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단 30년의 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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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12월 스무닷샛날 밤이었다.

일본 동경 本鄕[본향]에 있는 내 하숙에는 나하고 朱耀翰[주요한]하고가 화로를 끼고 마주 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파우리스타의 커피 시럽을 진하게 타서 마시면서 그날 저녁(한두 시간 전)에 동경 유학생 청년회관에서 크리스마스 축하회라는 명목으로 열렸던 유학생들의 집회에서 돌발된 사건 때문에 생긴 흥분이 아직 생생하게 남아서 그 이야기를 중심으로 이야기에 꽃이 피었다.

한국이 일본에 병합된 지 겨우 8, 9년, 아직 그 날의 원통함과 분노가 국민에게 생생하게 남아 있던 시절이라, 더우기 선각자요, 지도자로 자임하고 있던 유학생들의 마음에는 애국지사적 기분이 맹렬하게 불타고 있었으며 ‘한국의 독립은 우리의 손으로’라는 포부가 유학생들의 마음에는 깊이 새겨져 있던 시절이었다.

그러한 때에 歐洲大戰[구주대전]이 끝나고 미국 대통령 윌슨이 인류에게 민족자결주의라는 것을 제창하였다. 한 개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의 자유의사로서 결정될 것이지 어떤 강력한 국가의 실력으로 좌우될 것이 아니라는, 그러니까 어떤 국가로서 그 나라의 실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다른 강국에게 먹히운 자가 있다면 그런 무리한 실력주의는 배제하고 그 민족의 자유의사 로서 그 운명을 결정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실력이 부족하여 일본에게 병합된 한국이라, 이 기회에 윌슨 대통령의 제창에 따라서 한국은 마땅히 그 국권을 회복해야 된다는 부르짖음이 동경 유학생(선각자로 자임하는) 새에 부르짖어졌고, 그 날(1918.12.25) 크리스마스 축하를 핑계삼아 청년회관에 집회하여서 거기서 드디어 커다란 결의까지 한 것이었다.

즉 3․1운동의 씨가 그 밤에 배태된 것이었다. 운동을 진행시킬 위원을 선출하고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內地(일본)와 연락할 방도를 토의하고 헤어진 것이었다.

요한과 나는 거기서 헤져서 파우리스타에 들러서 차를 한 잔씩 마시고 커피 시럽을 한 병 사가지고 함께 내 하숙으로 온 것이었다.

처음에는 우리들 새에는 아까의 집회의 이야기가 사괴어졌다. 그 집회에서는 徐椿[서춘]이 우리(요한과 나)에게 독립선언문을 기초할 것을 부탁했었지만, 우리는 그 任[임]이 아니라고 사퇴(뒤에 그것은 春園[춘원]이 담당했다)했었는데 사퇴는 하였지만 내 하숙에서 마주 앉아서는 처음은 자연 화제가 그리로 뻗었었다. 처음에는 화제가 그 방면으로 배회하였었지만 요한과 내가 마주 앉으면 언제든 이야기의 종국은 ‘문학담’으로 되어 버렸다.

“정치 운동은 그 방면 사람에게 맡기고 우리는 문학으로―.”

이야기는 문학으로 옮았다.

막연한 ‘문학담’‘문학토론’보다도 구체적으로 신문학운동을 일으켜 보자는 것이 요한과 내가 대할 적마다 나오는 이야기였다.

이 밤도 우리의 이야기는 그리로 뻗었다. 그리고 문학운동을 일으키기 위하여 同人制[동인제]로 문학잡지를 하나 시작하자는 데까지 우리의 이야기는 진전되었다.

200원이면 창간호를 낼 수 있다. 그리고 매호 100원씩만 추가하면 계속 발간할 수 있다는 요한의 말에 그러면 그 자금은 내가 부담하기로 하고 자금도 자금이려니와 손맞잡고 일해 나갈 동인을 고르자 하여 늘봄(長春[장춘] 田榮澤[정영택]), 흰뫼(白岳 金煥[백악 김환]), 崔承萬[최승만] 등을 우선 내일이라도 찾아가서 동인되기를 권유하고 장차 孤舟 李光洙[고주 이광수]를 끌어넣고 그때는 이 땅에 어찌도 엉성한 지 이 이상 동인 될 만한 인물을 찾아내기조차 힘들었다.

잡지의 이름은 <創造[창조]>라 하기로(처음에는 요한이 <창조>는 종교 내 음새가 있다고 약간 반대하였지만)하고 밝는 날 곧 평양 어머님께 전보쳐서 창간비 200원을 청구하기로 하고, 둘(요한과 나)이서 내 하숙집 자리에 든 것은 새벽 다섯시도 지나서 우유배달 구루마의 소리를 들으면서였다.

잠깐 눈을 붙였다가 일어나서 요한과 나는 하숙에서 함께 조반을 먹고 아 오야마(靑山[청산])의 전영택을 찾으러(동인되기를 청하러) 내 하숙을 나섰 다.

우편국에 들러서 200원 보내달라고 전보를 어머님께 치고 아오야마의 전영 택을 찾아서 함께 김환을 방문하고 다시 최승만을 방문하여 모두 동인되마 는 쾌락을 듣고 요한, 전영택, 나 셋이서 어떤 양식점에 들러서 함께 런치 를 먹을 때, 우리들의 기쁨과 흥분으로 떠드는 이국말 소리에 다른 객들은 놀라는 눈을 우리에게 던졌다.

―이리하여 4천 년, 이 민족에게는 ‘신문학’이라는 꽃이 그 봉오리를 벌 리기 시작하였다.

그 옛날은 모르지만 한문이 이민족의 글로 통용되며 모방 한문학으로 민족 의 문학욕을 이렁저렁 땜질해 오던 이 민족에게 그 ‘문학 갈증’의 욕구에 대응하고자 우리 몇몇 젊은 야심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잃어버린 국권을 회복하려는 ‘3․1운동’의 실마리가 표면화되기 시작한 것 이 1918년 크리스마스 저녁이요, 민족 4천 년래의 신문학 운동의 봉화인

<창조> 잡지 발간의 의논이 작정된 것이 또한 같은 날 저녁이었다.

뿐더러 그 <창조> 창간호가 발행된 1919년 2월 8일은 또한 ‘3․1운동’의 전초인 ‘동경 유학생 독립선언문’ 발표의 그 날이었다.

조선 신문학 운동의 봉화는 기묘하게도 3․1운동과 함께 진행되었다.

그때 내 나이 열아홉― 요한도 동갑으로서 내가 요한보다 한 달인가 두 달 먼저 났다.


민족의 역사는 4천 년이지만 우리의 문학의 유산을 계승받지 못하였다. 우 리에게 상속된 문학은 한문학이었다.前人[전인]의 유산이 없는지라, 우리가 문학을 가지려면 순전히 새로 만들어내는 수밖에는 없었다.

문학 가운데서도 나는 ‘소설’을 목표로, 요한은 ‘新詩[신시]’를 목표 로 주춧돌을 놓고서 그 자리를 골랐다.

문학은 문장으로 구성되는 자이라, 우선 그 문장에서 소설이면 소설용어, 시면 시용어부터 쌓아 나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겨우 30년 전의 일이요, 오늘날은 벌써 소설이며 시에 대하여 그 용어의 스타일이며 본때가 확립되어 있어서 오늘날 소설이나 시를 쓰는 사람은 그 방면의 고심이라는 것은 아주 면제되어 있지만 지금에 앉아서 보자면 평범 하고 당연한 ‘문장’도 처음 이를 쓸 때에는 말할 수 없는 고심과 주저라 는 관문을 통과하고서 비로소 되어진 것이다. 우선 문장의 구어화였다.

<창조> 이전에도 소설은 대개 구어체로 쓰여지기는 하였다. 그러나 그 ‘구어’라는 것이 아직 문어체가 적지 않게 섞이어 있는 것으로서 ‘여사 여사 하리라’‘하니라’‘이러라’‘하도다’등으 구어체로 여기고 그 이 상 더 구어체화 할 수는 없는 것으로 여기었다. 신문학의 개척자인 춘원 이 광수의 소설을 볼지라도 <창조>가 구어체 순화의 봉화를 들기 이전(1919년 이전)의 작품들을 보자면 (「無情[무정]」이며 「開拓者[개척자]」등) 역시 ‘이러라’‘하더라’‘하노라’가 적지 않게 사용되었고, 그 이상으로 구 어체화 할 수는 없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창조>에서 비로소 소설용어의 순구어체가 실행되었다.

‘구어체’화와 동시에 ‘過去詞[과거사]’를 소설용어로 채택한 것도 <창 조>였다. 모든 사물의 형용에 있어서 이를 독자의 머리에 실감적으로 부어 넣기 위해서는 ‘現在詞[현재사]’보다 ‘과거사’가 더 유효하고 힘있다.

‘김 서방은 일어서다. 일어서서 밖으로 나간다’하는 것보다 ‘김 서방은 일어섰다. 일어서서 밖으로 나갔다’하는 편이 더 실감적이요, 더 유효하다 하여 온갖 사물의 동작을 형용함에 과거사를 채택한 것이었다.

<창조>를 중축으로 <창조> 이전의 소설을 보자면 그 옛날 한문소설은 무론 이요, 李人稙[이인직]이며 이광수의 것도 모두 ‘현재사’를 사용하였지 ‘과거사’를 쓰지는 않았다. <창조> 창간호에 게재된 나의 처녀작 「弱 [약]한 者[자]의 슬픔」에서 비로소 철저한 구어체 과거사가 사용된 것이었 다.

또한 우리말에는 없는 바의 He며 She가 큰 난관이었다. 소설을 쓰는데 소 설에 나오는 인물을 매번 김 아무개면 김 아무개, 최 아무개면 최 아무개라 고 이름을 쓰는 것이 귀찮기도 하고 성가시기도 하여서 무슨 적당한 어휘가 있으면 쓰고 싶지만 불행히 우리말에는 He며 She에 맞을 만한 적당한 어휘 가 없었다. He와 She를 몰몰아(성적 구별은 없애고)‘그’라는 어휘로 대용 한 것―‘그’가 보편화하고 상식화한 오늘에 앉아서 따지자면 아무 신통하 고 신기한 것이 없지만 이를 처음 쓸 때는 막대한 주저와 용단과 고심이 있 었던 것이다.

일본말의 ‘違[위]ひなかつた’를 직역하여 ‘틀림없다’‘다름없다’등으 로 처음 쓸 때의 그 어색함도 아직 기억에 생생하다.

‘느꼈다’‘깨달았다’등의 형용사를 갖는 의의와 전연 다른 방면에 활용 하여 재래의 우리말이 표현할 수 없는 특수한 기분을 표현하는 데 사용하였 다. 지금은 ‘느꼈다’‘깨달았다’등이 소설용어로는 보편화되었지만, 처 음 그 어휘를 쓸 적에는 도무지 틀에 맞지 않아서 스스로도 불안에 불만을 느끼면서(즉 이런 ‘느낀다’는 형용사) 쓴 것이었다.

지금 소설이나 시를 쓰는 후배들의 어느 누가 이런 방면의 고심을 하는 사 람이 있을까? 태고적부터 우리말에 이런 소설용어가 있었겠지쯤으로 써 나 아가는 우리의 소설용어―거기는 남이 헤아리지 못할 고심과 주저가 있었고 그것을 단행할 과단성과 만용이 있어서 그 만용으로써 건축된 바이다.

스무 살의 혈기. 게다가 자기를 선각자노라는 어리석은 만용― 이런 것들 이 있었기에 조선 소설용어의 주춧돌은 놓여진 것이다. 그 만용만 없었던들 소설 중에의 주춧돌은 튼튼히 놓여지지 못하고 3․1 전환기를 지내 군웅난립 의 세상을 만나서 소설용어는 혼란 상태에 빠졌을 것이다. 3․1은 우리 민족 의 큰 전환기다. 3․1때에 旣成[기성]이던 사람은 ‘기성인’으로, 3․1 뒤의 사람은 ‘후인’으로, ‘기성인’은 ‘후인’에게 대하여 지도권을 잡았기 에 말이지, 3․1 때에 소설용어에 ‘기성 스타일’이 없었다면 3․1 뒤의 군웅 이 亂生[난생]하여 제각기 자기를 주장하여 천태만상의 소설용어 스타일이 생겨났을 것이다. He며 She에 대해서도, 3․1 후에 어떤 사람은 ‘저’‘저 여자’를 주장하고 어떤 사람은 ‘궐’‘궐녀’를 주장하여 한동안 제 주장 을 고집하였지만, ‘그’라는 용어가 전기에 생긴 것이라 종내 ‘그’로 확 정된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궐’‘궐녀’로 했던 편이 좋지 않을까 싶기도 하지만, ‘궐’이란 용어가 미처 생각나지 않아서 ‘그’로 된 것이다.


<창조> 창간호에 나는 「약한 자의 슬픔」이란 소설을 썼고 주요한은 「불 노리」란 시를 썼다. 그 전해(1918) 4월에 나는 결혼을 하였다. 양력 4월에 결혼을 하였는데 그 음력 4월 8일 석가여래의 탄일에 평양에서는 수십 년래 쉬었던 큰 관등놀이를 하였다.

수십 년 못하였던 것이니만치 호화롭고 굉장하게 하였다.

새로 결혼하고 신혼여행으로 금강산을 돌아서 집으로 돌아오니 관등놀이 다. 처갓집에서는 사위맞이 축하 겸 큰 배를 한 척 구하여 뱃속 잔치 열고, 觀燈船[관등선]에 섞이어 유쾌한 한 저녁을 보냈다.

신혼, 잔치, 관등― 하도 마음이 기뻐 그 관등놀이의 굉장하고 훌륭함을 요한에게 말하였더니 거기서 名篇[명편]「불노리」의 노래가 생겨난 것이었 다. <창조> 창간호에는 요한의 시 「불노리」와 전영택의 소설, 최승만의 희곡, 내 소설 등으로 인쇄는 橫濱[횡빈](요꼬하마)에 있는 복음인쇄소에 맡겼다. ‘복음인쇄소’는 조선 성경을 인쇄한 곳이다. 조선글 활자는 충분 하였지만 직공이 조선글을 모르는 일본인이라, 글자 모양으로 보아서 문선 을 하느니만치 ‘号[호]’자와 못’자‘외’자와 ‘’자 등이 혼동되고 ‘’‘’등 아랫자는 넉넉하지만 ‘깔’‘생’등은 부족한 따위의 불편 이 여간이 아니었다.

자기의 글이 활자화되는 것만도 신통하고 신기한데 그것을 자기의 손으로 교정까지 보노라니 마음의 유쾌 만족은 이를 데 없었다. 자기의 글이 활자 화되고 그 활자화된 글을 또 독자의 손에 들어가기 전에 교정보면서 고치고 싶은 데는 고치기도 하고, 진실로 유쾌한 일이었다. 「약한 자의 슬픔」의 원고(인쇄소에 넘겨서 인쇄하고 되돌아온)는 30년이 지난 지금도 군데군데 좀 먹은 채 내 손에 보관되어 있다.

제2호의 원고가 인쇄소로 넘을 때 창간호의 견본이 우선 왔다. 그리고, 2 월 초여드렛날 그 1천 부가 횡빈서 동경에 철도로 오기로 되어서 그 전날인 이렛날은 흥분되어 어서 명일이 오기를 기다리며 자리에 들었다.

여드렛날은 두 가지의 일이 있다. 하나는 무론 횡빈서 본사(김환의 하숙) 로 도착된 잡지를 보러 본사로 가는 일이요, 또 하나는 이 날 또 유학생의 모임이 청년회관에서 열리는데 거기도 가야 할 것이다. 이리하여 여드렛날 일찌기 일어나선 조반을 채근하여 먹고 막 나서려는데 웬 손이 찾아왔다.

은근히 내미는 명함을 보니 와까마쓰(若松[약송]) 경찰서 형사였다.

눈이 펑펑 내리는 이른 아침의 길을 형사와 동반하여 와까마쓰 경찰서로 갔다.

그 날 조선 여자도 한 사람 와까마스 경찰서로 불리어 취조를 받았다. 金 [김]마리안가 黃愛德[황애덕] 혹은 黃信德[황신덕]인가, 조선 학생 집회에 서 간간 보던 얼굴이었다.

그 여자는 무슨 취조를 받았는지 모르지만 나는 요컨대 <창조> 창간 비용 으로 집에서 200원 갖다가 쓴 것이 학생의 신분으로는 큰 돈이라 무엇에 쓴 것이냐는 것이었다.

분명히 잡지 창간 비용으로 쓴 것이 판명되어 당일로 무사히 석방이 되었 다. 경찰에서 무사히 나와서 아오야마의 본사로 가서 거기서 비로소 유학생 독립선언 발표의 전말을 들었다.

동경 유학생과 일본 경찰의 투쟁의 막은 열렸다. 그로부터 유학생은 청년 회관 혹은 히비야 공원에 집합하여 일본 경찰을 상대로 연일 투쟁을 하였 다. 그 어떤날 히비야 공원에서 집회하였다가 경찰에서 해산을 당하고 몇몇 은 경시청으로 引致[인치]가 되었는데, 다른 10여 명 학생은 곧 다시 석방 되고 나와 李達[이달]이라는 학생이 하룻밤 검속을 당하였다.

그 사건이 <大阪朝日[대판조일]>과 <東京日日[동경일일]> 신문에 보도되어 집에서는 깜짝 놀라서 ‘어머님 병환이 위독하니 곧 귀국하라’전보를 내개 쳤다.

그 전보가 거짓 전보인 줄을 알 까닭이 없는 나는 깜짝 놀라서 주요한을 찾아서 <창조>의 뒷일을 부탁하고 그 날 밤차로 동경을 떠났다. 3월 초하룻 날이었다. 기차가 大阪[대판]을 지날 때에 기차에서 신문을 사서 보니 조선 서는 무슨 사건이 발발되었다.

그러나 큰 사건으로는 알지 않았다. 그 새 10년간 겪은 寺內[사내]와 長谷 川[장곡천]의 무단정치 아래서는 무슨 큰 사건이 일어나리라고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동경서도 그 새 한 것처럼 몇백 명씩 모여서 수군거리다가는 해산당하고 그런 일쯤이 있은 것으로 추측하였다.

下關[하관]서 연락선에 오를 때와 부산서 뭍에 내릴 때에 경계가 좀 심한 것은 느꼈지만 3․1의 그렇듯 크고 웅대하고 장쾌한 사건이 폭발되었으리라고 는 뜻도 안 하였다.

기차에서 비로소 윤곽을 짐작하였다. 뿐더러 이전 같으면 일본인인 기차 전무차장에게 벌벌 떨 시골 노인네가 전무차장에게 무슨 호령을 하는 광경 을 보고,

“아아 민족은 살았구나. 寺內[사내]의 총뿌리로도 민족의 혼은 죽이지 못 하였구나!”

하고 칵 눈물지었다.

기차가 경성을 지나면서 因山[인산] 구경 왔다가 3․1을 겪고 돌아가는 사람 에게서 비교적 정확히 3․1의 웅대한 멜로디를 들을 수 있었다.

기차에서 듣는 감격의 뉴우스에 도취되면서 평양까지 이르러 집으로 들어 갔다.

나는 열다섯 살까지의 소년 시기를 평양에서 지냈지만 친구가 없는 사람이 다. 본시 교제성이 없는 위에,‘나쁜 가정의 아이들과 사괴지 말라’는 교 육방침 아래서 자라니만치 소학교의 동창은 있지만 서로 가정으로 찾아다닐 만한 친구가 없다.

3․1의 국민자숙으로 거리도 쓸쓸하고 친구도 없고 집에 박혀서 책이나 읽을 밖에는 일이 없었다.

그때에 나의 아우가 제 동무들과 謄刷版[등쇄판]으로 격문을 찍어서 밤마 다 시내에 돌리고 있었는데 그 격문의 원고를 하나 초하여 달라 하므로 초 하여 주고 그 때문에 3월 스무엿샛날 경찰에 붙들렸다. 경찰로 감옥으로 꼭 석 달을 지내서 6월 스무엿샛날,

‘6개월 징역, 2개년 집행유예.’

라는 판결을 받고 다시 밟은 세상에 나와서 보니, 인쇄소에 넘기기만 하고 그 뒤를 관계치 못한 <창조> 제2호는 무론 인쇄는 다 되었지만 격변하는 세 태가 어찌될지 예측할 수 없어서 책을 본사에 가려두었다 하며, 본사에는 김환 혼자서 유숙하고 있고 전영택도 귀국해 있었고 주요한도 귀국하여 내 안해와 협력하여 무슨 격문을 하나 꾸며 시내에 돌리고 요한은 上海[상해] 로 피신을 하고, 바야흐로 일어서려던 조선 신문학은 3․1에 봉착하여 정돈상 태로 되어 있었다.

문학운동은 3․1에 봉착하여 동인은 산지사방하고 정돈상태에 있었지만, 시 민생활은 3․1 이전으로 복귀되어 시집갈 이 시집가고, 장가갈 이 장가가고 다시 평온한 원상으로 돌아갔다.

일본 정부는 조선의 3․1사건을 결국 寺內[사내] 총독 무단정치에 대한 반항 이라고 하여 해군대장 齋藤實[재등실]이를 조선총독으로 내보내고 조선에 문화정치를 편다는 것을 선포하였다.

이 齋藤實[재등실]의 문화정치의 배에 편승하여 조선에도 몇 개의 잡지와 민간 신문이 발간되었다. 그리고 출판을 목표로 하는 회사도 생겨났다.

그때 나하고 廉尙燮[염상섭]하고의 새에 논전이 한 번 벌어졌다.

당시에 <창조> 동인이라 하면 조선 문화계의 한 빛나는 존재로 되어 김환 도 <창조> 동인이 된 덕에 동경 유학생 기관 잡지 <學之光[학지광]>의 편집 위원 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위풍(?)으로써 동경 조선인 YMCA의 기관 잡지 <現代[현대]>에 무슨 소설을 하나 썼다. 김환은 자기가 동인관계를 갖 고 있는 <창조>에 자기의 소설을 발표하고자 했지만 내가 그것을 엄금하기 때문에 하릴없이 <현대>에 발표한 것이었다. <현대>는 <창조> 동인인 崔承 萬[최승만]이 편집책임자였다. 그런데 그 <현대>에 실은 김환의 소설에 대 하여 염상섭이 비평문을 써서 <현대> 잡지에 보냈다. 그 염상섭의 비평문 가운데는,

‘내가 이전의 무슨 소설을 써서 <학지광>(동경 유학생 기관지)에 기고하였 더니 그 <학지광> 편집위원인 김환이 내 소설을 沒書[몰서]하였기에 김환은 얼마나 소설을 잘 쓰는 사람인가 했더니 이번 <현대>에 난 것을 보니 이 꼴 이다.’

하는 서두로 김환의 소설을 욕하였다.

그 서두문은 즉 감상문이라 편집원 최승만이 애전에 삭제하고 그 원문만을

<현대>에 실어주고 그 사정을 내게 편지로 알리었다.

나는 그때 문학에 대하여 청교도 같은 결백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라(그러 니만치 김환의 소설은 <창조> 지상에는 싣지 못하게 한 것이다) 염상섭의 이 개인 공격적 비평을 문학의 모독이라 보아 성냈다. 그리고 상섭이 봉직 하고 있는 창간 초기의 東亞日報[동아일보]에 염상섭의 비평 태도를 공격하 는 글을 보냈다.

한 개 작품에 대하는 비평가는 그 작품의 작자에게는 이래라 저래라 할 아 무 권한도 없고, 독자에게 대하여 그 작품의 호불호(즉 감상방법)를 설명하 는데 그치는 것이 마치 활동사진에 변사의 지위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 번에 염상섭이 김환의 소설을 비평한 것은,

‘이전 <학지광> 편집원 시대에 운운.’

하여 과거의 원혐을 들고 나왔으니 이는 불순한 비평이요, 따라서 廉[염]의 이번의 태도는 좋지 못하다는 나의 논지였다.

거기 대하여 염상섭은 같은 동아일보 지상에 대답하여 작품 비평가는 범죄 에 대한 재판관같이 그 작품을 쓰게 된 동기며 원인까지도 추궁할 권한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 논전이 계속되는 그동안에 염상섭, 吳相淳 [오상순], 黃錫禹[황석우] 등이 ‘동인제’로 <廢墟[폐허]>라는 잡지를 창간하였다.

이리하여 조선에는 <창조>에 대하여 <폐허>가 생기고 ‘창조파’에 대한 ‘폐허파’가 생기게 되었다.

<창조>에도 이광수가 동인으로 가입하고, 吳天錫[오천석]이 들고 李一[이 일]이 들고, 새로 동인들이 늘면서 속간을 시작하였다. 그때 <창조>는 과연 문학청년들의 애모하는 푯대였다. <창조> 지상에 글 한 번 실어 보는 것을 큰 영예로 알았다. 朴×胤[박×윤]이 자기의 소설을 한 번 <창조>에 싣게 해 달라고 그 교환 조건으로 <창조> 한 호의 발간 비용을 부담하겠다는 소 청을 한다고 김환이 누차 조르므로 제5호인가 6호인가의 한 호 발간비를 부 담시키고 박×윤의 글을 한 번 실은 일이 있다. 또 方×根[박×근]도 그런 사정으로 한 번 싣기로 하였는데 그다지 신통치도 않은 소설을 두 회분을 써 왔으므로 하반부는 몰서하여 버렸다.

나의 그때의 작품도 돌아보면 하나도 신통한 것이 없었지만 자기 딴에는 걸작이라는 신념으로 썼다. 더우기 ‘그’라는 대명사며 순구어체와 과거사 의 ‘소설용어 방침’이 후배들에게 그냥 답습되어 조선 소설용어의 기준이 되는 것을 바라볼 때 스스로 만족감을 금할 수 없었다.

당시 조선문학을 대표하는 두 파― <창조>와 <폐허>는 그 칭호가 꼭 그들 의 길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창조파’는 다 제 밥술이나 먹는 집 자제들로서 생활이 안정되니만치 자 연 창조적이요 명랑하고 생기발랄하고 용감하였다.

거기 반하여 ‘폐허파’는 폐허적 퇴폐 기분에 싸이어서 침울하고 암담하 고 보헤미안적 생활을 경영하였다.

이 ‘폐허파’의 퇴폐적 기분을 싫어하여 <폐허> 동인이던 金岸曙[김안 서], 金惟邦[김유방], 金彈實[김탄실] 등 몇 사람이 <폐허>를 탈퇴하고 <창 조>로 옮겨 왔다.

그런데 ‘폐허파’에는 스스로 결함을 내포하고 있었다. 근대문학을 대표 하는 花形[화형]은 ‘소설’인데 ‘폐허파’에는 소설작가가 없었다. 閔泰 瑗[민태원](牛步[우보])이 <폐허>의 소설을 대표하는 작가인데 그는 통속작 가로는 3․1 이전의 사람이지만 끝끝내 통속의 역을 벗지 못했고, 오상순 (시), 황석우(시), 金萬壽[김만수](철학), 염상섭(평론) 등등으로 소설작가 가 없었다. <창조>에는 이광수가 있고 전영택이 있고 내가 있고 하여 조선 소설계를 대표하는 작가가 전부 모였고, 시로는 요한이 있고 김안서가 있고 오천석이 있고 하여 신시의 수령이 다 모여서 조선 문단은 <창조>로 대표하 였었다.

게다가 '창조파'에서 세운 소설용어 스타일이 조선 소설의 표준(이광수도 과거에 쓰던 문어체의 잔재를 아주 청산하였다)이 되었는지라, <창조>의 광 휘가 찬연히 빛나는 반비례로 <폐허>는 음울한 생명을 유지하다가 그나마 제2호를 간신히 발행하고는 폐간하여 버렸다.


이리하여 <창조>에서 엄이 돋아 오늘에 이르기까지 30년, <창조>를 일으켜 서 키운 주요한, 전영택, 내가 아직 그냥 살아서 이 문단의 일원으로 아직 그냥 움직인다 하는 것은 희유한 경사라고 할 수도 있다. 게다가 당년 <폐 허>의 일원이던 염상섭이 소설가로 전향을 하여 그의 건필을 그냥 두르는 것은 이 또한 큰 경사이다.

복받은 조선 문단― 그 창시 때의 사람들의(폐허파와 창조파) 중요한 멤버 는 30년이 지낸 아직도 그냥 건재해 있다 하는 것은 인류 역사에도 쉽지 않 을 경사이다.

<창조> <폐허>에 뒤달려 생겼던 바 <白潮[백조]>가 중요한 멤버의 거지반 을 저 세상으로 보낸 것(羅稻香[나도향], 玄憑虛[현빙허], 洪露雀[홍로작], 金浪雲[김낭운], 李相和[이상화], 盧子泳[노자영], 그 밖 여러 사람이 죽었 다)처럼 <창조> <폐허>의 원로들도 죽었다면 오늘날의 조선 문단은 얼마나 쓸쓸하랴.

이 희유의 경사를 스스로 축하하는 뜻으로 내가 과거 30년간 걸어온 문단 의 자취를 더듬어 보아서 그간 나의 주변에 일고 잦은 에피소드, 일화 등을 차례로 적어 보려 한다.

때때로 현재 살아 있는 사람의 명예에 관계된 일도 없지 않을 것이고, 쓰 기 곤란한 일도 없지 않을 것이나 내가 죽으면 무덤 속에 감추어져 버릴 것 이 아까와서 모든 고장을 무릅쓰고 적어 보려 한다.

독자도 그 점을 미리 양해해 주시기를 바란다.

文學[문학]과 나[편집]

나는 어찌하여 세상에 하고 많은 학문 중에서 문학― 문학 가운데서도 소 설을 목표로 길을 잡았는가? 그리고 또 어떤 길을 밟아서 1919년 (<창조> 잡지 발간)의 金東仁[김동인]까지 이르렀는가?

나의 아버지가 나를 일본 동경으로 공부하러 보낼 때는 당년의 세상 보통 의 어버이가 자식에게 촉망하는 바와 마찬가지로 장차 변호사나 의사가 되 기를 희망하였다. 이론 잘 캐고 경우 잘 따지는지라, 용한 변호사가 되리 라, 어려서부터 화학, 물리 실험에 능하였으니 의학자로도 용한 수완을 보 이리라, 하여서 의사나 변호사 되기를 기대하였다. 열다섯 살의 어린 몸으 로 청운의 뜻을 두고 만리 밖 외국에 공부하러 떠나는 나도 장래의 목표를 의학이나 법률에 두었다.

동경에서 주요한이 나보다 먼저 와 있었다. 요한은 그의 아버지가 동경 조 선인 유학생 선교목사로 동경에 주재하게 된 관계로, 아버지를 따라 나보다 1년 전에 동경에 와 있던 것이다.

본국서도 같은 소학교(중등학교의 전신인 예수교 소학교)에 다녔었다. 동 경의 요한을 만나니 요한의 말이 자기는 장차 ‘문학’을 전공하겠다 한다.

법률학은 분명 변호사나 판검사가 되는 학문이다. 의학은 분명 의사가 되 는 학문이다. 그러나 문학이란 장차 무엇이 되며 무엇을 하는 학문인지, 어 떻게 생긴 학문인지, 그 윤곽이며 개념조차 짐작할 수 없는 나는 이 주요한 이 나보다 앞섰구나 하였다. 소년의 자존심은 요한보다 뒤떨어지는 자기 자 신이 스스로 불쾌하고 부끄러워서 학교에 입학하는 데도 明治學院[명치학 원]을 피하고 東京學院[동경학원]에 들었다. 요한은 1년 전에 학교에 들었 는지라 그때는 벌써 명치학원 중학부 2학년이었다. 나는 새로 입학하려면 1 학년에 입학하게 되는지라 1년 뒤떨어진다. 같은 명치학원에서 요한보다 하 급생 노릇하기가 싫어서 동경학원 1학년에 입학을 한 것이다. 그런데 이듬 해 동경학원은 왜인지 폐쇄되며 재학생들은 명치학원과 靑山學院[청산학원] 에 각각 분배 전학시키는 바람에 나는 저절로 명치학원으로 배정되어 요한 이 3학년 때에 나는 명치학원 2학년이 되었다.

그런데 그 동경학원 시절, 그러니까 아직 중학 1학년 때에 영작문 시간에 숙제로서, 1년생 정도의 영작문 한 편씩이 과제되었다. 나는 그때 영어에 매우 취미를 붙이던 때라, 내가 아는 영어 지식의 최선을 다하여 영어 노래 를 하나 지었다. 지금은 무론 그 내용도 잊었거니와 스펠까지 잊었지만 ‘튕클튕클, 리틀 스타’로 시작하여 몇 줄의 노래를 옥편을 뒤적이고, 참 고서를 뒤적이어 만들어서 내놓았더니, 선생이 보고 네가 지은 것이냐 묻기 에 내가 지은 것이라고 하였더니 너는 장차 훌륭한 문학자가 되겠다고 칭찬 하여 준다.

나는 선생의 칭찬을 듣고 이런 것이 문학인가 하여 문학의 윤곽을 짐작했 다고 스스로 믿었다.

그러나 문학자가 어떤 것인지, 문학자란 무엇을 하는 것인지, 전혀 짐작도 못하는 나는 역시 장래 목표는 변호사나 의사에 두었었다.

동경학원은 이찌가야(市谷[시곡]) 육군사관학교 근처에 있었다. 하학하고 등에 조그만 가방을 진 학생(나는 열다섯 살 때까지는 유난히 작았다)은, 일부러 걸어서 아오야마(靑山[청산]) 연병장 뒤로 휘돌아서 연병장 어구에 있는 찻집에서 모찌(혹은 야끼이모) 2전어치를 사서 먹으면서 한가로이 나 까시부야(中澁谷[중삽곡]) 하숙까지 돌아오고 하였다. 공일날은 빠지지 않 고 아사쿠사(淺草[천초])에 영화를 보러 갔다. 그때는 제1차 구주전쟁이 시 작된 해요, 아메리카의 영화가 차차 불란서며 이태리 영화를 압도하여 세력 을 잡기 시작하는 초기이며, 탐정활극이 영화계의 주조였으며, 몇십 권짜리 연속 대장편이 등장하려는 무렵이요, 채플린의 한 권 두 권짜리 폭소 희극 이 영화계에 데뷰하는 무렵이요, 일본은 大正[대정] 난숙기의 꽃시절이었 다.

한 조그만 이름 없는 조선 소년은 공일날마다 아사쿠사 영화관(제국관, 전 기관 등의 양화 전문관만 다녔지 일본 영화는 보지 않았다. 일본 영화는 아 직 무대극의 구투 그대로 오노에<尾上松之助[미상송지조]> 독무대 시절이 며, 아직 여배우라는 것은 일본에 없던 태고시절이었다)에서 채플린에게 허 리를 끊기며 혹은 하리 핫취에게 박수를 보내며, 그리고 돌아올 때는 나까 미세 뒤에서 10전짜리 덴동(てんどん―튀김덮밥)에 혀를 채며 영화의 탐정 극에 공명과 고혹을 느낀 소년은 차차 탐정소설을 읽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어떤 때 소년문학문고로 「비밀의 지하실」이라는 책이 눈에 띄어, 그 제목이 탐정소설 같아서 사다가 읽어 보았다. 탐정소설이 아니었다. 코 롤렝코든가 누구든가 잊었지만, 노서아의 어떤 대가의 소설을 번역한 것이 었었다.

