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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상록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ははやまひおもしいもおと(母病重[모병중], 妹[매])’

‘ははもどくすくこいいもと(母危篤[모위독] 直行[직행], 妹[매])’

두 장의 전보. 나는 가슴이 선뜩하였다.

이틀 전에 어느 시골 친구의 집에 놀러갔다가, 새벽차에 돌아와서 집에 들어서는 참 집에서 기다리고 있던 전보 두장.

그 새 사십여 시간 동안은 오래간만에 만나는 친구와의 이야기 때문에 한 잠도 자지 못하였다. 그 피곤한 몸을 좀 쉬려고 어서 자리를 찾아오느라고 집으로 뛰쳐든 때에 의외에도 이 두 장의 전보가 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보의 날짜를 보매 한 장은 그저께 저녁, 또 한 장은 어제 아침이었다.

그저께 저녁에 전보를 놓고 여컷 새벽차를 기다려 보아서 안 오니까 재차 전보를 친 것이 분명하였다. 어제 아침에 전보를 놓은 뒤에는 아직 다시 전보가 안 오는 것을 보니 평양(平壤)서는 내 불효(不孝)를 욕하면서 내게는 다시 전보도 안 친 셈인 모양이다.

이틀 동안을 자지를 못하여서 몹시 신경이 둔하게 된 나는 이런 급한 경우에 두서를 차리지를 못하였다.

“여보 어떡해야겠소?”

“아침 차로 가셔야지요.”

무론 가야 할 것이다. 내가 물어 본 것은 집안이 다 갈까, 나 혼자 갈까를 의논한 것이었다.

현대에 살아 가는 비애로서는 온갖 문제의 앞에 경제 문제라는 것이 걸려 있다. 이 달도 벌써 중순이 지난 지금, 집안 전 식구가 내려갈 차비며 내려 가 있을 동안의 비용이 준비되어 있을 까닭이 없다. 이 이른 새벽에 어디 나가서 그 비용을 갑자기 마련할 수단도 없었다.

여덟시 십분. 아침 기차 시간까지는 인제 겨우 한 시간 남아쯤, 그러나 나는 다만 가슴이 설렁거리고 서늘할 뿐 두서를 차리지를 못하였다.

그저께 내가 시골을 내려갈 때도 안해에게는 아무 말도 없이 간 것이다.

내가 없는 틈에 이 놀라운 전보를 받은 안해는 밤새도록 나를 기다리다가 어제는 아침 일찌기부터 나를 찾아나가서 감직한 곳을 실컷 다 찾아보고 피곤하여 집으로 돌아오니까 집에는 또 한 장 전보가 와 있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어젯밤까지 나를 기다려 보고, 그래도 안 오면 오늘 아침 차로 자기만이라도 내려가기로 마음먹고, 그 준비도 대략 하여두었던 것이 다 기차 시간은 차차 닥쳐오고 . 별 신통한 해결책은 생기지 않아서 우선 나부터 혼자 내려가기로 하였다. 집안 다른 가족이 내려가고 안 내려가는 것은 내가 내려가서 형세를 보아서 작정하기로 하였다.

두서를 살피기가 어려운 어지러운 가운데서 조반도 먹을 틈이 없었다. 서 울서 이틀을 입은 채 뒹굴었기 때문에 덜 민 속옷도 갈아입을 틈이 없었다.

대략 이렇게 의논을 한 뒤에 나는 창황히 정거장으로 뛰쳐나갔다.

대개 예기는 하였었지만 이번 이 길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올 때는, 나의 단 한 분이시던 어머님은 벌써 이 세상에서의 존재를 잃으신 것이다.

내 나이 벌써 서른다섯. 내가 어머님을 그릴 나이가 아니며, 예순일곱에 떠나신 어머님의 춘추가 부족하달 수 또한 없지만 웬 일인지 왜 좀 더 살아 계시지 못하였는가 하는 원망이 마음에 사라지는 날이 없다.

어머님은 매우 건강한 체질의 소유자였다.

어머님이 제일차의 뇌일혈로 넘어지신 것은 벌써 근 삼 년 전 이다. 뇌일혈이 일었다가는 소생키 쉽지 않고 소생한다 하더라도 전신이나 반신 불수는 대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머님의 건강하신 체력은 능히 이 무서운 고비를 어렵잖게 물리치고 다시 지팡이를 짚고는 거리에도 나다니실 만치 회복이 되었다.

이렇게 차차 회복기에 가까와 가다가 금년 이른봄 제이차의 뇌일혈이 생겼다.

의사도 그때는 진찰까지 거부하였다. 진찰할 필요도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놀라운 체력의 소유자이신 어머님은 이 고비를 용히 또 넘겼다. 금년 여름에는 지팡이를 짚고는 변소 출입도 능히 하시고 부축하는 사람이 있으면 한길에까지도 나설 수가 있을이만치 차도가 있었다.

이리하여, 여름에 어머님은 오래간만에 이 서울 내 집을 또 와 보시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두 번의 뇌일혈을 겪으신 뒤의 어머님은, 내가 보기에도 매우 딱하였다.

반 삭을 서울 계실 동안 꼭 한번 웃으셨다. 내 어린 계집애의 재롱에 꼭 한 번 웃으신 일이 있었다. 그 외에는 반 삭간은 언제든 언짢은 낯으로 계셨다. 좀 하면 우셨다. 당신의 아들의 집이요, 당신의 아들 며느리 손주들이거늘 매우 어렵게 알고 미안하게 아셨다. 무엇을 가져오라든가 사오라든가 하시지 않고, 반드시 부자유한 몸을 움직여서 몸소 하시고, 당신의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어 아이들에게 사오라 하시고 하였다.

이렇게 약하게 변한 어머님의 성격을 볼 때에 나는 늘 쓸쓸하였다.

“동인아.”

내게 대해서 이렇게 부르시는 일조차 없었다. 내게 무슨 말씀을 하시기조차 매우 어려워하셨다.

“누구를 보아도 반가워할 줄도 모르고 ─.”

반가운 사람을 볼지라도 반가운 뜻을 나타내실 줄 몰라서 언짢다 하시는 뜻이다.

그렇듯 늘 눈떡만 짓고 계신지라, 아직 철없는 내 아들은 할머님의 앞을 꺼리였다. 이전에는 늘 ‘할머니’, ‘할머니’를 연발하며 할머니의 곁을 떠나지를 않아서 웃기던 그 애도 슬슬 피하였다.

“너 좀 할머님 곁에 있거라.”

타이르면 잠깐 있다가도 핑계만 생기면 다른 데로 피하고 하였다. 당신의 앞을 꺼리는 철없는 손주를 쓸쓸히 보신 뒤에도 또 흐득흐득 느끼시고 하였다. 마치 어린애와 같으셨다. 이렇게 언짢은 경성 생활을 반 삭 동안을 하였다.

평양으로 도로 내려가시기 수삼 일 전에 어머님의 목 뒤에 조금만 부스럼 하나가 생겼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은 부스럼이었다. 조고약을 사다가 붙 여 드렸다.

그러나 어머님은,

“수술을 해얄까부다.”

혹은,

“항종에는 관을 짓는다던데.”

이런 불길한 말씀을 연발하였다. 그리고 클클하기 때문에 그 조고약을 한 시간에도 몇 번씩을 뗐다 붙였다 하셨다.

그 부스럼이가 말썽이 되었다. 곧 나으려니 했더니 평양 내려가실 때에는 주먹만하게 든든하게 되었다.

평양에서 수술하셨다는 기별이 이르렀다. 뒤이어 수술 경과가 좋지 못하다는 기별.

그러나 나는 비교적 안심하고 있었다. 부스럼에서 시작된 종처거니 절개(切開)만 해버리면 나으려니 이만치 여기고 있었다. 그랬더니 불과 며칠이 지나지 못하여 이 전보였다.

기차에서 나는 최면제를 복용하였다. 두 장이나 연거푸 온 전보로 미루어 벌써 불행이나 생기지 않았나, 불행이 생겼으면 오늘부터라도 수일간을 밤 경을 해야 할 테니 그 준비를 위하여.

