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이동

미정고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가을의 세검정(洗劍亭)은 더한층 사람을 쓸쓸하게 함이 있다. 세검정의 역사적 내력을 말할 것은 없으나 우리로서 그 자리에 서서 옛일을 돌아보는 이의 마음 가운데 물들듯이 스며드는 감상이 있다고 하면 그것이 곧 우리의 마음속에 속살거려 주는 새검정의 말일 것이니 그것을 듣는 이에 따라서 그 말의 빛이 엷고 진함이 다르기는 할는지 모르겠으나 그 말이 그 말일 것은 다시 말할 것이 없을 것이다.

날이 아직 더웁지는 아니하였으나 높다라니 개인 벽옥색 하늘에는 서쪽으로 넘어가는 저녁해가 장엄한 오색빛을 서편 산 위에서 하늘을 향하여 흠뻑 퍼뜨리었다. 그 빛을 다 시 이쪽 산이 가리어 산은 산 그림자를 넣지 못한 산골짜기 위에 검은 포장을 눌러 놓듯이 높은데 얕은데 나뭇가지 시내속 틈틈 사이사이 남겨놓지 않고 가려놓았는데 우뚝바위 위에 말없이 서 있는 세검정의 그림자를 서쪽에서 동쪽으로 늘여서 기름하게 가로 놓았다.

꽃이 봄에 아름다운 것이라 하면 단풍이 가을에 귀한 것이니 먼 산 가까운 언덕에 누르고 붉게 피어 있는 단풍은 돌아가는 여름이 선지를 물었다가 흠뻑 내뿜은 듯이 처참하기도 하고 겨울을 맞는 가을이 여름 한 겁을 두고 봄을 뒤집어 복사한 듯이 알 수 없는 감회를 일으키기도 한다.

바람은 분다. 을씨년스러운 생각이 난다. 단풍은 바람에 떨 때 바위 틈을 기어나고 모래로 숨어들어 은방울 울리듯이 흐르는 가을 물은 그것을 비쳐서 마치 뜨거운 볼은 피가 모였다가 흐르는 것 같기도 하다.

벌거벗은 산에는 울퉁불퉁 내어밀은 바위가 멀리서 와서 멀리 가는 바람이 스칠 때마다 서늘한 느낌에 소름이 돋는 듯하다.

그 위 소림사(小林寺)에서 저녁 종소리가 들려온다.

고요한 산골에서 퍼질대로 퍼지는 종소리는 흑은 이었다 끊어지는 듯 끊겼다 이어지는 듯하기도 하였다.

하나씩 둘씩 떨어지는 갈잎이 종소리에 묻어서 다시 한번 재주를 넘고 한 구석으로 모여든다.

창의문(彰義門) 쪽에서 여승 하나가 옥양목 두루마기에 고무신을 신고 배낭을 지고서 이쪽까지 오더니 다시 길을 왼쪽으로 돌이켜 해수관음(海水觀音)으로 향하여 내려간다.

여승은 나이가 근 육십 되어 보이는데 허리가 아프든지 뒷짐을 지고 서서,

「관세음보살 ! 나무아미타불 !」을 부르며 다시 시내를 건너 저쪽 산 그림자 속으로 구부러져 들어가 버렸다.

그 뒤를 이어서 창선(昌善)과 주영(珠榮)은 어깨를 나란히 하여 이쪽을 향하여 왔다. 그들은 아까 여승이 물 건너던 데 와서 여승이 가던 저쪽 길을 내어 놓고 다시 이쪽 길로 발을 내놓았다.

『조금 일찍 올 걸 그리 하였어요. 너무 늦어서 안 되었어요.』

주영은 조금 가무스름하나 틀이 잘 잡힌 이마 위에서 하느적거리는 머리카락을 옆으로 젖히며 늦게 온 것이 불안하다는 듯이 붉은 입술을 열었다. 그의 입술은 연지를 바르고 혀를 내밀어 한번 핥은 듯이 윤이 흐르고 진하게 빨갰다.

『허지만 어디 오늘 생각이나 했었소. 갑자기 오게 되었으니까 그렇게 되었지 !』

창선은 고꾸라 양복이 조금 으스스해서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찌르면서 자기가 미안함을 참지 못한다는 듯이 말을 받았다.

주영은 그것도 그렇다는 듯이 입을 다물고 있다가,

『그러나 댁에서 무엇이라고 편지가 왔어요? 내년에는 학교에 입학하실 수가 있게 됩니까? 댁에서도 너무 과히 하시지 않으세요?』

창선이는 이맛살에 근심 걱정이 가득하여지며 입을 뗄듯뗄듯 하다가 다시 시뻘건 주먹이 두 주머니에서 쑥 나왔다.

그는 무엇을 저주할 듯이 입을 다물고 전신에 힘을 주고 한참이나 말이 없다가 다시 맥을 홱 풀면서 힘있는 입김을 내어 쉰 후,

『에, 자식을 모르는 아버지는 아버지가 아니지요.

우리 아버지가 날더러 자식의 할 본분을 하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아버지도 자식에게 할 직책이 있지않소.』

주영은 따라서 근심하는 빛이 얼굴과 그의 눈과 그의 온몸 속에 스며든 듯이 말소리까지 흐려지며,

『그렇고 말고요. 댁에서는 너무 심하게 하세요. 창선 씨가 단 한 분이 아니십니까. 누님도 안 계시고 형님 동생 다 안 계시고…』

둘이서는 다시 세검정 옆까지 와서 오던 길을 돌아다 보고 서 있다가 창선이가,

『우리 저리로 올라갑시다』

하고 고개를 돌이켜 소림사를 가리켰다.

세검정을 내어놓고 발을 다시 그리로 옮길 때 창선은 다시 말을 이어서,

『세상에서는 우리 집이 비천하다고 멸시하고 천대하지 않소? 주영이도 아다시피 우리 집안은 대대로 백정이었지요.

우리 아버지와 우리 할아버지가 손에 칼을 쥐고 짐승의 생명을 끊는 것을 나도 보았소』

할 때 창선의 목소리는 화살이 떠나간 활과 같이 떨리었다. 주영이도 인습적 관념에서 일어나는 면구하고 부끄러움을 억지로 가리려고 고개를 땅으로 향하였다.

창선은 말을 끊지 않고,

『생명을 끊는 것이 죄악이라면 죄악이겠지요. 다만 우리 발바닥 밑으로 기어가는 개미 한 마리를 죽인다 하더라도 그것이 착한 일이라고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나 우리 할아버지나 우리 몇 대조 할아버지가 그것을 모른 바가 아니요, 어떻게 해서든지 그 죄악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썼으나 그들은 거기서 벗어날 수가 없었소. 그들은 자기네의 먹고 입을 것을 거기서 얻는 수밖에 없었소. 그들은 잔인한 행위를 아니하려 하였으나 그때의 사회제도는 거기서 벗어날 수 없도록 꼭 얽어매어 놓았었기 때문에 자연히 아버지가 하던 일을 자식이 하게 되고 자식이 하던 일을 손자가 하게 되는 동안에 지금 말로 하면 유한계급 특수계급의 노예가 되어 갖은 학대와 멸시를 받게 된 것이 아니오. 그러는 동안에 그들 에게는 어찌 피가 없고 열이 없었겠소. 그들 가슴 가운데서 터져나올 것 같은 원한은 소극적 행위로 나타나서 자기네의 종족은 자기네의 종족끼리 결합하고 단결하는 수밖에는 없었던 것이오. 그리하여, 그리하여 오늘까지 내려온 것이지요. 그러나 그까짓 이야기는 지나간 이야기니까 여기서 길게 말할 것은 되지 못하지마는 오늘 우리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놓고보면 얼마나 눈물나는 일인지 알 수 없어요. 우리 집은 아니라 우리 종족은 그러한 학대를 받아 내려오는 동안에 무식할 대로 무식하여졌고 어리석을 대로 어리석어져서 참으로 짐승이 되어 버렸지요. 그들은 자기의 뼈속에 사무친 원한을 적극적 행위로 풀어볼 수 있는 시기가 이른 줄을 모릅니다. 자 이것을 보시오 !』

하고 창선은 주머니에서 편지를 꺼내어 주영이에게 보이려 할 때 어느덧 절에 다 올라옴을 깨달았다.

그들은 중에게 밥을 시키고 다시 저쪽으로 객실을 향하여 가서 마루에 걸터 앉았다.

『자 보시오.』

하고 창선은 편지를 읽었다.

「너의 편지는 보았다. 너의 뜻하는 바나 목적이 좋기는 좋다마는 너의 애비는 벌써 늙었다. 나는 너를 내 앞에 두고 집안 일을 맡기고 싶다. 너도 개화한 공부를 삼 년이나 하였으니 세상 글을 다 배웠으리라.

두 말 말고 이 편지 보는 대로 집으로 내려 오너라.

너희 어머니도 네가 보고 싶어 기다린다. 이번에 만일 내려오지 않으면 너는 내 자식이 아니라 애비의 영을 거슬려 큰 사람이 된 자가 만고에 있지 않으니라. 네가 의학을 배운다 하니 너는 너의 선조로부터 지금까지 무엇을 하였는지 알 것이다. 요새 양의는 사람의 껍질을 벗긴다더라. 이 무지한 놈아 ! 너는 다시 그런 맘을 먹지도 마라 ! 어서 내려 오너라. 내려 와서 장가를 들고 벼슬을 하여라 ! 이곳 군수에게 청을 하여 놓았으니까 군 주사 하나는 넉넉히 되리라.」

창선은 다 읽고 나더니 기가 막혀 하늘을 보고 웃었다.

『이렇구려 ! 이런 이하고 무슨 말을 한단 말이요.

나는 죽어도 집에는 돌아가지 않을 터이요』

하며 일어서서 마당으로 거닐다가 다시 서서,

『글쎄 이것을 보고 날더러 어떠한 결론을 내리라 하면 이것이 아니오. 옛날에 자기네를 학대한 사람이 누구요. 자기네를 죽이고 때린 사람들이 누구요. 그것은 벼슬하던 자와 그들의 옹호로 살아가던 소위 양반놈들이 아니었소. 그러면 날더러 벼슬을 하라는 그 심정은 무엇이요. 날더러로 자기네를 못살게 굴던 그러한 놈이 되라는 것이 아니요? 자기 원수의 대를 이으라는 것이 아니요? 그렇지요. 사람이 자기보다 힘있는 자에게 반역하고 나설 때 그들의 궁극의 목적은 결국 자기도 그자들과 같이 남을 학대하고 모욕해 보려는 본능적 야심밖에는 없나 봅디다.』

주영은 창선의 결심 한 번이 자기의 생활을 좌우할 듯이 그의 얼굴빛 말소리를 살피면서,

『그러면 어떻게 하실 터입니까. 아버님 말씀대로 시골로 가실 터입니까. 그렇지 않고 서울 계시겠읍니까. 어떻게든지 결정을 하셔야 할 것이 아녜요』

하는 소리는 무슨 남모를 번민을 지내 나오는 것 같이 착 가라앉지 못하고 걱정스러웠다.

창선은 마루 위에 두 손으로 깍지를 끼고 그 위에 머리를 얹고 드러누우며,

『결심한 지는 벌써 오래니까요. 그러나 여보 주영.

우리가 우리 고향에서, 안동(安東)서 말요, 재작년 이맘 때 영호루에서 서로 이야기하고 서로 경동하던 이상은 오늘 와서 얌전하게 깨쳐 버리지 않았소. 나는 의학을 배우고 당신은 간호부로 산파가 되어 같이 업을 하고 함께 지내자 하던 것은 그것만 해도 철모르는 어린애의 세상 모르는 계획이었구려. 당신은 내년이면 산파면허장을 받겠지만 나의 의학은 동향풍에 날아갔구려. 맘대로 되지 않는 세상이니까 말할 것은 없지마는…』

하고 고개를 저쪽으로 돌리고 말이 없다.

주영은 먼 산만 보고 있었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움직거리는 것이 있었다. 그는 남모를 즐거움이라 하면 즐거움, 또는 걱정이라 하면 걱정이 있었다. 그의 뱃속에서는 창선과 자기 둘을 합하여 다시 둘로 쪼개논 새로운 생명이 꼼지락거리기를 시작한다. 우리 인간에 새 생명을 창조하는 즐거움을 주영이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자기가 인식하지 못하는 동안에 겨자씨보다도 적은 생명의 씨가 자기 몸에 머물러 그것이 차차 커지기를 시작하여 그것을 알고 그 겻을 느끼고 또는 생각할 때 지금까지 자기로서는 깨닫지 못하던 인생의 숭엄한 사실 하나를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즐거움은 반드시 즐거움뿐이 아니다.