탐정소설은 아니고, 내용에 그다지 엽기적으로 끌리는 대목은 없지만, 그 작품 전체에 나타나 있는 침울한 맛과 무게와 힘은 분명히 어린 나의 마음 을 움직였다. 탐정소설은 아니고도, 그 작품에 끌렸다. 소설문학문고 전 7 권을 모조리 사다 읽었다.

탐정소설 아니고도 마음 끌리는 소설이 있구나, 비로소 소설에 흥미와 관 심을 가지게 되었다. 아직 연애라든가 남녀 관계에는 흥미를 모르는 소년이 었지만, 탐정이야기 아니고 연애이야기 아니고도, 사람의 마음을 끄는 이야 기가 있다는 것은 어린 나에게는 큰 새 지식이었다. 그것이 ‘문학’이라는 것도 어언간 알았다.

―이리하여 차차 문학이라는 것을 알기 시작하였다.

그보다 아래 들기 싫어서 서로 좀 소원하게 되었던 요한과 다시 가까이 사 괴고, 문학을 토론하고, 차차 문학으로의 정열이 높아 갔다.

동경 명치학원이란 학교는 조선 사람과는 매우 인연 깊은 학교다. 명치학 원 조선학생 동창회 명부를 보자면 朴泳孝[박영효], 金玉均[김옥균] 등이 그 첫머리에 씌어 있고, 내가 그 학교에 재학할 동안에도 白南薰[백남훈]이 5학년에 재학하였고, 文一平[문일평], 정광수도 명치학원 출신이요, 화백 金觀鎬[김관호]의 그림이 나 재학할 때도 그 학교 담벽에(김관호도 명치학 원 출신이다) 장식되어 있었고, 현재의 조선을 짊어지고 많은 일꾼이 명치 학원을 거치어 사회에 나왔다.

일본서도 시마자끼 도오손(島崎藤村[도기등촌]) 이하의 많은 문학자가 명 치학원 출신이라, 따라서 문학풍이 전통적으로 학생들에게 흐르고 있었다 (그 학교의 자랑인 교가는 시마자끼의 지은 것이다). 그러는 만치 3,4학년 쯤부터는 그 학년 학생끼리의 회람잡지가 간행되고 있었다. 3학년 때에 나 도 3학년 회람잡지에 소설 한 편을 썼다. 지금은 다만 썼었다는 기억밖에는 무슨 소리를 썼는지 전혀 생각나지 않지만, 이 일본문으로 쓴 소설이야말로 나의 진정한 처녀작이다.

음울하고 교제성 없기 때문에 너 일본말 아느냐, 교수하는 말 알아듣느냐 는 주의까지 듣던 소년이 일본글로 소설까지 썼다고 동창(일본애)들은 아직 껏 내게 가지고 있던 생각을 다시 고쳐 먹고 문학담을 하자고 하숙으로 찾 아오는 동창이 꽤 여럿이 생겼다. 그리고 소년다운 열정과 희망으로 너는 장차 조선의 소설가가 되어라, 나는 일본의 소설가가 되마, 그리고 조선과 일본이 서로 문학으로 교류하며 끝까지 문학 교제를 하자고 굳게 손까지 잡 았던 동무도 여럿이다.

지금은 이름까지 잊어버린 그때의 동무들― 과연 그들은 그때의 희망처럼 문학으로 출세를 하였는지? 그때는 일본도 아리시마 다께로오(有島武郎[유 도무낭]), 기꾸찌깡(菊池寬[국지관]), 아꾸다가와 류노스께(芥川龍之介[개 천용지개]) 등도 출세하기 이전이요, 기꾸찌의 스승인 나쓰메(夏目漱石[하 목수석]) 등의 시절이었다.

나는 그때 소년다운 야심이 만만하던 시절이라, 더우기 나의 아버지가 나 를 기르실 적에 唯我獨尊[유아독존]의 사상을 나의 어린 머리에 깊이 처박 았으니만치 일본문학 따위는 미리부터 깔보고 들었으며 빅토르 위고까지도 통속작가라 경멸할이만치 유아독존의 시절이었다. 따라서 일본 동창 아이들 과 문학담을 하면서도 너희 섬나라〔島國[도국]〕인종에게서 무슨 큰 문학 생이 나랴 하는 생각은 늘 속에 품고 있었다.

레오 톨스토이야말로 나의 경모하여 마지않는 작가였다. 「전쟁과 평화」 며 「안나 카레니나」등에 나타난 그 귀신 울릴 만한 기묘한 사실 묘사뿐 아니라 ‘全[전] 톨스토이’를 경모하는 것이었다. <창조> 몇 호엔가에 그 런 뜻의 글도 썼거니와 그때의 나의 문학관 내지 예술관은 대략 이러하였 다.

<창조>에 쓴 나의 예술관의 대의― ―대체 사람이란 동물은 하느님의 만든 세계에 만족치 않는다. 자연계에 아 름답고 훌륭한 ‘꽃’이라는 게 있는데도 불구하고 제 손끝으로 제 재간으 로 그림으로든 조각으로든 꽃을 모방하여 만들고(그러니까 따라서 자연계의 꽃과 달라서 빛깔의 아름다움도 부족하거니와 냄새도 없고) 이 초라한 복제 품을 좋아한다. 우수한 ‘자연품’보다도….

제 손으로 만든 것이 자연계의 것보다 아무리 너절하고 초라할지라도 자연 계만에 만족치 못하고 제 손으로 복제하여 그것을 좋아하는 것이 사람의 심 정이다.

이것이 즉 예술이다. 자연계를 모방하여 음향으로 복제한 것이 음악이요, 그림이나 조각 등으로 복제한 것이 문학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자기가 창 조한 세계’―이것이 예술이다.

이런 관점으로 노서아의 두 큰 작가(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를 비교해 볼 때에 ‘사랑의 천사’며 성자라는 존경을 만인에게 받는 도스토예프스키 보다 인도주의의 강독자요 폭군이란 평을 받던 톨스토이가 훨씬 더 ‘내 세 계’를 명료하게 창조해 가지고 그 ‘자기 세계’를 마음대로 조종하였다.

이런 의미로 톨스토이가 도스토예프스키보다 예술가로 더 승하다….


이런 의미로 우선 톨스토이를 예술가로 경모하고 지엽적으로는 그의 섬세 하고 부진한 사실 묘사와 소설의 기술적 수완에 경모하였다.

나의 작풍이 톨스토이를 모방하든가 톨스토이의 영향을 얻은 점은 없지만 그것은 민족성이나 환경이나 교양의 차이 때문이지 톨스토이라는 인격은 내 게 큰 영향을 주었다.

文學[문학] 出發[출발][편집]

1918년 연말 <창조> 잡지를 간행하기로 작정하고 그 창간호에 실으려고 소 설을 쓰려 원고지 앞에 앉기 이전에는 명치학원 중학부 재학때 3학년생 회 람 잡지에 일본글로 소설을 한편 써 본 경험밖에는 원고Tm기에 전력이 없었 다.

우리가 간행하는 잡지이며, 틀림없이(몰수당할 근심 없이) 공개될 글이라 하고 보니 덜컥 겁이 앞선다.

과거에도 머리 속으로는 소설을 구상도 해보았고 대목대목 상세하게 꾸미 어도 본 일이 있기는 하지만 정식으로 붓을 잡고 원고지 앞에 앉아본 전력 이 없느니만치 마음이 떨렸다.

더우기 과거에 혼자에 머리 속으로 구상하던 소설들은 모두 일본말로 상상 하던 것이라, 조선말로 글을 쓰려고 막상 책상에 대하니 앞이 딱 막힌다.

‘가정교사 강엘리자벳은 가리킴을 끝내고 자기 방으로 들어왔다.’


이것이 나의 처녀작 「약한 자의 슬픔」의 첫머리인데 거기 계속되는 둘째 구에서부터 벌써 막혀 버렸다.

순‘구어체’로 ‘과거사’로― 이것은 기정 방침이라 ‘자기 방으로 돌아 온다’가 아니고 ‘왔다’로 할 것은 예정의 방침이지만 거기 계속될 말이 ‘かの女[여](그녀)’인데 ‘머리 속 소설’일 적에는 ‘かの女[여]’로 되 었지만 조선말로 쓰자면 무엇이라 쓰나? 그 매번을 고유명사(김 모면, 김 모, 엘리자벳이면 엘리자벳)로 쓰기는 여간 군잡스런 일이 아니고 조선말에 적당한 어휘는 없고….

이전에도 막연히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본 일이 있다. 3인칭인 ‘저’

라는 것이 옳을 것 같지만 조선말에 ‘그’라는 어휘가 어감으로건 관습으 로건 도리어 근사하였다. 예수교의 성경에도 ‘그’라는 말이 이런 경우에 간간 사용되었다. 그래서 눈 꾹 감고 ‘그’라는 대명사를 써버렸다.

이때에 있어서 ‘일본’과 ‘일본글’‘일본말’의 존재는 꽤 큰 편리를 주었다. 그 어법이며 문장 변화며 문법 변화가 조선어와 공통되는 데가 많 은 일본어는 따라서 선진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모든 일을 신중히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니, 소설가의 소설에 쓴 용어가 그 나라 국어에 작용하는 힘이 지대하여 소설에 쓰인 용어가 시민의 새에 ‘反語[반어]’로 화하는 것이 꽤 많은지라, 그러니만치 책임 없는 문 장을 함부로 써 던질 수도 없는 노릇이다.

소설을 쓰는 대 가장 먼저 봉착하여― 따라서 가장 먼저 고심하는 것이 用 語[용어]였다. 구상은 일본말로 하니 문제 안 되지만, 쓰기를 조선글로 쓰 자니, 소설에 가장 많이 쓰이는 ‘ナツカシク’‘一[일]ヲ感[감]ヅタ’‘一 [일]二[이]違[위]ヒナカツタ’‘一[일]ヲ覺[각]エタ’같은 말을 ‘정답 게’‘을 느꼈다’‘틀림(혹은 다름)없었다.’‘느끼(혹 깨달)었다’등으로 ― 한 귀의 말에, 거기 맞는 조선말을 얻기 위하여서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하였다. 그리고는 막상 써 놓고 보면 그럴듯하기도 하고 안 될 것 같기도 해서 다시 읽어 보고 따져 보고 다른 말로 바꾸어 보고 무척 애를 썼다. 지 금은 말들이 ‘회화체’에까지 쓰이어 완전히 조선어로 되었지만 처음 써 볼 때는 너무도 직역 같아서 매우 주저하였던 것이다. 더우기 나는 자라난 가정이 매우 엄격하여 집안의 하인배까지도 막말을 집안에서 못 쓰게 하여 어려서 배운 말이 아주 부족한 데다 열다섯 살에 외국에 건너가 공부하니만 치 조선말의 기초 지식부터 부족하였고 게다가 표준어(경기말)의 지식은 예 수교 성경에서 배운 것뿐이라, 어휘에 막히면 그 난관을 뚫기는 아주 곤란 하였다. 썩 뒤의 일이지만 그때 독신이던 나더러 염상섭이 경기도 마누라를 아내 삼으라 권고한 일이 있다. 조선어(표준어)를 좀더 능란하게 배울 필요 상 스승으로 경기도 출신의 아내를 얻으라는 것이다. 지금 소설을 쓰는 사 람이 맛보지 못하는 난관들이었다.

또 前人[전인]도 겪지 않은 고생이었다. 전인이 춘원이거나 菊初[국초]거 나 다른 사람들도 다 그저 순화 못한 구어체로 과거사, 현재사의 무자각적 혼용으로 소설용어에 대해서는 아무런 고심도 하지 않았다.

술어에 관해서도 한문 글자로 된 술어를 좀더 조선어화 해 볼 수 없을까 해서 ‘교수’를 ‘가르킴’이라는 등, 대합실을 ‘기다리는 방’(「약한 자의 슬픔」제1회 분에서는 ‘기다림 방’이라 했다가 제2회 분에서는 ‘기다리는 방’이라 고치었다)이라는 등 창작으로서의 고심과 아울러 그 고심에 못하지 않은‘용어의 고심’까지, 이 두 가지 고심의 결정인 처녀작「약한 자의 슬픔」을 써서 ‘4천 년 조선에 신문학 나간다’고 천하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치고 싶은 충동을 막을 수 없었다. 지금의 젊은 문학자들이 다만 창작욕이라든가 예술욕의 충동으로써 문학을 만드는 것과, 당시의 우리의 심정과는 근본적으로 달라서 당시의 우리는 4천 년 민족 역사 생긴 이래 아직 있어 보지 못하던 신문학을 창건한다는 포부와 자긍이 있었다. 따라서 우리의 자취는 후인에 영향되는 ‘전철이 된다’하여, 우리의 겪음의 좌일보, 우일보가 조선 신문학의 운명의 바늘이라 하여 그 거취를 매우 신중히 하였다.

대중적 흥미에 치중하는 것은 문학을 통속화하는 것이요, 문학의 타락이라, 일본이 명치유신 이후에 신문학 발달 興起期[흥기기]에 있어서 오자끼(尾崎[미기]) 도구 도미(德富[덕부]) 야나가와(柳川[유천]) 등의 흥미 치중 작가들이 지도권을 잡기 때문에 일본문학은 대정 초엽까지도 ‘답보로’상태에 있다 하여 조선 신문학 발아의 초기에 가장 피할 것이 ‘대중적 흥미 치중’이라 하여 이것을 몹시 꺼리었다.

이런 자각과 이런 주장을 가진 사람들의 손으로써 조선 신문학의 주춧돌은 놓여진 것이다.

<創造[창조]>와 <廢墟[폐허}>[편집]

<창조> 창간호를 발행하고 제2회의 교정을 간신히 끝내고 만세사건이 폭발 되어 나는 귀국해 버렸다.

뒤이어 경찰서로 감옥으로 꼭 석 달을 세상과 떨어져 있다가 다시 광명한 천지에 나오니, 세상은 예대로 환원되어 시집가고 장가가고 10전 20전 돈을 다투고….

<창조> 발간에서 움이 돈은 조선 신문학은 만세사건에 동인들이 각각 흩어 져서 정지상태에 빠졌다. 내가 감옥살이를 끝내고 나와 보니 김환과 최승만 은 동경에 있고, 전영택은 그 새 귀국해서 결혼했고, 주요한은 상해로 망명 해 있었다.

인쇄만 하고 쌓아 두었던 <창조> 제2호를 발행케 하며 동인들과 연락하여 제3호 원고 수집에 착수하였다.

그때 李一[이일]과 오천석이 <창조> 동인이 되기를 바란다 하므로 마침 현 재의 다섯 사람만으로는 원고난을 느끼던 차이라, 상해의 주요한에게 편지 로 교섭하여 역시 상해에 망명해 있던 이광수도 끌어 이일과 오천석을 새로 동인으로 넣기로 하였다.

그때 일본 정부에서는 조선의 만세사건은 寺內[사내](뒤에 長谷川[장곡 천]) 총독의 무단정치에 대한 반항행동이라 하여 齎藤實[재등실]이를 조선 총독으로 보내고 문화정치를 한다고 선포하였다.

그 문화정치의 덕으로 민간신문이 생겨나고 언론도 얼마간 자유의 길이 열 렸다.

이리하여 과거에는 嚴封[엄봉]되어 있던 언론과 출판 등에 약간의 완화가 생기매, 이 땅에는 웬 문학자가 그리도 많았던지 너도 소설 나도 소설, 너 도 시 나도 시로, 시인 소설가가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그 많은 문학자들의 많은 작품을 소화하기 위하여 사면에서 잡지사 와 출판사가 생겨났다.

글을 토막토막 끊어서 쓰면 이것이 시요, 남녀가 연애하는 이야기를 쓰면 이것이 소설인 줄 안 모양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쓸쓸하였다. 이 많은 ‘글쓰는 사람’가운데도 촉망할 작가 가 나서지 않고 따라서 <창조> 동인이라는 한 그룹밖에는 ‘문단’이라는 것이 형성되지 못하니, 무변광야에 홀로 헤매는 것 같아서 고적하고 쓸쓸함 이 이를 데 없었다.

그런 때에 역시 동인제로 문학잡지 <廢墟[폐허]>가 창간되었다. 그 동인으 로는 黃錫禹[황석우] 吳相淳[오상순] 廉尙燮[염상섭] 閔泰瑗[민태원] 金萬 壽[김만수] 南宮檍[남궁억] 金明淳[김명순] 下營魯[하영노] 金億[김억] 金 瓚永[김찬영] 기타였다.

그러나 신문학을 대표하는 소설 작가가 <폐허>에는 없었다. 전인인 통속작 가 민태원이 <폐허>의 소설을 대표하였다.

그런데 <폐허> 창간호가 발간되면서 <폐허>의 주요 동인인 김안서, 김찬 영, 김명순의 세 사람이 <폐허>를 탈퇴하고 <창조>로 건너온 것이었다.

김명순은 김탄실이라 하여 이전 <靑春[청춘]> 잡지의 현상 소설에 당선하 고 그 문명이 빛나던 존재였다.

김찬영은 평양의 전설적 부호요, 명문집 자제로 동경 미술학교 출신으로, 다방면(그림과 글)에 소양 많은 사람이었다.

김안서는 만세 이전부터의 시인으로 ‘하여라’‘하였서라’투를 시작하여 시에 독특한 지반을 쌓아나가던 사람이다. 그때 서울에 돌아와 있던 김환에 게선 ‘김찬영, 김억, 김탄실이 <창조>로 오겠다니 어떠냐’는 편지가 있어 서 그것 좋다고 하여 <창조>로 오게 되었다.

이것이 <창조> 제2호의 특고다.

사실 제2호 원고를 橫濱[횡빈](요꼬하마) 인쇄소로 보내자 동경 유학생 독 립선언 사건이 생기고, 뒤이어 3․1의 위대한 운동이 발발하고, 귀국하자 감 옥에 들어가고 뒤따라 주요한도 본국을 거치어 상해로 망명하고, 전영택도 귀국해 버리고(전영택은 귀국하여 전부터의 약혼자와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결혼식장에서 약혼자는 만세사건으로 형사에게 잡혀가는 비극을 겪었다), 최승만(현과도정부 문교부 무슨 과장), 오천석(현 과도정부 문교부장), 김 환(사망) 등이 겨우 무사한 동인이었지만, 그들도 서로 아무 연락도 없이 지내는 형편으로 내가 꼭 석 달 만에 소위 집행유예로 감옥에서 나와 보니,

<창조>를 실마리로 움돋으려던 조선문학은 된서리를 맞아 그 싹이 꺾이고 말았다.

나는 그 여름 감옥에서 나온 한 달 뒤 잠깐 동경을 다녀왔다. 의사도, ‘그대의 건강 상태로는 긴 여행은 못하리라.’고 충고하였지만, 마음을 흔 드는 어떤 情事[정사] 때문에 만사를 제치고 동경 여행을 한 것이었다.

동경서 일이 뜻과 달리 되어, 아프고 쓰린 가슴을 붙안고 귀국한 나는, 번 연히 마음을 다시 먹고, <창조> 속간에 착수하였다.

그때는 소위 寺內[사내]의 무단정치의 대신으로 齋藤[재등]의 문화정치가 조선에 펴진다 하여, 민간신문의 발간 계획도 들리고, 文興社[문흥사]라는 출판사가 생겨 <曙光[서광]>이라는 잡지를 간행한다는 소식도 들리고, 曙光 社[서광사]에서는 기고 부탁도 왔다.

그 <서광> 창간호보다 <창조> 제3호를 먼저 내놓으려고 퍽이나 애를 썼지 만, 동인이 상해 동경 서울 평양에 분산되어 있고, 인쇄소가 횡빈에 있느니 만치,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아, <서광> 창간호가 1919년 11월 30일이었는 데 <창조>는 그보다 열흘 늦어, 12일에 제3호가 났다.

그러나 그 해 2월에 창간하여, 그 뒤의 만세사건이며 동인 이산, 입옥 등 온갖 분규를 겪으면서도, 그 해 안으로 3호를 내놓았다 하는 것은 오직 동 인들의 불타는 열성의 산물이다.

그 뒤 <창조> 제4호는 다음해 2월 22일부로 발행되었는데, 거기 난 신간 소개를 보면, 소위 齋藤[재등] 총독의 문화정책의 물결에 편승하여 그 새 막혔던 이 민족의 문화에의 돌진을 볼 수가 있었으니, 그 신간 소개를 초기 하자면,

<曙光[서광]> 제2호, 2월 18일 발행.

<新靑年[신청년]> 제2호, 12월5일 발행.

<綠星[녹성]> 창간호, 11월 5일 발행.

<서울> 창간호, 12월 15일 발행.

<現代[현대]> 창간호, 1월 31일 발행.

<三光[삼광]> 제2호, 12월 28일 발행.

<女子時論[여자시론]> 창간호, 1월 24일 발행.

이상은 <창조> 지상에 신간 소개가 난 것만이거니와 이 밖에도 많은 잡지 가 소나기 쏟아지듯 생겼다. 그 대개는 창간호가 종간호를 겸하거나, 혹은 제2호 내지 제3호까지 간신히 내고 그만둔 것이었지만….

하여간 한일합방 이래 막혔던 우리 민족의 울분은 한꺼번에 터진 것이었 다. 혹은 재력 부족으로, 혹은 사람 부족으로 크게 자란 자는 없지만, 1919 년 말에서 1920년 초에 걸치어서는 진실로 많은 잡지가 생겼다가 없어졌다.

그 잡지마다 탕약에 감초격으로 으례 소설 한두 편씩은 실렸지만 그 실린 소설에서 장래성 있는 작가를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늘 서운하였 다. <창조>가 신문학의 첫 고함을 친 지 겨우 1년 남짓이 지낸 뿐이지만, 우리는 마음 초조하게 소설작가의 출현을 기다린 것이었다. 소설이 근대문 학의 花形[화형]이니만치 소설작가가 배출하여야 문단이 흥성스러워진다 보 아서, 장구성 있는 소설작가가 나지 않은 현상을 매우 괴롭게 여겼다.

<창조>는 그 뒤 제9호까지 내고 폐간하여 버렸다. 폐간한 이유에는 여러가 지가 있겠지만, 이만 했으면 조선 신문학의 주춧돌도 놓여졌다 하는 것도 하나의 이유요, <창조>가 아닐지라도 동인들의 글의 발표 기관(신문, 잡지) 이 많이 생겼으니 동인지가 필요없게 되었다 하는 것도 하나의 이유이지만,

<창조> 폐간의 진정한 원인 내지 이유는, 첫째로는 무제한한 入費[입비]였 으니 마지막에는 2천 부까지 소화되었지만 그 매상대금은 어디론가 없어지 고 매번을 새로 새 비용을 내온 것이 괴로왔다. 게다가 나도 차차 방탕에 빠지어 문학보다도 방탕에 더 고혹을 느끼게 되었고, 또 <창조> 유지가 귀 찮아져서 폐간의 의향을 꺼내었더니, 그냥 계속하려면 뒤맡을 책임자가 없 어서 폐간하기로 결정이 되었다.

그때 사실 나는 <창조>의 무제한 입비에 정떨어져서 사무 책임자인 김환에 게 누차 불평을 말하였더니, 김환은 그러면 창조사를 주식회사로 하여 보자 고 하두 열심히 돌아다니는 그 열성에 감복하여, 나는 ‘주식회사 창조사’

의 제1회 불입금을 김환에게 솔선하여 맡겼더니 김환은 그 돈을 홀짝 안 (安) 모라는 기생에게 부어넣고 주식회사의 꿈은 영 소멸되어 나도 손떼기 로 결심한 것이었다.

이리하여 <창조>는 조선 신문학 史上[사상]에 지대한 자취와 공적을 남기 고 제9호로서 끝을 막았다.

그러나 <창조>가 남겨 놓은 공적은, 조선문학이 살아 있는 동안은 결코 몰 락할 수 없는 것이다. 더우기 <창조>를 무대삼아 조선문학 건설의 큰 역사 에 애쓴 일꾼들이(김환 한 사람이 죽은 밖에는) 30년 뒤인 오늘까지 모두 건재하여, 혹은 정부의 문화 부분의 고관으로, 혹은 민간 문화사업의 책임 자로 그냥 꾸준히 조선문화 진흥에 힘쓴다 하는 것은, 조선을 위하여 축하 할 일이다. 이나(金東仁[김동인])만은 무능 무재하여 오십 반백의 몸을 서 재에서 붓대에만 씨름하고 있지만, 同友[동우]들의 사회에서의 건투하는 양 을 보면 남의 일 같지 않다. 마음의 흥분을 억제하기 힘들 지경이다.

<廢墟[폐허]>·<白潮[백조]>[편집]

1921년 봄에 나는 소위 <창조> 주식회사의 창립총회를 하자는 김환의 초청 으로 서울로 올라왔다.

유방 김찬영, 안서 김억, 그 밖 몇몇 글벗과 짝지어 종로를 지나가다가 문 득 동무들이 발을 멈추어 김억의 말로,

“소개하지. 한동안 紙上[지상]에서 싸우던 염상섭 군.”

하는 바람에 나도 발을 멈추고 맞은편에 얼굴이 커다랗고 입이 너부죽한 사 람을 마주 보았다.

얼마 전에 小星[소성] 玄相允[현상윤]에게 쓸데없는 시비를 걸고 그 위 김 환에게 인신공격(소설 비평이라는 핑계로서)을 한 염상섭에게 대한 나의 선 입관은 자못 좋지 못하였다. 필시 얼굴도 인상이 나쁜 인물이리라는 선입관 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얼굴에 미소를 가득 띄고 내게 향하여 손을 내미는 염상섭은 다만 짝없는 호인일 따름이었다.

상섭의 내미는 손에 마주 손을 내밀었으나, 나는 여전히 그의 얼굴을 주시 하여 마지 않았다. 선입관과 실물이 너무도 相違[상위]되므로….

그 날, 상면한 사람은 염상섭뿐 아니라 고 남궁벽, 오상순, 황석우, 김만 수 등 <폐허>파 주요 동인 전부였다.

그들과 작별하자 곧 안서가 날 꾸짖는다.

“염(尙燮[상섭])은 자네를 그렇듯 호의로 대하는데 자네는 왜 옛날 논전 을 했으면 했지 오늘 그렇듯 악의의 눈으로 염을 대하는가. 사람이 그래선 못써 너무 狹量[협양]이야.”

당년의 안서는 노염 잘 내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조금만 비위에 거슬리 면 곧 절교로 선언하고 옷을 떨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 나간다. 그러나 30분 내지 한 시간 뒤에는 싱글벙글 웃으며 아까의 절교는 잊은 듯이 찾아 오는 사람이었다.

그런 안서지만 지금의 내게 대한 책망은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염상섭 이 나의 선입관과 달라 예상 외의 호인이므로 나도 내심 상섭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는 판에 안서의 이 꾸중이다.

여기 대하여 惟邦(김찬영)이 대신 말하였다―.

“동인 군, 자도 기회 있을 때 자네에게 말하려고 벼르고 있었지만 자넨― 아마 생장과 환경의 탓이겠지만 대인응대에 남보기에 몹시 거만해 뵈어. 그 게 자네 처세에 큰 방해가 될 걸세.”

자기로는 모르지만 사실 그런 양하여 건방지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으며, 더우기 경찰이나 경무부 도서과 같은 데서는 ‘나마이끼(なまいき―건방 짐)’하다는 탓으로 부당한 대접을 받은 일이 비일비재다. 그러나 이 ‘거 만하다’는 것도 나이와 지위의 나름인 듯, 내 나이 오십(마흔아홉이다)이 되고 지위도 문단의 늙은이로 되고 보니, 건방지다는 폄은 어언간 없어지고 말았다.

주식회사 창조사의 제1회 拂入株金[불입주금]을 곧 김환에게 보내고 나는 자금 이후는 원고와 편집 책임밖에는 지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랬더니 내 불입금을 오입에 죄 소비해 버린 김환은 어떻게 수단을 썼던지 <창조> 제8호와 제9호의 발행비 책임을 廣益書舘[광익서관]에 떠지워서 8호와 9호 는 광익서관의 손으로 무사히 세상에 나왔다.

나는 그 주식회사 창조사의 발기인회에 참석코자 상경하여 발기총회에서 어떤 기생과 사괴게 되어 한번 쏠리면 끝장을 보고야마는 성격으로, 문학이 고 예술이고 집어치고 방탕의 방면으로 쏠려 들어갔다.

<폐허>는 뒤에 나서 먼저 없어지고(2호로 폐간), <창조>도 9호로 폐간해 버리고 이 땅에는 한때 그 흔했던 문예잡지는 종자도 없어졌다.

그런데 <폐허>가 단 두 호를 낸 뿐으로 조선 문학사상에 커다랗게 이름을 남긴 것은 전혀 염상섭의 공이 아닌가 한다.

<폐허>가 간행되는 동안 염상섭은 내내 한 작품 비평가로 종사했지만, 그 뒷날 <開闢[개벽]>이 간행되고 <조선문단>이 간행될 때에 <개벽> 지상에 처 녀작 「청개구리」로 출발하여서 大[대]염상섭의 오늘을 이루었는지라, ‘염상섭 요람’의 마을인 <폐허>가 따라서 이름이 살아 있지 않은가 본다.

<폐허>와 전후하여 생겼던 문예잡지 <三光[삼광]>이며 그 밖의 다른 잡지들 이 모두 잊히어졌는데 오직 <폐허>의 이름은 <창조>에 버금하여 남아 있는 것은 오직 상섭의 덕이라 보는 것은 나의 실수일까?

<창조>와 <폐허>가 다 없어지고 잠깐 잠잠하던 이 땅에는 문예잡지 <백조>가 생겨났다.

조선 신문학 초창기를 회고할 때에 분명 창조파라는 색채와 ‘페허파’라 는 색채를 구분할 수 있지만 <백조>에는 색채가 없었다. 억지로 집어내자면 書生[서생] 색채가 있다고나 할까?

현재 재학생 혹은 갓 교문을 나온 젊은이들― 이런 문학소년 내지 문학청 년들을 규합하여 동인으로 하였는지라, 다만 문학 애호라는 점만이 공통될 뿐이지 사상이나 경향은 십인십색으로 통일된 색채가 없었다.

그러나 <창조> <폐허>에 속하지 않은 온 조선의 총규합이라, <백조> 간행 당시에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동인들도 후일 <개벽>과 <조선문단>을 무대 로 일어나서 한때 조선 신문학 황금시대를 현출하였다.

그런데 위에도 쓴 일이 있지만 <창조> 동인 열한 사람 가운데 30년 뒤인 지금에 죽은 사람은 오직 김환 항 사람이요, <폐허>에는 민태원, 남궁벽 등 두 세 사람이 죽었으나 염상섭을 필두로 오상순, 변영로, 황석우, 중요한 동인은 역시 축나지 않았는데 <백조>는 이상하게도 稻香[도향] 나빈을 비롯 하여 빙허 현진건, 노작 홍사용, 춘성 노자영 등 온 동인의 6할이 저 세상 으로 갔다 하는 것은 비통하고도 괴상한 숙명이다.

그 가운데도 도향과 노작의 죽음은 진실로 아깝다.

도향이 죽은 것이 겨우 스물 서너 살이었으니, 무론 아직 미성품이요, 좀 과히 로만티시즘과 센티멘탈리즘에 기운 느낌은 면할 수 없었으나 그의 천 분이 완숙되어 보지 못하고 세상 떠난 것은 조선문학을 위하여 찬탄하여 마 지않는 바이다.

도향에 관해서는 아래 다시 쓸 기회가 있겠거니와 홍노작에 대하여 한두 마디 쓰고자 한다.

제호는 잊었지만 <개벽> 지상에서 노작의 시를 보고 큰 시인의 알이 하나 생겼구나, 한 일이 있었다. 그후 얼마 뒤에 서로 면식은 하였다.

1942년경, 나는 불경죄라는 죄목으로 형무소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때 未 決監[미결감] 같은 방에 영화감독 尹達春[윤달춘]이 있었다. 그 윤봉춘이 노작에 관하여 이런 말을 하였다. 무슨 영화를 제작하는데 그 영화의 주제 가를 하나 지어 달라려 노작을 찾아갔는데, 갈 때 빈 손으로 갈 수가 없어 서 쇠고기를 한 근 사들고 갔었다.

노작의 집 아이들은 고기의 맛이 하두 신기하여 대체 이 맛있는 물건이 무 엇이냐고 부모에게 물으니까 그건 ‘노다지’라고 하여 두었다.

그 뒤부터 윤봉춘이 노작의 집에 가면 아이들은 노다지 가져온 사람이라고 환영하더라는 이야기다.

감옥에서 윤봉춘에게 이 이야기를 듣고, 아아, 노작이 그렇게 곤란하게 지 내는가, 조선문인된 자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가엾어라고 깊이 탄식하였다.

그러나 1년 뒤 감옥에서 나와서는 노작을 한 번 찾아 본다는 것이 어름어 름 밀리고 밀리는 중, 1945년 국가 해방의 날도 지난 그 초가을 어떤날, 웬 전문학교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나를 찾아왔다.

그래서 만나 보았더니,

“노작 홍사용 선생을 아시오?”

하는 질문이었다. 그래서 아노라고 했더니 지금 홍선생이 많이 위중하십니 다는 것이었다.

가슴이 뚱 하였다. 그래서 노작이 나를 한 번 만나기를 부탁하더냐고 물었 더니, 그런 배는 아니요 다만 같은 문단이기에 노작의 위독을 알리는 뿐이 라 하고는 도로 가버렸다.

아마 짐작컨대 그 여학생은 노작의 친척이나 친지로서 내 집 앞을 지나다 니며 내 문패를 보고 金東仁[김동인]이가 어떤 화상인가 한 번 보고자 노작 을 핑계삼아 들어왔던 것이리라.

그래서 무심하게 버려 두었더니, 2, 3일 뒤에 신문지는 노작의 부보를 알 리었다.

자기 집 전답을 팔아서 그 돈으로 <백조>를 간행한 노작, <백조> 자체가 조선문학 건설에 남긴 공로는 그다지 없다. 그러나 <백조>를 요람으로 출발 한 노작의 많지는 못하나마 몇십 편의 주옥은 조선 문학사상에 영구히 빛날 보배다.

현빙허의 죽음도 진실로 아깝다. 빙허는 어떤 정도까지 그의 업적을 남기 고 죽었으니, 어려서 죽은 도향처럼 원통하게 아깝지는 않지만, 이 <백조>의 세 작가(빙허, 도향, 노작)가 지금도 살아서 현역으로 활동을 한다면 우 리 문단은 얼마나 더 흥성스러울 것인가?

沈滯[심체][편집]

사실은 <백조>가 언제 창간되어 언제 폐간되었는지 그 당시에는 나는 몰랐 다. 나는 <창조>의 책임을 집어치우고는 아주 글과 떠나서 한동안 방탕에 잠기느라고 글과는 아주 절연하게 있었다.

