요.』
자기가 뱉은 이 한마디는 새로운 감격을 가지고 자기의 고막을 흔드는 것 같았다.
눈물이 포윽 쏟아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사는 아무 대답도 없다. 은몽은 숙였던 머리를 반짝 들며
『그리고 수일씨가 저 유불란씬줄은……그리고 이선배 ── 모든 것이 꿈 같아요. ……수일씨는 왜 저를 속이시고 ──』
은몽은 잠깐 말을 끊었다가
『모든 것이 꿈 ── 악몽 같읍니다! 깊고 깊은 의혹의 「래빈스(迷宮[미궁])」를 걷고 있는 것 같아요. 아아, 수일씨!──』
은몽은 옆에 오상억이 서 있는 것도 잊어버린 듯 돌연
『아아!』
하고 울음섞인 목소리로 외치면서 사나이의 몸뚱이에 매어 달렸다.
『저를 구해 주세요! 저를 이 무서움으로부터 구해 주세요!』
은몽은 사나이의 두팔을 잡아 흔들면서 조금 아까 오상억에게 한말과 똑같은 말을 거듭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나이는 그 때 은몽의 달삭거리는 양어깨를 한번 다사롭게 쓰다듬었다 놓으면서 이 집 주인 오상억을 향하여 몸을 돌리며
『인사가 늦었읍니다. 유불란이 올시다.』
『오상억입니다. 오시느라고 수고가 많았읍니다. ……앉으시지요.』
권하는대로 유불란은 의자에 걸터 앉으며 은몽씨를 위하여 많은 『 힘을 써 주신다는 말씀, 외람스럽습니다마는 일개 우인으로서 경하하여 마지않습니다.』
『황송한 말씀 듣기에 대단히 거북스럽습니다.』
『── 더구나 △△일보에 발표하신 글을 읽고나서 오형을 존경하는 마음 은근히 깊어 졌읍니다.』
『황송스러운 말씀 거듭 듣기에 죄송스럽습니다.』
두사람의 대화는 지극히 겸손하였다. 그러나 서로서로 상대자의 가슴 속을 꿰뚫어 보고저 하는 눈초리 ── 그 명석한 두뇌로 말미암아 일조일석에 민중의 영웅이 되어 버린 청년 변호사 오상억과 명탐정이란 이름을 세상에 날려오는 노련한 유불란 ── 그들은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으며 무엇을 궁리하고 있을까?
더구나 천하의 미인 공작부인을 싸고도는 두 사람의 상극된 감정 ── 두 사람 사이에는 금시라도 불꽃과 같은 감정의 부딪침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실상 오형의 그 놀라운 상상력에는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읍니다. 따라서 지금 무서운 위험에 빠져있는 은몽씨를 구할 사람은 오직 오형 밖에 없으리라고 ── 이것은 △△일보에 게제된 오형의 글을 읽는 순간 느낀 거짓 없는 나의 질투심의 부르짖음이었다는 사실을 솔직히 고백하는 바입니다.
이것은 단지 나 혼자의 과찬이 아니라, 민중의 부르짖음입니다. 더구나 은 몽씨 자신까지 오형을 믿고 위험을 무릎쓰고 이와같은 심야에 단신 오형을 찾아온 그 외로운 심정을 저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형의 굳센 품안은 은몽씨에게 있어서 가장 탐탁한 피난소일 것입니다. ──』
독자 제군이여. 제군은 아까 안개 내리는 들창 밖에서 이 응접실 안에서 오상억과 주은몽 사이에 벌어졌던 광경을 엿보고 섰던 사나이가 바로 이 유불란이란 것 쯤은 필자의 설명 없이도 가이 짐작하리라고 믿는다.
그리고 제군은 아직도 기억하리라. 아까 공작부인이 오상억의 품안에 매어 달려서
『이 품안은 나의 피난소, 피난소!』
하고 부르짖던 말을 기억하리라.
유불란은 지금 은몽의 앞에서 그와 똑같은 말을 오상억에게 던졌다.
그러나 제군은 유불란을 야비한 사나이라고 단정하지는 말지어다. 어째 그러냐고? 독자여! 너무 조급하지 말라! 다만 이 소설을 끝까지 읽어 주기를 바랄 뿐이다.
그것은 하옇든 유불란이 뱉은 이 한마디는 확실히 오상억과 주은몽을 극도로 당황하게 하였다.
유불란씨를 지금까지 『 신사라고 믿었던 나자신을 후회할 뿐입니다.』
하고 오상억은 그때 어디선가 자기들을 엿보고 있었던 유씨를 은근히 비난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직업을 오형께서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데서부터 나온 불평이라고 생각합니다.』
『네 잘 알겠읍니다. 유불란씨는 세상이 인정하는 명탐정이시니까. ──』
점점 격해가는 두사람의 감정이다. 사나이 둘에 계집 하나 ── 그것은 세계에서 나 평화를 멀리하는 한개의 비극의 요소일 것이다.
그 때 상노아이가 한장의 명함을 들고 들어왔다. 임경부였다.
보이지않는 손 임경부는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뜻하지 않은 진객을 눈앞에 발견하고
『허허 유불란씨가…… 이게 웬일입니까?』
하고 오상억과 주은몽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오래간만입니다 임경부 ──』
정중한 태도로 임경부에게 앉기를 권하는 유불란의 말에
『이거 참 뜻밖입니다…… 이처럼 훌륭하신 명탐정 두 분이 사이좋게 앉아 있을 줄은 참.』
『명탐정 한 분은 또 빼놓으셨군요.』
『하하, 나야 어디……』
『임경부께서는 너무 겸손하셔서 ──』
임경부는 잠깐 말을 끊었다가
『그런데 유불란씨는 이번 사건에 관해서 무슨 단서를 잡으셨읍니까?』
『임경부께서 잡지 못한 단서를 제가 어떻게……』
입맛이 쓰다는 임경부의 얼굴이었다.
『그러면 △△일보에 게재된 오상억씨의 글을 읽었읍니까?』
긴장하는 일동 ── 더구나 은몽의 두 눈동자가 반짝하고 빛난다.
『읽었읍니다.』
『오상억씨의 풍부한 상상력과 치밀한 과학적 두뇌를 선망할 따름입니다.』
『그러면 오상억씨의 글 전체를 인정하신다는 말입니까?』
『네 ── 한점도 사실과 어그러짐이 없었읍니다. 』
『그러면 유불란씨는 대체 무슨 이유……』
그러면서 임경부는 상반신을 바싹 유불란에게로 내밀었다.
대체 어떠한 이유로 『 일인 삼역이라는 ── 마치 탐정소설의 주인공과 같은 역활을 했는지?…… 직접 유불란씨 자신의 입으로 설명해 보시요.』
그러나 유불란은 묵묵히 앉아있을 뿐이다.
『변명을 하시요. 오상억씨의 글이 지금 어떻게 유불란씨를 불리한 입장에 세웠는가 쯤은 유불란씨 자신이 잘 알 것이라고 믿는바이요.』
그래도 유씨는 은몽의 얼굴만을 물끄러미 쳐다볼 뿐이다.
『어째서 화가 김수일이란 가명으로 은몽씨와 교제해 왔으며 어째서 이 선배는 끝끝내 자기의 정체를 감추지 않으면 안되었던가? 이 모든 의문에 대하여 유불란씨는 어디까지든 변명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
『그렇습니다. 어디까지든지 나자신을 변명하지 않으면 안될 지극히 불리한 입장에 서 있다는 것을 나는 누구보다도 통절히 느끼고 있는 것 만은 사실입니다. ── 그러나 나의 변명이 얼마나 임경부를 만족시킬런지, 다만 그것만이 마음에 걸려서……. 오늘밤 임경부를 먼저 찾아뵙지 않고 오상억씨를 찾아온 것도 실상은 나의 변명을 오상억씨라면 혹시 이해해 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으로 였읍니다.』
임경부는 입가에 가벼운 조소의 빛을 띄우며
『하옇든 이야길 하여 보시지요. 이해를 하던 못하던 ──』
불쾌하기 짝이 없다는 임경부의 표정이다.
『── 무엇보다 먼저 내가 왜 김수일이란 가명으로 은몽씨와 교제를 했는가? 이 점을 설명하려면 탐정 유불란이란 사람의 취미, 일상생활 기타 모든 점을 종합해서 생각하지 않으면 안될 문제입니다. 오상억씨도 이미 그 글에서 언급한바 있지만 나의 일상생활 ── 더구나 나의 탐정적 취미 ── 나는 나 자신이면서도 때때로 나 이외의 인물을 모방하는데 무한한 흥미를 가집니다. 그것은 다만 인물의 외관뿐만 아니라 그 인물의 내적 생활(內的 生活) ── 성격이라든가, 취미라든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뭐 사람이 지니고 있는 분위기까지도 모방하지요. 「지킬」박사와 「하이드」씨가 자연 발생적 이중 인격자라면 나는 인위적인 이중 인격자입니다. ── 그렇습니다.
내가 미모의 무희, 공작부인과 ××개인전람회에서 서로 알게 된 것은 바로 내가 화가로서의 생활을 얼마 동안 계속하고서 결심한 그 즈음이었읍니다.
누구한테도 그러하듯 나는 완전한 한개의 화가 김수일로서 나자신을 공작 부인께 소개하였던 것입니다. ──』
유불란은 잠깐 말을 멈추고 어떻게 설명하면 상대방을 충분히 이해 시킬 수 있는가를 생각하다가 다시 계속하였다.
『── 물론 처음엔 그저 가벼운 의미에서 잠깐 만났다 곧 헤어지는 사람 가운데 하나로서 공작부인을 대하였읍니다마는 ──」
하고 얼굴을 주은몽에게로 돌리며 임경부야 듣건말건, 은몽씨 당신 좀 내 말을 똑똑히 들어주시오, 하는 투로
『── 그러나 나는 얼마지나 실로 의외의 사실을 발견하였던 것입니다.
── 세상의 애인( ) 공작부인 주은몽씨가 나를 따르고 나를 사모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읍니다. 은몽씨!』
유불란은 한층 어조를 높여서
『당시의 나로서 이 얼마나 영광이었겠읍니까! 그러나 한가지 슬픈 사실 ── 그것은 그리 고상하지 못한 직업을 가진 탐정 유불란에게 바치는 애정이 아니고 화가 김수일 ── 예술가적 아름다운 공상과 예술가적 사색과 정열과 분위기를 가진 순진하고도 쾌활한 청년화가 김수일이에게 바치는 애정인 줄을 깨달은 나의 슬픔과 낙망을 은몽씨, 당신은 감히 짐작할 수 있겠읍니까? 바늘 끝처럼 예민한 은몽씨의 예술가적 기질은 화가 김수일과 맞을지언정 탐정 유불란과는 결코 맞을리 없으리라고 이것은 단지 나자신의 추측이 아니라 어떤날 우리들의 화제가 우연히도 탐정소설에 언급하였을 때 은 몽씨, 당신은 무엇이라 말씀했었는지 기억하십니까? ── 나는 탐정소설을 즐겨 읽지마는 그것은 소설에 나오는 탐정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탐정에게 쫓겨다니는 범죄자의 말못할 사정, 호소할 곳 없는 신세 ── 온 세상을 적으로 삼고 싸우는 그 저릿저릿한 공포와 쓸쓸한 심정을 생각할 때 치밀한 두뇌와 민활한 수완을 가진 소위 명탐정이란 존재를 은몽씨는 그 예술가적 사색을 가지고 얼마나 경멸했으며 얼마나 비웃었읍니까? 나는 그때처럼 자기의 직업에 대해서 슬퍼해 본 적은 없었지요. 이것이 즉 나로 하여금 끝끝내 화가 김수일로서의 행동을 취하는 한 중대한 원인일 것입니다.
──』
사람들은 말이 없다.
『── 그래서 나는 태평동 나의 집에서 가장 가까운 서린정 「중앙 ‧ 아파 ─ 트」에다 김수일의 숙소를 정했던 것입니다. 은몽씨가 나의 사진을 한 장도 가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임경부께서는 적지않게 수상히 생각 하였겠읍니다마는 그것도 역시 어디까지든지 나 자신을 감추려는 데서 한장의 사진도 은몽씨께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
하고 그 때까지 묵묵히 귀를 기우리고 앉았던 임경부가 입을 열었다.
『어째서 유불란씨는 또 이선배란 이름을 가지고 가장무도회에 나타났는지 그 점을 정확히 설명해 보시요.』
그것도 역시 같은 동기에서 『 부터였지요. 그 점에 대해서는 나보다도 오상억씨의 글이 더 정확히 설명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파트너」
백영호씨에 대한 의리 때문에 모든 것을 저바리고 그리로 시집가려는 공작 부인에게 최후의 의향을 물어볼 생각이었지요. 그러려면 필연적으로 김수일이란 얼굴을 그대로 가지고 갈 수 없는 것이 무도회에는 유불란과 김수일의 얼굴이 같다는 것을 공작부인 앞에서 증명할 사람이 있을 것을 두려워한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이유로는 예의 이중인격 취미 ── 더구나 그것이 한국에서는 처음보는 가장 무도회라는데 자극을 받아 그런 장소에 어울릴 만한 가장을 시켜서 이번에는 놀라운 이 선배란 인물을 내세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로서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다른 사람은 혹시 몰랐다 하더라도 과언이 아니지만, 은몽씨가 이선배의 가장을 몰라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은몽씨는 이 선배를 유불란씨인줄은 몰랐을 망정 그것이 김수일이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나는 믿읍니다. 은몽씨 어떻습니까?』
하고 은몽의 얼굴을 쏘는 듯이 쳐다본 것은 오상억 변호사였다.
은몽은 잠자코 오상억을 바라보았다.
『어떻습니까 은몽씨? 김수일과 이선배가 동일한 인물이란 것을 은 몽씨만은 벌써부터 알고 있었으리라고 믿는데……』
하고 재차 묻는 오상억의 말에 은몽은 또 다시 머리를 숙이며
『저도 처음엔 몰랐어요. 그러나 화장실에서 침실까지 그이에게 안기워 올 때 저의 코를 찌른 이상한 몸냄새가 수일씨의 것인줄은 얼마 지나서야 생각이 났어요. 그러나 도저히 제입으로 이선배와 김수일씨가 같은 인물이란 말은 어떻게……』
『그러면 김수일씨를 위해서 아직까지 잠자코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려?』
임경부의 불만이었다.
그러나 은몽이 아무 대답이 없는 것을 보고 임경부는 유불란을 향하여
『그러면 유불란씨가 ── 아니 이선배가 무도회장을 탈출하여 끝끝내 자취를 감추어 버린 것도 오상억씨의 추측과 같이 유불란과 이선배,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유불란과 김수일 이가 같은 인물이라는 사실을 감추려고 한 때문입니까?』
『그렇습니다. 오상억씨의 상상과 조금도 어그러짐이 없읍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이유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 두겠읍니다. 내가 그 처럼 경찰의 맹렬한 추격을 받아 가면서 까지 끝끝내 자취를 감추었나는 것에는, 그리고 지금까지 일인삼역이라는 사실을 숨겨두고 자한 이면에는 대단히 외람스러운 수작이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설명해 드리지 못하는 무레를 용서해 주십시요.』
『음 ──』
하고 임경부는 한번 신음한 후에
『그러면 거기에는 무슨 중대한 이유가 숨어 있다는 말씀이지요?』
『아니올시다. 숨어있을 것 같아서 하는 말입니다.』
『그럼 무슨 단서를 잡았다는 말입니까.』
『아니올시다. 잡을 것 같아서 하는 말씀입니다.』
『음 ── 하옇든 사건이 이만큼이라도 진전을 본 것은 오상억 변호사의 공로라는 사실과 사건을 이처럼 복잡하게 하고 경찰당국과 일반 민중을 이처럼 속여온 책임은 유불란씨에게 있다는 것만은 기억해 두셔야 겠읍니다.』
『네 잘 알아 들었읍니다. 거기 대한 책임은 이 사건을 하루바삐 해결하므로써 당국과 아울러 전 한국 민중에게 사죄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
유불란은 그 때 오상억과 은몽을 한번씩 쳐다본 후에
『그러나 오상억이라는 호적수(好敵手)가 본격적으로 사건에 손을 댄다면…… 임경부, 정신을 똑똑히 차려야 합니다. 이러다가는 결국 사건의 공로자라는 지위는 임세훈 경부나 유불란 탐정을 무시하고 오변호사께로 옮아갈 것입니다. ── 더구나 공작부인 주은몽을 위해서는 전 생명을 바쳐서라도 발을 벗고 나서겠다는 것이 오상억씨의 의향인 듯 싶은 지금에……』
동서고금을 통하여 명작에 나오는 명탐정들은 거의 다 연애를 모르는 글자 그대로의 목석같고 기계같은 초인적(超人的)인물이다.
그러나 유불란 탐정만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보통 사람과 같이 연애할 줄 알고 보통사람과 마찬가지로 질투할 줄 아는 말하자면 피가 도는 인간이다.
허나 이처럼 노골적으로 은몽과 오상억 사이에 관심을 두는 것은 처음이다.
『유불란씨는 아까부터 나와 은몽씨의 사이를 너무 과도히 신경을 쓰시는 모양 같습니다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너무 교양없는 사람들의 취할 태도가 아닌가 싶습니다. 말씀을 좀 삼가시는게 어떻습니까?』
그러나 사람들은 유불란씨의 답변만을 듣고 있을 여유를 갖지 못했다.
바로 들창을 등지고 앉았던 은몽이 무엇에 놀랐는지 「흑!」하고 숨을 드려 마시며 갑자기 의자에서 벌떡 일어서서 휙하고 뒤를 돌아다본 때문이다.
흐느적 흐느적 움직이는 「커 ─ 텐」!
치렁치렁하게 늘어진 「커 ─ 텐」이 물결처럼 흐느적거리지를 않는가?
사람들은 불현 듯 그 어떤 불길한 예감에 온몸이 으스스함을 느꼈다.
『바람도 없는데 「커 ─ 텐」이 왜 움직일까?』
그런 의혹이 일시에 사람들의 가슴을 꽉 부여잡는다.
그 순간, 의자에서 벌떡 일어선 유불란 탐정이
『누구냐?』
하고 고함을 치면서 비조처럼 재빠른 솜씨로 「커 ─ 텐」을 헤치고 들창을 휙하니 넘어 나갔다.
들창 밖은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안개의 담벽이다.
오상억과 임경부도 들창 밖을 내다보았다.
『누구냐?』
정원을 헤매는 유탐정의 거치른 목소리가 안개를 뚫고 들어온다.
그 때였다.
『앗!』
하고 외치는 은몽의 째지는 듯한 목소리가 오상억과 임경부의 등뒤에서 떨려졌다.
『왜 그러시우?』
오상억과 임경부가 그렇게 고함을 치면서 일시에 뒤를 돌아다 보았을 때
『붉은 봉투가 ── 그 놈의 붉은 봉투가 ──』
하고 은몽은 그 때까지 자기가 걸터 앉았던 의자의 등을 가리켰다.
『붉은 봉투?』
오상억과 임경부는 그렇게 반문하면서 은몽이 가르치는 곳을 바라 보았다.
『아, 봉투다! 빨간 봉투로구나!』
『해월이다! 해월의 것이다!』
한장의 주홍색 봉투가 조그마한 단도와 함께 의자의 등 ── 심노색 「비로 ─ 드」에 박혀 있지 않는가!
해월의 경고문(警告文)! 복수귀 해월의 무서운 경고문이다!
오상억은 곧 칼과 함께 주홍색 봉투를 뽑았다.
고슴도치 처럼 몸을 오그리고 바들바들 떠는 주은몽 ──
『아아 무서워!…… 무언가 등뒤에서 사람의 숨결소리가 들리기에 돌아다 보니 「커 ─ 텐」이 그처럼 흐느적 흐느적……』
새파랗게 변색한 은몽의 입술이었다.
오상억은 부리나케 봉투를 떼었다.
은몽!
내가 가장 미워하고 내가 가장 귀애하는 은몽! 가장 미워하기 때문에 너를 죽이려고 결심한 나요, 가장 귀애하기 때문에 아직도 죽이지 못하고 있는 나로다. 그러나 은몽! 나는 알고 있다. 이제 방금 오상억의 품안에서 뭐라고 아양을 부렸는가? 『이 품안이 나의 피난소, 피난소! 』하고 너는 중얼거렸다. 그러나 너의 남편 백영호가 죽은지 오늘까지 몇일인고?…… 요부!
요부! 은몽, 너는 어렸을 때부터 요부였다. 그러나 결국 너는 나를 두려워 하지 않고는 못견딜 것이다. 네가 그 처럼 영원한 보금자리로 믿고 있는 오상억의 품안이 그 얼마나 힘없는 것인가를 알 때가 오리라.
그러면 제 이차의 참극의 주인공은 누구냐? 누구냐?…… 복수귀 해월
『음!』
오상억은 편지에서 눈을 떼었다. 무서운 얼굴이다.
『나를 죽이겠다고?……』
반항심에 타오르는 듯한 오상억의 얼굴을 은몽은 미안한 듯이 바라다본다.
두사람의 시선과 시선이 그 어떤 굳은 맹세를 짓는 것 같았다.
그 때 정원으로 해월을 따라 나갔던 유불란이 돌아왔으나 아무런 수확도 없었다. 짙은 안개속 ── 해월이가 어느 구석에 숨었는지 알 길이 만무하다.
유불란도 편지를 읽었다. 아까 자기가 들창 밖에서 방안을 엿보고 있을 때 해월이도 어느 구석에서 자기와 같이 방안을 드려다 보고 있었던가? ──
『대담한 놈이다! 무서운 일이 반드시 일어나고야 말 것이다!』
유씨의 이 한마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그것은 유씨 자신만이 알 것이다.
寫眞[사진]속의 處女[처녀]
[편집]복수귀 해월이 ── 아아 그는 너무나 대담한 악마였다.
임경부, 오상억, 유불란, ── 이처럼 명성이 쟁쟁한 탐정들의 눈앞에서 해월은 마치 인도의 마술사와도 같이 나타났다 사라지지 않았는가.
해월은 대체 어디 숨어서 그 처럼 응접실 안의 광경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엿보고 있었던가? 그가 던지고간 붉은 봉투는 무참하게도 또 한사람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
이튿날 아침이다. 오전 열시 ── 태평동 유불란은 돌연 요란한 전화 소리에 눈을 번쩍 뜨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머리맡에 놓인 수화기를 들었다.
『유불란이 올시다. 누구십니까?』
긴장한 얼굴이다.
『접니다. 저예요 ──』
은몽이었다. 주은몽의 절반은 애원하는 목소리였다.
『아 은몽씨!……』
유불란은 그 순간 말문이 꽉 막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은몽씨 어떻게 이런아침에…』
하고 물었을 때 은몽은 바들 바들 떠는 음성으로
『저는 무서워서, 무서워서 못견디겠어요. 이렇게 대궐같은 커다란 집에서 정란이와 단둘이 어떻게…… 남수씨는 지금 어디론가 여행을 떠난다고 서둘러대고……』
『여행? 남수씨가 어디로 여행을 떠난답디까? 그리고 어떠한 목적으로 그처럼 갑자기?』
『모르겠어요. 가는 곳은 말리지 않고 가는 목적도 말하지 않아요. 그저 무엇엔가 대단히 흥분한 얼굴로…… 그 처럼 침착하던 사람이 오늘아침 갑자기 태도가 변했어요. ……『해월을 잡는다, 해월을 잡는다!』하고 미친 사람처럼 혼자 중얼 거리겠지요. 무엇인가 잘 알수는 없지만은 무슨 유력한 증거를 잡은 모양 같아요. 지금 마악 떠나려는 즈음인데 그렇게 되면……』
은몽이 말을 채 맺기전에 전화의 목소리가 바뀌었다.
『선생님! 유선생님이시죠? 저는 정란입니다. 처음 뵙는 선생님께 이처럼 전화로 실례 합니다마는, 오빠가 어디론가 여행을 떠난다고요. 그렇게되면 저의 집에는 남자라고는 한사람도 없지않아요. 어떻게 우리들끼리…… 그래서 생각다 못해 어머님이 유선생께 전화를 거는거랍니다. 선생님께서 어머님을 조금이라도 생각하신다면 말씀이야요. 오빠가 여행으로부터 돌아오는 날까지 저의 집에 오셔서 우리들을 보호해 주세요. 어머님을 한시 바삐 구해 주세요! 이대로 그냥 두었다가는……』
은몽과 정란이가 지금 전화통에 매어 달리듯이 애원하는 광경이 눈앞에 보는 듯이 떠오르는 유불란이었다.
『정란씨 잘 알았읍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가서……』
유불란은 잠깐동안 말을 끊고 정신을 가다듬으려는 듯 눈을 감았다 다시 뜨며
『그런데 정란씨! 제가 갈 때까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남수군을 꼭 붙잡아 두십시요. 제가 남수군을 꼭 만나야겠읍니다! 꼭 붙들어 두셔야 합니다!』
『네 네! 그러면 선생님, 지금 곧 이리로 와 주셔요!』
『십 분만 기다리십시요. 십 분 동안만 남수군을 붙잡아 두시요!』
유불란은 전화를 끊었다. 부리나케 외출복으로 갈아 입으면서 그는 마치 열병환자 처럼 중얼 거린다.
『남수가 ── 저 탐정소설가 백남수가 대체 무엇 때문에 갑자기 여행을 떠나는가……?』
아침도 못먹은 유불란이다.
삼분 후 ── 나는듯이 밖으로 뛰어나간 유불란은 지나가는 빈 자동차를 잡아타고
『삼청동, 삼청동!』
하고 외쳤다.
『이 사건에는 탐정이 너무 많은 것 같애!』
총독부 앞을 지나 삼청동을 향하여 질풍처럼 기어 올라가는 자동차 안에서 지긋이 눈을 감고 그렇게 마음속으로 외쳐보는 유불란이었다.
『── 임경부, 오상억, 백남수, 그리고 나 ── 모두 명탐정들 뿐이다!』
이윽고 자동차가 삼청동 「풀」 옆에 솟아있는 백영호씨 저택 정문 앞에서
『삑』소리와 함께 멎있을 바로 그때, 커다란 여행용 가방을 들고 마악 현관을 뛰어 나오는 백남수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 뒤를 이어 은몽과 정란이가 따라나오는 것을 보니 잠깐만 기다리라는 모양이다.
유불란은 자동차에서 뛰어내려 활기있게 현관으로 걸어 들어가며
『남수씨 오래간만입니다. 어디 여행을 떠나시렵니까?』
하고 먼저 인사를 하였다.
『유선생님……』
정란과 은몽이 반가히 맞이한다.
『아, 유불란씨입니까. 안녕하십니까 ──』
백남수의 그 흥분한 얼굴이 저윽이 당황해 한다.
『어디 여행을 가시렵니까?』
『네 잠깐 다녀올데가 있어서 ──』
『그렇습니까? 하마터면 남수씨를 놓칠번했군! 나는 나대로 또 남수씨를 꼭 만나야 할 용건이 있어서 찾아 왔는데, 여행은 어디로……』
그러나 백남수는 거기에는 대답을 피하며
『무슨 용건이십니까?』
그 때 옆에 서 있던 정란과 은몽이
『아이 좀 들어 오셔서 이야길 하셔요!』
유불란도
『과이 바쁘시지 않으시거든 ──』
하고 안으로 들어가기를 청하였다.
백남수는 잠깐동안 무엇을 생각하는 듯 주저하더니
『그럼 안으로 들어 가십시다. 그리고 나도 유불란씨에게 중대한 것을 한 가지 말씀 드려야겠읍니다. 자아 ──』
이리하여 그들 네 사람은 얼마 후 이층 응접실에 마주앉는 몸이 되었다.
『유불란씨!』
남수는 마주앉아 홍차를 단숨에 꿀꺽꿀꺽 드리키며 유씨를 쳐다보았다.
『네? ──』
『유불란씨는 대체 이 사건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떻게 생각하시다니요……』
유불란은 자기의 무능을 스스로 부끄러워 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남수에게로 향하였던 시선을 옆에 앉은 은몽에게로 옮기었다.
『그러면 아직 아무런 단서도 잡지 못하였다는 말씀입니까?』
『남보기에 대단히 부끄러운 일입니다만 아직 아무런 단서도 ──』
유불란은 무안한 듯이 얼굴을 붉혀 보이었다.
남수는 그 때 또 한번
『유불란씨!』
하고 힘있게 불렀다.
『왜 그러시우?』
『이 사건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무슨 유력한 증거물을 발견했읍니까?』
『그렇습니다! 실로 이상야릇한 한가지 사실을 발견했읍니다. ── 다시 말하면 그렇게도 착잡 다단한 이 사건이 오상억군의 글로 말미암아 ── 즉 이선배와 김수일과 유불란씨가 동일한 인물이라는 사실이 증명된 지금에 이르러서는 사건은 무척 단순화 하여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주은몽씨에게 복수하려는 해월만을 체포하면 되었으니까 ── 그러나 여기 이상한 사실이 하나 발견 되었읍니다.』
『무엇입니까?』
세 사람의 극도로 긴장한 얼굴, 얼굴, 얼굴 ── 그러나 그 때 아랫층에서 초인종 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젊은 어멈이 한 장의 명함을 들고 들어왔다.
저 관철동에 계시는 『 , 오선생님하고 또 한분 ── 이런 분이 찾아 오셨읍니다. 』
명함에는
『혜성전문학교 교장 황세민』
이라 씌어 있었다.
이윽고 젊은 어멈에게 안내를 받아 금테 안경을 쓴 오상억 변호사와 육십이 될락말락한 혜성전문학교 교장 황세민씨가 들어왔다.
황세민씨는 한번보아 대단히 온화한 늙은이다. 머리털이 절반 이상 희었고 그 허엽스레한 머리털과 노동자처럼 햇볕에 탄 거므틱틱한 얼굴이 유달리 사람들의 시선을 빼았는다. 그거므틱틱한 얼굴은 전문학교 교장으로서는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그러한 인상을 사람들은 받았다.
백남수의 흥미있는 화제가 이 두사람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중단 되었으므로 사람들은 적지 않게 귀찮다는 얼굴로 오변호사와 황교장을 맞이하였다.
오상억은 일동에게 황세민씨를 소개 하였다. 황세민씨는 특히 주은몽과 정란을 향하여 허리를 굽히며
『백영호씨의 무참한 봉변에 대하여서는 이 황세민, 무어라 말씀 드려야 할지 모르겠읍니다.』
『일부러 이처럼 찾아 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어서 앉으시지요.』
은몽이 권하는대로 황교장은 의자에 걸터 앉으며 다시 한번 은몽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 때 오변호사가 황교장을 대신하여 입을 열었다.
『오늘 황교장께서 이처럼 찾아오신 것은 돌아가신 백선생과 황교장 사이에 약속되었던 칠십만원 제공 문제에 관하여……』
하고 고문 변호사로서의 자격을 차렸다.
『네 실상은 ──』
하고 이번에는 황교장이 말을 받아
『실상은 이처럼 불행중에 계시는 요즈음, 이런 문제를 가지고와서 여러분을 귀찮게 하는 것은 저의 본의가 아니옵니다만 사정이 너무 촉박하여 졌으므로 한시 바삐 ──』
하고 은몽과 남수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네에 ──. 물론 그러한 의사를 그이가 생전에 표시한 것이니까 고인의 의사를 존중하는 의미에서도 하루 바삐 그 문제를 해결해 버리는 것이 저도 좋을 듯 싶읍니다만 ──』
하고 은몽은 남수의 표정을 살피려는 듯 그리고 얼굴을 돌렸다.
『네에……잘 알아 듣겠읍니다. 그런데 ──』
하고 남수는 한번 기침을 한 후에
『아버지가 그런 의사를 표시한 것만은 사실인 듯 싶으나, 그러나 아직 거기 대한 법적수속 같은 것은 없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저는 최초부터 칠십 만원 제공 문제에 극력 반대하여 온 사람입니다. ──』
『그러면? ──』
하고 긴장한 얼굴빛으로 자기를 쳐다보는 황교장의 시선을 무시해 버리려는 듯 남수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의사를 어디까지나 존중해야만 될 나의 처지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만은 아무리 아버지의 의사라 할지라도 저는 반대입니다. 아버지께서 어떠한 심경의 변화가 생겨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읍니다만 아직 저로서는 사재의 거의 전부를 그런 사회사업에 바칠 그러한 기특한 심경의 변화는 아직 가져본적이 없으니까요.』
『……』
『그러니까 대단히 매정스런 말씀입니다만 이 문제만은 이대로 중단된 것으로 알아 주시면 고맙겠읍니다.』
칼로 베는 듯 딱 잡아떼는 남수의 말에 은몽은
『그래도 고인의 의사를 그렇게 무시하면 어떻하세요?』
하는 것을
『은몽씨는 잠자코 계십시요. 남철(南鐵)형님이 실종선고(失踪宣告)를 받은 이상 유산상속권은 이 백남수에게 있으니까 ── 도대체 아버지가 칠십 만원이라는 거액의 돈을 사회사업에 바치겠다고 한 그 심경을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괴사이지요. 하옇든 황선생과 아버지 사이에 어떠한 의사의 교환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법적화 하지않은 이상 저는 이 문제를 그냥 진행시킬 수 없다는 것을 짐작해 주시면 고맙겠읍니다. ──』
그 처럼 한점의 찬의(讚意)조차 보이지 않고 냉냉하게 잡아 떼는 남수의 말에 늙은 황세민 교장은 다시 뭐라고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유감입니다.』
옆에 앉았던 오상억이 은근히 황교장을 위로하였다.
『할 수 없읍니다. 혜전을 폐교할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지요.』
풀이 죽은 황교장이었다.
그 때 남수는 팔뚝 시계를 드려다 보며
『그런데 오군, 마침 잘 왔네.』
하고 말머리를 돌린다.
『왜?』
『유불란씨와 자네에게 한가지 보여줄 물건을 발견 하였단 말이야.』
『뭐?』
오상억과 함께 유불란, 정란, 은몽이, 모두 상반신을「테이블」위로 내밀었다.
남수가 대체 무엇을 가지고 그렇게 흥분했던가?……사람들은 일단 중단되었던 남수의 이야기가 다시 이어졌음을 기뻐 하였다.
『대체 뭐길래 그렇게……』
은몽은 대단히 안타까운 모양이다.
『이것을 보십쇼!』
남수는 그 때 「포켙」에서 수첩을 꺼내 들더니 그 수첩사이에 끼어 있던 한장의 사진 ── 명함판의 조그마한 사진을 꺼내어 「테이블」위에 놓았다.
『이 사진을 자세히 드려다 보십시오!』
사람들의 시선이 일시에 사진위로 쏠린다. 그러나 황세민 교장만은 아무런 흥미도 느끼지 않는 듯 멍하니 들창 밖을 내다볼 뿐이다. 폐교당할 혜전의 최후를 황교장은 슬퍼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사진을 드려다 보자마자
『이것이 웬거요?』
『어디서 났어요?』
『대체 이 사진을 어디서……』
하고 저마다 물어보는 것이다.
그것은 머리를 길게 땋아 느린 시골처녀의 상반신이었다. 얼굴이 갸름하고 눈썹이 길고 그러나 상당히 오랜 사진임에 틀림이 없는 것은 사진 빛이 부옇게 퇴색한 것을 보더라도 넉넉히 짐작할 수 있었다.
저번날 밤 ── 복수귀 해월이가 백영호씨를 죽이던날 밤, 이층 미술품 수집실에서 얻은 사진 ── 조그마한 『로켓트』에 들어있던 그 사진과 똑 같은 인물이 아닌가?
『음 ──』
유불란은 사진을 손에 들고
『적어도 이십년 전, 아니 근 삼십년 전에 찍은 사진이다. 나이는 열 아홉 아니면 스물가량. ──』
『그렇습니다. 지금 임경부가 가지고 있지만, 저번 수집실에서 얻은 사진도 이것과 똑같은 사진이었지요.』
『그런데 이것을 어디서 얻으셨어요?』
은몽은 복수귀 해월의 출현을 불현 듯 예기함인지 입술을 바르르 떨면서 남수의 눈동자를 매섭게 쳐다보았다.
『오빠, 대관절 이것이 어디서 났어요?』
정란도 무서운 모양이다.
그 때 비로소 황세민 교장도 문제의 사진을 목을 늘여 넘겨다 보았다.
그러나 그 순간 ── 다른 사람은 모르리라. 유불란만은 흘깃 넘겨다보는 늙은 황세민 교장의 얼굴에 이상한 충동의 빛이 일순간 떠올랐다 사라지는 것을 눈치 빠르게 보았던 것이다.
허나 물론 모르는 척 하는 유불란이다.
『어디서 주웠는지, 오빠 빨리 이야길 좀 해봐요! 왜 그리 잠자코만 있는 거예요?』
그러나 남수는 무엇인가 이야길 하려다가 가끔 입을 꽉 깨물어 버리곤 하는 것이었다.
『백군 이야길 해보게나! 어디서 주웠는지…… 그리고 군은 이 사진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는 말인가? 』
하고 캐묻는 오상억의 말에
『어디서 주웠는지 미안하지만 이 자리에서 그것을 이야기 할 수는 없네.
그리고 이 사진이 누군지, 그것은 나도 모른다. 그러나 사흘 후면 이 사진이 누구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사흘 후, 내가 다시 여행으로 돌아오는 날, 적어도 이 사건에 관한 비밀의 절반은 해결될 것이라 믿네.』
그리고 남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러면 오군 특히 유불란씨! 제가 돌아오는 날까지 은몽씨와 정란을 잘 돌바 주시기 바랍니다.』
남수는 황급한 걸음으로 뛰어나갔다.
어디론가 알 수 없으나 탐정소설가 백남수가 여행을 떠난다고 하면서 흥분한 얼굴로 응접실을 뛰어나간 후, 사람들은 걷잡을 수 없는 공허함과 아울러 남수가 남겨 놓고간 흥분으로 말미아마 일순간 어지러운 공기속에서 서로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백남수의 그 미친듯한 흥분은 사람들로 하여금 사건이 무척 촉박하여 졌다는 감을 저마다 느끼게 한 것만은 감출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면 저는 이만 실례 하겠읍니다.』
하고 그 때, 늙은 황세민 교장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은몽은 황교장을 현관까지 바래다 주고 다시 들어 와서 남수가 여행으로부터 돌아오는 날까지 죄송스러운 부탁이나마 자기와 정란을 위하여 며칠 동안 자기 집에 같이 묵어 주기를 청하였다.
정말 유선생님이 저희들과 『 같이 계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유선생님 그렇게 해 주세요!』
정란도 은몽의 말을 지지하였다.
이리하여 결국 유불란과 오상억 두 사람이 은몽과 정란의 위험을 보호하고자 그 날 밤부터 이 집에서 유숙하기로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저는 잠깐 집에 다녀 오겠읍니다.』
하고 유불란은 오변호사와 정란과 은몽을 응접실에 남겨 둔채 밖으로 뛰어 나왔다.
밖으로 뛰어 나온 유불란은 삼청동 긴 골목을 안국동 쪽을 향하여 달름박질 치는 것이다.
얼마 동안 달름박질 치던 유불란은 안국동 네거리에 다다르자 발걸음을 우뚝 멈추고 네거리에서 종로쪽으로 걸어 가는 황세민 교장의 늙은 뒷 모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황교장은 그런 줄도 모르고 종로 네거리를 향하여 주첨주첨 걸어 간다.
오정이 바로 지난 종로 네거리 ── 유불란은 약 오십 「미 ─ 터」가량의 간격을 두고 황교장의 그림자를 놓치지 않고 따르는 것이다.
황교장은 그때 백화점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잠깐 동안 주저하는 모양이더니 마침내 무엇을 생각했는지 머리를 끄떡끄떡하면서 백화점 안으로 들어간다.
유불란도 따라 들어갔다.
황교장은 심각한 표정으로 머리를 기우리면서 일층, 이층, 삼층, 사층, ── 그는 마침내 식당으로 들어가서 저편 들창 옆 식탁에 자리를 잡고 「런 치」를 청한다.
오정을 바로 지난 이「M데파 ─ 트」의 식당은 마치 수라장처럼 어지럽고 분주하다.
유불란은 그때 요행으로 황교장의 바로 뒷 식탁이 비는 것을 보고 달려갔다. 황교장과 등을 지고 자리를 잡은 유불란이었다.
이윽고 유불란은 「커 ─ 피」를 마시고 황교장은 「런치」를 먹는다.
그러나 유불란에게는 이 늙은 황세민 교장의 태도가 어딘가 이상하였다.
그는 「런치」를 먹으면서 그 「런치」그릇 앞에 놓인 무슨 물건을 유심히 들여다 보고 있다.
유불란은 틈을 타서 머리를 기웃하고 황교장의 어깨위로 그가 들여다 보는 물건을 넘겨다 보았다.
『시계!』
커다란 회중시계였다.
그러나 유불란은 거기서 회중시계만을 본 것이 아니다. 회중시계 외에 또 한가지 물건!
『사진이다!』
그렇다. 그 커다란 회중시계 뒷두껑 안에 붙은 한장의 사진 ── 머리를 길게 땋아느린 스물안팎의 처녀 ── 얼굴이 갸름하고 속눈썹이 길고……
그것은 두말할 것 없이 조금아까 백남수가 보여준 그 사진과 똑같은 인물이었으며 복수귀 해월이가 미술품 수집실에 떨어뜨리고 간 그 사진의 인물이 아닌가?
아까 황교장이 남수가 「테이블」위에 내놓은 문제의 사진을 보던 순간, 다른 사람은 몰랐으나 유불란만은 황교장의 얼굴에 나타난 이상한 충동의 빛을 보았다.
『그러면 백남수가 주웠다는 문제의 사진은 대체 누가 가지고 있던 것인가?……』
第二次[제이차]의 慘劇[참극]
[편집]황교장이 가지고 있는 커다란 회중시계 뒷뚜껑에 붙은 사진속의 처녀와 남수가 어디선가 주웠다고 하는 문제의 사진 속의 처녀와 그리고 해월이가 미술품 수집실에 떨어뜨린 사진속의 처녀가 모두 똑 같은 인물이라는 실로 이상야릇한 사실을 안것은 유불란이었다.
유불란은 거기서 더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없는 초조와 흥분을 한아름 품고 황세민 교장을 식당에 남겨둔체 백화점을 뛰어 나왔다.
『이상한 일이다! 똑 같은 인물의 사진을 해월이도 가지고 있고 황세민도 가지 그 있고, 그리고 또 남수가 주웠다는 사진은 대체 누가 가지고 있던 것일까?……』
초하(初夏)의 종로네거리가 유불란 탐정의 눈에는 마치 황당무개한 백일몽(白日夢)의 풍경처럼 비치는 것이었다.
『해월과 황세민? 해월과 황세민?』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복수귀 해월과 황세민 사이에 있어야만할 그 어떤 관련성의 실마리를 잡을 수가 없었다.
십년 전 아메리카 『 , 「 」「샌프란시스코」로부터 삼백만원이란 거액을 품고 표연히 귀국한 황세민 —— 그리고 삼백만원이란 대금을 모두 교육사업에 던진 황세민 —— 그러나 그와같은 거액이 어디서 들어왔는지를 밝히지 않는 황세민 —— 특별히 영어와 중국어에 능통했으나 남달리 높은 교육을 받은 사람 같지도 않아 보이는 황세민 —— 얼굴이 노동자처럼 거무틱틱 하니 볕에 찌들은 황세민 —— 남수의 말에 의하면 사회사업 같은데는 꿈도 안꾸던 백영호씨로 하여금 혜성전문학교를 위하여 칠십만원 제공문제를 승락시켰던 황세민 —— 그리고 복수귀 해월의 것과 똑같은 사진을 시계 뒷뚜껑에 붙여 가지고 다니는 황세민 ——』
깊고 깊은 의혹의 굴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자기를 가다듬으며 유탐정은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타고 효자동 혜성전문학교를 향하여 쏜살같이 몰아 댔다.
이윽고 혜전 현관 앞에서 「택시」를 내린 유탐정은 황교장과의 면회를 수부에 청하였다.
『교장선생님은 아침에 외출하셔서 아직 돌아오시지 않았읍니다.』
하는 늙은 소사에게
『그렇습니까. —— 그러나 오후 한 시에 황교장과 교장실에서 만나기로 약속이 되었었는데 — 나는 이러한 사람입니다.」
하고 유탐정은 얼토달토 않은 가짜 명함을 꺼내 소사에게 주면서
『한시까지는 아직 십분이 남았으니까, 하옇든 좀 기다려 보기로 하지요.』
『네 그럼 이리로 들어 오시지요.』
소사는 의아스런 눈치로 유탐정을 쳐다보면서 교장실과 접한 응접실로 그를 인도하였다. 만일 교장실과 응접실이 접하여 있지 않았던들 유탐정은 어떠한 수단을 써서라도 교장실에서 황교장을 기다렸을 것이다.
그러나 응접실과 교장실이 문 하나 사이에 두고 서로 통하게된 사실을 안 유탐정은 인도하는 대로 응접실 의장에 유유히 걸터 앉아서 황교장을 기다리는 것이다.
이윽고 소사가 차를 가져다가 유불란씨에게 권하고 다시 밖으로 나가자마자 그는 벌떡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교장실로 통하는 「도어」를 열고 옆방으로 들어 갔다.
교장실로 들어 가자 그는 곧 뜰에 면한 유리창의 「커 — 텐」을 내리고
「테이블」위에 놓인 서류함(書類凾)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거기서 목적물을 발견하지 못한 유불란은 이번에는 「테이블」설합 속에서 조그마한 수금고 을 끄집어 (手金庫) 내어 그 속에 들은 편지 뭉치를 조사하기 시작하였다.
그 중에서 필적이 꼭 같은 두개의 영문(英文)편지를 골라 가지고 내용을 한번씩 읽어 본 후에 발신인의 주소 성명을 부리나케 자기 수첩에다 적어 놓고 다시 응접실로 돌아 와서 소사를 불렀다.
『황교장이 아직 안 돌아 오시니 내일 다시 찾아 오겠다고 여쭈시요.』
혜성전문학교를 뛰어 나온지 약 삼십 분 후였다.
태평동 자기 서재 암록색 소파에 누운 유불란은 이제 방금 혜전 황 교장실에서 적어 가지고 온 수첩을 물끄러미 들여다 보고 있었다.
▲ 월리엄·엔더 — 슨 ▲ 샌프란시스코·해안통(海岸通)삼백 오십 칠 번지.
『월리엄·엔더 — 슨과 황세민 교장 사이에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
월리엄·엔더 — 슨이 황세민에게 보낸 두 장의 편지의 내용을 요약해서 말하면 —— 지금 경영난에 빠진 혜성전문학교를 구하는 의미에서 약 오십만 원 가량을 돌려 달라는 황세민의 간절한 청탁을 『월리엄·엔더 — 슨』
이 완곡하게, 그러나 극히 친절한 태도로 거절하는 편지였다. 얼마 동안 쇼파에 누워서 수첩을 들여다 보고 있던 유불란은 벌떡 몸을 일으키어 「테이블」로 가서 펜을 들었다.
유불란은 펜을 놓고 초인종을 눌러 젊은 서생을 불러 들였다.
『「죤·피 ― 터」씨에게 치는 전보다. 빨리 국으로 가서 타전하여 주게.』
『네에.』
『그리고 오늘부터 사흘 동안은 삼청동 주은몽씨 댁에서 묵을테니 내게로 배달되는 중요 서신은 하나도 빼지 말고 보내 주게.』
『네 그러겠읍니다.』
서생은 전문을 가지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유탐정이 전보를 친 「「죤·피 ― 터」씨로 말하면 로스안젤스에서 변호사 개업을 하는 한편 사립 탐정으로서 이름이 높은 중년 신사이다.
로스안젤스·××스트리—트·××번지죤·피터 — 샌프란시스코·해안통 삼백 오십 칠 번지의 월리엄·엔더 — 슨과 경성 혜성 전문 학교 교장 황세민과의 관계를 상세히 보고하라.
서울·코리아 유 불 란 재작년 봄 유탐정이 여행을 하였을 때 「동양의 신비와 범죄」라는 책의 저자로서 특히 동양에 관한 범죄 사건에 유달리 흥미를 가지고 있는 이
「죤·피 ― 터」씨를 찾아 본 후부터 두 사람 사이에는 십 년 지기와 같은 친분이 맺어졌던 것이다.
그것은 하옇든 이제부터 필자는 복수귀 해월이가 연출한 제 이차 참극의 전말을 기록해야만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언제든지 그러했지만 이번에도 해월은 탐정 유불란의 바로 눈 앞에서 사람을 죽였다는 실로 불가사이한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유불란은 백남수의 말대로 그가 여행으로부터 돌아 오기까지 약 사흘 밤을 오상억 변호사와 함께 삼청동 남수의 집에서 묵었다.
그러나 아아, 그 사흘 동안이야 말로 유탐정에게 있어서는 실로 여러 가지 의미로 초조와 번민의 연쇄였다.
첫째로는 사건을 하루 바삐 해결해야 되겠다는, 말하자면 탐정으로서의 초조였고 둘째로는 한개의 연애자(戀愛者)로서의 번민이었다.
더구나 오상억이라는 새로운 경쟁자가 주은몽의 눈 앞에 나타난 이 즈음, 그리고 전과는 달라서 주은몽의 태도가 지극히 애매하여진 이 지음이 아닌가.
오상억과 어깨를 가지런히 하고 정원을 산책하는 은몽의 뒷 모양을 멀리 이층 발코니에서 내려다 보는 유불란의 초조한 가슴 속 —— 자기와 더불어 같이 하는 시간 보다도 오상억과 같이 있는 시간이 많은 주은몽이 아닌가, 조각처럼 단아한 오상억의 어여쁜 용모를 아침 저녁으로 대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유불란의 우울한 마음 —— 차라리 은몽을 눈 앞에 보지 않음이 다행이라 생각하였다.
그와 같은 초조 가운데서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마침내 사흘이 지난 날 밤 아홉시쯤해서 탐정소설가 백남수가 여행으로 부터 돌아왔던 것이다.
이것은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그 때 여행으로부터 남수가 가지고 온 보고야 말로 이 세상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비극의 하나인 동시에 우리들이 느낄 수 있는 가장 무서운 비밀의 하나 였다.
그렇다! 제 이차의 참극이 일어난 것은 백남수가 여행으로부터 돌아온 바로 그날 밤이었다.
그 날밤도 서울장안엔 짙은 밤안개가 비오듯이 흐르고 삼청동공원 일대는 그 깊고 깊은 무막(霧幕)속에서 고요히 잠들고 있었다.
그즈음 —— 이층 응접실에는 여행으로부터 돌아온 남수를 중심으로 하고 오상억 유불란 , , 은몽, 정란 —— 이 네사람이 묵묵히 앉아 있는 남수의 심각한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 오빠, 여행은 어디로 갔었어요?』
하고 정란은 물었으나 남수의 입은 통 열려지지 않는다.
『백군, 보건대 이번 여행에서 무슨 대단한 수확을 얻어온 듯 한데 —— 어떤가? 왜 그리 잠자코만 있는거야?』
하고 이번에는 오변호사가 묻는다. 아무런 말도 묻지 않고 그저 남수의 얼굴을 무섭게 쳐다보고만 있는 것은 유불란과 은몽뿐이다.
그러나 유불란은 남수의 얼굴만을 쳐다보는 것은 아니었다. 거기 앉아있는 사람들의 얼굴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그 재빠른 눈초리로 하나씩 하나씩 엿보는 것이다. 은몽의 얼굴, 오상억의 얼굴, 정란의 얼굴들을 ——
『오빠, 그래 그 사진속의 인물이 누군지 아셨어요?』
하고 재차 묻는 정란의 말에 남수는 비로서 입을 열었다.
『정란 너는 네방으로 가거라 그리고 ——』
이번에는 은몽을 향하여
『은몽씨도 자리를 잠깐 사양해 주세요.』
하고 정란과 은몽이 응접실로부터 퇴장하기를 은근히 청하였다.
『왜요 오빠! 여기 있으면 어때요?』
하고 정란은 적지않게 오빠를 나무라면서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런게 아니다. 심장이 약한 여인네들이 들어서는 안될 이야기니까 그러는 게지 —— 은몽씨 정란과 같이 잠깐만 자리를 비켜 주시요.』
이리하여 은몽과 정란은 적지않게 불쾌한 얼굴빛으로 응접실을 나왔다.
열시를 치는 괘종소리가 텅빈 복도로부터 뗑 — 뗑 — 울려온다.
창밖은 여전히 짙은 안개의 장막이다.
정란과 은몽이 밖으로 나간지 일 분 후, 남수는 사방을 한번 휘 둘러 보고 나서 비로소 묵직한 입을 열었다.
『불란씨! 오군!』
하고 부르는 남수의 굵다란 목소리는 비상하게 떨린다.
『하옇든 백군, 자네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찬찬히 이야기해 보게나.』
『음 ——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서 그것을 이야기해서 될런지 어쩔런지 나는 두려워 하네. 아직 확실한 증거를 잡지 못했으니까 단언할 수는 없네만 우리는 이 사건을 다시 한번 맨 처음부터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아, 나는 지금 그와 같은 기다란 이유를 늘어 놓을 여유를 갖지 못했단 말이야. 나는 실로 무서운 사실을 발견하였네!」
그러면 자네는 『 그 사진 속의 처녀가 누군지 알고 있다는 말이지?』
『음 —— 알지, 알고 말고! 의외의 인물, 꿈에도 생각 못했던 실로 의외의 인물이다!』
남수의 목소리는 극도의 흥분으로 말미암아 점점 커져간다. 점점 더 떨리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때였다.
복도로 통하는 「도아」가 약 한 치 가량 방싯하니 열리자 회색빛 도는 권총 뿌리가 살그머니 나타나지 않는가!
남수는 여전히 말을 계속한다.
『유불란씨, 나는 마침내 해월의 정체를 안 것 같읍니다.! 아아, 만일 나의 상상에 틀림이 없다면……』
그 때, 유탐정이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나의 상상에도 틀림이 없다면……』
『아, 그럼 유불란씨도 역시……』
그러나 유불란은 거기 대한 대답을 피하고
『하옇든 그 사진의 처녀가 누군지를 빨리 가르쳐 주시요.』
그 때, 문 틈으로 뾰족 나온 피스톨의 구멍이 그 어떤 목적물을 향하여 소리 없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그 어떤 목적물을 향하여 움직이고 있던 문 틈의 권총 뿌리!
그 차디찬 권총 뿌리가 마침내 한개의 심장을 노리면서 우뚝 멎지를 않았 는가!
『뭘 그리 주저하시오? 하옇든 그 사진 속의 인물이 누군지……』
하고 유불란이 재차 물었을 때, 백남수는 그 무엇을 결심한 것 같은 비장한 얼굴을 번쩍 들며 입을 열었다.
『그것은 지금으로 부터 약 삼십 년 전……』
그러나 그 한마디가 이 세상에 남겨 놓은 백남수의 최후의 목소리였다.
『탕 ——』
하고 방안을 진동시키는 한방의 총소리!
『앗!』
하고 외치는 유불란 ——
『악』
하고 의자에서 뛰어 일어나는 오상억 —— 머리를 약간 앞으로 숙이고 두 손으로 「테이블」귀를 잡은 남수의 몸뚱이가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처럼 힘없이 앉았던 의자와 함께 털썩하고 방바닥에 쓸어진다.
『어디냐?』
하면서 남수의 쓰러진 몸뚱이를 쓰러안는 유탐정 ——
『복도다! 복도다!』
하고 부르짖으며 쏜살같이 복도로 뛰어나가는 오상억 변호사 —— 안았던 남수의 몸뚱이를 내던지고 오상억 뒤를 따라 달음질해 나가는 유탐정 ——
『앗, 해월이다! 해월이!』
하고 외치는 오상억 변호사의 높은 목소리가 그 때 복도로부터 들려왔다.
『뒤를 따라라!』
하고 고함을 치면서 「도어」밖으로 뛰쳐나간 유탐정 —— 그는 거기서 무엇을 보았는가? —— 해월이, 해월이, 저 무서운 살인귀 해월이 —— 머리에서부터 발뒤축까지 치렁치렁한 주홍색 「만또」로 전신을 둘러싼 살인귀 해월이가 권총을 휘저으면서 기다랗게 뻗힌 복도로 층층대를 향하여 화살같이 달리고 있지 않는가!
『유불란씨, 빨리 빨리!』
하고 고함을 치면서 해월의 뒤를 따르는 오변호사 ——
『해월의 그림자를 놓쳐서는 안됩니다!』
하면서 오상억의 뒤를 따르는 유탐정 ——
『앗! 해월이가 아랫층으로 내려갑니다!』
새빨간 「만또」를 범나비처럼 펄럭이며 비상한 속력으로 층층대를 뛰어 내려가는 해월의 그림자 —— 앗, 절박한 위험! 아랫층 침실에는 은몽이 잠들어 있을 것이다!
『오상억씨! 놓쳐서는 안됩니다! 은몽씨가 침실에서 잠자고 있으니까 ——』
하고 주의시키는 유탐정의 초조한 부르짖음 —— 오상억의 뒤를 따라 층층대를 미끌어지 듯 달음박질해 내려간 유불란 탐정은 그 때 왼편으로 기다랗게 뻗힌 넓은 복도를 미친듯이 달리는 해월의 불덩어리처럼 새빨간 그자림을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유탐정은 가슴이 써늘해짐을 전신에 느끼고 우뚝 멈춰섰다.