그는 창조의 즐거움을 느끼었다. 그는 기적을 보는 것 같이 자기로서는 능히 해석하지 못할 사실을 당할 때 한편으로 기쁘기도 하고 한편으로 무서웠다.

자기로서는 하지 못할 일을 한 것 같이 몸이 떨리면서 또 그 하지 못할 것을 자기가 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신기함과 기꺼움이 있었다.

그는 몇 번이나 이를 창선에게 알리려 하였다. 자랑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그 말하는 것이 무서운 것 같았다. 그의 입은 열리려 하다가 다시 다물어 졌었다.

그러나 하루는 마침내 그 말을 창선에게 하였다.

『창선 씨 ! 저의 몸은 퍽 이상해졌어요. 평상시와는 퍽 달라졌어요. 이런 것을 학교에서 배운 것으로 말을 하면 임신이라고 해요』

하고는 이 스무 살 된 애어머니는 감격함과 부끄러움에 창선의 가슴에 엎드렸었다. 그의 눈에는 눈물까지 고였었다.

창선은 바다에 용솟음치는 태산같이 높은 물결이 자기 가슴으로 몰려와 안기듯이 위대한 사실을 당한 것 같이 경건한 맘으로 그 말을 듣고 속으로 감사하는 맘으로 좋아하였다.

그러나 지금 주영은 맘속에는 무서운 파동이 있다.

이 무서운 파동을 보는 이가 없고 듣는 이가 없어 혼자 속을 괴롭게 하는 주영의 마음을 또한 창선이도 알 길이 없었다.

주영은 먼 산만 바라보다가 다시 창선을 보며,

『여보세요. 만일 시골댁으로 부득이한 일이 계셔서 내려 가신다 하면 내려가셔서 새로운 부인을 얻으시겠지요?』

하고 얼굴에 근심이 나타난다. 창선은 눈이 뚱그래서 벌떡 일어나며,

『무엇요? 또 당신은 심심한 모양이구려. 또 싸움을 하여 보고 싶소』

하고 주영의 모양을 자세히 살핀다.

『아녜요. 당신께서는 아무리 해도 아버님 말씀을 들으시게 되세요. 아버님 말씀을 거역 하시면 당신 일생이 좋지 못할 것 같애요. 나는 당신을 위하여 내려 가시기를 권합니다』

하고 마룻바닥만 손가락으로 긁고 있다.

창선은 화를 더럭 내며,

『가뜩이나 속이 좋지 못한데 공연히 글컹거리는구려. 이건 누구 마음을 떠보는 모양이요?』

하고 주영을 뚫어지게 흘겨본다.

『아네요. 저는 그런 짓은 할 줄 몰라요. 그러나 만일 그런 일이 있다하면 말이지요. 저는 어떻게 됩니까.

여자는 남자와 달라요. 더구나 저는 저 혼자 몸이 아니니까요.』

『그러니 날더러 어떻게 하라는 말이요. 여태까지 몇 백 번이나 맹세한 것을 당신은 못 믿는다는 것이 아니요.』

『못 믿는다는 것이 아니라요.』

『그럼』

『세상 일이 우리 두 사람 사이를 서로 떠나게 할 것 같아서 하는 말예요. 저는 창선 씨를 믿어요. 더 의심없어요. 그렇지만 어떠한 불가항력의 사실이 닥칠 때 우리의 운명이라는 것은 비참하여질 것 같아요.』

『불가항력의 사실이란 무엇이요. 나는 결코 이상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요. 이 현실에 서서 우리 인생사회를 보는 사람이요. 굳세면 되는 것이요. 힘있게 뜨거웁게 나가면 될 것이요. 그렇지 않소. 너무 당신은 약하게 생각을 하는 것이 언제든지 걱정이란 말요. 세상에 무엇이 우리를 떼놓는단 말이요. 세상에는 우리 사이를 떼놀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요. 만일 우리 사이를 떠나게 하는 것이 있다 하면 그것은 언제든지 우리 자신일 것이지요. 결코 운명 더구나 숙명을 나는 믿지 않는 사람이요. 자, 우리는 굳센 사람이 됩시다.

우리의 사랑을 위하여 싸우는 사람이 됩시다. 응, 맘을 단단히 좀 먹어요』

하고 창선은 주영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주영은 창선의 힘있는 말에 믿음이 생긴 듯이 겨우 고개를 들어 창선을 쳐다보며,

『그러면 여보세요. 창선 씨는 또 한 번 나를 위하여 맹세해 주시겠어요. 저는 언제든지 창선 씨를 이렇게 뵈올 때나 말씀을 들을 때는 마음이 놓였다가도 떨어져 있게만 되면 마음이 놓이지 않고 의심이 나서 못견디겠어요. 언제든지 당신의 맹세를 듣고 싶어요.

천번만번 당신의 맹세만 들었으면 마음이 놓이겠어요, 어떤 때는 공연히 불 같은 의심이 나서 그대로 뛰어가서 맹세를 듣고 오고 싶은 때도 있어요. 어떻든 당신은 다시 고향에 가시더라도 부인을 얻지 않는다는 것만 여기서 맹세하여 주세요.』

창선은 주영이를 어린애같이 어루만지며 껄껄 웃었다.

『글쎄 왜 나를 그렇게도 못 믿우? 내가 당신을 내버리고 다시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할 것 같소. 좀 마음을 굳세게 먹어요. 내가 지금껏 몇백 번이나 맹세하지 않았소. 그래도 또 맹세를 해야 마음이 놓이겠소. 당신의 마음이 놓인다면 얼마든지 하지요.』

창선은 주영을 귀여운 어린애를 들여다보듯이 보았다. 철모르는 처녀가 공연한 걱정에 속을 태우는 것 같아서 가증스러웁게도 귀여웠다. 걱정이 가득한 두 눈썹은 초승달이 한조각 구름을 이고서 서산으로 넘어가는 듯 펼듯말듯이 가벼웁게 찡기었다. 그 밑에서 먹수정 같은 두 눈은 서늘한 맛이 드는 것이 시꺼멓게 익은 머루알 같아서 입속에 넣고서 슬슬 굴려보고 싶었다.

『글쎄 하늘을 두고 맹세하리다. 다시는 주영이 외에는 다른 여자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창선은 정열을 다하여 말을 하여 보았으나 너무 여러번 맹세를 하여서 어째 쑥스러운 것 같았다. 그래서 그 뒤를 이어,

『그만하면 우리는 그럴 시기는 지나지 않았소』

하고 조금 멀리 떨어져 앉을 때 저녁상이 들어왔다.

두 사람은 정다웁게 밥을 먹었다. 주영의 의심도 어느덧 사라져 없어지고 창선의 마음도 저으기 풀어졌다.

아까까지 개었던 하늘에는 솜뭉치 같은 구름이 얇게 피어서 군데군데 창이 난 구멍으로 는 별들이 반짝반짝하는데 한 귀퉁이 잠잔 이지러진 달이 얼굴을 가리었다 내놓았다 한다.

바람은 하늘에서 무섭게 부는 모양이다. 구름은 가는 것 같아 보이지 않으나 공중에 달린 달이 창랑에 띄워 놓은 은반(銀盤)같이 출렁거리며 떠나가는 것 같다.

주영이는 달을 쳐다보며 무슨 노래인지 처량한 곡조를 입 속에서 부르고 있다. 달을 쳐다보는 눈 광채는 무엇을 동경하는 듯이 멀고 먼 창공에 닿은 듯 하다. 그의 입 가장자리에는 갓난이가 누워 자는 때같이 평화가 가득 찼었다.

바람이 나무 끝에 분다. 다시 낙엽이 땅 위에 떨어진다. 떠나가는 달의 앞길을 쓸려는 듯이 앞에 우뚝 선 느티나무 가지는 바람이 불 적마다 이리 흔들 저리 흔들하여 뭉게뭉게한 창공의 구름을 헤칠 듯 헤칠 듯하다가도 다시 와스스바람과 함깨 낙엽이 떨어지면 하늘에 구름은 여전히 있고 땅에는 시꺼먼 나무 그림자만 마당의 모래를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는 듯하다.

창선은 주영의 옆으로 왔다. 그는 견딜 수 없는 즐거움이 가슴에서 끓어오르는 듯이 주영의 어깨를 안았다. 주영은 고개를 돌려 창선을 보았다. 두 사람의 눈은 힘있는 광채로 서로 부딪쳤다. 사람의 입은 말로

(이하 4백자 원고지 1매 탈락)

『…려운 감격때문에 눈에서 눈물이 난 것까지 나는 지금 기억하오. 아아 참 좋았지. 우리가 앉아 있던 모래는 가루 같은 모래가 한없이 깔린 그 위에서 멀리서 내려와서 우리 앞을 지나서 멀리 흘러가는 물 위에 달이 비추인 것을 보며 이야기하던 때. 얼마나 우리는 행복스러웠소. 당신은 내 이름을 모래 위에 쓰고, 나는 당신의 이름을 모래 위에 쓰고, 그것을 누가 지우랴는 문제가 나서 서로 못 지우고 그대로 돌아온 일이 있지 않소. 그러나 그것을 지워 준 사람이 누구요. 그것은 사람도 아니요 귀신도 아니요. 물론 하느님도 아니라 그 달을 비추었던 강물이 아니었소. 그와 마찬가지로 당신과 나 두 사람의 사랑을 지워 놓을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지 않소.』

주영은 옛날 기억 속에 잠겼다. 창선은 다시 달을 보고,

『달이 흐리는 것도 달 자체가 흐린 것이 아니라 구름이 앞을 가린 까닭이 아니오. 만일 세상의 모든 불순하고 사악한 것이 우리의 눈을 가릴 때는 그 사람도 빛을 잃는 것이 아니오. 그러나 나는 한 가지 미쁜 것이 있소. 어떠한 구름이 우리의 사랑을 가린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구름 속에서 우리 사랑의 빛을 넉넉히 나타낼 수가 있는 것이오.』

창선은 말을 그치고 주영을 낀 채 하늘만 쳐다보다가 주영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면서,

『나는 주영의 마음이 옛날에 낙동강가에서 우리의 이름을 쓰던 때나 지금 이 자리에 앉은 이때나 조금도 변함이 없이 순결한 것을 믿소. 그것을 믿음으로써 나는 살아가는데 광영을 본단 말이요.』

말이 없이 듣기만 하던 주영은 가는 기침을 하더니 창선의 그 뜨거운 열이 있고 굳센 힘이 있고 또는 신앙이 가득 찬 말이 모두 옳다는 것을 대답한다는 듯이 몸을 창선에게 안기었다. 그들의 눈은 다시 번득거리었다. 다시 영과 영의 속살거림이 있었다.

별 하나 그 중 큰 별 하나 바로 두 사람 위에서 반짝거리었다. 주영이는 그것을 쳐다보았다. 그 별이 떨어져 주영의 눈이 되었는지 주영의 눈이 그 별이 되었는지 별 반짝 눈 깜박할 적마다 눈 광채가 별에 가 닿기도 하고 별의 광채가 눈에 와 닿기도 하는 듯하다.

『에그 , 별 크기도 하이. 저 별 이름이 무엇이예요?』

주영은 별의 눈을 창선에게 옮기었다. 그의 눈은 창선의 마음을 빨아들이는 듯하였다.

『어느 별?』

창선은 물었으나 그의 마음은 별에 있지 않았고 주영의 눈에 있었다. 창선의 마음은 두근거렸다. 그는 견딜 수 없는 정열로 주영의 입을 맞추었다. 두 사람은 모두 별을 잊어버렸었다. 두 사람이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웃을 때 주영이도 별을 잊어버렸고 창선이도 별을 잊어버렸었다. 그들은 영원히 별을 잊어버렸다.

창선은 주영을 기숙사까지 내려다주고 자기 여관으로 향하여 간다. 남대문통을 걸어올 때는 그는 다시 자기 주머니 속에 있는 아버지의 편지를 꺼냈다가 꾸깃꾸깃하여 한 손에 들 적에는 지금까지 잊어버렸던 뒤숭숭한 생각이 머리속에 떠오른다.

그는 조선은행을 지나놓고 전기불 드물고 쓸쓸한 식산은행 앞을 걸어올 때 무엇이라 말할 수 없는 어색한 감정이 가슴을 눌러 하늘을 쳐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높다란 하늘까지 위에서 자기를 누르는 듯하였다.

달이 땅에 비쳐서 자기의 시꺼먼 그림자가 뒤를 따라오는 것까지 저주의 망령이 어느 틈에 모르는 사이에 따라오는 것 같았다.