그러나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개성을 지나서 잠깐 잠이 들었다가 신막서 깨었다. 그 뒤부터는 다시 잠이 들 수가 없었다.

이러한 가운데서 나는 망연히 생각하였다. 지금부터 십칠 년 전 동경서 공부할 시대에 아버지에게 곧 돌아오라는 전보를 받고 황황히 돌아온 그 날의 기억이 오늘날 어머니의 전보를 받고 고향으로 내려가는 때 다시 기억에 소생하였다.

사흘간의 긴 여행을 끝내고 평양에 들어서니 아버님은 벌써 세상을 떠나셨다.

아버님의 임종도 못 보았거니와 어머님의 임종도 못 보나.

그저께 저녁에 전보가 오고 어제 아침에 또 오고 그 뒤에는 안 오는 것은 혹은 벌써 불행하셨다는 것을 뜻함이 아닐까.

아버님을 잃은 것은 내 나이가 열여덟 살 ─ 인생에 대한 용기와 희망으로 찬 시절이었다. 아버님을 잃는다는 일조차 그다지 크게 마음에 울리지 않았다.

지금 내 나이 서른 다섯 ─ 중년의 적적함을 가장 통절히 느낄 시기다. 그 위에 어머님께 대해서는 부단(不斷)의 염(念)이 마음에 있었다. 그 청년 시기와 중년 시기를 아무 부자유가 없이 보내신 어머님을 나의 방탕과 파산 때문에 노후(老後) 불안정한 생활을 하시게 하기 때문에 늘 마음이 불안하였다. 언제 좀 더 안정된 생활을 경영하게 되기만 하면 어머님을 모셔 오기로 속으로 작정하고 그 날을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이 위 생활이 안정된 뒤의 설계의 제일 조건으로서 주택, 어머님의 거실의 설비의 양식을 늘 몽상(夢想)하고 있던 것이다.

아들의 방탕 때문에 노후에 부자유한 생활을 하시면서도 한 번도 불평한 안색을 하시기는커녕, 도리어 자기의 죄로서 부자유한 생활을 하는 이 아들을 미안한 생각으로 대하시던 어머님을 생각하면서 가슴이 저리고 하였다.

마음에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도 우리 김문(金門)의 수저워하는 성격 때문 에 어머님께 대하여, 기뻐하실 말 한 번도 드려 보지 못한 나였다.

이런지라 평양서 기차를 던지고 어머님의 계시던 집까지 뛰쳐가서 어머님이 입원하여 계신단 말을 듣고 아직 환송하시지 않았단 말을 들을 때에 이 위독하신 어머님을 앞에 두고 나는 도리어 가슴에 북받쳐오르는 희열을 금할 수가 없었다.

‘기독부인병원’ 형수와 누이 부처가 간호하는 가운데 누워계신 어머니. 어머님은 눈을 뜨시고 나를 보았다.

아무 감정도 없는 눈으로 잠시 보셨다. 아마 누구인지 모르시는 모양이었다. 그런 뒤에는 휙하니 몸을 저편으로 뒤채셨다.

뒤채신 지 한 분(分)이 못되어 다시 이 편으로 뒤채셨다. 그 뒤에 또 곧 저편으로.

단 한 분도 안정해 계시지 않았다. 이편 저편으로 잠시를 멎지 않고 뒤채고 계시다.

말을 듣건대 그 부스럼이 악화하여 평양서 수술을 하셨는데 그것을 어머님 이 소독치 않은 손으로 만지기 때문에 수술한 자리로 단독균이 들어가서 이렇게 되었다 한다.

춘추가 춘추라 병원에서는 친척의 계약서가 없이는 대수술을 거절하였다.

그 입원 날 저녁에 내게 전보를 쳤다.

이튿날 아침에는 후두부(後頭部) 전체가 붉게 부어올랐다. 각각(刻刻)으로 그 범위가 넓어 가는 것이 분명하였다. 대수술을 않을 수가 없이 되었다.

또다시 내게의 전보가 그때의 것이다. 각각으로 넓어 가는 자리는 잠시도 더 유예할 수가 없이 되었다. 더 꿈질거리다가는 큰 일이 닥치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의 입회인으로서는 누이 내외가 있을 뿐이었다.

형에게 전화를 하였으나 형은 조반(朝飯)후에야 오겠다고 하고 동생에게 전인(傳人)을 했으나 동생도 아직 안 오고 내게 어젯저녁에 전보를 쳤으나 나조차 하양(下壤)치 않고 병세는 더 유예할 수가 없고 하여 누이 단독으로 계약을 하고 드디어 대수술을 하였다 한다.

수술 뒤 감각은 몇 시간 뒤에 회복되었으나 의식은 삼십여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회복이 되지 않고, 장래 영구히 안 되지나 않을까 하면서 누이는 눈물짓는다.

답답하다고 부채질을 하라는 말과 물을 달라는 말 밖에는 아직 입 밖에 낸 말도 없어도, 많은 사람 가운데 누이 한 사람 밖에는 알아보시는 사람도 없다 한다.

그날 밤 나는 단독으로 병원에서 새웠다. 형의 집에서 하녀 한 사람을 보냈으나, 나는 그를 간호부실로 보내고 혼자서 간호하기로 하였다. 좀 아직껏 수저워하기 때문에 소홀히 한 효도를 임종에나마 드려 보고 싶었다.

부대하신 위에도 또, 잠시를 쉬지 않고 몸을 이편 저편으로 뒤채시는지라, 한 개의 침대로는 지탱할 수가 없어서, 침대를 두 개를 나란히 하여 놓은 위에서 어머님은 밤새도록 그냥 끊임없이 이리저리 뒤채셨다. 한 번 시험삼아 팔을 붙들어 보았더니 놀라운 힘으로 그것을 빼서, 역시 뒤채셨다.

밤중에 어머님은 나를 알아보셨다. 시험삼아 내가 누인지 아십니까고 물어 보았더니 한참을 물끄러미 보시다가 간단히,

“서울 아이.”

하셨다 그러나 기쁘신 . 표정도 언제 내려왔느냐는 질문도 없이 역시 몸을 저리로 뒤채실 뿐이었다.

물, 부채질 ─ 이 두 가지 밖에는 아무 욕망도 없으셨다. 수술 전날 밤까지도 내게 전보를 치라고 채근을 하시고, 이튿날 아침에 수술하시기 직전에도 내가 내려 안 왔느냐고 물으시더라더니.

오전 열시쯤 회진할 때에 나는 수술 자리를 비로소 볼 기회를 얻었다. 형 도 누이도 모두 있었지만 차마 보지 못하겠다고 모두 병실 밖으로 피하고 내가 어머님을 부축하고 있을 책임을 지게 되었다.

팔로 어머님의 어깨를 붙들고 다리로 어머님의 허리를 버티는 관계상 내 눈앞 한뼘쯤 되는 거리에 있는 그 수술 자리, 넓이가 다섯 치쯤 길이가 여섯 치쯤 후두부의 가죽을 잘라 내어서 두개골이 통 보이며 군데군데 그냥 붙어 있는 살덩이는 모두 썩었고 그 변두리 가죽이 그냥 있는 곳도 모두 누르는 곳마다 농(膿)이 비어져 나온다.

“아파 아파.”

발음이 분명치 못한 음성으로 연하여 고통을 호소하시는 어머니. 잔혹한 일도 비교적 냉정히 관찰하는 습성이 있는 나도, 이 끔찍한 수술 자리를 보고는, 몸을 떨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십 관이 썩 넘는 어머님의 온 몸의 몸무게를 받고 있는 내 팔과 다리가 떨리고 가슴이 서늘하여, 그 자리를 보 지 않으려고 애를 쓰나, 기운 없는 신음성이 연하여 나매, 눈을 또 한 그곳 서 뗄 수도 없었다.

이런 무서운 상처를 가지고도, 용하케 참으시는 참을성은 경탄할 만하였다. 그 자리를 보는 내게조차 식은땀이 온몸에 내배었거든, 어머님은 놀라운 참을성으로 참으신다. 가죽과 뼈의 틈으로 심지를 꽂을 때에도, 몸만 흠칫흠칫하실 뿐 용히 참으신다. 혹은 아픔이 너무도 과한지라 도리어 그다지 감각치를 못하시는지.

