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보
도수장께를 들어오다 만보는 기어코 지게를 벗어 던지고 밭고랑으로 뛰어 들어가 허리를 풀었다. 보거나 말거나 태연한 자세로 담배를 집어내 불을 붙였다. 섬은 바소고리의 곱절이 든다. 공복에 두 섬의 거름을 들까지 나르고 나니 해도 어지간히 들었다. 만보는 면에서도 제일가는 장골이다. 장정의 반나절 일을 식전에 해버리는 버릇이었다.
아침 기운이 산들하다. 도랑 건너 과목은 물이 온다. 자주빛으로 무르고 녹았고 보리밭에는 푸른 이랑이 줄줄이 뻗쳤다. 봉굿이 솟은 검은 흙이 발을 떠받드는 것 같다. 무겁던 것이 한결 개운하다. 자취없이 녹아 흐르는 연기와 같이 몸도 녹아버릴 것 같다. 하루 동안의 그 어느 때보다도 시원하고 즐거운 한때였다. 그 어느 때보다도 구수한 담배 맛이었다.
한 개가 다 탈 때까지 웅크리고 앉았으려니 별안간 난데없는 흙덩이가 뒷덜미에 떨어졌다. 발꿈치를 간지르는 개미만큼도 그의 마음을 건드리지 못하였으나 이어서 일어난 웃음소리가 비로소 그의 주의를 끌었다 그렇다고 그 자리를 급스럽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눈썹 하나 안 움직이고 유창하게 앉아 있음은 일반이다. 누구인가 말소리를 기다릴 뿐이다. 또 한 덩이 흙이 뛰어오더니 걱실걱실한 목소리가 났다.
“재수 텄다. 꼭두아침부터 이건 걸물인데.”
박회계원임을 알고도 만보는 끔쩍도 하는 법 없이 담뱃불을 신발 끝에 문질렀다. 회계원은 어느 틈엔지 꽤 빠르게 앞으로 돌아와 껄껄 웃으면서 호탕스럽게 소리를 친다
“버릇없는 망나니,”
빙그레 웃으면서 몸을 일으키는 것을 한 걸음 다가서며 놀램 반 웃음 반으로 경탄의 소리를 자아낸다.
“백두산 전나무만 한걸.”
만보는 픽 웃으며 반지를 올리고 몸을 단속하고 나서 비로소 대꾸할 여유를 보였다.
“왜 장가들여 주려나.”
“들기도 들어야겠어. 삼십을 넘은 총각이란 보기도 흉측스러운 걸.”
만보의 농을 됩데 이용하여,
“선심만 쓴다면야 장가도 어렵지 않지.”
교묘하게 가늠보아 노총각의 마음을 떠본다.
“선거 말인가,” 만보는 만보로서 민첩하게 회계원의 뱃심을 알아채인 것이다.
“어떠한 한몫 거들어만 준다면 퇴나게.”
말줄을 얻은 듯이 회계원은 은근히 슬금슬금 잡아 낚은다.
“술집으로 요릿집으로! 그야말로 독벼락 맞을 걸세.”
“면장 될 생각이 바짝 나나 부다. 면장이 조합장으로 뽑히면 그 뒷자리에 들어서자는 배짱이지.”
“그야 나중 얘기이지만 어떤가 생각 있나.”
“도시 미친놈들이지. 허수아비 같은 조합장을 바라는 놈이나 두 패로 나누어 그놈을 부축하는 놈들이나 어리석긴 일반. 어느 때라구 이 바쁜 철에 떼를 지어서 술집으로 요릿집으로 돌아다닌단 말이야.”
“밭일 말이지. 그건 염려 없네. 윤직장께 말해서 나흘 동안만 자네를 빌기로 작정됐으니까. 이렇게 된 바에야 기운이 첫짼데 기운으로야 자네만한 사람이 어데 있나.”
“내야 어느편을 들고 어느편을 안들 수 있나. 실상인즉 종화 편에서도 부탁이 있었기에 말이네.”
“그렇기에 자네 소원이 무엇인가. 한 팔 걷어 준다면 무엇이든지 소원을 들어줌세.”
“저녁에 남도집에서 만나세 그려.”
시계를 내보더니 출근시간이 바쁜 듯이 박회계원은 걷기 시작하였다. 거뿐한 지게를 걸머지고 뒤를 따르는 만보에게 걸으면서 뛰엄뛰엄 선거의 형세를 말하였으나 만보는 심드렁한 듯도 하고 마음이 댕기는 듯도 하였다.