최후의 선고를 받은 자에게는 희망도 없고 광명도 없고 요행까지도 없는 것이다.

자기는 아무러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아버지 어머니가 계신 고향에는 갈 수가 없다. 가는 것이 아버지에게 옳은 일이라 하면 가지 않는 것이 창선에게는 진리요 생명이다.

집에를 가면 사랑하는 주영이도 버리고 자기의 이상하던 모든 것을 헌신짝같이 버려야 할 것이다. 아버지의 종이 되어 땅 속의 지렁이같이 꿈틀거리는 송장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여기에 있어보자. 세상은 자기에게 보수없는 밥을 줄 리가 없다. 추운 밤에 잘 곳을 줄 리가 없다. 목마를 때 물, 피곤할 때 자리. 이것이 어찌 세상에 흔하고 우스 운 것이 아니랴마는 흔하고 우스운, 그러니만치 그만큼 우리에게 많은 진리를 주는 것이다.

먹기는 어떻게 먹으랴 살기는 어떻게 살랴. 이런 생각을 하다가 다시 잊었던 기억 속에서 무서운 번민거리를 찾아내었다.

주영의 뱃속에 들어 있는 어린애는 어찌하랴.

그는 거기와서 앞길이 딱 막혔다. 그는 걸어가던 길을 멈칫하고 섰다가 마침 옆으로 지나가던 사람이 자기를 쳐다보므로 다시 발길을 내놓았다.

그는 아무러한 결정과 단안을 내릴 수 없었다. 그에게는 아무 수단과 방법이 없었다. 그는 어두운 굴 속을 더듬어 들어가는 것 같이 한 줄의 광명도 없었다.

불 같은 정열을 가진 사람에게는 또한 그만한 비례의 현실적 압박이 있으니 미적지근한 정열을 가진 이들이 당하는 현실적 압박의 고통보다도 더 큰 고통을 그는 당하는 것이다. 그 의 고통이 그렇게 크니 만큼 아픔이 심하면 심한 만치 안락을 구하는 힘이 굳셀 것이다.

창선의 번민과 고통은 컸다. 그는 자기의 몸을 사를 듯한 열정을 가진 대신에 현실의 압박과 싸우는 힘은 더 컸다.

그는 다시 아버지 어머니를 둘러싼 고향을 생각하였다. 그리고 주영이를 생각하고 어린애를 생각하여 보았다.

그는 그 모든 것을 넣어서 공상을 시작하였을 메 그에게는 행복도 있었고 즐거움도 있었다. 그러나 공상이라는 자기 희열에서 깨고 차디찬 현실에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다만 답답함과 갑갑함이 있을 따름이다.

그는 집으로 향하려 하였으나 머리가 산란하고 속이 답답하여 종로로 해서 광화문통을 돌아 중학다리를 돌기로 하였다.

발에 익은 길이라 어느 틈에 온지 모르게 광화문까지 오다가 그는 갑자기 무엇에 도취하고 싶은 욕망이 끓어올라왔다. 그는 자기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고향으로 내려오라고 부쳐 준 돈을 생각하였다.

그는 돈이 귀한 것이 아니었으나 그 돈이 자기의 운명을 마지막으로 결정한다는 것을 생각하니 우습기도 하고 또는 아버지의 주신 것은 주신 것이지마는 자기를 굴복시키려는 것인 것을 생각할 메에 그는 분한 생각까지 났다.

『이까짓 돈은 있거나 없거나 산다.』

그는 주먹을 쥐고 결심한 듯이 공중을 향하여 부르짖었다.

그리고 아까 세검정에서 얼마간 쓰고 남은 돈을 만져보았다. 그는 다시 그 돈을 찢어 버리고싶기까지 하였다.

그는 이러한 생각으로 휘적휘적 사직골 맞은 골목을 돌아서려 할 매 그의 앞을 딱 막아서는 사람이 있었다.

『어디 갔다 오나?』

창선은 교개를 번쩍 쳐들었다. 자기 앞에는 신태호(申泰浩)가 서 있었다. 그는 가느스름한 눈에 상냥한 웃음을 상글상글 나타내면서,

『오래간만일세그려』

하고 창선의 손을 다정스럽게 잡는다.

창선은 신태호를 만나면 언제든지 다정한 그의 태도에 마음이 끌려 버리므로 그도 따라서 태호의 손을 잡았다.

『이거 얼마만인가. 왜 그렇게 한 번도 놀러오지를 않아.』

『나 역시 공연히 바쁘니까 그렇지. 회사인지 빌어먹을 데 다니느라고 눈코 뜰 새가 있어야지. 월급 몇 푼이 사람 죽이네.』

이 사람은 학교 재학 당시에는 자기 년급 중에 어학의 재조와 작문을 제일 잘하므로 장래의 문학자나 문사가 된다고 대 기염을 토하며 학교에서 학생끼리 만드는 잡지도 자기가 편집을 맡아하고 연설 같은 것을 할 때에도 옛날 옛적의 문호 이름이나 그들의 경구를 섞어가며 그럴듯하게 늘어 놓아 일반 학생들과 선생들이 장래를 촉망하는 것은 물론이요 자기도 그 방면으로 나아가기를 맹세까지 하여온 청년이다.

꽃밭에 놀던 나비들이 첫서리를 맞고서 떨어지지 않은 나뭇잎 밑에서 서로 만난 듯이 옛일을 돌아보고 지금을 생각하니 몇 달 되지 않은 사이지마는 세상의 변천과 또는 자기네 내면생활의 변화는 말할 수 없는 감회를 일으킬 뿐이다.

창선은 그의 손을 슬그머니 놓으면서,

『대관절 지금 어디로 가는 길인가?』

하니까 그는,

『별로 정한 곳이 어디 있나? 심심하니까 저녁 먹고 나선 셈이지』

하고 땅을 내려다 보았다.

『그럼 마침 잘 되었네. 오래간만이니 나하고 산보나 좀 해보지 않으려나?』

『그러세그려. 나 역시 혼자 다니기는 너무 심심한데.』

두 사람은 중학다리를 건너서 안동으로 나섰다.

창선은 안동 네거리에서 방향을 정하려는 듯이 머뭇머뭇하더니,

『우리 어디 가서 저녁 한 그릇 먹어보세』

하며 태호의 의견을 묻는다.

『저녁? 저녁은 시방 곧 먹고나오는 길인데. 자네는 여태까지 안먹었나?』

『먹기는 먹었으나 좀 일찍 먹었기 때문에 시장하여졌어.

어떻든 가보세그려.』

창선은 전동 큰길로 내려오다가 어떤 청요릿집을 항하여 들어간다. 태호도 따라 들어갔다.

창선은 자리를 정한 후에,

『여보게, 자네 술 한 잔 먹지 않으려나?』

하고 태호를 보았다. 태호는 먼저 웃기만 하다가,

『술? 어디 술 먹을 줄 아나?』

하는 것이 먹고 싶은 모양이다. 창선은 다시 물어보지도 않고 술을 청하였다.

술이 들어와 놓이고 안주가 들어와 놓이었다. 많이 먹어보지 못한 청국술 독한 냄새가 일종의 상긋한 알콜 향기를 내면서 독한 냄새로 코를 찌른다.

창선은 술을 태호에게 한 잔 따른 뒤에 자기의 잔에 부었다.

마치 먹어도 해롭지 않은 약을 마시는 듯이 창선은 먼저 잔을 들어 한모금 마신 뒤에 태호에게 잔을 전하였다. 이것은 어린애들이 소꿉장난을 할 때 빨간 벽돌을 물에 타서 소주라고 하고서 콧잔등에 붓고서 에헴 하고 수염 쓰다듬는 시늉을 하는 데서 조금 진보된 놀음밖에는 아니 되는 것이다.

『들게』

창선은 태호를 보며 권하였다.

『자네는 소문 들으니까 대주호(大酒豪)가 되었다네그려.』

창선은 다시 한번 태호를 보았다.

『무얼 어디 몇 잔 하나. 더구나 이런 술은 독해서…』

『독하긴 무에 독해. 이런 길로 다섯은 할 걸?』

하고 창선이 옆에 있는 술병을 가리키니까 태호는 고개를 내흔들며,

『여보게 큰일날 소리 말게. 이것 둘은 먹으라면 먹지. 그러나 그 이튿날은 죽어나는 거…』

『대관절 자네는 술을 어디서 그렇게 배웠나?』

『술 배운 것 말인가?』

『그래』

창선은 태호의 말을 받고 또 잔을 들며 눈짓과 손짓으로 술들기를 청하였다. 두 사람은 일시에 한 잔씩을 들었다. 술은 혓바닥에 닿지 않고 그대로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마치 쓰디쓴 약을 마시는 것 같았다. 맛도 보지 못하고 냄새도 맡지 못하고 그대로 잔을 놓으면서,

『커어』

하며 입맛들을 다셨다. 그들은 술맛을 몰랐다. 어른들이 하니까 나도 해본다는 소꿉질 하는 어린애들과 마찬가지로 한 번 두 번 해보는 데 불과한 것이었다.

『술 배운 거야 별다를 것 있나?』

태호는 조금 호기있는 어조로 말을 하였다.

『회사에를 다니니까 자연히 먹게 되데그려. 우리 회사의 사원이 육칠십 명되는데 그 중에서 술먹는 사람이 얼만고 하면 아니 술먹는 사람을 고르는 것보다도 술 안먹는 사람을 골라내는 것이 도리어 속하겠네.

네 사람인가 다섯 사람 빼놓고는 거의 다 먹으니까.

혹시 어디 연회가 있어 가거나 그렇지 않고 친구들과 섞이어 가서 아니 먹으면 병신 구실을 하네그려. 그리고 또 이것들이 짖궂게 먹으니까 한두 잔 받아먹는 것이 자연 버릇이 되어 먹게 된 것이란말야.』

『그러면 술에 무슨 맛이 있던가?』

태호는 한참이나 주저주저 하다가 맛이 있다 하자니 어떤 맛인지 모르는 것을 거짓말하기도 무엇하고 또 모른다고 하는 것은 주객의 위신에 관계가 되는 것 같아서,

『맛이야 물론 있지. 그러나 우리 따위 술로야 어디 깊은 맛을 아나. 남이 먹으니까 먹는 것이지』

하고 슬그머니 딴말을 하여 버리려고 할 때 옆의 방에서 사람들이 모여드는 지 구두소리, 교의 치우는 소리가 마치 마굿간에 말굽소리 나듯이 야단이다.

그들은 어디서들 술들이 취하여 다시 이 집에 좌서 이차회나 삼차회를 하려는 것인 듯하 였다. 목따는 소리같이 낄낄 하는 소리로 중국인들을 부리기도 하고 손뼉을 두들기도 하고 또는 재털이를 집어서 상 위에다가 탁 내어 던지기도 하는지 시끄럽고 부산하다.

그들은 창선이가 있는 방을 지나서 들어가지 않고 창선이가 있는 방 뒤 난간을 돌아서 들어가게 되었으므로 문을 향하여 앉은 창선에게 얼른 눈에 뜨이지도 않았던 것이다.

『내가 술을 먹기 시작한 것은 학교 졸업한 후부터 즉시 아버지하고 싸운 뒤부터야. 남들이 화날 적에 한두 잔씩 먹으면 모두 잊어버린다고 그러데그려. 그래서 먹어 보니까 한때 흥분은 되지마는 어디 모든 것이 잊어버려지던가. 공연히 마음만 점점 거칠어지데.

그렇지만 한 번 입에 대기를 시작한 후로 그것을 영영 떼어 버리기는 어려워, 언제든지 친구를 만나 서로술잔을 들면 맛도 모르는 술 가운데 또한 알 수 없는 맛이 있네그려.

그렇지만 우리 같은 젊은 사람으로 술 아니먹는 사람이 별로이 없는 모양인대, 내가 아는 친구 중에도 아마 구십 퍼센트는 술먹는 사람인 모양이야 !』

창선은 쉴새없이 술을 따르고 술을 마시면서 말을 하였다.

태호는 거기에 동감이라는 듯이 손으로 상 바닥을 치더니,

『그러이, 그래. 나 역시 그러이. 지금 청년뿐만 아니라 나이깨나 먹은 이로부터 늙은이까지라도 사람치고 술을 먹지 않는 사람은 별로이 없는 모양이야!』

하고 한심해 하는 표정을 지었다.

술잔들을 다시 들었다. 입에 열이 올라오면 구미를 잃어버려 맛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창선과 태호는 어느덧 몸에 술기운이 돌아서 눈과 입에 그것이 나타나기를 시작하여 입에 닿은 술이 아까는 쓴 가운데에도 이상한 맛을 알 수 있더니 지금은 그것조차 알 수가 없었다.