“경과가 매우 좋아요.”

의사는 보증하였다.

그러나 이 보증을 나는 믿기 힘들었다. 사람의 체력이 얼마나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본시 탈 때문에 쇠잔하셨던 몸에 또한 이만한 상처를 받으시고도 능히 견딜 수가 있을까.

동생과 누이의 권고에 나는 오후 두시쯤 그 새 여러 날을 자지 못한 잠을 잠깐 자 보려고 병원에서 얼마 되지 않는 누이의 집으로 갔다. 최면제를 먹고 한잠 들고자 하였으나, 꿈과 같이 생시와 같이, 자는 듯 마는 듯한 두 시간을 겨우 보내고 다시 병원으로 달려갔다.

여전히 번열증 때문에 부채질을 멈추지 못하게 하시며 냉수를 연하여 청하시며 일 분도 쉬지 않고 이리저리로 뒤채시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그날 밤도 또한 나 혼자서 밤을 새기로 하였다. 누이는 제 지아비에게 강박(强迫)하여 몸이 약한 나를 오늘은 쉬도록 하게 하려고 하는 것을 들었지만 나는 간밤의 간호뿐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싶지 않았다. 불면증이 있기 때문에 한밤을 앉아서 새울지라도 까딱도 안 하는 나 같은 사람이야말로 환자 간호에 가장 적임자일 것이다. 밤에 목이 마르시다든가 변의(便意)가 계시다든가 그렇지 않으면 무슨 급변이 있든가 할 때에 자지 않고 지켜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할지라 나는 이 위중하신 어머님의 앞을 밤 동안은 차마 떠나지를 못 하였다.

그러나 이 밤은 내게도 꽤 괴로왔다. 그 새 여러 날을 잠을 못 잤기 때문 에 온 신경을 누르는 졸음 때문에 근년(近年) 십여 년래에 처음으로 ‘졸음 때문에 괴로운 경험’을 하였다.

잠드신 듯하다가는 문득 깨시고 깨신 듯하다가는 문득 잠드시고, 깨신다 할지라도 아무 의식도 없는 듯한 눈으로 무한한 전방(前方)만 응시하시고 ─ 이러한 가운데서 이 밤도 지났다. 보고 싶은 사람도 계시겠거늘, 청하고 싶은 일도 계시겠거늘.

세상 잡무에 관한 욕망도 벌써 다 잊으시든가 혹은 무관심하게 되셨나. 그렇지 않으면 몸이 너무도 거북하여 의사표시하는 행동조차 귀찮으셨나. 간혹 내게로 향하여 돌아누우시며 눈을 내 위에 던지시는 일도 있지만 아무 표정도 없이 다른 데로 다시 구을리시고 하였다. 의식 정도가 얼마나 한지 도 의심스러웠다.

새벽녘께 깨신 기회에 또 열과 맥박을 재다가 나는 어머님께 내가 누구인 지 아시느냐고 물어 보았다. 너무도 안타깝기 때문에.

“예?”

“내가 누구인지 아세요?”

“의사다.”

이 아들을 아직껏 의사로 알고 계셨나. 나는 칵 눈물이 쏟아졌다.

“의사가 왜 의사야요. 서울 있던 동인이 아닙니까? 그저께 내려온 동인이 야요.”

귀 가까이서 조용한 말로 이렇게 말할 때는 나는 무론 이 말에 대해서 어머님의 얼굴에 반가운 표정이라도 나타나기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이 말에 대해서도 어머님은 아무 감정도 없으신 음성으로,

“동인이?”

이렇게 반문하신 뿐, 눈을 거듭떠보려도 안 하셨다.

그 풍만하시던 얼굴이 여름새에 무척도 여위셔서, 광대뼈가 쑥 보이며 사지에는 살이 빠졌기 때문에 잔주름이 한 꺼풀 덮인 어머님을 주물러 드리며 침두(枕頭)에 서 있는 동안,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호흡이 통하고 맥박이 움직이고 ─ 이뿐, 이 밖에는 인간의 온갖 감동과 감정을 모르시는 어머님을 볼 때에, 멈추려야 멈출 수 없이 뒤이어 눈물이 솟았다.

밝는 날 회진왔던 의사는 여전히 경과가 매우 좋다고 선언하였다.

그 경과가 좋다는 것은 무엇을 뜻함이냐 물으매, 종처의 자리가 더 넓게 썩어지지 않으니 이것이 즉 좋다는 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그러나 드레싱을 하는 동안 내 눈앞 다섯 치의 거리의 그 수술 자리에서는 여전이 살 썩는 냄새가 코를 찌르고, 변두리를 누르면 농이 비어서 나오지 않는다.

“내과적으로는 어떻습니까?”

의사를 따라 나가서 병실 밖에서 이렇게 물어 보매, 의사는 이 외과적 환자의 내과적 방면을 묻는 것을 도리어 의아히 여기는 듯이,

“좋아요. 매우 좋아요.”

하고는 저편으로 가 버렸다.

그러나 좀 뒤에 의사는 다시 이번은 청진기를 가지고 왔다. 먼젓번은 외과 적 기구만 준비해 가지고 왔던 것이다.

입원 이래 처음으로 내과적 진찰을 하여 보았다. 의사는 잠깐 눈살을 찌푸렸다.

“폐염 기운이 있는 모양이나 잘 주의하면 별 관계가 없겠소. 경과 좋아요. 아주 좋아요.”

왼편 폐에 염증이 생겼다 한다.

사흘이 지나고 나흘이 지나는 동안도 어머님의 병환은 차도가 있는 듯 싶지도 않았다. 의사는 회진 때마다,

“경과 좋아요.”

를 연발하지만 우리들의 눈에는 무엇이 좋은지 어떻게 좋은지 알 수가 없었다.

단지 내가 처음 평양으로 달려온 때보다 좀 변한 것은 한 분(分)도 쉬지 않고 몸을 이리로 저리로 뒤채시던 그 동작이 없어진 것뿐이었다. 그러나 이것조차 우리의 눈으로 보자면 더욱 기운이 쇠잔하셔서 몸 뒤채실 기력조차 없어진 것으로 보였다.

형의 집에서 선풍기를 가져다 놓았다.

웅웅 돌아가는 선풍기의 바람 아래서 고요히 눈을 감고 계신 어머님. 너무도 고요히 계시므로 혹 선풍기를 튼 것을 의식치 못하시나 하고 스위치를 끊어 놓으면 곧 눈을 뜨시고,

“선풍기 돌려라.”

하고 하신다.

여전히 연하여 냉수를 청하시고 실과를 청하시는 뿐 다른 세상의 욕망은 싹도 보이지 않았다.

어머님의 병환이 지구적(持久的)으로 들어가며 급변(急變)은 없을 모양이 보이면서부터는 나는 차차 나의 서울 집이 걱정났다. 내가 원고를 써서 그 수입으로만 이렁저렁 호구(糊口)를 하여나아가는 집안이라 그냥 내버리고 평양으로 뛰쳐내려왔는지라, 그 생활 문제가 근심되었다.

이곳은 형이 부호로 지내고 동생 누이 모두 근심이나 없이 지내며 어머님의 병환도 일 양일간(一兩一間)으로는 급변은 생각지 않을 듯하나 서울 적 지 않은 내 식구는 오로지 내 붓끝 하나에서만 밥을 먹고 사는 것이다. 서 울 안해에게서는 벌써부터 경제난을 하소하는 편지가 왔다. 이제 월말을 눈앞에 둔 이때 이 문제도 적지 않게 근심되었다.

잠깐 서울까지 다녀오나. 서울 가서 집안 일을 당분간 좀 되도록 만들어 놓고 마음 놓고 평양에 다시 와서 천천히 간병을 하나.

그러자니 또한 이 위중하시고 의식조차 명료치 못하신 어머님의 앞을 차마 떠나가기 싫었다.