1921년에서 1922년에 걸친 겨울을 나는 서울 패밀리 호텔의 한 방을 전용 으로 잡아두고 거기서 살았다. 저편 한 방에는 유방 김찬영이 묵어 있었다.

패밀리 호텔에 있을 노자영(아직 상면도 없는 사람이었다)에게서,

‘무슨 연애 서간을 한 편 써 달라.’

는 부탁을 편지와 전화 등으로 여러번 받은 일이 있는데,

‘연애 편지를 얻고 싶거든 먼저 내게 애인을 제공해서 그 애인에게 보내 는 편지를 구하여 보라.’

고 야유적인 회답을 보냈더니 다시는 연애 서간 요구는 없었고, 그 뒤 알아 보니 노자영은 그때 그렇게 모든 연애 편지들을 한 책으로 모아서 「사랑의 불꽃」이라는 제호로 출판하였다 한다.

그 노자영의 출현으로 보아서 아마, 그때 백조파가 대두하던 시절인 모양 이다. 그러나 <창조>와 <폐허>의 잔당들은 모두 아주 글과 떠난 생활을 하 고 있었다.

춘원과 요한은 상해에서 <독립신문>에 종사하고 있고, 염상섭은 <폐허> 폐 간 뒤에 할 일이 없어서 이따금 나나 김찬영을 패밀리 호텔로 찾아서 소일 하다가 평북 어떤 산촌의 교원 자리를 하나 구해서 그리로 떠났고, 안서는 행방불명(아마 고향에 내려가 있었을 것이다)이요, 김찬영과 나는 낮에는 잠자고 밤에는 食道園[식도원]에서 세월을 보내는 형편이요, 김환은 서울 있기는 있는 모양이지만 주식회사 창조사의 제1회 불입금을 집어삼킨 허물 이 있는지라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고, 사실 그 새 창조했던 <조선문단>은 폐허가 되어 버린 셈이었다.

이러한 때에 또 한 개의 비극이 우리 문학사상에 생기게 되었다.

그것은 광익서관 주인 高敬相[고경상]의 아버지의 환갑의 전날이었다.

그 날도 남궁벽 등의 두세 친구와 식도원에서 놀았다. 그런데 남궁은 몹시 배가 아프다고 괴로운 얼굴을 하면서도 시장한지 음식은 그냥 먹는다.

대개 남궁이란 친구는 그 옷이나 몸가짐에 몹시 마음쓰는 사람으로서, 기 침 한 번, 손짓 몸짓 한 번도 모두가 오래 스스로 수련하여서 터득한 남궁 독특의 스타일과 타입으로서, 단벌 양복이나마 언제든 깨끗이 솔질하고 총 대같이 바지의 줄을 새워가지고 다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남궁이 이 날은 체모를 차리지 못하고 한편 구석에 디굴디굴 굴고 고민하고 있었다. 그래서 하다못해 남궁의 愛妓[애기] 한경애라도 불러 주 려고 퍽이나 애를 썼으나 그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튿날은 고경상 아버지의 환갑날.

공경상은 <폐허>의 두 호 발간비를 부담했고, <창조>도 마지막 두 호는 그 에게 맡겼으며, 「無情[무정]」「海王星[해왕성]」등 여러 개의 출판물을 내는 등 신문학 운동에 적지 않게 공허한 사람이라, 그 아버지의 환갑은 온 문화인이 축하하였다.

그 자리에 으례 나올 남궁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물어보니 배가 몹시 아파서 앓고 있다 한다.

엊저녁 너무 과식하더니 필시 식체여니 하여, 나는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 다. 그리고 그날 저녁으로 만주 방면으로 어떤 기생과 놀러 떠나기를 약속 했는지라, 몰래 기회 보아서 그 연회석을 피해 나와서 약속한 기생과 북행 차에 몸을 실었다.

평양서 이틀을 보내고 만주 안동에 이르니 나의 定宿[정숙]인 원보관에는 나보다 먼저 내게의 전보와 편지가 와 있는 것이었다. 그 전보와 편지는 아 울러 서울 柳志永[유지영]에게서 온 것으로 남궁의 急逝[급서]를 알린 통지 였다.

그 말투, 몸가짐, 걸음걸이, 하다못해 기침하는 법까지 자기 독특의 방식 을 안출해서 이행하던 남궁, <폐허>의 동인이면서도 <폐허>의 보헤미안적 기분을 싫어하며 죽는 날까지 <창조> 동인들과 교우하면서도 역시 절조를 지켜서 <폐허>를 탈퇴하지 않던 남궁.

남궁의 죽음도 나도향, 홍노작, 현빙허 등의 죽음과 아울러 조선 신문학사 에 대한 지대한 고장이라 아니할 수 없다.

同人詩[동인시]의 終焉[종언][편집]

이리하여 1922년경까지로 조선 신문학은 동인지의 시대를 이탈하였다. 그 러나 종합 잡지로 그때 <개벽>이 발간되고 있었지만, 초창기의 <개벽>은 천 도교의 人乃天[인내천]이나 주창하는 한 기관잡지인 느낌이 없지 않았다.

그 <개벽>이 정도에 올라서 ‘종합잡지’로서의 소임을 다하여 문예에 상 당한 페이지를 제공하고, 또한 춘해 방인근이 월간 <조선문단>을 간행하게 될 때에 온 조선문인(<창조>의 잔당, <폐허>의 잔당, <백조>의 잔당, 그 밖 새로 나오는 사람들)은 이 두 잡지를 무대로, 좋게 말하자면 백화난만 상태 요, 나쁘게 말하자면 어중이 떠중이 난무의 혼란시대를 현출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혼란 가운데서 그래도 조선 신문학은 차차 정돈되고 자라서 오 늘까지 이른 것이다.

위정 당국의 탄압과 사회 대중의 무시(멸시) 아래서 이만한 문학이라도 건 설해 놓은 문인들의 고충을 조선 사회는 마땅히 크게 감사하게 보아야 할 것이다.

高敬相[고경상][편집]

<창조> <폐허> <백조>의 세 동인 잡지 시대가 조선문학 탄생의 진통기였다.

1919년 2월에 창간호를 내어 1921년 6월에 제9호를 내고 폐간한 <창조>.

1920년 6, 7월경에 창간하여 제2호까지 내고 폐간한 <폐허>.

그 뒤에 생겨서 두세 호 내고 폐간한 <백조>.

이 문학 건설의 큰 공사에 있어서 몰각할 수 없는 역할을 한 사람이 있으 니, 즉 광익서관의 주인 고경상이다.

고경상의 伯氏[백씨] 裕相[유상]은 滙東書館[회동서관]을 경영하고, 고경 상은 광익서관을 경영하여 당시 조선 서적업계에 이 형제가 군림하고 있었 는데, 동생 되는 고경상은 그때 일어나는 조선문화운동에 관심을 가져 동경 서 발행되는 유학생 기관지 <학지광>이며 <女子界[여자계]> 등 잡지의 조선 판매의 책임을 지고 또는 이광수(春園[춘원])의 「무정」이며 「개척자」등 도 초판 발행을 감행하였고 <폐허> 창간호와 제2호는 순전히 고경상의 힘으 로 발간되었고, <창조>도 내가 출자 책임을 회피한 후인 제 8, 9의 두 호는 고경상의 힘으로 발간되었다.

광익서관의 가게 점두는 문사들의 공동휴게소와 연락처의 소임을 하였고, 더우기 폐허파의 문인들은 제 가정을 피하여 방랑적 표랑적 생활을 즐기더 니만치 그들은 늘 광익서관의 점두를 구락부인 듯이 모이고 하였다.

안서(김억)의 처녀 시집(번역) 「懊惱[오뇌]의 舞蹈[무도]」도 고경상의 손으로 발행되었다.

고경상은 이렇듯 영리자로서는 외도인 ‘문학 옹호’를 하다가 마침내 조 선의 老舖[노포]인 광익서관을 둘러엎고 심화가 나서 한동안 상해, 북경 부 근에 유랑하다가 1930년경에야 귀국하였다.

귀국하여서는 예전의 광익서관의 점원이던 사람이 경영하는 책방에 점원으 로 들어가서 주객전도의 구슬픈 살림을 한동안 하였다.

그러다가 내가 「女人[여인]」원고를 그에게 제공하며 출판계에 재출발하 기를 권고했더니, 이에 용기를 다시 내어,

“서 푼짜리 원고를 출판함으로써 출판계에 재등장을 하니 社名[사명]을 三文社[삼문사]라 지으라.”

는 농담에 따라서 ‘三文社[삼문사]’라는 간판을 걸고 출판계에 재출발을 하였다.

본시 출판과 책사에 경험이며 솜씨가 있던 사람이라 그 영업은 순조롭게 되어, 큰 집을 사고 전화를 매고 전집 간행에까지 착수를 하더니, 금광 방 면에 오입을 하여 일껏 바로 되어 가던 출판과 서적까지 집어삼키고 다시 은퇴하여 버렸다.

그러나 초창기의 문학 건설 운동에 있어서의 고경상의 공로는 조선문학이 생명을 유지하는 동안은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고경상의 원조만 없었더면 대체 <폐허>라는 잡지가 나와 보았을는지, 따라서 ‘폐허파’라는 그룹이 생겨 보았을는지부터가 의문이요, <창조>도 제7호로 폐간되었지 8, 9호는 나 보지 못했을 것이요, 여러가지의 단행본도 썩 후년에야 출세해 보았을 것이다.

고경상은 문학인이 아니다. 그러나 그가 문학 건설에 바친 힘과 희생정신 은 조선문학이 감사히 여기어야 할 것이다.

冬眠期[동면기][편집]

<백조>가 언제 창간되었다가 언제 폐간되었는지는 전혀 기억이 없다.

<폐허>의 동인인 霽月[제월](염상섭)이며 樹州[수주](변영로)며 황석우 등 은 <폐허>가 창간되기 전에도 한 개 문학청년으로 <창조>에 투고 등을 하여 그 이름은 기억하는 바였지만 <백조>의 동인들은 모두 갓 중학 출신의 소년 들로서 그다지 관심치 않는 동안에 창간되었다가 폐간되었다. 그 <백조>의 동인으로 나빈(도향), 현진건(빙허), 홍사용(노작) 등이 <개벽>이며 더 뒤 에 <조선문단> 등을 무대삼아 成家[성가]를 하였기에 말이지 <백조>가 간행 되는 당년에는 그다지 주목을 끌지 못했다.

기생집에 갈지라도 기생에게 ‘금향 씨’‘명화 씨’하여 ‘씨’의 존호로 부르고 기생에게 창가를 가르치며 전연 난봉 학생 같은 행세를 하며 다니던

<백조> 동인들이었다.

나도향은 그의 자랑하는 美聲[미성]으로 ‘김산월’인가 하는 기생에게 창 가 춘원 작가 金永煥[김영환] 작곡 ‘백마강’을 가르쳐서 그 창가가 한때 童妓[동기] 새에 유행한 일까지 있었다.

그러나 우리 ‘조선 신문학 건설’의 주춧돌을 놓으라고 애쓰는 젊은이들 에게 한결같이 외롭고 쓰린 일은 우리의 이 사업에 대한 일반 사회의 몰이 해 및 무시였다.

우리는 우리의 전인인 춘원(이광수)의 밟은 문학 발자국을 옳다 보지 않았 다. 춘원은 문학을 일종의 사회 개혁의 무기로 썼다. 이상 건설의 선전기관 으로 썼다.

그 태도 내지 주의를 우리는 옳다 보지 않은 것이다(그런 관계로 춘원이

<창조> 동인으로 있는 2년나마 <창조>에서는 춘원에게 소설을 부탁하지 않 았다).

권선징악을 목적으로 한 소설을 용납할 관대성을 못 가진 것과 같은 의미 로 사회개혁을 목표로 한 소설도 용납할 수가 없었다. 문학은 오직 문학을 위한 문학이 존재할 뿐이지, 다른 목적을 가진 것은 문학으로 인정하지 못 한다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었다.

그리고 또 리얼이라는 것이 소설 구성의 최대 요소로 여기었다.

독자에게 아첨하기 위하여 흥미 본위의 소설을 쓰는 것은 문학자로서 부끄 럽게 여길 일이라 보았다.

그런지라, 우리가 그때 산출한 소설이라는 것은 대중적 흥미는 아주 무시 한 생경하고 까다롭고 싱거운 것뿐이었다.

우리는 이 생경한 ‘이야기’를 소위 ‘문학’이라 하여 대중에게 ‘맛있 게 먹기’를 강요한 것이었다.

3․1 후 반항기분과 신흥기분으로 일부의 젊은이들은 이 생경한 문학의 맛있 는 체하고 억지로 받아 먹었지만, 일반 대중은 우리의 노력의 결정인 신문 학을 아주 무시하여 버렸다.

새 문학이 없는 이 땅에 새 문학을 건설해 보겠다고 나선 우리들에게 일반 사회의 이 냉대는 과연 적적하고 가슴 아팠다.

<폐허>의 폐간도 이 냉대에 정떨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창조>도 (무어니 무어니 하여도) 대중의 열렬한 지지와 후원만 있으면 폐 간 안했을 것이다.

이리하여 <창조> 폐간되고, <폐허> 폐간되고, <백조>도 없어지고, 조선 사 회에는 문학운동이 한때 冬眠[동면]상태에 빠졌다.

‘문학’을 냉대하는 사회에 무슨 문학이랴― 이런 심리로 모두 폐간하여 버린 것이다. 그리고 제각기 제멋대로 놀아났다.

<창조>의 동인들은 오입장이로 돌아서고 <폐허>의 동인들은 방랑과 표랑으 로 돌아섰다.

위에도 쓴 일이 있거니와 ‘주식회사 창조사’의 불입한 불입금을 ‘안금 향’이라는 기생에게 통 부어 넣고, 그 때문에 김환은 면목이 없어 말을 더 듬는 떼, 떼, 떼 하는 눌변으로써 연해 시골(진남포였다) 자기 집 논을 팔 아서 변상하겠노라고 쫓아다니며 변명하였지만, 나도 그때 바람이 나서 몇 천 원의 돈을 김환에게 먹히운 것쯤은 생각도 안하던 때라 아주 개의치 않 고 나 놀대로 놀아났다.

안서는 그때 漢城圖書株式會社[한성도서주식회사]에 「위인 링컨전」이라

「위인 와싱톤전」이라 위인 누구 누구전을 연속적으로 팔아서 술값 수입이 좋던 시절이라, 매일 康明花[당명화]라는 기생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던 시절 이었다.

늘봄 전영택은 평양에, 東園[동원] 이일은 서울에 각각 신혼한 애처의 보 금자리에 묻혀 있었다. 천원 오천석은 아직 총각으로 몸을 아버지(목사)의 품에 쉬고 있었다.

이광수, 주요한은 상해에 있었다.

염상섭은 <폐허> 폐간 전후하여 평안북도 정주 오산학교에 교원으로 두석 달 가 있다가, 다시 제 집으로 돌아와서 숨어 있었다.

이리하여 모두 붓을 내어던지고 제멋대로 놀아나서 조선문학은 탄생 2년 뒤에 동면상태에 빠지게 된 것이다.

이때의 언론기관으로 민간과 총독부 기관지를 합한 네 개의 신문과 <개벽> 잡지뿐이었는데, 신문은 문예를 다루지 않고 <개벽> 역시 초창기로서 천도 교의 인내천만을 주장하는 얘기 잡지로서, 아직 문예와의 인연이 맺어지지 않은 시절이었다.

<東亞日報[동아일보]>[편집]

<창조> 1920년 5월호 맨 끝에 6호 활자로 동아일보의 창간을 축하하는 글 이 늘봄 전영택의 문장으로 실리어 있다. 그 글을 보면 마치 어른이 어린이 의 장래를 축복하는 듯한 사랑과 귀염이 가득 든 문장이다.

언론기관으로 순전히 민간의 자본과 민간의 기술과 민간의 힘으로 생겨나 는 동아일보를 <창조>는 진심으로 어른답게 축복한 것이었다.

초창기에서 중간기까지의 조선문인으로서의 동아일보에 한 때(잠깐이라도) 적을 두어 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아마 따로 제 직장을 가지지 않은 사람으로는 나 한 사람이 아닐까 이렇 게 나는 생각한다) 얼른 꼽아 볼지라도 맨 초창기 동아일보에 천원 오천석, 제월 염상섭이 있 었고 춘원 이광수와 주요한이며, 안서 김억이며, 빙허 현진건이며, 춘성이 며, 누구누구 枚學[매학]키 힘들 지경이다.

그러면서도 또한 동아일보같이 조선문학을 학대하고 박대한 언론기관도 또 한 없다.

조선의 문인으로 동아일보에게 쓰라린 박대를 받아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춘원이 동아일보의 편집국장으로 있으면서 춘원 자신부터가 문인으로서 는 학대를 받았으니 더 할말 없을 것이다)이며, 동아일보가 바야흐로 싹트 려는 조선문학에 대하여 범한 과오가 또한 심한 바 있다.

이것도 아래에 차례로 기회 생길 때마다 쓰겠거니와 그 탄생(발간)을 그렇 듯 진심으로 축복하였던 우리는 그 축복을 내심 후회하고 취소하였던 것이 다.

다른 신문(時代日報[시대일보]며 朝鮮日報[조선일보] 등)이 그래도 좀 양 심적인 신문소설을 지상에 연재할 때에 동아일보는 솔선하여 통속소설과 구 담으로 대중에게 아첨하여 이 탓에,

‘신문소설이란 것은 흥미 중심의 통속소설이 아니면 안 된다.’

를 세워 놓아서, 지금 자라려는 조선문학에 된서리를 준 죄로 변명할 여지 가 없는 동아일보의 과오다.

南宮壁[남궁벽]의 죽음[편집]

1921년에서 1922년에 걸친 문학 동면기에 있어서 가장 슬픈 일은 남궁벽의 죽음이었다.

남궁벽은 <폐허> 동인에서 가장 빛나는 또한 특이한 존재였다.

그의 남긴 시와 문예 비평, 에세이는 모두 散逸[산일]되어 오늘날은 찾아 볼 바이 없지만 상섭, 수주 아직 출세하지 못한 당년의 <폐허>에서는 남궁 이 가장 빛나는 존재였다.

남궁은 <폐허>의 룸펜색을 싫어하여 단벌 옷이나마 늘 깨끗이 손질하고 다 림쳐 입고 날카로운 콧등에 안경을 쓰고 단장을 짚고 담배도 굶으면 굶었지 ‘해태’가 아니면 피지 않았고― 그런 사람이니만치 룸펜색 농후한 <폐허>당을 피하여 김찬영이나 나와 늘 짝지어 다녔다.

김찬영이나 내나 모두 평양 명문집 자제로서, 옷도(남궁처럼) 늘 손질은 못하지만 모자에서 신발까지 모두 최고급품을 여러 벌씩 가지고 있는지라 늘 깨끗하였고, 이런 점이 남궁의 뜻에 맞는 듯하여 내나 찬영이 서울 와 있으면 남궁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우리의 정숙인 패밀리 호텔에 와서 세월 을 보냈다.

그다지 말이 없는 남궁이요, 그다지 말이 없는 내가 종일 한 마디의 이야 기도 없이 마주 있다가 저녁때 내가 먼저 내 단장을 짚고 외투를 입으며 일 어서면 남궁도 따라서 외투를 입고 단장을 짚고 일어선다.

(남궁은 그 외투의 엉덩이가 허옇게 닳은 것을 매우 마음 썼다. 그러나 자 존심이 몹시 센 남궁은 그 자기의 외투의 초라함을 한 번도 하소연한 일이 없었다. 나는 여유있는 집안에 태어나서 여유있게 자란 만치, 옷같은 것도 감이 보이면 짓고 짓고 하여 옷이 남이 달라면 서슴지 않고 주고 하여 유지 영 같은 사람은 내 옷을 꽤 여러 벌 얻어 입었지만, 남궁은 달라는 일도 일 체 없었고 나도 또한 남궁에게는 차마 달라느냐는 말이 나오지 않아 마음으 로는 한 벌 주고 싶으면서도 주지 못했던 것이다.) 호텔에서 나와서는 그때 남미창동 살던 유지영을 불러내어 가지고 이 일행 은 식도원으로 간다. 그때의 식도원은 우리 일행을 위하여 제7호실은 늘 비 워두는 것이다.

식도원에서는 새벽 서너 시까지 질탕치듯 놀아난다.

우리는 이런 허장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글과는 아주 절연하고.

그것은 광익서관 주인 고경상의 아버지의 환갑 전날이었다. 우리(김찬영, 남궁벽, 유지영, 나)는 또 식도원에서 놀았다. 그런데 노는 도중 건너편 방 손님과 기생 때문에 시비가 생겼다.

보이는 좌우편 다 괄시할 수 없는 손님들이라, 더 커지지 않도록 알선하느 라고 삥삥 도는 동안 남궁은 이 시비통에 끼어들기를 피하여 음식만 연해 먹고 있었다. 이튿날 고경상 아버지의 환갑 잔치에 <창조>, <폐허>의 재경 동인이 모두 축하하는데, 으례 올 남궁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 알아 보았더니 어제 먹은 음식이 체하여 몹시 앓는다는 것이다.

그 날 나는 어떤 동반자와 여행을 떠나기로 약속이 있었으므로 앓는 남궁 을 찾지 못하고 연석에서 몰래 빠져나와서 길을 떠났다.

평양서 2, 3일 지내서 목적했던 안동까지 이르니 안동 내 정숙인 원보관에 는 전보 한 장과 편지 한 장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울 유지영에게서 온 전보와 편지였다. 전보는 남궁이 죽었다는 것을 알 린 것이요, 편지는 남궁이 그 밤 먹은 음식에 체하여 종내 죽었다는 사인의 보도였다.

아직 미성품인 채 죽은 남궁이니, 남궁이 살았다면 조선문학에 어떤 업적 을 남겼을는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그의 특이한 성격과 날카롭던 관찰안과 미성품인 채로 새벽 明星 [명성]같이 산뜻하던 詩風[시풍]은 그에게 壽[수]만 더 있었더면 어떤 문학 업적이 있었을 것을 넉넉히 단언할 수 있다.

廉尙燮[염상섭][편집]

상섭과 나는 두 번 큰 싸움을 하였다. 한 번은 서로 아직 상면도 없는 1920년경이요, 또 한 번은 1928년경이다. 그러나 현 문단에서 가장 가까운 친구를 꼽으라 하면 나는 서슴지 않고 상섭 그 밖 두서너 사람밖에는 없다.

상섭의 문학 출발 초년경에는 몹시 불우했다.

그의 성격에는 어디인지 비꼬아진 데가 있어서 젊었을 적에는 남에게 시비 를 걸기를 좋아했다. 소성 현상윤과도 무슨 논전을 한 일이 있다. 창간초의 동아일보에 잠깐 들어갔었지만 언제 들어갔다가 언제 나왔는지 電光石火[전 광석화]적이었다.

그 뒤 고경상은 후원으로 동인제로 <폐허>가 났다가 없어졌지만, 상섭은

<폐허>에서도 한 그림자 엷은 존재였다.

남궁벽의 아버님 남궁훈 노인이 安秉畯[안병준] 앞에서 조선일보 사장이 될 때 상섭은 남궁벽의 인연으로 조선일보의 편집국장이 되었다.

그러나 무명 청년 상섭의 아래 사원이 통제될 리가 없어서 곧 불신임 문제 가 일어나서 꼭 사흘 국장 노릇하고는 물러나왔다.

그 뒤 정주 오산학교의 교원으로 잠깐 갔었지만, 이 역 언제 갔다가 언제 그만두었는지 전광석화다.

문학 동면기에 내가 패밀리 호텔에서 놀아날 때 상섭은 가끔 호텔로 놀러 와서는 그의 능변적인 너부죽한 입을 놀려가면서 뒷날 그의 장편소설에서 보는 것 같은 아기자기한 화술로써 사람을 고혹케 하고 하였다.

그 뒤 나는 그 새의 1년간의 놀이에서 피곤도 하고 염증도 생겨 잠깐 동경 으로 산보를 다녀와서는 평양의 내 가정으로 돌아와서 그 새의 피곤을 삭였 다. 대동강에 김찬영과 마상이〔小舟[소주]〕를 내다가 띄워 놓고 낚시를 대동강에 던지고 그 새 모진 놀이에 피곤한 머리와 몸을 고요히 쉬었다.

그동안에 상섭은 육당 최남선 주재의 東明社[동명사]에 들어가서 <東明> 편집 책임자가 되었다.

1923년 상섭이 동명사에 있으면서 내게 소설 하나 써 보내라고 부탁하였 다. 이 요구에 나는 3·1 옥중기의 한 토막으로 「笞形[태형]」을 써 보냈다.

이 전후하여(1923, 4년경이라 생각된다) 지금껏 천도교의 기관지인 듯한 느낌이 강하던 <개벽>이 차차 종합잡지로 체재를 갖추며, 처음은 좌익 색채 가 강렬하다가 민족주의 색채로 변하여 동시에 적지 않은 페이지를 문예란 에 제공하였다.

한낱 문예비평가로 자임 타임하던 상섭이 <개벽>에 그의 처녀작 「標本室 [표본실]의 靑[청]개구리」를 발표하였다.

이 「표본실의 청개구리」에 대하여 나는 1929년 조선일보 지상의 ‘朝鮮 近代[조선근대] 小說考[소설고]’라는 소론에 이렇게 썼다.


‘그 새 문예비평가로 방황하던 상섭은 이에 비로소 소설 작가로서의 길을 발견한 것이었다.

더우기 그의 능란하고 풍부한 어휘는 문단의 경이였다. 뒷날 내가 아내를 잃고 독신으로 지낼 때에 상섭은 누차 나더러 경기 여인을 아내로 맞으라고 권고하였다. 춘원의 소설 문장이 그처럼 화려한 것은 춘원 부인 허씨의 어 학 코치의 덕이라 하며, 경기 여인의 好辯[호변]이 소설 제작에 큰 도움이 되리라는 뜻으로 나더러 경기 여인을 아내로 맞으라는 것이었다. 나는 이 상섭의 호의적 충고를 좇지 않고 평안도에서도 용강이란 시골, 용강서도 농 촌 처녀를 아내로 맞아서 가정을 이루고 현재에 미쳤었지만, 나더러 그런 권고를 하느니만치 상섭은 자기의 경기인인 풍부한 어휘를 아낌없이 소설상 에 썼다.

(약)성섭이 「표본실의 청개구리」라는 소설을 썼다. 이 사람이 소설을 썼 구나, 나는 이런 마음으로 그 작품을 보았다. 그러나 연재물의 제1회를 볼 때, 나는 큰 불안을 느꼈다. 강적이 나타났다는 것을 직각하였다. 이인직 (국초)의 독무대 시대를 지나서 이광수(춘원)의 독무대, 그 뒤 2, 3년은 또 한 나의 독무대 시대에 다름없었다.

(약)과도기의 청년이 받은 불안과 공포― 「표본실의 청개구리」에 나타난 것은 그것이었다. 나는 상섭의 출현에 몹시 불안을 느끼면서도 이 새로운 ‘하믈레트’의 출현에 통쾌감을 금할 수 없었다.(약)….’

文學[문학] 開花[개화][편집]

조선문학 발전에 있어서 <개벽>의 공적은 크게 보아야 할 것이다.

동인잡지 <창조>를 지나서 동인잡지 <폐허>와 동인잡지 <백조>― 이렇듯 신문학의 업은 동인잡지에서 싹터서, 동인잡지니만치 각각 자기네의 성곽처 럼 지내다가 1922년의 동면기에 들었던 것이다.

이 동면에서 깨날 때 그들의 작품을 받아 소화할 만한 기관은 오직 <개벽> 하나였다.

인제는 <창조>니 <폐허>니 <백조>니 파당적 색채를 떠나서 한 조선의 문학 자로서 모두 <개벽>에 모여들었다.

상섭이 두각을 낸 것도 <개벽>이거니와 빙허(현진건), 도향(나빈), 노작 (홍사용) 등 <백조> 잔당이며 朱耀燮[주요섭](요한의 동생), 素月[소월](金 廷湜[김정식]) 등이 이름을 나타낸 것도 <개벽>이었다.

상섭이 먼저 나왔는지 빙허가 먼저 나왔는지는 지금 기억에 모호하지만, 곧 뒤이어 도향까지 나타나서 조선의 소설단이 찬란한 競艶[경염]을 <개벽> 지상에 전개하였다.

요한의 시도 <개벽>에 나타났다. 노작의 시도 나타났다.

더우기 민요시인 소월(김정식)의 출현은 온 문단의 경이였다.

소월은 본시 안서(김억)의 제자였다. 안서의 문하에서 시도를 닦을 적에는 그 시풍은 물론이요, 원고용지의 모양 형식까지도 스승 안서를 본따므로 우 리는 그의 장래성을 아주 무시하였는데, 그가 자기의 길을 민요에서 발견하 고 「朔州龜域[삭주균역]」을 노래부르며 문단에 데뷔할 때에 그의 스승 안 서를 비롯하여 온 문단은 이 놀라운 천재의 출현에 입을 딱 벌렸다. 그의 스승인 안서부터가 지금껏 固持[고지]하던 자기의 시풍과 시도를 버리고 제 자인 소월의 개척한 신민요를 개종을 한 것이다.

박명한 천재 김소월―.

개화해 보기 10년도 못 하여 소월은 그만 저 세상으로 갔다. 모진 술이 그 의 젊은 생명을 빼앗았다 한다. 그러나 그가 남긴 업적은 우리 민족 생명이 계속되는 동안은 영구히 우리 문학상에 빛날 것이다.

스승 안서의 손을 빌어 「素月詩集[소월시집]」이 간행되어 오늘에 이른 점은 시집 한권 못내 본 남궁벽에게 비기어 나은 편이나 소월의 업적에 대 해서는 한 개 기념비라도 있을 법한 일이다.

<白潮[백조]> 殘黨[잔당]의 걸음[편집]

<백조>는 <창조>나 <폐허>에 관계없는 젊은 문학 애호자의 총 모임이니만 치 일정한 주견과 주장 색채가 없었다.

그런지라 빙허(현진건), 도향(나빈)이며 노작(홍사용), 월탄(박종화), 夕 影[석영](安碩柱[안석주]) 같은 사람이 있는 반면에는 懷月[회월](朴英熙 [박영희]), 八峰[팔봉](金基鎭[김기진]) 같은 조선 좌익문학의 창시자가 또 한 있었다.

회월이나 팔봉이나 무슨 확호한 신념 아래서 좌익문학과 좌익사상을 주장 한 바가 아니고, 다만 젊은 객기와 호기심에 겸한 한 때의 외입과 반동 기 분으로 그리로 달린 것은 뒷날의 그들의 행보를 볼지라도 알 수 있거니와 당년의 회월은 가장 적극적으로 좌익문학을 주장하여 한때 無技巧文學[무기 교문학] 전성의 시대를 현출한 일이 있었다.

이 무기교문학은 그 발상지가 소련이요, 일본을 거쳐 조선에 수입된 것으 로서,

‘무산자는 어느 何暇[하가]에 기교를 희롱한다는 한가로운 재간을 할 겨 를이 없으니까 문학에 있어서도 소재를 독자 앞에 제공하면 그뿐이지 기교 를 희롱하는 것은 부르조아 문학이라.’

하는 이론 아래서 살인 방화 소설과 주먹마치 시가 한때 문단을 횡행하였 다.

그러나 팔봉은 회월과 달라 약간 온건파로서 문학은 건축과 같은 것이라는 이론으로 한동안 회월과 올싸움을 하였으나 회월의 정열에 압박되어 마지막 에는 회월에게 굴복하였다.

한편 구석에서는 이런 이론이 주장되고 진전되는 동안도 온건파에 속한 우 리들은 그런 주장을 무시하고 오직 고요히 우리의 참된 문학을 건설하기 위 하여 매진하여,

‘문학은 문학이지 다른 것이 아니라.’

는 가장 평범한 진리가 확인되는 날까지 우리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당년에 회월은 열정적이요, 부딪치면 반드시 쏘는 살벌〔針峰[침봉]〕같은 사람으로서 당시의 문사로 회월에게 한두 번 쏘이지 않은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이 맹장들(회월, 팔봉 등등)도 한두 번 경찰과 감옥의 맛을 본 뒤에는, 그 만 질겁을 해서 180도를 더 한 번 꺾어 360도로 極左[극좌]에서 極右[극우] 로 조선인의 일본 황민화운동의 최선봉으로 혹은 ‘文人報國會[문인보국 회]’며 혹은 ‘國民總力聯盟[국민총력연맹]’의 간부로서 활약하다가 국가 해방의 날을 맞았다.

조선이 소련의 일부가 되기를 희망하던 20년 전 사상과 조선인이 일본 황 민되기를 부르짖던 5년 전의 주장을 다 청산하고 고요히 조국 광복의 날을 기다리는 그들― 그들 역시 단군의 후손이요, 배달 종자였다.

이 뒤에 그들이 다시 민족문화 운동의 선두에 나서서 지휘봉을 두를 날이 있을런지? 오십 가까운 늙어가는 몸이라, 과거의 소련 추종과 일본 추종의 과오를 청산하고 다시 재출발의 길에 올라서기에는 앞날이 너무 짧다. 만약 재출발하는 세월을 만나지 못한다면 그들의 재분은 불순한 환경 때문에 헛 되이 썩는 것이니 이 또한 아까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羅稻香[나도향][편집]

1923년 여름 나는 창작집 「목숨」을 자비로 출발하기 위하여 상경하였다.

어떤 출판사에서 출판하자고 교섭이 있었지만 무책임한 출판사가 무책임하 게 출판하는 것은 나의 프라이드가 허락치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날 인쇄소(한성도서주식회사)에 갔다가 내 처소(태평여관)로 돌아오는 길에 그 도중에 있는 청진동 안서의 여관에 들렀더니, 그때 안서는 웬 손과 마주 앉아 이야기하고 있었다.

흰 린넬 쓰메에리 양복을 입은 얼굴에 굴곡 많은, 나이의 나보다 한두 살 아래로 보이는 키는 작은 편인 젊은이였다.

나는 그 젊은이의 입은 옷이며 얼굴 생김이 마치 형사 같으므로 형사인가 하여 도로 돌아설까 하는데 안서가 그 젊은이를 나도향이라 소개하였다.

「옛날 꿈은 창백하더이다」라는 도향의 소설을 본 기억이 있는지라, 이 친구가 도향인가 호기심은 났으나, 그 형사 같은 첫 인상이 불쾌하여 나는 뚱한 채 그다지 말도 사괴지 않고 그냥 내 처소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튿날 도향이 여관으로 찾아왔다. 와서는 서슴지 않고 린넬 저고 리를 벗어서 병풍에 걸고 마루에 장기판을 보고 장기둘 줄 아느냐고 묻는 다.

“약간.”

나는 어제의 인상이 좋지 못한 찌꺼기가 있어서 흥미없는 듯이 대답하였더 니,

“한 번 놉시다.”