지금은 술을 입술에 대고 입맛을 다시어 가면서 마실지라도 아무러한 맛을 알지 못하고 그대로 술술 마실 수가 있었다.

그들은 두 눈꺼풀 위에 천근만한 무엇을 올려 놓은 듯하여 눈을 크게 떠 제대로 그 눈썹을 펴려 하였으나 그것은 허사였다. 눈은 점점 게슴츠레 하여지더니 상체와 두 손이 조금씩 조금씩 흔들거리기 시작하였다. 마치 오뚜기를 슬그머니 건드린 것 같았다.

창선은 눈 위에다가 세상 근심을 올려 놓은 것 같았다. 술이 마음을 돌아나가면 나갈수록 그의 마음은 울고 싶다 할지 무엇을 한 번 깨뜨려 부수고 그대로 거꾸러지고 싶다 할지 어떻든 가슴속에 울적하게 쌓여 있는 무엇을 한 번에 시원하게 풀어볼 수 있다 하면 다시 사는 것이나 다름없을 것 같았다.

그는 정종을 청하였다. 옆의 방에서도 이 방 흉내를 내어,

『우리도 정종 가져와 !』

하고 저희들끼리 웃었다. 그들의 목소리는 평탄하고 순조로 나오지 않고 구부러지고 흔들거리며 나오는 것 같았다.

그들은 웃고 싶어 웃는 것이 아니라 남이 웃으니까 따라서 웃어 보는 것이었다. 그들의 말은 자기 마음속에 있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전에 생시에 하던 이야기를 입으로만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창선은 뚝뚝하게 그 말을 들었다. 그는 자기 흉내를 내는 그들이 무례한 생각이 나기는 났으나 그대로 웃으며 참았다. 갑자기 태호는 목을 누르면서,

『목이 몹시 마르이』

하며 상을 찌푸렸다. 창선은 선뜻 보이를 부르더니,

『맥주 한 병 들여와』

하였다. 옆의 방에서도 또,

『호갸, 우리도 맥주 한 병 일이 있어』

하고 저희들끼리 허리를 구부려가며 웃는 모양인데 그 중에는 담벼락이 아니라 병풍 하나 격한 사이로 창선의 귀에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저 자식들 먹는 대로 우리도 따라서 먹어 볼까?』

이 소리는 창선의 귀에다가 싸움을 하여 보자고 조전하는 화살을 먼저 던지는 것 같았다. 창선은 속으로 따라서,

『어디 해보자. 너희가 지나 내가 지나 죽을 때까지 해보자』

하고 술이 들어간 김이라 헛기운이 올라서 결심을 하였다.

창선은 태호를 권할 겨를도 없이 자기 혼자 마시었다. 창선의 눈에는 모든 것이 예술사진에 안개 경치를 박아놓은 듯이 흐릿한 가운데 싸여서 그것이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기를 시작하였다. 어떤 때는 푸른 하늘에 총총 박혀 있는 반짝이는 별 틈으로 주루룩 흐르는 운성 같은 것도 보였다가 어떤 때는 오색이 찬란한 무지개가 바람개비 모양으로 뺑뺑뺑 돌다가 딱 끊기고 연화불 같이 탁 터져 쫙 퍼지는 것 같기도 하였다.

열이 온몸에 퍼지었다가 그것이 골고루 돌지 않고 이리저리 한꺼번에 몰릴 때에는 창선의 몸과 정신이 공중에 높이 솟았다가 다시 깊은 속으로 가라앉는 것 같기도 하였다.

둔화된 신경은 작은 것을 생각지 못하며 작은 것을 감촉하지 못한다. 술취한 사람이 수를 세지 못하며 바늘을 집을 수 없는 것은 그 까닭일 것이다.

창선은 일어섰다. 그는 춤이 추고 싶고 노래를 부르고 싶은 충동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의 춤 그의 노래라는 것은 넘치는 유열을 그와 표정과 근육과 손짓이나 발짓으로 나타내어 흐르는 듯한 꿈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속에 쌓인 울적한 감정을 어떠한 동작이나 형태로서 바깥으로 내쫓아 보고 싶은 침통한 충동이었다. 그는 일어서서 노래도 불러 보았다. 춤도 추어보았다. 그러나 다만 자기 자신의 그러한 행동을 하는 것이 부끄러울 뿐이요 피곤할 뿐이었다.

그는 다시 앉았다. 불빛이 아까보다 조금 어두워 보였다.

그것은 자기 눈에 혈액이 많이 도는 까닭이었다.

따라서 앞에 놓인 접시나 교의나 또는 화병까지 그 위치가 바꾸어진 것 같았다.

창선은 다시 앞에 놓인 술을 마셨다. 술잔은 탁각탁각 하더니 오똑 섰다.

옆에 있는 음식접시가 뱅글뱅글 돌아가는 것 같이 그 가장자리에 무수한 동그라미를 그리는 듯하였다.

그는 그것을 붙잡았다. 그러니까 마치 요술하는 사람의 손에 들어간 것 같이 오똑 아까같이 보였다.

『아 취한다 ! 아아 졸다.』

창선은 입김을 내쉬면서 부르짖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가슴속에 심장이 뛰는 것과 혈관 속에 피가 울리는 것과 또는 울적한 마음이 더욱 누르는 듯한 것밖에는 정말 좋은 것이 없었다.

『먹자 !』

창선은 잔을 들었다.

『그리고 잊어버리자,』

태호도 잔 들은 손이 떨리었다. 그는 작은 눈이 실 같이 그의 눈이 그 속에서 반짝거릴 뿐이다.

그때 옆의 방에서도 잔들을 들며 그 중에 목소리 강강하고 또렷또렷은 하나 조금 떠듬떠듬 혀 꼬부라진 소리로,

『자 들어라! 그리고 춤추고 노래하자. 그렇게 비관할 것은 없다』

하는 소리는 분명히 이쪽을 조롱하는 소리다.

창선의 눈은 깊은 산중의 이리의 눈 같이 번득거리며 그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그 중에 한 사람은 술잔을 들며 말을 하였다.

『자아 들어라, 모두 마시자 ! 한 방울도 남기지 말고 마시자. 친구와 같이 술을 마시고 술과 갈이 취하고 춤추고 노래하자 ! 아침 햇빛이 동편에서 솟을 때에는 다시 우리의 행복이 올 것이다. 너희들은 양껏 먹어라. 그리고 그 이튿날의 행복을 위하여 춤추어라 ! 노래하여라 ! 우리에게는 아무 것도 거칠 것이 없다.』

그는 말소리에 억양을 맞추었다. 그리고 기운이 가득하였다. 여러 사람은 손뼉을 치며 웃었다.

『흥 어리석은 놈들아』

창선은 누구를 대항하려는 듯이 한 손으로 허리를 짚고 또 한 손으로 술잔을 들고 엄연히 서서 그쪽에서 말소리가 끝나자 곧 부르짖었다. 그는 입 가장자리에 조소가 나타났었다.

『너희가 내일의 행복을 말하지마는 어느 하느님이 너희들에게 내일의 행복을 주마고 맹세하였드냐? 말할 놈이 있거든 말해 보아라 !』

하고 술을 마실 때 태호는,

『이거 왜 이러나. 공연히 건드렸다가 싸움이나…』

하고 눈짓을 한다. 그러나 그도 속으로 통쾌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자 대답을 하여라 ! 폼페이의 영화도 하루저녁의 재로 변한 것을 너희는 모르느냐?』

창선은 태호의 눈짓을 본체만체 하였다. 그는 가슴의 울적한 비분을 한 번 풀어볼 상대자가 생긴 것을 기뻐하였다.

그는 최후의 결전을 하는 용사와 같이 적수가 자기보다 세력이 많아도 좋고 적어도 좋았다. 남을 때려눕히는 데 승리의 통쾌함이 있기도 하지마는 싸우다 거꾸러지는데 명예에 싸인 즐거움도 있는 것이다. 담벼락을 대강이로 받아서 뚫어 버리는 즐거움도 즐거움이지마는 거기에 대강이가 터져 보는 데에도 말할 수 없는 유쾌가 있다. 즉 맞아보지 못한 자가 남을 때리지 못하는 까닭이다. 싸움은 그 싸우는 용감심에 승부가 있는 것이요 그 결과에 있는 것이 아닌 까닭이다.

옆방은 대포 소리를 불시에 들은 군중처럼 갑작스럽게 고요하여졌다. 그러더니 먼저 말을 하던 청년이 소리를 꽥 지르며 병풍을 뚫 나올듯이,

『어떤 놈이냐? 건방진 소리를 하는 놈이 !』

하고 이 방으로 뛰어오려는 것을 동무들이 잡는 모양이었다. 그러더니 그 중에 성미가 조금 느긋한 듯한 사람이 질그릇 속에서 울려나오는 듯한 목소리로,

『허허, 재미있는 친구로군 ! 술 한잔 가히 먹을 만한데』

하고 까짜 비스름하게 혼자말을 한다.

어느 틈인지 창선이 있는 방 방장을 바람같이 열어젖뜨리고 들어오는 청년이 있었다.

그의 눈에는 독살스러운 빛이 마치 총을 맞고 덤비는 맹수와 같이 번득거리었다.

그는 두 사람을 번갈아가며 보았다. 그리고 그 얼굴을 보아서 목소리의 주인을 찾으려는 듯이 두리번두리번하였다.

『어떤 놈이냐? 지금 말을 한 놈이』

하고 두 팔을 그 청년은 걷었다. 그 청년의 얼굴에는 술기운이 올라온 데다가 열이 올라서 붉다 못해 푸르르다. 갸름한 얼굴에 오똑한 코라든지 부드러워 보이는 머리는 얼핏 옛날의 그리스 사람을 연상하게 하였다.

창선은 전등불 같이 활활 붙는 듯한 두 눈으로 그 청년이 들어오는 것을 보더니 멈칫 뒤로 물러서며 비웃는 듯이 아래위를 훑어보았다.

그 그리스 타입 청년의 뒤로는 그 방에 있던 사람들이 모조리 따라나와 창선의 방문을 막아섰다. 그들은 마치 김장 때 배추 흥정하는 틈에 선 배추장수들 모양으로 떠들었다.

『저놈이다 !』

『이놈 아직 맛을 모르는 놈이로군 !』

『잡어내라 잡어내』

이렇게 떠드는 것을 창선은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리스 타입의 청년도 창선을 뚫어지게 보았다. 얼마 동안은 조용하였었다. 그리스 타입의 청년은 어디서 창선을 본 것 같이 의아해 하는 것이 그의 눈을 보아서 알 수가 있었다.

태호는 그리스 타입의 청년 앞으로 갔다. 그의 다리는 떨리고 그가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을 때는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

『여 여보』

그는 자기 마음이 다정한 것만 생각하고 그의 손을 잡고 가까스로 말을 하였다. 그리고 정을 다하여 간청하였다.

『피차 술먹다가 그런 것을 무엇을 그러시우, 그만둡시다.』

『무얼 그만두어. 우리는 여태까지 그런 일을 해보지를 못 하였어.』

하고 주먹으로 태호의 복장을 들여미니까 이 나약한 샌님은 공중제비를 하여 한 구석에 가 틀어박히며,

『에쿠』

하는 듯이 흘겨보았다.

그리스는 창선을 발길로 지르고 손톱으로 꼬집었다.

그리고 발버등질을 치며 매달렸다.

창선은 다시 그리스의 멱살을 한 손으로 쥐었다. 그는 깰깰 하면서 말을 못하였다. 창선은 그리스를 그대로 번쩍 들어다가 그들의 동무들이 서 있는 데다가 내던졌다. 그리스는 펄썩 주저앉았다.

그러자 그 중에 나이 지긋하고 점액질로 생긴 청년 하나가 다시 덤비려는 그리스를 밀치고 한 손가락 사이에 다 타가는 담배를 든 채 웃통 벗은 채 제 딴은 자세를 단정하게 가지고 창선에게로 가까이 오나 그의 다리는 술이 돌아서 이리 흔들고 저리 흔들렸다.

『여보쇼. 초면에 말씀하기는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하는 소리는 아까 그 질그릇 속에서 울려나오는 소리로 까짜를 올리던 사람이다.

창선은 그자의 담배불 든 것을 아니꼽다는 듯이 내려보며,

『네, 말씀하쇼』

하고 그대로 꼼짝없이 섰었다.

『피차 술이 취해서 이리 된 일이니까 누가 잘잘못이 있겠소. 그럴 거 없이 피차 잘 지내도록 합시다.