금융조합장 김종화는 삼년의 만기퇴직을 앞두고 이어 그 자리에 눌러 앉을 생각이었다. 면장 자리가 오래지 못함을 알고 최면장이 후보로 나서게 된 때부터 싸움은 터졌다. 남문패는 최면장을 세우고 서면패는 김종화를 받들어 거리와 마을은 은연중 두 패로 나뉘어 재선거날을 앞두고 경쟁이 심하여 갔다. 조합장을 선거할 조합총대는 사십 명 가량이다. 처음부터 양편으로 갈리어 태도가 선명한 총대의 수효는 피차 상반하므로 나머지의 총대의 지향이 결국 선거의 운명을 결정할 계제에 이르렀다. 그 얼삥빵한 총대를 뺏기에 싸움의 목표가 걸려있다. 권고와 설명만으로 총대의 심중을 확실히 잡 을 수 없었다. 서편패가 단말로 꾀어 놓으면 남문패가 괴로운 조건으로 댕겨 버리고 남문패가 술로 사놓으면 서편패는 더 나은 미끼로 뺏어 버리곤 하여 피차의 꾀에는 한정이 없었으나 그러면 그럴수록 총대의 마음이 대체 어느편으로 기울어질까가 전연 안개 속의 일이어서 도리어 의심 초조 시기는 구름같이 일어나 싸움은 얼크러저 어둠 속의 매작질로 변하였다. 이 수단 저 수단을 쓰다못해 이윽고 맹랑한 일이 일어났다. 궁한 끝이라 술책도 헤벌어지고 드러나게 되었다. 총대를 모아다가 두게 되었다. 수족과 마음의 자유를 잃은 총대로서는 허울좋은 허수아비 격에 지나지 못하였으나 다따가 산협에서 끌려나온 그들에게 아침 저녁으로 대접받는 진미와 술잔과 호강이 고이치는 않은 것이었다.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바쁜 시절이라 농사 걱정뿐이었다. 이런 술책이 어느편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게 두 편이 다 그 속에 휩쓸려 선거운동은 어지럽게만 되었다. 총대 수효의 평균이 깨트려져 세력이 기울어졌을 때 이번에는 별수없이 간직한 총대의 약탈전이 시작되었다. 떼를 지어서는 밤중에 뒷방에 몰려들어 잠자는 총대를 신짝같이 뺏어오곤 하게 되었다.
최면장 편의 괴수는 박회계원이었다. 남문의 소소리패를 모아 진을 다졌으나 워낙 강적인 김종화 편에는 한 수 휘는 형세였다. 김종화는 군내의 거농으로 한편 자본을 부어 갖가지의 장사를 경영하는 터이므로 잡화상의 치호, 양주소 주헌, 정미소 히수는 한 떼가 되어 종화의 팔다리 노릇을 하였다.
승벽이 세고 단결이 굳은데다 무엇보다도 비용이 풍성하여 거래가 쉽고 윤택이 있음이 도무지 남문패의 따르지 못할 바였다.
맞서려면 면장은 빚 위에 빚을 내게 되었으니 황새걸음을 따르려다가 다리가 찢어질 지경이었으나 그렇게 되면 거의 취중의 일같이 분별 없이 허둥지둥하여 바른 정신의 소행은 아니었다.
그런 판이라 제일 탐탐이 여겨지는 것은 기운이었다. 이치도 설명도 아무 것도 없이 우격으로 총대의 몸아리를 뺏어옴에는 마지막 수단인 부락스러운 힘이 첫째다. 돈에 한 수 꿀리는 면장은 그 점에 더 많이 생각을 이루었다. 박회계원이 만보를 꾀였음에 물론 등뒤에 면장의 뜻이 움직여 있었다.
만보는 산에 나무하러 간 길에 노루를 산채로 잡는 장골이었다. 벼 한 섬쯤은 별로 애쓰지 않고 들 수 있다. 단오절마다 시민운동회에서는 씨름에 판판이 일등이었다. 해마다 탄 소가 늘어서 웬만한 재산을 이루었다. 윤직장 집에는 근 십년이나 머슴으로 있으면서 알뜰히 번 것과 합치면 새살림을 벌리기에 넉넉하였다. 하루라도 속히 장가를 들어 살림날 궁리를 할 뿐이었다. 박회계원에게서 청을 받았을 때 만보는 바쁜 때에 미친 짓이라고 생각하였으나 윤직장의 승낙이 있었다는 소리에 마음이 쏠리지 않음도 아니었다. 남도집에서 만나자는 것 또 반가운 말이었다. 비취가 그의 마음을 댕긴지는 오래였다. 그러나 감히 말 붙일 계제가 없었던 것이다. 비취는 박회계원과 좋은 사이였고 멀지 않아 후실로 들이리라는 소문까지 있었다. 박회계원과 남도집에 가기는 제물맞춤이라고 생각되었다.
세 순배째 들어오니 못하는 술에 만보는 관자놀이가 후끈거렸다. 주는 잔을 감춰 버릴 줄도 모르고 고지식하게 알뜰히 받아 마신 것이 꾀 없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비취의 얼굴이 반달같이 동그랗게 떠올라 보인다.
“사양 말게. 얼근해야 기운도 나지 맨송한 정신으로 싸움이 되나.”
박회계원은 뒤를 이어 거듭 잔을 권한다.
“승패는 오늘밤에 달렸네. 기운 바짝 내주게.”