하면서 장기판을 들여왔다.

몇 번 놀았는지 그 승부가 어땠는지는 4반 세기를 지난 옛날이라 기억이 없지만, 서로 수가 비슷비슷하였다고 기억한다. 장기를 몇 차례 논 후에 도 향은 나에게도 눕기를 권하며 자기도 보료 위에 번뜻 자빠누웠다.

그리고는 담배를 한참 뻐근뻐근 빨다가 문득 어두운 데 홍두께로,

“김 형, 사람의 세상은 왜 이리 외롭소?”

한다.


‘종로 네거리에 우두커니 서 있노라면 사람들이 곁으로 앞으로 휙휙 지나 갑니다. 그들이 내 얼굴을 보면 마주보며 미소해 주려고 벼르지만, 눈만 마 주치면 얼른 외면해 버리고 그냥 씁쓸히 지나가니 사람의 세상이란 꼭 그렇 듯 서로 무관심히 지내야 합니까?’


그의 소설 「옛날 꿈은 창백하더이다」에 나타난 적적미를 나는 여기서 그 본인에게서도 발견하였다.

“도향, 우리 술 먹으러 갈까?”

“대찬성! 대찬성.”

어제의 불쾌하던 인상이 기억을 깨끗이 씻고 두 젊은 소설학도는 작반하여 청량리로 나갔다.

그로부터 매일 도향은 나의 처소에 와서 날을 보냈다.

육당(최남선)이 <시대일보>의 주인이 되며 염상섭이 <시대일보> 사회부장 이 되면서 빙허(현진건)와 도향이 사회부 기자가 되어 <시대일보> 사회부는 소설작가로 조직되었다.

그 겨울에 나는 무슨 일로 상경하여 저녁에 우리는 어떤 술집으로 갔다.

우리란 염상섭, 나도향 및 朱鍾健[주종건]이라는 공산주의자(역시 <시대일 보>기자)였다.

그 자리에서 주종건은 주로 내게 향하여 공산주의의 설법을 시작하였다.

염상섭은 소위 ‘진보적 사상’이라 하여 얼마만치 공산주의를 시인하는 사 람이었지만 이런 설법을 만나면 또한 그의 성격상 반대의 입장에 서는 사람 이었다. 내게로 향한 주종건의 설법에 대하여 상섭이 대맡아 논전이 시작되 었다.

나는 잠자코 듣고만 있다가 문득 한 마디 끼어 보았다. 소위 체면이든가 체재라든가 하는 것을 공산주의에서는 어떻게 보느냐고.

“체재라든 체면이라든, 그런 건 다 소부르조아적 근성입니다.”

“그럼 주 공, 이건 내 눈이 무딘 탓인지는 모르겠소마는, 주 공 가슴에 걸려 있는 싯누런 시계줄을 나는 도금줄이라 봤는데, 설사 도금이 아니고 진정한 금이라 한들, 니켈이나 그저 쇠줄이나 노끈을 쓰지 않고 싯누런 줄 을 쓰는 건 무슨 까닭이오? 또 실례지만 그 줄 끝에 시계가 있기는 하오?

알맹이 없이 누런 줄만 가슴에 장식한 건 아니오? 주 공이 싯누런 시계줄을 가슴에 걸고 있는 동안은 공산주의 선전의 자격이 없다고 나는 보오.”

도향이 연해 발가락으로 내 무릎을 꾹꾹 찌르는 것은 통쾌하다는 뜻인지 너무 심하다는 뜻인지는 모르지만 주씨는 더 할 말이 없는지 입을 닫쳐 버 렸다.

그 자리를 파한 뒤에 염(상섭)은 나더러 너무 심하다고 나무랐지만 도향은 소년처럼 올라뛰며,

“김 형 만세! 김 형 아니면 못할 말, 김 형만이 할 수 있는 말― 김 형, 만만세! 만만세!”

하며 좋아하였다.

나이 젊은 사람, 더우기 경제적으로 불순한 환경에 있는 사람은 아주 감염 치기 쉬운 공산주의로되, 도향은 불순한 환경의 젊은이이면서도 끝끝내 거 기 대립하여 있었다.

1924년 겨울 춘해가 <조선문단>을 창간하였다. 원고료를 200자 한 장에 50 전씩 내었다.

이 원고료는 <개벽>에서 먼저 시작한 일로서 <창조> 잔당들은 돈으로 글을 팔랴 하여 도리어 불쾌하게 보았다.

그러나 나만은 강청에 못이기어 글을 썼지만, ‘개벽사’건 ‘조선문단 사’애당초 내게는 원고료를 낼 생각도 안했고, 나도 받을 생각도 안했고, 그런 만치 글쓰는 데 자셋상스러웠다.

그러나 재경 문사들은 이 두 잡지사의 원고료가 술값 도움에 적잖은 보탬 이 된 모양이었다.

여기 대해서는 뒤에 더 쓸 기회가 있겠거니와 도향은 여기서 약간 여유가 생긴 모양으로 공부하러(?) 떠났다.

그러나 동경에 얼마 있지 못하고 다시 귀국하였다.

동경서도 異鄕[이향]의 적적함을 여러번 엽서로 하소연하던 도향이라, 그 가 귀국한 뒤에 나는 일부러 상경하여 그를 만났다.

평양을 꼭 한 번 보고 싶다는 도향의 하소연에 꼭 오라고, 오면 술과 기생 은 싫도록 대접하마고, 도향이 下壤[하양]할 날까지 약속하고 나는 평양으 로 돌아와서 도향의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는데 그 날을 당하여 도향에게서 사정 때문에 못 간다는 엽서가 왔다.

그 사정이란 물론 찻삯 등 경제사정일 것이 짐작이 가서, 이 뒤 상경할 기 회가 생길 때 함께 데리고 오리라고 벼르는 동안 그 뒤 한 달쯤 지나서 신 문지는 도향의 죽음을 알렸다.

나는 이 신문보도를 보고 소리없이 울었다. 총각으로 죽은 도향이었다. 굴 곡 많은 얼굴이며, 땅딸보 키며, 가난이 여인의 사랑을 끌 매력이 없는 것 이라 살틀하고 다정한 도향이었지만 그의 짧은 생애를 고적하고 쓸쓸하게 마치었다.

그 뒤 얼마 지나 역시 고인 曙海[서해](崔鶴松[최학송])에게서 도향의 비 석을 해 세우려 하니 얼마간 찬조하라는 편지가 왔다. 나는 그때 왜 이런 태도를 취하였는지 지금까지도 생각날 때마다 스스로 부끄러이 여기고 후회 하는 바이지만, 그때의 서해의 간곡한 편지에 대하여 나는 내가 <조선문단>에 글을 쓸 터이니 그 원고료를 받아서 비석 비용에 보태라고 회답하였다 (서해는 그때 조선문단사에 있었다).

그때 서해가 조선문단사에서 내 원고료라는 명목으로 얼마 받아서 비석 비 용에 보태 썼는지 어떤지는 따져 본 일이 없지만, 뒷날 사진으로 본 도향의 비석(작다란 화강석 비석이었다) 따위는 도향에게 대한 우정 관계로든 서해 에게 대한 의리 관계로든, 나 혼자의 힘으로라도 넉넉히 해 세울 수 있을 것이었다.

서해는 내 태도를 불쾌히 여겼는지, 혹은 조선문단사에서 내 원고료라는 명목으로 얼마 꺼냈는지는 모르지만 도향의 비석은 서해의 힘으로 건립되었 다. 가장 기대 크던 도향이었다.

나이 어리니만치 아직 미성품 채로 사라진 도향이지만, 여러 각도로 뜯어 보아서 가장 기대 크게 가질 작자였다.

도향 죽기 전후의 조선문단(주로 소설단)을 개괄적으로 살펴 보자면 최서 해는 조선문단사의 식객으로, 사원으로, 서기로, 하인으로, 명목 모호한 존 재로 겨우 몇 편의 창작으로 출발하려던 무렵이라 말할 바이 없고, 빙허(현 진건)는 질보다 재간이 과승하여 재간으로 메꾸어 나가던 사람이요, 염상섭 은 그 풍부한 어휘와 아기자기한 필치는 당대 독보지만 끝막이가 서툴러 ‘미완’혹은 ‘계속’이라고 달아야 할 작품의 꼬리에 ‘끝’자를 놓는 사람이요, 월탄(박종화)은 <개벽>에 창작 몇 편을 실어 보았지만 습작 정도에 지나지 못하고, 중일전쟁 전후에야 <매일신문>에 ‘신문소설’을 써서 비로소 대중 적으로 알린 사람이요, 춘해(방인근)는 그때부터 오늘까지 전진, 후퇴 전혀 없는 사람이요, 나 역 시 그 시절 작품은 모두 묻어 버리고 싶은 형편이니 말할 것도 없고, 이러 한 문단 형편에서 도향을 잃었다는 것은 조선문학 발전에 지대한 손실이라 지 않을 수 없다.

도향의 죽음의 가장 큰 원인은 영양부족한 창자에 독한 냉주를 끊임없이 사발로 들이킨 때문이다.

소월하며, 도향하며, ‘조선’이란 땅은 천재를 내려주기는 너무도 아까운 땅이다. 성경의 귀절에 있나니 가로되,

‘도야지에게 진주를 던져 주지 말라. 도야지는 진주의 그 무엇임을 알지 못하느니라.’

영양부족으로 죽은 도향의 비석에 이 구(句) 한 귀를 새겨 주고 싶다.

<靈臺[영대]>[편집]

1924년 여름 안서가 평양에 왔다. 아직 <조선문단>이 창간되기 전이요,

<개벽> 혼자서 활보하던 시절이었다.

김찬영, 김억, 나, 이렇게는 대동강 특유의 정취인 ‘어죽놀이’를 하고 강에서 돌아오는 길에 어떤 요리집에 들렀다.

강에서부터 시작된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더 진전시키기 위해서였다.

동인잡지가 없으면 자연 게을러진다. 의무적으로 꼭 써야 할 기회가 없으 면 자연 붓을 들기 싫어지는 것이 인정이다. 게다가 우리의 기관 잡지가 아 닌 잡지에 글을 쓰자면 자연 눈칫밥 먹는 것 같아서 쓰고 싶은 소리를 마음 대로 쓰지 못한다.

뿐더러 <개벽>은 원고료를 바라서 쓰는 것 같아서 쓰기 싫고, 거저 쓰자니 남의 시비가 있고, 모두 귀찮으니 동인제의 잡지를 또 발간해 보자는 것이 었다.

이야기(의논)는 일사천리로 진척되어 곧 착수하기로 하였다. 동인으로는, (가나다순) 金觀鎬[김관호], 素月[소월] 金廷湜[김연식], 金東仁[김동인], 岸曙[안서] 金億[김억], 流暗[유암] 金興濟[김흥제], 惟邦[유방] 金瓚永[김찬영], 長春 [장춘] 田榮澤[전영택], 春園[춘원] 李光洙[이광수], 蘆月[노월] 林長和[임 장화], 天園[천원] 吳天錫[오천석], 朱耀翰[주요한].

이러하였다. 이것을 다시 따지면 예전 <창조> 동인에서 김환과 최승만, 동 원(이일)이 없어지고, 소월(김정식)과 유암(김여제)이 새로 든 것이었다.

말하자면 약간(진실로 약간)의 이동이 있는 밖에는 <창조> 동인 그대로였 다.

제호는 ‘靈臺[영대]’라 하기로 하였다. 옛날 문왕의 ‘영대’의 인연도 상서롭거니와, 한문 글자 ‘영대’의 네모나고 묵직한 생김생김도 노블리티 하였고, 글자의 획수가 많으면서 삼척동자라도 다 아는 글자라는 점도 마음 에 들었거니와, 이남 발음으로 ‘영대’, 서도 발음으로 ‘녕대’라는 그 리듬과 신령 령자(靈[영]) 집 대자(臺[대])가 합한 그 모든 것이 우리의 고 답적인 취미에 적합하여 제호는 ‘영대’라 하자는 내 의견은 이의없이 채 택되었다.

그 직전에 상해에서 귀국해 있던 춘원(이광수)과 요한(주)도 오래간만에

<영대>에 붓을 잡았다. 요한보다도 춘원은 진실로 오래간만에 창작 집필이 다. 「人生[인생]의 香氣[향기]」라는 자서 소설을 썼다.

편집도 평양서, 인쇄도 평양서 하기로 하였다. 평양에는 동인으로는 김찬 영과 내가 있을 뿐이다. 書家[서가] 盧三山[노삼산]에게 제호를 받아오고, 중국 고금명가 필적으로 ‘영’자와 ‘대’자를 수십 장 골라서 짝맞추고

‘앙리 마티스’와 ‘피카소’등의 素畫[소화]를 커트로 모고 목각 컷을 새 기고―.

이렇듯 만단 준비를 다하여 1924년 8월 초하룻날 창간호가 나왔다.

이 <영대>가 나온 직후에 서울서는 춘해(방인근)의 손으로 춘원 주재라는 명색으로 <조선문단>이 창간되었다.

또 그 직후에 예전에 <폐허> 잔당들이 모이어 <폐허이후>를 내었는데 창간 호 즉 폐간호로 되어 버렸다.

<영대>는 1924년 8월에 창간하여 1925년 정월에 제5호까지 내고 폐간했는 데 평양 光文社[광문사]라는 광고지나 인쇄할 능력을 가진 인쇄소에 페이지 物[물]을 맡기고 보니 그 고생과 고심이 여간이 아니었다.

요행 직공들의 헌신적 협력(직공장이 나와 소학 동년 동창이었다)과 경영 자 측의 희생적 원조의 덕으로 서너 달 뒤부터는 조금 낫게 되었으나, 처음 은 참 맹랑한 상태로 도저히 할 것 같지 않았다. 매달 우리가 지불하는 인 쇄료의 반액에 해당하는 새 활자를 계속적으로 사들여서 조금 인쇄소 꼴이 나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서울서 판매를 맡은 노월(임장화)과 안서(김억)에게서는 판매대금 을 엽전 한 푼도 오지 않았다. 그 실정을 조사해 조고자 나는 1924년 상경 하여 몸을 임노월의 집에 던졌다.

임노월이라는 친구 재미있는 친구로서 탄실 김명순과 동서생활을 하다가 탄실은 모에게 빼앗기는 체하고 밀어치우고 현재는 金元周[김원주], 지금은 중이 되어 있는(수행 누락)과 동서를 하고 있었다.

김원주는 본시 모 전문학교 교수의 영부인으로 조선 신여성계의 혁혁한 존 재로 있었는데(주원 자신의 말에 의지하자면) 남편인 교수씨의 의족(교수씨 는 다리가 제 다리가 못 되고 의족이다)이 밤마다 선뜩선뜩 맨살에 닿는 것 이 역하여 임노월의 유혹에 응하였노라 하는 것이었다.

나는 3, 4년 전 李東園[이동원]의 소개로 서울 어떤 고지대의 문화주택(교 수씨의 댁)의 마담으로서의 김원주, 신여성계의 지도자요 花形[화형]으로서 의 김원주를 본 일이 있느니만치 지금 임노월의 집에서 행주치마를 입고 된 장찌개를 끓이는 김원주에게― 더우기 임노월의 안해인지 소실인지 정체불 명한 김원주에게 매우 모멸하는 눈초리를 던졌던 것이다.

그러나 신경이 약간 둔한 김녀는,

“아이고 김 선생님, 이게 얼마만입니까?”

고 반겨 맞는다. 나는 그 날 하루를 노월의 집에서 묵고 이튿날 노월에게 (원주도 듣도록),

“자네네 집은 제일에 춥고, 그 위에 나는 된장국과 콩나물만으로는 밥이 목을 넘지 않으니 여관으로 떠나노라.”

고 선언하고 그의 집을 나와서 나의 年來[연래]의 定宿[정숙]인 태평여관으 로 옮겼다.

나는 그때 <영대>에 「遺書[유서]」라는 소설을 연재 중으로 신년호까지 나 나야 끝날 예산이었다. 그래서 신년호까지는 부득이 내야겠는데 <영대> 판매대금의 행방을 조사해 보니 안서의 술값과 노월의 콩나물 값으로 둘이 경쟁적으로 ‘총판매소’에서 찾아가는 형편이었다.

이에 <영대>는 신년호까지나 내고서는 폐간하려고 마음먹고 다시 평양 집 으로 돌아왔다.

평양으로 돌아와서는 김찬영과 의논하고 <영대>는 생명 6개월로, 제5호로 폐간하였다.

<영대>를 걷어치우기로 하고, 나는 소위 ‘산보’차로 잠깐 동경을 가는 길에 서울에 들렀더니, 춘원도 「인생의 향기」가 중단되는 것을 아꼈고, 안서는,

“<영대> 제6호는 어찌하고 동경으로 산보를 가느냐?”

고 항의하였다. ‘동경 산보’면 한두 시간이나 하루이틀로 끝날 것이 아니 고, 한두 달은 걸릴 것이니 그동안 <영대>는 어쩔 작정이냐는 것이다. 그래 서 유방(김찬영)의 의견이 폐간하는 게 좋겠다 하여 폐간하기로 합의가 되 었다 하니, 안서는 깜짝 놀라며 폐간이란 웬 말이냐 한다. 그래서 솔직하게 폐간 이유를 말했더니 안서는 ,

“여보게 연말연시가 아닌가, 양해하게 양해하게.”

그러나 이미 왕복 차표를 산 터이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렇듯 <영대>는 다섯 호로 다시 죽었다. <영대>는 다섯 호로 죽었지만 조 선문학 발전에는 아무 공헌도 없이 폐간된 것이다. 예전 <창조>를 발간할 때는 동인들의 의기가 벌써 ‘조선문학 건설의 본화’라는 생각 아래서 정 열과 정성으로 불탔지만 이번의 <영대>는, 1. 게을지 않기 위하여 1. 눈칫글 아닌 글을 자유로이 쓰기 위하여 이처럼 순전히 우리 동인들 자신의 필요와 욕구 때문에 생겨 났던 것이라, 거기는 조선문학을 건설한다든가 발전시킨다든가 하는 의욕은 낄 여지가 없 었다.

일본은 그때 대정 14년으로서 제1차 전쟁으로 돈벌이도 많이 하였고 문화 발달도 많이 한 ‘大正[대정] 爛熟期[난숙기]’였다. 난숙기의 일본의 수도 동경은 漫步者[만보자]의 기분으로 간간 들여다보기는 흥미있는 일이었다.

파산의 비극을 겪고 경제적인 여유를 잃기 이전까지는 나는 1년에 한두 번 씩 동경을 ‘산보’식으로 다녀오는 것이 취미요, 겸해 습관으로 되어 있었 다.

이리하여 <영대>를 집어친 뒤에는 또 잠깐 동경을 다녀온 것이다.

<朝鮮文壇[조선문단]> 시대[편집]

1924년 가을 춘해 방인근이 자기 시골 진답을 죄 팔아가지고 상경하여 춘 원 이광수의 집에 기류하면서 이광수 주재, 전영택․주요한 고문이라는 구호 로써 월간 문예잡지 <조선문단>을 창간하였다. 상해에 망명해 있던 이광수, 주요한 등이 그 직전에 ‘귀순’을 표명하고 귀국해 있던 것이었다. 그때는

<창조>의 잔당들의 <영대>를 간행한 직후요 <폐허>의 잔당들이 <폐허이후>를 계획 중인 시운이었다.

오늘날에 앉아서 보자면 이 춘해의 <조선문단>은 조선 신문학사상 몰각할 수 없는 큰 공적을 남기었다. 춘해 자신은 우금 조선문학에 기여한 한 개의 작품도 만들지 못하였지만, 그의 창간한 <조선문단>이 문학사상 남긴 공적 은 지대하다.

염상섭, 나도향, 현빙허 등이 스타트를 한 것은 <개벽> 지상이었지만 소설 가로 토대를 완성한 것은 <조선문단>에서였다.

서해(최학송―아까운 천재였다)의 요람도 <조선문단>이었다. 蔡萬植[채만 식]의 요람도 <조선문단>이었다. 尙虛[상허] 李泰俊[이태준]의 문학청년으 로서의 요람, 鷺山[노산] 李殷相[이은상]의 요람, 그 밖 적잖은 작가들이 이 <조선문단>을 요람으로 출발하였다.

이 가운데도 서해 최학송은 출중한 거물이었다. 삯꾼, 부두 노동자, 중, 아편장이 등의 파란중첩한 고난살이의 과거를 가진 최서해가 마음에 불붙는 문학욕을 품고 찾아든 것이 오래 전부터 사숙하던 춘원 이광수였다. 그 집 이 겸해 조선문단사 임시 사무소 겸 춘해 방인근 기류처였다.

춘해는 그때 조선문단사 주인(사장)이요 또한 스스로 기성인이라 자진하던 시절이요, 서해는 장차 출발하려는 아직 ‘알(卵)’이라 서해는 처음 조선 문단사의 사환 겸 문사 겸으로 있었다. 그때 갓 바람이 난 방춘해가 기생집 에라도 묵고 싶으면 서해를 시켜 인천쯤으로 가서 서해는 전화를 조선문단 사로 걸어서 방춘해의 부인(田有德[전유덕] 여사요 전영택의 매씨다)에게,

‘지금 잡지사 용무로 방 선생(춘해)과 함께 인천에 왔는데 혹은 오늘 밤 은 인천서 묵게 될런지도 모르겠읍니다.’

는 뜻을 통해 두고 방춘해는 마음놓고 기생(아마 김산월이라는 기생으로 기 억한다)을 품고 밤을 지새고 서해는 전화 끝내고 도로 서울 춘해에게 돌아 와서 방춘해가 기생 품고 자는 웃목에서 새우잠을 자는― 그런 불우한 세월 을 보내고 있었다. 사실 방춘해가 서해에게 대한 대접은 너무 잔학하고 너 무 무시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 한창 문학욕이 왕성하여서 바야흐로 폭발할 듯이 문학정열에 들뜬 서해는, 이 주인 아닌 주인(방춘해)의 수모를 쓰게 보지 않고 오직 이 집에 기류해 있으면 많은 문사들과 지면할 기회가 있고 또는 방춘해의 감식 에 맞으면 자기(서해)의 글을 <조선문단> 잡지상에서 실을 수 있는 점을 고 맙게 보아서 굴욕적 생활을 탓하지 않고 살고 있었다.


방춘해는 <조선문단>을 창간만 춘원 댁에서 하고는 용두리로 옮겼다. 시골 서 전답을 팔아 와서 돈이 있는지라, 문사들에게 원고료(200자 한 장에 50 전으로서 <개벽>도 그 정도였다)를 내주었다. 그리고 어느 편이 원인이고 어느 편이 결과인지는 모르지만― 즉 자기가 놀고 싶어서 문사들과 축지어 다녔는지 축지어 다니노라니 바람이 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매일같이 문사 들과 짝지어 놀러다니고 술 먹으러 다녔다. 명월관 지점, 혹은 태서관으 로….

나는 그때 평양 사는 사람이라, 늘 함께 놀지는 못하였지만, 상경하면 꼭 초대향응을 받았다. 그때 방춘해의 술을 많이 얻어 먹은 사람이 염상섭, 고 나도향, 고 현빙허, 고 유지영, 고 梁白華[양백화], 박월탄, 박회월 등과 심부름꾼 격인 최서해 등이었다. 그 모두가 斗酒[두주]를 사양치 않는 호걸 들이요, 또한 모두가 주머니 빈 사람들이라 매일같이 쓴 방춘해의 유흥비는 막대했으리라고 생각한다.

방춘해의 부인 전유덕(호는 春江[춘강] 여사)은 지금은 고인이 된 사람이 지만, 유명한 신경질의 사람이요, 질투 세고 욕 잘하는 사람이었다. 염상섭 이며 고 현빙허 등이 방춘해를 끌어내려(술 씌우려) 조선문단사로 찾아갔다 가 춘해 부인 춘강 여사에게,

“이 개자식들, 뭘 하러 지근지근 남의 참한 서방님을 유혹하러 찾아다니 느냐? 배라먹을 자식들.”

이라는 욕을 얻어먹기를 수없이 하였고, 눈치보아 가면서 욕 안 먹을 만한 사람을 골라서 밀사로 보내는 수단까지 써서 방춘해를 끌어내고 하였다.

나는 평양 사람으로 그다지 방춘해를 끌어낸 일도 없거니와 춘강 여사의 오라버니 되는 늘봄 전영택의 친구요, 그 위에 선배되는 관계도 있어서 춘 강 여사에게 개자식이란 욕을 얻어먹은 적은 없지만, 염상섭, 현빙허, 박월 탄, 양백화 등은 개자식 욕을 욕으로 여기지 않을 정도로 면역되어 있었다.

그 내가 어떤 해(1926년이라 짐작한다) 상경하여 그때의 정숙인 태평여관 에 투숙하여 저녁에 나도향을 만나 함께 태평여관에 묵은 일이 있다.

이튿날 아침 깨어서 그냥 일어나지 않고 자리에 누운 채 담배를 피우며 나 도향과 이야기하고 있노라는데 방춘해 당황한 얼굴로 찾아왔다.

눈에 눈꼽이 낀 채로 소청하는 말이, 이제 자기의 안해(춘강)가 이리로 자 기를 찾으러 올지 모르겠으니 와서 자기를 찾거든 지난밤 함께 자고, 일찍 돌아갔다고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 부탁을 하고 춘해 방인근이 돌아간 지 10분도 못 되어 우리(나와 나도 향)가 누워 있는 방문을 벼락같이 열며 춘강 부인이 들어섰다.

“우리 인근이 여기 있어요?”

나도향은 여러번 겪은 일인 듯이 그저 무심하였으나, 나는 대처 그 ‘우리 인근’이란 날에 놀라서,

“춘해 말입니까?”

곧 반문하였다.

“예. 그 녀석 그래 어디 있어요?”

“방금 나간걸.”

“자리 어디 폈었어요?”

거기는 나와 나도향 두 사람의 자리만 아직 개키지 않은 채 있는 것이었 다.

“보이가 개켜 내갔지요.”

“그래 어디를 간다구요?”

“댁으로 갔을걸요.”

히스테리 일으킨 여인의 독특한 흥분된 어조로 이놈을 , 이놈을 중얼거리 면서 다시 왜각 문을 닫고 돌아서는 춘강 여사에게 나는 오히려 공포감까지 느꼈다.

이런 무서운 암〔雌[자]〕범의 시하에서도 그냥 바람 부릴 수 있는 방춘해 의 용기가 깊이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시에 그 암범의 감시 아래 있 는 재경문사들의 재간에 또한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형편이라, 그때 방춘해가 제 집에서 외출을 하려면 內[내]허락을 받 지 않으면 안 되고 내허락을 따내기 위하여 최서해의 인천 시외전화의 수단 이 안출되었고(서해가 인천에 밀파되어 조선문단사로 전화 걸어 급한 社務 [사무]가 있으니 인천으로 오라고 하는 것이다),그렇지도 못한 때는 뒷일은 어떤 벼락을 맞던 간에 부인의 눈만 안 떼는 데 빠져나오는 것이다.

그러니까 방춘해가 밖에 빠져나올 구실을 얻기 위해서 조선문단사에서는 교외 절간에 ‘좌담회’‘합평회’등을 자주 열었다. 그리고 그것(회합)뒤 에는 반드시 제2차 회가 어떤 요정에 열리었다.

나도 상경한 때마다 그러한 좌석에 참여했지만, 그때 함께 담소하던 벗이 대개 벌써 저 세상으로 간 오늘날에서 회고하자면 감개 깊고 짝없이 그립 다. 나도향, 현빙허, 양백화, 유지영, 최서해, 전춘강 여사. 모두 아하 아 하.

그러나 돌아보건대 조선문학 30년에 그 시절이 가장 호화스러운 시절이 아 니었을까?

문단에는 파당적 분열이 없고, 선배와 후배 새에 샘이나 자만의 갈등이 없 고, 모두 서로 자기문학 건설에만 열중한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그리고 3․1 운동 뒤에 신혼기분과 호경기에 따르는 생활안정 가운데서 마음이 모두 부 드럽고 용가하고 기운찬 분위기가 작품 행동에도 영향되어 활발하고도 무게 있는 작품들이 속출하였다.

이런 점으로 보아서 방춘해의 공로도 크다 보지 않을 수 없다.

방춘해는 시골서 논밭을 팔아 가지고 서울 올라와서 <조선문단> 잡지와 술 값에 다 탕진했지만 '<조선문단> 시대' 라는 한 절기를 만든 것은 크게 감 사해야 할 것이다.

나의 原稿料[원고료][편집]

<영대>를 집어치운 뒤에 한도안 나는 한가한 몸을 대동강의 낚시질로 소일 하며 원고료 받지 않은 처지라, 그야말로 자셋상스럽게 기고를 하며 지내다 가 심심풀이로 훌쩍 일로 동경으로 ‘산보'를 갔다.

이 ‘동경 산보’라는 말의 유래는 이러하다.

어떤 때 동경까지 잠깐 놀러가느라고 평양을 떠나서 잠시 서울에 들렀는 데, 서울 전차에서 문득 오래간만에 춘원을 만나서 어디 가느냐고 묻기에 ‘산보’라고 대답한 위에 이어서,

“동경 잠깐….”

했더니 춘원은,

“아, 동경 산보요? 과연 東仁式[동인식]이로군.”

하여 그 뒤부터는 동인은 동경을 산보처럼 다닌다는 말이 났고, 친구들을 만나면,

“동경 산보 안 가느냐?”

고 웃음의 말을 하게 된 것이다.

평양서 동경까지 왕복 차표를 사가지고 갔었는데 동경에 한 달쯤 놀고 인 젠 귀국하려고 보니, 왕복 차표에 돌아오는 절반 차표가 없어진 것이었다.

동경서 한 달 지내는 동안, 언제 어디서 잃었는지 알 수 없는 분실이었다.

장차 돌아갈 동안 기차에서 쓸 비용 밖에는 다 써버린 뒤라 귀국할 차비가 없었다.

그때 동경 왕복 차표는 통용 기한 두 달이요, 2할이라는 특전이 있으므로, 이 초라한 특전에 유혹되어 두 달 동안 보관하기 힘든 작다란 왕복을 샀던 자신을 내내 나무라면서, 일변 집으로 편지 띄우고 또 조선문단사와 ‘개벽 사’에 원고료를 좀 주겠느냐고 편지를 하였다. 그랬더니, 집(평양)에서와

<조선문단>, <개벽> 두 잡지사(서울)에서 같은 날 돈이 왔다.

미루어, 평생 처음 청구하는 원고료에 말 떨어지기 무섭게 곧 보낸 것이 분명하였다. 더우기 내 예상 이외로 많은 금액이었다.

나는 이리하여 원고료라느 것을 동경여행 때 처음 받아 보았다.

두 잡지사에서 보낸 액수가 서로 같은 점을 보아서 당시 잡지사로서 작자 에게 대접할 수 있는 최고 금액이었던 모양이다.

보통 2등차를 타던 내가 예상 이외 필요 이상의 돈이 들어온 덕에 1등차에 푹 박혀 호화로운 기차 여행을 하여, 자기의 땀으로 번 돈을 쓰는 기분을 상쾌하게 느꼈다.

이것이 내게 있어서는 처음 받은 원고료인 동시에 처음 내 노력으로 번 돈 이었다.

그러나 그때의 나의 관념은 여전히,

‘원고는 쓰되 돈을 받을 것이 아니라.’

는 것이었다. 원고에 대해서 돈을 받는다면 아무리 해도 심리상의 구속이 생길 것이요, 심리상의 구속이라도 있으면 맑은 맛이 없게 될 것이다. 한껏 자유로운 기분 아래서 붓을 잡기 전에는 아무리 해도 불순성을 띠게 된다 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三千里[삼천리]>[편집]

방춘해의 <조선문단>도 춘해가 돈을 다 없앤 뒤로는 폐간하여 버렸다. 지 금 생각하면 그만한 부수가 나왔으면 수지는 맞을 성싶은데 술값이 너무 많 이 나가서 폐간의 비운에 빠지게 되었을 것이다.

<조선문단> 잡지가 없어지매 조선의 문단도 한때 침체였다. 잡지 <조선문 단>에서 빛을 競艶[경염]하던 꽃이 다 한꺼번에 사라진 모양이었다.

어느 땅이던 그렇겠지만, 우리 땅은 더우기 명료히 출판물과 문학과가 共 生共死性[공생공사성]을 보인다. 출판계가 아직 왕성치 못한 탓이겠지만, 잡지가 몇 개 생기면 문단도 활기를 띠고 잡지가 몇 개 없어지면 문단도 침 체하고, 잡지가 없어지면 문단도 동면기에 든다.

방춘해의 <조선문단>이 폐간되고 <개벽>이 적잖게 좌익화하자 몇몇 좌익계 열의 문사가 겨우 꺼져 가는 생명을 존속할 뿐, 신생 조선문단은 침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평양서 천하만사를 잊고 낚시질로만 소일을 하다가 그도 부족하여 또 놀아났다.

<조선문단>과 <개벽>의 원고료로 비교적 곤궁치 않은 생활을 하던 재경 문 사들은 <조선문단> 폐간되고 <개벽>이 좌익화하자 작가로서 밥줄이 끊겨져 서, 혹은 재빨리 신문사에 취직하며 혹은 문학을 폐업하며 등, 신생 조선문 단은 참담한 형태에 빠졌다.

이런 때에 巴人[파인] 金東煥[김동환]의 <三千里[삼천리]> 잡지가 조선문 학의 명맥의 한 귀퉁이를 붙드는 역할을 하였다.

파인은 감개성 많은 시인이었다. 동시에 조선일보 기자였다. 들리는 바에 의하건대(사실 여부는 보증하지 않는다.) 파인은 조선일보 기자로 당년 개 최 되었던 共進會[통진회] 끝난 뒤에 출입기자에게 준 수당금(진실로 약간 한 금액이다)을 가지고 버리는 셈치고 <삼천리>를 창간하였다는 것이다.

파인의 하숙집, 빈대투성이의 파인의 거실― <삼천리>사 편집실 발행과 발 송실, 영업실을 겸했고 파인이 사장 ․ 편집인 ․ 기자 ․ 하인을 겸한, 참으로 빈약한 출판이었다. <조선문단>을 요람으로 출발한 파인이지만, 그 당시는 진실로 무명한 시인이었다. 저널리스트의 열력도 적고 문단적인 열력도 적 고 한 사람이었지만, 그 재치있고 엇글수한 편집 기술에 일종 미혹성이 있 어 <삼천리>는 시골 독자에게 환영을 받았다.

돈이 없는 파인이요, 따라서 원고료를 내놓지 못하는 형편이며 우의에 호 소해서 얻어내는 원고와 파인 자신이 꾸민 폭로 기사, 에로 기사 등의 하잘 것 없는 내용의 <삼천리>였지만, 이 밑천 아니 먹힌 잡지사 시골 독자에 매 력 있었던 모양으로 비교적 잘 팔리었다.