왜 그러냐하면 오상억에게 쫓기는 살인귀 해월이가 바른편으로 빠져나가지 않고 현관을 그대로 지나 「아뜨리에」를 거쳐 그 다음방 은몽의 침실로 들어가지 않는가!
『앗, 위험!』
『은몽씨가 위태하다! 오상억씨, 빨리 따라 들어 가시요! 나는 이 현관으로 나가서 침실 들창문 밖으로 갈테니 —— 빨리 빨리!』
그 순간이었다. 은몽의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가
『악 ——』
하고 복도로 굴러나왔다. 뒤이어 한방의 총소리가
『탕 ——』
하고 방안의 공기를 찢으며 날아온다.
은몽의 찢는 뜻한 부르짖음과 뒤이어 터져나오는 총소리 한방 —— 아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유불란 탐정은 너무나 잘 안다.
『해월은 마침내 은몽을 죽였구나!』
유불란은 마음속으로 그러게 중얼거리며 걸려있는 현관문을 꿈결처럼 열어 젖히고 정원으로 뛰어 나갔다.
밖은 두꺼운 안개의 담장이다. 그때 다시
『아, 앗 ——』
하고 부르짖는 공포에 찬 은몽의 목소리가 들리었다.
뒤이어 오상억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아? ——』
하고 놀라고
『은몽씨 ——』
하고 외치는 것을 들으면서 현관 밖에 달려있는 외등(外燈)이 보얗게 비치는 짙은 안개의 장막 속으로 유탐정은 뛰어 들어갔다.
유탐정이 침실을 향하여 「아뜨리에」들창 밖에 있는 넓은 꽃밭을 나는 듯이 휘 돌고 있을 그 때였다.
『앗! 저 놈이 들창 밖으로……유불란씨 빨리, 빨리 —— 저 놈을 붙들어 주시요!』
하는 오상억 변호사의 미친듯이 날뛰는 목소리가 들렸다.
『오냐!』
유탐정은 두꺼운 안개속을 유심히 바라보며 꽃밭을 뺑 돌아 침실을 향하여 달리면서
『어디 어디?……』
하고 외쳤다. 그 때
『저기다, 저기 간다!』
하고 침실 들창 밖으로 상반신을 내밀고 정신없이 고함을 치는 오변호사의 그림자가 안개속으로 희미하게 보인다.
『어디, 어디?』
유불란은 달려가자 마자 그렇게 외쳤다.
『저 편이다, 저 편으로 도망갔다!』
유불란이 달려온 반대쪽을 가리키며 들창을 뛰어넘은 오상억도 유탐정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 아아, 신출귀몰한 살인귀 해월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
안개속을 아무리 뒤져 보았으나 있을리 만무한 해월 —— 해월은 안개라는 자연의 가장을 이용하였던 것이다.
유탐정과 오변호사가 침실로 부터 부리나케 뛰어 들어 왔을 때, 은몽은 분홍빛 「파쟈마」를 입은 채 침대위에 쓸어져 있었다.
『은몽씨!』
치밀어 오르는 격정을 억제하면서 유탐정은 은몽의 연연한 몸을 잡아 일으켰다.
『아, 은몽씨는 아무데도 상하지 않았읍니다. 총알은 이처럼 ——』
하고 옆에 있던 오변호사가 외쳤다.
은몽을 쏜 해월의 총알은 목표가 어그러져 침대 머리맡 조그만 탁자 위에 놓여 있는 화병을 깨뜨렸다. 방바닥에 흩어진 장미꽃과 가루처럼 부스러진 화병 ——
『은몽씨, 정신을 차리시요!』
유탐정은 그러면서 은몽을 침대 위에 누이었다.』
『은몽씨, 아무런데도 상한데가 없읍니다. ——』
오상억도 은몽을 흔들었다. 그러나
『오빠가……남수 오빠가 ——』
하고 외치면서 층층대를 뛰어 내려오는 정란의 무서움에 어린 목소리를 들은 유불란은 은몽을 오상억에게 맡기며
『이층엘 올라가 볼테니 은몽씨를 ——』
하고 복도로 뛰어 나갔다.
『아, 유선생님! 오빠가 오빠가 ——』
하고 팔에 매어 달리는 것을 유불란은
『정란씨 포도주가 있거든 빨리 은몽씨에게 갖다 드리시요.』
한마디를 남겨놓고 이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남수의 몸뚱이를 중심으로 하고 일면 피의 호수(湖水)다. 총알은 조금도 어김없이 남수의 심장을 꾀뚫었던 것이다.
유불란은 무엇보다도 먼저 쓸어진 남수의 피묻은 「포켙」을 뒤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렇다할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맨 나중에 문제의 처녀사진이 끼어 있는 조그만 수첩을 펴 보았을 때 그는 불현 듯 중얼거렸다.
『부부암(夫婦岩)의 비밀?』
『부부암(夫婦岩)의 비밀?……부부암의 비밀?……』
유불란은 잠깐 동안 수첩을 뚫어질 듯 드려다 보며 그렇게 중얼거려 보았다.
문제의 처녀사진이 끼어 있는 「페 — 지」 일면에는 「부부암의 비밀」
—— 이란 문구가 여기저기 너저분하게 가득 씌어 있었던 것이다.
『남수의 글씨다!』
그러니까 남수는 이번 여행으로부터 「부부암의 비밀」과 이 사진 사이에 얼켜있는 그 어떤 무서운 비밀을 탐지해 가지고 왔던 것에 틀림 없었다. 그러면 「부부암의 비밀」이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가?……
유불란은 문제의 자신과 수첩을 자기 「포켙」에 쓸어 넣고 경찰서에 전화를 건 다음 아랫층 은몽의 침실로 내려갔다.
기절했던 은몽은 정란이가 가져온 한 잔의 포도주를 마시고야 비로소 무서운 악몽으로 부터 깨어났던 것이다.
『아, 유선생님!』
하고 자리에서부터 몸을 일으키려는 은몽을 제지하면서 유불란은 은몽의 이야기에 귀를 기우렸다.
은몽의 파리한 얼굴에는 아직 공포의 빛이 사라질 줄을 몰랐고 옆에 앉은 정란은 오빠 남수의 무참한 죽음에 눈물을 흘린다.
이층 남수의 방에서 나온 은몽과 정란은 복도에서 서로 헤어졌다. 정란은 삼층 자기 방으로 올라가고 은몽은 아랫층 자기 침실로 내려왔다.
『침실로 내려와서 자려고 「파쟈마」로 바꾸어 입고 침대에 누워 있는데 어디선가 탕하고 총소리가 나겠지요. 그때 깔짝 놀라 몸을 일으키고 가만히 귀를 기우렸더니 이층으로 올라가는 층층대를 뛰어 내려오는 사람의 발자욱 소리가 가슴이 덜컥하고 내려 앉아서……』
그래 은몽은 부리나케 침대에서 한번 뛰어 내렸다가 무서워서 다시 침대 위로 뛰어 올라가려했다. 그 순간 문이 벌컥 열리고 ——
『아 무서워요, 무서워요! 저 해월이가, 온몸이 불덩어리처럼 새빨간 해월이 가 그렇게 벌컥 뛰어 들어 오자마자 나에게 권총을 겨누고……그래 그만 악하고 소리를 치면서 침대에 납작 엎디는 순간 탕하는 총소리에 침대에서 그만 방바닥으로 떨어졌어요 . —— 오선생이 뛰어들어온 것 까지는 알지만 그리고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어요. —— 하고 오들오들 떨면서 설명을 하는 은몽의 말에
『하옇든 은몽씨는 신수가 좋습니다.』
하고 옆에 섰던 오상억이 은몽을 위로 하면서
『내가 뛰어 들어 온 것과 은몽씨가 침대에서 떨어진 것과 그리고 해월이 가 빨간 「만또」를 박쥐처럼 펄럭거리면서 들창 밖으로 뛰어나간 것이 말하자면 모두 똑같은 순간이었지요. 안개만 없었던들 ——』
『그래 남수씨는 종래……?』
하고 묻는 은몽의 말에 유불란은 그 비장한 얼굴을 두어 번 끄떡거릴뿐, 그의 모든 사색을 빼앗은 것은 남수의 수첩에 적혀 있는 「부부암의 비밀」이었다.
『하옇든 경찰서에 전화를 걸었으니까 곧 오겠지요.』
하고 침대위에 엎드려서 느껴 우는 정란의 어깨를 유불란은 다사롭게 어루만져 주었다.
『그 놈은……그 놈은 글쎄 우리 오빨 왜 죽이는거요?』
하는 원한에 찬 정란의 말에
『모두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 기왕 돌아가신 오빠를 울어보았자 소생시킬 수도 없는 일이니 진정 하세요. ——』
하는 유불란의 부드러운 음성.
이리하여 살인마 해월이가 연출한 제 이차 참극은 또 한개의 생명을 피로 물들였다는 가장 처참한 「에피로 — 그」와 함께 막을 내렸다.
疑惑[의혹]
[편집]복수귀 해월은 마침내 또 남수를 죽였다. 세상은 해월의 대담무쌍한 담력에 혀를 차는 한편 유탐정과 오변호사의 무능을 시비하기 시작하였다.
실상 유불란 탐정으로서는 그 이상 더 불명예가 없었다. 해월을 눈앞에 빤히 바라보면서 놓쳐버리지 않았는가.
『아아, 불명예다, 불명예다!. 유불란, 너는 이 사건에 있어서 너무나 무력하다.』
이것은 이튿날 아침, 유불란 탐정이 삼청동 공원을 혼자 이리저리 산책하면서 자기 자신을 꾸짖은 말이었다.
사실 이번 사건처럼 유탐정의 고혈(膏血)을 짜아내는 사건은 드물었다. 처음부터 유불란이 사건에 관계하였기 때문에 다른 사건보다 훨씬 쉽게 해결을 보리라고 생각했던 것이 결국 잘못이였던가 보다.
그러나 그러나 『 , 이상한 일이다. ── 나의 상상에 틀림이 없다면 해월은 확실히 그 놈인데……』
유불란은 벌써부터 그 어떤 인물을 해월이라고 가상(假想)하고 그 가상 밑에서 모든 추리를 진행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어제밤 남수 살해사건에 접함으로써 그 때까지 고이고이 길러오던 그 무서운 가상이 뿌리째 송두리째 산산이 깨여져 버리고 말았다.
『그것은 하옇든 한 인물의 사진을 세 사람이 똑같이 가지고 있지 않은가?…… 해월과 황세민과 또 한사람……또 한사람?……남수가 주웠다는 사진은 대체 누가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유불란은 그런 것을 생각하면서 문득 발부리로 조그마한 조약돌 하나를 툭 찼다. 그리고 그 조약돌이 채 「풀」위에 떨어지기도 전에
『앗차, 백영호다!』
하고 외쳤다.
『그렇다! 또 한사람은 백영호씨에 틀림이 없다! 남수가 주웠다는 사진은 확실히 백영호씨가 가지고 있던 것이다! 어째서?……어째서 그렇지 않은가!…… 어째서?…… 글쎄 그렇지 않은가?……』
유불란은 발걸음을 멈추고 우뚝 섰다. 자기자신의 물음에 대하여 답변을 하려는 것이다. 담배를 붙여물고「스틱」으로 몸을 의지하여 이끼 낀 푸른 못을 뚫어질 듯이 노려본다.
「그렇다! 어째서?……그렇다! 어째서?…… 그렇지 않은가! 첫째로 남수가 그와같은 중대한 증거품이 되는 사진을 발견하고도 그 출처(出處)를 밝히지 않은 이유는 대체 어디 있는가? 해월이가 떨어뜨린 것과 똑같은 사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자기 아버지라면 그렇다, 그것은 남수만이 아니라 누구든지 그 출처를 밝히기를 꺼릴 것이 아닌가?……살인귀 해월과 자기아버지 사이에 한장의 사진을 중심으로 비밀이 얽혀 있으리라고 믿는 그 뜻하지 않은 발견! 남수는 놀라고 의심하고 그리고 그 사진에 관한 해월과 아버지의 그 어떤 비밀을 찾아 내려는 맹렬한 탐정욕에 가슴을 태웠을 것이다. ── 그러면 사진에 관한 비밀을 알려고 남수는 대관절 어디로 여행을 갔었던가?…… 사흘 만에 돌아온 남수는 그 어떤 무서운 비밀을 가지고 왔었다. 그러나 해월은 남수의 입으로부터 비밀이 탈로 될 것을 방지하려고 남수를 죽였다.』
유불란의 두눈은 불덩어리처럼 빛나기 시작한다.
『그러면 남수의 수첩에 적혀 있는「부부암의 비밀」이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장의 사진을 해월과 백영호씨와 황세민씨 ── 이 세사람이 다같이 가지고 있다는 이 이상 야릇한 사실!
그 순간 유불란은 채 타지 않은 담배를 툭하고 못가운데 던지면서 외쳤다.
『남수가 부리나케 다녀온 곳 ── 그것은 남수의 고향이다. 백영호씨의 고향일 것이다!』
『그렇다, 남수가 자기 고향에 갔다온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왜 그러냐 하면 지금부터 약 삼십년 전 ── 다시 말하면 문제의 사진속의 처녀와 남수의 아버지 백영호 사이에 그 어떤 관계가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리고 한편 문제의 사진이 약 삼십 년 전에 찍은 것이라고 추측한다면 지금으로부터 삼십 년 전의 백영호씨가 어디 있었던던가?……그것이 문제가 될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삼십 년 전 ── 확실하게 단언할 수는 없으나 그 즈음 백영호 씨는 아마 자기 고향에서 살고 있었을 것이다.』
유불란의 상념이 거기까지 도달했을 때, 그는 황급한 걸음으로 못가를 떠나 남수네집 정문을 향하여 걸어 들어갔다.
어제밤 급보를 받고 돌아온 임경부 이하 여러 경찰관들이 이층 응접실을 임시 수사본부로 정하고 아직도 분주스러히 활동하고 있는 모양이다. 임 경부의 그림자가 들창 안으로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는 것이 보인다.
유불란는 정문을 들어서면서 저편 화단 옆을 산책하는 남녀 두 사람의 그림자를 보았다.
정란과 그의 약혼자 문학수였다.
『정란씨 잠깐?』
하고 유불란은 정란의 파리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 유선생, 아직 댁으로 돌아 가시지 않으셨읍니까? 돌아가셔서 주무신다고 그러시더니 ──』
『네 집으로 가서 한잠 느러지게 자려고 했었는데……한가지 정란씨에게 여쭤볼 말씀이 있어서요.』
『무슨 말씀?』
『저리로 가십시다.』
유불란은 정란과 문학수를 저편 은행나무 밑「벤취」로 데리고 가서 걸터 앉으며
『정란씨의 고향이 어디시지요! 평안남도 어디시란 말을 들은 것 같은데 ──』
하고 밤새껏 울어새인 정란의 통통부은 눈두덩을 쳐다보았다.
평안남도 천읍 이라는데 『 × , 저는 어렸을 때 고향을 떠나서 아직 한번도 가본 적이 없어요.』
『평안남도 ×천읍이면 저 대동강하류(大同江下流)에 있는?』
『네 거기서 진남포까지 한 이십리 밖에 안된다나봐요.』
정란은 무엇인가 약간 불안한 눈동자로 유불란을 쳐다보았다.
『그러면 정란씨가 ×천을 떠난지는 언제입니까?』
『제가 두살 때라니까 벌써 한 이십 년 된 셈이지요.』
『이십 년?……음 ── 그럼 돌아가신 아버지께서는 그간 고향인 ×천에 여러번 가보셨겠지요?』
『글쎄요. 그건 자세히 알 수 없지만 하여튼 고향에 가신다는 말을 한번도 들은 적이 없이 자라난 저이니까요. 그건 왜 물으세요?』
하는 정란의 물음을
『아니 잠깐 ──』
하고 회피하면서
『정란씨의 자친님께서도 역시 고향이 ×천이십니까?』
『네, 같은 ×천이래요. ×천은 아주 경치가 좋은 곳이라는데 아직 한번도 가보질 못해서 고향에 대한 동경이 무척 커요.』
『그렇겠습니다. 언제 한번 고향엘 가 보시지요.』
그 때 옆에 앉았던 문학수가
『그런데 유불란씨, 정란씨를 이런 위험한 장소에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읍니다. 어느때 어떠한 위험이 닥칠지……』
하고 비장한 얼굴로 유불란을 바라 보았다.
그러나 그 순간 정란은 돌연
『앗, 저기저거 ── 저게 뭐야?』
하고 손으로 허공을 가리키며 그렇게 외쳤다.
『뭡니까? 뭐?』
유불란과 문학수가 동시에 정란이가 가리키는 곳을 쳐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욱어진 은행잎 사이로 범나비 처럼 팔락팔락 떨어져 내리는 한장의 주홍색 종이조각
『앗 봉투다! 붉은 봉투다!』
『붉은 봉투다!』
『해월의 경고문이다!』
문학수와 유불란은 그렇게 외치면서「벤취」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암록색 은행잎 사이를 눕이 듯 팔락팔락 떨어져 내리는 빨간 봉투 한장 ── 그것은 틀림없이 살인귀 해월의 경고장이다.
삽분하고 소리없이 잔디위에 내려앉은 붉은 봉투를 향하여 뛰어 가는 문학 수와는 반대로 땅위에 못박힌 것 처럼 한 곳에 우뚝 서 있는 유불란의 시선은 자기 머리위에 욱어져 있는 컴컴한 은행잎 사이를 뚫어질 듯이 쳐다보는 것이다.
그 욱어진 은행나무 가지 사이로 간신이 보이는 한개의 들창문 ── 그것은 틀림없이 은몽의 침실 바로 윗층인 미술품 수집실이 아닌가.
그 순간 현관을 향하여 달음박질 치는 유탐정의 몸뚱이 ── 현관을 들어서 자 그는 기다란 복도를 왼편으로 「커 ─ 브」하여 나는 듯이 층층대를 뛰어 올라갔다.
남수의 시체가 안치 되어있는 남수의 방을 지나고 임경부 이하 여러 경찰들이 모여 있는 응접실을 지나고 그리고 그 다음 방인 미술품 수집실을 향하여 뛰어가던 유탐정은 그 때 수집실「도어」가 방싯하니 열려 있는 것을 보고 우뚝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다시 용기를 내어 마침내 수집실「도어」를 열어 젖히고 안으로 들어 섰다.
예기하던바와 틀림없이 수집실 안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해월이가 그때까지 수집실안에 머물러 있을리는 만무하였던 때문이다.
그는 열어 젖힌 들창문으로 상반신을 내밀고 무성한 은행나무 가지를 손으로 헤치며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해월의 경고문을 읽는 문학수와 정란의 그림자가 내려다 보일 뿐이었다.
그는 다시 밖으로 뛰어나와서 해월의 편지를 읽었다. 그것은 해월이가 유불란과 오상억에게 보낸 협박장이다.
유불란, 주책없이 사건에 뛰어 들었다가는 네 목숨이 위태하리라. 이 말은 오상억에게도 통용되는 말이다. 주은몽을 사모하는 너는 나의 칼날로부터 은몽을 구하고자 하는 동시에 미남 오상억의 손으로부터 은몽을 빼앗고자 하지만 그것은 모두 아무 효력없는 노력에 지나지 못할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네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보았자 나의 칼날로부터 은몽을 구하지 못할 것이며 오상억의 손으로부터도 은몽을 빼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은몽과 오상억의 사이가 요즘 어떻게나 농후해졌는가를 너는 아직 모르리라. 너와 은 몽의 관계보다도 오상억과 은몽의 관계가 열 배나 스무 배나 더 깊어 졌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나 혼자 밖에 없으니까. 그것은 하옇든 유불란, 나의 계획은 기계처럼 정확하게 일보일보 진행되고 있다. 나의 하고자하는 바를 방해하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죽여 버릴테다. 백영호씨도 죽었다. 그리고 백남수도 죽었다. 은몽을 보호하고자하는 자는 모두가 나의 적이다.
너도 그렇고 오상억도 그렇다. 목숨이 아깝다고 생각한다면 한시 바삐 이 사건으로부터 손을 떼어라!~ 나는 어디있느냐? 나는 항상 너희들과 같이 있다!
해 월
『사건은 촉박했다!』
편지를 읽고난 유불란은 그렇게 중얼 거렸다.
그 때 현관으로부터 오상억과 주은몽이 어깨를 나란히하고 정원으로 나온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무척 정다워 보이는 두 사람이었다.
『아 여기 계졌군요.』
오상억은 그러면서 유불란 앞으로 걸어왔다.
유불란은 잠자코 해월의 경고문을 그들 앞에 내놓았다.
『붉은 봉투?』
봉투를 보자마자 은몽은 그렇게 외치면서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오상억과 은몽이 해월의 협박장을 읽고 있을 그 때 안으로부터 임 경부도 뛰어나왔다.
『또 협박장입니까?』
하면서 임경부도 편지를 드려다 보았다.
이윽고 편지에서 눈을 뗀 오상억은
『대체 그 놈은 어디서……』
하고 대체 어디 숨어서 은몽과 자기를 감시하고 있었느냐는 말끝을 채 맺지 못하고 은몽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은몽은 아무말도 없다. 머리를 푹 숙이고 유불란의 시선과 마주치는 것을 무척 두려워하는 태도였다.
『그런데 ──』
하고 오상억은 말머리를 돌리면서
『이 협박장을 보니 사태가 대단히 절박한 감을 느끼게합니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제삼차의 비극 ── 아니 제사차, 제오차의 참극이 발생할지도 모를 테니까……』
『그렇습니다.』
유불란도 오상억의 말을 지지하였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저마다 개인 행동을 취해 왔지만 그래가지고는 도저히 해월에게 대항해나갈 수 없다는 것을 나는 통절히 느꼈읍니다. 개인의 공로라든가 명예라든가, 그런 것 보다도 우리는 사회의 치안을 위해서 어디까지든지 서로서로 협력하여 공동전선을 펴지 않으면 안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당국은 당국대로 따로 행동을 취하고 또 유불란씨는 유불란씨 대로 개인 행동을 취한다는 것은 설사 임경부와 유불란씨 사이에 어떠한 악감정이 가로 막혀있다 하더라도 결국 그것은 한개의 조그마한 사적감정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니까 ──』
『그렇습니다. 임경부께서 저와 타협하기를 즐기지 않더라도 이번만은 제가 머리를 숙이고 도와주십쇼하고 빌지 않으면 안되게끔 사건이 절박했읍니다. 절박했을뿐만 아니라, 사건의 범위가 대단히 넓어서 도저히 나 혼자서는 손이 미치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하면 적어도 이 사건을 해결지려면 세 갈래로 파당을 나누어서 수사를 진행시키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지요.』
『세갈래로?』
『그렇지요. 첫째로 은몽씨와 정란씨의 신변을 항상 감시해야 되겠고 둘째로는 남수씨가 다녀 온 것과 꼭같은 「코 ─ 스」를 밟아서 문제의 처녀 사진이 누군가를 조사해야 하겠고 셋째로는……』
『아 유불란씨 ──』
하고 그 때 오상억이「벤취」에서 벌떡 일어서면서
『은몽씨와 정란씨의 신변을 감시하는 역활은 임경부께 맡기기로하고 문제의 처녀 사진이 누군지, 그것은 내가 조사하겠읍니다.』
『그럼 오상억씨는 남수씨가 어디를 다녀왔는지 아신다는 말씀입니까?』
하고 묻는 임경부의 말에
『남수군은 자기 고향인 평안남도 ×천읍엘 다녀왔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고 아까 유불란이「풀」옆에서 발견한 것과 대동소이한 이유를 설명하였다.
『그렇습니다. 남수씨는 분명히 자기 고향엘 다녀왔읍니다.』
하고 찬의를 표하는 유불란의 말에 오상억은 어지간이 힘을 얻어
『사흘 안으로 나도 남수가 탐지해온 그 어떤 무서운 비밀을 보고 하겠읍니다.』
『그럼 오변호사께서는 그 방면을 담당하시기로하고 나는 ──』
하고 혜전교장 황세민에 관한 이야기를 할까하고 잠깐 동안 망설이다가 생각하는 바가 있어 그 말을 입밖에 내지 않고
『금강산 백도사로 가서 해월의 행방을 다시 면밀히 조사해볼까 합니다.
해월이가 금강산을 떠나서 묘향산 방면으로 갔다는 말을 풍문에 들었는데, 하옇든 해월이가 그 후 어디 있었으며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를 끝까지 더듬어 볼 필요가 있읍니다 . 해월이가 서울안에 살고 있는 이상 그는 어떤 가면을 쓰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니까 ──』
『그렇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한시바삐 할동을 개시합니다.』
임경부도 결국 오상억 변호사가 제출한 공동전선에 찬의를 표하였다.
이리하여 제각기 개인행동을 취해오던 오상억, 유불란, 임경부 ── 이 세 탐정 사이에는 신출귀몰하고 기상천외의 재주를 가진 살인마 해월을 체포하고자 마침내 공동전선을 펴기로 협의가 되었다.
「그런데 ──」
하고 그 때 유탐정이 입을 열었다.
『아까 문학수씨도 말씀한바 있었지만 정란씨와 은몽씨가 같은 집에서 기거한다는 것은 정란씨의 입장으로서 대단히 위험합니다. 은몽씨의 신변에 정란씨가 항상 가까이 있다는 것은 그것이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해월에게 있어서는 어느때나 방해물이 될 수 밖에 없으니까요. 백영호씨도 그렇고, 모두가 해월의 방해물이었기 때문에 무참한 죽음을 당했지요.』
『그렇습니다. 나는 이 이상 더 정란씨를 은몽씨와 한 곳에 두는 것을 극도로 반대합니다.』
문학수의 주장이었다.
『그렇게되면 어머니가 혼자서 얼마나 무서워 ──』
하고 정란이가 은몽에게 동정하는 것을
『은몽씨는 은몽씨고 당신은 당신이지요. 은몽씨 한사람 때문에 죄없는 두 사람이 무참한 희생을 당한 것만해도 억울하기 짝이없는데, 이제 당신마저……』
하고 문학수는 적의를 품은 눈으로 은몽을 힐끗 바라보며
『하옇든 그런 쓸데없는 동정은 그만두고 당신은 오늘부터라도 은몽씨와 헤어져 있어야합니다. 이 유령의 집에서 하루 바삐 나와야 합니다. 은 몽씨가 받는 고통, 은몽씨가 당하는 무서움은 말하자면 자기가 부질없이 저질러 놓은 어리석은 행동에서 오는 당연한 벌일런지 모르나 당신이야 왜 거기에 끼어서 같은 고통을 받아야 합니까? 나는 당신의 약혼자로서 이 이상 더 당신을 이 무서운 집에 두어둘 수 없소. ──』
문학수의 어조는 점점 높아간다.
『하옇든 이 사건에 대해서는 은몽씨가 전 책임을 져야지요. 아, 글쎄 그렇지 않소? 은몽씨가 이 백씨문중에 들어와서 남겨놓은 공적이란 결국 나의 장인될 사람을 죽이고 나의 처남될 사람을 죽인것 밖에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 뿐만 아니라……』
『잠깐 ──』
하고 흥분된 문학수의 말을 가로막은 것은 오상억이었다.
『말씀이 너무 과격하다고 생각지 않습니까? 그거야 물론 결과로만 따진다면 그렇게도 말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은몽씨인들 그것이 고의가 아닌 이상 어느 정도까지의 책임은 있을망정 그렇게까지 너무 과격하게…… 그렇지 않더라도 은몽씨는 지금 그 너무나 무거운 책임을 한몸에 걸머지고 ── 』
『책임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남편이 죽은지 두달도 못되어서 딴 사나이와 ──』
『아이 그만두세요! 무슨 말을 그러게 하신담? ── 어머니, 이이는 너무 흥분하기 쉬운 성질이있어……너무 성격이 괴격한 것이 결점이야요. 자아, 어머니, 안으로 들어 가십시다.』
정란이가 은몽의 팔목에 매어달렸다.
『문선생, 용서하세요! 모두 제가 마음 약한 여자이기 때문에…… 아무데도 의지할 곳 없는……」
눈물이 포옥 쏟아져 내리는 것을 백어같은 두손으로 급히 가리우면서 핵하고 돌아서서 머리를 숙인채 앞도 쳐다 보지 않고 현관으로 뛰어 들어갔다.
『어머니, 어머니!』
정란도 따라갔다. 그 뒤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서 있던 임경부가
『좀 지나쳤읍니다. 그렇게 까지야 ──』
하는 것을 문학수는 한참 동안 잠자코 있다가
『그것은 하옇든 나에게는 이 사건에 이상한 점이 수도록 합니다. 첫째로 저……』
하고 폭탄처럼 터져 나오려는 말을
『잠깐, 잠깐 가만계십쇼!』
하고 손을 휘저으면서 돌연 문학수의 말을 막은 것은 그때까지 묵묵히 서 있던 유불란 탐정이었다.
문학수는 그만 유탐정이 가로막는 바람에 자기가 하고자 하던 말을 꿀꺽 삼켜버리고 말았다. 그런 말을 함부로 입밖에 내면 안된다는 유탐정의 표정이었다.
『그러면 ──』
하고 유불란은 말머리를 돌리어 그럼 문학수씨는 정란씨를 『 맡으시오. 남수씨의 장례식이나 끝나면 명수 대 은몽씨의 댁이 비어 있을테니까, 은몽씨는 당분간 그리로 가 계시기로 하고 문학수씨는 정란씨와 함께 이집을 지키십시오.』
『아, 그게 좋겠군요.』
하고 그때 임경부도 찬성하였다.
이리하여 사람들은 각각 자기가 맡은 역활을 충분히 이행하기를 굳게 약속하며 헤어졌다.
헤어질 때 유불란은 문학수를 불러 삼청공원을 산책하면서 약 한시간 동안이나 이야기하였으나 그것이 대체 무슨 이야긴지 사람들은 모른다.
여기서 문학수와 헤어진 유불란은 무엇을 생각했는지 다시 임경부를 불러 내다가 순사부장 박태일을 얼마 동안만 빌려주기를 공손히 청하였다.
『박태일군을?』
하고 주저하는 임경부에게
『네, 얼마 동안 박군과 행동을 같이 했으면 합니다.』
하는 유불란의 말에 임경부는 잠깐 동안 생각하다가 마침내
『어렵지 않은 일이죠.』
하고 승낙하였다.
『고맙습니다.』
유불란은 순사부장 박태일을 데리고 삼청동 은몽이네 집을 나왔다.
얼마 후 유불란과 박태일은 안국동 네거리 ××식당 이층에 마주앉은 몸이 되었다.
『박군 수고를 좀 해줘야겠네.』
유불란은「포 ─ 크」를 놓으면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무슨 말씀이든 명령하시는 대로 복종하겠읍니다.』
박태일 부장은 비로소 스승을 만났다는 기쁨에 안색을 가다듬었다.
『다른게 아니라 군이 내 대신 한번 더 도승 해월의 행적을 더듬어 주게.
나는 또 나대로 할일이 태산 같으니까. ──』
『네 유선생의 말씀이라면 무엇이든지 제 힘자라는대로 ──』
『실상은 나도 저번에 금강산 백도사로 찾아가서 도승 해월의 자취를 조사해 보았으나 결국 박군의 조사보고와 대동소이한 결과를 얻었을뿐 이렇다할 아무런 발견도 못했단 말이야. ── 그러나 한가지 박군의 보고보다 상세한 것은 해월이가 백도사를 떠난 후, 묘향산 보성사(普聖寺)에 가서 얼마 동안 있다가 이번에는 평양 모란봉 밑에 있는 영문사(永文寺)로 갔었다는 말을 탐지해 놓고 부랴 부랴 영문사로 찾아 가 보았더니 절간 주지가 하는 말이 금강산 백도사에 있을 때 폐병삼기에 있던 해월은 그 때 벌써 삼기를 넘어 제사기에 들어 갔다는 말을 하면서, 서해안(西海岸) 어디로 가서 생굴을 까 먹겠다는 말을 남겨놓고 표연히 영문사를 떠나 버렸다고 ── 그래서 나도 그의 자취를 더듬으려 했으나 군도 아다싶이 그 때 오변호사의 글이 △△일보에 발표되어 나는 부득이 나자신을 변명하고자 다시서울로 올라왔거든 ── 』
『그럼 그 때 벌써 폐병 삼기를 넘어선 해월이가 지금까지 살아있을 리는 만무하지 않습니까?』
『음 ──』
하고 유불란은 그 때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려다 말고
『그러나 우리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한 이상 그거야 단언할 수 없으니까…… 하옇든 거기까지는 확실한 사실이니까, 그 후의 해월이가 어떻게 되었는지?…… 수고로운 대로 군이 좀 맹활동을 개시해 주게.』
『네, 잘 알아 들었읍니다.』
『그럼, 오늘 저녁차로 곧 평양으로 내려가야만 하겠네.』
『네에!』
박태일 부장은 대답과 함께 의자에서 기운차게 몸을 일으켰다.
黃世民校長[황세민교장]
[편집]이리하여 박태일 순사부장은 평양으로 해월의 행적을 더듬으러 떠나고 오상억 변호사는 백영호씨의 고향인 평안남도 ×천읍을 항하여 출발하였다.
한편 주은몽은 남수의 장례식이 끝난 후 본래 자기가 살고 있던 한강 건너편 명수대 저택으로 옮아가고 정란은 약혼자 문학수의 다사로운 보호 밑에서 삼청동에 그냥 머물러 있기로 되었다.
삼청동을 떠나 명수대로 옮아가는 날 은몽은 자기의 외로운 신세을 한없이 눈물겨워 하였다.
일세의 아름다운 무회요 세상의 애인인 공작부인 주은몽 ── 그러나 그것은 결국 창공에 떠도는 한점의 부운과도 같이 허무한 것임을 새삼스러이 느낀 은몽이었다. 은몽은 정란의 손목을 부여잡고 어렸을 때 돌아가신 양친을 그리워하며 울었다.
『정란, 문선생의 말씀과 같이 모두가 나의 탓이야. 나 하나 이 세상에서 없어졌으면 이렇게 무참한 비극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니까. ── 그래, 그래, 그렇고말고! 정란이가 나와 한집에 있는 것은 문선생의 말씀과 같이 역시 위험한 일이지 무섭고 . 쓸쓸하지만 나혼자 명수대에 가 있을테야. 그러나 결국 여기 있으나 거기 가 있으나 마찬가지니까. 나는 아무리 살려고 얘를 써도 소용없어. 그 놈은 나를 배리배리 말려서 죽일 셈이니까 ── 』
그리고 손수건으로 눈물을 씻으면서
『정란, 놀러와 응?』
그런 말을 남겨놓고 은몽은 경찰들의 보호를 받으면서 떠나갔다.
명수대로 옮아온 은몽의 생활은 글자 그대로 지옥이었다. 자기의 생명이 하루하루 졸아드는 것 같은 무서움 ── 그것은 마치 산 송장의 참담한 생의 계속이었다.
『해월이, 해월이! 죽이려거든 어서 죽여줘요! 고양이가 쥐새끼를 잡아먹듯이 당신은 나를 노리기만하고……대체 당신은 어디 있는 거요?…… 어디서 나를 그 처럼 감시하고 있는거요? 어서 지금이라도 발칵 달려 들어 죽여요!
어서 속히 시원하도록 천갈래 만갈래로 찢어 죽여요! 아아……』
한밤중 같은 때 넓은 방안에 우두커니 앉아서 사방을 돌아다보면서 그렇게 중얼거리는 은몽의 목소리가 정원을 지키는 경찰들의 귀에까지 들려오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혜성전문학교 교장 황세민씨가 은몽을 방문하였다.
임경부는 응접실 문밖에서 귀를 기우리고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었다.
『얼마나 쓸쓸하십니까?』
황세민씨는 은몽의 창백한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진심으로 울어나오는 위로의 말을 건낸 후에 천천히 담배를 붙여물고는 또 얼마 동안 망설이 다가 마침내 용기를 얻은 듯이
『다른게 아니라, 이 늙은이가 이처럼 부인을 뵈러 온 것은 부인께서도 이미 짐작하실 줄 믿습니다만 이것으로 최후의 교섭을 삼을 셈으로 ── 』
하고 말의 줄거리를 채 끝내지 못하고 그만 시선을 무릎위에 떨어뜨렸다.
『네 선생님의 말씀은 잘 알아 듣겠읍니다. 그리고 혜전을 그 처럼 아끼시는 선생님의 교육자로서의 참된 성의에 머리를 숙으립니다.』
『그건 너무 과분의 말씀입니다만 ── 하옇든 부인의 말씀을 최후로 하여 우리 혜성전문학교의 운명이 좌우되겠끔 절박하였읍니다. 돌아가신 백영호씨 뜻대로……』
『글쎄요. ── 』
하고 은몽은 황세민씨의 말을 막으며
『교장선생의 뜻이 얼마나 간절하신지 마치 제 일같이 느껴져요. 그리고 황 선생의 입장을 저는 무척 동정하고 있었어요. 그러나 선생님도 아시다싶이 제게 그러한 권리가 있을수 있읍니까? 남수씨가 돌아가신 이 때 제산에 관한 권리는 원칙적으로 정란에게 있지 않아요? 제가 아무리 선생님을 동정한다 해도 문제는 정란의 의사 여하에 달렸지요. 그렇지 않읍니까? 황 선생님? ── 』
사실 은몽의 말대로 백영호씨의 백만원 재산권은 남수의 손을 거쳐 정란에게로 옮아간 이 때, 황교장이 아무리 은몽에게 애걸을 해 보았자 결국은 상속권 소유자인 정란의 승낙이 없으면 안 될 것은 황교장도 모르는바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정란은 아직 세상일을 모르는 어린애가 아닌가. 어른격인은 몽에게 한번 애원해 보는 것이 황교장으로서는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제산상속권은 정란씨에게 있다 하더라도 그 분은 아직 연세가 어리시고 그래서 부인께 여쭈어 보려고요. 부인께서 후원만 해주신다면 정란씨인들…』
하고 황교장은 일단 숙였던 머리를 들고 은몽의 얼굴을 이모저모 따지듯이 쳐다보는 것이 었다.
『글쎄요. 제 힘 자라는 데 까지는 정란에게 권해 보겠읍니다만, 어쩔른지요. 하옇든 교장선생의 의사만은 잘 전하겠읍니다.』
은몽은 진심으로 황교장을 동정하면서도 모든 것이 자기 힘으로 모자라는 것이 유감이라는 말을 여러번 되풀이 하여 늙은이를 위로하였다.
황교장은 무엇을 생각하는지 얼마 동안 묵묵히 앉아서 담배만 푸욱푸욱 피우더니
『그런데……』
하고 말머리를 돌리며
『대체, 그 해월이란 놈은 어떠한 놈이기에 그 처럼 재주가 비상합니까?
원 세상에 그런놈이 어디 있단말이요. 아무리 원한이 골수에 맺혔기로 사람을 죽이다니 그런 악인이 세상에 있을수 있읍니까. ── 그래도 정정당당하게 나서서 나는 네가 이러이러한 원한이 있으니……하고 공공연하게 복수를 한다면 또 모르거니와 이건 비겁하게도 암암리에 사람를 하나도 아니고 두 사람씩이나 해쳐 놓으니 원 그런 악인이 어디 있겠오!』
하고 해월의 비겁한 행동을 적지 않게 흥분한 어투로 비난하였다.
『글쎄 말이지요. 죽이려면 어서 한칼에 죽여줬으면 오죽 좋겠어요?』
『그것도 원 제 애비를 죽인 원수라면 또 모르거니와 이건 어린시절에 철 없이 저질러 놓은 사소한 일을 가지고 사람을 죽인다 만다하니, 원 될법한 이야기요?』
하면서 황교장은 담배재를 재털이에 털어놓고 저윽이 안색을 가다듬으며 그런데 실례되는 『 말씀입니다만 한 말씀 묻겠읍니다. ── 부인은 어디 태생이십니까! 보아하니 평안도 태생이신 듯 하온데 ──』
하고 젊은 미망인 은몽의 비록 우수를 띄었을망정 화려한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네, 저어 평, 평안도예요……그런데 그건 어떻게……?』
하고 반문하는 은몽이 입술이 바르르하고 떨렸다.
『아니에요. 말씨에 어딘가 평안도티가 있는 것 같아서……그럼 평안도 어디십니까?』
『저어, 신의주예요.』
『신의주!』
황교장은 그리고
『신의주! 음…신의주면──』
하고 서너번 되풀이 하면서
『양친께서는 두 분 다 안계셨습니까?』
『어렸을 때 돌아가셨어요.』
『돌아가셨다! 음 ── 그러면 엄친의 존함은 누구십니까?』
『아버지는 주택서(朱澤書)라고 부르셨어요. 선생님, 그건 왜 물으세요?』
『아아니요. ── 늙은이라니 그저 젊은 사람들을 대하면 화제가 빈곤해서, 허, 허, 허…… 그런데 이런 것까지 물어서 황송하기 짝이 없읍니다만 자친님의 성함은 무엇이지요?』
황교장은 그러면서 은몽의 입술을 가장 긴장한 낯으로 쳐다보았다. 은몽은 그 순간, 이 늙은이가 별소리를 다 묻는다는 듯이 새침한 낯으로 상대방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대답하였다.
『김옥녀(金玉女)라고 부르셨어요.』
『김옥녀!』
황교장은 그 순간 자기의 기대와는 그 무엇이 어그러진다는 듯이
『아 그렇습니까, 가뜩이나 외로우신 몸이 요즈음 얼마나 더 쓸쓸하십니까. 하옇든 위험에 빠지시지 않도록 몸조심 잘 하셔야 겠읍니다. 하긴 이처럼 경찰대의 수비가 든든하니까 뭐 염려될 것은 없겠읍니다마는…… 그럼── 』
하고 몸을 일으키며
『저는 이만 실례하겠읍니다. 이처럼 불행 중에 계신 분을 괴롭혀서 ── 염치없는 이 늙은이를 과히 욕하지나 마십시요.』
『아이 선생님도……모두 제 힘이 모자라는 것을 한탄할 뿐이예요. 정란께는 선생님의 의사를 잘 전달하겠읍니다.』
『과분의 말씀, 황송합니다.』
하고 황교장은 밖으로 나왔다.
칠월 초순 ── 무더운 날이었다. 황교장은 한강 기슭 어떤 조그마한 정자나무 그늘로 찾아가서 맥고모를 벗어들고 이마에 땀을 씻었다.
발 밑으로 멀리 내려다 보이는 「보오트」떼, 백사장에서 날뛰는 벌거숭이들 ──칠월의 한강은 젊은이들의 호화로운 청춘을 싣고 어제도 흐르고 오늘도 또 내일도 흐르건만 ──
『일생이 길다면 긴 것이야. 젊은 시절에 꾸던 꿈이 바로 어젯밤 같건만 ── 』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황교장은 꿈꾸는 것처럼 물끄러미 한강을 내려다 보는 것이었다.
얼마 동안을 그러고 서서 달콤한 회상에 잠기어 있던 황교장은
『흐음 ── 』
하고 코소리를 내면서 커다란 회중시계를 꺼내어 잠깐 드려다보고는 다시 집어 넣으려 다가 문득 생각난 듯이 시계 뒷뚜껑을 손톱으로 열었다.
머리를 길게 땋아느린 처녀의 사진 ── 그즈음 유불란 탐정은 햇볕이 뜨겁게 내려쪼이는 태평동 거리를 활기있게 걷고 있었다.
그는 지금 마악 부청 호적과로부터 뛰어나오는 길이었다. 그는 황교장의 신분을 조사하기 위해서 부청을 찾았던 것이다.
그리고 호적과에서 그가 발견한 사실 ── 그것은 황세민씨의 국적(國籍)이 조선에 있지 않고 「아메리카」「샌프란시스코」에 있다는 의외의 사실이었다.
「아메리카」에 귀화(歸化)한 황세민!』
유불란은 새하얀 「파나마」 모를 벗어서 부채질하며 「스틱」으로 구두코를 툭툭 치면서 걸어가는 것이었다.
황세민씨는 지금으로부터 약 십년 전 「아메리카」로부터 돌아온 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아메리카」귀화인 ── 다시 말하면 「아메리카」국민인 줄을 세상사람들은 통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다만 서울 시민으로서의 거주계를 부청에 제출했을 따름이었다.
그 어떤 희망을 품고 호적과를 찾아 갔던 유탐정은 이 실로 뜻하지 않은 황교장의 신분에 접함으로써 기대는 엄청나게 어그러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럴리가 있나? 그럴리가 있나?』
하고 열병 환자처럼 수 없이 되풀이하면서, 하옇든 직접 황교장을 만나 보는 것 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부민관 앞에서 효자동 가는 전차를 잡아 탄 유탐정이 효자동 종점에서 그리 멀리 않은 혜성전문학교 정문을 들어 선 것은 약 이십 분 가량 후의 일이었다.
면회를 청하니 저번 유불란에게 속아 넘어 간 늙은 소사가 수상한 놈이라는 눈치로 아래 위를 훑어보고 나서 오늘은 아침부터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는 말을 전한 후에 긴급한 용건이 있으면 자택으로 찾아 가라고 하면서 주소를 가르쳐 주었다.
황교장의 자택은 학교에서 얼마 멀지 않은 청운동 ××번지 조그마한 양옥이었다.
유탐정은 안으로 들어 가기 전에 주위를 한번 유심히 살펴 보았다. 좁으나 마 정원에는 화단이 있고 화단 옆에 조그만 연못 같은 것도 보이고 새 조롱도 달리고 ── 늙은 독신자의 취미를 엿볼 수 있었다.
유불란은 마침내 현관으로 가서 초인종을 눌렀다.
초인종 소리가 안에서 찌르릉 찌르릉 울리더니 이윽고 늙은 어멈이 나오면서 유불란을 마지하였다.
『황선생 댁에 계신가요?』
『지금 계시지 안는뎁쇼.』
『언제 쯤 돌아오실런지 모르시지요?』
『글쎄올시다. 아침에 나가셔서 아직 안돌아 오셨는뎁쇼. 아마 곧 돌아오실 겁니다. 어디서 오셨읍니까?』
하고 묻는 말에 유불란은 잠시 망설이다가
『그럼 다시 찾아 뵙겠읍니다』
하고 현관을 나섰다.
그 때 유불란은 정문에서 한장의 엽서를 들고 현관을 향하여 들어오는 우편배달부와 바로 뜰 한복판에서 마주쳤다.
『황세민씨 ── 』
하고 배달부는 유불란을 이집 주인으로 착각했는지 손에 들었던 엽서를 내 주고는 자기의 직무를 다했다는 듯 바쁜 걸음으로 돌아서서 밖으로 나가버린다.
유불란은 엽서를 받아들고 이집 어멈에게 전달할 셈으로 다시 발걸음을 돌이키면서 무심중 엽서를 드려다 보았다. 서면에는 지극히 간단한 문구가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오늘밤 열시 정각에 귀하를 「 방문할 예정이오니 준비는 착실히 해 두었을 것으로 믿습니다.」
서명도 없고 주소도 없다. 보통 때 같았으면 별로 주의도 안했을 것이나 때가 때인지라 유불란은 무엇인가 지적할 수 없는 그 어떤 예감에 사로잡히 기 시작하였다.
그는 엽서를 현관 문틈으로 던져 놓고 정문을 나섰다.
효자동 정류장까지 나온 유불란이 행길 옆 가게로 들어가서 담배를 사고 있는 바로 그 때, 명수대 은몽을 찾아갔던 황세민 교장이 전차에서 내렸다.
그래 공교롭게도 유탐정과 황교장은 불과 몇 발자욱 안되는 가까운 지역에 있으면서도 서로 만나지 못한 채 하나는 왼편으로 하나는 바른편으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유불란이 담배를 사가지고 전차에 올라탔을 즈음에는 황교장은 벌써 효자동 종점에서 왼편으로 꺽어져 한참 동안 걸었을 때였다.
황교장은 자기집 현관을 들어서면서 발부리 앞에 떨어져 있는 한장의 엽서를 발견하고 허리를 굽혔다.
황교장은 허리를 펴면서 누가 보지나 않나하고……두려워하는 눈동자로 주위를 한번 살펴 본 후에 구두를 벗었다.
그때 늙은 어멈이 마주 나오면서 인사를 하였다.
『인제 방금 손님이 찾아 오셨는뎁쇼.』
『누가?』
『누구신지 성함은 말하지 않고……저어 검은 안경을 쓴 키가 후리후리한 ── 』
『검은 안경?』
음 ── 유불란 탐정이로구나 하였다. 저번에도 검은 안경을 쓴 사나이가 학교로 찾아와서 자기의 설합을 뒤지고 가지 않았는가.
『다시 찾아 오시겠다고요.』
하는 어멈의 말을 들은체 만체하고 무거운 표정을 이마에 그리면서 서재로 들어갔다.
서재에 들어가자 그는 뜰에 면한 「커 ─ 텐」을 열어젖히고 피곤한 몸을 털썩 의자 위에 올려 놓았다. 그리고는 양손으로 턱을 고인 다음 추녀에 걸린 새초롱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밤 열시에 온다고?』
하고 중얼거리면서 「포켙」에서 문제의 엽서를 꺼내어 「테이블」위에 놓았다.
황교장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 진다.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테이블」위에 놓인 엽서를 드려다 보는 황교장의 얼굴에는 점점 심각한 오뇌의 빛이 떠돌기 시작하였다.
네시, 다섯시, 일곱시 ── 시간은 쉬임없이 지나간다.
여덟 시에 저녁을 먹고난 황교장은 어멈을 불려 들였다.
『오늘밤은 특별히 여가를 줄테니까, 어디든지 가고 싶은 곳에 가서 놀다 오시요. 늦어지면 내일 돌아와도 괜찮고 ── 』
하는 주인의 말에 늙은 어멈은 기뻐하며
『그럼 저 동대문밖 딸애네 집에나 갔다옵죠. 아유 고마워라!』
하고 변덕을 부리면서 나가버렸다.
어멈이 밖으로 나가자 황교장은 우뚝 의자에서 일어나며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았다.
『여덟시 삼십 분 ──』
열 시에 오겠다고 했으니 한시간 반 밖에 남지 않았다.
팔짱을 끼고 방바닥을 드려다 보며 우리에 갇힌 짐승처럼 이리왔다 저리 갔다 하는 황세민 교장 ── 그러다가는 시계를 또 쳐다보고 시계를 쳐다보고는 또 방안을 돌아다니고…….
마침내 그는 무엇을 결심했는지 아홉 시를 치는 괘종소리를 듣는 순간,
『음 ── 』
하고 길게, 그리고 깊게 한번 신음한 후에 저편 구석에 놓인 챌상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는 「포켙」에서 조그마한 열쇠 한개를 꺼내어 책상 맨 밑 설합을 열고 설합 속에서 손수건에 싼 무슨 뭉치 하나를 끄집어 냈다.
황교장은 그것을 「테이블」위에 올려 놓고 이번에는 들창에 「커 ─ 텐」
을 깊이 내리웠다. 정원에는 아직 황혼이 남아있고 무더운 여름밤은 어둡기 시작했다. 황교장은 손수건에 싼 조그마한 몽치를 끌렀다. 그것은 한 자루의 권총이었다.
그는 감개무량한 듯이 「피스톨」을 어루만져 보았다. 그리고 그는 권총을 들고 벽에 걸린 시계를 겨누었다.
『책칵 ── 』
하고 자물쇠를 당기는 소리 ──.
황교장은 다시 책상 설합에서 탄환을 꺼내어 권총에 재운 후에 「포켙」에 쓰러넣고 또 시간을 보았다.
열시가 거의 가까워 온다. 모든 것을 결심한 듯한 황교장의 얼굴에는 벌써 초조도 보이지 않고 오뇌도 보이지 않는다. 침착할대로 침착해진 황세민 교장이었다.
집안은 죽은 듯이 고요하다.
정각 열시 ── 그래도 현관에는 아무 소식도 없다. 황교장은 「포켙」위로 「피스톨」을 어루만져 보면서 손님을 기다린다.
열시 십분 ── 찌르릉 하는 초인종 소리가 돌연 텅 빈 집안을 울린다. 현관에 누가 온 모양이다.
그래도 교장은 의자에 앉은채 일어설 줄을 모른다. 깊은 심호흡을 한번 하고 나서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것 처럼 두 눈을 스르르 감았다.
초인종 소리가 또 찌르릉 ── 하고 이번에는 길게, 그리고 세차게 울리었다. 어멈이 외출했으니 황교장 밖에 마중나갈 사람이 없건만 그는 도무지 움직일줄을 모른다.
또 째르랑 ── 초인종은 마침내 세번째 울리었다. 그래도 돌부처와 같은 황교장이다.
머얼리서 전차소리가 우웅하고 들려온다. 여름밤은 점점 깊어가고 황 교장은 여전히 의자에 파묻혀 있고 ── 그러나 초인종 소리는 다시 울려오지 않았다.
현관문 여는 소리가 드르륵하고 들린다. 거센 발자욱 소리가 복도를 울린다.
그리고 한참있다 슬그머니 「도어」가 열리면서 한사람의 사나이가 그림자처럼 쑤욱 황교장 앞에 나타났다.
黄齒人[황치인]
[편집]「노크」도 하지않고 황교장 앞에 쑤욱 나타난 사나이 ── 왼편 볼 위에 굵다란 지렁이가 기어가는것 같은 보기 흉한 칼자리를 가진, 나이가 오십쯤 되어 보이는 키가 극히 적은 사나이다.
사나이는「캡」을 벗지도 않고 양복 웃저고리에 양손을 꽂은채 등으로
「도어」를 떠밀어 닫고는 그 자리에 우뚝 서서 들창을 등지고 묵묵히 앉아 있는 황교장을 역시 묵묵히 노려보았다.
얼굴빛이 유달리 깜한 것은 항상 뜨거운 태양 밑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부수수하니 자란 수염도 깎지않고 입에는 「마드로스‧파이프」를 물고 ──
「마드로스‧파이프」를 물어서 그렇게 보이는지는 몰라도 어딘가 해상생활(海上生活)을 하는 선부같기도 하다.
『준비는 착실히 해두었을줄 아는데 ──』
수상한 사나이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것은 벌써 하나의 권력을 표시하는 엄연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황세민씨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사나이를 묵묵히 쳐다볼 뿐이다.
『준비는 착실할테지?』
사나이의 목소리는 조금 높아졌다.
『약속대로 삼 만원을 ──』
『…………』
『삼 만원은……
『…………』
『삼만원!』
『…………』
점점 찌그러져가는 사나이의 얼굴이었다.
『대답이 없는 것을 보니 나의 요구를 무시한다는 말이지? 히히히 ──』
사나이의 비굴한 웃음소리가 이빨 사이로 『히히히, 히히히』하고 굴러 나왔다.
아아 그 무서운 이빨! 짐승의 치아(齒牙)처럼 커다랗고 싯누런 이빨!
『삼만 원이 아깝다는 말이지? 히히히, 히히히……』
사나이는 그 구리처럼 싯누런 이를 보이면서 짐승 처럼 『히히히, 히히히』하는 웃음을 연발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실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소름이 오싹 끼치는 무서운 웃음이었다.
『할 수 없지!』
하고 뱉 듯이
『삼만 원이 아깝다면 할 수 없거든! 그러나 그 순간 부터 혜성전문학교 교장 황세민씨가… 히히히, 히히히……』
사나이는 그러고 황세민씨의 앞을 이리저리 걸어 다니면서
『황세민씨가 조선 교육계의 은인인 황세민 교장이……히히히 ── 그런 것을 생각하면 삼만원 아니라 삼십 만 원도 아깝지 않을텐데 ── 아무리 생각해도 교육자 황세민씨는 계산에 좀 어두워. 이해타산이 밝지 못하거든 ──』
하고 그는 말을 끊었다가
『아니, 내가 지나친 생각을 했군! 하옇든 나는 오늘밤 약속대로 삼만 원을 받아가면 그만이니까. 이렇다 저렇다 여러말을 벌려 놓았자 결국 내 입만 닳아빠지고 ──』
그리고 팔뚝시계를 한번 드려다보고 나서 이번에는 좀 강경한 태도로 황세민 시간이 바쁘니까 『 ! 빨리 대답 하게! 대체 어떻게 할 셈이야? 그렇게 잠자코만 앉았으니 그럼 그대는 나의 요구에 응하지 않겠다는 말인가?』
그 때 까지 잠자코 있던 황세민씨가 돌연
『악마!』
하고 외치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만큼 이편의 사정을 이야기하고 그 만큼 네 사정을 보아 주었는 데도 불구하고 이제 삼만원은 또 무슨 삼 만원이란 말인가?』
하고 전신을 부들두들 떨면서
『악인은 악인대로의 의리와 우정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너같이 뱃대기 속까지 썩어져 버린 놈이 대체 어디 있단말이냐? 어서 나가! 어서 이방으로부터 못 나갈테냐?