자 그럴 것 없이 서로 화해하쇼』

하고 창선의 손을 잡으려 하였다. 창선은 시원히 울적함을 풀지 못한 것이 아까왔든지 그래도 버티고 서서 붙잡는 손을 뿌리쳤다.

『그럼 우리도 잘못했단 말이요? 시비는 시비대로 따져놓아야 할 것이 아뇨? 무엇으로든지 해보고 싶거든 해보자고 합시다』

하고 여러 사람에게 붙잡혀서 있는 그리스를 눈이 뚫어지게 보더니 다시 한번 자기 주먹을 내려보았다.

그리고는 그리스에게 가까이 가서 주먹을 코 밑에다 들이대며,

『한 번이면 죽어』

하고 얼러대었다. 그리스는 본시 감정질이 되어서 일시 퍼뜩하는 마음에 정신없이 덤비었다가 한 번 맛을 보고나서 기운이 준 데다가 술이 모두 깨어서 다시 덤빌 생각도 감히 나지 않았으나 그래도 앙센 마음은 남아서 창선의 눈을 마주 들여다보며,

『어디 때려보아라. 때려봐 !』

하고 있을 뿐이었다.

『글쎄 여보』

그 뚱뚱한 친구는 다시 창선의 등을 어루만지었다.

『그만둡시다. 노형이나 내가 유쾌하게 술 먹는 것이 본의가 아니요. 자, 그러지 말고 우리 방으로 갑시다』

하고 다시 한구석에서 분해서 새근거리고 있는 태호를 보며,

『자 가십시다. 일이 모두 미안하게만 되었읍니다.』

창선은 그래도 버티고 서서,

『아뇨, 노형네 방에 갈 것은 없읍니다』

하기는 하였지마는 어떻든 저쪽 편에서 고개를 숙이고 덤비는 것이니까 마음이 저으기 풀어지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글쎄 그러실 것은 없지 않소. 일인즉 우리 편에서 술들이 더 취하여 먼저 잘못은 하였읍니다.』

어루만지는 수작인지 또는 정말 정직하게 사죄를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으나 어떻든지 창선은 그제야 만족하여졌다.

『쩍.』

입맛을 한 번 다신 창선은 얼굴빛이 점잖아지면서 『피차 잘잘못이 있겠소. 젊은 혈기에 그리 되기도 예사요. 술깬 뒤에라도 한번 만나 웃으면 그만인 걸.

자, 다 잊어버립시다』

하고 창선은 그 청년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단단히 악수를 하였다. 태호는 한 번 나가자빠진 것이 속으로는 분하나 말도 못하고 되어가는 꼴만 보다가 일이 평화로이 해결되는 것을 보고서 속으로 다행해서,

『고맙습니다. 우리가 서로 싸우면 무엇이 이로울 것이 있단 말이요』

하고 저도 손을 내밀어 악수를 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무슨 굉장한 일이 있으리라고 기대하다가 기대하던 굉장한 일은 없이 결과가 싱거웁게 되므로 그대로 하나씩 둘씩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리고 그리스는 여전히 이를 악물고 버티고만 섰다.

점액질의 청년은 그리스를 보고,

『자아, 우리 방으로 가세. 가서 우리 다시 화해나 하고 재미있게 술이나 한잔 먹어보세』

하고 그리스를 밀쳤다. 그리스의 성미가 한 번 얽힌 마음의 매듭은 다시 풀 줄을 모르는 줄 앎으로 그 청년은 창선과 화해를 당장 시키지 않는 것이다.

창선과 태호는 그 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방안은 마치 강화조약을 하는 듯이 한쪽에 살기가 있어 보인다 하면 또 한편에는 웃음이 있어 보여 그 살기와 웃음이 서로 융화가 되려는 첫걸음에 있는 듯하였다.

여러 사람은 서로서로 얼굴들만 쳐다보았다. 창선은 전승국의 대표자라 하면 태호는 수종원 격으로 나란히 앉아서 위엄있게 앞만 보고 있었다.

그리스 타입은 저쪽 상 귀퉁이에 서서 원수를 잡지 못한 고양이처럼 살기있는 눈으로 창선을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은 조금도 창선에게서 떼지를 않았다. 마치 눈독을 들이는 것 같았다. 틈만 있으면 그에게로 덤벼들 것 같았다.

여러 사람들은 마치 제 정신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 같았다. 아까도 창선을 한꺼번에 죽일 듯 덤벼들던 자들이 지금은 또다시 창선을 앞에 놓고 웃음을 띠어 친하려고 하였다.

그것은 창선이 갑자기 정다워 그리한 것도 아니요 또는 가까이 할 필요가 생겨서 그리한 것도 아니라, 약한 자가 언제든지 갖는 경우라는 마음이 창선을 두려워하게 하였으며 그 두려운 마음은 다시 창선에게 웃음을 보내어 환심을 사 두려는 비겁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첫째 그들은 그리스에게 우정을 지킬 필요가 없었고 또는 어디까지든지 이해관계가 크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점액질의 청년은 술을 부어 창선을 권하며 여러 사람과 같이 마시었다.

이렇게 여러번 먹는 동안에 그리스 혼자만 술을 먹지 않았었다.

방안은 얼마 동안 엄숙한 연회처럼 조용하더니 그 중에 얼굴 까맣고 눈이 자그마한 젊은이가 담배를 고더니 침을 옆에다가 퇘퇘 배앝고 말을 꺼냈다.

『참 이렇게 한 자리에 있었어도 인사를 못하였읍니다그려』

하고 옆에 알은 태호에게 인사를 청하였다. 태호와 그 사람은 인사를 하더니 여러 사람과 죽 둘러가며 인사를 하였다.

그리고는 옆의 청년들과 술잔을 돌리며 흥치있고 정답게 이야기 시작이 되었다.

창선도 일어섰다. 그는 자기 이름을 말하였다. 그리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스는 갑자기 한 발자국 앞으로 거꾸러질듯이 나서더니 다시 뒤로 물러서며 여태까지 몰랐던 죄인을 자기 동료 중에서 찾아낸 듯이 눈을 크게 뜨더니,

『당신이 이창선이요?』

하고 창선을 멍하니 보고 섰었다. 여러 사람은 일시에 그리스를 보았다. 그리고,

『그렇소. 왜 그러쇼?』

하는 창선을 보았다. 그들의 고개짓은 군대에서 조련할 때와 같이 동시에 움직이고 동시에 그쳤다.

그리스의 지금까지 독살스럽던 얼굴에는 일종의 승리의 웃음이 나타났다. 그 웃음에는 조소하는 빛도 섞이어 있었다.

『흥! 내 어쩐지 아까부터 당신을 본 것 같습디다 !』

하고 비로소 천천히 축배를 올리듯이 자기 혼자 잔을 들어 마시었다. 술잔을 입에서 떼고 입맛을 한 번 다실 때는 경멸함과 조소함이 그의 입 가장자리에 가득하였다.

여러 사람들은 다만 그리스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리스는 거퍼 술잔을 들더니 창선을 보며,

『그러면 노형이 유주영이라는 여자를 알겠구려』

하고는 뒷짐을 지었다. 창선은 그리스의 입에서 주영의 말이 나오는 것이 기적인 동시에 또는 명예롭지 못한 수치를 느끼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고,

『응?』

소리만 지르고 말이 얼다가,

『그것은 노형이 어떻게 안단 말이오?』

하고 그리스를 훑어보았다. 그리스는 조소하는 눈으로 창선을 보더니,

『왜 나는 좀 그것을 모르라는 법 어디 있읍디까?』

하며 술잔을 입에 댄 채 웃었다.

『흥, 노형은 주영이라는 여자를 노형밖에는 더 모르는 줄 아는지는 알 수 없으나 노형보 다 나으면 나을른지 알 수가 없어도 못하지 않게 아는 사람이 이 세상에는 또 있단 말이요.』

창선은 이 말을 듣고 가슴속에 무슨 예감을 주는 것 잘은 찔림이 있었다.

『아니 나는 노형이 무슨 의미로 이 자리에서 그런 말을 하는지 나는 그 뜻을 알 수 없소.』

『무슨 의미로 이 말을 하느냐고요? 네. 만일 그 의미를 나에게 물어보신다 하면은요.』

그는 술취한 사람이 누구나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나오지 않는 침을 아무 데나 퇘퇘 배앝으며,

『나는 당신에게 충고, 아니 충고라 하면 좀 아니봅게 아실런지도 알 수가 없으니까 깨우쳐드릴 것이 있다는 말씀이죠.』

『네. 너무 고마운 말씀이요. 얼마든지 고맙게 듣지요.』

여러 사람 중에는 흑은 술잔을 든 채 흑은 테이블에 고개를 대고 잠이 든 채, 음식을 젓가락에 든 채 두 사람의 설왕설래를 듣고 있다.

그리스는 입맛을 다셔 침을 한 번 삼킨 후,

『노형이 들으면 혹시 노할른지도 알 수 없으나 노형이 아무리 똑똑하고 젠체 하더래도 말이요.』

채 말을 마치기 전에 목소리는 갑자기 밀어 올라오는 흥분으로 말미암아 떨리며 강철을 튀기는 듯이 쟁쟁 하는 소리가 섞이었다.

『결국 당신은 부끄러움 모르는 어리배기 바보 못난이란 말이요. 하하. 퍽 듣기 싫으시겠소. 그러나 하나에 하나를 더하면 언제든지 둘인 것과 같이 사실을 언제든지 거짓말이 못 되는 것이지요.』

창선은 주먹에 피가 올라왔으나 그대로 참고서,

『그러면 세상 일이 하나도 이유없이 되는 것이 없으니까 그 이유를 말씀하셔야 할 것이 아닐까요. 더구나 노형의 인격을 두고 맹세하고 당신 말에는 거짓말이 없을 것을 나는 믿으려 합니다.』

여러 사람의 눈들만 반짝반짝한다.

『노형은 지금 노형이 주영 씨란 여자의 사랑을 완전히 차지한 듯이 만족히 여기실 터이지요?』

주영 씨란 씨자가 어째 어색하기도 하고 또는 존경하는 듯한 의미로 여러 사람의 귀에 들렸다.

『나는 노형 말의 요령을 찾아낼 수가 없소. 당신이 새삼스레 그런 말을 할 필요가 도무지 없는 것이 아니오. 남의 개인관계에 대하여 더구나 중상적 말을…』

『아니 아니 남의 말을 듣고서 말씀을 하시오. 말이란 두서가 있으니까 말이오. 노형이 만족하고 영광으로 생각하는 일이 도리어 노형의 낙망과 불명예를 만든다 하면 어떻게 할 터냐 그런 말이요.』

『말씀하시요.』

『어떻든 말이오. 다른 말은 다 그만둡시다. 당신은 아직까지도 당신의 분수를 모르는 사람이란 말이오.』

그리스는 담배를 붙이고 성냥갑을 든 채,

『노형의 주제에 사랑을 한다는 것이 본래부터 건방진 수작이란 말이요』

하고 성냥개비를 창선에게 내던지자 그것은 창선이가 마시다 둔 잔 속으로 들어갔다. 그 마(魔)와 같은 기운이 숨어있는 액체 속에 기운죽은 백양목의 한 조각이 잠가질 때 그 백양목은 무엇에 뒤틀리는 듯이 가라앉았다.

그리스는 그만만 하면 창선에게 부부히 아까의 보복을 하였으리라고 만족한 웃음과 함께 담배 연기를 흠뻑 빨아 공중으로 후하고 내뿜었다. 창선은 그리스의 말 뜻을 알았다.

그는 정령 자기를 모욕하였다.

그의 전신의 피는 철 위에 부은 기름과 같이 끓기를 시작하였다. 두 눈에서는 장마비 쏟아지자 번쩍번쩍하는 번개불 같이 불이 솟았다. 팔과 다리와 오금의 근육은 뜨거운 피가 전속력으로 돌아가는 대로 부들부들 떨리었다. 그의 가슴속은 기관차의 실린더 모양으로 맹렬한 기운으로 벌럭거리기 시작하였다. 그의 온몸의 조직과 기관은 다만 싸움을 위하여 돌진 하려고 준비가 다 되었을 뿐이었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참아라』하였다.

그는 자기의 모든 감정을 한 번 더 눌렀다. 누르면 그 반동세력은 더 큰 것이다.

『나는 노형 같은 반벙어리와 말하는 것이 대단히 명예롭지 못할 것 같소. 명예롭지 못한 일이지마는 나는 반벙어리에게 나의 명예에 대한 말을 들었으니 다시 한번 물어보겠소. 당신은 언제든지 결과와 지엽의 말만하였지 근본과 또는 원인은 말하지 않았단 말이오. 당신 입이 있는 것 같이 나도 입이 있으니까 나를 모욕하는 이유를 말해 보시오. 분명하고 여러 사람이 다 알아듣도록.』

창선은 말을 하고 주먹을 테이블에 놓는 바람에 테이블 위에 고개를 대고 잠을 자던 사람이 빨간 눈을 번쩍 들었다.