게다가 또한 <개벽>은 좌익화하고 그 위에 잡지 내용보다도 원고료 지불을 아낄 필요로 신진급도 못 되는 무명인의 글만을 취급하는 형편인데, 파인의

<삼천리>는 그 목차가 벌써 사람의 호기심을 자아낼 만하여 일테면 ‘삼천 리식’이라는 한 타입이 생겼다.

파인은 신문기자라는 직업을 집어치우고 잡지에 전력을 하였다.

당시 잡지란 다 없어지고 오직 <개벽>과 <삼천리>(명색은 월간이지만 대개 서너 달 혹은 너덧 달에 한 호가 났다)뿐이라 작품 발표기관을 잃은 신시단 은 극도로 침체하였다. 때때로 마음 속에 충일된 창작욕에 참지 못하여 써 낸 우수한 작품들이 저절로 <삼천리>에 모여 <삼천리>에는 간간 <삼천리>답 지 않은 우수한 글이 발표되어 이 덕으로 <삼천리>의 인기는 더욱 높아 갔 다.

春園[춘원]의 再活動[재활동][편집]

이 문단 침체의 기간을 나는 평양서 돌아왔다.

그런데 상해 망명에서 돌아온 춘원 이광수와 주요한은 얼마 뒤에 동아일보 사에 들었다.

춘원이 다시 글(소설)을 쓰기 시작하였다.

이광수 주재라는 명색의 춘해의 <조선문단>에 단편이 몇 편 있었지만, 춘 원 자신도 창작 방면에 자신이 없었던 듯 <영대>가 폐간되기까지 그 <영대>에 자서전 「인생의 향기」를 연재하다가 중단한 뿐으로 창작방면에서는 손 을 떼었다가 동아일보와 특수관계를 맺자 동아일보에 대중소설을 쓰기 시작 하였다.

이 춘원의 재활동은 신생 조선문학 건전한 발육에 지대한 장해를 주었다.

그때의 우리는 소설의 기초, 소설의 근간을 ‘리얼’에 두고 아직껏 「春香 傳」[춘향전]「沈淸傳」[심청전] 혹은 「九雲夢」[구운몽]「玉樓夢」[옥루 몽] 등이나 읽던 이 대중에게 생경하고 건조무미한 ‘리얼’을 맛있게 먹으 라고 강요하던 것이다.

그 구시대의 마지막 잔물이요, 신시대에 한 풀 들여민 이가 국초 이인직이 었다.

국초의 뒤를 이어 신문화의 봉화를 든 이가 춘원 이광수였다. 그러나 구시 대에서 신시대에 들어서는 춘원에게는 아직 낡은 옷이 너무도 여러 벌 입히 어 있었다.

그런 소설에 젖은 이 땅 대중에게 ‘리얼’만을 가지고 이것을 맛나게 먹 으라고 강요하는 것은 혹은 무리한 일일 것이다.

처음에는 앞서는 정열에 앞뒤를 가리지 않고 이 생경한 ‘리얼’문학을 대 중에게 이거야말로 문학이라고 제공하고 있던 것이다. 대중은 짐작컨대 맛 은 모르고 이 맛없는 문학을 맛있게 받는 것이 이 현대인의 피할 수 없는 의무인가 하여, 맛없는 가운데서라도 맛을 발견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이런 세월이 얼마를 계속하노라면 대중도 종내는 리얼의 ‘맛’과 ‘멋’

을 이해하는 시절에 이르리라는 장구한 생각으로, 우리는 그냥 우리의 리얼 의 길만 고집하고 있던 것이다.

이런 때에 춘원이 재활약을 시작하여 리얼에 소화불량된 이 대중에게 다시 통속, 흥미중심의 소설을 제공하는 것은 우리 문학발달에 큰 지장이 아닐 수 없다.

이 고장, 이 지장에도 불구하고 온 문단은 춘원과 別立[별립]하여 신문학 건설로 정로만 고루 밟았다. 그러나 발표기관이 없는지라. 움돋는 신문학의 싹은 자라지를 못하고 일견 사멸한 듯한 형태에 놓여 있었다.

동아일보가 조선 언론계에 군림하고 출판계에 군림하는 자리를 반석처럼 확보하는 반면에, 문학 발표기관은 없는 세월이 한동안 계속되어 문학은 참 담한 형태로 떨어지고, 문단에서 고립된 이광수는 동아일보를 배경으로 온 대중에게 지지받으면 커다랗게 일어섰다.

그러나 춘원이 재활동하는 처음 무렵에는 자기는 창작자는 못 된다는 스스 로 삼가는 마음으로 「許生傅」[허생부] 등의 講談[강담]으로 카무플라주하 는 풍이 보이었지만, 대중의 지지가 자기에게 있다고 믿은 뒤부터는 소설이 라는 칭호는 붙일 수 없는 설화를 역사소설이란 명칭으로 연해 동아일보에 썼다.


이것은 오직 춘원만을 허물할 것은 아니다. 동아일보의 사시가 그러하였 고, 사장 고 宋鎭禹[송진우]의 명령이 그러하였다. 송진우는 자기가 신문소 설(동아일보에 실리는)을 읽는 배가 아니요, 그의 안해(본시 평양 기생)가 신문소설의 고문이라, 안해가 읽어서 재미있다는 소설의 작가를 고르자니 자연 그렇게 되는 것이요, 게다가 ‘신문 잘 팔리도록’이라는 조건이 붙고 보니 부득이한 일인 것이다.

원칙적으로 말하자면, 구소설에서 현대문학으로 올라가는 도정에는 그러한 계단은 없지 못할 층계이기는 하다. 게다가 신문지상에 소설을 이용하여 이 우리 민족에게 위정 당국이 감추던 우리의 역사를 알리고 민족사상을 주입 한 점은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신흥 문학도들은 춘원을 문학도의 반역자라 하여 문단에서는 아주 제외하고, 춘원은 춘원대로, 문단은 문단대로 각각 딴 길을 걷게 된 것이 다.

춘원은 또는 요한은 나더러도 동아일보에 소설을 쓰라고 몇 번 말하였다.

그러나 문학의 길에 대하여 청교도 같은 주장을 가지고 있던 당년의 나는 동아일보가 고답적 소설을 용인하지 않는 한 , 나는 거기 붓을 잡을 수 없 노라고 내내 사절하였다.

진정한 의미의 신문학에 주춧돌을 놓았노라고 스스로 믿고 있는 나로서는 차마 문학의 진정한 발달에 저해되는 일은 할 생각이 없기 때문이었다. 아 래 다시 쓸 기회가 있겠거니와, 당년에 그렇듯 프라우드하던 내가 돌변하여 역사소설로, 史譚[사담]으로 막 붓을 놀리어서 적지 않은 사람을 뒤따르게 하여 발전 노정에 있던 신문학을 타락케 한 것은 나로서는 나로서의 이론이 따로 있다 할지라도, 또한 스스로 후회하여 마지않는 바이다.

이렇듯 나는 평양서 놀아나고 있는 동안에, 그때(안서 김억도 평양에 와 있었다)의 문단은 사멸된 듯 고요하고 춘원이 홀로 대중소설에 붓을 놀리고 있었다.

左傾文學[좌경문학] 擡頭[대두] 時節[시절][편집]

좌익문학이 대두한 것이 문단 부진의 그 시절.

소련에서 제조되어 일본을 거치어서 우리나라까지 수입된 그때의 이론은 문학상의 온갖 기교를 무시하자는 것이었다. 무산자는 기교를 희롱할 유한 한 신분이 못 되니 문학상의 모든 기교는 有閑[유한] 문학자에게 맡기고 무 산자는 기교를 무시한 문학을 만들 것이라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이 문제로 같은 좌익문학 진영에도 회월 박영희와 팔봉 김기진과 의 사이에 대립이 생겨서 적잖은 논전까지 있었다.

종내 기교 무시를 주장하는 회월이 승리를 하여 좌익문학은 기교따위를 돌 볼 한가한 처지가 아니라는 논지 아래서 한때 소위 ‘살인 방화 소설’전성 시대를 현출한 일까지 있었지만, 온 문단이 침체한 시기에 주로 <개벽>을 터전으로 대두했는지라 처음 꽤 활발하게 움직였다.

그때 기성문인들은 다 동면상태의 시대라 좌익문학은 발생하면서부터,

“낡은 문학과 낡은 사상은 모두 사회에서 청산하였노라.”

고 개가를 크게 외쳤다.

그렇게 외쳐도 상당할이만치 문단은 고요한 동면상태였던 것이다.

소위 ‘청산’이라는 말은 좌익계열이 즐겨 쓰던 용어로서, 어떤 문사(우 익 계열의)의 어떤 사정으로 한두 달 혹은 반 년 일 년 붓을 쉬고 있으면, 성급한 좌익계열은 임시 휴식을 영구 정지로 속단을 하고 ‘청산했노라’고 쾌재를 외치고 하였다.

그러한 시기 도안을 나는 고향 평양에서 술과 계집과 낚시질로 모든 다른 일에서는 떠나서 살고 있었다. 그러다가 펄떡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니, 그 새 6, 7년간에 굉장한 남용으로 내 재산상태가 현저하게 흔들림을 본 것이 었다.

이에 어느 권고하는 사람의 권에 따라서 나는 토지관개사업을 시작하기로 하였다. 평양 근교에 몇백 정보되는 땅에 물을 대어 주어서 논을 풀게 하고 그 水稅[수세]를 받아 생활을 경영하기로 한 것이었다.

평양서 전선을 게까지 끌어내어 전기의 힘으로 물을 끌어 논을 푸는 것이 었다.

薄土[박토]가 美沓[미답]으로 변하여 거기 벼가 나서 자라는 것을 바라볼 때에 스스로 만족감과 긍지를 무한히 느끼면서 이 새사업에 도취하였다.

그 가을 수세로 들어온 큰 낫가리를 보며, 이만하면 내 경제생활은 그냥 유지되려니 하고 있는데, 뜻밖에도 조선총독부 당국에서 관개상업 불허의 지명이 나온 것이었다.

이것은 물론 일본 정부에서 쌀값 폭락을 방지하기 위하여 朝鮮産米[조선산 미] 移入[이입]이 제한되기 때문에 조선총독부는 거기 추종하여 産米制限 [산미제한] 정책을 쓴 탓도 있겠지만, 또 한 가지 원인은 그때 현장(개간) 을 조사하러 나왔던 일본인 관리와 민족 차별적 감정으로 언쟁이 시작되어 그 관리를 쫓아 돌려보낸 것이 원인이 된 것이다.

단지 물허가에 그친 뿐 아니라, 이미 개간했던 땅을 다 도로 원상 회복을 하라, 즉 논이 되었던 땅을 밭이나 뚝으로 회복해 놓아라 하는 것이었다.

전기를 끌어내다가 설비를 하는 데 막대한 비용이 걸린 데다가, 다시 원상 으로 회복해 놓는 데 다시 막대한 비용이 걸치어서, 그렇지 않아도 현저하 게 흔들림을 보았던 나의 재산상태는 아주 발가숭이― 잘못하면 큰 빚을 지 고 떨어질 형편이었다.

관개했던 땅을 다시 원상 회복을 하려면 나의 남아 있는 재산(땅)을 죄 팔 아버려야 할 형편이었다. 나는 모든 것을 깨끗이 내버리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명문소집 귀동으로 고이고이 자라나서 가난을 모르고 부족함을 모르 던 이 호화로운 젊은이가 장차 돈없이 세상을 살아가야 할 생각을 하니, 기 막히고 아득하였다.

천금의 귀한 줄을 모르고 만금의 많은 줄을 모르던 몸이, 이제 장차 푼전 에 딸리는 생활을 생각하매 그저 딱하였다.

그냥 지나가면 몇 해는 더 부족 모르고 지낼 것을 남의 꼬임에 빠져서 괜 한 노릇(관개사업)을 시작해서 재정적 몰락을 다그어 끌었거니― 나무려운 생각까지 매우 컸다.

나는 재산정리의 사무를 아내에게 일입하였다. 차마 내 손으로는 祖[조]의 유업을 팔아 없애기 싫어서 아내에게 말하여 이것 이것을 팔아서 정리하고, 그래도 모자라거든 이것 이것을 팔고 어느 것은 할 수 없는 경우가 아니거 든 최후까지 남겨 두라고 부탁을 한 뒤에 나는 그 모든 것이 차례로 팔리는 상황을 보기가 역하여 서울로 피해 올라왔다.

서울서는 中學洞[중학동] 어느 집에 몸을 던지고 그 겨울을 보내고, 이듬 해도 여름이 가까와서 집으로 돌아가 보니 본시 적지 않던 논밭은 다 없어 지고 그것을 팔아 빚을 정리하고, 꼭 남고 모자람 없이 들어맞더라는 아내 의 말이다.

中學洞[중학동] 時節[시절][편집]

‘文[문]은 窮也[궁야]라.’

하여 글과 궁함을 불가분의 것이라는 중국인의 말도 있고,

‘붓은 한 자루요, 젓가락은 두 개라.’

하여 한 자루의 붓으로 두 가락의 箸[저]를 당하지 못한다고도 하거니와, 더우기 이 땅의 문사들과 가난과는 숙명적으로 떨어질 수 없는 연분인 양하 여, 내가 서울로 올라와서 중학동에 하숙하고 들어보니 자라던 신문학은 동 면에서 거진 사멸 상태요, 따라서 문사들은 모두 붓을 깊이 감추고 딴 직업 에 종사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서해 최학송은 어는 券番[권번]의 기생잡지 간행의 일을 도와주고 있었는 데, 이것이 좋은 부류에 드는 지극 참담한 형편이었고, 안서 김억은 영리한 사람으로서 고향인 郭山[곽산]에는 밭낟알이나 있지만 그것은 처자를 위하 여 남겨 두고 단신으로 상경하여 어떤 출판회사에 「위인 와싱톤전」이니

「위인 그렛스톤전」이니 하는 것을 연해 팔아서 그것으로 그 새는 비교적 유복한 생활을 하고 ‘假面’[가면]이라는 개인잡지까지 한 호(두 호이든 가)를 내놓아 보기까지 하였으나, 이 침체기에는 안서까지도 할 수 없이 그 의 장기 ‘에스페란토’를 팔아서 그것으로 호구를 하다가 그것으로도 당할 수 없어 시골 논밭을 팔고 가족을 서울로 불러올리어, 서울서 살림을 하면 서 처세상 불리한 문우 교제는 아주 끊고 ‘에스페란토’제자들과만 교우를 계속하고 있는 즈음이었고, 주요한은 서대문 안에 ‘태백상점’이라나 하는 고무신 가게를 내고 고무신 장사에 겸 동아일보 기자(조사부장이었다) 노릇 을 하고 있었고, 염상섭은 술값이 없으면 두문불출하는 사람이라 꾹 집에 숨어 생사조차 형편이었고, 임노월은 고향 진남포에 내려가 있었고, 함께 따라갔던 아내( ? ) 김원주는 노월과 이별하고 혼자 서울 올라와 사직골 어 떤 하숙집에 하숙하고 새 남편을 물색중이었고, 춘해 방인근은 소식 불명이 었고, 신출이었던 노산 이은상, 상허 이태준, 채만식 기타는 전연 소식도 알 수 없었다.

滿月臺[만월대], 善竹橋[선죽교], 慶州[경주]의 시조와 역사대중소설로 뒷 날 이름을 나타낸 월탄 박종화는 그때는 아직 미미한 존재로서 白華[백화] 梁建植[량건식], 염상섭 등의 술친구인 관계와 <백조> 잔당인 관계로 문단 에 알리어 있었는데, 그는 서울 商家의 자제로 부호의 둘째 아들로 생활은 안정된 사람이었지만, 아버지와 형의 겹친 시하라 현금은 푼전을 손에 쥐어 보지 못하는 판이라, 역시 불경기에 문사축에 얼굴도 나타내지 않고 집에 박혀서 나지 않고 있었다.

이렇듯 문사들은 각기 제 입 풀칠하기만 급급한 판국에, 나는 서울로 올라 와서 중학동에 하숙을 잡고 들어앉았다.

파산이라는 비운을 목도하지 않고자 도피해 온 나인지라, 꺼져들어 가는 암담한 심사를 속이기 위하여 하숙에 마장 상과 마장 쪽을 사다 놓고 보료 방석 화문석을 벌여 놓고 친구들을 청하여 매일 밤을 새면서 마장을 놀았 다. 대체 마장이란 유희는 바둑이나 장기와 달라서 돈을 거는 내기가 아니 면 싱거운 것이라 돈없는 문사들은 피하고 장사치들을 상대로 돈내기 마장 을 놀아서 그날그날의 암담한 심사를 속이고 있었다.

도박운이 약한 나는 적잖은 손해를 보고 하였으나 이런 노릇이라도 하지 않고는 배겨내지 못할이만치 마음이 괴로왔다.

문사로서는 그래도 간간 푼전을 만질 수 있는 김억만이 한두 번 놀아 보고 는 손해 보았노라고 발을 끊고 오직 장사치들이 그때에 나의 동무였다.

그 겨울 어떤 잡지엔가 김원주(一葉[일엽] 여사)의 시― 라기보다는 예삿 글을 짤막짤막이 끊어서 딴 줄로 쓴 것이 발표되었는데, 그 글은 전문이 이 성이 그리워 죽겠다는 뜻으로 차 있는 글이었다.

임노월과 헤어져 혼자 사는 과부 김원주였으며 몸이 풍만하고 육감적인 일 엽 여사라, 이 글을 보고 그의 심경을 짐작했다. 더우기 일없이 하숙으로 찾아와서 한참씩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다가는 돌아가던 그가 생각나서 마음 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그 겨울 크리스마스날 일본의 대정 천황이 죽었다. 벌써 죽은 것을 감추고 있느니 어쩌니 항간 말썽이 많던 대정이 그 15년의 제왕 생애를 마치고 별 세한 것이었다. 일본의 대정 난숙기, 명치가 45년간 쌓아올린 제국에서 15 년간을 무사평온한 임금 노릇을 하다가 세상 버린 그 발표에 호의를 앞에 펴놓고 내 하숙에서는 역시 마장판이 벌어졌다.

2, 3일째 나는 치통으로 신음하고 있던 차이라 친구들에게 마장을 시키고 나는 보료에 누워서 참예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밤도 김원주가 찾아왔다. 마장 친구들이 들어오기 전부터 지금껏 그냥 않아 있던 것이다.

일찌기 모 전문학교 교수의 영부인이었던 몸으로 임노월과 눈이 맞아 본남 편을 버리고 노월의 안해인지 첩인지 애인인지로 노월의 본댁 진남포에 한 동안 가 있다가 다시 노월과 헤어져(버렸는지 버리웠는지는 모른다) 홀몸으 로 지내는 그였고, 최근 그 성욕에 미칠 듯한 글을 공공연히 내놓은 그에게 동양 도덕적 불쾌감을 품고 있는 나는, 나에게 무릎을 베어줄 듯 가까이― 마장 상과는 등지고 있는 그를 외면하여 아까 복용한 강렬한 진통약에 취하 여 누워 있었다.

보통 밤을 새던 마장패들이 그 날은 11쯤 끝내고 내게 눈을 끔쩍 하면서들 돌아가는 것은 무슨 딴 뜻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강렬한 진통제와 치통 에 부대낀 나는 그냥 담벽을 향해 누운 채 움직임 없이 있었다.

원주는 얼마나 더 앉아 있었는지 모르지만,

“전차가 인젠 끊어졌을 텐데 어떻게 가나―.”

혼자 걱정을 종알거리면서 밤이 꽤 깊어서 돌아갔다.

중학동서 사직골까지 거리는 약간 있으나 전차 탈 곳은 없는 것이다.

그 일이 뉘 입에서 소문 퍼졌는지 연말 가까운 어떤날 서해 최학송이 하숙 으로 놀러 왔다가,

“일엽, 살 푸근푸근하지요 ?”

하며 웃는다. 나는 “에이, 여보” 하여 일소에 붙여 버렸지만 그 뒤로 두 세 친구에게서 그런 조롱을 받은 일이 있다.

그 일 뒤로는 원주는 다시 중학동 하숙에 온 일이 없었다.


서해가 南[남] 某[모]( ? )라는 出財者[출재자]를 붙들어 가지고 그가 예 전 하인처럼 있으면서 조력한 일이 있는 방춘해의 <조선문단>을 속간하겠다 고 소설 한 편을 부탁하였다.

나는 <조선문단> 복간이 반가워서 오래간만에 붓을 잡고 내 외사촌 누이가 겪은 일을 토대삼아 한 단편을 만들어 서해에게 주었다.

「딸의 業[업]을 이으려」라는 단편이다. 그랬더니 이튿날로 몇십 원의 원 고료를 가져왔다.

지난날 동경서 차표를 잃고 조선문단사와 개벽사에 편지하여 좀 융통받은 일이 있지만 그것은 ‘원고는 거저 주’고, 뒤에 <조선문단>과 <개벽>에서 는 또 한 사례의 의미로 보낸 것이지 매수를 세어서 원고료를 받은 것이 아 니었고, 이번 것이 진정한 의미의 나의 첫 원고료였다.

매일 마장 도박으로 잃은 금액에 비기자면 하잘것 없는 적은 돈이었지만 이 돈이 고마워서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그 돈으로 만년필과 잉크 스탠드를 사서 그 만년필로써 그 뒤 적지 않은 글을 썼다.

이 중학동 시절에 望洋草[망양초] 金明渟[김명정](혹은 김탄실 양)이 <매 일신보> 기자로 며칠 들어갔다. 이것이 여자 신문기자의 맨 처음이었다.

망양초는 ‘남편 많은 처녀’라는 일컬음을 듣던 사람으로서 일찌기 동경 유학 때에 몇 남편을 경유한 것을 비롯하여 귀국해서는 임노월을 경유(김원 주 보다 먼저다) 하고 유방 김찬영을 경유하고 그 뒤 서울서 처녀과부로 지 내던 터이었다. 따라서 딴 수입 없이 지내노라니 매우 곤핍하였고 들리는 평판에는 안서며 상섭이며 萬壽[만수]들이 식지 움직여 혹은 하숙으로 찾고 혹은 함께 산보를 청하고 했으나 정절을 굳게 지키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는 나는 보증치는 않는다.

망양초라는 사람은 뒷날 내 소설(「金姸實傳」[김연실전])의 주인공이라고 세상에서 추정하는 사람으로, 그의 오라비와 내가 소학 1년생 때의 동창생 이었던 관계로, 본시부터 지면이 있었고 내가 패밀리 호텔에서 놀아날 때에 곁방에 있던 김유방의 리베로 몇 번 보았고, 그 전에는 임노월의 리베로 대 한 일이 있어서 좀 쑥스러운 데도 불구하고 얼굴 붉히지 않고 나를 대하였 다.

뒷이야기지만 그는 매일신보사에 며칠 있다가 퇴사하여 한때 독일 유학 가 겠다고 독일어를 배운다고 김 모(현재 한국민주당의 효장이요 당시 좌익운 동의 거물)를 찾아다니다가 사제간 이상한 관계가 생겨, 그때에 그의 또 다 른 친구(남자)와의 사이에 삼각관계에 격투까지 있었다는 말을 들었다.

망양초는 나보다 연장자인 오라비를 가졌고 역시 나보다 연장자인 리베를 몇 사람 경유한 여인이라 나더러 봇쟝봇쟝 하며 중학동을 가끔 찾아왔다.

찾아와서는 林[임], 金[김] 등과 좋게 지내던 이야기는 하는 일이 없고, 그 대신 안서며 상섭이 자기에게 어떻게 어떻게 구는 것을 자기는 어떻게 땄노 라고 자랑삼아 이야기하면서 웃고 하였다.

그러나 영업적 賣女[매녀] 아닌 여인에게는 동양인적의 불감증인 나는 망 양초에게 아주 흥미도 느끼지 않고 그의 뜻있는 듯한 자랑에 그저 머리만 끄덕이고 있을 따름이었다.


망양초에 대해서는 또 후일담이 있을테니 그만치 쓰고, 최서해가 출재자를 붙들어서 만든 <조선문단> 속간은 한 호―ㄴ가 두호―ㄴ가 내고 출재자는 또 사라졌다. 그것을 발간하는 동안, 그때 탐정소설의 애독자이던 채만식도 적지 않게 협력하였고 채만식의 문단 진출이 그때부터 시작되었다고 기억한 다. 그러나 최서해의 열성과 문사들의 의지는 그냥 계속되었지만 출재자의 열의가 끊어져서 속간 <조선문단>도 폐간되었다 그것이 폐간된 뒤에 서해는 다시 주선하여 누구를 붙들고 <現代評論[현대 평론]>이라는 종합잡지를 시작하노라 하며 원고를 부탁하기로 「소설가의 詩人評[시인평] 제3 金億論[김억론] 써서 주고 <현대평론>이 발행되는 것을 보지 않고 다시 중학동 하숙을 집어치우고 평양으로 돌아왔다.

그때는 재산을 다 정리해 없어지고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안해의 말이었 다. 나는 아무 말도 안했다. 하면 무얼 하랴. 한 푼 없는 깍대기라는데도 불구하고 밥상에는 늘 기름진 음식이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진솔 새 옷 만 제공되는 수수께끼의 살림에도 나는 한 마디도 없이 오직 침묵하였다.

내 주머니가 늘 비어 있을 뿐이지 생활은 지난날과 아무 다름이 없었다.

이런 수수께끼의 생활이 반 년이나 계속하였다.

여름부터 나는 또 낚시질을 시작하였다. 대동강은 나에게는 다시 없는 보 배였다.

쓸쓸하고 아픈 회포도 대동강에 호소하면 씻기어나가는 듯하였다.

평양에 너서 첫 멱〔初浴〕[초욕]을 대동강 물에 감고 자란 자, 누구 대동 강에 대하여 지극한 애착을 안 느끼는 자 있으랴마는, 나의 감상적이요 정 열적인 성격은 더욱 대동강에 대한 애착이 심하여서, 망연히 대동강물만 굽 어보노라면 모든 수심과 괴로움이 사라져 없어지는 것이었다.

生活[생활] 破局[파국][편집]

여름에서 시작한 낚시질은 가을도 마가을까지 미쳤다.

마상이에서 자고 마상이에서 깨고 마상이에서 밥지어 먹고 아주 마상이에 서 살았다.

때때로 쌀이 필요하다든가 담배며 성냥이며가 필요하든가 옷을 갈아입을 필요가 생기든가 하는 때어만 집에 들어갔다. 그러면 안해는 내 취미, 내 성격에 맞을 만한 장그런 물품을 준비해 두었다가는 제공하고 하였다.

평양의 마상이라는 배는 대동강에서 낚시질을 위하여 만들어지고 발달한 배다. 크기는 한 조각 편주에 지나지 못하지만 노를 젓는 손짓에 따라서 앞 뒤와 동서로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어서, 가령 큰 고기가 낚시에 걸리어 달아날 때는 고기를 따라 동서남북으로 자유자재로 쫓아다닐 수 있고, 비올 때나 잠잘 때 위에 덮은 ‘뚬’이 있고, 닻을 달고는 여울도 올라갈 수 있 고, 낚시질의 온 도구를 배에 장비하게 된 경첩한 배다. 그리고 평양 사람 으로는 마상이를 조종할 줄 모르는 사람이 아마 없을 것이다.

언젠가 안서가 평양에 놀러왔다가,

“나는 마상이를 저을 줄 안다.”

고 뽐내며 마상이 타러 가자기에 함께 갔더니, 안서는 마상이의 노를 들고 일어서서 뒤로 향하여 돌아서되 머리를 더풀거리며 숨이 차서 젓고 있었다.

마상이란 대체 그 전에 앉아서 앞을 바라보며 왼손만으로 가볍게 젓는 것 이 원칙이다(오른손은 아주 쉰다). 안서처럼 힘들이고 애써서 젓는 것이 아 니다.


마상이에서 낚시질로 천하만사는 잊고 그날그날을 혹은 萬景臺[만경대]로 내려가며 혹은 酒岩[주암]으로 올라가며 고기잡이에 취에 온갖 세상을 모르 고 지내는 동안, 가을도 깊어 첫겨울에 가까왔다. 곱게 자란 선비의 손이 마가을 찬바람에 폭로되어 손등이 모두 터져 주먹을 쥐면 피가 흐를 지경이 지만, 불안한 심경을 잊기 위해서는 뭍에 오르지를 않았다.

날은 차서 마상이에서 밤을 지내고 나면 밤새 입김〔口氣〕[구기] 쏘인 데 는 허옇게 성애가 돋쳐 있고 하였다.

그러다가 어떤날 집에 옷을 바꾸어 입으러 돌아왔더니 안해가 없었다.

어린 딸애를 데리고 서울 잠깐 놀러간다고 떠났다 한다. 부자집 딸로 부자 집 안해로 갖은 호강을 다하다가 재정적 파국에 직면하니 기도 막히리라, 가슴도 답답하리라. 그 화풀이로 며칠 놀러 간 것이라 무심히 생각하고 옷 을 바꾸어 입고 다시 강으로 나왔다.

한 일주일 더 지내서 또 집으로 돌아오니 안해는 여전히 없었다.

내 산보용 모자에 무슨 종이가 있기에 펴보니 안해의 편지였다.

동경 가서 몇 해 공부를 해서 파산한 가정을 부활시키러 떠나니 그리 알라 는 것이었다.

나이 25, 6세에 공부는 무엇이며 공부하러 떠나는데 딸아이를 데리고 간다 니 무슨 소리냐? 나는 짐작했다. 내가 이 편지를 보면 곧 따라와서 자기를 도로 데려오리라는 생각으로 이 일을 감행했다고. 공부에는 방해되는 어린 아이(내가 몹시 사랑하던 애다)를 데리고 떠나고 내가 집에서 흔히 사용하 는 모자를 골라서 거기 편지를 넣고 간 점으로 미루어 내 짐작에 틀림이 없 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 나는 낚시질에서 한 번 집에 돌아왔다가 다시 나가서 이 그의 편지를 발견한 것은 그가 편지를 넣고 떠난 지 진실로 반 달이나 되었다.

나는 행장을 수습해 가지고 곧 상경하였다. 딸을 찾으러….

서울서 다시 일본 동경으로 이리하여 동경 바닥에서 내 어린 딸을 찾아 가 지고 다시 귀국하였다.

달아난 안해가 남기고 간 두 아이를 길러야 할 커다란 의무를 뒤맡지 않을 수 없는 나는 과거의 모든 호화롭던 놀이를 잊고 집에 박혀 있기로 하였다.

1927, 28 이태 동안을 나는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이 평양에 박혀 있었다.

그동안에 안서의 행보는 재미있다. <창조> 없어지고 <폐허> 없어진 뒤에 안서는 시골 내려가서 자기의 논밭을 모두 팔아다가 서울에 집 두어 채를 사서한 채는 월세를 놓고 한 채는 자기가 쓰고 나머지 돈은 은행에 예금하 고 은행에 예금한 것은 소절수를 찢어서 술값을 치르는 호화로운 생활을 하 여 여급들에게 ‘고깃데(小切手[소절수]―수표)상’이라는 명예를 지니고 있었다. 이때에 안서를 따라다니던 친구로는 변영로, 염상섭 등이 있었다.

역시 ‘고깃데상’이라 부르면 안서는 득의연하여 아낌없이 소절수를 떼는 것이었다.

그러나 안서의 쥐꼬리만한 재산으로는 고깃데상 노릇도 얼마를 하지 못하 고 넘어지고 말았다. 나는 그 소절수의 신세를 진 일이 한 번인가밖에는 없 지만 안서와의 사이는 이 소절수 시절을 전후하여 매우 가까와졌다.

안서가 무슨 일로 평양 근처를 지날 일이 있으면 반드시 평양에 나를 찾았 고 내가 서울 무슨 볼 일이 있으면 반드시 안서의 집을 숙소로 하였다. 그 때는 안서는 오랜 하숙 생활을 걷어치우고 禮智洞[예지동]에 집 한 채를 마 련하고 가족들을 불러올려 살림을 하고 있을 때였다.

나는 이때에 원고료라는 것의 고마움을 비로소 알았다. 글을 돈으로 팔랴 하던 주장은 자취없이 사라지고 돈도 안 받고야 글을 어떻게 쓰랴 하는 새 주장이 생겨 났다. 그때 <新小說[신소설]> 잡지가 생기고 <大潮[대조]>라는 잡지가 생겼는데 거기 글을 보내고 약소한 원고료가 들어온 것이 진실로 반 가왔다.

이리하여 나는 돈으로 글을 팔아서 살아가는 새 생활을 시작하였다. 더우 기 그 돈이란 것이 무슨 군것질 용처가 아니요, 그 날 없으면 그 날은 굶지 않을 수 없는 절실한 물건이었다.

나의 再婚[재혼][편집]

서양 철인이,

‘사람의 살림이란 여편네 있어도 귀찮아 못 살겠거니와 여편네 없이도 또 한 불편해 못 살겠다.’

고 갈파했거니와, 사실 안해 없는 홀아비 생활을 2년나마 하고 나니 인젠 진저리가 났다. 남매 두 어린 자식을 매일 가꾸어서 학교에 보내고 학교 하 학한 뒤에는 또한 학과 복습을 시키고 이것은 사실 여인이 할 노릇이지 사 내로서는 감당치 못할 노릇이었다.

1929년 여름 나는 두번째 결혼하기로 마음먹었다.

다시 결혼하기에 가장 마음에 켕기는 점은 경제적 안정인데 둘러보아야 우 리나라에 글 쓰는 사람으로 경제적으로 안정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문사의 안해란 가난쯤은 달게 각오해야 할 것이다.

이리하여 그 여름에 나는 지금 안해와 혼약을 한 것이었다.

이보다 조금 앞서 나는 동아일보에 연재소설을 쓰기로 승낙을 한 것이었 다. 동아일보에 연재소설의 요구는 늘 받아왔지만 일체로 신문소설은 거절 해 오던 나로서도 결혼을 앞두고 경제문제 해결책으로 승낙을 할 것이다.

이것이 나에게 있어서 첫 훼절이었다. 아직껏 누가 무슨 소리를 하던 간에 나는 내 길만 닦아 나아간다던 그 주장은 꺾이고 대중소설에 손을 댄 나의 첫번의 훼절이었다.

이리하여 첫번 신문소설을 쓰기 위하여 龍岡[용강] 온천으로 가서 「젊은 그들」의 첫머리를 좀 써서 동아일보사로 보내자 동아일보는 그만 무기 정 간이 되어 버렸다.

그때 동아일보 편집국장이던 춘원 이광수에게서 간곡한 위로의 편지가 있 었으나 나는 에라 잘 됐다쯤으로 쓰기 싫은 글 안 쓰게 되었으니 결국 잘 되었다고 내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中外日報>[중외일보](<시대일보>의 후신이다)에서 또 장편을 하나 요구한다. 그래서 <중외일보>에 대해서는 내 주장을 충분히 표시한 뒤에 그 런 조건 아래서라도 써 달라면 써 주겠노라고 하여 「太平行」[태평행]을 쓰기 시작하였다.

정간 처분을 받았던 동아일보는 그 가을부터 다시 나기 시작하였다. 거기 는 「젊은 그들」이 실리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중외일보>가 나다 말다 하 다가 깜빡 꺼지고 말았다. 「태평행」은 5, 60회 연재되다가 중단되어 버렸 다.