그러나 사나이는 조금도 두렵지 않은 모양으로 어깨를 한번 들썩거리며
『흥! 날보고 도리어 악인이라고?……백영호를 죽인게 그게 누구였던가?…… 히히히…… 그만했으면 삼 만원 쯤은 아깝지 않을텐데, 흐, 흐, 흣 ……, 히, 히, 힛 ──』
하고 싯루런 이빨을 내보이었다.
『뭐가 어때?』
그 순간 황교장은 마치 눈에서 불덩어리가 솟아나는 것 같이 외쳤다.
『백영호씨를 죽인게 대체 누구였던가 물었을 따름이야. 뭘 그리 놀랄 게 있나, 응?』
싯누런 이빨을 가진 수상한 사나이는 상대방에 관한 모든 비밀을 자기 혼자만이 알고 있다는데서 부터 울어나오는 힘과 권력을 보이기 위하여 한층 더 침착한 태도로 방안을 왔다갔다하면서, 말하자면 일종의 시위운동을 개시하는 것이었다.
『백영호씨를 죽였다?』
『그리고 백남수도 죽이고 ──』
『백남수를?……』
황교장은 모든 것이 꿈같다는 듯 얼마 동안 어리벙벙하니 서 있다가
『대체 군은 ──』
하고 어지간히 침착한 음성으로 상대방을 쳐다보았다.
『군은 대체 정신이 있는가 없는가?……군의 이야기를 들으니 백영호씨와 백남수군을 해한 범인이 이 황세민이란 뜻인데, 그게 대체 어떠한 근거에서부터 나온 이야긴지, 좀 자세히 설명하면 어떤가? 자네가 아무리 악당이기로 그러한 근거없는 이야기를 어떻게 함부로 입에 담는단 말인가?』
『근거없는 이야기라고?……흥!』
하고 입을 한번 삐죽한 다음에
『그거야 나보다 자네가 더 잘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닌가? 그러니까 그걸 다시 내입으로 새삼스럽게 이야기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고……하옇든 자네와 백영호씨와의 관계를 아예 입밖에 내지않는다는 조건으로 삼 만원이면 그리 큰 돈도 아니겠고 ──』
그 때 황교장은 화를 벌컥 내면서
『돈이 많다 적다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혹시 나의 과거의 약점을 잡아 가지고 나에게서 삼만원이란 돈을 취해 가겠다면 또 모르거니와 비굴하게도 그 삼 만원을 조건에 엉터리 없는 백영호씨 살해사건까지 끄집어 넣는 이유가 대체 어디 있느냐 말이야? 그야 물론 백영호씨와 남수군이 살해를 당한 그 시간에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를 충분히 설명하면 그만이거니와 그것과는 별문제로 네가 만일 끝끝내 나의 생활을 협박하고 괴롭힌다면 나는 도저히 너 같은 놈을 용서할 수 없어!』
그 처럼 유화한 황교장의 얼굴에는 어느새 점점 독기가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그는 이 이상 더 참을 수가 없다는데서 나오는 그 어떤 장엄한 결심이 그의 전신을 지배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용서할 수 없다는 말은 결국 나의 요구를 용감하게 물리치겠다는 의 민가? 히, 히 힛 ── 그럼 허는 수 없지. 할 수 있나!……』
사나이는 그 때 또 한번 어깨를 추켜 올리면서
『그러나 너무 조급하게 생각할 건 아니야. 돈을 채 마련하지 못했다면 지금으로부터 꼭 하루만 더 참아주지. 꼭 하루 ── 하루가 몇 시간인지 아나? 이십 사 시간! 이십 사 시간만 더 여유를 줄테니까 이십 사 시간이면 적어도 사회적 명망이 높은 황세민 교장 쯤이면 돈 삼 만원 쯤이야 뭐……
더구나 백영호씨의 백만원 재산이 남수의 손을 거쳐 정란의 손으로 굴러들은 이즈음! 공작부인 주은몽 아씨를 잘 삶아 놓으면 대금 칠십 만원이란 돈이 자네 수중으로 굴러 들겠다.! 그 칠십 만원의 이십 분지 일 쯤으로 이 불쌍한 친구를 구제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테니까 ── 히히히, 그럼 오늘은 이만하고 가네. 꼭 이십 사 시간이라네! 히히히히 ──』
그리고 사나이가 그 추악한 얼굴에 싯누런 이를 내보이면서 히, 히, 힛 하고 두 서너번 웃어댄 후 발걸음을 돌리어 복도로 나가려는 그 순간이었다.
「포켙」에서 「피스톨」을 꺼낸 황교장의 손이 사나이의 뒷덜미를 향하고 번쩍 들리었다.
사나이의 등골을 향하여 번쩍 들린 황세민의 권총!
뒤이어
『탕 ──』
하고 고요한 밤공기를 울리는 총소리 한방 ── 그러나 황세민씨의「피스톨」은 사나이를 쓰러뜨리는 대신 바로 머리 위에 매어달렸던 전등을 쏘았던 것이다.
캄캄한 방안 ── 황세민씨가 「피스톨」을 번쩍 든 그 순간, 바로 등뒤 「커─텐」 사이로 양복을 입은 어떤 사나이의 주먹이 쑥 나타나면서 황세민씨의 권총을 든 손목을 탁 쳤던 것이다.
『악!』
하고 싯누런 치아를 가진 사나이의 놀라는 소리와
『이게 누구야?』
하고 황교장의 부르짖는 소리가 일시에 들리었다.
그러나 방안은 옷칠을 한 듯 캄캄하다. 황교장은 무슨 영문인지를 몰랐다.
누가 들창을 넘어 방안으로 뛰어 들어오는 기척이 보인다.
『누구야? 누구야?』
하고 고함치는 황교장의 물음에는 대답이 없고 「도어」를 홱 하니 열어 젖히며 복도로 뛰어가는 두 사람의 발자욱 소리 ── 황교장은 얼마 동안 어리벙벙하니 서서 두 사람의 발자욱 소리가 정문 밖으로 사라지는 것을 꿈결처럼 들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물론 황교장은 자세한 사정은 몰랐으나 그 놈은 자기 짝패를 들창밖에 파수시켜 놓았던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악운이 센 놈이란 할 수 없어!』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그는 촛불을 가지러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즈음 ── 황세민씨의 서재로부터 뛰어나온 두 사나이의 시컴은 그림자는 효자동 종점을 향하여 어둑어둑한 골목을 쏜살같이 달음질치고 있었다.
앞선 놈은 키가 적고 뒤선 놈은 키가 크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두 사나이가 같은 파당 같지는 않았다. 앞서서 등뒤를 힐끗힐끗 돌아다 보면서 달음질치는 키 적은 사나이는 틀림없이 저 싯누런 이빨을 가진 무서운 사나이이며 그 뒤를 역시 죽어라하고 따라가는 키 큰 사나이는 분명히 유불란 탐정이었다.
효자동 종점이 가까웠을 때 두 사람의 사이는 불과 십 「미─터」밖에 안 되었다.
그 때 유불란은
『아차 ──』
하고 외쳤다. 왜 그러냐하면 자기보다 약 십 「미─터」쯤 앞선 그 사나이가 지금 마악 떠나가는 전차에 휙하고 올라탔던 때문이다.
닭쫓던 개 지붕마루 쳐다보 듯 유불란은 멍하고 어둠속으로 점점 적어져 가는 전차의 뒷 그림자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나 요행으로 전차가 총독부 앞으로 「커─브」를 했을 바로 그 때, 손님을 태워가지고 온 한대의 자동차가 유불란 옆에서 멈췄다.
『빨리, 빨리!』
유불란은 자동차에 오르자 마자 그렇게 외쳤다. 위잉! 하고 달아나는 자동차 ──
『저 ─ 앞에 가는 전차를 따라가 주게!』
그러나 자동차가 총독부 앞까지 다달았을 때 전차는 벌써 거의 광화문에 정류하려 할 때였다.
『저 전차다! 속력을 내라! 속력을!』
유불란은 미친듯이 부르짖었다.
이리하여 총독부앞 넓은 길을 글자 그대로 비조처럼 몰아댄 유불란의 자동차가 광화문 전차 정류장에 다달았을 때
『스톱!』
하고 유불란은 고함을 쳤다.
『보수는 얼마던지 줄테니 자네는 자동차로 스름스름 내 뒤를 따라주게!」
그런 말을 남겨놓고 유불란은 광화문 네거리 한복판 「고스톺」의 「시그 날」이 서 있는 곳을 향하여 달음박질 친다.
과연 전차에서 내린 저 키 작은 사나이가 태평동 거리로 뛰어가지 않는가.
사나이는 광화문 네거리를 건너서자 조선일보 쪽을 향하여 나는 듯이 달름 박질 친다. 한참 가다가 하나씩 섰는 가로등 밑을 번개처럼 닫는 사나이와 그 뒤를 약 백「미─터」가량 떨어져서 따르는 유불란 탐정 ── 그렇다! 이 싯누런 이빨을 가진 괴한(怪漢)만 체포한다면 백영호씨와 황세민씨에 관한 비밀을 알 수 있을 것이며 한걸음 더 나아가 사건의 주인공인 도승 해월의 정체를 청천백일하에 폭로 시킬수 있을 것이다.
유불란과 괴한의 사이가 점점 가까워진다. 조선일보사를 지나고 부민관을 지나서 괴한이 부청앞 넓은 마당을 본정 쪽으로 향하여 횡단(橫斷)하려고 하는 바로 그때였다.
남대문 쪽에서 황금정으로 질주해 오는 한대의 빈 「택시」 ── 괴한은 손을 번쩍 들어 「택시」를 멈추질 않는가.
『앗! 저 놈이 「택시」를 멈추었다! 여보 운전수! 빨리 저 「택시」를 따라 가 줘요.』
하고 아까 효자동에서 광화문까지 타고온 자동차가 그 때까지 자기의 뒤를 스름스름 따르고 있던 것을 본 유탐정은 자동차에 올라 타자마자 그렇게 외쳤다.
『네, 염려 마십쇼! 약주값만 톡톡히 주신면야 ──』
『약주값은 염려말고 시퍼런 영감님 한장!』
그 때는 벌써 괴한을 실은 「택시」가 우렁찬「엔진」소리와 함께 황금정 쪽으로 쏜살같이 날고 있을 때였다. 그 뒤를 따르는 유탐정의 자동차 ── 과연 약주값 십원의 효과는 즉시로 나타났다. 반도「호텔」앞까지 왔을 때에는 두 자동차 사이가 불과 오십 「미─터」, 황금정 네거리에 다달았을 때는 삼십「미─터」, 그리고 거기서 왼편으로 「커─브」해 가지고 종로 네거리까지 왔을 때 두 자동차는 마침내 어깨를 나란히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유불란은
『앗차!』
하고 부르짖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어찌된 노릇인가?
『빈 「택시」가 아닌가?』
텅빈 객실 ── 운전수가 수상스럽다는 얼굴로 「택시」를 멈추면서
『대체 무슨 일이 생겼소?』
하고 도리어 유불란에게 묻는 것이다.
『무슨 일이라니? 이제 방금 부청 앞에서 태운 손님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땅으로 자잣는지 하늘로 올라갔는지 연기처럼 없어진 사나이였다.
『아, 그 키 작은 손님 말씁입니까?』
『응! 얼굴에 칼자리가 있는 손님!』
『그는 지금 쯤 본정통을 산보하고 있을 겁니다.』
『뭐, 본정통?』
하고 반문하는 유탐정이었으며
『앗, 속았구나!』
하고 재차 외치는 유불란이었다.
그 때야 유불란은 저 황치인(黃齒人)의 요술을 짐작하고 마음속으로 감탄하였다.
그놈은 『── 사실 지금 쯤은 본정통을 산보하고 있을거다.──』
하고 신음하는 유불란에게 「택시」 운전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그 손님은 왼편 문으로 자동차에 오르면서, 앗차! 내가 긴급한 용건을 잊었구나 하고 외치며, 운전수 미안합니다, 한마디를 남겨놓고 이번에는 바른편 문으로 내려서 우편국 쪽으로 뛰어갔읍죠. 뛰어 내리면서 일원짜리 지폐 한장을 쥐어주길래 꼬라지는 못 생겼을 망정 인사성 있는 양반이라고, 난 또 기분이 좋아서 한참 몰아댔더니…… 그런데 그가 도둑놈입니까?』
그러나 그 때는 벌써 타고온 자동차에 다시 뛰어 오르며
『청운정!』
하고 부르짖은 유불란이었다.
두말 할 것 없이 청운정 황세민교장을 찾으려는 것이다.
유불란 탐정이 다시 자동차를 몰아 청운정 황교장의 집을 찾았을 즈음 ── 황교장은 서재 팔거리 의자에 깊이 파묻혀 그 어떤 심각한 명상에 잠겨 있었다.
『아 그럼 그것이 유불란씨 였었읍니까! 나는 또 그 놈의 패거리인줄만 알았지요.』
유불란의 설명을 듣고난 황교장은 단지 그것 한마디뿐, 그 밖엔 아무말도 없이 묵묵히 앉아서 담배만 피우고 있다.
『그런데 황선생!』
하고 그 때 유불란은 안색을 가다듬고 황교장을 쳐다보았다.
『무엇보다 먼저, 지금 황선생의 입장이 대단히 불리하다는 사실은 다른 사람들 보다도 황선생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황교장은 아무 대답도 없다.
『왜 그런가는 제가 새삼스러이 설명할 필요조차 없을 것입니다. ── 그러니까 제가 제 입으로 이것저것 선생께 질문을 발하는 것 보다도 선생이 자진해서 제가 알고 싶어하는 모든 의혹을 풀어 주신다면 이상 더 기쁜 일은 없겠읍니다.』
하고 황교장을 다시 한번 빤히 쳐다 보았으나 황교장은 그저 푹푹 담배만 피울 뿐이다.
『어떻습니까 선생님? 선생과 백영호씨의 관계, 그리고 오늘밤 여기 나타나서 선생께 삼만원을 강청하던 그 괴한과 선생의 관계를 좀 말씀해 주실 수 없겠읍니까? 그의 입을 빌어 말하면 백영호씨와 백남수씨를 해친 것이 선생이라는 의미 같았었는데…… 그러나 그것은 저로서도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니만큼 어째서 그가 그런 말을 하는지…… 저는 거기 대한 만족한 대답을 선생께 기대하고 있읍니다. ──』
『네 ──』
하고 그 때 비로소 황교장은 대답 하였다.
『오늘밤 유불란씨가 제게 보여준 호의는 대단히 감사하다고 생각합니다.
허나 지금의 나로서는 거기 대한 만족한 답변을 해드리지 못함을 역시 유감이라고 생각합니다.』
황교장은 그리고 『에헴』하고 한번 기침을 한 다음에
『어째서 그 놈이 나를 일부러 백영호씨와 백남수군을 해친 범인이라고 인정하는지, 그 점에 대해서 나 역시 꿈같은 이야깁니다. 그러니까 나로서는 단지 그 점에 대한 변명을 해드리면 그만이겠고, 그 외에 관해서는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니까, 대단히 유감된 일이나마 유불란씨의 의혹은 하나도 만족하게 풀어 드릴 자격을 갖지 못했읍니다.』
하고 잠깐 말을 끊었다가
『백영호씨가 살해를 당한 시각에 나는 지금 앉아 있는 이 서재에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할 사람은 우리집 식모일 것이며 백남수군이 살해를 당한 시각에는 내가 학교사무실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할 사람은 학교 소사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기 대해서 무슨 의심이 가는 것이 있다면 유불란 자신이 한번 면밀히 조사해 보시는게 좋을 듯 싶습니다.』
하고 그 외에는 오불관연이라고 뚝 잡아떼는 황교장의 태도였다.
『아니올시다. 이제도 말씀드린바와 같이 그 점에 대해서는 저 역시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 바이니까 조사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습니다. 단지 제가 황 선생께 묻고자 하는것은 백영호씨와 선생의 관계올시다. 아까 그 괴한의 말을 빌것 조차 없이 선생과 백영호씨 사이에는 비단 칠십만원 제공문제뿐 아니라 그 외의 어떤「델리케이트」한 관계가 잠재해 있다고 생각하는데……』
『글쎄올시다. 유불란씨가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그거야 할 수 없는 일이지요. 그러나 백영호씨와 나와의 관계는 칠십만원 제공문제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똑똑히 말해두는 바입니다 ──』
아무것도 말하지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굳게 결심한 듯한 황교장의 태도에 유불란은 잠깐 동안 묵묵히 앉아있다가 다시 계속하였다.
『선생이 그 처럼 강경한 태도를 취하신다면 나로서 이상 더 이렇다 저렇다 물을 필요 조차 없읍니다. 이 처럼 극히 불리한 입장에 서 있으면서도 모든 것을 침묵으로서 일관하신다면 문제는 오직 시간이 흐름에 따라 해결되기를 기다릴 수 밖에 없지요. 그러나 오늘밤에 일어난 일이 만약 임 경부의 귀에 들어간다면 대단히 재미있는 일이 생기리라고 생각합니다.
『할 수 없는 일이이죠!』
『그런데, 한가지 ──』
하고 유불란은 「포켙」에서 한장의 사진 ── 남수가 살해를 당한 직후 남수의 「포켙」에서 수첩과 함께 빼낸 문제의 처녀 사진을 꺼내어 「테이블」위에 내놓았다.
『선생도 이와 똑같은 사진을 가지고 계신 듯 싶은데 ──』
하고 황교장의 안색을 살피는 순간
『엣?』
하고 놀라는 황세민씨였다.
『이것은 남수군이 어디선가 주웠다는 사진인데, 선생도 아시다싶이 이와 똑같은 것을 백영호씨 살해사건이 일어난 직후, 이층 미술품 수집실에서도 한장 주웠읍니다. 물론 해월이가 떨어뜨린 것에 틀림이 없는데……』
황교장의 얼굴에는 일순 걷잡을 수없는 오뇌의 빛이 뭉게뭉게 떠돌았다.
『선생은 이 사진속의 인물을 누구보다도 잘 아실줄 믿습니다!』
그러나 황교장은 그 때 머리를 좌우로 흔들면서
『모릅니다. 나는 그런 인물을 조금도 모릅니다!』
하고 부르짖었다.
『모르신다면 그 것 역시 할 수 없는 일이고……그리고 선생은 저 무서운
「부부암(夫婦岩)의 비밀」도 모르실 것입니다!』
『부부암의 비밀? 뭐, 부부암의 비밀?』
그 말이 유불란의 입에서 떨어지자 황교장은 외치며 후닥딱 의자에서 뛰어 일어난 것이다.
『그것 조차 모르신다면 전 그럼 이만 오늘밤은 실례하겠읍니다. ──』
하고 유탐정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모릅니다! 모릅니다!』
하고 고함치는 황교장의 목소리를 등뒤에 들으며 창황한 발걸음으로 황세민의 집을 나섰다.
『그렇다. 황세민씨의 입으로 부터 그러한 비밀이 손쉽게 줄줄 터져 나온다면 탐정이란 일이 뭐 어려울 것도 없는게 아닌가!』
유불란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열 두시가 가까운 밤거리를 전차도 탈 생각 없이 태평동 자기집까지 터벅터벅 걸어왔다. 현관을 들어서니 젊은 서생이 기다리고 있다가
『전보가 왔읍니다.』
하고 앞서서 이층 서재로 뛰어 들어갔다.
『어디서?』
『「샌프란시스코」에서요.』
『「샌프란시스코」? ──』
두말 할 것 없이 「로스안젤스」에 사는 사립탐정 「존‧피─터」로 부터 온 전보일 것이다. 과연 전보는 「존‧피─터」로 부터였다. 「샌프란시스코」의 「윌리엄‧엔더─슨」과 황교장에 관한 전보인데 전문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간단히 적혀 있었다.
「윌리엄‧엔더─슨」은 당시(當時)의 명망있는 목사(牧師) ── 二十年[이십년] 전까지 남지나해(南支那海)에서 해적(海賊)생활을 계속하던 황(세민) ── 상세한 것은 후보로 ── 피─터
呉相相[오상억]의 歸京[귀경]
[편집]『황세민이 해적이었다?』
전보를 구겨쥐고 부르짖는 유불란 탐정이었다. 황교장의 과거가 결코 순탄한 생활이 아니었던 것만은 유불란도 벌써부터 짐작하고 있었으나 그러나 그와 같은 암흑의 일면을 가진 황세민인줄은 실로 예측도 못했던 일이었다.
이제와서 생각하니 저 싯누런 이빨을 가진 괴상한 사나이의 어딘가 해상 생활자인 듯 싶던 풍채와 해적이라는 무서운 과거를 가진 황세민과를 아울러 미루어 볼 때 황교장과 그 괴한과 의 관계가 단언할 수는 없으나 어렴풋이 머리에 떠오르는 유불란이었다.
그것은 두말 할 것 없이 황교장과 괴한은 같은 해적시대의 친구였을 것이며 한걸음 더 나아가서 괴한은 옛적 친구였던 황교장의 그 어떤 비밀, 그 어떤 중대한 약점을 잡아가지고 황교장의 손으로부터 적지 않은 금품을 번번히 갈취해 가곤 한것만은 넉넉히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해적이었던 황세민교장! 음 ──』
하고 유불란은 다시 한번 신음하 듯 중얼거리며
『그러면 그 해적이었던 황교장과 해월의 손에 무참히 죽은 백영호씨와는 대체 어떠한 관계가 잠재해 있을까?……백영호씨와 황교장과 복수귀 해월과 ── 이 세 사람이 다 같이 꼭 같은 인물의 사진을 가지고 있다! ──』
유불란은 새로 한시가 거의 가까운 경성시가를 물끄러미 내려다 보았다. 광화문 네거리에 오다가다 선 가로등불이 여름밤 무더위에 피곤한 듯 조을고 있다.
그 때 탁상 전화의 벨 이 「 」 고요한 밤공기를 뒤흔들며 요란하게 울리었다.
유불란은 그 어떤 예감에 가슴을 두근거리며 수화기를 들었다.
『유불란입니다. 어디십니까?』
『명수댑니다. 주은몽씨를 경비하는 임세훈이 올시다.』
저윽이 흥분한 임경부의 목소리였다.
『네, 네, 그런데 이 밤에 왜 그러십니까? 무슨 변괴가?……』
하고 묻는 유불란의 말에
『아니올시다. 아직 변괴는 없지만, 하옇든 무슨 사건이 또 일어날 것 같아서요. …… 다른 게 아니라 오상억 변호사가 여행으로부터 돌아와서 지금 막 경성역에 내렸는데……』
『그래서?……』
『그런데 지금 오변호사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자기 신변이 대단히 위태롭다고요. 여행할 목적은 충분히 달했으나 여행 중 수차나 해월의 습격을 받아가면서 간신히 경성역까지 피해왔지만 경성역에서 명수대까지 오는 도중이 대단히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오변호사는 지금 살해를 당한 백남수씨와 똑같은 처지에 서 있는 사람이니만큼 어느 때 어디서 해월의 습격을 받을지 모르니까, 경비대를 경성역까지 파견해 달라는 전화가 외서 나는 은몽씨 때문에 이 자리를 떠날 수 없고 해서 본서로 전화를 걸어 십여 명의 경비대를 보냈는데…』
하는 임경부의 보고를 들은 순간 유탐정은
『나도 곧 가겠읍니다. 그런데 임경부께서는 절대로 은몽씨의 신변으로부터 떠나서는 안됩니다.!』
유불란은 전화를 끊으려다가 다시 말을 이어
『그리고 임경부께서 본서로 전화를 걸어 삼청동 정란씨를 경비할 순경 약 오 륙 명만 파견해 주시도록 힘써 주십시요!』
하는 말에 임경부는
『삼청동은 뭐 경비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그렇게해야 된다면 그렇게 하겠지만 정란씨야 뭐 그리 위험하지 않은데요. 그뿐만 아니라 문학수가 계시고…』
『아닙니다! 은몽씨보다도 정란씨의 신변이 더 위태합니다! 그러니까 곧 수비를 해 주십시요!』
유탐정은 대답을 기다릴 여유도 없이 전화를 끊고 밖으로 뛰어 나갔다.
태평동 자기 집을 뛰어나온 유불란 탐정은 때마침 지나가는 빈 자동차를 잡아 타고 깊어진 여름 밤거리를 곧장 명수대를 향하여 질풍처럼 달리고 있었다.
오변호사가 『 여행중 수차나 해월의 습격을 받았다!』
이 한마디가 얼마나 놀라게 했는가는 나중에 이르러서 알리워질 것이나 하옇든 그 한 마디가 지금까지 쌓아온 공상탑(空想塔)을 뿌리채 뒤집어 얻고야 말았던 것이다.
『해월이가 어느새 그리고 어떻게 오상억의 뒤를 따라 갔던가?』
그것이 유불란 탐정으로서는 도저히 풀을래야 풀 수 없는 한개의 신비였다.
만일 유불란의 추리(推理)가 사실과 어그러짐이 없다면 해월은 도저히 오 변호사의 뒤를 따라갈 여유가 없었던 때문이었다.
『모를 일이다! 알 수 없는 일이다!』
마치 열병환자처럼 중얼거리는 유탐정은 그 순간까지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오상억의 보고에 눈앞이 아찔해짐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 나는 지금까지 생각하고 있던 모든 것을 잊어버려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출발을 해야겠다! 나의 출발점이 너무 공상적이었고 너무 탐정소설적이었던 탓이다! 그렇지 않은가! 나는 지금 탐정소설속의 인물이 아니고 한 개의 생생한 현실 속의 인물이다! 탐정은 모름직이「리알리스트」여야 한다. 「로맨티스트」여서는 아니된다!』
그것은 인적이 끊어진 한강인도교를 건느면서 한 유불란의 마음속의 외침이었다.
유불란의 머리는 혼란할대로 혼란하였다. 여기저기서 삐쭉삐쭉 나오는 수 없이 많은 의혹의 실마리를 대체 어떻게 처리하야 할지를 몰랐다.
『처음부터, 맨 처음부터 다시 출발해야 된다!』
그렇게 자신에게 타일렀을 즈음, 자동차는 벌써 명수대 공작부인의 저택 현관 앞에서 머졌다.
여기저기 정원내를 파수하는 경찰에게 인사를 받으며 유탐정은 현관을 들어서 이층 응접실로 올라갔다.
유불란은 층층대를 올라가면서 그 층층대의 한층한층이 자기와 공작부인 주은몽의 지나간「로맨스」를 이야기해 주는 것 같아서 우울하기 비할데 없으면서도 할편「초코렛」맛처럼 달콤한 감정이 사르르하고 가슴속으로 스며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순간의 일에 지나지 못하였다. 해월은 지금 최후의 발악을 하려고 하지않는가.
응접실에는 임경부와 은몽이 마주앉아 있었다. 오변호사가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오변호사가 돌아 왔다지요.』
유불란은 임경부와 은몽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그렇게 물었다.
『네, 아까 전화로도 간단히 이야기했지만 오변호사의 신변에는 항상 해월의 감시의 눈초리가 떠나지 않는다고요. ──』
임경부였다.
『이같은 밤중에 오시라고해서……』
하고 은몽은 적지않게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유불란을 바라보았다.
『오변호사가 여행을 떠난지 벌써 닷새나 되었지요?』
『네, 꼭 닷새만이에요.』
『그런데 ──』
하고 이번에는 임경부를 향하여 물었다.
『그 동안 은몽씨의 신변에는 아무런 사고도 없었읍니까?』
잠깐 무엇을 생각하던 임경부는
『아까 유불란씨 말씀대로 삼청동 정란씨 댁에 경비대를 파견했읍니다만은 몽씨 보다도 정란씨가 한층 더 위험하다는 이유는 대체 무엇입니까?』
『아 그것은 ──』
유불란은 순간 무척 당황한 얼굴로
『그것은 단지 나의 부질없는 추측이니까, 이 자리에서 뭐라고 단언 할 수는 없읍니다. 그러나……』
하고 뒷말을 이으려하던 바로 그 때였다.
경비대의 보호를 받으면서 무사히 도착한 오상억 변호사가 종이장처럼 창백한 낯으로 응접실 안으로 들어 섰다.
창백한 얼굴로 허둥지둥 들어 서는 오상억 변호사를 맞이하는 임경부, 유불란, 주은몽 ── 일동은 엄숙한 표정으로 오상억을 바라보았다.
오상억은 의자에 몸을 던지 듯 털썩 주저 앉으며 그 때서야 비로서 자기가 무사히 돌아왔다는 안도에
『후우 ──』
하고 긴 한숨을 지었다.
일동은 말이 없다. 여름 밤은 깊을대로 깊어가고 방안은 어지러운 침묵에 가득 찼다.
대리석처럼 싸늘하고 백납처럼 새파란 오상억의 얼굴, 한일 자로 굳게 다운 입술이 도무지 열릴 줄을 모른다. 그 굳게 다문 오상억의 입술을 임 경부는 호기심에 빛나는 눈동자로 쳐다 보았고, 은몽은 어린애처럼 울상을 하고 바라보았고 유불란은 , 가장 엄숙하고 가장 심각한 눈초리로 쏘아 보았다.
『여행하신 목적은 충분히 달하셨어요?』
하고 먼저 그 무서운 침묵을 깨뜨린 것은 은몽의 떨리는 목소리였다.
오상억은 시선을 돌려 싸늘한 눈초리로 은몽을 바라보더니 이윽고 다시 임 경부를 향하여 머리를 돌리며
『대단히 비겁한 말씀입니다만 이 집 주위의 경비는 든든 하겠지요?』
하고 비로소 입을 열었다.
『아, 그것만은 염려 마시오. 정복 사복을 한 십여 명이 정원과 정문 밖에서 엄중히 경비하고 있으니까요. 개새끼 한 마리라도 기어들 수 없을 만큼 수비가 되어 있습니다.』
하는 임경부의 말을 그래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방안을 한번 휘 둘러 보며
『좀 더울지 몰라도 들창문을 전부 잠가 주시면 좋겠읍니다. 그리고 「도어」에도 자물쇠를 잠그고요.』
하고 청하였다.
『그렇게 안심이 안된다면 잠그지요. 그러나 그럴 필요는 조금도 없지요.
보시는 바와 같이 들창 밖에 정복 순경이 지켜 있지 않습니까?』
『그래도 잠그기로 했으면 좋겠읍니다. 먼저번 남수군이 살해를 당했을 때도 「도어」를 잠그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 때 유불란이 일어 서면서
『만사는 든든히 하는게 좋겠읍니다. 좀 더워도 오상억씨 말씀대로 사방문을 꼭 잠급시다.』
하고 손수 돌아가면서 들창과「도어」를 꼭꼭 잠가버렸다.
『자아, 이만했으면 아무리 해월일지라도 이 방안에는 한발자욱도 드려 놓지 못할테니까 ──』
그렇다! 해월이가 아무리 위대한 힘과 초인적 재주를 가졌더라도 이같이 커다란 그물처럼 사민팔방을 봉해버린 방안에야 어찌 감히 침입할 수 있을 것이랴.
『자아, 안심하고 이야기 하십시요. 이 방은 요행이 천정에 구멍도 뚫리지 않았으니까!』
하고 도로 제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그제야 오상억도 어지간히 안심한 듯 「아이스ㆍ커피」를 한꺼번에 주욱 드리키고 나서 어디서부터 이야길 해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모양으로 잠깐 동안 복잡하게 떠오르는 사념을 가다듬은 후에
『무엇보다도 먼저, 나는 이번 여행으로 말미암아 문제에 사진속의 처녀가 누군지를 알았읍니다.』
하고 일동을 바라보았다.
『누구예요, 그가?』
오상억의 말이 입술에 떨어 지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은몽은 재빠른 말씨로 그렇게 물었다.
『의외의 인물 ── 뜻하지 않았던 실로 의외의 인물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 보다도 한층 더 무서운 비밀을 나는 알았읍니다!』
『무서운 비밀?』
임경부와 은몽이 동시에 이렇게 반문하였다.
『그렇습니다.! 살인귀 해월이가 어떠한 인물인지를 나는 알고 있읍니다!』
『해월이가 어떤 인물인줄 알으셨다고요?』
하고 은몽은 연거퍼 물었다.
『알았읍니다. 그리고 해월이가 이 거치른 세파에 탄생하기 까지의 그 무서운 비밀, 그 악착한 숙명의 실마리를 발견했지요.』
『그럼, 해월이도 역시 백영호씨의 고향인 평양 ×천 사람입니까?』
하고 물은 것은 임경부였다.
『그렇습니다! 역시 ×천서 출생한 해월이었지요. 아아, 저 「부부암」에서 벌어진 무서운 죄악!』
경탄하 듯 이야기하는 오상억이었다.
『부부암의 죄악?』
오상억의 이야기에 항상, 그리고 누구보다도 놀라는 것은 은몽과 임 경부였다.
『부부암의 죄악이란 ── 뭐예요?』
『부부암의 죄악이란 ── 그렇습니다! 한마디로 말 못 할 기나긴 역사를 가지고 있지요. 그 부부암의 비밀을 탐지하기 위하여, 그리고 그것을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탐지했기 때문에』
이것좀 보십쇼. 나는 하마터면 생명을 잃어버릴뻔 했읍니다. ──』
하고 오변호사는「싸이드ㆍ테이블」위에 놓인 자기의「파나마」모를 사람들에게 보였다.
『총알구멍이 아니에요?』
은몽은 놀랐다.
『그렇습니다. 해월이가 쏜 탄환구멍이지요.』
『아이 무서워! 어쩌면 ──』
은몽은 오그라질 듯이 몸을 웅크리는 것이었다.
다행이 탄환은 모자꼭대기 손잡이를 옆으로부터 꿰뚫었던 것이다. 한치만 더 낮았더면 탄환은 오상억의 이마를 산적처럼 옆으로 꿰뚫고 지나갔을 것이다.
『하마터면 큰일날뻔 했군요!』
하는 임경부의 말에
『그러나 나는 다행이 무사했지만……』
하고 다음 말을 이으려할 때
『아, 오상억씨 ──』
하고 그의 말을 막는 것은 그 때까지 잠자코 있던 유불란이었다.
『이야기 하시는 것을 중단하여서 죄송합니다만 오상억씨가 서울을 떠나서 부부암의 비밀을 탐지하기까지의 자세한 경로를 한번 체계있게 이야기해 주시면 좋겠읍니다.』
오상억도 유탐정의 말을 옳다 여기고 잠깐동안 착잡한 머리속을 더듬으려는 듯 말을 끊었다가
『내가 ×천읍에 도착한 것은 그 이튿날 아침이었습니다. ──』
하고 다시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천읍은 여러분도 아시다싶이 대동강 하류에 접한 조그마한 읍인데, 하구(河口)에 있는 진남포와 산을 하나 사이에 두고 서로 격리됐지요. 인가가 약 삼 사 백호나 될까요. 동편은 대동강에 임했는데 깎은 듯이 절벽이 솟아 있고, 남, 서, 북 삼면은 수림이 무성한 △산의 연봉이 평풍처럼 ×천읍을 빙 둘러 싸았읍니다. 평양서 진남포행으로 바꾸어 타고 진지동(眞池洞)까지 가서 거기서 다시 자동차로 약 한 시간 동안 산골짜기로 들어가면 ×천읍인데 ──』
하고 오상억은 거기서 잠깐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천읍에 도착한 것은 오전 열시 였읍니다. 얼마동안 읍내를 이리저리 싸다니다가 금강 여인숙(金剛旅人宿)이란 조그마한 간판이 붙은 객주집 비슷한데 들어가서 아침겸 점심을 먹은 후에 주인을 불렀지요. 이집 주인으로 말하면 나이가 한 삼십 여세 쯤 되어 보이는데 이십 여년 전까지 이 고을에 살고 있던 백영호라는 사람을 아느냐고 물었더니만, 그는 잠깐동안 백영호 백영호…… 하고 중얼거리더니 아, 저 지금 서울 어디서 산다는 그 백영호씨 말씁입니까 하고 그때야 비로소 생각난다는 듯이 마루 끝에 걸터 앉으며 의아스럽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는 것이었습니다. ──』
오상억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그리고 주인은 나를 의아스럽다는 『 얼굴로 쳐다보면서 거 이상하외다, 요 얼마 전에도 서울서 내려왔다는 젊은 신사 한분이 우리집엘 들렸었는데 그분도 역시 백영호라는 사람에 대해서 여러가지 묻습니다. 나는 원래 타고을에서 들어온 사람이 되어서 이십 년 전의 일은 모르는데요. ── 하는 것을 보니 그이가 신문을 통 읽지 않는다는 사실과 얼마 전에 서울서 왔다는 사람이 남수군이었던 것을 짐작할 수가 있었읍니다. 그래 이번에는 그 고을에서 상당히 오랫동안 살고있는 면장을 찾아 갔지요. 면장은 연세가 사십을 훨씬 넘은 사람으로서 내가 명함을 내고 백영호씨의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벌써 저 편에서는 나를 신문지상으로 안모양인지, 아 선생이 오상억씨십니까 하고 저윽이 놀라는 얼굴로 백남수씨가 또 살해를 당했다지요 하고 신문 지상에서 읽은 지식을 나열 하였읍니다. 면장의 이야기를 들은 즉 남수군도 역시 그를 찾아갔다는 것인데 자세한 사정은 모르나 어느 정도까지 백영호 씨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면장의 입장으로서는 이번 백남수 피살사건에 관한 보도에 접하여, 자기의 신변도 대단히 위험하다는 말을 하면서 그때 남수군에게 한 것과 대동소이한 이야기를 하였읍니다. ──』
거기까지 이야기한 오상억 변호사는 잠깐 동안 말을 끊고 일동을 바라보았다. 호기심에 가득찬 임경부와 은몽의 눈동자였다. 그러나 유불란만은 아무런 감동의 빛도 보이지 않고 묵묵히, 그리고 열심히 오상억의 이야기에 귀를 기우리고 있다.
면장이 오상억에게 한 이야기를 대강 추려서 말하면 다음과 같았다.
백영호가 ×천읍을 떠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이십 여년 전이었다. 그런데 백영호는 어려서 부터 양친을 여윈 고아로서 그의 백부인 백준모(白準模)의 손에서 자란 사람이었다고 한다. 칠 팔 십만원 ── 아니 백만 원에 가까운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 본래 백영호씨의 아버지 백창모(白昌模)도 그만한 재산을 지니고 있었으나, 그러나 백창모는 천성이 호탕하여 계집과 도박과 술로 말미암아 재산 전부를 탕진하고 그가 죽을 즈음에는 겨우 사오만원 밖에 남지 않았다.
백창모가 죽은 것은 아들 백영호가 겨우 여섯 살 되는 해 봄이었다. 백창모의 형 백준모는 조카 아들 백영호를 가련하다하여 자기집에 데려다가 자기 친 아들처럼 길렀던 것이다. 더구나 어렸을 때부터 천성이 총명한 영호를 삼촌 백준모는 자기 친아들 문호(文豪)보다도 더 귀여워하고 아끼었다.
백준모의 외아들 문호는 영호보다 세살 위였다. 문호와 영호는 친형제 처럼 같은 집에서 자랐다.
그런데 그들이 점점 성장하여 모두 이십 고개를 훨씬 넘어선 어떤 해 여름 백준모의 친아들 문호는 , 불행하게도 대동강에서 멱을 감다가 그만 다리에 쥐가 나서 영영 돌아오지 못할 물 귀신이 되고 말았다고 한다.
백준모의 비탄은 두말할 것도 없거니와 친형처럼 따르던 문호의 죽엄을 가장 슬퍼한 것은 영호였다.
『그 이듬해 가을, 백준모마저 세상을 떠난 후 삼촌의 유산을 상속한 백영호씨는 읍내서 장가들어 남철씨와 남수군과 정란씨를 낳아가지고 ×천읍을 떠나 서울로 올라왔다는 것입니다.』
오상억은 이야기를 끊고 담배를 붙여 물었다.
『그럼, 그 사진속의 인물은 누구예요?』
하고 물은 것은 은몽이었다.
『네 ── 그건 그 때 나는 문제의 사진을 면장에게 내보이었더니만 면장은 아, 그것 말씀입니까? 그것은 먼저 남수씨도 가지고 왔던 사진인데요 하고 그는 사진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의외의 이야기를 하였읍니다. ──』
罪惡(죄악)의 실마리
[편집]면장의 이야기를 요약하면 이 ×천읍에는 대대손손이 서로 원수같이 지내오는 두 가문이 있었으니 그 하나는 백준모의 조상 백씨였고 또 하나는 문제에 사진속의 처녀 선조인 엄(嚴)씨였다.
백씨와 엄씨가 어떠한 이유로 그렇게 사이가 나빴는지, 그것은 면장도 자세히는 알 수 없었으나 추측컨댄 옛날부터 양가는 문벌 다툼을 무척 세웠던 것만은 사실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백준모의 조부 때에 이르러서 백씨와 엄씨 사이에는 실로 입에 담아 이야기할수 없는 그 어떤 무서운 사연(邪戀) 사건으로 말미암아 백 씨가 엄씨를 죽였다던가 엄씨 편에서 백씨 문중의 한 사람을 해쳤다던가 하는 ─ 하옇든 정확한 사실은 알 수 없어도 그러한 종류의 사정으로 인하여 백 씨와 엄씨는 마치 개와 원숭이 처럼 서로 시기하고 미워하면서 지내었다고 하는 것이다.
가령 예를 들어 말하면 양가의 젊은이들이 혹시 산골짜기 같은데서 서로 만나는 때가 있게 되면 그들은 입술에 거품을 품어 가면서 제각기 제 조상이 훌륭하다는 것을 다투게 되어 마침내는 네가 옳으니 내가 옳으니 하다가 결국 이론으로 해결 짓지 못하는 것은 힘과 힘을 다하고 생명과 생명을 내놓아서 승부를 맺곤 하였다고─ 이것은 누구의 입으로부터 나온 말인지, 그 출처는 명확치 않으나 ×천읍의 노인네들은 대개가 다 그만한 것은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백씨나 엄씨는 모두 자손이 바른 집안으로서 백씨네만 하더라도 아우인 백창모가 백영호를 낳고 죽어 버렸고 형인 백준모의 외아들 백문호가 역시 이십 사 오 세 때 대동강에 빠져 죽었으니까, 백씨 가문을 대표하는 사람은 백준모였고 백씨를 길이길이 후세에 이어갈 사람은 단지 백준모의 조카아들 백영호 한사람 뿐이었다.
한편 엄씨 가문에는 더 한층 손이 귀했다.
백준모와 같은 세대의 인물로서 엄도현(嚴道玄)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이 엄도현으로 말하면 백준모와 나이가 비슷한 사람으로서 엄씨를 대표하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엄씨를 이어갈만한 사내자식이 없었다. 청렴한 선비로서 일생을 보낸 엄도현은 비록 자기의 대를 이을만한 손이 없다손 치더라도 소실을 두어 사내손을 보려는 그러한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도 전혀 손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비록 대를 이을 사내는 아니었을망정 귀여운 딸자식 하나가 그의 쓸쓸한 여생을 위로 하였던 것이다.
그 딸자식의 이름을 여분(汝粉)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여분이가 열 여섯살 되던 해 가을, 아버지 엄도현은 귀여운 딸과 정숙한 아내를 남겨놓고 세상을 떠나버리고 말았다.
『이 여분이야말로 문제의 사진속 처녀 그 사람이었읍니다!』
거기까지 이야기한 오상억 변호사는
『후우─』
하고 긴 한숨을 지으며 일동의 긴장한 얼굴을 둘러보았다.
『엣?─』
하고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외치며
『사진속의 처녀가 그 여분이라는 사람이예요?』
『그렇습니다. 엄도현의 무남독녀 엄여분이가 바로 이 사진 속의 인물입니다.』
『그러면 해월이가 어떻게 그 사진을 가지고 있었어요?』
하는 주은몽─
『그리고 백영호씨는 또 어떻게 그 사진을……』
하고 연거퍼 묻는 임경부─
『그리고 황세민씨는 또 어떻게 엄도현의 딸 엄여분의 사진을 가졌는가?……』
이것은 유불란 탐정이 마음 속으로 자기 자신에게 묻는 물음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유불란의 , 머리에는 황세민이란 사람의 윤곽이 점점 명확하게 떠오르는 것 같았다.
엄도현의 외딸 여분이가 바로 저 문제의 사진 속 처녀라는 오상억 변호사의 말에
『그럼, 엄 여분이란 사람이 현재도 ×천 읍에서 살고 있어요?』
하고 주은몽이 가장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오변호사를 쳐다 보았다.
『네 그것이─』
오상억은 점점 망설이는 모양이더니
『지금으로부터 근 삼십 년 전─ 그가 바로 열 아홉살 때 세상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백씨와 견원(犬猿)의 적이던 엄씨네 댁는 거기서 그만 끊어져 버렸다는 말씁입니까?』
하고 묻는 것은 임경부였다.
『그렇지요. 아버지 엄도현도 죽고 딸 여분이도 죽었으니까요.』
『그럼 오선생, 해월이와 여분이란 사람과는 대체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씀이에요?』
하는 은몽의 물음과
『그리고 백영호씨와 여분이와는 또 어떤 관계가 있읍니까?』
하는 임경부의 질문은 거의 동시였다.
오상억은 거기서 다음 말 머리를 찾으려는 듯이 잠깐 동안 주저하다가
『하옇든, 제 이야기를 좀 찬찬히 들어 주시요. 거기에는 실로 무서운 죄악의 실마리가 숨어 있답니다.』
하고 오상억은 그 때 방안을 한번 휘 둘러 보면서 자기의 생명을 노리고 있는 해월의 잔인한 눈초리를 무서워 하였다.
그러나 뚜겅을 덮은 모말과 같은 출입구란 출입구는 모두 잠그어 버린 방안 ─ 그가 기체(氣體)로 변하는 재주를 가졌다면 모르거니와 그렇지 못한 이상 해월은 도저히 오상억의 이야기를 조지(阻止)할 수는 통 없었다.
『면장은 대략 이상과 같은 사실을 나에게 이야기 하였지요. 여분이가 어떻게 죽었으며 여분이와 백영호씨의 관계가 어떠했는가?……그런 자세한 사정은 통 모르는 것이었읍니다.
그것도 그럴법한 것이 여분이가 죽은 것은 고향인 ×천읍이 아니고 어딘가 타 곳에 나가서 죽었다는 사망계(死亡屆)를 수리한 기억이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면장은 면서기 견습생으로 있었으니까, 더군다나 자세한 것은 모른다고요. ─ 그래 그 때의 수리한 사망계를 한시간 이상이나 걸려서 찾아보았더니 사망지(死亡地)는 평양 수옥리(水玉里) ××번지로 되어 있었읍니다. ─ 귀여운 딸 여분이가 죽자, 여분이 어머니도 고향에서 살 맛이 없었던지 얼마되지 않는 가재를 정리해 가지고 ×천읍을 떠났다는 것이었읍니다.─』
『그러면 여분이의 사망지인 평양 수옥리를 탐지해 보셨읍니까?』
하는 임경부의 말에
『네, 나도 처음에는 그럴 도리 밖에 없다고 생각해 보았지요. 그러나 일은 무척 순조롭게 진행 되었읍니다. 나는 그 때 그 여분의 집안 사정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더니만 면장은 저번 백남수씨에게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엄씨네 집안 사정을 잘 알 사람은 당시 엄씨댁에서 절가(머슴)살이를 하던 홍(洪)서방 내외일 것이라고요.─』
면장의 이야기를 들으면 홍서방은 지금 오십을 조금 넘어선 중늙은이인데 여분이 모친이 ×천읍을 떠난 후, 그도 어디론가 이리저리 방랑하다가 본처가 죽어서, 지금으로부터 삼년전에 젊은 계집을 하나 데리고 ×천읍으로 돌아와서 술장사를 차려 놓았는데, 그가 술만 한잔 얼근하면 항상 하는 말이, 이 세상은 악한 사람이라야 살아 나간다고 ─ 그리고 그는 어디 금광을 하나 가지고 있는데 석달에 한번, 혹은 반 년에 한번씩 금광엘 갔다오면 그의 호주머니에는 시퍼런 백원짜리가 여남은 장, 많을 때는 이 삼십 장씩 들었다는 것이었다.
『그래 나는 부리나케 홍서방네 술집을 찾아 갔읍니다.─』
오상억 변호사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그리하여 나는 삼십 년 전 엄씨댁에서 머슴살이를 하던 홍서방네 술집을 찾아갔읍니다. 그 즈음부터 나는 나의 신변에 누군지는 똑똑히 알 수 없으나 나를 항상 감시하고 있는, 그 어떤 눈초리를 느꼈읍니다. 나를 따르는 것 같은 인기척에 불현 듯 뒤를 돌아다보곤 하였읍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읍니다. 나중에 생각하니 그것이 살인귀 해월이었지요. 그래 내가 이상하다, 이상하다, 하는 느낌을 항상 느끼면서 홍서방을 찾은 것은 그날 오후 다섯시 경이었읍니다.─』
홍서방네 술집은 조그마한 개울을 끼고 바로 다릿목 옆에 있었다. 기와집 이층으로서 「나까이」가 다섯명이나 되는 것을 보니 홍서방의 호주머니가 예상 외로 충실한 모양이었다.
아랫층 온돌방에는 주정뱅이 술꾼들이 「나까이」들을 가지고 희롱이 한창이다.
서울서 왔다는 말을 듣고 그의 젊은 아내는 후다딱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어떻게 찾아왔느냐는 한마디 물음조차 없이 부리나케 이층으로 뛰어 올라가는 것이었다.
얼마 후에 호잠뱅이를 무릎까지 걷어 올린 홍서방이 부채질을 연거퍼 하면서 몸이 무겁다는 듯이 좁은 층층대를 내려오는 것이었다.
웬 여석이 또 찾아왔느냐는 『 , 극히 귀찮아하는 표정이었읍니다.─ 이윽고 나와 홍서방은 이층 개울에 면한 시원한 방에 마주 앉았읍니다. 이층에는 그의 젊은 아내와 그의 전처 딸이라는, 보기에 스물 대 여섯 쯤 되어 보이는 여자가 앉아 있다가 홍서방의 눈짓과 함께 아래로 내려가 버렸읍니다.
듣건데 그의 전처 딸은 근 이십년 동안이나 어떤 곡마단(曲馬團)에 따라 다니다가 바로 몇달 전에 돌아왔다는 데, 보기에 상당한 미인이었읍니다. 그러나 불행이도 벙어리였읍니다. 그것은 하옇든─』
하고 오상억은 이제부터가 이야기의 중요한 줄거리라는 어투로 일동을 둘러보면서 다탄 담배 꽁초를 재털이에 던졌다.
『홍서방과 같은 악당도 세상엔 드물겁니다. 아무리 공교로운 말을 써서 달래보아도 글쎄올시다, 글쎄 그런 자세한 사정은 모른대도 그럽네다 그려 ─ 하는 단지 그 몇 마디를 가지고 나의 물음을 끝끝내 회피하고자 하는 능청스러운 자였지요. 그는 단지 내가 면장한테서 들은 정도의 이야기 이외에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마치 칼로 베듯이 딱 잡아떼는 것이었읍니다. 그러한 홍서방과 약 세시간 동안을 아느냐 모르느냐를 계속하다가 나는 마침내 그의 앞에 시퍼런 백원짜리를 한장 꺼내 놓았지요. 그러나 홍서방은 눈끝에도 차지 않는다는 듯이, 원 천만의 말씀을 다 하십니다. 백원짜리가 제 아무리 신통한 힘을 가졌기로 모르는 사실을 알게 하는 재주야 있겠읍니까?
원 ─ 하고 담배만 퍽퍽 피우지요. 그래 이번에는 두 장을 더 꺼냈읍니다.
그러나 역시 빙글빙글 웃기만 하길래 다시 다섯장을 꺼내서 도합 팔백원을 그의 앞에 쭉 늘어놓았더니만 그때야 비로소 비굴한 웃음을 입가에 띄우면서, 마저 채워주시지요, 하는 것이었읍니다. ─』
거기까지 이야기한 오상억은 신이 나는 듯
『이리하여 결국 천원을 받아 쥐고야 비로소 홍서방은 사실 말하자면 열 장도 눅은(싼)셈이지요. 히히 ─ 하고 그 무르익은 대추처럼 시뻘건 코구멍으로 한번 웃어댄 후에 나의 귀를 잡아 당겨서 자기의 입에다 갔다대면서, 부부암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은 이 넓은 세상에나 나 혼자니까요 히히 ─ 하면서 자기 아내를 불러 술상을 차려다 놓고 다음과 같은 기나 긴, 그리고 무서운 이야기를 시작 하였읍니다. ─』
일동의 얼굴은 긴장할대로 긴장해 졌고 무더운 여름밤은 밀폐한 방안을 삶드시 깊어간다.
독자제군이여 이제부터 ! 백씨 가문과 엄씨 가문사이에 벌어진 아름다운
「로맨스」인 동시에 무서운 죄악의 실마리를 이야기하고자, 무대는 지금으로부터 삼십 년 전으로 기어 올라가야만 한다.
그것은 물론 홍서방의 입으로부터 아무런 질서도 없이 잡연(雜然)히 흘러 나온 이야기를 오상억 변호사가 자기의 풍부한 상상력으로 혹은 부언하고 혹은 생략하여 다음과 같은 하나의 질서있는 「로맨스」를 구성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지금까지 오리무중 잠겨 있던 사건의 중요한 인물인 살인귀 해월의 기구한 과거가 한폭의 아름다운 그림을 보듯 우리들의 눈앞에 전개되었다.
제군이여! 제군은 벌써 면장의 이야기를 통하여 백씨와 엄씨의 두 가문이 옛날부터 피치못할 하나의 숙명적 원한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그러나 거기 대해서는 이렇다할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았으므로 자세한 사연은 알 수 없었으나, 듣건대 백씨의 조상 한사람이 엄씨의 조상 한 사람에게 실로 극악무도한 모욕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백준모의 조상 한사람이 시집가는 날 ─ 그것은 보슬비가 내리는 어떤 늦은 봄이다. ─ 엄도현의 조상 한사람이 불한당과 작패하여 시집가는 도중에서 신부를 약탈해 가지고 산골짜기로 끌고가서 능욕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양가에서는 실로 저릿저릿한 유혈의 참극이 일어났다.
신부를 능욕한 엄도현의 조상은 백씨문중의 북수의 습격을 받아 무참히 살해를 당하였을뿐만 아니라, 원한에 찬 복수의 칼날은 그의 사지를 오리오리 찢어서 행길가 나무가지에 걸어놓고 오고가는 사람들의 조소와 증오를 받게 하고 시체는 굶주린 까마귀들의 양식이 되어 버렸다.
이러한 피의 역사를 가진 백씨와 엄씨가 대대손손이 서로서로를 견원지적으로 삼아온 것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백준모는 아들 문호와 조카아들 영호를 사람없는 방에 불러다 놓고 그러한 과거를 가진 자기네 조상의 피와 능욕의 역사를 이야기한 후에
『엄도현은 우리의 적이다! 원수다!』
하고 부르짖곤 하였다.
『엄도현을 학자니 뭐니 하면서 사람들은 가장 청렴한 선비로 떠 받고 있지만, 사실 알고 보면 그의 피에는 그와 같은 더러운 수성(獸性)이 섞여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엄도현이가 젠척하고 잘난척하고 나를 가르쳐 인색한 고리대금업자의 아들이라고 멸시하지만 아무리 고리대금업이라도 내 아버지 너의 할아버지 ─ 몸에는 그러한 더러운 핏줄기는 섞여 있지 않아!
엄도현이 제깐놈이 뭐가 잘났다고?……』
그럴 때 백준모의 이야기를 옳다여기고 조상이 받은 모욕을 자기 자신의 모욕처럼 분해하고 쓰라려하는 것은 그의 조카아들 영호였다.
『큰아버지! 큰아버지는 왜 엄가에게 복수를 안하십니까?』
타오르듯 하는 조카아들 영호의 눈동자를 귀엾다는 듯 바라보면서
『시대가 다르다. 옛날과는 달라서 힘과 힘, 몽뚱이와 몽뚱이를 가지고 싸울 수는 없들 때다. 너의 조부께서 고리대금까지 하여가면서 축재(蓄財)에 힘을 쓴 것도 청빈(淸貧)을 유일한 재산으로 뻗히는 엄씨 일가에 대한 ─ 말하자면 시대적 복수에서였다. 그러니까…』
『그러나 큰아버지! 그건 너무 소극적인 복수가 아니예요? 좀 더 적극적으로 ─』
하고 삼촌의 그 시들어가는 복수심을 항상 자극시키는 영호였다.
백준모는 이처럼 타오르기 쉬운 영호를 무척 사랑하였다. 자기와 같은 주견, 같은 감정을 가지고 엄가를 욕설하는 조카아들을 무척 귀여워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백준모의 아들 문호는 한마디의 동의도 표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자기 아버지 백준모와 자기의 사촌동생 영호가 그 처럼 엄씨 일가를 아무리 미워하고 욕을 하여도 문호는 아직 단 한번도 그들에 가담해본 적이 없었다.
문호는 언제든지 그들의 주고받는 흥분한 대화를 안색을 가다듬고 극히 엄숙한 태도로 잠자코 듣고 있을 뿐이었다.
아버지 백준모는 그 너무나 감동할줄 모르는 자기 아들의 마음속을 헤아릴 바 없어서
『너는 그대 조상이 받은 모욕을 조금도 쓰라리다 생각하지 않느냐?』
고 물을 때가 있어도 문호의 굳게 다문 입술은 통 열릴출을 몰랐다.