그리스는 주제넘다는 듯이 창선을 노려보았다. 그만하면 알아채고 국으로 있으라는 말이다. 도리어 무엇이라 하면 제 밑 들어 남 보인다는 듯이,

『모욕? 나는 노형 같은 이를 모욕하고 싶어할 사람이 아니오. 내가 당신을 모욕한다 하면 그야말로 내가 나 자신을 모욕하는 것이니까. 더 다시 무슨 말을 날더러 하여 달라 하면 당신은 더욱 어리석은 사람이지요.』

『말씀을 하시오. 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더라도 순직하고 힘있고 열있는 사람이 되고 싶소. 자 무슨 말이든 하여 보시오. 자 자』

창선은 교의를 비켜 놓고 점점 그리스 옆으로 가며 주먹을 내흔들면서 재촉을 하였다.

때는 이미 익으려는 것 같았다. 창선의 주먹은 그리스의 입에서 말이 나오든지 아니 나오든지 그의 몸에 떨어질 것 같았다. 그리스는 이왕 말을 꺼내었다가 흐리멍팅하게 하여 버리는 것도 우스운 일이거니와 또는 자기가 생각하는 모든 비밀을 탄로시켜 버리는 것도 유쾌한 일 갉았다.

창선의 주먹이 거의 그리스의 턱밑에 닿았을 때 순간적으로 일어난 격정으로 그리스는,

『네가 백정의 아들이 아니냔 말이다. 너는 백정의 아들인 까닭으로 연애하는 것이 주제넘다는 말이다.

백정의 아들이 연애가 다 무엇이냐? 그뿐 아니라 훌륭하게 남에게 애인을 빼앗기고도 그것을 모르고 속 못차리는 너를 볼 때 불쌍하단 말이야. 하하하하』

하는 소리를 지르고 혼자 웃을 때 창선의 주먹은 그의 멱줄띠기를 쳤다. 창선의 피의 힘, 살의 힘 또는 뼈의 힘, 나중에는 근의 영의 초자연적 힘, 자기의 대대로 내려오는 쌓이고 쌓인 원한의 힘이 뭉치고 뭉친 대장간의 메판에 떨어지는 메보다도 더 단단한 주먹은 한 번에 그리스를 넘어뜨렸다.

『이 자식, 내가 백정의 자식인 까닭에 너에게 무슨 해를 끼치더냐? 우리 아버지나 우리 할아버지는 정직하게 솔직하게 유순하게 짐승의 가죽을 벗기어 자기의 생활을 하여 왔다. 그러나 너의 애비와 할아비의 한 일은 무엇이냐. 갖은 허위와 포악과 박탈과 은둔과 기만과 나중에는 자기까지 속인 것밖에 무엇을 하여 왔느냐? 우리 조상이 너의 조상들에게 학대와 멸시와 박탈을 당하고 목숨을 잃은 일은 있다 하더라도 너의 조상들은 아마 쌀 한 알갱이 피천 한 푼을 준 일이 없을 것이다. 우리 조상은 피눈물을 참아가면서 여태까지 왔다. 때를 기다렸다. 입을 찾고 눈을 찾고 귀를 찾고 자기의 다리 팔의 칩을 찾을 때를 기다렸던 것이다. 네가 지금 무엇으로써 나를 백정의 자식이라고 모욕하려느냐? 그 조건을 말하여라, 너희는 결국 인습의 노예밖에는 되지 않을 것이다.』

여러 사람은 일어섰다. 다시 잠이 들었던 젊은 사람 하나는 꿈 속에서 놀란 듯이 일어나던 맡에 사면을 휘휘 둘러보며 어리둥절한다.

다른 사람들은 공연히 주먹이 불끈불끈 쥐어지며 등골에 소름이 쭉쭉 끼친다.

그 중에 한 청년은 마치 닭싸움 하는 것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유쾌한 성벽으로써 보고 있었다. 그는 싸움이 더욱더욱 잔인한 지경에 들어가기를 바랐다.

속으로는 손뼉까지 치고 싶었다.

점액질은 말을 다시 하지 않을 사람같이 입을 다물고 있더니 창선의 팔을 잡아다녔다.

『여보시우. 그만두시우. 술취한 사람을 그러면 무엇을 하시우. 그만두시우. 그만두어요.』

말리기는 말리지마는 그의 마음속에도 옛날의 유대 백성들의 마음속에 『나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다』하는 거만한 생각이 있었던 것이나 마찬가지로 창선에게 대하여 일종의 자긍을 갖는 동시에 멸시하는 마음이 있었다. 나라는 망하고 백성은 죄악의 굴혈로 들어가도 그때의 유대사람의 머리속에는 「택함을 입은 백성」이란 관념은 살아 있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 점액질의 청년의 머리속에는 무엇이 남았었으랴? 은둔과 고식과 편협과 시기와 질투 증오 또는 여대 망상으로 가득 찼던 그들 부모의 관념을 그들의 부모에게서 피를 받아 나올 적부터 역시 얼마간 받아가지고 내려왔었다.

그들은 무슨 조건과 이유가 없이 창선을 멸시하였다. 그들에게 만일 무슨 까닭에 너희 맘 속으로 창선을 멸시하느냐 하면 그들은 아마 대답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세례 요한이 옛날에 요단강에서 세례를 줄 적에

『너희들은 속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을 자랑하지 마라.

하나님은 이 돌로써 능히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 수 있느니라』

한 말과 같이 진리는 조선 사람 양반 특수계급, 이 모든 것을 변하여 땅에 구르는 돌이 되게 할 수 있는 것들을 단단히 알지 못하였다. 그는 은둔과 주저 가운데서 뜨물 먹는 듯한 생활을 하여가는 무리들이었다.

창선은 붙잡는 사람의 말은 듣지도 아니하였다.

『너는 나를 모욕하는 것보다도 나의 애인을 모욕하였다.

너는 음해와 중상으로써 남의 신성한 애정을 저해하려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

그리스는 목을 움켜쥐고 일어섰다. 그는 여러 사람 앞에서 자기의 힘 약한 것을 보인 수치스런 마음과 자기가 그만큼 멸시하는 창선의 그야말로 치명상에 가까운 철권을 받고 나니 그에게 남은 것은 약한 자의 맨 나중 무기인 악밖에 남는 것이 없었다.

그는 어느 결엔지 상 위에 있는 젊단 화접을 집었다. 그것은 창선의 이마를 번개같이 때리고 세 조각이 갈라지며 상 위에 걸렸다가 다시 재주를 넘고 마룻장 위에 떨어져 산산이 부서졌다.

창선은 갑자기 눈앞이 깜깜하여졌다. 그가 아마에 손을 대었다가 떼일 때 그의 이마에서는 붉은 피가 솟았다. 여러 사람들은 일제히,

『피』

소리를 지르고 창선을 보았다. 옆에서 창선을 만류하던 태호는 수건을 꺼내어 창선을 씻어 주려고 이마를 짚으려 하며,

『피가 나네. 피. 어서 씻어』

하고 창선을 권하니까 창선은 그대로 태호를 뿌리쳤다.

그리스는 피가 몰린 눈으로 창선을 보며,

『무엇이냐, 되지 않는 녀석 백정놈이』

하고 욕설을 퍼붓고 섰는데 옆의 청년은 그의 두 팔을 단단히들 붙잡았다.

창선은 웃었다. 그는 그 웃음 속에서 최후의 승리가 있는 것을 믿었다. 그는 다만 태연히 흘러내려오는 피를 씻으려고도 하지 않고 껄껄 소리쳐 웃었다.

『나는 너 같은 비겁한 자와 다시 싸우려고는 하지 않을 터이다. 오히려 내가 먼저 너에게 손대인 것을 부끄러워한다. 나의 대적이 되지 못하는 자와 싸우려 한 것이 나에게 불명예이니까 ! 자아 여러분 ! 나는 여러분에게 미안한 일이 많습니다. 이 자리에서 떠나가는 것이 피차에 좋은 것 같습니다. 자아 그러면 이후에 다른 기회에 만나 뵐 때가 있을 터이지요.』

창선은 문으로 나오며 그리스를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그는 모자를 집어 쓰며 그리스를 향하여,

『내가 약해서 피해가는 것은 아니다. 나는 네가 싸울 사람이 아닌 것을 안 까닭이다. 나의 대적은 네가 아니라 다른 데 있는 까닭이다.』

창선은 그 집에서 나가다가 사무실에서 셈을 하여 줄 때 비로소 이마가 아픈 것을 깨달았다.

창선은 집을 향하여 간다. 부악산을 스쳐 내려오는 찬 바람이 아직 술기운이 다 깨지 못한 훗훗한 뺨을 식히면서 지나갈 적마다 일종의 비분이 그의 뜨거웁게 타오르는 감정을 식히는 듯하였다.

그 감정은 아직까지는 잘 조화가 되지 못하고 잘 정제가 되지 못한 것같이 창선의 가슴을 거북하게 흔들어 놓는 듯하였다.

거칠은 감정을 가진 자는 자기의 감정에게 지배를 받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창선은 누르려 하면 누를수록 자기의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어떻게 해야 속이 시원할는지 조바심이 나서 괴로웠다. 그 감정 그 울분은 창선의 가슴속에서 훌륭히 세련을 당하여 조화를 얻고 정제가 되어 조리있고 규칙 있고 열이 있고 힘이 있게 자기의 억울을 풀 때가 있을 것은 분명한 일이지마는 아직 때가 되지 못하였다는 것을 제육감(第六感)으로 깨달음이 있을 때에 그의 마음은 더욱 안타까움으로 찼었던 것이다.

『아아 세상이 나를 무슨 까닭으로 천대하고 모욕하느냐?

모욕하고 천대하는 조건을 나에게 보여라.

만일 내가 백정의 아들이라는 단순한 조건으로 너희들이 모욕하고 천대한다 하면 너희들은 무엇이냐. 너희들은 무슨 큰 소리를 할 입이 있느냐? 사람이 사람의 아들인 까닭에 죄인이라는 어리석은 말이나 무엇이 다를 것이 있느냐?』

그는 불 같이 분한 마음이 솟아오르며 세상을 깨뜨려 부수어 자기를 모욕하는 자를 모조리 때려 부수고 싶었다. 지금은 어떠한 사람과 싸울 때도 아니요 어떠한 나라와 싸울 때도 아니요 어떠한 민족과 싸울 때도 아니라 온 세상으로 더불어 싸울 때인 것을 알았다. 아버지의 편지에는 오히려 부자의 정리의 미적지근한 정이 남아 있다. 지금은 아버지와 싸우기는 너무 적다. 그리스와도 싸우기에는 너무 비겁함이 있다. 더 큰 것이 세상보다도 더 큰 무엇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만일 그것과 싸우다가 힘이 자라지 못하면 그대로 자기가 쓰러질 때까지 싸울 뿐이다.

그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났다. 그것은 결코 비겁한 자의 나약한 눈물도 아니요 의지 박약한 자의 절망의 눈물도 아니라 두 발을 잡힌 굳세인 용사의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비분한 눈물이었다. 그의 뜨거운 눈물은 주먹을 적시었다.

아무것도 없고 다만 한둘레 밝은 달이 먼 데 산 윤곽만 희미하게 비추이는 안동 네 거리 고요한 길 위로 무거운 구두발을 내어놓는 창선의 가슴은 납덩어리를 끓여붓는 것 같이 뜨거웁고 또 무거웠던 것이다.

그는 고요한 달을 쳐다보았다. 말없이 달려 있는 달까지 원망스러웠다. 웃지도 않고 울지도 않고 아우 말도 없이 왔다가 아무 말도 없이 가는 달은 언제든지 높은 중천에 둥두렷이 달려 있어 이 세상을 내려다본다. 그러나 그 정하고 깨끗한 것은 말이 없고 웃음이 없고 울음이 없어도 사람에게 무슨 암시를 주는 듯하다.

기우두룸하게 올라오던 달은 또 기우두룸하게 서쪽으로 기울어간다.

멀리서 주정꾼이 별궁 담을 끼고 반 넘어를 부르고 올라가는 소리가 창선을 다시 정열과 비분과 울적한 심사에서 차디찬 세상으로 불러내었다.