손에 받은 잔을 만보는 떨어트렸다. 회계원의 말은 한 귀로 흘리며 비취를 바라보기에 정신이 빠졌던 것이다.
산속에 들어가 문득 부딪치는 한 포기의 자작나무와도 같이 흰 바탕에 새까만 머리쪽이 제비날개같이 곱다. 손안에 넣고 희롱하면 털 고양이같이 부드러울 것 같다. 그 얼굴 그 모습에 어느 모가 부족해서 하필 술집으로 팔려 다닐까. 그의 몸 속은 사람 아닌 무슨 귀한 것으로 가뜩 채워져 있을 성싶다. 그의 조그만 입에서 선녀의 말 아닌 사람의 말이 굴러 나옴이 이상하다. 따
뜻한 아침 황소를 타고 김이 무렁무렁 나는 들로 나갈 때 세상에는 푹신한 황소 등어리같이 좋은 것은 없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비취는 그 황소보다도 더 좋고 마음을 댕기는 것임을 알았다. 이글이글한 눈망울에 기름이 흐르고 입술이 방끗 벌어짐을 볼 때 만보의 오장은 나뭇잎같이 너벌너벌 흔들렸다.
“자네 마음이 너긋해 보이니 다행이네.”
회계원은 능걸치게 웃으며 다시 잔을 권하고 눈짓하니 비취는 가뜩 부어 잔을 채운다.
“오늘밤이 사생결단이야. 계책대로만 가면 선거에 이기네. 놈들이 설마 우리의 꾀야 알 수가 있나.”
교묘하게 낌새보아 그날 밤 계책을 말한다. 만보의 멀건 취안에는 경읽는 소리만큼도 대수롭지 않게 들렸다. 눈과 마음은 한결같이 비취에게로만 쏠리는 까닭이다.
서편패가 총대 두 사람을 데리고 은밀히 온천놀이를 떠났음을 감쪽같이 알아냈다. 밤늦게 돌아올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아 총대 두 명을 중간치기로 뺏자는 것이었다. 동구 밖 어구 숲 속에 숨었다가 별안간 엄습하여 알 채로 뺏어내면 뒤에 숨었던 다른 한패가 부축하여 모르는 집에 갔다 감추는 것이다. 그편의 앞장은 아마도 중구일 법 한데 중구쯤은 만보에게는 조족지혈이라는 추측이었다. 조합선거의 돈놀이는 아직도 법에 작정이 없는 까닭에 경찰에서도 이번 운동에는 손찌검이 없다는 것을 회계원은 덧붙여 말하고 나서,
“사람 둘쯤이야 자네겐 나무 한단 쳐드는 폭밖에 안될 걸세.”
은근히 구슬린다.
“그까짓 것이야 염려 있으랴만.”
만보는 처음으로 입을 열고 호담스럽게 장담하고,
“결국 자네 말뿐일세 그려.”
어수룩하게 속아 넘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럴 리 있나. 소원을 들어보세.”
회계원은 속을 뽑힌 듯해서 급스럽게 느물뜨리면서,
“일만 되고 보면 무언들 아끼겠나.”
데설데설 웃는다.
“비위 좋게 일될 때를 기다리란 말이야. 안되면 그만이구.”
“한번 언약하였는데 그 말은 왜. 얼마면 좋겠나.”
술상 밑에 손을 넣고 손가락을 꼽아 보인다. 다섯까지 꼽았다.
“누가 돈을 바란단 말인가.”
“그럼 도야지 한 마리 사줌세.”
“일반이지.”
“설마 소 한 마리 탐난단 말이 아니겠지.”
“그런 게 아니라.”
“…………”
비취가 마침 술을 가지러 나가는 틈을 타서 만보는 겨우 수줍게 벙글벙글 웃음을 띠우며 그쪽을 바라본다.
“비취 말인가.”
회계원은 민첩하게 만보의 눈치를 살폈다.
“소나 도야지는 다 일없어.”
만보의 뜻이 확실함을 알고 순간 얼굴빛이 변하여 회계원은 한참이나 말문이 막혔다.
“다른 사람이면 안되겠나. 꼭 비취가 소원인가.”
“비취 아니면 자네에게 말할 것이겠나.”
회계원은 몸이 확 달았다. 모욕을 당한 듯도 하다. 그러나 즉시 얼굴빛을 풀며 괴로운 웃음을 보였다.
“그럼 어데 후려보게나. 당사자의 뜻이지 내로서야 할 수 있는 노릇인가. 암탉을 후리는 것은 수탉의 재주니까.”
넓은 염량을 보이기는 하였으나 가슴이 섬찟하다.
“나중에 아무 말 없으렷다.”
다지는 말에 회계원은 괴로운 심장이 뒤흔들리는 것 같다.
“재주껏 해보게나.”
속 비인 웃음을 억지로 데설데설 웃으며 술을 가지고 들어오는 비취를 떫은 표정으로 바라보는 수밖에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