『그러면 네 애비의 생각을 그르다 하느냐?』
아버지의 음성은 차차 노기를 품고 높아갔다. 그래도 대답이 없는 문호였다.
『그러면 너는 엄씨 조상의 그 짐승 같은 행동을 옳다하느냐?』
그러나 아무리 준렬한 아버지의 다짐이 있을지라도 문호는 엄숙한 얼굴로 머리를 푹 숙으리고 입술을 꽉 깨물을 뿐이다.
아버지 백준모는 마침내 참다 못해
『에익, 고약한 놈 같으니!』
하고 꿰엑 소리를 치며
『애비의 말이 아무리 그르다해도 ─ 아니 설사 그르면 그르다고 자식으로서의 간언이 있을 법이지, 네 놈처럼 애비의 말을 처음부터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법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이냐?』
하고 담뱃대로 성급히 놋재털이를 두드리면서
『이놈! 좀 얘길 해보아라. 쓰다달다는 말이 없이 네가 그 처럼 잠자코 있는데는 필경 이 애비의 말이 네 귀에 거슬린다는 뜻일게다. 이놈, 그러면 그렇다고 바른대로 말을 못해? 비겁하기 짝이없는 놈 같으니!』
노기가 중천한 삼촌을 만류하면서 그 때까지 옆에 조용히 앉았던 영호가 문호를 향하여 입을 열었다.
『문호형님, 형님의 변명을 듣고자하는 아버님의 뜻이 이같이 간절하거늘 형님은 어째서 그렇게 대답이 없으십니까? 형님도 백씨의 혈육을 받으셨다면 아버님의 그 천 만번 당연한 말씀이 형님의 귀에 거슬릴리는 만무하지 않습니까?』
하고 이번에는 목소리를 좀 낮추어 문호의 귀에 입을 대고 속삭이 듯이 ─ 그러나 삼촌이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의 음성으로
『형님, 이번 기회에 그만 형님의 그 어려운 사정을 부친께 이야기해 보시시지요. ─』
하는 말에 문호는 놀라며
『뭐, 그럼 자네는 벌써…』
하고 숙으렸던 머리를 번쩍 들었다.
『네에 형님의 비밀을 저는 모두─』
하고 「비밀」이란 말에 힘을 주었다. 그것은 두말 할 것 없이 삼촌 백준모가 좀 들으라는 영호의 가장 자연스러운 꾀였던 것이다.
『뭐, 비밀? 문호가 무슨 비밀을 가졌어?』
하고 왈칵 달려드는 백준모에게 문호는 정중히 읍하면서
『아버지, 불초 문호를 용서하십시요!』
하는 단지 그것 한마디를 남겨놓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이놈! 나가긴 어딜 나가! 이놈!』
하고 아들을 쫓아 나가려는 삼촌을 만류한 영호는 낮으나마 엄숙한 목소리로
『큰아버지, 면목 없소이다. 선조에 대하여 뵈일 낯이 없소이다!』
『뭐? 선조에 뵐 낯이 없다?』
『네에, 벌써부터 여쭙고자 하였으나─』
『아니, 대관절 문호가 어떻게 되었단 말이냐?』
하고 성급한 백준모는 조카아들 영호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영호는 숨을 가라앉히려는 듯이 잠깐 동안 수심이 만면한 얼굴로 묵묵히 앉아있다가 마침내 머리를 들었다.
『큰 아버지, 문호 형님이 엄여분과─』
하고 말끝도 채 맺기 전에
『뭐, 문호가?』
하고 외치면서 백준모는 눈앞이 아찔해짐을 깨닫고 방바닥에 펄썩 주저 앉았다.
『문호가 엄여분과 대체 어찌 되었단 말이냐?
「로미오」와 「쥴리엣」
[편집]그날밤 ── 여분은 삼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글방에 들어 앉아서 조그마한 책상에 몸을 기대고 깊어가는 여름밤을 외로히 지키고 있었다.
이러한 외로운 밤은 천년이고 만년이고 같이 살다가 같이 죽자고 맹세에 맹세를 거듭한 그리운 낭군과 더불어 같이 지낼 수 있다면 여분은 얼마나 기뻤으랴. 마음대로 되지않는 이 말썽 많은 세상을 여분은 얼마나 미워했으랴.
여분은 나이 자라 금년 열 아홉 ── 삼년 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신 날, 여분은 처음 맛보는 그 비길데 없는 슬픔을 원수의 후손 백문호의 품안에서 풀었던 것이다.
『여분아, 슬퍼한들 뭣하니? 사람이란 누구나 다아 한번씩은 죽는거지. 너도 나도 한번씩은 죽는단다 ──』
『싫어, 싫어! 난 안 죽을래! 너도 죽으면 안돼!』
하며 문호의 품안에서 느껴울던 삼년 전을 여분은 생각한다.
하필 원수의 자손을 눈여겨볼 까닭이 어디 있느냐고 제 마음에 열번 스무 번 물어본 여분이었으나 사랑이란 도리어 그러한데서 더 많이 생기기 쉬운가보다 하였다.
이윽고 여분은 몸을 일으켜 발을 반 만큼 걷어들고 밖을 내다보았다. 행여나 문호의 그림자가 보이지나 않을까?
무더운 밤이건만 화단에 어린 창백한 달빛이 한결 시원해 보이기도 하였다.
『너 아직도 안자니?』
안방에 불은 벌써부터 꺼져있건만 어머니는 아직 잠이들지 않으신 모양이다.
『잠이 안와요 어머니 ──』
『어서 자거라. 자고 깨고 자고 깨고 하노라면 세월도 흐르고, 세월이 흐르면 마음도 흐르는 법이란다. 어서 자거라!』
『어머니 어서 주무세요.』
『자래도 그래! 마음이 약하면 몸도 약해진다고, 네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다. ── 글쎄 너도 철이 없지, 그게 글쎄 될법한 노릇이냐?…… 너 네 아버지가 살아 계시다면 설마 죽이기야 하겠니만 넌 벌써 집을 쫓겨 났겠다.
──』
『어서 주무세요, 어머니!』
『응, 너도 어서 자거라. 홀 에미라고 깔보았단 안된다. 안돼 ── 어서 이 놈의 고장을 떠나야 겠다. 음 ──』
우는 듯한 어머니의 자비스러운 목소리에 여분은 다시 발을 내리고 방바닥에 쓰러져 느껴 울기 시작하였다.
『어머니 용서하세요! 어머니, 어머니!』
눈물을 흘리면서 마음속으로 그렇게 외치는 것이었다.
『그렇게 너그러우신 어머니를 이처럼 괴롭히는 이년을 아버지, 할아버지, 하루 바삐 저승으로 잡아 가소서!』
그러나 다음 순간 여분의 귀밑에 쟁쟁하니 떠오르는 것은 며칠 전 문호와 자기가 저 부부암에 나란히 앉아서 주고 받던 이야기의 한구절이었다.
『천년만년 살고지고……』
『천년만년 살고지고……』
여분은 그만
『아아 ──』
하고 애닲게 느끼면서 그 연약한 손톱으로 방바닥을 무섭게 긁어대는 것이었다. 벗어진 손톱사이로 흐르는 선혈 ── 바로 그때였다. 어디선가
『애기씨, 애기씨!』
하고 여분을 부르는 목소리가 낮으막히 들려왔다.
여분은 불현 듯 눈물어린 얼굴을 반짝들고 귀를 기우렸다.
『애기씨, 주무세요? 애기씨! ──』
목소리는 분명히 들창문 밖에서 들려오는 것이었다. 사나이의 음성이다.
여분은 사방을 한번 휘 둘러본 후에 몸을 일으켜 들창을 열었다. 들창 밖은 바로 담장이고 담장 박은 바로 행길이다.
달빛을 등지고 담장 위에 엉거주춤 올라앉은 사나이의 그림자 ── 여분은 후다닥 놀라며
『거 누구세요?』
하고 가늘게 불렀다.
『애기씨 접니다. 저예요 ──』
『오, 춘길이! 난 또 누구라고?』
그것은 머슴 홍춘길(洪春吉) ── 현재 술장수하는 홍서방이었다. 춘길네 부부는 여분네 바로 옆집 오막살이에서 살고 있었다.
술과 도박과 싸움을 유일한 취미로 여기는 머슴 춘길이 ── 그런 춘길이가 오늘밤 담장 위에 올라 앉아서 주인집 애기씨 여분을 부르는 까닭은 무엇일가?
『애기씨, 백씨댁 도령이 이 편지를 애기씨에게 갖다 드리라고요.』
하면서 내놓은 것은 달빛에 허엽스레하니 보이는 한개의 흰 봉투였다.
『빨리, 저리로 내려 가!』
여분은 봉투를 받아 들며 춘길이를 그렇게 재촉하였다.
『부부암에서 기다리시겠다고요.』
『알아 알아! 들키기 전에 빨리 내려가래도 그래!』
춘길은 담장 밖으로 사라지고 여분은 봉투를 뜯었다.
달은 밝고 마음은 어둡고 그대 그리는 마음 비길데 없어서 오늘밤도 부부암에서 자정을 기다리노라. 만나면 하고 싶은 말 태산 같건만 못다하고 헤어지는 마음 슬프고 애달퍼라. 그래도 오늘밤만은 하고싶은 말 다 하리다.
그리던 낭군 백문호의 낯익은 글씨였다. 여분은 편지를 착착 접어서 젖가슴 밑에 쓰러넣은 다음에 옥색치마에 만만제 장날 사온 회신을 갈아 신고 불을 끄고 뜰아래로 내려갔다. 안방에 계신 어머니는 주무시는 모양이다.
이리하여 대문밖을 나선 여분은 좁은 개천을 끼고 하류로 하류로 자꾸만 내려갔다. 부부암까지는 그리 멀지는 않았으나 길이 무척 험하다.
자정이 가까운 산골짜기 길을 여분은 모든 두려움을 잊어버리고 허둥지둥 걸었다.
개천이 점점 넓어져 간다. 여분은 왼편 가파로운 숲 사이 길로 들어 섰다.
그 숲 사이 길을 꼭대기까지 올라가면 거기가 바로 부부암이다.
부부암은 대동강을 멀리 발밑에 내려다보는 절벽 위에 있었다. 그리 크지 않은 두개의 바위가 아름다운 「로맨스」를 속삭이 듯 가지런히 앉아서 대동강을 내려다 보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백년 전인가 이백 년 전인가 ── 이 ×천골에 길동이라는 열 일곱 난 총각과 보배라는 역시 열 일곱살인 처녀가 살았는데 보배는 명망 높은 재상의 후손이었고 길동은 그 댁 하복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이 너무도 짝이 기운 자기네들의 신분을 저주하여 오던 나머지 어떤날 밤, 두 처녀 총각은 신을 가지런히 벗어놓고 이 벼랑위에서 몸을 던져 대동강 푸른 물속으로 뛰어 들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신을 벗어놓은 그 자리에서 두개의 돌뿌리가 움터 나오기 시작하더니 사흘만에는 현재 보는바와 같은 거의 한길이나 되는 두개의 바위가 돋아 났다고 ── 그 후부터 사람들은 그것을 부부암이라 불렀다고 하는 하나의 「로맨틱」한 전설이 서리어있는 바위였다.
여분은 마침내 달빛이 얼룩얼룩 어린 숲새길을 더듬어서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여분은 후우하고 숨을 내쉬며 주위를 돌아다 보았다.
부부암 한편쪽 바위 위에 달빛을 등지고 물끄러미 벼랑밑을 내려다보고 앉아 있는 사나이
『오오, 여분이!』
사나이는 바위 위에서 몸을 일으키며 여분을 맞이하였다.
여분은 달려 가자마자 문호의 품안에 안기우며,
『보고팠어요! 안탑갑게 보고팠어요!』
하며 삼단같이 길게 땋아느린 머리를 사나이의 가슴속에 파묻었다.
『나도나도……얼마나……』
그러나 문호의 굵다란 목소리는 끝을 채 맺지 못한채 그만 중단 되었다.
원수의 아들과 원수의 딸은 대대손손이 지켜오던 철석같은 가헌(家憲)을 헌 신짝같이 저버리고 그 애달픈 마음과 고달픈 영혼을 이 일순간에서나마 마음껏 하소연 하려는 것이었다.
희미하게 비치는 여름밤 달빛 아래서 두 사람의 그림자는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떨어질줄 모르고 흑흑 느껴우는 것이었다.
『우리가 이렇게 서로 만나보는 것도 이젠 한달 밖에 안 남았어……』
여분이의 우는 목소리였다.
『한달 밖에? 왜?』
문호의 놀라는 목소리였다.
『한달 밖에……한달 밖에!』
『여분이, 대관절 그게 무슨 말이야?』
『한달 후엔 이 ×천골을 떠나겠다고……어머니가, 어머니가 그러시는 걸!』
『………』
원수의 자식이라도 『 문호만은 사람이라고 ── 그러시면서 어머니는 늘 칭찬은 해도, 아무리 너그럽게 생각해도 원수는 원수라고 ── 원수의 자식에게 제 딸을 시집보내진 못하겠다고…』
『음……』
하고 깊이 신음하면서
『여분이가 이 골을 떠난다면 나도 이 골을 떠날테야! 여분이 없으면 난 못 살아! 난 죽을테야!』
『죽으면 난 싫어! 죽지 말아요!』
『우리들의 사이를 오늘 아버지께서 아시고 날 죽이겠다고……』
『아버지께서? 건 또 어떻게?』
『영호가, 영호자식이 그만 우리들의 사이를 눈치채고 아버지께……』
『영호가?』
하고 여분은 깜짝 놀라며
『뱀같은 사람! 사갈같은 사람! 난 지금까지 아무말도 안하고 있었지만, 저번에도 개천가에서 날 붙들고 제 색씨가 돼달라고, 전 얼마안 있으면 백만장자가 된다나 뭐 ── 그래 아버지 재산은 아들이 상속하는 법이지, 조카 아들이 무슨 소용있느냐고 그랬더니, 그래도 두구보라고, 그리고 날 극진히 사랑하는 증거라고 그러면서, 어디서 났는지 저번 평양서 찍은 내 사진을 주머니에서 꺼내 보이는 거에요.』
『음 ── 그랬던가? 글쎄 책상설합에 넣어 두었던 여분이의 사진이 얼마 전부터 도무지 보이지 않았어.』
두 사람의 이야기는 거기서 한동안 그쳤다.
여분은 부부암에 몸을 의지하고 댕기 꼬리를 잘근잘근 깨물면서 달빛이 꿈결같이 어린 대동강을 멍하니 내려다본다.
문호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얼마 동안을 잠자코 서 있다가 이 귀찮은 사파를 일순간이라도 잊어 버리자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여분아! 저 물이 어디까지 흐르는지 너 아니?』
『우리 그만 죽을까?』
『…………?』
『이 벼랑에서 길동이와 보배도 죽었는데 뭐 ──』
『…………』
『그만 죽고 싶어!』
『저 물이 어디까지 흐르는지 여분은 모를 걸?』
『저 물은 ──』
『저 물은?』
『남포까지 흐르지 뭐.』
『그리군?』
『황해바다까지 흐르고 ──』
『또 그리군?』
『또 그리군, 그리군 ──』
『그리군 황해에서 인도양으로 인도양에서 대서양으로 ──』
『대서양에선?』
『태평양으로……』
『태평야에선? ──』
『또 황해바다로 흐르지!』
『그럼 뺑뺑 돌아만 다니게?』
『커다란 배를 타고, 저 물결을 따라 세계를 한번 돌아 다녔으면 ──』
『얼마나 좋을까!』
『그럼 죽을 필요는 없지.』
『누가 정말 죽쟀나 뭐 ──』
이리하여 문호와 여분은 달이 거의 지도록 도저히 허락 되지 못할 애달픈 사랑을 부부암에서 속삭이었다.
문호와 여분이의 사랑이야말로 현대의 「로미오」와 「쥴리엣」의 애끓은 사랑 그것이었다.
부부암에서 내려온 문호가 동리밖 개천가에서 여분과 헤어져 자기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 백준모는 자지않고 기다리다가 문호를 사랑으로 불러들였다.
『거기 좀 앉아라!』
아버지 목소리는 무척 온유하였으나 그 부드러운 음성 속에는 그 어떤 엄숙한 결심이 감추어져 있었다.
문호는 아버지 앞에 끓어 앉아서 머리를 숙으렸다.
『밤새로독 어떤 일이 있었느냐? ──』
『아버지!』
문호는 숙였던 머리를 들었다.
『지금에 이르러 무엇을 숨기리요.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하여 엄씨댁 외딸 엄여분과 같이 있었읍니다!』
『음 ── 그러나 너는 단지 이 애비의 말을 거역했을뿐만 아니라 이 백씨 가문의 조상을 모욕하였다는 사실을 못깨닫는단 말이냐?』
아버지의 얼굴은 점점 핏기를 잃어간다.
『열번 스무번 깨닫고 있읍니다!』
『그러면 그 처럼 자각을 가진 네가 엄가의 후손과 정을 통하다니, 그것이 자각있는 사람으로서 감히 취할 길인가?……』
『문호야!』
하고 아버지는 힘을 주어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네? ──』
『엄가의 딸과 정을 끓어버릴 생각은 없느냐?』
문호는 대답이 없다. 아버지의 얼굴을 묵묵히 쳐다볼 뿐이었다.
『엄가의 딸과 정을 끓어버릴 생각은 없느냐?』
아버지는 다시 한번 그렇게 다졌으나 역시 문호의 다문 입은 통 열릴 줄을 모른다.
『대답이 없는 것을 보니 정분을 끓어버릴 생각은 없다는 말이로구나!』
『아버지!』
문호는 한발자욱 앞으로 가까이 다가 앉으며
『불효 소자를 용서하십시요!』
하고 머리를 다시 숙였다.
『용서하라는 뜻은?』
『아버지!』
『어서 말을 해봐라!』
『소자는 아버지의 허락없이 엄여분과 백년해로를 언약하였읍니다.』
『그래서?』
『아버지!』
『말을 해봐!』
『소자는 엄여분과 백년해로의 언약을 하였읍니다.』
『그 말 뿐이냐?』
『엄여분은 소자의 아내입니다!』
『그말 뿐이냐?』
『엄여분은 소자의 아내입니다!』
『그말 뿐이냐?』
『여분은 소자의 아내입니다!』
『에익! 고약한 놈 같으니!』
거기까지 이르자 백준모의 노기는 마침내 화산처럼 폭발하고야 말았다.
『아무리 지각이 없는 짐승이라도 어버이의 은혜는 갚는다는데, 하물며 사람으로 태어나 원수의 자식과 정분을 통하다니…… 이놈! 개새끼같은 놈 같 으니……』
백준모는 치를 부들부들 떨며
『이놈, 비록 네가 백씨성을 부른대도, 이 백준모를 애비라고 불러서는 안 되리라! 너는 오늘부터 내 아들이 아니니 썩 썩 이 집을 나가! 나가!』
『아버지!』
『아니 썩 못 나갈테냐?』
백준모는 드디어 아들의 등살을 쥐고 끌어 올리며 문밖으로 떠밀어냈다.
『아버지!』
『썩 못나갈테야?』
『아버지 ── 그럼 아버지 안녕히……』
그 날밤, 문호는 날이 채 밝기 전에 짐을 조그맣게 꾸려 가지고 정처없이 자기집 대문을 나섰다.
기왕 쫓겨난 몸일진대 여분을 한번 찾아보고 떠나리라 하였다. 아니 될 수만 있다면 여분과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먼 나라로 달아나 버리고 말리라 하였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문호는 개울을 끼고 여분네 집을 향하여 걷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문호는 달빛이 희미하게 비치는 개울 다릿목까지 다달았을 때 돌다리 위에 엉거주춤 하니 앉아 있는 한 사나이의 그림자를 발견하였다.
『아, 백씨댁 도령이 아니십니까?』
하고 물으면서 다가오는 것은 틀림없이 여분네집 머슴 홍춘길이었다.
『아 춘길이가 아닌가?』
『아니, 도령님, 이거 웬일이십니까? 이 밤중에 어딜 행차하시길래……』
춘길은 그러면서 문호의 차림차림을 보고 놀라는 것이었다.
『애기씨를 또 좀 불러주게!』
하고 문호가 충실한 심복 홍춘길에게 대강 이야기를 전하였을 때 춘길은 한번 더 놀라면서
『애기씨는, 애기씨는……』
하고 중얼거릴 뿐이었다.
문호가 홍춘길을 지금까지 충실한 심복이라고 믿었던 것이 불찰이었다. 춘길은 문호에게만 충실하였을뿐 아니라, 문호의 사촌아우 영호에게도 충실하였던 것이다. 자기에게 술값과 도박대만 넉넉히 쥐어주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도 충실한 심복이 될 수 있는 그러한 종류의 인간이었다.
『애기씨가, 애기씨가 어떻게 되었단 말인가?』
문호는 불길한 예감을 등골에 느끼면서 홍춘길의 손목을 부여잡고 흔들어 댔다.
『애기씨는, 저 애기씨는……』
춘길은 좀체로 입을 열지 않는다.
춘길의 그 비굴한 눈치를 알아차린 문호는 지갑을 꺼내어 지폐 두장을 내어주면서
『자 스무냥이다! 애기씨가 어떻게 되었단 말인가?』
이리하여 문호가 머슴 홍춘길의 입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 아까 여분이 가 부부암으로 문호를 만나러 집을 떠난 바로 조금 후에, 영호가 춘길을 불러 술값을 톡톡히 쥐어 주면서 여분을 꾀어내달라고 하길래, 부부암으로 가보라고 하면서 문호와 여분이가 늘 부부암에서 만난다는 이야기를 했노라고 ──
『그런데 대관절 어떻게 된 노릇인지 지금껏 안돌아 오시는데요. …… 그래 너무 걱정이돼서 이렇게 잠을 못자고 애기씨를 기다리는데요.』
그러나 그 때는 벌써 부부암을 향하여 쏜살같이 뛰어가는 문호였다.
춘길은 하루밤에도 여러 차례씩 자기 수중에 들어오는 술값을 머리속으로 세어 보다가 대관절 일이 어떻게 되는가고 문호의 뒤를 따르기 시작하였다.
아까 문호와 여분이가 부부암에서 애달픈 사랑을 속삭이고 있을 때, 춘길의 말을 듣고 따라올라간 영호는 으슥한 숲속에 숨어서 그들을 감시하고 있다가, 두 사람이 헤어지는 것을 보고 여분을 어디론가 꾀어 냈을거라고 생각하면서 춘길을 한사코 문호의 그림자를 놓치지 않고 따랐다.
그러나 문호가 산비탈길로 부부암을 향하여 뛰어 올라가던 그 때였다.
달빛이 희미하게 비치는 숲새길을 아래로 뛰어 내려오는 두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그것은 틀림없이 여분과 영호다. 쫓겨 내려오는 것은 여분이고 따라 내려오는 것은 영호였다.
『여분이가 아닌가? ──』
절반은 딩굴듯이 뛰어 내려오는 여분을 왈칵 붙잡고 문호는 그렇게 부르짖었다.
『아악 ──』
하고 울면서 문호의 품안에 쓸어지는 여분이 ── 신발은 벗어지고 옷은 무참하게 흩어지고 ── 따라 내려오던 영호가 우뚝 멈추었다.
『짐승같은 놈! 저 놈은 저 놈은 나를……』
그렇게 영호를 저주하면서 문호의 품안에 쓸어졌던 여분은 흩어진 치마허리를 움켜 쥐고 몸을 일으켰다.
골수에 찬 원한이 복받쳐오는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여 여분은 다시 산비탈길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 내려가는 것이었다.
『영호야!』
문호는 한발자욱 다가서면서 그렇게 영호를 불렀으나 영호는 무엇을 생각했는지 뒷걸음질을 하면서 다시 부부암이 있는 꼭대기로 기어 올라갔다.
문호는 영호의 뒤를 따라 올라갔다.
이윽고 두 사나이는 달빛어린 대동강을 멀리 내려다보는 부부암 앞에서 마주 서게 되었다.
그러나 두 사나이는 말이 없다. 성난 황소처럼 마주선 두 사나이 ── 거기에는 다만 어두운 침묵이 있을 뿐이다.
『영호야!』
얼마 후 마침내 문호가 입을 열었다.
그러나 영호는 통 대답이 없다. 영호는 영리한 사나이였다. 말을 하는 사이에 그는 생각하여야 한다.
『영호야 너도 사람이냐? ──』
하고 문호는 재차 물었다.
『흥! 원수의 자식을 아내로 삼으려는 문호만 사람인가?……우리 조상의 원수를 갚은 이 영호는 사람이 아니고? 나는 오늘밤 백씨가문을 대표하여 엄가가 우리조상에게 준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엄가에게 복수했을 따름이다! 나는 여분이 년을……』
『이놈아! 바른대로 이야길 못해? 네 말이 참말이라면 너는 왜 원수의 자식 여분의 사진을 가지고 다니는거야? 아무리 네가 짐승 같은 놈이라도 남의 집 처녀를 능욕한다는 법이 ──』
그러나 그 순간
『앗!』
하고 외친 문호의 몸뚱이가 짚었던 조그마한 바위와 함께 벼랑 밑으로 툭 떨어지다가 벼랑 기슭에 돋은 키 작은 나무 가지를 붙들고 매어 달렸다.
『하하하! ──』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영호의 웃음소리 ── 문호는 죽어라하고 소나무가지를 붙잡았다. 외넝쿨에 매달리 듯 달랑달랑 매어달린 문호의 몸뚱이! 캄캄하니 내려다 보이는 대동강!
『하, 하, 하, 하 ── 문호 형님! 언젠가 한번은 이제 그 빠져나간 조그마한 바위에 형님을 세워 놓으려고 벌써 한달 전부터 벼르고 있던 것이, 오늘 밤에야…… 사실은 형님과 여분이 년이 매일처럼 이 부부암 근처에서 만난다는 말을 듣고 ──』
그것은 영호가 한달 전부터 문호를 해치려고 만들어 놓았던 무서운 함정이었다. 바위밑을 살짝 빼놓고 간드랑 간드랑 노는 그 바위 위에다 나무 가지를 덮어 놓고 ──
『너는 나를 정말 죽일테냐?』
무서움에 떨리는 문호의 목소리였다. 붙잡은 소나무 뿌리가 한오락 한오락 빠져 나온다.
『앗, 영호야! 빨리, 빨리 손을……』
극도의 공포로 말미암아 맹수처럼 부르짖는 문호 ── 그러나 영호는 엉거주춤하니 벼랑밑을 내려다 볼 뿐 ── 툭! 툭! 하고 끊어지는 나무 뿌리. 문호의 무거운 몸뚱이를 싣고 소나무 뿌리는 한줄기 한 줄기 끊어진다. 끊어질 때마다 흙덩어리가 우루루하고 문호의 얼굴을 덮어 버리는 것이었다.
『영호야! 영호야! 아, 앗, 손을, 손을 내밀어! 아, 앗, 이 비굴한 놈! 악마 같은 놈! 아앗 ──』
다음 순간 문호의 허엽스레한 몸뚱이는 빠져나간 소나무 구루와 함께 희미한 달빛 속을 일직선으로 떨어져 내려갔다.
점점 적어지는 몸뚱이 ── 이윽고 멀리 벼랑 밑으로부터 조그마한 돌을 던진 것과 같은 물소리가 「참방」하고 들린다.
이 무서운 광경을 컴컴한 숲속에 몸을 감추고 목격한 사나이가 있었다.
그것은 엄씨댁의 머슴 홍춘길이었다.
第三次[제삼차]의 慘劇[참극]
[편집]이리하여 영호의 머리속에서 고이고이 자라던 무서운 야심은 마침내 엄씨 댁의 무남독녀 여분을 능욕했을뿐만 아니라, 사촌형 문호를 부부암 절벽으로부터 영원히 대동강 물결속에 장사지내고 말았다.
그러한 무서운 죄악, 저릿저릿한 비밀을 아는 자는 이 세상에 백영호 자신과 무심히 서 있는 부부암 밖에 없으리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삼촌의 백만원에 가까운 유산 상속권은 이 영호에게 있다!』
그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부르짖었다.
더구나 그 날밤 문호가 아버지 백준모에게 쫓겨났다는 사실을 안 영호로서는 더욱 구실이 좋았다.
그런데 문호형님은 『 , 대관절 어디로 갔을까요? 노자나 착실히 주었읍니까?』
영호는 걱정이 되어 못견디겠다는 듯이 그러한 말을 때때로 삼촌에게 하였다.
『어딜 가서 빌어 먹던지, 그건 내 알바 아니다! 문호 놈은 내 아들이 아니니까 ── 빌어 먹다가 먹을 것이 없으면 굶어 죽겠지!』
그렇게 말로는 호기있게 내뿜는 백준모도 마음 속으로는 무척 쓸쓸했던 것만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었다. 설마 나가란다고 정말 나가버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형님도 홀아버지를 혼자 남겨두시고, 정말 나가버리면 어떻게 하겠다고 ──』
그렇게 문호를 꾸짖은 영호였다.
『음 ──』
하고 백준모는 신음하 듯
『내 자식이 원수의 딸과 정을 통하다가 쫓겨났다면 세상에 대할 면목이 없어. 그러니까, 죽었다고 그래라 죽었다고! 대동강에서 멱을 감다가 다리에 쥐가 나서 물에 빠져 죽었다고 그래!』
영호는 무심중에 한 삼촌의 말에 가슴이 뜨끔하였다.
『그렇게라도 꾸며 놓아야 내일이라도 동네 사람들을 볼 낯이 있지. 에이 집안이 망할라면 이럭저럭 망하는 거야!』
이리하여 동네 사람들은 문호가 정말 대동강에서 멱감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영호는 꿈에도 모르리라. 자기가 부부암에서 범한 무서운 죄악을 여분네 집 머슴 홍춘길이가 숲속에 숨어서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목격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영호는 통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허나 춘길이는 또 춘길이로서의 흉산(胸算)이 있었다.
문호가 벼랑기슭에 돋아난 조그마한 소나무가지를 죽어라고 붙잡고 영호에게 살려달라고 외치던 그 순간, 춘길이는 금시라도 뛰어 나가서 악마 백영호의 대가리를 갈라놓고 싶은 충동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춘길이는 다음 순간
『참아라 참아라! 참기만 하면 너는 일평생 밥걱정을 하지 않고도 살 수가 있지 않은가!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하고 마음속으로 외치면서 자기자신을 억제하였던 것이다.
그날밤 춘길은 자기 아내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너 남의 집 머슴살이에 싫증이 안나니?』
『싫증이 나도 할 수 없지 뭐 ──』
『할 수 없긴 왜 할 수 없어? 일평생 놀고 먹었다, 일평생 놀고 먹었어!』
『또 몇 푼 땄나보다.』
『흥! 투전판에서 생긴 돈으로야 일평생 먹고 사나? 가만있자! 너 백만 원의 십분의 일, 아니 십분의 일은 좀 과하지, 너 백만원의 백분의 일이 얼만지 아니?』
『미쳤나봐! 갑자기 ──』
『멍텅구리가 그런 걸 알면 멍텅구리 소리를 안 듣게. ── 만원이야 만원!
십만냥 몰라? 십 만냥! 히, 히, 히, 히 ──』
십원짜리 지폐를 모르는 홍춘길이의 눈앞에는 열냥(일원)짜리 종이돈 일만장이 함박눈처럼 우수수하니 자기 마당 위에 떨어지는 환상을 그리면서 뜬 눈으로 아침을 맞이하였다.
흩어진 치마 허리를 움켜 쥐고 부부암으로부터 뛰어 내려온 여분은 자기 방으로 가만히 들어가서 이와같은 간단한 유서를 써 놓고 비겁한 악마 백영호로부터 받은 치욕을 금할바 없어 자기의 더러운 몸을 죽음으로서 청산 하리라 결심하였다.
그러나 여분에게는 죽음까지 자유롭지 못하였다.
양잿물 그릇을 들이키려는 바로 그때, 안방에서 주무시던 어머니가 왈칵 달려 들었던 때문이다.
『이년아! 네 에미가 불쌍하다고 생각지 못하느냐? 죽기까지 결심한 일이라면 살아선들 왜 못한단 말이냐? 백문호가 그렇게도 그립다면 내 날이 밝거던 달려가서 머리를 땅에 묻고 청혼이라도 하겠다! 이년! 원수의 앞에서 머리를 굽히겠다는 이 홀에미가 가엾지도 않느냐……』
『아니예요? 어머니 아니예요!』
여분은 어머니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흑 하고 쓸어졌다.
어머니는 그 때야 옆에 놓인 여분의 유서를 들여다 보았다.
『두 사나이를 보았다! 아, 이년아 두 사나이를 보다니……』
여분은 얼마 동안 흑흑 느껴 울다가 마침내 오늘밤에 생긴 일을 숨김없이 어머님!
한 계집의 몸으로서 두 사나이를 맞이한 이 불효 여분은 죽소이다.
죽어서 행여 아버님 곁으로 가게되면 죄 많이 지은 이 몸을 한번 더 죽여 줍소서 하고 아버님께 빌겠오이다.
어머니에게 고백하였다. 어머니는
『음 ── 영호! 그 놈은 우리, 엄씨 조상에게 복수를 했구나!』
단지 그것 한마디뿐, 그리고는 이를 바드득하고 갈면서 입술을 꼭 깨물었다.
날이 밝자 동리 사람들이 어젯밤 영호와 더불어 멱감으러 나갔던 문호가 물에 빠져 온데 간데 없이 죽어버리고 말았다는 소문을 듣고 떠들면서 문호의 시체를 건지러 강으로 몰려 나갔다.
『문호가 죽었다?……』
이 한마디는 실로 여분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사실이었다.
『문호가 언제 어느 때에 영호와 함께 멱을 감으러 나갔던가?…… 어젯밤 자기는 자정 때부터 문호와 같이 부부암에서 약 한시간 동안이나 이야길 하고 있었고…… 그리고는 부부암에서 내려와 문호와 헤어진 바로 그 때, 영호에게 끌리어 다시 부부암에 올라갔다가 모욕을 당하고…… 다시 쫓겨 내려올 때, 문호는 어딜 가는지 봇짐을 지고 뛰어 올라가지 않았던가……』
거기까지 상념이 도달했을 순간,
『영호다! 영호가 죽였다!』
하고 여분은 외쳤던 것이다.
비록 보지는 못했으나 여분은 두 눈으로 본것처럼 그렇게 생각이 들었다.
『복수다! 복수를 해야한다!』
여분은 자기가 죽지 않은 것을 무엇보다 다행으로 여겼다.
그러나 조금 후에 머슴 홍춘길의 이야기를 듣고난 여분은 자기의 직감이 한조각 한조각 깨어져 나가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 그래서 백씨댁 큰 도령은 아버지에게 쫓겨나던 길에 아가씨를 한번 더 만나보시겠다고 하시면서 찾아 오시다가 다릿목에서 저를 만났읍니다.
그래 저도 애기씨가 안돌아와서 걱정이라고 그랬더니, 부리나케 부부암으로 다시 올라가시길래 저도 걱정이 되어 뒤따랐읍니다. 도중에서 저는 애기씨를 모시고 돌아오려다가, 그런 때 저 같은 놈이 나서기가 뭣해서 숲속에 숨었다가 애기씨가 내려오신 후에 부부암까지 따라 올라갔더니만, 큰 도령과 작은 도령이 뭐라고 아웅다웅 하시다가 큰도령은, 에이 너 같은 놈도 사람이냐 하고 침을 탁 뱉으시면서, 다시는 이 놈의 고향에 발을 안들여 놓겠다고요. 그러시곤 남포로 가는 앞재길로 봇짐을 지시고 떠났읍니다. ── 그런 걸 아마 백씨댁에서는 쫓아 버렸다고 해서는 동리사람 볼 낯이 없으니까, 물에 빠져 돌아가셨다고 해두는게 나을 것 같으니까 그랬을 겁니다. 그러니까 애기씨 조금도 염려 마십시요. 다시 발길을 안하시겠다고 그러셨지만 애기씨를 모시러 큰도령님은 , 이제 또 돌아오실 것입니다. 두고 보십시요. 제 말이 맞나 안맞나』
머슴 홍춘길의 이야기를 듣고야 여분은 비로소 모든 것을 안 듯 싶었다.
춘길의 말이 사실이라면 문호는 죽지않고 살아 있으니 어느땐가 한번은 자기를 찾아 주리라 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홍춘길의 흉악한 거짓말인줄이야 여분은 꿈에도 몰랐다. 더구나 열길이나 되는 높다란 벼랑 밑으로 떨어진 문호의 시체를 그 후 사흘 동안이나 찾아 보았으나 물살이 센 탓이었는지, 통 건질 수가 없었던 것이 한층 더 홍춘길의 말을 여분으로 하여금 신용케 하였던 것이다.
여분은 매일매일 문호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돌아와서 자기를 거느리고 먼 나라로 떠나 주기를 고대하였건만 벌써 물귀신이 되어버린지 오랜 문호가 여분을 찾을리는 만무하였다.
여분의 어머니는 그 날 밤, 영호가 여분이의 몸뚱이에 저질러 놓은 비밀을 꿈에라도 입 밖에 내서는 안된다는 것을 머슴 춘길에게 다진 다음에 그의 입을 봉하는 의미로 적지 않은 금액을 춘길이에게 쥐어 주었다.
『원 천만에 ── 이런 대금을…… 조금도 걱정 마십시요. 제 입이 찢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애기씨의 비밀을 누설할리야 있겠읍니까? 원, ……』
춘길은 이처럼 뭉텅이 돈이 자기 주머니에 슬슬 들어오게 된 자기의 팔자를 늘어지게 행복하게 여겼다.
한개의 비밀을 지켜 줌으로서 엄씨와 백씨 사이를 공교롭게 헤엄쳐 다니는 홍춘길의 계획은 예상보다도 더 정확히 들어 맞았던 것이다.
그가 백영호를 붙잡고 그 날밤 부부암에서 일어난 무서운 비밀 ── 사촌형 백문호를 벼랑밑으로 떠밀어 죽인 백영호의 죄악을 마치 눈앞에 보는 듯이 설명했을 때 영호의 놀람이 어떠했으랴. 홍서방이 근 삼십 년 동안 백영호로부터 받은 금액은 실로 거액에 달하였다. 현재도 그는 광산엘 갔다옵네 하고 어디론가 나갔다 오면 그의 수중에는 일 이천원은 반듯이 있었다. 물론 백영호로부터 갈취한 돈이었다.
『모두가 참을성 있는 탓이지! 그때 ── 문호가 벼랑 밑으로 떨어질 때, 젊은 혈기에 못견디어 벌컥 뛰쳐 나갔던들 내 팔자는 이렇게 늘어지진 못했을 걸!』
그는 늘 이렇게 생각하였다. 그것은 하옇든 부부암 사건이 있은지 보름 후에, 여분네 일가는 얼마 되지않는 가재를 정리해 가지고 대대손손이 살아오던 고향을 떠나버리고 말았다.
어머니가 딸 여분일 데리고 부랴부랴 고향을 떠난 것은 여분이의 뱃속에 벌써 삼개월이나 넘은 문호의 피가 고이고이 자라고 있었던 때문이다.
처녀의 몸으로서 ── 더구나 원수의 자식 문호의 피를 받은 여분의 신세를 어머니는 무척 미워하고 무척 가엾이 여겼다.
아무리 원수의 피라한들 피 그 자체에야 무슨 죄가 있으랴. 너그러우신 어머니는 여분이의 배가 더 커지기 전에 산설고 물설은 타향에 나가서 해산시키리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천 골을 떠나기 전날 밤, 여분은 어머니 몰래 부부암에 올라가서 자기의 배를 쓸어 보고 떠나간 낭군 문호의 옛자취를 더듬으면서 한루밤을 눈물로 세웠다.
언제 돌아올런지 알 수 없는 문호를 그리워 하면서 여분이가 다시 집으로 내려오던 도중에 그는 홍춘길이의 처를 만났다.
그때 춘길이의 처는 내일 아침엔 영원히 ×천읍을 떠나버릴 주인 애기씨 여분의 귀에 무엇을 속삭이었던가!
남편 춘길이가 절대 입 밖에 내서는 안된다고 열번 스무번 다진 무서운 비밀 ── 영호의 간계로 말미암아 그렇게도 그리던 문호가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는 무서운 사실을 알았다.
『역시 그랬던가?……』
여분은 놀라는 대신, 파리한 입술을 피가 흐르도록 꼭 깨물었다.
『영호야! 두고 보아라!』
여분이가 뱉은 이 한마디 ── 이 한마디야말로 이 기나긴 이야기의 근원이 되는 말이었으며 사랑의 처녀 여분으로 하여금 복수의 권화(權化)를 만든 무서운 서언(誓言)이었다.
고향 ×천읍을 떠난 여분이 모녀는 평양 옥리(玉里)에서 셋방살이를 하면서 여분이의 해임기(解姙期)를 기다렸다.
한달 두달 점점 커가는 자기의 배를 드려다 볼 때마다 여분은 이를 악물고 악마 백영호에게 복수하기를 수 없이 부르짖었다.
억울한 죽음을 당한 남편 문호를 위하여, 한걸음 더 나아가서는 백가에 모욕을 당한 엄씨 조상을 위하여 여분은 어떠한 일이있더라도 복수를 해야만 되겠다고 신명에게 서약하였다.
날이 가고 달이 옴에 따라 여분의 배는 커질대로 커져서 그 해 겨울 함박눈이 창밖에 소리 없이 내리는 날밤 여분은 마침내 아기를 낳았다.
그것은 옥과 같은 사내였다.
『애비없는 자식!』
얼마 후 정신을 차린 여분은 어린애를 물끄러미 드려다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
『보기 싫다! 울지 마라!』
그렇게 딸을 꾸짖은 어머니 자신도 얼굴을 가리고 코를 풀었다.
그러나, 아아 어찌 그리도 무심한 하늘인가!
여분은 해산한지 사흘만에 산후가 순조롭지 못하여 그만 열 아홉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여분은 세상을 떠나면서 비로소 저 부부암에서 일어난 백영호의 악착한 범죄를 어머니에게 이야기하였다.
『어머니, 저는 비록 가슴 속에 사무친 원한을 풀지 못하고 죽더라도 어머니만은 오래 오래 살아계시다가 얘가, ……얘가 자라거든 이 어미를 대신하여…… 그 놈 백영호게…… 백영호에게 이 어미의 원수를……』
『알았다. 알았어! 어서 편안이 죽기나 해라! 네 원수는…… 얘가…… 얘가 갚아 주리라!』
이리하여 어머니와 딸은 골수에 사무친 원한에 피눈물을 흘리면서 유명의 세계로 영원히 작별하였던 것이다.
한편 백영호는 어떻게 되었는가.
여분이 모녀가 ×천읍을 떠난지 일년 후에 삼촌 백준모가 세상을 떠났으므로 영호는 백만원에 가까운 재산을 상속하였다.
홍서방 춘길이의 말에 의하면 그 처럼 건장하던 백준모가 그와 같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도 제눈으로 보지 못했으니까 단언할 수는 없느나 필경 백영호의 잔인한 작위(作爲)가 숨어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백영호는 그후 읍내 어떤 관리의 딸과 결혼하여 남철(南鐵)(실종선고를 받은 남수의 형) 남수와 정란일 낳아 가지고 서울로 이사하여 갔는데, 그는 어렸을 때부터 조각(彫刻)에 남달리 우수한 재주를 가졌으므로 중앙으로 가서 그 방면에 대한 연구를 하겠다는 것이 고향을 떠난 유일한 동기였었다고 한다.
백영호가 ×천골에 살고 있을 때는 두말 할 것도 없이 그가 서울로 이사하여간 후에도 홍서방은 어느때나 생각나면 찾아 올라가서 물질적 보조를 적지 않게 받았다고 ── 이상이 홍서방의 이야기를 오상억 변호사가 생략하고 부언하여 가면서 꾸며놓은 「로맨스」였다. ── 백씨와 엄씨 사이에 서리어 있는 무서운 「로맨스」의 대강 줄거리.
홍서방은 그 때 술잔을 꿀꺽 드리키면서
『그때 여분 애기씨가 낳은 사내 자식 ── 그가 바로 해월이라는 승명(僧을 가지고 나타나서 名) 백영호씨를 죽이고 남수씨를 죽인 그 사람이지요?』
하고 얼굴을 들었다.
『그때 여분이가 낳은 사내 아이가 해월이었다?』
홍서방의 기나긴 이야기를 듣고난 오상억은 그 때야 비로소 엄씨와 백씨 사이에 얽히어 있던 모든 비밀을 알았다.
오상억은 시계를 꺼내 드려다 보았다. 길기 쉬운 여름밤은 벌써 자정이 훨씬 넘었던 것이다.
아침 여섯시 차로 상경할 예정이었던 오상억은 ×천읍을 떠나기 전에 문제의 부부암이란 곳을 한번 보고 올 셈으로 홍서방에게 그 뜻을 말했더니
『아, 그러시지요. 다행이 달도 밝고 한데 ── 』
하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리하여 오상억과 홍서방은 읍내로 흐르는 개울을 끼고 동편쪽 대동강을 향하여 걷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홍서방은 그때 여분이가 평양서 해산한 사실을 대체 어떻게 알았소?』
하고 묻는 오상억의 물음에 홍서방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여분이가 그처럼 어린애를 낳고 덜컥 죽고보니 여분이 어머니는 생각다 못해 이왕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머슴 홍춘길의 아내를 몰래 데려다가 약 일 년 동안이나 어린애에게 젖을 먹여 길렀다고 한다.
그때 홍춘길의 처도 바로 해산한 뒤라, 일은 무척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 후 여분이 어머니가 어린아일 데리고 어디로 갔는지 그건 도무지 알 수 없읍니다. 지금까지 종무 소식입니다. ──』
『그러면 그때 여분이가 낳은 어린애가 해월인줄은 어떻게 알았소?』
『그거야 확실한 증거가 없으니까 ── 그렇다고 똑 잡아 뗄 수는 없지만 ── 그 후 이런 일이 있었지요. ── 백영호씨가 이사하여 서울로 올라간 지 사 오년 후에, 해월이라고 부르는 열 대여섯 살 되어 보이는 애기중 한 사람이 이 ×천골에 나타나서 백영호씨에 관한 이야기를 자세히 묻고 간 적이 있읍니다. 그때 나는 무슨 볼일이 있어서 몇일 동안 평양엘 들어 갔었는데, 나중에 가만히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그것이 여분씨의 아들 같애요』
그런 이야길 하면서 두 사람은 숲새길을 더듬어 부부암으로 올라갔다.
『그러면 여분의 호적은 아직도 이×천읍에 있는가요?』
『예 있고말고요.』
『그럼 그때 여분이가 낳은 아들의 이름은 호적상 무엇이라고 적혀 있소?』
『그것이 말입니다. 호적에는 도무지 오르지 않았답니다. 그것도 생각하면 그럴 듯 하지요 . 애비어미 없는 애를 ── 더구나 원수의 피를 받아 난 애를 왜 호적에까지 올리겠읍니까? 그러니까 호적상으로야 여분 아기씨는 깨끗한 처녀로 죽었지요.』
바로 그 때였다.
홍서방과 오상억이 부부암 앞에서 캄캄한 대동강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고 있던 바로 그 순간 ── 등뒤로 부터
『탕 ── 』
하는 한방의 권총 소리가 고막을 찢는 듯 울리었다.
오상억은
『앗!』
하고 외치면서 땅위에 납작 업디었다. 오상억의「파나마」모가 휙 하고 땅 위에 나부끼면서 떨어졌다. 하마트면 총알은 오상억의 이마를 깰번 하였다.
『탕!』
하고 또 한방의 총소리가 울리는 것과 거의 동시에 벼랑 기슭에 섰던 홍서방의 몸뚱이가 짚으로 만든 인형처럼 흿뚝 하고 허리를 꺾으면서 희미한 달빛을 등지고 벼랑 밑으로 툭 떨어져 내려갔다.
『해월이다! 복수귀 해월이다!』
그렇게 마음속으로 부르짖으면서 아무런 무기도 갖지 못한 오상억은 땅 위를 벌벌 기어서 반대편쪽 숲속으로 몸을 감추었다.
『탕! 탕! ── 』
해월의 총소리가 저릿저릿하게 오상억의 등뒤를 따라 오는 것이었다.
劉探偵[유탐정]의 懊惱[오뇌]
[편집]이상으로 오상억 변호사의 기나긴 이야기는 끝났다.
사면 문을 꼭잠근 방안에서 사람들은 후우 하고 긴 한숨을 지으면서 훤하니 밝아오는 한강 일대를 들창밖으로 바라다 보았다.
『그래 나는 해월의 총소리를 등뒤에 들으면서 부부암을 뛰어 내려왔지요.
면장의 사택과 주재소에 들려서 홍서방의 최후를 보고하고 오늘 오후 차로 거기를 떠났읍니다. 차중에서도 나는 항상 해월의 무서운 감시가운데 있는 것만 같아서 ——』
오상억은 그러면서 방안을 한번 휘 둘러 보았다.
다행이 해월은 그 경비가 심한 저택안으로 침입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러면 대체 어떻게 되나요? 해월은 그러면 나를 죽이려는 것이 아니고……』
하고 은몽이 의아스럽다는 얼굴을 지었다.
그러나 그때 오상억이 대답하기 전에 임경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렇지요 해월이가 부인을 『 . 해치겠다는 것은 말하자면 제이의 목적이고 제일의 목적은 백영호씨 일가에 대한 복수입니다.』
『그렇습니다!』
하고 오상억은 임경부의 말을 지지하며
『이것은 물론 나의 공상에 지나지 못하는 추측이지만 ── 홍서방에 의하면 해월이가 열 대여섯살 적에 ×천읍을 방문하여 백영호씨의 소식을 캐물었다는 것으로 보아서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즉 여분의 아들은 그 후 점점 자람에 따라 할머니의 입으로부터 자기 아버지 백문호를 죽이고 자기 어머니 여분을 능욕했다는 백영호의 무서운 죄악을 알자 아버지의 원수 어머니의 원수 한걸음 더 나아가서는 백씨 일가에 대한 엄씨 일가의 복수 ── 이처럼 골수에 사무치는 원을 품고 그는 해월이라는 중이 되어 조선 십 삼도를 편답하면서 원수 백영호를 찾아 다녔읍니다. 그러다가 그가 열 여덟 살 되는 해 여름, 금강산 백도사에 있던 해월은 거기서 은 몽씨와 알게 된 것입니다. 은몽씨에 대한 열렬한 짝사랑 은몽씨가 철없이 던진 한마디 동정의 말을 사랑의 표현이라고 착각한 해월, 그는 그 후 타오르는 연정을 품고 십 여년 동안이나 은몽을 찾아 다니다가 찾아 놓고 보니 그것은 해월에게 있어서 너무나 놀라운 일이었으며, 너무나 우연한 일이었읍니다. 원수 백영호의 약혼자인 공작부인(孔雀夫人) 주은몽! 무척 놀랐고 무척 기뻐했을 해월은 거기서 무엇을 생각했는가…… 오냐! 너희들을 전멸시키고야 말리라, 그러나 해월은 영리한 사나이였지요. 백영호씨 일가에 복수한다는 뜻은 추호도 밝히지 않고 단지 하나의 실연자로써 자기의 순정을 유린한 은몽씨에 대한 복수라는 것을 표면 이유로 내세웠읍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의 신분을 영원히 감추려는 것이었지요. 그리하여 해월은 은 몽씨에게 복수한다는 말을 내걸고 그 실은 백영호씨를 죽이고 남수군을 죽였읍니다. ──』
오상억 변호사의 이야기는 반박의 여지가 없을만큼 질서 정연하였다.
『그러면 정란이도? ──』
해월의 목적물의 하나인가를 은몽이 물었을 때
『물론!』
하고 오상억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저번 결혼식에서 정란씨가 장송곡을 치라는 해월의 명령을 거역했을 때, 해월은 뭐라고 말했읍니까?……나는 너를 위해서 장송곡을 치리라고 선언하였읍니다.』
임경부는 그 때야 비로소 아까 유불란탐정이 취한 태도의 의미를 알았던 것이다.
아까 오변호사가 경성역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유불란에게 전달했을 때, 유불란은 임경부에게 뭐라고 말했는가?……삼청동 정란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하여 경비대를 파견하라고 그러지 않았던가! 그리고 은몽 보다도 정란이가 한층 더 위험한 처지에 놓여 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오상억씨!』
하고 그때 비로소 유불란은 그 묵직한 입을 열었다.
『그 때 엄여분이가 낳은 아이가 확실히 사내였읍니까?』
여분의 아이가 확실히 사내였던가고 묻는 유불란의 말에 오상억은 놀라며
『물론 내눈으로 보지 못했으니까 단언 할 수는 없읍니다. 그런데 왜 그런 말을 묻읍니까?』
『아니 ──』
하고 유불란은 잠깐 동안 무엇인가를 주저하는 모양이더니
『그때 여분이가 낳은 아이는 호적에 오르지 않았다니까, 그것이 계집앤지 사낸지 누가 그것을 증명합니까? 홍서방도 자기의 눈으로 직접 보지 못했으며……』
『아, 그것은 그때 약 일년동안이나 어린애에게 젖을 먹여준 홍서방의 처가 증명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홍서방의 처가 지금도 ×천읍에 살고 있읍니까?』
『아니올시다. 홍서방은 그 후 상처하고 지금은 젊은 후처를 얻어 살지요.』
『그러니까, 아아 ──』
하고 유불란은 무의식 중에 긴 한숨을 지으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여분이도 죽고, 여분의 어머니도 지금 쯤은 죽었을게고, 홍서방의 처도 죽고, 또 홍서방마저 죽어버린 지금에 이르러서……그리고 어린애는 호적에도 오르지 않고……』
『그러면 유불란씨는 해월이가 혹시 여자……?』
하고 옆에 앉은 임경부가 무심 중 물었을 때, 유불란은 황급히 머리를 흔들며
『아닙니다. 단지 나는 호적에도 없는 하나의 인물을 의심할 따름이지요.
여분이가 그때 아들을 낳았는지 딸을 낳았는지……아니 한걸음 더 나아가서 여분이가 과연 임신을 했었는지 이 모든 점을 지금에 이르러서는 증명할 사람이 한사람도 없다는 말입니다.』
유불란의 말을 듣고 나니 임경부는 어떻다고 꼭 지적할 수는 없으나 지금까지 뚜렷하게 눈앞에 떠오르던 살인귀 해월의 존재가 갑자기 몽롱해 지는 것 같았다.
해월이란 인물이 과연 실재의 인물일까? 자기가 모르는 것을 벌써부터 알고 있는 듯한 유불란이 아닌가. 은몽이 보다도 정란이가 더 위험하다는 유불란, 오상억이 멀리 ×천읍까지 찾아가서야 비로소 알고 온 사실을 유불란은 서울안에 가만히 앉아서도 알고 있지 않는가. 더구나 은몽의 말을 들으면 어렸을 때 백도사에서 만났던 애기중 해월은 그야말로 계집애처럼 어여뿐 얼굴을 가졌다고 하였다. 그러면 유불란이 의심하고 있는 것과 같이 해월은 여자였던가 임경부는 유불란이 밉기도하고 부럽기도 하였다.
『유불란씨가 이 사건에 관해서 우리들 보다 좀 더 알고 있는 점이 있다면 여기서 한번 이야기 해 보는 것이 어떻소?』
하고 유불란을 쳐다보았다.
『정말 유선생은 무엇인가 우리들 보다 좀 더 깊이 알고 계신 것 같애요.』
하고 은몽은 그것을 무척 듣고 싶어 하였다.
『네 이야기 해 보세요! 해월은 그럼 제게는 복수를 안할까요? 저를 해치진 않을까요?』
은몽은 사지를 부들부들 떨면서 애원하는 듯 유불란을 쳐다보았다.
그래도 유불란은 얼마 동안 대답이 없다가
『다른것은 모르겠읍니다만 지금 물으신 은몽씨의 물음에는 대답하여 드리지요. 해월은 ──』
하고 또 한번 말을 끊었다가
『해월은 절대로 은몽씨를 해치지 않을 것입니다!』
하는 유탐정의 말에는 힘이 있었다.
『그러세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절망의 밑바닥에서 희망의 꼭대기로 기어 올라가는 듯한 은몽의 얼굴 ── 그러나 다음 순간 은몽의 두 눈동자는 점점 어두워진다.
더구나 오상억 변호사가
『아니올시다! 저는 ──』
하고 유불란의 말에 자신있는 어조로 반대했을 때, 은몽의 얼굴은 더욱 침울해졌다.
『그럼 오상억씨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유불란의 물음이었다.
해월은 『 반드시 은몽씨도 해치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이유는?』
『해월이가 그것을 은몽씨에게 선언했기 때문에!』
『………』
해월이가 주은몽을 해하느냐? 안하느냐?……
이것은 실로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 중대한 문제에 관하여 유불란 탐정과 오상억 변호사의 의견은 정반대로 대립하였던 것이다.
『해월은 절대로 은몽씨를 해하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지금까지 생각해 왔읍니다. 그리고 그리고……』
유탐정의 얼굴에는 일종 헤아릴 수 없는 심각한 오뇌의 빛이 뭉게뭉게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마치 고무방망이로 뒤통수를 한번 얻어 맞은 것과 같은 무참한 얼굴이었다.