어머님의 병환이 급할 때는 서울 집안의 일 따위는 생각할 겨를도 없었지 만 지구적으로 들어가면서부터는 이 문제가 매우 근심되었다.

어느 날 밤 나는 고요히 잠드신 어머님의 침두에 서서 오른손으로 어머님의 열을 짚어보며 생각하여 보았다. 지금 고요히 주무시는 양으로 보아서 무슨 급변이 생길 듯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연로하신 위에 적지 않은 병을 지니고 계신 이 어머님을 아무리 지구적으로 병환이 변하였다 하지만 어떻게 버려두고 그냥 갈까.

자정이 지나고 축시(丑時)가 지날 때까지 나는 잠드신 어머님의 이마 위에 손을 얹은 채 우두커니 서서 양난(兩難)한 입장을 스스로 울었다.

밤에 열을 보러 들어왔던 간호부는 내 이 눈물을 단지 어머님의 위중을 슬퍼하는 것으로 알았을 것이지, 가도오도 할 수 없는 이 내 마음의 아픔은 알아줄 사람이 없었다.

새벽녘, 병상 맞은편 의자에 앉아서 전등을 내 편으로 돌려 놓고, 무슨 취미잡지를 읽고 있을때에 어머님이,

“거 누구가?”

하고 물으셨다.

나는 책을 얼른 내리었다. 사람이 보통 기쁠 때에는 화색이 나고 그 정도를 넘을 때는 울고, 또 그 정도를 넘게 되면, 멈출 수 없이 홍소(哄笑)하게 되는 것을 나는 이때 비로소 경험하였다.

의식이 드셨다. 아직껏 단지 냉수를 찾으시든가, 부채질을 하라시든가, 그렇지 않으면 아픔을 호소하는 데 지나지 못하시던 어머님이 사위(四圍)에 주의를 하실 만치 의식이 드셨다. 자기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양복장이가 누구인지를 알아보시려는 의식이 드셨다.

보던 잡지를 내어던지고 어머님 앞에 가서, 이마에 손을 얹고 멈출 수 없는 웃음 가운데서 동인이외다 동인이외다 아뢰었다. 어머님은 나를 쳐다보셨다. 그러나 여름부터 표정을 잃으신 어머님은, 역시 무표정하게 보실 뿐이었다.

한참을 보시다가는 다시 눈을 감아 버리셨다.

이 날부터 어머님은 조금 의식이 드셨다.

그러나, 의식이 드셨다 할지라도 무슨 요구를 제출하시든가 하는 일은 없으셨다. 단지, 문병온 사람들을 분간하시며 세상 잡무에 관한 약간한 이해력을 회복하실 뿐, 당신의 의사는 여전히 나타내는 일이 없었다.

그날 오후, 형이 병원에 온 때에, 나는 매우 괴로운 말을 꺼내어 보았다.

“월말은 차차 가까와 오고 하는데 서울 집으로 용처를 약간 보내주시면 좋겠읍니다. 좌우편으로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지금 어쩔 수가 없읍니다.”

이 날 마침 안해에게서도 편지가 왔다. 지금 집안에 용처가 떨어졌는데 어디 원고료 들어올 곳이 있으며 알으켜 주면 자기라도 가서 받아와야겠다는 것이었다.

내 요구를 들은 형은 곧,

“없다. 인제 생기면 보내 주지.”

하고 거절의 뜻을 나타내었다.

딱하게 되었다.

서울 집안을 그냥 버릴 수 없다. 그렇다고 이 위중하신 어머님을 또한 어쩌나.

그날 밤, 오래간만에 하룻밤을 쉬려고 병원을 매부에게 부탁하고 어머님의 계시던 집으로 나와서 피곤한 몸을 잠자려고(의사가 들으면 깜짝 놀랄 만 치)다량의 최면제를 먹고 자리 위에 눕자 곧 잠이 들었지만 양난(兩難)의 괴로운 마음을 알고 있는 나는 안면(安眠)하지를 못하고 연하여 깨었다. 잠 들면 못된 꿈을 꾸었다.

이렇게 불안히 혹은 잠들고 혹은 깨고 하는 동안 나는 매우 냉혹한 결심을 하였다.

상경(上京)하자. 상경하여 일 양일간(一兩日間) 지내면서 그냥 버리고 온 내 집을 정돈하여 놓고 내려와 있도록 하자. 이곳은 내가 없을지라도 아직도 두 아들과 며느리며 딸 사위가 있어서 근심이 없지만 서울 내 식구는 나만 없으면 가두에 방황할 몸이 아니냐. 아직 빚[債〕에 시달리는 생활을 하 게 한 경험이 없는지라, 내 안해는 현금만 없으면 어쩔 줄을 모를 사람이다. 올라가서 어떻게든 임시로라도 꾸며주고 다시 내려오자.

밝은 날, 나는 진일(盡日)을 우울하게 지냈다.

인제 명일(明日)이면 잠깐 다시 상경하였다가 내려오리라는 결심을 하였는 지라 어머님의 용태가 근심스러웠다. 지금 보아서는 어제보다도 좀 더 차도 가 있는 듯하지만, 노인의 병세라 언제 급변할는지 알 수가 없으므로, 이것 이 근심되었다.

나는 당직의에게 묻고, 주치의에게 묻고, 원장에게 묻고, 이렇듯 돌아가면서 물어 보았다. 만약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위중하다면 무론 상경치 못 할 것이요, 이구동성으로 양호하다면 안심하고 상경할 것이다. 그러나, 원장의 말은 양호하다 하고 당직의 말은 위독하다고 하고 주치의의 말은 아직 모르겠다 하매 어떤 편을 신망하여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날 밤 역시 고요히 잠드신 어머님의 침두에서 밤을 새우는 동안 나는 나의 환경을 탄식하였다. 아직 어떻다 단언할 수 없는 어머님을 두고 상경하여야 할 수밖에 없는 내 처지를 탄식하였다. 이틀만 있다 다시 내려올게 그때까지 무사히 계십시오. 나는 이렇게 연하여 속으로 빌었다.

“야.”

보매 잠드신 줄 알았던 어머님이 어느덧 눈을 뜨시고 나를 쳐다보고 계신다.

나는 얼른 일어나서 물주전자를 어머님의 입에 갖다 대었다. 물을 찾으실 때 밖에는 사람을 부르는 일이 없는 어머님이므로.

그러나 어머님은 물을 달갑지 않으신 듯이 한 모금만 받아 마신 뒤에, 몰표 정한 눈으로 그냥 쳐다보고만 계시다.

“내 입성 어디 있니?”

한참 쳐다보시다가 하는 말씀. 풍 때문에 발음이 똑똑치 못하셔서, 마치 누구를 책망하시듯이 하시는 말씀이었다.

나는 이 밑도 끝도 없는 말씀을 못 알아들었다. 그래서 반문치 않을 수가 없었다.

“네?”

“내 입성 말이야.”

“옷이요?”

“어.”

나는 어머님의 옷이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모른다고 대답하매 어머님은 한참 아무 말씀이 없으시다가 또 성가신 듯한 음성으로,

“거기 내 뚜머니 이서. 뚜 쭈머니.”

“주머니요?”

“어.”

여전히 끝도 밑도 모를 말씀이었다.

“쭈머니에 똔이서.”

말하자면 입원하시고 벗어놓으신 옷에 주머니가 있고, 그 주머니에 돈이 들어 있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지금의 어머님의 입장과 아무 관련이 없는 이 문제를 나는 어머님의 한낱 헛말씀으로밖에는 들을 수가 없었다. 몸이 너무도 아프셔서 헛말씀을 하신다 이렇게 보았다. 그리고 어머님 손의 맥을 짚어 보았다.

어머님도 다시 잠이 드셨는지, 눈을 감아 버리셨다. 그러나 한 십 분 지났을까 말았을까. 어머님은 눈을 감으신 채 다시 말을 하셨다.

“너 용첩슴 쓰.”

불분명한 발음이나마 너 용처 있으면 써라 하시는 말씀에 틀림이 없었다.

나는 눈에 콱 솟아나는 눈물을 막을 수가 없었다. 정신만드시면 관심하실 일이 하고많거늘 제일 먼저 이 나의 용처를 관심하시나.