그는 달을 보니 세검정 생각이 나고 세검정 생각이 나니 주영이가 생각나고 주영이 생각이 나니 아까 그 그리스의 말이 다시 생각난다. 아니라 그리스가 생각되니 주영이가 생각되고 주영이 생각이 나니 세검정이 보이고 세검정이 보이니 달이 한 번 쳐다보였다.

창선은 또다시 코웃음을 쳤다.

『정신나간 녀석 ! 누구를 중상하려고. 놈의 가는 뼈가 굵기도 전에 그따위 버릇부터 배웠나.』

창선은 생각하였다. 저녁과 새벽으로 맨 먼저 났다가 맨 나중 사라지는 장경성(長庚星)이 하늘에서 떨어져 그것이 한강물 속으로 깊이깊이 들어가 잠기는 일은 있을는지 몰라도 주영의 사랑이 변할 리는 없을 것이다.

낙동강 금모래 위에 우리 두 사람의 이름을 지운 사람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우리의 사랑을 지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오늘 세검정에서 주영이와 약속한 일을 생각하고 지금껏 지내오던 것을 생각하고 또 처음 만나던 때를 생각하고 지나간 사랑의 역사의 갈피와 구석을 모조리 돌아보고 주영의 마음을 생각하고 제 마음을 생각하고 모든 것을 생각하여 보아도 주영과 자기의 사랑은 참이요 진실이었다.

그러나 사람이 자기가 모르는 곳에 자기의 이해와 관련되는 일이 있다 하면 그것을 알고 싶고 보고 싶은 것이나 마찬가지로 창선의 절대의 이해 다시 말하면 생명과 똑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는 주영의 사랑과 관련되는 일이 한 번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던 그리스의 입에서 나온 것을 생각할 때 그의 마음이 든든할 리는 없었다. 만지면 커지는 것이 부스럼이면 생각할수록 커지는 것은 의심이다.

창선은 불 안땐 아궁이에 연기가 나랴? 는 말이 생각나며 조그마한 근거라도 없는 곳에서 그런 말이 나왔을 리가 없었고 그리스가 주영의 이름을 자기에게 말하는 것이며 또는 그것을 말미암아 자기를 모욕한 것을 생각할 때 그는 의심을 하지 아니치 못하였다.

『의심하지 마라. 그것이 죄악이다. 더구나 애인을 의심하는 것이 죄악이라면 어찌 작은 죄악이랴?』

의심의 싹이 그의 가슴 복판에서 뾰로통하게 솟아오르려 할 때 그는 그것을 누르려고 혼자 이런 말을 하고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러나 그것을 누르기는 어려웠다. 싹은 점점 자라나는 것 같았다. 그는 공중에다가 손을 내저어가면서 모든 것을 씻어 버리려 애썼다. 그는 지금 바야흐로 지으려는 죄악과 싸우려는 것처럼 여러번 주먹을 쥐고 꾸짖고 달래고 또는 결심하였다. 그는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보다도 더 어려운 난행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창선은 하나님이 아니요 사람이었다. 하나님이 사람의 이상이라 하면 그 이상에 도달하려는 노력이 있고 싸움이 있고 희생이 있으므로 사람의 사람다운 점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창선도 주영과 자기 사이의 사랑을 이상적으로 만들려고 노력하고 싸우고 또는 자기희생까지 하려는 데 참으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는 의심을 누르고 자기의 감정을 눌러서 될 수 있는 데까지 자기를 냉정하게 보려 하였다. 냉정한 가운데 아무것도 가리운 것이 없이 우뚝 서있는 자기를 찾아내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어느덧 자기 여관 가까이 왔다. 화동서 재동으로 넘어가려면 한 반쯤 넘어가 바른손 쪽으로 뚝 떨어진 곳에 수통이 박히고 그 수통박이 앞집에 대머리 반찬가게가 있으니 그것은 그 주인의 머리가 훌렁 벗겨진 까닭이다.

그 대머리 반찬가게 옆집이 바로 창선이가 유하는 여관이다.

창선은 담뱃대를 물고 소설책을 든 대머리 반찬가게 주인을 보았다.

지금까지 속이 조이고 거북하던 것이 안경을 콧잔등이에다가 걸어놓고 침을 지르르 흘리고 앉아서 소설에 정신을 잃고 앉아 있는 대머리를 보고 얼마간 마음이 늘어지며 유한하여지는 듯하였다.

대머리 반찬가게 주인은 안경 너머로 창선을 보더니 다시 안경을 쳐들고 뚫어지게 보며 자기 이마를 만져볼 듯이 손을 이마 앞 공중까지 들었다가 다시 담뱃대를 들고 멀거니 창선을 보았다.

창선은 즉각적으로 여태까지 인사는 서로 하지 않았어도 서로 안면은 익숙한 터에 창선의 이마가 터진 것을 보고 말을 할듯말듯 하다가 계면쩍어 그만 두는 것을 알았다.

창선은 문을 열기 전에 생각나는 것은 여관집 주인 노파와 그 딸이다. 그 노파라든지 그 딸이 자기를 아주 착실하고 얌전한 사람으로 아는데 술먹고 이런 꼴을 당하였다 하면 오죽 욕을 할까. 욕은 하든지 말든지 밥간을 한 달치나 안 준 데다가 집에서 돈 온 것을 아는데 모두 술 먹는 데 써버리고 이마가 터져 들어왔다 하면 신용까지 잃어버려 밥도 못먹고 내쫓길 터이니 딱한 일이지.

창선은 공연히 죄지은 사람 같았다. 그는 문앞에 다다라 서서 손을 입에 대고 허 입김을 불어서 술내가 나는지 안 나는지 시험하여 보았다. 그러나 자기 코와 입과 피 속에 배인 술김이 자기 코에 맡아지지는 않았다. 그는 혼자 안심을 하면서도 그래도 주저하는 생각이 나며 문을 열려는 손 은 열적은 맛이 있고 어떤 때는 열려 있고 어떤 때는 닫혀 있는 문이 혹시 닫혀 있으면 어찌 하나 하는 생각까지 났다. 만일 열려 있으면 그대로 열고 들어가 시치미를 떼고 들어가 자버리면 그만이지마는 그렇지 않고 문이 닫혀 있어 노파나 딸이 나와 문을 열다가 술취한 눈치를 채이면 어떻게 하랴 하는 생각이 나서 대담하게 문을 밀지 못하였다.

그러나 문을 아니 열 수는 없었다.

문은 빗장이 걸려 있었다. 창선은 무의식적으로 둘러서서 말이 없었다.

누구든지 불러야 할 일이다. 노파가 나오든지 그 딸이 나오든지 둘 사람 중에 한 사람은 나올 것이다. 노파가 나와?

그것은 얼마간 다행한 일이지마는 그 딸이 나와? 그러면 창선에게는 말할 수 없는 부끄러운 일이다. 창선은 그 검은 눈, 붉은 뺨, 흐르는 듯한 허리, 모과빛 같은 종아리, 석고같은 모가지를 연상하고 조금이라도 자기의 추태나 허물을 그 스물 두 살 된 머리 쪽진 여자에게 보이는 것이 부끄러웠다. 그 부끄러운 것이 어찌 부끄러운지 그 것을 집어 말하려면 더욱 몽롱한 감각만 남을 뿐이요 물김을 붙잡는 것과 향기를 맛보는 것이나 마찬가지뿐이었다.

더구나 서늘한 눈동자에서 번쩍번쩍하는 눈 광채가 창선을 볼 적마다 웃을 때 창선은 그 웃음에서 무슨 뜻을 찾는 듯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까지 「무슨 뜻」으로 남아 있을 뿐이요 무슨 뜻인지는 몰랐다.

그는 마치 제비뽑는 마음으로 목소리를 가다듬어 문을 열려 하였다.

두번째 대답이 있었다.

『나가우』

마치 기침 소리에 싸여 나오는 목소리가 안방 속에서 그윽히 들린다. 그것은 노파의 대답이다.

방문 소리가 났다. 신차 끄는 소리가 났다. 그것은 정녕코 딸의 발자취였다.

창선은 하는 수 없다는 듯이 가까이 문으로 들어섰다가 그래도 거리를 멀리하기 위해서 조금 나섰다. 문이 열렸다.

『인제 오세요. 나는 벌써 들어와 주무시는 줄 알고 문을 닫아걸었죠.』

조용한 밤 가운데 젊은 여자의 목소리를 듣고 사내 마음은 이상한 물결이 치는 것이다. 마치 잔잔한 물결 위에 진주 한 알을 떨어뜨린 듯이 창선의 가슴 복판은 따뜻한 피가 용철같이 풀리었다가 다시 감기었다가 하는 것 같았다.

창선은 말을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네, 네』

입 속으로만 중얼거리었다. 그 여자는 창선의 눈을 보고 전신의 행동을 보더니 다시 희미한 안방 창 한 겹을 지내 나오는 불빛에 이마의 상처를 보았다.

『에그 저게 웬일에요』

하며 한 발자국 가까이 들어설 때는 창선의 가슴도 공연히 설렁하였다.

『네? 무엇이요?』

『이마에 피가 묻었어요.』

창선은 새삼스러웁게 손으로 이마를 만지고 다시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창선은 우물쭈물하면서,

『여태까지 피가 흐르네』

하고 수건을 꺼냈다. 그 수건은 마치 단풍을 움켜쥐인 것 같이 붉고 누르렀다.

『그게 웬일예요? 어쩌면 피가 저렇게 흐르는 것도 모르시고』

하면 창선에게 다시 가까이 다가설 때 자기의 코에는 떫은 침감냄새 같은 술내가 코에 끼쳤다. 그 여자는 그렇지 않을 곳에서 그런 것을 본 것 같이 다만 입만 다물고 말이 없이 창선을 물끄러미 보았다.

창선은 자기를 보는 그 여자의 눈이 자기를 책망하는 것 같아서 우물쭈물하며 자기 방으로 향하여 갔다.

그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가장자리에다가 납가루를 번질번질 칠해 놓은 것 같은 떼묻은 이불 요가 깔리어 있는 방은 몹시 으스스하였다.

그 여자는 안방으로 건너가더니 무슨 이상한 일을 당한 것처럼 어머니를 불렀다.

『어머니 !』

어머니는 이 세상과 꿈 세상의 몽롱한 경계선을 배회하는지 딸의 대답은 들었으나 대답은 없었다.

『어머니 이것 좀 봐요.』

어머니의 몸을 흔드는 바람에 노파는 아까운 꿈나라에서 깨는 듯이 눈을 채 뜨지도 못하며,

『왜 그러니? 문 걸었니?』

할 뿐이다.

『건넌방 손님이 이마가 터지고 술이 취해 들어왔어요. 이마가 퍽 많이 터져서 피가 흐르는 것도 모르고…』

『무어? 이마가 터져?』

전기불 켜지듯 노파의 눈은 둥그래졌다.

『어쩌다가 그랬어.』

『내가 아우.』

『넘어진 게지.』

『그렇지도 않은 게야. 술이 퍽 취했어요.』

『술이라니 어디 그이가 술먹을 줄 아니? 먹어도 한두 잔 남몰래 먹는데』

노파는 옷을 주섬주섬 입으면서,

『어디 가만 있거라. 그게 무슨 소리냐』

하고 담뱃대를 들고 건넌방으로 건너오면서,

『주무시우? 대관절 어디를 상했단 말이오?』

하고 방으로 들어온다. 창선은 기껏 피해 들어와서 이불을 쓰고 드러누었는데 자던 노파가 일부러 일어나서 들어오는 것은 고맙기는 하나 귀찮은 일이었다.

『아녜요. 별로히 크게 다치지는 않았어요』

하고 창선은 고개를 이불 속으로 끌어들이며 두 눈만 내어 놓고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노파는 짐짓 다가앉으며,

『어디 좀 봅시다』

하고 창선의 손을 들더니 쭈글쭈글한 상을 더욱 찡그리면서,

『어그 이게 웬일요. 어디 가 넘어졌소? 대단히 다쳤구려.

약을 하든지 밀태승(密陀僧)을 바르든지 해야지 그대로 두었다가 덧나거나 하면 어찌한단 말이요.

대관절 바람이 들어가면 어떻게 하오?』

하더니 안방을 향하여,

『얘, 그 의걸이 장 안에 헛솜 보무라지 좀 가지고 건너오너라』

하며 그 딸을 부른다. 창선은 제발 좀 남의 염려 그만하고 그대로 건너가 주었으면 좋겠는데 거기다가 딸까지 불러다가 이 꼴을 보이려고 하니 속으로 민망하고 초조하다.

『괜찮아요. 가만 두면 저절로 말라 붙을 걸요. 그만두세요』

하고 만류하나 들을 리가 없었다.