『참패(慘敗)!』
이와같은 두 글자가 유탐정의 얼굴에 알알이 떠올랐다.
『유불란씨가 그렇게 생각하시는 데는 물론 상당한 근거가 있을 겁니다.
나는 해월의 잔인한 성격으로 미루어 보아서 제일의 복수 ── 즉 백영호씨 일가에 대한 복수는 마치고 제이의 복수 ── 은몽씨에게 복수의 칼날을 던 지리라고 나는 생각하지요. 지금껏 해월은 자기의 선언한 바를 한번도 실행에 옮기지 않은 적은 없으니까요. ──』
『대단히 흥미있는 문제입니다.』
하고 그때 임경부가 유불란에게 얼굴을 돌리며
『해월이가 은몽씨를 절대로 해치지 않으리라는 유불란씨의 지론을 좀 더 자세히 보시면 어떻겠읍니까?』
하는 임경부의 말을 받아 은몽은 애걸하 듯
『네, 그걸 좀 똑똑히 말씀해 주세요. 정말 그렇다면 얼마나 좋을까!……
정말 저는 목숨이 한치한치 줄어드는 것 같아서 견딜 수 없어요!』
하고 유불란을 쳐다보았다.
은몽은 언제든지 자기의 몸을 해월의 손으로부터 구제해 주는 사람에게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바쳐도 한이 없다는 ── 말하자면 생명을 유지하겠다는 일종의 본능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모든 지각을 상실한 그러한 태도였다.
미남 오상억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유불란에게 쓰디 쓴 실연의 고배를 맛보게 한 주은몽이었으나 그러나 사랑보다도 목숨이 아까웠던 것이다.
유불란은 물끄러미 은몽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니 그는 은몽의 흑진주처럼 까만 두 눈동자를 쏘는 듯이 드려다 보다가 마침내 무슨 위대한 결심을 한 듯
『해월은 절대로 은몽씨를 해하지 않으리다! 그러나……』
이 한마디의 결론은 유불란 탐정에게 있어서는 너무도 무서운 단언이었다.
그가 지금까지 지니고 온 모든 명예를 이 한마디에 걸어 놓았다는 것을 독자제군은 멀지 않아서 깨닫을 날이올 것이다.
『그 이유는?……』
오변호사의 신날한 질문이다.
『그 이유를 나는 이 자리에서 설명할 수 없읍니다. 그 이유가 여러분 앞에 공개되는 날 사건은 무사히 해결될 것입니다. ── 임경부, 저로 하여금 사흘 동안만 여유를 갖게 하여 주십시요. 사흘 후에는 ──』
『사흘 후에는?』
『사흘 후에는 살인귀 해월을 체포하여 드리겠읍니다!』
『해월을?』
하고 놀라는 임경부를 무시하고 이번에는 시선을 옮겨
『은몽씨!』
하고 힘있게 불렀다.
『네에?』
그 어떤 격정(激情)으로 말미암아 은몽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었다.
『전 일에 있어서 은몽씨는 나의 하나 밖에 없는 애인이었읍니다!』
유불란은 무슨 이유로 사람들 앞에서 돌연 이러한 말을 꺼내는가.
은몽의 시선이 총에 맞은 참새처럼 툭하고 무릎 위에 떨어진다.
『그리고 지금도 은몽씨는 나의 하나 밖에 없는 애인일 것입니다.』
『…………』
『그리고 미래에 있어서도 은몽씨는 나의 하나 밖에 없는 애인일 것입니다.!』
『왜 그런 말씀을 갑자기……?』
은몽은 불현 듯 머리를 들었다. 오상억을 무시하고 눈물은 은몽의 종이장처럼 흰 얼굴을 주루루 흘러 내렸다.
『나는 그 하나 밖에 없는 나의 애인을 위하여 해월을 체포 하겠읍니다!』
그리고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창황한 걸음으로 밖으로 나가려는 유불란을 은몽은
『수일씨!』
하고 불렀다.
아아 수일(秀一)씨! 수일씨! 유불란은 지나간 그 옛날 공작 부인(孔雀夫人) 주은 몽의 입으로 부터 이 말을 얼마나 들었던가!
유불란은 「핸들」을 잡은 채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나 멎었던 발걸음은 도리킬 줄 모르고 그냥 「도어」밖으로 살아졌다.
그 길로 태평동 자기집으로 돌아온 유불란은 무서운 번민 속에서 하루를 보냈다.
『사흘 후엔 살인귀 해월을 체포 하겠노라고 나는 사람들 앞에서 단언하지 않았는가. ── 나는 과연 해월을 체포할 수 있을까?』
하룻밤을 뜬 눈으로 새운 유불란은 피곤한 몸을 침대 위에 던졌으나 통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머리는 착잡할 대로 착잡해지고 두 눈은 무섭게 충혈되었다. 그는 마치 미친 사람 처럼 물끄러미 천정을 바라다 보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러나 수상한 일이다! 서울안에서 한발자욱도 떠나지 못했을 해월이가 어떻게, 그리고 어느새 오상억을 ×천읍까지 따라가서 홍서방을 죽였을까?……』
그것은 실로 유탐정으로서는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난문제 중의 난문제였던 것이다.
이 문제만 해결될 수 있다면 유불란은 금시라도 해월을 체포할 수가 있는 것이다.
『아니다! 아니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해월은 분명코 그이다! 그이다!
그러나 아아 ──』
유불란은 손으로 두 눈을 가리우며 모든 것을 잊어버리겠다는 듯이 이불을 푹 뒤집어 썼다.
이불을 뒤집어쓰자 캄캄한 망막에 나타나는 여러 인물 ── 임경부의 그 노둔한 얼굴, 오상억 변호사의 차디찬 이지적인 얼굴, 정란의 가련한 얼굴, 문학수의 유순한 얼굴, 그리고 은몽의 창백한 얼굴이 무섭게 「크로즈·엎」되어 유불란을 향하여 점점 다가온다.
『은몽이! 은몽이!』
그는 망막에 떠오른 은몽의 확대한 얼굴을 잡으려는 듯 두손을 내저었다.
은몽의 그 매섭고도 꿈꾸는 듯한 눈동자를 볼 때마다 유불란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의 실연자로서의 고배(苦盃), 부끄러움, 그리고 마침내는 「그리샤」형의 표정없는 미남 오상억에 대한 질투심이 어린애 처럼 북바쳐 오르는 것이었다.
그렇다 탐정이란 『 ! 결코 연애를 해서는 아니 된다! 연애는 모든 사물을 정확히 내다보는 시력(視力)을 빼앗는 것이다. 아아 그러나 ──』
그러나 유불란은 은몽의 그 매혹적인 눈동자를 아무리 잊고자 하여도 잊을 수가 없었다.
『은몽은 과연 나를 ── 아니, 청년화가 김수일을 참말로 사랑하였던가?
은몽은 오상억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 걸까? 은몽은 나를 통 잊어버리고 말았을까? 은몽은 은몽은……』
유불란은 그 때 손을 머리맡으로 내밀어 초인종을 눌렀다.
이윽고 젊은 서생이 들어오면서 허리를 굽힌다.
『저를 부르셨읍니까?』
『응 ── 나는 이제부터 한잠 늘어지게 잘테니까, 어떤 손님이 찾아 오더라도 없다고 그래.』
『네 ──』
『그러나 ──』
『네?』
『그러나 단 한사람 ── 이 세상에서 제일 어여쁜 부인이 찾아올지도 알 수 없으니까, 그 때는 군이 가진 모든 성의를 다해서 부인을 모셔드려야 하네! 이 세상에서 제일 어여쁜 부인일세! 알겠나?』
젊은 서생은 빙그레 웃으면서 점잖게 대답하였다.
『공작과 같이 어여쁜 부인 말씀입니까?』
유불란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다시 이불을 뒤집어 썼다.
그 후 얼마나 지났는지 유불란은 모른다.
『선생님, 선생님!』
하는 소리에 눈을 번쩍 떠 보니 방안은 어둑어둑한 황혼으로 가득 찼다.
『선생님 이 세상에서 제일 어여쁜 부인이 찾아 오셨읍니다.』
선생은 그리고 벽을 더듬어 「스윗취」를 눌렀다.
유불란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모셔 들여!』
그것이 이 세상에서 제일 어여쁜 부인인가 아닌가는 여기서 갑자기 단정할 수는 없으나 과연 유탐정의 추측은 들어 맞았다.
서생이 손님을 모시러 다시 밖으로 물러간 후, 유탐정은 거울 앞으로가서
「넥타이」와 흩으러진 머리를 고친 다음 무섭게 긴장된 자기의 얼굴을 물끄러미 드려다 보면서 유불란 아니 『 ── , 탐정 유불란! 네게 있어서 가장 귀중한, 그리고 가장 의의있는 시간은 왔다!』
장엄한 어조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두 눈을 감고 서너번 심호흡을 한 유탐정은 마침내 침실을 나와 응접실을 향하여 천천히 걸어갔다.
『유불란 탐정! 너는 언제든지 너 자신을, 그리고 너 자신만을 믿어야 한다!』
그것은 그가 응접실 「도어」를 열면서 자기자신에게 들려준 가장 의미 깊은 충고의 말이었다.
응접실 안에는 한 흑장(黑裝)의 여인이 주인을 기다리며 저 편쪽을 향하고 의자에 걸터 앉아 있었다. 깊은 명상에나 감겨 있던 듯 여인은 발자욱 소리에 놀라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이 쪽을 향하여 머리를 돌렸다.
『아, ……』
그때야 비로소 여인은 썼던 모자와 얼굴을 가리웠던 그물 「베일」을 벗었다.
『은몽씨,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어서 앉으십시요.』
그리고 유탐정은 들창을 활짝 열어 젖힌 후에 은몽과 마주 앉았다.
유불란의 집을 방문한 것은 오늘이 처음인 은몽은 잠깐 동안 방안을 돌아다 보고 모든 것이 꿈과 같다는 표정이었다.
주인도 말이없고 손님도 말이 없다. 그러나 그 처럼 묵묵히 마주 앉아있는 것이 도리어 그러한 때에 있어서는 어울리는 풍경이었다.
은몽은 무엇을 생각하고 유불란은 또 무엇을 생각하는가?……
『두 사람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서 얽히고 또 얽히고 —— 그러나 시선을 먼저 무릎 위에 떨어뜨린 편은 은몽이었다.
『저는 언젠가 한번은 은몽씨께서 저를 꼭 찾아주실줄 믿었읍다.』
은몽은 다시 시선을 들어 유불란의 얼굴을 뚫어질 듯이 바라보았다.
『저도 언젠가 한번은 수일씨를 꼭 찾아 뵈오려고 했었어요. ──』
『나는 유불란 입니다.』
『아녜요, 수일씨예요!』
두 사람은 거기서 또 말이 끊겼다. 서로서로의 표정을 더듬어 보면서 터져 나오려는 감정의 불꽃을 눌러 보려는 듯 싶었다.
『나를 유불란이라고 불러 주세요.』
얼마 후 유탐정은 한번 더 그렇게 다짐을 했다.
『수일씨라고 부르겠어요!』
『은몽씨!』
하고 유불란은 힘있게 불렀다.
은몽씨는 아마 오늘밤 『 나를 괴롭히러 오셨나 봅니다. 지금 와서 새삼스럽게 나를 수일이라고 부르겠다는 은몽씨의 마음을 통 헤아릴 수가 없읍니다.』
독자제군이여! 유불란이 뱉은 이 한마디를 기억해 두라!
『은몽씨도 가만히 생각해 보시면 아실 것입니다. 백만장자 백영호씨와 결혼함으로서, 숨진 한 청년 김수일을 절망의 밑바닥으로 밀어넣은 은몽씨 자신을 생각치 못하십니까?』
『…………』
『그리고 미남 오상억 변호사와 사랑을 속삭임으로서 은몽씨가 지금 그의 이름을 부르고 싶어하는 김수일 ── 절망의 밑바닥에서 간신히 기어 올라오려는 김수일을, 은몽씨는 무정하게도 그 진흙 묻은 구두발로 짓밟아 버리지 않았읍니까?』
저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의 말이 점점 열을 띄어 오는 것을 유불란은 무척 두려워하였다.
은몽은 머리를 포옥 숙으린채 인형처럼 꼼짝도 안한다.
눈물이 한방울 톡 —— 하고 무릎 위에 은선을 그으면서 떨어지는 것을 유불란은 보았다.
그러나 은몽의 눈물은 단 한방울, 그것 뿐이었다.
이윽고 은몽은 머리를 들었다. 은몽의 그 새침하니 쳐다보는 얼굴을 유불란은 마음의 손으로 가만히 애무하여 보았다.
『아아, 저 어여쁜 눈동자! 저 매혹적인 입술!』
긴 눈썹 밑에서 요성(妖星)처럼 반짝이는 두개의 눈동자가 언제까지나 유불란의 얼굴에서 떠날줄을 모르는 것이다.
오늘밤은 유달리 짙은 화장을 한듯 싶은 은몽의 앵도알처럼 빨간 입술, 타오르는 정열 속에서 영원히 꿈꾸려는 저 입술!
유불란은 오늘처럼 자기의 직업을 미워해 본 적은 없었다. 아니, 그는 은 몽과 단둘이 있을 때면 반듯이 자기의 직업을 경멸하는 습관을 배웠다.
지나간 시절 ── 김수일과 은몽이 사랑을 속삭이던 그 어떤날, 두 사람의 대화가 우연히 탐정소설에 미쳤을 때, 은몽은 무엇이라고 말하였던가……
『저는 탐정이란 직업을 이 세상에서 제일 경멸해요.』
그때 부터 유불란은 은몽을 볼 때 마다, 은몽을 생각할 때마다 자기 자신을 얼마나 경멸하였던가.
은몽이 경멸하기 때문에 자기도 무조건 경멸하지 않을 수 없었던 자기의 그 소박한 생각을 그 후 여러번 비웃어 본 유불란이 아니었던가.
그러한 유불란이 은몽의 그 꿈꾸는 듯한 입술을 눈앞에 보자, 한 때는 비웃어까지 보았던 자기의 그 소박한 감정을 오늘밤 다시 되풀이하지 않을 수 없으리만큼 은몽의 존재는 연애인 유불란에게 있어서는 너무나 위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밤 유불란은 전날처럼 무조건 자기의 직업을 경멸하지는 않았다. 유불란은 지금 자기의 직업을 한없이 미워할 뿐이었다.
『저 눈! 저 입술!』
유불란은 다시 한번 마음속으로 외쳐 보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유불란은
『「크라이시스(機危[기위])」!』
하고 절규하였다.
그때, 은몽은 유불란의 얼굴로부터 딴 곳으로 시선을 돌리며
『그럼 저는 이 순간부터 김수일이란 이름을 영원히 잊으려고 노력하겠읍니다. 그러나……그럼 유선생은 어째서 아까 아침에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저를 하나 밖에 없는 애인이라는 말을 하셨어요?』
하고 일단 옮겼던 시선을 다시 상대편으로 돌리었다.
『별다른 이유라고는 없읍니다. 단지 나의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였을 따름이지요!』
하고 이번에는 좀 더 힘있는 어조로 말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나의 마음을 ── 나의 가장 심각한 오뇌(懊惱)를 은 몽씨에게 피력하는 동시에, 아니 그 보다도 좀 더 깊은 의미에 있어서 특히 임 경부와 오상억씨에게 피력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지요.』
『무슨 의미의 말씀인지, 저는 잘 알아듣질 못하겠어요. ──』
하고 의아스러운 표정을 짓는 은몽에게
『알기쉽게 말하자면, 탐정 유불란은 해월의 칼날 아래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은몽이란 한사람의 여인을 자기의 생명보다도 더 귀중하게 여겨왔다는 사실을 임경부와 오상억 변호사에게, 아니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일반사회에 선언하였을 따름입니다. ──』
이 한마디를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뱉어버린 자기자신을 유불란은 무척 신뢰하였다. 그는 점점 침착해지는 자신을 깨닫고
『위기(包機)는 넘어 섰다!』
하고 마음속으로 고함쳤다.
『무슨 말씀인지……그것을 사회일반에게 선언할 필요는 어디 있어요?』
『있읍니다!』
『무슨 이유로?』
『유불란은 탐정이기 때문입니다!』
『탐정이기 때문에……』
『그리고 탐정은 절대로 사건중의 이성과 연애를 해서는 안되기 때문에!』
『……?』
무서운 想像[상상]
[편집]은몽은 잠자코 잠깐동안 유불란을 비들기처럼 말똥말똥 쳐다보다가
『그것이 무슨 말씀인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 ──』
하고 정색을 하였다.
『탐정독본 제삼과 쯤에 이런 과목이 한대목 있어도 무방하지요. 즉 ── 탐정은 절대로 사건 중의 인물과 연애를 하지 말것 ──』
그리고 유불란은 앞에 놓인 「아이스·커피」를 한숨에 쭈욱하고 드리켰다.
『그것은 또……』
무슨 의미냐고 물으려는 은몽의 말을 그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킴으로서 무시하고 들창 곁으로 걸어가서 캄캄한 바깥을 내다 보았다.
광화문 네거리는 그리 화려하지는 못했으나 이 무더운 밤, 이 답답한 방안에 은몽과 단 둘이 마주앉아 있는 것 보다는 무척 시원해 보였다.
야간비행이 있나보다. 「푸로펠라」 소리가 가까이서 들려온다.
은몽도 자리를 떠나 유불란 곁으로 걸어와 어깨를 나란히 하였다.
『후우 ──』
하고 유불란은 한숨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아아, 저 「푸로펠라」가 그립다! 「로빈손·크로소오」는 연애를 하였던가?』
그리고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묵묵히 서서 창밖을 바라볼 뿐이었다.
얼마동안 그리고 서 있다가 은몽은
『비행기를 타고 「로빈손·크로소오」처럼 무인도로 가고 싶지는 않으세요?』
하고 역시 긴 한숨을 지었다.
『누가?』
『유선생 말씀이예요. ──』
『혼자서요?』
『아아니 ──』
『누구하고 말입니까?』
『유선생이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시는 사람과 ──』
『오상억 변호사가 들으면 ──』
『유선생!……』
은몽은 돌연 그렇게 부르면서 유불란의 품안에 얼굴을 파묻었다.
『저를 데리고……저를 데리고 먼 곳으로……』
정열의 불덩어리 처럼 돌변한 은몽이었다.
『남양도 좋고 북양도 좋고……먼 데로……먼 데로 저를 데리고 가 주세요!』
그러나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유불란이었다.
『오상억은……오변호사는 제게 있어서는 아무것도 아니예요! 정말 아무것도 아니예요!』
『약혼을 하신다면서 그런 말씀을 함부로 하시면 못 쓴답니다.』
『유선생이……지금 유선생이 저를 건져주시지 않는다면, 정말 그이와 약혼할 것 같애요. 그러니까 지금, 오늘밤이라도 저를 어디로든지 데리고 가세요!』
은몽은 운다. 울면서 유불란의 팔을 미친 듯이 잡아 흔드는 것이다.
그러나 돌부처처럼 서 있는 유불란이었다.
『먼 곳으로……해월이가 따라 오지 못할 먼 곳으로……』
『아, 그러면 은몽씨는 해월이가 무서워서?』
『아니, 그것도 있지만……유선생은 저의……』
그 때 유불란은 은몽의 어깨를 슬그머니 떠밀며
『은몽씨!』
하고 가장 엄숙한 목소리로 불렀다.
『…………』
『아까도 말했지만, 해월은 은몽씨를 절대로 해하지 않으니까……그 때문이라면 남양도 필요없고 북극도 소용없읍니다.』
『아녜요! 그것도 있지만……아아 수일씨!』
은몽의 안타까운 부르짖음이었다.
『수일씨, 저를……은몽을 버리지 마세요! 네? ──』
그러면서 은몽은 「테이블」 위에 쓰러져 흐느껴 울기 시작하였다.
유불란은 어찌할바를 모르는 듯 얼마동안 멍하니 은몽을 바라보고 서 있다가 마침내 은몽의 들먹거리는 어깨를 부드럽게 흔들었다.
은몽씨 사랑도 『 ! 물론 귀중하지만, 그러나 우리는 지금 한가로이 「러브·씬」을 연출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자아 은몽씨! 울지 말고 나의 말을 들어 주시요. 이제부터 살인귀 해월이가 절대로 은몽씨를 해치지 않는다는 중대한 이야기를 들려 드릴테니까 ──』
그러나 은몽은 애닮게 흐느껴 울뿐, 통 얼굴을 들지 않는다.
『자아 ─ 은몽씨, 제 말을 자세히 들어 보시요!』
하고 유불란은 「테이블」위에 엎드린 은몽을 그대로 내버려두고 「시가렛·케이스」에서 담배를 한꼬치 꺼내 붙여 물었다.
한목음 깊이 빨아 드리키고 그것을 다시 후하고 기운차게 내뱉으면서 혼잣말 처럼 중얼거렸다.
『해월! 그렇습니다! 해월은 너무도 잔인한 복수귑니다. 그런데 은몽씨!』
하고 또 한번 은몽을 불렀다. 그 때야 비로소 은몽은 눈물어린 얼굴을 가만히 들었다.
『은몽씨도 언제가 그런 말을 하셨지만, 해월은 실로 나같은 자의 적이 아니지요. 해월은 나보다도 곱절이나 영리한 인간입니다. 해월은 내가 생각할 바를 미리 생각했고 내가 취할 행동을 미리부터 짐작하고 있었던 때문입니다.』
『그러면 유선생은 해월이가 어디 있는지, 그 곳을 알고 계셔요?』
애욕에 타오르던 은몽의 눈동자가 이번에는 그 어떤 호기심으로 말미암아 빛나기 시작하였다.
『아니, 이것은 공상을 즐겨하는, 나의 하나의 빛나는 공상 ── 너무도 무서운 공상일 따름이지요. 나의 이 무서운 공상이 과연 어느 정도까지 들어 맞을런지 그것은 물론 단언할바는 못 되지만 하옇든 ──』
하고 점점 해월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는 은몽을 기뻐하며
『하옇든 우리는 다시 한번 사건 전체를 천천히 재음미하여 보기로 합시다. 그리고 사건의 주인공인 은몽씨의 의견도 들을 겸 ──』
그리고 유불란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안을 뚜벅뚜벅 한 발자욱 한 발자욱 힘을 주어가면서 걷기 시작하였다.
『자아 은몽씨! 우리는 무엇 보다도 먼저 사건이 돌발한 맨처음 장면부터 검토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읍니다. 맨 처음 장면 ── 그것은 두말 할 것 없이 은몽씨의 생일날 밤 ── 그것은 틀림 없이 지나간 사월 보름날 밤이었지요. 그 날밤 백영호씨는 약혼자인 은몽씨의 탄생을 호화롭게 기념하려고 조선서는 처음 보는 가장무도회를 열었읍니다.』
은몽은 묵묵히 앉았을 뿐 ── 은 몽씨 나는 이제부터 『 ! 그날밤에 일어난 사건의 전말을 은몽씨와 함께 좀 자세히 연상해 보고자 합니다. 만일 나의 말에 그릇됨이 있거든 염려 마시고 정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날밤 ──』
그리고 유탐정은 자기의 착잡한 머리를 정돈하려는 듯이 한 번
『에헴.』
하고 기침을 하였다.
『그날밤 나는 화가 이선배라는 가명으로 무도회에 나타났었읍니다. 내가 그런 가명과 가장으로 나타난데 대한 이유는 저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인 오상억 변호사의 물샘틈 없이 치밀한 논리로 말미암아 충분히 설명 되었으니까, 여기서 다시 그것을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간단히 이야기 해둘 것은 그 때 내가 ── 아니 공작부인 주은몽의 애인이었던 청년화가 김수일이 최후의 다짐을 다지고자 가장 무도회를 기화로 여기고 화가 이선배라는 이름으로 은몽씨를 찾았다는 것입니다.』
유불란은 그리고 어쩐지 몹시 창백하여 보이는 은몽의 얼굴을 일순간 쏘아보고 다시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나는 안내인을 따라 「홀」에 들어서서 이구석 저구석 은몽씨를 찾아 보았읍니다. 그러나 어쩐셈인지 무도회의 주인공인 은몽씨의 그림자를 도무지 발견할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저편 파초나무밑 「소파」에 걸터 앉아 혼자 차를 마시고 있던 남수군에게 물었더니 그의 대답이 은몽씨는 한차례 춤을 추고 다시 안으로 들어 갔다는 것이었읍니다. 그래 나는 하는 수 없이 은 몽씨가 다시 「홀」에 나타나기 기다리면서 남수군과 농담을 하고 있었읍니다.
그 때 남수군은 나에게 이상한 이야기를 속삭이었지요.』
『무슨 이야기예요?』
은몽은 시선을 들었다.
『가장 무도회에 참석한 인물들을 대개는 다 알아 보겠으나, 그 중 두 사람만은 도무지 그 정체를 알아보지 못하겠다고요.』
『아, 저……』
『그렇습니다! 하나는 두말 할 것 없이 이선배로 가장한 나였고, 또 하나는……』
『저 ─ 도화역자……』
『그렇습니다!』
거기서 유탐정은 잠깐 말을 끊었다가
『그렇습니다. 저편 「뺀드」 바로 옆에 서서 사람들의 춤추는 양을 히죽히죽 웃으면서 바라보고있던 그 도화역자 ── 타오르는 듯한 주홍색 도화복에다 역시 주홍색 수건으로 머리를 동여매고 흰떡 같은 얼굴에는 간판처럼 색칠을 하고 ── 그 인물이 대체 누군지를 알아보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지요.』
『해월!……』
하고 은몽은 몸을 웅크리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저 잔인무도한 복수귀 해월이었던 사실을 사람들은 몰랐읍니다. 그러는 사이에 그 도화역자는 나와 백남수군이 서 있는 이 쪽을 힐끔 힐끔 바라보면서 복도로 빠져나가고 말았지요. 그러니까, 그 후 조금 지나서야 「홀」에 나타난 은몽씨가 물론 그 도화역자를 보지못했을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요! 저는 그런 인물을 「홀」안에서는 통 보지 못했으니까요. ── 』
『물론 그랬을 겁니다! 나는 그 때 은몽씨와 초면의 인사를 교환한 후, 은 몽씨를 「발코니」로 데리고 나가서 친우 수일군을 위하여 백영호씨와의 결혼을 중지하기를 여러번 권했읍니다마는 마이동풍, 은몽씨는 통 나의 말을 듣지 않고 그때 삼청동 댁에서 온 백영호씨와 정란씨를 맞이하러 다시
「홀」 안으로 들어가 버렸읍니다.』
『용서하세요! 저는 그런 줄도 모르고……그러나 그것이 수일씬줄 알았다고 하더라고 역시 저는……』
하고 은몽은 머리를 또 숙으렸다.
『아닙니다! 나는 지금 그런 것을 문제삼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지금 해월의 이야기를, 해월이가 은몽씨를 절대로 해치지 않으리라는 이야기를 은몽씨에게 들려 드리려는 사람이니까 ── 그 때 백영호씨와 춤을 몇 차례 추고 난 은몽씨는 화장을 고치겠다는 말을 남겨놓고 백영호씨의 곁을 떠나 다시 안으로 들어 갔읍니다. 화장실로부터 은몽씨의 찢어지는 듯한 부르짖음이 들려 온 것은 은몽씨가 안으로 들어간지 약 오분 후, 그 때 누구보다도 화장실로 뛰어들어간 사람은 나였지요. 삼면경 앞에 쓸어진 은 몽씨의 어깨에 박힌 날카로운 단검 ── 은몽씨는 그 때 방싯하게 열린 들창 밖을 가리키면서 도화역자, 도화역자……하고 외쳤읍니다. 남수군이 곧 들창을 넘어 정원으로 뛰어 나갔지요. 그러나 아무리 정원을 뒤져보아도 도화역자는 온데간데 없이 없어지고 말았읍니다. 두길이나 되는 「콩크리트」 담장을 넘을리는 만무하고 또 그즈음 가장무도회를 감시하던 순경 한사람이 정문 앞을 순시하고 있었더니 만큼 도화역자가 정문으로 나갔다면 순경이 보지 못했을리는 만무한 일이지요.』
『그러면 해월은 어디로 갔을까요?』
『아무데도 가지못했을 것은 매일아침 해를 보듯 정확한 사실입니다!』
『그러면……?』
하고 재차 질문하는 은몽의 말을 무시하고 유탐정은 그냥 계속하였다.
『해월은 정녕코 왼손을 쓰는 사람이었읍니다. 어째 그러냐하면 삼면경 앞에서 화장을 고치고 섰던 은몽씨의 왼편 어깨를 그 놈은 은몽씨의 바로 등 뒤에서 찔렀던 때문이지요. 이것은 그 때 은몽씨가 우리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해월은 왼손잡이!』
은몽은 자기 입으로 한번 그렇게 되풀이해 보았다.
『그런데 불행중 다행으로 은몽씨가 받은 어깨의 상처는 예상 외로 경상이었읍니다. 해월이가 만일 은몽씨를 정말 죽이고자 하였다면 사나이인 그가 그렇게 가벼운 상처만을 남겨 놓고 도망할리는 만무하지 않읍니까?』
『그 때…… 그 때 제가 고함을 쳤으니까요』
『아무리 은몽씨가 고함을 쳤다 하더라도 지금까지 취해 온 살인귀 해월의 대담무쌍한 성격으로 미루어 보아 ── 그뿐만 아니라 우리들이 「홀」에서 화장실까지 뛰어오는 동안이면 은몽씨 하나를 죽일만한 시간은 넉넉하였다는 말씀이지요.』
『그럼 그 놈은 단지 나를 놀라게할 셈으로……』
『놀라게할 셈이라고요? 그렇지요, 물론 그것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것 보다도 좀 더 의미깊은, 좀 더 무서운 의미가 포함되어 있을 겁니다!』
『무서운 의미!』
은몽의 입술이 바르르 떨리었다.
『그렇습니다. 복수귀 해월이가 은몽씨에게 그렇게 예상 외로 경상(輕傷)을 준데는 좀 더 깊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지요!』
하는 유탐정의 말은 사람의 폐부를 찌르는 것 처럼 맵다.
『깊은 의미라니요? 무슨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는 말씀이예요?』
의자에 앉은 은몽의 시선과 방안을 왔다 갔다하는 유불란의 시선이 방 한복판에서 무섭게 부딪쳤다.
유탐정은 들창 옆에 우뚝 서서 은몽의 어쩐지 몹시도 창백한 얼굴을 글자 그대로 뚤어질듯이 쏘아보면서
『깊은 의미! 그것은 해월이가 은몽씨를 해하겠다는 것을 표면이유로, 실은 백영호씨 일가에 복수를 하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그때 나를 『 찌른 그 도화역자 ── 즉 해월은 대체 어디로 갔다는 말씀이예요?』
『아무데도 가지 않았읍니다. 그는 우리들과 같이 있었읍니다!』
『엣?』
하고 은몽은 놀랐다.
『우리들과 같이 있다니요?』
『우리들과 같이 있었다는 말을 못 알아 들으시겠읍니까?』
『무슨 의미인지 통 갈피를 잡을 수 없어요.』
『다시 말하자면 해월은 항상 우리들과 같이 있으면서 우리들의 행동을 일일이 감시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누구예요? 그가 대체 누구란 말씀이예요?』
은몽은 호기심에 찬 두눈을 반짝이며 불현 듯 상반신을 「테이블」위로 내밀었다.
『누구예요? 어서 말씀을 하세요. ── 우리들과 항상 함께 있던 사람이라면 오 변호사?』
『아닙니다!』
『그럼, 그럼 누굴까? 정란과 문학수씨와, 그리고 유선생 이외에는 이렇다 할 사람이 없었는데……』
『나는 물론 해월이가 아니고……』
『그리고 문학수씨와 정란이도 물론 해월이가 아닐테고…… 누구예요? 대체……』
『잘 생각해 보시면 아실 겁니다. ── 은몽씨가 잘 아시는 사람이니까요!』
『제가 잘 아는 사람?』
은몽은 앵무새처럼 반문하면서 상대방의 그 어떤 위대한 마술에 휘말린 사람같이 말똥말똥 유탐정을 바라다 보았다.
그러나 유불란은 말머리를 돌려
『그리고 그 다음 해월은 정란씨에게 협박장을 보내어 은몽씨와 백영호씨의 결혼식을 저 「쇼팡」의 장송곡으로 축하하라고 명령했을 때, 정란씨는 마리야를 대신 「파아니스트」로 세웠지요. 그러나 마리야는 해월의 저릿저릿한 협박장을 두려워하여 명령대로 장송행진곡을 치지않았읍니까. 그것은 하옇든 은몽씨도 아시는바와 같이 그 때 결혼식장에서는 실로 불가 사의의 현상이 일어났읍니다. 은몽씨에게는 아직도 기억에 새로운 일이겠읍니다만 그때 은몽씨는 한구석에서 무심중 해월을 발견하고 고함을 쳤읍니다. 그러나 그 때는 벌써 임경부가 사복한 부하들로 하여금 식장의 앞뒷문을 마치 밀폐한 모말모양으로 꼭 봉해버린 때였었지요. 그러나 은몽씨도 아시다싶이
「홀」안을 이잡 듯이, 그리고 한사람 한사람 엄밀이 취조를 해 보았으나 복수귀 해월은 귀신같이 사라지고 말았읍니다. 이 실로 이상야릇한 사실을 은몽씨는 대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떻게 생각하다니요? 그것을 제가 알아 낼 수 있다면……』
이처럼 해월을 두려워할 필요가 어디 있느냐는 얼굴이었다.
『자 ── 은몽씨!』
하고 그는 한걸음 은몽의 앞으로 다가 섰다.
『여기서 우리는 해월의 입장으로서 그가 만일 귀신이 아니고 사람이라면 이러한 때에 어떠한 행동을 취했는가를 생각해 봅시다. 물론 그는 하늘로 오르지도 못했을 것이며 땅으로 꺼지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은 몽씨의 눈을 속일만큼 그러한 훌륭한 변장을, 그러한 긴급한 시간에 그리도 신속히 했을 리도 없을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두말 할 것 없이 해월은 사람들 가운데 섞여 있었을 것이 분명하지요!』
『그래, 그가 대체 누구예요?』
『아까도 말한바와 같이 그는 항상 우리들과 같이 있었고, 그리고 은 몽씨가 잘, 너무도 잘 아시는 인물입니다!』
『누구예요? 누구예요? ──』
하면서 은몽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서서 유불란의 팔목을 잡아 흔들었다.
『무서워요! 어서 가르쳐 주세요! 왜 그리 잠자코만 있어요.』
『정말 알고 싶읍니까?』
하는 유탐정의 얼굴에는 증오의 빛이 알알이 떠돌았다.
『정말, 정말 알고 싶어요!』
『정말 그렇다면 아르켜 드리지요! 은몽씨가 계신 곳에는 반드시 같이 있던 인물 ── 그림자가 물체를 따르듯이 ── 그것은 은몽씨 자신이었읍니다.』
그 순간 은몽은
『흑 ──』
하고 숨을 들이키며
『에, 엣……』
하고 외치면서 잡았던 유탐정의 팔목을 탁 놓았다. 그리고는 얼빠진 사람 모양 멍하니 유불란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더니
『유 유선생은……』
하고 한걸음 뒤로 물러서서 의자에 간신히 몸을 의지하였다.
『유선생은 그런 말씀을…… 그런 말씀을 농담으로……』
그러나 유불란은 거기 대해서 곧 대답을 하지는 않았다. 악몽 속에서 헤메이는 사람처럼 꿈인지 생시인지를 분간하려는 듯 멍한 표정을 가진 은몽을 언제까지나 물끄러미 바라 볼 뿐이었다.
광화문 네거리를 지나는 전차의 궤도소리가 우욱하고 들려온다.
그것은 정말 조그만 과장도 없는 실로 납덩이처럼 무거운 침묵이었다.
『은몽씨!』
이윽고 유탐정이 먼저 입을 열었다.
『농담치고는 내 얼굴의 표정이 너무 심각하다고 생각지 않습니까?』
하는 엄숙한 말에 은몽은 비로서 그것이 하나의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안 모양이었다.
『그래요! 유선생의 얼굴은 무섭게, 무섭게 긴장되었어요! 그러나…… 유 선생은 아무래도 아무래도 제 정신이 아니신가 봐요!』
『은몽씨! 그래도 은몽씨는 내 말을 못알아 들으십니까?』
『알아요! 잘 알겠어요! 유선생의 말씀은 정신병자 ──』
그때 유탐정은
『하하……』
하고 한번 웃고나서
『은몽씨의 입장으로서야 물론 나의 말을 하나의 농담, 그렇지 않으면 하나의 정신병자의 이야기로 돌려보내고 싶을 테지요. 그러나 은몽씨! 이제부터 내가 하나의 정신병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동시에 해월이가 은 몽씨를 절대로 죽이지 않는다는 나의 결론에 대하여 좀 더 자세한 설명을 하여 드리겠읍니다. ──』
은몽은 아무말도 없다. 대체 무엇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통 알 수 없는 모양이다.
『무엇보다 먼저 저 가장무도회날 밤 ──』
유탐정은 그리고 열어젖힌 들창을 등지고 멀찍이 서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아니 가장무도회란 그 자체가 벌써 내 생각으로는 은몽의 그 어떤 원대한 계획 밑에서 개최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 왜 그러냐 하면 가장무도회는 실로 은몽씨의 계획을 진행시키는데 있어서 없어서는 아니 될 가장 중요한 무대였기 때문이지요. 왜냐하면 거기에는 가지각색의 가장 인물 이 등장하는 (假裝人物) 까닭입니다. 이리하여 은몽씨는 약혼자 백영호씨에게 졸라서 우리 조선사람의 생활상태로서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가장 무도회라는 것을 열었읍니다. 알아 들으시겠읍니까?』
『네 어서 말씀을 하시지요.』
『── 무도회날 밤, 은몽씨는 맨 처음에 「홀」에 나타나서 한차례 춤을 추고는 도로 화장실로 들어 갔읍니다. 화장실로 들어간 공작부인 주은몽은 대체 거기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그는 부리나케 입었던 「드레스」를 벗어 버리고 미리부터 장만하여 두었던 주홍색 도화복으로 몸을 감추었읍니다. 역시 주홍색 수건으로 머리를 감추고 얼굴에는 흰떡 같은 분칠을 하고 그 위에다 또 가지각색의 색채로 간판처럼 칠을 하여 놓았으니 설마 그것이 공작부인 주은몽이었을 줄이야 누가 알았으리요. 그는 다시 「홀」에 나타나서 도화역자의 존재를 사람에게 깊이 인박아 주었읍니다. 그리고 다시 복도로 빠져나가 화장실로 숨어 들어간 그는 빠른 솜씨로 도화복을 벗고 얼굴을 씻고 다시 그날밤의 주인공 공작부인으로, 화장을 하고 「홀」에 나타났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홀」에 나타난 그는 약혼자 백영호씨와 춤을 몇 차례 춘 다음에, 화장을 고치겠다는 구실로 다시 화장실로 들어가서 대담하게도, 그리고 영리하게도 자기 자신의 어깨에다 단도를 찌르고 삼면경 앞에 쓰러져서 고함을 쳤읍니다.
유탐정은 그리고 어떠냐는 얼굴로 은몽을 바라보았다.
『에에!…… 내가 이 손으로 나 자신의 어깨를 찔렀다구요? 헤에!…… 이 손으로요?』
하고 은몽은 자기의 손바닥을 드려다 보았다.
『그렇습니다. ── 은몽씨의 바로 그 손이 ── 그 바른손으로 은몽씨 자신의 왼편 어깨를 찔렀던 것입니다.』
『이 손이 말씀이지요? 분명히 이 손이 나 자신의 어깨를 찔렀단 말씀이죠?』
은몽은 그러면서 자기의 바른 손바닥을 들어서 유탐정에게 보이는 것이었다.
『그렇습니다! 틀림없이 그 바른손이 찔렀을 것입니다. 삼면경 앞에서 화장을 고치고 있던 은몽씨의 등뒤에 도화역자가 쑥 나타나서 찔렀다고 은 몽씨가 말하였을 때, 그것이 만일 사실이라면 범인은 틀림없이 왼손잡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실은 왼손잡이가 아니고 은몽씨 자신이 범인이었던 때문에 생긴 착각이었지요.』
『그리고 제가 들창 밖을 가리키면서 도화역자가 그리로 도망갔다고 말했다단 말씀이죠?』
물론 해월은 실로 『 ! ── 영리하고도 대담한 사람이었읍니다. 그와 같은 자 상행위(自傷行爲)로서 해월이라는 복수귀, 해월이라는 가공 인물(架空人物)의 존재를 사람들의 머리속에 뚜렷이 못박아 주었던 것입니다. ──』
『그것은 유선생의 너무나 지나친 공상이 아니예요? 아무리 영리하고 대담한 범인이라해도 자기의 몸을 자기의 손으로 그 처럼……』
처음에는 그저 망연자약한 태도로 유불란의 그 너무나 무서운 상상을 가만히 듣고 있던 은몽의 얼굴에는 어느새 반항의 빛이 점점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영리한 범인이라면 그만한 것 쯤 못할리 없지요. 더구나 그것이 생명에는 조금도 관계없는 경상인 것이라면…… 이러한 예는 「봔·다인」의 어떤 소설에서도 발견할 수 있지요. ── 이렇게 생각해 보면 그날밤 은몽씨가 나를 ── 아니 이선배로 변장한 김수일을 김수일이라고 간파하지 못한 은 몽씨의 이상한 행동의 수수께끼도 자연히 풀릴 것입니다.』
『이상한 행동이라구요? 어째서요?』
은몽이 바싹 달려든다.
『아무리 변장을 잘했기로 자기의 애인을 눈앞에 보면서도 그것을 딴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은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보통으로선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제가 그때 그가 김수일씨란 사실을 알고도 그것을 숨기었다는 말씀이예요?』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지 않아요?』
『숨기는 이유는 뭐입니까?』
『배영호씨 일가를 멸망시키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가진 공작부인은 그것이 자기의 애인 김수일인줄을 빤히 알면서도 귀찮으니까 모르는 척 하고 백영호씨와의 결혼의사를 한층 더 강조하였읍니다. ── 아니, 은몽씨는 이 선배의 정체가 김수일이란 사실만을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서 김수일이가 즉 탐정 유불란이란 사실도 알고 있었읍니다! ──』
『에?』
하고 은몽은 한번 더 놀라며
『그럼, 김수일씨와 교제를 하면서도 그것이 유불란씨인줄을 알고 있었단 말씀이예요?』
『그렇습니다! 이것은 나의 건방진 추측일런지 모르나 은몽씨가 ×× 개인전람회에서 처음으로 저와 인사를 나누었을 때 부터 은몽씨는 내가 탐정 유불란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지요. ── 아니 좀 더 건방진 추측을 한다면 내가 탐정이란 직업을 가졌기 때문에, 그리고 단지 그 이유만으로 은몽씨는 나와 교제를 하였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째서요?』
긴장할대로 긴장한 은몽의 얼굴이었다.
『은몽씨! 한번만 더 건방진 상상을 용서하시요. ─ 은몽씨의 그 원대한 게획을 방해할 사람, 해월의 그 저릿저릿한 범죄 설계도를 깨뜨릴 가능성이 있는 적(敵)이 즉 유불란탐정이기 때문입니다!』
유탐정의 이야기는 점점 열을 띄기 시작한다.
『처음부터 은몽씨는 계획적으로 나와 교제하였읍니다. 그런 무서운 계획이 있는줄도 모르고 김수일은 ── 아니 유불란 탐정은 공작부인 주은 몽에게 마치 소년과 같은 순정과 정열을 바쳤지요.』
『너무하세요! 그와같은 그릇된 공상을 근거로……』
은몽은 그 어떤 격정을 이기지 못하여 「테이블」에 쓰러졌다.
『공작부인 주은몽은 본래부터 요부는 아닙니다. 단지 자기의 계획을 위하여 요부 노릇을 하였을 따름이지요!』
『너무하세요! 당신은 너무해요! 자기의 부질없는 공상만을 내세우고 저의, 저의 고독한 마음, 의지할 곳 없는 입장은 조금도 이해 못하시는 거예요! 무슨 이유로……어떠한 근거가 있길래 저를 가리켜 해월이라고……』
그러면서 은몽은 흐느껴 우는 것이었다.
魔乎人乎[마호인호]
[편집]유불란은 괴로운 듯 흐느껴 우는 은몽을 잠깐동안 정신없이 바라보다가
『자아, 내 이야기를 좀 더 들어 주시요!』
하고 은몽의 그 교태(嬌態)있는 풍부한 몸뚱이에서 부터 자기자신을 가다듬으며 다시 준열한 어조로 계속하였다.
『 - 부민관 결혼식장에서 은몽씨는 해월을 발견하고 기절하였읍니다. 그러나 아까도 이야기한 바와같이 그 때는 벌써 사복한 경찰들로 말미암아 식장의 출입구란 출입구는 전부 봉해 버렸지요. 그러나 해월은 연기처럼 사라졌읍니다. 그것은 현대과학으로서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지요. 은몽씨가 해월인줄 알면서 그를 그대로 밖으로 통과 시켰던지 그렇지 않으면 은 몽씨가 연출한 하나의 교묘한 연극일겁니다! 어째 그러냐하면 그때 해월을 보았다는 사람은 은몽씨 혼자 밖에 없었으니까요!』
『그럼 협박장도 제가 썼다는 말씀이죠?』
은몽은 흐느껴 울면서 그렇게 항변하였다.
물론 은몽씨의 『 위필(僞筆)이겠지요. 나는 얼마 전에 나의 이 무서운 공상을 물적 증거로서 증좌(證左)하기 위하여 은몽씨의 필적과 해월의 필적을 대조해 보았읍니다. 대조해 본 결과 두 사람의 필적은 과연 달랐읍니다. 그러나 필적을 위조한다는 것은 해월이와 같은 영리한 범인이라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지요. 현대의 필적감정법이란 그리 절대성이 있는 건 아니니까요. - 이리하여 은몽씨는 두 번째 해월이라는 복수귀의 존재를 세상 사람들에게 깊이깊이 인식시켰어요. - 』
『네 맞았어요! 꼭 들어 맞았어요! 유선생…… 유불란 선생은 정말 명탐정이시네요! 유선생의 말씀을 듣고 나니 저는 정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통 갈피를 잡을 수가 없어요.…… 지금까지 하신 유 선생의 그 허황한 공상을 전부 승인한다고 하더라도 유선생은 …… 아아, 유 선생은 금강산 백도사에서 소년승려 해월이와 제가 교제하였다는 사실을 대체…… 대체 어떻게 설명하실테에요? 말씀 좀 해보세요! 어서 말씀 좀 해보세요!』
「테이블」에 쓸어졌던 은몽은 얼굴을 번쩍 쳐들면서 그렇게 부르짖었다.
『 - 은몽씨가 백도사에서 애기중 해월이와 교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은몽씨 이외에는 아무도 없읍니다.』
『그럼 그것 역시 제가 창작한 한토막의 거짓「로맨스」였다는 말씀이지요?』
『그렇습니다! 허기야 어느정도까지의 교제가 있었는지, 그것은 이 자리에서 갑자기 추측할 수 없읍니다만 제 생각으론 해월이가 은몽씨를 그렇게 증오하도록 - 그와같은 깊은 교제가 있었다고는 생각지 않지요.』
『그러면 유선생의 말씀이 뒤죽박죽이 되지 않아요?……저와 해월을 동일한 인물이라고 보시는 유선생의 공상은 대체 어떻게 되느냐 말씀이예요?』
은몽은 이제는 울줄을 몰랐다. 아니, 울고만 있을 때가 아니었다. 자기 자신의 그 위험한 입장을 기를 쓰고 변명하여야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여기서 나의 논리는 꽉 막혀 버렸지요. 이처럼 절벽으로 말미암아 꽉 막혀 버린 나의 논리의 방향을 어떻게 개척하여야만 될 것이냐?
그 때 백도사에는 과연 해월이라는 소년승려가 있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때 폐병 제삼기에 발을 들여 놓았던 해월은 그 후 묘향산 보성사로 가 있다가, 거기서 평양 모란봉 밑 영문사로 옮겨갔을 때는 해월의 폐병은 벌써 삼기를 넘어서 제 사기에 들어 섰읍니다. 해월은 거기서 다시 서해안 어디로 생굴을 까먹겠다는 말을 남겨놓고 어느날 표연히 영문사를 떠났읍니다 그 후 . 해월이가 어떻게 되었는지…… 이 점을 자세히 조사해 보기 위하여 얼마 전에 순사부장 박태일군을 평양으로 파견했으나 아직 아무런 소식도 없읍니다.』
『그러면 유선생의 이야기는 어떻게 돼요? 유선생은 해월이란 인물의 실재(實存)를 부정하면서 한편 해월의 실재를 인정하신다는 괴상한 논리를 어떻게 해결하세요?』
『그렇지요! 그것은 틀림없이 하나의 괴상한 논리입니다.! - 그러나 괴상한 논리도 아무것도 아니지요!』
패기가 만만한 유탐정의 얼굴을 은몽은 날카로운 증오의 눈초리로 쏘아 보았다.
『그것이 하나의 괴상한 논리가 아니라는 것을 어서 이야기해 보세요!』
하고 대드는 은몽의 낮으막한 목소리는 바늘처럼 예민하고 또 맵다.
『물론 내 눈으로 직접 본 것이 아니니까, 모든 것이 하나의 상상에 지나지 못하지만, 그 점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상상함으로써 꽉 막혔던 나의 논리의 방향을 개척할 수 있었읍니다. - 실인 즉 이 점에 대해서 나는 무척 번민하였습니다. 질서정연하게 세워 오던 나의 상상을 한 때는 포기하려고까지 생각하였지요. 그러나 결국 해월의 존재를 부정하면서도 한편 그의 존재를 긍정한다는, 이 모순된 형식논리의 참된 방향을 발견하였읍니다. - 즉 백도사에게서 폐병을 앓고 있던 소년승려 해월의 실재를 나는 긍정하지요.
그러나 복수귀 해월의 존재는 어디까지나 부정합니다!』
『그게 대체 어떻게 하시는 이야기예요?』
『모르시겠읍니까?』
『모르겠어요. - 』
『해월은 죽었읍니다!』
『에?…… 해월이 죽었다고요?』
『아니, 죽은 것을 내 눈으로 보지 못했으니까, 죽었을거라고 말씀 드리는 것이 마땅하지요.』
『………?』
『지금으로 부터 십 삼년 전, 해월이라는 승명(僧名)을 가진 어여쁜 소년 승려가 백도사에 살고 있었지요. 그 해 여름 열 여섯살인 은몽씨는 할머니와 함께 백도사로 피서를 갔던 것도 사실일 것입니다. 그러나 은몽씨의 말씀대로 과연 해월이가 그 때 그렇게 지긋지긋하게 은몽씨를 사랑했는가 그것은 혼자만이 알고 있는 영원한 비밀일 것입니다. 그러나 추측컨대 은 몽씨의 그 지긋지긋하게 무서운 연애사는 말하자면 은몽씨의 아름다운 창작 - 해월을 하나의 무서운 악마로 만들고자한 은몽씨의 독백(獨白)이었을 것입니다. 해월은 은몽씨를 따랐을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십 삼년이란 기나긴 세월이 흘러간 지금에 이르러서 은몽씨에게 그 처럼 무시무시한 복수를 하리만큼, 그 만큼 은몽씨를 사랑했다고는 통 생각키지 않아요. 박태일 부장이 돌아오면 알 수 있읍니다만 내 생각으로는 평양 영문사에서 폐병 제 사기를 접어 들었던 해월은 그 후 어디선가 남모르게 죽어 버렸을 겁니다.』
하고 유탐정은 은몽을 바라보았다.
은몽은 늙은이가 옛말을 사랑하 듯 무척 흥미를 느낀다는 얼굴로
『재미있는 말씀, 오늘밤 싫건 들려 주세요! 그래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예요?』
하고 은몽은 조소에 빛나는 눈동자를 들었다.
『조금 더 있읍니다. - 거기서 은몽씨는 무엇을 생각했는가? 십 삼년 전이면 옛날입니다. 그 옛날에 금강산 백도사에서 몇일 동안 같이 놀던 애기중- 자기를 좀 따르는 듯 하던 애기중 - 그리고 폐병으로 말미암아 여명이 길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던 애기중 - 그 애기중이 - 그 후 어디선가(이것은 은 몽씨만이 알고 있을 겁니다만) 남모르게 죽어버렸다는 소식을 주워들은 은 몽씨는 무엇을 생각했는가. 애기중과의 무서운 연애사를 창작하여 복수귀의 악마적 성격과 아울러 복수의 동기를 이야기 하였고 그의 성명을 그대로 따옴으로서 해월이라는 하나의 실재성(實存性)을 가진 인물을 등장시키어서 범인이 가공적(架突的)인물이라는 것을 「캄프라치」하였읍니다. ―은몽씨!
어떻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은몽의 싸늘한 비웃음 밖에 아무 것도 사지 못하였다.
『대단히 재미있는 이야기예요. 저는 유선생을 탐정이라고 알았는데 지금에 이르러보니 탐정이 아니고 탐정소설가의 재능을 더 많이 가지셨군요!』
이 말은 확실히 유불란으로 하여금 가슴을 서늘하게 하는 한마디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렇습니다! 이렇다할 물적증거를 아직 하나도 잡지 못한 나의 이야기는 확실히 하나의 탐정소설가적 공상에 지나지 못할 것입니다.』
하고 유불란은 초조한 듯 방안을 이리저리 돌아 다니다가
『그러나 은몽씨!』
하고 부르며 휙 돌아섰다.
『나의 이 탐정소설가적 공상은 멀지않아 은몽씨의 입으로 하여금 나를 탐정이라고 부르게 할 때가 반드시 오리라 믿읍니다!』
『그러나 제 입은 그것을 말하지 못하고 죽을 것을 걱정하지요. 태양이 서쪽에서 뜨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는 것과 마찬가지로…… 저번 날밤, 해월이 가 저에게 처음으로 기나긴 협박장을 보낸 날밤, 임경부가 삼청동 「풀」
옆 「콩크리트」담장 밑에서 엉거주춤하고 앉아 있는 해월의 그림자를 발견한 사실을 유선생은 대체 어떻게 설명하시렵니까?』
독자제군은 혹시 잊었을런지 모르나 저번 폭풍우가 쏟아지던 날밤, 삼청동 백영호씨의 저택을 방문하였던 임경부가 정문 앞까지 나왔을 때, 그는 바로 삼청동 「풀」옆 담장 밑에서 배회하고 있는 수상한 사나이의 그림자를 발견하고 놀랐던 것이다.
『아, 그 사나이 말씀입니까?』
하고 유탐정은 한번 빙그레 웃으면서 설명하였다.
『그때 사나이는 곧 저편 숲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임경부는 곧 안으로 뛰어 들어가서 본서로 전화를 걸어 부하들을 데려 왔지요.』
『그래요. 유선생의 말씀대로 제가 곧 해월이 그 사람이라고 가정한다면, 저는 그 때 틀림없이 여러 사람들과 함께 침실에 있었다는 사실을 유 선생은 대체 어떻게 설명하실 테야요?』
은몽의 얼굴에는 바늘같은 비웃음이 가득 찼다.
『흥 - 은몽씨는 그걸 가지고 나의 지론을 반박하고자 하시지만, 그건 또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단 말씀입니다.』
『어떻게요? 어서 설명을 해보세요!』
『그 사나이로 말하면 해월이도 아무것도 아니었지요.』
『누구예요?』
『사랑하는 사람의 생명을 보호코자, 한걸음 더 나아가서는 해월이라는 범인을 체포하고자 삼청공원 일대를 배회하던 탐정 유불란이었읍니다.』
『에?…… 유선생이었어요?』
최후의 성벽(城壁)이 무너진 것처럼 절망과 놀라움이 휩쓸린 것 같은 은 몽의 목소리였다.