“아니. 용처는 넉넉해요.”

눈물 가운데서 이렇게 대답하매 어머님은 다시 입을 봉하셨다. 그러나 잠시 뒤에 또 입을 여셨다.

“서울두 보내야지. 뚜머니에 깍지두 이서.”

나는 더 참지 못하였다. 어머님의 팔에 머리를 묻고, 느껴 울었다.

어머님은 내가 어저께 형에게 하는 걱정을 들으신 것이었다. 그리고, 당신이 가지신 다만 한 개의 귀중품인 순금 양반쭝의 가락지를 팔아서 쓰라시는 것이었다.

당신의 왼편 팔에 머리를 묻고 우는 내 머리에 어머님이 오른손이 와서 덮이는 것을 나는 알았다. 이십여 년 만에 어머님의 손으로 머리를 쓸리우며 나는 한없이 한없이 울었다.

“그럼 말씀은 마세요. 인제 다시 쾌차하셔서 끼셔야지.”

“끼긴. 내가 살아날 것 같던!”

어떤 일이 있든 내일 잠깐 상경했다가 돌아오자. 서울 가서 대지급으로 집 안을 대강 정리해 놓고 마음놓고 다시 내려와서, 내 정성을 다하여 어머님을 간호하자. 내 정성으로라도 어머님을 다시 병상에서 일어나시도록 하자.

“아까 원장도 경과가 좋다는 걸요. 인제 며칠만 더 계시면 안 나리까.

내 일은 아무 걱정 마세요. 어떻게든 내 아니 꾸리리까.”

어머님은 이번에는 아주 입을 봉해 버리셨다. 깨셨는지 주무시는지 고요히 눈을 닫으신 채 규칙 바르게 숨소리만 겨우 정숙을 깨뜨린다.

이리하여 이 밤도 무사히 밝았다.

아침 회진 때에 원장은 B라는 서양 여자를 데리고 와서 이 사람이 인제부터는 주치의가 되어서 치료를 담당할 테니 그리 알라고 한다.

회진 후, 어머님은 잠이 드시고 병실에서는 나와 누이동생 단 두 사람이 되었을 때에, 나는 비로소 누이에게 오늘 밤 상경하겠다는 뜻을 말하였다.

오늘 밤 상경하여 일을 보고 내일 밤 늦어도 모레 밤차로 다시 오겠다고.

“그럭하면 되나요?”

누이는 무론 깜짝 놀라며 반대의 뜻을 나타내었다.

“그렇지만 어떻하니. 나도 차마 떠나기 싫지만 어머님도 하루 이틀새에는 급변할 것 같지도 않고….”

“그래도 찾지.”

무론 찾으실 것이다. 내가 없으면 밤경을 할 사람은 내 아우와 매부의 두 사람뿐이다. 두 사람이 다 잠 많은 사람으로서, 밤을 새워서 지키지를 못할 것이다. 일전도 너무 곤하여 하룻밤 매부에게 맡겼더니 밝는 날 어머님은 불평을 말하셨다. 밤에 물을 달라 해도 모르고 자고, 소변을 보시겠다 해도 그냥 모르고 자고, 몸의 위치를 고치시려 할 때에도 완력(腕力) 있는 대로 써서 아파서 못 견디시겠다는 것이다.

나 자신으로도 어머님의 앞을 잠시도 떠나기 싫었거니와 어머님의 간호를 위하여서도 나는 그 새 피할 수 없는 일(식사라든가 잠잘 때라든가)밖에는 단 오 분간을 병실 밖에 나가 보지를 못했다.

나 이외에는 어머님을 전심(專心)으로 간병할 사람도 없었거니와 전심으로 간병한다 할지라도 어머님께 불평이 없으시도록 하기가 힘들 것이다. 그런 관계상 내가 상경한다는 것은(그것이 단 하루간이라도) 매우 난처한 일이 다.

나는 서울을 가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상경하기를 번의하였다.

그날 잠에서 깨신 어머님은 갑자기 기괴한 말씀을 하기 시작하셨다. 잠에서 깨서 곁에 누이를 부르시고 갑자기,

“내 입성 어디 있니?”

하고 물으셨다.

나는 어젯밤 어머님의 말씀을 들은 일이 있는지라, 뜨끔하였다.

“내 입성 어디 있어?”

“입성? 집에 가져다 뒀지요. 왜요?”

“주머니는?”

“주머니두 집에 함께 잘 갖다 뒀지요. 갑자기 그 이야긴?”

“좀 가져오렴.”

“그건 왜요?”

“볼라구.”

이런 회화였다.

나는 가슴이 서늘하였다. 동시에 눈물이 나오려 하였다. 어머님과 누이의 회화 틈에 내가 끼여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야. 아무 무척 귀애하시던 주머니니깐 오매중에 생각나시나부다.”

이렇게 누이를 그 말에서 떼어 버리고, 다른 말을 하게 하였다.

지금껏 누이를 데리고 계시던 어머님이라 어머님의 가지신 약소한 부동산이며 동산은 죄 누이 자기가 가질 것으로 알고 있는 배다. 그런 형편이라 이곳에서 다른 말이 나오면 나와 그의 새에 기괴한 감정이 끼일까 그것을 저어하였다. 병상에 계신 어머님의 말씀을 헛말씀이라 하여 저까지 이렇게 할 필요가 있는지 어쩐지는 판단키 어려운 일이로되 그 당장에서는 나는 이렇게 말해서 그런 말을 삭여 버릴 이외에는 도리가 없었다.

어머님도 당신의 것은 딸이 물려받으려고 생각 먹고 있는 줄 아시는지라, 더 말씀하시기가 어려워서 분명한 말씀은 채 하시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 날부터 임종하시는 날까지 마치 헛말씀같이 옷을 가져오너라 주머니를 보자 하시는 말씀은 매일 몇 번씩 하셨다. 그 말씀을 들을 때마다 내 가슴은 우겨 내는 듯하였다.

그날 밤부터는 몹시 수술한 자리가 아프시다고 호소를 하시므로 간호부에게 명하여 진통제 주사를 한 대하게 하였다.

지금도 늘 감사한 생각이 나는 배지만 그때, 간호부들이 진실로 잘 말을 들어 준 점이다. 본래 이 병원 계통의 각 병원은 간호부가 친절치 못하다는 소문이 높은데, 우리 병실에 대하여서만은 그야말로 입안의 혀와 같이 놀랍게도 잘 순종하였다.

이튿날 새벽, 매부가 온 것을 기회로 잠깐 집에 들어가서 대변을 보고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더니 그 새 깨신 어머님이 매부에게,

“동인이 서울 갔느냐?”

어제 내가 가겠다는 말을 들으신 것이었다.

“가긴 왜 가요. 여기 있읍니다.”

모든 세상사를 관념 안 하시며 그렇게 사랑하시던 외손주가 눈앞에 와도 모른 체하시는 어머님이, 내가 갔는지 안 갔는지 관심하시는 것을 볼 때에 나는 상경하겠다는 마음을 내었던 것만도 매우 죄송하였다.

그 날부터 병세는 이상하게 되었다.

열이 더하다든가, 고통이 더하다든가 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무슨 환각에 위협받으시는 듯하였다.

어젯밤 이 병원에서 아이 둘이 죽어 나갔는데, 그 직후에 아기 귀신이 앙앙 울어서 그 소리에 잠을 못 잤노라고 말씀을 하신다.

불길한 예감이었다. 간호부를 불러서 몰래 혹은 이 병원에서 어린애 죽은 일이라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간호부의 대답은 이 병원에는 지금은 이 병실 (어머님) 이외에는 위독한 환자조차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말을 어머님께 드리고, 그런 망상과 환각을 어머님에게서 없이해 보려고 애를 썼으나, 어머님은 마지막에는 성까지 내시며, 분명히 죽어 나갔는데 너희는 나를 속이냐고 힐책하신다.

그것뿐 아니라, 잠드시든 깨시든 늘 무슨 환각을 보시는 것이 분명하였다.