대체 이 땅에서 글 쓰는 사람의 비애란 자기가지여서 다 손꼽기도 어렵거 니와, 작품 발표기관 문제도 그 큰 것의 하나일 것이다.

신문이건 잡지건 작가에게 별별 소리를 다 하여 연재물을 시작하게 한 뒤 에는 뒷 책임은 아주 무시해 버린다. 신문(혹은 잡지)의 체면과 체재상 소 설 한편쯤 연재해야겠으니 연재를 하는 것이지, 그 작품이 완결되건 말건 그런 것은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런지라 몇천 편의 소설이 신문이나 잡지 에서 시작만 되다가 그 신문(혹은 잡지)의 폐간으로 중단되어 버렸는지 일 일이 다 헬 수 없다.

「태평행」도 <중외일보>의 폐간으로 중도에 끊어지고 말았다.

그 겨울ㅡ 연말 가까이 나는 열 편의 창작과 그 밖에 4, 5편의 수필을 써 가지고 상경하였다. 그 새 독신생활 3년에 축적된 정력을 한꺼번에 쏟은 것 이었다. 열흘 동안에 창작 열 편과 수필 4, 5편을 써 던진 것이었다. 그것 을 모두 돈으로 바꾸니 꽤 오래간만에 주머니가 두둑하게 되었다.

그 두둑한 주머니를 털어서 평양에 남겨둔 오누이 두 아이의 겨울옷을 사 가지고 돌아올 때에 나는 돈의 힘의 고마움을 통절히 느꼈다.

몇 달 뒤 나는 새 안해를 맞아왔다. 그러나 그 전후부터 나는 강렬한 불면 증에 걸려서 신음하던 중이었다. 파산이라 失妻[실처], 이런 가지가지의 불 행한 사고가 만들어낸 병으로서, 약혼기간 중 약혼자를 찾아다닐 때도 최면 제는 늘 끼고 다니던 것이었다.

염상섭과 나와의 새에 소위 발가락 문제의 사건이 생긴 것이 아마 이때였 었다고 생각된다.

‘발가락’ 事件[사건][편집]

염상섭이 결혼한 것은 1927, 8년경으로 그의 나이가 그때 서른을 썩 넘은 때였다.

阿峴[아현]에 新居[신거]를 장만하고 신혼생활을 시작하였는데 그와 이웃 하여 이은상이 살고 있어서 이은상을 통하여 염상섭의 신혼생활의 이면상이 끊임없이 세상에 전파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는 상섭이 제 새 안해를 때린다는 둥 싸움이 잦다는 둥 별의별 뉴우스가 다 있었다.

나는 언젠가 상경하여 안서와 함께 그 신혼 댁을 찾은 일이 있었다. 그때 는 나는 안해를 잃고 독신생활을 하던 때로서 서른이 지내서 안해맞이를 하 고 살림을 하는 상섭의 살림 모양이 그저 아늑하고 부럽게만 보였다.

은상을 통하여 전파되는 모든 신혼생활의 잡음도 30이 지나서 결혼한 사람 의 당연한 의처증이려니 이렇듯 간단히 보아 두었다.

내가 두번째 결혼을 한 뒤 무거운 불면증에 걸려서 그것을 치료하려 상경 하였다. 그때는 안서는 樂園洞[낙원동] 어느 여관에 살고 있는 때였다. 안 서는 고깃데상의 즐거운 시절도 며칠을 못 지내서 끝장을 막고 서울에 두 채 장만했던 집도 다 없애 버리고, 실의의 외로운 몸을 낙원도 어떤 여관에 의탁하고 에스페란토 강습의 약간한 수입으로 그날그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 안서가 내게 대해서 매우 흥분된 태도로 무슨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즉 안서는 지난날 고깃데상 시절에 염상섭 등을 술잔이나 먹였으니까 안서 의 단순한 해석으로 자기는 상섭 등이 마땅히 그것을 신세로 알아야 할 것 인 데도 불구하고 상섭은 그 신세를 원수로 갚아서 안서를 주인공으로 한 무슨 소설을 썼는데 그것이 분하여 못 견디겠으니 원수를 갚아달라는 것이 었다.

그때 나는 마침 동아일보에 신년 현상소설에 고선의 책임을 지고 책상머리 에는 원고 뭉텅이가 산적되어 있던 시절이다.

그저 응응 해 두었더니 안서는 무슨 잡지를 내게다가 제공하며 상섭의 문 제의 소설이 있으니 읽어 보고 대책을 강구해 달라는 부탁이다.

그 해에 동아일보의 현상 모집은 그 금액에 있어서 단연 고액이었던 관계 로서 응모자가 놀랍게 많았다. 400편이 넘는 그 많은 응모 작품을 고선하다 가 그것을 그냥 소하물로 부치고 나는 뒤따라 내려왔다.

안서는 정거장까지 따라 나와서 꼭 복수를 부탁하는 것이었다.

평양집으로 돌아오니 지난봄 결혼한 내 안해는 곧 그의 첫딸을 낳으려고 신음하는 중이었다.

딴 방에 자리하고 누웠으나 强度[강도]의 불면증의 사람이 아무리 하룻밤 을 기차에 시달렸다 하나 졸음이 올 까닭이 없었다.

이에 나는 원고지를 펴 놓고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발가락이 닮았다」는 이리하여 씌어진 것이었다.

그것이 안서의 부탁으로 씌어진 것인지는 나는 모른다. 더구나 염상섭을 모델로 한 것인지는 모르는 바이다.

다만, 염상섭이 그것을 읽고 이는 자기를 모델로 자기를 욕하기 위하여 쓴 것이라고 크게 노염을 내어, 그 소설에 대한 기다란 반박문을 써서 <東光 [동광]>에 기고하였다. 그런데 <동광> 잡지의 주간인 주요한이 그 글을 그 냥 보류하여 버려서 삭아버리고 말았지만 그 문제는 그때 문단의 화젯거리 가 되어서 그 뒤 한동안 조선일보 지상에서도 논란되었다.

서울 生活[생활][편집]

새해 봄에 나는 불면증을 정식으로 치료하기 위하여 서울로 올라왔다.

작년부터 원고료라는 것으로 생활의 기본을 삼은 이래 나의 창작에 대한 태도는 달라졌다. 아직껏은 고답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차차 꺾이어 나갔다.

열 장 쓴 것, 열한 장 쓴 것이 그 들어오는 금액이 다른지라 간격을 위주 하면 작품이 변하여졌다. 그리고 어디서든 글 주문만 들어오면 응하였다.

불면증 치료에 매일 다대한 비용이 걸리는 나는 그 비용을 구하기 위하여 수없는 글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3월에 안해가 서울로 나를 찾아왔다. 안해와 협의하여 서울로 이사오기 로 작정하였다.

대체 조선에서 원고료로 생활을 유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고, 더우 기 지방에서는 못할 노릇이다.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서 서울에 자리잡기로 한 것이었다.

서울 살림의 준비ㅡ 우선 집을 한 채 월부로 사기로 하였다. 그리고 가족 다섯 사람의 서울 살림은 시작이 되었다.

당시의 글의 발표기관이란 순전히 신문이었다. 그런데 신문 가운데서는 조 선일보가 그 대표자였었고, 조선일보가 그 발행은 그냥 유지하여 오나 아주 위태로운 형편이었고, <중외일보>는 中央日報[중앙일보]로 변하여 가지고 나다 말다 하는 형편이었고, <매일신보>가 동아일보와 대항하여 꾸준히 나 오는 단 하나의 신문이었다.

그런데 신문은 대체로 창작소설은 싣지 않는 편이라, 신생 소설문단은 그 발표기관을 전혀 못 가졌다. <동광> 혹은 <別乾坤[별건곤]>(<개벽>의 변형 물) 등에 간신히 지면 몇 페이지가 창작을 위하여 제공되는 뿐이었다.

그러한 상태 아래서 집을 월부로 사며 새살림을 시작하자니 고생은 여지없 이 컸다. 게다가 원고료는 저절로 정확히 지불하는 데는 적고 필자의 수효 는 늘고 보니 원고료는 저절로 차차 내려서 예전 <조선문단>이나 <개벽>에 서 내주던 액수의 4분지 1로 떨어지고 말았다.

당시 문사의 생활이 얼마나 고단하였는지는 안서(김억)의 시 添削料[첨삭 료] 문제로 보아도 알 수 있다. 고깃데상의 호화로운 시절의 뒤에 안서의 생활은 지극히 영락되어 그날그날의 담배 용돈에도 딸리고 있었는데 그 안 서가 한 가지의 기책을 안출했다.

안서가 안출했는지 주요한이 안출했는지는 모르지만 요한이 주간하는 잡지

<동광>에 ‘신시 첨삭료’를 두어서 신시 한 편에 50전(30전이든가) 우표를 동봉해 보내면 안서가 첨삭하여 준다는 말하자면 일종의 잡지 선전책에 지 나지 못하는 일이었다.

이리하여 수입된 첨삭료인 우표를 안서는 또한 <동광사>에 몇 할인가 하여 팔아서 술값 담배값에 쓰던 것이었다. 이것은 <별건곤> 잡지에서 ‘新時[신 시] 땜장이’라고 험구한 덕에 안서는 ‘시 땜장이’로 한 때 이름이 높았 다.

대체 안서라는 친구는 그 성질이 몹시 단순하니만치 한 번 누구를 밉게 보 기 시작하면 그 생각을 고칠 줄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평안북도 정주 출생 으로서 춘원(이광수)이 오산중학 교원 노릇을 할 때 춘원의 문하에 공부를 하여 말하자면 춘원과 師弟[사제]의 분이었지만, 무슨 까닭으로 춘원과 틀 렸는지 춘원과는 아주 사이가 좋지 못했다. 춘원이 동아일보의 편집국장으 로 있으면서 안서에게 글을 써달라는 부탁도 안한 것이 안서의 노염을 저버 렸는지도 모른다.

‘시 땜장이’로까지 타락을 하면서도 동아일보에 글을 쓰지 않는다. 그래 서 어떤 때 춘원더러 안서의 글을 좀 사라고 권고한 일이 있다.

“좋은 원고면 얼마이고 사지요.”

그래서 춘원과 의논하여 동아일보 가정난에 「名婦列傳」[명부열전]을 한 동안 계속해서 쓰기로 하고, 안서에게 그 뜻을 말했더니 안서는 동아일보에 는 쓰지 않는다고 고집한다. 그것을 가까스로 얼려서 쓰여 가지고 그 원고 를 춘원에게 갖다 맡겼다.

몇 회나 계속했는지 모른다. 몇 회 계속하다가는 뚝 끊어지고 말았다. 동 아일보에 가서 알아보니 續稿[속고]가 오지 않아서 중단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안서에게 속고를 채근하였더니 안서 대답은 속고 찾으러 오지 않아 서 안 주었다는 것이다.

짐작컨대 안서의 생각으로는 속고를 연해 졸리어서 부득이 집필하고 싶었 을 것이요, 동아일보 쪽에서는 안서가 자진하여 가져오면 내주거나 할 마음 보였던 모양이다.

이리하여「명부열전」은 몇 번 나가다가 끊어지고 말았다. 이 일을 가지고 누가 잘 했다 못 했다 할 것은 없지만, 결국 손해를 본 것은 안서였다.

당시에 안서는 여러가지 의미로서 불행의 대표자였다.

그가 소절수를 떼며 놀아날 때도 선술집이 아니면 과즉 카페였다.

그가 서울의 살림을 걷어치우고 가족은 모두 시골로 내려보내고, 낙원동 어떤 여관에 몸을 잠근 때는 경제적으로 어쩔 수 없는 막다른 곬이었다.

그때 그에게 애인이 하나 생겼다. 진남포 어느 소학교 여훈도로서 좌우간 안서의 손에 걸려들었으니 엔간히 만만한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성씨가 제각기 다른 前夫[전부]의 소생이 몇 남매 있었다 하니 그 여인의 품행 가히 짐작할 것이리라.

안서는 그 여인을 서울로 불러 올렸다. 여인은 사내가 부르니 온 것이요, 안서는 여인이 생활비를 대려니 기대하였던 것이다.

경제적으로 서로 상대쪽을 믿었으니만치 덜컥 서로 만나면 그 새에 여러가 지의 델리케잇한 문제가 생길 것이다.

여인은 안서를 믿고 서울로 왔다가 그간 다시 티각태각 진남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 서울서 살림할 때의 상황을 염상섭이 상섭 독특의 차근차근한 필치로 소설화한 것이었다.

나는 그때의 외로운 살림에 동정하였다. 그래서 내가 힘써서 그 여인을 도 로 안서의 품으로 돌려보내 주기로 약속하였다.

약속에 의지하여 진남포로 가서 그 여인을 만나 보았다.

벌써 남편을 경험하고 그 뒤 또 남편 아닌 사내를 몇 경유한 그 여인의 다 변성에 적지 않게 압도되면서 안서의 그 새의 고적한 생활을 들어 호소해서 그 여인에게 다시 상경해서 안서를 위로해 주기를 부탁하였다.

美女[미녀](그의 성이 강씨였다)는 그런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면서도 나도 내심 걱정하였다. 이 여인의 성격은 안서와 결코 서로 맞 지 않을 터인데 안서는 무엇 때문에 이 여인에게 그렇게도 반했는가?

<東亞日報[동아일보]>와 新興文學[신흥문학][편집]

어느 나라에서는 그 나라의 출판계와 문학운동의 새에는 끊지 못할 관련성 이 있으며, 문학은 출판업이라는 배경을 가지고야 일어나는 법이다.

그런데 우리 문학은 출판계라는 독립한 기관이 없어 신문에 힘입은 바 매 우 크다.

그러면 그 당년에 신문계에 패권을 잡고 있던 동아일보는 우리 문학운동과 어떠한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었던가?

더우기 당년 문단의 가장 선배인 이춘원이 내내 동아일보 편집국장의 자리 를 차지하고 있었으니까. 동아일보는 당연히 조선 문학운동에 기여한 바 컸 으리라 보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동아일보는 일어나는 문학운동을 비방하고 그릇된 길로 몰아넣는 일에만 충실하였다고 보는 것은 우리의 誤斷[오단]일까?

200자 1매에 50전이란 원고료를 8매에 1원이라고 떨어뜨린 것이 동아일보 였다. 한 사람 앞에 다섯 페이지 이내로 지면을 제한한 것이 동아일보였다.

게다가 동아일보가 문사에게 대하여 취하는 태도며 취급방식은 사용인이 고 원을 취급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우선 편집국장 이광수가 원고를 사들이는 데도 주주총회의 승인이 있어야 하는 형편이었으니 다른 것은 미루어 알 것이다. 그때 나는 춘해 방인근의 연재소설 「魔都[마도]의 香[향]불」을 동아일보에 소개하여 연재케 하고 있었다. 그것이 거진 끝나게 되어 감으로 <매일신보>에 교섭하여 「放浪[방 랑]의 歌人[가인]」을 연재케 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어떻게 되어서인지 동 아일보의 「마도의 향불」이 채 끝나기 전에 <매일신보>에 「방랑의 가인」은 연재가 시작되었다. 즉 결과에 있어서는 춘해는 동아일보와 <매일신보> 두 신문에 연재소설을 집필하게 된 셈이었다.

그러나 동아일보에서는 지금껏 연재 중이던 「마도의 향불」을 탁 끊어버 리고 말았다.

나는 동아일보의 춘원을 찾아서 중단한 부당성을 말하고 인제 4,50회면 끝 날 것이니 끝나기까지 연재하기를 요구하였던 바, 춘원은 매우 어색한 웃음 을 웃으면서 이는 돈이 시키는 일이라, 돈(출자) 안 낸 자기로서는 용훼할 권한이 없다는 것이었다.

짐작컨대 당시 동아일보에 연재소설을 쓴다 하는 것은 한 큰 이권인 듯하 여, 이 이권을 두고 여러가지의 암투가 일어나서 춘해의 연재물이 그 희생 이 된 모양이었다. 동아일보에서는 이 사실을 사회적으로 변명하면서, ‘<매일신보>(총독부 기관지)에 글을 쓰는 사람은 동아일보에는 쓸 자격이 없다.’고 하여서 그 뒤 한동안 이런 알력으로서 명랑치 못한 세월이 계속 되었다. 그리고 어떤 문사는 ‘동아일보에 글쓸 권리’를 잃지 않기 위하여 일부러 <매일신보>에 글을 사절하는 등 이런 일까지 생겼다.

이리하여 글 쓰는 사람 가운데는 <매일신보>에 글 쓰는 사람과 안 쓰는 사 람이 한동안 갈리었다.

그럼 나는 어느 파에 속하였던가?

글 쓰는 사람 가운데 그런 기색이 보이자 나는 자진하여 동아일보에 글을 아니 썼다. 그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동아일보사에서 글을 부탁해 왔 다. 그래서 나는 <매일신보>에 글 쓰는 사람이라고 대답했더니 그 기자는 당황히 그것은 모두 풍설이지 어디 그럴 까닭이 있겠느냐고 변명하며 꼭 써 달라고 재삼 부탁을 한다. 요컨대 한동안 말썽거리였던 ‘매일신보 집필자 문제’도 누구 누구의 몇 사람을 보이콧하기 위한 일종의 책략이었지 그 이 상 아무것도 아니었다.

한 민족문학이 건설되려는 마당에 이러한 책략이 무슨 효과를 나타내랴?

<매일신보> 집필가 배격 문제도 이렁저렁 흐지부지하니 끝장이 났다.

대체로 동아일보 자체가 민족문학 건설 문제에 관하여 절대적인 지도권을 못 잡고 있는 터에 이런 구구한 문제가 좋은 끝장을 볼 수가 없었다. 문사 는 도리어 동아일보와 대립되어 동아일보를 무시하고 자기의 길을 걸었다.

李光洙[이광수]의 걸음[편집]

<창조>시절 이전에 「무정」이하「開拓者」[개척자] 등을 발표하여 文名[문 명]이 있던 춘원 이광수는 동경 조선유학생 독립선언문을 초한 뒤에 재빨리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독립신문>을 주요한과 함께 해나가고 있었다. 그러 다가 그의 건강상태며 사회정세며를 따라서 조선총독부에 귀순하고 무사하 게 귀국하였다.

한동안 ‘儆新學校’[경신학교]의 영어교사 등으로 세월을 보내다가 그때 한창 신문계에 드날리는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 들어가서 일을 보기 시작하 였다.

그러나 사회정세는 춘원이 망명하기 이전보다 훨씬 달라졌다. 더우기 문학 에 대한 견해가 달라졌다.

젊은 우리들이 애써서 대중을 이렇게 끌어온 것이었다. 즉 춘원이 그 새 우리의 대중 앞에 내에 놓은 일종의 대중문학을 부인하고 우리는 새로운 문 학의 건설에 매진하던 것이었다.

춘원이 동아일보에 자리잡은 때는 바야흐로 이런 시기였다.

춘원은 한동안 주저하는 기색이 보였다. 그러다가 동아일보에 소설을 쓰기 시작하였다. 「許生傳」[허생전]「再生」[재생] 등을…. 이것은 우리의 문 학발전상 지대한 지장이었다.

우리는 그 새 10년간을 영영공공 ‘대중적 흥미 없는 문학’ 건설에 힘써 왔다. 우리의 대중은 우리가 써낸 그 생경한 문학을 부득이하여 달갑게 먹 고 있던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딴에는, 우리 생각으로, 오랫동안 이런 문학 만을 제공하노라면, 나중에는 결국 대중도 이해하는 날이 오리라고 굳게 믿 던 바이었다.

그래서 대중을 우리의 생경한 문학으로 10년간을 길러 왔는데 춘원이 다시 금 이 대중에게 통속문학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대중은 다시 춘원을 만났 다. 그 새 10년간을 쓴 떡만 먹어 오던 대중은 다시 춘원의 달콤한 글을 만 난 것이었다.

더우기 춘원이 그 달콤한 글을 발표하는 기관이 이 땅에서 왕자격으로 군 림해 있는 동아일보 지상이었다.

그때 동아일보에 「허생전」,「一說 春香傳」[일설 춘향전],「재생」등을 쓴 것이 춘원 자신의 뜻이었는지 혹은 동아일보 사장 古下[고하] 송진우의 뜻을 받음이었는지는 따져보지 못하였지만, 이 사실 때문에 바야흐로 싹트 려던 조선 신문학이 받은 타격은 막대하다.

이 책임을 오직 춘원에게 뒤집어 씌우는 내가 오히려 비겁하다. 파산, 실 처 등 쓰라린 사고에 부딪쳐서 붓을 던지고 숨어 있던 내가 다시 붓을 잡은 것은 동아일보 지상의 「젊은 그들」이었다.

아직껏 청초하고 고결함을 자랑하는 나였었지만 몇 푼의 원고료를 받아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하여 거절해 오던 동아일보 집필을 종내 수락한 것이었 다.

춘원은 어차피 그 출발이 신문소설이었던 사람이었지만, 이 나의 훼절이야 말로 온 조선 사회에 크게 영향되었다.

어떤 사람은 이 훼절을 나무라고 어떤 사람은 욕했지만 그보다도 많은 追 隋者[추수자]가 뒤따른 것이었다.

“신문소설을 써도 괜치않다. 金東仁[김동인]도 쓰지 않느냐? 신문소설을 쓰는 것은 결코 흠절이 안 된다.

이런 생각을 들게 하여 신문학 발전에 큰 지장을 준 허물은 입이 백 개라 도 변명할 여지가 없는 바이다.

물론 신문소설이란 것은 대중은 신문소설 영역까지 끌어 올리는 역할을 하 지만 그 반면에 문학을 등한하는 것이라, 조선문학은 신문소설의 창성으로 하여 뒷걸음친 것이었다.

신흥 문단에서는 춘원이 홀로 「허생전」이며 「재생」등을 쓴 동안은 춘 원은 문단인이 아니라 하여 불관심하여 버렸지만, 金東仁[김동인]까지 신문 소설을 쓰고 보니 신문소설을 쓰는 것이 문사로서 결코 흠이 안 된다 보게 되고, 그것이 차차 신문소설을 쓰려는 요구로 변하게까지 되었다.

신문에 한 편의 연재소설을 쓰기 시작하면 그것을 쓰는 동안은 이렁저렁 생활이 안정되기 때문이었다. 7,8개월 동안 생활의 안정을 얻는다 하는 일 은 사실 생활의 경제적 기초를 못 가진 문사들에게는 여간한 큰 일이 아니 었기 때문이다.

春江[춘강] 女史[여사][편집]

위에서도 말했거니와 나는 1931년 봄에, 드디어 가족을 거느리고 서울로 이사를 왔다. 월부로나마 사기로한 杏忖洞[행촌동]의 나의 새 집은 새로 지 은 집으로서, 이 집을 그다지 불편 없도록 꾸리기에는 여간한 손실이 아니 었다.

게다가 나의 안해라는 사람이 평안남도 龍岡郡[용강군] 吾新面[오신면] 九 龍里[구용리]라는 시골 태생으로 평남 順安[순안] 義明學敎[의명학교]와 평 양 崇義女中學校[숭의여중학교]를 겨우 경유한ㅡ 아직 속으로든 겉으로든 학생때가 그냥 남아 있는 사람이었으매 살림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사람 이었고 나 역시 돈이나 쓰며 호화롭게 놀기나 하던 사람이라, 살림이라는 까다롭고 귀찮은 일을 아내에게 맡겨 버렸다.

이때에 서울 살림에 선배되는 춘해 방인근의 신세를 적잖게 졌다. 전처 소 생의 두 아이의 학교 입학(전학) 문제도 춘해의 알선으로 이렁저렁 끝냈다.

그야말로 긴장한 마음으로 한 1년간 지내니 안해도 인젠 서울 살림에 익어 지고 살림이 차차 자리가 잡혔다.

그런데 방인근의 부인 춘강 전유덕은 이름은 좋이 有德[유덕]이지만 그 이 름과는 아주 상반되는 무덕한 사람이었다. 염상섭, 현빙허, 김억 등이 이전

「조선문단」 시절에 모두 춘강 여사에게 개자식 소리를 들은 사람이었지 만. 내가 서울로 이사온 뒤에 그의 집과 그다지 상거가 멀지 않은 관계로 가끔 우리 집에 놀러와서는 내 아직 철없는 아내에게 대하여 내 험구를 불 어넣으며,

“우리 방 선생은 본시 크리스찬이니까 개과할 가망도 많지만 김 선생(즉 나)은 아주 악질 부랑자니까, 애전에 분홍치마적에 갈라지는 편이 상책이 라.”충동한다고 아내는 내게 호소하고 하였다.

서울로 이사를 온 이듬해쯤으로 기억한다. 춘해와 나는 어떤 카페에서 술 을 같이 먹었다. 춘해는 그 날 제 집에 안 돌아갈 예정이었던 모양으로 자 기의 집으로 엽서를 한 장 띄웠다.

‘잡지 조선문단을 부흥할 필요상 나는 그 의논차로 시골에 와 있는데 한 2, 3일 뒤에 귀경하겠소 이런 뜻의 글을 써서 日附印[일부인]이 모호하게 찍힙소사 빌며 우체통에 집어 넣었다. 그런데 모호하게 찍히란 일부인은 모호하게 찍히지 않았던 모 양으로서, 춘해 부인 춘강 여사가 그 엽서를 들고 성이 독같이 나서 우리 집으로 달려왔다. 비가 좍좍 흐르는데 그 비를 함빡 맞으면서 와서은 댓바 람,

“우리 인근이 내놓으라.”

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 응대를 안해가 하고 있었는데 상대자의 기세가 너무도 승승하므로 안해는 내게 응원을 청하였다.

그래서 나가보니 그는 그 춘해의 엽서를 휘두르며 시골서 편지 부친다는 것이 광화문 우편국 일부인이 찍혔으니 이는 필시 무슨 곡절이 있는 노릇일 것이라 인근이를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나는 처음에는 좋은 말로 타일러 보았다. 그러나 결국에 있어서는 나도 그 와 마주 성을 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보, 내가 인근이 아범이란 말이요, 할아버지란 말이오? 당신이 남편 잃고서 누구에게 시비를 거는 거요?

지금은 벌써 고인이 된 춘강 여사.

남을 찾아다니며 분홍치마 시절에 갈라서라고 권고하던 그도 이제는 지하 에서 썩는 몸이 되었는가? 그렇게도 제 남편을 감싸고 감추기 위해서 남편 의 친구를 모두 ‘개자식’으로 몰던 그도 그 남편을 끝끝내 지키지 못하고 자기 홀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 아끼던 남편은 그 뒤 다시 새 안 해를 맞아서 새살림을 하는 것이다.

과도기의 한 유다른 전형이었다.

崔曙海[최서해][편집]

춘해의 <조선문단>을 발판삼아 출발한 학송 최서해는 그 뒤 <중외일보>가 간행되매 <중외일보> 사회부 기자로 들어갔다가 그 뒤 다시 <매일신보> 학 예부에 적을 두게 되었다.

내가 평양서 두번째 결혼을 할 때에 일부러 평양까지 내려와서 들러리를 서준 서해였다.

당시의 <매일신보>는 아주 보잘 것 없는 신문으로서 문사로서는 <매일신 보>에 붓을 잡는 사람이 업는 형편이었다.

그것을 서해의 부탁에 의지하여 내가 먼저 집필하기 시작하였다.

<매일신보>는 이처럼 집필자가 없는 신문이니만치 원고료가 다른 신문보다 후하였다. 내가 계속하여 <매일신보>에 집필을 하고 원고료가 다른 신문보 다 후한 것이 알리어지자 뒤따라 다른 문사들도 집필을 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되매 동아일보에서는 ‘매일신보 집필가의 원고는 싣지 않는다’는 일종의 매명적 정책이 선 것이다.

동아일보는 여하튼간에 최서해는 그때 지명 문인들의 글을 사기에 열심이 었다.

나는 최서해에게 대해서 참으로 잘못한 일이 있다. 그것은 전에도 쓴 바이 지만, 나도향 세상 떠난 뒤에 최서해가 주동이 되어 고 나도향 비석을 해 세워 주는데, 그때 서해가 나더러 얼마간 찬조하라는 것을 핑계 좋게 거절 한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서해는 끝끝내 나를 지지하고 내 원고를 어떻게든 돈과 바꾸어 주려고 노력하였다.

이 조선 사회에서 월부로 집을 마련한다는 일은 시작하여 놓고 돈이 못 돌 아서 쩔쩔맬 때에 서해가 이 곤경을 구해준 적도 비일비재였다.

그 서해가 1932년 여름에 문득 병이 나서 모 병원에 입원했다 한다.

어떤 여름 날 <매일신보>로 갔더니 편집국장인 星海[성해] 李益相[이익상] 이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서,

“서해에게 수혈을 좀 했더니….”

하면서 어지럽다고 머리를 싸매고 있다.

나는 서해가 입원해 있는 모 병원으로 달려가 보았다. 서해는 비교적 원기 좋은 얼굴을 하고 있다.

“방금 춘원이 다녀갔지요.”

하며 그는 자기와 춘원과의 새에 막혀 있던 델리케잇한 감정이며 그런 관계 로 그 새껏 춘원을 보지 않았는데, 지금 자기는 병상에서 일지 못할 것이 분명해 졌으므로 일부러 춘원을 오라고 청하여 춘원이 방금 다녀갔다는 이 야기를 하였다.

사실 춘원은 많은 문인들에게 원혐을 사고 있다. 춘원과 아무 원혐 없이 지내는 사람은 문인 가운데는 오직 나 한 사람이 아닐까 한다.

춘원이 동아일보의 편집국장으로 앉아서, 문단의 일원으로 행동하지 않고 순전히 신문인으로 행세한 것이 그 원혐의 원인이 아닐까 한다.

나는 서해가 춘원과의 사이에 막혔던 간사리를 터버렸다 하는 데 비교적 마음이 흡족하여 이 짧은 인생에서 서로 옳고 긇고 하면 무얼 하겠느냐, 좌 우간 마음을 굳게 먹고 치료나 잘 하라고 그를 위로하고 작별하였다.

그로부터 이틀인가 사흘인가 뒤에 최서해의 별세가 신문에 보도된 것이었 다.

문단에서 이 나 金東仁[김동인]를 이해하고 사랑하고 이끼기 서해만한 사 람이 없었다.

더우기 또한 내가 가장 촉망하던 작가였다. 부두 노동자로까지 전락했던 그의 생활 경력은 책상머리 출신만인 조선문단에서 한 이채였다.

그의 남긴 작품은 진실로 적다. 어느 신문사의 기자 노릇을 하여 그 여가 에 붓을 잡은 그라, 더우기 작가 생활의 기간도 짧았으며 몇 편이 못 된다.

그러나 그의 남긴 ‘최서해’라는 이름은 크다. 그리고 이 이름은 만대까 지 남아 있을 것이다.

서해의 장례날, 그의 장례는 서해의 명성에 그다지 부끄럽지 않도록, 다른 것은 모르지만 장례의 뒤를 따르는 자동차의 수효가 4, 50대로서 그 기다란 자동차 행렬은 진실로 장하였다.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이 기다란 葬列[장열]은 최서해라는 사람에게 대한 인사가 아니라 <매일신 보> 학예부 책임자에게 대한 인사였다. 최서해라는 소설가에 대해서는 20분 의 1의 대접도 아낄 조선 사회였다.

서해가 남긴 고아와 과부는 장차 누구를 믿고 누구를 의탁하고 살랴? 그 장례가 호화로움에 반하여 뒤에 남은 과부와 고아를 돌보아 줄 사람은 전혀 없다.

이 불쌍한 과부와 고아를 위하여 몇 푼 거둔 것이 있었으나 그것도 누구가 먹었는지 종적이 없어지고 말았다.

그로부터 이태 뒤 나는 연전에 나도향 비석해 세워줄 때 서해에게 진 큰 양심의 짐을 갚기 위하여 서해의 비석을 해 세워주려 하였다.

그래서 백화 양건식이랑 김안서 등과 협력하여 서해란 단 두 글자를 가로 크게 새긴 비석을 하나 만들어 서해의 만 2주깃날 이를 그의 무덤 앞에 세 워주었다.

무덤 속에 서해가 이것을 알랴마는 나도향 建碑[건비] 때 그렇듯 애쓴 최 서해에게 대하여 그때 그렇듯 무심하였던 이 나의 속죄 행사였다.

辱設[욕설][편집]

이 1932년경을 전후하여 문단 한편 귀통이에는 욕설 비평이 대두하기 시작 하였다.

이 땅이 일본에게 합병된 지 20여 년 그 새 펴보지 못하여 압축된 감정을 펴보기 위하여 하는 욕이라 누구에게든 다닥치는 대로 욕이었다.

<批判[비판]>이란 잡지는 이 욕으로 판매정책을 세웠다. 좌익잡지라는 구 호였지만 당시의 조선총독부 검열정책이 좌익사상을 약간이라도 선전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던 시절이라, 비록 자칭 ‘좌익계동’의 잡지라 하나 <비 판>은 총독부 검열에 파스하는 잡지였다.

<비판> 잡지의 선동의 덕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나도 욕을 꽤 얻어 먹은 축이었다.

누구누구에게 욕을 먹었는지 지금 기억할 수 없으나 必承[필승] 安懷南[안 회남]이며 水原[수원] 朴承極[박승극] 등의 욕은 지금도 기억한다.

회남이 나를 욕한 것을 내가 밉다든가 하여서가 아니라 회남 자신이 출세 욕에 초조한 나머지, 왜 좀 후진에게 글을 비켜주지 않느냐는 나무람에서 나온 욕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나에게 할 욕이 아니고 잡지(혹은 신문) 간 행자에게 할 욕이었다. 신문이나 잡지의 간행자도 자기네의 신문(혹은 잡 지)를 많이 팔자니 자연 지명인에게 글을 청구할밖에 없을 것이다.

나 또한 원고료로써 생활을 해 나아가는 사람이매 잡지(혹은 신문)의 요구 에 거절하지 않고 승낙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회남의 초조한 생각으로는 김의 글 부탁을 좀 거절해 주면 그것이 자기 몫에 돌아올는지도 알 수 없으리라는 기대로서 내가 무슨 글을 쓰기만 하면 달려드는 것이었다.

사실 나는 그때 글을 좀 많이 썼다. 寡作[과작]을 자랑하던 예전과 달라서 글을 써서 그것으로 생활을 유지해야 할 입장에 서 있더니만치 부탁받는 글 은 하나도 빠지지 않고 썼다.

이 땅에 문단이라는 것이 형성된 지 우금 39년, 오직 붓대만으로(딴 직업 은 가져보지 않고) 생활을 경영한 사람이 나 단 한 사람밖에 없다면 넉넉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에 나에게는 남의 출세에 방해되고 어쩌고 그런 문제는 고려할 여가조 차 없었다. 다만 사람이 살아 나아가는 막대한 비용을 오직 붓끝만으로 변 통해 나아가는 일만이 신기하고 기특하여, 어디서 글 부탁하는 사람이 걸려 들기만 하여라고 기다리는 판이니, 어찌 남을 고려할 수가 있었으랴?