『글쎄 안 된다니까 그러는구려. 덧나면 큰일나지.

험이 되면 어떻게 하우』

할 즈음 안방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창선은 그 여자가 자기 꼴을 보지 못하게 전기불을 끄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싶었다.

그러나 문을 열고 딸은 들어왔다. 손에는 햇솜뭉치를 들었다. 창선은 마치 사막에 고개만 파묻은 타조 모양으로 혼자 눈을 감고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

노파는 혼자,

『글쎄 어디서 이랬소. 넘어졌단 말요? 누구에게 맞았단 말요? 큰일날 뻔했어. 불행 중 다행이지.』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창선의 이마 터진 데다가 솜을 대고 꼭꼭 누른다. 그 딸은 팔짱을 끼고 때묻은 버선을 호목까지 질러 신은 채 물끄러미 서서 창선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노파는 솜을 다 대고 나더니 누워 있는 창선을 내려다보면서 아까 상 찌푸리던 얼굴을 어느덧 기롱하는 사람이 갖는 시부렁대는 빛으로 변하고서,

『글쌔 웬일이요. 말을 좀 하시우. 어찌 된 일이요?』

하고 담뱃대에다가 불을 붙여 문다. 본시 젊었을 때부터 절조가 없는 무정조한 거치러운 생활을 하여온 늙은 은근자의 피 속에는 후천적으로 음란한 피가 흘러서 그것이 천성이 되다시피 한 데다가 다시 그의 성격은 변태적으로 가꾸어지기 시작하여 지금은 한 개의 병적 성격을 이루어 놓았다. 그는 나이 젊은이를 보면 반드시 음란한 실없는 소리와 성적 유희를 연상케 하는 기롱을 몹시 좋아하게 되었다.

그래서 벌써 나이가 오십이 넘었으나 아직까지도 아침이면 분세수를 하고 머리에 기름을 바르며 남자를 보면 히스테릭한 부끄러움을 지어 동화에 많이 나오는 요술하는 노파를 생각하게 한다. 더구나 코 간드러지게 웃는 웃음이며 옆의 사람들을 호려들일듯이 톡 치는 손짓에는 무서운 요괴함이 흐르는 것 갉다.

그가 혹시 나들이를 갈 때에 화장을 하고 몸맵시를 차리는 것은 마치 고목가지에 꽃을 붙여 놓은 것이나 해골에 분칠을 하여 놓은 것 같아서 그야말로 대낮의 요귀 같았다.

그는 자기의 지나간 청춘을 반성해 보고 판단할 지능이 없었다. 그는 지금까지 지나온 생활이 마땅히 자기가 하여와야 할 팔자이었으며 그 이외에 더 넓고 고상한 생활이 더 있는 것을 알지도 못하였거니와 더 알려고 하지도 못하였다. 설령 자기가 지금까지 살아온 생활보다 더 범위가 넓고 고상한 생활이 이 세상에 있다 하더라도 자기로서는 더 나갈 수가 없고 더 고상해질 수가 없었다. 그는 철저한 숙명에 자기 몸을 얽어놓고 자기의 생활, 다시 말하면 자기의 팔자는 거기에서 한 발자국을 더 내놓을 수도 없는 것이요, 한 발자국 더 돌려놓을 수도 없던 것이다.

자기의 외면생활은 즉 자기의 내면생활이요 아무러한 생의 고민, 생에 대한 노력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그러나 늙었다. 어느덧 뜨거웁던 피는 식기를 시작하고 검던 머리는 희기를 시작하였다. 쇠잔하여가는 육체는 자기의 욕망을 만족시키기에 너무 힘이 없었다.

그는 탄식은 하였을망정 결코 비관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자기 뿐만이 아니라 온 세상이 똑같이 당하는 것임을 알 때 그는 든든한 생각이 났다.

그러나 그는 다른 어떠한 같은 종류의 여자들이 갖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질투하는 마음을 갖지 않았다.

늙은이가 갖는 젊은이에게 대한 질투, 즉 자기는 벌써 영영 쇠잔하여진 것을 깨닫고 자기 이외의 사람이 싱싱한 힘 을 가진 것을 볼 때 일어나는 암상스런 질투를 이 사람좋은 노파는 많이 가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기의 못하는 것, 자기가 향락하지 못하는 것을 남이 하고 남이 향락할 수 있는 것을 볼 때 일어나는 반동 감정을 결코 악의로써 남에게 풀려 하지 아니하고 호의로써 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젊은 여자나 젊은 남자를 볼 때 변태적으로 일어나는 성적 감각을 자기에게서 는 만족을 찾기 어려운 것을 알고 쓰린 단념과 함께 그것을 제삼자인 다른 사람에게 돌려보내어 그 만족해 하는 것을 보는 것으로써 자기의 위안을 삼기 시작하였다.

거기에는 심술궂은 고집과 완고한 강제가 있었다.

즉 자기가 어떤 여성과 어떤 남자에게 만족함을 주어 그것을 즐기고 거기서 위안을 얻으려는 무서운 욕망은 자기의 직접 충동으로 일어나는 만족을 채우려는 것 이상의 완고함과 심술스러운 것이 있었던 것이다.

『아마 어떤 계집 때문에 누구하고 싸운 게지. 그러니까 얼른 말을 못하고 주춤주춤하네.』

창선은 그 소리를 들으니까 울컹하고 속에서 더러웁고 창피한 마음이 일어났다.

「나를 그런 비열한 녀석으로 아느냐」하는 생각이 나며 더한층 분한 생각이 나며 그 말을 듣는 자기보다도 그 말을 하는 그 노파의 마음이 부끄러울 것 같아서 고개를 노파에게서 돌이켰다.

『흥 내가 그렇게도 비열해 보이시우? 계집 까닭에 싸울 나는 아니랍니다.』

창선은 시떱지 않은 듯이 코대답을 하였다.

『에그, 큰소리 마시우. 젊은 양반의 혈기를 누가 믿을 수 있읍니까? 비열할 것도 무엇 있소. 젊어서 그러기도 예사일이지. 젊어서 안 그러면 언제 그러게.』

담배통에 재를 엄지 손가락으로 꼭꼭 누르며 노파는 창선을 어린애라는 듯이 스스로 내려다본다. 그 딸은 다만 흥미있는 농담을 듣는다는 듯이 생그레 웃으면서 어느 틈에 앉았는지 옹구리고 앉아 있다.

『그러나저러나 전에 없던 일이 웬일이요? 술을 저렇게 자셨으니 인제는 점점 못되어 가는구려.』

사내가 술 먹는 것이 흉될 일이 아닐 뿐더러 한두 잔 먹지 못하는 것을 도리어 졸장부로 아는 그는 어느 때 싫다는 것을 억지로 권하기까지 하고 혹시 자기가 울적할 때면 호헙스러웁게 주안을 차리고 일부러 같이 먹기를 청하던 그는 말거리를 만들려고 이런 소리도 해보 는 것이다.

창선은 자리 속에 눕기는 하였으나 아까 가슴에서 날뛰던 감정이 다시 일어 났다 가라알았다 하는 바람에 노파의 말이 귀찮기만 한 데다가 딸까지 앞에 앉혀 놓고 객적은 농담을 하는 것이 싫었으나 억지로 마지못해 말대답을 하여 준다.

『왜 내가 전에는 술을 못 먹었답디까? 주인 마나님이 보시지를 못했지요.』

『에그 저런, 사내가 술 한두 잔 먹은 것을 가지고…』

말을 채 끊기도 전에 그 딸이 가로나서며,

『오늘같이 자신 날은 생전 처음이야』

하며 또 그 시원한 눈은 웃었다. 드러누운 창선의 가슴 위로 그 서늘한 수정알 같은 눈동자가 굴러가는 것 갉았다.

『아마 잡숫지 못하는 약주를 좀 과히 잡수신 것을 어떤 나쁜 녀석들이 손을 댄 게지요.』

딸은 눈앞에 창선의 맞은 꼴이 선하게 보이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고 앉아서 말을 하였다.

창선은 딸의 말을 들으매 속으로 모욕을 당하는 것 같아서,

『설마 얻어맞고 다닐까요? 사내 자식이 변변치 못하게』

하고 딸을 흘겨 보았으나 그 흘기는 눈에는 따뜻함이 있었다.

『그럼 왜 말을 아니하세요.』

『말씀할 수 없는 일이니까 그러지요.』

『저것 좀 봐? 부끄러운 일이니까 말을 못하지 왜 못한담.』

노파는 깔깔대며 담뱃대를 떨다가 담배 연기가 코로 들어가며 기침을 시작하였다. 입 속에 모인 가래를 배앝더니 그대로 기침이 복바쳐 올라와서 딸을 향하여,

『나는 건너가겠다. 천천히 이야기나 더 하고 건너오려무나. 물이나 새로 떠다놓고…』

하고 노파는 건너갔다.

그 딸은 어머니를 따라 건너가기는 싫고 또 그렇다고 젊은 사내방에 앉아 있기도 계면쩍은 듯이 고개만 숙이었다가 다시 창선을 보았다 하였다.

방안은 두 사람이 번갈아 쉬는 숨소리밖에는 들리지 않는 듯이 고요하다. 창선은 눈을 감고 있고 그 딸은 성냥갑만 만지작거리며 있었다.

너무 조용한 것이 두 사람을 근지럽게 하는 것 같아서 딸은 창선의 머리 맡에 있는 담배갑을 보더니,

『담배 하나 피워 드려요?』

하고 창선의 주의를 끌려 하였다.

창선은,

『글쌔요. 하나 피워 주신다 하면 먹지요.』

하고 고개를 돌렸다.

딸은 담배를 입에 물더니 성냥을 그어대어 한모금 흠뻑 빤 후 후하고 내불면서 창선을 주었다. 창선은 담배를 받아 물고 한 손을 이불 밖에 내놓았다.

『담배 태우시죠.』

창선은 딸에게도 담배를 권하였다.

『그런데 어디서 그렇게 상하셨어요? 말씀을 좀 하세요』

딸은 나에게야 말못할 것이 무엇 있느냐는 듯이 침착한 얼굴로 물었다.

창선은 기가 막힌 듯이 힝 웃으면서,

『꼭 아셔야 하겠어요?』

하고 딸을 쳐다보았다.

『꼭 알아야 할 것까지는 없지마는 한 집안에 있으면서 궁금한 일이 아녜요. 그렇게 안 알려 주실 것은 또 무엇예요.』

『안 알려 드리는 것도 아니고 못 알려 드릴 것도 없지마는 말을 하면 분하고 속이 상해 말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좋으니까 그렇지요.』

『무엇이 그렇게 분하고 속이 상하세요? 어디 이야기 좀 하여 보세요. 저에게 이야기하시는 것은 아무 일 없으실 것이니까요.』

창선은 그래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웬일인지 그 다정스럽게 묻는 여자 앞에서 자기가 애인이 있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자기의 신분을 말하기도 거북하였다.

『차차 말을 하면 아시지요. 오늘은 그런 말을 나에게 물어 주지 마세요.』

『저는 웬일인지 이마가 상하신 데는 무슨 깊은 이유가 있는 것 같아서 그것이 알고 싶어요. 그와 같은 일이 예사 다른 술먹은 사람의 일이라 하면 저도 그리 이상하지도 않거니와 알고 싶지도 않지마는 그리 하시지 않으실 어른이 그런 일을 하셨으니까 그 가운데는 필연코 무슨 큰 이유가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어요.』

『무슨 큰 이유라뇨?』

『그것은 저도 잘 모르지요.』

딸은 고개를 숙이고 부끄러운 웃음을 지을 때 그의 두 뺨에는 옴푹옴푹 우물이 지었다.

『술먹고 머리 터지는 데도 무슨 예사 사람…』

(1매 결)

『그렇게 알고 싶으시다면 언제든지 알려 드릴 날이 있을 터이지요.』

창선은 다시 말을 이었다.

『언제요?』

『언제든지요. 내가 무슨 사정으로 댁에서 떠나가는 일이 있으면 모르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아실 날이 있지요.』

『어느 천 년에요.』

『그렇게도 알고 싶으세요?』

『그럼요, 손님 일이면 무엇이든지 알고 싶어.』

(이하 결)

라이선스

[편집]

이 저작물은 저자가 사망한 지 70년이 넘었으므로, 저자가 사망한 후 70년(또는 그 이하)이 지나면 저작권이 소멸하는 국가에서 퍼블릭 도메인입니다.


주의
주의
1923년에서 1977년 사이에 출판되었다면 미국에서 퍼블릭 도메인이 아닐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 퍼블릭 도메인인 저작물에는 {{PD-1996}}를 사용하십시오.