아직까지는 냉수를 달라든가 선풍기를 틀라든가 하는 청구 이외에는 입을 여시는 일이 없더니 공연한 말씀을 늘 꺼내시고 하였다.

이 집을 모두 허는데 어디로 피하여야겠다는 말씀도 하셨다.

일환이(내 아들) 어젯밤에 내려와서 저기 모자를 벗어 두고 나갔는데 어디 갔느냐고도 물으셨다. 그러면서 연하여 어서 퇴원하자는 말씀을 하신다.

마치 어린애가 조르듯 우리를 보실 때마다 퇴원하자고 조르는 경향은 차마 우리로서는 보기가 힘들었다. 춘추가 춘추고 그 위에 병환이 또 병환이라 다시 일어나시지 못할 것은 뻔히 아는 바였지만 그래도 자식 된 정애로는 불가능한 경우에서라도 만일의 행(幸)이라도 바라보고 있었다. 냉정히 생각 할 때는 무론 불행한 일을 반드시 겪을 줄 믿는 바였지마는 그래도 지금 이 움직이시는 어머님이 장래에 영원한 정지(靜止)와 침묵에 들리라고는 믿기 우지 않았다. 마지막에는 탄원하는 태도로까지 퇴원하자고 하실 때도 우리는 끝까지 이 말씀을 거역하였다.

“퇴원해야 꼭 될 일이 있다.”

하실 때도 역시 며칠 뒤 조금 차도가 보일 때에 퇴원한다고 거짓말로써 어머님을 속였다.

나는 밤에 어머님께 그 퇴원해야 될 일이라는 그 ‘일’을 들었다. 세상 잡무였다. 이번에는 반드시 세상 떠나실 줄 아신 어머님이 마지막 처리를 하기 위해서 그렇듯 퇴원을 강요하신 것이다.

“그런 걱정은 마세요. 공연히 그런 생각까지 하시기 때문에 탈에 영향 됩 니다.”

이렇게 말하여 끝까지 듣지는 않았지만, 마지막 병상에서 정신이 혼미 하신 이때까지도 그냥 꾸준히 사십이 거의 된 이 아들을 걱정하시는 어머님의 마음에 울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문병왔던 사람들마다 모두 돌아갈 때는 우리에게 섭섭한 듯이 인사를 하고 가곤 하였지만, 우리는 그래도 끝끝내 희망을 붙였다. 냉정히 생각할 때는 절망으로 알면서도 그래도 불행이 임박하였으리라고는 뜻도 하지 않고 있었다. 더구나, 사람의 임종을 아직 본 일이 없는 나는 임종이 어떠한지 알지도 못하였다.

B라는 서양 여자가 주치의가 된 뒤부터는 음식이 늘 기괴한 것이 들어왔다.

고기 군 것, 고사리나물, 김치 이런 것들이었다.

그전까지는 죽과 미음과 우유와 계란 등이 교대로 들어왔는데 B가 맡은 뒤부터는 끼니마다 이런 것들이 들어왔다.

환자는 이것을 싫어하였다.

유동물(流動物)의 음식이라도 입에 떠 넣어 드려야 마지못해서 받으셨거늘 이런 음식을 좋다 할 리가 없었다.

“당뇨병이 있소.”

B의 말이었다.

“싫어. 사과나 한 쪽 다고.”

그 굳은 고기를 드릴 적마다 어머님은 머리를 저으시며 받지 않으려 하신다. 그러나 이것도 치료상의 한 도정이라 하여 우리는 어머님이 그렇듯 청 하시는 과실 한 쪽 드리지 못하고 고기와 고사리나 물뿐으로 대접하였다.

한 번 누이동생이 몰래 능금 한 쪽을 드렸다가 B에게 들키어서, 한참 말을 들은 일이 있었다.

당뇨병에 일년감은 괜치않다는 말이 있으므로 일년감을 좀 드린 일이 있었는데 이것도 불행히 금지를 당하였다.

불행한 환자.

나는 어머님을 가만히 들여다 볼 때마다 그 불행을 마음에 진실히 느꼈다.

위중한 환자의 소원이라면 웬만치 불가능한 일이라도 하여드리는 것이 옳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는 배다. 그러나 이 위중하신 어머님의 병상에서의 소원은 하나도 성공해 본 일이 없었다.

퇴원하자. 옷을 가져오너라. 주머니를 가져오너라. 이것을 모두 병상에서 의 섬어(譫語)라 하여 우리는 무시하였다. 나는 그 의미를 다 알고 있었으 나, 나도 여러 가지의 사정 때문에 말을 꺼내지 못하였다.

능금을 다고. 복숭아를 먹자. 무과수를 가져오너라. 이 소원도 B 때문에 들어 드리지 못하였다.

문병오는 어떤 사람이 복사와 무과수를 가져온 일이 있었는데 어머님은 못 보신 줄 알았더니 그 사람이 간 뒤에 곧 복사를 깎아오라고 하신다. 이것을 드리지 않을 때에 사실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였다.

어떤 날, 어머님이 주무시는 줄 알고 능금을 하나 먹고 있다가 문득 보매 어머님이 물끄러미 내 능금을 바라보고 계신다. 나는 이때 너무도 미안하여 의사의 말을 거역하고 어머님께 한 쪽 드렸다. 그 능금을 혀를 채며 잡수시던 모양.

갈하다면 냉수를 드리는 뿐이었다. 고기와 고사리가 뻣뻣해서 목에 넘지 않는다 하실지라도 그 밖에 다른 것은 의사가 금해서 어찌할 수가 없었다.

“나 국수(냉면) 좀 먹으면 안 될까.”

어떤 날 주무시다가 갑자기 깨시며 하시는 이 말씀. 얼마나 시원한 것이 생각나기에 이런 말씀을 하실까.

우리는 무슨 과일이나 그 밖 시원한 것을 먹을 기회가 있더라도 반드시 병실에서 나가서 포치에서 먹었다. 그러나 먹고 도로 병실로 들어올 때마다 무슨 큰 죄나 지은 것같이 미안하고 죄송하였다.

왼편 폐의 염증은 대단하여졌다 한다. 그러나 너무 걱정하지는 말라 한다.


팔월 이십칠일.

그날도 역시 퇴원하자는 말씀과 옷을 가져오라는 말씀과 그 밖에는 집이 무너진다는 둥 차도도 없고 더하지도 않는 모양으로 지냈다.

저녁 다섯시쯤 간호부가 무슨 주사를 한 대 하고 나간다. 무슨 주사냐고 물으니 인슐린이라 하며 당뇨병 치료제라 한다.

병실에는 어머님과 나 두 사람뿐이었다. 어머님은 고요히 잠드신 듯하여 무슨 취미잡지를 잠시 보다가 어머님의 숨소리가 조금 높은 듯하기에 책을 던지고 달려가 보았다. 이마에 손을 얹으매 이마가 불덩어리 같았다. 손을 잡아 보매 맥이 놀랍게도 빨랐다.

나는 가슴이 선뜩하였다 . 창황중 어찌할 줄을 몰랐다. 그때에 내가 어떤 순서로 일을 처리하였는지는 도무지 기억에 없다.

좌우간 체온기도 끼었다.

간호부도 불렀다.

강심제 주사를 놓아 달라고 하다가 의사의 처방이 있어야 놓겠다 하므로 간호부에게 윽박하여 강심제 주사를 연거푸 두 대를 놓은 일도 기억은 된다.

어떻게 된 병원인지 병원에는 지금 원장도 당직의도 주치의도 의사라는 종류는 하나도 없다 하므로 간호부를 모두 내세워서 의사를 찾으러 보낸 일도 기억은 된다.

아들들을 지급히 불러야 할 터인데, 집을 아는 사람이 없어서 쩔쩔매었다.

형의 집에는 전화로라도 통지할 수 있지만, 전화를 할 사람도 없었다. 간호부란 간호부는 모두 의사를 찾으러 나가고 나는 한 초라도 환자의 곁에서 떠날 수 없고 ─. 그러는 동안에 열은 삼십구 도로, 구 도 삼분으로, 오 분으로, 팔 분 구분으로 각각으로 올라간다. 가슴에는 그렇듯 열기가 높은데 도 발은 얼음장같이 차졌다. 흔들어도 정신도 못 차리셨다. 고함을 질러도, 부르짖어도, 다만 걸그렁걸그렁 하는 숨소리만 높고, 아무 감각도 모르시는 모양이었다.