그런지라, 뒷날 회남이 출세를 하여 문단의 일원이 되어 있는 오늘, 나는 회남에게 대하여는 전날의 욕설을 아주 잊어버리고 그의 대성만 고요히 기 다리고 있다. 그러나 박승극이 내게 욕설을 퍼부은 것은 그 의도가 더럽다 보아서 아직 내게 불쾌한 일이다.

내가 조선일보(方應謨[방응모] 조선일보다)에서 학예부의 일을 40일간 맡 아본 일이 있다. 그 어떤날 수원 박승극이라는 사람에게서 꽤 방대한 ‘農 民文學論[농민문학론]’이라는 원고 뭉텅이가 우편으로 배달이 되었다. 그 래서 그냥 서랍에 집어넣어 두었다.

2, 3일 뒤 편집국장 주요한에게서 ‘농민문학론’을 왜 지상에 싣지 않느 냐는 채근이 있었지만, 아직 보지도 않은 것이라 그저 그냥 버려두었더니 그 뒤 또 2, 3일 지나서 수원서 장거리 전화가 왔는데 가로되,

‘자기는 박승극이라는 농민문학론의 저자인데 왜 자기 원고를 신문지상에 발표하지 않느냐?’

는 것이다.

그때 내가 무엇이라 대답했는지는 기억치 못하려니와 좌우간 내겠다고 승 락은 안 했던 모양이다.

그로부터 또 며칠이 지나서 웬 젊은 사람이 조선일보로 찾아와서 박승극의 편지를 내밀며 그 원고의 반환을 요구한다.

그로부터 그 박씨와 나와는 원수지간이 되어서 그가 이용할 수 있는 온갖 언론기관을 이용해 나를 욕하기 여념이 없었다.

박씨는 그 뒤 몇 해를 두고 나를 욕하고 욕하다가 그만 기진했는지 그 욕 을 중지한 것은 여러 해 뒤였다.

짐작컨대 박씨에게 있어서는 그 ‘농민문학론’이 꽤 애쓴 글이었던 모양 인데 그것을 그냥 도로 반환한 데서 그의 노염을 그렇듯 돋우었던 모양이 다.

조선의 문사치고 가장 욕많이 먹는 사람은 춘원이었고 내가 그 다음으로는 가는 모양이다. 가끔 뜻하지 않은 사람에게,

“이전 선생을 좀 욕한 일이 있지만….”

이라는 변명 비슷한 말을 듣는데, 나는 당년 그 욕에는 아주 무관심하여 누 구누구가 무슨 욕을 했는지 알지도 못하고 지냈다.

내가 방응모 조선일보에 40일간 봉직할 그 어떤날 같은 사의 촉탁으로 있 던 故[고] 文一平[문일평]이 은근히 나를 찾는다,

“김 선생, 미안한 청탁이 하나 있는데요. 내 어떤 친구가 이즈음 생활이 아주 곤란한 모양인데, 그 친구가 소설을 하난 썼노라고 그것을 조선일보사 에 사 주면 해서 그러는데요….”

이런 청탁이었다.

“좌우간 그 원고를 한번 보여주시지요.”

“아니, 그 친구가 언젠가 김 선생을 어느 잡지에서 욕을 했대요. 그래 서….”

“난 그런 건 일일이 기억도 못합니다. 원고를 좌우간 보여주세요.”

이리하여 문일평은 한 뭉텅이의 원고를 내어놓았다. 그 원고란 民村[민촌] 李箕永[이기영]의 「쥐불(鼠火)」이었다.

민촌이 언제 어디서 나를 욕하였는지 나는 모른다. 좌우간 민촌 자신이 기 억하느니만치 헐한 욕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나는 그때 민촌이란 이름은 ‘살인 방화’식의 좌익작가로 기억하고 있더 니만치 또 여전히 ‘살인 방화’식 소설이려니 하여 썩 마음에 내키지 않는 것을 문일평에게 대한 대접으로 읽기 시작하였다.

좌익계통에 살인 방화가 아닌 소설을 쓰는 사람도 있구나 하여 곧 전표를 떼어 약소한 원고료나마 문일평에게 내어주고 그 「쥐불」은 약간한 가필을 할뿐 조선일보 지상에 싣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실마리가 되어서 민촌은 그 뒤이어 조선일보에 연재 장편을 쓰게 되고 그게 문단 한편 구석에서 욕과 살인 방화 소설 따위로 겨우 존재를 알 리었던 민촌이 당당한 중앙 무대에 나서게 된 것이다. 민촌더러 말하라면 이것은 자기 작품이 우수했던 탓이라고 호언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시에 있어서 동아일보는 전연 단편 창작은 취급하지 않고 우익잡 지들은 좌익계의 작품은 읽지도 않고 몰서하는 형편 아래서 「쥐불」이 다 른 신문이나 잡지에서 용납되었을 까닭이 없고 조선일보 곧 아니더면 민촌 의 출세는 몇 해를 뒤지든가 혹은 아직껏 「쥐불」의 원고를 부여안고 방황 하는 중일는지 알 수 없다.

나는 그 뒤 다시 「쥐불」을 읽을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책으로까지 났다 는 그 표지는 보았지만.

그러나 좌익작가가 고수하여 오던 바의‘살인 방화’식의 소설에서 벗어나 려는 그 첫 작품으로 특필할 가치가 있는 작품이었다.

取諦[취체]의 손[편집]

1919년 2월 <창조>의 발간으로 발족한 ‘韓文學[한문학]’은 그 새 10년간 의 공을 쌓아서 그 공에 대한 원만한 업적을 획득하였다.

이야말로 순전히 그 당년부터 이 길에 종사한 몇몇 문사의 순전한 열서의 산물이었다.

일반 사회의 지지도 없었다. 국가의 보호도 없었다. 아니, 그 반대로 온 국민은 문학을 천시 괄시하고 조선총독부 당국은 문학을 괄시, 학대, 탄압 하는 가운데서 오직 우리 몇몇 사람의 끓는 열정만으로 건설하고 키워 오던 것이었다. 위정 당국(조선총독부 당국)과의 항쟁의 순서를 따라 보면 일본 해군대장 齋藤實[재등실]이 조선총독의 임무를 띠고, 남대문 정거장에서 姜 字奎[강자규] 노인이 폭발탄 세례를 받으며 부임하여, 소위 문화정책 실시 를 선언한 직후에 이 땅에 족출한 신문화 운동은 일견 적색 색채를 다분히 띤 것이었다.

그것은 이 민족이 과거 10년간 일본 제국주의에게 학대받은 거기 대한 반 항으로 권력자에게 반항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적색사상 포섭이었다.

주요한도 마치를 찬송하는 시를 쓰고 염상섭도 현재도 일부 사람에게는 중 간파로 인정되어 있느니만치, 소위 ‘진보적’사상의 사람이었고 적색사상 은 진보적 사상이라 하여 온 천하를 풍미하는 시절이었다.

일본 제국주의와 조선총독부에 반항심을 품은 우리나라 사람은 누구나 일 본에 반항하기 위하여 붉은 사상이라도 용인하기를 사양치 않았다.

따라서 일본 제국주의의 출장소인 조선총독부 당국은 처음은 이 붉은 사상 취체에 전력을 다하였다.

<개벽>도 좌경하고 조선일보· 동아일보조차도 ‘진보적 사상’에 기울 동 안, 우익의 진용을 견지한 자는 오직 신생 문단의 <창조>파 뿐이었다. 지주 의 자제, 부자집 도령들로 조성된 <창조>만이 좌익을 떠난 생예술의 길을 개척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10년ㅡ1930년경에는 이 땅에는 좌익사상이라는 것은 그 무서운 탄압에 견디지 못하여 소멸되거나 지하로 숨어 버리게 되었 다.

이러자 취체 당국은 당연한 순서로 민족문학에게로 그의 총부리를 돌렸다.

아직껏 무풍지대에서 고요히 자라던 민족문학자의 위에 탄압과 제재가 내 리기 시작하였다.

후년, 내가 무슨 사건으로 囚人[수인]이 되어 법정에 서게 될 때 그때 나 를 논고하던 현명한 검사가 말한 바,

“조선에 민족주의 사상을 뿌리고 배양한 문학가 이광수, 金東仁[김동인] 두 사람 가운데 이광수는 전향하여 지금 충량한 천황의 적자가 되었지만, 이 金東仁[김동인]이는 운운….”

의 논고도 받았지만, 일개 이름 없는 검사에게까지 민족주의의 문학가로 이 름 알리었더니만치 내 글에 대한 그들의 감시는 엄중하였다.

당국의 취제가 좌익사상에서 민족주의 사상으로 옮자 과거 좌익사상에 대 하여 탄압한 그 방식을 짐작하는지라 전전긍긍, 우리의 붓을 다시 깎아서 당국과 항쟁의 수단을 강구하였다. 우리는 문학의 수법의 이용할 수 있는 온갖 방법을 다 써서 우리 민족사상을 죽이지 않기로 노력하였다.

선동에서 선전으로ㅡ 다시 변하여 암시 수법으로 이 민족사상만 주입해 두 면 언제든 민족 해방의 날이 올 것을 굳게 믿고 암시 수법까지 이용하여 민 족주의 사상만은 살려 보려고 노력하였다. 우리가 문학적 수법을 이용하여 이렇듯 당국의 취체를 피하려 하면 당국의 취체도 또한 우리의 뒤를 따라왔 다.

“이 글은 아무리 뜯어보아도 불온한 데를 찾아낼 수 없었다. 그러나 다 읽고 가만히 생각하면 은연중 불온한 사상이 숨어 있다. 그래서 이 글은 삭 제하는 바이다.”

취체 당국은 마지막에는 이러한 막연한 이유를 붙여서 ‘암시’에까지 취 체의 손을 뻗치었다.

민족문화 건설과 민족주의 사상 유지의 두 가지 큰 명예를 멘 우리 문학도 들은 온 국민의 무시와 당국의 철저한 탄압 가운데서도 용하게 그냥 싸웠 다.

그때에 만약 우리가 기운에 지쳐서 어느 편으로든 넘어졌더면, 지금쯤은 이 땅은 소련의 한 연방이 되었거나 일본의 한 지방으로 화하였을 것이다.

우리의 그 가여운 노력이 그래도 얼마간의 효력을 나타내어 8·15 이후에 대한민국이 이루어진 것을 볼 때에 우리는 과거의 가여운 노력이 오늘날에 위대한 성과에 기쁨을 금치 못하는 바이다.

당년에 내가 쓴 글 가운데 위험한 사실이 암시되어 있다고 인정받은 자는 죄 총독부 검열 당국에 압수되어 지금은 알아볼 바도 못 되지만, 그 지독한 검열의 눈까지 피하여 새어나온 글이 오늘날에 민족정신 보존의 일조라도 되었는가 하면, 문학의 위대한 선전력에 스스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동시에 연전 나를 구형하던 검사의,

“이런 선전력 많은 민족주의 문학가의 전언행을 엄중히 취체 제재(약)할 필요상, 피고를 1년 징역에 처하는 것이 마땅하다.”

고 논고하던 일이 상기되어 스스로 고소를 금치 못하는 바이다.

염상섭은 나하고 ‘발가락’문제를 일으킨 이래, 한동안 당시 적을 두었던 조선일보를 물러나와서 두문불출하고 있다가 육당 최남선의 알선으로 <매일 신보> 사회부장의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한자리에 1년간을 앉아 있지 못하 는 그의 버릇을 따라서 <매일신보>도 집어치우고 만주로 뛰었다. 만주서도 몇 번 자리를 옮기면서 지내다가 국가 해방의 날을 맞아서 귀국하였다.

그런지라, 그는 그 모진 조선총독부 검열의 시달림은 겪지 않고 지냈다.

그러나 일본 군부가 만주사변을 일으킨 이래 조선총독부의 검열 방침은 더 욱 기괴하게 발달되어, 암시 ‘취체’의 눈에까지 거리지 않는 선전방침에 는 당국으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어서 덮어놓고 문학이라는 것은 박멸하려고 그 취체방침은 나날이 강화되었다.

무슨 연대를 기록하면 절대로 명치든가, 대정, 소화 등의 연대를 기록하 지, 서력 몇 해라고는 쓰지 못하리라, 만주의 일을 쓰려면 꼭 ‘國[국]’자 를 놓아서 ‘滿洲國’[만주국]이라고 해야 하느니라, 등등. 한 글자에 대해 서까지 일일이 간섭이 가해지며, 가령 무슨 글에 ‘황량한 만주에도 겨울이 이르러서’란 글이 있으면 검열 당국에서는 ‘만주국’이라고 고치라는 주 서를 달아 내보내서 ‘황량한 만주국에도 겨울이 이르러서’라 인쇄된다.

그들이 싫어하는 사람의 이름에 아무개 ‘씨’라 하면 ‘씨’자를 삭제해 버리며 등등은 고사하고, 흔히 글의 원작자를 도서과에 불러서 원작품을 전 부 개작해 가지고, 이러이러하게 발표를 하라는 따위의 강요까지 받는다.

따라서 검열이 강화된 시절에 발표된 작품이란 것은 원작자와 검열관과와 합작물이 적지 않다. 어떤 시인은 시집을 검열받았는데 하도 많이 합작과 개작 부면이 많아서 남의 시를 개작하면 어쩌느냐고 분개하고 그 개작된 시 집을 그냥 삭여 버린 일까지 있다.

검열 당국은 온갖 수단을 다 써서 민족사상 전파를 막으려 했지만, 그래도 그 틈새를 꿰어 그냥 퍼져나가는 민족사상에 최후 탄압수단으로서 南次郞 [남차랑] 총독 시절에 그만 朝鮮語使用[조선어사용] 禁止令[금지령]까지 내 린 것이었다.

이런 탄압과 금지를 뚫고, 그래도 우리 문학이 윤곽을 세우고, 민족사상의 뿌리를 그냥 박아둔 당년의 문학가의 훈공을 크게 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에 앉아서 30년간 우리가 걸어온 가시밭을 돌아볼 때에 , 숱한 고초 는 겪었을망정, 결코 우리의 걸어온 발자국이 헛되지 않았노라는 긍지를 느 끼는 동시에 4천 년간 문화로 육성된 이 거룩한 땅에 唯物史觀的[유물사관 적] 사상을 뿌려보려는 헛된 노력을 하는 일부인에게 대한 연민의 정을 또 한 금할 수가 없었다.

<朝鮮日報[조선일보]> 시대[편집]

내가 서울로 이사를 와서 순전히 붓끝으로 먹어 나가려고, 월부로 집을 한 채 사고 고투한 지 1년나마 뒤에 금광부자 방응모가 그 새 폐간 상태에 있 던 조선일보가 생겨났다.

듣는 바에 의지하건대 방응모는 본시 동아일보 定州[정주] 지국장이었다.

그는 동아일보 본사로 보내야 할 신문대금을 몇 달 밀렸다. 그래서 그때 동 아일보 사장이던 고 송진우가 지국을 해소시키고 말았다.

방응모는 송진우에게 누차 한 번만 더 연기해 주기를 간청했지만 송진우는 단연 이를 거절하고 지국을 해소시켰다.

여기 분개한 방응모는 하릴없이 금광 덕대로 전향하였는데, 운이 터지느라 고 금광에서 노다지가 나서 금광부자가 되었다 한다.

이 방응모가 철천지한을 품은 자가 동아일보와 그 한 계통인 普成傳門學校 [보성전문학교]였다. 내가 장차 크게 되면 동아일보를 압도할 신문과 보성 전문을 압도할 학교를 만들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그때인지는 모르지만 방응모는 <중외일보> 폐간 임시에도 <중외일보>를 사 려고 움직이다가 아직 자금에 미흡한 점이 있어서 모 출판사를 사려고 움직 인 일이 있다.

전사는 하여간, 그때 사멸상태에 빠졌던 조선일보를 매수하여 다시 살린 그 공적은 크게 볼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조선일보를 매수하여 蓮建洞[연건동]에 문을 열고 조만식 사장, 방응모 부 사장, 주요한 편집국장이라는 진용으로 동아일보에 선전을 포고하였다.

방응모의 금력과 주요한의 편집기술은 동아일보와 넉넉히 맞설 만하였다.

당시 윤전기가 한 대밖에 없는 조선일보로서는 동아일보의 일간 10페이지 의 간행을 실력으로 당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조석간 간행이 인기를 사서, 더우기 투쟁력 왕성한 신진 기예의 기 자로 조직된 주요한 내각의 참신한 취재 편집이 인기를 사서 조선일보가 과 거 10년간을 따르다 따르다 못하여 참패한 동아일보와의 쟁파전에 조선일보 는 드디어 동아일보를 육박하고 압도하게 되었다.

귀순 이래 동아일보의 공로자 이광수를 조선일보에서 뽑아 오고, 명예사장 조만식을 들쳐내고 방응모 자신이 사장이 되고, 이리하여 조선일보는 동아 일보와 대등의 위에 오르고 지국장 떼인 분풀이는 충분히 하였다.

당시의 에피소우드로 방응모는 옛날 원수 송진우와 사사에 겨루어 어떤 좌 석에 초대를 받을지라도 자기가 먼저 가서 송진우의 웃자리에 앉아야지, 차 례가 뒤떨어져서 아랫자리로 가게 되면 불쾌한 표정까지 감추지 못했다 하 니, 그의 성격을 가히 짐작할 것이다.

신문의 성적이 이처럼 좋으니 그는 안심이 생겨서, 사장 조만식을 갈아내 고 스스로 사장이 되고 조선일보를 사실상 키운 공로자 주요한을 내쫓고, 조선일보의 독재왕이 되었다.

나도 방응모 조선일보가 될 때 불리어서, 조선일보의 학예부를 40일간 맡 아본 일이 있다. 이 40일간의 봉급 생활로서 과부의 서방질이나 일반으로 나 스스로도 창피하게 생각하는 바이다.

그러나 그 동안에도 한두 가지의 유쾌한 일은 있었으니, 하나는 위에도 말 한 일이 있지만 민촌 이기영의 발견이었다. 그때의 민촌은 소위 살인 방화 소설 문사로 중앙 문단에서는 제외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사실 당시 좌익 문사들의 생활은 참담하였다. 민족파 문사들은 탄압의 틈 새를 꿰어, 어떻게든 뚫을 기교와 수법을 강구하여 탄압자들에게 대항하였 지만, 그런 수법이나 기교를 강구할 기능이 없는 좌익문사들은 전업하지 않 으면 굶을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당시 白鐵[백철]도 좌익(동반자)계열의 한 맹장으로 민족과 문학가들을 덮 어놓고 욕하던 패지만, 어떤날 조선일보에 나를 찾아와서, 인제부터 이데올 로기를 고칠 테니 원고를 사 달라고 하면서 원고 뭉치를 내놓았다.

조선일보는 당시 복간초라, 원고료 예산도 확정되지 않아서 지금 생각하면 얼굴 붉힐 정도의 돈을 지불하고 원고를 산 일이 있지만, 이렇듯 단 몇 푼 이라도 지불해서, 가난에 쪼들리는 문사들에게 점심 한 그릇값이라도 내어 주기 위하여, 나는 늘 경리측과 다투었다.

그때 어떤날 편집국장 주요한이 나에게 조선일보에 연애 소설 한 편을 실 어야겠는데 누가 좋을 듯하냐 묻기에, 아마 여학생 소설로는 李泰俊[이태 준]이 으뜸이라 대답했더니 요한 말이 채만식이 어떻겠느냐, 어떤 간부가 蔡[채]를 추천하는데… 한다.

사실 이태준은 그때 ‘신생사(新生社)’라는 데 들어가서 몇 편 수필의 전 력은 있지만 아직 미지수였다.

채만식이도 아직 전력이랄 것은 없지만 <조선문단> 제2기 (방춘해 <조선문 단>이 폐간된 뒤에 최서해가 남 모라는 출재자를 붙들어 한 호인가 두 호인 가 낸 일이 있다) 시절에 약간 문명을 낸 사람이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채만식이 원고 한 뭉치를 가지고 찾아왔다. 요한의 말이 그 원고를 보아서 고칠 데를 고쳐 주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태준을 지 지하는 사람이라, 채만식의 그 원고(「人形[인형]의 집을 나와서」라는 것 이었다) 여러 군데 뻑뻑 말살을 하여 도로 내주었다.

그런 뒤에는 나는 조선일보를 사직하고 나와서, 뒤는 모르지만 채만식의 그 「인형의 집을 나와서」가 먼저 조선일보 지상에 연재되고 그 뒤에는 이 태준이 집필(아마 「聖母[성모]」라고 생각된다)하였다.

조선일보를 물러나와서 수절과부 서방질한 것 같아서 어이없이 있을 적에 어떤날 조선일보 사장 조만식이 찾아왔다. 그리고 내게 「雲峴宮[운현궁]의 봄」을 계속 집필을 파격의 원고료로써 부탁한다.

내가 조선일보에 재적할 동안 내가 책임맡은 학예면을 史譚[사담] 「雲峴 宮[운현궁]의 봄」을 며칠에 한 번씩 연재하고 있었다. 하도 총망스러운 신 문사 일의 여가에 쓰는 바이라, 쓰며 말며 그러했는데, 독자들에게서 좀 성 실하게 연재하라는 투서가 자주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아직 집값 월부금으로 치르던 것이 계속되는 시절에 갑자기 직장까지 떨어 져서 어찌할 방도가 아직 서지 못했던 차이라 나는 이를 수락하였다.

집값을 월부로 치르던 시절이라 내 원고를 한꺼번에 다 써갈 터이니, 원고 료를 일시금으로 달라고, 그 조건으로 다시 원고료 생활로 돌아왔다.

조선에서의 원고료 생활이란 사실 불가능한 일이다. 더우기 일본의 準戰生 活[준전생활] 체제의 강화시기로서, 인쇄 용지는 부족하였다. 검열제도 강 화로 글 쓰기는 어렵겠다, 우리 사람의 습성으로 원고료 지불은 군돈 같아 서 좀체 주지 않겠다, 그래도 원고료는 대정으로 주는 것이라 이쪽에서 채 근하기는 면중스럽겠다, 등등의 관계로 그냥 글에 종사하는 사람은 쉽지 않 고, 글을 부업으로 하거나 혹은 아주 글에서 떠나서 다른 직업으로 전향해 버리거나 하는 것이었다.

그 당년에도 ‘문단 침체’니 무에니 시비가 많았지만, 일반 대중의 이해 지지가 없고 관할 당국의 철저한 탄압 아래서 생활 방도도 보장되지 못한 문사들이 순전히 노력과 정성으로 그만한 업적이라도 쌓았다 하는 점을 크 게 평가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자고로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의 문학이 이 러한 곤경 학대 아래서 나서 자란 자 있었던가?

더우기 조선문학은 조선어로써 조성되는 것이다. 南次郞[남차랑] 총독 시 절에, 소학교서부터 조선어과를 뽑아 버리고 관공리는 가정에서도 일본말을 쓰라고 강제하며 가게에서 담배 한 갑을 사도 일본말로 하는 시절에 있어서 도 그 강제, 탄압, 그 제재를 무릅쓰고 조선어를 사수하여 해방된 국가에 그대로 바친 그 위업에 대해서는 이 나라 언어를 사용하는 자, 한결같이 모 두 사례를 하여야 할 것이다.

<野談[야담]>·<月刊野談[월간야담]>[편집]

1935년 尹白南[윤백남](敎重[교중])이 내게 무슨 원고를 한 뭉치 보내면 서, 그것을 읽어보고 그 이야기에 따라서 원고지 100매 가량의 소설을 하나 써달라는 것이었다.

윤백남이 출재자를 얻어서 <월간야담>이라는 잡지를 시작하는데, 원고를 매호 제공해 달라는 것이다. 대체 윤백남을 비상한 才子[재자]로서, 동아일 보 사장 송진우의 마누라 유산홍이 윤백남의 애독자인 탓으로 연해 동아일 보의 講演面[강연면]을 담당하던 사람으로, 인재 박덕으로 어디를 가든 오 래 있지 못하는 성품이었다. 지금 출재자를 잘 만나서 <월간야담>을 창간하 지만 며칠이나 계속할는지 의문이었다.

그때, 원고 주문만 받으면 다닥치는대로 응하여 안회남에게, 후배에게 길 을 터주지 않는다고 욕을 먹던 나는 이 백남의 청도 곧 수락하였다. 그러나 그때 나는 역사소설의 한 선구로 지목받기는 하는 터이나, 역사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전 깜깜이었다.

백남이 내게 보여준 원고(「元斗的[원두적]」였다)를 참고하여, 원두표 이 야기를 한편 써서 백남에게 보였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史譚[사담] 방면으로 손을 벌리게 되었다. 고답적 문 학작품 이외에는 붓들기를 피해 오던 나는, 이리하여 글로 밥을 마련하기 위하여 온갖 방면으로 진출하였다. 그리고 거기 대한 변명적 이론조차 지어 낸 것이다.

백남은 그 천성은 역시 벗지 못하여 <월간야담> 창간 두세 달을 지내서는 그만 또 만주로 달아나고 말았다. 그러나 <월간야담> 간행에서 재미를 본 그 잡지사에서는, 이번은 내게 달려들어, 그 당시 <월간야담>은 거진 내 글 만으로 꾸며나가며 간행을 계속하였다.

그것을 한동안 보다가, 나도 한 잡지를 시작해 보기로 하였다. <월간야담>이 내 글만으로 꾸며나가는 것은 둘째 두고, 그때 내가 다달이 쓰던 글의 분량을 모으면 한 개 잡지쯤은 넉넉히 당할 만한 분량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한 잡지를 창간하기로 하였다. 제호는 <야담>이라 하여….

문필생활이 지난한 이 땅에 있어서, 그 새 문필만으로 살아오자니 과연 진 저리가 났다. 그 새의 경력이 있으니 그래도 글 주문이 연락부절로 왔지, 그 주문을 글을 사양치 않고 쓰자니, 사실 지기지기하였다. 글 주문이나 없 고 한 때에는 등이 달았다. 물가 비싼 서울 살림에서, 더우기 새살림을 차 려 놓고 건설하는 판이니, 그 살림이란 여간 초조하고 등다는 것이 아니었 다.

백남의 <월간야담> 경영상태를 보니 수지는 제법 맞는 모양이었다. <월간 야담>은 거진 내 글로 꾸며진다. 그럴진대 그 내 글로써 내가 잡지를 간행 하면 매번 구구하게 원고료 받지 않고도 내 살림은 영위가 될 것이다.

이리하여 나는 創刊費[창간비] 약간을 마련해 가지고 <야담> 잡지를 간행 하였다. 숫자로 따져 보자면 수지는 맞았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는 9천여 부까지 나갔는데도 불구하고 매호 새 비용을 처넣지 않으면 다음 호의 간행 이 불가능하였다.

그동안에 나의 건강은 철저적으로 꺾이어 나갔다. 시작한 지 1년 반, 잡지 로 16, 7회를 낸 뒤에는, 그 잡지를 어떤 진남포 사람에게 내어맡기고 나는 몸을 쉬려 平南[평남] 寧遠[영원] 어떤 광산으로 갔다.

이름은 광산이나, 산수 경치 진실로 명랑한 곳이었다. 그곳에 자리잡고 있 을 동안에, 중국 북경 교외 蘆溝橋[노구교] 근처에서 몇 방 총이 울리고 제 2차 대전의 서막인 支那事變[지나사변]이 터졌다.

손에 한 조각의 쇠가 없고, 있을지라도 쓸 줄을 모르는 우리 한국인은 자 연 이웃 나라의 사변에 관심을 갖는다. 지나사변의 서곡인 滿洲事變[만주사 변]이 터졌을 때도 이 백성은 남의 일 같지 않아서 무슨 호박이나 생기지 않는가고, 매일 배달되는 신문의 특별호외를 목을 길게 하고 기다리던 터였 다. 그 만주사변이 헛되이 ‘만주국’이라는 허수아비 나라 하나를 세운 뿐 으로 막을 닫힐 때, 이 백성은 얼마나 실망을 하였던가?

지나사변이 차차 격화될 때에 이 백성은 다시 숨을 모아 쉬며, 그 진전을 보고 있었다. 광산의 사무실 계통은 물론이요, 한낱 광부에 이르기까지 모 두가 3, 4일만에 한 번씩 배달되는 신문을 기다리고 신문의 보도를 보고 자 기의 상상력을 가하여 가면서, 소위 지나사변의 추이에 신경을 쓰고 있었 다. 조선의 경찰 당국은 이 사변이 조선 민심에 영향될까 보아서, 취체가 차차 강화되었다. 그러다가 광산 광주되는 내 가형도 종내 ‘同友會[동우 회]’ 관계로 囹圄[령어]의 몸이 되었다. ‘동우회’란 島山[도산] 安昌浩 [안창호]가 만든 ‘興士團[흥사단]’의 조선 안 단체로서 그때 안창호도 수 감되어 마지막 옥사까지 한 것이다.

‘皇軍 慰問[황군 위문]' 北支行[북지행][편집]

앓는 몸을 이끌고 다시 서울로 돌아와 보니, 나의 친지들은 대개 종로 경 찰서를 거치어 서대문 형무소에 입소되어 있고 서울 시내는 완연 戰時都會 [전시도회]의 상태를 이루고 있었다.

어떤날 거리에 나가 보니, 거리는 방공연습을 하노라고 야단이고, 소위 민 간유지들이 경찰의 지휘로 팔에 누런 완장을 두르고 고함지르며 싸매고 있 었다. 夢腸 [몽장] 呂渾亨[여혼형]은 그런 일에 나서서 삥삥 돌기를 좋아하 는 사람으로서, 그날도 누런 완장을 두르고 거리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대체 몽양이란 사람에 대해서는 쓰고 싶은 말도 많지만 다 삭여 버리고 말 고, 방공훈련 같은 때는 좀 피해서 숨어버리는 편이 좋지 않을까. 나는 한 심스러이 그의 활보하는 뒷모양을 바라보았다.

대체 <야담> 1년나마의 경영에 얼마나 노심을 했는지, 그때 꺾인 건강상의 손해는 좀체 낫지 않아서, 이듬해 앓는 사람에게는 겨울은 견디지 못할 일 이었다. 긴긴 겨울밤을 이불을 쓰고 누워서 나는 이불이나 쓰고 있지만 지 금 연해 보도되는 저 멀리 싸움마당에서 쫓기는 戰災民[전재민]들은 얼마나 고생하는가? 그때는 나는 중국 본토는 아직 가 보지도 못한 좁다란 인생이 라, 중국 땅은 춥게만 생각되어서 신문지가 보도하는 바 몇십만 명, 몇백만 명의 죄없는 백성의 유랑이 끝없이 가긍하였다. 동시에 일변으로 겁나는 것 은 총독부 정치의 나날이 강화되는 일이었다.

그 강화에 질겁을 하여 이 땅 각 계급, 각 사회는 소위 皇軍 慰問[황군 위 문], 소위 전쟁 협력, 소위 報國行動[보국 행동] 등 명칭으로 각각 무슨 일 이든 하고 있다. 그 가운데 꿈쩍 않고 가만 있는 사회가 하나 있다. 즉 문 단이라는 사회만은 천하의 대변도 모르는 듯이 각각 제 할 일만 하고 있다.

당국은 보고도 모른 체하고 버려 둔다. 이것이 정녕 버려 두는 것이 아니 라, 너 두고 보자 벼르는 것이다. 문단에 탄압이나 간섭이 내리는 날에는 나 金東仁[김동인]이는 제일차의 희생물로 꿰어 올릴 것이다.

이광수는 ‘동우회’ 사건으로 벌써 감옥에 들어가 있고 만약 문단에서 희 생자를 구하자면 내가 제일차로 될 것이다. 병으로 날카롭게 된 신경에는 이것이 여간 큰 협위가 아니었다. 이 몸으로 감옥에 들어가면 당장 죽는다.

일본의 문사들도 이러한 문제 때문에, 근자 漢口[한구] 위문이니 전쟁문학 이니 자꾸 협력 행위를 하지 않는가.

여섯 명의 가족을 거느린 주인이 감옥에 들어가면 그 가족 전부가 참변이 다. 이런 협위 때문에 전전긍긍하다가 음력으로 섣달 그믐께 아픈 몸을 간 신히 일으켜서 그 길로 택시를 불러 타고 총독부로 사회교육과장 某[모]를 찾아갔다.

그때 내 생각으로는 일본 문사들 모양으로 한구 방면에 군사 위문이나 알 선해 주려니, 그렇게 되면 나는 중학 병태라 도저히 여행은 못할 게고, 문 단에서 누구 두세 명 선택해서 소위 군사 위문을 보내면 당국의 눈짓도 좀 덜해지려니 해서 그 사람(과장 모씨)을 찾았던 것이었다. 그랬더니 그 과장 씨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군사 위문은 군에서 시끄럽다니, かミッパイ(가미 시바이)를 문사들이 쓰도록 해 보시지요, 하는 것이었다. 하도 어이없는 말 이라 나는 그냥 총독부를 물러나왔다.

나오는 길에 종로 네거리 이태준 경영의 文章社[문장사]에 들러서 지금 총 독부에서 들은 이야기를 하고 함께 웃어주었다.

나는 가볍게 웃어주었지만 이태준은 내 이야기에 가슴 찔리는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전쟁에 협력 행위를 않고 초연하게 있는 것은 문단만이 아니었 다. 문단과 마찬가지로 출판업자들도 전쟁 나 모른다는 태도로 있던 것이었 다. 더구나 출판업자 중에도 서적상이라든가 인쇄업자가 아닌 ‘인텔리’출 신이요, 문사를 겸한 출판업자가 이태준의 문장사, 林和[임화]의 學藝社[학 예사], 崔載瑞[최재서]의 人文社[인문사] 등 세 곳이 있다. 내가 문장사를 다녀간 뒤에 이태준은 겁이 나서 학예사 임화며, 인문사 최재서 등을 초청 하여 협의한 결과 세 출판사에서 돈을 내어 여비를 만들어서 문사 몇 사람 을 선택하여 전선 위문을 보내기로 합의가 된 모양이었다.

이리하여 장차 내려 씌워지려는 불세례를 문단 출판업자 연합으로 방비해 보자는 것이었다.

잊히지도 않는 섣달 그믐날, 집에서 설차림 떡을 먹고 있노라는데 이태준 에게서 속달 우편으로 지금 학예사 임화며, 인문사 최재서며가 함께 모였는 데 곧 좀 나와 달라는 것이었다. 나갔더니 세 사람이 모여서 함께 警務局 [경무국] 圖書課[도서과]에 좀 같이 가 달라는 것이었다.

일전에 학무국 사회교육과에 갔다가 ‘가미시바이’나 쓰라는 소리를 듣고 나온 나는, 그다지 시원히 생각지 않았지만 그들의 간청으로 함께 경무국 도서과를 찾았다. 그랬더니 도서과에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기뻐 환영 하는 것이었다.