유불란은 다시 담배를 피워 물고 은몽의 얼굴을 뚫어질 듯 바라보다가
『 - 그날밤, 정원안과 정문 밖에는 순사부장 박태일군을 위시하여 여러 경찰들이 빈틈없이 지키고 있었읍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은몽씨의 신변에는 또 다시 신기한 사건이 발생하였지요. 은몽씨와 정란씨는 침실에서 자고 있었고 남수네 부자와 임경부는 바로 옆방 「아뜨리에」에서 은몽씨를 지키고 있지 않았읍니까. 창밖은 무서운 폭풍우, 밤은 깊어서 열 두시가 이윽히 넘었을 때, 백영호씨는 「아뜨리에」에서 옆방 침실로 들어가 보고 놀랐읍니다. 침대 바로 위, 벽에 꽂힌 협박장, 그 때 은몽씨는 정란씨와 함께 침대 위에서 잠들고 있었지요. 그 협박장 - 복수귀 해월의 비가(悲歌)가 적혀 있는 그 협박장을 벽에 꽂아 놓은 것은 정란씨보다 약 반 시간 쯤 후에 잠들었다는 은몽씨 자신이었을 겁니다.』
은몽은 잠깐동안 후추알처럼 매운 침묵으로 유탐정의 설명을 비웃고 있다가
『네에 너무 꼭꼭 들어 맞아서 무섭습니다. - 그럼 이층 미술품 수집실에 출입한 것도 저였을까요?』
『물론, 은몽씨 자신일겁니다! 백영호씨가 가지고 있는 열쇠를 훔쳐 가지고 미술품 수집실에 들어가서 방바닥 매듭(節[절])을 빼놓고 아래층 침실이 내려다 보이게 해놓은 것도 은몽씨였고 방바닥 먼지 위에 사람이 기어다닌 자리를 남겨논 것도 은몽씨입니다. 왜냐고요? 그렇게 해 놓음으로서 은 몽씨는 어디까지나 해월을 하나의 실재인물로 만들려 했던 때문이지요.』
『그 누구의 탐정소설을 읽는 것 같아서, 대단히 흥미가 있읍니다. 결국은 모든 것이 나자신이 연출한 나의 연극이란 말씀이지요.』
『그렇습니다. 그럼 이제부터는 은몽씨의 연극 중에서 가장 「클라이막스」인 백영호씨 살해 당시의 광경을 설명해 볼까요? - 』
『네, 어서 - 』
『그날밤 - 백영호씨가 해월의 칼날에 죽는날 밤, 집안에는 백영호씨와 은 몽씨와 그리고 정란씨가 있었읍니다. 정란씨는 삼층 자기방에서 「피아노」
를 치고 있었고 은몽씨와 백영호씨는 아랫층 「아뜨리에」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읍니다. 아니, 백영호씨 살해에 대한 「찬스」를 엿보고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 적당할 겁니다. 왜냐하면 , 은몽씨의 연극에는 반드시 적어도 한 두 사람의 관중(觀衆)이 필요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그 때 은몽씨가 관중으로 택한 사람은 누구였던가?…… 그것은 두말 할 것 없이 그즈음 삼청공원을 산책하고 있던 남수군이었읍니다.』
『남수씨가 제 연극의 관객(觀客)이었다고요?』
『그렇지요. 남수라는 한사람의 관객이 은몽씨의 연극을 구경함으로써 해월이 가 실재인물이라는 것을 주장하게 되는 때문입니다.』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제가 알아들을 수 있게 - 』
『그럽시다!』
유불란은 그리고 점점 깊어가는 여름 밤거리를 한번 내다보고 나서
『남수군이 정문 밖에서 은몽씨의 고함치는 소리를 듣고 황급히 정문 안으로 뛰어 들어 왔을 때, 들창문을 활짝 열어 젖힌 「아뜨리에」에는 「커- 텐」이 쳐져 있었읍니다. 그 「커-텐」에 비친 두 사람의 그림자 - 하나는 틀림없는 백영호씨고 또 하나는 치렁치렁한 긴 「만또」로 전신을 감춘 복수 귀 해월이가 백영호씨의 가슴을 예리한 단도로 찌르는 광경이었지요. 그러나 그 때 은몽씨의 그림자는 통 보이지 않았읍니다.』
『저는 그 때 옆방 침실로 뛰어 들어가 무서워서 침대 아래에 숨어 있었다고 그러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제 그림자가 비치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글쎄 그것은 은몽씨의 이야기고…… 그때 남수군은 사태가 너무 촉박해짐으로 이놈 해월이! 하고 고함을 치며 현관으로 부리나케 뛰어 들어가면서 보니, 해월은 놀라 복도로 뛰어 나가면서 「스위치」를 껏읍니다. 현관으로 뛰어 들어간 남수군은 그때 캄캄한 복도에서 은몽씨의 부르짖음을 듣고 해월이와 은몽씨가 컴컴한 복도에서 서로 부딪쳤던 것으로만 생각하고 은 몽씨의 이름을 부르면서 따라 갔읍니다. 그때 은몽씨는 저편 복도의 들창으로 해월이가 도망갔다고 말했읍니다. 이리하여 남수군은 은몽씨의 교묘한 연극에 감쪽같이 속아 넘어갔던 것입니다.』
『어째서 남수씨가 속았다는 말씀이예요?』
『해월은 아무데도 도망하지 않고 그 자리에 있었던 때문이지요! 은몽씨는
「스윗치」를 끈 다음에 재빠른 솜씨로 해월의 가장을 벗어서 어딘가에 감추어 두고 다시 「스윗치」를 켰던 것입니다. 이층 미술품 수집실에서 목탁 소리가 났다던가, 백영호씨와 둘이서 천정을 바라보며 무서워 했다던가 - 그것은 전부가 은몽씨의 창작적 「세리프」지요!』
하고 은몽을 한번 흘겨 보고나서
『은몽씨! 그래도 은몽씨는 나의 상상을 긍정하지 않으십니까? 해월의 그 귀신같은 행동은 이렇게 생각하므로서 모든 의문이 풀리는 것입니다. 정원 한복판에서 「커-텐」에 비친 해월의 그림자를 본 남수군은 거기서 한번 더 복수 귀 해월의 실재를 확인하였읍니다. 그것이 은몽씨 자신의 대담무쌍한 연극이었을 줄이야 꿈에도 몰랐을 겁니다. 이리하여 남수군은 은몽씨의 살인극에 있어서 가장 충실한 역할을 하였던 것이지요. 은몽씨는 마음 속으로 살인극의 성공을 무척 기뻐하면서 그때까지 채 목숨이 끊어지지 않은 백영호씨의 앞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무한히 슬퍼하였읍니다. - 은몽씨! 은 몽씨가 정말 악인이 아니라면 하시바삐 나의 말을 긍정해 주십시요!』
『유선생!』
하고 은몽은 힘있게 불렀다.
『유선생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저로 하여금 유선생의 그 황당무게한 공상의 희생자로 만들어야만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유선생이 정말 그것을 원하신다면 그리고 그렇게 …… 돼야만 유선생의 사회적 책임을 면할 수 있겠다면…… 저는, 저는 - 』
『아닙니다. 은몽씨! 내가 그것을 원한다는 것이 아니라, 나는 다만 사건을 참되게 해결하겠다는 일념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읍니다. - 그래도 은 몽씨가 나의 말을 옳다고 여기지 않는다면 그 때 은몽씨가 백영호씨에게 최후의 「키쓰」를 하였을 때, 백영호씨가 은몽씨의 입술을 깨물은 이유를 설명해 드릴까요?』
『어서 설명해 보세요.』
『 - 백영호씨는 해월의 칼을 맞고 쓰러질 때, 실로 무서운 사실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무서운 사실 - 그것은 해월이가 남자가 아니고 여자란 사실, 그리고 그 여자란 다른 사람이 아니고 자기의 사랑하는 아내였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았읍니다. 그래서 그는 죽기 전에 그 무서운 사실을 남수군과 정란 씨에게 전하려고 팔을 은몽에게로 내밀면서 입술을 들썩거리었지요. 그러나 영리한 은몽씨는 그 눈치를 알아차리고 입을 막을 셈으로 「키쓰」를 하였읍니다. 백영호씨는 너무도 안타까운 김에 은몽씨의 입술을 깨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명배우인 은몽씨는 그것을 남편이 자기에게 남겨 놓고간 애정의 표적이라고 말하면서 한층 더 애닲게 느껴 울었지요. - 』
『입을 막을 셈으로 「키쓰」를 했다고요?』
하고 은몽은 어이없다는 듯이 한번 흥 하고 코웃음을 쳤으나 유탐정은 그런 것 쯤 조금도 개의(介意)하지 않고 자기의 생각하는 바를 어디까지나 솔직히 토로하였다.
『 - 그러나 거기서 은몽씨는 실로 치명적인 실수를 하나 저질러 놓았던 것입니다.』
『실수는 또 무슨 실수를 제가 저질렀어요?』
『백영호씨가 살해를 당한 직후, 이층 미술품 수집실에서 사람들은 문제의 처녀사진이 들어 있는 조그마한 「로켓트」를 주웠읍니다. 그것은 실로 은 몽씨 자신이 다년간 몸에 지니고 있던 「로켓트」였을 것입니다. 은몽씨의 실수로 떨어뜨린 이 한 장의 사진으로 말미암아 사건의 범위가 훨씬 좁아졌지요. 더구나 남수군이 그와 똑같은 사진을 자기 아버지의 신변에서 발견했을 순간, 그가 필연적으로 연상한 것은 해월과 자기아버지 백영호씨와의 그 어떤 관계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남수군은 부랴 부랴 자기 고향인 ×천읍을 다녀온 그날 밤, 해월은, 아니 은몽씨는 대담하게도 증인 감시 중에 남수군을 살해하므로서 그 어떤 비밀을 이야기 하려고한 그의 입을 영원히 봉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유선생은 『 그 사진도 역시 제가 떨어뜨렸다는 말씀이예요?』
하고 톡 내쏘는 은몽의 독기를 품은 질문에 유불란은 잠깐 말을 끊었다가
『물론 그랬을 것입니다.』
『그럼 대체 어떻게 되는거에요? ×천읍에서 살던 그 여분이라는 부인이 제 어머니란 말씀입니까?』
그러나 유불란은 한참동안 잠자코 서 있다가
『그것은 나 역시 할 수 없는 일이지요. 은몽씨의 아버지 주택서(朱澤書)씨와 은몽씨의 어머니 김옥녀(金玉女)씨가 오년 전까지 신의주에서 살다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지금 이 자리에서 엄여분을 은 몽씨의 어머니라고 단정할 수는 없으니까요. - 그러나 엄여분과 은몽씨 사이에 그 어떤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만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해월은 아니 은몽씨는 엄여분의 사진으로 말미암아 과거의 비밀이 탈로날 것을 두려워하여 여행으로 부터 돌아온 남수군을 쏘아 죽였으니까요!』
『유선생은 처음부터 나를 해월이라고 가정하고 그 그릇된 가정 밑에서 이론을 진행시키기 때문에 그와 같은 모순된 말씀을 하시게 되는게 아니예요?
저와 엄여분의 사이에 대체 무슨 관계가 있길래……』
그것은 실로 유탐정에게 있어서는 치명적인 반박이었다.
『은몽씨의 말씀대로 나는 아직 거기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 드릴 아무런 지식도 가진 것이 없읍니다. 만일 내가 거기 대한 정확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면 나는 벌써 사법주임 임경부로 하여금 공작부인 주은몽의 체포장을 발행하게 했을 것입니다. 』
하고 유불란은 물었던 담배를 재털이에 부비면서
『 - 그러나 은몽씨! 그 점에 대해서는 멀지않아 만족한 설명을 해드릴 때가 반드시 오리라 믿고 있읍니다!』
『네, 그럼 저는 목을 느리고 그 때가 오기를 기다리지요. - 그러면 그 담에 제가 남수씨를 살해하였다는 설명을 하여 보시지요!』
『 - 그 날밤, 이층 응접실에는 여행으로부터 돌아온 남수군을 중심으로 하여 나와 오상억변호사가 앉아 있었읍니다. 그 때 정란씨는 삼층에 있었고 은몽씨는 아랫층 침실에 있었을 것입니다. 침실에서 은몽씨는 해월을 상징하는 주홍빛 긴 「만또」를 뒤집어 쓰고 이층으로 올라와서 「도어」를 방긋하니 열고 남수를 「피스톨」로 쏘았읍니다. 그때 나보다도 먼저 뛰쳐 나간 것은 오상억 변호사였지요. 해월은 무서운 속력으로 층층대를 뛰어 내려 아래층 은몽의 침실로 뛰어 들어 갔읍니다. 뛰어 들어가면서 은몽은 「악마 하고 외치고 입었던 」 해월의 「만또」를 벗어버린 후 권총으로 바로 머리맡에 놓여 있는 화병을 쏘았읍니다.』
『아아!』
『그리고 침대 아래 쓰러져서 뒤로 따라 들어온 오변호사를 향하여, 해월은 들창 밖으로 넘어 갔다고 외쳤읍니다. 저번에 남수군을 속이듯이 오변호사를 은몽씨는 또 속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해야만 될 것이, 그 때 현관으로 나가서 침실 들창 밖으로 뛰어 온 나는 거기서 도망하는 해월의 그림자를 필연적으로 발견했어야만 될 것이 아니겠읍니까?』
『그러나 그날밤은 안개가 유달리 짙었읍니다.』
『그렇습니다. 안개가 짙어서 해월을 볼 수가 없었을거라는 점이 은몽씨가 만들어 놓은 유일한 피난소(避難所)일 것입니다!』
『어쩌면 유선생은 마치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그리도 꼭꼭 맞히시는 지 참 신통하기 짝이 없어요!』
은몽의 입술이 날카롭게 비웃는다.
제사차[第四次]의 참극[慘劇]
[편집]밤은 점점 깊어 간다.
은몽은 유불란의 이 무서운 공상을 어떻게 반박해야할지 통 모르는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무척 놀랐고, 그 다음에는 유불란을 비웃었고 또 그 다음에는 상대방을 경멸까지 하여 보았으나 유탐정의 신념에는 추호도 어지러워짐이 없는 것을 본 은몽은 돌연 밀물처럼 북받쳐 오르는 비애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흑! 하고「테이블」위에 쓰러지면서
『너무 하세요! 유선생은 정말 너무 하십니다! 아무리 유선생이 저를 미워하고 저를 원망하신다 하더라도 그건 너무도 저를 모욕하는 말씀이예요. 아무리 제가 유선생을 저버리고 오상억씨와 가까이 하였다해서 그건 너무한 분풀이예요! 유선생이 그렇게 비겁한 사람인줄은 전 정말 몰랐어요. 무슨 증거로…… 무슨 증거가 있길래 저에게 그렇게 무실의 원죄를 뒤집어 씌우려는 거예요? 탐정의 입장으로선 그러한 공상을 논하여 한시바삐 사건을 해결하고 싶겠지만, 저로선…저로선 너무도 억울한 누명이 아니예요?』
격할대로 격한 은몽이었다. 슬픔은 은몽의 온 몸뚱이를 폭풍우처럼 습격하는 것이었다.
『── 오변호사가 ×천읍엘 갔었을 때, 저는 명수대 제 집에서 한 발자욱도 밖엘 나와 본 적이 없었어요. ……그러한 처지에 있던 제가 어떻게 오변호사를 ×천읍까지 따라갔다는 말씀이에요? 부부암에서 홍서방을 대체 어떻게 죽였다는 말씀이예요 ? 유선생의 명예를 위해서 제가 유선생의 희생자가 된다면 그건…… 그건 정말 달갑게 받겠어요. 어디까지든지 유선생은 저를 그 무서운 함정에다 잡아 넣으려고…너무하세요! 무슨 증거로 저를 가르쳐 해월이라고?……』
은몽은 무섭게 흐느껴 울었다. 마자(魔者)냐? 성자(聖者)냐? 그 폐부를 찌르는 듯한 은몽의 원한에 가득찬 하소연 ── 그건 마치 원죄를 짊어진 성자의 자태 같기도 하였고, 그 성자를 황야에서 시험한 「사탄」같기도 하였다.
유탐정은 들창에 몸을 기대고 우두커니 서서 비애와 원망의 물결 속에서 흐느적거리는 은몽의 몸뚱이를 얼마동안 정신없이 바라 보다가
『으음 ──』
하고 괴로운 듯 한번 길게 신음하였다.
『은몽씨! 절대로 나를 오해하시는 것만은 그만두어 주십시요. 실연의 분풀이로 죄 없는 인간을 죄있게 만드는 것을 만족하게 생각 할, 그러한 인간은 아니올시다. ── 아까도 은몽씨에게 말씀드린바와 마찬가지로 나는 과거에 있어서나 현재에 있어서나 그리고 영원 무궁히 은몽이라는 한사람의 여인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서운 공상을 토로하지 않으면 안되게된 저의 고충을 살펴 주십시요.』
그리고 그는 은몽의 옆으로 가까이 걸어와서
『은몽씨의 눈물을 보는 순간마다, 나는 나의 공상이 얼마나 황당무게하며 얼마나 악착한가를 깨닫읍니다. 그러나 다음 순간 ── 은몽씨의 얼굴에서 눈물이 사라지는 순간, 나는 다시 나의 공상을 보다 더 굳게 믿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 은몽씨! 나의 솔직한 고백을 솔직히 받아 드려 주십시요 ── 그러나 아아!』
유불란은 마치 경탄하 듯 혼잣말로 중얼거려 본다.
『오변호사를 따라갔던 해월! 부부암에서 홍서방을 쏘아 죽인 해월! 나의 상상을 뿌리채 뒤집어 엎은 이 해월의 존재를 대체 어떻게 해석해야만 될 것인가?』
바로 그때였다. 옆방 서재로부터 전화「벨」이 요란스럽게 울려온다.
유불란은「테이블」에 엎드러진 은몽을 그대로 남겨놓고 옆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은몽은 그때야 비로소 눈물어린 얼굴을 들고 귀를 기우렸다.
『유불란이 올시다. 삼청동…엣? 정란씨가 살해을 당했다고……』
유불란의 굵다란 목소리가 놀라움과 흥분을 싣고 은몽의 고막을 두드렸다.
아니 뭐 『 , …… 정란씨가 살해를 당했다니…… 언제? 약 십 오분 전? 어디서? 삼청동 공원에서! 그러면 문학수씨, 내 지금 곧 갈테니……그런데 임 경부는 왔읍니까? 지금 막 전화를 걸었다?…오상억씨는?…오상억씨는 아직 알리지 않았다?…』
유불란은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가 다시 수화기를 들어 광화문국 ××××번을 불러냈다.
『여보시요! 오변호사 댁입니까?…아, 바로 오변호사입니까? 유불란이 올시다. 다른 것이 아니라 지금 삼청동 문학수씨 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정란씨가 또 살해를 당하였읍니다! 은몽씨 말씀입니까? 아 은몽씨는 염려 마십시요. 지금 내 집에 오셨으니까……』
유불란은 거기서 전화를 끊었다가 이번에도 또 수화기를 들고 역시 광화문 국 △△△△번을 불렀다.
『황선생 댁에 계십니까? 아, 황선생이십니까? 유불란이 올시다. 안녕하십니까? 아직 사건은 미해결입니다.……다른 것이아니라 오늘밤, 잠깐 황 선생을 뵈오러 가려고 했었읍니다. 그런데, 지금 좀 긴급한 일이 생겨서 내일 아침 일찌기 찾아 뵙겠읍니다. 부디 외출하지 마시고 저를 기다려 주시면 대단히 고맙겠읍니다. 네네,…그럼 내일 아침에……안녕히 주무십시요!』
전화를 마친 유탐정은 다시 서재로 돌아와서
『은몽씨! 은몽씨도 들으셨겠지만 정란씨가 또 살해를 당했읍니다!』
그러나 은몽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유불란의 창백한 얼굴을 잠깐동안 말똥말똥 쳐다 보다가
『유선생!』
하고 유불란을 불렀다.
『유선생! 저는 지금 기뻐해야할지 슬퍼해야할지 통 제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 없어요! 정란이가…… 정란이가 살해를 당했다는 사실은 저에게 슬픔과 기쁨을 동시에 맛보게 하는군요! 정란이가 죽은 것은 한없이 슬프지만……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정란의 죽음은 저를……저를 가르쳐 해월이라고 부르시는 유선생의 무서운 눈초리로 부터 저를 구해주었읍니다! 저는… 저는 유선생과 지금껏 이 방안에 앉아있지 않았읍니까?』
그러면서 은몽은 또 다시 북바쳐 오르는 비탄에 무섭게 몸부림 쳤다.
『자세한 이야기는 후일로 미루고, 자아 빨리 삼청동으로 가보아야 겠읍니다!』
유불란은 그러면서 은몽을 재촉하여 허덕거리는 발걸음으로 서재를 뛰쳐나왔다.
밤은 거의 열 두시가 가까웠다.
이리하여 유불란과 은몽은 광화문 네거리 어떤「가레 ─ 지」로 가서 「택시 ──」를 타고 삼청동을 향하여 달리기 시작하였다.
유불란은 팔짱을 끼고 눈을 지긋이 감은채 고슴도치 처럼 통 움직일줄을 모른다.
정란이가 죽었다! 그것은 실로 탐정 유불란에게 있어서 글자 그대로, 아니 글자 이상으로 청천벽력과 같은 무서운 사실이었다.
『아아, 가엾은 유불란! 지금까지 내가 쌓아온 모든 추리, 모든 공상은 모래 위에 누각이 아니고 무엇인가! 정란이가 죽을 때, 은몽은 분명코 나와 같이 있었다! 나와 같이 있었다!』
유탐정은 자기의 몸뚱이가 천길만길 되는 깊은 구렁속으로 쑥 빠져 들어가는 것 같은 절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해월이란 대체 어떠한 놈인가?』
유불란은 마음 속으로 그렇게 부르짖으며 감았던 눈을 슬그머니 뜨고 묵묵히 앉아 있는 은몽의 얼굴을 곁눈질 해 보았다.
사실 은몽의 얼굴은 슬퍼하는 것 같기도 하였고 기뻐하는 것 같기도 하였다.
『아아, 저 사랑스러운 얼굴! 저 어린애처럼 무심한 얼굴!』
그리고 그가 마침내 은몽의 그 백납처럼 핼쓱한 얼굴에서 발견한 것은 의지할 곳 없고 믿을 곳을 잃어버린 고아(孤兒)로서의 무서운 고독의 빛이었다.
자꾸만 자꾸만 흘러 나오려는 뜨거운 눈물을 억지로 참으려는 듯 눈만 깜박거리며 외면한채 통 얼굴을 돌리지 않는 은몽 ── 이윽고 유불란과 은몽은 삼청동 정란의 집에 도착하였다. 근방 일대는 엄중한 경비망이다.
유불란과 은몽은 경찰의 안내를 받아 아래층 침실로 들어갔다.
『아, 정란이!……』
은몽은 방안에 발을 들여 놓자마자 정란의 무참한 죽엄을 눈앞에 보고 그렇게 외치면서 피로 물들인 침대를 향하여 달려갔다.
정란의 가슴에서는 아직도 선혈이 뭉클뭉클 솟는다.
『이게 웬 일이야? 정란이!』
은몽은 그러면서 정란의 시체를 붙잡고 흐느껴 울기 시작하였다.
시체 옆에는 약혼자 문학수가 침통한 표정으로 돌부처처럼 서 있다. 한 걸음 먼저 도착한 임경부가 뒷짐을 지고 방안을 이리 저리 왔다갔다 한다.
뒤이어 오상억 변호사가 뛰어 들어온 것은 바로 그 때였다.
『이게 대체 어찌된 셈입니까?』
하고 오상억은 어리벙벙한 얼굴로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임경부도 말이 없고 문학수도 말이 없다.
『유불란씨!』
하고 그때야 비로소 임경부는 걸음을 멈추고 유불란을 향하였다.
『날이 밝는 대로 나는 사직원을 제출할 작정이오!』
하는 임경부의 얼굴에는 심각한 책임감이 알알이 떠올랐다.
『나는 이 이상 더 사건을 붙잡고 있을 수가 없읍니다. 나는 나 자신을 경멸하는 동시에 이후부터는 절대로 범죄사건에 손을 대지 않으려고 결심하였소.』
하고 잠시 말을 끊었다가
『그리고 내 생각으로는 유불란씨도 나와 함께 한시바삐 전 국민에게 사죄의 뜻을 표하는게 좋을 듯 싶읍니다.』
그러나 유불란은 아무 말도 없이 정란의 시체 옆에서 흐느껴 우는 은몽의 새하얀 목덜미만을 쏘아보고 있었다.
『유불란씨! 지금 하신 임경부의 말씀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고 그 때까지 돌부처처럼 서 있던 문학수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지당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대답 밖에는 없읍니까?』
『문학수씨, 나는 오늘 아침 사람들 앞에서 사흘 동안의 여유를 달라고 선언하였읍니다. 사흘 후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해월을 체포하겠노라고요!』
『그렇습니다!』
하고 그때 오변호사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면서
『사흘만 여유를 주신다면 변변치는 못하나마 이 오상억도 해월을 체포하겠읍니다!』
하는 오변호사의 시선과 유불란의 시선이 무섭게 부딪쳤다.
그러나 유불란은 곧 시선을 돌리며
『하옇든 정란씨가 봉변을 당하기 까지의 이야기를 들려 주시면 고맙겠읍니다.』
하는 말에 문학수는 그런건 알아서 무얼 하겠느냐는 듯 얼마동안 대답없이 서 있다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였다.
더위가 하도 심하고 해서 정란은 좀체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옆방에서 자는 문학수를 깨워 삼청동 공원으로 바람이나 쐬러 나가자고 청하였다는 것이었다.
그래 나는 신변의 위험을 『 느끼면서도 이 며칠동안 바깥 구경을 못한 정란을 위하여 그의 말대로 공원엘 나갔었지요. 흐리던 날이 개이면서 공원 일대에는 달빛이 어렴풋이 비치고 있었읍니다. 여기서 공원까지는 실상 엎디면 코가 닿으리만큼 가깝지 않습니까. 그리고 집 주위에는 경찰들이 파수하고 있겠다 어지간이 마음을 놓고「풀」을 지나 저편 가회동으로 올라가는
「드라이브·웨이」를 걷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떻게 그렇게 갑자기 나타났는지, 안국동쪽으로부터 한대의 자동차가 스름스름 기어 올라오는 것이 보이겠지요.「헷드·라이트」는 무척 밝았읍니다. 자동차 안은 캄캄한 어둠이었읍니다. 우리들은 하는 수 없이 강렬한「헷드·라이트」속에서 눈을 가리우면서 자동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렸지요. 그 순간 획하고 옆을 지나가는 자동차 속에서 시커먼 팔목이 쑥 나타나면서 한방의 권총소리가……아니 총 소리를 의식했을 때는 벌써 나의 팔목에 비틀비틀 쓰러질 때였지요. 자동차는 무서운 속력으로 가회동 쪽을 향하여 쏜살같이 질주하는 것이었읍니다.』
문학수의 설명이 끝나자 유불란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팔목시계를 들여다보며 당황한 발걸음으로 밖으로 뛰어 나왔다. 새로 한시다. 그는 현관에 대기하고 있는 자동차에 오르면서
『효자동까지!』
하고 부르짖었다.
이리하여 정문을 나선 자동차는 컴컴한 밤거리를 질풍처럼 달리기 시작하였다.
총독부를 지나고 효자동 종점을 지난 자동차는 약 십분 후 혜전교장 황세민씨의 집 앞에서 욱하고 멎었다.
초인종을 눌렀으나 황교장은 곧 나오지 않았다. 집안에 불이 모두 꺼진 것을 보니 자는 모양이다.
이윽고 침실 비슷한 방안에 전등이 켜지며 복도를 걸어 나오는 발자욱 소리. ── 현관이 드르륵하고 열리며 나타난 것은 황교장 자신이었다.
『아, 유불란씨가 아니십니까?』
잠옷을 입은 황교장이 의아스러운 눈으로 유불란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주무시는데 찾아와서…… 황송하기 짝이 없읍니다. 사실은 내일 아침 일찌기 찾아 뵙고자 하였읍니다만 사정이 좀 급해서……』
『네네, 들어오십시요.』
황교장은 앞장서서 유불란을 서재로 인도하였다.
『황선생 ──』
유불란은 의자에 앉으며 당황한 목소리로 그렇게 불렀다.
『사정이 급하시다니…… 또 무슨?……』
『정란씨가 또 살해를 당했읍니다.』
『옛 정란씨가?』
하고 놀라며
『역시 범인은 해월이?』
『물론 그럴테지요. ──』
거기서 유불란은 문학수가 한 설명을 그대로 옮겼다.
『으음 ──』
하고 긴 한숨을 짓는 황교장에게
『황선생!』
하고 유불란은 힘을 주어 불렀다.
『황선생! 아니 백문호씨!』
『옛?』
하고 그 순간 의자에서 일어나는 황세민 교장의 놀라움을 무시하고
『── 삼십 년 전 ×천읍 부부암에서 사촌동생 백영호가 떠밀어 대동강의 물귀신이 되었다는 백문호 ──』
『으, 으, 음 ──』
황교장은 다시 의자에 털썩 주저 앉으며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고 무섭게 신음하였다.
『당신…… 당신은 대체 그것을 어떻게……』
『문호의 애인 엄여분을 능욕한 악인 영호는 그 후 백부인 문호의 아버지에게 독약을 먹여서 살해한 후에, 유산 백만원을 상속하여……』
『오오…… 당신은, 당신은……』
번개처럼 떠오르는 지나간 날의 무서운 추억이 늙은 황교장의 전신을 뒤흔드는 모양이다.
『그러나 죽은 줄로만 알았던 백문호는 요행이도 해적선의 구호를 받아, 다년간 본의 아닌 해적생활을 계속하다가 ── 그리고 황선생이 중국어에 능통하다는 것으로 보아 그 해적선이 황해와 남지나해 일대를 노리고 있는 지나인의 해적선이었을 것입니다. ── 그러다가 문호는 마침내 「쌘 프란시스코」에서 해적선을 탈출하여 명망있는 목사「윌리암·엔더 ── 슨」씨의 보호를 받다가, 지금으로부터 십년 전 삼십 만원이란 거액을 품고 조선으로 돌아와서 사회사업에 여생을 바치려 했습니다.』
『당신은 마치 자기 눈으로 본것 처럼……』
놀란움을 넘어서 하나의 기적에 당면한 것 같은 황교장의 얼굴이었다.
『── 아니, 그 보다도 먼저 문호는 악마 영호에게 대한 복수의 일념에 불탔읍니다. 그러나 천성이 선량한 문호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도리어 원수와 손을 마주잡고 쓰러져가는 혜선전문학교를 위하여……』
『잠깐만, 잠깐만……』
하고 황교장은 그때 이마에 흐르는 구슬땀을 손등으로 씻으면서
『그것은 내가 그에게 청한 것이 아니라, 영호가 자진하여 자기가 범한 죄값의 만분지 일이라도……즉 사죄의 의미로서 자기의 재산의 십분지 칠 ── 칠십 만원을 제공하겠다고……』
『악마 영호에게 비하면 문호는 너무나 착한 성품의 소유자였읍니다. 그는 백영호의 죄악을 물로 씻은 듯이 잊어버리고 오로지 사회사업을 위하여 온 정신을 바쳤읍니다. ── 그는「쌘프란시스코」에서「아메리카」에 귀화했을 때의 이름 ── 황세민을 가지고 조선으로 돌아왔 때 물론 백문호라는 이름은 호적상의 주선(朱線)을 맞은지 오랬였었지요.』
「테이블」을 웅켜잡은 황교장 ── 아니 백문호의 두 팔이 와들와들 경련을 했다.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면서 황교장은 유불란의 이야기를 떨리는 목소리로 수긍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문호는 엄여분이가 죽을 때……』
『그렇습니다! 나도 그 후 ×천읍을 몇 번 찾아갔지요. 사람들 중간에 내세워서 간접으로 홍서방에게 여분의 행방을 탐지 시켜 보았으나 그 후 얼마 되지 않아서 평양 어디서 죽었다는 소리밖에 못 들었읍니다.』
『그러면 여분의 몸에서 어린애가……』
『에? 어린애가아니 여분이가 그 때 어린애를 낳았습니까?』
황교장의 놀라움은 극도에 달하였다.
그 황교장의 놀란 얼굴을 유불란은 잠깐 측은한 표정으로 묵묵히 바라보고 앉았다가
『그렇습니다. 여분은 그 때 어린애를 낳고 산후가 불순하여 세상을 떠났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 어린애는 누구의?』
『문호가 부부암에서 살해를 당한지 육칠개월 만이니까, 그것은 문호의 자식임에 틀림이 없겠지요.』
『오오! 당신은, 당신은 그런 비밀까지……』
하고 자기의 어지러운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듯 머리를 두 서너번 흔들고 나서 그 애가 그 어린애가 『 …… 지금도 살아 있읍니까? 살아 있다면 지금 어디서 무얼하고 있습니까…… 이름은 뭐라고 부릅니까……가르쳐 주세요! 어서 빨리 그것을 가르쳐 주시요!』
그러면서 황교장은「테이블」위로 손을 뻗혀 유불란의 팔을 부여잡고 미친 듯이 흔들었다.
『그 애가 어디 있는지, 그리고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그것을 이 자리에서 가르쳐 드리지 못하는 것을 용서해 주십시요. 그러나 다만 한가지, 그 애의 이름만은 가르쳐 드릴 수가 있읍니다.』
『오오! 당신은 참말 이 늙은이의 귀인이요! 그애 이름은, 그 어린애의 이름은 뭐라고 부릅니까?』
유불란은 잠깐 말을 끊었다가
『세상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해월이라고 부릅니다!』
하고 황교장을 쳐다보았다.
『옛?』
황교장은 불현 듯 잡았던 유불란의 팔목을 털썩 놓으며
『뭣이라구요?……해월이? 아니, 저 살인귀 해월이라구요?』
찢어질 듯이 부릅뜬 황교장의 두 눈에는 방금이라도 불덩어리가 튀어나올 듯이 무섭게 충열되었다. 황교장에게 있어서 그것은 실로 청천벽력과도 같은 것이었다.
『해월이가 백영호씨의 미술품 수집실에 떨어뜨린「로켓트」의 사진은 지금 황선생이 가지고 계시는 사진과 똑같은 엄여분의 사진입니다.』
『음……나도, 나도 그 사실이 하도 마음에 걸려서……으음! 역시 나의 생각과 같았었던가……』
하고 황교장은 깊은 구덩이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자신을 느끼면서
『해월이가 지금 어디 있읍니까? 그것을 한 시 바삐 이 늙은이에게 가르쳐 주시요.』
『황선생! 이 삼일 동안만 기다려 주십시요. 이 삼일 후엔 제가 황 선생을 해월의 곁으로 인도해 드리겠읍니다.』
『이 삼일 동안을 어떻게 기다리라고 당신은……지금 곧 해월이 있는 데로 나를 안내해 주시오!』
『아닙니다! 이 삼일 후가 아니면 해월이가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읍니다. ── 그런데 황선생께 한가지 여쭙고자 하는 것은 저번 날 밤에 황 선생을 찾아왔던 그 싯누런 이빨을 가진 사나이가 대체 어떤 인물인가를 가르쳐 주시면 대단히 고맙겠읍니다.』
『아, 그 오첨지 말이요?』
『오첨지?』
『네, 오첨지는 나와 해적생활을 같이한 놈인데, 우리들은 그를 오첨지하고 불렀고, 그의 이름은 모르지요. 그의 고향이 평안북도 어디라는 말을 들었을 뿐입니다.』
해적생활 시대에는 황세민 ── 아니 백문호와 오첨지는 대단히 친한 사이였으므로 백문호는 자기의 과거를 오첨지에게 하나도 숨김 없이 전부 이야기 한 것이 지금에 이르러서 생각하니 크나 큰 실책이었다.
백문호가 황세민이란 이름으로 조선으로 돌아온지 오년 후 어떤 날, 돌연 오첨지가 황교장 앞에 나타나서 해적생활 하던 황교장의 과거의 비밀을 지켜준다는 것을 조건으로 혹은 몇 천원, 몇 만원씩 갈취해 가곤 하는, 말하자면 바다위에서의 친우가 육지에서는 하나의 적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던 것이 이번 백영호 살해사건이 일어난 후부터는, 마치 거머리처럼 꼭 달라 붙어서 떨어지질 않지요. 백영호를 살해한 범인을 나라고 협박하는 것입니다. 내가 백영호 일가에게 복수한다는 것을 협박 조건으로 나에게 삼만원을 강요하러 왔던 것이지요. 그 놈은 지나간 오년 동안 내 생활에 있어서 흡혈귀(吸衣鬼)였읍니다.』
最後[최후]의 慘劇[참극]
[편집]황교장 집을 뛰쳐 나온 유탐정은 타고온 자동차에 다시 올라 태평동 자기 집 앞까지 단숨에 몰아댔다.
『운전수, 가지 말고 기다리시요.』
유불란은 그렇게 부탁해 놓고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가방을 준비해 주게!』
그는 마중나온 서생에게 명령 하였다.
『어디 여행을 떠나시렵니까?』
서생은 눈을 부비면서 주인을 쳐다본다.
『응 ——』
하고 서재로 들어가는 유불란에게 서생은 따라 들어오면서 한 장의 전보를 내어 주었다.
『한시간 전에 온 전봅니다.』
유불란은 전보를 받아들고 들여다 보았다.
그것은 해월의 행방을 탐지코자 평양으로 내려갔던 박태일 부장으로부터 온 전보인데 진남포서 친 것이었다.
유불란은 전보를 포켙 「 」에 꾸겨넣고 탁상전화의 수화기를 들어 광화문국을 불렀다.
『삼청동입니까? 임경부를 좀 바꾸어 주시요. 아, 임경부입니까? 유불란이 올시다. 그 방에 지금 여러 사람들이 있읍니까? 있어요? 그러면 임 경부께서는 내 말을 듣기만 하시고, 이런가 저런가 질문을 하시지 마십시요.』
하고 이번에는 목소리들 낮추어 가지고
『거기 지금 오상억 변호사가 있읍니까?…… 있다! 그리고 문학수씨도 있읍니까?…… 있다 그리고 은몽씨도?…… 있다! 그런데 지금 나는 어디 잠깐 여행을 떠나는데, 내일 밤이나 모레 아침에 돌아 오겠읍니다. 그러나 내가 여행 떠난다는 말은 누구에게도 해서는 안됩니다. 절대 비밀을 지켜 주실 것! 아시겠읍니까?…… 사실은 지금이라도 해월을 체포하고 싶으나 물적 증거가 하나도 없읍니다. 내가 여행으로부터 돌아오는 순간, 모든 것은 해결됩니다. 그리고 임경부께서 꼭 주의해야 될 것은 해월은 항상 임경부와 같이 있다는 것입니다. 쉬이! 그렇게 큰소리를 내면 안 된대도 그러셔 …… 해월은 지금 임경부와 같은 방에 있읍니다. 아시겠읍니까? 그러면 내가 돌아오도록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은몽씨의 신변을 잘 지켜 주십시요! 차 시간이 급박하여서 자세한 이야기는 할 수 없읍니다. 나의 주장대로 해월은 절대로 은몽씨를 해치지 않습니다. 은몽씨의 목숨은 절대로 안전합니다. 그러나 그것과는 또 다른 의미로써 은몽씨를 살 지켜달라는 말씀입니다. 아시겠읍니까?』
유불란은 전화들 끊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테이블」로 가서 열쇠로 설합을 열고 거기서 조그마한 서류함(書類凾)을 꺼내었다.
그는 서류함 속에서 커다란 「노 ― 트」를 꺼내어 「테이블」위에 펼쳐 놓았다. 「노 ― 트」등에는 금자로 「탐정일기(探偵日記)」란 글자가 적혀 있었다.
그는 그리고 약 이십분 동안이나 열심히 무엇을 적어 놓고 또 다시 서류함평양 영문사를 떠난 해월은 진남포서 약 오리 쯤 떨어져 있는 ×도라는 섬에서 일년 동안 생굴을 까먹다가 다시 ×도를 떠나 구월산 어떤 절간으로 들어간 자취가 판명. ×도를 떠날 때엔 해월의 폐병이 거의 절망적이었다고 —— 상세한 것은 명일 다시 ——에 넣은 후에 설합속에 집어 넣었다.
그리고 서생을 불러서 열쇠를 내어주며 이번 여행은 대단히 『 위험하니, 만일 내가 죽고 다시 돌아오지 못하게 되는 때는 이 설합속에 들어있는 탐정일기를 임경부께 전해 주게.』
『아니 선생님……?』
서생은 낯색을 변하며 놀라 쳐다 보았다.
『아니, 뭐 그렇게 염려할 건 없고, 만일 그런 경우가 있다면 말이네 ——』
하고 유불란은 놀라는 서생을 위로하였다.
『네! 말씀 대로 꼭 이행하겠읍니다. 그러나 선생님!』
『글쎄, 염려할 것 없대도 그래. 그리고 내 편지를 한 장 쓸테니, 지금 곧 삼청동 문학수씨에게 전해 주고 오게.』
하고 유불란은 원고지에 두서너줄 무엇인가 적어서 봉투에 넣고 꼭 봉하였다.
『자아, 그러면 다녀 오마.』
그리고 유불란은 조고마한 손가방을 하나 들고 밖으로 나갔다.
자동차가 경성역에 도착한 것은 새벽 두시 반 —— 그가 올라 탄 기차는 봉천행 특급이었다.
날이 밝자, 정란의 시체는 곧 대학병원으로 운반되어 해부대에 오르게 되었다.
이처럼 정란의 시체를 해부해 보기를 주장한 것은 임경부였다. 정란의 사인(死因)이 과연 문학수의 말대로 해월이가 쏜 총상(銃傷)으로 인한 것인지, 혹은 그 외의 어떤 원인에서 인지 임경부는 그것을 명확히 알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다.
어째서 임경부가 그렇게 정란의 사인에 의혹을 품기 시작했는가 하면, 그것은 어젯밤 아니, 오늘 새벽에 여행을 떠나려는 유불란으로 부터 다음과 같은 전화가 걸려왔기 때문이었다.
『해월은 항상 임경부의 신변에 있읍니다!』
하는 한마디였다. 이 한마디는 실로 임경부로서 모든 인물을 의심하게 하였던 것이다.
정란이가 죽은 것은 문학수와 정란이 단 둘이서 삼청 공원길을 산보할 즈음이었다. 그리고 문학수 이외에는 누구 한 사람 정란의 살해 광경을 본 사람도 없었고 해월이가 탄 괴상한 자동차의 존재를 본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해부해 본 결과 정란의 사인이 틀림없는 총상이었다.
임경부의 의혹은 아무런 수확도 남기지 못한 채 단순한 하나의 의혹에 지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문학수 자신이 『 「피스톨」로 정란을 죽이고 그러한 허위의 진술을 하였다고 생각해도 무방하지 않은가? 그러나 무슨 동기로…… 문학수는 정란의 약혼자가 아닌가?』
임경부가 대학병원을 나와 다시 삼청동으로 돌아온 것은 무더운 여름날도 거의 저물어가는 황혼이었다.
삼청동에는 은몽과 문학수와 오상억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루밤을 뜬 눈으로 새운 은몽은 현기증이 난다고 하면서 아까부터 침대에 누워 있었다.
옆방 「아뜨리에」에는 오상억과 문학수가 마치 개와 고양이처럼 서로서로 상대방을 경계하며 묵묵히 앉아 있었다. 그것도 그럴법한 것이 오상억과 문학수는 지나간 날, 정란을 사이에 두고 싸우던 연적(戀敵)이 아니었던가.
오상억은 무엇을 생각하며 문학수는 또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두 사람은 틈만 있으면 서로서로의 얼굴을 곁눈질해 보는 것이었다.
어젯밤 유탐정이 금명간 해월을 체포 하겠다고 말했을 때, 오상억 변호사도 역시 해월의 체포를 선언하였다.
그럴상 싶어서 그런지 문학수의 얼굴을 곁눈질 해 보는 오상억의 얼굴에는 어딘가 자신만만한 빛이 떠돌았다.
유탐정과 오변호사의 경쟁 —— 유탐정이 먼저 해월을 체포하느냐, 오변호사가 먼저 해월을 체포하느냐? 이것은 독자제씨와 더불어 필자 역시 대단히 궁금한 하나의 수수께끼다.
그 때 침대에 누워 있던 은몽은 오상억과 임경부에게 한시바삐 여기를 떠나 명수대로 가 있기를 청하였다.
『여기는 무서워서 잠시도 있을 수가 없어요. 그리고 두통이 어떻게 심한 지 어서 집으로 가서 한잠 늘어지게 자야겠어요.』
『그러시지요! 참 대단히 피곤하실 텐데……마침 내가 타고 온 자동차가 밖에 있으니 제가 모셔다 드리지요.』
하는 임경부의 말에
『고맙습니다만 그러나 전 그런 경찰용 자동차는 싫어요. 누가 보면 죄수 같지 않겠어요. 흐흐……』
하고 은몽은 미안하다는 듯이 억지로 웃어 보이는 것이었다.
『아 그러면 ——』
하고 그 때 오상억은 손수 전화를 걸어 「택시 —」 한대를 불렀다.
택시 가 도착하자 「 」 오상억은 은몽을 부축하여 「택시」에 올랐다. 현관까지 걸어나가는 동안 은몽은 현기증으로 말미암아 여러번 쓸어질 듯 하였던 때문이다. 핏기라고는 한점도 보이지 않는 은몽의 얼굴에는,
『이젠 내가 죽을 차례로구나!……』
하는 공포와 아울러 생에 대한 단념의 빛이 보이는 것 같았다.
문학수는 그 때 무엇을 생각했는지
『저도 같이 가 보겠읍니다.』
하고 임경부의 자동차에 올라탔다.
이윽고 두 대의 자동차가 삼청동을 출발하여 명수대를 향해 달리기 시작하였다. 오상억과 은몽이 탄 「택시」가 앞서고 임경부와 문학수의 경찰용 자동차가 뒤따랐다.
그러나 이 두 대의 자동차가 명수대까지 도착하였을 때 사람들은 실로 이상한 사실을 발견하였다.
때는 오후 여덟시 경 —— 거리거리에는 지금 울긋불긋한 「네온」과 함께 밤의 서막이 내리려 한다.
삼청동을 떠난 두 대의 자동차는 지금 종로 네거리를 왼편으로 「커 — 브」하여 일로 남대문 쪽으로 달리고 있다.
앞선 「택시」는 오상억과 은몽이 탔었고 임경부와 문학수를 태운 경찰용 자동차는 그 뒤를 약 오십 「미 — 터」가량 떨어져서 달렸던 것이었다.
『해월은 절대로 은몽을 해치지 않는다. 그러나 은몽의 신변으로부터 한시라도 감시의 눈을 게을리해서는 아니 된다.』
뒤로 달리는 창밖에 「네온·라이트」를 물끄러미 내다보면서 임경부는 어젯밤 유불란이 전화로 한 그러한 이야기를 다시금 생각하여 보는 것이었다.
그것은 실상 임경부로서는 하나의 괴상한 논리에 틀림이 없었다. —— 은몽은 절대로 안전하다. 그러나 은몽의 신변을 잘 살피라는 유불란의 말을 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될는지 그는 몰랐다.
그리고 한편 옆에 앉은 문학수로 말하면 어젯밤 유탐정이 보낸 한 장의 편지를 받은 그 순간부터, 그의 얼굴에는 무엇인가 심상치 않은 심각한 빛이 떠돌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그가 유탐정으로부터 접수한 편지에는 대체 어떠한 내용의 글이 적혀 있었던가? 그러나 그것은 차차 알려질 기회가 반듯이 오리라고 믿고 여기서는 두 대의 자동차가 명수대에 도착하기까지의 경로를 그리면 그만일 것이다.
자동차는 지금 본정입구를 지나 남대문을 향하여 달리고 있다.
그러나 두 대의 자동차가 남대문 앞까지 달려왔을 때, 남대문 앞 네거리에서 있는 「고오·스톱」의 「시그날」로 말미암아 은몽과 오상억이 탄 「택시」는 네거리를 겨우 건널 수가 있었으나 임경부의 자동차는 그만 「스톱」을 당하고 말았다.
이윽고 「스톱」의 「시그날」이 「고 —」의 「시그날」로 변하였을 때는 벌써 은몽의 자동차는 세브란스병원 앞을 스름스름 달리고 있을 때였다.
임경부의 자동차가 조금 더 속력을 내어 경성역을 지났을 즈음에 다시 두 자동차는 약 오십 「미 —터」의 간격을 두게 되었던 것이다.
삼청동을 떠날 때부터 현기증으로 말미암아 몹시 괴로워하던 은몽이 마침내 견딜 수가 없다는 듯 오상억의 품안에 기대이고 있는 모양이 뒷 「글라스」창으로 보인다.
임경부는 그때 운전수에게 앞 차를 따르라고 명령하였다. 앞 차도 뒷차가 따라오기를 기다리는 듯이 스름스름 달린다.
이리하여 두 대의 자동차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을 때
『대단히 편찮으십니까?』
하고 임경부는 커다란 목소리로 오상억을 불렀다.
『뇌빈혈 같습니다. 아까부터 구토가 날것만 같다고 그러더니만 ——』
하면서 오상억은 은몽을 자기 무릎 위에 눕혔다.
『하옇든 좀 빨리 갑시다.』
하고 오상억은 운전수에게 재촉하였다.
그러나 한강교를 지날 즈음해서는 은몽의 현기증이 좀 난 모양이었다.
이윽고 그들의 자동차는 명수대의 은몽의 집 현관 앞에서 멎었다.
사람들은 황급히 자동차에서 내렸다.
그러나 그 때 만일 유탐정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는 무척 놀랐을 것이다.
현관 전등불에 비친 「택시」의 운전수 —— 은몽과 오상억을 태워온 「택시」 운전수의 얼굴 왼편 볼 위에는 마치 지렁이가 기어가는 것 같은 무서운 칼자리가 박혀 있었던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때 무엇이 우수운지 빙그레 웃는 그 운전수의 입밖으로 마치 황소 이빨처럼 싯누런 치아(齒牙)를 발견하고 놀랐을 것이다.
황치인(黃齒人) 저번날밤, 황세민 교장을 협박한 황치인이 아닌가!
오상억은 은몽을 안고 아래층 침실로 들어가 그를 침대 위에 눕혔다.
은몽은 아무말도 없이 눈을 고스란히 감고 있었다.
『하루밤을 꼬박 세웠으니 한잠 주무시고 나면 괜찮겠지요.』
하고 문학수는 은몽의 머리와 맥을 잠깐 집어 보고나서 그런 말을 하여 수심에 찬 오상억을 위로하였다.
원체 몸이 약한데다가 『 요즘은 침식을 거의 폐하다싶이 하니까 ——』
하고 오상억도 문학수의 말에 어지간히 안심한 모양이다. 그러나 그즈음 해월의 마수가 또 다시 어둠속에서 움직이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날밤은 유달리 무더웠다. 사면 들창을 모두 열어 놓아도 바람 한점 들어오지 않는 밤이었다. 세사람은 고요히 잠든 은몽의 침대 옆에 둘러 앉아서 식모가 가져온 냉차를 마시면서 그들은 각각 자기생각에 깊이 파묻혀 있었다.
은몽을 잘 지키라는 유탐정의 말이 또 다시 임경부의 사색을 혼돈케 하는 것이었다.
임경부는 시선을 돌려 침대 위에 누은 은몽을 바라 보았다. 새카만 양복과 대조된 은몽의 새하얀 얼굴은 더 한층 창백해 보였다.
지나간 날 공작부인으로서의 꽃다발처럼 화려하던 은몽의 얼굴이 이제는 공포와 고독으로부터 오는 우수(憂愁)의 암영(暗影)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임경부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쓸쓸해지는 자기 마음을 뒤적거려 보면서, 문득 시선을 돌려 묵묵히 오상억과 마주앉아 있는 문학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때, 그는 어쩐지 가슴이 이상하게도 두근거림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왜 그런가하면 오상억의 얼굴을 때때로 곁눈질해 보는 문학수의 두 눈에서 그 어떤 잔인성을 임경부는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문학수의 눈에서만이 아니었다. 임경부는 오상억의 눈초리에서도 역시 그보다 못지않게 잔혹한 빛을 발견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한마디의 대화조차 없이 돌부처처럼 마주앉아 있는 그들 두 사람의 눈초리는 무엇인가 알 수 없으나 서로를 의심하고 서로서로의 일거일동을 무섭게 주목하고 있는 것만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 때였다.
『이층 서재에 전화가 왔는뎁쇼.』
하면서 식모가 들어왔다.
『누구에게?』
『저 경찰서에 계신 임경부나리를 좀 대어 주십사고요. —— 대단히 긴급한 말씀이 계시다면서 곧 좀 ——』
그러나 임경부는 좀처럼 몸을 일으킬 줄을 몰랐다.
『긴급한 전화라니 대체 어디서 온 전화길래……』
어디서 온 전화인지는 알 수 없으나 자기도 그 보다 못지않게 긴급한 사정이 있다는 임경부의 표정이었다.
『저어, 태평동 유탐정나리 댁에서 온건 뎁쇼.』
『유탐정?』
임경부는 하는 수 없이 의자에서 일어나면서 한번 더 오상억과 문학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 어떤 험악한 공기가 그들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음을 깨닫고 좀체로 떨어지지않는 발걸음을 옮겨 복도로 나갔다.
『「찬스」를 놓쳤나보다? ——』
임경부는 층층대로 뛰어 올라 가면서 마음 속으로 그렇게 부르짖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임경부의 가슴속은 한층 더 초조하였다.
서재로 뛰쳐 들어간 임경부는 부리나케 수화기를 들자마자
『네, 임세훈이요.』
하고 거의 고함치 듯 말하였다.
『아 그렇습니까? 저는 태평동 유불란씨댁 서생입니다.』
『그래서? 빨리 용건을 말해봐요!』
하고 조급스레 묻는 임경부의 말에
『다른 것이 아니라, 지금 박태일 부장으로부터 유불란씨에게 전보가 한창 왔는데 말씀이지요. —— 유선생은 계시지 않고 해서, 그리고 내용을 보니 대단히 급한 전보길래……』
『빨리 전보를 읽어 봐요! 잔소리 말고!』
『 —— 네에, 그러면 읽겠읍니다. —— 해월은 지금으로부터 오년 전 구월산 계명사(鷄鳴寺)에서 확실히 죽었다, 박태일 ——』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앗!』
하고 외치는 임경부의 목소리가 방안을 찢었다. 아아 동굴과도 같은 암흑!
뒤이어
『악!』
하고 외치는 목소리와 함께 복도를 무섭게 달리는 사람의 발자욱 소리 —— 그것은 틀림없이 한 사람은 쫓기고 한 사람은 그 뒤를 따르는 발자욱 소리와 였다.
『빨리 불을…… 불을!』
하고 고함치는 식모의 놀라운 목소리를 듣고야 비로소 임경부는 자기 「포켙 」에서 회중전등을 꺼내 들고 나는듯이 층층대를 뛰어 내려왔다.
임경부는 거기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식모의 그림자를 발견하였다.
『어찌된 일이냐?』
『전등이 갑자기 꺼지길래 뛰어나와 보니 아씨의 방으로부터 사나이 둘이 뛰어나오는 발자욱 소리가 들리겠지요. 그래 바로 여기서 그들과 제가 맞 부딪쳐서 저는 넘어지고 그들은 현관 밖으로 뛰어 나갔읍지요.』
그 때는 벌써 임경부는 회중전등을 번쩍거리며 은몽의 침실 안으로 뛰어 들어간 때였다.
『오오!』
하고 신음하는 임경부의 떨리는 목소리!
회중전등에 비치는 침대위의 은몽 —— 은몽의 가슴에는 한자루의 단도가 무참히 박혀 있었다.
임경부는 부리나케 단도를 빼고 자기 귀를 은몽의 입에다 갖다 대어 보았다. 거의 거의 끊어져 가는 숨길이었다.
바로 그 때 바깥 정문 밖에서
『탕!』
하는 한방의 총소리 —— 연거퍼 또 한방
『탕!』
하는 총소리 임경부는 식모에게 은몽을 간호하라는 말을 남겨놓고 들창을 넘어 정원으로 뛰어 나갔다.
넓은 정원을 뛰어 정문 밖으로 달음질해 나간 임경부는 거기서 우뚝 발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임경부의 회중전등이 비춰 주는 무서운 광경!
조약돌을 깐 행길위에 주홍빛 「만또」로 전신을 감춘 하나의 괴물이 박쥐처럼 활개를 활짝 펴고 쓸어져 있지 않는가!』
간판처럼 울긋불긋한 도화역자의 가면을 쓴 괴물! 왼편 손으로 행길 위에 깔린 조약돌을 움켜쥐고 바른편 손에는 한자루의 권총이 쥐어져 있고 —— 그러나 임경부의 회중전등이 비춰 주는 것은 그 전신 주홍색의 괴물만은 아니었다.
살인귀 해월의 시체 바로 머리맡에 한사람의 사나이가 비장한 얼굴로 땅 위에 쓸어진 괴물을 묵묵히 내려다보고 서 있는 것이었다.
『해월은 죽었읍니다.』
사나이는 감개무량한 어조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 사나이, 그것은 다른 사람 아닌 오상억 변호사 그 사람이었다.
『아 그러면?』
하고 임경부는 그 어떤 예감이 들어 맞았다는 듯이 오상억과 괴물을 번갈아 쳐다 보았다. 그러나 오상억은 아무 말도 없다.
임경부는 마침내 허리를 굽혀 엎드러진 괴물을 반듯이 제쳐놓고 얼굴을 가리운 도화역자의 탈을 슬그머니 벗겼다.
『음 ——』
하고 임경부는 신음하였다. 그것은 틀림없는 의학박사 문학수의 얼굴이 아닌가!
『문학수?』
탈을 벗기자마자 임경부는 그렇게 외쳤다.
『대체 어떻게 된 노릇입니까?』
하는 임경부의 말에
『자세한 이야기는 안으로 들어가서 합시다. —— 아, 은몽씨는 그런데 어떻게 됐어요?』
하고 고함치면서 그 때야 비로소 침실에서 자고있는 은몽을 문득 생각한 오상억은 부리나케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러나 그 때는 벌써 은몽의 숨은 뚝 끊어져버린 뒤였다. 은몽의 시체 옆에서 식모가 촛불을 켜들고 흑흑 느껴울고 있는 것이었다.