그때 마침 누이가 병원으로 왔다.

이 경황을 보고 울면서 달려들려는 누이를 말리고, 먼저 기림리(동생의 집)로 달려가서 동생을 데려오라 하였다. 이즈음 이사한 동생의 집은 누이 밖에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 매부에게는 먼저 형에게 전화를 하고 곧 나와서 이 병원 관계의 어느 의사든 의사를 끄을어오라 하였다. 그러는 동안 어느덧 무릎까지도 식었다.

먼저 누이와 동생이 달려오고, 형수, 형, 뒤따라 달려온 때는 환자는 벌써 넓적다리까지 식고, 의사를 데리러 나갔던 간호부들도 모두 헛길을 하고 돌아온 때였다.

캠퍼를 또 한대, 또 한대, 또 한대 ─ 연하여 놓았지만 그 효력도 보이는 듯하지 않고 환자는 여전히 의식없이 숨소리만 높을 뿐이었다.

맨 먼저 원장이 왔다. 진찰해 보고는 섭섭하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이고 무슨 주사를 두 대명하고는 돌아가 버렸다.

주치의라는 B가 그 다음에 왔다. 역시 같은 말을 하였다.

당직의사도 보았다. 내과 주임도 보았다. 모두 섭섭하다는 뜻을 말한 뿐이었다.

동생의 안해 그는 마침. 그의 아들이 성홍열로 피병원에 감금되어 있었는 데, 이 소식에 놀라서 피병원을 탈출하여 왔다.

자식들이 죽 둘러선 가운데서 의식 모르는 환자는 숨소리만 걸그렁거리며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이윽고 다리에 온기가 조금 회복되었다. 그 온기가 차차 발로 내려갔다.

밤 열한시쯤 발까지 모두 뜨끈뜨끈하게 되었다. 열기는 보통 때나 일반으로 삼십팔도 팔 분.

강심제의 효력이 몇 시간이 가느냐고 물으니, 오륙 시간 혹은 칠팔 시간까지 간다 한다.

지금 이 상태는 단지 ‘강심제’라는 약의 효과일까. 차차 식어가던 몸이 다시 따스러워지고, 숨결조차 상태(常態)로 돌아온 이것이 한 개 약의 효과 일까. 약의 효과의 지속시간만 지나면, 몸은 그냥 식어 버리고 말 것인가.

열한시, 열두시, 새벽 한시.

자식들이 말 한 마디 내지 못하고 숨소리까지 죽이고 둘러섰는 가운데서, 환자는 규칙 바르게 걸그렁걸그렁 숨소리를 높여 자고 있다.

시험삼아 귓가에서 불러 보기도 하였다.

몸을 좀 흔들어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표정 한 번 움직일 때 없이, 그냥 잠자코 계시다. 한 번 시험삼아 내가 몰래 팔을 조금 꼬집어 본 때가 있었다. 그때 나는 등골로 소름이 끼쳤다. 한순간이나마 어머님의 표정이 아픈 듯이 찡그러지셨다. 예기치 않았던 일이다. 아무 감각도 모르시리라고 믿었는데 거기 표정이 움직일 때에, 나는 무슨 거대한 무서운 물건을 본 듯이 소름이 끼쳤다.

연하여 발을 만져도 보았다. 아까의 경험으로 발이 먼저 식는 것을 알았는지라, 끊지 않고 발을 한 사람은 잡고 있었다.

체읍, 읍열, 병태가 급변하리라고는 아무도 예기치 못했던 바이므로 사후 (死後)에 대한 심적(心的) 준비가 없던 우리는, 어머님이 단 한 번이라도 눈을 다시 뜨시고 우리를 한 번 더 보아 주시기라도 바랐다. 남기고 싶은 말씀이라도 계시련만 이대로 지나가다 그냥 몸이 식어 버리시면 그렇게 야속한 일이 어디 있으랴.

무겁고 가슴 저린 시간은 흐르고 그냥 흘러갔다. 세시, 네시, 다섯시, 꺼질 듯한 괴로운 침묵 아래 환자의 숨소리만 그냥 규칙적으로 계속될 뿐이었다.

시간은 따지자면 주사를 놓은 지 칠팔 시간 ─ 약의 효과의 지속 시간을 인젠 다 지낸 셈이다. 최후의 순간을 기다리는 공포 때문에 우리의 마음은 커다란 바위에 눌린 듯이 아팠다.

간호부가 들어 왔다.

간호부는 예에 의지하여 (例) 기계적으로 맥과 열과 호흡을 본 뒤에, 손을 환자의 어깨 아래로 넣어서 덜컥덜컥 들추었다.

이때의 심적 공포를 어떻게 형용할까. 인젠 최후로다 하는 단 한 가지의 생각이었다.

번쩍?

환자의 눈은 뜨였다. 공포에 위압된 눈자위였다. 그 눈으로 몇 번을 두리번두리번 눈알을 구을리었다. 어디서 보시는지 초점은 무한한 먼 곳을 보시는 모양으로, 지향 없이 몇 번 눈알을 구을리신다. 그러나 그 주위에 있는 우리의 얼굴들이며 전등이며 보시지도 못하시는 모양이었다.

“아마.”

무슨 기계에서 울려 나오는 듯한 기괴한 소리까지 내셨다. 그런 뒤에는 다시 눈을 감으셨다. 걸그렁걸그렁. 아까와 마찬가지로 기막히는, 괴로운 숨소리지만 다시 이방의 정숙을 깨뜨릴 뿐이었다. 그 가운데에서 우리들은 한결같이 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아침, 날이 밝는 것과 동시에 우리들의 공포의 예기에 반하여 어머님은 다시 정신이 드셨다. 눈을 번쩍 뜨시며,

“나 물 좀 다오.”

하실 때 우리는 환희 때문에 가슴이 터질 듯하였다. 급히 청하여 온 의사는 진찰을 하여본 뒤에, 어젯밤의 선고를 취소하였다.

환자가 임종에는 다시 잠시 정신이 드는 일이 흔히 있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그 입술의 빛은 역시 창백하다. 그러나 이 환자는 입술에도 홍조가 있으니 어젯밤 선고는 잠시 보류한다는 것이었다.

여덟시쯤 조반이 들어왔다. 이때 나는 너무도 기괴한 이 병원의 처치에 격노치 않을 수가 없었다. 조반은 역시 고기 구운 것과 고사리나물과 김치였다. 주방 주임을 불러다가 음식이 뉘 처방이냐 물으니 B 주치의의 처방이라 하므로 언제 처방이냐 물으니 오늘 아침 처방이라 한다.

나는 곧 B를 불러오라 하였다. 청진기를 두르며 병실 안에 들어서는 B에게,

“저 음식이 이 환자에게 드리라는 게요?”

격노로 말미암아 숨이 허덕이었다.

“네. 왜 그러시오?”

“그래 이 환자에게 고기, 고사리, 김치.”

“네. 자양분 많아요. 칼로리가 ─.”

만약 이때 매부가 내 등을 얼싸안지 않았더면 나는 이 문명국 여자에게 만행을 가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좀 뒤에 인슐린 주사를 놓으려고 간호부가 들어오기에 나는 놓지 못하게 하였다. 인슐린이라는 약 이름은 처음 듣는 배지만 이상히도 어젯저녁 인슐린 주사를 놓은 지 삼십 분쯤 뒤부터 용태가 급변하였는지라 꺼림칙해서 놓지를 못하게 하였다.

조반 후에 어떤 지인(知人) 의사한테 전화를 걸어서 인슐린이란 어떤 약이냐 물어보고 나는 기절할 듯이 놀랐다. 인슐린은 당뇨병에 쓰는 약인데, 건강한 환자라도 인슐린 주사를 놓고는 즉시 포도당 정맥주사를 놓아서 인슐린과 중화(中和)를 시키지 않으면 심장마비를 일으키는 일이 있으며 쇠약한 환자에게는 위험무쌍하다는 대답이었다.