사실 도서과에서는 문단에서 무슨 협력 행위가 있기를 가다리고, 만약 없 으면 처벌이라도 하려고 벼르던 중이었다. 이럴 즈음에 문단과 출판업자가 협력해서 무슨 행위를 하겠노라 자진해서 청하니까 그들은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군부에도 알선해 주겠노라, 현지 각 당국에도 알선해 주겠노라, 자기네가 쓸 수 있는 호의는 다 쓰겠노라 하며 나더러 안색이 매우 좋지 못 하니 만약 여행을 하게 되면 감당하겠느냐 묻는다. 그래서 나는 건강상 여 행을 감당할 수 없으니 누구 적임자에게 밀겠다고 하였더니, 도서과에서 네 가 안가면 되겠느냐, 어서 건강 회복을 도모해서 한두 달 안으로 건강 회복 토록 노력하라고 한다.

당시 온 문단은 무언의 협위에 전전긍긍하던 시절이었다. 이 단체 저 단체 가 모두 위문이니 무엇이니 해서 당국의 취체의 예봉을 피하는 이 시절에, 한개의 단체도 못 가진 문사들이라, 장차 무슨 무서운 탄압이나 간섭이 있 을 것은 누구나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 단체도 없기 때문에 앉아서 이 제재를 기다리지 않을 수 없던 문단은 이번 일을 매우 흡족하게 여겼다.

그런데 그때 뚱단짓 곳에서 시비가 생겼다. 춘원 이광수는 자기가 문단의 수령이노라고 자임하고 있었는데, 온 문단적 행사에 자기가 끼지 않았으니 이는 문단적 행사가 아니라 하여 <조선신문>이라는 日文[일문] 신문에 공격 을 가하였다.

춘원을 그때 동우회 사건으로 수감되었다가 보석으로 나와 있던 즈음이었 다.

나는 자동차를 달려서 자하문 밖 춘원의 산장을 찾아 춘원을 만나서, 누누 이 이번 행사가 문단을 당국의 손에서 구해 보려는 일임을 설명하여 그대가 이 일을 방해해서야 되겠느냐 하여 서로 양해가 되고, 이튿날 춘원은 일부 러 龍山軍司令部 [용산군사령부]로 가서 <조선신문> 상의 공격은 자기가 한 바 아니요, 金文輯[김문집]이 라는 친구의 노릇이라고 변명하고 춘원이 선 두에 나서서 이번 일을 공공연히 추진시키기를 약속하고 돌아왔다.

이리하여 하마터면 문단에 내릴 뻔한 탄압 제재의 손을 묘하게 피해 버리 기는 하였다.

가난한 조선 사회ㅡ 그때 주최 세 출판사를 비롯하여 서울 온 출판업자가 죄 모여서 거둔 돈이 겨우 세 사람 여비밖에 안되었다.

목표지는 北支部[북지부], 기간은 세 달로서 세 사람은 길을 떠나게 되었 다. 나는 그 길에서 빠지고자 여러번 꾀해 보았으나, 내 건강이 나날이 양 호해 가서 건강을 핑계 삼을 수 없고, 도서과에서도 네가 빠지면 일이 되겠 느냐고 강압하여서 부득이 길을 피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이번 길에는 중대한 책임이 짊어지어졌다. 전선을 시찰하거든 돌아 와서 시찰 보고문을 저술해서 공포하라는 것이었다. 우리 일행이 떠날 때에 는 총독부 국장, 과장급이 모두 정거장에 환송하여 진실로 성대한 길이었 다.

불행이랄까, 다행이랄까, 나는 돌아오는 길에, 臨芬[림분]을 지나다가 혼 도하여 기억력을 전부 잃어버리었다. 그때 함께 갔던 친구 朴英熙[박영희], 林學洙[임학수] 두 사람은 ‘戰線紀行’[전선기행] 詩[시]와 수필을 저술하 여 짊어졌던 중임을 이행했지만, 기억력을 잃은 나는 당국의 미움을 받으면 서도 종내 이행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이태 뒤, 나는 ‘不敬罪’[불경죄]라 는 죄로 징역 1년을 산 일이 있는데, 그것도 요컨대 그 임무를 이행하지 않 은 탓이라 짐작은 하지만, 1, 2년 징역을 살면 살았지 그때 북지에서 본 참 담한 실황의 ‘無敵 皇軍[무적 황군]의 美德[미덕]’으로는 도저히 쓰지 못 할 것이었다.

同友會[동우회]와 李光洙[이광수][편집]

북지나 여행을 끝내고, 그 뒤 연여를 건강 회복 때문에 이 온천장 저 온천 장으로 돌아다니다가 조금 나아서 서울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와 둘러보니 이 땅의 문단은 참으로 참담한 형태였다. 내가 그렇게도 사랑하고 아끼던 이 땅의 문단의 형태는 그야말로 참담하게 흩어졌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 중앙일보는 폐간되고, 온갖 잡지도 모두 문을 닫혀 서 문학이 의지할 근거지가 없게 되었다.

게다가 조선총독부 당국의 조선어 박멸책은 더욱 강화되어, 도회지의 아이 들은 인젠 집에서부터 일본말을 쓰도록 훈련받고, 조선문의 출판물은 출판 을 금지하고, 예전 출판 허가를 받은 것조차 새로 출판하려면 다시 겸열을 받으라는 철저한 방침이었다.

글을 쓰려면 반드시 시국적인 글을 써라, 다른 글은 지금 비상시국하에 절 대로 용인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직껏 20년간을 민족주의적 지도자로서 자타가 허락하던 이광수가 전향한 것이 이때였다.

이광수는 ‘동우회’의 형사피고인으로 보석은 현재 자유로운 터이었지만 재입옥될지 알 수 없는 아슬아슬한 처지였다.

같은 동우회 형사피고인으로 보석 중에 있던 가형 東元 [동원]이 어떤날 나를 조용히 불렀다. 그때 나는 북경 여행에서 돌아와서 온천장으로 휴양 다니다가, 평양에 쉬고 있던 때였다. 형은 나더러 잠깐 상경하여 춘원을 만 나 춘원의 심경을 좀 따져 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형의 심경을 짐작하였다. 부자집 맏아들로 아직껏 고생을 모르고 지 낸 형ㅡ 그가 예전 소위‘寺內[사내] 총독 암살미수 사건’이라는 세칭 105 인 사건에 걸리어 3년간을 감옥 미결수로 2년나마를 있다가 지금 보석으로 출옥해 있기는 하지만, 당국이 ‘동우회’를 처벌할 생각을 가지는 동안은 반드시 언제든 또 고난을 해야 할 것이다.

나이 60, 이제 또 감옥에 들어갔다가는 반드시 죽는다. 그의 선배 동지 도 산 안창호는 얼마 전에 죽어 버렸다.

동우회의ㅡ동우회 회원들의 운명은 이제 춘원 이광수의 거취에 달려 있다.

이광수가 당국에게 대하여 전향을 표명하면 혹은 용서될 수도 있겠거니와, 이광수가 버티면 동우회 4, 50명의 생명은 형무소에서 결말을 지을밖에는 없었다.

도산 안창호 떠난 뒤의 ‘동우회’는 오직 이광수의 전향 여하로 운명이 결정될 것이다. 동우회의 평남 책임자로서 주요한 책임을 지고 있는 가형의 이때의 심경을 나는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형에게 여러가지의 의논을 하기를 피하였다. 이것이 나의 독단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형이 내게 한 말이 이광수를 전향시키어 동우회 40여 명의 생명을 구해달라는 뜻으로 들었다.

연전 북경 여행을 단행하여 문단에 내리려는 박해를 모면케 한 나는, 이에 가형 이하 40여 명 동우회의 운명을 좌우하는 중대한 사명을 지고, 또 다시 병든 몸을 이끌고 상경하기로 하였다.

걸음걸이가 부자유하기 때문에 택시를 잡아타고 자하골 이광수를 찾은 것 은 이튿날 오정도 지나서였다.

택시에게 길에서 한 시간을 기다리라 한 뒤에, 이광수의 집에 들어섰다.

이광수는 그때 자하골 산장에 홀로 있고 문안 자택에서 매일 조반 저녁을 배달하여 먹고 있던 중이었다.

그날은 늦은 가을 바람이 세차게 불어서, 문이 연해 덜컥 열리면 이광수는 달려가서 문을 닫고 다시 와서 나와 마주 않고, 이러한 가운데서 나는,

“壽[수], 富[부], 貴[귀]를 일생의 복록으로 꼽는데 그대 나이 50이니 이 미 수에 부족이 없고 그대 비록 재산이 없으나 부인이 넉넉히 자식 양육할 만한 재산이 있으니 부도 그만하면 족하고, 춘원 이광수라 하면 그 명성이 이 땅에 어깨를 겨눌 자 없으니 귀 또한 족하다. 이제 더 ‘수’를 누리다 가 욕이 혹은 더해지겠고 지금껏 쌓은 공이 헛 데로 돌아갈지도 모르겠으 니, 그대의 수를 50으로 고정시켜서 그대의 뒤가 헛 데로 안 돌아가도록 함 이 어떠냐?”

고 그의 가슴 찔리는 말을 하였다.

그때 춘원은 난감한 듯이 연해 한숨만 쉬며 대답을 못하고 있었다. 한 시 간 기다리라고 약속한 택시는 시간이 되었다고 싸이렌을 뚜우 뚜우 울리어 서 나 나오기를 채근하고 있었다.

나는 종내 몸을 일으켜 택시로 나왔다. 춘원은 따라 나와서 택시를 붙잡고 서서 그냥 아무 말도 못하고 한숨만 쉬고 있다. 한 시간 가량을 이렇게 서 있다가 종내,

“내 잘 연구해서 좋도록 처리하리다. 백씨께 그렇게 말씀드려 주시오.”

하고야 택시를 놓아주었다.

이광수가 그때 어떤 上申書[상신서]를 재판소에 내었는지 나는 모른다. 그 러나 상고심 재판까지 올라가서, 이광수는 온 책임을 자기가 뒤집어쓰고 자 기는 자기의 잘못을 통절히 느낀다는 성명을 하고, 자기가 그렇게 사랑하는 이 2천만 동포를 진정한 천황의 적자가 되도록 하기에 여생을 바치겠노라는 서약을 하여, 5개년 간 끌던 ‘동우회’사건은, 모두 무죄의 판결을 받았 다.

내가 그때 춘원에게 권고한 바는, 춘원이 온 ‘죄’를 홀로 쓰고 수, 부, 귀 그냥 지닌 채 자살해 버리라는 것이었다. ‘자살’이란 말을 노골적으로 꺼내지 못하여 춘원으로 하여금 내 말 뜻을 잘못 해석하여 一蓮托生 [일련 탁생]식의 전향을 성명케 하여 춘원을 실질적으로 우리 민족운동 사상에서 말살케 한 것이다.

춘원은 재판소에서 전향을 성명한 이후 그의 성격상 표리가 다른 언행을 할 수 없으므로, 진정한 일본 천황의 적자가 되고자 노력하였다. 아직껏 꺼 리고 피해 오던 일본인과의 연회에도 자주 나가고, 총독부 출입조차 자주하 고, 大和同盟[대화동맹]의 간부로 지방 강연도 자주 나가고, 집에서는 일본 옷으로 일본식의 생활을 하며, 이러한 생활에 적합한 이론까지 꾸며내어 글 로 발표하며ㅡ 지금껏 청년계의 사표로 추앙받던 춘원이 홱 돌아서서 청년 사상 악지도자로 표변하였다.

학병, 징병 등을 위하여 강연을 다니며 천황을 위하여 목숨을 아끼지 말라 고 부르짖던 춘원ㅡ 그가 과연 예전 민족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라고 외치던 춘원의 후신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춘원의 성격은 어디까지든 충직하였 다. 겉으로만 부르짖고 속으로 딴 꿈을 꿀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런지라 솔선하여 창씨개명도 하였고 대담스럽게 황국신민이 되라고 부르짖기도 한 것이다.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당시 춘원의 말을 따라서 지금껏 원수로 여기던 일본을 조국, 모국이라 생각을 돌렸던가?

당년 춘원의 전향으로 무죄 석방이 된 40여 명 동우회원은 모두 해방된 내 나라에 자기네들이 바칠 충성을 강구하고 있지만, 춘원은 오직 60의 늙은 몸을 효자동 구석에서 그래도 붓대는 놓을 수 없어서 외로운 심경으로 붓대 를 희롱하고 있다.

돌이켜 생각하건대 얼마나 많은 이 땅의 젊은이가 일본 제국주의의 철봉 아래서 춘원의 덕으로 피하게 되었는가? 춘원이 서둘러서 막지 않았다면 일 본의 성난 제국주의는 얼마나 많은 피를 이 민족에게 요구하였던가?

그러나 춘원은 이를 막기에 급급하여 ‘民族魂[민족혼]’을 일본에게 넘겨 준 것이다.

춘원 전향의 일부 책임을 면할 수 없는 나는 지금 ‘민족 반역자 처단법’

에 걸리어 있는 춘원을 보기가 민망하기 짝이 없다.

춘원이 나에게 향하여 내가 이렇게 된 것도 모두 너 때문이라고 질책할지 라도 나는 변명할 아무 말도 없다.

1945년 8월 16일인가 17일인가에 苑南洞[원남동] 어떤 집에서 ‘문인보국 회’의 統[통] 이은 ‘文化協議會’[문화협의회]의 발족회가 있을 때 벽초 에 ‘이광수 제명’문제가 생겼다.

그 좌석에는 兪鎭午[유진오], 李無影[이무영] 등도 있었지만 兪[유]는 보 성전문의 교수로 학병추진 등에 불소한 노력을 한 사람이요, 李[이]는 朝鮮 總督[조선총독] 文學賞[문학상]을 받은 사람이라 아무 말을 못하고 맥맥히 있었고, 이광수의 변명을 위해서는 내가 한마디 않을 수 없는 입장에 선 나 는,

“이 회합이 정치단체를 목표로 하든가 良心人團體[양심인단체]라는 목표 라든가 하면여니와, 문사의 단체인 이상에는 조선문학 건설의 최초 공로자 이광수를 뽑을 수 없다. 만약 이광수를 뽑는 문사단체일 것 같으면 나도 참 가할 수 없는 바이다.”

고 퇴석한 일이 있지만 8·15해방 이래로 이광수는 샘이 다분히 섞인 많은 시비를 받고 지금 ‘反民法’[반민법]의 처단을 고요히 기다리고 있다.

文人報國會[문인보국회][편집]

북경 여행에서 돌아와서, 기억력을 잃었노라는 핑계로 연이어 각 온천장으 로 돌아다니며 놀다가 집으로 돌아와 보니 세상의 형태는 아주 달라졌다.

세상은 전쟁 색채와 협력 색채로 아주 메워졌다.

여기서 무슨 강연회, 저기서 무슨 음악회가 모두 전쟁 색채였다. 게다가 일본이 미국과, 영국에까지 선선을 포고한 뒤에는, 이 땅도 싸움하는 땅으 로, 이 백성은 황국신민으로 모두가 된 듯하였다.

위정 당국도 이 백성을 황국시민으로 화하기 위해서는 조선문학의 선전력 을 빌어야 될 것을 비로소 느낀 모양으로, ‘朝鮮文人協會’[조선문인협회] 를 총독부 후원하에 조직하게 하고, 朴英熙[박영희]로서 그 간사장을 삼고 이광수는 형사피고인이라 보류해 두었지만, 실질에는 회장이었다.

'조선문인협회'가 '조선문인보국회'로 발전하고 총독문화상 제도가 생겨서 문사들은 상을 타려고 경쟁하며 날뛸 때도 나는 병을 핑계삼아 이곳 저곳으 로 자리를 옮기며 피하고 있었다.

더우기 만주국 문학가들이 와서 환영하는 뜻으로 무슨 대회를 할 때 그때 시골 가 있던 이태준까지 끌려와서 거기 참석하였지만, 나는 멀리 양덕 객 창에서 친구들의 모임을 신문지로써 겨우 알았다.

국문 언론기관이란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하나이 남고 다 폐간당하고, 잡지란 <朝光>[조광] 등 한두 개가 남을 뿐이었지만, 그 남은 것조차 소위 '국문 페이지'라 하여 '일문 페이지'를 두지 않으면 안 되는, 고단스러운 세상ㅡ 이런 세상에서 조선문, 조선문학의 생명이나마 유지해 보려는 것은 지대한 공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1940년경 나는 병도 거진 나았노라 기억력도 거진 회복되었노라 하고 서울 로 아주 돌아왔다. 그러나 나의 이 도피생활은 당국의 미움을 샀던 모양으 로서, 서울서 한두 달 간 안온한 생활을 하려는데, 갑자기 그닥지도 않은 일로 헌병대에 붙들렸다.

일본 군헌의 교묘한 유도심문에 능락되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그 수 단의 탓으로 소위 '불경죄'라는 죄목으로 만 1년간을 서대문 형무소에서 지 냈다. 형무소에서 나는 비로소 알았다. 일본 정치가 얼마나 가혹하게 전쟁 을 추진시키는가를.

造言蜚語[조언비어]죄로 들어온 죄수, 전시 절도죄로 들어온 죄수, 별별 불경 죄수, 그리고 바깥 세상에서는 그런 말싹만 티었다가는 유언비어죄로 걸릴 만한 소리도 형무소 안에서는 공공히들 하고 있는 것을….

1년을 지나서 나와 보니 세상은 더욱 좁아져 한 다리 한 팔을 자유로이 움 직일 여지가 없었다. 게다가 조선문, 조선어 박멸 정책은, 실제로는 우리 의식의 줄이며 나아가서는 이 종족의 줄을 끊으려는 것이었다.

조선어가 없이 장차 우리는 무엇으로 이민족에게 우리가 조선 사람임을 증 명할 수 있고 주장할 수 있으랴? 문학이라는 것은 민족 있고야 볼 일이다.

우리의 자손이 일본말을 쓰는 인종으로 변하면 그들은 장차 무엇으로 자기 가 조선인임을 변명하랴? 언어의 말살은 즉 민족의 말살이다. 무슨 변이 있 을지라도 이 민족의 언어만은 사수해야겠다.

이리하여서 나는 죽도록 이 민족의 언어만은 사수할 결심을 하였다.

사실 그때 이태준까지도 자기가 일본말에 통하지 못하매, 자기의 작품을 친구시켜 일본말로 번역해서 발표하는 등의 苦肉策[고육책]까지 쓰는 형편 이었다.

이 노력은 필경은 헛된 노력으로서, 3, 4년 뒤에는 국가가 해방되어 조선 말의 세상이 이르렀지만, 그때의 나의 어린 딸에게 애써 가르쳤던 조선어가 일어로 교육받은 다른 동창들과 섞이어서 단연 이채를 나타낸 것은 그 노력 의 한 보수라고 할까?

그때의 일어의 추진정책은 얼마나 세었는지, 거리의 작은 가게에서라도 일 본말로 물으면 잘 응하지만 조선말로 물으면 눈 거들떠보지도 않던 형편이 었다.

마지막 씨름[편집]

총독부 당국의 조선어 탄압정책이 강화됨에 따라서 일반 독자층에는 그 반 동으로 조선문 서적 구입이 높아졌다. 전에는 한 판(版[판]ㅡ1천 부) 발행 하면 10년 걸려야 다 팔린다던 조선문 서적이 초판 3, 4천 부는 으례껏 팔 리고, 좀 잘 팔리면 1만 부는 나가게쯤 되었다.

이것은 그때 막다른 곬에 든 문사들의 생활에 약간의 여유를 주었다.

그러나 단행본이라면 으례 500페이지 이상이 표준이다. 웬만한 젊은 작가 들은, 500페이지를 채울 만한 작품이 없었다. 그런지라, 조선문 서적 잘 팔 리는 시절에도 그 혜택을 입는 작가란 몇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 그리고 신 문 잡지 등, 신작 발표기관은 총 스톱을 한 시절이라, 이 땅의 문사들은 대 개 轉業[전업]을 하거나 폐업을 하고 말았다. 그리고 御用學者,[어용학자] 御用文士[어용문사]만이 일본글로 작품을 써서 연명하고 있었다.

그때 문사들을 시달리는 협위 가운데 늘 정책적 협위 밖에, 또 '징용' 이 라는 협위도 있었다. 그때의 문사들이란 대개 징용 적령자였다. 게다가 무 슨 착실한 직업이 없었다. 그런 위에 교만하여 郡吏[군리], 面吏[면리]들에 게 미움 사는 무리였다.

나도 역시 그 협위를 받는 축이었다. 그때 나이는 40을 겨우 지났지만 징 용 연령이 50세까지로 확대됨에 따라서 그 범위 안에 들게 되어서 늘 전전 긍긍하였다.

그때 '문인보국회' 회장 阿部[아부] 某[모]의 보증이 있으면 징용을 면할 수 있다 하므로 생각다 못하여 그때의 간사이던 鄭人澤[정인택]을 찾아서 그대의 간사를 내게 양도하라 하였더니 정은 그래도 간사 자리가 아깝든지, 누구 다른 사람의 간사 자리를 알선하마 약속하고 이리하여서 구한 간사 자 리로써 겨우 안심을 한 형편이었다.

당시 정인택, 金龍濟[김룡제], 이무영 등은 조선총독상을 받았다 하여 아 주 기개높던 때였다.

무영은 軍浦里[군포리]에 자리잡고 앉아서 고기에 굶주린 친구들이며 총독 부 고관들을 초대해서 '닭고기會[회]' 등을 베풀어 대접하며, 서울서는 볼 수도 없는 호화연회 등을 하며 있었다. 총독부 제조 '문인보국회'라는 것으 로 이들과 연락되는 춘원 이광수는 思陵[사릉]이라는 곳에 초당을 짓고 거 기 나가 살고 있었다.

언젠가 춘원은 거기서 요한을 기탁하여 자기의 심정을 말한 바 있었다.

"내가 東亞文學者大會[동아문학자대회]로 上海[상해]에 갔을 때 그때 요한 은 和信[화신]의 商用[상용]으로 상해에 왔었는데, 그때 요한은 상해 영미 인의 생활을 보고 에쿠, 일본이 졌구나 깨달았지요. 그 풍부한 물자를 가진 나라를, 돌쩌귀까지 빼서 쓰는 일본이 어떻게 당하겠느냐고 심각하게 느꼈 읍니다. 참 상해는 풍부하거든ㅡ."

이 말로 보아서 춘원은 지난날 일본이 꼭 이기리라는 신념하에서 그의 정 직한 성격이 조선사람을 위하여 조선사람이 장차라도 살려면 일본에 협력해 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황국신민화'를 그렇게 부르짖은 모양이었다.

그때 춘원은 몹시 번민하고 있었다. 상해 등지를 돌아본 결과로 일본의 패 배는 필연적인 일인 모양인데 일본이 전패하고 조선이 일본의 동반자로 몰 락하면여니와, 일본 거꾸러지고, 조선이 그 탓에 소생한다면 조선 민족의 일본인화를 활동한 자기는 당연히 반역자로 몰릴 형편이라, 그 때문에 매우 번민하는 것이 분명하였다. 그때 나는 또 다른 일 때문에 춘원과 자주 만났 다.

일본 전패의 최후 계단을 우리 문사들은 어떻게 뚫고 나오는가? 그 새의 조선문 박해의 기나긴 기간을 통하여 그야말로 삼순구식의 고경을 겪어온 조선 문사들이 빛나는 신생 조선의 날까지를 무엇을 먹고 무엇을 쓰고 뚫고 나오려는가?

이 가난한 문사들에게 1년간의 생활비를 뒤대에 주어서 초비상 시국을 무 난히 뚫게 할 수단은 없을까?

이리하여 안출해 낸 것이 이런 수단이었다. 즉 춘원에게는 어떤 후원자가 있어서 춘원이 무슨 일을 하겠다면 몇백만 원 뒤대어 줄 호의까지 가지고 있다. 그것을 이용하고자 하였다.

춘원을 선두에 내세워 작가의 단체를 하나 조직케 하고 그것을 핑계로 몇 백만 원 끌어내어 문사 한 사람에게 수삼만 원의 현금을 지불하여 근거 없 는 문사들이 국가 비상시국에도 그 물결에 휩쓸려들지 않도록 해보자는 것 이었다. 그 계획이 진행되는 즈음에는 8월 보름달, 국가 해방이 돌연히 이 른 것이다. 동시에 신흥 조선문학도 일본인의 제압 아래서 해방되었다.

分裂[분열][편집]

'문인보국회'란 본시 '조선총독부'에 소속하여 '문인협회'란 이름으로 발족 한 것이다. 그것이 일인까지 가입하고 조선문인보국회란 이름으로 재출발하 여 조선문인 전부를 포섭하였단 것이다.

그것이 국가가 해방되니까 저절로 해소되고 문인보국회의 멤버와 승부를 가지고 새로 재조직된 것이 文學家同盟[문학가동맹]의 전신인 文化協議會 [문화협의회]다. 회관은 문인 보국회 회관인 韓靑[한청]빌딩 4층이었다.

그런데 나는 춘원 제명 문제로 거기서도 탈퇴하였다. 그러나 협의원 중에 서는 나의 탈퇴를 인정하지 않은 모양으로 그 때 방인근, 박종화, 梁柱東 [양주동] 군이 朝鮮文人協會[조선문인협회]를 발기한다고 할 때도 내게 간 청하여 가서 해소시켜 달라하였다.

그때는 좌익, 우익이라는 편당적인 색채도 뚜렷하지 않은 시절이라 문화협 의회가 있고 문인협회가 또 생기는 것은 會[회]가 둘이 있어야 회장이 둘이 있을 것이라 조선사람 특유의 벼슬욕이 낳은 희극이려니 가벼이 생각하고 太古寺[태고사]로 문인협회를 누차 찾았다.

그러는 동안에 문화협의회는 차차 좌익적 색채가 농후해지며 몇몇 우익측 젊은 문사들은 자진하여 문화협의회를 탈퇴하여 그 측에서 제명한 몇몇 과 거의 친구 문사들은 謝罪聲明[사죄성명]을 하고 다시 가입 신청을 하는 등 의 사변이 일어났다.

각계가 다 좌우로 갈릴지라도 문단만은 한 개 민족의 문학으로 결코 좌우 로 분열시키고 싶지 않은 나는 좌우단합을 위하여 꽤 노력해 보았다.

그러나 아직껏 선배를 선배로 대접해 오던 문단도 좌우익으로 갈리면서는 선배도 후배도 없었다. 내가 퍽 사랑하고 귀애하던 젊은 문사들도 수두룩히 좌익으로 돌아섰다. 이 사람이면 장치 우리 문단건설의 한 귀한 기둥이 되 려니 촉망하던 여러 사람이 좌로 달아났다. 소련에서 혹은 공산당에서 몇백 만 원의 기밀비가 나와서 좌익 문사들에 퍼졌다. 그것이 모두 위조지폐다 등등의 소문이 퍼지며, 사실 가난에 쪼들리던 좌익 문사들이 막대한 골동품 을 사며, 집을 사며, 여행을 하며, 한때 호화스러운 소문이 높았다.

그러다가 그들이 동경하는 북조선으로 모두 탈출하고 말았는데, 예술을 사 랑한다는 김일성 치하의 북조선에게도 그들은 과히 후대받지 못하는 모양으 로 도로 남조선으로 오고 싶어하는 기색이 완연하다.

은혜받지 못한 가련한 그들ㅡ 일찌기 일본 제국주의의 치하에서 숨은 글을 쓰노라고 애쓰다가 그도 못하여 붓대를 꺾었다가. 나라가 해방되매 젊은 객 기에 공산주의로 쏠리어 북으로 도피하고 보니 그것도 시원치 않아서 도로 남쪽을 사모하는ㅡ 定心[정심] 없는 그들ㅡ 이것이 우리 민족의 결국의 결 말이던가?

1946년 이른 봄, 남한 땅에 버티고 있는 문사들로써 '文筆家協會'[문필가 협회]가 조직되었다. 1945년 연말, 무슨 시위 행렬을 구경하면서 大東新聞 社[대동신문사] 사장실에 앉아있다가 이야기끝에 문단도 이제 다 좌우 두 쪽으로 갈라졌는데, 좌측에는 공산주의 조직 기술에 따라서 '문학가동맹'이 생겨나서 활발하게 활동하는데 우측 문사들은 제각기 개개체로 조직체가 없 어서 걱정이라 했더니, 사장은 이 내 말을 듣고 느낀 바 있던지 결성비는

<대동신문>에서 낼테니 하나 만들어 보자는 말이 나왔다.

이리하여 이듬해 정월에 國一館[국일관]에서 준비회를 열고 뒤이어 결성회 를 靑年會館[청년회관]에서 하였다.

그 첫 회합날, 나는 근자 밤출입을 안 하는 전통을 깨뜨리고 이에 출석하 였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모두를 회장, 간사, 무슨 부장 등의 직함 자리의 전쟁을 보고 중도 집으로 돌아왔다. 과거 '문학가동맹'의 결성에서도 그랬 거니와 문인들이 문인답지 않게 무슨 자리를 서로 탐내서 다투는 것은 참으 로 역한 일이었다.

그로부터 2, 3일 뒤 역시 대동신문사에서 그 신생 '문필가협회'의 간부 李 軒求[이헌구]를 만나서 문필가협회가 할 일 가운데 무엇보다도 급한 일은 조선 사람이 대개, 대체 문사라는 인생은 좌익이거니 하는 생각을 가졌으니 이것을 타파하는 일이 급하고 그러기 위해서도 방송국에라도 한 주일에 단 10분씩이라도 문필가협회의 시간이라는 것을 두어서 우익 문인의 단체가 있 다는 것을 상식화할 필요가 있다는 점과 그 밖의 수삼 조건으로 주의시킨 바 있었다.

그러나 문필가협회의 한 벼슬 자리를 이미 차지한 그는 더 움직일 필요를 느끼지 않았던지 나의 주의는 聽而不聞[청이불문]이었다.

이래, 문필가협회는 무엇하는지 이 요란한 세상에서 고요히 잠만 자고 있 는 모양이다. 그때 대동신문사에서 나온 협회기관지의 비용도 누구나 먹었 는지 잡지가 나온 것을 보지 못했고, 젊은 축들이 문학 옹호를 위하여 무슨 행동을 하려 하면 도리어 간부측에서 억압해서 못하게 하며ㅡ 말하자면 문 학을 보호하려는 협회가 아니요, 위축시키려는 협회인 느낌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 땅 좌익 중견 전부를 포섭하고 있는 그 협회는 장차 제 길로만 올라서면 우리 문학진흥의 날도 이르게 될 것이다. 다만 파생을 좋아하는 우리 민족성의 영향인지, 거기도 金派[김파], 李派[이파] 등 수두룩한 파가 생겨서 서로 할퀴고 뜯는 불상사가 보이는 것은, 바라보기에 딱하고 한심스 러운 일이다.

結語[결어][편집]

이렇듯 우리 문학은 1918년에 발족하여 오늘날에 이르렀다. 그 맨 처음부 터 오늘까지의 고생스러운 가시밭을 다 겪어온 나같은 사람은 눈에는 과연 용하게 자라났다고 부르짖지 않을 수 없을 만한 괴로운 가시밭이었다.

한 민족의 문학이 발흥하려면 첫째로 대중의 지지가 필요하고, 감독 당국 의 보호 장려가 필요하거늘, 우리의 민족 문학은 처음 대중의 지지의 권외 에서 나서 자랐고, 감독 당국의 탄압과 배제의 아래서 성장하였다. 이러한 가시밭에서 자란 문학이 어느 민족에 또 있던가?

이러한 고난을 뚫고 좀 자라노라니까 좌익문학이라는 것이 생겨나서 순탄 히 자라는 민족문학에 커다란 지장을 주었다. 좌익문학이 없어지면서는 소 위 태평양전쟁이라는 것이 생겨나서 종이가 없고 물자가 부족한 가난살이에 겹쳐서 당국은 문학협력을 강요하는 어지러운 세상이 이르렀다.

그 뒤에 이른 고개는 38선이라는 구획으로 나라가 두 조각이 나며, 우수한 몇몇 문사가 북조선으로 건너가서 삼십 유여 년 길러온 문학도 두 조각으로 부스러진 일이었다.

'도야지에게 진주를 주지 말라. 도야지는 진주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 다.' 고 한 바이블의 말이 있지만 문학은 이 민족에게는 너무도 거룩한 학문일지 도 모른다. 5천 년간 문화로 길러나고 자란 동양민족이 문화를 무시한단 사 실도 기막히고 답답한 일이다.

일본 당국의 탄압이 있고 일반 대중의 무시까지 겹칠 때, 어떤 때는 이 문 학을 탁 내던지고 싶은 충동도 비일비재였다. 그러나 그것을 그냥 붙들어서 오늘날 국가 해방까지 본 것이다. 해방이 되자, 문단 중견들은 모두 북조선 으로 넘어갔다.

지금은 북조선에 가 있는 이태준이 문학가동맹 창립 때 어떤날 나에게 이 런 말을 하였다.

"소련서는 문학자도 大巨[대신]의 대우를 해 준답디다."

대신 자리가 부러운 것이 아니라 생활안정이 부러운 것이었다. 그리하여 건국 200년 미만인 과학문명의 나라 미국 군정의 남조선을 박차고 북조선으 로 건너간 것이다.

육당 최남선이 언제 이런 말을 하였다.

"내 아들놈이 문학을 하겠다기에 욕했소. 이놈, 네 아비가 문학 30년에 집 한 간 못 쓰고 있는 것을 보면서 너도 문학이냐고. 그래 의학을 시켰소. 사 위도 의사 사위를 맞고…."


일본이 40년간 이 땅을 통치함에 가장 문학의 발흥을 꺼린 것이다. 문학이 민심에 주는 그 영향력을 생각하여 '문학 없는 땅'을 만들려 한 것이다. 그 런 정책 아래서 문학을 건설하노라니, 과연 땀나는 노릇이었다. 지금 우리 나라는 일본에서 해방되고 우리나라 사람의 손으로 운영되는 고장이 되었 다. 정치적으로 간섭하고 탄압하는 아무 기관도 없이 오직 자유로운 세상에 나서게 되었다. 이제야말로 내부적으로 남을 밟고 해치려는 좁은 생각에서 해탈되어, 우리의 문학을 힘차게 기를 수 있는 날이 이르렀다.

과거 40년간, 일본 정치 아래서 우리 사람이 한 일 가운데 어느 것 하나 학대받아 보지 않은 것이 있으랴만, 문학처럼 일본의 학대와 자국민의 무시 아래서 發芽[발아]해서 자란 것은 없다. 그 끈기 있는 생장력을 가지고 우 리는 장래 우리의 마음에 맞는 체제 아래서 우리의 문학을 크게 키워 볼 수 가 있을 것이다.

세계 열강의 틈에 끼어서 그 건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동방 4천 년의 정기를 모은 우리의 문학을 우리는 장차 키워 보자.

가시밭에 자란 우리의 문학을 옥토에 고이 배양할 것이 우리와 우리 후배 에게 짊어지워진 지대한 사명이다. 된소나기를 지난날의 꿈으로, 우리는 우 리의 문학을 곱게 화려하게 키워 보자ㅡ 이것이 후배에게 주는 가장 진실한 부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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