『은몽씨!』
오상억은 북받쳐 오르는 슬픔을 억제할 바 없어 은몽의 차디찬 시체를 어루만지면서 일생을 외롭게, 그리고 슬프게 마친 은몽의 영혼 앞에 엄숙히 머리를 숙였다.
『은몽씨! 은몽씨를 그렇게 괴롭히던 악마는 죽었읍니다. 아아, 그러나 은 몽씨!』
머리를 숙인 오상억의 두 눈으로부터 뜨거운 눈물이 한방울 떨어지기 시작한다.
『—— 은몽씨를 위한 저의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읍니다. 은 몽씨를 살리려고 은몽씨를 구하려고 그렇게 애를 썼읍니다만…… 은몽씨가 없는 이 세상이 제게 무슨 소용이 있으리요! 은몽씨는 바로 저요, 저 이상이었읍니다.』
하고 오상억은 마치 산 사람에게 이야기하듯이 은몽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이었다.
그때 해월 —— 아니 문학수의 시체를 현관까지 끌어다 놓은 임경부는 해월의 그 무시무시한 주홍색 「만또」와 도화역자의 탈을 벗겨들고 침실로 들어왔다 침실 안의 . 「스윗치」를 눌러 보았으나 통 전등이 켜지지 않으므로 식모에게 물어보니 현관 바로 옆담 벽에 이집 전등 전체를 끌 수 있는
「스윗치」가 붙어 있다는 것이다.
임경부는 다시 현관으로 나가 회중전등을 비춰 보았다. 식모의 말대로 계량기 옆의 「스윗치」를 눌렀다. 집안에는 다시 전등이 환 — 하게 켜졌다.
『전선을 끊은줄 알았더니……』
하고 중얼거리며 다시 침실로 들어온 임경부는
『대체 어떻게 된 셈입니까? 내가 이층으로 전화를 받으러 올라간 사이에 이렇게 ——』
하고 묻는 말에 비로소 오상억은 머리를 들고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였다.
임경부가 이층으로 올라가자 문학수는 무엇을 생각했는지 돌연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복도로 걸어 나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금 후에 갑자기 전등이 꺼졌다.
그래 오상억은 그 어떤 무서운 예감에 잠든 은몽을 그대로 남겨놓고 불시에 문학수의 뒤를 따라 복도로 나갔다.
복도는 왼편으로 「커 — 브」하여 현관으로 나가게 되었는데 그 현관 쪽에서 잘 보이지는 않으나 시커먼 그림자가 움직이고 있질 않는가.
『그래 나도 현관으로 따라 나갔더니만 그 시커먼 그림자는 내가 따라 오기를 예상한 듯이 정원으로 내려서서 침실 쪽으로 달음박질 치는 것입니다.
나도 물론 따라 갔읍니다. 그 놈은 휙하고 들창을 넘어 들어가지 않겠읍니까. —— 그러나 나도 그의 뒤를 따라 부리나케 침실 들창을 넘었을 때는 벌써 시커먼 그림자는 은몽씨의 가슴에 칼을 꽃아 놓고 복도로 뛰어 나가는 때였지요. 물론 나는 은몽씨의 몸을 더듬어 볼 겨를도 없이 그림자를 따라서 다시 복도로 뛰어 나갔읍니다. 그 놈은 은몽씨의 가슴에 칼을 꽃고 달아났으니만큼 그만큼 나와 그의 사이는 단축해져서 다시 왼편 현관 쪽으로
「커 — 브」할 때는 약 두서너 발자욱의 간격 밖에 안되었지요. 그렇습니다. 그 놈과 식모가 어둠속에서 마주친 것은 바로 그때 였지요. 그 놈은 현관을 나서서 정문 밖으로 달음박질 쳤읍니다. 거기서 결국 나와 그 놈의 사이는 점점 좁아져서 나는 마침내 그 놈의 펄럭거리는 「만또」의 귀를 잡았읍니다. ——』
거기서 두 사람 사이에는 무서운 격투가 일어 났으나 그 때 오상억은 해월의 손에 권총이 쥐어진 것을 알고 가슴이 선뜻하였다고 한다.
『나는 해월의 손으로부터 권총을 빼앗으려고 애를 썼읍니다. 그러나 그 순간 권총은 나의 겨드랑 밑에서 한방 터졌지요. 그리고 다음 순간, 또 한방 총소리가 터졌을 때, 나는 갑자기 해월의 온 몸뚱이로부터 점점 빠져 나가는 기운을 느꼈읍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땅위에 쓸어지고 말았지요.
——』
黃齒人[황치인] 逮捕[체포]
[편집]『호외! 호외!』
『공작부인 주은몽의 살해!』
『해월의 최후의 발악!』
『폭로된 해월의 정체!』
『살인귀 의학박사 문학수!』
밤 열 두시가 가까운 서울장안의 거리에는 앞을 다투는 도하의 각 신문 호외 조각이 난무했다.
눈을 부비면서 호외를 드려다 보는 경성시민 칠십 만은 세계대전이 터진 것 이상으로 놀라고 흥분하고 무서워하였다.
각 신문사에서 제일 호외, 제이 호외, 제삼 호외 ─ 이렇게 연겊어 배포하는 호외의 벼락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하루밤을 무서운 흥분 속에서 뜬 눈으로 밝히었다.
아아, 그것은 실로 의외에도 의외에도 저 저릿저릿한 살인귀 해월의 정체가 의학박사 문학수 그 사람이었다니…… 이게 대체 꿈인가, 생시인가?
칠십 만 경성시민의 충혈된 눈동자는 이 청천벽력 같은 사실에 한결같이 엽기적, 탐정소설적 흥분에 사로잡혀 호외 활자를 한자도 놓지지 않고 읽었다.
거기에는 해월을 체포하는 순간 오상억 변호사의 대담하고도 민첩한 행동과 아울러 그의 공적이 역력히 빛나고 있었다.
거기에는 또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던 공작부인 주은몽의 눈물겨운 최후와 함께 무려 사람을 다섯명이나 죽인 세세의 살인마 해월의 무서운 최후가
「센세이쇼날」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물론 거기에는 아직 미상한 점이 많았지만 삼청동 공원에서 정란을 죽인 것도 문학수 자신었을 뿐더러 오상억을 ×천읍까지 따라가서 홍서방을 죽인 것도 그 였으며 백영호씨와 백남수를 죽인 것도 그였읍니다.
그러나 그는 마침내 오상억 변호사의 맹렬한 추격에 못견디어 격투 중에 그만 쏘느라고 쏜 것이 자기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더구나 사람들은 은몽이 이 세상에 남겨놓고 간 눈물겨운 유서를 읽으므로서 약 두달 동안 산 송장으로서의 은몽의 생활에 동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니 , 이제 은몽의 유서를 적어 보면 다음과 같았다.
……………………………………
오선생(상억)!
저는 이미 모든 것을 각오하였읍니다. 오선생이 저를 위하여 아무리 노력하신다 하더라도 저는 도저히 해월의 칼날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유탐정께서는 저의 생명은 절대로 안전하다고 단언 하시었읍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그 어떤 허황한 공상밑에서 흘러나온 그릇된 단언일 것입니다.…… 아아 저는 죽어요! 저는 불원간 그놈의 칼날에 무참히 죽을거예요.
오선생! 피눈물이 나도록 쓸쓸해하고 무서워하던 저의 마음을 가장 다사롭게 위로해 주신 오선생! 제가 모든 것을 바쳐서 사모하고자 하던 오선생!
저의 이 무서운 고독을 잘 이해하여 주시는 분은 이 넓은 세상에서 오로지 오 선생 뿐이었읍니다.
그러한 오선생께 저는 무엇을 기념물로 남겨 놓고 죽어야 할까요?
오선생! 저의 일신에 속한 모든 것은 오선생의 것이었읍니다. 언젠가 오 선생은 만주 목단강 유역에 사 두신 오십 만 평의 토지를 개간하기 위하여 십만 원의 자금이 필요하다는 말을 하신 기억이 있지 않읍니까?
오선생! 저를 경멸하지 마십시요. 두달 동안 저를 위하여 모든 정력을 기우려 주신 오선생께 저의 명의로 되어 있는 이 주택을 오선생의 만주개발 자금의 도움이 되도록 사용해 주시면 저로서 이상 더 큰 기쁨이 없겠읍니다. 그러나 현가 오만원 밖에 안된다는 이 주택이 얼마나 오선생의 도움이 될런지…… 그러나 이것이 저에게 속한 재산의 전부이오니 어찌할 수 없소이다. 하여튼 저에게 속한 모든 권리를 오선생께 들인다는 말을 남겨 놓으므로서 저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의 만분지 일이라도 보답코자 하는 은몽의 마음을 헤아려 주십시오.
×월 ×일 주은 몽 ……………………………………
오상억 변호사는 사실 은몽에게 있어서는 애인인 동시에 은인이었다. 사람들은 다시 은몽의 그 여자다운 고운 마음씨에 눈물을 흘렸다.
『은몽은 마침내 죽었다! 해월도 마침내 죽었다!』
이러한 흥분 가운데서 사람들은 무서운 하루밤을 해월의 이야기로 새웠다.
그즈음 ─ 오전 일곱 시 쯤해서 오상억과 임경부가 마주 앉아있는 명수대 은몽의 집으로 한 장의 전보가 배달되었다.
그것은 처음엔 삼청동 정란에게로 온 전보였으나 정란은 이미 죽고 받을 사람이 없는 것을 짐작한 배달부는 곧 명수대 임경부에게로 재 전달한 것이었다.
임경부와 오상억은 곧 전보를 떼어 보았다.
남철이라니 아 『 …… 팔년 전 실종선고를 받은 남수군의 형이 아닌가?』
하고 외치며 오상억과 임경부는 얼굴을 마주 쳐다보았다.
팔년 동안이나 소식이 두절 되었던 백영호씨의 맏아들 백남철(白南鐵)이 오후 두시 오십분 경성역에 도착한다는 전보가 온지 약 사오 시간 후의 일이었다.
신경(新京)을 출발한 특급 「노조미」가 봉천, 안동현, 신의주, 평양을 거쳐 황주, 사리원을 지났을 때는 거의 정오가 가까웠을 때였다. 삼등 객실은 입추의 여유도 없는 만원이었고 이등객실도 빈자리라고는 두 서넛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 「노조미」이등객실 맨 구석에 앉아서 아까부터 열심히 신문을 읽고 있는 한사람의 신사가 있었다.
공작부인 주은몽의 살해와 살인귀 해월의 체포 기사로 가득찬 신문지를 손으로 활짝 펴들고 읽기 때문에 신사의 얼굴은 신문지에 가리워 통 보이지 않았다. 아까부터 열심히 해월의 기사를 읽고 있는 그 신사는 대체 누구인가? 보건데 그는 신문을 열심히 읽는다는 구실로 신문지로 자기 얼굴을 가리고 자 하는 것이 아닌가?
과연 신문지 한 복판에는 일전짜리만한 구멍이 뚫어져 있었다. 그의 쏘는 듯한 눈초리는 그 구멍을 통하여 뚫어질 듯이 내다보고 있는 것이다.
그 구멍과 그의 눈초리를 맺는 일직선 위에 저편 삼등실로 통하는 「도어」가 있었다.
이리하여 그 조그마한 구멍으로 사람들의 출입하는 광경을 주의해 보고 앉아 있는 그 신사 ― 그는 탐정 유불란 그 사람이었다.
그러면 그는 대체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가? 누구의 행동을 살피고 있을까?
그는 아까부터 그 어떠한 인물의 출현을 이 조그마한 신문지 구멍으로 내다 보면서 기다리고 있다.
과연 그의 계획은 들어 맞았다.
차가 사리원을 지나고 신막을 지나 개성역에 도착하였을 때, 혼잡한 「프렛트․홈」으로부터 이 이등객실에 올라 탄 한 사람의 수상한 사나이가 있었 하르빈에서 우연히 아버지와 남수군의 횡사(橫死)소식을 듣고 놀랐다. 오늘 오후 두 시 오십 분 차로 경성역 도착. ─ 백남철─다.
캡 을 깊이 눌러 쓰고 「 」 기다란 양복 저고리에 바른손을 쓸어 넣은, 나이가 한 오십 삼 사 세쯤 되어 보이는 사나이 ─ 왼편 볼 위에 지렁이가 기어가는 것 같은 추악한 칼자리가 있는 사나이 ─ 그것은 틀림없이 저 싯누런 치아를 가진 사나이었다.
사나이는 「도어」를 열고 이등실로 들어왔다. 그는 마치 빈 좌석을 구한다는 얼굴로 양편의자에 앉아있는 손님들의 얼굴을 하나씩 하나씩 점검하면서 천천히 이 편으로 걸어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도중에 한 둘 빈 좌석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더 좋은 자리를 구한다는 얼굴로 마침내 맨끝, 맨구석에 앉아 있는 유불란 앞에 까지 걸어 왔다.
그는 열심히 신문을 읽고 있는 유불란의 얼굴이 무척 마음에 걸리는 모양인지 마침 비어 있는 유불란의 바로 앞 좌석에 앉아버렸다.
그러나 신문지로 말미암아 유불란의 얼굴은 통 보이지 않는다.
기차가 개성을 떠나자, 사나이는 다시 한번 객실 안을 점검하 듯 살펴본 후에 「포켙」에서 담배를 꺼내 피어 물었다. 자기가 찾고자 하는 인물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이 무척 수상스럽다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최후의 희망을 버리지 않은 모양이다. 바로 자기 앞에 앉아서 열심히 신문을 읽고 있는 유불란의 얼굴을 그는 아직 보지를 못 하였던 때문이다.
사나이는 기침도 해보고 머리도 기웃거려 본다. 그러나 유불란은 통 신문지를 내리우지 않는다.
사나이의 얼굴은 약간 초조한 표정을 띄우기 시작한다. 팔뚝시계를 드려다 본다. 두시가 거의 가까웠다. 기차는 어느새 문산역을 지난다.
그 때 마침내 사나이는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이 차가 경성역에 도착하는 것은 두시 몇 분입니까?』
그러나 유불란은 대답이 없다.
『저 신문을 읽으시는데 대단히 죄송스럽읍니다만, 이 열차가 경성역에 도착하는 것이 두시 몇 분이지요?』
그래도 상대방이 신문을 내리우지 않는 것을 본 사나이의 눈동자가 그 어떤 위험을 느낀 듯이 번쩍 빛났다.
그 순간 ─ 사나이가 자기 바른편 손을 부리나케 양복저고리「포켙」에 쓸어 넣으려고 한 그 순간이었다.
『오첨지! 손을 움직여서는 안된다!』
사나이는 후다닥 머리를 들었다. 「포켙」으로 들어가려던 오른손이 중도에서 기운없이 멎어버렸다.
돈닢만큼 뚫어진 신문지 구멍으로 뾰족하니 나온 권총부리가 자기의 심장을 노리고 있지 않는가!
『대체 당신은 누구십니까?』
싯누런 치아를 가진 사나이 ─ 아니 오첨지는 놀라 그렇게 물었다.
『내가 찾고 있는 백남철이다!』
유불란은 아직 신문으로 얼굴을 가리운채 지극히 엄숙한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엣?』
오첨지는 그 싯누런 이빨을 내보이면서 또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백남철?』
『음, 팔년 전 실종선고를 받은 백남철이다!』
그러면서 유불란은 비로소 얼굴을 가리웠던 신문을 내리웠으나 아직도 신문지 속에 있는 「피스톨」은 오첨지의 심장을 겨누고 있다.
『엣! 너는?』
그것이 유탐정의 얼굴인 것을 안 오첨지는 거기서 세 번째 놀랐다.
『놀랄 것 없어.』
유불란이 오첨지의 「포켙」에 손을 쓸어 넣어 예리한 단도 한 개와 「모―젤」한 자루를 꺼내어 자기 주머니에 넣는 것을 본 오첨지는
『음─』
하고 싯누런 이빨을 갈았다.
『백남철이 돌아 온다는 전보를 친 것은 네 놈이었구나!』
하고 신음하면서 유불란의 함정에 손쉽게 빠져버린 자기를 무척 분해하였다.
『그래, 나를 대체 어떻게 하겠다는 말이야? 내가 무슨─』
하고 반항하려는 오첨지를 한번 흘겨 보고난 유불란은
『잔소리 말고 잠자코 있어!』
하고 낮으나마 힘있는 어조로 명령하였다.
사나이는 하는 수 없이 입을 다물었으나 야수와도 같이 사납게 돌변한 그의 얼굴에는 틈만 있으면 달려 들고자 하는 무서운 기세가 알알이 떠올랐다.
그 때 유불란은 지나가는 차장을 불러 그의 귀에다 입을 갖다 대고 무엇인가 한참 동안 속삭이었다.
이윽고 열차는 우렁찬 소리와 함께 경성역 「프랫트․홈」에 멎었다.
그러나 유불란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킬 줄을 모른다.
손님이 절반 쯤 내렸을 때, 아까 그 차장이 세 사람의 경찰을 이끌고 뛰어 들어왔다.
유불란은 자기에게 목례를 하는 경찰들에게
『수고스럽지만 이 분을 본서까지 정중히 모셔 가시요. 그러나 내가 정거장 밖에 나가기 까지는 여기서 잠깐 이대로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하고 유불란은 손수 「프랫트․홈」에 면한 「커―텐」을 전부 내리운 다음에 손님들의 뒤에 서서 천천히 기차에서 내렸다. 유탐정이 「프랫트․홈」에 내리자마자
『유불란씨가 아니십니까?』
하고 절반은 외치는 목소리로 혼잡한 손님들의 사이를 헤치면서 이리로 다가 오는 것은 임경부였다. 임경부의 뒤로 오상억 변호사도 따라온다.
『아, 어떻게?』
하고 유불란은 그들이 정거장에 나온 이유를 물었다.
『이차로 백남철씨가 도착한다는 전보를 받고 마중을 나왔는데……』
하는 임경부의 말에
『백남철?』
하고 유불란은 얼른 생각이 안난다는 얼굴을 지으며 상대방을 쳐다 보았다.
『저, 실종선고를 받은 백영호씨의 맏아들 말입니다.』
하고 옆에 있던 오상억 변호사가 말하였을 때야 유불란은 비로서 생각이 난다는 듯
『아, 아─』
하고 크게 한번 놀라 보이면서 물었다.
『그 사람이 어떻게 갑자기……』
『하르빈서 우연히 신문지상으로 집의 소식을 알고 이 「노조미」로 경성역에 도착한다는 전보가 오늘 아침 정란씨에게 왔는데, 물론 그는 아직 정란씨의 살해 사실을 모르고 있는 모양이지요. ─ 사진만 가지고는 어디 똑똑히 얼굴을 알 수가 있어야지……』
하고 중얼거리면서 그는 오상억과 함께 차에서 내리는 손님들을 일일이 점검해 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손님들이 전부 내리도록 찾아 보았으나 사진과 같은 얼굴을 가진 백남철은 통 발견할 수가 없었다.
『마중 올줄 알았던 정란씨가 보이지 않으니까 혹시 혼자 삼청동으로 갔을런지도 모르지요.』
하는 유불란의 말에 옳다 여기고 세 사람은 밖으로 나와서 자동차를 탔다.
『신문을 보았지요?』
하는 임경부의 말에
『네, 자세히 보았읍니다.』
하고 유탐정은 무거운 어조로 대답 한 후
『그러나 오상억씨는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을 한사람 죽였읍니다.』
하였다.
『엣?…… 그럼 해월은 다른 사람……』
하고 부르짖는 오상억 변호사의 놀라움은 실로 컸었다.
유불란은 대답이 없다.
자동차는 질풍처럼 은몽과 문학수의 시체가 안치되어 있는 명수대를 향하여 달린다.
『아니 그러면 문학수와 해월은 딴 사람이란 말씀이요?』
하고 임경부도 저윽이 놀란 얼굴을 쳐들었다.
『그렇습니다. 해월과 문학수는 전연 딴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는 유탐정의 얼굴은 무섭게 긴장되었다.
『그러면 대체 해월은……』
하고 재차 묻는 오상억의 물음에 유불란은 잠깐 동안 대답이 없다가
『글쎄, 잘 생각해 보시요. 문학수를 가르쳐 해월이라고 가정하면 대체 사건 전체는 어떻게 해결이 된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그는 주홍빛 「만또」와 도화역자의 탈을 쓰고……』
하는 임경부에게
『물론 해월은 항상 주홍색 「만또」와 도화역자의 탈을 쓰고 나타나곤 했으나, 그렇다고해서 주홍색 「만또」와 도화역자의 가면이 곧 해월 자체는 아니지요.』
『그러면 누구……?』
그 때는 벌써 한강 인도교를 지난 자동차가 명수대 은몽의 집 앞까지 다다른 때였다.
세 사람은 황급히 자동차에서 내렸다.
사복한 형사, 정복한 경찰들이 이 집을 삥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은 가장 긴장한 표정을 지으며 자동차에서 내리는 세 사람에게 인사를 한 후 평양으로 해월의 행적을 더듬으러 내려갔던 순사부장 박태일이 돌아왔다는 보고를 하였다.
그 때 현관으로부터 뛰어 나오며 세 사람을 맞이하는 박태일 부장은
『제가 어젯밤에 친 전보는 보셨을 줄 믿습니다만 ─』
하고 유불란과 임경부를 쳐다보며
『해월은 오년 전 분명히 황해도 구월산 계명사란 절에서 죽었읍니다.』
하고 해월의 죽음을 증명하는 여러 가지 사실을 이야기하였다.
『아, 수고하였네!』
유불란은 그 한마디를 남겨놓고 문학수와 은몽의 시체가 안치되어 있는 침실로 들어갔다.
침실에는 두꺼운 「커―텐」을 내렸고 그 「커―텐」을 통하여 들어오는 오후의 해볕이 백포(白布)를 씨워 놓은 두개의 시체를 부드럽게 비추고 있었다.
유불란은 은몽의 시체 앞에 우뚝 멎었다. 그리고 가장 공손한 태도로 잠깐 눈을 감고 은몽의 명복을 빈 후에 손을 내밀어 은몽의 얼굴로부터 백포를 살그머니 벗겼다.
백납처럼 하―얀 얼굴 ─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은몽의 얼굴에는 조금도 공포의 빛이 보이지 않았다. 고요히 잠든 천사처럼 거기에는 다만 평화스러운 안식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는 얼마동안 모든 사색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비장한 낯으로 은몽의 얼굴을 묵묵히 내려다 본다.
『아아 사랑스러운 악마!』
하고 중얼거리면서 벗겼던 백포로 얼굴을 일단 덮었다가, 그때 문뜩 무엇을 생각했는지 백포를 벗기고, 고요히 감은 은몽의 눈을 손으로 빌기집어 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유불란은
『엣?』
하고 놀라며 이번에는 이편 눈을 또 떠 보았다.
『음 ─ 그랬던가!』
그는 분주스러히 다시 백포로 얼굴을 가리워 놓고 흥분에 찬 얼굴로 방을 나왔다.
유불란은 대체 무엇에 놀랐으며 무엇으로 말미암아 그처럼 흥분하였는가?…… 은몽의 두 눈을 빌기집어 본 그는 거기서 대체 무엇을 발견했는가?
독자 제씨여! 조금만 더 기다려 주기 바란다.
유불란의 흥분한 얼굴은 복도로 뛰어 나오자마자 다시 평시의 얼굴로 돌아갔다.
그는 저편 현관에 서서 무엇인가 이야기하고 있는 임경부와 오상억을 데리고 이층 응접실로 올라갔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세 사람은 마주 앉았다.
유불란은 「테이블」위에 놓인 「시가렛 ․ 케이스」에서 「시끼시마」를 한 개 꺼내어 피어 물며
『사건은 이로 말미암아 완전히 해결을 지었읍니다!』
하고 임경부와 오상억을 쳐다 보았다.
『아니, 그건 문학수를 해월이라고 보지 않는 입장에서 말씀입니까?』
하고 묻는 오상억에게
『물론! 절대로 문학수씨가 해월이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유불란씨는 대체 누구를 해월이라고……』
유불란은 이내 대답하기를 피하는 듯 들창 밖에 높다라니 솟아 있는 수양버들 가지를 물끄러미 내다보다가
『해월은 죽었읍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아니 저어 오년 전 구월산에서 죽었다는 해월이 말씀입니까?』
『아니올시다! 해월은 어젯밤에 죽었읍니다.』
새로운 幻影[환영] 흡사 닭 쫓던 강아지 모양이었다. 은주와 박인해가 사라진 쪽으로 영훈은 털썩털썩 걸어 갔다. 옛 날 백연숙을 놓쳐 버렸을 때와 꼭 같은 허무감 속에서 영훈의 서글프고도 괴로운 영혼의 방랑은 다시금 시작되었다.
오후의 태양이 눈부시게 거리에 범람하고 있었다. 거리도 가로수도 사람도 자동차도 모두가 다 그 눈 부신 가을 햇빛 속에서 움직이고 있었으나 영훈의 시각에는 은주의 환영 이외에는 아무런 것도 들어 오지 않았다.
낡은 환영과 새로운 환영이 영훈의 머리 속에서 그 위치를 바꾸어버린 것이다. 연숙에의 환영이 살아 있을 무렵에는 은주에의 환영이 색채를 띠지 못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은주에의 환영이 발랄하게 살아 온 현재에 있어서 연숙에의 환영은 차차 퇴색하여 갔다.
이것은 실로 영훈 자신은 예기치도 못했던 정신 생활의 변모를 의미하고 있었다.
『나라는 인간이 불량한 탓일가?……』
영훈은 그렇게 생각해 보기도 하였다.
연숙에의 환영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을 가리켜 불량 하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지만 고영훈의 성실성을 가지고 이러한 환영의 고체가 야기 되었다는 것을 영훈 자신 슬퍼할 도리 밖에 없었다.
연숙과의 관계가 이미 이 지경에 이른 이상 십년 동안에 걸친 환영을 그대로 고히고히 기르므로써 은주에 대한 새로운 환영의 싹을 문질러 버리는 것이 도의적이고 또한 사건을 처리하는데 순서적이라고는 생각하면서도 은주에 대한 환영은 차츰 더 강렬해져 가는 것이었다.
광교 다릿 목에 있는 판자집으로 들어 가서 영훈은 꼬치 안주와 함께 벌컥벌컥 대포 술을 연거퍼 들이켰다. 몸의 심지가 빠져 나가 자즈러들 것만 같던 기력이 차차 밑힘을 얻으면서 기분이 조금 너그러워 졌다.
박인해와 달려 간 은주의 모습이 아까처럼 신경을 갈구라지게 긁어 쥐지는 차츰 않아 왔다.
그러한 갈구라진 신경을 은주도 가졌을 것이라고, 자기 몸을 한번 뒤채어 봄으로서 지나간 날의 은주의 불행했을 감정을 저울질하여 보는 마음의 여유가 점점 생겨 왔다.
『술이란 이래서 좋다.』
술 기운을 빌어 은주에의 환영을 영훈은 한사코 축소시키려고 노력을 하는 것이었다.
『연숙을 열심히 생각하자!』
은주를 재빨리 잊어 버릴 수 있는 길만이 자기의 이 불행한 감정을 구하는 유일한 방도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영훈의 의욕일 뿐, 감정은 아니었다.
『은주가 그처럼 재빨리 몸을 뒤챌 줄은 정말 몰랐다.』
판자집을 나서서 을지로 쪽으로 휘청휘청 걸어 가면서 영훈은 중얼거려 보았다.
『그처럼 재빨리 몸을 뒤챌 수 있는 한은주야 말로 가장 현대적인 여성의 한 타잎일는지 모른다.』
자기가 연숙에의 환영을 안고 있던 것처럼 은주도 박인해의 환영을 안고 있었던 것이 아닐가?……둘이가 다 딴 환영을 지닌채 이루워 졌던 결합 같이 만 생각키웠다.
그러나 다음순간, 그것은 자기의 한낱 망상일 것이라고, 영훈에 대한 은주의 애정에 허위가 섞여 있었던 것 같지는 또한 않았기에 은주는 다만 자기의 불행한 감정을 한시바삐 처리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어쨌든 은주를 대할 면목은 이미 없어지고 말았다. 인제 새삼스럽게도 은주의 무릎 앞에 머리를 숙이고 참회의 눈물을 흘린댔자 모난 은주의 성격으로서 용서할 감정도 나지 않을뿐더러 그것은 또한 영훈 자신의 욕망의 제시로서 상대편의 관용을 빌려는 뻔뻔스런 행동일 수 밖에 없었다.
『엎지른 물은 다시 담을 수 없다.』
자기의 과오를 절실히 느끼고 깨끗한 유리 그릇에서 이미 엎지러진 물일진대 그 물이 시궁창으로 흘러 들어 가건 뒷간으로 흘러 들어 가건 흘러가는 대로 흘러 갈 수 밖에 별다른 도리가 있을 수 없었다.
『백연숙과의 금후의 관계가 아무리 불행한 결과를 맺을지언정……』
자기의 행동으로서 취해진 결과일진대 그 곳에 안주하는 것이 당연하기도 했다.
『결국은 연숙의 환영을 십년 동안 안고 살아 온 것처럼 한은주의 환영을 일생 동안 안고 살아 나갈 수 밖에 나에게는 없다.』
백연숙의 과오를 영훈은 결국에 있어서 용서할 것처럼 되어 있지만 영훈 자신의 과오를 은주에게 용서받을 생각은 좀처럼 하지 못했다. 남을 관용하는 수는 가끔 있어도 남에게 관용을 받을 생각은 도시 못하는 영훈이었다.
고영훈의 삶의 방도가 그만큼 옹졸하다면 옹졸했지만 자기 손으로 이루워진 비극은 자기 자신이 감수할 줄 밖에 영훈은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아아, 한은주는 정말로 가버린 것일가?』
은주가 자꾸만 그리워 졌다. 애정의 주류(主流)가 단 하루 동안에 이처럼 급변할 줄은 꿈에도 영훈은 몰랐다.
을지로 네거리까지 영훈은 왔다.
『어디로 갈가?……』
영훈은 걸음을 멈추고 어지러운 네길어름에서 두리번거렸다.
『갈 데가 없다. 한 곳도 없다.』
영훈의 마음은 완전히 주인을 잃고 있었다. 어제까지도 영훈의 마음 속에는 연숙과 은주의 두 여성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 두 여성이 하루 사이에 한꺼번에 홀랑 날아 가 버리고만 것이다.
연숙은 인제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았다. 연숙을 만난다는 것은 엎지러진 물이 마치 시궁창으로 흘러 들어 가는 것과 같은 느낌을 자꾸만 주기 때문이다.
어지러운 십자로 한 모통이에 멍하니 서서 갈 바를 모르고 두리번거리는데
『고선생님!』
맞은 편 「신여신」사 이층에서 소리가 났다. 머리를 후딱 들었더니 들창 밖으로 깍아중이 머리를 내밀고 사동이 열심히 손을 내졌고 있었다.
『어이.』
영훈도 손을 들어 보였다.
『사장이 부르셔요! 빨리 올라 오세요!』
그러는데 사동의 등 뒤로 백연숙의 얼굴이 나타났다. 말은 없이 연숙은 사동의 뒤에서 가만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연숙의 그 은근한 인사가 영훈의 허둥거리던 마음 한 구석을 조금씩 조금씩 차지하기 시작했다.
네거리를 건너 영훈은 다소 취기있는 걸음으로 층층대를 올라 가면서 후딱 연숙의 육체를 생각하였다. 십년 동안에 걸친 아름다웠던 환영은 이미 완전히 사멸(死滅)해 버리고 있었다.
환영 보다도 먼저 육체를 생각한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라고, 영훈은 마지막 계단에 올라 서면서 격렬히 돌이돌이를 했다.
문을 열고 편집실로 들어 섰을 때는 이미 연숙의 자태는 보이지 않았다.
『아까 사장님의 심부름으로 고선생님 댁에 갔었더랬어요.』
들어 서기가 바쁘게 소년은 보고를 해 왔다.
『그래?』
『바쁜 일이 계시다고 사장님이……어서 들어가 보셔요.』
영훈은 다소 무뚝뚝한 표정으로 사장실 문을 열고 들어 갔다.
커다란 사무탁자 앞에 앉아 있던 연숙이가 조용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아까보다도 좀더 공손한 태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영훈은 얼굴이 확근 달아 왔다. 그러나 고개를 든 연숙의 얼굴은 태연하였다.
『편히 쉬시는데 모시러 보내서 죄송합니다.』
익살맞은 동글동글한 목소리를 연숙은 냈다. 표정하나 까딱 없다.
닳아 올라 오는 얼굴을 가까스로 지탕하며 영훈은 천천히 연숙의 앞으로 걸어 갔다. 걸어 가는 영훈의 표정은 완전히 굳어져 있었다.
『왜 다방에는 나오시지 않았어요?』
까딱 없던 표정을 그제서야 풀면서 연숙은 반만큼 웃었다.
『………………』
대답은 없이 영훈은 연숙의 꽃피는 얼굴을 정면으로 물끄럼이 바라보았다.
『잊었어요?』
『아니오.』
영훈은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럼……?』
『………………』
『그럼 왜 안 나오셨어요?』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아니, 제 물음은 왜 안 나오셨냐는 말이예요.』
『공연히 나오기가 싫었읍니다.』
솔직한 대답을 영훈은 했다.
순간, 연숙의 반만큼 웃고 있던 표정이 후딱 굳어지며, 그리고 가만히 얼마 동안 석고상처럼 서 있다가
『알아 들을 것 같애요.』
했다.
『무슨 뜻인가요?』
『서로가 너무 솔직한 말은 피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설명은 그만 두겠어요.』
무슨 뜻인지, 영훈도 알아 들을 것 같아서 잠자코 서서 담배를 피워 물었다.
『나도 한 꼬치……』
연숙은 손을 뻗쳐 영훈의 담배 갑에서 캬멜을 한 꼬치 빼 물며 영훈의 코 앞으로 바싹 닥아 섰다.
라이타를 켜 대려는 영훈의 손을 막고 영훈이가 문 담배 불에 자기 것을 갖다 대며
『빨아요, 힘껏!』
연숙도 담배를 빨아 불을 옮기며 영훈의 두 눈동자를 말끄럼이 쏘아 보고 있었다.
『빨리 붙여요.』
담배를 문 연숙의 빨간 입술이 너무도 눈 앞에 가깝다. 아름답던 환영은 이미 없고 연숙의 입술에 먼저 관능이 왔다. 건들여도 아끼지 않을 입술이기에 일부러 그런 포오즈를 취하는지도 몰랐다.
『왜 자꾸만 투정이야?』
담배를 빼 들기가 바쁘게 빨간 입술에서 영훈의 얼굴을 향하여 홱 연기를 뿜어 왔다.
『담배는 또 언제부터 피웠소?』
『지금 이순간부터……』
『왜?……』
『지나치게 솔직한 표정에는 연기라도 뿜어 줘야 개원해서……』
『………………』
영훈은 또 대답을 잃었다.
『말을 안 해도 다 알아』
『뭘 알아요?』
『환영이 깨진 게지.』
『………………』
『십년 간의 아름답던 환영이 하루 밤 사이에 조각 조각이야?』
『………………』
자기의 마음 속을 들여다 보는 것 같은 연숙이가 차츰차츰 무서워 졌다.
『그렇지만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야.』
『응?……』
영훈은 몰랐다.
『놀랄 것이 뭐가 있어요? 피장파장인 걸!』
영훈의 표정이 갑자기 얼어 붙기 시작하였다.
『그럼 연숙은 역시 장난으로……?』
『천만의 말씀이예요.』
『그럼……?』
『장난은 분명 아니지만……결과에 있어서 환영이 깨어진 것만은 나 역시 사실이야. 영훈씨의 환영이 아름답던 것처럼 내 환영도 아름다웠어요. 그래서 그 사지판인 삼팔선을 넘어 온 연숙이었으니까요.』
『잘 됐소!』
영훈은 퉁명스런 대답을 뱉았다.
『잘 된 것도 없고 안 된 것도 없지요. 사람이란 누구든지 다 자기의 아름다운 환영을 실현 시켜 보려는 노력을 하는 것 뿐이니까요. 노력의 결과가 어떠 하리라는 것은 해 봐야만 아는 일이구요.』
『당신이야 말로 진정한 요부다!』
『노오!』
연숙은 격렬하게 부정을 하며
『나는 다만 나의 아름다운 이상을 실현시켜 봤을 따름이예요. 내 행동에 단 한가지도 거짓은 없었으니까요. 장난이라든가 누구를 일부러 유혹한 다든가, 그런 허위의 감정은 추호도 없었어요. 모두가 다 다급하리만큼 진실한 감정 문제였으니까요.』
『옛날의 백연숙이와 똑 같다.』
영훈은 그 어떤 의분을 느끼면서 배앝듯이 말했다.
『인간의 성격이라든가 취미라든가 좀처럼 변질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는 이 순간에 와서야 확실히 깨달은 것 같아요.』
『당신은 역시 비극의 주인공이다』
『아냐요. 비극의 제조가(製造家)일는지 몰라요.』
『불행한 성격이다.』
『그렇지만 별반 불행을 느끼지도 않는 성격이기도 한가 봐요.』
『연숙씨!』
영훈은 그 때, 다소 엄숙한 어조로 존칭을 써서 불렀다.
『네?』
연숙은 담배를 재떨이에 문질러 버리면서 미소 띤 얼굴을 가만히 돌렸다.
『이 순간에 있어서의 연숙씨의 명확한 마음의 풍경을 이야기해 주어서 대단히 감사 합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좀더 마음 고생을 했을는지도 모르니까요.』
『과히 뇌심하지 마세요. 영훈씨에게 대해서 취해진 내 행동이 어디까지나 순수했다는 건만 알아 주면 정말 나는 행복해요.』
『연숙씨의 또 하나의 색다른 행복을 빌며 연숙씨 옆에서 나는 영원히 떠나겠읍니다.』
『그럴 필요는 조금도 없지 않아요? 왜 내 옆에서 떠나야만 한다는 말이예요? 예기했던 환영이 다소는 깨졌는지도 모르지만 나는 지금 영훈씨의 존재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예요.』
『……?』
영훈은 다시 한번 놀람을 금지 못했다.
『너무 심각히 놀랄 필요는 없어요. 영훈씨 역시 한은주만 없다면 나에 대한 환영이 다소 깨어졌다고 하더라도 백연숙의 존재를 전적으로 무시하거나 경멸하지는 못할만한 가치는 있으리라고 믿으니까 하는 말이예요.』
백연숙이라는 한 여성이 이처럼 자기 자신에 철저하고 또한 상대방의 심정을 이렇게도 이해하여 줄 수 있는 여성이었다는 사실을 영훈은 오늘에 와서야 분명히 깨달은 것 같았다. 십년전의 백연숙의 어림보다 십년이라는 세월의 애정의 경험을 쌓은 오늘의 연숙의 성장이 인간적인 깊이를 가지고 영훈의 관념적인 상식을 문지러 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영훈의 연륜(年輪)에서 오는 어림과 남녀 관계에 대한 무경험은 백연숙의 경지를 이해는 하여도 도저히 몸소 보조를 맞추어 나갈만한 확고한 인생관의 형성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영훈씨가 내 옆에서 떠나야만 할 이유는 조금도 없다고 나는 생각하지만요. 그렇지만 구태여 그래야만 되겠다면 그것 역시 하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지요 내가 지금 . 영훈씨를 필요로 한다는 것은 영훈씨가 제 입술에 다소간의 유혹을 받을는지도 모르는 것처럼 나도 그런 것을 영훈씨에게서 요망한다는 말이예요. 담배를 버려요.』
백연숙에 대한 세로운 환영 하나를 그 순간, 영훈은 불현듯 발견하였다.
그냥 물고 있는 담배를 손을 뻗쳐 연숙은 빼앗아 가지고 휙 재떨이에 던졌다.
『나는 이 순간, 영훈씨의 포옹을 원하고 있어요.』
영훈은 한 걸음 닥아서며 아무런 저항 없이 연숙의 상반신을 품 안에 넣었다.
『힘껏!』
『………………』
『입술!』
『………………』
둘이는 그러한 자세를 오랫 동안 유지하고 있었다.
大空(대공)의 惡魔(악마)
[편집]『뭐요? 홍서방 살해범인으로 오상억씨를?』
임경부는 깜짝 놀라며 그렇게 부르짖었다.
『그렇습니다! ×천읍 부부암에서 홍서방을 「피스톨」로 쏘아 벼랑 밑으로 떨어뜨려 버린 것은 해월이가 아니고 오변호사 자신입니다!』
『아니, 그러면 오상억씨의 보고가 전부 거짓말이었단 말이요?』
뭐가 뭔지 정신을 차릴 수 없다는 임경부의 물음이었다.
『아니올시다. 오변호사의 보고는 십분지 구 까지는 사실이었고 십분지 일—— 여분의 아이가 사내라는 것과 그 후 해월이라는 소년 승려가 ×천읍으로 백영호씨를 찾아 왔다는 것만이 거짓이었지요!』
『그러면 오상억씨는 대체 무슨 이유로……』
『복수귀 해월을 어디까지나 사나이로 인정시키기 위하여 ——』
『그것은 또 왜요?』
『임경부와 아울러 세상의 신임을 독차지 해온 「아마츄어」탐정 오상억 변호사는 한꺼풀 가면을 벗기면 악마와 제자 —— 살인귀 주은몽에게 영혼을 팔아먹은 악인입니다!』
『엣?』
하고 또 한번 놀라는 임경부의 목소리와 거의 동시에 오상억의 입으로부터 퍼붓는 듯한 폭소가 터져 나왔다.
핫 핫 핫 핫 『 , , , —— 그래 유불란씨는 대체 어떠한 증거를 가졌기에 나를 가르쳐 악마의 제자라고 ——?』
『잔소리 말아! 홍서방의 입으로부터 엄씨와 백씨의 비밀을 알고난 너는 비밀이 다시 다른 데로 누설될까 무서워서 홍서방을 부부암으로 끌고 나가서 영원히 그의 입을 봉해 버렸다. 그러나 귀신이 아닌 너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너와 홍서방이 이층에서 여분의 비밀을 이야기하고 있을 때, 홍서방의 전처 딸 —— 다년 간 곡마단에 따라 다녔던 벙어리 딸이 컴컴한 층층대에 쭈그리고 앉아서 자기 아버지 홍서방의 입으로부터 흘러 나오는 기구한 이야기를 엿듣고 있었다는 사실을 너는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포켙」에서 한개의 원고지 쪼각을 꺼내어 「테이블」위에 펼쳐 놓았다.
『자자, 이것이 어제 신의주에서 돌아오는 길에 ×천읍 홍서방의 집을 방문하여 얻은 증거품이다. 나와 그 벙어리 사이에 주고 받은 필담(筆談)의 일부분이니 네 눈으로 똑똑히 읽어보라!』
거기에는 소학교 이삼 학년 정도의 글씨보다도 더 유치한 필적으로 다음과 같은 몇 줄이 씌어 있었다.
『다행이 그 벙어리는 다년 간 「써 ― 커스」에 따라 다니면서 가장 정확한 독순술(讀唇術)을 배웠기 때문에 그 때의 대화는 하나도 놓치지 않고 엿듣고 있었던 것이 너의 악운의 최후였다!』
그때 바로 옆방 서재에서 요란한 전화 소리가 방안을 울리었다.
임경부가 옆방으로 들어가서 전화를 받더니 다시 뛰어 나오면서
『유불란씨 전화 받으시요.』
하였다.
『아 그러면 ——』
하고 서재로 뛰어 들어가다가 다시 뒤를 돌아다 보며
『임경부께서도 인젠 명탐정 오상억 변호사를 체포할 용기가 생겼을줄 믿
『예 아버지는 분명히 에미나이(계집애란말)라고 그랬어요.』
『애기중이 찾아왔다는 말은 한마디도 안했어요.』
『그런데 아버지는 왜 죽었는지 몰라요. 순사가 그러는데 무서운 중놈이 죽였대요.』
『예 그 양복쟁이(오상억을 가리침)하고 둘이서 어디로 나갔다가 부부암에서 중놈한테 총에 맞아 죽었대요』
습니다!』
하고 오상억을 경계하라는 의미의 말을 남겨놓고 안으로 들어가서 수화기를 들었다.
그것은 서장으로부터 ×× 온 전환데, 아까 유탐정이 열차 안에서 체포한 오첨지를 부하들이 아무리 취조를 해도 통 함구불언이라는 말을 하면서, 어떻게 하면 좋겠는지, 유탐정의 의견을 듣고자하는 전화였다.
그래 유탐정은 잠깐 생각하다가
『그러면 그대로 내버려 두십시요!』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다시 응접실로 들어오면서
『자아, 그러면 오상억! ××서로 가서 오래간만에 아버지를 만나보지!』
『엣? 아버지?』
새파랗게 핏기를 잃어 버리는 오상억의 얼굴!
『뭘 그리 놀라는 거야? 저 싯누런 이빨을 가진 오첨지 말이야, 오첨지!』
앗! 그 순간 옆에 지키고 섰던 임경부를 단 한주먹에 쓰러뜨리고 비조처럼 들창을 휙하고 넘어가는 오상억의 몸뚱이!
『앗!』
그러나 몸뚱이는 창밖에 늘어진 수양버들 가지를 잡고 그네처럼 휘익하고 이층에서 정원 잔디밭 위에 툭 떨어졌다.
『앗! 저 놈을 잡아라!』
상반신을 들창으로 내밀고 미친 듯이 외치는 임경부 ——
『어이, 제군! 저 놈을 잡아라! 오변호사를 잡아라!』
임경부는 커다란 목소리로 다시 한번 고함을 쳤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 때는 사복한 형사, 정복한 순경들이 모두 아래층 현관 옆 임시 휴계실에 모여 앉아서 해월의 이야기에 한층 꽃을 피우고 있을 때여서 뜨거운 햇볕이 내려 쪼이는 정원에는 사람의 그림자하나 보이지 않았다.
『아, 저놈이……』
하고 임경부가 그렇게 부르짖으면서 발을 동동 구르며 부리나케 복도로 뛰어 나갈 때는 오상억은 벌써 현관 옆에 멎어있는 자동차를 향하여 질풍처럼 달려가서, 운전대에 오르자 마자 우윽하는 「엔진」소리와 함께 정문 밖으로 휘익하고 빠져 나가고 있었다.
『뭣들을 하고 있느냐 말이야? 빨리, 오변호사를 따라라!』
미친 듯이 날뛰는 임경부의 목소리가 아래층 현관에서 들려온다.
그 소리와 함께 박태일 부장을 선봉으로하고 사복, 정복의 경찰들이 대경질색하여 정원으로 뛰어 나왔다.
『어찌된 일입니까?』
『오변호사가 무슨……』
경찰관은 무슨 일이 생겼는지 전혀 꿈결같다는 표정으로 각각 자동차와
「오 ― 토바이」에 분승하였다.
『잔소리 말고 저 놈을 따라라! 오변호사를 잡아라!』
박부장과 함께 자동차에 올라 탄 임경부의 벽력같은 호령 소리!
「오 ― 토바이」 두 대와 자동차 한대는 「엔진」소리와 함께 엉덩이를 들썩거리면서 정문 밖으로 기어나간다.
그러나 그 때는 벌써 오상억의 자동차는 명수대 고개, 넓은 신작로로 한강 인도교를 향하여 황진을 날리면서 넘어가고 있을 때였다.
때는 무더운 여름날, 서편 하늘에 기울어진 뜨거운 햇볕이 무섭게 내려쪼이는 오후 다섯시경 —— 유불란 탐정은 홀로 이층에 남아서 마치 재미있는 서부활극을 눈앞에 보듯 들창에 상반신을 의지하고 쫓고 쫓기는 자의 그 흥분한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다.
그때 다릿목까지 다다른 오상억의 자동차는 바른편으로 급 「커-브」를 하여 한강 다리 위를 그야말로 번개같이 달리고 있다.
그 뒤를 따르는 경찰대의 일행 —— 오상억의 자동차가 인도교를 다 건넜을 즈음에야 경찰대는 비로소 다리 한복판까지 따라왔다.
이윽고 쫓기는 오상억의 자동차도 보이지 않고 따르는 경찰들의 「오 ―토바이」도 보이지 않는다.
유불란은 얼마 동안 그 고요한 방안에 우두커니 서서 한강일대를 꿈꾸는 사람처럼 머엉하니 내려다 보다가
『후우!』
하고 마침내 기나긴 한숨을 지었다.
『오상억이 만일 악인의 편이 아니고 선인을 위해서 활동을 한다면 그는 필시 만인이 우러러 볼만한 명탐정의 소질을 가졌건만! 아까운 일이다!』
그러나 그 때 그는 무엇을 생각했는지 돌연 들창 옆을 떠나 옆방 서재로 뛰어들어갔다. 황급히 전화의 수화기를 들은 유불란은
『광화문 ×××××번!』
하고 불렀다.
그것은 분명히 효자동 황세민 교장의 집 전화번호였다.
『황교장이십니까?』
『네, 황세민입니다. 누구십니까?』
『유불란이 올시다. 못 뵈온 동안 안녕하십니까?』
『예, 그저……』
『그런데 이렇게 전화를 건 것은 황선생을 가장 놀라게할 소식을 한가지 전하려고 ——』
『아 무, 무슨 소식이요?』
『지금 황선생 틈이 계십니까? 계시거든 ——』
『아 틈이야 얼마던지 있지요만…… 대체 놀라운 소식이라니……』
『황선생 정말 놀라시지 마십시요!』
『아, 글쎄 무 무슨……』
『기쁘고도 슬픈 소식! 지금으로부터 약 삼십 년 전 ×천 부부암에서 영원히 헤어진 엄 여분이가 낳은 자식과 만나보고 싶으시지 않으십니까?』
『엣?……』
『황선생! 황선생! 그러기에 처음부터 놀라시면 안된다고 제가……』
『아니, 여분이가, 여분이가 자식을 낳았단 말이요? 누구요? 그 애가 대체 어디 있오? 계집애요? 사내요? 어서 이름을……』
『따님입니다!』
『딸? 그래, 그 애가 지금 어디 있오? 어디서 살고 있오?』
『자하문(紫霞門)밖에서 지금 행복된 가정을 이루고 있읍니다. 제가 이제 곧 선생을 그리로 모시고 가겠읍니다 ——.』
하고 그는 전화를 끊었다.
황세민 —— 아니 백문호의 딸이 자하문 밖에서 행복된 살림을 하고 있다는 유탐정의 말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의외의 선언이었다.
한강 인도교를 넘어선 오상억의 자동차는 무서운 속력으로 시내를 향하여 바람처럼 달리고 있었다.
그 오상억의 자동차에서 약 삼백 미터 가량 떨어진 경찰대
『포대에 든 쥐다! 저 놈을 체포하는 것은 쉬운 일이나 살게 잡아야만 한다!』
임경부는 혼잣말로 그렇게 외쳤다.
『그런데 대체 어찌된 셈입니까? 오변호사가 ——』
하고 묻는 박태일 부장에게
『음 —— 자세한 이야기는 후에하고……빨리 빨리! 속력을 좀 더 내봐!』
행길 양편에는 길 가던 사람이 우뚝 멎어 이 처참한 추격전에 눈을 둥그렇게 떴다.
거리에선 고오 「 ·스톱」의 「시그날」을 무시하고 달리는 오상억의 자동차. 그럴 때마다 교통순경의 벽력같은 고함소리가 따라오다가 그만 사라지곤 한다.
이리하여 그들의 자동차가 거의 경성역 까지 다달았을 즈음에는 그들의 간격은 삼백 미터에서 이백미터로 단축되었던 것이다.
오상억은 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그는 과연 이 맹렬한 경찰대의 추격으로 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더구나 —— 아아, 그 때 오상억으로서는 실로 불리한 광경이 하나 그의 눈 앞에 나타났다.
그것은 오상억의 자동차가 남대문을 지나 조선은행 쪽으로 향하여 달리고 있을 그 때, 오상억과 임경부 사이에 무서운 추격전이 일어났다는 보고를 받은 ×서에서는 무장한 경찰대 수 십명을 황금정 네거리에 수비시켜 놓았던 것이다.
조선은행 앞까지 질주해온 오상억의 자동차는 그만 하는 수 없이 거기서 멎어 버리고 말았다.
황금정 네거리에서부터 수 십명의 경찰대가 총부리를 나란히 하고 오상억의 자동차를 향하여 밀물처럼 몰려온다.
앗! 왼편 부청 앞으로 빠지는 길목에도 경찰대의 수풀, 수풀!
앗! 임경부 일행의 「오 ― 토바이」와 자동차가 백 미터 뒤에 절박하였다.
아아, 함정에 빠진 짐승과도 같은 운명의 오상억! 전후좌우로 밀물처럼 다가드는 총부리 총부리!
앗! 오상억은 마침내 자동차에서 뛰어 내렸다. 앞에도 경찰관 뒤에도 경찰!
그것뿐인가, 장소가 극히 번화한 본정 입구라, 순식간에 모여든 군중의 아우성 소리!
『앗! 저 놈이 권총을 꺼내 들었다!』
『으와, 으와……』
하고 떠드는 군중의 부르짖음!
앗! 위험천만! 오상억은 마침내 「피스톨」을 휘저으면서 M백화점 앞 넓은 마당을 끼고 본정 입구를 향하여 다람쥐처럼 달음박질 친다.
『으와아 ——』
하고, 떠들면서 뒷걸음질을 하는 군중의 물결 —— 그러나, 아아 본정 입구에도 경찰대의 총부리!
하늘로 오르거나 땅속으로 잣거나 오상억의 취할 길은 두가지 중의 한가지뿐 —— 때는 바로 여섯시 —— M백화점의 페관(閉舘) 「싸이렌」이 울리기 바로 직전이다.
그 순간 백화점에서 밀려 나오던 손님들이
『으악!』
소리를 치면서 물결이 칼로 베이 듯 양쪽으로 갈라섰다. 오상억이 권총을 휘두르면서 백화점 안으로 뛰어 들어갔던 때문이다.
아아, 그것은 실로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미친듯이 날뛰는 오상억의 손으로 부터 한시바삐 권총을 빼앗아야만 하지 않는가!
벌떼처럼 떠들어대는 군중을 헤치며 오상억의 뒤를따라 부리나케 쫓아 들어가는 것은 분명 임경부와 박태일 부장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백화점 안으로 따라 들어갔을 때는, 벌써 오상억의 뒷 모양이 지금 마악 윗층으로 올라가려는 「엘레베이터」안으로 사라졌을 때였다.
『앗! 그 「엘레베이터」멎어라!』
임경부의 부르짖음이 점내를 우렁차게 울리었다. 그 고함소리와 함께 일단 움직였던 「엘레베이터」가 멎지를 않겠는가!
그러나 다음 순간, 「엘레베이터·걸」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해 버렸던 것이다.
폐관 직전이었으므로 내려오는 손님들은 많고 올라가는 손님은 하나도 없는 그 「엘레베이터」안에는 종이장처럼 새파랗게 변한 「엘레베이터·걸」
의 얼굴과 그 「엘레베이터·걸」의 가슴에다 한자루의 권총을 겨누고 서 있는 오상억의 얼굴이 있을 뿐, 손님이라고는 한 사람도 없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엘레베이터」를 중심으로 하고 멀리 반원(半圓)을 그린 경찰대 —— 오상억과 경찰대는 지금 「엘레베이터」의 쇠창살 한 겹을 사이에 두고 그 쇠창살을 통하여 서로 흘겨보면서 마주 섰다.
『오상억! 그 소녀의 가슴으로부터 권총을 내려라!』
하고 그 때 임경부는 가장 엄숙한 목소리로 명령하였다.
그러나 부처님처럼 오상억의 얼굴에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오상억! 권총을 걷우라!』
임경부는 다시 한번 명령하였다. 그러나 오상억의 「피스톨」은 여전히 소녀의 가슴을 겨누고 있더니 돌연 권총부리가 휙 돌아섰다.
쇠창살 밖으로 경찰들을 향한 총부리!
『으와 ——』
하고 떠들면서 한발자욱씩 뒷걸음질 치는 경찰들 —— 그 순간 소녀를 옆으로 물리친 오상억의 왼편 손이 문 옆에 달린 「스윗치」를 눌렀다.
윗층으로 휙 하고 올라가는 「엘레베 ― 터」 ——
『앗! 저놈이 윗층으로!』
하고 층층대로 뛰어 올라가는 경찰들의 물결 ——
『각층에 몇 사람씩 지켜있어야 한다!』
임경부의 고함소리 —— 이층에서 삼층, 삼층에서 사층 —— 그러나 그 때는 벌써 「엘레베이터」는 옥상까지 기어 올라갔을 때였다.
이리하여 경찰들이 옥상까지 뛰어 올라 왔을 때, 그들은 실로 이상한 광경을 눈앞에 보고 놀랐다.
『앗……저 놈이 저기를……』
하고 고함치는 박태일 부장의 말에, 그가 손가락질하는 방향을 사람들은 일제히 쳐다 보았다.