“왜 이런 병원에 입원했느냐?”

는 나의 힐책에 대하여 누이는 급하고 또 집에서 가깝기 때문에 부득이 여기 입원케 되었다 한다.

인제라도 다른 병원으로 가고 싶었다. 저녁때만 되면 이 병원 의사들은 모 두 삑삑이 놀러 나가고 당직의사까지 없어서, 위급한 일이 생기면 발을 동동 구르면서 당할 수밖에 없을 것을 어젯저녁의 일로 짐작이 가는 위에, 이런 무지스런 처방으로써 환자를 취급하는 이병원이 차차 무서워졌다.

그러나 이 위독한 환자를 어떻게 움직이나. 어머니에게 대한 자식의 욕심으로 아직도 이 환자가 다시 회복할 날을 기다리고 있던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래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사후에 대한 준비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날 저녁으로 임종을 보라고는 우리는 뜻도 안 하였다. 우리의 욕심도 또한 그다지 적다 할 수는 없었다.

한 시간 앞의 일도 알지 못하는 인생의 일원(一員)인 우리는 그 날 진일을 비상한 긴장 가운데서도, 비교적 무심히 보냈다.

어머님의 용태가 어제보다 변한 것은 단 한가지, 어제까지는 몸에 이불을 일 분간(一分間)을 그냥 두지 않고 벗어 버리고 하셨는데, 오늘은 이불을 씌워 드리면 드린 채로 가만히 계신 점뿐이었다.

잠시 깨셨다가는 다시 잠드셨다. 잠드셨다가는 다시 깨셨다. 깨시면 오른편 팔만 연하여 붕대로 올라가는 뿐, 다른 동작은 일체로 하시지 않았다.

그날 오후에 잠에서 깨신 어머님은 또 갑자기 퇴원을 하자신다.

“야 퇴원하자.”

우리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볼 뿐이었다. 퇴원을 하나 안 하나, 이것은 과연 큰 문제였다. 만약 쾌차될 가망이 절대로 없다 하면 이 간절하신 부탁을 거역치 못할 일이다. 그러나 만에 일이라도 천행을 기다리고 있는 우리는 지금 위독하신 어머님을 병원 밖으로 모셔내갈 수가 없었다. 미상불 어머님께서 당신이 다시 회복할 가망이 없으므로 잘 알고 하시는 말씀이겠지마는 우 리의 생각은 또한 그렇지 못하였다.

“오늘 저녁이나 내일쯤 꼭 퇴원하지요.”

우리는 이렇듯 여전히 거짓말을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러매 어머님의 얼굴에는 분명히 낙망의 표정이 나타났다. 어머님은 자유로이 구을리기도 힘든 눈동자를 겨우 구를려서 내 누이 편을 보았다.

“깍지 크넝 줘라.”

“네?”

“깍지 크넝 줘!”

“껍질을 그냥 둬요? 무슨 껍질?”

“크넝 줘! 깍지!”

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는 대화의 가운데를 나는 뛰쳐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네, 다 알았어요. 걱정 마세요.”

그리고는 누이에게 향하여는 아마 무슨 실과를 잡숫는 환각이라도 보시는 모양이라고 웃어 버렸다.

그러나 나의 마음은 산산히 흩어졌다. 얼마나 마음에 계신 일이관대 이런 위독한 병실에서 그 말씀을 또 꺼내시나. 그리고 그 말 한마디를 하시기 힘 들어하는 어머님의 이 말씀을 알아듣고도 그냥 삭여 버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더욱 가슴이 탔다.

내 말을 들으시고 어머님은 더 말씀하시기가 싫으신지 그만 다시 눈을 감으셨다. 그리고 이 말씀이 어머님의 육십칠 년이라는 짧지 않은 일생의 마지막 말씀이었었다.

그날 저녁 우리는 병원에서 저녁을 먹었다.

병원에서 멀지 않은 어머님 계시던 댁에 가서 먹어도 심상할 듯하였지만 왜 그랬는지, 유난히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병원에 저녁을 가져다가 먹기로 하였다.

병원 포치에서 저녁을 먹은 뒤에 숭늉도 마시는 듯 마는 듯 다시 병실 안으로 들어와 보니 어머님은 그냥 주무시고 주무시는 어머님의 입에 간호부가 무슨 약을 따라 넣고 있었다.

보니 포도당액인 듯하였다.

“포도당이요?”

“예.”

“인슐린 주 사놨소?”

“예.”

나는 가슴이 철석 하였다.

인슐린 주사를 왜 또 놓았느냐고 간호부를 책망할 만한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간호부가 약을 숟갈로 따라 넣지만 입도 잘 벌리시지 못하고, 약을 잘 넘기시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차차 내 눈이 아득하여졌다. 포도당을 받기 편리하게 하기 위하여 손으로 어머님의 입을 열고 있지만, 어서 맥박을 보고 열기를 보고 싶기 때문에 약을 못 넘기시는 것이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매부가 들어왔다.

뒤따라 누이가 들어왔다.

그때야 약은 겨우 마지막 숟갈을 떠넣었다. 약을 다 드리고 간호부가 돌아 나갈 때에 나는 어머님의 맥박을 잡으려고 입술에서 손을 떼었다.

그때에 어머님의 호흡 소리가 뚝 끊쳤다.

“야 ─ 이게 ─.”

너무도 의외의 일에 벼락같이 이렇게 고함을 지를 때에 몇 초간 끊쳤던 숨이 다시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이 들이켰다 내쉰 숨이 어머님의 마지막 호흡이었다.

누이의 급보에 문밖에 있던 형수와 동생이 병실로 뛰어들어올 때는 어머님은 육십칠 년간의 최후의 호흡을 끝내시는 때였다.

주사 ─ 주사 ─ 주사 ─. 오륙 회의 주사도 인제 효력을 나타내지 못하였다. 어머님의 건강하시던 체력은 제일회의 인슐린은 정복을 하였지만, 그때 에 기운을 너무 쓰셨기 때문에 제이회의 인슐린은 당하지 못하셨다. 무지한 의사의 그릇된 처방 때문에 인제 단 며칠간이라도 더 살아 계실 어머님은 희생을 당하신 것이다.

병원에서 빈소로 ─ 빈소에서 사 일간 그 뒤 장례 때까지 내 마음을 늘 괴롭게 하고 좀 하면 눈에서 눈물이 흐르게 한 것은 어머님께 대한 나의 불효의 추억이었다. 비록 끼니를 건너신다든가 하는 일까지는 맛보지 않으셨지 만 말년(末年)을 경제적으로 불안하신 가운데 보내시게 하여 백발이 성성하신 어머님으로 하여금 마음고생을 하시게 한 그 나의 죄과(罪過). 더구나, 이 아들을 노여워하시거나 미워하시지 않고, 도리어 임종에까지 사십이 가까운 아들을 걱정하시며 떠나시게 한 그 점을 생각하면 가슴이 우기어 내는 듯하였다.

이 어머님께 대하여 마음으로는 (남에게 지지 않는 정성을 가졌건만) 겉으로는 쑥스러워 보여서 나타난 효도도 드려 보지 못하였다.

인제 내 생활이 펴기만 하면 그때 모셔다가 효도를 드리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내 생활이 필 가망도 보이기 전에 어머님은 불귀의 객이 되셨다.

평양 역두에서 동생들의 전송을 받으며 다시 경성으로 돌아올 때 나는 남 의 눈도 개의치 않고 기차에서 울었다.

칠십이 가까우신 어머님의 춘추가 부족함이 없고 사십이 가까운 내가 어머님 그릴 나이가 아니언만, 마음속에 허공을 느끼며 나는 울고 울었다.

어머님이 떠나신 지 삼사 삭(朔)이 지난 지금도 때때로 장래의 안정된 생활을 몽상(夢想)하다가도 그때 이 안정을 기뻐하여 주실 어머님은 인젠 없으시다는 생각을 하면 무엇인지 형용할 수 없는 적막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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