이 M백화점으로 말하면 요즈음 창설 이십 주년 기념으로 할인 대매출로 손님을 끌고 있었는데, 거기 대한 선전광고로 매일처럼 이 옥상에서 『창설 이십 주년 기념! 할인 대매출』이란 깃발이 달린 커다란 「애드바 룸(廣告球(광고구)」을 띄웠다.
그런데 지금 오상억은 그 「애드바룸」의 줄을 마치 곡마사처럼 발발 기어 올라가고 있지를 않는가!
우체국 앞 넓은 마당에 모인 수천 명의 군중이 갑자기 으와 으으와 하고 떠들기 시작한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니었던 것이다.
멀리 쳐다보이는 백화점 옥상에서 가는 줄을 타고 조금씩 조금씩 기어 올라가고 있는 사람의 그림자!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노릇인줄을 군중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어째 그러냐 하면, 사나이가 「에드바룸」까지 다다르려면 적어도 삼십 미터는 더 올라가야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에드바룸」까지 올라가기 전에 경찰들이 아래서 풍선(風船)의 줄을 감으면 그만이니까 ——이 광고풍선은 아시다싶이 밑에는 외줄이나마 위에 올라가서는 풍선을 잡아맨 여러줄이 합해졌으므로 거기까지 올라가면 그 합해진 줄과 줄 사이에 넉넉히 힘 안드리고 사람 몸뚱이 하나가 들어 앉을 수 있다.
그러나 거기까지 올라가기에는 적어도 반 시간 이상의 시간이 걸릴 것이니 그 동안에 경찰들은 아래서 줄을 감을 것이 아닌가.
이것이 그렇지 않아도 흥분된 군중의 가슴을 더 한층 짜릿짜릿하게 했다.
아아 저것이 대체 『 , 어찌되나? 위까지 올라간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사람들은 사나이가 한시바삐 경찰들에게 붙들리는 것 보다도 그 어떤 곡예사 같은 재주를 보여주기를 더 한층 기대하면서 마음을 조였다.
앗, 과연 사람들의 추측은 들어 맞았다.
사나이가 풍선줄 약 절반 쯤 기어올라 갔을 즈음에 경찰들은 줄을 감기 시작한 모양이다.
그 때까지도 조금씩 조금씩 기어 올라가던 사나이의 조그마한 몸뚱이가 반대로 조금씩 아래로 내려오지 않는가!
그것은 비록 예기하였던 바였으나 사람들은 손에 땀을 쥐어가면서 대체 어떻게 될 것인가고 온 몸이 형언할 수 없는 흥분에 휩쓸려 버리는 것이었다.
일분, 이분, 오분, 십분 —— 사람들은 점점 커지는 풍선을 머리 위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커지는 풍선과 정비례하여 사나이와 경찰들 사이는 점점 가까워진다.
그러나 그 때 군중은 이상한 것을 보았다.
그 때까지 조금이라도 올라가고자 애쓰던 사나이의 몸뚱이가 이번에는 꼼짝도 하지않고 한 곳에 잠잠히 멎어 있지 않는가. 그러나 사나이의 손은 자기 발밑의 줄을 자꾸 어루만지고 있는 것 같았다.
『앗! 저 놈의 손에 칼이……』
망원경으로 쳐다보던 한사람의 점원이 돌연 그렇게 부르짖었다.
아아, 오상억은 자기의 몸뚱이가 땅에 까지 내려오기 전에 「에드바룸」의 줄을 끓으려는 것이었다.
한자 두자 내려오는 몸뚱이! 한오리 두오리 끓기는 밧줄!
그러나 그 순간 사람들은
『으악 ——』
하고 부르짖지 않을 수 없었다.
둥실하고 하늘로 떠 올라가는 사나이의 몸뚱이!
마침내 밧줄은 끓기었다.
『으와! 저놈 봐!』
『저런 대담한 놈 봐!』
『저 놈이 저러면 잡히지 않을텐가?』
넓은 마당에 모여선 군중의 물결은 저마다 뭐라고 떠들면서 폭풍우와 같은 흥분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었다.
줄을 끓긴 애드바룸 「 」은 점점 상공을 향하여 올라가기 시작한다. 사나이는 다시 위로 한 발자욱 두 발자욱 기어 올라간다.
아아, 그것은 실로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손에 땀을 쥐게하는 무서운 곡예(更藝)였다. 전 생명을 내걸고 하는 너무나 무시무시한 공중 비행이었다.
상공에는 그래도 바람이 있나보다. 풍선은 오상억의 조그마한 몸뚱이를 달고 차츰차츰 서북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풍선은 어느 듯 조선은행 상공으로 옮아왔다. 풍선을 따라 역시 그 편 쪽으로 밀려가는 사람들의 물결!
아우성 소리! 으와, 으와……
그러나 마침내 그 커다란 광고풍선이 「풋볼」만큼 적어졌을 때, 망원경을 가진 어떤 사나이가 돌연 부르짖었다.
『저 놈이 마침내 올라가 앉았다! 줄이 합해진 그 사이에 마치 그네를 타듯이…… 아 저놈이 웃는다! 양복소매로 이마의 땀을 씻는다! 저 놈봐! 저런 대담한 놈!……』
사람들 사이에는 거기서 망원경 약탈전이 전개되었다.
이 전대미문의 대곡예사의 공중비행! 이 소문이 어느 듯 서울장안의 골목 골목까지 전파 되었다. 담위에 올라간 사람, 지붕위에 올라간 사람, 나무 위에 올라간 사람……
풍선은 그 이상 더 올라갈 줄을 몰랐으나 바람이 서북쪽으로 이동하는 때문에 얼마 후에는 부청까지 옮아 왔다.
M백화점에서 부청까지는 그리 멀지않은 거리였으나 원체 바람이 없었기 때문에 적어도 삼십분 이상의 시간이 경과 되었던 것이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푸로펠라」소리가 들리었다.
『앗! 비행기다! 비행기가 떴다!』
그것은 ××일보사의 비행기 —— 비행기는 「애드바룸」을 중심으로 하고 마치 맴돌듯이 원을 그리며 돌아간다.
이것은 약 한시간 후에 배포된 ××일보사의 호외 기사의 한 줄거리지만, 그 때 비행기 「떠글라스」를 타고 대공(大突)의 악마 오상억의 심경을 타진코자 나타난 것은 ××일보 사회부장과 그의 부하인 민완기자 정대호였다.
그러나 「푸로펠라」소리에 대화는 불가능이고 다만 풍선의 주위를 돌면서 오상억의 모양을 관찰했을 뿐이었다.
—— 오상억이 앉은 자리는 비교적 편안하였다. 위에서 내려온 이십여 오리의 줄과 밑둥의 줄이 합해진 사이에 몸을 올려놓고 그 어여쁜 부처님과도 같은 얼굴에는 때때로 미친사람처럼 히죽히죽 웃음이 떠올랐다. 멀리 발 밑에 군중을 내려다 보고, 자기 코 앞을 스치면서 지나가는 무리들의 「카메라」를 바라보고…… 그러나 그 때는 벌써 오후 일곱시, 약 열시간 밖에 부 유력(遊浮力)이 없다는 이 불완전한 광고 풍선으로부터 「까스」가 새어나는 모양이다. 점점 아래로 내려가는 풍선을 문득 쳐다보는 오상억의 어두운 얼굴 빛! 풍선은 어느 듯 광화문 네거리 위로 옮아왔다. 무엇을 생각했을까? 그는 「포켙」에서 조그만 수첩을 꺼내어 거기다 만년필로 무엇인가 한 줄 쯤 기록하여 그것을 허공 중에 날리는 것이다. 그것이 한장뿐이 아니고 두장, 석장, 열장, 스무장 —— 이상이 ××일보사의 호외기사의 한 대목이었으나, 그 때 광화문에서 총독부 앞으로 밀려가는 군중의 머리위로 흰 나비처럼 팔락팔락 내려오는 종이 조각을 주은 사람이 있다.
아니, 그와 같은 종이조각을 주은 사람이 한사람뿐이 아니었다. 이 모퉁이에서도 줍고 저 모퉁이에서 줍고……
그 종이조각을 향하여 쇄도하는 군중! 거기에는 대체 무엇이 적혀 있었을까?
은몽아, 잘 있거라!
은몽아, 잘 있거라!
아아, 오상억은 조금씩 아래로 내려오는 풍선과 함께 얼마 남지 않은 자기의 운명을 깨닫고 사랑하는 사람 주은몽에게 최후의 작별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은몽은 벌써 그 보다 먼저 죽지 않았던가?』
이와같은 새로운 의문이 사람들의 가슴을 사로 잡았다.
그것은 실로 이상하기 짝이 없는 문구였다.
해는 서산을 넘는다. 풍선은 총독부를 지나 청운동 쪽으로 이동하면서 스름스름 아래로 내려온다.
「풋볼」만 하던 풍선이 이제는 한결 커졌다. 대바구니만 하여 보인다.
이대로 가면 오상억은 풍선과 함께 자하문밖 근방에서 완전히 땅위에 내려앉을 것이다. 사람의 파도는 아우성 소리와 함께 효자동 쪽으로 흘러간다.
海月(해월)의 正體(정체)
[편집]그보다 약 한시간 전 ─
「애드바룸」이 부정 상공을 부유하고 있을 즈음, 소연한 시내를 등지고 자하문 고개를 넘어가는 두사람의 그림자가 있었다. 한 사람은 젊고 한 사람은 늙고 ── 앞선 젊은 사람은 탐정 유불란이었고 뒤선 늙은이는 교장 황세민이었다.
고개 마루턱을 넘으면서 두 사람은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다 보았다.
그 주위를 배회하는 비행기도 보인다. 군중의 떠드는 소리가 들려온다.
『글쎄, 저 놈이 어쩌자고 저런데를 올라간담! 저러면 잡히지 않고 견디어 낼 수가 있을까.』
황교장의 중얼거림이다.
『말하자면 범죄자로서의 일정의 허영심이라고 밖에 설명할 도리가 없지요. 아, 저 풍선이 차츰 이편으로 이동해 오는 군요.』
『바람이 이쪽으로 부는 모양이지요. 그런데 ──』
하고 황교장은 ── 아니, 백문호씨는 유불란과 같이 발걸음을 옮기면서
『아까도 여러번 물었지만, 대체 내 딸이 어디서 살고 있단 말이요? 인제는 뭐 그렇게 감출것 없이 탁 터 놓고 얘길해도 괜찮을텐데 ──』
하고 유불란의 옆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런게 아닙니다. 황선생께 아니 백선생께, 일부러 감추려고 하는 것이 아니지요. 실은 나 역시 확실한 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옇든 가봐야 알지요. 내 생각 같아서는 백선생의 따님이 확실히 그 문영태(文榮泰)라는 소경네 집에 있으리라고 ──』
『뭐, 소경?』
하고 백문호씨는 저윽이 놀랐다.
『네! 놀라지 마십시요. 그 문영태라는 소경이 백선생의 사위일 것입니다.』
『아니 뭐? 그래 그 소경이 내 딸의 남편이라구요?』
하는 백문호씨에게
『거듭 놀라지 마십시요. 백선생의 따님도 역시 소경이랍니다!』
하고 어떤 의미 깊은 웃음을 입가에 띄웠다.
『내 딸이 소경?…음 ──』
백문호씨는 어디까지나 기구한 자기의 일생을 암담한 마음으로 회상해 보았다.
『내 딸이 소경이라구요? 그게 참말인가요? 참말이라면 언제부터 소경이 되었읍니까? 유불란씨, 모든 것을 속 시원히 빨리 이야기해 주십쇼! 소 경……소경……』
허둥지둥하는 발걸음을 단장으로 잡으면서 그는 신음하듯이 물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 ── 아니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오면서 부터 소경이었지요.』
『으음 ── 기구한 팔자가…… 그래 이름은 뭐라고 부릅니까?』
『예쁜이라고 부릅니다.』
『예쁜이요?』
『네, 예쁜이!』
『예쁜이! 여분이! 예쁜이! 여분이!』
백문호씨는 이 두개의 이름을 함께 불러 봄으로써 지난날, 자기의 온 정열을 불태워 주던 엄여분의 모습을 눈앞에 그려보는 것이었다.
『엄여분은 예쁜이를 낳고 산후가 순조롭지 못하여 세상을 떠났읍니다. 어미 없는 예쁜이는 그때 엄씨댁의 머슴이던 홍춘길이 내외의 손에서 자라 났지요. 그런데 홍서방에게도 예쁜이와 동갑인 딸이 하나 있었는데, 그 애도 병신이어서 말못하는 벙어리였읍니다.
홍서방 부부는 그 후 어떤 사정으로 × 천읍을 떠나서 평양으로 들어와 살다가 예쁜이가 열 살 때에 병신인 두 어린애를 길러 내던 홍서방의 처가 전염병으로 털컥 죽고마니까 홍서방은 젊은 후처를 얻어 드리면서, 귀찮은 이 두 병신애를 서울 어떤 맹아학원(盲啞學院)에 넣어두고 자기는 후처와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다가, 지금으로부터 오년 전에 다시 × 천읍으로 돌아가 살았지요. 홍서방의 주머니에는 그 때 두 어린애를 맹아학원에 맡겨둘 만한 돈이 있었읍니다. 그 후 부터는 통 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홍서방의 딸은 어떤 곡마단의 줄타기로 들어가고 예쁜이는 학원에서 알선하여 지금의 남편인 문영태라는 복술가의 집에 맏며느리로 들어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 이것은 어제 × 천읍으로 가서 홍서방의 벙어리 딸에게 들은 사실이니까 가장 확실한 것으로 믿습니다.』
유불란은 거기서 말을 끊고 주첨주첨 따라오는 늙은이의 어두운 얼굴을 엿보았다.
그러나 백문호씨는 아무말도 없다. 그저 머리를 숙으리고 모든 것이 꿈결 같다는 표정으로 유불란의 뒤를 따라가는 것이다.
십년 전에 엄여분이가 낳았다는 딸자식 예쁜이의 얼굴을 머리 속에 그려 보면서 ──.
좁은 길가에 게딱지치럼 다닥다닥 붙어 있는 부암정을 지났을 때는 해가 서편 산기슭을 누엿누엿 넘으려는 때였다.
『대체 그 애가 살고 있는 데가 어디 쯤 됩니까?』
하는 백문호씨의 기운없는 물음에 유불란은 힐끗 뒤를 돌아다보며 홍제리 일백 삼십 『 × 번지 라는데요. 아, 잠깐 기다리시요. 내 저 담배가게에서 물어 보고 오지요.』
유불란은 행길가 조그마한 담배가게에 들려서
『아, 말씀 한마디 여쭙겠읍니다. 홍제리 일백 삼십 × 번지면 대개 어느 방향입니까?』
하는 온근한 물음에 호외를 읽고 있던 젊은 주인이 머리를 쳐들며
『일백 삼십 × 번지면?…아, 아직 멀었읍니다. 한참 더 가셔서 다시 한번 물어 보십시요.』
하고는 다시 호외를 읽는다. 호외는 두말할 것 없이 광고풍선을 탄 오상억에 관한 기사였다.
유불란은 잠깐 머리를 기웃하고 호외를 들여다 보았다.
『글쎄 이런 대담하고도 민첩한 놈이 어디 있겠소! 풍선의 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는 데 풍선의「까스」가 점점 빠져서 그대로 내버려 두면 두 시간 후에는 이 자하문 밖 어디서 땅위에 떨어지리라고요! 지금 총독부까지 떠왔다는 군요. 글쎄! 참 사람이 사노라면 별별 괴상한 것을 다 보겠소!』
젊은 주인의 혼잣말 비슷한 중얼거림을 등뒤에 남겨놓고 유불란은 다시 백 문호씨와 어깨를 나란히하고 시외로 시외로 자꾸만 걸어갔다.
이리하여 자하문 고개에서 약 십리 쯤 걸었을까, 지붕위에 도사리고 있던 저녁연기도 이제는 사라지고 회색빛 황온이 마을을 덮기 시작할 즈음에야 비로소 그들은 목적지 박영태의 집싸리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싸리문 옆에 ── 복술가(卜術家)박영태 ── 라는 조그마한 널판자로 만든 간판이 붙어 있는 이 집은, 마을에서도 한참 떨어져 있었다.
개천을 하나 건너선 산비탈에 외따로 서 있는 초가 삼칸이었다.
『이 집입니다!』
하는 유불란의 말에 백문호씨는 그저 머리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백선생에게 미리 다져 둘 것은 ──』
하고 이번에는 목소리를 낮추어
『어떠한 놀라운 일이 있더라도 결코 고함을 친다든가 또는 그 놀란 표정을 상대방에게 보여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의외의 사실에 접하시더라도 백선생은 절대로 입을 열어서는 안됩니다! 내가 백 선생과 따님을 소개할 때까지 백선생은 그저 돌부처 처럼 잠자코 계셔주시면 됩니다! 알아 들어시겠습니까?』
하고 백문호씨를 쳐다보았다 . 늙은이는 그렇지 않아도 모든 것이 꿈같은 데다가 더구나 이러한 유탐정의 다짐을 어떻게 해석해야만 될지 통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저 알아들었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일 따름이었다.
이윽고 유불란은 싸리문을 열었다. 그리고 주인을 부르려고 한발자욱 안으로 들여 놓은 그때 건너 방문에 친 발이 들리면서 이집 주인인 듯한 소경 ─ 나이가 한 사십이 될락말락하여 보이는 눈먼 사나이가 소경 독특한 감각으로 얼굴을 쳐들고 마루로 나왔다.
『거 누구요!』
바로 저녁을 물리고 나온 듯한 소경은 긴 담뱃대를 툭툭 마루 끝에 털면서 그렇게 묻는다.
『이 댁이 점을 치시는 박영택씨 댁이십니까?』
유탐정의 목소리는 대단히 낮으막하다.
『네 그렇소. 내가 박영택이란 사람이 올시다.』
『아, 그렇습니까? 아이 참 어찌나 먼지……』
하고 유탐정은 마루 앞으로 다가서면서
『하도 용하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읍니다.』
그 때야 비로소 안색을 펴며
『아, 먼길을 찾아 주셔서 황송합니다. ─ 야아 간난아, 손님들께 방석을 갖다 드려라.
자아, 누추하지만 어서 이리로 올라 앉으시요. 에이 이 놈의 모기 때문에 원 ─』
반가이 맞이하는 장님의 말대로 유탐정과 백문호씨는 마루로 올라가 앉았다.
저녁바람이 부나보다. 울파주 안의 옥수수 잎이 어둑어둑한 황혼 속에서 팔락거린다.
유불란은 마루에 올라앉자 머리를 들어 뜰 안을 한번 내려다 보았다.
답사리와 화초나무가 무성한 그리 좁지 않은 뜰안 저편으로 부엌과 안방이 건너다 보였다.
황혼은 점점 짙어가고 지붕위의 박꽃이 소복한 여인처럼 요염하고도 청초하다.
백문호씨는 황혼에 잠긴 뜰안과 불빛 ─ 희미하게 비치는 안방 방문을 물끄어미 바라다 보았다. 지금 저 문안에, 저 등불아래 자기 딸 예쁜이 ─ 사랑하는 여분이가 낳은 딸 예쁜이가 앉아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일분 일초가 그에게는 무한의 초조를 가져오는 것이었다.
『다른 것이 아니라 ──』
하고 이윽고 유탐정은 주인을 쳐다보며
『실인 즉 우리들은 점을 치고자 온 것이 아니고 선생께 한가지 의외의 사실을 전하고자 온 사람입니다.』
『의외의 사실이라고요?』
소경 박영태는 순간 안색을 가다듬으며 얼굴을 번쩍 쳐들었다.
『네, 의외의 사실이라는 것보다는 말하자면 무척 기쁜 일이지요. ── 선생의 장인되시는 분을 모시고 왔읍니다.』
『뭐 장인?』
장님은 깎짝 놀라며
『아니 장인이라니요? 그러면 내마누라의 부친을 모시고 오셨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예쁜이의 부친을 모시고 왔읍니다.』
『아니 그럴리가 세상에……예쁜이의 부친은 벌써……세상을 떠나셨는데……』
하고 장님은 양미간을 모았다.
『── 네, 예쁜이가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 아버지는 세상을 떠난 것으로 되어 있지만요 그러나 ──』
하고 유탐정은 간단하게 전후 사연을 설명한 후에
『여기 저와 같이 오신 분이 그 때의 백문호씨 그 사람입니다.』
장님 박영태는 이 의외의 사실에 놀라
『아, 그, 그렇습니까? ── 아버님! 이거 참……』
하고 백문호씨에게 정중한 인사를 하고나서
『여보오! 여보, 빨리 좀 이리로 나오쇼! 원 이런 경사스러운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여보오! ── 야아, 간난아! 아씨를 모시고 나오너라!』
하고 희색이 만면하여 호령을 하였다.
그러나 안방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없다. 희미하게 비치는 안방문이 통 열리지를 않는다.
『야, 간난아! 어서 빨리 아씨를 모시고 나오래도!』
장님은 다시 한번 범같은 호령을 했다.
아까 방석을 가지고 나온 십 오륙세 쯤 되어 보이는 계집애가 쪼르르 뛰어 나오며
『저어, 아씨께서는 지금 주시는댑쇼.』
하고 마루아래서 공손히 두손을 읍하였다.
응 주무셔 『 ? …… 아니, 조금 아까까지 앉아 있었는데 ── 원 그런 일이 어디 있나?』
하고 이번에는 손님들을 향하여
『잠깐만 실례하겠읍니다.』
하고 스스로 몸을 일으켜 마루를 내려서서 답사리 사이로 안방을 향하여 걸어갔다.
그러나 장님은 통 안방으로부터 나오지를 않는다.
『여보 여보! 이게 웬일이요?……대체 이게……』
하고 부르짖는 장님의 목소리가 어둑어둑한 황혼을 뚫고 터져 나왔다.
『엣?』
하고 그 순간 유탐정은 벌떡 몸을 일으켜 쏜살같이 안방으로 뛰어갔다.
백문호씨는 통 무슨 영문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어 그저 멍하니 안방을 바라다 볼 뿐이다.
뒤이어 들려오는 유탐정의 목소리 ──
『아, 늦었다!』
유탐은 그리고
『백선생, 빨리 빨리 이리로 들어 오시요! 빨리 빨리!』
하고 부르짖는 것이었다.
깜짝 놀란 백문호씨! 그가 컴컴한 뜰안을 허둥지둥 걸어서 안방으로 뛰어 들어갔을 그 순간, 그는 거기서 대체 무엇을 발견 하였을까?
『엣?』
문안에 들어서자 백호씨는 그렇게 외치며 돌부처처럼 우뚝 섰다.
이 세상에 꿈과 같은 사실이 정말 있을 수 있다면 지금 백문호씨의 눈앞에 전개된 그 광경이 바로 그것일 것이다.
유탐정과 장님이 지금 아랫목에 누워있는 한사람의 여인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지를 않는가!
그리고 그 여인은 그 어떤 극도에 달한 육체적 괴로움을 참지 못하여 눈을 지긋이 감고 얼굴을 찌프리고 양손을 허공 중에 내졌고 있다.
『오오! 은몽씨가 아니요!』
하고 늙은 백문호는 떨리는 목소리로 고함쳤다.
아아, 세상에 이런 기적(奇蹟)이 또 어디 있으리요!
독약을 마시고 지금 무섭게 고민하는 예쁜이 ── 소경 박영태의 처 예쁜이는 비록 남루한 의복을 몸에 걸쳤을 망텅 그것은 틀림없는 주은몽 그 사람이 아닌가!
여보 이게 『 ! 대체 어찌된 일이요? 독약을……아니 독약을 마시다니……』
장님은 두손으로 아내의 몸뚱이를 쓰다듬으며 목메인 소리로 부르짖었다.
두 눈을 질끈 감고 사지를 무섭게 요동시키면서 장님의 아내 예쁜이는 지금 창자를 쑤시는 듯한 육체적 고통으로 말미암아 온 정신을 잃어버린 모양이었다.
『은몽씨, 은몽씨!』
거의 숨결이 끊어져가는 여인의 상반신을 잡아 흔들면서 유불란은 힘차게 불렀다.
『아니, 은몽이라니……당신은 대체 누구를 부르는거요?』
하고 꿱 소리를 치는 장님의 물음을 무시한 유탐정은
『은몽씨! 어서 눈을 뜨시요! 그리고 아버지 ── 은몽씨가 그렇게 그리워 하시던 아버지가 오셨읍니다! 백문호씨가 오셨읍니다!』
하고 거의 고함치 듯 하는 유불란의 말에 여인은 최후의 기력을 다하여 감았던 두 눈을 반짝하고 떴다.
『여기 계신 이 어른이 백문호씨! 삼십 년 전 부부암에서 떨어져 죽었다던 백문호씹니다!』
그 말에 여인은 전신의 힘을 다하여 간신히 입을 열었다.
『화, 황선생!』
『그렇습니다. 부부암에서 대동강에 떨어진 백문호씨는 그 후 어떤 해적선의 구호를 받아 다년간 해적생활을 하다가 「아메리카」 「쌘 프란시스코」에서 해적선을 탈출하여 황세민이란 이름으로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서……』
하고 빠른 말씨로 성명을 하는 유탐정에게
『유불란씨, 대체 이것이……』
하고 얼리벙벙해진 백문호씨의 팔을 잡아 당기면서
『백선생, 숨이 끊어지기 전에 빨리 한마디라도 이야길 해보시요! 은 몽씨는 틀림없는 백선생의 따님입니다!』
그러나 유탐정의 이 벼락같은 설명에 아버지도 딸도 잠깐동안 벙어리처럼 마주 쳐다 볼 뿐이더니 마침내 백문호씨가 입을 열었다.
『은몽씨 그대의 부친 성명이 무엇이지요?』
하는 물음에 여인은 경련하는 입술을 간신히 벌려
『백……백문호씨……』
『오오! 그러면 그대의 모친은 엄여분이랑 사람이 아닙니까?』
『네에……엄여분……』
『오오! 그대는 틀림없는 내 자식! 내 딸이로구나!』
그렇게 외치면서 감정의 폭풍우에 휩쓸린 늙은 백문호씨는 왈칵하고 달려들어 은몽의 몸뚱이를 웅켜 안았다.
오오 은몽이 『 ! ! 내 딸! 네가……네가 여분이의 자식일줄은 꿈에도…내가 네 애비다! 백문호다!』
『아……아, 버, 지 ──』
그 순간 은몽의 창백한 얼굴에는 창자를 끊어내는 듯한 무서운 고통도 잊어버린 듯 희색이 발가우리하니 떠올랐다.
아아, 어머니의 뱃속에서 동서로 헤어진 이 아버지와 이 딸은 그 후 삼십 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격하여 이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서로 만날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은몽아!』
하고 부르는 백문호씨에게
『아버지……아버지의 워, 원수는 제가……제가……제 몸은 아……아직 처녀(處女)……』
『오오 ──』
하고 신음하는 백문호씨 그 때 유불란은 은몽의 목숨이 순식간에 끊어질 것을 알아차리고
『은몽씨!』
하고 은몽의 귀에다 입을 갖다대고 힘있게 불렀다. 은몽의 힘없는 시선이 유불란에게로 천천히 옮아 온다.
그 순간, 은몽의 눈동자가 샛별같이 반짝하고 빛나는 것을 유불란은 보았다.
『유, 선, 생!』
은몽은 두팔을 간신히 쳐들어 유불란에게 내밀었다.
『은몽씨!』
그는 은몽의 상반신을 자기의 품으로 옮겨 안으면서
『저를 수일이라고 불러 주시요!』
『……수……일……씨 ── 유……유서(遺書)……』
은몽은 손으로 자리밑을 가리키며 돌연 눈을 감았다. 이 한마디가 마지막으로 세상에 남겨놓은 은몽의 목소리였다.
『은몽씨!』
『은몽아!』
그러나 대답이 있을리 만무하다.
『아니, 여보! 당신네들은 대체 내 마누라를 가지고 뭐 은몽이! 아니 예쁜이가 대관절 죽긴 왜 죽었다는 말이요? 원, 이런 땅이 꺼질 노릇이 어디 있나? 야아, 간난아! 빨리 들어와서 아씨의 얼굴을 자세히 드려다 보아라!』
장님의 날뛴 듯한 부르짖음이었다. 뜰 아래서 바들바들 떨고 있던 계집애가 바르르 뛰어 들어왔다.
『분명히 아씨냐?』
하는 장님의 분부에 계집애는 무서움에 찬 눈동자로 시체로 변한 여인의 얼굴을 갸웃하니 드려다 보고
『네, 아씨예요. 아씨예요!』
하고 외쳤다.
『뭐, 분명히 아씨란 말이냐?』
『아씨예요! 아씬데요. 뭐 ──』
그 때 자리 밑에서 은몽의 유서가 들어 있는 봉투를 분주스러히 「포켙 」에 쓰러 넣으면서 유탐정은 마치 놀란 사자처럼 으르렁거리는 이집 주인 장님의 소매를 잡았다.
『여기에는 깊은 사연이 있읍니다. ── 그리고 지금 독약을 마시고 죽은 이 여인은 결코 당신의 부인이 아니라는 사실 만을 알아 두십시요. 자세한 사정은 차츰 이야기해 드리겠읍니다. 그리고 ──』
바로 그 때였다.
『아, 저게 뭔가……저거, 저거……』
뜰아래서 컴컴한 하늘을 처다보며 간난이가 돌연 그렇게 부르짖었다.
『뭐냐? 간난아! 뭐가 어떻게 되었다는 말이야?』
하고 머리를 쳐들고 밖으로 발더듬을 하면서 나가는 장님의 당황한 물음에
『뭔지 모르겠어요. 뭔가, 둥그런 풍선이……아 비행기 비행기가 ──』
유불란과 백문호씨도 밖으로 뛰어 나갔다.
요란한「푸로펠라」소리와 아울러 으와 으와 하고 떠드는 군중의 아우성 소리가 자하문 고개로 넘어온다.
『아, 「애드바룸」!』
유불란과 백문호씨는 동시에 그렇게 부르짖었다.
그렇다. 그것은 틀림없는 오상억 변호사가 탄 광고풍선이었다. 한시간 전까지도 총독부 상공에서 부유하던 풍선은 황혼과 함께 일어난 저녁바람에 몰리어 자하문 고개를 넘어서 부암정을 지나 어느 듯 홍제리 상공까지 떠 왔던 것이다.
캄캄한 하늘에 두 줄기의「써 ─ 취‧라이트」가「애드바룸」을 중심으로 하고 교차되었다. 풍선이 움직이는대로 탐조등(探照燈)도 옮아간다.
아아 그러나 총독부 , 근방에서는 그렇게 높이 떠 있던 풍선이 지금은
「까스」가 점점 새여 군중의 머리 위에서 약 일백 오십 미터 쯤 되는데서 둥실둥실 떠 있지 않는가. 그리고 그것이 한자한자 눈으로도 잴 수 있는 속력으로 군중의 머리를 향하여 내려오고 있었다. 강렬한「써 ─ 취·라이트」속에서 마치 거머리처럼 줄에 매달려 있는 사람의 그림자 ─ 그 주위를 맴도는 비행기 ── 창공을 쳐다보며 유불란은
『음 ──』
하고 신음하였다.
『저 놈이 저러면 어떻게할 셈인가.』
백문호씨의 중얼거림이다.
그 때 유불란은 뭣인가 컴컴한 하늘에서 팔락팔락 떨어지는 종이조각을 하나 주웠다.
은몽아 잘있거라!
은몽아 잘있거라!
종이조각의 문구를 드려다 본 유불란은 가장 심각한 얼굴로 머리를 끄덕이었다.
그것은 절박해온 자기의 운명을 깨닫고 사랑하는 사람 주은몽에게 보내는 오상억의 최후의 인사인 것을 유탐정은 알고 있다. 주은몽이 숨어있는 이 자하문 밖으로 풍선을 몰아준 풍세(風勢)를 오상억은 무척 기뻐했을 것이다.
『오상억은 지금 저 창공에서 이 장님의 초가집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방금 독약을 마시고 자기보다 먼저 죽어버린 은몽을 오상억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아아 ──』
유불란은 긴 한숨을 지었다. 그러나 ── 앗! 그러나 바로 그 순간이었다.
『탕 ──』
하는 한방의 총소리가 멀리 머리 위에서 들리었다.
다음 순간
『으와 으와 ──』
하고 돌연 높아진 군중의 부르짖음 ── 아아 보라! 총소리와 함께 터져 나간「애드바룸」! 오상억은 자기 손으로 풍선을 터쳐 버리지 않는가!
군중의 머리위에 쏜살같이 떨어져 내려오는 오상억의 몸뚱이! 그 뒤를 따르는 탐조등의 불빛! 천지를 진동시키는 군중의 아우성!
돌매같이 낙하하는 오상억의 몸뚱이를 중심으로하고 수라장처럼 흩어지는 사람의 물결!
오상억의 몸뚱이는 마침내 땅위에 떨어졌다.
그것은 실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간장을 서늘하게한 무서운 곡예였다.
『악인다운 최후다!』
유불란과 백문호씨는 아직도 탐조등이 번쩍이는 컴컴한 하늘을 우러러 보면서 중얼거렸다.
『모 ─ 든 것은 지나갔다!』
그렇다. 몇 달 동안 서울 장안을 휩쓸던 폭풍우는 사라졌다. 은몽도 죽고 오상억도 죽었다. 문학수도 죽고 정란도 죽고 홍서방도 죽었다. 그리고 백영호도 죽고 백남수도 죽었다.
이리하여 모든 것은 끝났다. 내일부터는 다시 평화의 햇살이 빛날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아직도 독자제군의 가슴 속에 남아있는 몇 가지 의문을 풀어주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한 장면(場面)을 부록으로 붙여 놓고자 한다.
그것은 그 때부터 약 세 시간 후의 일이다. 장소는 ×× 서 사법 주임실이었으며 등장인물은 유불란 탐정, 임경부, 백문호씨 세사람이었다.
探偵 廢業(탐정 폐업)
[편집]『유불란씨, 대체 어떻게 된 일이요?』
『이 꿈같은 아실을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되오?』
이것은 아까「테이블」을 둘러싸고 마주 앉으면서부터 임경부와 백문호씨가 연발 하는 질문이었으나 유불란은 다만 어두운 얼굴 빛으로 들창 밖의 밤거리를 묵묵히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그렇게 잠자코 있을 수도 없어서 비로소 얼굴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사건이 이처럼 진전할대로 진전한 지금에 이르러서 무엇을 새삼스러히 설명해 드릴 필요가 있겠읍니까만 ──』
하고 사건의 진전을 미리 조처하지 못한 자기를 깊이 뉘우치면서
『그러나, 하옇든 제가 아는데까지는 설명해 드릴 터이니 모르는 것이 있으면 질문해 주십시요. ──』
하고 그는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않는 듯이 상대방을 쳐다보았다.
『그러면 무엇보다도 먼저 어젯밤 명수대에서 살해를 당한 주은몽과 오늘 밤 자하문밖 장님네 집에서 자살을 한 주은몽의 관계를 설명해 주시요!』
하는 것은 임경부였다.
네 실상 사실을 『 ── 모르고 보면 그것은 하나의 기적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지요. 그러나 어젯밤 명수대에서 살해를 당한 것은 사실을 알고 보면 주은몽이 아닙니다!』
『뭐요? 주은몽이 아니라고요?』
임경부와 백문호씨의 놀라움은 형언할 수 없이 컸다.
『그렇습니다! 주은몽이 아닙니다. 장님 박영태의 아내 예쁜입니다.』
『엣? 예쁜이?』
방안이 터져나갈 듯한 백문호씨의 고함소리였다.
『아니 예쁜이라니……그게 대체 무슨 말씀……』
그 때 유탐정은 엄숙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백선생 거듭 놀라지 마십시요. ── 주은몽과 예쁜이는 쌍동이 입니다.』
『쌍동이?』
『두 분이 다 백선생의 따님 ── 삼십 년 전 엄여분이가 낳은 따님입니다!』
『오오 ── 주여!』
늙은 백문호씨는 칠흙 같은 얼굴 빛으로 변하면서 두 손을 가슴 앞에 합장하였다.
『이 늙은이에게 무슨 죄가 있기로서니 이런 참혹한 벌을 주십니까?』
유불란은 차마 백문호씨의 그 비참한 얼굴을 볼 수 없어 시선을 임 경부께로 돌렸다.
『어제 아침 × 천읍에서 나는 홍서방의 벙어리 딸과의 필담으로서 이 사실을 알았지요. 쌍동이를 한 집에서 기르면 화가 미친다는 × 천읍의 미신으로 여분의 어머니는 작은딸 예쁜이는 홍서방의 처에게 맡겨서 고향을 떠나 평양에 들어와 살게하고 자기는 큰딸 은몽을 데리고 신의주 주택서의 집에서 길렀던 것입니다. 예쁜이는 홍성방의 딸과 서울 맹아학원에 다니다가 지금의 남편 박영태에게로 시집을 오고……』
『그러면 은몽과 예쁜이를 바꾸어 논 것은 오상억?』
하고 묻는 임경부에게
『그렇습니다. 그리고 예쁜이를 죽인 것도 오상억이지요!』
『음 ── 문학수에게 주홍빛 만또를 씨워놓고 죽인것도 오상억 자신이로군요!』
『물론 그렇습니다. 그 때 임경부께서 이층으로 전화를 받으러 올라간 후에 일어난 일 즉 오상억의 ── 입으로부터 나온 이야기는 전연 거짓말이지요. 아니 거짓말이라는 것 보다도 오상억 자신과 문학수의 입장을 바꾸어서 한 이야깁니다 ── 왜 그러냐하면 나는 그 전날 밤 여행을 떠나면서 임 경부께 전화를 걸어 은몽을 감시하라는 말을 전하는 한편 문학수씨에게도 오상억을 잘 감시하라는 편지를 띄웠지요. 그러니까 생각컨데 문학수씨는 오상억의 신변으로부터 일분 일초도 감시의 눈을 게을리하지 않았을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입니다. 그러면 임경부께서 이층으로 전화를 받으러 올라 간 후, 아랫층 침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 때 오상억의 입으로부터 나온 이야기를 정반대로 설명하면 그만이지요. 즉 먼저 침실을 나와 현관으로 나가서「스위치」를 끊어 논 것은 문학수씨가 아니고 오상억 자신이었읍니다. 문학수씨는 두말도 할것 없이 곧 오상억의 뒤를 따랐지요. 캄캄한 암흑 ─ 그때는 벌써 오상억의 손에는 권총이 쥐어졌었고 그의 몸에는 해월의 가장이 씨워져 있었읍니다. 오상억은 정원 들창으로 다시 침실을 넘어 들어가 은몽의 가슴에다 칼을 꽂고 다시 현관으로 빠져서 정문 밖까지 문학수를 끌고나와 거기서 따라오는 문학수씨를 쏘았지요. 그리고 자기의
「만또」를 씨워놓고 그의 손에 권총을 쥐어 주었던 것입니다. ── 그러나 그때 침대에 누워 있던 것은 벌써 은몽이가 아니고 예쁜이었지요. ──』
『아 그렇다!』
하고 그 순간 임경부는 고함을 쳤다.
『오상억이 은몽과 예쁜이를 바꾸어 논 것은 그때 였구나! 우리들은 그날 저녁, 삼청동에서 명수대로 옮아 갔는데, 앞선「택시」에는 은몽과 오상억이 타고 뒤의 서용 자동차에는 문학수씨와 내가 탔었지요. 은몽은 삼청동을 떠날 때부터 현기증이 난다고「택시」에 올랐을때에도 오상억의 부축을 받았지요. 그런데 우리들의 자동차가 남대문까지 다달았을 때 공교롭게도 「고 오 · 스톱」의「시그날」로 말미암아 그들의「택시」는 먼저 건너가고 우리는 잠깐동안 정지했다가 다시 따라 갔을 때는 벌써 오상억의 「택시」는 세브란스병원 앞을 스름스름 달리고 있었는데, 은몽과 예쁜이가 바꾸어 진 것은 그 때였군요! 글쎄 거기서 부터 은몽은 현기증이 심하다고 오상억의 어깨에 몸을 기대고 통 눈을 뜬 적이 없었지요.「택시」에서 내릴 때도 오상억이 안고 침실까지 옮겨 놓았읍니다. 음 ──』
임경부는 괘씸한 듯이 양볼을 푸르럭거렸다.
『그렇습니다. 남대문과 세브란스병원 사이에서 오상억은 운전수에게 은몽을 청운정 자하문 고개아래까지 모셔드리라는 말을 남겨 놓고 자기는 「택시」를 내렸지요. 그리고 그때 그 옆을 스름스름 지나가는 다른 「택시」에 올라 탔읍니다 . 그「택시」속에는 은몽과 똑같은 흑장(黑裝)의 양복을 입은 예쁜이가 마취약에 정신을 잃고 쓰려져 있었읍니다. 이것은 은몽의 유서를 보고 알았읍니다만 그 때 그「택시」의 운전수가 싯누런 이빨을 가진 오첨지였지요.』
『뭐, 오첨지?』
그 때까지 정신없이 앉아 있던 백문호씨가 외쳤다.
『네에, 혜성전문학교 교장 황세민씨의 어두운 과거를 미끼로 거머리처럼 따라 다니던 오첨지! 평안북도 S읍에서 백정 노릇을 하던 오만복(吳萬福)!
악마의 제자 오상억의 아버지!』
『오첨지가 오상억의 아버지라고요?』
거듭 놀라는 백문호씨에게
『그렇습니다. 저번날 밤, 백선생에게 그의 이름이 오첨지라는 말을 듣고 혹시 오상억과 무슨 관계가 없는가 하고 곧 오상억의 고향 S읍 주재소에 조회를 하여 보았더니 과연 얼굴에 칼자리가 있고 싯누런 이빨을 가진 오상억의 아버지가 이십 년 전 고향을 떠나 어디론지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는 보고가 있었읍니다.』
『음 ── 그랬던가!』
임경부와 백문호씨는 모두가 꿈과 같은 사실에 그저 경탄의 눈을 부릅 뜰 뿐이었다.
『그런데, 오상억이 은몽의 복수에 같이 참가한 이유는 대체 무엇입니까?
그는 처음부터 은몽과 행동을 같이했다는 말이요?』
하고 임경부는 가장 중요한 질문을 하였다.
유불란은 잠깐동안 말을 끊고 들창밖을 물끄러미 내다보다가 다시 계속하였다.
『오상억과 은몽의 공범관계(共犯關係)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거기 대한 나의 추측은 이러했읍니다. 즉 오상억이 × 천 읍으로부터 돌아왔을 때은 몽 자신을 범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나는 눈앞이 아찔해짐을 깨달았읍니다. 왜 그러냐하면 해월이가 × 천읍까지 오상억을 따라 가서 홍서방을 죽이고 오상억을 해하고자 했다는 오상억의 보고에 접한 때문이지요. 오상억이 × 천읍에 갔을 때는 은몽은 임경부의 엄중한 감시 밑에서 한발자욱도 명수대를 떠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나는 굳은 신념을 어디까지든지 버리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동시에 오상억의 보고를 하나의 허위 보고라고 마음 속으로 단정 하였지요. 나는 은몽과 오상억의 공범관계를 그 때에야 비로소 알았읍니다. 백영호씨의 과거를 조사하러 × 천읍 행을 자청한 오상억 ── 그렇습니다. 오상억 이외의 인물이 × 천읍에 가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오상억 자신이 가서 하나의 허위 연극, 허위 보고를 해야 은몽의 신변으로부터 나의 혐의의 눈초리를 떼어 버릴 수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그 이튿날 밤, 나를 찾아온 은몽에게 나는 나의 무서운 공상을 말했읍니다. 은몽은 물적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끝끝내 나의 공상을 부정했읍니다. 그리고 정란씨가 삼청동 공원에서 살해를 했다는 전화가 온 것은 바로 그 때였지요. 그 때 은몽은 나를 비웃었읍니다만 나의 신념은 추호도 동요하지 않았읍니다. 그래 나는 곧 관철동 오상억에게 전화를 걸어 그가 집에 있는가 없는가를 알아 보았지요. 그는 집에 있었읍니다. 그러나 그 때는 벌써 정란이가 살해를 당한지 약 십 오분 후였으니까, 십 오분이면 넉넉히 삼청동에서 관철동까지 자동차로 돌아 올 수 있었겠지요.』
유탐정의 설명을 듣고 있던 임경부는
『그러면 백영호씨와 백남수씨를 죽인 것은 은몽의 단독 행위였읍니까?』
『그렇습니다. 오상억이 은몽의 범죄에 가담한 것은 백남수가 살해를 당한 직후였지요.』
『그러면 오상억이가 은몽의 범죄에 가담한 동기는 대체 무엇입니까? 그는 단지 은몽의 미모에 취하여……』
하고 임경부는 연거퍼 물었다.
『물론 그것도 있을 것입니다. 아까 그거「애드바룸」에서 날린 종이조각에 「은 몽아, 잘 있거라.」라는 문구가 적혀 있는 것을 보면 은몽에 대한 그의 정열이 얼마나 굳세었던가를 거이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
하고 유탐정은 그 때 의미있는 어조로 말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말하자면 그가 은몽의 범죄에 가담한 동기에 몇 분지 일도 못될 것입니다.
그에게는 실로 웅대한 동기가 있었지요.』
『웅대한 동기?』
하고 반문하는 임경부에게
『그렇습니다! 그가 다만 은몽을 위하여 그 무서운 복수에 가담했으면 거기에는 웬만큼 동정의 여지도 있을법 하지만, 그러나 그에게는 은몽의 복수 행위와는 별개의 동기가 있었던 것입니다!』
『별개의 동기라니요.……정란에게 실연을 당한 분풀이란 말씀이요?』
하고 임경부는 안색을 가다듬었다.
『아, 그러한 감정도 있었을런지 모르지요. 그러나 그러한 동기가 아니고 좀 더 커다란 것 즉 좀 더 악마적인 동기가 숨어 있었읍니다. 임경부! 내가 무슨 목적으로 백남수의 형 ── 팔년 전 실종 선고를 받은 백남철이가 「하르빈」으로 돌아온다는 허의 전보를 쳤는지 임경부께서는 아직 그 이유를 모르시겠습니까?』
하고 시선을 쳐들었다. 그때야 비로소 임경부는 모든 것을 알아차리고
『아, 그랬던가!』
하고 무릎을 치며 외쳤다.
『임경부, 나는 어젯밤 명수대에서 일어난 참극 ── 은몽(그실은 소경인 예쁜이)이가 해월 문학수에게 살해를 당했다는 호외의 기사를 오늘 아침 평양서 보았읍니다만, 나는 그 순간 오상억의 숨은 동기를 알았습니다. ── 즉 은몽이가 오상억에게 보내는 거짓 유서 가운데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었지요. 오상억의 은혜에 만분지 일이라도 갚을 생각으로 명수대에 있는 자기 저택을 오상억에게 주고 그 외에도 만일 자기에게 속하는 권리가 있다면 그것을 전부 오상억에게 준다는 유언이었지요.』
(독자여! 다시 한번 은몽의 유서를 읽어보라.)
『음 ── 목적은 싯가 오만원짜리에 지나지 못하는 명수대 저택이 아니고 추상적(抽象的)의 권리양도 ── 즉 미래권양도(未來權讓渡)……』
하고 신음하는 임경부에게
『그렇습니다! 자기에게 속하는 모든 권리를 준다는 것이 중요한 대목이지요. 현재는 오만원짜리 집 한채 밖에 없으나 얼마 후엔 ── 즉 수속만 하면 백만원의 재산이 자기의 손에들어 올터이니 그것을 양도한다는 의미지요. ─』
『음 ── 백영호씨의 백만원이 남수에게로, 남수로부터 정란에게로, 정란으로부터 은몽에게로 굴러 들어오니까 ──』
『그렇지요. 그러니까 여기서 뜻하지 않았던 백남철의 출연으로 말미암아 기득(旣得)의 이권을 손실하게 되는 것은 오상억이지요. 거기서 만일 백남철이 귀향한다는 전보를 치면 오상억이나 혹은 그와 이익을 같이하는 분자가 반드시 백남철이라는 방해물을 없애버리려고 나타날 것을 확신했읍니다.
과연 오상억의 아버지 오첨지가 도중에서 기다리고 있었지요.』
그 때까지 비통한 얼둘로 두 사람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백문호씨가
『유불란씨!』
하고 머리를 들었다.
『유불란씨의 설명으로 모든 의문이 풀렸소만, 단 한가지 나의 입장으로서는 가장 중요한 질문이 하나 남아 있읍니다!』
『네, 무엇입니까?』
『다른 것이 아니라, 나는 지금 대 자식 은몽에게 대한 나의 감정을 어떻게 처리하여야 할지 모릅니다. 다시 말하면 나는 은몽의 행동을 슬퍼해야 할지 기뻐해야 할지 통 감정의 갈피를 잡을 수가 없읍니다. 아버지의 원수와 어머니의 원수를 갚은 은몽을 그의 동기에 있어서 가상타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수단이 너무나 악착하지 않읍니까? 더구나 자기의 일신을 구하고자 자기의 동생 예쁜이를 희생시켰다는 것은 애비로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유불란씨, 은몽은 은몽으로서의 뜻이 있었을런지 모르거니와 저 눈 못 보는 불쌍한 예쁜이를 생각할 때……』
백문호씨는 말를 채 잇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리는 두 팔을 「테이블」위에 올려 놓았다.
『아, 백선생 그 점에 대해서는 은몽씨 자신이 변명하였읍니다. 이것를 보십시요.』
하고「포켙」에서 묵직한 봉투를 하나 꺼내었다.
『이것은 아까 은몽씨가 숨을 끊으면서 나에게 준 유서올시다. 이것을 보시면 오상억이랑 놈이 얼마나 악착한 인물이란 것을 가이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백문호씨는 유불란의 손으로부터 은몽의 거짓 없는 유서를 받아 들었다.
은몽의 유서는 대단히 길었다. 원고지로 약 삼십 매나 되는 것인데 거기에는 백영호 일가에 대한 자기의 복수의 동기로부터 범죄의 수단 오상억과의 관계, 그리고 유불란의 무서운 추리에 쫓겨 다니던 자기의 공포심이 여자다웁게 섬세하고도「센티멘탈」한 필치로 적혀 있었다.
그러나 필자는 여기서 이 기나 긴 은몽의 유서 전부를 기록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유서에는 이미 독자제군이 알고 있는 사실과 중복되는 대목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탐정소설가는 결코 필요 이외의 것을 기록해서는 안될뿐만 아니라 탐정소설 애독자는 결코 필요 이외의 것을 알려고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서 필자는 은몽의 기나긴 유서 중에서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몇 대목을 초기(抄記)하여 유탐정의 설명을 보충하는 동시에 독자 여러분의 몇가지 의문을 만족시키고자 한다.
(前略[전략])……그렇습니다. 저번 날밤, 유선생이 저에게 주신 말씀과 같이 저의 범죄 계획에 있어서 가장 두려워 한 것은 유선생이었읍니다. 유 선생의 입으로부터 그 무서운 공상을 들은 순간, 나는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고백하고자 하였읍니다 . 그러나 그 때는 아직 나의 뜻을 채 이루지 못한 때였지요. 정란이가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선생의 그 예리한 추리 가운데 몇 가지의 착오가 있아오니 그 점을 정정해 드릴 의무가 제게 있다고 생각하옵니다. ── 오상억 변호사가 나와 공범관계를 맺은 것은 백남수 살해 직후 였읍니다. 유선생의 말씀대로 나는 이층 복도에서 남수를
「피스톨」로 쏘고 아랫층 나의 침실로 쫓겨 들어와서 해월의 가장을 벗고 따라 들어오는 오상억에게 해월은 이제 방금 들창을 넘어 정원으로 도망쳤다고 속이었읍니다. 그러나 사실을 알고 보면 그렇지 않았지요.
그 때 나를 따라 내려온 오상억의 달음박질이 예상 외로 빨라서 침실까지는 겨우 붙잡히지않고 쫓겨 들어 왔읍니다. 그러나 해월의 가장을 채 벗어 버리기 전에 오변호사가 따라 들어왔던 것입니다. 아아, 그 순간의 오변호사의 놀란 표정! 뭐라고 외치고자 하는 그의 발밑에 머리를 숙이고 나는 두 선을 합장 하였읍니다.
그것은 두말할 것 없이 나의 일신에 속한 모든 것을 전부 바치겠다는 표적이었읍니다.
그 때는 벌써 현관으로 돌아나간 유선생의 발자욱 소리가 들창 밖에서 들려 왔을 때지요.
오상억의 두 눈동자가 번쩍 빛났읍니다. 그는 부리나케 들창으로 뛰어가 상반신을 내밀고 유선생을 맞이하면서 해월은 들창을 넘어 도망했다고 거짓말을 하였읍니다. 그러나 아아, 그 순간부터 나는 뱀 앞에 개구리 모양으로 그를 대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상억은 나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권력자였지요……(中略[중략])…… 이렇게 그 때 저를 구해준 그의 호의를 처음에는 저에게 대한 애정이라고 생각 했읍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애정문제 보다도 더 심각한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백씨일가의 전멸과 함께 나의 수중으로 들어올 백만원 재산을 겨누고 있었읍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수단을 가리지 않았읍니다. 유선생이 나를 가르쳐 해월이라고 무서운 단정을 내리던 이튿날, 악마 오상억과 나 사이에는 하나의 이상한 계약이 체결 되었읍니다 ── 즉 그가 나의 목숨을 구해주는 대신 나는 나에게 장차 굴러 들어올 백만 원을 그에게 양도한다는 유언을 하라는 것이었지요. 그것은 절대적인 명령이었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묻지 말고 자기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中略[중략])…… (여기에 그날 저녁 삼청동에서 명수대로 옮아 가다가 남대문을 지나서 예쁜이와 바꾼 광경이 상세히 적혀 있다.)…… 이리하여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오상억이가 하라는대로 자하문 고갯턱에서 자동차를 내려 양장을 벗어 버리고 오상억이 싯누런 이빨을 가진 무서운 사나이의 손으로부터 받아 주는 보따리에서 시골 부인네 의복 한벌을 꺼내어 입고 홍제리 박영태라는 장님의 집으로 가서 그의 아내 예쁜이라는 소경 노릇을 하면 된다고 하면서 예쁜이의 성질과 일상생활에 대한 지식을 상세히 가르쳐 주었읍니다 .……(中略[중략]……이리하여 저는 어젯밤에 이곳으로 왔읍니다. 그리고 백만원이 오상억의 손으로 들어간 후에 둘이서 상해로 도망하자는 것이었읍니다. 유선생! 저에게는 지금 생에 대한 애착이 손톱 만큼도 없읍니다. 처음에 오상억을 유혹한 것은 사실이오나 그것은 단지 그의 탐정안(探偵眼)을 무서워 하였기 때문입니다. 저에게는 지금 독약 ×× 가 준비되어 있읍니다. 이것을 한방울 마시면 죄 많은 저의 일생은 순식간에 청산될 것입니다. 그러나 죽기 전에 단 한가지 유선생께 여쭐 말씀은 청년화가 김수일씨는 저의 영원한 애인이었었다는 한마디 입니다. 저는 탐정 유불란을 미워했으나 화가 김수일을 미워하지 않았읍니다. ……(下略[하략])
『그만했으면 오상억이라는 인물이 얼마나 악착한 놈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았을 줄 믿습니다. ──』
하고 유불란은 임경부와 백문호씨를 쳐다보았다.
『오상억은 예쁜이와 은몽이가 쌍둥이라는 사실을 끝끝내 은몽에게 알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은몽은 단지 기계처럼 그의 명령대로 움직였을 따름이지요.』
『으흠 ──』
하고 백문호씨는 그 참혹한 사실에 전신을 부들부들 떨 뿐이었다.
『그리고 또 한가지 ── 언제부터 오첨지가 자기 아들 오상억의 범죄에 가담했는지, 그것은 있더라도 오첨지를 취조하면 알 것입니다. ──』
하고 유불란은 백문호씨의 눈물어린 얼굴을 빤히 쳐다 보면서
『그것은 여하간, 백선생 ── 즉 황세민씨와 백영호씨의 관계를 잘 알고 있는 오첨지니까 오상억도 물론 황선생이 백영호의 사촌형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은몽에게 그런 말을 꿈에도 하지 않았지요. ── 지금까지 백영호의 손에 죽었다고만 믿고 있던 자기 아버지가 살아 있다는 사실를 알게되면 ──』
『은몽은 복수행위를 중지한다는 말씀이지요?』
하는 임경부의 말에
『그렇지요! 그렇게 되면 백만원이 자기 수중으로 굴러 들지는 않을 테니까.』
유불란은 붙여 물었던 담배을 재털이에 던지고나서 침울한 얼굴로 잠깐 동안 잠자코 앉았다가
『임경부!』
하고 부르면서 의자에서 힘차게 몸을 일으켰다.
『이번 사건은 나에게 가장 귀중한 교훈을 가르쳐 주었읍니다. 나에게는 탐정의 소질이 없는 것을 가르쳐 주었읍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결코 슬퍼하지 않읍니다. 이후에는 절대로 범죄사건에 손을 대지 않겠다는 것을 나는 이 자리에서 임경부께 성명합니다. 탐정의 혈관(血管)에는 피가 순환하여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나는 비로서 깨달은 때문입니다. 탐정의 혈관에는 강철(鋼鐵)이 돌아야 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